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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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경은 힐끗힐끗 황제를 훔쳐보고 있었다. 자리보전하고 비스듬히 기대듯 누운 황제는 눈을 감고 있었다. 저렇게 눈을 감고 누운 지가 벌써 수분 째. 어쩌면 곤한 잠에 빠진 것인지도 모른다.

내리깔린 황제의 눈꺼풀이 그의 옥 같은 피부만큼이나 희고 고왔다. 눈을 감은 황제의 용안은 마치 백설(白雪)이 애애한 산봉우리와도 같았다. 그린 듯한 얼굴과 사슴 같은 긴 목, 넓은 옷자락 끝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손가락 같은 곳은 그야말로 티 하나 없는 설백색(雪白色)이었고, 콧대는 모로 누운 여인의 잘록한 허리를 닮은 산등성이 같았다. 피부 빛이 백분을 바른 것처럼 고운데도 불구하고 마냥 해사한 느낌만 들지 않고, 오히려 위험한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는 듯한 긴장감이 감도는 것이 더더욱 그랬다. 

그야말로 서리가 내린 꽃, 찬바람으로 박제한 얼음바위 위의 수정꽃 같은 차고 덧없는 아름다움이었다.

“···정말 자나.”

그러나 정작 그런 황제의 코앞에 있는 서문경은 황제의 그린 듯한 눈썹이며 옥 같은 얼굴 등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척 팔짱을 끼고 앉아 있었다. 시시때때로 곁눈질을 하는 눈초리가 시퉁하기 그지없었다.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위태로운 미인이 아니라 발발발 기어 다니며 사고만 치는 똥강아지라도 되는 듯한 시선이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십 수 분이 지나도 황제가 눈을 뜰 생각을 하지 않자 서문경의 표정이 흐려졌다. 서문경은 눈으로는 황제의 창백한 얼굴을 살피면서 동시에 황제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황제의 숨소리는 깊은 잠에 빠진 아이의 숨소리처럼 규칙적이었지만, 한 번씩 숨을 내쉴 때마다 그 소리가 잦아들고 있었다. 쌕, 쌕, 쌕, 하고 간헐적으로 울리던 목소리가 귀에서 서서히, 서서히 멀어진다. 이러다 언젠가 황제의 숨소리가 완전히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덜컥 겁이 난 서문경이 충동적으로 내뱉었다.

“폐하.” 서문경 자신의 귀에조차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그 소리에 조금 놀란 서문경이 조금 더 목소리를 높였다. “폐하, 주무십니까?”

그러나 이번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잠시 후 살그머니 무릎을 바닥에 대고 몸을 일으킨 서문경이 황제의 눈 바로 위에 손을 흔들어 보았다. 반응은 없었다. 서문경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꿀꺽,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이 넘어갔다.

“폐하.” 서문경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곤히 잠이 든 황제를 이렇게 내려다보고 있는 것도 처음이 아니건만, 새삼스럽게 심장이 떨렸다. 이럴 때의 황제는, 유난히 창백한 낯빛 때문인지 아니면 계속해서 잦아드는 숨소리 때문인지 종종 잠든 것이 아니라 한 번 숨을 쉴 때마다 점점 생명이 빠져 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무서웠다. 서문경은 다시금 황제를 불렀다. “폐하. 폐하. 폐하···.”

주무시는 겁니까? 주무시는 거지요? 잠든 사람에게 무리한 요구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황제가 잠시 눈을 뜨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 몸이 노곤하여 단잠을 자고 있었거늘 어찌 호들갑을 부려 자신을 깨우느냐며 신경질을 내 주면,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그렇게만 해 준다면 자신도 마음 편히 이 불편한 자리를 떠날 수 있을 텐데. 황제의 얼굴을 보는 것조차 불편해 연신 몸을 들썩들썩 하면서도 미련스럽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바로 어제, 이곳에서 영문도 모르고 당했던 일이 아직도 눈앞이 생생했다. 혹시라도 또 같은 일을 겪을까 두렵고, 황제가 갑자기 눈을 뜨고 어제의 일을 언급할까 무서웠다. 그런 자신이 어리석고 기가 막혔지만 그 생각이 본심이었다. 익숙지 않은 일이 마냥 꺼려지고, 일단은 피하고 싶었다. 언젠가는 정면으로 돌파해야만 할 일이지만, 지금은, 일단 지금만큼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걱정을 뱃속에 안고 끙끙 앓으면서도 이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불안감보다도, 지금 당장만큼은 황제에 대한 염려가 먼저였다. 누군가가 자신이 하고 있는 꼴을 본다면 멍청한 짓이라며 코웃음을 칠지도 모르지. 아니, 멀리 갈 것도 없이 스스로 생각해봐도 지금 자신의 행동은 미련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하지만···.

