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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교꾼의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수상부(首相府)에 다다른 것이다. ‘나리, 문중(門中)까지 뫼실깝쇼?’, 수상부의 정문에 이르러 보교꾼 우두머리가 여쭙자 보교 위에 타고 있던 사내가 손을 한 번 휘저었다. 보교가 곧 바닥에 내려졌다. 보교에서 내린 사내가 몰래 자신을 훔쳐보고 있는 보교꾼 우두머리에서 돈을 몇 푼 쥐어주자, 보교꾼들이 다시 가마를 메고 왔던 길을 돌아갔다.
수상부 앞에서 내린 사람이 누구인가 싶어 그 편을 힐끔 쳐다보던 어사(御史) 기섬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달려왔다.
“합하(閤下)!”
하며 달음박질 쳐서 오는 기섬 쪽을 돌아본 사내의 표정이 미미하게 굳었다. 호들갑을 떠는 어사 기섬의 뒤에서 나이가 지긋이 들어 보이는 남자가 느긋한 걸음걸이로 걸어와, 사내에게 말을 툭 던졌다.
“네 교자(轎子)는 어데 두고 보교꾼 신세를 지느냐?”
“아버님께서 수상부까지 웬일로 행차하셨습니까.”
남자가 픽 웃었다.
“아직까지 인갈(引喝: 벽제소리)을 치는 것이 부담스러우냐?”
“술시(戌時)면 백성들이 공히 제 할 일에 집중하고 있을 시간입니다. 그네들을 건혼(乾魂)케 하여 좋을 것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여전히 핑계는 그럴듯하구나.” 하고 일축한 남자, 서엽이 자신의 계자에게 손짓을 했다. “좀 걷자꾸나.”
앞장을 서는 서엽의 뒤를 서현이 따르며, 어사 기섬에게 말했다, ‘곧 들어갈 터이니 경시 그대가 천견에게 그리 일러 다오.’ 그 말을 받든 기섬이 잰걸음으로 사라지자 서엽과 서현 두 사람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수상부 중당(中堂)을 돌아, 화강석 익랑(翼廊)으로 이어진 우측 익사(翼舍) 뒤로 돌아가자 인적이 눈에 띄게 드물어졌다. 착칠을 화려한 왜주홍(倭朱紅) 대신 주칠(朱漆)로 한 몇 채의 전각들을 지나쳤다. 정원수로 심은 반송(盤松)의 수가 늘어나는가 싶더니, 조금 더 걷자 주변의 관상수들이 반송 대신 낙엽송 잡목들로 바뀌고 야트막한 언덕이 하나 모습을 드러냈다. 그 언덕 위에는 용님의 신위(神位)를 모신 신실(神室)이 있었다.
걸음을 늦춘 서현이, 서엽에게 권했다.
“선향정으로 드시겠습니까.”
“되었다.” 일언지하로 잘라 거절한 서엽이 대신 턱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희야, 저 편으로 올라가자꾸나.”
그가 가리키는 자리를 본 서현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날이 저물어 신실 주위는 어둡습니다. 재고하시는 것이,”
“가자.”
서엽이 서현의 말허리를 끊고 발을 돌렸다. 장성한 아들을 몇이나 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 넓고 탄탄한 뒷모습이 거침없이 동산 위를 오른다. 서현이 아직 자신의 뒤를 따르지 않고 계속 같은 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을 눈치 밝은 그가 모를 리도 없건만, 성큼성큼 걸어가는 서엽의 뒷모습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의혹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 서엽의 등을 서현은 말없이, 찡그린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언뜻 고요한 듯 보이는 그 시선에 난감함과 함께 희미한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결국 서현은 서엽의 뜻을 따라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소리 없이 서엽의 뒤를 따르는 서현의 모습이 온통 세상에 어두운 검보라빛 석음(夕陰)이 진 때문인지 이 세상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단숨에 언덕 위로 올라간 서엽이 곧바로 신실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검은 현판을 건 신실 문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도록 어린애 머리통만한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서엽이 턱짓을 했다.
“열거라, 희야.”
“불가합니다.”
서엽이 서현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열거라.’ 하지만 이번만큼은 서현도 서엽의 말을 들어줄 수 없었다. 비록 수상부 안에 자리를 잡고 있다고는 하나, 신실은 속세의 권력이 미치지 않는, 표현하자면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서엽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아비 말이 들리지 않느냐, 소희야.”
“아버님.”
“네가 단순한 신자(臣子)에 불과하냐.” 서엽의 어조가 날카로워졌다. 서현은 눈썹을 찡그렸다. 비로소 서현에게로 몸을 돌린 서엽이 잇따라 쏘아붙였다. “대답해보아라. 네가 다른 치들처럼 단순한 신자에 불과하냐는 말이다.”
서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서엽의 말에 고개를 젓지도 않았다. 서엽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신실은 용님의 신위를 모신 방. 물론 이 수상부의 신실도 마찬가지다. 신실을 개합(開闔)할 수 있는 권리는 황족 중에서도 자격을 갖춘 이에 한한다. 그러므로 수상부의 수장인 수장에게도 신실을 개폐할 수 있는 권리는 없지. 허나, 너는 다르다.”
“소자가 황친이라 이름 붙이기도 민망할 만한 위치라는 사실은 어느 누구보다도 아버님께서 잘 알고 계시는 일이 아닙니까.”
“그래. 이 아비가 그러니 내 자식인 너는 오죽할까. 그러나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핏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자격에 관한 이야기다.” 서엽이 다시금 물었다. “다시 말하마. 네게는 정녕 ‘자격’이 없느냐.”
“······.”
자격. 서엽의 말대로, 신실을 개폐할 수 있는 권리는 가진 것은 ‘자격’을 가진 황족.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자격’은 황실의 핏줄을 얼마나 진하게 타고났느냐 따위가 아니었다···. 서현은 다물고 있던 입을 더더욱 굳게 다물었다. 해가 완전히 저물고 불타는 듯하던 석양마저도 모습을 완전히 감춘 이유에선지 서현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가 조금 더 짙어진 것처럼 보였다.
서엽이 서현의 이름을 불렀다.
“현아.”
서현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아버지를, 무심결에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짙은 그림자가 진 아버지의 얼굴은 그가 서 있는 위치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짙고 시커먼 그림자가 진 자리가 얼굴이 아니라 커다랗게 입을 벌린 구멍처럼도 보였다. ‘이 아비를 거역할 셈이냐.’, 꾸짖는 투로 말한 서엽이 곧바로 언제 그랬냐는 듯이 부드럽게 서현을 얼렀다, ‘너는 착한 아이잖느냐.’
“단 한 번도 아비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어.”
앞으로도 그러리라 믿는다, 서엽의 그 말에 등이 떠밀려 서현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뗐다. 서엽은 그런 서현의 등 뒤에 서서 서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느껴졌다. 그 익숙한 감각을 느끼며 서현은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내 어깨에 매달려 있는 것은, 바위일까, 아니면 악귀일까.
