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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뿐히. 정말로 살짝 닿는 감촉이었다. 마치 깃털이 내려앉듯이. 그러나 짐승의 털 대신 매끈한 가죽의 감촉과 함께 온기가 느껴진다. 손인가? 서문경은 자신의 뒷덜미에 닿은 감촉을 느끼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 다음 순간이었다.
“···!”
정신이 아찔해졌다. 시야가 핑 흔들린다. 그제야 고통을 인지했다. 어디를 맞았지? 머리? 아니면 목이 졸렸나?
“맞은 곳은 없네.”
묻지도 않았는데 대답이 들려왔다.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머리를 돌리는 속도보다 눈앞이 새카매지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스르륵 앞으로 고꾸라지는 배를 단단한 뭔가가 받치는 것이 느껴졌다. 나무인가 했지만 사람의 팔이었던 모양이다. 배를 받친 팔이 힘을 주어 서문경의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곧 배 대신 허리를 감싸고 받쳤다. 그와 동시에 다리가 완전히 풀렸다.
“조심해야지.”
하고 누군가가 속삭였다. 귀가 간지러워서 어깨를 움츠렸다. 귓전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무릎 밑에 뭔가가 쑥 들어왔다.
서문경은 문득 생각했다. 들어본 적 있어.
저 목소리. 누구 목소리였지?
몸이 허공이 붕 떴다. 서문경을 안아든 남자가 다시금 말했다.
“착하다.”
뭐. 상황에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말에 당혹감이 밀려왔다.
“그러니 도와다오. 자네에게도 나쁜 일은 아닐 게야.” 그렇게 말해놓고 자신이 한 말이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웠는지 남자가 킬킬 웃었다. “혼절시켜 놓고 하는 말치고는 참으로 뻔뻔하군. 하지만 말일세, 사실이야. 자네에게도 결코 나쁜 일은 아닐세.”
남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나직해졌다.
“···않은가?”
그렇지 않아도 먹먹한 귀는, 남자의 말을 제대로 잡아내지 못했다.
“나도 그렇다네. 그러니 도와주게. 자네는 착하니까, 그럴 수 있지 않은가. 가난한 자를 가엾게 여겨 자네가 자신 것을 베풀어 줄 수도 있지 않은가.”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도 서문경은 대답했다. 결국 말이 되어 나오지는 않았지만,
“도와줄 것이라고, 이해해 주리라고 믿네.”
아니야. 서문경의 입술이 대답했다. 정말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굳이 구걸하지 않아도 도와줄 수 있어. 내가 가진 것이 아니라도, 도와줄 수 있어. 하지만 아니야. 당신이 지금 하는 건 구걸조차 아니야. 당신이 하는 짓은,
강탈이잖아.
**
엄헌영은 몹시 기분이 언짢았다. 참으로 지겹게도 내리던 궂은비가 겨우 멎은 참이었지만 궂은비가 내리던 때보다 엄헌영의 속은 더 어둡고 싸늘했다. 칫. 엄헌영은 근엄한 일령장군의 위엄이 무색하게 애 같은 소리로 혀를 차고는 배를 살살 쓰다듬었다. 뱃속이 싸하다 했는데 단순히 기분 탓이었던 모양이었다. 아마도 비틀릴 대로 비틀린 심기가 창자까지 비비 꽈대고 있는 거겠지···.
그러나 엄헌영은 자신의 심기가 비틀려 있다는 사실은 알았어도, 그 이유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모처럼 있는 대휴(代休)에까지 황궁에 드나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짜증이 나는 건지, 아니면. 엄헌영이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요 며칠 사이에 귀에 들어오는 풍문 때문에 아직도 배알이 뒤틀려 있는 것인지.
“것도 제 복이지.”
애써 생각지 않으려 했던 생각이 다시금 떠오른 것에 불쾌해진 엄헌영은 소리까지 내어 내뱉어버렸다. 그렇게라도 하면 말과 함께 뱃속 안에 도사리고 있는 감정이란 놈도 내뱉어 낼 수 있을 거라 믿는 듯한 태도. 허나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다. 자신이 한 말을 듣고 도리어 더 부아가 치민 탓에 엄헌영의 얼굴이 더 구겨질 자리도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다.
그 일···.
“대가리가 텅 빈 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 놈을 곱게 받아줄 수가 있어. 입방정 잘 떨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영인(令人) 공씨에게서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엄헌영이 무심코 내뱉은 말이 그거였다. 증조부가 수상까지 지낸 명벌의 영랑(令郞)에다, 출세가도를 치달리는 유망한 젊은 장군이 할 만한 말이 아닌지라 일순 방 안에 당혹스런 정적이 감돌았음은 물론이다. 덕분에 현주(縣主)에게서 따끔한 꾸중을 들어야 했다.
당시의 일을 떠올린 엄헌영이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 어른께서도 참으로 너무하시지. 근래에 격조하였으니 한 번 얼굴이나 보자꾸나 하시기에 찾아가 뵈었더니 하필 이런 날 이런 부탁이나 하시고. 엄헌영은 제 손이 들린 서찰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엄헌영의 걸음이 잠시 멎었다. 갈림길이었다.
“······.”
입을 굳게 다문 엄헌영이 좌로 시선을 주었다. 거의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뒤늦게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를 깨달은 그가 처음에는 얼굴을 굳혔다가, 이윽고 작은 한숨을 한 번 쉬었다. 이쯤 되면 더 발뺌할 수도 없다.
이 홍원문에서 왼편으로 죽 가다보면 나오는 것이 청의관.
“신경 쓰여서 미치겠군.”
현주를 뵌 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더더욱. 콱 이를 악문 채로 엄헌영은 청의관으로 통하는 왼편과 수상부가 있는 우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나 몇 분의 시간이 지나도, 멈춘 엄헌영의 발은 다시 움직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지금 충동과 고집과 현주의 당부와 그녀의 얼굴 따위가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 때였다.
“장군님?”
문득 부르는 소리에 엄헌영이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다. 엄헌영의 얼굴을 확인한 남자의 얼굴이 환해졌다.
“맞으시군요!”
하고 말하는 이는 엄헌영과 같은 용호군에 소속된 무변(武弁)이었다. 자신을 부른 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 엄헌영의 얼굴은 남자의 표정과는 대조적이었다. 평소 남자가 태황태후의 총애를 받는 자신을 눈여겨보고 어떻게든 줄을 대보려 필사적인 자였던 탓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남자가 태황태후를 들먹였다.
