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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이 막 호박방을 나가기 직전, 황제의 목소리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멈추게.”
“더 하문하실 것이 있으시옵니까.”
조원이 돌아보고 짐짓 공손한 척 아뢴 말에 황제가 코웃음을 쳤다.
“짐이 그대를 모르는가. 뜻을 캐물으려 말을 섞어 보아야 답답해지는 것은 짐의 성심이요, 흐려지는 것은 짐의 성명(聖明)이지.”
“한낱 객된 자가 어찌 이 나라의 주인 되시는 분을 상대로 허언을 고하리이까. 근심마시고 하문하시옵소서.”
“되었다. 짐에게도 마리(: 머리)란 놈이 달려 있느니.” 하고 일갈하며, 황제가 털썩 보료방석 위에 주저앉았다. 황제가 앉은 자리를 보고 조원의 한 쪽 눈이 저절로 꿈틀했다. 황제가 자리를 틀고 앉은 곳은, 열로 쌕쌕 앓으며 곤한 잠에 빠져 있는 서문경의 머리께였다. 황제가 투덜거렸다. “네 놈 말을 곧이들을 정도로 갱충쩍지는 않아.”
조원이 언짢은 기색을 씻은 듯 거두고 빙긋 웃었다.
“그리 하시면 어찌 하시겠사옵니까. 소인은 그저 성상을 믿고 행하겠사옵나이다.”
“불덩아.”
황제가 툭 내뱉었다. 제 집 똥개를 부르는 듯한 투에 조원의 눈썹이 그 자신도 모르게 구겨지는 것을 보면서 황제가 히죽 웃었다.
“네 주인 놈 짓이더냐?”
“다짜고짜 그리 하문하시오면.”
“네 놈은 모른다?” 세운 무릎 위에 턱을 괴며 황제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있나.”
그러나 이번만큼은 의뭉을 떨며 약을 올리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었던 모양이었다. 미소 어린 조원의 얼굴에서 용케 난감해하는 기색을 눈치 챈 황제가 머리를 들었다. 황제가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희한타.”
“요 사이 큰 일이 부쩍 는 탓에 성심을 간첩히 헤아리지 못하여 송구하옵니다. 혹, 폐하께서 하문하시는 것이 곧 있을 내춘대연회에 대한 일이시옵니까?”
“그래, 그러고 보니 태황태후전에 일패(一牌)나 곡마사, 소리꾼 따위가 부산히 드나든다고 하더구나.”
“근래 경성문을 드나드는 이들이 하루에도 수백을 헤아린다 하옵니다.” 황제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일단 적당히 대꾸하던 조원의 머릿속에 일순 섬광처럼 영감이 스쳐 지나갔다. “헌데 요즈음 태황태후전에 행보가 잦으신 것 같사옵니다.”
“손자가 할마마마께 자주 문안 드는 일은 좋은 일이지.”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장려할 만한 일이지요. 헌데···.”
조원이 이상하다는 듯이 머리를 모로 기웃했다.
“일패도 소리꾼도 아닌 여가(閭家)의 부인들이 태황태후전에 드나드는 것은 묘한 일이 아닙니까?”
“외명부(外命婦)들이 황실 어른께 배후 드리는 것이 무어가 이상한 일인가.”
“외명부들이 두루 태황태후전에 문안을 드리는 것이라면 그것이 뭐 이상한 일이겠습니까 마는, 그렇지가 않으니 소인이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지요.” 조원이 기억을 더듬어 보는 척 하다가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한산당상관 유현의 배필인 숙부인(淑夫人) 기씨와, 영인(令人) 염씨가 특히 자주 태황태후전을 드나든다 하였사옵니다. 헌데, 폐하께서 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숙부인 기씨와 영인 염씨라 하면 각각 장안에서 제일가는 옥빈홍안(玉?紅顔)의 친인척 되는 외명부들이 아닙니까.”
혹여 아십니까? 조원이 넌지시 물었다.
“유현의 소매인 유송연이 그리도 절색(絶色)이라 합니다. 풍문으로는, 교가의 옥화로 칭송받는 교운조차도 유송연의 자태에는 견줄 수 없다 하지요. 놀라운 것은, 중무장군(中武將軍) 강환과 영인 염씨의 계자인 강재희가 사내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설중사우(雪中四友) 중 하나인 수선(水仙) 유송연과 감히 비할 수 있을 만큼의 미색이라는 겁니다. 혹자는 그 동자를 일러 납매(臘梅)라고도 하더이다. 이리도 송앙(頌仰)하는 소리가 높으니 절로 두 사람의 면면이 궁금해지지 뭡니까. 황상께서는 그렇지 않으십니까?”
“궁금할 것이 무에 있어.” 황제가 불퉁하게 대꾸했다. “제 아무리 수선이나 수선에 버금갈 미동이라 해 봐야 어디 짐의 용안에 비할 수 있을까.”
“······.”
일순 농언(弄言)인가 생각했지만, 무뚝뚝한 황제의 얼굴과 눈 어디에도 농담을 하는 기색은 없었다. 저 치가 그렇게 주장한다면 반박할 수는 없지만, 조원은 생각하며 내심 한숨을 쉬었다. 절벽에 매달린 꽃을 보려 수선을 피우는 것보다는 가까이에 있는 경대를 한 번 들여다보는 편이 현명하지, 운운하며 황제가 지껄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조원은 이번에는 그 말을 못 들은 척하고 웃으며 말했다.
“허나 황상께서는 이미 수선이나 납매의 여용(麗容)을 보시지 않았습니까?”
황제의 투덜거림이 딱 멎었다. 맞군. 어림짐작으로 내뱉었던 조원이 속으로 빙그레 회심의 미소를 그렸다. 제 말마따나 수선이나 눈매화 따위는 옆에 댈 수도 없을 만치 잘 생긴 얼굴을 잔뜩 구긴 채로 아무런 말도 않고 있는 황제에게 조원은 서문경을 눈짓해 보였다.
“납매의 친모인 영인 염씨가 벌써부터 녹패옥(鹿佩玉)을 마련한다 하더이다.”
녹패옥이란, 정식으로 품계를 받은 황제의 후궁들만이 찰 수 있는 사슴 문양을 새긴 패옥을 이름이었다. 그 말에 기가 막힌 지 황제가 허, 하는 소리를 냈다. 조원이 더더욱 파고들었다.
“금번에는 태황태후전에서 나서시는 듯 하니 곧 방비(傍妃: 후궁)를 맞으시겠습니다. 미리 감축 드립니다.”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운현궁 마마께서 추진하시는 일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황제가 훽 조원에게 고개를 돌렸다. 고성(高聲)을 지를까, 아니면 손이 먼저 올라갈까. 조원은 어림짐작하면서 황제 몰래 몸을 살짝 뒤로 물렸다. 그러나,
“희한하군. 정말로 몰랐던 게냐.”
황제가 허탈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조원의 미간이 구겨졌다.
“무슨 말씀이시온지.”
“네 주인의 짓이 아니다?” 하지만 이미 황제는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황제의 고개가 왼편으로 조금 기울어진다. “아니지. 사냥개가 모른다 해서 그 주인도 모른다 결론을 짓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판단이지···.”
혹시나 싶어 조원이 물었다.
“이 일에 체제공이 얽혀 있단 말씀이십니까?”
황제가 코웃음을 쳤다.
“네 주인의 일을 왜 내게 묻느냐, 불덩아.”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조롱하는 듯 하던 황제의 어조가 변했다. “운현궁에서 직접 상서원부전에 언질을 넣었다.”
“원부사에게···!”
공론(公論)화. 이는 이전 교운 적의 일처럼, 사석에서 간만 보고 완전히 없는 일로 물릴 수 있는 종류의 일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운현궁 마마께서 정녕 망령이 든 것이 아닌 바에야 그런 수를 쓰실 리가 만무하지. 더구나, 중무장군이라면 모를까 한산당상관 유현과 부인인 기씨의 일가는 확실히 태황태후전의 사람. 그런 자의 여식을 버릴 패에게 붙여 준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지.”
“간자로···,”
하고 중얼거리다가 조원이 바로 입을 닫아버렸다. 간자? 어림도 없는 소리다. 태황태후에게 있어 지금의 황제는 그 정도의 정성을 기울이는 것조차 아까운, 하찮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황제가 픽 웃었다.