언뜻 투박하게까지 보이는 커다란 자물쇠는 가까이에서 보자 무섭도록 정교하고 화려한 문양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서현은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은 이미 그 문양이 어떤 모양인지 알고 있었다. 어지럽게 흩어진 수 백 개의 구름, 폭풍우에 흩날리는 수 천 개의 빗방울, 그리고 커다란 자물쇠 전체를 휘감고 있는 한 마리의 용.
굳게 입을 다문 자물쇠를 여는데 개금(開金: 열쇠)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쇄금(鎖金: 자물쇠) 위에 서현의 손이 겹쳐졌다. 일순 쇄금과 서현의 손이 맞닿은 자리에서 파직 새파란 전기가 튀었다. ‘자.’, 서현의 몸이 반사적으로 주춤하자 서엽이 어린애를 달래듯 중얼거리면서 서현의 어깨에 한 손을 얹었다. 경쇄에서 튀던 전기가 서서히 사그라지고, 대신 경쇄가 움칠움칠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 무거운 쇳덩이가, 잡고 흔드는 힘도 없이 미친 듯이 경련을 일으켰다. 딱딱딱딱딱딱딱, 경쇄가 흑칠한 나무문을 굉음을 내며 때렸다. 그 소리가 점점 커졌다. 점점, 점점, 점점···!
그리고 어느 순간, 굉음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서엽이 물러나는 것을 느끼고, 서현이 옆으로 비켜섰다. 자물쇠가 완전히 풀려 있었다. 서엽의 한 쪽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치켜 올라갔다.
“보아라. 언제나처럼, 이 아비의 말이 옳지 않니.”
서엽이 문을 밀며 덧붙였다, ‘용인이 아닌 이는 불태워버리는 이 경쇄가 풀린 것이 그 증거다.’ 끼이이익-. 낡은 경칩이 무거운 문의 무게에 비명을 지르듯이,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질렀다.
불을 밝히지 않은 신실 안은 한치 앞도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어두웠다. 그야말로 깊디깊은 동굴로 향하는 입구. 하지만 서엽은 개의치 않았다. 서엽이 척척 신실 안으로 들어가며 서현에게 일렀다.
“소희야. 불을 밝히련.”
신실 안에서 ‘자격’이 없는 아비는 술(術)을 쓸 수 없으니.
서현이 말없이 손을 뻗어 주변의 유실수에서 엽지(葉枝)를 하나 떼어냈다. 그것에 그가 입김을 한 번 부니 그것이 얇은 백지(白紙)가 되었다. 서현이 그것을 허공에 툭 내던지자 백지가 갑자기 시뻘건 불꽃에 휩싸였다. 처음에는 아이 주먹만 하던 불덩이가 점점 커져 곧 성인 사내의 머리통 만해 지더니, 살아 있는 것처럼 서현의 옆을 뱅글뱅글 돌았다. 서현은 서엽을 따라 신실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리 새끼마냥 서현을 따라 온 불덩이 덕에 어둡던 신실 안이 환해졌다.
“아버님.”
서현이 벌써 저만치 앞서가고 있는 서엽을 불렀다. 부르는 소리를 들은 서엽이 서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위패 앞에 향을 올리려는 듯, 서엽의 손에는 향이 들려 있었다. 서엽이 권했다.
“먼저 향을 올리려무나.”
“소자는 이곳에 오래 있고 싶지 않습니다.”
서엽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러다가 그가 곧, 눈에 띄게 서현의 파리해진 얼굴빛을 보고 알겠다는 듯이 입술만 끌어 올려 웃었다.
“숨 쉬기가 힘들더냐.” 신위에 향을 내려놓은 서엽이 서현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나 같은 범인(凡人)에게는 느껴지지 않는 것이, 용인인 네게는 느껴지나 보구나. 그렇다면, ···그래, 지금의 너로서는 힘들만도 하지.”
“그런 이유가 아닙니다.”
“그럼.”
그 물음을 모른 척 하고 서현이 물었다.
“아버님. 저는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이유? 이유라. 무슨 이유?”
서엽이 의뭉을 떨며 반문하자, 괴로운 듯 서현의 낯빛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서현은 입을 다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것을 본 서엽의 표정이 조금 구겨졌지만, 그가 상대적으로 어두운 곳에 있는 탓에 서현은 그 모습은 보지 못했다. 서현이 서엽을 향해 발을 뻗으며 입을 열었다.
“무슨 까닭으로.” 무슨 까닭으로? 하고 묻듯이 서엽이 머리를 모로 기울이는 것이 보인다. 깔보는 것이 분명한 가벼운 태도에 언짢을 만도 하건만 서현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말을 이었다. “무슨 까닭으로 이곳에 오신 겁니까, 아버님. 어찌하여 이리도 갑자기, 신실을 찾을 마음이 드신 겁니까.”
“그저 신실 안을 둘러보고 싶을 뿐이다.”
“소자는 그 말씀을 믿을 수 없습니다.”
서현의 말은 마치 칼로 베어내는 것처럼 단호했다. 똑바로 서엽을 쳐다보는 시선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 서현을 파충류처럼 무감동한 눈으로 응시하던 서엽이 어느 순간 픽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아비가 무슨 중죄라도 지은 것처럼 말하는구나, 소희야.”
“자격을 갖추지 못한 이가 신실을 엿보는 것 자체가 죄이옵니다.”
“무어, 어떠냐.” 서엽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서현 쪽을 돌아보며 활짝 웃었다. 그의 목소리가 술에 취한 것처럼 흥겨워지고 높아졌다. “내 아들이 황좌에 오르면 아비 또한 황족보 제일 윗자리에 이름을 올리게 될 것이 아니냐?”
그 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꾹 깨문 서현이 대꾸했다.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은 아닙니다.”
“멀지 않은 일이다.”
“지금은!” 웬만한 일로는 흔들리지도 않던 서현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지금은 아닙니다.”
그 말에 서엽이 절레절레 도리질을 하며 들으란 듯이 중얼거렸다.
“허나 그러는 너도 말 뿐이지, 이 아비를 말리지는 못하잖느냐.”
“그건!”
서현이 고함을 질렀다가 곧바로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고개를 숙인 바람에 드러난 그의 하얀 가리마를 서엽이 냉담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잠시 후 서현이 고개를 들자, 그 순간 거짓말처럼 서엽의 눈빛도 돌변했다. 자신에게 다정한 시선을 보내는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서현은 시선을 돌렸다. 잠시 흐트러졌던 서현의 표정도 언제나처럼 무표정하게 변해 있었다.
서현이 원래의 화제로 돌아왔다.
“아버님의 생각이 듣고 싶습니다.”
“아비를 추궁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자식이 어찌 하늘같으신 어버이를 추궁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저는, 아버님께서 갑자기 신실로 행차하신 연유가 궁금했을 따름입니다.”
“그 연유라면 벌써 답해 주지 않았더냐.”
