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2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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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익, 지이익, 지이익. 무거운 가죽 부대를 끌고 오는 듯한 소리가 저 어두운 동굴 속에서 들렸다. 땅거미가 기는 밖으로 사람의 팔 한쪽이 튀어나왔다. 만일 그 자리에 누군가가 있었다면 시체가 튀어나온 것이 아닌가 싶어 기겁을 할 만한 기괴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곧 그 창백한 손이 허름한 문설주를 움켜잡았다. 산 사람이었다. 

이윽고 신실 밖으로 나온 것은 다름 아닌 수상 서현이었다. 허나 그는 깊은 호수처럼 흔들림 하나 없음 평소의 모습이 아니었다. 문설주를 잡고 있는 손은 부들부들 떨렸고 그의 얼굴은 어두운 가운데서도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창백하였다. 또한 드러난 피부를 비롯하여 그의 온몸은 식은땀으로 흠뻑 짖어 있는 상태였다. 거의 풀리다시피 한 눈빛과 파리한 피부, 희미한 보랏빛까지 도는 입술 등 금방이라도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문설주를 잡고 거의 제 몸을 내팽개치듯 해서 신실 밖으로 나온 서현은 곧바로 신실 문을 닫았다. 남아 있는 힘을 모두 짜내어 거칠게 문을 닫았음에도 불구하고, 문은 작은 소리조차 내지 않고 사뿐히 닫혔다.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서현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돌겠군.” 

동시에, 서현의 입술 틈을 비집고 답지 않게 난폭한 중얼거림이 튀어나왔다. 서현은 한 쪽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힘 빠진 머리를 기댄 다음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큰 한숨을 내쉴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게 벽에 등을 기대고, 머리는 무릎에 괸 채로 숨을 고르고 있던 서현이 다시 움직인 것은 사방에 가득한 석음이, 단순한 어스름이 아닌 진짜 어둠으로 변하기 시작한 때였다. 

쉬고 있을 틈 따위는 없다.

서현의 시선이 저절로 신실을 향했다. 심신에 무리가 가는 것을 알면서도 하필이면 오늘 신실을 찾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 사람’의 판단에 따라 당장이라도 자신은 신실에 들어갈 수 없는 몸이 될지도 모른다. 다행스럽게도 아직은 그가 손을 쓰지 않은 모양이지만···, 당장 내일은 알 수 없는 일이지.

서현은 손가락을 오므렸다. 바스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종이였다. 그 안에 적힌 이름을 서현은 보지 않아도 외울 수 있었다. 

진왕(進王) 자화 문위 현, 오왕(悟王) 정연 문위 호, 영수군왕(永守郡王) 지언 문위 제하, 경왕(瓊王)부 왕세자(王世子) 한서 문위 진국, 북위사 천진부 북직현 흥평군왕부 군왕세자(郡王世子) 체하 문위 효, 인선장공주(仁善長公主) 문위 승향, 효명대장공주(曉明大長公主) 문위 계연. 현재로서는 그 행적을 파악하기 힘든 군왕의 5세손 이하 황족이나 현군(縣君)이하의 여황족은 제외하였다. 

이 모든 이들이 의왕군왕 문위 주나 보국중위 문위 위정처럼 신실에 위패가 모셔져 있는 자들이었다. 친왕이나 대장공주, 군왕과 장공주 등 비교적 품계가 높아 현재까지 기록이 전해져 올 황족들의 사인(死因)을 조사해 보면 그들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왜 용신실(龍神室)에 한낱 황족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것인지 알 수 있겠지.”

하고 중얼거리며, 서현은 몸을 일으켰다. 

“체제공!”

그 때였다. 멀리서 서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사내, 하고 목소리의 성별을 구분한 순간 서현의 표정이 굳었다.

“···누구?”

서현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딘가 몸을 숨길만한 곳이 있을 터···, 

“체제공! 이곳에 계셨습니까.”

“?!” 서현이 멈칫했다. 놀란 나머지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그의 머리가 훽 돌아갔다. 서현의 콧잔등이가 찡그려졌다. 서현이 이상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천견?”

“위험합니다, 체제공.”

날도 저문 때 불빛도 없이 산에 계시는 것은.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걱정을 섞어 조심스럽게 건넨 말을 듣고 나서야 서현의 얼굴이 펴졌다. 어둠에 감싸여 잘 보이지 않던 모습이 드러났다. 육척이 넘는 장신에 박달나무처럼 단단한 기골. 역시 천견 최유였다. 

목소리를 듣고도 천견이 아닌 줄만 알았다. 서현은 이마에 손을 짚었다. 이마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너무 기력을 썼나보군···.”

하고 중얼거린 말이 씨라도 된 것인지, 그렇지 않아도 물 먹은 솜처럼 노곤하던 몸이 누가 발목을 잡고 끌어당기기라도 하는 듯이 무거워졌다. 지금껏 잘 버티고 있던 다리조차 일순간 휘청 흔들렸다. 마치 어깨 위에 쿵, 무거운 짐이 와서 떨어지는 듯한 충격. 단순한 피로감이라고 하기에는 정도가 지나친 충격이었다. 그러나 서현은 당황하지 않았다.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오히려 작금의 상황을 호(好)이냐, 불호(不好)냐 따지자면 전자에 가까웠다. 

표정을 살필 수 있을 정도의 거리로 다가온 최유가 서현의 낯빛을 보고 대경하여 그를 설득했다, ‘체제공!’

“낯빛이 너무도 좋지 못하십니다. 쉬셔야 합니다. 어서 수상부로 돌아가시지요.”

하며 부축을 하려는지 두 손을 내미는 그에게, 서현이 손을 저으며 대뜸 물었다.

“시킨 일은?”

호의가 무시당한 것이 면구하였는지 최유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평소처럼 공손한 대답이 최유에게서 들려왔다.

“송구합니다.”

“아직이란 말인가? ···하기는.” 

서현이 먹 같은 어둠이 깔린 사위를 둘러보았다. 납득한 시선이 가라앉았다. 자신이 중당에서 나온 것이 석음이 사방에 가득했던 늦은 일석(一夕) 때이니 막 어두워진 지금과 시각은 오랜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과 자신에게서 직접 명을 받은 최유가 아직까지 수상부에 있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렇지 않아도 예민해져 있던 서현의 목소리가 절로 엄해졌다.

“내, 분명 시각을 다투는 일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송구합니다, 버릇처럼 머리를 수그리며 말한 최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의왕군왕에 대한 일은···.”

“천견.” 답지 않게 말끝을 흐리는 최유를 막으며 서현은 황족들의 이름이 적힌 선지를 내밀었다. “그대답지 않은 실수다만 금번만큼은 그냥 넘겨주도록 하겠다. 허나 다음은 아니야. 서둘러라.”

일단 받아든 선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던 최유가 여쭈었다.

“의왕군왕에 대해 내리신 하명과 같은 종류의 일을 행하면 되는 것입니까.”

서현은 대꾸 없이 날카로운 턱 끝만 살짝 끄덕였다. 막 최유의 곁을 지나치려고 하는 그를 붙잡아 최유가 물었다, ‘어디를 가십니까, 체제공.’ 짧게 대답하는 것조차 힘에 부쳐 서현이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말하지 않았던가.”

“냉한(冷汗: 식은땀)이 그치지 않습니다. 역시 일단은 수상부로 돌아가시어 심신을 돌보시는 것이···.”

“한 시가 급하다 하지 않았나!”

최유가 입을 다물었다. 갑작스레 목소리를 높이는 서현의 태도에 조금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체력이 한계에까지 몰린 서현은 자신의 냉정하지 못한 태도를 반성할 틈도, 당혹한 최유의 사정을 돌볼 여유도 없었다. 서현은 다만, 식은땀이 쉴 틈 없이 돋아나고 있는 차디찬 이마를 손등으로 훔치며 덧붙였을 뿐이었다.

