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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안에 우회(憂懷)가 가득하십니다.”
줄곧 체제공 서현의 곁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천견 최유가 그렇게 말문을 연 것은 시간이 막 술시(戌時)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요즈음 들어 제법 낮이 길어졌다고는 하지만, 이미 해는 타고 남은 짚처럼 거무스름한 간곡(澗谷) 너머로 떨어진 지가 오래였다. 해가 떨어지고 방 안까지 긴 땅거미가 졌으니 당연히 등불을 밝혀야 할 터인데, 지나치게 침중한 분위기 탓에 가련한 시비(侍婢)가 차마 점등(點燈)을 해야 할 시간임을 고하지 못하고 장지문 바깥을 초조히 서성거렸다. 점점이 밝은 등이 켜진 고택 안에 체제공과 최유 등이 들어 있는 외실(外室)만이 홀로 쓸쓸하였다. 마치 황홀한 꽃등 사이에 초라히 불 꺼진 촉화(燭火)가 서 있는 듯한 고택의 풍광처럼, 그 방 안의 분위기도 실로 적적하며 극중하였다.
불을 들고 쥐걸음만 쳐대는 시비가 가여웠던지, 아니면 단순히 입이 간지러웠던 것인지 염락 조원이 불쑥 입을 열었다.
“이러다 구순에 녹이라도 슬겠습니다. 체제공이나 천견이나, 구중(口中)에 혀 대신 강철이라도 들어 있소이까?”
“염락, 말을 삼가게.”
“천견께서도 참 딱하십니다.” 천견 최유의 꾸중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염락 조원이 되레 혀를 찼다. 그 말에 최유가 반사적으로 눈살을 구기는데, 조원이 서현의 모습을 흘끔 눈짓하더니 말을 이었다. “이렇게라도 입을 놀려야 체제공께서 한 숨 돌릴 겨를이 생기시지요. 일일 내도록 저리 근심에 잠겨 계시는데 천견께서는 언제까지 구경만 하고 계실 셈입니까?”
그 말에 최유가 아차하는 표정을 짓는데, 서현의 나직한 목소리가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가당찮군.”
“공을 이리도 애틋하게 생각하는 소인에게 너무 매정한 언사 아니십니까?”
“입 안에 그건 뭔가.”
서현의 지적에 조원이 씩 웃었고, 최유는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조원이 자신 몰래 두레사당(:알사탕)을 우물거리고 있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던 탓이었다. 방정치 못한 행동을 꾸짖는 최유의 눈초리를 조원이 모른 척 하고는, 대신 서현을 향해 입에 발린 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실로 놀랍습니다. 주위 개의치 않으시고 심사(深思)와 묵도에 잠겨 계시던 분께서 언제 그런 것은 다 보셨답니까?”
“염락, 자네.”
“그렇지 않습니까, 천견?” 주의를 주려는 최유의 말허리를 뎅겅 끊으며 조원이 훽 그 편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어찌하여 체제공의 낯빛이 저리 어두우신지 천견은 알고 계십니까?”
그 말에 주춤한 최유가 머리를 돌려 새삼 서현의 얼굴빛을 조심스럽게 살핀 후, 결국 깊은 염려를 감추지 못하고 여쭈었다.
“옥안에 우회가 가득하십니다. 옥보방신(玉步芳身)이 상하신 것은 아닌가 심히 염려되나이다.”
“염려할 것 없다.”
“돌려서 말씀 올릴 필요 없습니다.” 그 때 조원이 불쑥 끼어들어 말했다. “체제공, 대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저희에게도 말씀해 주시지요.”
“염락! 체제공께 그것이 무슨 말버릇인가!”
오만방자한 조원의 행동에 기겁한 최유가 당장 목소리를 높였지만 정작 꾸지람을 들은 조원은 반성의 빛은커녕 코웃음을 쳤을 뿐이었다. 조원이 성난 최유의 팔을 손등으로 슥 밀며 쏘아붙였다.
“언제 한 번 말씀 드리려 했는데 마침 잘 되었소. 천견께서는 뭔가를 착각하고 계신 것 같소이다.”
“무슨 말인가?”
“염락은 아직 객(客)이로다.”
하고 대답한 것은 조원이 아니라 분명히 서현의 목소리. 멈칫한 최유가 서현 쪽을 바라보았다.
“체제공.”
“거처를 분명히 한 그대와는 상황이 다르다. 그러니 금번에는 염락이 옳다.”
그 지적에 최유도, 조원도 입을 다물었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깬 것은, 뜻밖에도 서현이었다.
“염락.”
“하문하십시오.”
상석(上席)에 앉은 서현이 입술을 다물고 말석(末席)에 방만한 자세로 걸터앉은 조원을 말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무엇을 물을 터이냐 재촉조차 하지 않고 조원은 방글방글 웃고만 있다. 그 얼굴이 사람의 얼굴 가죽이 만들어내는 표정 같지 않고 마치 이미 만들어져 있는 가면 같았다. 그러나 서현은 조원의 그 얼굴이 다른 의미로 거북살스러웠다. 그 속에 무슨 생각인지도 모를 시커먼 것을 담고 뚜껑으로만 방글방글 사람 좋게 웃고 있는 모습이 누군가를 생각나게 했다···.
서현은 물었다.
“근래에 그 자를 보았는가?”
“그 자라니요?”
“청의관 물손님 말이다.”
“아, 그 자 말입니까. 몇 번 얼굴을 본 적은 있습니다. 가까이로는, 그래, 작일에 한 번 보았더랬지요. 대연회에 대해 물었습니다. 소인도 아는 것이 빈천하여 큰 도움이 되어 주지는 못하였습니다마는.”
“금일(今日)은.”
“이미 말씀 올리지 않았습니까.”
물손님을 본 것은 작일이 마지막이었다고요, 하며 웃는 조원의 얼굴을 서현은 가만히 응시하다, 불쑥 생각난 것처럼 말을 던졌다.
“혹, 그대는 내가 무어라 하문하였는지 기억하는가.”
그 말에 조원이 새처럼 고개를 조금 옆으로 기웃 하였다가, 곧 어이쿠 하며 능청스레 제 무릎을 친다. 그가 고개를 살살 저으며 대답하였다.
“소인의 겉귀에 때라도 낀 모양입니다. 어찌 한 번에 공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이리 공을 번거롭게 하는지요. 물손님을 ‘만난’ 때가 언젠가 하문치 않으시고 그 이를 ‘본’것이 언제냐 하문하셨더랬지요. 그런데 체제공께서는 정녕 세 번째 눈이라도 있으신 겝니까? 소인이 물손님을 늘 눈여겨보고 있음은 어찌 아시는지요?”
그의 말뜻을 알아들은 천견 최유가 설핏 표정을 굳혔다.
“자네, 설마 그 자를 염탐하고 있는 겐가.”
“천견께서도 해보시렵니까. 참으로 재미있는 아이올시다. 가만히 그 아이 하는 꼴을 보고 있노라면, 따로 오락이 필요 없을 정도지요.”
“그런 말이 아니지 않는가! 어찌 그리 군자답지 못한가? 마치 간자(間者)나 할 법한 짓을 하고 있지 않은가?”
“간자라니요.” 조원이 혓바닥에 들기름이라도 바른 것 마냥 매끄럽게 반박했다. “그 이도 사실을 알고 있소이다.”