“그저 신실을 돌아보기 위한 이유였다면 이곳이 아닌 다른 신실을 찾아가시는 편이 좋았겠지요.”
“무어, 어떠냐. 소희 네 얼굴도 볼 겸.”
서엽이 웃으며 가볍게 대꾸했다. 진짜 목적은 말하지 않겠다는 대답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말이었다. 그 말뜻을 알아들은 서현의 얼굴이 굳어졌지만, 서엽은 그것을 못 본 척하고 본격적으로 신실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마치 아이 같은 눈으로 주변을 살펴보던 그가 말했다.
“헌데, 생각했던 것보다 크구나.”
“···역대 용들의 신주(神主)를 모신 곳이니까요.”
“원론은 그렇다만 이곳은 다른 신실과는 조금 사정이 다르지 않으냐.”
하고 말한 서엽이 신실 밖을 물끄러미 내다보며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예전, 이 아비가 너처럼 수상부를 맡고 있을 당시에는 중당 반월창으로 내다보면 바로 이 언덕이 보였었단다.’ 밖을 내다보는 서엽의 시선이 기분 탓인지 묘하게 흐릿했다.
“꽤 먼 거리지만 맑은 날이면 언덕은 물론이고 언덕 위에 있는 이곳까지 훤히 보였었지. 물론 신실 안까지는 볼 수 없었지만. 그래서 일이 한가로울 때면 잠시 쉬면서 창 밖 풍경을 내다보다가 종종 의아해하곤 했단다. 어째서 따로 부지를 받아 단(壇)을 쌓은 다른 신실들과 달리 저곳은 황궐도 아닌 수상부, 그것도 한참 외곽 한편에 쓸쓸히 처박혀 있는 것인가···.”
서엽의 말은 사실이었다.
예제국 수도 곳곳에 위치한 신실은 모두 다섯. 그 이름은 청권단(淸權壇), 지덕단(至德壇), 장충단(裝忠壇), 여용단(餘勇壇)이라 하며, 각각 법치(法治)와 덕치(德治)로 이름 높은 황제와 절의와 충성으로 지극이 용님을 공경하였던 황제, 그리고 지극히 뛰어난 무(武)를 이루었던 황제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었다.
이 네 개의 단(壇)은 차례로 대가와 목청, 절신과 행지에 드넓은 부지를 받아 칙명을 통해 지어졌다. 역대 황제들의 위패를 모시는 장소인 만큼 각 단의 넓이는 왕부(王府)나 공주부(公主府), 혹은 별궁에 버금갈 정도이며, 그 보안도 학궁의 제일가는 술사인 오경박사들이 사력을 다하여 결계(結界)를 이룩하고 따로 군대를 편성하여 입구에 경비를 세웠을 정도로 철저하였다.
그러나 다섯 개의 신실 중 단 하나, 정식 이름도 없이 향명(鄕名)으로 황주라 불리는 이 신실만은 예외였다.
서엽이 말했다.
“뭇사람들은 이 신실을 거칠 황(荒)자에 술 주(酒)자를 쓴다고도 하더구나. 너무 감례(甘醴: 술)와 여인을 좋아해서 할 일을 내팽개치고 주색잡기를 즐기다 결국 제위에서도 쫓겨난 고사(古史) 속 황제를 이르는 것이지.”
“···어차피 황주라는 이름 자체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멋대로 붙인 것이 아닙니까.”
“틀리다. 이 신실의 이름은 황주가 맞아.”
뜻밖의 사실을 들은 서현이 눈을 크게 뜨자, 서엽이 마치 붓글씨를 쓰듯이 허공에 슥슥 글자를 써내려갔다.
“두려워할 황(惶)자에 주인 주(主)자를 쓰지. 들리는 말로는 폐주(廢主)의 위패를 보관하는 신실이라고는 하나···.”
거기까지 말하고 서엽이 입을 다물었다. 서현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위패를 모신 자리를 돌아보았다. 적은 수이기는 하나 분명히 이 신실 안 신위에도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그러나···.
“예의 역사에는 폐군(廢君)이 없습니다.”
“그렇지.” 서엽이 선뜻 동의했다. “용님의 화신이나 다름없는 황제룡을 감히 폐하는 이가 어디에 있으랴? 만일 있다면 날벼락을 맞아 마땅한 일이지.”
“그럼 이 위패는 대체 누구의 위패이며, 이 신실의 역할은 무엇이란 말씀입니까?”
“글쎄···.”
하고 중얼거리며 다가온 서엽이 불쑥 손을 뻗었다.
“아버님!”
깜짝 놀라 두 눈을 홉뜬 서현이 목소리를 높였다. 서엽이 감히 신위에 놓인 위패 중 하나를 집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서엽은 비어 있는 나머지 손을 저으면서 말했다.
“목소리를 낮추어라. 귀가 따갑구나.”
“위패를 내려놓으십시오. 혹여 다른 이가 볼까 두렵습니다.”
“괜한 염려다. 이런 때, 그것도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신실에 굳이 찾아올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렇다 해도···.”
“왜. 이 아비가 황족 모욕죄라도 범하는 것 같으냐.”
그 말에 서현은 다만 눈썹만 찡그렸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대답을 하지 않은 것 자체가 그렇다는 대답이었다. 그것을 못 알아들을 리 없는 서엽이 피식 웃으며 손에 든 위패를 서현의 눈앞에 몇 번이고 흔들었다. 서현의 얼굴에 눈에 띄게 불편한 감정이 짙어졌다. 그제야 서엽이 위패를 제 자리에 내려놓았다. 달그락, 하는 소리가 이상하게 크게 울렸다.
“한서사(韓瑞司) 서안부(西岸府) 건주(健州) 의왕현 의왕군왕(郡王) 자하(紫霞) 문위(門衛) 주(柱)···.”
서엽이 무슨 말을 중얼거리고 있는지 뒤늦게 알아챈 서현이 찡그린 눈으로 위패를 돌아보았다. 방금 전 서엽이 들었다 제자리에 내려놓은 그 위패에 쓰인 글귀였다. 서엽이 턱을 쓰다듬으며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의왕군왕이라. 군왕이면 친왕(親王)의 장자(長子)로군.”
예에서는 황태자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 황제가 되지 못한 황자들로 하여금 금으로 된 책서(冊書)와 옥새(玉璽)를 내리고 친왕(親王)으로 봉하여 황궐로부터 독립하도록 했다. 이 위패에 이름을 올린 군왕(郡王)이란 친왕부(親王府)를 승계할 친왕의 장자를 제외한 아들들에게 내리는 작위였다.
그러나, 참으로 의아한 일이었다. 의구심을 채 숨기지 못하고 있는 서현을 그 때 서엽이 돌아보고 말했다.
“희한한 일이로구나. 신실이라 함은 대대로 용으로 각성하시었던 선제들의 위패를 모신 장소. 그런데 그 신실 중 하나에 고작 군왕에 불과한 황족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니.” 서엽이 의왕군왕의 위패 대신, 또다른 위패를 하나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서현도 말리지 않았다. “보국중위(輔國中尉) 진백 문위 위정.”
