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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추전을 뛰쳐나온 서문경은 기청문(祈請門) 돌다리 위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천추전 후원에서 흘러나오는 어구(御溝)에서 졸졸졸 노래하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푸른 잎 하나 없이도 낭창낭창 교태로운 버들가지들이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여인의 가는 팔과 다리처럼 휘청휘청 춤을 췄지만 서문경의 낯빛은 어둡기만 했다. 영제교(永濟橋) 돌다리에 올라 앉아 지존이 무탈하도록 나쁜 기운을 모조리 잡아먹는다는 돌짐승의 험악한 표정이 지금의 서문경과 비슷했다.
타닥타닥타닥, 마치 불똥이 튀는 듯한 잰 소리를 내며 영제교 위를 걷고 있던 서문경의 걸음이 어느 순간 딱 멈췄다. 서문경이 침음하며 중얼거렸다.
“역시 그 놈 밖에 없나.”
하고 내뱉자마자, 왜인지 뒤에서 ‘그 놈이란 난가?’하고 조원이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 서문경은 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아무리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하는 조원이라고 해도 자신을 하루 종일 감시하고 있는 게 아닌 이상 지금 나타날 리가 없다. 조원은커녕 나인들의 걸음도 드문 기청문 주위에 서문경을 보는 눈이라고는 소나무의 꼬부라진 가지위에 올라앉은 까치 한 마리뿐이다. 하지만 서문경은 경계를 거두지 않고 도리어 소나무 위의 까치를 노려보았다. 발을 까닥까닥하며 푸른 솔잎을 할퀴고 있던 까치가 그 눈길을 느꼈는지 서문경을 보고 동그란 머리를 한 번 갸웃했다.
“···내가 무슨 생각을.”
아무리 그래도 저 까치가 조원일 리는 없지.
“희작(喜鵲:까치)이 아니라 빈작(賓雀:참새) 쪽.”
“?!”
불현듯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란 서문경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서문경의 뒤에 서 있던 남자가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내가 이쪽이 아니라 금송(錦松)을 보라고 안 했던가?”
그를 향해 서문경이 따지듯 물었다.
“당신이 왜 여기 있습니까?”
“서행관(西行官)으로 가는 길에 무관(武官)이 있는 것이 괴아(怪訝)한 일인가, 아니면 청의관 물손이 있는 것이 괴아한 일인가?”
남자가 비꼬며 반문하자, 아까 그 소나무 위의 까치 새끼가 그랬듯 서문경이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기웃했다. 까치가 우는데 어째 반가운 손님은커녕 꼴 보기도 싫은 위인이 보이는구나. 서문경의 생각을 읽은 남자가 싸늘하게 내뱉었다. 아까부터 생각한 것을 다 입 밖으로 말하고 있는데, 너.
“자네가 왜 여기에 있나.”
“여기?” 타박하는 듯한 투에 서문경이 새삼스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있으면 안 되는 곳입니까?”
“청의관과는 너무 멀어.”
서문경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있으면 안 되는 곳은 아닌가 보구나.
“기청문은 서행관으로 통하는 문이야.” 하고 무뚝뚝하게 말한 남자가 영 자신의 말뜻을 눈치 채지 못한 눈치인 서문경을 보고 짧게 덧붙였다. “못 알아듣나. 무관 관사 말이야.”
그제야 방금 남자가 ‘서행관으로 가는 길에 무관이 있는 것이 이상한 일이냐’ 운운한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고 서문경이 체, 혀를 찼다. 서행관이 뭐 하는 동네인지도 모르고 지 놈이 무관인지 문관인지조차 모르는데 나보고 뭘 어쩌라고.
그 때 남자가 말했다.
“도망쳤군.”
도망? 서문경이 무심코 남자의 시선을 따라갔다. 남자의 시선이 늙은 소나무에 가 멎어 있었다. 구불구불 굽어진 나뭇가지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서문경이 입춘(立春)을 맞은 청개구리마냥 눈을 껌뻑껌뻑하자, 남자가 버럭 화를 냈다.
“내, 빈작 쪽이 염락의 귀라고 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참새가 없는데요.”
“방금까지 있었잖나!”
“있었나요?”
“있었다니까! 저기서 자네를 감시하고 있었다니까!”
그 말에 서문경이 펄쩍 뛰었다.
“참새가 어떻게 절 감시합니까?”
“자네 새대가린가? 염락이 술사(術士)라는 걸 잊고 있는가!”
저 새끼가? 새대가리라는 표현에 눈길이 말도 못하게 표독스러워졌던 서문경이 곧 어, 하며 조금 전까지 참새가 앉아 있었다던 금송을 돌아보았다. 그 표정을 보고 이제야 겨우 서문경이 자신의 말뜻을 알아들었다는 것을 깨달은 남자가 후우, 하고 들으라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말했다.
“알겠으면,”
“좋아. 듣고 있었단 말이지.”
남자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중얼거리며 서문경이 한 쪽 팔을 걷었다.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까치며 참새 같은 것을 보느라고 잠시 멈춰 서 있던 서문경이 척척척 큰 보폭으로 걷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멀어져가는 그를, 남자가 서둘러 붙잡았다.
“뭡니까?”
“어디 가나.”
“청의관으로 갑니다.”
“돌아가려고?”
“제가 하는 꼴을 다 보고 있었다니, 그럼 지금쯤 제가 자신을 찾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요. 아마 청의관으로 돌아가면 그 앞에 와 있을 겁니다.”
신출귀몰한 그 작자의 행적을 내가 하염없이 찾아 헤매는 것보다는, 갈 곳이라고는 천추전과 청의관이 다인 나를 그 작자 쪽에서 찾아오는 것이 효율적이니까 말이지. 창혜각으로 가는 길도 모르겠고 가마를 탈 돈도 없는데 마침 잘됐다, 서문경은 생각하며 씩씩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서문경의 뒤에, 남자가 끈질기게 따라 붙어서 물었다.
“화 안 내나? 그 자는 자네를 감시했어.”