당장 눈앞에 있으면 걱정이 되는데 어쩌란 말인가. 서문경은 한숨을 쉬면서 조심스레 한 손을 뻗었다. 서문경의 손가락 끝이 황제의 이마에 드리워진 가만 머리카락 끝을 스치듯 건드렸다. 잠시 닿은 이마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런데 그 순간,

“앗!”

놀란 서문경이 비명을 질렀다. 끈 풀린 인형처럼 늘어져 있던 황제의 손이 불시에 서문경의 손목을 붙잡고 끌어당긴 것이다.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고 확 당기는 힘에 당황한 서문경이 비틀거리다 쿵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프잖습니까!”

이 인간이 진짜! 애틋하던 마음이 삽시간에 가시고, 부딪친 미골(尾骨)께를 신경질적으로 문지르며 서문경이 성을 냈다. 그제야 황제가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서문경을 올려다보았다. 그 시선을 사나운 눈으로 마주보았다가 서문경이 자신도 모르게 주춤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시선은 언제나처럼 가맸지만 어지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올려다보는 눈빛에서 숨길 수 없는 당혹이 그대로 전해져 와서 서문경은 당황하는 동시에, 가슴이 따끔해지는 것을 느꼈다. 유난히 까만 검은자위 때문인지, 아니면 무방비한 표정 때문인지 지금 황제는 낯선 곳에 갑자기 내던져진 어린애처럼 느껴졌다. 어째서 자신이 이런 행동을 했는지, 스스로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가면을 쓰듯 삽시간에 표정이 돌변한 황제가 빈정거렸다.

“둔부가 부실한 거냐? 털방석을 하나도 아니고 세 개나 깔고 앉은 놈이 무에가 그리 아파.”

황제를 멍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던 서문경이, 순간 자신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잊어버리고 움찔했다. 서문경이 세웠던 상반신을 굼실굼실 내리며 방석을 고쳐 앉았다. 

“뭐야···. 다 보고 계셨습니까?”

“듣고 있었던 게지.”

“주무신 게 아니었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서문경의 투는 묻는다기보다는 숫제 따지는 것 같았다.

“정말 악취미십니다.”

“악취미? 이런 고얀 새새끼를 보았나.”

황제가 서문경에게 네 놈이 슬쩍한 꿀물을 다시 내놓으라는 손짓을 해보이며 혀를 끌끌 찼다. 머쓱함을 숨기려 더 큰 소리로 투덜거리며 황가의 입가에 물그릇을 대주던 서문경이 일순 표정이 변했다. 가까이서 들어보니 황제의 숨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가느다랬던 탓이었다.

“폐하? 정말 편찮으십니까?”

숨소리는 가느다랬지만, 그와 동시에 쇳조각이 낀 듯이 거칠기도 했다. 황제의 가슴팍이 오르내릴 때마다 새근거리는 숨결이 마른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폐하!”

서문경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황제의 낯빛이 평소보다 한층 더 창백했었던 것도 같았다. 아픈 사람에게 난 무슨 짓을 한 거지, 침방으로 들이닥치자마자 자신이 황제에게 퍼부어댔던 폭언을 떠올린 서문경의 표정이 저절로 일그러졌다. 

“폐하, 드실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어의를!”

황제가 꿀물 한 모금도 넘기지 못하고 할딱거리자 서문경이 서둘러 장지문 쪽을 돌아보았다. 막 사람을 부르려는 서문경을 황제의 손이 붙잡은 것은 그 직후의 일이었다.

“폐하?”

자신의 손목을 감싸 쥔 황제의 손이 일순 섬뜩할 만치 차가워서 서문경은 두 눈을 크게 떴다. 흰 명주 수건으로 입가를 훔친 황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도 부르지 말라는 표시였다.

“하지만 이렇게 편찮으셔서야.”

“자주 있는 일이니 크게 염려할 것 없다.”

“자주 있는 일이라고요···.”

