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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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송림을 벗어난 직후, 엄헌영이 땀으로 흥건한 이마를 훔치며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림에는 아무런 답을 해줄 수 없어서 서문경은 가쁜 숨만 몰아쉬었다. 금방이라도 뱃속에 있는 것을 왈각 게우며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라 엄헌영의 시선이 저절로 서문경의 뒤를 향했다. 마른 어깨가 거칠게 오르내리는 것이 안쓰러웠다. 

“저기.” 서문경이 거친 숨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며 손가락을 들었다. “저기 사람이.”

과연 그 손가락을 따라가자, 양거재의 궁인들이 두 사람을 발견하고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걔 중 하나가 엄헌영을 알아보았는지 기겁을 하고 외쳤다, ‘엄장군님?!’ 흉한 꼴을 보였다고 생각했는지 엄헌영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장군님! 이것이 대체 무슨···,”

목청색(木靑色) 관복을 입은 관리가 서문경과 엄헌영이 하고 있는 꼴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그가 궁인들을 돌아보고 어서 장군을 모셔라, 하고 명령했지만 엄헌영은 손을 내저어 사람들을 물리쳤다. 그러다가,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손은 아직 든 채로 서문경에게 물었다.

“어쩔 텐가.”

그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던 서문경은 곧, 엄헌영이 조원을 어떻게 할 것인지 묻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망설였다. 알려야 할까. 자신만이라면 모를까 태황태후의 질자인데다 고위 관리인 엄헌영이 얽혀 있으니 조원 정도는 충분히 손을 쓸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엄헌영은 이 일의 결정권을 자신에게 넘겨주고 있었다. 서문경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좀 더 생각해 볼 것이 있었다.

엄헌영이 그 말에 보일 듯 말 듯하게 턱 끝을 끄덕이고는, 사람들을 물렸다. 양거재의 관리와 궁인들이 의심쩍은 표정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차마 엄헌영의 명령을 못 들은 척 하지는 못해 제 자리로 돌아갔다.

사람들이 사라진 후 잠시 그 자리에 앉아서 숨을 고르던 엄헌영이 서문경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어떻게 된 거지?”

서문경의 얼굴이 흐려졌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모른다고?”

“갑자기 개가···, 강아지가 우는 소리가 들려서 가봤더니 저도 모르는 새에 정신을 잃어서.”

“개가 우는 소리에?”

엄헌영이 기가 막힌다는 듯 허, 하는 소리를 냈다. 서문경의 낯이 미미하게 붉어졌다. 그러나 부끄러운 것과는 별개로 당시의 일이 떠오르자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 강아지는 어떻게 걸까. 살아 있을까···.’

그 때 엄헌영이 심술궂게 건네는 말이 들려왔다.

“또 내게 빚을 졌군.”

“예?” 서문경의 눈이 순간적으로 커졌다가, 원래의 크기대로 돌아왔다. 서문경이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예, 정말로 고마웠습니다.”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하고 묻는 서문경을 엄헌영이 찌푸린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왜 그렇게 보느냐고 묻는 듯이 서문경의 미간이 미미하게 구겨졌다. 그러나 엄헌영은 서문경의 의문을 풀어주는 대신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저 놈은, 평소에는 까다롭기가 성 난 자위(刺蝟: 고슴도치) 못지않으면서 가끔 저렇게 허를 찌르곤 한다. 

왠지 껄끄러워져서 엄헌영은 화제를 돌렸다.

“무얼 하고 있었나?”

“예?”

“무얼 하다 그 소리를 들었냔 말이야.”

그 말에 서문경이 바로 대꾸하지 않고 눈을 내리깐 채로 침묵했다. 기억을 더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옆모습을 힐끗 곁눈질로 훔쳐보며 엄헌영이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청의관에 제안이 와 있다질 않았나.’ 그러다 엄헌영은 서문경이 불쑥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을 발견하고 물었다.

“뭐지?”

그렇게 물었다가, 엄헌영이 입을 다물고 이맛살을 구겼다. 슬쩍 올려다본 서문경의 얼굴이 너무나 창백했던 탓이다. 어디가 안 좋나, 하고 물으려는데 서문경이 홀린 듯한 시선으로 앞을 응시하며 말했다.

“가봐야.”

“뭐?”

“가봐야 합니다. 폐하께서 혼자 계세요.”

하고 알 수 없는 말을 내뱉고서 비틀거리는 다리로 뛰어가려는 서문경의 팔을 엄헌영이 황급히 붙잡았다.

“이봐! 이게 무슨,” 

“놓아주세요! 폐하께서 혼자 계실지도 모릅니다! 어서, 어서 가봐야.”

“멀쩡한 사내놈이 혼자 있는 것이 뭐가 어떻단 말이야?”

“저도 모릅니다!” 서문경이 신경질적으로 엄헌영의 손을 쳐냈다. “하지만 수상이, 수상이 결코 폐하를 혼자 두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엄헌영의 낯빛도 변했다.

“그가 그런 말을 했다고?”

“예. 그러니까 가 봐야 합니다.”

엄헌영이 생각이 잠긴 틈을 타, 정말로 서문경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뛰어가고 싶었지만 아직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곧바로 서문경이 다시 멈춰 섰다. 우뚝 그 자리에 선 채로 서문경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양거재. 사이에 둔 송림을 건너가면 바로 청의관으로 갈 수 있지만, 지금은 송림으로 들어갈 수 없다. 하지만 서문경은 그 외의 길을 알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서문경의 표정이 변했다.

“어···?”

넋 빠진 소리를 내며 서문경이 두 손바닥을 활짝 펼쳤다. 그 손바닥을 말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던 서문경은 다시 머리를 들어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러던 그의 시선이 찌푸린 시선으로 자신 쪽을 쳐다보고 있는 엄헌영에게로 가 멎었다. 서문경이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보여.”

“뭐?”

“보여요. ···언제부터였지?” 서문경은 기억을 더듬었다. 언제부터였더라? 엄헌영이 송림에 들어오기 전은 확실히 아니었다. 그 이후에도···. 기억을 더듬는 서문경에게 엄헌영이 물어왔다.

“그런데 그건 어떻게 된 거였지? 네 ‘힘’은 환상을 만드는 것이 고작이라고 들었는데.”

“아!”

그 말에 서문경은 겨우 깨달았다. 불! 머릿속에 선명한 영상이 떠올랐다. 조원의 당황한 고함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봤을 때 본, 그 불투명한 불바다. 그것이 서면경이 기억하는 ‘처음’이었다. 분명하다 그 때부터 다시 눈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어째서지? 그 이유를 도통 알 수 없었다.

서문경이 자신의 물음에 대답하지는 않고 이유도 모를 짓만 하고 있자 언짢아진 엄헌영이 미간을 구기며 서문경을 불렀다, ‘어이.’ 그 소리에 서문경이 얼떨떨한 얼굴을 그에게로 돌렸다가 곧바로 물었다. 

“여기서 송림을 통하지 않고 청의관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답부터.”

“그건 저도 모릅니다.”

하고 대답한 뒤 재차 청의관으로 가는 길을 묻는 서문경은 조금 전 송림에서 일어난 기이한 사건에 대한 생각을 할 여유가 조금도 없어 보였다. 그런 서문경을 찌푸린 눈으로 응시하던 엄헌영은 결국 서문경에게 방금 전의 일을 캐묻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자신처럼 서문경도 그 일이 일어난 영문을 모르는 것은 물론, 지금 서문경의 머리통 안에는 청의관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꽉 들어차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엄헌영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나도 가지.”

서문경의 눈이 커졌다. 엄헌영이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납치당할 뻔 했다는 사실을 벌써 잊어버렸나. 그런 사람이 혼자서 가겠다고?”

“그건···, 그렇지만.”

“가지.”

턱짓을 한 번 하고 앞장을 서며 엄헌영이 앞장을 섰다. 서문경이 쭈뼛거리며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여전히 그에게서는 떨떠름해하는 기색이 묻어났다. 그것이 괜히 짜증이 나서 엄헌영이 덧붙였다, ‘어차피 나도 그 근처에 볼일이 있으니.’

“볼 일이요?”

“알 것 없네.”