“그런 건 만나서 직접 따지면 됩니다. 화 낼 대상도 없는데 괜히 힘 빠지게 열 낼 필요 무어 있습니까.”
“그럼? 내 말은 믿나?”
서문경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휙, 소리가 나도록 서문경이 고개를 돌렸다.
“속인 겁니까?”
“새를 자네 눈으로 직접 본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믿느냐는 말이야.”
그 말에 팔짱을 끼고 선 서문경이 못마땅한 듯 고개를 이리 기웃, 저리 기웃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를 모르겠는 듯, 이윽고 서문경이 멈춰 있던 발걸음을 다시 옮기며 휘휘 한 손을 저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 하나하나를 의심하다 보면 피곤해서 어떻게 삽니까? 먼저 적의를 드러낸다면 또 모릅니다만. 아무튼 전 그렇게는 못 삽니다.”
“예전에 자네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나는 몰라. 하지만 여기서는 그렇게는 안 돼.”
남자, 효강 엄헌영이 서문경의 뒤통수에 대고 나직하게 경고했다.
“황궁은 깊은 숲과 같다. 자네의 눈에는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사람들로 보이나? 아니야, 그것들은 금수(禽獸)다. 차라리 지우한 금수가 낫지, 그것들은 한 몸에 인간의 교활함과 금수의 흉포함을 모두 갖추고 있으니 그들은 실로 만장홍진(萬丈紅塵)에서도 첫째가는 흉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과 어우러져 살아가려면 지금과 같은 안이한 마음가짐으로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
그 단호한 말에 서문경이 흠칫했다. 다짜고짜 생사의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닌 서문경에게는 너무 멀고 낯설게만 느껴졌다. 걸음을 멈춘 서문경이 두서없이 시선을 옮기다가, 문득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새 한 마리에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 왠지 가슴이 덜컹 내려 앉는다. 마치 때를 맞춘 것처럼 엄헌영이 말을 이었다.
“경고하네만, 황제를 믿지 말아.”
“무슨 소문을 듣고 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지금도 그 분을 마냥 의지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저는 저대로···,”
“그런 말이 아니야.”
허수아비 황제이니 그대가 기댈만한 재목이 아니라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서문경이 돌아보자, 엄헌영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너무 나직한 목소리라서 말소리라기보다는 와르르 물이 끓는 소리처럼 들린다.
“그 자를 믿어서는 안 돼. 그 자에게 정을 주지 말아. 자네가 보낸 모든 호의와 선대(善待)가 그대를 찌르는 비수가 되어 돌아올 테니.”
“···왜 그렇게까지 폐하를 증오하시는 겁니까?”
그 말에 엄헌영이 넓은 목깃 위로 길게 뻗어 나온 자신의 목을 더듬었다. 그 두텁고 건강한 목에는 작은 생채기 하나 없었지만, 엄헌영은 큰 상처를 입기라도 한 것처럼 신중한 태도로 목덜미를 쓸면서 얼굴을 구겼다. 그것을 서문경이 쳐다보고 있으려니 엄헌영이 순간 툭 내뱉듯 말했다.
“물어뜯긴 적이 있었지.”
“예?”
그게 무슨. 서문경이 황망하게 중얼거리는데, 엄헌영이 그런 서문경의 옆을 지나쳐가며 조용히 덧붙였다.
“그러니까 경계하라는 말이야.”
방심하면, 자네도 물어뜯길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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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왔나. 청의관 부연(附椽)처마 밑에 서 있던 조원은 박석이 깔린 향나무 오솔길을 걸어오고 있는 서문경을 발견하고 반색했다. 조원이 다가가 말을 걸자, 서문경이 걸음을 멈추고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고개를 든 서문경의 표정이 어딘가 묘했다. 어리둥절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깊은 고민에 잠겨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무슨 일 있었나? 조원이 묻자 서문경이 여전히 그 묘한 표정을 지은 채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입을 열었다.
“역시 감시 중이었던 겁니까?”
“맞네.” 조원이 놀라는 시늉조차 하지 않고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접으며 웃고는, 속삭이듯 덧붙였다. “그래서 효강과 자네가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니라, 그가 줄곧 자네의 뒤를 쫓은 거라는 사실도 알고 있지.”
서문경의 눈이 커졌다.
“절 일부러 쫓아왔다고요? 대체 왜.”
하고 말하던 서문경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것을 보고 조원이 웃으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지만 자신의 눈과 귀가 되어 주던 참새가 사라진 후 엄헌영이 무슨 이야기를 했었느냐고 묻지는 않는다. 묻지 않아도 이미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대신 그는 화제를 돌려 물었다.
“그래, 나는 왜 찾았나?”
자리를 옮길까? 청의관 주변을 쉴 새 없이 드나드는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 조원이 묻자 서문경이 눈을 또록또록 굴리며 반문했다, ‘어째서요?’ 그 말에 조원이 피시식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리 심각한 용무는 아닌 모양이지.
“그래도 일단은 자리를 옮기지.”
자신과 서문경을 힐끔거리는 사람들을 눈짓하며 조원이 재촉했다. 그제야 지금 청의관에 드나들고 있는 사람들이 평소와는 달리 나인이나 내관들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달은 서문경이, 아차하는 표정을 지으며 조원의 뒤를 따랐다.
청의관 후원까지 사람들이 들끓고 있었던 탓에, 조원과 서문경 두 사람은 한참 동안을 걸어야만 했다. 청의관 처마 위에 매단 국화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걷자, 나란히 겹처마 끝을 맞댄 정자가 둘 나오고 그 정자를 지나치자 홍경문(紅鏡門)과 증문(曾門)이 잇따라 나왔다. 황궁의 남문인 용하문(龍下門)으로 통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그러나 조원은 용하문까지 나가지 않고 증문 문루(門樓)에 멈춰 섰다. 문루에 붙은 금빛 현판을 곁눈으로 한 번 보고 서문경이 말했다.
“이쯤이면 되지 않을까요.”
