소설리스트

24화 (25/66)

**

서서히 밖이 밝아왔다. 서문경은 먹물을 부은 듯 새카맣기만 하던 하늘이 시야의 끝자락부터 파랗게 젖어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파르스름한 기운이 돌던 하늘이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이번에는 희게 타오르기 시작한다. 검푸른 하늘이 섬광 같은 흰 빛과 공존한다고 생각한 순간, 이미 하늘은 밝아져 있었다. 아침인가···, 하고 서문경이 멍하니 생각하고 있는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자고 뭐하누.”

“폐하는요.”

하고 눈도 떼지 않고 받아치자 조금 떨어진 곳에 누워 있던 황제가 데구르르 굴러 바로 옆까지 오는 것이 느껴졌다. 저 인간은 명색이 황제라는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굴러서 오고 그래. 서문경이 생각하고 있는데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머리가 서문경의 목과 어깨 사이의 오목한 공간에 얹어졌다. 물론 황제의 머리였다. ‘마르셔서 아파요.’, 서문경이 머리를 털며 신경질을 냈지만 황제는 눈 하나도 깜빡하지 않았다. 그가 배꼼 반월창 밖을 내다보며 물었다.

“뭘 보누? 볼 것도 없구먼.”

“아무 것도 안 봅니다.”

“거짓부렁도.”

“그냥 생각할 것이 있어서···.”

무엇을? 하고 황제가 묻는 소리가 들렸지만 서문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경아?”

황제가 머리를 들고 서문경의 표정을 살피려고 했다. ‘폐하?’, 그러나 서문경이 머리를 조금 기울여 황제의 귀에 제 볼을 대고는 불쑥 물어온 것이 먼저였다. 응? 하고 황제가 대답했다. 피부가 맞닿아 있는 탓에 응?, 하는 황제의 목소리가 피부 안쪽에 직접 들어오는 것 마냥 웅웅 울렸다. 기분 탓인지 온 몸이 간질간질해진다. 서문경은 바르르 몸을 떨며 머리를 들었다.

동요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면서 서문경이 물었다.

“손님들이 ‘힘’을 쓰는 방식과 용님의 백성들이 ‘술’을 쓰는 방식은 많이 다른가요?”

다행스럽게도 황제는 질문 자체에 정신이 팔려 서문경의 태도가 어색하다는 것은 눈치 채지 못한 듯했다. 황제가 눈살을 구기며 되물었다.

“음?”

“아뇨···, 제가 듣기로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서문경이 몸을 물려 황제에게서 떨어지면서 기억을 쥐어짰다. 분명히 학궁에서 자신의 ‘힘’을 되찾으면서 오경박사인 소천 경모에게 들은 설명이 있었는데, 당시 의식이 혼미했던지라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늘손님이나 물손님 같은 경우에는 타고난 ‘힘’으로···.”

“그릇.”

황제의 목소리가 서문경의 말을 잘랐다. 서문경이 쳐다보자 황제가 다시 말했다.

“그릇의 차이다. 객들의 ‘힘’은 흔히 가득 차 있는 금간 술병에, 술사들의 ‘힘’은 빈 찻종에 비유하곤 하지. 경이 네가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서 말하자면, 객들은 이미 완성된 존재다. 하늘이나 물을 건너오면서 범인(凡人)들은 절명할 때까지 일부도 쓰지 못하는 신민(神民)으로서의 힘을 자각하는 것이니 더 이상 발전의 여지는 없음이야.” 

여기에서 황제는 서문경의 손바닥에 슥슥 글자를 몇 개 써보였다. 서문경의 눈이 조금 커졌다. 신민(臣民)이 아니라 신민(神民). 

근본적으로 모든 사람들은 용님의 백성이든 범님의 백성이든 모두가 신들이 직접 빚어 만든 백성이자 자식들. 그러므로 누구든 그 깊은 곳 어딘가에는 신묘한 힘이 숨어 있다는 말이었다. 직접 신과 맞닿을 수 있는 기회가 없는 한 그 힘은 죽을 때까지 깨어나지 않지만, 하늘손님이나 물손님은 경우가 다르다. 계(界)를 이동하면서 신인 하늘님이나 물님의 은혜를 접한 때문이다. 

“그에 비해 술사들의 ‘힘’은 인간이란 그릇 안에 인간의 힘을 담은 것, 그러므로 완성된 것도 아니고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발전이 가능하지. 다만 그 힘은 신의 힘에 비할 바는 못 되느니.”

“하지만 방금 말씀하시기를, 손님의 그릇은 금이 가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지. 계를 넘어온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니.”

“그럼 손님의 그릇은 새기만 할 터이고, 이 세계 술사들의 그릇은 노력에 따라 차기도 할 터인데도 그렇게 차이가 난단 말입니까?”

“물론이다.”

하고 대꾸하며, 황제가 벽에 괸 모벼개에 등과 한 쪽 어깨를 기대고 앉았다. 

“애초에 힘의 종(種) 자체가 다른 것을. 사람이 제 아무리 코를 단련한다손 쳐도 어찌 견공의 코에 비할 수 있으랴.”

“비유가···.”

떨떠름해하는 서문경을 보고 황제가 픽 웃었다. 왜, 알아듣기는 수월하지 않았느냐? 서문경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황제의 말이 사실이었지만, 방금 전 황제의 말에서는 어조나 목소리나 표현 하나하나까지 경멸과 함께 노골적으로 얕잡아보는 기색이 드러나 있어서 듣기가 불편했다. ···어떤 대상을 향한 감정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 황제가 화제를 달리하여 물었다.

“헌데 그것은 왜?”

“네?” 서문경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아, 하고 얼빠진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냥···, 궁금해서요.”

거짓말이었다. 

창가에 턱을 괴면서 서문경은 생각했다. 결국 내 ‘힘’은 여기서 더 발전시킬 수는 없다는 말이구나. 서문경이 손가락을 허공에 잠시 까닥했다. 서문경의 손가락 끝에서 손가락 한 마디만한 하얀 꽃이 한 송이 떨어졌다. 익숙한 향이 코를 스친다. 그 향기를 맡은 서문경은 반사적으로 꽃받침을 입술에 물고 쭉 빨아 당겼다. 단 꿀이 흘러나와 혀끝에 닿았다. 아카시아 꿀. 서문경의 머리가 더 기울어졌다. 두 손가락 사이에 끼운 자그마한 꽃송이가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서문경의 눈앞에서 까닥까닥했다. 참으로 신기한 힘인데. 

사람이란 참 간사한 동물이다. 예전 같으면 얼굴까지 붉히며 흥분했을 이런 신기한 힘을, 이리 실망스런 눈길로 바라볼 수 있다니. 문득 자신의 힘에게 미안해졌다. 생명이 있는 것도 아닌데 미안한 마음을 가질 필요가 뭐 있겠나 싶기도 하지만, 어쩐지. 

“더···.”