“그렇다면 뻔하지. 대체 무슨 심산에선지, 어떤 수를 쓴 건지까지는 파악할 수 없네만, 적어도 누군가가 태황태후전을 꾄 것은 확실하지 않은가. 그리고 그 강정(强情)한 노인네를 어를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지.”
잠시의 시간을 두고 황제가 말을 이었다.
“그러나 자네가 모른다니 달리 생각해 봐야겠군.”
“······.”
생각에 잠긴 조원을 향해 황제가 훠이훠이 손을 저었다.
“물러가라. 더 이상 면면을 맞대고 있는 것은 서로에게 불쾌한 일일 터이니.”
“허면 대연회 당일에나 먼발치에서 배알하겠사옵니다.”
조원이 서둘러 뒷걸음질 쳐, 황제의 면전에서 사라졌다.
방문이 닫히자, 황제의 몸이 미끄러지듯 스르륵 쓰러져 벽에 기대어졌다. 그 때 ‘황상, 등촉(燈燭)을 밝히리이까?’, 하며 뒤늦게 나인이 여쭙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황제는 일언지하로 잘라 말했다.
“불은 되었다. 물과 수건을 내어 오라.”
“받들겠나이다.”
나인의 그림자가 물과 수건을 가져오기 위해 사라지는 것을 보고 황제는 시선을 모로 돌렸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어렵지 않게 서문경의 얼굴을 더듬었다. 핥듯이 천천히 서문경의 얼굴을 훑던 황제의 눈이 결국 서문경의 눈에 가 멎었다. 어둠이 사람의 그림자를 삼키듯, 서문경의 하얀 눈꺼풀이 그의 까만 눈을 뒤덮고 조금도 틈을 보여주지 않는다. 황제는 문득 외로워졌다.
“경아.” 대꾸가 없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황제가 나직이 서문경을 불렀다. “네 놈 생각은 어떠냐, 으응?”
황제의 손이 서문경의 머리에 닿았다. 그 손이 서문경의 머리카락에 닿기 직전, 잠시 움츠려드는가 싶더니 곧 서문경의 귓가를 덮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새하얀 조개 같은 귀가 뼈대가 굵은 손 안으로 사라졌다. 황제가 나머지 손을 뻗어 서문경의 다른 귀도 덮었다. 서문경의 귀를 막고 황제가 말을 이었다.
“짐은···, 희(熙)가 이번 일을 꾸민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무슨 심산인지까지는 도통 알 수가 없구나.” 혼잣말로 중얼거린 황제가 잠시간 입을 닫았다. 황제가 시선을 돌려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응시했다. 방 안을 가득 채운 어둠 속에 잠긴 탓인지 빛 한줌 찾아볼 수 없는 그 눈빛이 몹시 차고 쓸쓸했다. 황제의 입술이 조금 움직였다. “짐을 아직 용서치 못하고 있는 것일까. 어찌하여 그대까지 빼앗아 가려는 것일까. ···벌을 받는 걸까, 또다시.”
황제가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욕심을 내서, 바라지도 말아야 할 것을 탐내서, 내 고독에 다른 이까지 끌어 들이려고 해서. 그래서 벌을 내리려는 걸까. ···그러나. 서문경의 귓전을 쓰다듬던 황제의 손이 멈췄다.
“짐은 아직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약속은 틀림없이 이행될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만큼은 ‘벌’을 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는 어찌하여 그런 짓을 꾸민 것일까. 그가 원하는 것은, 지금 자신이 앉아 있는 황좌 뿐. 허나 그는 황좌와는 하등의 관련도 없는 물손님을 자신으로부터 떼어내려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역시 결론은 하나뿐인가.
-행복해질 수 없다.
황제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영원히, 너는.
-누구에게나 버려져서, 영원히 홀로.
-그대는, 태산조차도 삼킬 괴물이다.
저주(詛呪). 저주는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 어쩌면 죽어서도 풀리지 않을 지도 모르지, 태어났을 때부터 붙어 있던 저주이니.
영원히 홀로···.
그 때였다.
“소세물 대령하였사옵니다.”
물과 수건을 가져온 나인이 고하였다. 상념에 잠겨 있던 황제가 그 소리가 화들짝 놀라 바짝 머리를 들며 어깨를 움츠렸다. 커다랗게 뜨인 눈이, 그 안에 심장이라도 들어 있는 것 마냥 쿵, 쿵, 쿵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했다. 하얀 이마에는 어느새 싸늘한 식은땀이 돋아 있었다.
황제가 대답이 없자 감히 나인 나부랭이가 황제를 닦달하였다.
“폐하? 소세물 대령하였사옵니다, 세초(洗草)하소서.”
“이,”
성난 짐승처럼 이를 드러내던 황제가 멈칫했다. 뜨거운 손이 갑자기 자신의 이마에 닿은 탓이었다. 황제는 황급히 옆을 돌아보았다. 눈을 가늘게 뜬 서문경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경아···,”
“식은땀.”
서문경이 불쑥 중얼거렸다. 황제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닫았다.
“차.”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서문경이, 아직도 열에 들떠 초점도 없는 눈으로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차가워요.”
뭘 한 겁니까. 감기 걸렸어요? 서문경이 물었다. 평소에는 이 나라 사람들의 말투나 어휘를 따라하느라 조금 경직되어 있던 서문경의 목소리가 드물게도 편하게 풀어져 있었다. 서문경이 황제의 이마를 힘없는 손짓으로 쓸었다. 이마에 닿는 손이 불타는 듯이 뜨거워서, 황제는 자신도 모르게 그 손을 움켜잡았다. 그러자 서문경이 웅얼거렸다.
“진짜 차갑네···.”
“그대가 열이 나는 거야.”
“차갑습니다.” 귀가 아직 먹먹한 탓에 황제의 말을 못 들은 서문경이 재차 중얼거렸다. “땀 난 채로 있으면 진짜 감기 걸리는데···.”
“···!”
황제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서문경이 자신이 덮고 있던 이불을 황제의 머리에 씌워 준 탓이었다. 머리에서부터 두꺼운 솜이불을 뒤집어 쓴 황제의 꼴을 보고 서문경이 고개를 모로 기웃했다, ‘어. 어깨에 덮어 주려고 했는데 왜.’ 머릿속까지 열이 잔뜩 올라 손도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조금 뒤, 마음을 달리 먹은 서문경이 헤작 벌어진 황제의 앞섶을 주섬주섬 여며 주며 말했다.
“그거, 잘 덮고 있어요. 감기 걸리면 안 되니까···.”
“어째서.” 황제가 어깨로 흘러내린 이불 한 쪽 끝을 움켜잡으면서 중얼거렸다. 예? 하고 묻듯이 서문경이 머리만 조금 기울였다. 황제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어찌하여 나를 염려해 주는 게냐.”
“네···?”
“그대가 이리 아픈 것은 나 때문이 아니냐.”
그 말에 눈앞이 어질어질한 가운데서도 서문경이 픽 웃었다.
“비를 내리는 재주가 있으신지 몰랐는데요···.”
“그대도 들었겠지. 백희궁에 새 사람을 들이리라는 태황태후전의 선언이 있었느니라.”
“그래서···.” 서문경이 숨이 가빠오는 듯 잠시 말을 멈췄다. 황제가 누우라는 시늉을 했지만, 서문경이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그 아가씨들 얼굴은 보셨습니까? 예쁜가요?”
“사내아이도 하나 있더구나.”
그 말에 서문경이 멍하니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이 나라에서 황제의 배필로는 성별을 가리지 않는다고 했었지. 그럼 이번에 들어온다는 후궁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일 수도 있는 건가. 몽롱한 머릿속에 황제의 옆에 작은 사내아이가 하나 서 있는 그림이 그려졌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밀려와 가슴 속이 울렁거렸다.
서문경이 자신도 모르게 불쑥 내뱉었다.
“싫습니다.”
“무엇이.”
그러자 의외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이런 생각이나 하는 제가요.”
“···짐이 원망스러운 것이 아니라?”
황제에게 이불을 덮어주는 바람에 바닥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던 솜이불을 끌어당겨 덮으면서 서문경이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짐이 그대를 농락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나?”
서문경이 잠시 침묵하다가, 황제의 얼굴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폐하께서 인정하신다면 모르겠지만···.” 서문경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아무 것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저.”
“그저···?”
“혼자는 너무 쓸쓸해서···.”