“그렇군.” 주위에 있는 것은 기다랗게 다란 단풍나무들과 한들한들 흔들리며 햇빛을 반사하는 다래 넝쿨뿐이라는 것을 확인한 조원이 대답했다. “문루로 올라갈 필요까지는 없겠지? 곧 끝날 테니까.”
대답 없이 자신을 쳐다보고만 있는 서문경에게 조원이 물었다.
“자네는 내게 뭘 물어 보려는 게야?”
“대연회 말입니다만.”
엄헌영이 한 말 때문에 아직도 머리가 복잡했지만 일단 그 생각은 접어 두기로 하고 서문경이 말을 꺼냈다. 의외라는 듯 조원이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곧바로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참가키로 했다는 그 대연회 말이지.”
“제가 뭘 해야 하는 겁니까?”
진지하기 짝이 없는 물음에 조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대연회에 참가하는 사람은 자네야. 그런데 내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으면 어쩌나?”
“저는 그 대연회인지 소연회인지 하는 놈이 뭐하는 놈인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서문경이 분통을 터뜨렸다. “다짜고짜 제 이름만 올려놓고, 거기서 춤을 춰야 하는지 노래를 불러야 하는지도 안 가르쳐 주고는···!”
“폐하께서?”
빙그레 웃으며, 조원이 말했다. 서문경이 딱 입을 다물었다. 의도한 바는 아닐 테지만, 꾹 다문 그의 입이 오리 부리마냥 툭 튀어나와 있었다. 그 꼴이 대답을 대신해주고 있었다. 서문경이 입 속으로 투덜거렸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그 인간은.”
“까마득히 높으신 성심(聖心)을 나라고 헤아릴 수 있겠나.”
성심은 무슨, 그냥 생각 없이 사는 거지.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고 있는 서문경을 향해 조원이 눈을 찡긋했다. 소름이 돋는지 서문경이 벅벅 팔을 긁적였다. 노골적으로 노려보는 눈초리에도 조원은 언짢은 기색도 없이 웃은 다음,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내가 아는 것은 모두 말해 주도록 하겠네. 이전에 간단히 설명해준 적이 있는데 기억하고 있나? 그래, 봄을 맞아 궁중에서 여는 내진연(內進宴)일세. 황상과 황실의 어른들은 물론, 안으로는 모든 내명부와 궁인들이, 밖으로는 3성 12부의 모든 관인들과 외명부 참여하여 봄이 온 것을 기뻐하고 제국의 홍복(洪福)을 기원한다네. 그 때 갖가지 볼거리며 행사가 열리는데, 그 중 자네가 참여하게 될 행사가 바로 화공예(花工藝)네. 각 각부와 황실 어른들이 자신들의 예인을 참가시켜 그 기량을 봄을 맞은 꽃망울마냥 활짝 펼쳐 보임으로서, 내연에 참가한 객들에게 기쁨을 주고자 꾀하는 행사지. 지금에 와서는 황실 사람들과 관부의 자존심을 겨루는 대리전으로 변질된 지 오래네만.”
거기까지 말한 조원이 잠시 말을 멈추고 서문경 쪽을 곁눈질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 있는지 서문경은 턱까지 딱딱하게 굳어진 채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꼴을 보아하니 더 기다려 봐야 별다른 말을 할 것 같지는 않아 조원은 다시 말을 이었다.
“딱히 그렇다 할 규정은 없는 것으로 아네. 춤도 좋고, 노래도 좋고, 비파를 켜고 퉁소를 불어도 좋네. 그 자리에서 마치 빛과 같은 속도로 명화폭(名畵幅)을 펼쳐 보이는 자도 있었지. 꼭두각시 놀음을 하는 이도 있었으며, 인형놀이를 선보이는 자도 있었네. 그러니 자네도 자유롭게, 자네의 재주를 펼쳐 보이면 될 것이야.”
재주를, 하고 말하는데 서문경의 표정이 묘하게 변한다 싶었다. 그런데 역시 제대로 본 모양이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서문경이 화가 나서 내뱉는 꼴을 보니.
“황제 이 빌어먹을 새끼가···.”
이를 북북 가는 서문경에게 조원이 손으로 목을 슥 긋는 시늉을 해보였다.
“자네의 담대함은 익히 알아 인정하는 바이네만, 한 나라의 지존을 그리 쉽게 능멸하는 것은 용기 따위가 아니라 오만과 무지의 소산이네. 더군다나 적인지 아군인지도 알 수 없는 치를 상대로 말일세.”
“그렇지만!” 서문경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가, 가까스로 목소리를 억누르고 말을 이었다. “제정신인 사람이 할 짓입니까. 그런 중요한 일을···, 저한테.”
“자네, 쓸 만한 재주 없나?”
리코더를 불면 두 손이 한꺼번에 움직이고, 단소는 끝끝내 소리를 내는데 실패했으며, 손발이 함께 움직이는 춤 솜씨에 의무교육 기간 내내 미술 실기 ‘가’를 자랑했던 서문경은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노래는? 조원이 은근히 묻자 서문경은 침묵했다. 아직 자신이 음치인지 아니면 그냥 박자감각이 없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았다. 조원이 한숨을 쉬며 물었다.
“자네, 당최 무슨 배짱으로.”
“제가 한다고 한 게 아니란 말입니다!”
억울함에 서문경이 배고픈 짐승처럼 부르짖었다. 그러나 조원은 웃으며 이렇게 받아쳤다.
“하지만 받아들인 건 자네지 않는가?”
“그렇지만.” 흠칫한 서문경이 우물우물 변명을 웅얼거렸다. “폐하의 사정이.”
“폐하의 사정이 어떻든 간에, 참가를 결정한 건 자넬세.”
그 냉정한 말에 서문경은 잠시 발끈한 것처럼 보였지만 곧 수긍했다. 풀이 죽은 서문경이 중얼거렸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지금 와서는 무를 수도 없고, 저 말고는 나설 사람도 없으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
“그거야 나도 알 수 없지.”