하고 무심코 중얼거렸다가, 제가 말하는 목소리에 놀라 서문경이 몸을 움츠렸다. 황제가 의아하게 쳐다보는 눈길이 느껴졌지만 서문경은 필사적으로 알아채지 못한 척 했다. 실수했다. 너무 생각이 많았던 나머지 속에 품고 있어야 할 말이 밖으로 나와 버렸다···.

서문경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뱃속에서 부글부글 무언가가 요란스레 들끓는 기분이 들었다. 서문경은 그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소망이다. 서문경은 힘을 가지고 싶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그것이 천객 중에서도 제일가는 힘을 가졌다 칭해지는 조원에게도 밀리지 않을 힘을 가지고 싶었다. 자신의 몸 하나만 건사하면 되는 상황이었다면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서문경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황제를 향했다. 문득 머릿속에 단어 하나가 떠올랐다. 짐. 황제가 자신에게 짐이라는 말이 아니었다. 자신 아닌 다른 사람을 아끼고, 항상 함께하며 상처 받지 않도록 보듬어주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주어지는 마음의 짐에 대한 이야기였다. 황제는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할 지도 모르겠지만, 아니, 분명히 그러겠지만 자신이 그러고 싶었다. 다시는 힘 있는 사람들의 농간에 놀아나지 않도록 보듬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힘이 필요했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힘’은 끝없이 새어 나가기만 할 뿐 다시 채울 수는 없다고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런 말도 없이 마냥 쳐다보기만 하고 있는 서문경이 이상했는지 황제가 머리를 모로 갸웃하며 서문경을 불렀다, ‘경아?’ 서문경은 물었다.

“제가 술을 배울 수는 없습니까?”

“무어?”

“이 세계 사람이 아니라 힘들까요?”

“아니···.” 갑작스런 말에 조금 당황했는지 황제가 얼떨떨한 표정 그대로 대꾸했다. “술사의 자질이 있는지는 심고(審考)를 해보아야 알 일이지.”

심사를 받아야 한다는 말에 서문경의 낯빛이 잠시 어두워졌지만 곧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럼 어쩌면 저도 자질이 있을 지도 모른단 말이지요?”

“무어. 그럴 수도 있고.”

황제가 떨떠름하게 대꾸하며 서문경의 얼굴을 곁눈질했다. 저 망둥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저리 펄떡대나 하는 얼굴이었다. 그 표정을 못 읽을 리가 없는 서문경의 얼굴도 절로 샐쭉해졌다. 저 인간. 자기가 어제 무슨 일을 당할 뻔 했는지도 모르고. ···하기는. 계속 모르는 편이 낫겠지만.

서문경이 갑자기 황제를 향해 돌아앉더니 황제를 불렀다, ‘폐하.’

“부르지 말고 이만 잠이나 자거라. 벌써 효단(曉旦)이니.”

“계속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도 숨 막히지 않으십니까?”

“? 답답하더냐?”

“예.” 서문경이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부렁을 지껄였다. 작일에도 뽈뽈거리고 나간 주제에, 하는 비난을 담은 시선이 당장 날아왔지만 서문경은 본 척도 하지 않았다. 서문경이 황제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앉으며 졸랐다. “나갈까요?”

황제가 콧방귀를 뀌며 벌러덩 몸을 눕혔다.

“짐은 싫다. 성가시게 무얼···.”

“그러니까 매일 그렇게 빌빌거리시는 거지요!”

‘빌빌?!’, 벌떡 황제가 몸을 일으키고 따졌다. 

“지금 짐을 두고 빌빌거린다 했느냐?”

“그럼 아닙니까?”

“사내란 무릇 잠자리에서만 튼튼하면 되는 일이야!”

기가 막혀 서문경이 허, 하는 소리를 냈다. 자신과 같은 범 세계 출신이기라도 하면 이 새끼가 집안에 틀어박혀서 야동만 돌려봤나 타박을 놓았겠지만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서문경이 한숨을 쉬며 누가 그럽디까, 하고 묻자 황제가 아닌가? 하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다른 이들이 하는 말을 귀동냥으로 들은 모양이었다. 

“아무튼 좀 나가지요.”

“혼자 가거라. 짐은 귀찮다.”

“그건 안 됩니다.”

강경한 서문경의 태도에 황제의 미간이 깊이 파였다. 요 놈이 갑자기 왜 이러누? 하고 생각하는 것이 뻔한 황제를 서문경이 나무랐다.

“벌써 잊으셨습니까, 폐하 혼자 계시면 안 됩니다.”

그 말에 황제가 대답 없이 인상만 찌푸렸다.

“그렇다면 차라리 안 나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거야 그렇지만. 서문경도 내심 황제의 의견에 동의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금방이라도 다시 자리에 드러누워 쌕쌕 고른 숨 내쉬며 잘 기세인 황제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 서문경이 그를 향해 손을 쭉 뻗었다. 

“···?”

황제의 오묘한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서문경의 손이, 무릎께에 대충 얹어 놓은 자신의 손등에 포개져 있었다. 그 때 꿀꺽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바라보니 왜인지 귓불이 시뻘게진 서문경이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러다 잡아먹겠구먼···,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서문경이 불쑥 말했다.

“가, 가고 싶어서 그럽니다.”

“어디가 그렇게?”

“그게 아니라···.”

서문경이 바로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황제가 머리를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자, 그것에 압박감을 느꼈는지 잠시 후 그가 거의 고함을 지르듯이 말했다.

“폐하와!”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푸시식 바람이 빠지듯 급속도로 서문경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폐하하고···.”

“꼭 짐과 바깥나들이를 나가고 싶다 그 말이지?”

평소에는 찰떡같이 말해도 개떡같이 듣는 인간이 꼭 이럴 때만···. 절로 눈매가 뾰족해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서문경은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황제를 혼자 둘 수는 없으니 어떻게든 함께 나가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스스로를 달래도 저 히죽거리는 얼굴을 정면으로 보고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었다. 

“···예.”

열불이 뻗혀서.

“무어, 좋다.” 잠시 생각하는 척을 하던 황제가 이윽고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경이 네가 그렇게 짐과 함께 나들이를 나가고 싶다면, 짐이 이 한 몸 희생하여 주도록 하마.”

‘이리 정인을 귀이 여기는 사내가 또 어디 있을꼬.’, 하며 황제는 자화자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황제가 거드름을 피우는 꼴을 보고 나서야 서문경은 깨달았다. 이 한 마디가 하고 싶어서 저 인간이 일부러 빼는 척을 했구나. 속았다.

“그럼, 어디를 갈까?”

자기가 언제 얼른 잠이나 자자고 채근했냐는 듯 태도가 돌변한 황제가 서문경에게로 몸을 돌리고 물었다. 눈에 띄게 낯빛이 환해진 황제를 보고, 서문경이 하는 수 없다는 듯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행동이겠지만···. 

그러나 곧바로 서문경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뭐, 됐다. 황제를 보는 서문경의 얼굴에, 스스로는 모르고 있었지만 희미한 웃음기가 돌았다. 마땅한 해결책도 없는 판국에 두 사람이서 머리를 맞대고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으면 또 무엇하랴. 괜히 인상만 구기고 있는 것보다는 저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훨씬 보기가 좋았다. 