그렇게 말하는 서문경은 조금 허탈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해 대수롭잖게 말하는 황제의 태도에 그만 맥이 빠져 버린 것이었다. 푹신한 침에 기대어 앉은 황제가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제는 익숙해질 만도 한데 새삼스럽구나.”

“그렇긴 합니다만.” 서문경이 한숨을 한 번 쉬고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잘못된 일이 익숙해질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상대는 귀가 없다.”

예? 뜻밖의 말에 서문경이 놀란 얼굴을 하고 돌아보자, 황제는 장지문에 비치는 사람들의 그림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그림자를 바라보는 황제의 시선에는 뜻밖에도 증오도, 분노도, 짜증조차도 없었다. 때문에 서문경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다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황제가 말을 이었다.

“저것들은 실체가 없는 그림자다. 바람이 깎아 만든 바위요, 파도가 깎아 만든 절벽이다.”

“무슨 말씀을···,”

황제가 비로소 서문경 쪽을 돌아보았다.

“말해도, 들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잠시 후 황제가 말을 고쳤다. “아니, 듣지 않는다. 듣지 않으니 변할 리가 만무하다. 그런 치들을 상대로, 무슨 기대를 하란 말인가. 짐만, 그리고 그대만 곤권해질 뿐이다.”

“하지만, 폐하께서도, 가끔은.” 황제의 묘한 표정에 압도된 서문경은, 어째서인지 말 한마디 한마디를 목구멍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조차 힘겨웠지만 억지로 내뱉었다. 이유는 설명할 수 없지만 그래야만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가끔은 노여워하시고 또···.”

아. 황제의 건조한 신음이 서문경의 말허리를 끊었다. 멈칫한 서문경이 황제를 응시하자, 황제가 빙그레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참, 그랬었구나.”

“······.”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위화감이 서문경을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서문경이 꾹 입을 닫고, 혼란스러운 시선으로 자신 편을 쳐다보고만 있자, 황제가 새처럼 머리를 모로 기웃했다.

“깜둥새야, 왜 그러누?”

“아니요.” 

반사적으로 대답한 서문경이, 그렇게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두 눈을 껌뻑이며 서문경은 황제를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뜯어보아도 방금 전 자신이 느낀, 불투명한 유리막이 한 겹 걸려 있는 듯한 위화감은 발견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언제나와 같았다. 착각, 하고 생각했다가 서문경은 곧바로 단어를 고쳤다. 아니, 역시 내가 너무 예민했었던 모양이다. 그래. 바로 어제 그런 일이 있었고, 또 오늘도 깜짝 놀랄 만한 일이 있었으니까 그것도 무리는 아니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려 긴 한숨을 다시금 내쉬면서 서문경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저는 싫습니다.”

“무엇이 말이야?”

“익숙해지는 것이요.” 

서문경이 장지문을 힐끗 곁눈질했다. 서문경이, 조금 전의 화제를 끌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황제가 콧잔등이를 꿈틀했다. 단정한 미간에 야트막한 계곡에 파인다. 황제가 대답했다.

“네 기력만 도소(徒消)하는 짓이래두.”

“그래도 싫습니다.” 서문경이 단호하게 대꾸했다. 그리고 눈살을 구긴 황제를 똑바로 쳐다보고 말을 이었다. “그것이 설사 석상에 대고 악을 쓰는 일이라고 해도 저는 싫습니다.”

“어찌하여?”

“결코 변하지 않을 일이라 해도 잘못된 일 아닙니까. 잘못된 일이 저마져 익숙해지면···,”

“익숙해지면?”

서문경이 갑자기 불끈 주먹을 쥐었다.

“지는 기분이 들잖습니까.”

“허?”

“그러니까 폐하께서도 그러시지 마십시오.”

익숙해지면 지는 겁니다! 주먹을 콱 쥔 서문경이 말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어 말했다. 서문경이 하는 말을 듣고 어이가 없는 나머지 허, 하며 벌어졌던 입술이 하, 하는 모양을 만들었다. 이쯤 하면 됐겠지, 싶어 슬슬 도망칠 준비를 하면서 서문경이 고개를 들었다. 

“아시겠지요? 그러니까,”

채 말을 끝맺지 못하고 서문경이 비명을 질렀다.

“으악!”

