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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의관으로 태황태후의 전언(傳言)을 전하러 갔었던 궁인이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 꼴을 보고 단박에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눈치 챈 태황태후 엄씨가 표정을 싹 굳혔다. 서릿발이라도 날릴 듯이 냉랭해진 상전의 눈빛에 잔뜩 움츠려 든 상궁이 깊숙이 수그린 머리를 더더욱 깊숙이 수그렸다. 그 하얀 가리마 위로 태황태후의 따가운 타박에 떨어졌다.
“장하다. 아주 장해.”
“소, 송구하옵니다, 마마.”
“자네, 그리 안 봤건만 어디 머리라도 모자라던가? 어찌 그 쉽살한(: 매우 쉽다) 일 하나도 제대로 해내지 못해?”
모욕적인 말에 궁인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벌게졌다. 아랫것들이 모멸감을 느끼든 말든 그런 것에 신경 쓸 리가 없는 태황태후가 제 가슴께를 주먹으로 탕탕 쳤다. 그런 태황태후를, 상궁이 들기 전부터 방 안에 들어 있던 중년 사내가 만류했다, ‘마마, 옥 같으신 몸이 상하실까 두렵사오니 심기를 다스리십시오.’ 자신의 충고에 태황태후의 행동이 멈칫하자 남자가 상냥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너그러우신 마마께오서 용서하십시오. 천한 것이 괜히 천한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그렇소만.” 태황태후가 괜한 헛기침을 몇 번 했다. “허나 체제공이나 헌의공을 보기가 부끄러워서, 원···.”
“하는 수 없지요. 이왕 일이 그렇게 되었다니 지금 와서 무얼 어쩌겠습니까.”
남자의 시원스러운 대답에 조금 표정이 누그러진 태황태후가 긴 한숨을 한 번 폭 쉬고는 어조를 달리하여 물었다.
“헌데 어찌해야 하겠소? 일이 이리 되리라곤 예상도 못 했지 뭐요. 참으로 괴이한 일이 아니요? 내 운현궁으로 행보하시라 한 것도 아니고, 황상의 침전인 천추전으로 돌아가시라 권했을 뿐인데. 이 말 어디에 의심쩍은 부분이 있었을꼬?”
체제공은 짐작이나 가시오? 태황태후가 어린 계집아이마냥 머리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그 꼴을 잘도 웃는 낯으로 보고 있던 서엽이 시선을 조금 옆으로 돌려 문지방 너머에 엎드려 있는 상궁을 보았다. 상궁의 납작한 등이 흠칫 떨리는 것을 뜯어보는 듯한 시선으로 보면서 서엽이 태황태후에게 말했다.
“신 또한 짐작 가는 곳이 도통 없습니다. 그러니 직접 상황을 본 아이에게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지 않았습니까.”
“저 아이에게 말이요?” 태황태후가 불만스런 투로 서엽의 말을 받았다. “글쎄, 그럴 만한 주제가 되는지도 모르겠구려. 허나 별 다른 수가 없으니···.”
그러고서 태황태후는 궁인에게 까닥 턱짓을 해보였다, ‘어디, 해보려무나.’ 궁인이 넙죽 엎드린 몸을 바로 세울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마마의 말씀은 분명히 전했사옵니다.”
“누가 네 변명부터 하래더냐.”
“그, 그런 것이 아니오라.”
‘상전이나 종이나 똑같군.’, 이래서는 제대로 된 말도 한 번 못 들어보겠다 싶어 서엽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태황태후를 달랬다.
“일단은 들어 보지요.”
그의 만류에 태황태후는 못 이기는 척 물러났지만 처녀 적처럼 고운 얼굴 여기저기에 심술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서엽이 궁인을 재촉했다, ‘계속 말해보련.’ 그런 서엽에게 궁인이 감격한 시선을 보냈다.
“마마의 당부대로, 청의관으로 향하니 그곳에 황상이 계시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대전 대령상궁인 연재상궁에게 청을 넣어, 폐하를 배알하였나이다. 폐하께서는···,”
“수객과 함께시더냐?”
“예. 수객이 묵는 방인 청의관 호박방에 폐하가 계시었습니다.”
“무슨 연유로 황상이 호박방에 행차하신 것인지는 혹여 알고 있느냐?”
“황상께서는 이전에도 종종 청의관으로 행차하시곤 하시던 것으로 알고 있나이다. 다만 이번에는 단시간이 아니라 몇 날간이나 내내 청의관에 머무셨다는 것이···.”
서엽이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생각 이상으로 황상께오서 그 수객에게 빠져 계시는 듯하구나.”
그 때 지지부진한 대화가 오가는 것을 참지 못한 태황태후가 목소리를 높이며 끼어들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소!”
“물론입니다.” 태황태후가 언성을 높인 것에 조금쯤은 기분이 상할 만도 하건만, 그런 티는 약간도 내지 않고 서엽이 선뜻 수긍했다. 그리고서 그가 물 흐르듯 화제를 돌렸다. “헌데, 어찌하여 황상께서 침전으로 돌아가지 않으신 것이냐? 황상께서 무슨 눈치를 채셨다면 연유가 있을 것이 아니더냐?”
“분명히 네가 입을 잘못 놀렸겠지.”
하고 말한 것은 물론 태황태후였다. 서엽이 그 말을 부드럽게 받아 넘겼다.
“어쩌면 그랬을 수도 있겠고, 혹은 아니었을 수도 있겠지요, 마마. 그래, 아가야. 사실은 어떠하냐?”
서엽의 호의적인 태도에 용기를 얻은 궁인이 순순히 대답했다.