정말로.

**

남자는 있는 곳은 어두웠다. 그러나, 설사 지금 그가 있는 곳이 수천 개의 야명주와 수만 개의 등잔으로 밝혀진 곳이라 했을지라도 남자에게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남자는 계속해서 안쪽으로 들어갔다. 어둠, 어둠, 어둠. 남자의 걸음걸음이 닿은 곳 모두가 어둠이었다. 그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어둠이었다. 마치 그의 머릿속에, 두 팔과 두 다리, 노쇠한 몸통과 뒤틀린 뱃속에 들어 차 있는 그것처럼. 몸의 구멍이란 구멍마다 찾아서 빠져 나가려 아우성을 쳐대는 뱃속의 어둠과는 반대로, 사방에 가득한 어둠은 몸속으로 어떻게든 기어 들어오려 온 몸을 짓눌러온다. 그 압력과 압력이 맞물려 언젠가는 온 몸이 뻥 터져 버릴 것 같다. ···나쁘지 않겠지, 그것도. 남자는 불현듯 생각하다가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안 될 일이다.

“아직은.”

‘아직’은. 그 표현 그대로였다. 당장 자신의 몸이 터지든, 아니면 갈가리 찢어져 바람에 날려가든 남자에게는 아무런 미련도 없었지만 그것도 장래에 벌어져야 할 일, 지금은 안 되었다. 남자에게는 이루어야 할 목표가 있었다. 목표···, 하고 단순히 되뇌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빠르게 뛰고 반대로 목구멍과 가슴이 콱 막혀온다. 

탁, 탁탁, 탁, 탁, 탁. 간헐적으로 딱딱한 소리가 들려온다.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자신의 발소리였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몸이 휘청했다. 남자는 서둘러 근처의 벽을 짚고 몸을 지탱했다. 갑작스런 어질증에 하마터면 큰 사달이 날 뻔 했지만 남자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 생각’을 하다 보면 늘 이런 식이었다. 온 몸이 통째로 폭풍우 속에 휘말려,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게 되는 기분. 그래, 지금 자신이 현재를 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과거에 있는 것인지도 모를···.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몸의 중심을 잡았다. 참으로 기나긴 길이었다. 그러나 곧. 이제 몇 발자국만 걸어 손을 뻗으면 원하는 것을 잡을 수 있다. 그러니 조금만, 아주 조금만.

남자가 멈추어 섰다. 깊고 긴 굴길 끝. 여전히 사방은 옻칠을 한 것처럼 어두웠지만 남자는 눈부신 무언가라도 앞둔 듯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비록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는 자신이 있는 곳의 모습을 알고 있었다. 

암실의 사방은 벽화로 둘러싸여 있다. 지금 남자가 발붙이고 있는 땅에는 수로를 다스리는 푸른 용(地龍), 남자의 머리 위 천정에는 ‘새’와 함께 신들의 하늘을 노니는 금빛 용(天龍), 암실의 우로는 인간에게 부와 번영을 가져다준다는 흰 복장룡(伏藏龍), 마지막으로 암실의 좌로는. 남자는 손을 들었다. 손가락 끝에 굳은 물감의 감촉 대신 거친 돌의 감촉이 느껴졌다. 암실의 좌로는 벽화가 존재하지 않았다. 허나 사람들은 이 암실의 사방이 용을 그린 벽화로 둘러싸여 있다고 말했다, 비어 있는 암실 좌측까지 벽화가 그려져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최초의 용님께서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려 지상에 내려 주신 그 분의 화신(化身)은 모두 네 가지 모습을 가진다. 그것이 바로 천룡인 황룡, 지룡인 청룡, 복장룡인 백룡, 그리고 신룡(神龍)이다. 대대로 예의 황제들이 황룡이었던 탓에 황룡 벽화는 다른 벽화들에 비하여 섬세하고 자세하며, 단 한 번 탄생하신 적이 있는 청룡의 벽화는 귀하신 분을 인간을 허물로 아깝게 보내고 만 죄책감을 담아 실제와는 달리 강건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 또한 아직 한 번도 제국에 태어난 적이 없는 복장룡의 벽화는 언젠가 이 세상에 강림하시어 인간들에게 번영을 가져다 주십사하는 염원을 담아 보다 아련하면서 화사한 색조를 띄고 있다. 마지막으로 신룡의 벽화는, 무(無). 아무 것도 그려져 있지 않았다. 이는 다른 용들에 비해 신룡을 허투루 여겨서가 아니었다. 지극한 경외감으로, 차마 그릴 수가 없었던 탓이다. 신룡은 바람과 비를 일으키는 용, 그러므로 신인 용님과 가장 가까운 존재, ···즉, 다른 용들과는 달리 다스리는 자가 아닌 심판하는 자였다.

그래서 감히 벽화조차 그릴 수 없었던 것이다.

암실 좌측 벽을 더듬던 남자의 손이 멈췄다. 남자의 검지 끝이 벽의 약간 패인 곳에 닿아 있었다. 멈춰 있던 남자의 손가락이 그 홈을 따라 느릿하게 내려가기 시작한다. 그 얕은 홈은 끊기는 곳 없이 아래로 내려가다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모로 흘러갔다. 그 홈을 더듬다보니 또 다른 홈이 나타났다. 남자의 손가락이 더듬고 있던 능선 같은 홈과는 달리 비스듬하고 짧게 파인 직선이었다. 바로 바람과 비를 조각한 것이었다. 남자의 시선이 자신의 손이 닿아 있는 벽으로 옮겨갔다. 남자의 시선이 누그러졌다.

“···같구나.”

마치 그와 같다. 분명히 세상에 존재하고 있으나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상은 없는. 그러나 곧 그와 저 이야기 속의 용은 처지가 갈릴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 만들 터이니.

남자가 벽에서 손을 거두고 한 발 더 앞으로 다가갔다. 남자의 두 손이, 조심스럽게 어둠을 갈랐다. 어둠에 잠긴 탓인지 주름진 손이 물에 젖은 듯 창백하고 지쳐 보였다. 달각, 하는 소리가 암실 안에 울렸다. 돌보다 가볍고 약한 것이 그보다 단단한 것에 스치듯 부딪치는 소리였다. 끊어질 듯 희미한 그 소리는 깊은 굴 안에 잔잔히 울리는 탓인지 마치 우는 것처럼 들렸다. 

남자가 두 손으로 든 것은 흙으로 빚어 불에 굽지 않고 굳힌 항아리였다. 그리고 그 바로 옆에, 또 하나의 항아리가 있었다. 남자가 들고 있는 토기와는 달리 유약을 발라 구운 항아리였다. 두 항아리는 모두 좁은 주둥이가 단단히 봉해져 있었는데, 주둥이를 봉한 재료가 무엇인지까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묘한 것은, 두 항아리 모두 안이 비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 안에 있는 것이 보이는 것처럼 은근한 빛을 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남자는 잠시 들었던 토기를 다시 제 자리에 내려놓고 그 표면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토기를 내려다보는 눈빛이나, 토기를 쓰다듬는 손길 등이 친애하는 이를 바라보는 것 마냥 애틋하고 약한 유리를 다루는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남자가 중얼거렸다.