너무 쾌활해서 더 차갑게 느껴지는 대답에 서문경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서문경을 똑바로 마주보고 조원이 물었다, ‘왜 그러나? 설마 북 치는 법이라도 알려 달라고?’ 그 말에, 꿈에서 깨어나듯 서문경이 퍼뜩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스스로가 당혹스러웠다. 지금 저 자에게 도움을 바라기라도 한 거야? 저 자의 뭘 믿고? 그 생각을 빤히 읽고 있다는 듯이 조원이 여우처럼 눈을 가늘게 접으면서 웃었다. 서문경이 불쾌감을 숨기지도 않고 눈살을 구기고는, 탁 쏘아붙였다.
“내 용건은 끝났습니다. 당신 용건은 뭡니까. 당신도 용건이 있으니 날 찾아온 거 아닙니까.”
“날 그렇게 매정한 사람으로 보나?”
“맞잖습니까. 아니면, 용건도 없이 제 일거수일투족을 훔쳐보는 변태적인 취미라도 생겼습니까?”
“그럼 용건이 있다고 해 두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대답한 조원이 그 뒤에 굳이 하지 않아도 좋았을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자네 하는 짓은 활동사진을 보는 것보다 훨씬 재미나더군. 무료할 때 종종 시도 해봐도 좋을 듯하이.’ 그 말을 들은 서문경이 조원을 노려보며 보란 듯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나더니, 한층 더 딱딱하게 내뱉었다.
“용건은.”
“글세. 자네 마음이 편하도록 뭐라도 말해주고 싶지만 정말로 할 말이 없군.”
“용건이 있다고 했잖습니까!”
“그래. 있었네.” 조원이 선뜻 대꾸하며, 서문경을 한 번 눈짓했다. “그런데 그 용건은 이미 다 이뤘네.”
“?”
무슨 말이야, 대체? 조원이 하는 꼴을 보고 서문경이 미간을 구긴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와중에도 조원은 웃음기 섞인 눈으로 가만히 서문경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서문경의 미간에 패인 주름이 더 깊어졌다. 설마. 일순 쏜살같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서문경이 험악한 기세로 내뱉었다.
“저를 보러 왔다고요?”
그렇게 묻는 서문경의 이마에 ‘제발 맞다고 대답하지는 마.’하고 쓰여 있었다. 그 기대를 깨끗하게 배반하며 조원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서문경이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빽 소리를 질렀다.
“소름 돋게 왜 이럽니까, 오늘 다들!”
“다들이라니, 폐하께서 뭘 또 하셨기에.”
그 말에 서문경이 잠시 침묵했다가, 서둘러 말을 돌렸다.
“절 관찰해서 뭘 하시려고요.”
“폐하께서,”
“뭘 하시려고요.”
계속 그 인간 이야기 할 거면 난 이만 가겠다, 서문경의 눈에서 번뜩거리는 위협의 빛을 읽고 조원이 픽 웃었다. 사실 굳이 물을 필요도 없는 말이었다, 서문경이 영제교에서 엄헌영과 마주치기 직전에 천추전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이미 새의 눈을 통해 봐서 알고 있는 일이었으니까. 필시 황상께서 되지도 않는 어깃장을 놓으며 저 성마른 아해의 속을 발칵 뒤집어 놓았겠지.
조원이 큰 선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서문경의 말을 받아 주었다.
“어느 높으신 분께서 그러라 하시더구먼.”
“높으신 분?” 서문경의 눈동자가 한 바퀴 데구르르 굴렀다. “수상 말입니까?”
조원이 고개를 젓는다. 서문경이 고뇌에 잠겼다.
“수상이 아니면. 더 높은 사람이 있었던가요? 아, 태황태후?”
“태황태후전에 내가 어떻게 줄이 닿나.”
“그럼요.”
불퉁히 튀어 나온 입으로 서문경이 내뱉자, 조원이 고개를 살살 저었다.
“자네는 말해도 모를 걸세.”
“그럼 말을 하지를 말든가.”
자기가 캐물었다는 사실은 금세 까맣게 잊고 서문경이 투덜거렸다. 황제라면 여기서 끌끌 혀를 차면서 ‘그러니 네가 새대가리 소리를 듣지.’ 운운하면서 서문경의 속을 박박 긁어 놓았겠지만, 조원은 그 말을 듣고도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것이 어쩐지 더 불쾌해서 서문경은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차라리 황제처럼 빈정거리는 것이 낫지, 저렇게 웃기만 하면 저 속에 든 것이 보드라운 몸을 둥글게 말고 누운 강아지인지 똬리를 튼 독뱀인지 알 수가 없으니 괜히 불안해진다.
조원과 더 얼굴을 맞대고 있기가 껄끄러워진 서문경이 말했다.
“서로 용건이 끝났으면.”
“가 볼 텐가?”
그럼 그러게나, 하고 조원이 휘휘 손을 내저었다. 그의 순순한 태도가 미심쩍이 생각되어서 서문경이 잠시 망설였지만, 그것도 일순이었다.
“청의관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저 의뭉스런 작자와 더 오래 있어 봐야 자신의 속만 새카맣게 탈 뿐, 저 자의 뱃속에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일찍 자리를 피하는 쪽이 낫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서문경이 몸을 돌리자, 조원이 건성으로 격려했다.
“힘내게. 그렇다고 너무 골머리 싸안지는 말고. 그럴 필요 없으니까 말일세.”
“도움을 안 줄 거면 말을 마···,” 입 속으로 투덜거리던 서문경이 갑자기 말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서문경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물었다. “그럴 필요 없다니요?”
조원이 눈을 크게 뜨고 입술 끝을 끌어 올렸다. 뭐? 하고 되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천연덕스러운 얼굴에 서문경이 눈을 가늘게 떴다가,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이상하다. 저 남자의 말을 듣는 순간 뒷덜미에 뭔가 섬뜩한 것이 훑고 지나가는 기분이 들었는데···.
서문경은 고개를 젓고는, 다시 머리를 돌렸다. 신경이 너무 예민해진 모양이었다.