이불 안에서 서문경이 더더욱 몸을 움츠렸다. 분명히 두터운 솜이불을 몇 채나 덮고 있는데도 눈밭에 알몸으로 버려진 듯 너무 추웠다. 저절로 딱딱 이빨이 부딪쳤다. 그러다 문득, 서문경은 자신을 말끄러미 내려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처음에는 시야가 안개라도 낀 듯이 흐려서 누구더라, 하고 생각했다. 그러다 방금 전에 나눴던 대화를 기억해냈다. 황제. 하지만 내가 잠들기 직전에는 그 사람이 있었는데. 그런데 언제···.
서문경은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몸이 뜨겁고 머리가 어지러워서 더 이상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다시 눈을 감던 서문경이 곰실곰실 옆으로 기어가더니 손을 뻗어 자신의 옆자리를 몇 번 두드렸다. 그리고 눈을 크게 뜬 황제를 보고 말했다.
“주무세요.”
“그대는 내가 꺼려지지 않는가.”
서문경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감기 걸리신다니까요···.”
“경아.”
“일단 옆에서, 주무세요. 저도 일단은 잘 테니까···.” 서문경의 말이 점점 느려졌다. 말하는 도중에도 점점 눈앞이 가물가물해졌다.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은 더 자야할 것 같았다. 그러니까 다른 건 자고 일어난 다음에···. 그리고. 서문경이 손을 뻗어 황제의 손에 깍지를 꼈다. “주무세요···.”
다른 사람의 체온이 느껴지자 심장을 딱딱하게 하던 냉기가 조금이나마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 청의관 나인들이나 조원이 한 방에 있을 때에는 온기가 느껴지기는커녕 그들과 아예 다른 공간에 들어 있는 것 같았었는데. 그래서 서문경은 인정해야만 했다. 처음이야 어쨌건 지금은 난, 이 사람이 좋은 거구나. 어떤 의미로건 간에.
“일어나면···.”
일어나면···, 하고 중얼거리던 서문경이 채 말을 끝맺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정신 끝자락에서 서문경은 생각했다. 말해야 하는데. 내가 일어날 때까지 꼭 여기 있어야 한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그러나 이상하게도, 해야 할 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도 언 몸이 미지근한 물속에 잠긴 듯 서서히 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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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를 만난 다음에는 늘 자신이 죽어가는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다.
참으로 희한한 기분이었다. 불쾌한 것도, 흠씬 두드려 맞은 것처럼 심신이 욱신거리는 것도 분명 사실이었건만 그와 동시에 자각이 든다. 살아 있다는 자각. 죽어가고 있다는 것은 아직은 살아 있다는 말과 같다. 고통을 느낀다는 말 또한 그에게 있어서는 아직 살아있다는 말과 동의어였다. 늘 납 안에 들어 있는 것처럼 둔중하게 느껴지던 충격이, 그대로 맨 몸으로 와 부딪치는 감각이란.
병식(病識). 그것에 굳이 이름을 붙이다면 병식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현재 자신이 병에 걸려 있다는 자각.
그리고 ‘저 남자’와 마주하고 있을 때면 또 다른 자각이 뒤통수를 때리곤 했다. 자신이, 이 오랜 병을 떨칠 마음이 조금도 없다는 자각. 오히려 더 깊디깊은 곳, 곪고 곪아서 허연 구더기가 들끓고 누런 진물이 줄줄 흐르는 상처의 가장 중심부로 자신이 기를 쓰고 기어 들어가려 한다는 자각이.
그 때 그가 하는 보고를, 대꾸 없이 듣고만 있던 남자가 불현듯 입을 열었다.
“향 없는 꽃이라.”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의외의 대답이 들려온 탓이었다. 깊은 생각도 하기 전에 반사적으로 대답이 나갔다.
“수객의 역능(力能)말이십니까. 주목할 만한 가치는 없는 힘입니다. 그것보다는,”
“아네.”
남자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그’의 말허리를 쳐냈다. 부드러운 어조였지만 반박할 수 없는 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가 입을 다문 틈을 타, 남자가 하던 말을 이었다.
“재용이 빼어나나 심상이 곱지 못한 여인을 모자라다는 뜻에서 흔히 향기 없는 꽃으로 비유하곤 하나, 사실 발향(發香)치 않는 꽃은 얼마든지 있지. 본디부터 향을 발하지 않도록 만들어진 만큼 그들은 향기가 없는 자체로 완벽하다네.” 비스듬히 턱을 괴고 있던 남자가 싱긋 눈으로만 웃었다. 수 천, 수 만 번 습관적으로 지어온 웃음 때문에 몇 줄이나 깊이 흔적을 남긴 눈이 또다시 깊은 모양을 내며 접혔다. 느긋하게 마른 입술을 적신 남자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허나, 원래 향기가 있는 꽃이 더 이상 향기를 내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진상(眞相)이라 하기는 힘들 것이다.”
말을 마친 남자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사람 좋은 눈웃음과는 사뭇 다른 웃음이었다.
“그건 그냥 병신이지.”
“······.”
‘그’가 대꾸하지 않자, 남자가 그곳으로 힐끔 무성의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농을 걸듯 가볍게 말했다.
“표정이 안 좋군, 자네.”
“그렇습니까?” ‘그’가 손가락 끝으로 마른 볼을 덧그리듯 문질렀다. “어르신 앞에서 말씀 올리기는 면구합니다만, 어쩌면 조금 심신이 피로한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기는, 그럴 만도 한가.”
“어려우신 분 아닙니까.”
그 말에 남자의 웃음이 짙어졌다. ‘그’는 희미하게 눈살을 구기며 상반신은 약간 뒤로 물렸다. 남자의 얼굴에 맺힌 미소는 이제 아예 칼로 새긴 것처럼 진했다. 덕분에 사람 좋은 특유의 그 미소가 어딘가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남자의 속이 얼마나 깊고 시커먼지는 가늠할 수 없으나, 표면적으로나마 남자의 표정을 읽는데에는 익숙해진 ‘그’가 무심코 표정을 굳혔다. 실수했다는 생각에 그의 얼굴에 낭패감이 스친다. 남자가 웃는 얼굴 그대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것 참···.” 느릿하게 중얼거리는 말끝에, 희미하게 혀를 차는 소리가 따라붙는다. “신기한 일일세. 속세 말로 세월의 흐름은 시위를 떠난 화살만치 빠르다 하더니만 정말로 그렇군. 그 물에 빠진 쥐새끼 같으시던 분께서 어느새 훌쩍 자라 호랑이 소리도 듣게 되셨으니.”
언뜻 들으면 대견해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짙은 경멸을 담아 빈정거리는 남자에게, 그는 진심을 담아 충고하였다.
“결코 빈말이 아닙니다, 어르신. 그 분은 결코 녹록한 사람이 아닙니다.”
“쥐새끼가 훌륭히 자라 봐야 서생원 소리 밖에 더 듣겠나. 자네, 어디 쥐새끼가 자라서 범이나 용이 된다는 말 들어본 기억 있는가?”
“허나, 어르신.”
“말 말게.” 남자가 휘휘 손을 젓는다. “호랑이 새끼는 무슨 짓을 해도 호랑이고, 쥐새끼가 낳은 놈은 어떻게 자라든 간에 죽을 때까지 쥐새끼야. 더더군다나 시궁창에 처박혀 제멋대로 자란 놈을, 더 말해 무얼 할까.”
“어르신.”
자신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며 그가 말했다. 반사적으로 경계하는 그에게 당장 남자의 시선이 날아왔다, ‘무얼 그리 경계하는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건만.’ 노골적으로 한심해하는 시선의 바탕에는 누구도 꺾을 수 없는 강력한 자신감과 농도 짙은 오만함이 두껍게 깔려 있었다. 그 시선을 받자 어지간한 ‘그’조차도 순간적으로나마 숨이 막혔다. 황제나 왕 따위의 지배자에게 자신을 제외한 타인들을 숨죽이게 하고 저절로 엎드려 경외하게 하며 결국은 스스로 복종하게 만드는 어떤 기운이 필요하다면, 자신이 본 사람 가운데 이 남자는 그 자리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자라는 생각이 일순 머릿속을 스쳤다.
물론 본인은 결코 그 자리를 원하지 않지만. 그의 시선이 힐끔 남자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그가 남자를 도통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 때문이었다.