“엄장군께서는 작일이 대휴인 줄 알았습니다만, 웬일로 황궁에 와 계십니까? 아, 운현궁 마마의 부르심을 받으시었습니까?”
“아닐세.”
“헌데 어찌하여?”
‘겸사겸사.’, 수선을 피우는 남자에게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엄헌영은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현주께서 부탁하신 일도 있으니 역시 일단은 수상부로 갔다가, 추후 돌아오는 길에 청의관으로 찾아가 보는 편이 낫겠지. 헌데 날이 꽤나 늦었는데 아직 수상부에 소희가 있으려나 모르겠군. 만일 수상부에 없으면 또 어디로···,
“아아. 알겠습니다.”
남자가 갑자기 제 무릎을 치며 목소리를 높이는 바람에 물 흐르듯 흘러가던 엄헌영의 생각이 뚝 끊겼다. 저 눈치 없는 인간. 더 이상 남자의 말을 들어주고 있기에도 곤혹스러워진 엄헌영이 막 급한 일이 있어 이만 가봐야 한다며 말하려던 참이었다. 그보다 선수를 쳐 남자가 말을 이었다.
“수상 어른을 찾아 오셨습니까?”
“수상?”
엄헌영의 낯빛이 변했다. 내내 귀찮아하던 기색이던 엄헌영이 관심을 보이는 듯 하자 신이 난 남자가 떠들어댔다.
“예에. 수상 어른을 홍원문 근방에서 뵈었습니다. 물론 먼발치에서 뵈었을 뿐, 직접 인사를 드리지는 못하였습니다만.”
“그 이가 왜 이곳에 있어?”
“예? 장군과 만날 약속을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까?”
엄헌영이 눈살을 찡그리며 반문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가?”
“예에? 그것이.” 지치지도 않고 계속해서 놀라며 남자가 더듬더듬 대꾸했다. “수상께서 이 먼 홍원문, 그것도 청의관까지 행차하신 것을 의아해하던 차에 엄장군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장군과 만나실 약조를 하셨나보다 하였지요. 엄장군께서도 청의관으로 가시려 하시는 것 같기에 그만···.”
“그가 청의관으로 갔다고?”
“예? 예. 그렇습니다.”
“확실한가?”
“예, 예에, 예. 제,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거의 윽박지르듯 하는 자신의 태도에 가엾게도 잔뜩 움츠려든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엄헌영이 얼굴을 싹 굳혔다. 그가 왜 청의관으로 갔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엄헌영은 물었다.
“수상 어른이 아직 청의관에 머무르고 계신가?”
“거기까지는 소인도···.”
모르겠습니다, 하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엄헌영이 휙 몸을 돌렸다.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는 엄헌영의 뒷모습을 남자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길을 가다 호박을 넝쿨째 줍나 했더니 호박은커녕 난데없이 날벼락을 얻어맞은 그런 기분이었다.
그것은 엄헌영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지나가다 날벼락을 맞은 것과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다. 날벼락보다는···, 엄헌영의 얼굴 근육이 꿈틀했다. 여우비를 목격한 기분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뜬금없이. 그래, 뜬금없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가 한 데 모여 있는 것을 본 그 황망한 기분. 지금 엄헌영이 기분이 딱 그랬다.
희, 그 놈이 무슨 일로 청의관엘 가? 쓸 만한 ‘힘’도 없는 물손님에게 무슨 볼 일이 있어서.
다른 사람이 두 걸음에 걷는 만큼의 거리를 한 걸음에 걸으며 엄헌영이 걸음을 재촉했다. 그렇지 않아도 빠르던 걸음이 계속해서 빨라진다. 덕분에 일다경(一茶頃) 뒤에는 거의 뛰듯이 할 정도였다. 그런 엄헌영의 얼굴이, 전에 없이 필사적이었다. 무심코 이를 앙다문 입가가 바르르 떨렸다.
주위의 풍경이 무서운 속도로 스쳐 지나갔다. 그 때문에 엄헌영은 어느새 자신이 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꽉 쥔 주먹에서 경혜현주가 맡긴 서찰이 엉망으로 구겨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신경 쓸 틈도 없었다. 상황을 안다면, 그 어른도 분명히 이해해 주실 것이다. 자칫 늦었다가는 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언뜻 보면 거대한 호수처럼 고요해 보이지만 엄헌영은 결코 속지 않았다. 겉모습과는 별개로 서현의 속은 미친 듯 풍랑이 이는 바다 그 자체였다···!
시야 끝에 익숙한 건물이 나타났다.
“어이!”
엄헌영이 고함을 질렀다. 어마나! 싸리비를 들고 길옆을 슥슥 쓸고 있던 궁인이 벽력이라도 떨어지는 듯한 굉음에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바닥에 주저앉아 바르작거리고 있던 궁인의 얼굴이 곧 새파랗게 질렸다 어느 사이에 그녀의 앞에 떡 버티고 선 인형이 그 험상궂은 표정만큼이나 험악한 기세로 추궁해 온 탓이었다.
“어디 있어?”
“예?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물손님.” 엄헌영이 청의관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 사는 그 놈 어디 갔느냐고.”
엉덩방아를 찧은 채 주저앉아서 벌벌 떨고 있는 궁인이 답답했는지 엄헌영이 발을 돌렸다. 청의관 안으로 들어가려는 것이다. 그런 그를, 뒤늦게 궁인이 붙잡았다.
“나, 나리! 지금 물손님은 청의관에 안 계십니다!”
엄헌영이 멈칫하며, 찌푸린 눈으로 궁인을 돌아보았다.
“없다고?”
“예, 예에. 잠시 바람을 쐬러 나가셨는데···.”
“어디로 간지는 모르나?”
“예에.”
“그럼 체제공은?”
혹시 서현이 서문경을 따라 나간 것이 아닌가 염려되어 그렇게 묻자, 다행이도 그것은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상국 어른께서는 그보다 먼저 청의관을 나가셨습니다.”
“완전히 허탕을 쳤구만.”