지금은 아니지만 송림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정말로 볼 일이 있었고. 그렇게 생각하며 걸어가던 엄헌영이 다음 순간 아차하며 잠시 걸음을 멈췄다.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엄헌영이 손끝을 꿈틀하더니 마구 옷소매를 뒤졌다. 그리고 빌어먹을, 하고 입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없다.

경혜현주가 서현에게 전해 달라고 신신당부했던 서찰이 없어졌다. 엄헌영은 속으로 탄식했다. 아무래도 송림에서 도망치던 중에 흘린 모양이었다. 설마 불에 탄 것은 아니겠지···. 젠장, 하고 이를 갈며 엄헌영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까 한 말은 아무렇게나 대충 둘러댄 말이었는데 정말로 청의관 근처에 가봐야 하는 일이 생길 줄이야. 

엄헌영이 그 자리에 우뚝 못 박힌 듯 서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이상했던지 서문경이 물어왔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야.”

하고 대답하며 엄헌영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방금 전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였다. 

**

창가에 팔꿈치를 괴고 앉아 있던 황제가 이변을 눈치 챈 것은 막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을 때였다. 며칠간 내리던 고우가 무색하도록 유난히 따사롭게 내리쬐던 햇볕이 삽시에 사라지고 사방이 어둑해졌다. 잠시 구름이 지나가는 모양이었다. 황제의 눈썹이 꿈틀했다. 햇빛이 사라진 탓이 아니었다. 데운 타락 자기를 가지고 돌아왔을 때부터 보이지 않던 서문경이 계속해서 모습을 나타내고 있지 않은 탓이었다. 이 녀석은 당최 어디에 처박혀 있기에 머리털 한 터럭도 보이지를 않아. 괜히 속이 답답해진 황제가 막 서문경을 찾으려 몸을 일으키려던 참이었다.

“···이더냐?”

밖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와서 황제가 멈칫했다.

“예에.”

“똑똑히 보았겠지?”

“예, 데운 타락을 몇 모금이나 들이키셨사옵니다.”

황제가 찌푸린 눈으로 반쯤 빈 타락 자기를 내려다보았다. 언제나처럼 타락에 약이 들어 있다는 사실은 타락이 혀끝에 닿자마자 알고 있었지만, 너구리처럼 나이가 든 청의관 궁관이 저리 부산을 떨며 확인하는 꼴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요놈에게는 평소와는 다른 목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빼꼼 머리를 내밀고 확인하는 움직임이 느껴지기에 미동도 없이 있어 주었다. 되었습니다, 하는 속삭임이 들려온다.

스르륵, 문이 닫혔다. 황제는 이맛살을 구겼다. 무슨 짓을 할 심산인지, 도통 짐작할 수가 없었다. 아니, 바깥 소리에 귀를 세우고 골똘히 생각해 보면 어쩌면 능히 추론해 낼 수는 있을 터였다. 그러나, 황제의 시선이 장지문과 달리 아직 열려 있는 반월창으로 향했다. 그림 족자 같은 바깥 풍경에는 아직도 서문경의 모습이 비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황제는 결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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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무장군 강환과 강환의 후실(後室)인 염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강재희는 올해 열넷 먹은 사내아이였다. 열넷이면 벌써 목소리가 굵어지고 턱에 나룻(: 수염)이 돋아날만한 나이였지만 강재희의 목소리는 여전히 황조처럼 높았고 갸름한 턱과 가느다란 팔다리는 미끈했다. 모르는 이들은 십중팔구 강재희를 어린 계집아이로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어여쁜 생김새와 버드나무처럼 매끈한 몸 때문만은 아니었다. 강재희가 하고 있는 복색이 사내아이라고 하기에 어딘가 미묘한 복색이었기 때문이었다. 옷고름이나 매듭단추, 옷의 모양 등은 분명한 사내아이의 옷이었지만 그 색색이 어찌나 화사하고 거기에 놓인 수는 어찌나 화려했는지, 멀리서 보면 강희재는 영락없이 오색 깃털로 단장한 애기앵무나 잘 익은 버찌처럼 보이곤 했다. 아비인 강환은 그것을 은근히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혹어후처(惑於後妻)하는 강환은 혹여 자신의 말에 꽃 같은 염씨 부인의 마음이 상할까 그 불만을 토로하지 못했다. 강재희에게 저 화사한 빛깔의 옷을 손수 해다 입힌 사람이 다름 아닌 염씨 부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염씨 부인은 사실, 강환의 전처인 사씨 부인이 안채를 차지하고 있던 시절 강환이 들인 첩이었다. 몸이 약하던 사씨 부인이 절명한 후에 정실이 되어 안채로 들어왔지만 그녀는 소실적의 기억 때문인지 여전히 뱃속 깊은 곳에 열등감을 품고 있었다. 사씨 부인이라는 표적을 잃은 그녀의 열등감은 사씨 부인이 남긴 소생들을 향했다. 

염씨 부인이 낳은 강재희 외에도, 중무장군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더 있었다. 강환의 장남인 강화와 차남인 강윤은 성광 강씨 집안의 남진들이 대부분 그렇듯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 무변이었다. 아픈 어미를 찬 안방에 홀로 내버려두고 어린 첩과 노닥거리던 아버지에 일찍부터 실망한 강화와 강윤 형제는 벼슬길에 나아간 후로 바로 독립하여 본가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사랑하는 첩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계자에 푹 빠진 강환도 본처에게서 본 아들들에게 관심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염씨 부인은 달랐다. 염씨 부인은, 자신에게 일말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 강화와 강윤 형제를 사사건건 의식하며 행동했다. 물론 염씨 부인의 이상 행동에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염씨 부인 소생의 아들인 강재희였다.

처음에는 염씨 부인도 강재희를 훌륭한 장수로 키워 강화 강윤 형제의 콧대를 꺾어 놓으려 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염씨 부인은 곧 인정해야만 했다. 강재희는 유서 깊은 무가에서 태어난 것이 이상할 정도로 무재(武才)가 미천했다. 아니, 아예 없다시피 하다는 것이 맞는 표현이었다. 염씨 부인은 몹시 실망했다. 그러나 실망하는 것도 잠시, 염씨 부인은 생각을 달리 하기로 했다. 강화 강윤 형제의 무재 이상의 재능이 강재희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웬만한 가인들도 부끄러워 감히 그 옆에 설 생각을 할 수 없을 만치 아름다운 용모였다.

현재 세간에서는 아름다운 용모로 유명한 규중처녀들을 암암리에 설중사우(雪中四友)라 부르며 칭송하였는데, 그 이들이 바로 옥매(玉梅) 교운, 수선(水仙) 유송연, 동백 백노하, 그리고 납매(臘梅) 강재희였다. 그 중 가장 특이한 이가 바로 납매였는데, 다른 사우와는 달리 강재희는 어린 사내아이였기 때문이었다. 이를 지적하여 혹자는 납매를 강재희가 아니라 다른 미녀로 대체하여야 한다 주장하였으나 이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모두가 쉬쉬하기는 했으나 설중사우 중에서도 제일가는 미인이 강재희라는 사실은 다른 사우들조차 자존심이 상하여 알면서도 모른 척 하는, 공공연한 비밀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보통의 어미들이라면 자신의 아들이 성별도 다른 미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이름이 오르내린다는 사실에 다소간 당황할 것이었으나 염씨 부인은 달랐다. 강재희가 다른 이들의 눈에도 그토록 아름답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염씨 부인은 결심하였다. 이 정도로 특출한 미모라면 야만스러운 이민족들을 상대하며 부상을 당하기 일쑤인 장수 나부랭이가 되지 않아도 호화롭고 풍족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염씨 자신은 고작 중무장군의 처가 되는데에 그쳤지만 강재희라면 그보다 높은, 어쩌면 저 구름 위의 세계에까지 손이 닿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예에서는 예로부터 국민들에게 일부일처를 권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법률로 정해진 사항은 아니었다. 때문에 세력이 있는 남자들은 몇 명이나 첩을 두었고, 그것은 높은 감투를 쓴 여인네들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국모인 황후의 성별에 제한을 두지 않는 전통 때문인지 아랫물인 귀족 사회에서도 처(妻)나 첩(妾)의 성별 또한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물론 처첩으로 여인을 들였지만 아름다운 소년이나 청년이 처첩의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염씨 부인은 그것을 노리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강재희가 자신처럼 시시한 자리에 만족하게 두지는 않을 셈이었다. 그 고상한 수선조차 뒷방으로 밀어놓는 강재희의 미모로 따지면 그에 어울리는 배우자는 적어도 황족···, 아니면 그에 버금가는 세도가의 자제여야 한다.