이번에는 하물며 친왕도, 군왕도 아닌 한참 방계의 황족이었다.
“어째서 이런.”
서현이 중얼거렸다. 이 신실은, 황제가 아닌 황족들의 위패를 모시는 신실이었단 말인가? 그래서 다른 신실과는 달리 이런···, 아니다. 서현이 곧바로 자신의 가설을 부정했다. 만일 그렇다면 고작 몇몇의 위패만 이곳에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언뜻 둘러보아도 이 신실에 모셔진 위패는 고작 열 개 안팎에 불과했다.
“소희야.”
그 때 서엽이 돌아서며 서현을 불렀다. 서현은 무심코 이맛살을 찌푸렸다. 돌아본 아버지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어려 있었던 탓이었다. 서현은 아버지의 웃는지 비웃는지 경계가 희미한 저 특유의 미소를 몹시 저어하였다. 차라리 불같이 성을 내고, 절로 뱃속이 아파오도록 비웃는 것이 나을 것이다. 저런 미소를 만면에 띠고 있을 때의 아버지는···, 몇 십 년을 얼굴을 맞대고 살아온 아들인 자신조차 생각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서엽이 말을 이었다.
“너는, 이것이 무엇일 것 같으냐.”
“현재로서는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의왕군왕 자하 문위 주와 보국중위 진백 문위 위정의 이름을 머릿속에 새기며 서현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수상부 중당으로 돌아가는 즉시 그 이름을 찾아봐야 할 것 같았다.
그 대답을 들은 서엽이 빙긋이 웃었다. 그 특유의 애매하고 오묘한 미소가 점점 더 진해진다. 서엽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
“이 아비 또한 그렇단다.”
서현은 생각했다. 거짓말. 저 말은 거짓말이다.
그러나 서현이 서엽을 추궁할 틈 따위는 없었다. 서엽이 숨을 고를 시간조차 주지 않고, 갑자기 화제를 돌려 이렇게 물어온 것이다.
“그런데 희야. 내가 묘한 이야기를 들었단다. 소희 네가, 태황태후전에 직접 아뢰어 방비(: 후궁)를 들이게 했다 하던데.”
서현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내심 숨을 삼키며, 서현이 대답했다. 아버지라면 벌써 태황태후전을 통하여 대부분의 사정을 들었을 터이니 어설프게 부정하는 것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습니다.”
“들은 대로구나.”
서현의 눈이 조금 커졌다. 의외의 반응이었다. 생쥐를 삼켜 일단의 굶주림을 막고, 배부른 척 의뭉을 떨며 토끼를 노리는 뱀처럼 자신을 삼키려 들 거라던 생각과는 달리 서엽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아무런 의문도 관심도 없는 것 마냥. 불현듯 가슴 속이 선뜩해졌다. 서엽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말을 걸었다.
“아버님, 그것은,”
“되었다. 희 네가 어련히 알아서 할까. 말했지 않느냐. 이 아비는 너를 믿노라고.” 서엽이 서현 편에 눈길도 주지 않고 손을 저었다. 서엽의 눈은 이제 또다른 위패를 향하고 있었다. 서현이 반사적으로 그의 시선을 좇자, 서엽이 어르듯 덧붙였다. “그러나 무리는 하지 말거라. 서두를 필요는 없느니.”
“말리지 않으십니까?”
그 물음에 비로소 서엽이 서현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희야, 일황자의 맨 등을 본 적이 있느냐?”
그러나 정작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는 것은, 의미도 맥락도 알 수 없는 영 딴 소리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일단 서현이 대꾸했다.
“없습니다.”
“그래, 하기는, 하기는···.”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싶더니 곧 그가 입을 완전히 다물어버렸다. 서엽은 뭔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했다. ‘어찌하여 그런 것을 물으십니까?’, 하며 서현이 물어도 서엽에게는 이미 다른 사람의 말 따위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잠시의 침묵 후에, 서엽이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이만 돌아가자꾸나.”
서현이 말없이 서엽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신실 문을 닫기 직전 서현의 시선이 위패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 닿았고, 서엽의 시선이 그런 서현의 뒷모습을 싸늘한 눈으로 훑은 후 곧바로 다른 곳을 향했다.
탕.
문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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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왕군왕, 문위 주. 그의 이름과 봉작으로 미루어 알 수 있는 정보는 지극히 단편적이다. 군왕의 봉호는 봉해진 곳의 지명을 붙이므로 의왕군왕은 한서사 서안부 건주 의왕현 의왕군에서 봉해진 것이 된다. 또한 군왕인 부친인 친왕이 봉해진 부, 주와 같은 사(司) 내의 현(縣)에 주로 봉해졌으므로···, 따라서 의왕군왕 문위 주는 한서사 서안부를 번국(藩國)으로 삼은 친왕의 아들이 된다.
문제는 보국중위(輔國中尉) 진백 문위 위정이었다. 비교적 직계의 황손인 군왕과는 달리 보국중위는 친왕의 5세손에게 내리는 직위이므로 지금에 와서는 황족보에서 이름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천견.”
잠시 고민하던 서현은 곧 결론을 내렸다. 중당에 돌아온 직후, 계속해서 생각에 잠겨 있던 수상이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것에 조금도 놀라지 않고 천견 최유가 대답했다.
“천견 최유 들어 있사옵니다. 하명하소서.”
“염락은.”
최유의 얼굴에 언뜻 난감해하는 빛이 스쳤다. 눈치 빠른 서현이 최유가 대답하기도 전에 상황을 파악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모습을 숨겼나.” 하고 중얼거린 서현이 최유에게 물었다. “그대의 ‘눈’으로도 볼 수 없는가.”
“술법이 미치지 않는 범위 내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천견(天見) 최유는 그 호처럼, 방 안 깊숙이 앉아서도 천리를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수도에서 변경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터의 상황을 자세히 살필 수도 있는 최유의 ‘눈’이 미치지 않는 범위는 감히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허나 범이나 독사에게도 천적이 있는 것처럼 당연히 최유의 ‘눈’이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최유의 능력 이상의 ‘힘’이 이미 그 자리를 지배하고 있는 경우였다. 즉, 이미 최유 이상의 술사들이 모여 결계(結界)를 이룬 자리-,
“정전이나 편전 혹은 신실.”
“혹은 그에 버금가는 중요 시설에 염락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그런 중요 시설에 별다른 직책도 없는 조원이 들어갈 수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최유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염락은 술사로서는 이름이 높지만, 아직 그렇다 할 직책은 없습니다. 그러니 염락 혼자서 행동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염락이 자네 ‘눈’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 언제쯤인가.”
최유가 잠시 생각한 후에 대답했다.
“대략 네 시진 전부터입니다.”
서현의 눈썹이 꿈틀했다.
“네 시진 전이라고?”