“처음 전언을 들으셨을 때에는 황상께서도 곧바로 침전으로 행차하실 눈치셨습니다. 헌데 그 때···.”
“그 때···.”
그러나 거기까지 말한 궁인은, 차마 그 뒤를 이을 수 없다는 듯이 말을 멈추고 애꿎은 입술만 달싹거렸다. ‘저 애가 또!’, 속이 답답해진 태황태후가 또다시 수선을 피웠지만 궁인은 몸을 벌벌 떨지언정 다시 입을 열지는 못했다. 그녀가 하는 꼴을 찬찬히 뜯어보고 있던 서엽이 어느 순간 불현듯 물었다.
“누가 온 게냐?”
화들짝 놀란 궁인이 펄떡 앉은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눈이 휘둥그레진 태황태후가 당장에 물었다.
“누가 왔다니? 그것이 무슨 소리요? 아니, 그것보다 헌의공은 어찌 그것을 아시오? 얘야, 헌의공의 말이 사실이더냐?”
“예, 예에, 마, 맞습니다.”
얼떨떨해 하고 있던 궁인이 갑작스런 질문에 자신도 모르게 대답하고는, 헉, 하며 숨을 삼켰다. 서엽이 빙그레 웃었다.
“이만 되었다.”
“예? 어르신, 무슨···.”
“대충 알겠으니 되었다는 말이다.”
하며 서엽이 휘휘 손을 저었다. 당황한 궁인이 무심코 주춤주춤 몸을 일으켰다가 뒤늦게 태황태후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태황태후는, 딴 데 정신이 팔린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 자신조차 자신보다 서엽을 우선시하는데 익숙해진 것인지 별 다른 눈치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태황태후가 서엽의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릴 듯이 움찔움찔 손을 뻗었다 거뒀다를 반복하며 물었다.
“무어요? 대체 어떻게 된 거요?”
궁인이 살그머니 궁둥이를 들고 뒷걸음질 쳐 사라지는 것조차 알지 못하고 태황태후가 서엽을 닦달했다.
“무얼 아셨다는 게요? 혼자만 알고 계시지 말고 이 늙은이에게도 알려 주시구려.”
“늙은이라니요, 운현궁의 옥경께서 겸손이 지나치십니다.” 능숙하게 태황태후의 체면을 세워준 후에 서엽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현이, 그 아이입니다.”
태황태후의 눈이 커졌다.
“현아···, 라면 상국을 말하는 게요?”
“그렇습니다, 마마.”
“아니, 그럼···, 더더욱 상황이 이상하지 않소.”
당혹한 나머지 태황태후가 말을 더듬었다.
“아니 그렇소? 수상이 청의관에 들어 직접 황상과 독대를 하였는데 어찌 황상이···.”
“자세한 것은 신도 알 수 없음이옵니다. 다만 상궁의 반응으로 미루어 보아, 그 당시 그 자리에 든 것이 현이였다는 것뿐이지요.”
“그렇다면 어째서,” 태황태후가 그제야 비로소 상궁이 사라진 것을 알고 놀랐다. “헌의공께서 내보내신 게요? 어찌 그러셨소?”
“그 이상은 상궁 아이도 알지 못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지요.”
하는 말을 듣고 태황태후가 입을 다물었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겐가, 서엽이 겉으로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운현궁의 옥호(玉狐)라는 이름이 아깝구나, 예나 지금이나 어찌 저리 한결 같이 아둔할 수 있는가. ‘들어 보시옵소서, 마마.’하며 서엽은 말을 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이전보다 훨씬 더 다정하여 마치 구름 속에 싸여 있는 것 같았다. 푹신한 위선에 감싸인 목소리에 깜빡 넘어가 태황태후가 부드럽게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말씀하시오. 그래, 헌의공께서 생각이 있으시니 그리 하셨겠지.”
“고작 상궁에 불과한 이가 만인지상 일인지하인 수상과 지존이신 황상이 마주하는 자리에 감히 동석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합니다. 그러나 십 중 팔구는 하상궁을 물리고 독대를 하였겠지요.”
“···옳소. 그렇구려. 그래, 하상궁이 수상과 황상이 독대한 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래, 그래서 헌의공이 하상궁을 내보낸 것이구려. 이제 알겠소. 헌데···.”
태황태후가 도통 알 수가 없다는 듯이 한 쪽 눈을 찡그렸다.
“이것만은 정말 모를 일이구려.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사달이 났을꼬. 수상과 독대한 자리에서 황상께서 무언가 언짢아 하실만한 말이 오갔던 것인지, 아니면 수상이 따로 생각하는 바가 있어 황상을 만류한 것인지. 수상을 운현궁으로 불러들여 사정을 묻는 것이 나을지···, 어떻게 생각하시오?”
태황태후가 의견을 묻자, 서엽이 그 말에 대꾸하는 척 하면서 이전의 화제로 회귀했다.
“다른 치가 끼어들었을 수도 있지요.”
“다른 치?” 태황태후는 콧잔등이를 찡그렸다. “황제와 수상이 독대하는 자리에 청의관의 그 누가 자리를 보전하고 있을 수 있단 말이오?”
“법도를 넘어설 수 있는 이가 하나 있지 않습니까.”
“무슨 말이요. 용님께서 내리신 법도를 어길 수 있는 이가 세상 천지에 어디···.”
태황태후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아, 하는 탄성이 붉게 연지를 칠한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수객···, 말이요?”
“신의 짐작은 그렇습니다.”
“하기는, 그토록 황상이 귀애하는 이이니 그 아이의 청이라면 충분히 성심이 움직일 만도 하지. 헌데 수객이 무슨 심산으로 그런 짓을 했을꼬? 또한, 무슨 일이 있을지는 어찌 알고?”