하지만 그녀의 욕심과는 달리 일이 그리 쉽사리 풀릴 리는 없었다. 목에 힘을 주고 다닐 수 있을 만큼 급이 있는 황족이나 그에 준하는 명문 세도가의 자제들이라면 그 배우자 또한 한 끗발 날릴만한 명벌의 규수인 것이 세상의 이치, 그러므로 등에 태산을 업고 있는 본처의 눈총을 감수하고 어린 사내애를 첩으로 들일만한 담대한(다른 말로 무모한) 사내는 그리 흔치 않았다. 덕분에, 강재희의 아름다운 얼굴과 낭창한 몸태만을 믿고 겉모습만 갈고 닦아 온 염씨 부인은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졌다. 어찌할꼬. 벌써 강재희의 나이가 열넷. 이리 보면 소년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소녀 같기도 한 강재희의 오묘한 매력은 현재 정점을 찍고 있었지만, 이는 시간이 지나면 거품처럼 스러질 지도 모르는 아슬아슬한 매력에 불과했다.

그런 와중에 운현궁에서 내려온 청은 그녀에게 있어서는 구명줄이나 다름이 없었다.

“잘 해야 한다.”

그의 어미는, 어리둥절한 표정의 그를 붙잡고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했다. 잘 해내야 해.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어린 강재희는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평소보다 더 많은 장식을 단 머리가 너무 무거워서 자꾸만 머리가 기울어지는 것이 고민이었다. 두 겹이나 더 껴입은 비단옷도 너무 길고 무거웠다. 비단옷 색이 너무 요란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거기에 금실은실로 꽃더미를 수놓은 것도 조금 부끄러웠다. 형님들께서 이런 옷을 입고 이런 나비장식을 다는 것은 한 번도 못 보았는데 어째서 나만. 저절로 볼이 퉁퉁 부었다. 

퉁퉁 부은 강재희의 볼을 염씨 부인의 고운 손이 차례로 감싸 안았다. 마지막까지 염씨 부인은 똑같은 말만 반복했다, ‘잘 해야 한다, 아가.’ 그리고서 그녀가 강재희의 귀에 대고 속살거렸다. 어찌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지? 물론 알고 있었다. 듣는 강재희의 귀가 아플 만큼 하셨던 말씀이 아닌가.

강재희는 미리 준비되어 있던 가마에 탔다. 어른 여자 하나가 겨우 탈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크기에 사방이 벽으로 막혀 있고 벽이며 둥근 뚜껑 전체가 까맣게 칠해진 기분 나쁜 가마였다. 창문조차 나있지 않아서 그 안에 들어가자마자 숨이 턱 막혔다. 강재희는 몸을 한껏 웅크렸다. 어머니가 밖에서 하염없이 손을 흔들고 있을 것이 뻔했다. 아가, 잘 해야 한다, 하시면서. 강재희는 숨을 몰아쉬었다. 못할 것도 없었다. 무슨 행위인지 뜻조차 모를 행동이지만 그것만 잘 해 내면 어머니의 콧대가 높아진다니 자식 된 도리로 못 해줄 것도 없었다. 잘 해야지···, 하고 재차 생각하던 중에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도착했습니다.”

하며 가마 문을 여는 소리가 화들짝 놀라 강재희는 잠에서 깼다. 

처음 보는 어른 여자가 자신을 말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었다. 소매 끝에만 꽃수를 놓은 주의를 입고 머리에는 아얌을 쓴 여자였다. 핥듯이 쳐다보는 눈길에 강재희가 어깨를 움츠렸지만 여자는 개의치 않았다. 그 눈길이 몹시도 노골적이었다. 그러기를 한참, 여자가 몸을 약간 뒤로 물리며 강재희가 나올 수 있도록 길을 터주었다. 강재희가 살금살금 기어 나오는데 아까의 그 여자가 강재희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여인과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절색이로고.”

“저 정도 용모면 황상께서도 크게 반겨하실 것입니다.”

“그렇지. 처음에야 꺼려하실지 몰라도 저리 어여쁜 아이가 꾀는데 어찌 당하실까. 사내라는 것들이 다 똑같잖은가.”

하는 둥의 말을 두런두런 나누던 여인들이, 강재희가 가마 밖으로 나온 것을 보고 손짓을 했다. 홀연히 눈앞에 나타난 커다란 기와집의 자태에 두 눈이 휘둥그레져 있던 강재희가 급히 여인의 뒤를 따랐다. 기와집 안으로 신을 벗고 들어가자 그를 안내하는 여인과 비슷한 차림의 여인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긴 마루복도를 걷는 내내 여인들이 강재희를 힐끗거리며 그리 말소리를 낮추지도 않은 말을 소곤거렸다. 그네들이 소곤대는 말들이 하나같이 귀가 홧홧해질 만치 얄궂기 짝이 없었다.

여인이 어떤 방 안에서 멈추어 섰다. ‘오시었습니까.’, 장지문 양 끝에서 문을 지키고 앉아 있던 소녀들이 여인의 발치에 공손히 절을 하며 여인을 맞았다. ‘어찌 되었는가?’, 하며 여인이 묻자 소녀 하나가 아뢰었다.

“깊이 잠들어 계시옵니다.”

“그 분께서 좋은 약을 주시었구나.” 하고 턱 끝을 주억거린 여인이 강재희에게 힐끗 눈치를 주었다. 그 눈짓이 뜻하는 바를 알아챈 소녀들이 재빨리 움직였다. 한 소녀가 닫혀 있던 장지문을 살그머니 열고, 사뿐히 일어선 또 다른 소녀가 머뭇머뭇하고 있는 강재희의 등을 살며시 밀었다. 

놀란 눈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어린 소년에게, 여인이 눈매를 가늘게 접고 웃으며 당부하였다.

“잘 해 내셔야 합니다.”

그 뒤로 한 소녀가 꺄르르 짓궂게 웃으며 덧붙였다, ‘마침 날도 저물었으니, 달큼한 시간 보내시길 기원하나이다.’ 머리도 다 자라지도 않은 것이 못하는 말도 없다. 열렸던 문이 다시 사르르 닫히며 여인이 웃음기 어린 소리로 소녀를 타박하는 것이 들려왔다.

어리둥절한 상태로 강재희는 방 안에 서 있었다. 처음에는 넓은 방 안에 자신 홀로 있는 것인가 했지만 아니었다. 강재희가 그것을 깨달은 것은, 활짝 열려 있는 반월창 너머에서 문득 찬바람이 불어온 탓이었다. 

“···!”

창 쪽으로 무심코 시선을 돌렸던 강재희는 곧, 비교적 나지막한 창틀 아랫목에 사람이 하나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째서 바로 발견하지 못했는지 의아할 만치 위로 길쭉한 남자였다. 

어쩌면 형님들이나 아버님보다도 더 키가 클지도 모르겠다···, 제 아버지 강환이나 나이든 노복 외의 사내들과는 접해본 기억이 드문 강재희가 호기심을 느끼고 살금살금 사내를 향해 다가갔다. 이상하다. 이윽고 가까이에서 사내의 얼굴을 들여다 본 강재희가 생각했다. 이상하리만치 존재감이 흐릿한 것도 그렇고 지나치리만큼 아름다운 용모도 그렇고, 여러모로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 이였다. 강재희는 불현듯 어머니 염씨 부인이 지난달 선물해 주었던 자기 인형을 떠올렸다.

참으로 그 자기 인형과 닮았다···.

그렇게 한참을, 넋을 놓고 남자의 얼굴만 들여다보던 강재희는 바깥에서 들리는 헛기침 소리에 놀라 제정신을 차렸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손을 꼬옥 붙잡고 어머니 염씨 부인이 했었던 당부가 떠올랐다. 그래,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강재희는 멈춰 있던 발을 움직여, 바닥에 반듯한 자세로 누워 있는 남자의 배에 살그머니 올라탔다. 그의 작은 머리통 안에는 어머니가 알려주었던 행동이 차례대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 다음에는···.

소년의 자그마한 손이, 남자의 옷깃을 끌어당겼다.