**
“이건 어떻습니까?”
서문경은 즉답을 듣지 못했다. 질문을 받은 사람은 눈을 가늘게 뜨고 서문경의 손바닥 위를 노려보고 있었다. 죽어가는 달처럼 가느다래진 눈매 사이에 치명적인 협곡처럼 깊은 주름이 패여 있는 것을 보고 서문경도 덩달아 이맛살을 구겼다. 그가 못마땅한 시선을 던지며 드디어 입을 열었다.
“싫으시다고요.”
그러나 서문경이 선수를 쳐서 그의 말을 낚아챘다. 샐쭉이 쳐다보던 그가 팔짱을 끼면서 혀를 끌끌 찼다.
“봄 연회에 꽃이라니.”
“그러니까 주제에 딱 맞는 것 아닙니까?”
“아니지, 식상하지.”
우리 깜둥새는 머릿속까지 가맣구나, 번뜩이는 재기 따위는 찾아보래야 찾아볼 수가 없느니. 황제가 혹평했다. 서문경이 왁 소리를 지르며 손을 털었다. 방금 전까지 그의 손바닥 위에 소복이 쌓여 있었던 봄 벚꽃이 끝도 없이 떨어져 매화가 수놓인 수석 위에 야트막한 꽃무덤을 만들었다.
“그럼 폐하께서 참신한 생각을 내놓아 보시던가요.”
“아니지, 아니지.” 삐뚜름히 턱을 괴고 앉은 황제가 서문경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까닥 했다. “금차(今次)에 네 녀석이 감히 짐을 대신하여 나서는 영광을 누리지 않느냐. 그러니 착상도 짐 대신 네 놈 호올로 능히 해내어야지.”
대답 대신 서문경이 홰치듯 두 팔을 한 번 휘저었다. 눈 같은 앵화(櫻花)가 휘휘 날았다. 내 생각은 여기까지가 한계니까 마음에 안 들면 네가 알아서 해. 서문경이 말하려는 바를 알아채고 황제가 혀를 끌끌 찼다.
“우리 깜둥새. 어쩌누.”
“뭐가요.”
“그리 생각이 단천하여서야 이 험한 세상을 어찌 헤쳐 나갈꼬.”
서문경의 눈빛이 한층 더 싸늘해졌다. 그건 당신이 할 말은 아닌데. 그러나 아무리 노려봐도 비단보료 위에 잣베개를 베고 가로누운 황제가 한심하다는 시선을 거둘 생각을 하지 않자, 서문경은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가는 게야?”
황제가 눈만 치뜨고 물었다. 자리를 탈탈 털고 일어나던 서문경이 툭 내뱉었다.
“폐하께 조언을 구한 제가 바보였지요.”
그러니까, 하고 서문경이 8짝 주호(朱戶: 붉은 칠을 한 지게문)를 열어 젖혔다. 드러누워 있던 황제의 눈썹이 꿈틀했다.
“감히 지존을 들어내려는 게냐?”
“누가 그런다고 했습니까?”
“그럼 왜 문을 열어젖히는 게야. 칼바람 앵앵 부는 소리가 들리지도 않느냐?”
“나간 후에 꼭 닫아 드립지요.”
황제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딜 가는 게야?”
“어디로든지요.”
서문경이 툭툭거리며 덧붙였다, ‘폐하께서 안 계신 곳으로 말입니다.’ 황제가 버럭 역정을 냈다.
“짐이 무얼 했다고!”
“아무 것도 안 하셨죠.” 서문경의 눈에 반드르르 살기가 돋았다. “아니, 차라리 아무 것도 안 하셨으면 밉지나 않지. 사람 머리 터지게 고민하고 있는 와중에 갑자기 찾아오셔서는 방해를 하시질 않나, 기껏 생각해 놓은 걸 비웃으시지를 않나.”
“짐이 슬믭다(:싫고 밉다)고?”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귀신처럼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황제의 행동에 서문경이 분통을 터뜨렸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황제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방을 박차고 나갔다. 지게문 구석에 살풋 귀를 대고 서문경과 황제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나인들이 화들짝 놀라 물러나다 찍 미끄러져 쿠당탕 엉덩방아를 찧어댔다. 그러나 잔뜩 뿔이 난 서문경은 그 요란한 소리에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어디까지 가야 황제가 뒤따라오지 않을까 싶어서 서문경은 계속해서 걸었다.
요 근래 계속 껄끄러운 일이 있었던 만큼, 당분간은 황제의 얼굴을 보지 않고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고 싶은 것이 서문경의 진심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조금도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구중궁궐 깊디깊은 곳에 들어앉아서도 괜한 소문을 흘려 자신을 꼭두각시 인형마냥 이리 들었다 저리 놓았다 하지를 앉나, 그래도 마음 독하게 먹고 방 안에 들어앉아 있을라치면 소리 소문 없이 들이 닥치니 도통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몸이 약해 툭 하면 경연(經筵)이며 상참(常參)까지도 거르곤 한다는 사람이 어찌나 청의관에는 자주 걸음을 하는지. 모르긴 몰라도 경연관(經筵官)보다도 자신 쪽이 황제의 면부(面膚)를 더 자주 보았을 것이 분명했다.
처음부터 그랬기는 했지만, 요즘 유독 황제와 함께 있는 시간은 폭풍우에 휘말린 것 같았다. 끝도 없이 사방에서 비바람이 몰아쳐서 도통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서문경이 불현듯 콧잔등이를 찡그렸다. 도무지 황제의 진심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여쁘다, 어리롭다, 같은 사내놈에게 별별 소름 돋는 칭찬을 해대면서 고백을 한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그 뒤의 행동이 너무 가벼웠다. 더구나 이쪽에서 진지하게 생각을 해 볼 시간조차 주지를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모든 행동을 장난으로 치부하기에는···.
서문경이 이맛살을 구겼다. ···그건 또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어쩌자는 걸까. 새삼 목이 턱 막히는 것 같아서 서문경은 한숨을 쉬었다.