남자가 끌끌 혀를 차며 ‘그’를 타박했다.
“자네, 생각보다 담이 작구먼.”
“여우새끼가 간이 커봐야 얼마나 크겠습니까. 다만 어르신께서 평소 소인을 높이 평가해 주신 것 같아 황괴할 따름입니다.”
더 이상 말꼬리를 물고 늘어져봐야 좋을 것 하나 없겠다는 판단에, 그가 얌전히 말머리를 돌려 남자의 말을 받았다. 그제야 보일 듯 말 듯 치켜 올라가 있던 남자의 눈썹 하나가 제 자리로 돌아왔다. 그것을 눈치 빠르게 알아차린 그가 내심 가슴을 쓸어 내렸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위험한 선까지 손을 내밀었던 모양이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크게 경을 칠 뻔 했다.
남자가 딱, 딱, 딱, 딱 손가락으로 제 무릎을 두드리며 말을 꺼냈다.
“그래···, 그럼 본 이야기로 들어가서.” 남자의 목소리가 다음 순간 조금 더 나직해졌다. 그와 동시에 방 안의 공기가, 급속도로 무거워지며 그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자네, 방금 한 말에 조금의 허언도 없으렷다.”
“어찌 어르신께 허언을 고하리이까. 허나 그 분의 말씀은 어림생각에 불과할 뿐, 그러니.”
“아니, 아니, 아니.”
남자가 휘휘 손을 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가 입을 다물기가 무섭게, 남자가 소리쳤다.
“주강! 주강!”
“찾아계시옵니까.”
하며 방문 앞에서 곧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분명 인기척 따위는 없었는데?, 심지어는 장지문에 사람의 그림자조차도 비치지 않았다! ‘그’는 몰래 혀를 찼다. 눈앞에 있는 저 남자를 포함하여 아래로는 저 남자의 말단 수족들까지, 모두가 천 년 묵은 구렁이마냥 의뭉스럽기 짝이 없었다. 늙은 뱀이 소리 없이 다가와 자신의 발목을 휘감고 있는 듯한 기분에 괜히 등골이 오싹해진다.
“들어오게.”
남자가 동석한 ‘그’에게는 허락도 구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말했다. 장지문이 스르륵 열리며 늙수그레한 중년 남자가 하나 들어왔다. 머리가 반 넘게 희고 회색빛이 도는 얼굴에 주름이 있어 나이보다 퍽 나이 들어 보이는 그 남자는 붉은 바다거북의 등딱지처럼 딱딱하고 넓은 어깨가 둥글게 굽어 있었다. ‘그’도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는, 남자의 수족 중 하나였다. 무심코 그 자에게 시선을 던졌던 ‘그’의 눈썹이 희미하게 꿈틀거렸다. 서찰?
그 때,
“그래, 계시던가.”
하고 남자가 맥락 없이 물으면서 제 수하를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예, 어르신.’, 남자의 수하가 굽은 등을 비굴할 정도로 깊숙이 수그리며 남자의 손에 제가 소중히 품고 있던 서찰을 건네었다. 서찰을 받은 남자가, 수고했다는 말은커녕 수하가 있는 쪽을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손을 저었다. 용건이 끝났으니 자네는 이만 나가보라는 뜻이었다. 나타날 때 그랬던 것처럼, 바다거북 같은 용모의 사내는 발자국 소리도 없이 조용히 사라졌다.
다시 문이 닫히자, 마치 방 안에 자신 외에는 없는 것처럼 남자가 태연히 서찰을 펴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혹, 태황태후전에 사람을 보내셨습니까?”
속으로 시기를 재던 그가, 넌지시 남자에게 여쭈었다. 여전히 눈으로는 서찰을 읽으며 남자가 대답했다.
“맞네.”
“그렇다면···.” 하고 말하다가 ‘그’는 멈칫했다. “소인이 청의관으로 떠난 직후에?”
“정확히는 전.”
남자가 심상하게 대꾸했다.
“태후전 사람인 숙부인이 운현궁에 드나드는 것은 괴아해할 일이 아니라 하나, 그 댁 소애(小艾: 딸)까지 몇 번이고 동행하는 것은 아무러하여도 미타스럽지 않은가. 더군다나 진시(辰時)에 입궐한 이들이 경시(庚時)까지 출궁하지 않으니 그 또한 의심쩍고. 유난히 태황태후전 손님들이 들어앉아 있는 시각과 일황자,”
거기까지 말한 남자가 잠시 입을 다물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난감한 듯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그’를 보고 보란 듯 씩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말실수를 했군, 하고 남자는 말했지만 ‘그’는 이미 그 남자가 고의로 황제를 황제가 아닌 일황자라는 말로 칭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남자는 대부분이 이런 식이었다. 궁 안에서 기거하거나 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황제를 우습게 여기는 것은, 아마도 이 남자의 영향이 클 것이다.
별 실수도 아니란 식의 가벼운 태도로 남자가 말을 이었다.
“태황태후전에 낯선 손님이 드는 시각과 황상이 태황태후전에 문후하시는 때와 대부분이 겹치더라 그 말일세. 거기에다가, 황상이 운현궁에 들기 한 시진쯤 전에 꼭 태황태후전에서 편전이나 정전에 사람을 보내곤 하시었고.”
‘그’의 얼굴에 놀란 빛이 섬광처럼 스치었다.
“설마 어르신! 태황태후전을 독시(督視: 감시)코 계시는 겁니까!”
“독시라니. 한낱 신자된 자가 어찌 황실의 큰어른께 그런 실례를 범하겠는가.”
“허면, 어찌하여 태황태후전의 동향을 그리 자세히 알고 계시는 것입니까?”
“귀에 저절로 들어오는 것을 어찌 막겠느냐.”
남자가 말하며 익살스레 제 귓불을 툭툭 쳤다. 그 꼴을 보며 ‘그’도 일단은 웃는 모양을 만들어 보였지만 속까지 태평하게 웃을 수는 없었다. 저 남자가 타인을 쉽사리 믿는 성정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선제 가연제 즉위 시부터, 아니, 어쩌면 태황태후가 강윤제의 정후(正后)였던 시절부터 한 배를 탔을 태황태후에게조차 저리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을 줄은 몰랐다.
불현듯 가슴 속 깊은 곳이 선뜩해졌다. 그렇다면, 나는?
그 순간, 남자가 말했다.
“소희의 짓이 맞다.”
“소희···.”
‘그’가 답지 않게 멍하니 중얼거리며 남자 쪽을 쳐다보았다가 뒤늦게 흠칫했다. 소희란 체제공 서현의 아명이었다. 남자가 그런 그에게 보란 듯 서찰을 들이밀었다.
“운현궁 마마께 직접 여쭈었다. 소희의 짓이 맞아.” ‘그’가 서찰을 받아가고 빈 우수(右手)로 남자가 자신의 턱을 몇 번 쓸며 중얼거렸다. “웬일로 그 일황자가 제대로 머리를 굴렸군. 우연이겠지만.”
“아닙니다.”
어쩌면 아차하는 사이에 내팽개쳐질지도 모른다. 갑작스레 닥쳐온 위기감에 필사적이 된 그가, 무엇이든 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밀려 무심결에 반박했다. 남자의 눈썹이 훽 휘어졌다.
“아니라? 무엇이?”
“우연 따위가 아닙니다, 어르신.” 그제야 자신이 무슨 소리를 지껄였는지 깨닫고 아차했지만 그는 제 말을 물리는 대신 오히려 더 힘을 주어 주장했다. “결코 황상을 얕보시면 안 됩니다. 쥐새끼?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괴물입니다.”
“무슨 말을 하는가 했더니.”
남자가 냉소적으로 내뱉었다.
“일황자에 대해서는 자네보다는 내가 더 잘 아네.”
“어르신, 그 자는···!”
“되었어.” 남자가 ‘그’의 말을 가로막으며 한 손을 들어보였다. “일황자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군. 들을 가치도 없고.”
“제발 어르신, 소인의 간언을 흘려듣지 마십시오!”
“그만.”
무어라 더 말하려던 ‘그’가 주춤하고 입을 다물었다. 고성은커녕 남자는 목소리 끝 하나 올리지 않았지만 나직한 남자의 목소리에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질러대는 것 이상의 위엄이 있었다. 남자의 목소리가 거대한 바위가 되어, 어깨와 등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 같은 압박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저 남자가 황제를 무슨 이유로 저리도 얕잡아 보는 것인지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의 고집에도 이유는 존재했다.
