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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르릉 요란스런 벽력이 울었다. 장대비로 변한 빗줄기가 바닥에 잔구멍이라도 뚫을 기세로 내리박혔다. 덕분에 귓가가 멍멍했다. 실재하는 것은 뇌성벽력과 장대비뿐이고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멀리서 사람들이 두런두런 나누는 말소리가 끊일 듯 말 듯 희미하게 들려왔지만 그 뿐, 그 소리조차 깊은 물속에 잠기어서 듣는 듯 현실감이 없었다. 어쩌면 창을 완전히 닫아 놓지 않고 반쯤 열어 놓은 탓인지도 모른다.
창틀에 부딪친 빗방울들이 서문경의 볼이며 목덜미에 튀었다. 그러나 온 볼이 싸늘한 빗물에 젖어도, 세운 무릎에 턱을 괸 채로 창밖을 응시하고 있는 서문경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눈동자 한 번 옆으로 굴리지도 않고 똑같은 자리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 모습이 꼭 나무로 다듬어 만든 사람 같다.
그러기를 한참, 서문경이 한기를 느꼈는지 두 팔을 뻗어 세우고 있던 무릎을 끌어안았다. 그 모습이 어머니의 뱃속을 갈구하는 갓난아기 같았다. 그 또한 그렇게 생각했는지, 자연스레 엄헌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황상은 굶주린 젖먹이 아이나 다름없어. 자신에게 애정을 줄 만한 사람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지.
서문경은 눈을 내리깔았다. 어미를 잃고 굶주린 젖먹이 아이, 배가 곯아 지금 제 앞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누구인지조차 가늠하기 힘든. 그래서 제 손에 잡은 차완(茶碗) 속에 든 것이 타는 목을 달래줄 차일 수도 있고 어쩌면 치명적인 독을 탄 술일 수도 있지만 개의치 않고 무조건적으로 매달린다. 너무나 배가 고파서,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잡은 것이 ‘누구’이냐, ‘무엇’이냐가 아니라, 단지 배를 채우는 것뿐이니까. 즉,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본능의 영역인 것이다···.
엄헌영의 말을, 서문경은 자신 있게 부정할 수 없었다. 부정하고 싶은 혀가 멋대로 움직였지만 그 전에 입술이 먼저 굳게 다물렸다. 갈 곳 잃은 말이 입 안이라는 동굴에 갇혀 허무하게 맴돌다 스러졌다. 그래서 서문경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전적으로 엄헌영의 말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자신 또한 의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황제의 진심을 매도할 생각은 없었다. 그의 마음이 흰지 검은지, 또 그의 마음이 짙은지 옅은지, 무거운지 가벼운지에 대해서도 지금으로선 결론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입으로는 연모(戀慕)의 정에 대해 말하면서도 황제는 그 앞에 검은 막을 드리우고 있었고, 자신은 그 막을 들여다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망설임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망설임이 아니라 두려움인지도 모른다. 그 안에 무엇이 있을지 무서웠다. 혹 황제의 진심이 그가 한 말과 같다고 해도 정작 그의 마음을 받아들일 결심도 하지 못했으면서, 막(幕) 안에서 황제를 가장한 광대가 자신을 조롱하고 있을까 봐 무서웠다.
또한···, 서문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계속해서 불안감이 들었다. 지금 당장은 저 사람이 나를 은애하며, 나를 최고로 생각하고, 나를 원한다고 말해주고 있지만 앞으로도 그럴까. 줄곧 홀로였던 탓에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선택지가 나 혼자 뿐이었기에 하는 수 없이 나를 택한 것이 아닐까. 나보다 훨씬 달고 고운 이가 웃으며 손을 내밀면, 나를 남겨 놓고 당신은 그 편으로 떠나가 버리는 것이 아닐까.
엄헌영의 표현을 빌리자면, 너무도 배가 고픈 나머지 일단 손에 닿는 나부터 취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생길 정도로 배가 차면 그 다음은? 나 아닌 누군가가 그의 손이 닿는 곳에 스스로 들어오게 된다면? 그러면, 나는?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영제교에서 엄헌영을 만난 지가 벌써 이틀 전의 일. 그러나 이 전으로도, 그 이후로도 천추전으로부터의 호출은 없었다. 황제가 청의관에 행차하는 일도 없었다.
서문경은 소라게처럼 껍데기 안에 틀어박혔다. 이틀 내내 장대비가 그치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빗소리가 원래부터 그래야 하는 것처럼 귓가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귀가 멍멍해지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현실감이 멀어진다. 서문경이 호박방에 틀어박힌 이틀간, 그를 찾아오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마치 서문경이란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거짓말쟁이.” 무릎을 끌어안고 있던 서문경이 불현듯 중얼거리며 고개를 모로 돌려 무릎에 턱 대신 볼을 댔다. 차갑게 식은 볼에 딱딱한 무릎 뼈가 유난히 민감하게 느껴졌다. 그것이 못내 거슬려 다시 머리를 돌렸다가, 결국 고개를 들었다. 더더욱 몸을 움츠렸다. 온 몸에 작은 벌레들이 곰실곰실 기어가는 듯한 불쾌한 감각이 느껴졌다. 서문경은 이미 그 불쾌감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그토록 애절하게 구애해 놓고서 덜컥 새 사람을 들인다는 황제 때문에? 그래, 그런 것도 조금쯤은 있겠지. 지금쯤 이야기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을까. 태황태후까지 나서서 정식으로 새 사람을 들인다고 했으니 당장 곱고 어여쁜 여인을 몇이나 뽑아 그 앞에 선보아 드렸을지도 모르지. 새 사람···. 그럼 이제 황제는 혼자가 아닌 건가?