“그 이···?” 최유가 주춤했다. 귀로 듣기는 했으되, 차마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청의관 물손님 말인가? 그 자도 알고 있다고? 자네가 제 일거수일투족을 훔쳐보고 있다는 것을?”
“그렇습니다.”
서문경이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 효강 엄헌영의 귀띔 덕이라는 사실은 숨기고 조원이 대뜸 대답했다. 천견 최유의 얼굴에 혼란이 가득했다. 염락의 술법은 일백을 헤아리는 천객들 사이에서도 으뜸이거늘 그 수객이 어찌 간파를 했단 말인가, 아니, 그것보다는 그 치는 그 사실을 알고도 왜···. 생각이 뻔히 비춰 보이는 얼굴로 고뇌하던 그가, 결국 스스로는 해답을 얻지 못했는지 조원에게 물어왔다.
“역정을 내던가?”
“천만에요. 오히려 일부러 부르려 찾아다니지 않아도 되겠다 기꺼워하였소이다.”
최유의 얼굴이 돌덩이마냥 굳었다. 간자처럼 남의 뒤나 캐고 다니는 조원이나, 그것을 알면서도 노여워하기는커녕 되레 그 점을 기껍게 여겼다는 청의관 물손님이나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한 번 조원과 맞닥뜨릴 때마다 끓어오르는 살심(殺心)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느라 고생하는 서문경이 알면 기겁을 하고 날뛸 만한 오해였다.
조원이 거짓은 아니되 진실을 뺀 말로 최유를 혼란스럽게 하는 꼴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서현이 조용히 입을 연 것은 그 때였다.
“어째선가.”
“예?”
조원이 예의 그 웃는 얼굴 그대로 서현을 돌아보고 말했다, ‘무슨 말씀이시온지?’
“어찌하여 그 아이를 그토록 눈여겨보고 있는 건가, 그대는.”
그 말에 조원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대신 서현을 가만히 응시하였다. 어둑한 방 안에서 장지문 밖에서 비추어 오는 빛을 받은 때문인지 웃는 모양 그대로 가늘게 뜬 눈에서 시선이 마치 칼날에 머문 달빛처럼 예리하게 번뜩인다. 조원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움직임이 지나치게 느릿해서, 천천히 떨어지는 그의 입술이 원래는 하나였던 것을 억지로 떼어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 이를 보고 있으면 참으로 마음이 유쾌해집디다. 단언컨대 근래에는 제일가는 재밋거리라고 할 수 있지요. 체제공께서도 마음이 우울하여 세상만사가 다 귀찮으실 때면 그 아이에게 한 번 농이나 걸어 보시지요. 망둥이 꼬리에 쳐 맞은 것 마냥 정신이 쏙 빠져서 세상 모든 근심이 훽 날아가실 겝니다.”
“비록 지금은 그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서현의 나직하지만 날카로운 말이 조원의 장황한 말을 끊었다. 조원이 바라보자, 서현도 피하지 않고 그를 응시했다. 서현이 단언했다. “시작은 아니었겠지.”
“······.”
“뉘의 발상인가. 그대인가? 아니면.”
“당연히 소인이지요.”
서현이 반사적으로 입술을 다물자, 조원이 두 눈을 부드럽게 휘면서 말을 이었다. ‘소인의 행동이니, 그 발상 또한 소인의 것이겠지요.’, 그 목소리와 어투가 마치 토라진 아이를 어르는 것과 같았다.
“아니면, 뉘라고 생각하셨습니까?”
따로 뇌리에 둔 사람이라도 있으신지요? 하는 물음에 서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서현은 조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방이 어둡군.”
“벌써 낙일(落日)한 지도 오래입니다. 불을 밝힐까요?”
“그리하게.”
조원이 시비에게 불을 받아 오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최유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제가···.”
“천견.”
그러나 최유가 조원을 붙잡기 직전에 서현이 그를 불렀다. 최유가 조원에게 향하고 있던 몸을 틀어 서현을 바라보았다. 서현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대는 차를 내오도록 하라.”
“그리하시면 어떤 차를?”
하고 물으면서 최유가 서현에게 다가갔다. 서현의 목소리가 너무도 나직하여 귀에 잘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서현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릴 정도로 가까이 다가간 최유가 막 두 무릎을 바닥에 꿇었을 때, 조원이 막 문을 열고 있는지 미닫이문이 문홈을 따라 좌르르 흘러가는 소리와 함께 어둡던 방이 약간 더 밝아졌다.
그 때였다.
“교가(家)에서는 별 소식이 없는가?”
“예?” 뜻밖의 물음에 최유가 당황하여 반문했다가, 곧바로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우직하게 대답하였다. “상서 이부 차관 교해근은 그의 말녀(末女: 막내딸)가 당한 수모에 격분하여 가항(街巷)에서 공공연히 황제의 이름을 입에 올리며 길길이 날뛰었다고 합니다. 또한 섣불리 일을 벌인 근장상장군에게도 당분간 본가에 발을 들이지 말기를 명하였다고 합니다. 감히 체제공에게까지 불쾌한 심정을 토로하지는 못하였으나 단단히 심기가 틀어진 것만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교산(喬山)의 옥화(玉華)로도 성심을 흔들지는 못함인가.”
잠시 생각에 잠겼던 서현이 또 다른 이의 이름을 꺼냈다.
“유현의 소매(小妹)는.”
“하명하시오면 바로 유가를 찾아 명을 전하기는 하겠사옵니다마는···.”
서현이 최유의 반신반의하는 얼굴을 보고 물었다.
“달리 생각이 있는가.”
“교산의 옥화로 이름 높은 미녀에게도 눈길 한 번 주시지 않는 것이나, 청의관 수객을 지나치게 기꺼워하시는 것으로 보아 황제께서는.”
“가인(佳人)들보다는 미동(美童)을 들이는 것이 낫다는 건가.”
혼잣말을 하듯이 입 속으로 중얼거린 서현이, 불현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은 탐탁지 않군. 하지만 필요하다면···.”
체제공. 시비에게 불을 받아 든 조원이 서현을 부르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재빨리 입을 다문 서현이, 더더욱 목소리를 낮춰 최유에게 일렀다.
“염락에게서 한 시도 눈을 떼지 말라.”
“염락···, 에게서 말입니까?”
보일 듯 말 듯하게 고개를 주억거린 서현은 조원에게 시선을 돌리면서 재빨리 덧붙였다, ‘또한 신여(迅輿)에게 일러 천추전에 바칠만한 미동을 물색하도록 하라.’ 그 말에는 어지간히 석상 같은 최유조차도 저절로 얼굴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신여란 상서원부사 조문명을 이름이었다. 그가 개입되면 내명부를 총괄하는 태황태후전에 이 말이 전해지지 않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황제의 침방에 바칠 이를 이전처럼 은밀하게가 아니라, 공식화 하시겠다는 말씀이 아닌가.
그러나 최유가 서현에게 이유를 물을 틈 따위는 없었다. 서현의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 안에 불을 밝힌 조원이 서현과 최유가 있는 편으로 다가오면서 물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말씀을 그리 재미지게 하십니까?”
“그대는 황아차(黃芽茶)로 괜찮은가.”
“좋지요. 몽정황아가 날에 어울릴 것 같습니다. 천견께서는 어떠십니까?”
조원이 돌아보며 묻는 말에, 굳은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던 최유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차실(茶室)에 이르고 오겠네.”