해답을 구하듯 태황태후가 서엽을 올려다보았다. ‘신의 생각은···.’하고 서엽이 일부러 말꼬리를 끌자, 태황태후가 무심결에 상반신을 서엽 쪽으로 기울였다. 그녀의 귀가 쫑긋하는 것이 마치 눈에 보일 듯 했다. 참으로 다루기 쉬운 사람일세, 서엽이 냉소적으로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신도 일전에 그 물손님을 한 번 본 적이 있었습니다만, 참으로 영악한 아이였사옵니다.”
“그래. 무척 똘똘하더이다.”
“그런 아이이니, 듣기에 별반 의심스런 구석이 없는 말일지라도 태황태후전의 전갈이라 하니 먼저 의심부터 하고 보았을 것입니다.”
“허어.”
“황상과는 깊은 친분이 있는 아이인지라, 아마 근래 황상께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충분히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서엽의 목소리가 나직해지자, 태황태후의 귀가 저절로 솔깃해졌다.
“투기(妬忌)를 하였을 수도 있지요.”
“투기라?”
놀란 나머지 태황태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 아이가 황상께 마음이 있었단 말이오?”
“혹은 부귀영달을 탐하였거나.”
“그런 아이로는 보이지 않았건만···, 하기는. 사람이란 속을 알 수가 없는 법이니.” 혼잣말처럼 입 속으로 중얼거리고서 태황태후가 바닥을 탁 쳤다. “이제야 상황을 알겠구려. 고얀 것, 강샘에 눈이 멀어 그런 짓을 하다니.”
서엽이 태황태후를 은근하게 자극했다.
“그냥 넘기시면 안 될 일입니다, 마마.”
“허나 어쩌란 말이오? 헌의공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소? 그 물손님은 예의 법도 바깥에 있는 이요. 무슨 명분으로 그 아이를 단속하란 말이오?”
“마마께서는 큰 어른이십니다. 먼저 이 세상에 나시어 온갖 역경을 헤치며 연륜을 쌓으신 어른이시니 치기 어린 젊은이를 꾸짖을만한 충분한 자격이 되시지요. 더구나, 마마께서는 황상의 할마님 되시는 분이 아니십니까?”
살살 추켜세우며 부추기는 말에 태황태후가 까무룩 속아 넘어갔다.
“헌의공의 말을 듣고 나니 그것도 그렇구려. 하기는. 어른 된 도리로 아까운 젊은이가 올바르지 못한 길로 가는 것을 빤히 보고도 방관하는 것도 못할 짓이지.” 태황태후가 바로 머리를 돌려 사람을 불렀다. “여보게, 거기 누구 있는가.”
그런 태황태후를 서엽이 조용히 불렀다, ‘마마.’ 동시에 밖에서 ‘마마, 찾아 계시옵니까.’하며 충실한 나인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손짓을 해보이고 태황태후는 서엽 쪽을 돌아보았다.
“어찌 그러오?”
“태황태후전에서 사람을 보냈다 하면 물손님이 저어하기도 전에 먼저 황상께오서 막아서실 것이 뻔한 일이옵니다.”
“그럼 어찌하면 좋겠소?”
“신에게 이 건을 일임하여 주십시오.”
태황태후가 반색을 했다.
“그래 주겠소?”
“물론이옵니다.”
하고 공손히 대답한 서엽이 태황태후의 윤허를 받고 운현궁 침방을 빠져 나왔다. 서엽이 침방에서 나서기가 무섭게, 그 앞을 지키고 있던 지밀나인들이 풀줄기가 쓰러지듯 픽픽 그 앞에 절하며 예를 표했다. 마치 서현에게나 하던 식의 극상의 예였다.
나붓나붓이 절을 하는 나인과 환관들을 본 척도 하지 않고 서엽은 운현궁 밖으로 내려섰다. 그는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았건만 신을 신으려 내민 발에 신이 신겨졌다. 신을 신은 서엽이 천천히 걸어 운현궁 본전(本殿)에서 멀어졌다. 서엽의 발에 신을 신겨 주었던 남자를 포함한 사내 몇몇이, 서엽의 그림자를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기는 십여 분, 서엽이 불현듯 말했다.
“자네, 걔 있는가.”
서엽의 뒤를 조용히 따르고 있는 이들 중 하나를 부르는 것은 아니었던 듯,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서엽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그 물손님을 꾀어 내게로 데려오게.”
그렇게 요구하는 서엽의 시선이 닿아 있는 곳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다랗게 자란 백색 나무, 더 정확히는 그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는 작은 새였다.
“자네와 나는 이미 한 배를 탔다는 것을 잊지 말아. 그대가 그토록 원하는 것을 손에 넣으려면, 끝까지 나를 충실히 따라야 할 것이야.”
서엽이 새의 새카만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덧붙였다, ‘명심하게. 자네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는 이는 나뿐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말이 끝난 지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지금껏 조각처럼 앉은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던 새가 커다랗게 홰를 치더니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다.
그것을 확인한 서엽이 자신에게 신을 신겨 주었던 수하를 불러 일렀다.
“중무장군 강환의 사택에 언질을 넣어 그 사내애를 데려 와라. 그 어미란 년이 부귀영화에 눈이 먼 속물이니 아주 환장을 하고 달려들게다.” 그런 다음, 하고 덧붙이는 서엽의 한 쪽 입꼬리가 슥 위로 치켜 올라갔다. “청의관 호박방으로 납매를 밀어 넣거라.”