저 바위처럼 무겁고 거대한 존재감을 가진 남자 앞에서조차 황제를 떠올리면 등줄기에 식은땀이 돋았다. 저 남자가 하늘도 능히 떠받칠 바위라면 황제는 귀신이었다. 비록 위협적인 실체는 없으나, 깨닫고 보면 어느새 소리도 없이 다가와 하늘조차 제 어둠 안으로 삼켜버릴 무시무시한 괴물!
“일황자는 결코 용이 될 수 없어. 심지어는 용인(龍人)조차도. 그 자는 저주받아 마땅할 불량품이다.”
“용은 되지 않겠지요. 허나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보다 더한 괴물입니다.”
“괴물?” 하고 입 속으로 중얼거린 남자가, 불쑥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물에 잠긴 듯 불투명해졌던 남자의 눈초리가 금세 싸늘해져서 ‘그’를 노려보았다. “용을 괴물 따위에 비유하는 건가?”
“신인 동시에 괴물.”
‘그’는 불쑥 중얼거렸다. 나이를 먹어 약간 처진 감이 있던 남자의 눈꺼풀이 꿈틀하며 단번에 치켜 올라갔다. 완전히 열린 눈에서 쳐다보는 것만으로 갈가리 사람의 살을 찢어발길 수도 있겠다 싶을 만치 흉흉한 빛이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이미 ‘그’는 자신의 입을 통제할 수 없었다. 그것이 말을 ‘하는’것이 아니라 ‘토해내는’ 것에 가까웠다.
“축복인 동시에 재앙. ···아닙니까?”
그가 묻자, 막 입을 열고 있던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그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존재할 때는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축복이지만 잠시라도 모습을 감추면 그 사실 자체로 재앙이 됩니다. 그 단비 같던 축복 아래에서 그의 백성들이 얼마나 나태하고 무능해졌는지!”
“또한.” 금방이라도 불호령을 내릴 것 같던 남자가 뜻밖의 나직한 소리로 대꾸해왔다. 그 표면 아래에 용암처럼 바글거리는 감정이 느껴졌지만 그것은 불같은 분노와는 조금 색조가 달랐다. 표현하자면 그것은, 너무도 오래되어 자글자글하게 쪼그라든, 초라하고 그만큼 색이 짙은 노여움. “그것이 애꿎은 사람을 때로는 죄인에 되게 하고. 제가 지었다는 죄가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으면서 사람들의 성화에 밀리고 화살비 같은 비난에 몰려 결국은 버틸 수 있는 한계까지 다다라-,”
거기까지 말한 남자가 말을 멈추고 대신 입술을 뒤틀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자네 말도 아주 틀리지는 않아. 그러나 용님은 예에 있어 불가결(不可缺)의 존재시네. 결코 없어서는 안 되는, 필요악이지.”
필요악···? ‘그’는 남자의 표현에 의아한 마음이 들었으나 순간의 일이었다. 자신의 감정이 밀려 벌써 어리석인 짓을 몇 번이나 저질렀다. 더 이상 남자의 말에 의구심을 드러내 보이는 것은 바보짓이다. 게다가, 필요악이라. 어쩌면 맞는 말이 아닌가, 이 나라 사람들에게는 모르지만 적어도 자신에게만큼은!
잠시간 침묵하고 생각에 잠겨 있던 남자가 물었다. ‘그’가 한 경고를 끝까지 헛소리로 치부하고 넘기려는 것처럼 보였건만, 그 일촌광음(一寸光陰: 짧은 시간)에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참으로 뜻밖의 물음이었다.
“자네는 그런데도, 일황자를 용님에 비함인가. 그 의려는 아직 유효한가.”
생각지도 못한 물음에 ‘그’가 잠시 침묵했다가, 이윽고 기회를 놓치지 않고 대답했다.
“예. 물론 황상께서는 결코 용님은 아닙니다, 어르신께서도 아시듯 용의 증후가 나타나지도 아니하였고 소인도 그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러나, 허나 소인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그’의 얼굴에서 갑자기 핏기가 빠져나갔다. 그의 얼굴에 서린 것은 분명히 경악, 혹은 공포였다. 그 꼴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던 남자가, 순간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추궁했다.
“자네, 무엇을 본 건가.”
“황상의 배부(背部: 등)에서 심한 압흔(壓痕)을 보았나이다. 그리고.” 그가 한껏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그 압흔 주위를 검은 피막(皮膜)이 감싸고 있었고, 때때로 흉터 밑이 뭔가가 갇혀 있는 듯 꿈틀거리곤 하였습니다.”
“···!”
“소인이 범님의 백성인지라 용님에 관해서는 견문이 짧아 여쭙는 것입니다만, 혹 용님에게도 시익(翅翼: 날개)이 있으십니까.”
남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
불덩이 같던 이마에 차갑고 보드라운 것이 계속해서 스쳤다. 그것이 이마에 닿았을 때는 스르륵 표정이 풀어졌다가, 잠시라도 그것이 떨어지면 애가 타서 안타까운 신음을 흘러나왔다. 또다시 볼에서 차가운 그것이 떨어져 나가서,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사실은 손을 뻗은 것이 아니라 고작 손가락 끝만 꼼지락거렸던 모양이었다. 손가락 끝에 까슬까슬한 돗자리 같은 것이 만져져서 그는 겨우 그 사실을 깨달았다.
이윽고 힘없이 바닥에 풀어진 손가락 위를 뭔가가 가볍게 덮었다. 처음에는 물이라도 묻힌 듯이 차고 축축했지만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메마르고 뜨거워졌다. 자신만큼이나 뜨끈거리는 그것이 들러붙어 있으면 기분이 나빠질 만도 하건만 이상하게 그렇지는 않았다.
자신의 손등에 가만히 얹혀 있던 뜨거운 것이 잠시 후 꼬물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느다란 가지 같은 것이 자신의 손가락 사이를 파고든다. 그 가지는 비록 가느다랗지만 피부에 닿는 감촉이 의외로 딱딱하고 튼튼했다. 몇 개나 되는 가지가 자신의 손가락 사이에 콱 맞물리고 나서야 알았다. 손. 그것은 사람의 손이었다.
“···깼느냐.”
무거운 눈꺼풀을 가까스로 밀어내자, 아직 흐릿한 시야 안에서 연기처럼 흔들거리는 인영이 물어왔다. 서문경은 대답했다. 아니, 대답하려고 했다. 그러나 바짝 마른 목은 새된 소리조차 뱉어내지 못했다. 인영이 조금 움직인다 싶더니, 언제까지고 풀리지 않을 듯이 꽉 껴져 있던 깍지가 풀렸다. 왜인지 가슴이 휑해진다. 곧 마른 입술에 매끈한 도자기 주둥이가 닿고 미지근한 물이 조금씩 입 안으로 들어왔다. 그것을 몇 모금이나 마시고 나서야 미각이 돌아왔다. 물이 아니라 꿀물이었다.
“정신이 드느냐.”
서문경의 등에 녹두베개를 몇 개나 괴어 그가 앉을 수 있도록 도와준 남자가 물었다. 고개를 숙이고 가느다란 숨을 내쉬던 서문경이 머리를 들었다. 푹 등을 기대자 녹두가 든 베개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터졌다. 아직 뻑뻑한 눈을 몇 번이나 깜빡이자, 그제야 제 앞에 있는 것이 무슨 물건인지 분간할 정도로 시야가 맑아졌다.
그러나 서문경은 자신의 앞에 앉아 말끄러미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도 의아한 듯 고개를 모로 기울이기만 했다. 남자가 작게 한숨을 쉬며 한 손을 쭉 뻗었다. 서문경의 눈동자가 데구르르 굴러 남자의 손이 움직이는 궤적을 따라갔다. 뭘 하려는 것일까.
“?”
“고놈의 정신 좀 제자리에 돌려놓지 못할까.”
딱. 남자의 손이 서문경의 이마를 가볍게 쥐어박았다. 별 것도 아닌 충격이었지만 갑작스레 당한 일에 놀란 서문경이 눈을 접시만 하게 뜨고 맞은 자리를 두 손바닥으로 감쌌다. 남자가 끌끌 혀를 찼다.
“웬 엄살이냐.”