“그리하십시오.” 하고 웃으며 대답한 조원이, 최유가 자리를 털고 밖으로 나가자 서현을 향해 고개를 모로 기웃했다. “묘한 일이군요. 체제공을 두고 어찌 제게 저런 말씀을 하신 답니까?”
“그런가.”
서현이 가볍게 대꾸하며, 반쯤 열어젖힌 월창(月窓) 너머로 보이는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이끌린 듯 덩달아 창밖을 올려다본 조원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구름이···.
“구름이 짙습니다.”
곧 비가 올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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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도 황제는 침전도, 정전(正殿)도 아닌 청의관에 들어 앉아 있었다. 주인 없이 불청객만 덜렁 하나 들어 앉아 있는 호박방 안이 불을 밝게 밝혀 놓았는데도 한을 품고 우는 여인마냥 을씨년스러웠다. 어쩌면 궂은 날씨 때문인지도 몰랐다.
밤새 내린 작달비가 정오가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내리고 있었다. 무자비하고 내리붓는 작달비에 근래에 겨우 피었던 꽃송이들이며 풀잎들이 퍽퍽 두들겨 맞은 것 마냥 고개를 숙였다. 사납게 빗줄기를 토해내는 하늘에 때때로 칼날마냥 새파란 전기가 번뜩번뜩거리며, 으르렁거리는 난운(亂雲)을 뱀처럼 휘감고 울었다.
콰르릉. 막 또 한 번 뇌성이 울었다. 잔뜩 찌푸린 사위에 시퍼런 벽력(霹靂)이 번쩍 치며, 일순간 사방을 섬뜩한 빛으로 밝혔다. 창가에 비스듬히 누워 밖을 내다보고 있던 황제의 창백한 얼굴에도 순간 퍼릇한 빛이 어렸다가, 삽시간에 사라졌다. 그 소리가 무슨 신호탄이라도 되는 듯이, 굳게 다물려 있던 황제의 입술이 꿈틀했다. 이윽고 조금 열린 입술 사이를 비집고 혼잣말이 흘러 나왔다.
“이리 장대비가 내리는데 이것은 제 집 놓아두고 어디서 빨빨거리고 있는 건지 당최 알 수가 없구먼.”
그 중얼거림이 흘러나오기가 무섭게, 장지문에 비치는 그림자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황제의 무심한 시선이 그 그림자를 슥 훑었다. 그 시선을 느낀 듯 더더욱 움츠려드는 그림자를 보며 황제가 불현듯 낮게 혀를 찼다.
“새가슴 주제에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쥐새끼 노릇을 하누.”
그 중얼거림에 펄떡 뛰어올라 발발발 물러나는 꼴을 보아하니 애기나인 티를 채 벗지 못한 애송이들인 모양이다. 하기는, 궁궐 물 여러 해 먹어 알 것 모를 것 다 아는 나인들이나 땋은 머리 올린 상궁쯤 되면 금관 쓴 허수아비에 불과한 황상이 무슨 눈치를 주건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버티고 있을 것이 뻔하니 장지문에 비친 그림자가 불안하게 울렁울렁 할 때부터 알아 봤어야 했다.
“으음.”
황제가 목 안에서 끓는 신음을 흘렸다. 비스듬히 괴고 있던 턱을 들고 창턱 우에 세우고 있던 팔꿈치도 아래로 내렸다. 화살 같은 빗줄기가 내리꽂히는 궂은 날씨에 내내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는 이 방주인의 안위가 염려가 고인 물처럼 떠나지를 않는다. 황제는 무심코 깊은 한숨을 쉬었다가,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못마땅한 듯이 혀를 끌끌 찼다.
“고얀 놈.” 황제가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것만으로는 모자라다는 듯이 또 다른 모진 타박이 튀어나온다. “미련한 놈.”
그러나 불퉁하다 못해 삐죽삐죽한 가시가 박힌 목소리와는 달리 황제의 낯빛은 근심으로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창틈으로 솔솔 새어 들어오는 찬 공기에 자신도 모르게 콜록콜록 잔기침을 몇 번 하고서, 황제가 어깨 아래로 흘러내린 미색 주의를 끌어 올렸다.
“이리 날이 궂은데 어디서 무얼 하고 있누.”
황제가 행차했을 때, 이미 호박방은 비어 있었다. 채 날이 밝기도 전이었건만, 더구나 이토록 궂은비가 내리는 날에. 허탈한 동시에 기가 막혔다. 짐이 행보할까 봐 미리 방을 비운 것이 분명하다, 새대가리 주제에 어디서 꾀를 부리누, 운운하며 씩씩대던 황제가 주인도 없는 호박방에 둥지를 틀고 앉은 지 거의 여섯 시진. 그러나 아직도 서문경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처음에 불같이 치솟았던 노염이 한풀 꺾이고 나자 점점 고개를 드는 것이 근심이다. 황제가 파리한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놈이 어디서 무얼 하고 있누. 갈 곳도 없는 것이. 그러면서 동시에 슬그머니 후회가 되는 것이다. 짐이 괜한 망령을 부린 겐가.
‘당분간 혼자 있고 싶다고 말씀 올리지 않았습니까?’ 하고 뎅글뎅글한 눈을 더 댕그랗게 뜨고 하던 말이 떠올랐다. 바로 작일에 황제가 호박방을 찾아 왔을 때 있었던 일이었다. 짐이 보고 싶다 하면 그저 곱게 따를 것이지, 괘씸한 것. 짐짓 엄숙한 척 나무라고는 그 옆을 꿰고 앉았었다. 녀석은 다 들리도록 투덜거리며 패악을 부려 댔지만, 그래도 결국 황제를 거스르지는 못했다.
황제가 자신도 모르게, 다분히 충동적으로 비가 되거라 강권한 후로 놈은 큰 근심에 잠긴 듯 했다. 한편 황제도 어찌하여 자신이 각종 계산을 뒤로 하고 그 따위 말을 한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의문보다도 욕심이 앞섰다.
욕심! 꼬박 밤을 지새워 근심한 결과 황제는 겨우 자신의 감정에 이름을 붙일 수 있었다. 그것은 욕심이었다. 곱고 맑은 것, 맑고 따스한 것을 품고 싶은 욕심. 누구나 탐낼 만한, 누구나 부러워 할 만 한 사람이 자신의 소유가 되었으면 하는 욕심이었다. 그 욕심을 인식하자 온 몸에 비웃음이 번졌다. 짐에게 그런 자격이 있었던가? 인계(人界)에서 가장 화려한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흔들리고 있는 거지. 그것이 바로 황제 자신이었다. 그런 자가, 고운 새를 품는다 해도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더구나, 그 새를 어찌 믿는단 말인가. 깃털 하나하나까지 곱디고운 그 황금새가, 언제 자신의 팔을 떠나 다른 이의 품에 의지하여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헛된 일이다.
그러나, 욕심이 냉정을 지나쳐 멋대로 말이 나온 것처럼 공처럼 튀기 시작한 욕심은 황제의 발을 움직였다. 의심과 자괴감이 채 가시지도 않았으면서, 정말로 저 새를 자신의 품에 품기 위해서는 이래서는 이보다 더 교활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음습한 조언이 머릿속에서 속삭여지는데도 발이 멋대로 이곳을 향했다. ···그저, 얼굴을 한 번 보고 싶었다.