홍원문에서 만났던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엄헌영이 이를 갈았다. 괜한 걱정을 해서 힘만 뺐다. 정보를 주려면 제대로 된 정보를 주든가, 밥도 죽도 아닌 것을 던져주면 어쩌란 말인가. 어이, 엄헌영이 짜증스레 중얼거리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런 엄헌영을 궁인이 차마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고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이윽고 엄헌영이 턱짓을 하며 요구했다.
“안내해라. 안에서 기다리겠다.”
그 기세에 눌려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도 궁인이 난감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것을 눈치 챈 엄헌영이 얼굴을 구기며 물었다, ‘내가 들어가면 곤란한 일이라도 있나?’ 저어. 궁인이 조심스럽게 청의관 쪽을 곁눈질했다.
“황상께서···, 와 계십니다.”
“제···, 아니, 황상이?” 당황한 나머지 황제의 이름을 부르는 실수를 할 뻔 했던 엄헌영이, 재빨리 말을 바꿨다. 시선이 저절로 청의관을 향하며 표정이 굳어졌다. 며칠간이나 계속 청의관에 머무르셨습니다, 하고 궁인이 대꾸하는 소리가 들렸다.
“······.”
“나, 나리?”
어디 가십니까? 한참 동안 굳은 얼굴로 청의관만 노려보고 있던 엄헌영이 불현듯 훽 몸을 돌리자, 궁인이 당황하여 물었다. ‘폐하께는 내가 왔었다는 사실을 절대 발설치 말라.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는 각오해야 할 것이다.’, 돌아보지도 않고 으름장을 놓은 엄헌영이 두려움으로 몸이 바싹 얼은 궁인에게 던지듯이 물었다.
“물손님이 어느 쪽으로 갔는지는 아느냐?”
“자, 잘은 모릅니다만 다른 나인 아이가 하는 말이···,” 궁인이 청의관 뒤편에 조성되어 있는 송림을 가리켰다. “물손님께서 저 곳으로 갑자기 뛰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궁인은 어, 하며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더 이상 이곳에 있기도 싶다는 태도로 엄헌영이 어디론가 걸어 가버렸기 때문이었다. 궁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물론, 자신이 방금 전 가리켰던 청의관 뒤의 송림(松林)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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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흔들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스슥, 파스슥, 파스스슥.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치고는 어딘가 둔탁한 듯한 소리에 더더욱 무거운 소리가 드문드문 섞여있다. 탁, 탁, 탁. 그래서 깨달았다. 바람이 불어서 풀이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풀을 헤치며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안 돼!
무슨 상황인지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가운데서도 퍼뜩 생각했다. 더 가서는 안 돼! 서문경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쳤다. 깜짝 놀란 근육이 입을 모아 비명을 질러댔지만 그 소리보다는 불감한 예감이 내지르는 비명 쪽이 훨씬 컸다. 더 가면 안 돼! 어떻게든 막아!
“읏?!”
죽은 듯 늘어져 있던 서문경이 갑자기 몸부림을 치는 것에 놀랐는지, 당황한 신음이 튀어나왔다. 자신을 단단히 붙잡고 있던 팔이 일순 균형을 잃는 것을 느끼고 서문경은 되는대로 발을 휘둘렀다. 발끝에 둔탁한 뭔가가 퍽 채인다 싶더니 악! 하는 짧은 비명이 들렸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 번 더 발길질을 했지만 이번에는 발이 붙잡혔다. 손!
손이다, 하고 생각한 순간 서문경은 몸을 움츠렸다. 예상대로 몸이 빙글 도는 기분이 들더니 웅크린 등이 딱딱한 뭔가에 부딪쳤다. 바닥이었다.
“···이런.”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나직한 웃음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나도 너무 마음이 약해서 큰일이라니까.”
“당신···!”
서문경이 날카롭게 외쳤다. 웃음소리가 좀 더 커졌다.
“좀 더 세게 졸랐어야 했나.”
“조원!”
“이렇게 일찍 정신을 차릴 줄은.” 하고 말하며 그가 서문경의 발목을 확 잡아당겼다. 그가 한 말을 듣고 서문경이 부득 이를 갈았다. 부정하지 않았다. 조원이 맞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미안하군.”
“미안할 짓을 왜,”
“아니, 그것이 아니라.”
발목을 잡고 끌던 손이 떨어져 나간다 싶더니, 인기척이 다가와 서문경의 명치를 지그시 눌렀다. 발이 자유로워진 틈을 타서 도망치려던 서문경이 놀라서 몸을 굳혔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조원이 말을 이었다.
“험한 꼴 보지 않도록 신경을 더 써줘야 했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하단 말일세.”
“그게 무슨···.”
“일이 끝날 때까지 혼절해 있었다면 두 번 힘들 일은 없을 것 아닌가.”
“···!”
서문경이 숨을 삼켰다. 조원이 웃으며 서문경의 굳은 어깨를 몇 번 가볍게 쳤다, ‘왜 그렇게 겁을 먹고 그러나.’ 서문경이 경계하며 되물었다.
“그래, 어쩌실 겁니까. 이번에도 목을 조르시려고요?”
“목을 조르다니? 아, 그래. 방금 전에 내가 한 말을 듣고 오해했나 보군. 그게 아닐세.”
조원의 목소리가 낮아지고, 서문경의 명치를 짚은 그의 손에는 오히려 힘이 들어갔다. 그가 속삭였다, ‘이런 걸세.’
서문경의 몸이 튀어 올랐다.
“헉!”
금방, 금방 그것 뭐였지? 눈을 가린 검은 천 안에서 서문경이 눈을 홉떴다. 벌벌 떨리는 손을 올렸다. 단단한 가슴팍이 잡혔다. 그러나 충격에 빠진 서문경은 자신의 명치에서 조원의 손이 치워졌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서문경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얼빠진 소리로 중얼거렸다.
“금방 여기가···.”
꿈틀거렸다. 마치 내 몸의 일부가 아니라 독립된 자아를 가지고 있는 존재인 것처럼!
조원이 은근히 물어왔다.
“무섭나?”
서문경은 대답하지 못했다. 무섭냐고? 물어볼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자신의 몸이 자신의 의지가 아닌 제삼의 무언가로 움직이는데 어느 누가 공포를 느끼지 않을까. 지금은 명치에 불과했지만 빼앗긴 것이 팔이었다면? 그 팔이 자신의 목을 조를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서문경은 이를 갈았다.
“이런 식으로 기절시킨 겁니까?”