하고 타박을 놓은 남자가 무릎걸음으로 몇 걸음 다가왔다. 그가 다시 손을 드는 것을 보고 서문경이 몸을 피하려다가 뒤늦게 남자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을 보고 움직임을 멈췄다. 물을 적신 명주 수건이었다. 수건이 서문경의 얼굴과 목을 꼼꼼히 훔쳐 주었다. 역시 자신이 잠들어 있는 새 자신의 얼굴을 닦아주던 사람이 저 사람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서문경이 골안개라도 낀 듯이 먹먹하기만 한 머릿속을 답답해하며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런데 정말로 누구더라?
그 때 남자가 말했다.
“아무래도 물에 한 번 씻는 것이 개운할 터인데, 그럴 기운이 있으려나 모르겠구나.”
“저, 고맙습···,”
“짐이 씻겨주랴?”
“···?”
잘못 들었나?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서문경이 두 눈을 껌뻑거렸다. 그러자 눈앞의 남자가 식은땀으로 축축한 쇄골께를 젖은 수건으로 문지르며 태연히 말을 이었다.
“물도 아낄 겸, 함께 씻으면 되겠구나.”
“···폐하.” 는질맞은 말을 말끔하게도 지껄여대는 소리를 듣는 순간 머릿속에 불이 번뜩했다. 반쯤 풀려 있던 서문경의 눈에도 스르릉 시퍼런 날이 섰다. “그리 목욕이 하고 싶으시면 혼자 열천(熱泉)에 들러붙어 계시든가 하시지요.”
그 말에 쳇, 하고 혀를 차며 황제가 서문경에게서 물러나 앉았다. 명주 수건을 은반(銀盤)에 내던지며 그가 투덜거렸다.
“이제 정신이 들었나 보구나.”
“사람이 제정신이 들었는데 왜 아쉬워하고 그러십니까. 저 자는 사이에 몰래 연대보증서에 지장이라도 찍게 하실 심산이셨습니까?”
“보증서? 그건 또 무어야.” 황제가 의아한 듯 눈살을 구겼다가, 곧 그런 것쯤은 몰라도 어떠냐 싶었던지 서문경을 향해 눈에 쌍심지를 켰다. “헌데 이놈이 짐을 면알하자마자 웬 역증이야, 역증은.”
“제가 안 그러게 생겼습니까!”
대체! 서문경이 바닥을 탕 치며 목소리를 높였다가 갑자기 눈을 감고 머리를 조금 비틀했다. 화를 내자 겨우 가라앉은 열기가 머리꼭지까지 치솟아 눈앞이 어지러웠다. ‘그러게 몸도 성치 않은 놈이 왜 고함을 지르고 그러누.’, 황제가 한심해하는 티를 숨기지도 않고 핀잔을 놓으며 서문경을 향해 뭔가를 던졌다. 손등에 툭 떨어지는 것이 뭔가 싶어 내려다보니 물에 적셔 물기를 짠 명주 수건이었다. 그것을 서문경의 얼굴에 노여워하는 빛이 눈에 띄게 누그러졌다.
수건을 집어들며 서문경이 말했다.
“왜 폐하쯤 되시는 분께서 손수 물일을 하고 그러십니까.”
“그럼 어째. 네 놈이 골골거리며 넘어가려는 판국에.”
“나인 아무나 데려다···,”
“잘도.”
“싫대도 시켜야지요. 그게 그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 아닙니까?”
“그것이 아니라.”
그럼? 하고 생각하던 서문경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황제가 자신을 빤히 응시하고 있다. 그 눈길에 뭔가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아 자신도 모르게 주춤해서는 ‘뭡니까?’하고 묻자,
“그대가 싫다지 않았나.”
예상 밖의 대답에, 서문경이 무심결에 제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두터운 솜이불을 덮고 있는 탓에 발끝은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서문경은 개의치 않고 생각했다, 내가 그랬다고?
“제가 그랬다고요?”
“그대가 고뿔로 앓은 지가 꼬박 한 나절하고도 반나절이 더 지났어.”
서문경이 눈을 찡그렸다.
“그런 기억은···.”
“안 나는 것이 당연하지. 눈 한 번 안 뜨고 잘도 자더구먼. 하기는, 그랬으니 이리 일찍이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던 게지.” 마지막에 가서는 거의 혼잣말처럼 입 속으로 중얼거린 황제가, 그 말끝에 덧붙였다. “궁인들이 새 물을 내온다 새 수건을 내온답시고 드나들 때만 귀신처럼 알고 일어나서 칭얼거리더구먼.”
“제가 그랬다고요?”
“오냐.” 방만한 자세로 등을 기대고 앉은 황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반드르르한 눈으로 서문경을 쳐다보다가 불현듯 웃었다. “본능이 아니겠느냐.”
본능이요? 통 이해가 가지 않아서 서문경이 반쯤은 허탈해하면서 되물었다. 황제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갓난아기가 어미를 찾아 젖을 빨고, 알을 까고 나온 오리 새끼가 처음 본 이를 제 어미라 여기고 따르듯이. 그대도 ‘아무나’ 괜찮은 것은 아니라는 말이지. 무릇 사람이란, 병막(病?)이 들어 정신마저 아뜩해질 지경이 되면 갓난아이나 혹은 갓 난 동물새끼나 크게 다름이 없음이다.”
황제가 하려는 말을 가까스로 알아들은 서문경의 이맛살이 서서히 구겨졌다.
“그래서, 제가 폐하를 가장 안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요?”
“혹은 짐을 가장 달갑게 여겼거나.”
“이 무슨,”
근거 없는 자신감에서 나온 망발···, 하고 독설을 내뱉으려는 서문경의 말허리를 황제의 목소리가 가로막았다.
“짐이 그러하듯이.”
서문경이 멈칫,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황제의 말을 듣는 순간, 누군가가 자신의 뇌를 통째로 잡아 흔드는 듯한 아찔함이 눈앞을 스쳐갔다. 황제가 말을 이었다. 그 소리가 마치 속삭이는 것처럼 나직했다.
“그대도 그러하다면 좋겠구나.”
“······.”
“무어. 짐의 희망이었다.”
그대가 다른 이들의 출입을 꺼린 것은 사실이지만. 황제가 꺼림칙해 하는 태도로 덧붙였다. 자신의 희망 사항을 한 꺼풀 벗고 생각해보니, 서문경이 그리 행동한 이유를 도통 모르겠노라는 태도였다. ‘역시 몸이 아프니 정신이 예민해져서 그런 것이었을까.’, 혼잣말로 웅얼거리는 황제에게 서문경이 불시에 물었다.
“그런데 왜.”
따지듯 내뱉는 말에 황제가 서문경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정작 말을 한 서문경은 황제가 아니라, 자신의 무릎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는 중이었다. 어느새 황제의 손에 버금갈 만치 여윈 서문경의 손이 자신의 무릎이 있는 자리를 콱 움켜잡았다. 마치, 절벽으로 떨어진 사람이 돌출된 돌조각을 붙잡고 매달리듯. 서문경이 말했다.
“말은 그렇게 하시면서, 왜 오지 않으셨습니까?”
엄헌영에게 사실을 들었을 때, 겉으로는 허세를 부리며 돌아섰지만 속은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불안했다. 속이 아플 만큼 술렁거리는 이유조차 그 때의 자신은 이해할 수 없었건만, 가슴팍과 뱃속은 딱딱해진 머리와는 이미 다른 생명체란 듯이 뒤흔들렸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실낱같은 희망이 남아 있었다.
“저는, 폐하가 한번쯤은 저를···,”
한번쯤은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고, 아니면 자신을 불러 주리라고 기대했다. 미련스럽지만, 그랬다.
“설명, 해주실 거라고.”
무슨 자신감에서였는지 모르겠지만, 그럴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허나 그것은 근거나 이유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그저 막연한 희망이나 미련에 불과했다. 그래서였을까.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황제는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다. 자신을 부르지도 않았다. 자신 쪽에서 황제를 찾아가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아주 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자존심 때문에? 아니었다. 서문경이 품고 있는 것 중 자존심 따위는 완전히 연소(燃燒)되고 없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은 자존심으로 가장한 허세 뿐, 하지만 그 허세 때문도 아니었다.
“무서워서.”
서문경의 어깨가 흔들렸다. 황제의 중얼거림이 날카로운 창이 되었다. 그 창이, 단 한 번에 자신의 심장을 꿰뚫었다. 첩첩히 둘러싸고 있던 갑옷이 순식간에 벗겨지고 알몸이 된 기분이었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정답.