“용들의 무덤에 가보았다.” 남자의 입꼬리가 위로, 계속 위로 치켜 올라갔다. “초라하더구나. 개집도 그보다는 호화찬란하리라 내심 비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남자의 얼굴에서 모든 표정이 사라졌다. 그리고 소리가 끊겼다. 남자가 움직일 때마다 긴 옷자락이 끌리는 작은 소리, 남자의 가죽신이 마른 바닥에 스치는 미음(微音), 마치 상대를 앞두고 있는 것처럼 나직나직 울리던 남자의 말소리. 그 모든 것이. 사위를 휘감고 있는 어둠에 버금가는 밀도의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담이 약한 이라면 숨 쉬는 것조차 잊을 만큼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른다.

남자가 다시 움직인 것은, 저 멀리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 후의 일이었다. 똑. 정확히 어디에서 떨어지는 것인지도 모를 물소리가 들리자, 석상처럼 굳어 있던 남자가 비로소 머리를 돌렸다.

보수(補修)를 해야겠구나. 신중하게 소리가 들리는 곳을 살피던 남자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더니 다시 토기로 시선을 돌렸다.

“잘못되어 여기까지 물이 들이치면 안 될 일이니.” 하고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에는 한숨이 섞여 있었다. “역시나 안품(?品: 가짜)은 참것을 완벽히 모방할 수는 없는 것인지. ···허나 잠시만 참아 다오.”

토기를 향해 말을 걸듯 하던 남자의 어조가 진지해졌다.

“곧이다.”

그래, 곧. 뿔 난 어린애를 어르듯 속삭인 남자가 이윽고 나지막한 웃음을 터뜨렸다. ‘참말이다. 달래려고 대충 하는 말이 아니야.’ 하고 속삭이며 남자의 손이 토기의 봉인한 주둥이를 쓸었다. 정말로. 남자의 시선이 잠시 유약을 발라 구운 항아리와, 용들의 벽화를 차례로 훑었다. 남자는 눈을 감았다. 그가 눈을 감고 말했다.

“곧, 돌려주마.”

그대가 원래 가져야 했던 것들을, 하지만 그대가 누릴 수 없었던 것들, 그래서 그토록 원했던 것들을 이제야 돌려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번쩍 눈을 뜬 남자의 눈에는 봄날의 공기처럼 아련하던 그 기운들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대신 싸늘한 예기(銳氣)가 번뜩이고 있었다. 입술이 달싹거렸다.

“허나 그 전에-.”

그의 귓전에, 서로 다른 목소리가 같은 소리를 지껄였다.

-괴물.

-괴물!

“······.”

그를 위해서라도,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남자가 단호하게 암실을 빠져나갔다. 

**

“엉덩뼈가 틀어지기라도 했느냐.”

“···뭐요? 시비 거십니까?”

“그것이 아니면 왜 자꾸 게걸음을 쳐.”

황제의 폭언에 눈을 희번덕거리던 서문경이, 황제의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머리를 휙 딴 데로 돌렸다. 괜한 정원석을 가지고 둘레에 이끼가 꼈니 어쨌니 트집을 잡는 서문경의 뒷머리를 쳐다보는 황제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자꾸만 딴 곳으로 빠지려 드는 서문경을 뒤따라가던 황제의 걸음이 느려지자, 그 뒤를 따르던 내관 및 나인들의 걸음도 저절로 느려졌다. 아마 저기서 꼬물거리는 것이 사람인지 무엇인지 구분도 가지 않을 만큼 먼 거리에서 보면 황제의 일행은 높으신 분의 행차가 아니라 나무굼벵이가 구물구물 기어가는 것처럼 보이리라. 

“게 서라.” 황제가 서문경의 뒷덜미를 텁 잡아다 끌어오며 으름장을 놓았다. “어딜 뽈뽈거리고 가는 게냐? 갈 곳을 정하고 가야 할 것 아니야.”

“어···.”

서문경의 얼굴에 난색이 어렸다. 황제의 목소리가 더더욱 낮아졌다.

“어디 들르고픈 곳이라도 있는 게냐?”

“아니.” 서문경이 서둘러 부정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냐?”

고개를 젓는 서문경을 가느스름한 눈으로 응시하던 황제가 어느 순간 시선을 돌리더니 골똘히 생각하는 척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안도했으나 조금 시간이 지나자 도리어 불안해진 서문경이 슬그머니 대산 그늘 안으로 들어와 물었다, ‘뭘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황제가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궁 어디를 가야 적호할지 생각 중이다.”

그 말에 서문경의 표정이 미미하게나마 굳었다. 마침 때 좋게 황제가 서문경 쪽을 보았다. 서문경은 황급히 표정을 수습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황제가 눈을 찡그리고 혀를 끌끌 찼다. 괜히 속이 뜨끔한 서문경이 적반하장 식으로 따졌다.

“왜 혀를 차고 그러십니까?”

“솔직하게 털어 놓거라.”

“뭐, 뭘요.”

황제가 성큼 다가와서 서문경의 귓전에 입술을 붙였다. 움찔해서 물러나려는 서문경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그의 한 쪽 어깨를 콱 잡고 황제가 속살거렸다.

“애최 가고픈 곳이 있었던 게지?”

“그, 그런 속셈은.”

“있었지.”

그런 속셈은 없었노라 시치미를 떼려던 서문경이 황제에게 뒷말을 빼앗기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각다귀 들어간다.’, 황제가 서문경의 아랫입술을 찰싹 때리며 구박했다. 난데없이 입을 얻어맞고 서문경이 성을 내려다가, 정말로 눈앞에 금각다귀 한 마리가 웽하며 날아가는 것을 보고 멈칫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니. 서문경이 어물거리고 있는 틈을 타 황제가 채근했다.

“실토해라. 어데 그리 가고파서 짐을 들쑤셨누?”

“······.”

“못 하겠느냐?”

그렇게까지 물어도 서문경이 대답이 없자, 황제가 지체 없이 몸을 돌렸다. 폐하! 순식간에 눈이 휘둥그레진 서문경이 황급히 황제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졌다. 황제가 서문경에게 잡힌 팔을 휘이 젓고는,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놓아라.”

“못 가십니다!”

“이런 맹랑한 놈을 봤나.” 

짐짓 불쾌한 체 하고 말한 황제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서문경의 얼굴을 힐끗 눈만 굴려 보고는, 불현듯 손을 뻗어 서문경의 한 볼을 꼬집어 당겼다. 뭡니까, 갑자기! 벌컥 성을 내는 서문경의 볼을 잡아당기는 황제의 얼굴이 왠지 뿌듯한 기색이 어렸다. 꼬집는 보람이 있는 볼떼기란 말이야, 하고 중얼거린 황제가 서문경이 아르릉거리기 전에 선수를 쳐서 말했다.