허나 서문경은 이미 그를 피해 자리를 뜬 뒤였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데도, 미처 생각을 하지 못했다. 허탈하고 화가 나 좀처럼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허탈함은 미련이 되고, 노여움은 근심이 되었지만.
황제는 문득 콧잔등이를 찌푸렸다.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비단 지금 뿐만이 아니다. 근래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아니, 진짜 문제는 욕심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대체 무슨 생각인가. 이것이 무슨 감정인가. ‘내 것’을 어찌하여 만들려 한단 말인가. 당장 짐은-.
황제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 상념을 깬 것은 작은 속삭임이었다.
“···님은 언제쯤 오시는고?”
그것은 호박방 앞을 지키고 있던 어린 나인이 부린 투정이었다. 그 칭얼거리는 소리에 번쩍 정신이 든 황제가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번쩍 들었다. 황제가 흘끔 장지문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몇몇 그림자가 비친다. 작은 관(冠)을 쓴 사내의 그림자가 둘, 그 외에는 하나같이 머리를 올리지 않은 그림자들이다.
황제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저기서 어른거리고 있는 그림자는 어린 청의관 궁인들의 것이렷다···. 그럼 당최 대전(大殿) 지밀상궁은 어디로 가 있다는 말인고? 문득 불길한 그림자 같은 것이 뇌리를 스치는 것을 느꼈다.
“거기 누구 있는가.”
시험 삼아 불러 보자, 나인들이 눈에 띄게 당황해하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보고 대략의 상황을 눈치 챈 황제가 이번에는 대전 지밀상궁을 꼬집어 불렀다.
“연재 상궁 거기 있는고?”
다른 이가 나설 틈도 없이 황제가 대령상궁 연재 화연의 이름을 부르자, 어리고 경험 적은 궁인들의 웅성거림이 조금 더 커졌다. 장지문에 비치는 그림자가 초조하게 이리로, 저리로 다다다다 쥐걸음을 걷는다. ‘대령상궁.’, 황제가 다시 한 번 연재 화연을 찾자, 아무리 상전을 뭣같이 여기는 하인들이라도 더 이상은 무시할 수가 없었는지 걔 중 그나마 직급이 높은 여관이 나서 가느다란 목소리로 대꾸해왔다.
“찾아 계시옵니까, 폐하.”
“듣는 귀가 없는가? 짐은 그대를 찾은 것이 아니다.” 황제가 냉담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대전 대령상궁은 어디에 있는고?”
“아뢰옵기 송구하옵니다. 대전 지밀상궁은 지금···,”
하고 아뢰던 목소리가 갑자기 멎었다. 다른 이들보다 한 발자국 정도 앞으로 나와 있는 여인의 그림자가 모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을 보고 황제가 미간을 구겼다. 감히 하늘같으신 지존의 하문에 답을 아뢰다가 멋대로 말을 멈추고 다른 곳을 보고 있는 죄가 당장 머리채를 휘어잡아 돌바닥에 내던지고 볼기짝을 때려도 할 말이 없음이었다. 허나 황제는 노여워하며 고함을 내지르는 대신, 나인의 시선이 향한 곳을 말끄러미 쳐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탁탁탁탁. 나지막하지만 굳이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는 않는 발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왔나. 그러나 발소리는 둘. 황제의 눈살을 저절로 구겨졌다. 대전 대령상궁인 연재 화연인 듯한 그림자와, 방재(方在)까지 황제를 상대하고 있는 궁인이 무어라 몇 마디 말을 주고받더니 궁인이 뒤로 빠지며 연재 화연이 나섰다.
“찾아 계시었사옵니까.”
“자네는 참으로 바쁜 사람이구먼.”
자그마치 황제나 되는 이가 비꼬는 말에 속이 뜨끔할 만도 하건만, 대전 대령상궁은 눈 한 번 깜빡하지도 않고 담대하게 대꾸하였다.
“송구하옵니다.”
“지밀 되는 자가 모시는 상전의 곁을 일언반구도 없이 뜬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음이렷다.”
“그것이.” 하고 대령상궁이 말끝을 흐리었다.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자리를 비켜주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내관(內官) 상서원부(祥瑞園部) 상서원부사 조문명 들었나이다.”
“상서원부사?” 황제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상서원부사가 예까지 웬 일인고.”
“경운전(慶雲殿)과 정명전(貞明殿)에 들었다 지존의 행보를 좇아 청의관까지 들게 되었다 하옵니다.”
어찌하여 정전(正殿)이나 편전(便殿)에 틀어박혀 있지 않고 이런 황궐의 귀퉁이까지 들어와 박혀 있느냐는 핀잔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대령상궁이 황제의 간벽(癎癖)에 익숙해져 있는 것만큼, 대령상궁이 둘러 탓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던 황제는 콧방귀만 뀌고 말 뿐이었다.
“상서원부사가 짐을 찾을 이유가 없을 터인데?”
“신(臣) 상서원부사 조문명 감히 지존의 용안을 뵈옵고 한 말씀 올리는 것을 부디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천자의 허락도 없이 멋대로 지껄여대는 소리를 듣고 황제의 성안(聖顔)이 한 번 실룩하였다. 그러나 장지문을 사이에 두고 황제의 그림자만을 접하고 있는 상서원부사 조문명이 그것을 볼 수 있을 리가 만무하였다. 그 때문인지 그가 감히 만용을 부려 천자를 재촉하였다, ‘알현을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허나, 황제의 대답은 전과 같았다.
“상서원부사가 짐을 알현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딱 잘라 상서원부사의 요청을 거절한 황제가, 그 뒤로 뾰족뾰족한 철가시가 돋친 독언을 다다다 쏟아냈다. “원부사는 그새 노망이라도 난 겐가? 그대가 맡은 임무가 무엇인지도 잊었는가? 내관 12부 중 상서원부라 함은 황궐 안 후궁관계 업무를 맡아 하는 관서가 아니던가? 그럼 상서원부의 으뜸 벼슬인 그대가 하는 일이 무엇일 것 같은고?”
“폐하, 신이 감히 아뢰올 말이 있사오니 부디,”
“하는 일도 없이 나라의 녹을 받아먹는 처지이면 짐의 용안(龍眼)에 거슬리지 않게 답싹 몸이라도 숙이고 없는 척이라도 할 것이지, 이것이 무슨 망령된 짓거리란 말이냐?”
계속해서 자신의 말을 끊어 먹는 황제의 태도에 화가 발끈 치밀어 올랐는지, 원부사 조문명이 겁도 없이 목소리를 올렸다.
“그래서 그간의 녹봉값을 치르려 이렇게 알현을 청하고 있지 않사옵니까?”
“허?” 이놈이 돌아도 아주 단단히 돌았구나. 미친개에게는 매가 약이라지, 황제가 한 쪽 눈썹을 확 치켜 올리며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 들었다가 그것을 던지기 직전에 입술을 뒤틀며 손을 내렸다. 문이 뚫리면 깜둥이 놈이 펄펄 날뛰어대겠지. 황제가 말했다. “문을 열라.”
문을 열래도! 뜻밖의 명령에 주춤거리고 있던 나인이 그 호통소리에 화들짝 놀라 다급히 문을 열었다.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그 뒤로 익숙한 원부사의 면상이 보이기가 무섭게 황제가 내렸던 손을 번개처럼 들어 올렸다.
“악!”
딱!
