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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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데···.” 

서문경이 황제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중얼거렸다. 아무리 깊이 잠이 들었어도 그렇지, 그 난리 난리를 친데다 이렇게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아직 눈 하나 깜빡하지 않다니 이건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별안간 심각해진 서문경의 눈이 완전히 식은 타락이 담긴 자기를 향했다. 설마 독약 같은 걸 탄 건 아니겠지···. 한 번 그런 생각을 하자 그럴 가능성은 낮다는 것을 알면서도 불안감에 심장이 쿵덕쿵덕 뛰기 시작했다. 폐하, 폐하. 서문경이 황제의 어깨를 짤짤 잡아 흔들었다. 

“폐하, 일어나 보십시오, 폐하.”

서문경의 손이, 끈 떨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힘없이 흔들리는 황제의 어깨 위로 올라왔다.

“제발, 폐하!”

서문경의 목소리가 찢어질 듯이 높아진 그 때 황제가 번쩍 눈을 떴다. 황제를 내려다보고 있던 서문경의 시선과 서문경의 무릎에 머리를 베고 누워 있던 황제의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뜻밖의 상황에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뭐더냐.”

먼저 입을 연 것은 황제였다. 황제가 황망한 시선으로 올려다보며 내뱉은 말에 황제의 볼을 꼬집고 있던 서문경의 손이 슬그머니 떨어져 나갔다. 황제가 맹렬하게 비난했다.

“그런다고 짐이 속을 것 같더냐?”

“쩨쩨하게.”

“무어라?!”

황제가 버럭 고함을 지르자 서문경이 에이, 하고 덩달아 신경질을 내며 제 무릎을 빼버렸다. 방심하고 있다가 맨 바닥에 뒤통수를 찧은 황제가 부딪친 자리를 감싸 쥐고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이런 무례한 놈!, 하고 성을 내는 황제에게 서문경이 적반하장으로 눈을 흘겼다. 

“무얼 잘했다고 흘겨보누, 흘겨보길!”

“볼때기 한 번 잡아 당겼다고 바로 자리 털고 일어나시는 것을 보니 장해서 그럽니다, 왜요?”

공격적인 서문경의 태도가 의외였는지 황제가 주춤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볼이 부었어.’, 영문을 알 수 없어 황제가 잠시 뿔난 성질을 접어놓고 우물거리자, 서문경도 따라서 푸시식 열이 식은 표정이 되었다. 세운 무릎 위에 턱을 척 올려놓은 서문경이 눈만 굴려 황제를 살피다가 문득 한숨을 폭 내쉬었다. 덕분에 황제는 한층 더 의아해졌다, ‘저 놈이 참말로 왜 저래?’

“정말···.” 서문경이 탈력한 투로 중얼거렸다. “정말 무슨 짓을 당할 뻔 했는지나 아십니까.”

“으응?”

“하기는. 아실 리 없지요. 계속 모르고 계신 것이 낫고요.”

하고 말하며 서문경이 어리둥절해하는 황제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처음에는 으응?하며 머리를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던 황제가 그러나 곧 이게 웬 떡이냐 하며 서문경을 폭 안아 주었다. 정도를 모르고 목덜미에 코를 묻는 황제를 옆으로 꾹꾹 밀어내면서 서문경의 황제의 등에 팔을 둘렀다. 시름시름 앓는 꼴이나마 두 눈을 뜨고 제 힘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이제야 마음이 놓였다. 서문경이 눈을 내리깔았다. 정말로, 정말로 얼마나 놀랐었는지. 낯모르는 소년 아래에 반나체로 누워 있는 모습을 봤을 때는 정말로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약간만, 아주 약간이라도 시간을 지체했으면 정말 큰 일이 날 뻔 했다. 별 일이 없어서 다행이지만···. 그렇게 마음을 가라앉히는데, 겨우 진정시킨 것이 무색하게 발끈 노염이 치솟았다. 자신의 추궁에 그 낯선 소년이 했던 대답이 떠오른 탓이었다. 고작 열네 살짜리 어린애에게 그 아이 주변의 어른들은 대체 무슨 짓을 시킨 거지? 대답하는 꼴을 보아하니 제가 하는 짓이 무슨 행위인지도 모르는 눈치던데. 다 미쳤어. 다 미쳐서 돌아가는구먼.

“······.” 

속으로 씩씩 성을 내던 서문경이 곧 숨소리를 삼키고 황제의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갑작스런 행동에 황제의 몸이 꿈틀한다. 이놈이 왜 이래?, 하고 황제가 의아해하고 있는 것이 뻔했지만 서문경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말은 그럴듯하게 했지만 정말 그 순간 자신이 화가 났던 이유를 떠올리자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워졌다.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애에게 그런 파렴치한 짓거리를 시킨 어른들에 대한 노여움? 그런 짓을 방조하는 것도 모자라 제 주인인 황제에게 몰래 약을 먹여 멍석을 깔아 놓은 궁인들에 대한 분노?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 광경을 봤을 때 가장 먼저 자신이 생각했던 것은.

싫어. 빼앗아 가지 마. 나한테서 저 사람 빼앗아 가지 마.

“폐하···.”

서문경이 갑자기 부르자 황제가 반사적으로 머리를 조금 움직였다.

“으응?”

“······.”

“왜 그러누. 불러 놓고서 왜 아무 말이 없어.”

황제의 말 대로다. 자신이 불렀으니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텐데, 그런데 아무리 해도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서문경은 비록 제 몸의 일부이지만 도통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여는 대신 황제의 등에 두른 팔에 더더욱 힘을 주었다. 

“폐하.”

“어찌 그리 울상이야.” 하고 말한 황제가 서문경의 볼에 차례로 손을 대더니 그대로 팔을 주욱 늘려 서문경의 얼굴을 요래조래 살펴보았다. 황제의 얼굴이 구겨졌다. “얼굴이 엉망이구나. 지금 보니 온 몸도 먼지투성이야.”

어디에 얻어맞기라도 한 게야? 하는 물음에 서문경은 잠시 말이 없다가 곧 눈을 내리깔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말해 봐야 걱정할 것이 뻔하니 말하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이미 끝난 일을 말해 무엇할까. 서문경이 변명했다.

“급히 오다가 넘어져서···.”

그 조악한 변명에 황제의 눈이 의심으로 가느스름해졌지만 서문경은 더 변명하지 않았다. 대신 서문경은 중얼거렸다. 

“저는···.”

저는. 그러나, 그 뒷말은 나직이 내쉬는 한숨에 묻혔다. 