“아버님께서 어떤 암계(暗計)를 품고 계신지, ···명일(明日) 당장 천지가 뒤집어진다 하여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다.”

“그리 말씀하시니···.”

심상치 않은 어투에 서현이 훽 고개를 돌렸다.

“뭐지?”

“체제공께서 명하신 일을 행하던 중에 몹시 괴이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놀라 수상부로 돌아온 것입니다. 체제공께서도 아시는 것이 좋다는 의려가 들어,”

“말하라.”

서현이 최유를 채근했다. 언제 급변할지 모르는 상황에 절로 입 안이 마를 만치 초조했지만, 의미심장한 최유의 말투나 표정을 마주하고 있자니 그의 말을 듣는 것을 뒤로 미루는 것도 힘들었다. 재촉을 받은 최유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헌의공 어른께서 천추전 안지밀들과 비밀리에 접하셨다는 풍문을 들었습니다.”

“안지밀들을? 어찌하여.”

“또한 세수간나인들과 권식에게도 헌의공 어르신의 수족으로 보이는 자들이 접선을 시도 하였다고···.”

그 보고를 듣고 서현은 생각에 잠겼다. 침전 안지밀들과 세수간나인들과 권식···. 대전 안지밀들만이라면 모를까, 세수간나인들과 권식이라니 이것은 조금 묘한 조합이 아닌가. 늘 황제를 지척에서 모시는 지밀과 황제의 세숫물과 목욕물 따위의 심부름을 하는 세수간나인, 마지막으로 황제의 몸단장을 맡아 행하는 벼슬아치인 권식. 서엽의 생각을 짐작할 수가 없어 눈살을 찡그리고 있던 서현의 눈이, 어느 순간 번쩍 커졌다. 

“그래서?!”

서현이 갑자기, 급박한 투로 캐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체제공?”

제 주인의 태도가 돌변한 것에 당황하는 최유의 어깨를, 서현이 부서뜨릴 듯이 움켜잡고 소리쳤다. 

“맨 몸을, 그 자들 중 용체(龍體)를 본 이가 있다 하던가!”

“그것까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서현의 난폭한 반응에 놀란 최유가 숨을 삼키며 대답했다. 그 대답에 서현이 얼굴을 확 구겼다가, 곧이어 당연한 대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최유의 어깨를 놓고 뒤로 한 발 물러섰다. 그 때 최유가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헌의공 어르신께서 곧바로 운현궁으로 걸음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태황태후전으로?”

“예. 어르신께서 대체 무슨 심산이신지.”

“······.”

서현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자신의 아버지가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용체를 본 이가 한 사람도 없다면, ···목격자를 만들면 그만인 것이다. 

‘그대는 돌아가 그대가 해야 할 임무를 행하라.’, 서현이 너무 나지막해서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들리는 소리로 내뱉고서 자신은 자신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 등에 대고 황급히 최유가 물었다, ‘태황태후전으로 가십니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현이 대꾸했다. 그 목소리에서 얼음 덩어리가 뚝뚝 떨어지는 듯 하였다.

“굳이 운현궁으로 가 호랑이와 얼굴을 마주할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인가. 천하에 다시없을 바보짓이지.”

“그럼···.”

“아예 일이 일어날 수 없도록 하면 그만이다.”

서현이 빠른 걸음으로 언덕을 내려갔다. 최유는 황망한 시선으로 그런 서현의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서현의 모습이 빠른 속도로 작아졌다. 등불 하나 켜지지 않은 칠흑같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서현의 모습은, 다른 어딘가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 그 자체에 녹아들어 완전히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물에 닿으면 녹아서 사라져버리는 거품이라도 된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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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입술이 떨어졌다. 그 사이를 틈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숨이 머리 꼭대기까지 차 오른 듯 온 몸이 뜨겁고 머리가 멍했다. 시선이 느껴진다 싶어 무심코 올려다보았다가 바로 시선이 마주쳤다. 내려다보는 시선은 마치 인간의 것이 아닌 듯이 보였다. 우윳빛의 얇은 피막이 덧입혀진 듯한 시선, 인간의 것이라기보다는 뱀이나 도마뱀 같은 파충의 시선 같았다. 그러나 서문경은 이질감이나 공포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 말끄러미 내려다보는 시선이 얇디얇은 피막 따위로는 감출 수도 없을 만치 강한 전언을 담고 있었던 탓이었다. 다시···, 하고 직감한 순간 막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 생각은 미지근한 물에서 익어 버린 개구리에 불과했다. 행동으로 결코 옮겨지지 못할 죽은 생각에 불과했다는 뜻이다. 

다시금 입술이 겹쳐졌다. 섞이는 숨이 어떤 것이 자신의 것이고 또 어떤 것이 상대의 것인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웠지만, 마찬가지로 뜨거운 입술에 비벼지는 젖은 입술은 이상하게도 서늘했다. 그것을 깨닫기가 무섭게, 슥, 축축한 혀가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긴 혀가 민감해진 입 안을 더듬는 순간 뱃속이 화끈해졌다. 무심코 손에 힘을 주었다. 길고 단단한 무언가가 손끝에 잡혀 그것을 끌어안았다. 그러고 나서야 깨달았다. 자신이 두 팔로 힘껏 껴안은 것은 사람의 목이었다. 놓아야 해, 생각했지만 곧바로 혀를 붙잡혀서 오히려 손에 힘을 주고 말았다. 길고 축축하고 서늘한 혀가, 도망치는 자신의 혀를 붙잡아 능숙하게 휘감고 빨았다. 쪽, 쪽, 쪽. 절로 귀가 뜨거워지는 음란한 소리가 귓가에 마치 심장소리처럼 울렸다. 

부르르 몸을 떨었다. 허공에 지지대 하나도 없이 붕 떠 있는 듯이 불안해졌다. 그러나 곧, 등에 딱딱한 무언가가 닿았다. 반사적으로 그것에 안도했다가 다음 순간 그는 깨달았다. 안도할 일이 아니었다. 어느새 자신은 은근히 몸을 미는 황제의 힘에 밀려 바닥에 등을 대고 있었다.

열기에 휩싸여 희미해진 이성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그러기가 무섭게, 냉엄한 꾸짖음이 들려왔다. 자신의 이성이 하는 말이었다. 미쳤구나. 너무도 안이해. 황제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아직 어떤 것인지도 가늠치 못하는 주제에, 어설프게 받아들이기만 해서 어쩌자는 말인가? 그것은 결코 호의가 아니었다. 오히려 근시일 내 날카로운 창검이 되어 황제와 서문경 두 사람 모두를 향해 날아올지도 모를 실책이었다.

“그···,” 서문경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겨우 움직여 황제의 어깨를 밀어냈다. 아니, 밀어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서문경은 황제의 어깨에 손을 얹은 듯한 몰골로 애원했다. “제발 그만.”

그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황제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막 서문경의 입에 입을 맞추려던 황제가 행동을 멈췄다.

“그만?”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이었지만, 거의 얼굴을 맞대고 있다시피 했던 터라 더운 숨결이 서문경에게까지 훅 스쳤다. 희미한 약향(藥香)이 났다. 익숙한 약향을 맡자 조금 더 정신이 돌아왔다. 바닥에 뒷머리를 대고 누운 채로 서문경이 황제를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만 하십시오.’ 그 말에 황제가 한 쪽 눈살을 찌푸렸다.

“흥을 깨는구나.” 황제가 몸을 일으킬 생각조차 하지 않고 투덜거렸다. 서문경이 눈살을 구겼다. 