“비슷한 수법이었지. 이번에는 좀 아플지도 모르네.”
“하지 마!” 조원의 손이 다시금 움직이는 것을 느낀 서문경이 악을 썼다. “손 치우십시오!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겁니까!”
서문경의 말에 조원이 문득 한숨을 쉬었다.
“자네는 뭔가를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군.”
“착각? 제가 뭘 착각하고 있다는 겁니까?”
“나는 자네 아군이 아닐세.”
“그 정도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아니.” 조원이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서문경의 말을 잘랐다. “자네는 모르네. 만일 정말로 그랬다면 지금 이렇게 나올 리가 없지. 나를 믿지 않는다. 내가 자네를 이용하고 있으니 자네도 나를 이용한다···, 전부 말뿐일세. 자네 주장을 믿는 것은 고작 해봐야 자네 입 정도일 거네.”
조원의 손이 자신의 이마와, 자신의 쇄골께를 차례로 짚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말을 이었다. 더더욱 낮아진 목소리가 이제는 거의 귀에 들리지도 않을 정도였다.
“자네 머리도, 가슴도 자네 말은 납득하지 않을 걸세. 정말로 자네가 나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면 내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왜 이런 짓을 하는 거냐, 고 묻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말했어야지. 역시, 라고.”
“······.”
“나는 자네 아군이 아닐세. 그러니 언제든 적으로도 돌아설 수 있는 거야.”
“적···.”
조원이 말을 하는 내내 입을 닫고 있던 서문경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서문경의 눈초리가 매서워진 것을 본 조원은 입꼬리를 가만히 끌어 올렸다. 조원이 어조를 바꾸어 달래듯이 말했다.
“하지만 너무 노여워 말게. 결과적으로는 자네에게도 나쁜 일은 아닐 게야.”
“제 적이면 폐하의 적이겠군요.” 조원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서문경이 말했다. “수상입니까, 태황태후입니까.”
하고 말하면서 서문경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수상? 조원에게는 수상이 시킨 일이냐고 물었지만 아마도 수상은 아닐 것이다. 일부러 먼 청의관까지 행차해 결코 혼자 있어서는 안 된다고 으름장을 놓고 간 사람이 한 순간에 마음이 바뀌어 이런 일을 벌인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태황태후인가. ···하지만 그녀는 황좌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황제가 꼴 보기 싫어 견딜 수가 없다는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일이 해결되리라는 느긋한 태도에 가까웠다. 단 한 번 본 것이 전부였지만, 서문경이 태황태후에게서 받은 인상은 그랬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좌절해 본 적이 없어서 결국은 모든 것이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될 것이라 조금도 믿어 의심치 않는 태도···. 그런 사람이 왜 이런 일을 벌이지?
조원이 대답했다.
“대답을 해주어야 하는 의무는 없는 것으로 아네.”
“예, 맞습니다.” 생각을 멈추고 서문경이 이를 갈며 대꾸했다. “그리고 저도 당신 말을 곱게 들어주고 있어야 할 이유가 없고요!”
서문경이 벌떡 조원의 손을 뿌리치고 일어섰다. 그리고 재빨리 뒷걸음질 치면서 눈가로 손을 올렸다. 눈가리개를 떼어 낼 참이었다. 그런데,
“없어?!”
서문경의 얼굴이 당혹으로 가득 찼다. 서문경은 필사적으로 눈가를 더듬었다. 하지만 아무리 눈가를, 뒤통수를, 귀 주변을 더듬어도 천 따위는 발견할 수가 없었다. 저벅. 그 때 사람의 발이 흙바닥을 밟으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서문경이 뒤로 물러나며 손을 내저었다, ‘오지 마!’ 그 날카로운 고함에 조원이 조용히 대꾸했다.
“찾을 필요 없네. 처음부터 눈가리개 같은 건 씌운 적도 없으니.”
“그럼 대체 이게,” 하고 말하다가 서문경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져 나갔다. 서문경이 손가락 끝으로 자신의 눈가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설마, 내 눈···.”
“자네 눈이 아닐세.”
조원이 대답했다, ‘지금은.’
그 말에 서문경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조차 알 수가 없어진 탓이다. 내 눈···. 서문경이 끈질기게 눈가를 더듬었다. 긴 속눈썹이 손가락을 찔렀다. 약간 치켜 올라간 듯한 눈꼬리도, 눈 바로 아래의 도톰한 살도 만져졌다. 약간의 물기가 묻어 나왔다. 그리고 볼록하고 말랑한···. 서문경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서문경의 손가락 끝이 겁이라도 집어 먹은 듯이 조금, 아주 조금 움직였다. 조금 볼록하고 말랑하고 물기가 어린 살. 낯선 감촉... 그 바로 뒤에 속눈썹이 시작되는 뿌리가 있다.
눈. 내 눈.
“왜···.”
눈을 깜빡여 보았다. 눈을 감는 것도, 눈을 뜨는 것도 가능했다. 눈을 감싸고 있는 속눈썹의 감촉도 느껴졌다. 그런데. 서문경은 다시 속눈썹 안쪽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예의 그 느낌이 느껴진다. 하지만 손가락에는 눈알의 감촉이 생생하게 와 닿는 반면, 눈알에서는 손가락의 감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서문경은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조원이 날카롭게 일갈했다.
“자네!”
“안 아파.”
그만 하게! 조원이 성을 내며 서문경의 손을 낚아챘다. ‘놓으십시오!’, 그러나 그러기가 무섭게 서문경이 사납게 외치며 조원의 팔을 뿌리쳤다. 흥분한 서문경이 들을 수 있도록 조원이 소리를 높여 외쳤다.
“흥분하지 말게! 눈이 안 보이게 된 것이 아니야! 그저, 잠시. 그래. 일이 끝날 때까지 잠시 눈을 감겨 놓은 것에 불과하네.”
“아니라고요?”
“그래, 그러니 진정하게. 이게 무슨 짓인가.”
눈이 아주 안 보이게 된 것이 아니라는 말에 일순 안정을 찾은 듯하던 서문경이 다시 사납게 돌변하여 조원을 확 밀어냈다. 방심하고 있던 차에 어깨를 밀린 조원이 별다른 수도 쓰지 못하고 주춤, 뒷걸음질 쳤다. 서문경이 쏘아붙였다.