그럼, 이젠 나하고는 다르겠구나.
그러다 문득, 서문경은 실소를 흘렸다. 내가 지금 누굴 탓하고 있는 거지. 내가 다른 사람을 탓할 자격이 있던가?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답이 나왔다. 아니, 없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자신에게만은 황제를 비난할 자격도 근거도 없었다. 황제의 진의가 어떤 것인지 자신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지금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하지만 나는 다르지. 내 머릿속에 들어 있는 생각을, 내 가슴팍 속에 들어 있는 감정을 나만큼 잘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서문경은 무릎을 끌어안고 있는 팔에 힘을 주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팔 근육이 욱신거리고, 옥죄어진 무릎이 아팠지만 고통이 지금만큼은 오히려 반가웠다. 고통마저 느껴지지 않으면 자신이 ‘이 순간’, ‘이 자리’에 존재하고 있다는 확신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빗소리와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뇌성(雷聲)만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듯 했다. 머얼리서 들려오는 듯하는 타인의 말소리와, 자신은 완전히 분리된 것처럼 느껴졌다. 미지근한 물속에 잠기어 서서히 시들어가는 풀꽃이 된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자신이 이 세계에 실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허공에서 실체도 없이 떠돌며 지상을 내려다보는 물거품이 된 것만 같았다. 어쩌면 이 팔을 품과 동시에 두둥실 떠오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착각마저 든다.
무섭다. 나를, 나를 이 세계에, 내가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세계에 발붙이고 살 수 있게 할 만한 말뚝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그것은 인간으로서 지극히 본능적으로 느끼는 공포였다.
뼈와 뼈가 부딪치는 불쾌한 감각을 애써 참으며 서문경은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몇 번이고 피부를 비비자 희미한 온기가 새어나왔다. 그것을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이의 것이라고 생각해보려 노력했다. 상상해 보았다. 피와 몸을 나눈 어머니. 아버지. 형제며 내 몸처럼 소중한 벗. 그들이 두 팔을 벌려 자신을 끌어안아주고 있는 상상을 했다. 따뜻했다. 따스했다···.
거짓말.
서문경이 북 이를 갈았다. 참을 수 없는 짜증이 솟구쳐서 일순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었다. 따뜻하다고? 개소리!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 주제에! 친구들의 얼굴은커녕 한 핏줄인 형제나 부모님의 얼굴도 기억 못하는 주제에! 기억이 없는 것은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니, 아예 없었던 것과 같다! 기억이 없는데, 자신에게 원래 그런 것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게 뭐란 말인가!
서문경은 인정해야만 했다. 자신이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이 다른 무엇도 아닌 공포라는 사실을.
무서웠다. 너무 무서웠다. 물손님. 그래, 나는 ‘손님’이다. 여기의 주인도, 주민도 아닌 것이다. 나는 언제 떠나가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손님이다. 그러니 내가 당장 이곳에서 사라진다 해도 나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 설사 몇몇이 나를 기억하고 있다 해도, 그것도 일시에 불과할 뿐. 손님이 언젠가 떠나는 것은 당연하고, 그리고 나는 어떤 누군가가 오래오래 나에 대한 기억을 간직할 만치 이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며 그 사람의 삶에 깊게 배여든 것도 아니니까. 다 잊을 거야. 결국은 다 잊을 거다. 모두가 나에 대해서, 나란 존재에 대해서, 내가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그리고 그 기억이 잊히면 나 또한 완전히 사라진다. 기억이 사라지면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나라는 사람이 실제로 ‘있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서문경은 떨리는 몸을 끌어안았다. 무섭고 외로웠다. 쓸쓸했다. 온 몸이 텅 빈 것 같았다. 버려진 것 같았다. 필사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은 그런 거였다. 무서워. 고독해. 비참해. 누가 내가 여기 있어도 된다고 말해줘. 누가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해줘. 누구든 좋으니까 날 보고 있다고 말해줘. 손을 잡아줘.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증명해줘. 내가, 내가, 내가···, 누가, 날···!
찬 빗물이 한껏 열이 오른 얼굴에 튀었다. 그러나 빗물이 튀지 않아도 서문경의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었다. 찬바람이 세차게 불 때마다 휘청휘청 나무들이 꺾이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나무들이 부러질 듯 꺾이며 비명을 지른다. 파도소리. 나무들이 꺾이며 내는 소리가 세찬 바람소리와 섞여 파도가 치는 소리처럼 들렸다. 서문경은 귀를 틀어막았다. 파도. 파도. 파도! 그 빌어먹을 파도소리···!
“거짓말.”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 이게 다 거짓말이었으면. 눈을 뜨면 원래 내가 살던 세상에 돌아가 있으면! 없어진 기억이 모두 되살아나고 나를 아는 사람들이, 원래부터 나와 얽혀서 살아가던 사람들이 나를 보고 웃으며 잊어버린 내 이름을 불러 줬으면. 어떤 대가를 치러도 상관없으니까 제발, 제발, 제발!
더 이상은 싫어. 환영 받지 못하는 손님이 된 이런 기분은. 서문경은 귀를 막은 채로 소리 없이 절규했다. 이제 싫어. 일 분, 일 초, 한 발자국 걷고, 한 번 숨을 쉬는 것조차 ‘사는 것’이 아니라 ‘견뎌야’하는 이런 생활은.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을 경계하고 모든 것에 날을 세워야 하는 이런 생활은. 지긋지긋해, 싫어, 싫다고! 필사적으로 허세를 부렸지만 이미 서문경은 신경은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언제 뚝 떨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신경줄이 잔뜩 상처를 입어 펄럭거렸다. 욱신욱신 머리가, 가슴이, 온 몸이 아파왔다. 그래, 서문경은 이곳에서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힘들었다. 여기서 보내는 일분일초가 날카로운 갈퀴가 되어서 서문경의 온 몸에 날카로운 생채기를 냈다. 여기 있는 것이 싫어. 여기가 싫어. 여기 있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알고 있었다. 여기뿐이다. 아무리 지긋지긋해도, 아무리 증오스러워도 이제 이곳이, 이곳만이 자신이 살아야 할 땅이었다. 이 타향이, 자신의 무덤이 될 곳이었다······.