명령을 받은 사내가 잰걸음으로 운현궁 정문을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을 잠시간 쳐다보고 있던 서엽이 조금 뒤 몸을 돌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가 중얼거렸다, ‘희야. 소희야.’
“장수가 움직이지 않을 때는 그 말을 쏘면 되는 법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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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한 바탕 폭풍우가 휩쓸고 간 듯하였다. 안온한 호박색 벽지가 발려진 방 안이, 방 안을 가득 채운 고운 빛깔이 무색하도록 스산했다. 갉작, 갉작, 갉작. 자신이 애꿎은 만화방석(滿花方席) 위 동백을 갉작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서문경이 손을 멈추자, 방 안에서는 소리라는 것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서문경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수석 위에 수놓인 붉은 동백이, 도백색 매화가, 푸르른 자양화가 눈 안에 들어온다. 붉고, 희고, 푸르다. 그것을 머리로는 인지하고 있었지만 가슴까지는 와 닿지 않았다. 모든 생각이 한 곳으로만 쏠려 있는 탓이다.
텅, 하며 우물 속에 빠진 기분.
초조하거나 조급한 마음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어딘가 잘못 되었다는 막연한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무엇이 어그러졌을까···.
“이상하네요.”
생각에 잠긴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던 모양이다. 수상 서현이 호박방에서 퇴실한 이후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던 황제가 자신 쪽으로 힐끗 눈길을 던지는 것이 느껴졌다. 서문경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지, 아니면 그 또한 상념에 잠겨 있는 것인지 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서문경은 말을 이었다.
“그 사람···, 좀 이상한 것 같습니다.” 하고 말해 놓고 서문경은 눈을 찡그렸다. 말을 잘못 고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 미묘하게 핵심에서 빗겨나가는 기분. 뭐라고 해야 할까···. “그 사람 자체가 이상하다는 말이 아니라···, 행동이나 말이···.”
그 때야 비로소 황제가 입을 열었다.
“무어가 이상하단 말이냐.”
“폐하께서는 못 느끼셨습니까?”
서문경이 우물거렸다, ‘그렇다면 아니겠지만.’
마치 연기 못하는 배우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극 속의 인물에 녹아나지 못하고 새로 만들어진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나’라는 자아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배우를 보는 듯한 느낌. 하지만 자신보다도 훨씬 오랫동안 서현을 보아온 황제가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했다면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착각에 불과할 것이다···.
그 생각에 쐐기를 박듯 황제가 다시금 말했다.
“무어가 이상하다는 것인지, 짐은 모르겠구나.”
“예···.” 하고 서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착각이었구나. 하지만 어째서 목에 가시가 박힌 듯한 기분이 사라지지를 않는 걸까, 그 가시가 자신의 머리가 만들어낸 착각에 불과한 것인데도.
그래서 서문경은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그런데 이유가 뭘까요? 무슨 이유로 갑자기 태황태후전의 말은 듣지 말라고 했었던 걸까···, 사이가 틀어진 걸까요. 굳이 따지자면 한 편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사이가 틀어진 것은 아닐 게다.”
워낙 오래된 사이니, 황제가 턱을 괴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서문경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더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러자 황제가 아무려면 어떠냐는 식으로 툭 내뱉었다. 시선은 창밖을 향한 채였다.
“무어. 또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겠지.”
“폐하···.”
이 사람이 진짜. 서문경이 벌컥 짜증을 냈다.
“그러니까 그 꿍꿍이가 뭔지 알아내야 할 것 아닙니까.”
“알아내어 무얼 하게.”
“못 하게 해야지요!”
“아서라.” 황제가 열을 내는 서문경이 도통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휘휘 손을 저었다. “꿍꿍이가 좀 있으면 어떠누. 암계를 좀 꾸미면 어때. 그것이 하루 이틀 일이었더냐?”
서문경이 정색을 하고 반박했다.
“이전에 날아온 화살은 폐하의 새끼손가락을 찌르고 왼 볼을 긁고 지나갔을 수도 있지요. 그런데 과거는 과거일 뿐입니다. 어떻게 앞으로도 그러리라고 확신하십니까? 그 화살이 이번에는 폐하의 손가락이 아니라 목을 향해 날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걸 그냥 미련하게 맞고 계실 겁니까? 피해야지요! 그러니, 그 화살을 피하려면 화살이 어디서 날아오는지부터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앉거라, 경아. 날도 더운데 왜 열을 올리고 그래.”
흥분한 서문경이 무안할 만치 황제가 심드렁한 태도로 대꾸하며 제 옆의 바닥을 몇 번 쳤다. 서서 설치지 말고 얌전히 앉아 있으라는 뜻이었다. 그 손짓을 못 알아들었을 리 없는 서문경이 처음에는 도끼눈을 떴다가 이윽고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황제의 옆자리로 슬슬슬 다가가 앉았다. 자신이 말을 해놓고도 서문경이 정말로 제 말을 들을 줄은 몰랐던지 황제의 표정이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서문경이 말했다.
“정말로 이러실 겁니까? 계속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실 거냐고요.”
“웬일로 귀염을 떠나 했더니.” 그러면 그렇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다다다 쏘아대는 서문경을 보고 김이 빠진 황제가 피시식 바람 새는 소리를 냈다. “기대한 짐이 멍텅구리였지, 그래, 누굴 탓할꼬.”
“아, 그런 이야기만 하지 마시고 좀.”
“바가지나 박박 긁어댈 양이면 그냥 저리로 가거라.”
탕! 서문경이 갑자기 바닥을 크게 쳤다. 온 방 안이 우르르 흔들리는 듯한 착각마저 일으키는 굉음에 황제가 화들짝 놀랐다. 서문경이 그런 황제를 똑바로 노려보고 말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어 말했다.