“적기에 말을 꺼냈다고 생각하는데요.”

“적기라? 그래, 어떤 의미로는.”

황제가 툴툴거렸다, ‘한창 흥이 올랐을 때에 맞춰 와장창 산통을 깨주니, 이것도 재주라면 재주로다.’ 그 말에 한 마디도 지지 않고 서문경이 대꾸했다, ‘왜요, 대연회에서 그 재주를 선보여 드릴까요?’ 그러자 황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입을 닫았다. 말로 안 되면 저 성격에 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이마라도 후려갈기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던 서문경이 뜻밖의 상황에 의구심을 느끼는데, 황제가 쑥 몸을 일으켰다. 뭐지? 덩달아 상반신을 일으키며 서문경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 모습을 곁눈질로 흘겨보고 황제가 빈정거렸다.

“왜? 더 해 주랴?”

“됐습니다!”

펄쩍 앉은 자리에서 튀어 오르는 서문경을 보고 황제를 콧방귀를 뀌었다, ‘새침 한 번 참 요란하게도 떠는구나.’ 그 말에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서문경이 아르릉거렸다.

“감기나 옮아라.”

“고뿔이라면 늘 걸려 있는 것을 새삼 무어.”

“아이구야···, 그것 참 자랑이십니다.”

기가 막힌 나머지 서문경이 중얼거린 말에 황제가 어깨를 으쓰으쓱했다, ‘그러니 새삼 네 녀석이 염려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빈정거린 걸 설마 진짜 칭찬으로 알았나, 저 인간···. 서문경의 눈이 샐쭉해졌다. 

“그러니.” 자아, 하고 주위를 환기시키며 황제가 서문경의 이마에 손을 댔다. 열을 재려는 건가? 서문경이 생각하고 있는데 황제가 쑥 얼굴을 내밀어 서문경의 입술에 쪼듯이 입을 맞추고는, 손에 힘을 주어 서문경을 눕게 했다. “네 놈이나 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거라. 언제까지 짐이 지존의 앞에서 벌러덩 드러누워 놀고 있는 꼴을 보아 넘겨 줄 것 같으냐?”

그게 보기가 싫으면 당신이 여길 나가면 될 일이지, 하고 서문경은 대꾸하려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포단 위에 누워 말없이 눈을 내리깔고 있는 서문경이 자신의 말을 듣고 얌전해 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황제가 한 결 더 거만해진 표정을 하고 솜이불을 서문경의 턱 바로 아래에까지 끌어올렸다. 그러고서는 갓난아기를 어르듯 그 위를 토닥토닥 두드리기까지 한다. 그 꼴을 용케 아무 말도 없이 봐주고 있던 서문경이 불현듯 물었다.

“그런데 며칠이나 지났지요? 요즘은 통 정신이 없어서···.”

“얼마 지나지도 않았느니.” 

하고 대답하는 목소리에 둘러대는 기색이 가득했다. 그것을 눈치 챈 서문경의 시선이 조금 싸늘해졌다. 그러나 서문경이 뭐라고 쏘아대기도 전에 황제가 느른하게 머리를 베고 드러누우며 요구했다. 

“그런 말은 말고, 하던 일이나 마저 하자꾸나.”

“···뭘요.”

설마 다시 달려들려는 건 아니겠지. 서문경이 경계하며 스스슥 몸을 옆으로 피했다. ‘짐도 비싼 몸이다. 네 놈이 동하여 달려들어도 내키지 않을 때에는 안 하느니.’, 경계하는 서문경을 보고 황제가 거드름을 피웠다. 물론 그 변명이 서문경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황제는 서문경을 향해 까닥까닥 손끝을 움직여 보였다.

“긴 말 말고 내놓거라.”

“뭘 내놔요.”

“하라고 멍석을 깔아줘도 왜 재주를 못 부리누.”

그제야 서문경은 황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차렸다. 그 놈의 병아리. 저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저도 내킬 때 아니면 안 합니다. 제가 재롱잔치 하는 어린애도 아니고, 원.”

“어찌하여 안 내키누?” 도통 이해가 안 간다는 듯 황제가 머리를 모로 기웃하였다. “짐을 위해 한 일이 아니었던가? 헌데 지금 짐이 그것을 보고 싶다지 않느냐. 그런데 왜 마음이 안 내킨다는 게야?”

“방식의 문제 아닙니까. 맡겨 놓은 돈 닦달하듯이 말하면 세상에 어떤 사람이 그럽지요, 참으로 영광입니다, 한답니까?”

“방식?”

다시 한 번 황제가 머리를 기웃했다. 그 몸짓과 더불어 ‘그딴 것은 아무래도 모르겠고···.’하는 중얼거림이 들려와 서문경의 얼굴이 더는 구겨질 수 없을 정도로 찌푸려졌다. 하지만 서문경이 폭발하기 직전에, 황제가 천진하게 내뱉은 말 한 마디가 막 당겨지던 불씨에 찬물을 끼얹었다.

“짐은 네 힘이 좋다.”

경이 네가 만들어 내는 것들이 좋아. 그 말에 막 독언을 퍼부어주려 입을 열던 서문경이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황제가 말을 이었다.

“무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그런 경험은 단 한 번도 없다만, 어미의 품에 안기면 그런 기분이 들지 않을까. 아니면 볕 좋은 날 잘 마른 볏짚에 몸을 누이고 있으면 그렇지 않을까. 활짝 핀 봄꽃에 파묻혀 있으면 그렇지 않을까···.” 

싶더구나, 하고 말하며 황제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런 황제의 시선은 서문경의 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시선을 느낀 서문경이 무심코 황제를 따라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자, 황제의 시선이 서문경의 머리로 옮겨갔다. 깎아 놓은 밤톨마냥 작고 동글동글한 머리통을 쳐다보는 황제의 눈에 저절로 웃음기가 어렸다. 

그러나 그 웃음이 잠시 후 쓴웃음으로 바뀌었다. 황제가 불현듯 중얼거렸다.

“진소위 중한 것은 심장이 아니라 가슴.”

···그리하여 저 아이는 뱃속 깊은 곳에 꽁꽁 감추어 놓은 자신의 열등감을 건드린다. 

자신의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지 자신을 바라보는 서문경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서문경을 향해 웃으며 황제는 두 손을 내밀었다. 칼로 베인 듯 가슴께가 익숙한 통증으로 욱신거렸지만 동시에 난폭한 쾌감이 뱃속을 가득 채우고 휘몰아쳤다. 그럴 수밖에! 저 선한 이가, 저 어린 새 같은 이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을 보고 있다. 혐오감 가득한 눈초리가 아닌 염려 어린 눈초리로, 질책하는 듯한 시선이 아니라 저리도 상냥한 눈빛으로.

다른 이가 아닌 자신을.

···황제는 그것으로 족하였다. 그래서 그는 말했다.

“짐은 네 힘이 좋다. 네가 만들어낸 것에 감싸여 있으면 새로 태어난 기분이 들어. 그러니 다오.”

증명을.

“무엇이든 좋다. 아니, 그것이 좋겠다. 그것을 보여다오. 그것들의 날개를 만지고, 머리통을 쓰다듬고 싶구나. 고 녀석들에 싸여 있으면 움직이는 포단을 덮고 있는 듯하여 아주 재미있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따뜻하여 좋아. 짐은 다른 치들보다 몸이 차가워 그처럼 따뜻한 것이 좋다.”

“······.”

황제는 자신을 향한 서문경의 눈길이 한층 더 깊어지는 것을 느꼈지만 모른 척 했다. 저 시선에 어두운 기운이 어려 있는 것이 안쓰러웠지만, 동시에 기뻤다. 조금 더. 조금만 더. 아니, 아예 저 눈 전체가, 저 몸 전체가 자신만 담고 자신으로만 채워졌으면. 황제는 애원하였다.