“허언이 아니다. 당장 속셈을 털어놓지 않으면 참말로 짐은 이대로 가 버릴 것이야.”

보란 듯 황제가 다시 돌아서는 시늉을 했다. 마음이 급해진 서문경이 더 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덥썩 그를 붙잡았다.

“학궁에.”

“학궁? 태학궁 말이더냐?” 황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태학궁에는 대체 왜?”

황제의 반응에 서문경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예상했던 그대로의 반응이었다. 잠시 머리를 굴리다가 서문경이 변명삼아 대답했다.

“제 ‘힘’만으로는 부족한 듯하여···, 이 나라 술법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하고.”

“필요 없다.”

서문경의 말이 채 끝을 맺기도 전에 황제가 단호하게 말했다. 서문경의 눈이 커다래졌다.

“필요 없다고요? 물론, 폐하께서는 대연회에 그리 큰 정성을 기울이지 않아도 된다 말씀하셨습니다만 그래도,”

“그 말이 아니다. 대연회에는 참석치 않아도 돼.”

“예?”

“아니, 필히 그러도록 하라.”

“하지만 폐하···!”

서문경이 반박하려 했지만 황제는 듣고 싶지 않다는 대답을 행동으로 대신했다. 서문경의 팔목을 콱 붙잡은 채로, 몸을 돌렸던 것이다. 황제가 대산을 들고 따라오던 내관에게 일렀다. 

“밀원(蜜苑)으로 간다.”

밀원이라면 정궁 북쪽 울안에 있는 황궐 최대의 궁원(宮苑)이었다. 더불어, 백양 아래에 위치한 태학궁과는 정반대 방향에 있는 곳이기도 했다. 비록 밀원을 구경해 본 적은 없어도, 황궁에서도 제법 오랜 시간 빨빨대고 다닌 덕에 밀원의 대략의 위치 정도는 파악하고 있던 서문경이 기겁을 했다.

“폐하, 잠깐만, 잠시만 제 말 좀 들어 보십시오.”

“짐이 할 말은 끝났느니.”

“제 말은 안 끝났습니다!”

서문경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일단 황제가 서문경의 손을 놓고 그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얼음처럼 굳은 황제의 표정은 조금도 변한 것이 없었다. 잠시 태도를 바꾼 것도 자신이 했던 말에 못을 박기 위해서였던지 황제가 곧바로 말했다.

“대연회 건에 대해서라면 네가 더 이상 신경 쓸 필요 없다.”

“하지만 제가 아니면···.”

“되었다.”

“저 대신 나갈 다른 사람이 있기는 합니까?”

“되었다고 하지 않았느냐.” 황제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그깟 연회 따위, 참석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서문경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스스로도 자신이 한 말이 억지라고 생각했는지, 황제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제 아무리 실권도 없는 허수아비 황제라고는 하지만, 황제라는 자리는 권리가 없다는 이유로 의무까지 등한시하는 것이 허락되는 자리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힘없는 황제이기 때문에 더 의무를 소홀히 보아 넘길 수 없었다. 다른 황제들에게는 생채기도 되지 못할 작은 허물이 얄팍한 방파제 하나 없는 지금의 황제에게는 집채만 한 파도가 되어 덮쳐올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내춘대연회는 황제가 몸소 주관하는 대례(大禮)와 대제(大祭)에 버금가는 황궐의 큰 축제인 동시에, 예조의 내로라하는 치자(治者)들이 그 자존심을 겨루는 대리전. 그러니 가벼운 마음으로 불참을 선언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이 아니었다. 

암만 서문경이 이 세계 사람이 아니라지만 그런 그로서도 이 정도의 추측은 할 수 있었다. 그런 서문경의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황제가 말했다.

“염려할 필요 없다. 짐이 어떻게든 할 터이니···.”

“어떻게요?”

서문경이 황제의 말허리를 끊었다. 황제가 화내는 대신 서문경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서문경의 말소리며 어조 따위가 이상할 정도로 침착했던 탓이다. ···역시나. 서문경의 표정을 본 황제의 얼굴이 와작 구겨졌다. 침착한 것이 아니었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오히려 싸늘해진 것에 불과했다. 황제가 대꾸가 없자 서문경이 재차 물었다.

“무슨 수가 있단 말입니까? 저 외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아니면, 폐하께서 직접 나가시기라도 하실 참입니까?”

“···경이 넌 염려할 필요 없대도 그러는구나.”

“그렇게 둘러대실 것이 아니라요!”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는 황제가 답답해 서문경이 더욱 날카로운 어조로 내뱉었다가, 자신이 너무 뾰족해져 있다는 자각을 하고서 일부러 목소리를 억눌렀다.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서문경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 사실을 물론 황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는 섣불리 서문경의 말에 동조할 수 없었다.

-소인이 알기로 폐하께서 근심하셔야 될 일은 따로 있는 것으로 아옵니다.

서문경이 열로 앓아누웠을 때, 호박방에서 맞닥뜨린 염락 조원이 독니를 세운 채 사르륵 소리를 죽여 기어오는 뱀 같은 소리로 속삭거렸던 말이 다시금 되살아나 귓가에 속살거린다. 

-화살에는 눈이 없음입니다. 그러니 눈 먼 독시의 촉이 누구를 향할지.

황제의 시선이 저절로 누군가를 향한다. 닿으면 델 듯이 열이 오른 와중에도, 빤히 쳐다보는 황제의 눈초리가 어딘가 묘하다는 것을 눈치 챘는지 서문경이 황제 쪽을 흘끔 보며 몰래 머리를 기웃한다. 그 눈빛에 걱정하는 빛이 부드럽게 섞여 들어갔다. 그것을 본 황제는 가슴 속에 껄끄러운 무언가가 들어차는 기분을 느꼈다. 눈 먼 독시의 촉이 누구를 향할지 모르니 조심하라 일렀던가. 거짓말이다. 그 화살은 분명히 눈이 달려 있었다. 그러니 경이 저 놈을 노리고 똑바로 달려든 것이지···.

황제가 충동적으로 내뱉었다.

“가지 마라.”

서문경의 눈이 반사적으로 커졌다.

“예?”

하고 서문경이 의아하게 물어왔지만 황제는 대답 대신 나지막한 한숨을 쉬었을 뿐이었다. 그런 다음, 황제가 말을 이었다.

“짐은 말이다.”

“예? ···오늘 좀 이상하십니다, 폐하.”

“그대가 그렇게 안달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지금 황제가 하는 말이 다름 아닌 자신의 ‘힘’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화제가 갑자기 왜 거기로 튀는 거지, 하고 서문경이 불만스럽게 생각하다가 불현듯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턱을 굳혔다. 설마 내가 태학궁에 가려는 진짜 이유를 눈치 챈 건가.

황제가 그 때 슬쩍 턱짓을 했다, ‘좀 걷자꾸나.’ 서문경은 황제의 발이 향하는 곳이 후원이 있는 쪽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서문경이 황제를 따라 걷자, 다시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을 저어 내관이며 수행 나인 등을 먼발치에서 따라오게 한 다음 황제가 말을 이었다.