“말씀 드렸지요, 이번에 날아올 화살은 폐하의 목에 꽂힐 수도 있다고. 그런데도 정말 정신 안 차리실 겁니까?”
“짐은···.”
“폐하께서 잘못되시면 저는 또 어쩌라고요. 또, 혹시 폐하께서 잘못되시면 저도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는 것 아닙니까?”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아무리 위협을 해도 미적지근한 황제의 반응에 서문경이 내심 한숨을 쉬면서 자신의 목까지 장대위에 대롱대롱 매달았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이런다고 무슨 변화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제 목을 걸어놓고 흔들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놈이 내 목과 쌍으로 걸어놓고 장대를 흔든다고 과연.
“그것은.”
···효과가 있었다.
난공불락의 성처럼 굳건하던 황제의 심드렁한 표정이 무너진 것에 놀란 서문경이 맹꽁이마냥 두 눈만 끔뻑거렸다. 착각이 아니라, 정말로 황제는 난감해하고 있었다. 할 말조차 고르지 못하겠는지 한 동안 입을 닫고 있던 황제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럴 일은 없을 게다.”
그러나 기대했던 대답은 아니었다. 그 탓인지 대답이 조금 공격적으로 튀어나갔다.
“그걸 어떻게 장담하십니까.”
“그 자들의 목적은 황좌다.”
“그러니 더더욱!”
“더 정확히는 체제공이 짐 대신 제좌를 차지하는 것.” 흥분한 서문경을 황제의 말이 가로막았다. 주춤한 서문경을 황제가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헌데 너도 알고 있지 않으냐. 그 날은 이미 정해져 있다. 기다리기만 하면 그 날은 온다. 그러니 그들이 굳이 무리를 할 필요도 없느니.”
서문경의 표정이 점점 굳었다. 그것을 불안감 때문이라고 생각한 황제가 서문경을 달랬다, ‘그러니 경이 너도 염려할 필요 없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문경이 하, 하는 소리를 냈다.
“이제 알겠습니다.”
“경아?”
불쑥 자리에서 일어난 서문경을, 황제가 올려다보며 불렀다. 서문경이 바득 이를 갈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야 했는데. 내가 미련했지. 이런, 빌어먹을.” 난폭한 욕지거리를 중얼거린 서문경의 시선이 훽 돌아가 황제를 향했다. 서문경이 돌아가지 않고 곧바로 물었다. “싫으신 거지요?”
무어가, 하고 묻는 대신 황제가 콧잔등이를 한 번 찡긋했다.
“그 자리가 지긋지긋하신 겁니다, 폐하는.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아무 상관이 없으신 거지요!”
“일전에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지.”
황제가 말했다. 서문경도 기억하고 있었다.
“맞습니다. 폐하께서는 아니라 하셨지요. 세상 누구도 저어할 리가 없는 자리가 아니냐고. 하지만 아니었던 겁니다.”
“짐은 허설을 한 적이 없다.”
“궤변에 불과합니다. 싫으냐고 물으면 아니다. 그래요, 싫으시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지긋지긋하지 않느냐고 여쭈면, 어떻습니까?”
황제가 웃었다.
“그래, 지긋지긋하다. 허나 이 말이 어찌 황위에 미련이 없다는 말로 둔갑할 수가 있누?”
“폐하께서 그 자리에서 물러나고 싶어 안달이 나신 것처럼 행동하시니까요!” 서문경의 목소리가 격해졌다. “무슨 꿍꿍이든 상관이 없다고요? 그래봐야 목적은 뻔하니까? 제좌를 빼앗기는 것이 고작이니까! 그 자를 대할 때의 태도도 그렇습니다! 그 사람, 마치 폐하께 황좌를 맡겨 놓기라도 한 것 같더군요! 폐하께서도! 태도가 그것이 뭡니까! 무슨 빚이라도 진 사람처럼! 남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 마냥 엉거주춤···.”
제 분을 못 이겨 서문경이 황제의 옷깃을 확 잡아끌었다.
“그러지 마십시오. 이전에는 그러지 않으셨잖습니까. 좀 더 당당해져 보십시오, 왜···.”
하고 말하던 서문경이 말끝을 흐렸다. 감정이 격해진 때문만은 아니었다. 순간 머릿속에 섬광처럼 의구심이 스친 탓이었다. 그래, 일전에, 분명히 방금 전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던 적이 있었다. 황제를 배알한다는 핑계로 서현과 조원 등이 천주천 침방을 찾았던 그 때. 오히려 서현을 도발했던 쪽은 황제였다···. 서문경의 눈빛이 혼란스러워졌다.
그 때 황제가 말했다.
“진솔한 답을 듣고 싶으냐.”
그 말에 서문경이 무심코 황제 쪽을 쳐다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린 모양이었다. 황제가 말을 이었다. 그의 하얀 얼굴에, 초한 입술에 무어라 해서하기 힘든 오묘한 웃음이 걸렸다. 서문경은 덜컥 불안해졌다.
“짐은 지쳤다.”
드문드문 황제의 얼굴에 스쳐 지나가곤 했던 그 표정이 다시금 그의 얼굴을 스쳤다. 바스라지기 직전의 낡은 책장. 오래된 창틀에 쌓인 먼지. 고비늙어 이제 말라가는 일 밖에 남지 않은 나무의 가지. 그 모든 것들에 닥쳐 온 겨울날.