아직도 자신의 볼을 누르고 있는 황제의 손등을 서문경이 손톱 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황제의 팔이 반사적으로 느슨해지자, 서문경이 다시 황제의 품 안에 파고들었다. 그의 체온을 느끼자, 연달아 일어난 사고로 아직도 놀라있던 가슴이 그제야 조금 가라앉았다. 

서문경은 황제의 등에 팔을 감았다. 민감한 손가락에 닿는 황제의 등은, 풍성한 옷자락에 묻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확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말라 있었다. 서문경의 손가락이 뒷덜미 바로 아래의 볼록 튀어나온 뼈를, 날카롭게까지 느껴지는 두 어깨를, 깨진 토기 화석처럼 메마른 날개뼈를, 그리고 오목하게 패인 등 한가운데에 곧게 뻗은 등뼈를 천천히 훑었다. 그럴 때마다 황제의 표정이 난감한 듯 굳어지고 그의 손등이 불쑥불쑥 튀어 올랐지만 제 감상에 젖은 서문경은 미처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이윽고 황제의 허리께에서 손을 멈춘 서문경이 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마르셨습니다.’

“많이 마르셨어요.”

“···경아?”

무기력하게 누워 있던 황제의 모습이 눈꺼풀에 쓰이기라도 한 듯이 어른거렸다. 이 곤권한 생활이 지긋지긋해 하루라도 빨리 제좌에서 내려오고 싶다던 황제의 지친 표정도 그 위에 겹쳐졌다. 서문경은 자신도 모르게 콱 이를 악물었다. 동시에 그의 팔에도 힘이 들어갔다. 왜 다들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들일까. 이렇게 힘없고 이리도 약한 사람을. ···화가 났다.

몇 번째인지도 모를 중얼거림을 서문경이 내뱉었다.

“폐하.”

“음.”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고 말하자 황제가 의아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무엇을 말이냐?하고 황제가 물었지만 서문경은 대충 대답을 얼버무렸다. 이미 그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될까. 내가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지켜줄 수 있을까···. 이제는 대연회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황제의 주위를 에워싼 이리 같은 사람들에게서 자신이 어찌하면 황제의 힘이 되어 줄 수 있을까. 

서문경은 생각에 잠겼다.

**

청의관에서 내쫓긴 강재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고덕의 제 집으로 가는 탈 것이 아니라 태황태후전에서 나온 엄격한 인상의 상궁이었다. 청의관의 궁인들보다 한층 더 격식 있는 차림을 한 상궁은, 빈틈없이 틀어 올린 머리만큼이나 심사가 꼬인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표정이 자신도 모르게 움츠려 든 강재희에게 운현궁 상궁이 턱짓을 하며 말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시지요.’ 그 말에 싫다는 반박 한 마디 하지 못하고 강재희가 운현궁 상궁의 뒤를 따랐다. 근래 자주 자신의 집을 찾곤 하는 저 상궁이, 강재희는 형님들이 다녀가셨을 때의 어머니만큼이나 무서웠다.

“···!”

하지만 자신을 부른 사람이 운현궁 마마가 아니라 저 어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귀신같은 표정을 짓는 운현궁 상궁께 혼쭐이 나는 한이 있어도 순순히 따라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궁이 대동하고 온 탈 것에 들어 앉아 있다가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가마 밖으로 내린 강재희가 아직 꺼내지 못한 한 발을 차마 꺼내지 못한 채로 딱딱하게 굳었다. 눈앞에 있는 남자가 빙그레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강재희를 맞았다.

“납매 오셨는가.”

하고 말한 남자는 강재희의 아버지인 강환보다 조금 연하로 보이는 중년 남자였다. 그러나 강재희는 눈앞의 남자가 보이는 것과는 달리 자신의 아버지보다 열 살 가까이 나이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헌의공 문효(問曉) 서엽. 수상인 서현의 아버지이자 경혜현주의 부군(夫君)이면서, 한 때 수상을 거쳐 가연제 시절에는 어린 황제의 대리로 거섭(居攝)까지 지낸 명실상부한 예의 최고 권력자. 

그러나 어린 강재희를 이토록 겁먹게 하는 것은 그런 휘황찬란한 감투 따위가 아니었다. 그저 강재희는 눈앞의 남자가 무서웠다. 그가 만일 하늘을 나는 새라도 떨어뜨릴 위세를 자랑하는 그 ‘헌의공’이 아니었더라도 강재희는 그를 두려워했을 것이다. 누군가가 강재희에게 어찌해서 저 이가 무서우냐고 묻는다면, 강재희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할 것이 뻔했다. 그것은 어린 짐승이 제 몸의 위험을 위협을 감지하는 본능에 가까운 감각이었다. 

벌벌 몸을 떠느라 제대로 된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는 강재희의 어깨를 서엽이 가만히 토닥여 주었다. 그 손짓에 강재희의 떨림이 멎기는커녕, 보고 있기가 안쓰러울 정도로 강재희의 자그마한 얼굴이 파래졌지만 서엽은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정말로 강재희를 달래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버릇대로 손이 나간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서엽이 물었다.

“시킨 일은 어찌 되었나.”

그 말이 채 끝나기가 무섭게 강재희가 그의 발밑에 납작 엎드렸다. 

“자, 잘못했어요.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어요.”

“이런.” 서엽이 혀를 차며 강재희의 앞에 한 쪽 무릎을 대고 앉았다. 그것을 느끼고 움찔 튀어 오르는 강재희의 등을 그가 지그시 눌렀다. 서엽이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내 그것을 물은 것이 아니지 않은가.”

“죄···.”

“납매.”

서엽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납매의 꽃 같은 모습과 마주하고 있는 것은, 마치 만개한 매화를 보고 있는 듯하여 참으로 흐뭇하네만 안타깝게도 내 그리 시간이 많은 이가 아니요. 그대가 미처 듣지 못한 듯하여 다시 묻겠소만,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나.”

두려움에 질려 대답은커녕 제대로 숨도 못 쉬고 있는 소년 대신 운현궁 상궁이 조심스럽게 대답하였다.

“···아뢰옵기 송구하옵니다, 헌의공 어르신. 뜻밖의 일로 일을 그르치고 말았나이다.”

“뜻밖의 일이라?”

“예. 막 일을 치르려는 마당에 불청객이 들이닥쳐 그만.”

“누군가.”

서엽이 돌아가지 않고 곧바로 물었다. 운현궁 상궁이 허리를 굽실거리며 대답했다, ‘운현궁 마마의 질자되시는 엄장군과···.’