“일이 끝나면, 이라니 아주 작정을 하고 일을 벌이셨군요.”
“반항치 말게. 자네만 괴로울 뿐이야.”
“그래, 아주 저와는 척을 지기로 결정하셨나 봅니다? 저를 통해서 얻어 낼 것이 있으신 듯 했는데 이제는 그것도 필요가 없어지셨나 보군요. 그래서, 이번에는 어딥니까? 팔을 꺾으실 셈이십니까, 아니면 도망도 못 치게 발목을 비트실 겁니까?”
조원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자네에게도 나쁜 일은 아닐세.”
“아까도 그런 말을 들은 것 같은데요.” 서문경이 거의 으르렁거리다시피 하면서 이를 드러냈다. “같잖지도 않은 소리 집어 치우시지요.”
“이야기를 들으면 생각이 달라질 걸세.”
“듣기 싫습니다.”
“고집 부리지 말고!”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기절시켜서 끌고 간 주제에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소리를 지릅니까!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대화를 할 기본적인 예절도 돼 처먹지 않은 작자와는 대화할 마음 없습니다!”
조원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런가?’, 그가 삽시간에 낮아진 목소리로 대꾸하며 한 손을 조금 들어 올렸다. 물갈퀴 달린 짐승처럼 쭉 편 다섯 손가락이 건반이라도 두드리듯 허공에서 유려하게 움직인다. 그러나 그 물 흐르는 것 같은 움직임과는 달리 그 손가락에서는 우두둑, 마디 꺾는 소리가 났다. 조원이 천천히 서문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서문경을 쳐다보는 그의 시선은 마치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아무런 감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말했다, ‘그럼 하는 수 없군.’
“실례하겠네. 고통스러울지도 모르겠네만, 용서하시게.”
빌어먹을, 하고 서문경이 입술을 깨물었다. 반사적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눈이 안 보이는 가운데 얼마나 도망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바닥을 더듬거려 무기로 쓸 만한 것을 찾아보았지만 바닥에 있는 것은 빈약한 나뭇가지와 바늘 같은 솔잎, 손톱만한 자갈 정도가 전부였다. 그 사이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서문경은 결국 무작정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미친 듯이 달렸다. 숲에 들어와 있는 것인지 계속해서 나무와 부딪쳐 튕기나가고 비명을 지르기를 반복해야만 했다. 덕분에 서문경 자신은 달리고, 그 뒤를 따라오는 조원은 느긋하게 걷고 있는데도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좀체 벌어지지를 않았다. 자신의 뒤에 끈질기게 따라붙는 발소리가 조금도 멀어지지 않는 것에 절망하던 서문경이 다시금 비명을 삼켰다. 달리다 또 나무에 팔이 찢긴 탓이었다. 피가 나나? 화끈거리다 결국 뜨거운 뭔가가 핥듯이 살을 타고 내리는 것을 느낀 서문경은 생각했다. 그럴 만도 했다. 피부에 부딪치는 나무들이 하나같이 단단하고 단단한 비늘이라도 붙여놓은 듯 건조하면서 날카로웠다.
비늘이라도 붙여 놓을 듯한 모양에, 몸통이 몹시 건조하고 날카로운 나무···.
소나무? 그럼 소나무 숲인가? 하고 생각한 서문경은 곧 청의관 뒤편에 펼쳐져 있는 방대한 소나무 숲을 떠올렸다. 만약 그곳이 맞다면 이곳은 서문경이 무료함을 참지 못하고 몇 번이고 찾아온 적이 있는 곳이었다. 서문경은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여기가 그곳이 맞다면, 정말 그렇다면 이 숲 너머에는···. 서문경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청의관 송림 너머에는 황제의 서재인 양거재(陽居齋)가 있다. 양거재에는 서재의 책들을 맡아 관리하는 관리들과 그곳을 정리를 맡은 궁인들이 있으니 그곳까지만 도망치면 어떻게든!
“···!”
서문경은 숨을 삼켰다. 심장이 덜컹, 떨어지는 것 같다.
“부딪칠 뻔 했네.”
서문경의 뒷덜미를 붙잡은 조원이 속삭이듯 말하며, 서문경의 머리를 조금 앞으로 밀었다.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서문경의 이마에 톡, 단단한 나무 몸통이 정면으로 와 닿았다. ‘자칫하면 크게 다칠 뻔 했어.’, 조원이 다행이란 듯 웃으며 말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다정한 목소리였지만 서문경은 조금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도리어 온 몸의 피가 일순에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아.”
조원이 손을 움직였다. 서문경의 목깃과, 뒷덜미를 붙잡고 있었던 뜨거운 손이 천천히 목 앞으로 돌아가 목덜미 전체를 감싸는 것이 느껴진다. 서문경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조원이 말했다.
“이만 가지.”
끝이다!
서문경은 절망하며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 때였다.
**
엄헌영은 기함할 만치 놀랐다. 상상치도 못한 광경을 목격한 때문이었다.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지 판단도 내리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염락!”
하고 벽력같은 고함을 내지른 엄헌영의 몸이 무서운 속도로 움직였다. 순간 사라진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단숨에 자신이 있는 곳까지 내달려 온 엄헌영을 발견한 조원이 그의 목줄기를 움켜쥐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엄헌영의 손이 도리어 그의 손목을 낚아채서 꺾었다. 우두둑 뼈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독한 조원은 비명 한 명 지르지 않고 자유로운 손을 활짝 펴 엄헌영을 향해 휘둘렀다.
덕분에 조원의 손에서 풀려낸 서문경이 풀썩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하지만 서문경은 섣불리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지척에서 갑작스런 열기가 느껴진 탓이었다. 서문경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살이 따가울 정도로 위협적인 열기였다. 뒤늦게라도 정신을 차리고 움직이려 했지만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몸의 무의식적인 판단은 옳았던 모양이었다.
“움직이지 마!”
엄헌영이 날카로운 경고를 던졌다. 그가 몇 번이고 덧붙였다, ‘그 자리에서, 지금 앉아 있는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면 안 돼.’ 그가 그렇게 말했을 때는 서문경이 이미 그 기묘한 열기가 자신의 앞이 아니라 양 옆이며, 뒤 등까지 포진해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엄헌영이 억눌린 소리로 내뱉었다.
“이런 일을 벌이다니.”