“사물을 분별하기 시작한 이래로, 모든 것들이 내 사지를 붙잡고 흔들었다. 짐은 진정한 의미에서 평온해 본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었느니라. 소계(小溪)를 넘으면 강이 나타났고, 강을 건너면 바다가 나타났다. 구릉을 넘으면 동산이 나타났고, 동산을 넘으면 산맥이 버티고 있었다. ···아마, 평생이 그럴 것이다.”
황제가 그 말끝에 조용히 단서를 붙였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한은.’
“네게도 말했듯 세상에서 가장 영화로운 자리. 그 누가 이 자리를 싫다 하겠느냐. 하지만 짐에게는 앞날이 보여. 이 자리에 앉아 있는 한, 아귀들이 짐의 머리를 흔들고 사지를 잡아당기는 날들이 계속되리라. 그래서 누군가가 등을 밀어준다면 충분히 못 이긴 척 내려올 수 있다. 그리고, 그 치는, 그 자들은···, 그런 것이다. 짐의 등을 밀어주는 자들이지. 흘러가는 대로 그대로 따르면 모든 이들이 흡족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리 시류가 흐르는 대로, 몸을 맡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하신데, 왜 저는 탐내셨습니까?”
“짐이 그대에게 청했지.”
황제가 조용히 물었다, ‘부디 짐의 옥비가 되어 달라고.’ 서문경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 청이 어딘가 이상하지 않았는가.”
“······?”
“왜 정궁(正宮)이 아니라 후궁(後宮)이 되어 달라 하였는가.”
그런 의문은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서문경의 표정이 애매해졌다. 그 또한 무슨 이유가 있었다는 말인가.
“내 생모는 정궁이 아닌 후궁이셨다. 허나 짐을 생산하신 직후에 절명하시었지. 그런 이유로 짐은 내전 마마의 손에서 자랐다.” 과거를 회상하는 탓인지 황제의 눈빛이 약간 흐릿해졌다. “꽃처럼 곱고, 어린 새처럼 어진 분이셨다. 허나 꽃처럼 무르고, 어린 새처럼 약하신 분이기도 하셨다. 그 아려하신 분께서는 그 용모와 성품처럼 그렇게 가셨다. 센 바람에 꽃잎이 찢기듯, 참수리 발톱에 날개가 꺾이듯 그렇게.”
서문경은 문득 불안해졌다. 아련하다. 희미하게 들이치는 햇빛에 비친 황제의 모습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아서, 자신만 놓아 주고 미련 없이 가 버릴 것 같아서 불안했다. 서문경은 손을 뻗었다. 말라서 튀어나온 단단한 손목뼈를 콱 움켜잡고 나서야 조금 마음이 가라앉았다.
갑작스레 서문경이 손목을 잡자 황제는 조금 놀란 모양이었지만, 잡힌 손을 떨쳐내지는 않았다. 황제가 말을 이었다.
“그런 이유로, 짐은 세 없는 황제의 정궁이 어떤 삶을 사는지 누구보다도 잘 안다. 방비라면 그저, 난만한 기화요초로 별천치를 이룬 후궁에서 꿈같은 삶을 살면 된다. 허나 정후는 방비와는 달라. 싫어도 뭇사람들의 앞에 나서야 하고, 속은 썩어가도 겉으로는 웃어야 하며, 무심코 튄 물방울 하나에도 고꾸라질 듯 피핍하여도 쓰러지기 전까지는 대나무마냥 꼿꼿하여야 하지. 세 없고 총도 받지 못하는 정후의 삶이란 금수장(錦繡帳)을 몸에 두른 화살받이와 같아. 선황조차 그랬을 진데 짐의 경우는 더 말 할 것도 없지. 여차 하면···.” 잠시 멈춘 목소리에 한숨 소리가 섞였다. “짐이 양위(讓位)를 하여 제좌에서 내려온 후에도 정후는 볼모로 궁에 남아 있어야 할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황제가 서문경의 손가락을 풀었다. 그리고 서문경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그가 속삭였다.
“···짐은 단 꿈을 꾼단다. 그 날이 오면 이 무거운 관을 벗고 내려와 고운 이와 더불어 조용하고도 평안한 삶을 살기를. 그 때가 되어도 어여쁜 이 하나 아쉽지 않도록 영롱한 구슬을 달아 주고 금빛 옷 둘러줄 만한 능력은 될 터이니.”
서문경은 우울한 시선으로 깍지를 낀 손을 내려다보았다. ‘너는 싫으냐.’, 황제가 나직이 물어왔다. 서문경은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싫으냐고···.
“폐하의 인생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은 조언은 해줄 수는 있어도, 결정을 해줄 수는 없다.
“폐하께서 정말로 그것을 원한다고 하시면···, 저로서는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짐을 내려놓고 폐하께서 만족하신다면, 저는, 그것으로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리 말하지만 낯빛은 그것이 아니구나.”
서문경이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아니요. 말한 그대로입니다. 폐하께서 정말로 그것을 원하신다면 저도 괜찮을 거라고, 그렇게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럼, 짐이 진심이 아니라고?”
“지금은···.”
하고 대답하면서 서문경은 목깃을 잡아당겼다. 가슴이 몹시 답답했다. 폐를 목전(木栓)으로 만든 마개가 막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직은 못 믿겠습니다.”
그 대답이 떨어진 후, 서문경과 황제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문경은 자신의 발치를 내려다본 채로 침묵했고, 황제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런 서문경을 응시했다. 그 침묵이 너무 무겁고 단단해서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침묵을 깬 것은 황제의 혼잣말이었다.
“아니야.”