원부사가 이마에 목침을 맞고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원부사 어른! 대경실색한 대령상궁이 빽 소리를 질렀다가, 뜨끈하게 달아오른 이마에 손을 얹고 한숨을 폭 쉬었다. 성미 왈왈하신 분께서 비위에 거슬리는 언사를 웃어넘기실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아니하였으나, 이리 사속히 나오실 줄은 또 짐작하지 못했음이었다. 정작 하셔야 할 일에는 각피 속에 들어앉은 달파니마냥 굼뜨기 짝이 없는 양반께서 이런 일에만 건첩하시지.
성큼성큼 디방(: 문지방) 앞까지 걸어온 황제가 머리를 붙잡고 뒹구는 원부사를 거만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다 툭 말을 던졌다.
“그래. 그 쌓인 녹봉값을 어찌 치르려고? 어떤 명안(名案)이 떠올랐기에 이 먼 곳까지 좇아와 짐의 성심을 어지럽히는지 들어나 보지.” 초승달처럼 도톰하게 올라간 족건 끝이 판부사의 옥대 끝을 툭툭 찔렀다. 황제가 재촉하듯 허리를 조금 수그렸다. “그 한 마디가 하고 싶어 애를 태우던 사람 어디 갔는고? 왜 입이 있는데 말을 못해.”
“폐, 폐하.”
“말해보게나. 건사할 사람도 하나 없는 후궁 살림을 돌보시는 상서원부사께서 짐에게 무어 할 말이 있다고?”
“새 사람을 들이겠습니다.”
무어라?
일순 할 말을 잃은 황제가 한 쪽 눈을 찌푸렸다.
“새 사람?”
“아, 그것이 아니라.” 황제가 당혹해하는 틈을 타 서둘러 자세를 추스른 원부사 조문명이 황제의 앞에 나부죽이 엎드리며 아뢰었다. “운현궁 마마께서 탄식하시기를, 내전이 폐허마냥 황량하니 예조에 경사가 없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셨사옵니다.”
황제의 눈매가 의심하듯 슥 가늘어졌군.
“원부사 그대가 태후전에 줄이 닿아 있는 줄은 미처 몰랐군.”
“그리하여 태황태후전에서 상서원부전에 직접 언질을 넣으시기를···.”
“내 태황태후전에서 그리 짐을 어리롭게 여기시는 줄은 꿈에도 몰랐구먼.”
아니면 한만(閑漫)함이 지나쳐 괜한 수선이라도 피우고 싶으시다던가? 그 빈정거림을 못 들은 척 귓등으로 받아 넘기고, 원부사 조문명이 마침내 황제를 애타게 찾은 요용건(要用件)을 털어 놓았다.
“당장 정후를 간택하는 것은 힘들더라도, 급한 대로 백희궁에라도 새 꽃을 두어 송이 심어 놓으라 명하시었사옵니다.”
황제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아래로부터는 나인과 내인들을 비롯한 궁관(宮官), 위로는 무품(無品) 후궁인 귀비(貴妃)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황궐 내직(內職)은 전적으로 내전(內殿)의 영역. 그리고 내전이 없는 현재 내직을 다스릴 권한은 황궁의 큰 어르신인 태황태후에게 있었다.
즉, 후궁인 백희궁에 새 꽃을 심겠다는 태황태후의 발언은 곧.
후궁을 간택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
황제가 태황태후전에 들었음을 알리려던 시위 내관이 ‘폐하-, 듭시오.’하는 그 짧은 말조차 채 끝맺지 못하고 나뒹굴었다.
“거치적거린다, 비켜서라.” 황제가 막무가내로 내관들을 물리치고 들이닥친 때문이었다. 어쿠쿠쿠. 뿔 난 사내애 발에 맞고 날아가는 건자(: 제기)마냥 마룻바닥을 뒹구는 퉁퉁한 내관을 본 척도 하지 않고 쿵쿵쿵 난폭한 발소리를 내며 다가간 황제가 확 곱접이문을 열어젖혔다. 꺅! 장지문 앞에서 발발발 떨고 있던 지밀들이 가녀린 몸을 답싹 엎드리며 억눌린 비명을 질렀다.
“이것이 무슨 일이냐?!”
송화색(松花色) 비단 보료 위에 구봉침(九鳳枕)을 베고 께느른히 앉아 있던 태황태후 엄씨가 갑작스러운 소동에 앉은 자리에서 펄떡 뛰어오를 만치 놀라며 소리쳤다. 그녀의 상아 같은 손가락에 들려 있던 화기(畵器)가 댕그렁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황상?” 열어젖힌 문 바깥쪽에서 황제의 얼굴을 발견한 태황태후의 얼굴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잔뜩 긴장해서 터질 듯 팽팽해져 있던 그녀의 근육이 반사적으로 느슨해지는 것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태황태후가 침에 등을 기대며 허탈한 듯 중얼거렸다. “웬일이요, 공사(公私) 극번(劇繁)하시여 용안 한 번 뵙기 힘든 분께서 여까지 다 행차를 하시고?”
“소손이 암만 공사 다바쁘다한들 어디 마마께 비하리이까.”
“그것이 무슨 말씀이시오?” 태황태후가 반사적으로 물었다가, 그다지 관심이 없는 일인 듯 곧 고개를 모로 돌리며 마저 타박을 놓았다. “그러한데, 한 나라의 지존되시는 분께서 어찌 그리 점잖지 못한 행동을 하신단 말이요. 이 늙은 할미를 놀래어 뒤로 넘어가게 할 심산이시오?”
“마마야말로 무슨 심산이시옵니까?”
태황태후가 말을 멈추고 눈을 몇 번 깜빡였다.
“황상, 당최 무슨,”
“상서원부사가 다녀갔나이다.”
“상서원부사?” 태황태후가 고운 아미(蛾眉)를 숙이며 생각이 잠겼다.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태도에 황제가 눈가를 의심스레 좁혔다. 곰곰이 기억을 짚어 보던 태황태후가 조금 뒤에 제 무릎을 치며 반색을 했다. “아, 이제야 기억이 나는구려. 그 일로 운현궁으로 행차하신 게요?”
황제가 주춤했다. 태황태후의 태도가 상서원부사 조문명의 말과 달랐던 탓이다. 황제가 잠자코 미간만 찌푸리고 있는 것이 이상했던지, 태황태후가 물어왔다.
“황상, 어찌 그러시오?”
“마마께서 백희궁에 들일 새 사람을 물색하라 명하신 것이 아니옵니까?”
“으응?” 태황태후가 의아하게 반문했다. “군부(君婦)의 자리가 비어 있으니, 그 또한 아직은 이 할미가 할 일이지요.”
“그것이 아니오라.” 황제가 몹시 답답해하며 캐물었다. “지금껏 한 마디 언질도 없으시던 분께서 당최 무슨 바람이 불어 새로이 그런 말씀을 하시느냔 말이옵니다. 딴 속내가 있으신 게 아닙니까?”
그 지적에 태황태후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딴 속내라니? 설마 할미가 황상께 해로운 일을 하겠소?”
“갑자기 새 사람을 들여야겠노라고 말씀하시는 저의를 모르겠나이다. 소손이 옥좌에 앉은 이후로 이 시각까지, 마마께서는 후정은커녕 난전(蘭殿: 황후의 궁전)에 대한 언급조차 없으시지 않았사옵니까?”
“그것은.”
노기등등하던 태황태후의 얼굴에 순간 난색이 어리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황제가 재차 몰아붙였다.