“효강.” 조원이 조용히 엄헌영을 불렀다. “부탁드립니다. 그냥 못 본 척 해주시지요.”
“이런 꼴을 보고도 나한테 못 본 척 하라고? 나까지 흉수가 되라, 그 말인가.”
“효강께 손을 빌려 달라 말씀 드린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누군가 이런 짓거리를 당하는 것을 보고도 그냥 지나친다면, 설사 내 손으로 직접 사람을 해한 것은 아닐지라도 결과적으로는 같은 가해자야.”
엄헌영이 코웃음까지 치며 한 대답에 조원이 긴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그러니까 제 청을 들어주실 생각은 없으시단 말씀이군요.’ 조원의 손가락이 꿈틀 움직이는 것을 본 엄헌영도 남은 한 손으로 재빨리 칼을 빼들었다. 조원이 손을 조금 들어올렸다. 그의 다섯 손가락 끝에서는 무시무시한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럼 잠시 조용히 계셔 주셔야겠습니다.”
“오만하기 짝이 없군.” 자신이 잡고 있던 손에까지 확 불길이 타오르자 민첩하게 그 손을 떨쳐내고 물러나 적당한 거리를 확보한 엄헌영이 이를 갈았다. “내가 얌전히 당해줄 것 같나.”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조원이 빙긋이 웃었다. 그가 한 팔을 앞으로 뻗었다. 그리고 나머지 팔을 반대편 팔 손목 근처에 가져다 대는가 싶더니, 뒤로 죽 당겼다. 마치 활시위를 당기는 듯한 모습. 그리고 실제로도 조원이 움직이는 대로 불꽃이 움직여 성인 남자 팔 한 짝만 한 불화살을 만들어냈다. 그 화살이 똑바로 엄헌영 쪽을 향했다.
“압니다. 용호군 중장랑 1령 장군 효강 엄헌영이라면 도적이나 이민족들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낯빛이 시퍼레지는 용장(勇將)이지요. 허나, 이러면 어떻습니까? 제 아무리 검이 빠르기로 소문이 난 효강이라도 활이 상대라면.”
“활보다는 외인(外人) 술사 중 으뜸이라는 염락 조원이 상대라는 사실이 문제겠지.”
“높게 평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조원이 웃으며 말한 다음, 불 시위를 당기고 있던 손가락을 한 번 튕겼다. 쉭! 매서운 소리를 내며 불화살이 튀어나갔다. 엄헌영이 침착하게 불화살을 칼로 쳐냈다. 그러나 칼날에 닿은 순간, 불화살은 꺼지거나 튕겨 나가기는커녕 갑자기 길게 늘어나 칭칭 밧줄처럼 칼날을 휘감았다. 칼날이 새빨갛게 달아오르자 엄헌영이 깜짝 놀랐다.
“이건?!”
“어떤 상황에도 검을 놓지 않는 것이 장수의 미덕이라지만 지금은 그 미덕을 버리시는 것이 신상에 좋을 겁니다.” 조원이 말했다. 이미 조원은 두 번째 화살을 준비하고 있었다. 엄헌영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조원이 빙그레 입술로만 웃는다. “이 염락(炎樂)을 상대로는 말입니다.”
염락···, 조원 스스로가 말한 조원의 호를, 엄헌영이 새삼스럽게 되뇌었다. 염락, 불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술사라 하여 붙여진 이름. 그러나 염락의 염(炎)은 또 다른 의미로 더 많이 쓰였다. 그것은···!
“그래서···!”
제기랄! 엄헌영이 욕설을 내뱉으며 들고 있던 검을 내팽개쳤다. 스멀스멀 검을 타고 내려온 검붉은 기운이 엄헌영의 손에까지 혀를 내밀려는 참이었다. 바닥에 내던져진 검이 치지지직, 타는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부식했다.
“독시(毒矢)!”
“그러고 보니, 효강께서는 제 ‘힘’을 상대해 본 적이 없으시지요?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름대로 불을 다루는 것이 제 힘입니다.” 다만. 조원이 가볍게 단서를 붙였다. “오염된 불이지요.”
자칫 잘못하시면 팔다리가 썩어 떨어져 나갈 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심하십시오. 따위의 가식을 떨고 있는 조원을 엄헌영이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엄헌영이 부식되어 초라한 몰골로 바닥을 뒹굴고 있는 검 대신 검이 담겨 있던 검실(劍室)을 빼들었다. 가죽이라고는 하지만 그 무게와 경도가 웬만한 검 못지않은 물건이었다. ‘그것으로 되시겠습니까.’, 그러나 제 아무리 견고하게 만들어진 검집이라 해도 그것을 무기에 비할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조원은 염려하는 척 엄헌영을 조롱하였다. 엄헌영이 그 조롱에 싸늘하게 답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봤군. 가볍기는 해도 이런 짓을 할 위인으로는 보지 않았는데.”
“좋게 보아 주셨다니 고마운 말씀입니다만, 효강께서도 참 사람 보는 눈이 없으십니다.”
“그래, 맞는 말이지.” 엄헌영이 인정했다. 그러니 이렇게 끝도 없이 뒤통수를 쳐 맞는 거겠지. 혀를 차며 한탄한 그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허나, 자네의 진짜 힘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애초부터 상종도 하지 않았을 거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서문경은 마른침을 삼켰다. 엄헌영의 목소리가 완전히 변한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엄헌영이 조원에게 말할 때의 목소리가 다소 부루퉁한 면이 있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친애와 인간적인 온기를 담고 있었다면, 지금 그의 목소리에는 온기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온기가 사라진 자리를 대신 채운 것은 차디찬 경멸이었다. 황제를 언급할 때와 비등한,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그 때 조원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웃었어? 뜻밖의 상황에 서문경은 그만 얼이 빠졌다. 그 목소리를 듣고도 어떻게 웃을 수가 있지?
조원이 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습니까. 하기는. 제대로 정신 박힌 인간이라면 다들 그러겠지요. 이해합니다.” 조원이 탈탈 손을 터는 시늉을 했다. “그간, 즐거웠습니다, 효강.”
“···희, 그 놈은 네가 무슨 짓거리를 했는지 알고는 있는 게냐. 어떻게 네 힘을 알고도 네 놈을 곁에 두고 있지?”
“글쎄요.” 조원이 애매하게 대답했다. “효강께서는 이해하지 못하실 지도 모르겠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더러운 손을 빌려서라도 꼭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을 수 있는 법이니까요.”