“짐이 보기에, 경이 네 ‘힘’은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아.”

“하늘손님들에 비하면 한참 모자란 힘이 아닙니까···.”

“모자라다 뿐이냐, 난약하며 쇄미하고 비루하지.”

위로는커녕 한 술 더 떠서 깔아뭉개는 대답에 서문경이 ‘정말로 때려버릴까.’하고 생각할 무렵이었다. 황제가 심상한 투로 툭 던지듯 말했다.

“그 치들을 상대로 질 일은 없겠지만.”

“그 치들? 하늘손님들이요?” 

황제가 무성의하게 머리를 주억거리자 서문경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보는 눈만 없다면 달려들어 황제를 콱 끌어안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다. 

“제가 그 사람들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없지.”

“···네?”

활짝 갠 얼굴 그대로 서문경이 굳었다. 잠깐 동안 침묵이 흘렀다. 황제가 긴 손가락을 뻗어 서문경의 미간을 꾹 눌렀다, ‘뭐하누? 경아 걔 있느냐?’ 뭐하는 짓입니까! 슬쩍 쥔 주먹으로 똑똑똑 머리까지 두드릴 기세인 황제의 팔을 팍 쳐내며 서문경이 성을 냈다. 이제야 겨우 출가한 정신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한 번 불이 붙자, 그 불에 기름을 부은 듯한 기세로 서문경이 따지고 들었다.

“왜 말이 달라지는 겁니까! 하늘손님들의 ‘힘’을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서요?”

“누가 그랬누? 일단 짐은 아닌데.” 휘휘 주변을 살펴보는 시늉까지 하는 황제의 뒤통수를 서문경이 죽일 듯 노려보았다. 곱게 말로 해도 될 것을 굳이 저렇게 빈정거리는 꼴이 얄밉기 그지없었다. 서문경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으면서도 들으란 듯 ‘어쩌누, 경아. 아무도 없구나.’ 따위의 말을 지껄여대던 황제가, 잠시 후에 픽 바람 새는 소리로 웃어대며 말을 이었다. “헌데 참말이다. 짐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어. 잘 되뇌어 보거라, 경아.”

깜둥새니 머리가 안 좋은 것은 이해한다만 그렇다고 이부까지 부실하면 못 쓰지. 황제가 쓸데없이 덧붙인 말을 듣고 서문경이 이맛살을 구겼다. 그러나 아무리 황제라곤 해도 믿는 구석도 없이 저리 당당할 리가 없다는 생각에 일단 서문경은 조금 전 황제와 주고받았던 대화를 찬찬히 떠올렸다. 그러기를 잠시, 서문경이 뭔가를 생각해 낸 듯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것 봐라, 하는 얼굴로 웃으며 황제가 말했다.

“질 일은 없을 거라 했지.”

“하지만 그 말이 그 말 아닙니까!”

서문경이 두 주먹까지 꾹 쥐고 억울함을 토로했지만 황제는 그 말을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서문경 쪽에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타박타박 걸어가기 시작한 황제의 뒤를 서문경이 죽상이 되어 따랐다. 차라리 계속 아무런 기대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모를까, 희망에 가슴이 후욱 부풀어 올랐다가 강제로 꺼지고 나니 기분이 더 우울해졌다. 

터덜터덜 힘없이 걷는 서문경에게 대산을 들고 따라오던 내관이 이 때다 싶었는지 다다닥 다다닥 가시 돋친 잔소리를 해댔다, ‘어데 가십니까, 앞을 잘 보고 가셔야지요. 아니, 지금 무얼 밟으시는 겝니까. 방금 객께서 밟은 은령이 어떤 내력이 있는 꽃인지나 아십니까. 이 은령으로 말할 것 같으면 몇 대 전의 황제셨던 호중제께서 총애하시던 비 마마를 위해···.’ 꽃을 밟은 것도 아니고 그 이파리 끝을 밟았다는 이유로 끝도 나지 않는 잔소리를 들어 먹는 신세가 된 서문경이 우울한 와중에도 생각했다. 여름꽃인 주제에 초봄에 떡하니 피어 있는 꼴을 보니 미친 은방울꽃이 분명한데 뿌리까지 뽑아다 저 얄미운 시누이 입에다가 처넣어주면 좋겠네. 

결국 서문경이 참지 못하고 내관의 입에다 옷자락이라도 처넣어 주려고 결심한 그 때, 황제가 말했다.

“어디서 풀벌레가 우는고. 몹시 듣그럽구나.”

보자, 마침 던질만한 자갈도 그득그득하구나. 황제가 심상하게 중얼거린 말에 합, 바로 입을 다문 내관이 슬슬슬 뒷걸음질 쳐서 서문경에게서 멀어졌다. 황제가 내관과 나인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게 있거라.”

허나, 하는 말이 기계적으로 돌아와서 황제는 신경질을 냈다, ‘실심(實心)도 아닌 주제에 성가시게 굴지 마라.’ 그 말에 내관과 나인들이 조용해지자 황제가 서문경에게 눈짓을 했다. 들어가자.

“여긴···.” 서문경이 주위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어느새 새 길에 들어서 있었다. 서문경이 서 있는 자리를 경계로 뒤로는 볕이 내리쬐는 널따란 터가 펼쳐져 있는데, 거기서 고작 몇 발자국 앞에 있는 길은 울창한 나무들이 점점 좁아지는 길 좌우로 늘어서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마치 아예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것만 같다. 서문경은 물었다. “밀원으로 들어가는 길입니까?”

“오냐. 네 녀석 입으로 찬바람을 쐬고 싶다지 않았느냐. 바람을 쐬며 잠시 걷기에는 이만한 곳이 또 없지.”

하고 대답하는 황제를 서문경이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윽고 발걸음을 옮겼다. 

사박사박사박.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아무도 없는 좁은 길에서 조용히 울렸다. 그러기를 한참, 암만 황제가 엄명을 내렸다고는 해도 그 넓은 후원을 황제가 홀로 행보케 할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수행 나인들도 천천히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물론 황제의 눈에 뜨이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두고서였다. 

좁은 길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잠시 야트막한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싶더니 곧 내리막길이 나타났다. 어린애 손바닥을 겹쳐 놓은 것 같은 작은 이파리를 수없이 매단 나무가 저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흔들렸다. 바닥에 깔리는 나무 이파리 그림자가 그리 어둠이 깊어지지 않은 이른 밤의 하늘과 갓 흰 빛이 밝아오기 시작한 새벽녘 하늘을 얼기설기 엮어 만든 그물 같았다. 바람이 불어 올 때마다 물이 쓸러 나가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마음이 가라앉았다. 

말이 없던 황제가 그 때 문득 중얼거렸다.

“시간은 많다.”

그 말에 서문경이 새삼스런 눈으로 주위를 훑어보았다. 모두 돌아보려면 적어도 반나절쯤은 걸릴 만큼 넓은 곳이라고 듣기는 했지만···.

“그렇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그 말은 아니었으리라.