그래서.
그래서 나는.
서문경은 입술을 다물었다. 내리깐 시선이 바르르 떨렸다. 밀물처럼 차례로 밀려온 공포와 증오와 슬픔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그 자리에 자괴감만이 남았다. 꽉 다물린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 것은 허탈한 웃음이었다. 건조한 시선을 발치에 던지며 서문경은 천천히 손을 들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가락이 땀과 비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내가. 내가 누군가를 미워할 주제가 되던가. 특히 그 사람을···, 서문경이 입술을 깨물었다. 설사 황제가 정말로 자신을 대신할 누군가를 찾았다 한들 서문경은 그를 비난할 수 없었다. 서문경은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졌다.
나 또한 그를 이용한 것이 아닌가?
이용? 아니야. 그런 게 아니다. 하지만. 굳이 그가 아니라도 상관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 나는, 그가 아닌 누구라도 상관이 없었다. 한 발자국 걸을 때마다 오히려 허공으로 떠오르는 것 같던, 그 끔찍한 부유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누구든 나를 인식해줄 수 있다면, 누구든 나를 이 땅에 붙어 있다는 확신을 줄 수 있다면, 만약 내가 홀연히 사라져도 나를 기억해 줄 수 있다면 굳이 그가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그것이 잘못일까.
모르겠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잘못이 아니라면, 그 또한 탓할 수 없었다. 내가 굳이 그가 아니라도 상관없었던 것처럼, 그도 그랬을 뿐. 그 뿐이다. 그러니까 서운해 할 필요도, 상처 입을 필요도 없다. 나처럼 그도 그랬을 뿐, 더구나 그 사람과 나는 아직,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관계도 아니니까.
하지만 어째서 이렇게 가슴이 텅 빈 듯한 기분이 드는 걸까. 찬바람이 뱃속까지 들어차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서문경은 몸을 더더욱 움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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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이 드셨습니다만···.” 주저주저하며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서문경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자신도 모르는 새 까무룩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아직 눈도 머리도 멍해 서문경이 눈만 깜빡거리고 있는 사이에 아까의 그 궁인이 재차 고했다. “객이 드셨습니다만 어찌 할까요?”
“손님이요?”
황제인가? 반사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찾아온 것이 황제였다면, 제 아무리 허수아비 황제라 한들 고작 하역(下役)에 불과한 각심이가 구오지위인 황제의 행차를 막고 서문경에게 사실관계를 알릴 여유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 누구지, 서문경이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두 무릎을 바닥에 댔다. 그러나 한참 동안이나 쪼그려 앉아 있었던 탓인지 무릎은 상체의 무게를 지탱해주기는커녕 오히려 썩은 장대처럼 휘청거렸다.
그 때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들어감세.”
“잠깐,”
하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미닫이문이 촤르르 열렸다. 그 사이로 나타난 사내가 서문경이 하고 있는 꼴을 보고 무심코 미간을 구겼다가 곧 픽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뭐하나, 자네.” 남자가 미닫이문을 닫으면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곡예라도 하려고?”
“넘어진 겁니다.”
서문경이 중얼거리듯 대꾸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기운이 없군.”
평소 같으면 당장 신경질을 내면서 쏘아 붙였을 서문경이, 거의 입 속으로 웅얼거리듯이 대답하는 것을 듣고 남자가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서문경은 이번에는 작은 대꾸조차 없이 긴 숨만 한 번 내쉬며, 벽에 등을 기댔다. 그것에 의아한 시선을 보내던 남자가 불현듯 방 안의 공기가 몹시 차다는 것을 깨닫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가 혀를 찼다.
“창문은 왜 열어놓고 있나.”
“더워서요.”
탁. 남자가 창문을 닫고 덧문까지 걸어 잠그면서 서문경을 돌아보았다.
“덥다고?”
“네.”
“방금 전까지 비가 왔었는데?”
“추우신가요?” 서문경이 비로소 남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만, 괜찮으시면 다시 창문을 열었으면 좋겠는데요···.”
그 말에 남자가 아무 대꾸 없이 척척척 걸어와 서문경의 앞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것을 본 서문경이 느릿하게 눈만 깜빡이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남자가 손을 뻗어 서문경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헤치고 이마에 손바닥을 짚었다. 곧바로 남자의 얼굴이 구겨졌다.
“역시 열이 있군. ···어쩐지 좀 이상하다 싶었더니.”
“열?”
“창문을 열어 놓고 자니까 당연히 감기가 걸리지. 왜 이렇게 사람이 부주의해?”
“자려고 했던 게 아니라···.” 웅얼웅얼 변명하던 서문경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왜?’, 남자가 묻자 서문경이 보통 때의 그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순순한 어조로 대답했다. “혹시 예전에도 이렇게 혼났을까 싶어서···.”
“예전?”
“아니요···. 기억이 난 게 아니라 그냥···, 부모님이나 형제가 있었으면 그랬을까 싶어서···.”