“어서, 경아. 춥구나.”

그 말에 가느다란 한숨을 쉬며 서문경이 두 손을 맞댔다. 그의 손 안에서 그의 머릿속을 그대로 투영한 환상이 줄줄이 태어났다. 환상은 분명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 방과는 다른 공간에 있는 듯 색이 부옇고 간헐적으로 지지직 흐려지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촌각에 불과했다. 그 환상은 곧 확실한 형태와 색을 가지고 실체가 되었다. 

어른 남자의 주먹만 한 작고 연약한 새끼새가 톡 바닥에 떨어지더니, 곧 황제를 똑바로 보고 빽 울었다. 그 소리에 서문경은 눈살을 구겼지만 황제를 향한 새끼새의 새카만 눈에는 순수한 호의가 가득했다. 종종종, 짧은 다리로 열심히 달려온 새끼새들이 곧 황제의 주위를 둘러쌌다. 걔 중 어떤 놈들은 킁킁 냄새를 맡기도 했고, 또 어떤 놈들은 겁도 없이 황제의 다리 위로 튀어 올라오기도 했다. 황제가 한 손바닥을 내밀자 거리끼는 기색도 없이 검은 병아리 한 마리가 그 위로 올라왔다. 

서문경이 들으라며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저리 좋다고.”

그 심술궂은 투덜거림에 황제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라앉은 병아리를 자신의 눈높이로 들어올렸다. 

한참이나 위로 올라와 무서울 법도 한데, 검은 병아리는 황제의 손에 엉덩이를 깔고 앉은 채로 말끄러미 황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올려다보는 까만 눈이 바둑알처럼 가맣고 빛을 받은 수면처럼 반짝거렸다. 그 시선에는 한 점의 미움도, 티끌만큼의 불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야말로 갓 내린 눈처럼 깨끗한 호감. 

“내가 만든 것들인데 어쩌면 내 속도 모르고 저러나.”

이어서 들려온 서문경의 투덜거림에 황제는 무심결에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은 골이 잔뜩 났는데 황제만 둥글둥글 앙증맞은 새끼새들에 둘러싸여 느긋하고 만족스러워 보이니 더 심술이 난 모양이었다. 허나 방금의 그 말은 명백한 실수였다. 

“깜둥새야.” 황제가 손바닥 위의 검은 병아리를 응시하다 문득 불렀다. 검은 병아리가 빽, 하는 짧은 울음으로 그 부름에 답했다. 털이 검은 놈이면 다 그렇게 부르시나 봅니다? 옆에서 서문경이 이기죽거리며 시비 비슷한 것을 걸었지만 황제는 그 말을 그저 웃어 넘겼다. 갑작스럽게 아량이 넓어진 때문이 아니었다. 크게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경아.’하고 다시 부르며 황제가 입꼬리를 크게 치켜 올렸다. 얇은 손바닥 가죽을 통해 검은새가 꼬물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만든 것? 그 말이 맞았다. 서문경의 힘은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심상을 환상으로 만들어 내는 것. 그러므로 다른 종류의 ‘힘’보다도 훨씬 더 결과물에 술사의 마음이 반영되게 된다. 약간의 과장을 섞어 말하자면 서문경이 만들어내는 환상은 서문경의 분신이나 크게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삐약삐약삐약. 검은 새가 연약한 소리로 울면서 황제의 손바닥을 콕콕 쪼았다. 그리고서는 자기가 쫀 자리에 머리를 북북 비볐다. 제 어미새나 형제새에게나 하듯이 친근하기 짝이 없는 몸짓이었다. 

술사의 진심이 결과물에게도 투영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황제가 슬쩍 돌아보자 서문경의 눈썹이 하늘 높은 줄을 모르고 위로 치켜 올라갔다. ‘뭡니까.’하고 묻는 목소리도 퉁명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황제의 발치에서 종종거리며 뛰어놀던 새끼새 두어 마리가 퍼드덕 날갯짓을 하면서 황제의 무릎 위에 올라왔다. 황제는 웃었고, 서문경은 찡그리며 구시렁거렸다, ‘새 새끼 아니랄까봐 유난스럽기는···.’

그러고서 슬슬 트집 잡기도 지치는지 서문경은 남은 꿀물을 홀짝거리며 황제와 검은 새끼새들이 어울려 노는 모습을 구경했다. 날리는 먼지와 날개에 마른기침을 콜록거리면서도 황제는 용케 역정을 내지 않고 새끼새들과 어울렸다. 피를 토할 것처럼 콜록거리는 것이 안쓰러워 황제에게도 물그릇을 밀어주며 서문경이 무심코 말했다. 

“그런데 정말로 하루 가는 줄을 모르겠네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며칠이 지난지도 모르겠어요. 서문경이 덧붙여 중얼거린 말에 황제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저것이 무슨 표정인가 싶어 서문경이 가만히 한 쪽 눈을 구겼다, 계속해서 새끼새들을 쓰다듬고 있던 황제의 손가락까지 움직임을 멈추고 있는 것을 보고 나머지 눈도 찡그렸다.

“···폐하?”

묘하다. 전혀 황제가 동요할 만한 말은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그러다 서문경은 불쑥 치솟은 기시감에 방금 전 있었던 일을 되뇌었다. 황제가 저것과 비슷한 반응을 보인 적이 있었는데 그 때의 화제도 아마.

“폐하, 진짜 오늘이 며칠입니까?”

“일자가 가는 것도 모르다니 네 녀석이 호되게 앓기는 호되게 앓았나 보구나. 어이쿠, 이놈이 어디를 쪼아, 고얀 것이. 어, 모른 척하고 대가리 돌리는 꼴 좀 봐라. 요놈아, 짐이 여기 떡하니 눈알이 박힌 것을 보았는데도 시치미를 뗄 셈이냐.”

자신이 한 질문은 딴 말로 넘겨버리고서 애꿎은 병아리만 잡고 늘어지는 황제를 노려보는 서문경의 눈초리가 저절로 험악해졌다. 결국 서문경이 버럭 언성을 높였다.

“폐하!”

“어이쿠야.” 황제가 과장되게 놀란 척을 하면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시커먼 놈들끼리 일전에 모여 밀담이라도 나누었더냐? 새 새끼나 주인이나 왜 이렇게 짐의 간담을 들었다 놨다 해. 이러다 짐이 놀라 뒤로 넘어가기라도 하면 그 뒷감당을 어찌 하려고?”

“딴청 피우지 마시고요.”

“짐이 무슨 딴청을 피웠다고 그래.”

“그럼 대답해 보십시오. 제가 앓아누운 뒤로 며칠이 지난 겁니까? 오늘이 몇 월 며칠입니까?”

예상대로, 황제가 서문경의 물음에 곧바로 대답하지는 않고 불만스럽게 입술만 삐죽거렸다. 서문경은 한숨을 삼키며 베갯모에 푹 얼굴을 묻었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대체 며칠을 누워 있었던 거야···.”

“무얼 그런 걸로.”

“그걸 말이라고!” 

서문경이 번쩍 고개를 들며 조금 전까지 자신이 얼굴을 묻고 이던 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던지려나? 황제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러나 황제에 비하면 비교적 상식인인 서문경은 치켜들었던 베개를 결국 제 무릎 위에 올려놓고 대신 씩씩 거친 숨을 쉬었다.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억누르고 있는 것이 뻔한 목소리로, 서문경이 내뱉었다.