“예, 헌의공 어르신께서 수상부로 행차하시고 체제공께서 막 화천교를 지나고 계실 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일과 관련이 있을지 까지는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만···.” 최유가 조심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무슨 말인가.’하며 서현이 눈을 들어 자신 쪽을 쳐다보는 것을 확인한 최유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작일에도 두어 시진 정도 염락이 보이지 않았었습니다.”
“작일에도?”
‘그러나 작일에는 분명···.’, 뜻밖의 말을 들은 듯이 눈살을 구긴 서현이, 어제의 일을 떠올리는 듯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최유를 재촉했다.
“당시 상황을 자세히 말해 보도록.”
“예. 체제공께서 헌의공 어르신과 함께 입궐하셨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아직 처풍(凄風)과 고우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던지라 창혜각을 나오는 이가 없었습니다. 헌데 을시(乙時)가 지나기 직전, 염락이 창혜각을 나서 북문으로 향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비바람을 막으려 우구(雨具)로 몸과 얼굴을 가리고는 있었으나, 분명히 염락이었습니다.”
“을시···. 이르군. 염락이 어디를 방문했는지는 보았나.”
하고 묻는 서현의 목소리는 나직했고 어조는 은밀했다. 작일에 조원이 방문했다던 그 곳이 천견의 눈조차 뚫을 수 없는 힘이 지키고 있는 곳이라고 확신하는 투였다. 그러나 천견 최유의 반응은 서현의 기대와는 달랐다. 그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청의관이었습니다.”
서현의 눈이 커졌다.
“청의관? 허나 청의관에 결계석은 전혀···. 그런데도 천견 그대가 그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고?”
“처음에는 보였습니다. 염락이 청의관 물손님을 찾아 그와 담소를 나누는 것 모두를 무리 없이 듣고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최유는 결국 자신이 비난했던 조원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는 행동을 했다는 이유 때문인지 조금 꺼림칙해 보였다. ‘헌데?’, 하지만 서현의 재촉에 그는 다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고뿔로 앓아누운 물손님이 결국 정신을 잃은 직후에, ‘눈’이 막혔습니다.”
“눈이 막혔다고?”
“예.”
하고 대답한 최유는 잠시 고민했다. 그 때의 그 느낌을 무어라고 표현해야 좋단 말인가.
“소인의 술력보다 강한 ‘힘’에 튕긴 것과도, 거부당한 것과도 느낌이 달랐습니다. 결계석과 맞부딪쳤을 때에는 그야말로 살피던 장소에서 완전히 내쫓긴 것과 같은 느낌이 들지만 그 때는···.”
최유가 우직하나 그리 재치 있지는 못한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려 그럴 듯한 표현을 뽑아냈다.
“소인은 계속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계속 있었다···?”
“예. 그러하였습니다. 계속 그 자리에 있으나 더 이상 보지도, 듣지도 못하도록 귀와 눈을 막힌 느낌이었습니다.”
최유의 설명을 들은 서현이 입을 다물었다. 최유는 몰래 서현의 표정을 살폈다. 내리깐 시선과 조금 어두워진 듯한 안색. 서현은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 했다. 그러기를 한참. 그러다 불쑥, 그가 내뱉었다.
“···좋지 않군.”
좋지 않아. 서현이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최유가 조심스럽게 여쭈었다.
“무엇이 다릅니까, 체제공?”
“침입한 것이 무엇인줄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정 튕겨내는 것과, 침입자의 정체를 속속들이 꿰뚫고도 추방하지 않고 그 귀와 눈만 가리는 것. ···한 번 생각해보라. 미처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 그대는 눈과 귀를 가려졌다. 허나 그것이 눈이나 귀가 아니라 목이었으면 어땠을 것 같나.”
“!”
“힘의 강함과 약함을 논하려는 것이 아니다.”
무심코 마른침을 삼키느라 급하게 오르내리는 천견 최유의 목젖을 무심한 시선으로 응시하던 서현이 이번에는 최유의 관자놀이로 시선을 던졌다.
“지혜다. 천견 그대를 위협한 ‘힘’의 주인에게는 생각할 수 있는 지혜가 있다. 무작정 입력된 명령만을 지키는 결계석과는 달라.”
“사람···입니까, 그럼.”
하고 물으면서도 그렇게 말하는 최유 자신의 목소리부터 의구심이 가득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뻔한 최유의 혼란스러운 얼굴로부터 서현은 눈을 돌리며 대꾸했다.
“지금으로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염락. 염락을 불러 오겠습니다. 그에게 캐어물으면,”
“천견.”
최유의 어깨가 조금 움찔했다. 서현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진 것을 눈치 챈 탓이다. 자신이 주인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사실을 안 최유가 황급히 머리를 수그리고 나서야 서현의 낯빛이 누그러졌다. 제 수족되는 자를 확실히 짓눌렀다는데서 온 쾌감이 아니라 자신이 너무 날이 서 있었다는 자각이 든 때문이다. 서현이 말했다.
“염락과 말을 섞는 것은 최대한 삼가도록 하라. 그대는 우직한 사냥개지만 그 자는 영악한 여우다. 냉정히 생각할 수도 없는 상태에서 그 간교한 자와 말을 섞어 어찌하겠단 말인가. 그 자에게 되레 속을 간파 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말씀 받들겠습니다.”
뭔가 반박하고 싶은 눈치였으나 천견 최유는 결국 서현의 말에 복종했다. ‘좋다.’, 그것을 보고 보일 듯 말 듯 턱 끝을 끄덕인 서현이 잠시 사이를 두고 나직한 말을 덧붙였다, ‘방금 그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언급하지 않도록 하라.’
예, 하고 최유가 대답하자 서현이 ‘좋다.’하고 입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최유가 황급히 물었다.
“어디로 행차하십니까? 소인이 수행하겠습니다.”
“아니, 천견 그대는 따로 해 줄 일이 있다.”
서현이 손을 내밀었다, ‘붓과 종이를.’ 서현이 내민 손에 최유가 붓을 내어주며 그의 앞에 새하얀 옥판선지(玉板宣紙)를 깔았다. 춤을 추는 듯 유려한 글씨가 한 줌 망설임도 없이 옥판지 위에 쓱쓱 써내려져 갔다. 먹이 마를 만큼의 시간이 지나자 서현이 옥판지와 함께 수상의 문장이 담긴 호두나무패를 최유에게 내어주었다.
“이 자에 대해 알아오라. 봉호는 의안군왕, 이름은 주, 호는 자하, 자는 시천. 한서사 서안부 건주 의왕현 의왕군에서 군왕에 봉해진 황족이다. 봉호가 낯선 것으로 미루어보면 한참 전의 황족일 확률이 높다. 그러나 친왕에 대한 기록은 그 혈손(血孫) 멸족하여도 체천묘(體川墓)에 전하는 법이니 체천묘를 찾아 한서사 서안부에 왕부(王府)를 두었던 왕들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분명히 그에 대한 이름이 나올 것이다. 그 후로부터는 그대의 ‘눈’으로 의안군왕 혈족의 내림족보를 살피면 될 것이다.”