우물우물 대꾸하는 서문경의 머리가 자꾸만 아래로 내려갔다. 열이 한껏 오른 그의 이마를 짚고 있던 남자의 손이 서문경의 동그란 뒤통수로 옮겨갔다. 뒤통수에 닿은 커다란 남자의 손은 그저 얹혀 있기만 할 뿐,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왠지 그 손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처럼 느껴져서 서문경은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상냥한 손끝과는 달리 정작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냉정하다 못해 잔인했다.
“그딴 일은 영원히 기억 못하는 편이 좋을 걸세.”
점점 나른하게 내려가던 서문경의 눈꺼풀이 번쩍 뜨였다. 놀란 서문경의 얼굴을 보고 남자가 쐐기를 박았다.
“기억해 봐야 자네 앞날에 걸림돌이 될 뿐이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아닌가?” 서문경의 항의에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 “제 아무리 애틋하고 그리운 기억이래도 그 뿐. 과거는 과거에 불과할 뿐이네. 그러나 자꾸만 생각이 나 앞으로 걸을 수도 없다손 치면 그것은 추억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망치는 덫일세. 계속 사람의 덜미를 잡는 추억이 무슨 추억인가.”
남자가 경멸하는 투로 덧붙였다. 저주지. 그 냉소적인 태도에 일순 압도된 서문경이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눈빛을 굳힌 채, 입을 굳게 다물어버렸다. 그런 서문경에게서 손을 거두고 물러서며 남자가 말을 이었다.
“앞으로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말게. 자네에게 해만 될 뿐이니.”
“하지만 저는···.”
“기억을 잃은 것은 오히려 축복이야.”
그래도 항변하려는 서문경을 완전히 떨쳐 내려는 듯 남자가 충동적으로 내뱉었다가, 이윽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잘 생긴 눈매를 구기고 몸을 슬쩍 뒤로 물리는 모습에서 실언을 했다고 생각하는 기색이 묻어났다. 그러나 온 몸에 열이 올라 몽롱해져 있던 서문경은 미처 그 기색을 눈치 채지 못했다. 춤을 추듯이 일렁거리는 시야를 가리려 눈가에 손바닥을 덮으면서 서문경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저는···.’ 방금 전과 어조 하나 달라지지 않고 같은 말에 남자가 짜증스런 표정을 지었다가 서문경이 하고 있는 꼴을 보고 멈칫했다. 그 틈을 타 서문경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저는 필요합니다.” 서문경이 중얼거리며 손을 이마로 옮겼다. 이상한 일이다. 조금도 뜨겁지 않은데, 왜 이렇게 어지러울까. 마치 발가락 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물처럼 일렁거리는 불을 안고 있는 것 같은 기분···. “덫이라면 오히려 좋을 지도요···. 발목을 물고 놓아주지 않을 테니까. 지금 이대로는 떠내려 갈 것 같아요.”
“떠내려간다고?”
“아니면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리거나.”
“···어째서?”
서문경이 스르륵 시선을 돌렸다. 남자가 그 시선을 좇아 움직였다. 남자의 얼굴에 곧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서문경이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허공(虛空).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없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공간. 그러나 서문경은 그곳에 뭔가가 있다는 듯이 굴고 있었다.
서문경이 느릿하게 대답했다.
“이유가 없잖아요.”
잠시의 침묵이 흐른 뒤에야 남자는 번뜩 깨달았다. 자신이 조금 전 했던 물음에 대한 대답이었다. 이상해. 반응이 너무 느리다. 하고 생각하며 남자가 서문경의 얼굴을 살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이렇게 긴 시간을 들여 얼굴을 살피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남자는 비로소 눈치 챘다.
“너···!”
“여기에는 제가 있어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여기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여기에 얽힌 기억도, 애정도 없어요. 나를 원하는 사람도 없고, 나를 친근하게 여기는 사람도 없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도 없어. 나도 마찬가지고. 여기에는 내 역사도, 내 현재도 없어요.”
서문경은 무섭도록 초췌해져 있었다. 처음 봤을 때에는 통통하게 살이 올라 있었던 볼이 어느새 푹 공기가 빠진 것처럼 꺼져 있었다. 낭만적인 윤기가 흐르던 바닷가의 백사(白沙) 같던 살갗이 메마른 바람에 날리는 사막의 모래처럼 빛을 잃고 있었다. 어째서 눈치 채지 못했지? 남자는, 조원은 몹시 당황했다. 아마도 예기(銳氣)로 형형하게 빛을 발하던 눈빛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열 때문에 그 눈빛조차 흐려진 뒤에 나타난 서문경의 알몸은 저 꼴이었다.
아니다. 조원은 곧바로 부정했다. 그것은 핑계였다. 서문경의 말이 옳았다. 서문경의 눈빛이 얼마나 날카로웠던, 그 혀가 얼마나 뾰족했건 간에 저리 벌거벗은 것을 보니 이제야 알겠다. 모두가 허세였다. 그 지독하던 가시들도, 그래봐야 아직 어린 고슴도치가 세운 가시에 불과했다. 만져봤다면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 가시가 덜 여물었다는 사실 정도는.
하지만 서문경의 말대로 여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신이 다치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서문경의 가시를 헤집어 볼 사람은. 가시를 헤쳐 얻는 타격이 기껏 해봐야 긁히는 것이 불과한 생채기일지라도, 그 작은 정성조차 들일 가치도 이유도 서문경에게는 없었으니까. 이곳의 그 누구도 서문경과는 얽혀 있지 않았다. 혈연도, 지연도, 벗으로서의 인연도, ···모든 것이 무(無).
손님. 서문경은 여기에서 완벽한 손님에 불과했다.
그래서,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이제 여기서 밖에 살 수 없다는 걸 아는데···.” 서문경이 다시 느릿하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열에 들떠 중얼거리는 서문경의 힘없는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바람에 실려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알아요, 나도 아는데. 이제 돌아갈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아는데. 그런데 잘 안 돼요. 아무리 해도.”