“또. 황제라면 치를 떠는 그 치가 저 혼자 그곳에 쳐들어 왔을 리가 없으니 다른 누군가가 있단 말 아니냐.”

“물손님이 들이 닥쳐서···.”

“수객이?”

강재희의 등을 짓누르고 있던 손을 떼어내며 서엽이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궁인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죄인이라도 다루듯 강재희의 양 겨드랑이에 팔을 끼워놓고 억지로 그를 일으켜 세웠다. 고운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얘진 강재희에게 서엽이 물었다.

“그 말이 사실인가.”

“자, 잘못, 잘못했···.”

“사실인가.”

주인 앞에서 오줌을 지린 강아지처럼 발발발 떠는 강재희의 귀에 운현궁 궁인이 속삭였다, ‘그 새초리마냥 생긴 이가 물손님입니다.’ 그녀의 귀띔에 강재희의 얼굴에 아아, 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 미세한 변화만으로도 강재희의 대답을 대충 알아챈 서엽이 끌끌 혀를 찼다. 

“대충 둘러댄 말이었건만 정말로 강샘을 부렸단 말인가.”

“그런 모양입니다, 어르신.” 하고 맞장구를 친 운현궁 상궁이, 잠시 후 조심스럽게 여쭈었다. “어찌 하시겠습니까?”

서엽이 바로 대답하는 대신 까슬까슬한 수엽이 돋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가 불현듯 중얼거렸다, ‘수객이라···.’

“희한하군.”

“예?”

“수객이 그토록 일황자를 싸고도는 것도 의문이지만 그것보다는 근본적으로 그 치가 어떻게 그곳에 난입할 수 있었던 겐지.”

서엽의 눈살이 팍 구겨졌다.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그 질문은 운현궁 상궁에게 던지진 것도, 강재희에게 던져진 것도 아니었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주인을 이십 년 넘게 모신 덕에 눈치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운현궁 상궁이 재빨리 물러날 채비를 마쳤다. ‘잠시 여 있게.’, 운현궁 상궁이 강재희를 잡아끄는 것을 힐끗 보고 서엽이 한 번 손짓을 했다. 겁을 먹은 나머지 혹시라도 이성을 잃고 강재희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운현궁 상궁이 강재희의 어깨를 콱 붙잡아 고정시켰다. 서엽이 시선은 강재희 쪽 대신 다른 쪽으로 던지면서 강재희에게 물었다.

“일황자의 몸을 보았나?”

“예?”

“등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내 납매에게 신신당부했던 것 같은데.”

두려움으로 얼어붙은 머릿속을 강재희가 죽을힘을 다해 뒤졌다. 어떻게든 생각해 내야만 이 장소를 벗어날 수 있다는 확신에 저절로 필사적이 되었다. 등? 그 인형 같은 사람의 등이, 어땠더라? 

“하, 하얗고···.”

강재희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옥이나 눈같이···.”

그저, 이상할 정도로 희기만 한. 

서엽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상처 하나 없었단 말인가?”

강재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서엽이 몇 번이고 물었다, ‘그 기억, 분명한가, 납매? 그 기억에 한 치의 오차도 없으렷다?’ 그 물음에 강재희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자 서엽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다 서엽이 문득 운현궁 상궁에게 이만 물러가보라는 눈짓을 보냈다. 물론 강재희 또한 함께.

운현궁 상궁과 궁인들이 강재희를 끌고 가다시피 해서 사라지자마자, 그 자리에 홀로 남은 서엽이 허공으로 물음을 던졌다.

“들었나. 이것이 어찌 된 일인가?”

염락, 하는 나직한 추궁이 그 뒤에 이어졌다. 그 말이 떨어지자, 분명 아무도 없던 허공에서 사람 하나가 훌쩍 떨어져 서엽의 앞에 공손히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그것을 본체만체하고 서엽이 대답을 재촉했다. 서엽의 앞에 불현듯 나타난 이, 염락 조원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소인 또한 까닭은 알 수 없습니다. 허나, 분명히 소인은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허나 납매는 일황자의 등이 상처 하나 없이 희기만 하다 증언하였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자네의 기억은 먼 과거의 것이나 납매의 것은 아니야.”

“말씀 드리기 몹시 송구하오나, 그 아이의 말을 신뢰하실 수 있습니까.”

완고하던 서엽의 입매가 약간 누그러졌다.

“그리 묻는다면, 아니라 해야겠지. 낯만 그럴싸할 뿐, 담은 한심할 만치 작고 머리통에 든 것은 하나도 없어 뵈더군.”

“그리하시면 소인의 말을 믿어 주십시오.”

“허나, 그것도 힘들겠어.”

조원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의 대답에 일순 당황했다가 시선을 의식하여 서둘러 표정을 수습하는 조원을 조롱하듯 웃음기 어린 눈으로 지켜보던 서엽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들었네. 일이 성사되던 도중 수객이 난입하여 그것을 망쳐 놓았다고.”

“······.”

“어찌 된 일인가, 염락.”

찌르는 듯한 시선에 조원이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잠시 후 결심한 듯 고개를 들고 말했다.

“어르신, 그렇지 않아도 그 일에 대해 긴히 아뢰올 것이 있습니다.”

그 당당한 대답이 의외였던지 서엽이 잠시 눈살을 구겼다가, 곧 일단은 들어 보겠다는 뜻으로 턱 끝을 끄덕였다.

“말하라. 다만 그대의 불민함을 감추기 위해 변명을 하려는 기미가 보인다면 용서치 않을 것이다.”

“물론입니다. 어찌 지엄하신 헌의공 어르신 앞에서 소인이 그런 망령된 짓거리를 꿈꿀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일단 머리를 조아리며 서엽을 추켜세운 조원이 곧바로 청의관 송림에서 있었던 일을 낱낱이 서엽의 앞에 고하였다. 일이 틀어져 심기가 언짢아지기는 했지만, 일단 조원에게 다시 기회를 주기로 한 이상 서엽은 원래의 쾌활한 태도로 돌아왔다. 

그러나 때로는 맞장구를 쳐주고, 때로는 사람 좋게 웃어 보이기도 하면서 조원의 말을 듣고 있던 서엽의 말수가, 조원의 말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극단적으로 줄어들었다. 그의 표정 또한 이거다 딱 집어 정의할 수 없을 만치 애매하게 굳었다. 조원이 길었던 보고를 끝맺고 입을 다물자, 생각에 잠겨 있던 서엽이 물음을 던졌다.