“정확히 이 자의 무엇을 알아 오면 되는 것입니까, 체제공?”
그 물음에 서현이 잠깐 입을 다물고 눈을 찡그렸다가, 곧바로 내뱉었다.
“그가 절명한 원인을 알아 오라.”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한 최유가 서현의 주의(周衣)를 들어 서현이 나갈 채비를 마치도록 시중을 들어 주었다. 소나기가 쏟아지기 직전의 하늘처럼 어두운 검회색인 서현의 주위는 뜻밖에도 장식이나 화려한 자수 하나 없이 소박했다. 넓은 소매에 한 팔을 꿰어 입던 서현이 ‘공께서는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최유가 여쭙는 말에 조용히 대꾸했다.
“신실로. 자세히 알아볼 것이 있다. 그 후에는.”
그 후에는···, 서현이 같은 말을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반복한 다음 말을 이었다. 대답을 들은 최유의 눈이 조금 커졌다.
“청의관으로 갈 것이다.”
**
풍선이 하나 두둥실 천장으로 올라갔다. 병아리 털빛을 닮은 노오란 개나리색 풍선이다. 그 뒤를 따르듯 잘 익은 복숭아색 풍선이며 비취 같은 쪽빛 풍선, 봄날 버들잎 같은 유록색 풍선들이 망글망글 떠오른다. 그 사이사이로 동글동글 방울이 진 비눗방울이 유유히 떠간다. 어린애 머리통마냥 동글동글한 비눗방울 표면이 비 걷힌 하늘에 걸린 천궁(天弓)마냥 신묘한 빛깔로 아롱거렸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하나 다가오더니 비눗방울 표면을 툭 하고 건드렸다. 유리 같은 손톱에 닿기가 무섭게 비눗방울이 톡 터졌다. 끙, 하는 신음이 어딘가에서 흘러나온다 싶더니, 그 옆에서 누군가가 타박을 놓았다.
“애도 아니고···, 왜 그걸 터뜨리고 그러십니까? 힘들게 만든 것을.”
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얀 남자의 손은 유록빛 고무풍선을 붙잡고 있었다. 방금 핀잔을 주던 청년이 반사적으로 눈을 구겼다가, 곧 아무렴 어떠나 싶었던지 앞으로 당겼던 몸을 느슨하게 펴고 앉았다. 희고 마른 남자의 두 손이 고운 연두색 풍선을 끌어당겨 제 품에 안았다. 그 모습이 마치 제 알을 품고 앉은 어미새 같았다.
“희한타.” 남자가 품안의 고무풍선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감탄했다. “어찌 이놈은 터지지를 않는고?”
“고무니까요. 그런데,”
그것도 너무 힘을 주면, 하고 말하려던 청년이 입을 다물었다. 남자의 손에 짓눌린 풍선이 이미 펑 소리를 내며 터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이고. 이마에 손까지 짚으며 탄식한 청년이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안 놀라셨어요?”
“이건.”
“너무 힘을 주어 누르거나, 너무 팽팽하게 바람을 넣으면 터집니다. 얇거든요.”
“천자를 공경할 줄 모르다니 고얀 놈이로다.”
“트집도 될 만한 트집을 잡으셔야 들어 드리는 척이라도 하지.”
이놈이, 하며 남자가 청년을 노려보았다가 청년의 얼굴이 그새 발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는 것을 보고 귀대야에 손을 뻗었다. ‘무슨 놈의 열이 내릴 기미가 안 보이누.’, 남자가 투덜거리며 물에 젖은 명주 수건을 쥐어짰다. 결 고운 미색 수건에서 물줄기가 주루룩 흘러나왔다. 그러나 보송보송하도록 물기를 짠 것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명주 수건으로 슥 훔치자 청년의 뺨이 흥건히 젖었다. 남자가 머리를 모로 기웃했다.
“어찌 이건 해도 안 될꼬.”
“뭐···, 너무 마른 것보다는 물기가 있는 편이 낫습니다. 그 편이 시원하기도 하고.”
그 말이 과연 빈말은 아닌지, 그렇게 말하는 청년의 표정은 한결 편해져 있었다. 남자가 이번에는 청년의 이마를 수건으로 훔쳤다. 눈에 뜨이게 달아올라 있던 청년의 낯빛이 그제야 제 빛깔로 가라앉았다. ‘괜찮으냐?’, 남자가 묻자 청년이 힘없이 움직임으로나마 고개를 주억거렸다.
“살만 합니다.”
“허나 열이 도통 내리지를 않는데.”
“정말로 조금도 낫지 않았다면 제가 이러고 있을 리가 없지요.” 나른하게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청년이 더욱더 깊숙이 몸을 누이며 두 손바닥을 붙였다 뗐다. 그의 손에서 떼구르르 굴러 나온 것은 어린애들이나 가지고 놀 법한 종이 풍선이었다. 그것을 집어 남자에게로 휙 던지며 청년이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이런 걸 가지고 놀기는커녕 제정신 차리기도 힘들었으니 말입니다.”
얼결에 종이풍선을 받은 남자가, 색색깔 종이로 곱게 접은 종이공을 바닥에 내려놓고 손끝으로 이리저리 굴렸다. 손끝으로 종이공을 여기로 저기로 굴려보면서 한시도 시선을 떼지 않는 남자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청년이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남자의 행동이나 시선이 마치 고양이 같았다. 낯선 것을 보면 괜히 주위를 맴돌며 앞발로 이리 꾹 저리 꾹 눌러보는 성미도 그렇고. 이런 것을 아는 것을 보면 이전에 나는 어쩌면 고양이를 키웠는지도 모르겠다···, 문득 든 생각에 청년의 낯빛이 조금 흐려졌다.
“왜 그러누?”
그 기색을 귀신처럼 눈치 챈 남자가 물어왔다. 청년은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아뇨, 그냥 목이 조금 말라서요.’ 그리고 남자가 그 대답을 의심하기 전에 손을 뻗어 아직 물이 반쯤 차있는 차완을 들었다. 그것을 보고 의심할 생각이 사라졌는지 다시 종이공을 툭툭 가볍게 쥔 주먹으로 건드려보고 있는 남자를 청년, 서문경이 힐긋 훔쳐보았다.
이전에는 어쩌면 개나 고양이를 키웠을지도 모르지. 아마도 범 세계에서는 학생이었을 테니, 일과를 마치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대문을 열자마자 커다란 개가 꼬리를 치며 나를 반겨 주었을지도 모르고. 또 어쩌면 현관문을 열면 게으른 고양이가 찢어지게 하품을 하며 나를 마중 나왔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어떤 가능성이 있든 간에 모두가 지나간 이야기. 자신의 손에서는 빠져 나간 것이었다. 서문경은 자신이 무심결에 남자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비를 맞고 지독한 감기를 앓으면서 새삼스럽게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과거에는 어쨌건, 지금 자신에게 있는 것은 저 남자 하나뿐이었다. 어떤 의미로건.
“재미있으십니까?”