-너무 골머리 싸안지는 말고.
문득 어제 조원이 했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근간 황제의 행동을 떠올려 보자니 자연히 그 생각이 난 것이었다. 어제도 그랬지만, 오늘도 황제의 태도를 보니 그는 내춘대연회 따위는 염두에도 두지 않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조원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참가할 대연회 화공예는 황실 사람들과 각 관부가 예인들을 통해 치르는 일종의 대리전 성격을 띠고 있다고 했었는데···. 그렇다면 황제는 자존심을 지키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것일까? 무시당하는 것에는 익숙하니까?
휴우.
서문경은 나지막하게 긴 숨을 쉬었다. 황제가 평소 받는 대접으로 미루어보면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은 어쩐지 자신이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문경은 두 손바닥을 붙였다 뗐다. 두 손바닥 사이에서 만개한 벚꽃이 하늘하늘 떨어져 내렸다. 유난히 흰 햇빛을 받은 꽃송이가 일견 눈송이처럼 보이기도 했고, 섬세하게 깎은 수옥(水玉) 장식 같기도 했다.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던 서문경이 갑자기 흥 콧방귀를 뀌었다.
“괜찮기만 하구먼.”
망할 인간.
하고 투덜거리며 서문경이 계속해서 손을 움직였다. 그의 손바닥 위에 하얀 벚꽃이 계속해서 쌓였다. 그 때 바람이 훅 불어왔지만 서문경의 손바닥 위에 쌓인 벚꽃은 바람에 실려 날아가기는커녕 얇은 꽃잎 한 장 흔들리지조차 않았다. 서문경이 손바닥을 기울였다. 칼바람이 점점 매서워지는 가운데 서문경의 손 안에서 하나, 둘, 셋, 넷. 나중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꽃송이가 떨어져 내렸다. 살을 벨 듯 날카로운 바람 속에서 수천 송이의 꽃이 유유히 춤추며 떨어지고 그 위로 봉밀(蜂蜜)같은 일화(日華)가 비추며 일렁일렁 금파(金波)가 일어나는 광경이 그야말로 인계(人界)에 실수로 한 조각 떨어져 나온 선경(仙境) 같았다.
봄꽃이 또 뭐가 있더라. 개나리는 좀 아닌가? 서문경이 끙끙 앓았다. 하지만 평소 꽃 같은 것은 눈여겨 본 적이 없으니 봄꽃이 뭐고 여름에 피는 꽃이 뭐고 가을에 피는 꽃이 뭔지 생각이 날 리가 만무하다. 에이, 하고 서문경이 되는대로 꽃을 생각하며 손바닥을 붙였다 뗐다.
봄 벚꽃과 사과꽃이 눈보라처럼 휘날리는 가운데 희고 붉고 노란 각색의 모란이 오옥(五玉)처럼 뚝뚝 탐스러운 자태로 떨어지고, 감국(甘菊)과 장미(薔薇) 송이가 피부로는 느껴지지 않는 기류를 타고 뱅그르르 춤추며 하늘을 날았다.
서문경이 의도한 바는 결코 아니었겠지만, 이곳에 서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타계(他界)의 바람을 타고 사철의 꽃들이 한꺼번에 나부끼는 모습이 참으로 신비하고 굉려하였다. 되는대로 일을 저질러 놓고 서문경도 그렇게 느꼈는지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벌어진 입술에서 탄성이 흘러 나왔다.
서문경의 눈이 반짝 빛났다.
“웬 일로 이렇게 잘 되지.” 뜻밖의 선전(善戰)에 자신도 모르게 흥이 났다. 희한한 일이지만, 혼자 틀어박혀서 끙끙댈 때는 되지도 않던 것이 이리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될 때가 있었다. 만약 대연회 때도 그런 행운이 따라준다면, 그런다면···.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아무리 높은 어르신들이라고 해도 사계절 모든 꽃들이 한데 모여 있는 광경을 본 일은 없을 테니. 하지만 곧바로 서문경의 표정이 흐려졌다. 아니, 모를 일이다. 본 적은 없지만 이 세계에는 기이한 수를 쓰는 술사(術士)들이 많다고 들었으니, 이 정도는 다른 사람들은 식은 차 마시는 것처럼 쉽사리 할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다시 고민에 잠긴 서문경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차라리 아예 이 세계에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좋을까? 보자, 그럴 만한 게 뭐가 있더라.
“?”
골똘히 생각하던 서문경이 불현듯 뒤를 돌아보았다. 도저히 뒤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누구지? 조원? 아니면 엄헌영?
그러나 서문경은 다시 한 번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려야만 했다.
“누구십니까?”
처음 보는 남자가 뒤에서 서문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농중조: 中-1
관리인가? 서문경은 생각했다. 낯선 남자가 입고 있는 옷이 몇 번 본 적이 있는 관복(官服)과 비슷했던 탓이었다. 그러나 역시 아닌 것 같았다. 황제의 침소에서 본 관리들은 대부분 붉고 소매가 넓은 단령(團領: 깃을 둥글게 만든 포)을 입고 머리에는 남색 술을 단 양관(梁冠)을 쓰고, 허리에는 금이나 은을 박은 각대(角帶)와 번청옥(燔靑玉)으로 된 패옥을 차고 있었지만 지금 서문경의 눈앞에 있는 남자의 옷차림은 그보다 훨씬 간소했다. 머리에 양관을 쓰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입고 있는 포(袍)도 관복과는 달랐다. 둥근 깃과 넓은 소매, 허벅지까지 오는 길이 때문에 잠시 관복과 착각했을 뿐 남자의 수박빛 비단포에는 관대도 흉배도 없었다.
“참으로 기위한 솜씨요.”
그 때 남자가 한 발자국 서문경을 향해 걸어오며 입을 열었다. 남자의 허리에 매달려 있던 두 개의 백옥 꾸미개가 달그락 달그락 소리를 냈다.