“앞날이 예측한 대로만 흘러간다고 보장할 수는 없으니까요. 싫다던 제게 대연회 때 폐하의 예인으로서 참가하라 밀어 붙이셨던 폐하께서 오늘날 이르러서는 그 말씀을 철회하게 된 것처럼요.”

“그건.” 하고 말한 뒤 말이 잠시 끊겨서 쳐다보자, 얼굴을 구긴 황제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었다. 그러다 곧 서문경의 시선을 눈치 챈 황제가 평정을 가장해 서둘러 말을 이었다. “사람 말을 왜 그리 안 듣는 게냐. 그 일에 대해서라면 네가 염려할 필요 없다고 했건만.”

“굳이 그 일이 아니더라도요.”

웬만해서는 황제가 고집을 꺾을 것 같지가 않아 서문경은 하는 수 없이 진심을 털어 놓기로 했다.

“대연회뿐만이 아니라 그 앞으로의 일을 위해서라도 대비를 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뒤의 일?” 황제의 눈이 꿈틀했다. “설마하니, 경이 네 놈 아직도 체제공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게냐.”

서문경은 대답하기를 망설였다. 얼마 전 이 사안으로 황제와 다툰 적도 있는 만큼 섣불리 대답하기가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결국 서문경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람을 설득하려 한다면서 정작 중요한 속내를 꽁꽁 숨기고 있다는 것은 사리에 맞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서문경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역시 저는 그 사람을 믿을 수 없습니다.”

“···경아.”

“사실은, 폐하께서 그렇게 그 사람 말을 철썩 같이 믿으시는 이유도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이 폐하께 그렇게 당당한 이유도 모르겠고요. 그 사람이 용이라서···.” 

고작 그 이유만으로? 서문경이 말을 멈췄다. 서현을 떠올리자 서문경은 자신의 신경이 칼로 깎은 것처럼 예민해지는 것을 느꼈다. 밑도 끝도 없는 막연한 직감이 폐를 쿡쿡 찔러대는 것처럼 느껴져서 숨소리가 저절로 낮아졌다. 서문경은 눈살을 찌푸렸다. 새카만 연기, 아니, 연기라고 하기보다는 한천질(寒天質)처럼 몰캉하고 질척하면서 동시에 끈적끈적한 무언가가 뱃속을 헤집고 다니는 것 같은 불쾌한 기분. 그러나 더 당혹스러운 것은 이 느낌이 어딘가 익숙하다는 사실이었다. 분명히 언젠가 한 번 느껴본 적이 있는 기분이었다. 그것도, 그것도 아주 최근에···.

뭐였지?

그러나 그 생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황제가 자신의 말에 이렇게 대꾸한 탓이었다.

“그에게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어.”

“자격?”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 툭 끊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서문경이 항의하듯 따지고 들었다. 

“무슨 자격이요? 용이라는 것 말입니까? 고작 그거 하나요? 용이면, 그런 짓을 해도 됩니까? 사람을 그렇게 깔보고, 명령하고, 강요해도 되냔 말입니다!”

“짐은···.”

“아니요, 폐하는 익숙하다고 하실 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싫습니다! 폐하가 그런 취급을 받고 계시는 것도, 그런 취급에 익숙해진 모습을 보는 것도 싫어요! 저는···, 저는 이해가 안갑니다!” 서문경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꾹꾹 눌러 담고 있던 진심이 파도처럼 밀려나왔다. 내친 김에 서문경이 내내 궁금했던 것을 추궁했다. “왜 태도가 달라지신 겁니까?”

황제가 반문했다.

“그것은 또 무슨 소린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그러지 않으셨잖습니까! 내관이나 나인들, 상궁과 높은 관리, 심지어는 태황태후의 앞에서도! 아니, 처음에는, 예전에는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수상의 앞에서도! 제가 이 세계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 때에는···, 조금도 움츠려들지 않으시고 오히려 폐하 쪽에서 그를 도발하셨습니다. 그러셨으면서 지금은 왜.”

하고 말하다가 서문경은 번뜩 알아차렸다. 자신이 수상 서현과 처음 맞닥뜨렸던 그 때와 얼마 전에 다시 얼굴을 보았을 때의 차이를.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얼굴이 싹 굳는 것이 느껴졌다. 서문경이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성급하게 물어 놓고 서문경이 뒤늦게 덧붙였다, ‘그 사람과요.’ 황제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무슨 말이냐, 황제가 물었지만 서문경은 그 말에 대꾸하는 대신 고집스럽게 자신이 할 말만 하기로 결심했다. 돌이켜보면, 황제와 대화를 하다 보면 항상 그런 식이었다. 자신이 캐어물으면 황제가 어물쩍 뜬금없는 말로 받아치고,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면 자신이 그의 말에 휘말려 있는.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게 넘어가 줄 수 없었다.

“예전에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지요? 그런 것이 아니라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무어가 그리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건지, 짐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구나. 체제공은 용인이니 황제가 되기에 충분한 재목이다. 허나 출신에서 밀려 제 자리를 잃었으니 요구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냐.”

“그러니까!” 서문경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지나칠 만치 날카로운 반응에 어지간한 황제조차 놀랐는지 황제의 눈이 조금 커졌다. 평상시 같으면 자신이 과하게 흥분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스스로를 자제했을 서문경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상할 정도로 자신을 자제할 수 없었다. 서문경이 연달아 소리쳤다. “왜 그 사람에게만 그런 겁니까! 왜 그 사람에게만! 어째서 그 사람에게만 그렇게, 그렇게···.”

놀란 황제가 경아, 하고 서문경을 부르며 손을 뻗었다. 하지만 서문경은 성큼 뒤로 물러나 그 손을 피했다. 황제의 표정이 흐려졌다. 어머니의 손을 잡으려다가 거부당한 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그 표정에 서문경은 가슴이 욱신거렸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뱃속에서 광포한 감정이 날뛰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갑자기 조용해진 서문경이 불쑥 말했다.

“그 사람과 어떤 사이였어요?”

“무어?”

서문경이 자신이 한 말에 놀라며 입가를 가렸다,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얽히면 왜 태도가 달라지시는지···, 마치 제가 아는 폐하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폐하께서는.” 서문경이 말을 골랐다. 이윽고 적당한 표현이 떠올랐는지 서문경이 입술을 열었다. 그러나 입술을 조금 벌린 채로, 서문경은 망설였다. 이 말을 해도 될까. 그러나 결단을 채 내리기도 전에 재촉하는 듯한 황제의 눈길을 받고, 아직 혀 위에 올려져만 있던 말이 등이 떠밀려 또르르 혀끝으로 굴러갔다. “폐하께서는 그 사람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사람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몹시 서글프게 들린다고 서문경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뒤에야 깨달았다. 아아. 난.

“전···.”

정말로 슬픈 거였다···.

“경아.”

“지금 폐하께서 앉아 계신 제좌도 그 사람을 위한 것. 그 사람이 요구하는 바를 모조리 들어주는 것도 그 사람을 위한 것. 다른 사람들의 눈이 있을 때에는 일부러 거만하고 게으른 모습을 보이는 것도 그 사람을 위한 것.”