황제의 두 손이 갑자기 뻗어와 뒤에서부터 서문경의 몸을 콱 껴안은 때문이었다. 비명을 내지른 서문경이 반사적으로 몸을 버둥거리자, 서문경의 가슴팍과 목을 안은 팔에 단단하게 힘이 들어갔다. 뼈 밖에 남지 않은 가느다란 팔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오는지,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빠져 나올 수가 없어 서문경이 결국 반항하기를 포기하고 머리를 조금 뒤로 돌렸다. 어떻게든 살살 꾀어 이 팔을 풀게 해야,

“경아.”

그 때였다. 귓전을 때리는 황제의 목소리에 서문경이 멈칫했다. 그 나직하고 황홀하도록 단 탄식이 섞인 목소리는 황제의 것 같지가 않았다. 깊은 숨을 한 번 내쉰 황제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가끔 네 놈은 짐을 미치게 만들 때가 있어···.”

“폐하?”

“경아, 경아, 경아.” 황제가 서문경의 뒷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짐의 옥비(玉妃)가 되어 주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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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도 예전 같지 않군.”

하고 누군가 말했다. 혀 차는 소리라도 추임새로 넣어야 할 법한 말의 내용과는 달리 해는 동편에서 뜨고 서편에서 진다고 말하는 듯한 무심한 투였다. 서현은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마침 바람이 그 편을 향하고 있었다. 

“한 시름 놓을라치면 염소니 수탉이니 하는 것들이 몰려들어 떠들어대니.”

상량각(上凉閣)도 예전 같지 않다 한탄한 이가 다시금 말했다. 그의 시선은, 그의 맞은편에 앉은 서현의 어깨 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서현이 무심코 뒤돌아보자 멀리서 누군가가 똑바로 상량각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것이 곧바로 눈에 들어왔다. 큰 키에 휘적휘적 걷는 걸음걸이가 몹시 눈에 익었다.

“염락?”

“누군가 했더니, 여우 새낀가.”

뒤에서 픽 웃는 기색이 느껴졌다. 서현의 반듯한 이마에 오목한 주름이 파였다.

“아버님.”

“내가 못할 말이라도 했느냐? 어찌하여 그런 눈으로 보는 게냐.”

남자의 난폭한 말에 서현이 나직한 투로 남자를 만류하자, 남자가 당장 낮아진 목소리로 서현을 윽박질렀다. 태도가 돌변하여 울근거리는 남자를 응시한 채로 서현은 잠시간 침묵했다. 남자를 바라보는 서현의 표정은 여느 때처럼 무심했지만, 정작 마음의 창에 어린 눈빛은 다소 착잡했다. 그 눈빛이 오래된 서책에 가라앉은 먼지처럼 무겁고, 지친 듯이 희뿌옇다.

어느덧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어르신 말씀이 옳습니다.”

쾌활한 목소리가 서현과 남자 사이에 끼어든 것은 그 때였다.

“염락.”

왔나, 하고 반기는 말도 없이 서현이 조원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와 눈을 맞추며 조원이 한 번 빙긋 웃어 보인 다음, 서현의 뒤에 앉아 있는 남자 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조원의 시선을 눈치 챈 남자의 눈꺼풀이 위로 한 번 꿈틀했다. 

“야호(野狐) 대령했습니다, 어르신.”

자신이 방금 조원을 두고 여우 새끼니 뭐니 한 것을 빈정거리는 말이었다.

“방자하게 입을 놀리는 꼴을 보니 당장 가죽이 벗겨져도 할 말이 없음이로군.”

“어이쿠, 어르신쯤 되시는 분께서 호백구(: 여우 겨드랑이의 흰 털이 있는 부분의 가죽으로 만든 갑옷)가 모자라기라도 하시는 겁니까?”

남자의 서슬 퍼런 위협에도 조원이 움츠려드는 기색 하나 없이 오히려 너스레를 떨었다. 그 말에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하던 남자의 얼굴이 종이짝마냥 와작 구겨지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남자가 언제 그랬냐는 듯 돌변하여 껄껄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여전하군, 염락.”

남자가 웃으며 말하자, 조원 또한 빈정거리는 기색이 강하던 웃음을 거두고 정중히 남자 앞에 인사를 올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르신.”

“그래, 상량각에는 웬 일인가?”