**

서문경은 숨 돌릴 틈도 없이 달렸다. 그보다 앞서 달리고 있는 엄헌영은 그 넓은 황궐 안을 제 손바닥처럼 들여다보고 있는 모양인지 단 한 순간도 멈칫거리지 않았다. 서문경은 그를 따라 달리면서 손등으로 턱에 맺혀 있는 땀을 훔쳤다. 거친 숨소리가 귓전에 들러붙고 가슴이 쉴 새 없이 오르내렸다. 한계 이상으로 달린 바람에 배까지 찢어질 듯이 아팠다. 그러나 서문경은 멈출 수가 없었다. 오히려 더 빨리 달리지 못하는 것이 불만이었다. 거기에 시계가 있을 리가 없는데도 그는 습관적으로 제 손목을 들여다보았다. 몇 시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지? 발이 저절로 동동 굴려졌다. 한 시가 급했다.

“아직,” 서문경이 말을 걸다가 울컥 치밀고 올라오는 숨소리에 밀려 헉헉거렸다. 거친 숨소리가 섞여 잘 알아듣기도 힘든 질문이 던져졌다. “아, 직 많이 가야 합니까?”

그런 서문경을 힐끗 눈만 돌려 바라보고는, 엄헌영이 대꾸했다. 

“힘든가?”

“그것보다는, 급해서.”

엄헌영이 이마를 찡그렸다.

“곧이야. 홍원문에서 얼마 멀지 않으니.”

그 말에 서문경이 잠시 걸음을 늦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까지는 마음이 급해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어느새 눈에 익은 풍경이 나타나고 있었다.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는 붉은 대문을 발견한 서문경의 걸음이 다시 빨라졌다. 방금 전까지 쓰러질 것처럼 골골대고 있던 놈이 갑자기 자신을 추월해서 달려가 버리자 엄헌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문경의 옆으로 따라붙으며 엄헌영이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이렇게 서두를 필요가 있는 일인가?”

“저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서문경이 점점 힘이 빠지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면서 대꾸했다. 그 덕에 마치 이를 갈면서 대답하는 것 같은 소리가 나왔다. 이래서야 영락없이 시비 거는 것처럼 들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서문경이 대답을 덧붙였다. “모르니까 더 서두르는 겁니다.”

그 말에 납득을 해서인지, 아니면 반대로 납득이 되지 않아서인지 모르겠지만 엄헌영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물론 서문경은 개의치 않았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만이 가득 차 있었다. 폐하에게 가야 돼, 최대한 빨리.

그렇게 달리기를 몇 분, 청의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문경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가, 다시 흐려졌다. 멈칫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서문경을 본 엄헌영이 서문경의 어깨를 밀면서 재촉했다.

“뒷문으로 통하는 길이다.”

“아···.” 

서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익숙지 못한 광경에 당황한 나머지 깨닫지 못했지만, 엄헌영의 말 그대로였다. 하지만 창문을 열어 놓았으니, 송림을 가로질러 왔었다면 긴 복도나 몇 개나 되는 문을 거치지 않고 바로 호박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 아쉬웠다. 사정이 사정이니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서문경이 급히 뒷문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송림 편과 청의관을 고민하듯 번갈아 바라보던 엄헌영이 따라 들어갔지만 완전히 신경이 딴 곳에 쏠린 서문경은 그조차도 깨닫지 못했다. 어마나! 쿵쾅거리는 서문경의 발소리에 장대석 위를 비질하고 있던 궁인이 화들짝 놀라며 비명을 내질렀다. 

“물손님! 물손님, 아니 되어요!” 서문경이 들은 척도 하지 않자 궁인이 형파까지 내던지고 그의 뒤를 따라왔다. “들어가시면 아니 됩니다!”

“어머나!”

갑작스런 소란에 누마루 위에 있던 궁인들이 펄쩍 뛰어올랐다. 그러더니 그네들이 하나같이 서문경을 막으려 뛰어들거나, 보랑(步廊)을 막아선다. 뒤로도 아래로도 사람벽에 가로막힌 서문경이 주춤 멈춰 섰다가 곧 사납게 외쳤다.

“뭐하는 짓들입니까!”

“지금은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내 방에 왜 내가 못 들어간다는 겁니까?!”

서문경이 화를 냈지만 궁인들은 요지부동이었다. 걔 중 직급이 높아 보이는 여인이 앞장서서 서문경을 밀어냈다. 그녀가 말했다.

“호박방은 객께서 잠시 머물러 계시는 곳이지 손님 소유의 방이 아닙니다. 지금은 사정이 있어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두어 시진 쯤 나가 계셔요.”

“비키십시오.”

“안 됩니다.”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비키세요.”

서문경의 위협에도 여인이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머리를 젓더니, 척하니 두 팔까지 벌리고 버텨 섰다. 서문경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평소 같으면 객의 도를 논하는 궁인들의 태도에 내심 움츠려들었을 테지만 지금을 달랐다. 서문경의 얼굴에 차가운 기운이 슥 스쳐 지나갔다. 

“그 눈치로 험한 궁 안에서 어떻게 버티고 있는 건가 황당할 지경이군.”

그 때, 사람의 발소리가 뒤에서 들려온다 싶더니 엄헌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 나리!’, 서문경의 뒤를 막아서고 있던 궁인이 비명을 삼키며 비켜섰다. 엄헌영이 서문경의 앞을 막아선 궁인을 똑바로 쳐다보고 명령했다.

“비켜라.”

“하, 하지만 장군···!”

“죽기 싫으면 비켜.”

그 기세에 눌린 궁인이 자신도 모르게 주춤했다. 그 틈을 타 서문경이 궁인들 사이를 뚫고 나갔다. ‘앗!’, 허를 찔린 궁인들이 뒤를 돌아보며 비명을 질렀다.

서문경의 뒤를 따르며 엄헌영이 이맛살을 구겼다. 차마 대놓고 원망하지는 못했지만 힐끗힐끗 훔쳐보며 탓하는 눈초리가 느껴졌다. 멍청한 것들. 엄헌영이 속으로 혀를 찼다. 자신이 막 좇아온 그 순간에 서문경의 얼굴에 스쳐 지나갔던 표정은 섬뜩할 정도였다. 자신이 때를 맞춰 끼어들었기에 망정이지, 저 놈이 무슨 사달을 낼 줄 알고. 

한편 서문경은 거의 뛰듯이 누마루 아래로 내려왔다. 한 쪽으로 돌출된 누마루 아래로 내려오니 또다시 긴 보랑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나타난 복도는 서문경의 눈에도 익숙한 것이었다. 몸에 밴대로 쭉 뻗은 보랑 끝까지 달려가 왼편으로 방향을 꺾었다. 청의관 곳곳에 있던 궁인들이 하나같이 서문경을 보고 놀라 몸을 굳히거나, 짧은 비명을 지르거나 혹은 숨을 삼켰다. 절대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을 보는 시선에 서문경의 얼굴이 점점 더 굳어졌다. 궁인들이 서문경을 막아섰지만 누마루에서처럼 겹겹으로 에워싸지 않은 한 가녀린 여인들이 다 큰 사내를 저지하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결국에는 내관들까지 동원되었지만 그들조차도 화가 난 서문경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서문경이 호박방 앞까지 다다랐다.

“안 됩니다!”

사분합문 앞을 대전 대령상궁 연재 화연이 결연한 태도로 막아섰다. 이제는 비키라는 말조차 하지 않고 서문경이 문 앞으로 다가갔다. 연재 화연이 힘껏 서문경의 가슴을 밀쳤다. 그러나 서문경은 도리어 그녀의 손목을 잡아 그녀를 바닥에 내팽개쳐 버리고는 그대로 장지문을 열어 젖혔다. 

“···!”

서문경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방 안에 펼쳐진 풍경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거의 반 벌거숭이나 나름 없는 상태의 황제 위에 사내인지 계집인지도 모를 이가 올라타 입술로 맨가슴을 더듬고 있었다. 아래쪽의 상황은 더더욱 볼만했다. 낯모르는 이의 손이 대담하게도 황제의 다리 사이에 기어 들어가 있는 꼴을 보고 서문경이 코웃음을 쳤다.

“손님···.” 누군가가 서문경의 옷자락을 조심스럽게 잡아끌었다. “황상께서 미인과 정을 나누시려는 참이오니 경을 치시기 전에 이만 물러나시지요.”