농중조 반드르르 윤이 나는 백색 패옥에는 뭔가 오목새김으로 문양이 들어가 있는 것 같았지만 서문경의 위치에서는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언뜻 봐도 호화스럽기 짝이 없는 패옥의 생김새에 경계를 품은 서문경이 주춤 물러났다. 이 황궐 내에서 황제의 편은 없다. 신분이 낮은 이도, 신분이 높은 이도 마찬가지만 신분이 낮은 사람들보다는 높은 사람들 쪽이 훨씬 더 위험했다.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다. 때문에 서문경은 갑자기 나타난 이 화려한 차림새의 남자를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남자가 느꼈는지, 걸음을 멈추고 안심하라는 듯 씩 웃었다. 서문경의 표정이 묘해졌다. 멀리서 볼 때는 자신보다 고작 두서너 살 연상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자 남자는 생각보다 나이가 있어 보였다. 아니···, 조금 정도가 아니었다.
돌체“아버지?”
“음?”
서문경이 불쑥 내뱉은 말에 당황한 듯한 남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서문경이 황급히 두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내가 그대 부친과 닮았소이까?”
“아니, 그게 아니라.” 서문경이 혹여 실례가 되는 말은 아닐까 조심스럽게 남자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연배가···.”
“아.” 남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겠다는 듯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무두질한 양피(羊皮)같은 피부에 깊은 주름이 여럿 잡히면서 사람 좋은 웃음을 만들었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가 말했다. “맞소, 나도 그대만한 막내아들이 있지.”
사람에 따라서는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는 말에, 낯선 남자가 기분 좋게 대꾸하자 서문경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풀어졌다. 그것을 귀신처럼 알아챈 남자가 멈춰 있던 발걸음을 옮겼다. 서문경도 이번에는 물러서지 않았다.
남자가 물었다.
“혹, 그대가 풍문의 물손님이시오?”
“그건 어떻게?”
“보면 한눈에 알지.”
그 말에 서문경이 무심결에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설마 자기가 운동화를 신고 있나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어젯밤 깨끗하게 빨아 놓은 운동화는 오늘 아침 창가에 말려 두고 왔으니까 말이다. 서문경의 얼굴이 어리둥절해졌다. 그럼 내가 물손님이라는 걸 저 사람은 어떻게 안 거지?
그 때 남자가 말했다.
“방금 그 술법이 내춘대연회에서 선보일 기술이요? 참으로 장관이었소. 내 이 세상에 나서 그런 광경은 처음 보는군.”
“술사십니까?”
남자의 말에 귀가 쫑긋한 서문경이, 자신이 방금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도 잊고 반문했다. 어쩌면 자신의 좁고 일그러진 인간관계에서는 얻을 수 없는 객관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을 지도 몰랐다.
“예전에는 그랬다오. 지금은 나이가 들어 제 힘을 잃은 지가 오래지만 말이오.”
“태학궁에 계셨습니까?”
“태학궁에서 녹을 받은 적은 없소. 하지만 태학궁에 적(籍)을 둔 술사들과는 이런저런 이유로 수 해 동안이나 친밀하게 지냈소이다.” 남자가 선뜻 대답하고는, 서문경을 힐끔 쳐다보았다. “손께서는 태학궁에 대해 궁금하신 점이라도 있으시오?”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그럼?”
“술사들을 많이 보셨다면. 제가 이 세계에는 아는 것도 없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마, 아니, 술법을 쓰는 것을 본 적도 없어서 그러는데···.”
서문경이 흘끔 쳐다보자 남자가 빙긋 웃으며 머리를 모로 기울였다. 마치 ‘그래서?’하고 묻는 듯한 태도였다. 그러나 서문경은 답지 않게 조금 망설였다. 방금 당신이 본 그 술법이 어떠하냐, 혹시 다른 곳에서도 본 적이 있느냐, 단도직입적으로 묻기에는 잘난 척을 하는 것 같아서 껄끄러웠다.
서문경이 우물거리는 사이에, 남자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말을 돌렸다.
“헌데 그것은 대체 뭐였소이까?” 뜬금없는 물음에 서문경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남자가 고쳐 말했다. “아까 그 술법 말이오.”
“굳이 말하자면 환각입니다만.”
“환각? 아니지.”
남자가 자신의 발치에까지 날아온 꽃봉오리를 집어 들기 위해 허리를 구부렸다.
“이렇게 만질 수 있잖소.”
서문경은 무심코 두 손바닥을 붙였다. 남자의 말대로였다. 서문경의 손 위에 있는 새하얀 꽃송이는 그 가녀린 모습을 눈으로 볼 수 있고, 그 달금한 향기를 코로 맡을 수 있는 것은 물론이요, 소녀의 입술처럼 보드라운 꽃잎과 황금실 같은 수꽃술을 손으로 만질 수도 있었다. 황제를 위해 불러낸 병아리들을 그가 쓰다듬고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수도 있었듯이 말이다.
그런데 이게 뭐? 서문경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러자 그의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남자가 말했다.
“만질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환각이 아니요. 이 세계 속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세계지.” 하고 말하던 남자가 서문경의 표정을 보고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내가 물은 건 그런 게 아닌데, 라는 표정이구려. 뜨끔한 서문경이 자신의 볼을 슥슥 문지르는데 남자가 말을 이었다. “그렇게 심드렁한 표정 짓지 마시오.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큰 도움이 될 수도 있는 능력이니. 그래···, 납득하기 쉽도록 가까이에서 예를 들자면 이번 교방대연회에서도.”
“도움이 되겠습니까?”
“환각을 보여주는 것 정도라면 누구라도 할 수 있소. 그러나 그대에게는 이 세계 사람들에게는 없는 것이 있잖소.”
남자가 손톱 끝으로 톡톡 오른쪽 관자놀이를 두드렸다. 남자의 말을 알아들은 서문경의 얼굴이 저절로 구겨졌다.
이전 세계에서의 기억.