하고 물으면서 남자가 서현 쪽을 흘깃 눈짓으로 가리켰다. 작게 턱 끝을 끄덕인 조원이 서현에게 다시 시선을 돌리자, 서현이 천천히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얇은 옥 같은 눈꺼풀에 색이 옅은 눈동자가 사라졌다가 다시 떠오른다.

“신새벽부터 바지런을 떨었다지?”

침묵하는 서현을 대신하기라도 하듯 남자가 입을 열었다. 바지런을 떨다니요?, 자신을 향한 말에 조원이 중얼거리며 눈꺼풀을 조금 치켜 올렸다.

“그래, 물손님은 잘 뵈고 왔나?”

남자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 조원의 눈이 조금 커진다 싶더니, 잠시간 조원과 남자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내내 보이지 않는다 싶었더니, 청의관에 다녀왔던가.”

그 침묵을 깬 것은 서현의 담담한 목소리였다.

“근래에 그 자와 퍽 좋아 지낸다 하더군. 역시 같은 범님의 백성인지라 마음이 맞았는가.”

서현이 덧붙인 사족에 남자가 픽 웃었다. 언뜻 들으면 꾸지람처럼 들리는 말이 실상은 조원을 감싸려는 말이라는 것을 눈치 빠르게 알아챈 탓이었다. 나무라는 듯한 빛을 띤 남자의 눈이 자신을 노골적으로 훑는 것을 느끼고 서현의 낯빛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다른 누구에게 흘린 적도 없는 자신의 행적을 남자가 알고 있는 것에 반사적으로 표정이 굳었었던 조원이 가까스로 웃는 얼굴을 가장하고 끼어들었다. 

“어르신, 그 소문은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소문?”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

“소문이라 둘러댈 셈인가. 그리고, 대체 어디서 그런 소문을 주워 들었냐니.”

조원의 물음을 제 식으로 난폭하게 탈바꿈시켜 버린 남자가 웃었다. 약간 마른 입술에서 픽하고 바람 새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조원은 그 쪽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똑바로 남자를 응시하는 모습과는 달리, 그런 그의 시선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화방석 위에 반좌(盤坐)를 한 남자는 조원의 눈에 마치 나이 든 맹금(猛禽)처럼 보였다. 아니, 단순히 나이가 들었다는 표현보다는 원숙함에서 우러나온 위풍이 풍기는 남자라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조원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얼굴 전체에는 은은한 웃음기가 어려 있고,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 생김새 또한 뛰어난 미형은 아니었지만 오래된 소나무처럼 단아하면서 온화한 멋이 있었다. 그러나 그 온화한 눈매 안에 박혀 있는 눈은 잘 벼린 칼날마냥 매서웠고 파르스름한 예기(銳氣)마저 서려 있는 듯하였다. 

조원이 남자의 오만한 말에 공손히 대꾸했다.

“어르신의 말씀이 옳습니다. 이 궁내에서 일어나는 일 중 어르신께서 모르시는 일이 있을 리가 만무하지요.”

그렇게 말하며 조원은 조금 눈을 옆으로 돌렸다. 시선을 피하는 자신을, 남자의 차가운 눈이 쫓는 것이 느껴졌다. 그 시선에 응시 당하자 순간적이지만 뒷덜미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남자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돌린 시야 끝에 서현의 얼굴이 들어왔다. 고개를 모로 돌리고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는 서현의 옆얼굴은 잔뜩 긴장한 동시에 몹시 지쳐 보였다. 눈앞에 큰 바위가 와 떨어져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평상시의 그를 떠올려 보면 기이하게 여겨질 만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조원은 서현의 그런 표정을 보고도 조금도 의아해하지 않았다. 서현 뿐만이 아니라 자신 또한 머릿속에서 피가 바짝바짝 말라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 물손님에 대해서는 근래 여러 가지 풍문이 돌고 있더군.”

온 몸의 물기가 말라가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장본인인 남자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꺼냈다. 서현은 내심 한숨을 쉬며 그를 바라보았다.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지만 온 몸에서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느껴지는 남자가 보인다.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을 눈치 챈 듯 남자의 눈매에 매달린 웃음이 조금 더 짙어졌다. 

헌의공 서엽. 선황제인 강윤제 대의 수상이자, 강윤제가 붕(崩)하고 어린 황자가 황좌에 앉은 후 몇 년 간이나 태황태후 엄씨와 함께 섭정의 자리에 있었던 권신(權臣). 또한 그는 현 수상인 서현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서현이 조심스러운 투로 자신의 아버지 서엽을 만류했다.