“그를 생각해 보면 참으로 희한한 일이 아니오리까?”
“황상, 그간 때가 좋지 않았잖소.”
“옳은 말씀이옵니다. 때가 좋지 않았지요. 아니지요. 때가 오지 않았던 게지요. 장차 용상(龍床)에 앉아 있을 이가 누인 줄 알고 곤위(坤位)에 사람을 앉힌답니까. 어느 댁 귀한 따님 신세를 망치려고요. 마마의 말씀이 다 옳사옵니다.”
황제의 거침없는 말에 태황태후는 불쾌감을 느낀 듯 이맛살을 구기고 숨을 삼켰지만, 감히 황제의 말허리를 끊고 끼어들지는 못했다. 그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섣불리 끼어들었다 무슨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황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더운 밤 폭풍우가 치듯이 세찬 기세로 몰아치던 그의 어조가 미묘하게 변한 것은 그 때였다.
“일이 그러한데, 어찌하여 하필 지금 그런 분부를 하신단 말씀입니까?”
“하필 지금이라?”
“그렇지 않사옵니까? 시월 초이렛날이 몇 달 남지도 않았사옵니다.”
“시월 초이레···.”
황제가 한 말을 무심코 읊조리던 태황태후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악 굳었다. 그 모습을 본 황제가 코웃음을 쳤다. 올해 시월 초이레는 황제가 스무 살이 되는 탄일인 동시에, 옥좌의 진짜 주인을 정하기로 약조한 날이었다. 그제야 황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를 깨달은 태황태후는 당혹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황제가 쏘아붙였다.
“때가 길하지 않기로 치자면 올 해 초중 순을 따라갈 때가 있겠사옵니까. 소손의 말에 무슨 어폐가 있는지요, 마마?”
“화, 황상, 그것은,”
“그러한데 어찌 마마께서는 이런 때에 그런 명을 내리셨는지요. 우둔한 소손으로서는 도통 까닭을 알 수가 없어 이렇게 운현궁에까지 들렀사옵니다. 부디 소손을 긍련히 여기사 마마의 명견(明見)을 일러 주시오소서.”
“그것이,” 아무리 머리를 짜내 봐도 그럴듯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는지 그것이, 그것이, 하는 말만 반복해서 하고 있던 태황태후가 한참 뒤에야 궁색하기 짝이 없는 대답을 내어놓았다. “할미된 자로, 약관 가까이 호올로 지내시는 황상이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금번 일을 꾀했소이다.”
“하필 이런 때에 말씀이십니까?”
“성상께오서 약관을 맞으시는 해가 아니요. 옛 성현들께서 말씀하시기를, 무릇 약관을 맞은 사내는 비로소 부모의 그늘 아래에서 독립하여 하늘 아래 한 점 부끄러움이 없도록 나라에 충성하고 식솔을 건사하며 심신을 깨끗이 닦도록 하여야 한다 하였소. 이는 사내가 약관을 맞으면 한 사람의 당당한 성인으로서 호올로 서서 제 할 일을 다 해내야 할 것이라는 말과 같소. 그러니 아무리 때가 좋지 않다 한들 약관을 훌쩍 넘길 때까지 홀몸으로 계실 수는 없지 않겠소?”
더듬더듬 졸렬한 변명을 늘어놓은 태황태후가 흘끔 눈만 치떠 황제 쪽을 훔쳐보았다. 자신이 긴긴 말을 하는 내내 황제가 빈정거림은커녕 한 마디 끼어드는 말조차 없었던 것이 괴기하게 여겨졌다. 그러자, 몰래 훔쳐보는 눈에서 굴러가는 소리가 들릴 리가 만무한데 황제가 귀신처럼 태황태후와 눈을 맞춰서 태황태후는 화들짝 놀랐다. 그것을 비웃는 듯한 시선으로 살피며 황제가 입을 열었다.
“마마의 삽삽하오신 마음 씀씀이에 소손은 마냥 감탄스러울 뿐이옵니다. 하오나.” 황제가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장차 큰일을 앞두고 있어 부정을 탈까 저어되오니 그 명은 물리쳐 주시옵소서.”
“황상.”
“분명히 뜻을 전했사옵니다.”
서둘러 손을 뻗는 태황태후를 본 척도 하지 않고 황제가 뒤돌아 방을 나가버렸다. 황상! 황상! 태황태후가 당혹하여 황제를 불렀지만, 황제는 결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잔뜩 성이 난 황제를 태황태후전 궁인들이 황망한 눈으로 바라보며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감히 예조의 주인 되는 이를 앞두고도 땅바닥에 엎드려 배례로 맞지 않는 무례한 작자들을, 황제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빠른 속도로 지나쳤다. 막 황제가 운현궁을 나온 직후, 대전 지밀상궁 연재 화연과 대산을 든 나인들과 내관 나부랭이들이 헐레벌떡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참으로 빠르시군. 지잠(地蠶: 굼벵이)이 부럽지 않을 정돌세.”
“폐하.”
변명인지 타박인지 지밀상궁이 무어라 주절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황제는 그 소리를 듣지 않고 귓등으로 받아 튕겨버렸다. 황제가 성큼성큼 걸어 나가버리자 대산을 든 나인이 황급히 그 뒤를 따라온다. 따르는 내관과 나인들을 무시하고 황제는 태황태후의 반응을 하나하나 곱씹어 보았다. 백희궁에 들일 새 후궁을 간택하라 명한 것이 마마시냐는 말에 처음에는 당연히 황실의 웃어른인 자신이 맡아서 해야 할 일이 아니냐며 태연히 반문하던 모습이며, 말뜻을 비로소 알아듣고 나서 횡설수설하던 모습이 자진하여 이 일을 계획한 당사자라기에는 몹시도 어색하였다. 그렇다면···.
황제의 걸음이 우뚝 멎더니, 그의 구순(口脣)을 비집고 누군가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황제가 하는 양을 조금도 놓치지 않고 엿보고 있던 대령상궁 연재 화연이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소희?”
소희란 누구를 말하는 겐가. 연재 화연이 이마를 찌푸렸다.
**
육포 감추어 놓은 괭이마냥 청의관을 제 집 드나들듯 하는 황제를 피해 꼭두새벽부터 바깥나들이를 한 지도 벌써 나흘. 서문경이 이변을 눈치 챈 것은 그 나흘째 낮의 일이었다. 그 날도 지척지척 동우(冬雨)가 내리고 있었다.
기름종이를 바른 지우산(紙雨傘)을 들고 타박타박 걷고 있던 서문경이 훽 뒤를 돌아보았다. 근방(近方)을 오고가고 있던 수사(水賜)들이 화들짝 놀라며 각색의 비명을 내질렀다. 어찌나 놀랐던지 쨍그랑 쨍그랑 물동이가 깨지고 애써 길러온 물이 쏴아아아 바닥에 쏟아지는 소리조차 들렸다. 어마나, 이를 어쩐담! 잔뜩 울상이 되어서 깨진 물동이에 달려드는 수사들을 보면서 서문경은 말없이 미간을 구겼다. 까다로운 세수간(洗手間) 나인들에게 생야단을 맞을 것이 뻔한 그네들의 신세가 딱해서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서문경이 고개를 모로 한 번 기웃했다. 궁 안 사람들이 자신을 훔쳐보고 수군거리는 것이 하루 이틀 된 일은 아니었지만 요 며칠간은 유난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표현이 약간 틀렸는지도 모르겠다. 흘끔흘끔 훔쳐보는 눈빛이 예전과 달라졌다. 이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지만 어째 나를 좀 딱해하는 듯한,
“윽.”