“무어라 생각하나, 자네는.”

맥락 없는 물음이었지만 조원은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소인의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일황자의 힘이라? 그것이?”

“물손님의 힘은 소인이 몇 번이고 봐 왔습니다. 그 이의 힘은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하고 단언한 조원은 서엽에게도 동의를 구했다. “어르신께서도 그 아이의 힘은 목격하신 적이 있지 않으십니까.”

서엽이 천천히 턱을 쓰다듬으며 대꾸했다, ‘물론···.’

“무론 그러하네. 허나, 그렇다고 하여 어찌 그 기사(奇事)를 일황자의 소행이라 단정 지을 수 있을꼬.”

“그 이 외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감히 서엽의 견해에 반박하는 조원의 말투는 칼처럼 단호했다. 그 말에 서엽이 가만히 이맛살을 구기자, 조원이 어조를 달리하여 조심스럽게 물었다. 

“말씀은 그리 하시지만 어르신께서도 숙고(熟考)하고 계신 바가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 말에 서엽은 한 쪽 눈과 눈썹을 가만히 치켜 올렸다. 돌출된 눈썹이 살아 있는 것처럼 몇 번이고 꿈틀거린다 싶더니, 어느 순간 그의 얼굴에서 불쾌해하는 빛이 싹 씻은 듯 사라지고 그의 메마른 입술을 비집고 짧은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서엽이 조원의 어깨를 탕탕 두드리며 호쾌하게 말했다.

“자네를 상대로는 한 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음이야. 그 사실은 어찌 알았나?”

그러나 조원은 속지 않았다. 겉으로는 웃고 있는 서엽의 속에 금방이라도 자신의 배에 쑤셔 박을 수 있는 칼날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그가 모를 리가 만무했다.

“부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어르신. 결코 소인이 어르신의 뒤를 캐어본 것이 아닙니다. 다만, 흘러 들어온 풍문을 들었을 따름입니다. 제 아무리 은밀히 일을 행한다 하더라도 어디에나 숨어 듣는 쥐새끼는 있기 마련이요, 소문을 실어 나르는 바람은 언제고 불기 마련입니다. 소인은 그저 그런 종류의 풍문을 듣고 미루어 짐작하였을 따름입니다.”

거기까지 말한 뒤, 조원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숨을 몇 번 고르고서 다시 입을 열었다.

“어르신께오서 수상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시중을 물리시고는, 아드님 되시는 체제공과 더불어 느긋하게 석후 산보를 즐기셨다지요.”

“그 단편적인 소문만으로 내가 무엇을 했는지 짐작하였다?”

“하고자 마음먹었다면 못할 것도 없음입니다. 수상부 후원 한편에 버려진 신실이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 아닙니까?”

“허나 주목하는 이 하나 없는 사실이기도 하지.”

“그러나 어르신께서는 그 신실을 찾아 가셨습니다.”

서엽이 무척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듯 입술에 희미한 미소를 버금은 채, 조원을 응시하였다.

“그리 여긴 이유가 있을 테지.”

“그 외에는 굳이 어르신께서 수상부를 찾으실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체제공께 긴히 이를 말씀이 있으셨다면 굳이 보는 눈이 많은 수상부로 어르신께서 찾아가시는 것보다는 체제공이 은밀히 어르신을 찾아뵙게 하는 것이 옳았을 것입니다. 또한 수상부 내의 사람이나 물건에 용무가 있으셨다면 오랜 시간을 들여 체제공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헌의공께서 직접 움직이셨으면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르신께서는 그리하지 않으셨지요. 그것은 꼭 체제공을 대동하여야 하는 일을 하실 참이었기 때문입니다. ···소인의 짐작이 틀렸다면 그렇다 말씀해 주십시오.”

“아니.”

서엽이 곧바로 인정했다.

“자네 짐작이 옳다.”

“그럼 신실에서.” 조원이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 말을 이었다. “신실에서 무엇을 보셨습니까?”

“신실에 무엇이 모셔져 있었는지는 그리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 아닐세.”

“그럼···?”

“왜.”

서엽이 높낮이조차 없는 투로 툭 내뱉으며 몸을 죽 폈다. 자신에게 묻는 말인 줄만 알고 눈을 크게 떴던 조원이 곧 알아차렸다. 자신에게 물은 것이 아니었다. 그 짐작대로 서엽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왜 그곳에 모셔졌는지가 문젤세.” 하고 말한 서엽이 그 말 뒤에 지금 막 생각났다는 듯이 덧붙였다. “소희가 그 까닭을 은밀히 조사하고 있는 듯 하더구나.”

조원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러나 경계하는 빛이 역력한 조원의 얼굴을 보고도 서엽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어르신, 하고 부르는 조원에게 서엽이 대충 손을 내저었다.

“염려할 것 없다.”

“물론 체제공이 효성이 지극하다는 사실은 소인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원이 입을 닫았다. 그만 하라는 듯, 서엽이 고개를 가로저은 탓이었다. 일단 입을 다물었으되 의심쩍어하는 기색이 전혀 가시지 않은 조원을 슥 한 번 보고 서엽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조원이 황급히 따라갔다.

“헌의공 어르신.”

“걱정할 것 없대도 그러는구나.”

“그러나.”

“설사 세상이 뒤집어진다 해도 그 아이가 이 몸을 앞지를 수는 없음이다.”

애초에 나기를, 그 젊은 아이보다 이 늙은이가 눈이 좋게 났으니 별 수 있을까. 서엽이 심상한 어조로 말하며 휘적휘적 걸어가다가, 불현듯 생각난 듯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리 하자꾸나. 어떠하냐?”

그 말에 조원이 서엽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서엽이 말했다···.

**

합하, 하고 조심스럽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서현은 머리를 들었다. 가물가물 타고 있던 화등잔 불꽃이 그 결에 조금 흔들렸다. 최유인가. 무심코 생각했다가 문종이에 비치는 자그마한 사내의 그림자를 보고 생각을 고쳤다. 누군가, 하고 나직이 묻자 공손한 대답이 돌아왔다. 얼마 전에 집안에 새로 들어온 젊은 사내종이었다. 

“무슨 일인가.”

“나리를 찾아오신 분이 계십니다만···.”

서현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마침 불어온 바람이 장지문이 덜거덩거렸다. 

“들라 하게.

“예?” 대답을 들은 사내종은 왜인지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고작 배복(陪僕: 하인)에 불과한, 더구나 이 저사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자가 가타부타 말꼬리를 잡을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노복은 허리를 수그리고 물러났다. 서현을 찾아왔다는 손님을 불러오기 위해서였다.