“풍문은 어디까지나 풍문일 뿐입니다. 아버님께서 마음에 깊이 담아 두실 필요는 없다 사료됩니다.”

“내가 언제 네 생각을 물었더냐.”

그러나 그 신후한 만류에 돌아온 것은 찬바람이 불다 못해, 경멸하는 기운까지 섞인 매정한 대답이었다.

“어디까지가 참이고, 또 어디까지가 거짓인지도 이 아비가 분간치 못할 것 같으냐.”

불 같이 서현에게 폭설을 퍼부은 서엽이 다음 순간, 다시 사람 좋은 얼굴로 돌변하여 조원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무시무시한 변화에 넉살좋은 조원조차도 움찔한 듯, 섬돌 앞에 서 있던 조원이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그것을 못 본 척 하고 서엽이 말했다.

“그 물손님과 친분이 있다고?”

“친분이 있다고 할 만한 관계는 아닙니다.”

“그래, 어떤 자냐, 그 치는?”

서문경과 잘 아는 사이냐는 물음에 조원은 곧바로 부정했지만, 서엽은 그의 말을 듣지도 않고 이어서 그렇게 물었다. 자신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서엽의 태도에 조원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그런 조원의 눈에 서현이 잔뜩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것이 들어왔다. 섣불리 입을 놀리지 말라는 주의였다.

“그 나이 또래의 그저 그런 사내애입니다. 어르신께서 친히 하문하시니 있는 것 없는 것 모두 말씀 올리는 것이 예의일 테지만 그 수객에게는 하등 특별한 점이 없으니 저로서는 민망할 따름입니다.”

조원의 대답에 서엽이 코웃음을 쳤다.

“그럼 황상의 용안(龍眼)이 흐려지셨나 보구나.”

그렇게 말해 놓고 그가 곧바로 아니다, 하고 말을 고쳤다.

“황상께서는 아직 제좌에 오르시기 전, 연소하셨던 황자 시절에도 그런 면면이 있으셨지. 모후를 일찍이 잃으신 탓인지 정이 굶주린 면이 있으셨어. 그러하신 분이니 손바닥 위의 새가 어여쁜 밤꾀꼬리든 꾀죄죄한 벼 도둑놈이든 개의치 않으실 것이 뻔하지.”

“빈작(賓雀: 참새)이라···.”

“통탄할 만한 일이 아닌가. 그런 상스런 놈에게 황상께서는 백희궁을 통째로 가져다 안길 기세로 빠져 계시다 하니.”

“벌써 그 말까지 들으셨습니까.”

서엽이 불만스레 내뱉은 말에 조원이 혀를 내둘렀다. 하루 종일 황궐 내를 휘젓고 다니는 자신조차 겨우 이십 여 분 전에 현 황제의 외척인 엄헌영의 입을 통해 들은 소문이다. 그것을 궁내에 사는 것도 아닌 서엽이 벌써 알고 있을 줄이야, 어떻게 생각해 보면 등골이 섬뜩해질 만한 일이었다.

“무어. 소인의 짧은 생각으로는 세상이 두어 번 뒤집혀도 그런 일은 있지도 않을 것 같습니다만···.”

엄헌영에게 백희궁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순간, 황제를 백희궁 기둥에 묶어 짓뭉개버릴 기세로 청의관을 뛰쳐나가던 서문경의 기세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무심코 중얼거린 말을 용케도 알아들은 서엽이 조원 쪽을 바라보고 싱긋 웃었다. 습관적으로 웃음을 흘린 덕분에 깊숙이 잡힌 눈주름을 따라 다시 한 번 주름이 파이고, 그 다정한 눈매 안에 담긴 눈이 예리한 빛을 발했다.

“짐작했던 대로 자네는 그 자에 대해 뭔가 더 알고 있는 모양이구먼.”

“어르신이 직접 행차하실 값어치도 없는 범부(凡夫)입니다.”

“값어치가 있느냐 없느냐 정도는 자네가 아닌 내가 판단해야 할 일이지.”

안 그런가?하고 날카롭게 물은 서엽이, 이제 생각났다는 듯이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운현궁 마마께도 이미 선을 보이고, 또 그 눈 높은 어르신께서도 그 자를 퍽 달가워 하셨다니 내 어찌 아니 궁금해 질 수 있겠나.”