“정을 나눠?”

서문경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더니, 방 안으로 척척 걸어 들어갔다. 뒤에서 손님!하고 황급히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방 안으로 들어간 서문경이 곧 황제와 낯모르는 이가 뒤엉켜 있는 자리까지 다다랐다. 그들의 바로 코앞에 멈춰 선 서문경은 물끄러미, 황제의 위에 올라타 있는 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픽, 서문경이 웃었다.

“정을 나누기는커녕, 그냥 범죄구만.”

하고 말한 서문경이 소년의 뒷덜미를 힘껏 잡아 올렸다. 생긴 것처럼 몸도 아직 어린 소년이 쑥하고 끌려왔다. 기겁한 연재 화연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와 서문경의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그녀가 성을 냈다.

“손님, 이것이 무슨 행패십니까!”

“이게 뭡니까.” 

서문경이 연재 화연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오히려 물었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 태연한 서문경의 태도에 연재 화연이 자신도 모르게 멈칫했다. 울거나 화를 내야 알맞은 상황에 저처럼 평온한 태도를 보이자 도리어 무서웠다. 서문경이 턱짓으로 황제를 가리켰다. 설마 알아챈 것인가, 싶어 연재 화연의 표정이 설핏 굳었다. 

“무, 무엇이 말입니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서문경이 소년의 뒷덜미를 놓고 대신 황제의 옆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들키는 것도 금방이다 싶어 연재 화연이 변명했다.

“곤권하셨던 모양입니다.”

“사람 억지로 재워 놓고 잘들 하는 짓들입니다.”

“억지로라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이 양반이 얼마나 예민하고 까다로운 양반인데, 이런 상황에 자의로 잠이나 처자빠져 잘  것 같습니까?” 하고 쏘아붙인 서문경은 주위를 단 한 번 둘러보고 바로 창가에 올려져 있는 자기 그릇을 발견했다. 그 안에 든 것을 힐끔 들여다보고 서문경이 중얼거렸다, ‘우유라. 이거군.’

서문경의 시선이 영문을 모르고 있는 소년에게로 옮겨갔다. 서문경이 물었다.

“몇 살입니까.”

“손님, 이 분은···!”

탁! 서문경이 소년을 낚아채가려는 연재 화연의 손등을 매몰차게 쳐냈다. ‘지금 말하고 있잖습니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냉담하게 말하는 투에 연재 화연이 자신도 모르게 움츠려들었다. 서문경이 다시 물었다, 몇 살입니까. 서문경을 휘둥그레 뜬 눈으로 쳐다보고 있던 소년이 얼결에 대답했다.

“여, 열 넷.”

“열넷. 시발, 내가 학교 앞에서 죽치고 앉아서 맥주 사탕이나 빨고 있었던 때에. 아무튼, 지금 당신이 뭐하고 있었는지는 압니까?”

서문경의 물음에 소년이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교합(交合)하는 거예요.’ 그 말에 서문경이 미간을 팍 찌푸려지자, 소년은 더 설명을 자세하게 해야겠다 싶었는지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면, 끝까지 잘 하면 다들 만족할 거라고.”

“다들?”

소년이 잠시 대답을 망설이다가 조용히 덧붙였다, ‘어머니나···.’ 

“어머니? ···그럼 당신은요?”

“잘 해 내면 저도, 행복해 질 거라고 어머니가.”

“그럼, 이 사람은요?”

하고 말하면서 서문경이 황제를 턱짓했다. 그 건방지다 못해 난폭하기까지 한 태도에 궁인들이 하나같이 헉하며 숨을 삼켰다. 그러나 소년은 다른 사람들이 왜 놀라는지 알 수가 없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서문경이 가리키는 대로 새삼 황제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서문경이 말했다, ‘이 사람 정신 못 차리고 있는 것 안 보입니까?’ 소년이 설레설레 고개를 젓자 서문경의 잔소리가 다다다다 이어졌다. 봤다고요? 그럼 이 사람 동의 따위는 받지도 않았다는 말이 되는데, 이 사태를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잠시 생각하다가 소년이 대답했다.

“하지만 다들···, 좋아하실 거라고 했어요.”

“좋아할 거라고요?”

“네···.” 소년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 들어갔다. 그러면서도 소년은 대답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어머니도, 저 분들께서도 모두···, 저를 저어하실 사내는 없을 것이라고.”

서문경의 얼굴이 더더욱 구겨졌다. 금방이라도 가시 돋친 말이 소년이고 궁인들이고 가리지 않고 내쏘아져 갈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뜻밖에서 서문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년도 서문경의 안색만 살피며 입을 닫았다. 그 덕에 호박방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기를 한참. 갑자기 서문경이 황제의 머리 옆에 털썩 주저앉더니 황제의 몸을 끌어다 자신의 무릎에 눕혔다. 안 그래도 칠칠맞은 인간을 이 꼴을 만들어 놓고, 서문경이 투덜거리며 목깃이 다 벌려진 황제의 옷을 제대로 정돈해서 입힌 다음 소년에게 말했다, ‘들으세요.’

“이건 아직 제 겁니다.”

소년을 포함해, 돌아가는 상황을 살피고 있던 사람들의 눈이 커다래졌다. 서문경이 다시 한 번 힘을 주어 선언했다.

“아직 거절하지 않았으니 아직은 제 겁니다. 그러니 눈독 들이지 마십시오.” 

그리고서 서문경이 작은 한숨을 푹 내쉬며 황제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남은 팔을 휘휘 저으며 나가라는 시늉을 했다. 

“피곤하니까 나가 보십시오.”

“허, 허나.”

“쉬고 싶습니다.” 

하고 한숨을 삼키며 말한 서문경이 문득 머리를 들어 문 밖을 내다보았다. 연재 화연이 따라서 뒤를 돌아보았다가 그대로 굳었다. 호박방 바깥에 있던 궁인들은 이미 엄헌영을 발견하고 잔뜩 움츠려들어 있는 중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엄헌영의 무뚝뚝한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서문경이 연재 화연을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어조로 말을 건넸다.

“···도 쉬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그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 대충 얼버무리고 묻자, 엄헌영이 대답 대신 이맛살만 구겼다. 왜 저런 표정인가 싶어 덩달아 이마를 구겼던 서문경은 문득 엄헌영이 이 근처에 볼 일이 있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해냈다.

“이 근처에 볼일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엄헌영이 그렇게 대답하고는, 입 속으로 덧붙였다. 아직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 서문경이 물었다.

“제가 어떻게 도와드릴 일이 없을까요.”

“···되었네.”

엄헌영은 한숨을 삼키며 대답했다. 그런 엄헌영을 말없이 쳐다보고만 있던 서문경이 다시 감사 인사를 해왔다.

“오늘 일은 정말 고마웠습니다.”

대답 없이 엄헌영은 손을 저으며 돌아섰다. 걱정이 가시지 않아 일단 뒤따라오기는 했지만 무사한 꼴을 보니 여기에 더 있을 필요가 없겠다 싶었다. 염락 또한 그 꼴을 당했으니 당분간은 꼼짝도 못할 테지. 그래서 엄헌영은 이만 돌아가 잃어버린 경혜현주의 서찰을 찾기로 마음먹었다. 혹여라도 영영 잃어버렸다면 다시 경혜현주에게로 가 사죄를 하고 새 서찰을 받아와야 할 테니 할 일이 많았다.

그런데···.

연재 화연과 낯모르는 사내애가 서문경에게 쫓겨나는 것까지 보고 나인에게 문을 닫으라는 눈짓을 보내던 엄헌영이 불현듯 표정을 흐렸다. 

“기다려.” 

막 문살에 손을 대는 나인을 멈추게 하고 엄헌영이 호박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것이 의외였는지 서문경이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서문경이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용건이 있으시면 들어오셔서, 하고 말하던 서문경은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엄헌영이 자신의 말을 조금도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이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니 자신의 무릎을 베고 곤히 잠든 황제의 얼굴이 나왔다. 엄헌영이 황제에게 적대적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떠올린 서문경이 자신도 모르게 황제의 얼굴을 제 팔로 감싸 안았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평소 같으면 벌컥 성을 냈을 엄헌영은 황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

서문경이 고개를 모로 기웃했다. 엄헌영이 저렇게 황제를 응시하고 있으니 뭔가 잘못된 것이 있는가 싶어 슬며시 마음이 불안해진다. 서문경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뭔가, 이상한 것이라도 있습니까?”