서문경이 불현듯 물었다. 황제가 ‘으응?’하며 돌아보았을 때에야 서문경은 자신이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당황한 듯 한 쪽 눈살을 찡그리고 있는 서문경을 한 번 보고 황제가 종이공을 툭 주먹 끝으로 쳤다. 종이공이 데구르르 서문경의 무릎에 가서 부딪쳤다.
“요 놈으로 어찌 노는 줄 아느냐?”
“아니요.” 뜻밖의 물음이었지만 서문경이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이런 것으로는 놀아본 적이 없어서.”
“놀아본 적이 없어?”
“예. 다른 공···, 가죽으로 만든 공으로는 놀아본 적이 있지만 종이공으로는.”
축구나 농구나, 아, 야구도 있구나.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을 쥐어짜고 있는 서문경의 귀에 황제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하기는. 요즈음 사내애들은 조금만 머리가 굵어져도 바깥에도 공을 찬다 제기를 찬다 바쁘다고 하더구먼. 짐은 가죽공은커녕 요런 종이공도 구경해 본 적이 없다만.”
어, 하는 기분에 서문경이 황제 쪽을 돌아보았다. 이곳에도 공 정도는 있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가 뒤늦게야 황제의 마지막 말에 머릿속에 들어왔다. ‘폐하께서는···.’하고 말을 꺼내자 서문경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눈치 빠르게 알아챈 황제가 대꾸하였다, ‘구경 정도는 해 본 적이 있지.’
“짐이 황자 시절에 소현태자의 소생인 경혜현주(縣主: 황태자의 서녀)가 자주 궐 안을 드나들었느니라. 경혜현주는 짐과 그다지 나이 차가 나지 않았는데, 어린 계집아이였던 시절에 현주는 공놀이를 무척 좋아하였단다. 그래서 늘 공을 가지고 다녔었지. 비단으로 만들어 금실은실로 수를 놓은 공이나, 네가 만들어 준 것처럼 어여쁜 색을 들인 종이로 만든 공이나···.”
하고 말끝을 흐린 황제가 문득 웃으며 덧붙였다, ‘약관을 앞두고 이리 공을 만지고 있으니 감회가 새롭구나. 헌데 요것으로 어찌 노는지를 도통 모르겠어.’
서문경이 불쑥 한 손을 내밀었다.
“뭔고?”
하며 황제가 묻자, 서문경은 황제의 손에서 종이공을 빼앗아가며 불퉁하게 대꾸했다.
“어쨌든 이걸로 놀면 되는 것 아닙니까. 방법이야 무슨 상관입니까. 보자, 이걸로 축구는 못하겠고. 야구나···.” 서문경이 훌쩍 종이공을 허공으로 던지더니 소반 위에 놓여 있던 은젓가락 한 짝으로 딱 때려 맞췄다. 종이공이 황제의 이마 중간에 정통으로 가서 맞았다. 그것을 보고 서문경이 중얼거렸다. “빗나갔네.”
황제가 반박했다.
“거짓부렁 하지 말거라. 노린 것이 아니냐!”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을!”
서문경이 정색을 했다.
“입을 노렸단 말입니다.”
“그래, 그렇다면···,”하고 머리까지 주억거리며 대꾸하다가 황제가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당장 도끼눈이 된 황제가 서문경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깜둥새 네 놈이 아주 간덩이가 부었구나?”
열이 아직 안 내렸나 보지요. 겁먹는 시늉도 하지 않고 대답한 서문경이 속으로 생각했다. 다행이다. 이 일에 정신이 쏠려 이전의 화제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그러나 정작 얄미운 말을 지껄여대는 서문경의 뱃속에는 아직 무겁고 검은 안개 같은 감정이 사그라지지 않은 채였다. 황제가 된 이후에는 몰라도 이전에는 하나 뿐인 황자였으니 무척 귀애받고 자랐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들어보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어찌된 일일까, 이것이. 그러나 열이 올라 멍한 머릿속으로는 더 이상의 추리는 할 수 없었다···.
경혜현주. 서문경은 멍청하게 되뇌였다. 황제가 제 어릴 적 이야기를 하면서 무심코 언급한 이름이었다. 경혜현주. 다시금 그 이름을 되뇌자 기시감이 들었다. 어디선가 이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어디였었지?
그 때였다.
“대령목수(待令木手)로구나. 보자, 저 길로 곧바로 가면 경운전으로 갈 수 있던가. 그건 미처 몰랐구나.”
“목수요?”
서문경이 황제를 따라 밖을 빠끔 내다보았다. 검은 작업복에 망태를 짊어진 사내들 여럿이 청의관 앞을 지나고 있었다. 턱을 괴고 앉은 황제가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한창 바쁠 때지···.”
“새 건물이라도 짓는 겁니까?”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지.”
“?”
무슨 대답이 그래. 서문경은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마침 황제의 물음이 들려온 탓에 생각이 끊겼다.
“헌데, 종이공은 짐도 몇 번이고 본 적이 있다만 요런 놈은 처음이구나. 요 놈은 어찌 새도 아닌 것이 하늘을 날아다니는고?”
돌아보자, 황제가 어느새 또 다른 풍선을 잡아다 제 품에 끌어 보듬고 있었다. 이번에는 터뜨리지 않도록 조심하려는지 고무풍선을 끌어안은 팔은 조금 느슨하다. 하늘 한 쪽을 떼어다 박은 듯 맑은 옥색 풍선을 내려다보는 황제의 눈이 어린애마냥 반짝반짝 빛났다.
마음에 들었나. 그렇게 생각하니 서문경은 괜히 흐뭇해졌다. 아직 열이 채 내리지 않은 가운데서도 홀로 외롭고 쓸쓸했을 황제를 위해 이것저것 곱고 어여쁜 것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보람이 있었다. 넓지 않은 방에 이렇게 둘이서 앉아 색색깔 풍선이며 비눗방울이며 둥글게 만 털실, 병아리나 새끼오리 따위에 둘러싸여 있으려니 햇솜에 안긴 듯 따사롭고 포근한 기분이 들었다.
“······.”
그러다 서문경은 문득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지금 이 상황이 기분이 좋다는 사실 자체가 왠지 쑥스러워져서였다. 기분 탓인지 귀까지 조금 달아오르는 것 같다.
그저 잘 해주고 싶어서였다. 자신과 함께 있을 때만이라도 그가 우울하거나 쓸쓸한 기분을 느끼지 않았으면 해서. 나아가서는 그 기억으로, 괴롭고 고독한 순간이 오더라도 힘을 얻었으면 하고. 자신이 앓아누웠을 때 느꼈던 그 고독감을, 그는 느끼지 않았으면 해서. 지금 설핏 떠올려도 절로 치가 떨리는 그 비참한 기분을 서문경 자신은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사람인 황제도 그런 기분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경아, 왜 또 그러누. 시선을 발치로 내리깔고 있는 서문경이 걱정이 되었던지 황제가 넌지시 물어왔다. 그 목소리에 걱정이 짙게 내리깔려 있었다. 오해 살 만한 행동으로 괜히 황제가 걱정을 하게 만들어 미안한 마음이 드는 동시에. ···울컥, 설움과 비슷한 감정이 솟구쳤다. 설움처럼 문득 눈시울이 따뜻해지고 가슴 속에 물이 차오르는 듯한 감각이었지만 그 감정이 서러움과 다른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서문경은 알고 있었다.