생각에 잠겨 있던 서현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은, 사내종이 손님을 모시고 다시 서재 앞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문종이에 어렴풋이 비친 그림자가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이의 것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은 서현이 괴고 있던 턱을 들었다. 아. 희미한 신음이 다물린 입술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자신을 찾아온 이가 있다는 사내종의 말에 자신이 손이 누구인지도 묻지 않고 들이라 했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탓이다. 

그 때 노복이 아뢰었다.

“손께서 드십니다.”

장지문이 열렸다. 

“수상부까지 다녀갔었다.” 

허나 없더군, 하며 손이 서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 뒤에서 사내종이 예의 바르게 서현과 손, 두 사람을 향해 예를 표한 다음 문을 닫고 물러갔다. 앉으라는 말도 하지 않았건만 손이 알아서 앉을 자리를 찾아와 앉았다. 등자를 끌고 와 서현의 맞은편에 앉은 손에게 서현이 조용히 대꾸했다.

“헛된 걸음을 했군. 암만 나라도 무인 반야(半夜)까지 수상부에 있지는 않네.”

“시혹(: 혹시) 그럴까 하여.”

“···무슨 일이 있었나.”

그 말에 무슨 일을 떠올렸는지 손이 미간을 잔뜩 구긴다 싶더니, 그가 불퉁한 투로 내뱉었다. 헛짓을 작일 주후에만 몇 번인가 했었지. 보통 사람들 같으면 그 헛짓이 무엇인가 한 번쯤 물어볼 만도 한데, 서현은 손이 했던 불쾌한 경험에 관심을 두는 대신 조용히 그에게 찾아온 용건을 물었다. 손의 눈길이 매서워졌다.

“쌀쌀맞기는 천하의 만년빙(萬年氷)도 울고 가겠군.”

“무용건이라면 그대가 이곳까지 찾아왔을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손이 서현을 향해 무언가를 턱 던졌다. 서현이 자신의 무릎 위에 떨어진 서찰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그것을 집으려 손을 뻗었다. 손이 말했다.

“경혜현주께서 보내셨다.”

서현의 손이 주춤했다. 그 행동을 손이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 시선을 느꼈던지, 곧 서현이 서찰을 집어 올려 펼쳤다. 일순간이라도 주춤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치 침착한 태도였다.

손이 물었다.

“무슨 내용이지?”

“모르나.” 

눈으로는 서찰의 내용을 죽 읽어 내려가면서 서현이 대꾸했다. 그 말에 손이 발끈해서 반문했다.

“나를 무어로 보는 거냐. 내가 내 것도 아닌 서찰의 내용이나 훔쳐 읽을 무뢰배로 보이나?”

“그런 말은 하지 않았어.” 서현이 서찰을 다음 장으로 넘겼다. 손의 눈매가 꿈틀했다. 어쩐지 꽤나 손에 잡히는 감각이 두툼하다 했더니 서찰은 한 장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서현이 그 때 말을 이었다. “그저 그 이···, 아니, 그 어른께 미리 말씀을 전해 듣지 않았나 싶었던 것뿐이야.”

그 말에 괜히 열을 낸 꼴이 된 손이 머쓱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듣지 못했네.’

서찰을 모두 읽은 서현이 종이를 접어 다시 손에게로 내밀었다. 열없이 입술만 일그러뜨리고 있던 손이 제 턱 밑에 내밀어진 서찰을 보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뭐지?”

“틀림없이 받아 읽었어. 바쁜 사람에게 수고를 끼쳤군.”

“왜 서찰을 돌려주는 건지 물었어.”

서현이 미간을 구겼다, ‘읽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 심상한 대꾸가 더 심기를 뒤틀리게 한 건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손의 얼굴이 귀신상이 되었다. 손이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서궤(書?: 책상)를 힘껏 내리쳤다. 쾅! 단단한 단목(檀木)서궤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우르르 떨린 탓에 산처럼 쌓아 두었던 책들이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걔 중 하나를 집어 들며 서현이 나직이 손을 나무랐다.

“밤이 늦었어. 조용히 해 주게.”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않나!”

“나는 자네가 왜 이리 열을 내는 건지 모르겠군.”

마지막 책을 집어 서궤에 올리면서 서현이 말했다. 그 말에 손의 입이 딱 다물렸다. 서현의 말에 납득했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성이 나 금방이라도 고함이 터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안될 일이었다. 손은 서현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절대로 흥분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수많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입을 굳게 다물고, 몇 번이나 가느다란 숨을 내쉰 후에 손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서찰을 돌려주는 건가? 답신도 아니고, 이 서찰을 왜.”

“답신을 바라는 내용은 아니더군.”

“그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목소리가 높아졌다. 손이 콱 주먹을 쥐고 화를 다스렸다. 그 덕에 잠시 끊어졌던 말을 이은 소리는 필요 이상으로 나직해져 있었다. “돌려줄 필요가 뭐가 있냔 말일세. 이건 현주께서 자네에게 보내신 서찰이야.”

“그래.”

뜻밖에도 서현이 순순히 인정했다. 그것이 의외였던지라 손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멈칫해 있는데, 서현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이 서찰을 어찌 하느냐도 내 소관이야. 그러나 자네가 서찰을 되돌려 받는 것은 반기지 않는 듯하니 다른 방식으로 처리하도록 하지.”

“처리···?”

그 뒤에도 뭐라 말을 하려고 했지만 할 수 없었다. 너울너울 춤추고 있던 작은 등잔불에 서현이 서찰을 가져다 댔기 때문이었다. !, 깜짝 놀란 손이 손을 뻗었지만, 이미 서찰은 새카맣게 타들어가 이제는 재가 되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게···.” 손이 바르르 주먹을 떨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서찰을 되돌려 받지 않은 사람은 자네야. 그래서 나는 내 방식대로 처리한 것뿐이네.”

“이 자식이!”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손이 서현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쿠당탕! 서현의 발에 채인 등자가 바닥을 뒹굴었다. 평소 같으면 칼같이 손을 떨쳐냈을 서현이 뜻밖에도 힘없이 끌려왔다. 이까지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던 손이, 서현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은 그 직후의 일이었다. 귀신처럼 일그러져 있던 손의 눈매가 점점 커지며, 그의 입술이 중얼거렸다. 희야, 너···.

허나 서현이 말한 것이 먼저였다.

“불쾌하네.”