잠시 서문경의 말이 끊겼다. 서문경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서도 주체할 수 없는 짜증과 자괴감이 솟구쳤다. 서문경이 거칠게 내뱉었다.
“저는 여기가 싫습니다.” 처음에는 중얼거림으로 시작되었던 것이 점점 더 언성이 높아졌다. 머리끝까지 확 솟구친 불에 서문경은 실낱같던 이성조차 흐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이미 그는 고함을 내지르고 있었다. 서문경이 소리쳤다. “싫습니다! 여기서 살고 싶지 않아요! 왜 내가, 왜 내가 여기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여기 있어야 할 이유가 없는데, 왜, 왜 내가, 왜 하필 내가! 내가 왜 여기에 있어야 하는데요?! 모르겠어요! 왜! 대체 왜!”
겨우 짓누르고 있었던 진심이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미친 유령처럼 온 몸을 맴돌았다. 유령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피눈물을 흘리며 유령이 절규했다.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여기는 외로워. 싫어, 여기는 고독해. 싫어, 여기는 비참해. 여기가 싫어. 여기서 살고 싶지 않아! 돌려보내 줘, 돌려보내 줘, 내가 원래 있어야 하는 곳으로 돌려보내줘! 돌려줘, 돌려 달라고! 내 것을 돌려줘! 내 기억, 내 고향, 내 부모님, 내 친구들, 원래 내 것이었잖아! 돌려줘! 돌려줘! 돌려달라고!
“알아요, 나도 바보는 아니니까, 안다고요! 돌아갈 방법이 없다는 것 정도는, 여기서 뿌리 내리고 살아야 한다는 것 정도는, 꿈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어떻게 모르겠어요?”
바닥에 날을 세운 서문경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돌출된 손가락뼈가 마치 날개를 잘린 새의 상처를 보는 것 같았다. 쾅, 쾅쾅, 쾅쾅쾅! 그 때 서문경이 갑자기 미친 듯이 바닥을 때리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조원이 서문경의 팔을 붙잡았다.
“자네!”
“당신도 알잖아요!” 서문경이 매몰차게 조원의 팔을 쳐냈다. 쾅! 서문경의 주먹이 바닥을 때렸다. 그와 동시에 서문경이 부르짖었다. “내가, 내가, 당신도···!”
조원은 말을 잃고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없던 어두운 천장에서, 새하얀 꽃송이들이 함박눈처럼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힘 따위 우리 세상에서는 없잖아···!”
천천히, 아주 천천히 꽃비가 내렸다. 꽃송이들이 허공에서 뱅그르르 바람개비처럼 돌면서 서서히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나 떨어진 꽃송이들은 결코 바닥에 쌓이지 않았다. 조원은 손을 움찔했다. 그의 손등 위에 내려앉았던 꽃잎은 그러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조원은 무심코 그 꽃에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보드라운 꽃잎이 그대로 느껴졌다. 하지만 조원은 곧 깨달았다. 향기가 없다. 이 꽃에는 아주 희미한 향기조차도 없었다.
환상(幻想). 조원의 표정이 굳었다. 비록 환상이지만 만질 수 있는 꽃, 그러나 향기는 없는. 이런 것은 환상이라고 말할 수도, 실상(實相)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이게 대체 뭘 의미하는 거지?
그러나 생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내리던 환상이 바뀌었다. 꿀을 탄 것처럼 맑은 햇빛이 온 방 안을 채웠다. 고운 햇볕이 내리쬐는 가운데 이번에는 정말로 새하얀 눈이 내렸다. 그 눈이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빗방울로 변했다. 반짝거리는 여우비에 즐거운 웃음소리가 섞였다. 그 웃음소리가 황홀한 피아노 소리로 변했다. 각색의 열대어가 튀어 오르는 듯하던 피아노 소리가 나직한 콧노래로 변했다···.
뒷머리를 벽에 댄 채로 서문경이 중얼거렸다.
“기억하거든요···.” 내가 살던 세상에 있던, 수 없이 많은 보물들을. 내게 소중하지 않았던 것들조차 이리도 아름답고 그리운데. “그런데 내가 잊어버린 것들은.”
얼마나 애틋하고 고울까.
햇빛이 만든 그물에 걸려 있던 찬란한 노래들이, 춤추며 노래하던 빗방울들이, 아이의 웃음소리를 감싸던 눈송이가 천천히 사라졌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쇠멸한 문명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다시 어두운 방 안에 버려진 듯 앉아 있는 서문경만이 남았다. 방금 전까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화미(華美) 색채와 빛과 대비되어서인지, 홀로 남아 있는 그의 모습이 이전보다 더더욱 초라하고 우울했다.
서문경은 겨우 조금 진정된 것처럼 보였다. 이마에 손을 짚은 그가 나직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미 놓쳤으니까, 여기에 뿌리를 내려야 하는 게 현실이니까 노력했어요. 노력했다고 생각했는데.”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모르겠어요.”
“모르겠다고?”
“네. 제가 정말로 노력을 한 건지. 내심 이건 현실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행동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또.”
“또···?”
“그 노력이라는 것이 제대로 된 것이었는지,” 하고 말하던 서문경이 불현듯 말을 멈추고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서서히 익어가는 듯했던 정신이 갑자기 또릿해진 때문이었다. 정신을 차린 순간 수치심과 함께 낭패감이 일었다.
갑자기 입을 다문 서문경을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조원이, 이윽고 서문경이 어째서 그랬는지를 알아챘는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웃는지 찡그리는지 모를, 애매한 미소였다.
“겨우 정신을 차렸나.”