“염락의 말이 옳습니다, 아버님.”

그 때 한숨을 쉬며 서현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런 서현을 응시하며 말없이 서엽이 웃었다. 

“늙은 아비가 겨우 소일거리를 찾았건만, 그것을 방해할 셈이냐, 소희(小熙)야.”

어린 계집아이에게나 붙일 법한 자신의 아명(兒名)을 들은 서현의 얼굴이 와자작 구겨졌다. 그러나 서현은 얼굴로는 모두 비록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지었을망정, 입으로는 자신의 아버지를 말리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염락의 말대로, 서푼짜리 사내애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서현의 시선이 조원의 얼굴을 슥 스쳤다. 그 시선에서 서현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눈치 챈 서엽이 옳다, 하고 무릎을 쳤다.

“옳다. 그렇지. 붕익의 날개를 타고 온 손님들처럼 쓸 만한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거기에, 언제 황좌에서 물러나도 이상하지 않은 황제가 아무리 익애(溺愛)해 봐야 무슨 위협이 되겠느냐.”

그 말에 서현의 좋지 못하던 낯빛이 조금씩 원래대로 돌아오는가 싶었다. 그러나,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 아비는 그 빈객이 어떤 놈인지 궁금하여 몸이 근질근질하구나.”

곧바로 이어진 말에 서현의 표정이 싹 굳었다. 서현이 바로 입을 열었다.

“굳이 처소에까지 행차하실 가치도 없는 이입니다.”

“처소에 붙어 있는 적도 거의 없는 것을요.”

조원도 흉인지 뭔지 모를 말로 서현을 거들었다. 그러자 서엽이 휘휘 손을 저었다.

“누가 누추하기 짝이 없는 청의관까지 행차한다 했더냐? 그보다는, 그래···.”

서엽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서현이 고개를 돌렸다. 서현과 조원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두 사람 모두,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라도 느낀 듯한 오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자가, 천추전에 자주 드나든다 했었지?”

“아버님, 설마.”

“천추전에는 들지 않는다. 퇴역한지 수년도 지난 노친네가 괜히 침전까지 들어서 무엇 하겠느냐. 다만···.”

서엽이 불현듯 가벼운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늙으니 새벽잠이 주는 대신 호기심만 늘지 무어야.”

**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어찌 대답이 없어? 서문경을 뒤에서 거의 끌어안다시피 한 황제가 사슴처럼 긴 목을 쑥 내밀어 서문경의 표정을 훔쳐보았다. 표정이 얼음장처럼 굳은 채로 서문경은 옥송골(玉松?) 같은 눈만 연신 껌뻑거리고 있었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지만, 화가 났다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순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그런 표정이었다. 그래서 황제는 서문경의 귓전에 다시금 속삭였다.

“짐의 옥비(玉妃)가 되어 주련?”

응? 진주 보석마냥 늘 쓰다듬어 주고 어여삐 여겨 주마, 응? 서문경의 하얀 귀에 붉은 입술을 붙인 황제가 서문경을 얼렀다. 황제의 입술이 작게 열렸다 닫힐 때마다 나직나직한 속삭임과 함께 달고 따뜻한 숨결이 새어나와 서문경의 귀를 간질였다. 그 숨소리가 귀를 자극하고 나서야 바짝 굳어 있던 서문경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녹슨 철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비꺽비꺽 힘겹게 서문경이 고개를 돌렸다가, 황제의 얼굴이 어느새 자신의 얼굴 바로 옆에 와 있는 것을 깨닫고 화들짝 튀어 올랐다. 서문경이 빽 소리를 질렀다.

“이, 이이이이, 이게 무슨!”

“약조하마.”

황제가 펄쩍 선 자리에서 뛰어오르는 서문경을 추슬러 품 안에 가두며, 한 손을 뻗어 서문경의 턱을 억지로 자신에게 돌렸다. 황제에게 턱을 잡힌 서문경이 서둘러 고개를 흔들었지만 그의 턱을 움켜쥔 황제의 깡마른 손은 돌덩어리라도 되는 듯이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것에 서문경이 당황한 틈을 타 황제가 서문경을 구슬렸다.