“뭐?”

서현이 눈을 내리깔고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내뱉었다.

“그 어른의 손길에 닿은 서찰을 받아 든 것부터 나는 몹시 마음이 좋지 못해.”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자네야말로.” 내내 잔잔하던 서현의 목소리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자네야말로 무슨 생각인가? 자네가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리할 수는 없어.”

“실망이군.”

손이 중얼거리며 서현의 멱살을 놓아주었다. 거의 내팽개치듯이 놓아주는 힘에, 서현이 휘청거리다 등자에 주저앉았다. 답지 않게 허수아비마냥 휘청거리는 꼴을 보고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는 손을, 서현이 올려다보고 물었다. 실망이라고? 그래, 손이 대답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나. 자네도 더 이상 어리지 않아. 그러니 알만 하지 않은가? 당시에는 용납이 되지 않는 일도, 지금이라면···.”

“유감스럽지만, 그리는 안 되는군.”

“현주께서도 피해자일세!”

“아니.”

서현이 이를 갈며 고개를 내저었다. 뭐? 손이 멍청히 물었다. 듣지 못했다면 다시 말해줌세. 서현이 차게 얼어붙은 소리로 말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서현이 그리 넓지 않은 서실 안을 느릿한 걸음걸이로 거닐기 시작했다. 손은 어리벙벙한 눈으로 그 모습을 좇을 뿐이었다. 착각인가 했지만 역시 아니었다. 처음에는 유난히 좋지 못한 낯빛 때문인가 했으나···. 손은, 엄헌영은 눈을 몇 번이고 깜빡거렸다. 시시때때로 서현의 모습이 잿빛으로 보였다. 그 모습이 길고 짙게 드리워진 그림자에 대비되어 오히려 본체가 영자(影子)처럼 보일 정도였다.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있는 엄헌영의 귀에 서현의 말이 들려왔다. 흐릿한 잿빛 몸이 무색할 만치 또렷하고 싸늘한 목소리였다.

“그대는 그리 생각할지 모르나 나는 아니네. 그 어른, 그 이는 피해자가 아니야. 설사 이보다 더 시간이 지난다손 쳐도 내 생각은 바뀌지 않을 걸세.”

“모르는 소리 말게, 그 분께도,”

“모르는 소리를 하는 것은 자네 쪽이야.”

서현이 엄헌영의 말을 싹둑 잘랐다. 엄헌영이 움찔했다. 서현이 이토록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서현이 경혜현주를 원망하고 있도록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엄헌영은 불현듯 괴로운 기억을 떠올렸다. 그래. 달리 생각하면 서현이 이렇게 질색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자신들처럼 현주도 어렸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현주라는 지위를 가진 이가 짊어져야 할 무게가 있었다. 당시의 상황은 그녀를 한계로 몰고 갔다. 현주는 선택지 중 하나를 택했고, 그녀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상처 받았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안타깝지만 어찌할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등등의 생각을 하던 엄헌영이 불현듯 이를 악물었다. 어렸다? 어찌할 수 없었다? 모순이다. 서현에게는 감정을 뒤로 밀어놓고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을 만큼 시간이 지났다고 말하면서, 정작 자신은 그러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엄헌영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은 그 어른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보글. 힘주어 억누른 보람도 없이 마음의 기포가 하나 솟구쳐 올라 툭 터졌다.

“오히려 제안의.”

“아니.”

그 터진 기포에서 새어 나온 감정이 서현까지도 자극한 듯 했다. 서현의 태도가 눈에 띠게 냉랭해졌다. 서현이 서실문을 가리키며 명령했다.

“나가게.”

“희야, 너는 오해하고 있다. 그 때 일은 현주의 자의가 아니라 제안의,”

“나가라고 하지 않았나!”

서현이 결국 고함을 질렀다. 한 번 폭발한 감정이, 자제를 모르고 봇물이 터지듯 계속해서 쏟아졌다. 

“잘못 알고 있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도대체 누구 쪽인가! 오해? 오해라니? 쉽게 입 놀리지 말라! 그 이의 잘못을 누구에게 덮어씌우는 것인가!” 노여움에 서현이 파르르 치까지 떨며 소리쳤다. “연소하였다는 말로 모든 일이 용서 되는가? 입장상 어찌할 수 없었다는 말로 모든 것이 용서 받을 수 있느냔 말이다! 자네 말대로 모든 일이 매듭지어진 뒤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니지 않는가! 시간이 많이 흘렀다고? 표현이 틀렸네, 효강. 시간만 흘렀을 뿐이야. 해결된 것은 아무 것도 없어!”

엄헌영은 제대로 된 반박조차 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한 발 뒷걸음질만 쳤다. 서현의 말에 한 치의 틀림도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가 완전히 이성을 잃고 있다는 것이 한 눈에 보여서였다. 늘 침착하며 때로는 파르스름한 예기조차 감도는 듯하던 그의 얼굴이 노기로 달아오르고 눈빛이 살기도 비등할 정도의 독살스러운 빛을 띠고 번뜩거렸다. 머리끝까지 치솟아 오른 노기가, 결국 사달을 낸 모양이었다. 

“그 일만, 그 일만 아니었더라도 내가 지금···!”

뚝, 하고 말이 끊겼다. 

새파랗게 질린 채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있는 서현에게 놀란 엄헌영이 다가갔다.

“희?”

“돌아가.”

서현이 중얼거렸다.

“돌아가라, 효강.”

서현이 막무가내로 엄헌영을 서실 밖으로 밀어냈다. 쾅! 난폭하게 문을 닫은 탓에 우르르 장지문이 떨렸다. 이게 무슨, 방심하고 있던 차에 밖으로 내밀린 엄헌영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리다가 입을 닫았다.

“자넨.”

엄헌영의 얼굴에 경계심이 어렸다. 어느새 서실 앞에 와 있던 남자가 엄헌영을 향해 예를 갖췄다. 자신보다 약간 위쪽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엄헌영이 곧 입을 열었다.

“창혜각의···.”

“천견 최유라 합니다, 장군.”

“아아, 그래. 염락과 함께 있는 것을 몇 번.” 하고 말하던 엄헌영이 말을 멈추고 이맛살을 구겼다. 그러고 보니 조원에 대해서도 서현에게 추궁해야 할 것이 남았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 여러모로 난감했다. 조원에 대해 떠올리자 여러 가지 불쾌한 생각이 연쇄적으로 떠올라 엄헌영은 기분이 가라앉았다. 마냥 화가 나기보다는, 무겁고 질척거리는 것들이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찜찜한 기분. 그 기분을 어떻게든 떨쳐내기 위해 엄헌영이 남자에게 물었다. “희가 자네를 높이 평가하여 곁에 두고 있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지만, 이 시각에 여까지 웬일인가?”