“제가 왜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서문경이 말하다 말고 멈칫해서 조원 쪽을 올려다보았다.
“뭐하는 겁니까?”
“열이 있어.”
“잠깐만,”
“일단 눕게. 제대로 처치하지 않으면 크게 앓을 걸세.”
“대체 이게 무슨···,” 다짜고짜 자신을 눕히려고 드는 조원을 밀어내며 서문경이 다급히 외쳤다. “당신 대체 왜 온 겁니까?”
서문경이 그렇게 따져 묻고 나서야 조원의 손이 멈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조원은 열이 올라 지척도 구분하기 힘든 지경인 서문경을 억지로 요 위에 눕히고 그 위에 두툼한 솜이불까지 두 채로 올려놓았다. 희미한 국화 향기가 풍겨 오는 베개가 머리와 목 사이로 들어오자 겨우 버티고 있던 정신이 아찔해졌다. 화선지에 먹물이 번지는 것 마냥 시야가 번졌다. 자신도 모르게 색색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보게.’ 하며 조원이 타박을 하고 나서야 서문경은 그것을 깨달았다.
“대체 왜 여기에···,”
“됐네. 나중에 함세.”
“잠깐,”
“제정신도 아닌 사람을 상대를 뭘 하겠나.”
“누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겁니까.”
“몇 번이나 말해야 되겠나, 자네 지금 열이 높아.” 조원의 어조가 벨 듯이 단호해졌다. “며칠간이나 창문을 열어 놓고 비를 맞았으니 몸이 제 상태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서문경의 시야가 새까맣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조원의 손이 자신의 눈을 덮은 것이다. 서문경은 무심코 따라서 눈을 감아버렸다. 어둠이 더 짙어졌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불안할 만도 한데, 이상하게도 불안이 가라앉았다. 감은 눈꺼풀 위에 타인의 체온이 느껴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조원이 어르듯 말했다.
“여기 있을 테니 안심하고 자게.”
“누가····,”
“그래. 나 같은 인간이 있어봐야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마는, 그래도 있을 테니까.”
서문경은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고요히 가라앉았다. 조원은 약속을 지킬 생각인 것 같았다. 희미하게 드리운 타인의 그림자가 자신의 곁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느끼고 서문경은 입술을 조금 달싹였다. 옆에 있어 달라는 부탁 따위 하지 않았는데. 고집스럽게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 의식이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끝없는 나락이 아니라, 마치 구름에 잠기는 것처럼 부드럽게.
그러나 그 구름 속에는 어둠이 있었다. 그림자가 있었다. 근심이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서문경이, 잠들기 직전 문득 생각난 것처럼 중얼거렸다.
“지금 폐하는···.”
조원이 무어라 대답을 했지만 서문경은 그것을 듣지 못했다. 조용히 침잠하던 의식이 완전히 새카맣게 변했다. 의식의 끝자락에서, 누군가의 발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지만 어쩌면 착각인 지도 모른다.
**
그 남자는 짐승이라기에는 오히려 유령에 가까웠다. 그가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것은 기척 뿐, 그는 작은 발걸음 소리조차도 이끌고 오지 않았다. 그림자조차도 없었다. 그림자가 없는 것은 방 안이 짙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이성과는 달리 본능은 미친 소리를 지껄여댔다.
괴물! 괴물이 이 방 안의 그림자를 삼켜버렸어!
그래. 방 안의 어둠이 그의 그림자를 삼킨 것이 아니라, 그의 그림자가 방 안의 어둠을 삼킨 것처럼 느껴졌다. 그 정도로 그 소리 없는 남자는 위협적이었다. 사박사박. 마치 함박눈이 쌓이는 것 같은 실체 없는 소리를 내면서 남자가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다가왔다. 바닥에 깔린 화문석에 남자의 긴 옷자락이 끌리는 소리였다.
그 소리가 끊길 듯 이어지다가, 불현듯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가, 놀래듯 갑자기 나타났다. 사각사각, 사각사각사각. 그 소리가 벌레처럼 그의 신경을 갉아먹었다. 비명을 지르고 싶어졌다. 그래서 결국 그는, 끝까지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어버렸다.
“여전하십니다.” 그 목소리가 너무 날카로워서, 그는 말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어깨를 조금 떨었다. 그러나 놀란 뇌와 별개로, 이미 그의 혀는 버릇대로 빈정거리는 말을 지껄여대고 있었다. “그 악취미는.”
“그대가.”
사각. 비로소 옷자락이 화문석을 스치는 소리가 멈췄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고작 몇 뼘 위를 올려다보는 것에 불과한데도, 딱딱하게 굳은 그의 목은 잘 보이지도 않을 만치 드높은 곳을 올려다보는 것처럼 바짝 치켜들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그 남자가 소리 없이 웃었다. 빛을 등진 탓에 그 남자의 얼굴에는 온통 그림자가 져 있었는데도 그는 그 남자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참으로 괴이한 일.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조차 새삼스러운 일이었다.
그 남자가 말을 이었다.
“이 정도 일로 겁이라도 집어 먹는 작자였던가.”
“어이쿠, 무슨 말씀을.”
‘그’는 필사적으로 너스레를 떨었다. 등에서 삐죽 식은땀이 솟았다. 능글맞게 웃고 있는 낯짝을 보았는지, 아니면 식은땀이 솟고 있는 내심을 읽었는지 알 수 없는 모호한 눈빛으로 남자는 시선을 돌렸다. 남자를 따라 곁눈질을 한 그의 표정이 희미하게나마 굳었다. 그가 자제력이 잃고 있다는 증거인 동시에, 아직도 남자의 지배력이 건재하다는 증거였다. 남자가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다르지.”