“더러운 손으로 이룬 소원이 무슨 가치가 있나.”
그 말을 듣고 조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 효강께서는 이해하지 못하신다는 겁니다. 엄헌영이 미간을 구기자, 조원이 덧붙였다.
“부럽군요.”
“뭐?”
“효강 당신이라면 같은 상황이었더라도 나나 그 분 같은 지경이 되지는 않았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됐습니다. 이미 모든 것은 망가졌고,” 끼기기긱. 시위가 당겨졌다. “남은 것은 끝을 보는 것 뿐.”
핑!
불화살이 매서운 소리를 내며 바람을 갈랐다. 그 화살이 단순한 불화살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엄헌영을 화살을 쳐내는 대신 화살을 피하며 조원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목표물을 놓친 화살은 그대로 나무나 흙바닥 따위에 가 꽂히는 대신 머리를 틀어 다시 엄헌영을 향해 돌격했다. 그 기색을 눈치 챈 엄헌영이 깜짝 놀라 몸을 비틀었다. 휘두른 검집이 조원에게 명중하기 직전의 일이었다.
“안 됩니다.”
이 염락을, 아무런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맞서시다니요. 조원이 충고했다. 엄헌영이 조원을 노려보다가, 불현듯 두 눈을 홉떴다. 서문경은 흠칫 몸을 떨었다. 늘었어. 느껴지는 열기가 몇 배로 늘었다. 서문경의 느낌은 사실과 일치했다.
조원의 주위에 채 다듬어지지 않은 수 십 개의 불덩이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아무리 천객이라고 하지만 저런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 귀기 어린 광경에 저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조원이 손을 들어 자신의 주변을 날아다니는 불덩이 중 하나를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고정된 형태가 없던 불덩이가 뾰족한 화살 모양으로 변했다. 또 다른 불덩이로 손을 옮기며 조원이 물었다.
“계속 하실 겁니까, 효강. 저 아이,” 조원이 힐끗 서문경에게 시선을 던졌다. “효강에게 있어서는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아이가 아닙니까.”
“···조금 불리해졌다고 꽁무니를 빼란 말인가.”
“하기는, 장군께 있어서 중요한 것은 상대가 아니라 장군의 정의지요. 제가 괜한 것을 여쭈었군요. -그럼 하던 것이나 계속해 볼까요.”
꿀꺽.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뇌성처럼 울렸다. 조원이 만들어낸 독화(毒火)가 모조리 독시가 되어 정확히 엄헌영을 향하고 있었다. 저것을 다 피할 수 있을까. 엄헌영이 생각했다. 불가능하다. 제대로 된 방비라도 했다면, 아니면 처음부터 염락의 진짜 ‘힘’을 알았다면. 그러나 지금 후회해봐야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었다. 엄헌영의 시선이 힐끗 서문경을 향했다. 그렇다면···.
그 때 조원이 말했다.
“너무 큰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장군. 제가 설마하니 운현궁 마마께서 총애해 마지않으시는 질자인 엄장군을 죽이기라도 하겠습니까.”
하지만 어딘가 약간 문제가 생길지는 모르지요. 그 말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독화살이 일제히 엄헌영을 향해 달려들었다.
엄헌영은 달리기 시작했다. 목표를 잃은 독시가 엄헌영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엄헌영은 키 큰 송목을 방패로, 잽싸게도 화살을 피해갔다. 엄헌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독시들이 나무에 부딪칠 때마다 조금씩 희미해져갔다. 조원이 다시 독화살을 만들어내, 이번에는 반대편에서 화살을 쏘았다. 양편에서 공격을 받은 엄헌영이 흠칫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엄헌영은 영리하게 화살을 피하며 달렸다. 조원이 한 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엄헌영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눈치 챈 것이다.
“장군답지 않군요.”
조원이 서문경의 뒷덜미를 확 잡아챘다. 숨을 죽이고 주변의 소리를 귀담아 듣고 있던 서문경이 숨을 삼켰다. 그 순간, 마치 시야에서 사라진 듯 했던 엄헌영이 서문경의 뒤에서 튀어나와 서문경의 팔을 잡았다. 조원이 손에 힘을 주었다.
“도망치시는 겁니까?”
“그래.” 숨조차 헐떡이지 않고 엄헌영이 검집을 치켜들었다. “굳이 자네를 상대해야 할 필요가 있나?”
휙! 묵직한 검집이 횡으로 허공을 갈랐다. 검집이 똑바로 조원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꽂혔다. 사람이라기보다는 숫제 맹수에 가까운 그 움직임을 조원이 따라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검집을 피하려다 가슴팍을 맞은 조원이 제 키만큼이나 뒤로 나가 떨어졌다. 그러나 독하게도, 조원은 나오는 비명을 삼키고 팔을 힘껏 휘저었다.
송림을 돌아다니고 있던 독시가 일시에 사방에서 엄헌영을 향하며, 동시에 사람 머리통만한 불덩이가 몇 개나 새로이 떠올랐다. 막 서문경을 붙잡아 달아나고 있던 엄헌영이 그 꼴을 보고 이를 갈았다. 조원이 목소리를 높여 경고했다.
“멈추십시오, 효강.”
그렇게 말하는 조원의 머리 주변을 수 개의 불덩이가 경고하듯 빙글빙글 돌았다.
“당장 멈추지 않으면.” 걔 중 하나가 지척에 있는 나무에 가 붙었다. 몇 십 년이 족히 되었을 키 큰 나무가 거짓말처럼 불타 재로 변했다. 조원이 나직이 말을 이었다. “숲을 불태우겠습니다. 그 때까지 당신이 숲을 빠져 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미쳤군. 숲에 불을 지르겠다고?”
“못 할 것도 없지요.”
“나도, 이 녀석도 죽일 셈인가!”
“그러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조원이 웃었다. “필요하다면.”
“···!”
조원이 다가오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엄헌영은 서문경을 내어줄 수가 없었다. 서문경에 대한 마음이 애틋해서도, 조원이 그럴 리가 없다고 방심해서도 아니었다. 엄헌영이 콱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굴복하면, 나 또한.
-···를 내어 주십시오.