“정말 어쩔 겁니까. 이래서야 저도 폐하도, 망신살이 뻗칠 것은 따 놓은 당상 아닙니까. 안 그래도 저희라면 비웃고 보는 인간들이 대연회 후에는 또 어떻게 속을 뒤집어 놓을지. 정말 이것을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아, 빌어먹을. 무슨 놈의 감기가 이렇게 호되게 걸려서는. 정말 이걸 어쩌나. 갑자기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세상이 뒤집어 지지 않는 이상은 다 끝났어. 다 끝났다고.”

“무슨 걱정이냐. 세상이 뒤집힐 텐데.”

“무엇보다 재하 원혜 그 여자가···,” 하고 거의 머리를 싸안고 중얼거리던 서문경이 멈칫했다. 잠시 후, 서문경이 의심쩍은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들었다. 서문경의 시선을 받은 황제가 왜 그런 표정이냔 듯이 콧잔등이를 한 번 찡긋했다. 저, 서문경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방금 뭐라고 말하셨습니까? 제가 잘못 들은 것 같아서.”

“혹여라도 운이 좋으면 세상이 뒤집힐 지도 모르니 사서 걱정하지 말라고 했었느니.”

어이없는 대꾸에 서문경이 고함을 질렀다.

“참 태평도 하십니다!”

“태평 못할 이유가 어디 있누.”

“그걸 말이라고!”

입에서 불이라도 뿜을 듯한 기세로 서문경이 날뛰었다. 벌떡 자리까지 박차고 일어나서 성질을 부리는 서문경 때문에 겁을 먹은 새끼새들이 도도도도 짧은 다리로 달려가 황제의 뒤에 숨었다. 쉬, 쉬. 황제가 안심하라는 듯 입술에 손가락을 짚고 짧은 숨소리를 내며 새끼새들을 달랬다. ‘괜찮다. 타고나기를 못된 성미는 아니니 해치지는 않을 게야.’, 새끼새들에게 그 따위 말까지 속삭이고 있는 황제를 서문경이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쏘아보았다. 왜 내가 나쁜 놈이 된 거야, 내가 뭘 했다고. 그러고 있으려니, 황제가 한 술 더 떠 우두커니 서 있는 서문경을 힐끗 올려다보며 충고한다.

“일단 앉거라. 아해들 앞에서 그것이 무슨 난봉이냐.”

“난봉? 난봉이요?”

“쉿. 아해들이 놀란 것 안 보이더냐.”

서문경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지금 그게 문젭니까!”

자꾸 왜 딴청이십니까! 결국 참지 못한 서문경이 베개를 던지며 화를 냈다. 메밀을 채운 모베개가 장지문 있는 곳으로 휙 날아갔다. 황제나 새끼새를 노린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아마도 모베개는 허공에서 힘을 잃고 그대로 떨어지거나, 아니면 반대편 벽을 맞고 떨어질 것···,

“악!”

서문경의 눈이 접시만 해졌다. 여기저기에서 헉, 하고 놀라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차례로 들려왔다. 툭, 하고 그제야 모베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언제부터···,” 서문경이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언제부터 문이 열려 있던 겁니까?”

서문경이 삿대질하는 곳을 무심한 눈으로 한 번 보고 황제가 이맛살을 구겼다. 

“돌았구나. 아뢰는 말도 없이 어찌 지존이 있는 곳 장지문을 발랑발랑 열어젖히고 드나들어.”

황제의 말대로, 어느새 호박방 장지문이 아뢰는 말 한 마디 없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리고 열린 문 문지방 너머 바로에, 대령상궁 연재 화연과 낯모르는 상궁 차림의 여인이 하나 서 있었다. 서문경이 던진 베개에 맞은 사람은 걔 중 낯선 상궁인 듯 곱게 분을 바른 얼굴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황제의 시선이 닿고 나서야 지금껏 뻣뻣하게 서 있던 이들이 비로소 무릎을 꿇고 앉았다. ‘황상을 뵙사옵니다.’하는 말을 귓등으로 받아 넘기고 황제가 쏘아붙였다.

“쓸 줄도 모르는 주둥이와 들을 줄도 모르는 귀는 차라리 없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예? ···예?! 그 무슨 말씀이시옵니,”

“보아하니 제 힘으로 굴러갈 수도 없는 대가리도 없어도 무방하겠구나.” 

턱을 괴고 앉은 황제가 손을 횡으로 슥 저어 목을 가르는 시늉을 했다. 황제가 말하려는 바를 알아들은 궁인의 낯빛이 삽시간에 새파래졌다. 금방이라도 황제가 자신의 목을 꺾어 놓을 것이라 믿는 것 마냥 제 목을 두 손으로 감싼 궁인이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며 애원하였다.

“폐, 폐하, 소녀의 무례를 부디 너그러이···.”

“경아, 너는 저것이 애구(哀求)하는 치의 목광(目光)으로 보이느냐?”

갑자기 황제가 고개를 돌려, 서문경에게 물었다. 저것이 무슨 말인가 생각했다가 서문경이 곧 미간을 찌푸렸다. 언뜻 보기에는 벌벌 떨며 애원하는 것 같던 궁인의 눈빛이 불손한 빛을 띠고 있는 것을 발견한 때문이었다. 자신이 저지른 크나큰 무례는 생각지도 않고 오히려 황제가 역정을 내는 것을 짜증스러워하는 표정에 서문경은 확 기분이 나빠졌다. 황제를 평소에 얼마나 하찮게 생각해 왔으면 저런 태도를 보인단 말인가.

“상전이 누굽니까.”

서문경이 물었다. 예? 하고 반문하며 궁인이 머리를 들었다. 서문경이 고개를 저었다, ‘당신에게 한 질문이 아닙니다.’

“폐하, 저 자의 상전이 누굽니까.”

“그것은 왜?”

서문경이 짓씹어 내뱉듯이 대꾸했다.

“얼마나 생각이 없는 자인지 궁금해서 그럽니다. 종의 수준을 보면 그 상전의 수준도 뻔하지 않습니까.”

그 폭언이 궁인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녀가 부득 이를 갈았다.

“이 무슨 무례한···!”

“그러게요. 황상의 앞에서 허락도 없이 머리를 든 데다 언성까지 높이다니, 이 무슨 무례한 짓거리랍니까.”

자신을 정확히 겨냥한 질책에 궁인이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말 한 마디 거들지 않고 지켜보고 있던 황제가 그제야 픽 웃으며 평했다.

“경이 네가 이제야 고뿔이 나았나 보구나.” 그렇게 말하고서 황제가 느릿하게 머리만 돌려 궁인 쪽을 응시했다. 황제가 무성의하게 물었다. “그래, 네 상전이 누구냐? 내 깜둥새가 몹시 궁금해 하니 짐도 한 번 들어보고 싶구나.”

“폐하···.”

하고 난감한 듯한 투로 끼어든 것은 대령상궁 연재 화연이었다. 황제가 그녀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빈정거렸다, ‘하기는. 내 종이 하는 꼴을 보니 다른 치를 탓할 것도 없나. 네 덕분에 이미 짐의 얼굴은 더 먹칠할 자리도 없겠구나.’ 

그 말에 연재 화연이 낯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일단 입을 다물면서도 그녀는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연재 화연이 다시 끼어들 틈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황제는 계속 낯선 궁인을 조롱하였다.

“정녕 구문이 떨어져 나갔누? 어찌 입은 있는데 대답이 없을꼬?”

그 말에 궁인이 콱 아랫입술을 깨문다 싶더니, 발작하듯 대답했다.

“운현궁 마마시옵니다.”

“태황태후전의 궁인이라고?”

태황태후가 언급되자 그것만으로도 근래에 있었던 불편한 일들이 되살아나는지 황제의 얼굴빛이 눈에 띠게 불편해졌다. 낯빛이 흐려진 것은 서문경 또한 매한가지였다. 황제와 서문경 모두가 입을 다문 그 틈을 타, 연재 화연이 다시 끼어들었다.