주어도 없이 툭 내던지듯 한 말이었건만 그는 남자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지금은 그럴 지도 모르지요.”
“지금은?”
남자가 혼잣말을 하듯이 중얼거렸다. 남자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폭포수 같은 머리카락이 마른 어깨를 흘러 넘쳤다. 낮달처럼 해쓱한 창안(蒼顔)과 때때로 너울거리는 하얀 옷자락이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유령화(幽靈火)를 권속처럼 거느린 죽음의 신 같았다. 그 섬뜩하면서도 황홀한 모습에 일순 시선을 빼앗겼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는 이를 악물고 대꾸했다.
“변할 겁니다.”
“변한다···.”
“이 아이도 당신을 버릴 겁니다.”
“버린다.” 아이처럼 천진하게 ‘그’의 말을 반복한 남자가, 어느 순간 입가에 짙은 웃음을 머금었다. 활짝 핀 꽃이나 벌어진 과일에서나 날 법한 농염한 향이 훅 풍겨오는 것 같았다. “그대가 그랬던 것처럼?”
꿀꺽. 마른침이 넘어간다. 일순 풍겨온 요염한 향에 동한 것 따위가 아니었다. 뼈까지 희게 드러난 시체에서 꽃이 피었다. 그 꽃이 얼마나 탐스럽고 그 향이 얼마나 황홀하든, 마음이 동할 리가 없다. 도리어 뒷덜미에 시퍼런 칼날을 대고 있는 듯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마른침이 식도를 타고 나려가며 메마른 목구멍을 마구 난도질했다.
잔뜩 굳어 대답조차 없는 그를, 남자가 채근하였다.
“아닌가. 짐의 말에 무슨 어폐가 있던가.”
“아닙니다. 모두 사실이지요.”
“그런데도 이 아이가 그대처럼 짐을 버리고 떠날 거라···.” 사각사각사각. 다시, 예의 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남자가 입 속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방 안을 거닐기 시작한 것이다. “짐을 버리고.”
우뚝. 갑자기 소리가 멎었다. 남자는 웃고 있었다.
“이 아이는 그대가 아니야.”
남자의 시선이 서문경에게 내리꽂혀 있다. 그는 돌아보지 않았지만, 자신이 뒤에 숨기듯이 하고 있는 이가 무슨 표정을 짓고,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익히 보아 알고 있었다. 열꽃이 피어 복사꽃마냥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 하얗게 부르튼 입술에서는 색색 더운 숨이 새어나오고 때때로 감은 눈꺼풀이 떨잠의 나비마냥 파르르 떨릴 것이다. 갑옷처럼 두르고 있던 표독스런 표정이 사라진 때문인지 발간 그의 얼굴은 아직 젊다는 말보다는 어리다는 말이 어울렸다. 그 애틋한 표정과 가엾은 얼굴.
그는 말했다.
“압니다.”
“그런데도, 이 아이가 그대처럼 변할 것이라고?”
“변할 겁니다.” 그는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순간 남자의 눈매가 꿈틀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시선을 돌리는 대신, 도리어 노한 기색이 역력한 남자의 눈에 똑바로 시선을 맞추었다. “폐하께옵서 변하지 않으실 터이니.”
아닙니까. 그가 묻는 말에 남자는 침묵했다. 그는 다시금 물었다.
“조금이라도 변하시었습니까.”
제가 벗으로서 폐하의 곁에 있었을 그 때와.
“아니지 않습니까.” 침묵으로서 대답을 얻은 그가 이제야 겨우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독약보다도 쓴 고소(苦笑)였다. “폐하께옵서 계속 한 자리에 머물러 계시는 한, 다른 이들이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남자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허나 그대들과 저 아이는 처지가 달라.”
“다르지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가.”
그는 무심결에 흘깃 뒤를 돌아보았다.
“기억이 없으니 원망(願望)조차 희미하리라고 단정 지었사옵니다. 허나.”
“허나?”
“깊이 뿌리 내린 나무는, 쉽사리 제 땅을 떠날 수 없음입니다.”
아리송한 비유였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부러 앞뒤를 모두 잘라먹고 선문답을 한 그가, 시선을 발치로 내렸다. 사람 머리만한 모란이 핀 화문석 등메에서는 향기로운 기름내가 났다. 그 향내를 맡고 나서야 그는 남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허나 그것은 자신이 잘나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원숭이처럼 현명하고 뱀처럼 교활한 그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저, 저 괴물 같은 남자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덕이었다.
그 때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저 이는 나를 버리지 않겠노라고 말했다.”
어린애 같은 말투라고 ‘그’는 생각했다.
“아니, 선택권은 짐에게 있노라고 말했었다.”
방금의 그 중얼거림도 마찬가지. 그러나 무엇 때문인지 이번에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남자는 더 이상 자신 쪽을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그 남자의 시선이 못 박힌 곳은, 당연히 자신의 등 뒤. 그 청년이 누워 있는 곳이었다. 그 남자가 말했다.
“그러니 그대 때와는 경우가 달라. 혹여 저 이가 그대처럼 마음이 변하여 짐의 곁을 떠나려 한다고 해도-,” 거기까지 말한 남자가 잠시 입을 닫았다가 바로 말을 이었다. 그 찰나의 침묵에 이상하게 숨이 막혔다. “그리 녹록하게는 안 될 일이지.”
“잠깐.”
맹수의 그림자가 아이의 머리에 이를 세운 것을 목격한 듯했다. 확실한 실체조차 없는 위기감에 쫓겨 ‘그’가 황급히 소리쳤다. 말해 보라는 듯 남자가 눈짓을 했다.
“어째서···, 대체 뭘 하시려는 겁니까.”