서문경은 고개를 들었다. 황제는 눈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 표정이 몹시 묘했다. 언뜻 보면 단순히 찡그린 듯한 그 표정이 유심히 들여다보면 복합적인 감정이 한데 엉겨 엉망이 되어 있었다. 감정을 느끼는 당사자인 황제 자신조차도 스스로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그러나 고집스럽게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아니야. 그런 것이 아니다.”
“······.”
서문경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는 긍정도 부정도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조심하세요.”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 서문경이 겨우 한 말이라곤 그것이 고작이었다. 서문경이 한숨을 쉬었다.
“폐하께서는 고작, 이라고 하시지만 저는 그래도 걱정이 되니까. ···그리고 양위 외에도 폐하를 제좌에서 내려오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은 또 있으니까요.”
그것도 양위보다 훨씬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 그래, 그런 것이 있었다. 하지만 수상이 자신을 해할 가능성은 왜인지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듯한 황제에게 그 말은 할 수 없었다.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잠시만.”
무거운 분위기를 견디다 못한 서문경이 어느 순간 발작적으로 말을 꺼냈다가, 바로 다음 순간 아차했다. 그러나 이미 황제가 그 말을 들은 뒤였다. 황제가 서문경이 못 다한 말을 대신이었다.
“바람이라도 쐬고 오겠느냐.”
“예? 하지만.”
“잠시만이라도 숨을 돌리는 것이 서로에게 나아.”
황제의 말이 맞았다. 황제도 서문경도, 지금은 뱃속에 응어리를 지고 있었다. 서문경은 다시금 가느다란 한숨을 쉬었다. 신경을 너무 쓴 탓인지 지끈지끈 두통까지 일었다. 황제의 말처럼, 잠시간이라도 자리를 바꾸어 찬바람을 쐬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결코 황제를 혼자 두어서는 안 된다는 서현의 경고가 서문경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 때 황제가 말했다.
“수상의 말은 그리 깊이 생각할 필요 없느니.”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습니다···.”
“그 자의 요구 자체가 덫일 수도 있어.”
서문경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 말을 들으니 더 머리가 아파왔다. 그런 서문경에게 황제가 휘휘 손을 저었다.
“네가 그리 속이 탄다면, 그래. 짐이 홀로 있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니냐.”
하고 말하며 황제가 닫혀 있던 문이고 창문 따위를 모조리 열어 젖혔다. 황제의 돌발 행동에 어안이 벙벙해진 서문경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만 둥그러니 떴다. 그 어벙한 꼴을 보고 황제가 픽 웃었다.
“되었느냐. 이제 안심이 되어?”
“하, 하지만.”
“나가보래도.” 황제가 손짓을 했다. “짐도 좀 쉬고 싶구나. 머리가 복잡하여 조금 쉬고 싶어···.”
그렇게 말하는 황제의 표정이 정말로 피곤해 보여서 서문경은 고개를 저을 수 없었다. 서문경이 조심스럽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황제가 갑자기 문이란 문은 다 열어젖히는 기행을 보여준 덕에 복도를 오가던 궁관들이 모조리 놀란 눈으로 호박방 안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것을 잠시 찌푸린 눈으로 보던 서문경이 곧 마음을 정했다.
“그럼 잠시만 바람을 쐬고 오겠습니다.”
서문경은 황제가 아닌, 황제가 턱을 괴고 앉아 있는 반월창을 보며 말했다. 황제가 보이는 저 창 근처에 있으면 되겠지.
황제가 대답 대신 턱 끝만 조금 끄덕였다. 서문경이 발소리를 죽이고 조심스럽게 호박방을 나갔다.
**
찬바람을 맞자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서문경은 숨을 몰아쉬었다.
목구멍 끝까지 차올라 있던 것이 겨우 사라졌지만 홀가분하기는커녕 기분이 더더욱 가라앉았다. 황제의 모습이 어렴풋이 비치는 반월창 근처에서 서성거리던 서문경이, 결국 그 자리에 풀썩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고서 그가 세운 두 무릎 위에 눈가를 푹 묻더니, 아아, 하며 짜증스런 신음을 흘렸다. 파바박, 서문경이 머리카락을 마구 흐트러뜨렸다.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지···.”
몇 분 지나지도 않아 당장 후회가 밀려왔다. 그럴 것을, 어째서 그랬을까. 왜 그렇게 몰아붙였을까. 그 사람도 속상했을 텐데. 화도 나고, 다른 사람 앞에서 그런 일을 당해 면구하기도 했을 텐데···. 그런데 내가 왜 그랬을까.
“이 놈의 성질머리 때문에 진짜.”
두 팔로 머리를 감싸 안은 채로 서문경이 한탄했다. 분명히 이전에도 그랬을 거다. 감정이 앞서 다른 사람 사정 살피지 않고 하고 싶은 말 다다다 퍼부어 놓고, 뒤돌아서 후회하고. 분명히 그랬을 거다. 내 생각이 다 옳은 것도 아닌데, 사람인 이상 생각은 다를 수밖에 없고, 그래서 오히려 더 냉정하게 말을 주고받아야 하는 건데. 나란 놈은 진짜.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퍼부은 말을 듣고 황제가 지었던 표정이 눈꺼풀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서문경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몹시 놀란 것 같았어. 그 자신은 한 번도 의심해 본 적도 없는 그런 부분을 부정당한, 그런 사람의 표정이었다. 그 표정 때문에 더 죄책감이 들었다. 도금을 한 동전을 소중히 간직하는 어린아이에게 그것은 사실 보물이 아니라 싸구려 황동에 불과하다고 알려준 어른이 된 그런 기분이 들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 동전은 영원히 아이에게 있어서는 보물일 수도 있었는데.