“이번 대연회 일 때문에 우뇌(憂惱)코 있는 것 같은데, 어렵게 생각할 것 없소. 범 세계의 것이라면 비록 단순한 환각이라 하여도 이 세계 사람들은 감탄을 금치 못할 터이니. 더구나 그대의 능력은 단순히 환각을 보여주는 것만이 아니지 않소. 그런 의미에서 그대는 다른 이들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소이다.”
마치 자신의 일처럼 열정적인 태도로 말하던 남자가, 꺼림칙해 하는 서문경을 보고 소리를 내어 웃었다.
“꺼려 지시오?”
“그런 건 아닙니다.”
서문경이 억눌린 투로 대답했다. 사실이었다. 저 남자와 얼굴을 맞닥뜨리기 직전까지는 자기도 이 세계 사람들이 구경도 해보지 못한 범 세계의 볼거리가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고 있던 중이었으니까. 그런데···, 결론적으로는 똑같은 말일 텐데 저 남자의 말은 왜 이토록 께름칙한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 그 때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하는 서문경에게 남자가 호탕한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하기는. 이왕 광대놀음에 광대로 나선 참에 가릴 것이 무어란 말이오? 기억이든 추억이든 팔아 이기면 되는 일 아니요?”
“팔다니요.”
“아, 표현이 거슬렸다면 미안하오.”
서문경의 표정이 묘해졌다. 자신의 자식뻘인 자신에게 순순히 사과를 하는 것도 놀라웠지만, 더 놀라운 것은 남자가 웃고 있다는 것이었다. 서문경은 빙글빙글 웃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불현듯 눈살을 구겼다. 말투나 말의 내용 모두 트집 잡을 곳 하나 없었지만 이상하게 놀림 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서문경에게서 경계하는 기색이 다시 강해지기 시작한 것을 느꼈는지 남자가 미안한 듯 웃으면서 손을 저었다, ‘나이가 드니 생각도 않고 말이 먼저 나가지 뭐요, 혹 불쾌했다면 미안하네만 부디 마음에 두지 마시오.’
“어찌되었건 내가 말하고 싶은 것 그거라오. 크게 염려치 마시오. 오히려 그대는 다른 예인들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으니 말이오.”
자신의 아버지뻘도 넘는 사내가 재차 사과를 하는데 계속 언짢은 티를 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서문경은 그저 조용히 대답했다, ‘위로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 말에 남자가 빙긋 웃었지만, 그 웃는 얼굴이 어딘지 묘했다. 뜻밖의 반응이었는지 약간 당혹스러워 하는 것 같기도 했고, 다르게 보면 조금 얇은 듯한 입술에 비웃음을 머금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때마침 주변을 둘러보고 있던 서문경은 그것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어···.”
별 뜻 없이 버릇대로 주위를 둘레둘레 돌아보던 서문경의 얼굴이 불현듯 어두워졌다. 당황스러워하며 재차 주위를 살펴보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남자가 물었다.
“뇌비치 못하시겠다면 함께 술사들에게 가 보겠소?”
“예?”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서문경이 새된 소리로 외쳤다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고마운 제안을 해주셨지만 지금은 상황이 안 좋습니다.”
남자가 웃는 얼굴 그대로 고개를 까닥했다.
“현명한 판단이시오. 사실 낯선 이가 하는 제안을 쾌인(快認)하는 것은 슬기로운 자가 할 행동은 아니지요.”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서문경이 여전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말끝을 흐렸다. ‘이 낯선 촌부가 언제 흉수(兇手)로 돌변할지도 모르는 일이고.’, 운운하며 서문경을 자극하려던 남자는 말을 멈추고 머리를 조금 모로 기울였다. 서문경이 전혀 자신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넌지시 물었다.
“무어 잃어버리신 것이라도?”
“저, 여기가 어딘지 아십니까?”
아무래도 너무 멀리 온 것 같은데. 눈살을 구긴 서문경이 난처한 듯 웅얼거렸다. 그제야 서문경이 주춤거리고 있는 이유를 알게 된 남자가 활짝 웃었다.
“강락당(康樂堂) 근처라오. 저 담장 너머로 있는 것이 태자궁(太子宮)이오. 태자궁을 지표로 삼아 좌로는 정침(正寢)이, 우로는 태후궁(太后宮)이 있으니 길을 찾기는 쉽지요. 태학궁이나 창혜각도 태후궁을 지나면 있소. 때문에 길을 잃을 염려는 없으니 염려치 말고,”
“아, 그럼 왼쪽으로 똑바로 가면 천추전이 나오는 겁니까? 그럼 청의관도 같은 방향으로 가면 되겠군요.”
“다른 술사들을 만나볼 생각은 없으시오?”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던 서문경이 남자 쪽을 쳐다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고마운 제안이십니다만, 지금은 안 될 것 같습니다.”
“어째서요?”
“지금은 제가 좀 바쁩니다.”
하고 서문경이 한숨을 섞어 말하면서 입 밖으로 꺼내면 실례가 될 또 다른 진심은 속으로 꿀꺽 삼켰다. 사람을 의심하는 것은 안 좋은 일이지만, 대체 당신이 누군줄 알고 넙죽 따라간답니까, 제가.
“바쁘다?”
“예. 뿔이 나서 무작정 뛰쳐나오기는 했습니다만, 지금쯤 슬슬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면 혼자 패악을 부리다 못해 밥상을 뒤집어엎을지도.”
여기 사람들은 하나 같이 얄미운 인간들이기는 하지만 밥에는 죄가 없으니까. 서문경이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선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남자 쪽을 돌아보고는 감사 인사를 했다, ‘위로 고마웠습니다.’
그것을 끝으로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저벅저벅 걸어가 버리는 서문경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중년 남자가 어느 순간,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그 허탈한 미소는 비틀어진 웃음으로 변했다.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뚫어져라 서문경의 등을 쳐다보고 있던 그가 중얼거렸다.
“과연 듣던 대로 맹랑하군.”
그리고서 그는 마치 더러운 것과 닿았다는 듯이 한 발 뒤로 물러서더니 옷깃을 손끝으로 탈탈 털었다.
“범 비린내가 가시지를 않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