“어디가 또 아프더냐?”
“···모르겠어요.”
“모른다고?”
의아함에 머리를 모로 기웃거리는 황제를, 서문경이 눈을 들어 바라보았다. 모호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대답에 황제가 의아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서문경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유는 자신이 했던 말 그대로였다.
···모르겠어.
정말로 모르겠다. 자신의 생각이고, 자신의 마음인데 그런데도 모르겠다. 열감기를 앓으며 무방비 상태가 되어 생각했었다. 어떤 의미로건 나는 저 사람을 좋아하고 있는 거라고. 그러나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누가 대답해 줄 수 있을까. 나조차도 가늠할 수 없는 내 감정의 색을. 답답했다. 그 색을 알기 전까지 나는 어떤 결정도 할 수가 없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계속 황제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는지, 어느새 황제 또한 서문경을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시선을 눈치 챈 그 순간, 서문경은 견딜 수 없을 만치 부끄러워졌다.
“경아.”
“저!”
황제가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서문경은 외마디 소리를 쳐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 울렁거림을 어떻게든 떨쳐내고 싶어서 조바심이 났다. 서문경은 답지 않게 수선을 떨면서 두 손을 맞댔다.
“뭐냐, 그건?”
처음 보는 물건을 발견한 황제가 물었다. 서문경이 횡설수설하면서 대답했다.
“악긴데.” 남자 어른의 위팔만한 길이의 목관 악기였다. 이름을 말해도 모르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서문경은 급히 리코더를 입에 물었다. “제가 다뤄본 적 있는 악기가 몇 없어서. 이런 거라도 연회 때 도움이 될까 해서 그냥.”
서문경이 다짜고짜 바람을 훅 불었다. 삐-, 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황제가 이맛살을 구겼지만 서문경은 계속해서 바람을 불면서 손가락을 움직였다. 두 손에 달린 손가락이 따로 움직이지 않고 짝이라도 맞춘 것처럼 같이 움직이는 바람에 악기에서는 아름답기는커녕 무슨 곡인지도 알 수 없을 만치 기괴한 소리가 났다.
“그만.”
그만 좀 하거라, 그걸 연주라고 하는 게냐. 황제가 서문경의 손에서 훽 악기를 낚아챘다. 서문경이 엇하고 있는 사이 황제는 서문경에게서 빼앗은 악기를 바닥에 툭 던졌다. 분명히 만질 수 있는 실체가 있던 악기가 바닥에 닿기가 무섭게 아지랑이가 되어 흩어졌다. 서문경이 항의했다.
“대체 왜,”
“귀가 썩겠다, 이것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이래봬도 최선을 다한 거란 말입니다!”
“생각도 마라. 그렇지 않아도 없는 체면이 바닥을 칠라.”
“사람이 말을 해도 하필이면 그런 식으로!” 하고 성을 내던 서문경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황제가 불쑥 서문경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긴 탓이었다. 흠칫한 서문경이 순식간에 입을 다물고 표정을 굳히는 것을 보면서 황제가 끌끌 혀를 찼다.
“역시나.”
그 단순한 한마디에 속을 간파당한 기분이 들어 뱃속이 따끔했다. 그리고 그 불길한 예감은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황제가 중얼거렸다, ‘어쩐지 맥락도 안 맞는 헛짓거리를 한다 했더니.’ 그리고서 그가 정곡을 찔려 주춤한 서문경을 힐끗 보며 웃었다.
“왜? 또 무슨 마음이 들어서?”
“무슨 마음이라니···, 저는 아무 것도···.”
“네 녀석 성미에 잘도 그러겠구나.” 황제가 서문경의 변명을 비웃으며 콧방귀를 꼈다. 그리고서는 서문경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서문경의 얼굴 가까이로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가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으응? 헛똑똑이인 것과는 별개로 남에게 비웃음 당할 일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할 네 놈이 말이다.”
무슨 생각을 했누? 황제의 속살거림이 자신의 어깨를 밀어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서문경이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나 서문경의 손목을 단단히 잡은 황제의 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친 채 한참 동안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방 안을 봄날의 햇빛처럼 감싸고 있던 포근한 공기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무겁고 팽팽해졌다. 그 부담감을 이기지 못한 서문경이 결국 먼저 입을 연 그 순간이었다. 황제의 한 쪽 입꼬리가 웃는지 찡그리는지 가늠할 수 없도록 구겨진다 싶더니,
“이것 참···, 돌겠구먼.”
꿀꺽, 하고 마른침 넘기는 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서문경의 눈이 커졌다. 자신이 자신도 모르는 새 마른침을 삼켰나 했더니 아니었다. 뼈처럼 툭 튀어나와 있는 황제의 목젖이 크게 오르내리는 것을 보았다. 그와 동시에, 황제의 입꼬리에 걸려 있던 애매한 표정이 난감한 웃음으로 변했다. 왜? 서문경이 의아해하고 있는데 황제가 불쑥 물었다.
“입 맞추는 것은 아니 되겠지?”
“예?” 서문경이 반사적으로 반문했다가 그렇지 않아도 크게 뜨고 있던 눈을 더더욱 휘둥그레 떴다. “예?!”
“확답을 듣기 전까지는 참아볼까 했는데.”
거기까지 말하고 황제가 잠시 말을 멈췄다.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은 것처럼 목소리가 쉬어 있던 탓이었다. 그런 자신의 목소리에 스스로도 놀랐는지 잠시 입을 닫았던 황제가 자신보다 더 놀란 서문경을 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여전히 낮게 쉰 목소리였다.
“잘 안 되는구나.”
서문경의 손목을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한 번.” 황제가 말했다. “단 한 번이다. 안 되겠느냐?”
서문경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예전 같으면 곧바로 진저리를 치며 황제의 손을 털어 내거나 그의 얼굴을 밀어버렸을 텐데, 이상하게도 지금은 손가락 하나도 꼼짝할 수 없었다. 불빛은 보고 굳은 괴처럼, 큰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는 서문경을 한 동안 살피듯 바라보던 황제가 서서히 다가왔다.
하얀 송편마냥 오뚝한 코끝이 스치듯 닿았다가, 뜨거운 이마에 서늘한 이마가 톡 와서 부딪쳤다. 그리고 결국에는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다. 갈라진 입술에 닿는 타인의 입술은 서늘하고 부드러워서 마치 얇은 비단이나 청낭자(靑娘子) 날개에 입술을 재고 있는 듯 하였다.
그 침묵이 이윽고 젖은 소리로 변하고,
···물론 ‘단 한 번’이라는 약속은 당연한 듯 지켜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