그러나 생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시선 끝에 익숙한, 허나 퍽 반갑지는 못한 사람의 모습이 들어온 탓이었다. 자신을 본 서문경이 주춤 뒷걸음질 치면서 신음을 내뱉는 것을 보았는지 그 자 또한 있는 대로 이맛살을 찌푸렸다. 공무 행정을 마치고 온 참인지 사내는 평소와는 달리 백색 패옥과 각대까지 갖춘 관복 차림이었다. 이윽고 서문경의 앞에 그 큰 키로 떡 버티어 선 남자가 길가의 벅수(: 장승)마냥 표정을 구기고 내뱉었다.
“자주 뵈는군. 여전히 한용한가 보아. 그래서야 내게 진 빚을 갚을 수나 있겠나?”
“필요하시면 당장 산나물이라도 캐서 갚아 드리지요.”
잡초와 흑맥(黑麥: 호밀) 싹도 구분하지 못하는 주제에 서문경이 발끈해서 대꾸했다가 곧바로 수심에 잠겼다. 정말로 그렇게 하라면 난 어떻게 해야 하지. 하지만 서문경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남자는 그저 괜히 서문경을 타박하고 싶었을 뿐 당장 빚을 받아낼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가 대꾸했다.
“헌데 정말 웬일인가. 이토록 격원(隔遠)한 곳까지, 하물며 고우(苦雨: 궂은비)까지 내리는 날에.” 하고 말한 남자가 ‘혹.’하며 서문경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서행관에 무슨 용무가 있나?”
“아닙니다.”
반사적으로 솔직하게 대답해놓고서 서문경은 자신의 입을 탓했다. 당장 남자의 시선이 가늘어졌기 때문이었다. 거짓부렁이라도 그렇다고 할 것을 그랬나. 하기는, 자신이 생각해봐도 이처럼 날씨 궂은 날에 용무도 없으면서 먼 곳까지 얼쩡얼쩡 기어 나온 놈을 보면 의심을 안 하래야 안 할 수가 없기는 했다. 그것도 벌써 나흘째 매일 얼굴을 맞닥뜨리고 있는 바에야.
남자가 물었다.
“그럼?”
그러나 서문경은 대답 대신 한숨만 푹 쉬었다. 대답을 하자니 황제라면 이부터 갈고 보는 저 남자에게 황제에 대한 정보를 흘리는 것이 탐탁지 않았고, 그렇다고 대답을 하지 않자니 안 그래도 삐딱한 남자의 태도가 본격적으로 가시가 돋을 것 같아 벌써부터 심신이 피곤해졌다.
그 때 남자가 불현듯 몸을 조금 서문경 쪽으로 기울였다. 남자가 든 박쥐우산 살 끝과 서문경의 지우산 끝이 딱하고 가볍게 부딪쳤다. 남자가 물었다.
“황상을 피할 심산에선가?”
“예?” 남자가 툭 던진 물음에 서문경이 놀라서 번쩍 고개를 들었다. 방심하고 있던 탓에 자신도 모르게 솔직한 반응이 터졌다. “그것을 어떻게?”
“그것이 무어 비밀씩이나 된다고.”
“벌써 소문이 돌았습니까?!”
“청의관에 드나드는 발이 몇이고, 지켜보는 눈이 얼만가.”
“하기는.”
서문경이 허탈하게 수긍했다. 남 말하기를 한 끼 밥보다 좋아하는 그 치들이 아직까지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면 그게 더 놀랄 일이다.
남자가 서문경에게 제의했다.
“자리를 옮기겠나. 여기는 듣는 귀가 많으니.”
“······.”
서문경이 입을 다물고 물끄러미 남자 쪽을 올려다보았다. 황제와 얼굴을 마주하기가 껄끄러워 청의관이나 천추전에서 무조건 먼 곳으로 걷다보니 나성(羅城: 성 외곽) 가까이에서 근무하는 저 남자와는 적어도 하루에 한 번쯤은 얼굴을 마주치는 처지였다. 그러나 남자가 자신에게 자리를 옮기자고 권유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서문경이 조금 고민하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황상과는.”
한참을 말없이 걷기만 하던 남자가 인적이 드문 길에 접어들자마자 불쑥 중얼거렸다. 서문경이 흘깃 남자 쪽을 곁눈질했다. 남자의 시선은 여전히 고집스레 앞을 향하고 있었다. 허나 자신을 향해 한 물음인 것은 확실한 듯 했다.
“근래에는 뵌 적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면서 서문경은 괜히 입술을 달싹였다. 입맛이 썼다.
“괜한 풍문에 흔들리는 성정은 아닌 것으로 뵈네만.” 남자, 효강 엄헌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서문경 쪽을 응시하였다. 서문경이 덩달아 멈춰 서는 그 순간 그가 날카롭게 물었다. “분명 용안을 보기 껄끄러운 일이 있었던 게지.”
“!”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설마 황제가 자신더러 후궁에 들어오라 명했다는 이야기까지 궐 안을 돌아다니는 건가 싶어서였다.
“황상은,” 엄헌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굶주린 젖먹이 아이나 다름이 없어. 자신에게 애정을 줄 만한 사람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지.”
그 말을 듣고 서문경은 확신했다. 그 이야기가 벌써 궁궐 안을 떠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지간한 서문경도 얼굴이 홧홧해졌다. 그와 흡사한 소문이 여기저기에서 떠돌 때도 이렇지는 않았건만, 은밀한 사실이 이 사람 저 사람의 입에서 오르내렸다고 생각하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얼굴에 불이라도 놓은 것 마냥 홧홧한 한편, 동굴마냥 깊디깊은 곳에서 코앞에 있는 이의 목소리조차 희미하게 들릴 만치 은밀하게 나눈 말이 어찌 풍문이 되어 궐 안을 떠돌고 있는지 당혹스러울 따름이었다.
그 얼굴을 보고 오해를 했는지 엄헌영이 혀를 찼다.
“···벌써 마음을 줬었나.”
“예?” 서문경의 눈이 커다래졌다. “아니, 그런 문제보다는,”
“지금이라도 정을 끊는 것이 좋을 거야. 시간이 오래지 않았으니 어렵지 않을 걸세.”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소문 이야기를 하다가 왜 갑자기 남의 인간관계에 참견이야? 서문경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지자 엄헌영의 목소리에도 힘이 들어갔다.
“그는 깊이 마음을 줄 만한 이가 못돼.”
“그건 제가 판단해야 할 일 아닙니까?”
“이건 충고네.”
“충고가 아니라 참견입니다.” 서문경이 딱 잘라 말했다. “보기보다 오지랖이 넓으시군요.”
엄헌영의 얼굴이 구겨졌다.
“모르겠군. 왜 그렇게 그 이를 감싸고도는 건가?”
“감싸는 게 아닙니다. 당신이 참견할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겁니다.”
“이미 당하고도 모르나.”
뜻밖의 말에 서문경이 멈칫했다. 이미 당했다고? 뭘? 서문경이 멈칫한 틈을 타 엄헌영이 말을 이었다. 당황스러웠다. 엄헌영의 태도가 숫제 꾸짖는 것에 가까웠던 탓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미련하군. 삽시에 낯선 땅에 떨어져 정 붙일 사람이 필요한 것은 이해하지만 그 치에게 그런 봉패(逢敗)를 당하고도 그리 용퉁스럽게구나.”