무서워서.
더 이상은 필요 없다는 말을 들을까 무서워서. 그래서였다.
“어떻게···.”
“짐은, 두려웠다.”
곧바로 이어진 말에 서문경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서문경의 부릅뜬 눈이, 시선이 황제의 얼굴에 가서 박혔다. 꿀꺽, 마른침이 귓가에 천둥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넘어갔다. 잠시 후에야 깨달았다. 황제는 자신의 마음을 읽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변명이었다. 고백이었다. 참회였다. 도움을 청하려 내민 손이었다.
“짐이 원한 일이 아니었다. 짐은···, 분명히 뜻을 밝혔다.”
황제 자신의 이야기였다···.
그렇게 말한 황제가, 답지 않게 나지막한 한숨을 흘렸다. 서문경은 황제의 얼굴을 새삼스레 응시했다. 아직도 머리가 뜨거워 미처 깨닫지 못했었지만, 오랜만에 본 황제의 얼굴은 며칠 전 봤을 때보다 눈에 띄게 까슬해져 있었다.
황제가 계속해서 말했다.
“상서원부사와 태황태후전에서 개입한 이상 공론화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니 짐의 뜻대로 흘러가지는 않았지만. ···짐은 적어도, 모든 불안 요소를 없애고 돌아가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 짐의 일로 그대에게까지 무게를 지우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 아닌가. 그래서, 짐의 선에서 일을 해결코자 했었다.”
“말씀하셨다면···,”
“경아.” 황제가 당치 않은 소리를 들었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서문경이 대답대신 눈을 조금 더 크게 뜨자 황제가 못을 박듯 말했다. “그것은 그대의 의무가 아니다. 구혼하는 쪽은 짐 쪽이야. 그러니 그대가 언짢지 않도록, 짐 쪽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잠시간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침묵의 무게에 짓눌린 것처럼 서문경이 고개를 조금 숙였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괜한 손발만 꼬물거렸다. 그러다 잠시 후, 서문경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황제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하지만 말씀해 주셨다면 좋았을 텐데요.”
“경아.”
“압니다.”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든 서문경이 서둘러 황제의 말을 막았다. “맞습니다. 폐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제가 폐하의 입장이었더라도. 이해합니다. ···그런데. 그런데, 저는. 저는.” 전, 하고 웅얼거리는 서문경의 목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거의 혼잣말처럼 들리는 서문경의 말소리를 들으려 황제가 조금 몸을 서문경에게 기울였을 때였다. 갑자기 표정을 굳힌 서문경이 오히려 목소리를 높여 내뱉었다.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말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예. 폐하께서 괜, 찮으시다면.” 서문경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제게도 의논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허나···.”
“제가 영 못 미덥지 않으시다면요.”
그런 것은 아니다만. 황제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서문경을 응시했다. 눈이 마주치자 당연한 것처럼 황제가 입을 다물었다. 서문경 또한 마찬가지였다. 머릿속까지 홧홧한 것이 아직 내리지 않은 열 때문인지 익숙지 않은 말을 한 부끄러움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만약 얼굴이 뜨거운 이유가 후자라고 해도 서문경은 자신이 한 말을 물릴 생각은 없었다. 따지고 보면 황제의 말이 백 번 옳았지만, 이미 이성과 떨어져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한 혀를 말릴 수는 없었다.
“고립된 것 같았습니다. 감기 때문에 마음이 약해진 탓도 있겠지만···.” 하지만 병에 걸린 원인도 주체할 수 없는 고독함에 제 몸을 돌보는 것을 소홀히 한 탓이었다. 비몽사몽 중에 각다귀처럼 들러붙어 자신을 괴롭히던 어두운 감정들이 새삼 생각났는지 서문경이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몸이 아플 때 혼자인 것만큼 서러운 것이 또 없다고 하더니 정말 그렇더군요. 찾아오는 이 하나 없이 홀로 빈 방 안에 누워 있으려니 이곳이 고독지옥(孤獨地獄)인가, 그런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서문경이 잠시 입을 닫고 황제의 눈을 응시했다. 의아한 표정을 짓는 황제에게 서문경은 불쑥 물었다.
“폐하께서는 늘 그러셨는지요?”
늘 그렇게, 홀로. 이 세상에 혼자인 듯,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행복한 가운데 그 자신도 홀로 버려진 것처럼. 풍요로운 바다에 떠 있는 황폐한 섬처럼, 늘 그렇게 쓸쓸하고, 고독하며, 비참하였던가.
“저는···, 이 세계에서 처음 눈을 떴던 순간을 떠올렸습니다.”
그 때를 기억한다.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그 순간. 지금 자신이 밟고 있는 이 땅이, 원래 자신이 태어나고 살기로 예정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던 그 순간. 이 땅에는 자신과 엮여 있는 어떠한 사람도 없고, 자신의 것으로 예정된 자리 또한 없다는 것을 안 그 순간···.
나는, 불청객. 서문경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 사실을 떠올리면 언제든 움츠려들게 된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서문경의 말이 점점 더 느려졌다. 남아 있는 이성이 필사적으로 경종(警鐘)을 울렸다. 그만해. 멋대로 움직이던 입술을 그 충고를 받아들였다. 지금 자신이 하려는 말은 어쩌면 무례를 넘어선 폭력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만하자. 그러나, 활활 타오르는 불꽃은 재속에서도 희미한 불씨를 숨겨두듯, 이미 열린 입술은 말의 찌꺼기를 뱉어내고 있었다. “폐하께서도···.”
앞뒤 설명 없이 튀어나온 토막말로도, 황제는 서문경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깨달은 듯 했다. 황제가 무심히 대꾸했다.
“네 놈이 먼 대륙에서 떨어져 흘러 들어온 섬이라 치면, 짐은 원래부터 이곳을 떠돌던 외딴섬이라 이 말이더냐.”
서문경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뜨겁던 머리가 한순간에 차가워졌다. 아니, 머리가 식는 것을 넘어 뇌 속에 가득 꽁꽁 언 각얼음을 채운 듯 시야까지 아찔해졌다. 실수했다. 서문경이 황급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제가 그만 실언을.”
“섬이라.” 황제가 서문경의 사과를 들은 척 만 척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다, 한 쪽 눈썹을 슥 밀어 올렸다. 황제가 수긍했다. “무어, 맞는 말이로군.”
뜻밖의 반응에 서문경이 그만 멍해졌다.
“예?”
“무얼 그리 놀라누.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고.”
“하지만···.”
“경아.” 서문경의 놀란 얼굴에 한심하다는 시선을 던지며 황제가 혀를 끌끌 찼다. “제 아무리 싫고 꺼려지는 일이라도 사실은 사실이다. 네 놈이라면 누군가 네 녀석에게 넌 이 세계에서 외톨이가 아니냐 묻는다면, 부정할 수 있으냐.”
아니다. 비록 화를 내거나, 홀로 속을 썩을 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은 사실. 아마도 자신은 그의 면전에서 고개를 젓지는 못할 것이다. 그 표정을 읽은 황제가 말을 이었다.
“짐도 마찬가지다.”
비록 그 따위 말을 한 것이 네 녀석이 아닌 다른 놈팡이였다면 그 놈 머리에 바로 재떨이가 날아갔겠지만. 황제가 가래 섞인 소리로 킬킬 웃었다.
잠시 후, 황제는 웃음기를 거두고 서문경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파르스름한 입술이 천천히 열리는 모습을 서문경이 홀린 듯 빤히 응시했다. 다른 사람에게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두터운 철문 안을 몰래 들여다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황제의 입술이 움직였다. 서문경은 기계적으로 그 움직임을 읽었다.
“네···,”
“네 녀석 행동거지를 보니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겠다.”
무심코 황제의 입술을 따라 읽던 서문경이 뒤늦게 황제의 말뜻을 인식하고 흠칫했다. 알겠다고?
“괘씸한 것 같으니.”
서문경이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뺐지만 황제의 움직임이 그보다 빨랐다. 뒤로 물러나는 서문경의 목 뒤를 소리도 없이 뻗어온 황제의 팔 안쪽이 턱하고 막았다. 얼결에 황제의 팔을 베고 앉은 꼴이 된 서문경이 당황한 눈으로 빠져나갈 길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황제가 팔에 힘을 주어 서문경을 끌어당겼다.