“체제공 어르신께서 긴히 명하신 것이 있어 이리 찾아뵈었습니다.”

서현이 긴히 명했다는 부분에서 귀가 솔깃했던 것이 사실이었으나, 엄헌영은 묻지 않았다. 뒤에서 캐묻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았다. 제 아무리 사람 말을 귓등으로도 받아 처먹지 않는 위인이래도 뒤를 캐는 것보다는 이야기하다 속이 터져 죽는 한이 있어도 장본인에게 묻는 것이 나으리라. 그나저나. 엄헌영이 문득 짜증 섞인 한숨을 쉬었다. 자신도 모르게 탄식이 새어 나갔다.

“당최 무슨 일을 하는지.”

그렇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겨우 엄헌영은 자신이 하던 생각을 말로 내뱉어 버렸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이런. 혹여 최유가 자신의 혼잣말을 들었을까 염려가 되어 그의 표정을 살피던 엄헌영이 그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일부러 물음을 던졌다.

“염락과는.”

“예?”

“염락과는 친밀한 사이신가.”

충동적으로 그리 물어 놓고 엄헌영이 내심 혀를 찼다. 그런 것을 물어서 어쩌려고. 그 비슷한 생각을 최유도 했는지, 그는 엄헌영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지체 높은 엄헌영의 물음을 아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이윽고 최유가 대답했다. 

“감히 되묻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어떤 이를 말씀 하시는 것입니까?”

아니, 대답이라고 생각했지만 물음이었다. 어떤 이? 무슨 말인가 싶어 엄헌영이 골똘히 생각하다가 곧 이유를 알아차렸다. 조원과 최유는 같은 하늘손님이기는 하나, 조원과는 달리 최유는 여태 엄헌영과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그러니 최유는 우연히 맞닥뜨린 엄헌영이 대뜸 자신의 인간관계를 물을 거라는 생각은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거 큰 실례를 했군. 엄헌영이 생각하면서 말을 고쳤다.

“체제공께서는···.”

“주인 되시는 분의 사삿일을 감히 발설할 수 없음이니 부디,”

“되었네.” 엄헌영이 머리를 저으며 대꾸했다. 일면식도 없는 이의 인간관계를 캐묻는 무례한 인간보다는 옛 친구의 사사(私事)를 궁금해 하는 오지랖 넓은 이가 낫겠지 싶어 대충 던진 말이었으니 서운해 할 이유도 없다. 사실 최유의 대답이 옳기도 하고. 

문득 엄헌영은 한숨을 쉬었다. 자꾸만 예기치 못한 실수를 범하는 것을 보니 자신이 몹시 피로한 모양이었다. 하기는, 금일 벌어진 굵직한 사건만 대충 추려 보아도 충분히 그럴 만 했다. 

이만 돌아가는 것이 좋을까, 생각하면서도 엄헌영은 굳게 닫혀 있는 서실을 돌아보았다. 미색 문종이에 서현의 그림자가 아른아른하고 있다. 걱정으로 좀처럼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몹시 피로하기는 하지만 서현이, 염락 조원이 무슨 짓을 저지른 놈인지 미처 모르고 있을 가능성도 있는 만큼 그 건에 대해서는 다시 대화를 해보아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움직이려는 발목을 조금 전 보았던 서현의 낯이 계속해서 붙잡았다. 회칠을 한 것 같던 그 낯빛···.

그런 엄헌영의 태도를 오해했는지 최유가 조심스럽게 대답을 덧붙였다.

“자세한 사정까지, 낱낱이 아뢰는 것은 힘듭니다만, 장군께서 그리 염려하실 일은 아닐 것입니다.”

엄헌영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조원?하고 입으로만 묻자 최유가 예, 하고 대답했다.

“틀어졌는가?”

“사이가 틀어졌다고 표현하기에도 모호한 것이, 애초부터 체제공께서는 염락을 그리 뇌비치 않으셨습니다.”

“확실한가?”

엄헌영은 몇 번이고 확인했다. 최유가 짜증내는 기색도 없이 성실히 대답했다. 그 태도가 신뢰감을 준 건지 엄헌영의 표정이 눈에 뜨이게 누그러졌다. 하기는, 하고 엄헌영이 중얼거렸다.

“지나칠 정도로 염결주의(廉潔主義)라, 저러다 사람들에게 크게 밉보이는 것이 아닐까 염려한 적도 있었거늘···, 괜한 걱정을 했군.”

“댁으로 돌아가십니까.”

하고 묻는 말에 엄헌영이 고개만 끄덕였다. 승교를 부를까 여쭙는 최유에게 엄헌영은 손을 저었다. 저 이는 서현이 신뢰하여 가까이 두고 부리는 수하이지, 노복이 아닌 것이다. 대신 엄헌영은 최유에게 일렀다.

“까닭은 알 수 없으나 내 실언으로 체제공이 크게 마음이 상한 것 같으니, 말 한마디 한마디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을 것이네.”

“명심하겠습니다, 장군.”

“그럼.”

엄헌영이 대충 손만 저어 인사를 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별채 근처를 오가고 있던 노복이 그를 발견하고 다가와 뭔가 대화를 주고받았다. 엄헌영이 고개를 저으며 뭔가 말하자 노복이 어딘가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아마도 집안 사내들이 타고 다니는 승교를 대령할까 여쭙는 노복에게 엄헌영이 길거리의 교꾼이면 족하다 거절한 모양이었다. 거기까지 보고서 최유는 문고리를 서실문에 두어 번 두드렸다. 

‘누군가?’, 엄헌영의 조언이 사실이었는지 조금 날카로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체제공, 천견 최유입니다. 최유의 대답에 잠시 틈을 두고 허락이 떨어졌다. 들어오게.

“늦었군.”

서현이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최유가 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여 문을 닫으며 대답했다.

“송구합니다.”

“시킨 일은.”

최유가 서궤 위에 몇 뭉치의 권자(卷子)를 내려놓았다. ‘경왕부 왕세자 문위 진국과 흥평군왕부 군왕세자 문위 효를 제하면 조사를 명하신 모든 이들의 사인을 기록하여 두었습니다.’, 하는 최유의 말에 서현이 두루마리를 펼치며 물었다. 

“그들은 어찌하여?”