같은 사람을 대하는데도 상황에 따라 태도가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을 때에는, 그 사람을 위해서 연기(演技)를 해야 했을 터이니. 혈통 하나만으로 제좌를 차지한 가왕(假王)이 자격을 갖춘 진실한 황제에게 모욕을 주는 비통한 꼴을, 용의 백성들이 보고서 서현에게 더더욱 충성하도록. 

“그저, 제 생각에 불과하지만.” 말 한마디 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입 안으로 있을 리도 없는 모래가 들어왔다. 까드득 까드득. 껄끄럽게 입 안을 돌아다니며 말을 잇는 것을 방해하던 모래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 뱃속의 내장을 돌아다닌다, 혈관을 타고 온 몸을 돌아다닌다.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서문경은 애써 그렇게 생각하려 노력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지금 이 기분을. 서문경은 그래서 다시금 되뇌었다. 나는 지금, 모래를 씹고 있다. “제 망상에 불과하지만···.”

서문경은 입을 다물었다. 계속해서 말을 끌었는데도 들려오지 않는다. 반박이. 네 지나친 생각에 불과하다는 반박이 돌아오지 않았다. 

“저, 는.”

서문경이 다시 입을 열었다. 쫓기는 듯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심장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저는, 죽을 뻔 했었어요.”

말하지 마. 이 말은 하지 않기로 했었잖아. 그러나 계속해서 입이 움직인다.

“그 사람이, 그 사람···, 저와 같은 세계에서 온 사람.” 너무 흥분한 탓인지 그의 이름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서문경은 필사적으로 기억을 뒤졌다. 그 사람. 항상 싱글벙글 웃고 있지만 등 뒤에 칼을 숨기고, 눈 뒤에 고뇌를 숨긴 그 사람. 서문경은 겨우 그 사람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서문경이 토하듯 말을 이었다. “조원.”

“조원?”

“폐하께서는 모르시겠지요. 얼마 전, 폐하와 다투고 제가 밖으로 나갔을 때 하마터면 변을 당할 뻔 했습니다. 조원 그 사람이 저를, 납치하려고 했었습니다. 마침 폐하의 외당숙 되는 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겨우 도망쳤지만, 그 사람은 진심이었어요.”

한 순간이었지만 정신을 잃고, 눈까지 멀었었다. 어쩌면 그 사람이 일으킨 불에 온 몸이 타서 없어졌을 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그 일은 그 사람이 독단으로 저지른 짓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은 수상의 아래에 있는 사람이었잖습니까.”

“그래서, 그것이 체제공이 명한 일이었다?”

“수상이 명령하지 않았으면 그 사람이 설마 그런···!”

그만 좀 해! 머릿속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홀린 듯이 마구 내뱉어대면서도 서문경의 이성은 알고 있었다. 이 말은 어딘가 이상해. 굳이 황제를 찾아와 경고한 사람이, 뒤로는 조원을 시켜 나를 납치하려 들었다고? 하지만 입은 더 이상 머리의 말을 듣지 않았다. 더, 더, 더! 서문경이 그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내뱉었다.

“분명히 그 사람이!” 

“그만.”

쾅, 하고 망치가, 얼어붙은 심장을 때렸다.

“그만 하거라. 듣고 싶지 않구나.”

“······.”

방금 전까지만 해도 미친 것처럼 소리를 질러대던 서문경이 거짓말처럼 입을 다물고 멍하니 황제 쪽을 쳐다보았다. 황제의 일그러진 얼굴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잔뜩 찌푸려진 얼굴은, 여전히 그린 듯 아름다웠지만 그래서 더 서문경은 비참해졌다. 저 사람은 그림처럼 아름다운데, 나는 이렇게도 흉해. 

나는···, 일그러졌다.

서문경은 눈을 내리깔았다. 경아, 하고 황제가 자신을 불렀지만 서문경은 대답할 수 없었다. 입을 열었다가는 그에게 험한 말을 할 것 같았다. 원망을 토해낼 것 같았다. 어떻게 당신이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느냐고 화를 낼 것 같았다. 입을 꾹 닫고 있는 지금도 원망이 자꾸만 꿈틀꿈틀 기어 나와 뱃속을 채우고 있었다. 그 시커먼 감정이 꾸역꾸역 기어 올라와 가슴을 침범하고 머릿속을 점령했다. 폭죽처럼 계속해서 원망이 터졌다. 들었잖아? 내가 무슨 일을 당했었는지 내가 말했잖아? 그런데도 당신은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걱정되지 않아? 화나지 않아? 왜 내 앞에서, 그 사람 편만 드는 건데? 당신, 서문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당신이···,”

당신이 먼저 그랬잖아. 내가 좋다고 그랬잖아. 내가 소중하다고 그랬잖아.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선 안에 당신을 들여 버렸는데, 내 ‘선’ 안쪽에 있는 사람은 당신 한 사람 뿐인데, ···하지만 당신이 그은 선 안에는 나 외에 또 누가 있는 거야? 그리고 그 사람. 그 사람이, 나보다 더 선 안쪽에 있다고 그렇게 말하는 거야?

그 사람을 택할 거야?

곧 가슴 속이 한 가지 감정으로만 부풀었다. 그 감정이 무척 버거웠지만, 감정이 격해지면 늘 나타나곤 하는 숨 가쁨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감정이 터질 듯 격렬한 감정이라기보다는 끝없이 움츠려드는 종류의 감정이었던 탓이었다. 

쓸쓸해. ···너무 쓸쓸해.

“저도, 그런 말 따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감정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버거워져, 결국 서문경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황제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서문경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하고 말하면서 서문경은 생각했다. 내 목소리처럼 들리지 않아. 내가 하는 말이 맞는 걸까. 손을 들어 입가에 가져다 대 보았다. 손가락 끝에 마른 입술이 오물오물 움직이는 것이 느껴진다. 

“폐하께서, 저를 그렇게 만들어요.”

입가를 더듬던 손이 툭하고 떨어진다. 말해 놓고서 곧바로 후회했다. 이런 말을 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황제를 설득하고 싶었다. 그를 위해서 대연회에 나가고, 그 이후에도 그를 지킬 힘을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정작 튀어나온 말은 서현에 대한 근거 희박한 비난과, 황제에게 책임을 미루는 말. 참으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은 충동이 이성을 이겼다. 아니, 그 말을 시킨 것은 충동이라기보다는···, 그래, 본능이었다.

그것이 내 진심.

서문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가 언제 이렇게 추악해졌지?

황제가 자신에게 무어라 말을 하려다 그만 두는 것이 눈에 비쳤지만 서문경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입을 열었다가는 더 이상 자신이 무슨 말을 할지가 너무나 두려웠다. 다만 서문경은 그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저는···, 할 겁니다.” 서문경이 자신의 발치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납득할만한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지금으로서는 어떤 수긍도 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말하자, 황제가 대답했다.

“짐 또한 마찬가지다.”

그 어떤 이유가 있어도 서문경을 대연회에 내보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