“운현궁에서 운현궁 마마의 말씀 받잡고 찾아뵈었사옵니다.”

“그대가?”

“예?” 연재 화연이 말을 더듬었다. “물론 소인이 아니오라···,”

“그대가 아니면 입 다물고 있게나. 그리 무료하면 짐 용안에 말고 자네 면면에 직접 먹칠이나 하고.”

찍 소리도 내지 못하고 연재 화연이 물러나자, 황제가 노골적인 짜증을 섞어 운현궁 나인에게 물었다.

“또 무슨 이유로 부르신다던가? 내 분명 이부 어두우신 어르신께서도 충분히 알아들으실 수 있도록 당부 드렸네만.”

“운현궁으로 듭시라는 전언이 아니오라···.”

“그럼?”

“마마께서는, 황상께옵서 지나치게 오래 침전과 편전을 비우시는 것을 염려하시었사옵니다. 운현궁 마마께서는 나라와 황궐의 주인 되시는 황상께오서 항상 가장 높은 자리에서 백성과 문무백관을 굽어보시며 기둥처럼 굳건히 버텨 주시어야 나라와 조정이 흔들림 하나 없이 평온할 수 있지 않는가 하고···.”

생각 밖의 말에 황제와 서문경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힐끗 쳐다보았다. 잠시간 침묵하고 있던 황제가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황제의 목소리와 어조가, 아직 채 의혹이 가시지 않은 탓으로 떨떠름하기 그지없었다.

“사직(社稷)을 위한 마마의 충언, 깊이 새겨듣도록 하겠네.” 

그렇게 잘 포장하여 대꾸한 뒤에, 결국 황제가 삐뚤어진 심기를 억누르지 못하고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덧붙였다, ‘무슨 심기로 마마답지 않은 직언을 하시는지는 짐작도 못하겠네만 말이지.’

계속 청의관에 눌러 붙어 있으면 계속 태황태후전의 나인이 귀찮게 할 것임을 직감한 황제가 하는 수 없이 자리를 털어 일어났다. 자신의 옷자락을 앙증맞은 부리로 물고 당기는 검은 병아리의 머리통을 검지로 한 번 쓸어주고 고 놈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황제가 서문경을 돌아보았다.

“일단은 가 보마. 아니면, 경이 너도 천추전으로 갈 테냐?”

“아니요.” 서문경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따라가서 뭐하겠습니까. 그냥 저는 여기서 요양이나 마저 하렵니다.”

“태의(太醫)를 보내주랴.”

“거의 다 나은 감기를 의사에게 보여서 어디다 씁니까. 잘 먹고 한 잠 푹 자고 나면 나을 겁니다.”

그 말이 옳다고 여겼는지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문경이 인사했다.

“아직 길이 젖었을 테니 살펴 가십시오.”

“배행은 아니 가느냐.”

“환자에게 꼭 배웅을 받으셔야겠습니까?”

“오냐. 꼭 받아야겠다.”

“아무리 그러셔도 환자는 못 갑니다.”

“아, 얼굴 좀 더 보자는 것이 무리한 청이더냐?”

“무리한 청입니다!”

배웅을 나오라는 황제와 그렇게는 못 하겠다는 서문경이 아옹다옹 끝도 없이 다투었다. 그 토닥거림이 길어질수록 운현궁 상궁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더 이상은 구겨질 자리도 없겠다 싶을 만치 그녀의 얼굴이 구겨졌을 무렵, 과연 운현궁 상궁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채근했다.

“황상, 급히 행보 하시옵소서.”

황제가 눈을 찌푸렸다.

“···그리 서두를 만한 일도 아니지 않은가.”

“무론 황상의 말씀이 천 번 옳사옵니다. 다만 소인은 청의관 물손님의 낯빛이 맑지 못한 것을 보니 그만 염려가 되어···.”

운현궁 나인이 허리를 굽실굽실하면서 변명했다. 얼토당토않은 변명이었지만 스치듯 본 서문경의 얼굴빛이 정말로 좋지 못한 것을 발견한 황제가 말꼬리 붙잡지 않고 그저 턱 끝을 주억거렸다. 황제가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배행은 되었느니. 누워서 쉬거라.”

“폐하···,”

황제가 순순히 배웅을 포기하려 하자 이상하게도 안도는커녕 오히려 아쉬운 마음이 들어 서문경이 황제를 따라 발걸음을 한 번 떼었을 때였다. 일부러 내는 것이 분명한 무거운 발소리가 들리더니, 곁눈질만 하며 상전들의 눈치만 살피고 있던 청의관 궁인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내뱉는 소리들이 들렸다.

“상국께서 어찌하여 이곳까지···.”

“체제공 어르신!”

탁, 탁탁, 탁탁탁. 무릎 뼈가 마룻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연쇄적으로 들리며, 궁인들이 하나 둘 나부죽 절을 올렸다.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장지문 바로 앞을 차지하고 있던 연재 화연과 운현궁 궁인 또한 대경하여 그 자리에서 비켜섰다. 

“······.”

시야에 들어 있는 모든 사람들이 무릎을 꿇었다. 아마도 사각(死角)에 자리한 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몸을 던져 절을 하여도 발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눈길조차 주지 않는 것이다.

꾸준히 커지던 발소리가 비로소 멈췄다. 연재 화연이 있었던 자리에, 커다란 사내의 그림자가 자리 잡았다. 앞을 응시한 채로 서문경은 이마를 찌푸렸다. 처음에는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 정도로 서현의 얼굴이 엉망이었던 탓이었다. 황제와 서현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친 채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지존을 뵙사옵니다.”

그 검은 그림자 같은 사내가 스르륵 미끄러졌다. 쓰러지는 것인가 싶어 가슴을 덜컹 내려앉았지만 다행스럽게도 아니었다. 황제의 앞에 예를 차린 남자가, 이윽고 황제의 허락조차 받지 않고 빳빳하게 머리를 쳐들더니 오만하게 요구했다.

“신 수상 서현, 황상께 독대(獨對)를 청하옵니다. 부디 주변의 모든 이들을 물리쳐 주시옵소서.”

실질적으로는 황제에게 하는 청이 아닌, 황제를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내리는 명령이었다.

**

모든 사람들이 빛을 맞은 그림자라도 된 듯이 스르륵 긴 옷자락을 끌고 사라졌다. 그들 중 단 한 사람, 운현궁에서 태황태후의 명을 받잡고 온 상궁만이 난색을 표했지만 이미 다른 치들의 시선이 무언의 압박이 되어 그녀를 억누르고 있었기에 운현궁 나인도 결국은 별 말 하지 못하고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앞에서는 하나하나가 뾰족한 가시를 세우고 스스로를 존재를 피력하던 자들이, 수상 서현의 한 마디에 저처럼 변한 것을 보면서 서문경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황제를 배려하려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저절로 한숨이 나오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무시무시할 정도의 장악력. 

그러나 동시에, 뱃속 깊은 곳에서 삐딱한 의구심이 머리를 든다. 예전 같으면 배알이 뒤틀려 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이토록 완벽하게 사람들을 제 손 안에 잡아 쥐어 마음대로 조정하는 서현이라는 인간 자체에 대한 감탄을 감출 수 없었겠지만. ···자연적으로 시선에 편견이란 박피(薄皮)가 쓰인다. 서현의 발치에 납작 엎드려 벌벌 기고 있는 저 사람들이 과연 서현이란 인간 자체에게 복종하는 것일까. 과연 저 사람들이 서현이 용이 아니라 해도 서현에게 저렇게 복종할까. 