“어찌된 영문인지 그들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기가 힘들었습니다. 명일에는 반드시···.”

서현이 손을 들었다. 되었다는 표시였다.

“수고했다.”

“허나 체제공.”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최유는 서현의 말에 무심코 서궤 위에 쌓은 권자들을 쳐다보았다. 서현의 판단이 옳았다. 그가 알고자 하는 것은 경왕부 왕세자 문위 진국과 흥평군왕부 군왕세자 문위 효의 생애가 아니라 황주에 모셔져 있는 위패들 사이의 공통점이었다. 

잠시 서실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최유는 말없이 두루마리 안의 내용을 읽는 서현의 앞에 서서, 서현의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 침묵은 제법 길게 이어졌다···.

“진왕···.”

서현이 다시 입을 연 것은 그로부터 십 수 분이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자화 문위 현, 연호(年號) 태화 21년 7월 급서(急逝). 오왕 정연 문위 호, 연호 건원영강 35년 12월 사고사. 영수군왕 지언 문위 제하 연호 금석 40년 9월 급서. 인선장공주 천수 문위 승향 연호 건흥 7년 2월 사고사, 효명대장공주 인평 문위 계연 연호 명금 25년 6월 급서.” 

서현의 입에서 줄줄이 읊어지는 사인은 최유도 익히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바로 최유가 조사하여 서현에게 올린 두루마리에 적힌 것들. 서현의 말이 점점 느려진다 싶더니, 그가 다음 말을 마지막으로 입을 닫았다.

“의왕군왕 자하 문위 주 연호 영강 30년 10월 사고사.”

두루마리에 이름이 실린 황족 중 산 시대가 겹친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서현이 두루마리에 시선을 꽂은 채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 모든 이들 중 자연사(自然死)한 이는 단 한 명도 없다.”

서현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들은 최유는 무심결에 마른침을 삼켰다. 

“체제공께서는 이들이 타살(他殺)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신중한 태도였으나, 눈빛은 달랐다. 서현은 이미 두루마리에 이름이 실린 황족들이 타살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최유가 조심스럽게 반박하였다.

“신실 황주에 모셔져 있던 위패의 주인 대부분이 급사나 사고사 등 원인이 의심스러운 죽음을 맞은 것은 이상한 일이지만, 타살이라 확언할 물증이 모자랍니다. 무엇보다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이유라.”

동기 말이지. 서현이 최유가 볼 수 있도록 서궤 위에 두루마리를 편편히 폈다. 그 위의 어떤 지점을 서현이 손가락 끝으로 짚었다. 최유의 눈이 조금 커졌다. 태화 21년, 건원영강 35년, 금석 40년, 건흥 7년, 명금 25년, 영강 30년. 

“고인(故人)들이 절명한···.”

“본디 용님의 백성이 아닌지라 바로 깨닫지는 못하는군.” 서현이 설명을 덧붙였다. “태화, 건원영강, 금석, 건흥, 명금, 영강 모두 연호다. 그리고 연호 뒤의 년도를 보도록. 태화를 연호를 쓴 태황은 윤진제(倫進帝)로 제위 기간은 22년, 건원영강을 연호로 하신 태황은 아연제(浩然帝)로 제위 기간은 36년, 금석을 연호로 삼으신 대창(大昌)태황의 제위 기간은 40년, 명금을 연호로 삼으신 태화(太和)태황의 제위 기간은 26년, 마지막으로 영강을 연호로 하신 무태(武泰)태황의 제위 기간은 31년이다.”

그리고 인선장공주 문위 승향이 급서한 건흥 7년은 인평제(仁平帝)께서 훙서하신 해와도 일치한다. 서현의 설명에 최유의 표정은 저절로 굳을 수밖에 없었다. 두루마리에 실린 황족들이 급사한 시기가 한 황제의 제위가 끝나기 직전이나, 당시의 황제가 승하한 해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서현이 말을 이었다.

“나는 황주에 위패가 모셔진 이들 모두가 황제의 자질을 가진 이들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황위 다툼에서 밀려나 죽임을 당한 이들.

“일리가 있는 말씀이십니다.”

최유가 동의를 표했지만 서현은 썩 개운해 보이는 안색이 아니었다. ‘체제공, 어찌 그러십니까?’, 하며 최유가 그 이유를 묻자, 서현이 두루마리 끝을 조금 말았다가 폈다를 반복하며 마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용의 자질을 가졌지만 황좌에 앉지 못한 이들은 이들 외에도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새로운 황제가 옹립되어 하늘에 제를 올리면 용으로서의 자질을 잃고 새로운 삶을 살다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았다. 그들의 위패는 물론 다른 황족들처럼 대묘(大廟)에 모셔졌다. 그러나 어찌하여 이들의 위패만이 따로 신실에 모셔진 것이며,”

또.

“그 신실은 수상부 한편에 방치되어 있었던 것인가.”

더군다나, 다른 신실에 비해 격이 현저히 떨어져 방치되어 있었다고 치기에는 신실 자체에 걸린 술(術)은 보통 것이 아니었다. 

그 말을 마친 서현의 얼굴이 비 내리기 직전의 하늘처럼 어두워졌다. 그리고···, 하는 말이 나직하게 흘러 나왔지만 그 말 뒤는 굳게 다물린 서현의 입 안으로 사라졌다. 서현은 생각했다. 어찌하여 그는, 아버님께서는 갑자기, 그 신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셨던 것인가. 

“헌데 체제공···.”

상념에 잠긴 서현을 최유의 목소리가 깨웠다. 서현이 눈을 들자,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문간에서 엄장군을 뵈었습니다만···.”

“효강?” 꽤나 오랫동안 붙어 있었던 모양이군. 서현이 콧잔등이를 찌푸렸다. “그가 자네에게 무슨 말을 하던가.”

“특별한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다만.”

앞의 말만 듣고 효강 그 이 성정에 그렇지, 하고 생각하며 두루마리를 제 쪽으로 끌어당기고 있던 서현이 그 뒤에 붙은 말을 듣고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다만?”

“염락을 거론하시며 체제공을 염려하는 빛을 비추셨습니다.”

“염락···.” 하고 중얼거리며 서현은 생각에 잠겼다. 문득 유난히 피로해 보이던 엄헌영의 낯빛이 떠올랐다. “염락과는 제법 마음이 맞아 지내는 줄 알았건만, 크게 외틀어진 일이 생겼던가.”

알아볼까요. 최유가 묻자, 서현이 턱 끝을 조금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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