그 끔찍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하던 그 남자의 목소리가, 소녀의 비명이, 소년의 울음소리가, 그리고 모든 것이 박살나고 만 처참한 결말까지. 엄헌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여기서 굴복하면, 나 또한 똑같은 인간이 된다. 이대로 불에 타 죽는 한이 있어도 그럴 수는 없다.
“···거절하지.”
엄헌영이 기어코 고개를 저었다. 틀림없이 그가 자신을 내어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서문경의 눈이 커졌다. 그와 반대로, 엄헌영을 내려다보는 조원의 눈은 가느스름해졌다. 가늘어진 눈 속에서 추악한 질투와 순수한 감탄이 서로 뒤엉켜 번뜩였다.
“···좋습니다.”
하나하나가 사람 머리통만 하던 불덩이가 한데 합쳐지기 시작했다. 멀리 있어도 피부가 아플 정도로 열기가 뜨거워졌다. 서문경이 엄헌영의 팔을 붙잡고 소리쳤다.
“무슨 짓입니까, 혼자라도 도망치십시오!”
“조용히 해.” 엄헌영이 눈으로는 계속 조원을 노려보며 속삭였다. 그가 서문경의 손을 바닥에 꾹 짓누르더니 그것을 바닥에 천천히 끌어 어딘가로 향하게 했다. “알겠나? 지금 네 엄지가 향하고 있는 방향. 무조건 그 쪽으로 뛰어.”
“당신은···.”
“네 녀석을 끌고 도망치는 것보다는 나 혼자가 빠르겠지. 그러니까 거치적거리지 말고 가라.”
서문경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엄헌영은 마치 서문경만 없으면 쉽게 조원의 손아귀를 빠져 나갈 수 있는 듯이 말했지만 그것은 결코 사실이 아니었다. 눈은 닫혔지만 귀는 열려 있었다, 그러니 모를 수가 없었다. 저 무시무시한 불이 옮겨 붙는데 걸리는 시간은 그야말로 눈 깜빡할 사이.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도망쳐야 한다. 약간만, 약간만이라도 조원의 눈길을 끌 수 있으면···.
그 순간, 서문경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시간을 벌기만 하는 거라면 나도 할 수 있어.
서문경이 엄헌영에게 속삭였다.
“제가 신호를 보내면, 바로 뛰십시오.”
“뭐?”
서문경이 대답 대신 두 손바닥을 붙였다.
제발.
서문경이 하는 꼴을 발견하지 못했을 리가 없는 조원이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왜. 재롱이라도 부려 볼 텐가?”
“······.”
서문경은 이를 악물었다. 쾅! 굉음이 터지며, 하늘에서 화려한 불꽃이 터졌다. 하하하하! 조원이 크게 웃으며 색색 깔의 불꽃이 터지고 있는 하늘에 시선을 주었다. 조원이 서문경을 조롱했다.
“참으로 어여쁘군. 하지만, 이것이 단가?”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염락.”
뜻밖의 목소리가 조원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조원의 눈이 커지며, 그의 얼굴이 경악으로 휩싸였다. 조원이 뒤를 돌아보는 순간, 엄헌영이 소리쳤다.
“희?!”
“뛰십시오!”
서문경이 소리를 지르며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상황을 채 파악하지 못한 엄헌영이 일단 서문경이 끄는 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주춤거리며 조원이 있는 쪽과 서문경이 가리키는 쪽을 번갈아보았다. 서현은 조원을 향해 그리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다가가며 한 손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서현의 손바닥 위에 둥실, 새빨간 불덩이 하나가 떠올랐다. 엄헌영과 조원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서현은 불의 술사가 아니므로 매개를 통하지 않고 바로 불의 술법을 쓸 수는 없었다. 상황을 먼저 파악한 이는 조원 쪽이었다. 당혹감이 어려 있던 얼굴이 여유를 되찾았다.
“환각이군.”
“뛰라고 했잖습니까!”
서문경이 엄헌영의 소매를 끌었다. 그러나 이미 조원은 서문경이 만들어낸 서현의 환각에게서 시선을 돌려, 서문경과 조원 쪽을 쳐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서현의 환각이 만들어낸 불이 더 높이 떠올랐지만 조원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환각에 불과한 불. 그것도 환각인 서현이 만들어 낸 환각이 낳은 환각에 불과한 불이다. 아마도 진짜 불처럼 뜨겁지도, 뭔가를 태울 수도 없을 것이다.
서문경은 엄헌영과 함께 이를 악물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늦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제는 모든 것을 운에 맡길 뿐이다.
확, 불길이 일었다. 열기가 온 숲 안에 번졌다. 서문경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눈이 멀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보다 더 큰 절망이 불처럼 번졌다. 뱀처럼 시뻘건 혀를 날름거리며 달려온 불이 서문경과 엄헌영의 뒤를 덮쳤다.
하지만, 숲 안을 울린 것은 고통에 찬 비명이 아니라 의문에 찬 고함이었다.
“어째서?”
더군다나, 조원의.
서문경이 멈춰 섰다.
“어째서···.”
뜨겁지 않았다. 엄헌영 또한 발걸음을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서문경은 그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그을린 곳 하나 없는 자신의 몸을 더듬거리던 서문경이 곧 조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온 숲 안에 불길이 파도처럼 일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불길은 불투명한 유리 너머로 본 것처럼 명도(明度)가 낮았다. 일렁거리며 나무며 사람 따위를 타고 오르는 불꽃은, 그러나 풀 한 포기도 태우지 않았다.
단 한 사람, 조원을 제하면.
그 불꽃과, 조원의 검붉은 불꽃이 끝도 없이 맞부딪치고 있었다. 불과 불이 부딪치자, 양 쪽이 거품처럼 허공으로 사라졌다. 서로의 힘이 비등하여 상쇄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원래 없었던 것처럼! 지금 이 순간도 검은 불꽃이 이글거리는 손을 자신을 향해 입을 벌리고 달려드는 불꽃을 향해 휘두르고 있던 조원이 불현듯 머리를 치켜들고 서문경을 노려보았다. 서문경 자체를 향한 눈길이라기보다는 지금 벌어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분노였다.
“어째서지?”
고작 환상에 불과한 것이 어째서!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서문경도 해줄 수 없었다. 그런 서문경을 엄헌영이 재촉했다.
“어서!”
서문경이 대답도 하기 전에, 엄헌영의 우악스런 손이 서문경을 억지로 끌고 숲 밖으로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