그러다 문득, 시선이 마주쳤다.

“······?”

처음에는 황제를 보는 것인가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서현은 분명히 자신 쪽을 보고 있었다. 자신을 향한 서현의 시선에서 서문경은 소리 없는 강요를 읽고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순순히 나가줄 줄 알고.

그러자 서현이 다시금 같은 말을 반복했다.

“신, 황상께 감히 독대를 청하옵니다.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빼족 세운 무릎에 턱을 괸 채로, 벽에 걸린 족자에 언짢은 시선을 던지고 있던 황제가 눈길을 주지도 않고 삐딱하게 대꾸했다. 

“짐이 윤허치 않아도 이미 독대할 상황이 된 것 같구나.”

“수객을 물려주십시오.”

그 말이 떨어지고 나서야 황제가 고개를 돌렸다.

“어찌한다? 저 놈은 지존의 말씀이라고 모두 듣는 족속이 아닌지라.”

가만히 있다 욕을 들은 서문경이 울컥하여 반박하려다 꾹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서문경이 애써 참고 있는 것도 모르는지, 황제가 히죽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경도 보라, 저 놈 하는 꼴이 어떤지.’ 이 인간이! 결국 참지 못한 서문경이 서슬 퍼런 눈으로 황제를 노려보았다가 곧바로 어, 했다. 황제가 자신 쪽이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있었던 탓이다.

대체 뭘 보고 저렇게 싱글거리나 싶어 황제의 시선을 따라가니, 거기 있는 것은 자신이 만들어 냈던 새카만 병아리 한 마리였다. 새끼새치고는 약간 사나운 느낌의 단과(丹果)씨 같은 눈매를 보니 황제의 손바닥에 앉아 있었던 놈 같았다. 녀석이 앙증맞은 두 날개를 딱 야무지게 붙이고 짧은 목을 주욱 앞으로 내민 채로 도도도도 앞으로 돌진을 한다. 어디로 가려고 그러나, 하고 생각한 순간 고무로 만든 가지 같은 조족(鳥足)이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라 문지방을 훌쩍 넘었다. 

“어.”

서문경이 자신도 모르게 짧은 신음을 흘렸다. 너무 힘차게 뛰어오른 나머지 균형을 잃은 검은 병아리가 정확히 서현을 향해 고꾸라진 때문이다. 그 꼴을 보고 이맛살을 구긴 서현이 한 손을 내밀었다. 받아 주려는 건가?, 서문경이 생각하는데 서문경과 멀어지자 환상을 지탱하는 힘도 약해졌는지 검은 병아리는 서현의 손바닥을 통과해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통. 작은 고무공이 튀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 검은 병아리는 바닥에 널브러진 채로 일어나지 않았다.

“방정맞은 것이.”

황제가 중얼거리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긴 침의 자락이 끌리는 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 무겁게 울렸다. 배부른 짐승마냥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간 황제가 문지방 앞에 멈춘 채 곤외(?外)로 손만 뻗었다.

“들어가자.”

하고 말하자 지금껏 죽은 것처럼 축 늘어져 있던 검은 병아리가 거짓말처럼 벌떡 일어나 황제의 손바닥 위로 올라왔다. 고 놈을 추슬러 들며 황제가 서현에게도 말했다.

“경도 안으로 들어오라. 그대가 청한 독대까지는 무리겠지만, 할 말이 있다면 들어 주마.”

“폐하,”

“수객은 물리지 않는다.” 황제가 전에 없이 단호하게 서현의 말허리를 동강냈다. “수객이 이 자리에 동석하는 것이 꺼려진다면 경은 지금이라도 돌아가도 좋아.”

서현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자신이 끝끝내 물손님을 물러나게 하라고 고집한다면 오히려 장지문을 닫아버릴 기세인 황제를 보고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에 잠긴 듯 했다. 그러다 문득, 그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물었다.

“그는, 믿을 수 있는 자이옵니까.”

“그렇다.”

“몇 번이고 치욕스러운 배반을 당하시지 않았습니까.”

황제의 낯빛이 냉엄해졌다. 허나 서현은 입을 다물지 않았다.

“그런데도. 외람되오나 다시 여쭙겠나이다. 저 자는 믿을 수 있는 자이옵니까?”

“···그래.” 황제가 씹어 내뱉듯 대꾸했다. “그렇다.”

“허나 신은 생각이 다릅니다.”

“경의 생각은 중요치 않다!”

결국 황제가 언성을 높였다.

“택하라. 어떻게 할 텐가? 돌아갈 텐가, 아니면.”

서문경은 서현의 입매가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서현의 시선이 당연한 것처럼 자신을 향한다. 그가 자신을 노려보리라고 생각했다. 원망과 노염으로 그가 이를 갈리라고. 그러나 아니었다. 서현을 마주 노려봐 줄 마음을 단단히 다지고 있던 서문경은 그래서 서현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당황했다. 

어째서?

두 색의 물감이 떨어진 것 마냥, 서현의 눈 안쪽에서 서로 다른 감정이 어지럽게 얽혀 일렁거린다. 경계와 씁쓸함, 걱정과 조바심. 물위에 떨어진 물감이 물속에서 엉기듯, 그 감정도 하나로 엉겨 곧 알아볼 수 없게 변했다. 서현이 몸을 일으켰다. 돌아가는 것인가, 했지만 이번에도 그는 서문경의 예상을 배신했다. 그가 천천히 호박방 안으로 들어왔다. 방 안으로 들어온 그가 자신의 손으로 장지문을 닫았다. 스르륵, 하는 소리. 그 소리가 서문경의 귀에는 실체 없는 영혼이 귓가를 스치는 것처럼 섬뜩하게만 들렸다.

“어쩌다 그 모양이 됐는가.”

황제가 불쑥 물었다. 무슨 소리가 싶어 서문경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가, 지금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치 창백한 서현의 얼굴을 보고 납득했다. 

“차라리 잘 된 일인지도 모르겠나이다.”

서현이 대답했다. 황제의 물음만큼이나 맥락 없는 대답이었다. 저 치들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선문답인가 했지만, 그 대꾸를 듣자마자 황제가 미간을 구기는 것을 보면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뜬금없이 무슨 소린가.”

“침전으로 행보하실 참이었나이까.”

“무슨 소리냐고 물었거늘.”

“그리하지 마십시오. 아니, 그리하실 필요 없나이다.”

황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대, 무언가 아는 것이 있는가.”

“당분간 이 청의관에서, 그리도 귀애하시는 수객과 더불어 계시며 상련지정(相憐之情)을 맺으시오면 아무 탈 없이 평온무사(平穩無事)하실 것이옵니다.”

“희한하구먼.” 황제가 냉소적으로 대꾸했다. “분명 운현궁 마마와 그대는 한 배를 탄 몸이 아니었던가. 그런 주제에 하나는 뫼로 가라하고, 다른 하나는 강으로 나라하니 짐은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꼬?”

“청의관에 계십시오.”

황제는 비소(非笑)를 금치 못하며, 조금 전 서현이 했었던 말을 그대로 서현에게 돌려주었다.

“그대는 믿을 수 있는 자인가?”

“······.”

“몇 번이고 짐은 그대에게 치욕적인 배반을 당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그대를 믿으라?”

그 말에, 서문경은 서현이 아랫입술을 콱 짓씹는 것을 보았다. 단단한 치아가 파리한 입술을 사정없이 짓누르며 숫제 그 입술을 파고들어 결국을 피를 내고 말았다. 그러다 결국 그가, 분을 억누르는 것이 분명한 쉰 소리로 대꾸했다.

“과거의 일과는 별개로,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믿으셔야 한다···.”