“봉패?”
“그 이는 의리를 저버렸다.”
“자, 잠깐만, 잠깐만.”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서문경이 서둘러 두 손을 저었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폐하께서 의리를 저버렸다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ㄱ···,”
“그것이 의리를 저버린 것이 아니라면 뭔가?”
엄헌영이 서문경의 말허리를 단박에 끊었다.
“제 아무리 구오지존(九五之尊)이라 하나 세상에는 의리로 행해야 할 암묵적 차례라는 것이 있음이야. 언제는 간이라도 빼줄 듯한 기세로 구애하다 새 사람이 나타나자마자,”
“새 사람?!” 이번에는 서문경 쪽이 엄헌영의 말을 가로막았다. 엄하게 꾸짖던 엄헌영이 무심코 입을 닫을 만큼 큰 고함을 지른 서문경이 험악한 기세로 캐물었다. “새 사람이라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누가 누구를요!”
당혹이 서려 있던 엄헌영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조심스레 살피는 듯한 눈초리에 서문경이 팍 미간을 구겼다. 눈에 익은 눈빛이었다. 그 눈빛을 어디에서 보았는지 깨달은 서문경의 눈매가 슥 가늘어졌다. 요사이 청의관 궁인들이 자신을 훔쳐보던 그 시선, 그리고 엄헌영과 맞닥뜨리기 직전에 보았던 수사들이 자신을 쳐다보던 그 시선과 몹시 흡사한 눈빛이었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머릿속에서 확 불이 당겼다. 서문경이 다짜고짜 따지고 들었다.
“대체 뭡니까? 왜 사람을 그런 눈으로 보는 겁니까! 제가 사기라도 당했습니까? 제가 안 그래도 없는 재산이라도 모조리 털렸답니까? 왜 사람을 동정하는 겁니까?”
“···모르는 건가?”
“그러니까 제가 뭘 모른다는 겁니까!”
말을 해야 알 것 아닙니까! 이게 뭡니까, 스무고개 하는 것도 아니고! 서문경이 버럭 화를 내자 엄헌영은 일단 서문경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서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래야 서문경의 흥분이 가라앉을 것이라는 판단을 한 것이었다. 그의 판단은 옳았다. 한참을 씩씩대던 서문경이 대나무 우산대를 어깨와 목덜미 사이에 끼우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올렸다. 빗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귀찮은 듯 쓸어 올리기를 수 번, 들썩이던 서문경의 어깨가 천천히 가라앉고 사납던 숨소리도 잠잠해졌다. 급하게 냈던 화가 가라앉자 오히려 허탈함이 찾아왔는지 묘하게 멍한 표정을 한 서문경이 긴 숨을 내뱉었다. 서문경이 빠르게 중얼거렸다.
“소리를 질러서···, 죄송합니다.”
서문경이 냉정을 찾자마자 새 사람이 들어온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고 물어 오리라 짐작하고 있던 엄헌영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 시선을 오해한 서문경이 머뭇거리면서도 거듭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당신을 탓할 일이 아니었는데요.”
“아니.” 무심코 대꾸했다가 엄헌영이 서문경의 휘둥그레진 눈을 보고 황급히 화두를 돌렸다. “아무래도 간도 모르고 있는 것 같으니 말해줌세. 백희궁에 새 사람이 들어온다는 소문이 궐내에 파다해.”
“백희궁···.” 귀를 쫑긋하고 엄헌영의 말을 듣고 있던 서문경이 검지로 자신의 턱을 가리켰다. 그리고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저···,”
“자네 말고.”
“저 말고요?”
“그래.” 하고 대답하며 엄헌영이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답지않게 어리벙벙한 반응을 보아하니 정말로 몰랐던 모양이었다. “태황태후전에서 나온 말이니만큼 단순한 풍문은 아닐 걸세.”
“폐하께서 진짜 후궁을 들이신다고요?”
허, 하며 서문경이 허탈한 탄성을 내뱉었다. 서문경이 당장 그 자리에서 허물어지며 절망하거나, 혹은 그 고약한 성미대로 바락바락 악을 쓸 것이라 예상했던 엄헌영이 뜻밖의 반응에 눈썹을 구겼다. 너무 큰 충격을 받아 넋이라도 나간건가? 그런 그의 귀에 계속해서 서문경이 내뱉는 탄성이 들려왔다.
“허, 참. 허, 이것 참.”
계속해서 같은 말만 반복하던 서문경이, 갑자기 몸을 휙 돌렸다. 당황한 엄헌영이 급히 서문경을 불러 세웠다.
“어디를 가는 건가! 황상이 어디에 계신 줄 알고!”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서문경이 팩 머리만 돌려 돌아보았다.
“누가 그 작자 찾아 간답니까.”
“그럼?”
“제 방에 갑니다.” 싸늘한 표정과는 달리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평온했다. “미친놈처럼 괜히 빗속을 서성거리고 있을 이유가 없어졌으니까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엄헌영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말없이 자신을 응시하는 엄헌영의 표정을 보고 서문경이 한 쪽 눈을 찌푸렸다. 왜 그렇게 봅니까? 하고 묻자 엄헌영이 대꾸 없이 고개만 한 번 가로저었다.
‘그럼.’ 하고 서문경이 까닥 목례만 해보이고는 엄헌영에게서 등을 돌렸다. 탁탁탁 잰걸음으로 걸어가는 서문경의 발이 질퍽질퍽한 진흙탕을 밟을 때마다 꿀찌럭 소리가 나면서 잔 흙탕물이 튀었다. 더러운 이수(泥水)가 고운 비단옷을 얼룩지게 하는데도 서문경은 그조차 깨닫지 못하는 눈치였다.
재색 옷자락에 꺼먼 흙 얼룩이 튈 때마다 엄헌영의 미간에 패인 주름도 깊어졌다. 빛 곱고 깨끗한 옷감에 하나 둘씩 가만 얼룩이 생기는 것이, 지금 서문경이 처한 상황처럼 느껴지는 것은 자신의 노파심 때문이겠지만···. 물손님과 황제가 좋아 지내는 것이 못내 못마땅하고 불안했던 자신으로서는 물손님이 저리 심사가 틀어진 것을 보면 마음이 흐뭇하고 좋아야 할 터인데 이상하게도 그렇지가 못했다. 그간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것만큼 저 치가 성질이 못되고 독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당장은 저리 토라져서 돌아갔지만, 황제가 측연한 모습으로 골골대며 매달리면 저리 당하고도 또 손을 내밀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성이 난 나머지 제 자신이 성이 났는지도 모르고 있는 꼴을 보아하니 분명히 그럴 터인데···,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엄헌영이 의식적으로 생각을 끊어버렸다. 만일 일이 그리 된다 하면 한 번 당해보고도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 비웃어주면 되는 일이다. 자신은 이미 충분한 경고를 했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참 동안을 그 자리에 서서 서문경이 사라진 자리를 응시하고 있던 엄헌영이 비로소 몸을 돌렸다. 그가 몸을 돌리자, 그의 허리에 매달린 백색 패옥 두 개가 부딪쳐 달그락 소리를 냈다. 황실의 종친(宗親: 유복친 안에 들지 않는 일가붙이)들만이 찰 수 있는 백패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