황제가 은근한 투로 캐물었다.
“깜둥아, 짐에게 할 말 없느냐.” 답지 않게 우물거리다 눈살을 찡그리고 앉은 서문경의 이마를, 황제가 손가락 끝으로 쿡쿡 찔렀다. 제멋대로 자란 손톱이 제법 아팠다. 그것 때문에 서문경의 미간에 잡힌 골이 깊어지자 황제가 웃음기 어린 소리로 타박했다. “응? 참으로 발칙한 것 같으니. 분수를 모르고 콧대가 높은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지, 어찌 깜둥새 주제에 지존과 견부(肩部: 어깨)를 나란히 하려 드누?”
심술궂게 생핀잔을 준 주제에 무어가 그리 좋은지 황제의 용안이 싱글벙글하며 입을 채 못 다문다. 그 꼴을 보다 못한 서문경의 눈이 스르륵 불손한 빛을 담고 가늘어지는데(‘내 옆에 있다가 감기라도 옮았나, 저 인간.’) 신이 난 나머지 그것도 미처 눈치 채지 못하고 황제가 어깨를 으쓱으쓱 했다.
“좋다, 허(許)하도록 하마.”
“···뭘요.”
“새침 떨지 마라.”
“···그러니까 뭘요?”
제 입으로 말하기에는 쑥스러웠던지 황제가 콜록콜록 괜한 헛기침을 몇 번이나 하고 대꾸했다.
“짐을, 네 놈과 일심동체라 여기고 의지하여도 좋단 말이다.”
“······.”
서문경은 생각했다. 저 말을 제 때 해줬으면 감동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와서는······.
“! 뭘 하는 게냐!”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며 고함을 지르는 황제에게 서문경이 대꾸했다.
“이야기 다 끝난 것 아니었습니까?”
“뭐라?!”
“더 하실 말씀 있습니까?”
서문경의 심드렁한 반문에 황제가 주춤했다. 잠시 고민한 후 황제가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랬다가 곧바로 그가 돌변해서 서문경을 향해 삿대질까지 하며 소리를 질렀다.
“고얀 것! 그렇다고 천자를 배알하면서 등을 보이며 눕는 이가 세상 천치에 어디 있느냐!”
“여기에요.”
“그래, 여기에···!”
기세 좋게 외쳤다가 바로 다음 순간에 황제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이게 아닌데? 황제 쪽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솜이불을 턱 바로 밑까지 끌어 올리고 있는 서문경을 황제가 우물거리며 불렀다.
“얘야. 경아. 깜둥새야? 짐이 하는 말을 듣고 있느냐? 새야? 깜둥아?”
황제가 몇 번이나 외쳐 부르고 나서야 서문경은 돌아누웠다. 하지만 겨우 황제 편을 향해 누운 서문경이 한 말은 볼멘 항의였다.
“안 가 보셔도 됩니까.”
“짐이 어디를 가.”
“제가 잘은 몰라도, 생각 외로 하는 일이 많지 않습니까, 지존의 자리란 것이.”
“많지. 경연에 상참에 윤대에···.”
“그런데 이리 편전을 오래 비우셔도 됩니까?”
옳다구나하고 서문경이 던진 물음에 황제가 들으란 듯 툴툴거렸다.
“아프다는 놈을 돌봐주었더니 은혜를 갚기는커녕 용포며 옥관이며 값나가는 것은 다 내놓고 물러가라니 도둑놈도 이런 도둑놈이 없구나.”
“제가 언제 그딴 걸 내놓으라고 했다고.”
“그런다고 짐이 갈 것 같으냐.”
절대로 못 가지. 황제가 콧방귀를 끼더니 서문경을 팍 옆으로 밀치고 그 옆자리를 꿰고 앉았다. 경황 중에 옆으로 밀려난 서문경이 허, 하며 기막힌 소리를 내뱉었다. ‘그 소리는 뭐냐.’, 용케 그 소리를 듣고 눈을 모로 세우고 발끈하는 황제에게 서문경이 따져 물었다.
“진짜 이러시깁니까.”
“무어가.”
“진짜 이러셔도 되느냔 말씀입니다.”
황제가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조금 전과는 달리 염려하는 기색이 역력한 물음이었기 때문이었다. 황제가 입을 다문 틈을 타 몸을 일으킨 서문경이 황제의 얼굴을 걱정스레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듣자하니 요 며칠간 청의관에 계셨던 것 같은데···.’
“모른다.”
황제가 불퉁하게 대꾸하며 벌렁 보료 위에 드러누웠다.
“모른다니요.”
“경연(經筵)이고 상참(常參)이고 윤대(輪對)고, 어느 누구 하나 짐에게 그런 일을 기대하는 자가 없으니 무슨 상관일까.”
“그렇다고 흠 잡힐 일을 하셔서 씁니까.”
황제가 빙글 서문경을 향해 돌아누웠다.
“근심스러우냐.”
“당연한 것 아닙니까.”
“어찌하여?”
“아, 폐하께서 굳건히 버티고 계셔야 저도 좀 폐하께 의지해서 살아볼 것 아닙니까!”
서문경이 답답하단 듯이 고함을 지르자, 황제가 킬킬 비웃으며 말했다, ‘왜? 언제는 짐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네 놈이 짐을 돌보는 것이라 하더니?’ 황제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이 쏘아붙인답시고 했던 말이었다. 저 인간 뒤끝 한 번 기네, 하고 생각하며 서문경의 부루퉁히 대꾸했다.
“서로서로 돕고 살아야지, 어느 한 쪽만 손해 보면 못 씁니다. 그런 관계는 결코 오래가지 않는 법이랍니다.”
“짐과 오래오래 살고 싶다고?”
“아, 좀!” 서문경이 짜증을 냈다. “좀 진지하게 대답하시면 안 됩니까!”
“짐이 무슨 도깨비장난을 놓았다고 그래.”
허나 그렇게 말한 직후에, 황제가 어조를 달리하여 대답했다.
“무의미한 일이다.”
언뜻 가볍게 들리는 말 속에 담긴 육중한 무게를 눈치 채고 서문경이 표정을 굳혔다.
“짐이 무슨 일을 하건,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 짐이 제 아무리 성실히 경연을 열고 열린 마음으로 백관(百官)들의 정견(政見)을 받아들여도 신자들이 짐을 보는 눈도, 마음도 조금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야.” 잠시 뜸을 들였다가 황제가 나직이 덧붙였다. “짐에게 용의 증후가 나타나지 않는 한.”
“용이면 되는 겁니까.”
서문경의 대꾸에 황제가 무슨 의미냐는 듯이 이맛살을 구겼다. 서문경이 북 이를 갈았다.
“이 나라에서는! 황제라는 사람이 얼마나 명석하고 현명한지, 얼마나 제 임무를 성실히 이행하는지, 얼마나 만백성을 애틋하게 여기는지, 얼마나 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그런 것 따위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겁니까?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까? 그저, 그저, 용이면 되는 겁니까? 용으로서 거듭나기만 하면, 창검으로 사람을 다스리는 폭군이 되어도 상관없는 겁니까?”
“그래.”
말문이 막혔다. 그런 서문경을, 황제가 무감동한 눈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당장 복부에 칼을 맞고 죽어가는 판국이라도 그 칼을 든 자가 용이라면, 그 누구든 중은(重恩)을 입었다 감격해하며 죽어갈 것이다.”
“···미쳤군.”
서문경이 자신도 모르게 내뱉었다. 내뱉고 나서 아차했지만, 서문경은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더 사납게 덧붙였다.
“당장 나라가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군요.”
“그래.”
뜻밖에도 황제가 서문경의 말에 동의했다. 서문경이 힐끔 눈만 돌려 바라보자, 똑바로 천장을 보며 누운 황제가 막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을 감은 채로 황제가 말했다.
“아마, 용님께서도 그리 생각하실 것이다.”
그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어 한 동안 황제의 얼굴만 내려다보고 있던 서문경이 이윽고 황제의 곁에 드러누우며 투덜거렸다.
“그런데 용님께서는 그리 불평하실 자격이 안 되지요.”
“왜?”
“자기가 지 자식을 그렇게 키워 놓고서 무슨.”
황제가 숨을 죽여 웃었다.
“그러게나 말이다.”
그러게나 말이야. 황제가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