그 말에 엄헌영이 눈살을 구겼다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말과 함께, 반쯤 닫혀 있던 문이 쾅하고 닫혔다. 

“뭐야···.”

방 안에 남겨진 서문경은 찜찜한 의문을 안은 채로, 하얀 장지문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정말로 오늘은 알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

엄헌영의 얼굴이 무섭도록 굳어 있었다. 서문경의 무릎에 아기처럼 머리를 눕히고 있던 제안의 모습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처음 호박방 안을 들여다봤을 때에는 그가 방 안에 있다는 사실조차도 인지하지 못했다. 때문에 제안의 모습을 뒤늦게 발견했을 때는 몹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몰랐지? 그리고 곧바로 다음 순간 깨달은 사실에, 다시 한 번 엄헌영은 놀라야만 했다. 제안의 이름만 떠올려도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불쾌감이, 제안의 얼굴을 눈앞에 두고 있는 지금 이 순간 고개조차 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탓이었다. 그 사실을 안 순간 엄헌영은 직감했다.

저것은 제안이 아니다.

짐작이 확신으로 굳어진 그 때 엄헌영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돌아 나왔다. 홀로 남겨진 서문경이 의아해할 것이 뻔했지만 거기까지 신경 써 줄만한 여유가 그에게는 없었다. 그 자는, 놈은 어디에 있지? 머릿속 깊숙한 곳에서 놈을 찾을 필요가 무어가 있느냐고 반박했지만 발이 멋대로 움직였다. 어디 있지? 어디 있어. 그리고 엄헌영은 거의 본능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현재 제안이 집착하는 유일한 사람은. 약간의 차이를 두고 그의 행적을 죽 좇아가면 다다르는 곳은.

다시 엄헌영은 송림 안으로 들어갔다.

분명 마지막으로 봤을 때 온 숲이 불바다였건만, 군데군데 탄 자국을 제하면 송림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건재했다. 엄헌영은 더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가며 생각에 잠겼다. 역시 그 불은 환상이었던가, 그러고 보면 자신과 그 아이 또한 불길에 휩싸였지만 다친 곳 하나 없었다. 다친 곳은커녕 오히려 희미한 온기조차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어째서 염락은···. 그러나 엄헌영의 생각과 발걸음은 거기에서 멈춰야 했다. 

엄헌영은 앞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아직도 이곳에 있었나.”

엄헌영의 말에, 바닥에 두 팔을 벌린 채 멍하니 누워 있던 남자가 입꼬리만 끌어올려 웃었다. 그가 누워 있는 주변에만 풀과 나무가 완전히 연소하여, 탄 재와 검은 흙만이 둥그렇게 남아 있었다. 남자, 조원이 대꾸했다.

“일어설 힘조차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 대답에 엄헌영의 시선이 움직였다. 조원의 근처에 드리워진 사람의 그림자는 둘. 그 중 하나는 엄헌영 자신의 것이었고 또 하나는. 엄헌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익숙한 불쾌감이 뱃속에서 끓어올랐다.

“자네가 한 짓인가?”

하고 엄헌영이 묻자,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저 자를 말하는 거라면.” 남자의 시선이 잠시 조원을 향했다. “아닐세. 내가 이곳에 왔을 때부터 저 신세가 되어 있더군.”

“그 불.”

엄헌영이 남자의 말을 가로막았다. 남자가 머리를 모로 기웃했다.

“불이라?”

“그 불, 자네가 한 짓인가.”

조금 전의 물음과 거의 같은 말이었지만 이미 엄헌영의 어조는 물음이 아닌 확신으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엄헌영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니라고···.”

“못 믿겠다는 표정이로군.”

엄헌영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그가 남자를 노려보았다.

“저도 못 믿겠습니다.” 

그 때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 편으로 무심코 시선을 돌리자 조원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일어날 힘도 없다더니?’, 하고 엄헌영이 비꼬듯 묻자 조원은 예의 그 버릇대로 두 어깨를 조금 으쓱해 보였다. 그렇다고 계속 누워 있을 수도 없잖습니까, 날도 저물었는데.

상반신만 일으켜 탄 자리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조원이 엉망이 된 머리를 대충 정리한 후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정말로 그 불, ···의 힘이 아니었습니까?”

엄헌영의 시선도 그 물음에 힘을 더하듯 남자를 향했다. 해가 저물자 급속도로 쌀쌀해진 공기에 목이 아픈지 콜록콜록 가래 낀 기침을 몇 번 한 후에 남자가 무성의한 태도로 손을 내저었다.

“다짜고짜로 불이라니? 송림이 화난(火難)이 잠시 일었다는 사실은 눈알이 붙어 있는 자라면 누구나 알 테지만, 허나 그것은 내 보기에 그대가 저지른 짓인 것 같네만.”

“모른 척 하는 건가.” 엄헌영의 사나운 목소리가 남자를 질책했다. 그의 손이 조원을 똑바로 가리켰다. 그을렸군, 남자의 눈이 찡그려졌다. 엄헌영이 코웃음을 쳤다. “그을렸다고? 저 꼴을 보고도 그런 표현이 나오나.”

엄헌영의 말이 옳았다. 불이 붙었던 조원의 한 쪽 어깨는 아직도 벌겋게 달아올라 모조리 살 껍질이 일어 있었고 그 중 일부는 억지로 탄 곳을 떼어낸 듯 허연 뼈까지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남자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대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내 알바 아니야. 알 수도 없고.”

남자가 짜증을 섞어 내뱉은 말에 엄헌영도 조원도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남자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고, 또 물증은 없이 비루한 심증만 있는 상황에서는 상대가 저렇게 나오면 이쪽에서는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가 없다. 두 사람이 조용해지자 남자가 주위를 돌아보았다. 뭔가를 찾는 듯한 시선이었다.

“내 목적은 하나뿐일세. 어디 있나.”

그 말에 조원은 얼굴을 찌푸렸고, 엄헌영은 대꾸 없이 뒤를 한 번 눈짓해 보였다. 청의관이 있는 자리였다. 고작 그 눈짓 하나만으로도 상황을 모조리 읽어낸 남자가 답지 않게 큰 소리로 웃었다, ‘그래, 제 힘으로 벗어났단 말이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남자를 보고 반대로 기분이 몹시 더러워진 엄헌영이 들으란 듯이 내뱉었다, ‘녀석이 불쌍하군.’ 그 말에 남자의 시선이 엄헌영을 향했다. 무슨 말이지?하고 묻는 듯한 시선에 엄헌영이 대답해 주었다. 듣고 죄책감이라도 들라는 마음의 발로였다.

“어떤 놈은 납치될 뻔 했다가 겨우 도망치고도 다른 이가 걱정이 되어 숨도 돌리지 못하고 돌아갔었는데, 정작 놈이 염려했던 이는 사정을 듣고도 좋다고 웃어대기만 하니 기가 막혀서 말이야.”

“허나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나?”

돌아온 대답이란 것이 참으로 기가 막혀서, 엄헌영은 대답을 듣자마자 미간을 구기고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뭐라?

남자가 날카로운 턱을 쓸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암. 그럴 수밖에. 본디 머리가 좋은 아이인 것은 알았지만, 새삼 이렇게 영리하단 사실을 확인하니 내 마음이 다 흡족하군.”

“제발!” 엄헌영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진저리난다는 듯이 그가 이까지 갈면서 외쳤다.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말하지 마! 자네는 조금도 변하지를 않았군! 모든 사람들이 자네나 희 같지는 않아! 그 자는 그냥 사람이야, 죽을 수도, 크게 다칠 수도 있었어, 왜 그걸 모르나! 왜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나!”

“죽는다니.”

함부로 입 놀리지 말게. 무섭도록 싸늘해진 남자의 대꾸가 엄헌영의 열띤 고함을 썩뚝 끊어놓았다. 엄헌영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렸다. 기가 막혀, 기가 막히는군. 그런 엄헌영에게 남자가 못을 박았다.

“그 이는 결코 죽지 않네. 죽을 수도 없고.”