“그대가 틀렸다.” 그 남자가 거대한 호수처럼 심상한 어조로 선고했다. “이전과는 다르다. 그 당시와는 달라.”
“안 됩니다!”
“이해할 수 없군.”
남자가 그의 말허리를 끊었다.
“정말 변하지 않은 이는 그대다. 이전이나 지금이나 그대가 원하는 것은 오롯이 하나 뿐. 아닌가.”
아니면, 그대의 소망이 변했는가?
“그대에게 중요한 것은 단 하나 뿐, 아닌가?”
“맞···,” 그가 더듬거리며 대꾸했다. 굳이 물을 필요도 없는 물음에, 잠시 생각할 이유도 없는 대답이었다. 당연한 것. 절대로 변치 않는 것. “맞습니다.”
내게 중요한 것은 그것, 단 하나 뿐. 그 사실만은 절대 변치 않는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리도 혀가 움직이지 않는 것인가.
남자의 냉담한 시선이 자신을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 찬 시선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머금고 있다. 남자가 배부른 짐승이 느긋하게 입맛을 다시는 것처럼 말하였다.
“그렇다면 개의치 말라. 짐이 무슨 생각을 하든, 무엇을 하려 들든, 무엇을 하든.”
“그러나···,”
“원하는 것이 있다면 한 눈 팔지 말라. 어리석은 일이다. 잠시 곁눈질을 하는 사이에, 그대가 진짜 바라는 것을 놓치게 될지도 모르니.”
그는 직감했다. 이것은 경고다.
“또한.” 화제가 바뀌었다. 남자가 몸을 돌렸다. 장지문 너머에서 들어오는 불빛이 섬세한 옆얼굴에 어른거려, 겨우 육안으로 남자의 표정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눈이 밝아짐과 동시에 오히려 머릿속은 안개가 낀 듯 흐려진 기분이 들었다. 남자가 그에게 냉담한 시선을 던지면서 말을 이었다. “참으로 우습구나. 그대는 지금 순수한 의도로 이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일순 말문이 막혔다. 남자가 계속해서 몰아붙였다.
“그런 그대가, 짐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 그대는 그대의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누구라도 버리고, 그 누구라도 이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다. 짐이 변치 않는다고. 그 말을 그대로 돌려주마. 짐이 그러하다면, 그대도 그러하다. 짐이 변치 않으니 그대가 변한 것이라고. 아니지, 그대는 변한 것이 아니다. 그대는 항상 그대로였다. 예전에도, 지금에도, 그리고 끝까지 그렇겠지.”
“······.”
“그런 그대가 저 아이를 염려하는 척 하는 것은 그 아이를 기만하는 짓이다.”
“그래서, 이대로 범의 아가리에 들어가는 꼴을 보고 있으라는 말씀이십니까?”
“참으로 알량한 동정심.” 남자가 그를 향해 몸을 훽 돌렸다. “언제든 등을 돌릴 수 있는 동정은 차라리 없는 것보다 못함이야. 아니지, 그 정도가 아니야. 언제든 등을 돌릴 수 있는 동정이 아니라 언제든 울고 웃는 이의 배를 찌를 수 있는 동정이지!”
아닌가? 남자가 보란 듯 서서히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물어왔다.
“당장 이 자리에서 짐이 그대의 바람을 이루어 주겠다고 확언한다면.”
“폐하를 위하여 지금껏 따른 주인의 다리를 물겠지요.” 그러나. 그가 남자를 마주보며 빙긋이 웃었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앞으로 여덟 달 남았습니다.”
남자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곧바로 알아챈 듯하였다. 남자가 이기죽거렸다.
“그래, 와룡(臥龍)께서는 언제쯤 기침하실 셈이라 하시던가? 짐의 탄일까지 계속 해타(懈惰: 게으름)를 부리시려고?”
“체제공은 진짜 용입니다.”
“짐이 무어라 했나. 그저 그 ‘진짜’ 용께서 몸이 무거워 일어나시기가 힘드신가 하여 염려한 것뿐이지.” 킬킬 마른기침소리를 섞어 웃은 남자가 얄밉게 덧붙였다. “짐의 성후(聖侯)가 몹시 미령하여 자리보전하고 있는 것조차 힘겨우니 혹여 염락께서 용께 최대한 서둘러 주십사 말씀 전해 드릴 수 있겠소?”
“그는!”
조원이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그는 진짜 용입니다. 그가 제 기질을 발하지 않고 있는 것도 모두가 깊은 뜻이 있기 때문이오니 황상께서는 부디 근심 마르소서.”
“깊은 뜻이라.”
하고 중얼거리며 마른 턱을 쓰다듬고 있는 황제를 노려보며 조원이 나직한 소리로 경고했다.
“그리고, 소인이 알기로 폐하께서 근심하셔야 될 일은 따로 있는 것으로 아옵니다.”
그 말에 황제가 입가에 조소(嘲笑)를 흘렸다.
“굳이 그래야 할지 모르겠군.”
“그러셔야 합니다.” 단호한 어조에 황제가 일순 이끌리듯 자신에게 시선을 던지는 것이 느껴졌다. 조원이 일부러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어 말했다. “폐하께옵서도 아시듯 화살에는 눈이 없음입니다. 그러니 눈 먼 독시(毒矢)의 화살촉이 누구를 향할지, 세상의 누가 알겠사옵니까?”
필히 계구(戒懼)하셔야 할 것이옵니다. 나직이 끄는 말끝이 마치 어둠 속으로 꼬리를 끌고 사라지는 독뱀과 같았다. 조원은 웃었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 황제의 고동치는 뇌와 심장을, 자신의 경고가 실 같이 가느다란 독뱀이 되어 휘감고 있는 것을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