괜한 짓을 했어. 서문경은 깊이 후회했다. 그리고 서문경은 무릎 사이에 코를 박고 뒷머리를 두 팔로 감싼 채로 한참 동안이나 머리를 들지 않았다.
서문경이 다시 머리를 든 것은, 수분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갑자기 서문경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솔직하게 사과 하자.
그렇게 결심하고 서문경이 몸을 일으킨 그 때였다.
“?!”
서문경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짐승이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온 탓이었다. 당황한 서문경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번에는 앓는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이에 있어. 서문경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발걸음을 뗐다.
그러나, 일순 귀가 아플 정도로 내지른 그 비명을 듣고도 소리가 들려온 쪽을 쳐다본 이가 자신 외에는 없다는 사실을 서문경은 미처 알지 못하고 있었다.
**
조심스럽게 다가오던 발걸음이 잠시 멈춘다. 걱정으로 가득한 눈초리가 신중하게 주변을 둘러본다. 그랬다가, 불현듯 뒤를 돌아본다. 마치 그 뒤에 어린애를 두고 온 듯한 시선이다. 멀리서도 고민에 잠긴 얼굴이 보였다. 그러더니 결국 주춤거리며 뒤돌아선다. 콱. 발에 힘을 주었다. 발밑에 있는 고깃덩이가 격렬하게 꿈틀거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귀청이 찢어질 것 같다.
막 뒤돌아섰던 몸이 물고기처럼 펄떡 놀라서 뛰어오르더니, 훽 고개가 돌아간다. 비명이 들리는 쪽을 찾는 것이 분명했다. 발밑의 생명을 걷어찼다. 퍽! 깽!, 하는 소리를 내지르며 고깃덩이가 데구르르 굴러갔다.
잠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납죽 엎드려 파들파들파들 떨고만 있던 그것이, 잠시 시간이 지나자 제 등을 짓누르고 있던 우악스런 발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은 듯 했다. 깨달은 순간, 작은 몸이 화살처럼 튀어나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것의 목 거죽을 움켜잡는 손 쪽이 더 빨랐다. 깨개개갱! 짐승이 처절한 소리로 울부짖었다. 제대로 된 언어도 아닌 짐승의 울음소리에 불과했지만 그 울음에 담긴 감정만큼은 분명했다. 살려줘!
그것을 ‘그’가 눈치 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홉뜬 눈으로 주변을 탐색하던 그가, 소리가 어디에서 들려오는지를 알았는지 이편으로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거의 반사적인 움직임이었다. 자네답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가 불현듯이 생각했다. 자네다워. 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분명 어린 짐승이 내지르는 고통스러운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었겠지. 착한 아이니까.
그러나 호의도 사람을 봐가며 베풀어야 하는 법이다. 절벽에 매달린 놈이 어떤 놈인지 알 것이 뭐란 말인가. 그 사람이 누구든 너는 개의치 않고 생명줄을 내려 주겠지만 그 동아줄을 타고 올라온 자는 그 밧줄로 네 목을 조를 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황궁 안에 살고 있는 치들은 대부분이 그런 작자들이었다.
물론. ···남자는 입술을 비틀었다. 조소인지 비소인지 애매한 미소였다. 물론 자신 또한 마찬가지다. 어쩌면 다른 치들보다 더 할지도 모르지. 막 절벽에서 기어 올라온 직후에는 울며 감사를 표해 놓고, 은인이 뒤돌아서면 그 목을 졸라 절벽으로 내던져 버릴 위인이니.
남자는 손짓했다.
이리오렴.
이리 와.
네 목을 조르게 해다오. 그리하면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에 한 발자국 가까워진단다. 그러니 네 목을 조르게 해 줘. 너는 착하니까. 상냥하니까.
남자가 웃었다.
그러니 용서해 줄 거지···?
**
“황상.”
하고 부르는 소리에 황제는 이마를 구겼다. ‘뭐냐.’ 저절로 날카로운 대꾸가 튀어나왔다. 모로 한 발 걸었다 뒤로 한 발 걸었다 결국은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곤 하는 서문경을 구경하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던 참에 방해가 들어왔으니 뿔이 날 만도 했다. 딱 창틀 안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인형극을 보는 듯하여 가라앉은 마음이 위로가 되었건만. 그 때 폐하, 하며 다시금 궁인이 황제를 불렀다. 답지 않게 참으로 끈질기다. 또 뉘라도 찾아온 겐가, 싶어 황제는 결국 머리를 돌렸다.
“무어야.”
태황태후전의 사람이 포기를 못 하고 또 찾아왔다면 이번에야말로 따끔하게 한 마디 해줘야겠다 싶어 그리 묻자, 발 앞에 엎드린 궁인이 조용히 아뢰었다.
“데운 타락(駝酪)을 들였사오니 찬 속을 데우시옵소서.”
황제의 눈썹이 꿈틀했다.
“무슨 바람이 들어서 이러누.”
“객께서 청하셨나이다.”
경이가? 황제가 서문경 쪽을 쳐다보았다. 곧바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싶어 창 아래를 내려다보았더니 사각에 쭈그리고 앉은 채로 머리를 무릎 사이로 처박고 있었다. 저 놈도 차암. 끌끌 혀를 차는 황제에게 나인이 조심스레 말을 붙였다, ‘황상께서 감환이라도 걸리실까, 객이 몹시도 염려하였나이다.’ 그 말에 천정이라도 찌를 듯이 치켜 올라가 있던 황제의 눈꼬리가 천천히 누그러졌다.
그리 염려를 하는데 걱정을 덜어 주는 것이 좋겠지···.
황제가 몸을 돌리며 손을 내밀었다.
“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