“말했지, 그 자는 사람이야. 그것도 아직 이 세계가 낯설 물손님. 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위태로운 입장이란 말이다. 헌데 어떻게 장담할 수 있지? 죽지 않는다고? 사람은 모두 죽어!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놀라는 척이라도 해봐. 걱정하는 척이라도 해야 사람이지. 더구나 그 치 자체에게서 얻어낼 이득이 있을 리가 없으니, 그 자가 피랍될 뻔 했던 것은 온전히 너 때문이다.”

“그만.” 남자가 사납게 엄헌영의 말허리를 끊었다. “듣기 싫네. 다치느니, 죽느니 하는 말 따위 입에 올리지 마.”

“···콩알만큼이라도 염통에 양심이라는 놈이 박혀 있다면 네가 이리 당당할 수는 없어.”

“그렇다면 내게는 양심이라는 것이 없는 모양이지. 여전히 그대 머리가 꽉 막혀 있는 것처럼 말이야.”

“뭐라고!”

“머리가 있다면 한 번 생각해보게.” 예전과 조금도 변함이 없다고 말한 사람은 자네야. 자네 입이지. 남자가 차분하다 못해 싸늘하게 내뱉었다. “그런데 왜 내 행동이 변하기를 요구하는 건가. 그대 말이 옳아. 내 머릿속은 이전과 그대로네. 그러니 행동이 변하기를 강요하지 말게.”

그렇게 말한 남자가, 조원을 향해 몸을 돌렸다. 엄헌영과 남자가 주고받는 대화를 웃음기 없는 웃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던 조원이, 남자를 향해 입꼬리를 조금 더 치켜 올려 보였다. 일종의 신호였다. 남자가 무심한 투로 내뱉었다, ‘어찌하다보니 본래 목적을 입에 올리는 것이 늦었군.’ 

“나는 그대가 무슨 짓을 꾸미는지는 몰라.”

“그리고 관심도 없으시고요.”

“허나 허튼 짓을 한다면 말이 달라지네.”

“허튼 짓이라···.” 조원이 머리를 조금 기울였다. “무지한 소인은 그 선을 잘 모르겠습니다만.”

“천만에.”

남자가 가볍게 한 발을 올리며 조원의 말에 반박했다. 퍽! 엄헌영의 눈이 커다래졌다. 남자의 발이 조원의 목젖을 밟고 그를 그대로 바닥에 찍어 눌렀다. 그러나 놀란 것은 엄헌영 하나뿐이었던 듯 했다. 조원의 목을 짓밟은 남자나, 갑자기 시야가 뒤집힌 조원이나 그 얼굴에 놀란 빛이 조금도 없었다. 남자가 심상한 투로 말을 잇는다.

“알고 있잖은가. 그러니 그를 골라 나를 자극하는 것이겠지.”

“큭···.”

“내게는 무슨 짓거리를 해도 상관없어.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수라에 독을 타건.” 아니면. 남자의 목소리가 은밀한 이야기라도 속삭이는 것처럼 나직해졌다. “타락에 잠약을 타건. ···허나 그를 건드린다면 이야기는 달라지네, 염락.” 

조원의 미소가 짙어졌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잔뜩 쉬고 드문드문 끊겨서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상당한 힘으로 목을 밟힌 모양인데 그렇게 웃다니. 더 기가 막힌 것은, 지금껏 웃는 모양만 갖추고 있었으되 웃음기라고 할 만한 것은 없던 그의 얼굴에 희미하지만 진짜 웃음기가 돌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남자 또한 깨달았는지 남자가 눈썹을 구겼다.

“어째서 웃지?”

“제가 웃었습니까?” 조원이 시치미를 뗐다. 거짓말처럼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재차 추궁하기도 전에 그가 말을 이었다. “허나, 오해이십니다. 저는 일부러 ···를 자극하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우연이었다?”

우연이라기보다는···, 하며 조원이 말을 골랐다. 

“동향에 대한 그리움이 샘솟아 그만,”

“동향인 이가 반가워 그리하고 말았다라.” 남자의 말에 힘이 들어갔다. 저절로 턱이 치켜들어지며 컥, 하는 소리가 터졌다. 그것을 무심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남자가 천천히 허리를 숙여 조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헌데, 그런 것 치고는 그리운 고향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묻지 않더군.”

“아직은 고향에 대해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아플 시기이니, 자제하고 있습니다.”

“그것 참 고마운 배려로고.”

하고 남자가 칭찬했지만 그렇게 말하는 어투는 빈정거리는 것에 가까웠다. 그 추측에 근거를 더해 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남자가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남자는 나직이 경고했다.

“허나 좀 더 마음을 써주었으면 좋겠군. 그대도 말했다시피, 한창 힘들 시기가 아닌가?”

“···무엇을 원하시는 겁니까?”

“눈앞에 나타나지 말게. 그대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아이는 제가 태어난 곳을 떠올릴 터이니.”

조원의 표정이 굳었다. 남자가 비웃었다.

“힘들겠는가?”

“···무어, 못 할 것은 없지요.”

“그래. 못 할 것은 없지. 하기는. 그대가 그리는 못한다고 하여도 이제는 그 아이 쪽에서 그대라면 치를 떨 터이니 그대 대답은 어찌되건 아무 상관없겠거니 싶기는 하구나.”

조원의 낯빛이 달라지는 것을 잔혹한 시선으로 훑으면서 남자가 말했다. 남자의 말이 끝난 후에도 조원은 한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오묘한 표정을 찌푸린 눈으로 내려다보던 엄헌영도 결국은 시선을 거두었다.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혼절시켜 끌고 가려고 했던 자다. 정이 약간이라도 들었었다면 그리 할 수는 없는 일, 그러니 새삼 저런 말을 듣는다고 해서 싫은 마음이 들 리가 없다. 제 계획에 이용하기가 힘들어지니 귀찮은 마음이 들 수야 있겠지만. 그러나 이렇게 저 치의 표정이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 때 조원이 속삭였다.

“지금은 그럴 것입니다.

그 묘한 어조에 남자가 멈칫한다, ‘지금은?’ 조원이 웃었다.

“허나, 모든 것을 알게 되면. 그 때는 그 아이도 알게 되겠지요. 진정 그 아이를 위해 주는 것이 누구였는지!”

“하!”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위해 준다? 그대의 행동이 그 아이를 위한 행동이더냐? 그대 자신을 위한 것이지!”

“결론적으로는 그 아이를 위한 결정이기도 하지요.”

“궤변이다. 궤변이로다.”

남자가 불쾌하다는 듯 언성을 높이며 고개를 저었다. 남자의 그런 행동을 본 것은 그 또한 처음인지라 엄헌영은 무심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조원과 남자가 과거 한 때 친밀하게 지내다 크게 틀어진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지금 그들이 나누는 대화가 당최 무슨 뜻인지는 파악할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인가, 하고 엄헌영이 자신도 모르게 끼어들려는 순간 남자가 발을 치우고 확 돌아섰다.

“더 이상은 듣지 않겠다.”

그 뒤에 대고 조원이 독하게 내뱉는다.

“그리하셔도 결국은 소인의 말대로 될 것을요.”

“만일 그리 된다면-.” 남자가 머리만 돌려 조원 쪽을 보았다. 그 시선이 잘 벼린 칼날을 눈알에 박아 놓은 듯이 형형하다. “네 놈 대가리부터 따 주마.”

“가능하시다면 부디.”

만일 그 때가 온다면 남자가 자신에게 손쓰는 것은 불가능하리라는 조롱이었다. 대답할 가치도 없단 듯이 고개를 돌리는 남자를 조원이 계속해서 조롱했다.

“당신께서는 그런 날이 결코 오지 않으리라 여기시겠지요. 그러나 아닐 것입니다. 결국은, 결국에는 당신이 아닌 제가 원하는 결론이 오고 말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물 흐르듯 그렇게 실려 가실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영원히 당신이 변하지 않는다 확언하시지만 그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느려도 사람은 변하는 법입니다.”

앞으로든, 뒤로든 어떤 식으로는.

“당신께서는 물 흐르듯 가시지만, 소인은 원하는 대로 갑니다. 그 중 누가 강할 것 같습니까.” 

그러니, 조원이 장담했다.

“모든 것은 결국 제가 원하는 대로 될 것입니다.”