황제가 검지 끝으로 검은 새끼새의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무심하게 중얼거리다가 불현듯 툭 내뱉었다, ‘그것, 마치 명령처럼 들리는구먼.’

서현이 대답했다.

“과거, 신이 저지른 야만스러운 행동을 부정치 않겠습니다. 허나 그 또한.” 서현이 잠시 말을 멈추고 턱 끝을 빳빳이 치켜들었다. “옳은 궤도로 들기 위한, 불가무(不可無)의 과정에 불과한 일이었나이다.”

“옳은 궤도.”

“물짐승은 물속에서 유영하고, 멧짐승은 뫼에서 뛰어 다니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옵니다. 헌데 지금은 그것이 어그러져 있지 않습니까. 신은 이전에는 물론, 지금도 그것을 바로 잡으려 힘쓸 뿐입니다. 이를 폐하께서는 어찌 여기십니까.”

물짐승은 물에, 멧짐승은 뫼에, 그것이 바른 이치. 그러나 인세의 상황은 어그러져 있다. 그 말은 곧-. 용이 아닌 자가 황제의 자리에 있으니, 서현 자신이 그 상황을 바로 잡으리라는 말이었다. 도발이었다. 서문경은 그리 여겼다. 황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고 곁눈질을 했으나, 서문경은 몹시 놀라고 말았다. 황제의 얼굴이 마치 밀랍을 바른 것과 같았다. 

아무런 감정도 찾아볼 수 없는 밀랍 가면 같은 얼굴로, 물끄러미 서현을 바라보던 황제가 입을 연 것은 잠시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어찌 생각하느냐고.” 그것은 혼잣말. 황제가 약간 눈을 치떴다. “그대는, 여전히 탐이 나는가?” 그리고 그것은 서현의 물음에 대한 반문이었다.

서현은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대답했다.

“물론이옵니다. 지금 폐하께옵서 계시는 자리는 원래는 저의 자리.”

“······.”

“제가 앉아야 하는 곳입니다. 제게 주어진 자리입니다. 제 것입니다!”

서현의 말이 점점 더 빨라졌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황제의 말은 점점 더 느려지고 우울해졌다. 황제가 물었다. 

“욕심이 나는가.”

“욕심!” 서현이 불현듯 목소리를 높였다. “욕심이라!”

황제의 어떤 말이 서현의 심기를 거슬렀는지 서문경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황제의 말에 서현의 심기가 비틀릴 대로 비틀렸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뱃속 깊숙한 곳에 숨겨 놓은, 예민한 치부(恥部)를 찔려. 지금만큼은 서현은 평소의 그 진한 먹 같던 냉엄함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었다. 지금의 그는 타인으로부터 놀림을 받아 잔뜩 화가 난 아이와 같았다. 

서현이 험악하게 쏘아붙였다.

“욕심이라 하셨습니까? 소인은 욕심 따위를 낸 적이 없습니다. 욕심이라니, 그깟 것, 그 지긋지긋한 것, 그 빌어 처먹을 것···!,” 부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격앙되어 있던 서현의 목소리가 마치 목 안으로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나직해졌다. “저열한 욕심 따위가 아닙니다. 그저 신이 그 자리에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폐하께서, 다른 사람은 또 몰라도 폐하만큼은 그 자리에 놓아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난폭한 말에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소리 또한 서문경의 것이었고, 정작 그 말을 들은 황제는 변함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시 후, 황제가 조용히 대꾸했다.

“그대가 과거와 생각이 변함이 없다면, 짐도 같다.”

“믿을 수 없습니다.”

“어찌하여.”

“저-.”

하고 말하는 서현의 시선이 서문경에게로 옮겨갔다. 뜻밖의 상황에 놀란 서문경이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황제가 한 손을 들어 올려 서현의 시선으로부터 서문경의 얼굴을 가렸다. 서현이 말을 이었다.

“저 수객을 이리도 감싸고 도시는 것을 보고도 어찌 신이 황상께서 하신 약조를 신뢰할 수 있겠나이까.”

“왜. 짐이 괴는 아이에게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해주고자 새삼 욕심을 낼 것 같더냐.”

“사람의 마음이란 무릇 갈대와 같은 법. 제 아무리 만인의 위에 군림하시는 지존이라 한들 지존 또한 결국은 사람일진데, 어찌 황상의 마음이 영원히 금석(金石)과 같이 굳건할 것이라 여길 수 있겠습니까.”

황제가 픽 웃고는 물었다.

“그런 이유로 간계를 꾸몄더냐.”

“간계?”

“경의 오지랖 덕분에 근래 몹시도 피핍하였느니. 금번에는 아주 일을 제대로 벌였더구려, 수상. 태황태후전에 한 시간이 멀다하며 드나들면서 아주 진땀을 뺐소이다.”

황제의 빈정거림에 서현의 낯빛이 설핏 굳는다 싶더니, 그가 곧 대답했다.

“이제는 그런 수고를 하실 필요가 없으실 것입니다.”

“과연 그럴지.”

황제가 미온적인 투로 대꾸하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탁. 탁탁. 탁탁탁. 황제의 손가락이 간헐적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그 소리에 자극된 것인지, 아니면 황제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모양에 현혹된 것인지 검은 새끼새 한 마리가 종종종 다가가 황제의 손등을 콕 한 번 쪼았다. ‘요 놈아,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새끼새의 머리를 아프지 않을 정도의 힘으로 슬 밀며 황제가 말을 이었다.

“운현궁 마마께서는 경과 생각이 다른 것 같았네만.”

“···운현궁에서 또다시 기별이 있었나이까.”

“경도 보지 않았던가. 운현궁에서 상궁이 와 있었어.”

그제야 대전 대령상궁의 옆에 있던 낯선 상궁의 얼굴을 떠올렸는지 서현이 다문 입에 힘을 주었다. 

“태황태후전에 행차하시라 하셨습니까.”

“아니.” 하고 대꾸하고는, 황제가 천장을 응시하며 턱 긁을 살살 긁었다. “묘한 것이 편전이나 침전을 오래 비우는 것은 지존의 도리가 아니다 하시더구먼. 당최 그 노인네 머리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헌데 이 또한 경의 짓인가. 황제의 물음에 서현은 고개를 저었다. 오만무례하게도 고개만 절레절레 흔드는 서현의 얼굴이 한층 더 딱딱하게 굳어 있다.

“···그 말은, 듣지 못한 척 넘기십시오.”

“듣지 못한 척 넘기라? 무시하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우습구나. 태황태후전에 정작 바람을 넣은 것은 그대가 아니던가.”

“처음에는 그러하였으나.” 서현이 마른침을 한 번 넘기고 말을 이었다.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나이다.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다 하여도, 태황태후전의 전갈을 바로 듣지 마시옵소서. 신이, 신도 물론 태황태후전에 권간(勸諫)을 넣어 볼 것이나···, 대언장담(大言壯談)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서현이 바닥에 짚은 손에 꾹 힘을 주었다.

“그 누구도 뇌비치 마시옵고, 무슨 일이 있다 하여도 다른 이와···,” 서현이 콱 이를 악물고 서문경 쪽을 보았다. “그 사람이 비록 저 자라 하더라도 결코 그와 떨어지지 마십시오.”

저 치라 함은···, 황제가 무심결에 서문경을 돌아보았다. 서현이 말이 그 위로 떨어졌다. 

“결코 홀로 계시지 마십시오.”

“경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짐은 모르겠다.”

“신도 설명 드릴 수 없나이다.”

하고 대답한 서현이, 신하가 주인에게 보내는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매서운 눈길로 황제를 노려보며 다시금 못을 박았다. 

“신에게 진 빚을 갚으실 마음이 만분지일이라도 있으시다면, 그리 해주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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