그런 조원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남자는 그 옆을 지나쳤다. 하지만 엄헌영은 보았다. 조원을 지나치는 남자의 눈빛은 무섭도록 굳어져 있었고, 입매는 고집스럽게 다물려 있었다. 그 표정을 엄헌영은 알고 있었다.

장기나 바둑을 둘 때마다 이미 자신이 상대에게 진 것을 알았으면서도, 그것을 인정하기 싫어 고집을 부려대던 그 어린 날의 모습과 똑같은 표정이었다.

엄헌영을 지나쳐 청의관으로 빠지는 길로 막 접어들기 직전, 남자의 발걸음이 우뚝 멎었다. 엄헌영과 어깨 끝이 거의 맞닿을 만한 거리에 섰지만 결코 엄헌영이 있는 쪽을 돌아보지는 않고 남자가 경고했다.

“그대도 입 조심해.”

“입 조심?” 하고 물었다가 엄헌영이 곧 아아, 하고 코웃음을 쳤다. “우습군. 내가 없는 말을 지어낸 것도 아니고.”

“그 아이에게 헛바람 넣지 말게.”

“그 치가 당연히 알아야 할 것을 알려준 것뿐이야.”

남자가 비로소 차가운 시선을 엄헌영에게로 돌렸다.

“설마하니 그 때의 일을 알려줄 심산은 아니겠지?”

그 말에 엄헌영의 얼굴이 귀신처럼 구겨졌다. 그가 남자의 멱살을 움켜쥐고 자신에게 확 당겼다. 지척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향해 엄헌영은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입 멋대로 놀리지 마.

“네 놈이 감히 입에 담을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하고서, 엄헌영이 내팽개치듯 남자의 멱살을 놓아주었다. 그러고서 그가 내뱉듯 덧붙였다. “그러니 그 점은 염려치 않아도 좋아. 아직 나부터 그 때의 일을 입에 올릴 만큼 상처가 낫지는 않았으니. 더구나 그 자에게 그 일을 말해줄 만큼의 의리가 있지도 않고. 그러나 그 외의 말이라면, 또 모르지. 네 놈이 어떤 인간인 줄 알고 붙어 있는 것이라면 또 모르지만 모르고 붙어 있는 거라면, 속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 아이가 내 옆에서 떨어져 나간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그 치의 선택이지.”

“아니.”

남자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날아갈 듯 가벼운 대꾸에 엄헌영이 눈살을 구기며 쳐다보자, 남자는 입술 뿐 만 아니라 눈으로도 빙긋 웃었다. 그러나 그 웃는 눈매 안에 담겨 있는 눈은 무서울 정도로 서늘했다. 사람의 것이 아니라 아주 다른 생물인 것처럼 이질적인 서늘함에 절로 등골이 오싹해졌다. 남자가 웃으며 속삭였다. 

“머리가 나쁜 건가, 이부가 부실한 겐가?”

“무어?”

“저 작자에게 한 말을 못 들었나?” 남자가 천천히 한 발 다가와서 엄헌영의 귓가에 제 얼굴을 기울였다. 차가운 입술 끝이 귓가의 솜털을 간질였다. 남자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괜히 나부대지 말게, 정말 일이 그렇게 된다면.”

엄헌영의 눈이 커졌다.

“효강. 아무리 너라도 무사치는 못할 거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자가 송림을 빠져 나갔다. 

“······.”

순식간에 작아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엄헌영의 귀에 조원의 말이 들려왔다. 

“단순한 선의라면 물러나 계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효강.”

엄헌영이 그 말에 조원을 말끄러미 쳐다보다가, 그에게서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멈춰 있던 발걸음을 움직였다. 사박, 사박, 사박. 화기(火氣)로 바싹 말라버린 나뭇잎들이 엄헌영의 발에 바스러지며 비명을 질러댄다. 조원은 엄헌영이 자신을 무시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곧 대답이 들려왔다.

“너와 저 녀석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나로서는 자네 행동을 이해하기가 힘들지만, 자네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말했지. ···그것과 같아.”

“소인은 장군과 저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 말입니까.”

“그래. 내게도 이유 정도는 있어.”

엄헌영이 말을 끝맺었다, ‘간섭하지 말게.’ 조원은 벌렁 그 자리에 드러누우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조원의 옆을 엄헌영이 지나치며 송림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서찰. 서찰을 찾아야 했다. 엄헌영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조원을 훑었다. 혹여 저 자의 손에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러기를 수 분, 겨우 엄헌영은 잃어버렸던 서찰을 발견했다. 송림에 몇 없는 당단풍 아래, 서문경이 앉아 있었던 그 자리였다. 장소를 보아하니 조원이 숲을 태운다만다 협박하던 그 때 서문경과 실랑이를 벌이다 서찰을 떨어뜨렸던 모양이었다. 엄헌영은 내심 가슴을 쓸어내리며 서찰을 집어 들고, 잠시 서찰을 펴 그 안의 내용을 확인해 보았다. 경혜현주가 맡겼던 그 서찰이 맞았다. 

그 때 어딘가에서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자 조원이 서찰 쪽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저 위치에서는 아무리 애를 써도 서찰의 내용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엄헌영은 괜히 껄끄러운 마음이 들어 서찰을 접어버렸다. 조원이 넌지시 물었다. 

“웬 서찰입니까?”

“···아무 것도.”

엄헌영이 서찰을 소매 속에 집어넣으면서 대꾸했다. 조원도 곧 호기심을 접고 눈을 감아버렸다. 검은 잿더미 속에 하늘을 향해 누운 채로 눈을 감고 있는 조원의 모습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엄헌영의 시선이 너덜너덜해져 있는 조원의 어깨에 가 닿았다가, 곧바로 떨어졌다.  

엄헌영은 몸을 돌렸다. 어서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기는 하지만, 정작 조원은 저렇게 무장 해제된 상태로 자신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있는데도 이상하게도 위기감이 가시지를 않았다. 막 발걸음을 옮기려는 엄헌영의 뒤통수에 대고 조원이 물었다.

“그냥 가시는 겁니까?”

“···그래.”

“그렇게 당하시고도 괘씸한 마음이 들지는 않으십니까?”

그 말에 엄헌영이 표정을 굳히고 대답했다.

“크게 다쳐서 널브러져 있는 사람을 상대로 뭘 하란 말인가?”

하, 하고 조원이 허탈한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 허탈한 신음은, 곧바로 하하하, 하는 커다란 웃음소리로 변했다. 그 웃음소리가 참으로 기묘하여 듣는 이의 눈살을 저절로 구겨졌다. 마냥 기뻐서 웃는 소리가 아니었다. 허탈한 듯도 하고 비참한 듯도 하고 부러운 듯도 한, 그야말로 웃음이지만 웃음보다는 제 분에 못 이겨 내지르는 고함에 가까운 소리. 그리고 잠시 후 그 웃음소리가 거짓말처럼 뚝 끊기더니 조원이 말했다. 

“과연. 과연 효강이십니다.”

“···가겠네.”

“하지만 그 넓으신 아량도 이제는 바닥을 드러내겠지요. 보지 않으셨습니까. 제 ‘힘’이 뭔지. 엄장군이시라면 아시겠지요? 천객의 ‘힘’이 무엇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지! 그러니, 그러니 제가 범님의 세상에서 무슨 짓을 하던 놈팡이인지도 이제 아셨겠지요!”

“그래.” 엄헌영이 씹어 내뱉듯 대꾸했다. 그렇게 대꾸하는 목소리에 애써 짓누르고 있던 혐오감이 그대로 묻어났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은 혐오가 흘러넘치는 그의 시선은 끝까지 조원을 향하지 않았다. “허나 그것과 이것은 별개의 문제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엄헌영이 양거재 쪽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비로소 드넓은 송림 안에 홀로 남겨진 조원은 한참 동안을 눈을 감은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독수리가 절벽에 떨어뜨린 양의 사체(死體)처럼 보였다. ···그러나 곧 불어온 바람이 조원의 얼굴에 스쳤다. 머리카락이 맨 피부를 끈질기게 간질였다. 조원은 눈을 떴다. 

조원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걸어 송림을 빠져 나갔다. 흉하게 패여 뼈까지 드러나 있던 상처가 그가 한 발자국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서서히 아물어 그가 송림을 완전히 빠져 나갔을 때 즈음에는 완전히 아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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