“경이 네가 이대로 짐의 품에 폭 안겨 주기만 한다면 내 살아생전 너 외의 계집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으마, 응? 짐 말고 또 어느 황제가, 아니, 어느 사내가 정인에게 이런 약조를 할까?”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꽃꿀이라도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황제의 말에 서문경이 감동하기는커녕 진저리를 떨면서 외쳤다. 서문경이 파르르 떨며 몸부림을 치자, 서문경의 어깨와 턱을 억세게 움켜쥐고 있던 황제가 거짓말처럼 서문경을 놓아 주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황제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온 서문경이, 황제가 힘껏 손을 뻗어도 자신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거리를 벌린 후에야 고개를 치켜들고 황제를 노려보았다.

“이, 이건 말이 다르지 않습니까!”

서문경의 항의에, 황제가 턱을 치켜들고 오만한 눈길로 서문경의 사나운 눈초리를 받아쳤다.

“짐이 못할 말이라도 했느냐? 왜 그렇게 떽떽대는 게야?”

“분명히 폐하께서 확답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백희궁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꺼내지 않으시겠다고요!”

“마음이 바뀌었느니.”

핏대까지 세우며 항의한 서문경이 무색해질 만치 황제가 심드렁한 태도로 대꾸했다. ‘짐이 제국의 살아 있는 법이거늘 짐이 좀 말을 바꾸고 또 법을 바꾼들 뭐 어떻다는 말이냐?’하고 말하는 듯한 황제의 뻔뻔스런 태도에 서문경이 일순 말문이 막힌 사이, 팔짱을 척 끼고 선 황제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닐 터인데.”

“예?”

서문경이 천천히 눈살을 찌푸렸다. 황제가 척척 걸어와 주춤 몸을 움츠린 서문경의 코앞에 와 멈췄다. 혹시라도 황제가 다시 자신의 턱을 움켜잡을까봐 있는 대로 몸을 뒤로 뺀 서문경을 향해 황제가 느릿하게 허리를 숙이고 머리를 치켜들었다. 신기한 동물을 살피는 듯한 눈길이었다.

“이 까막새야, 짐이 무어라 말했었는지 제대로 기억이나 하는 게야?”

“그야!”

자신이 방금 들은 말도 잊어 버렸을 것이라고 여기는 듯한 황제의 말투에 발끈한 서문경이 대뜸 목소리를 높여 놓고 불현듯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한 쪽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천천히 모로 기울였다. 서문경이 잠시 말이 없자, 황제는 서문경의 얼굴을 들여다보느라고 숙였었던 허리를 꼿꼿하게 펴며 혀를 끌끌 찼다.

“어찌 이리 반응이 느릴꼬.”

진짜 새도 아닌데 말이다, 하는 말에 서문경이 자신도 모르게 두 팔로 제 머리를 감싸 안았다. 나는 새대가리가 아니야!, 하고 외치는 듯한 행동에 황제가 킬킬 마른기침 소리가 섞인 웃음을 흘렸다.

“이제야 짐이 무슨 말을 했었는지 생각이 난 모양이지.”

“그러니까···.”

눈으로는 매섭게 황제를 노려보면서 서문경이 입으로는 꾸물꾸물 제대로 된 말을 하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황제는 그런 서문경은 어여쁘다는 듯한 눈길로 그윽하게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 

“그러니까···.”

“어허!”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계속해서 서문경이 뜻도 없는 말만 반복하자,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인내심이 바닥이 난 황제가 버럭 역증을 냈다. 

“입이 없나, 혀가 없나! 제대로 말 하지 못할까!”

“그러니까.” 다시 한 번 같은 말을 반복하고서 서문경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눈으로 황제를 올려다보며, 비장한 각오가 서린 목소리로 힘들게 물었다. “그 말씀, 진심이십니까?”

황제가 코웃음을 쳤다.

“그럼. 지존된 자가 이 천금 같은 혀로 거짓부렁을 지껄일까.”

순간 몇 분 전 분명히 저것과 비슷한 거짓부렁을 들은 것 같은데, 하는 말이 머릿속에 섬광처럼 스치고 지나갔지만 서문경은 황제의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대신 이렇게 묻는 것을 택했다. 시원하게 뻗은 서문경의 목 한가운데에 튀어나온 뭉뚝한 돌기가 다시 한 번 오르내렸다.

“어째서요?”

황제가 입을 열었다.

**

곧바로 느물거리는 대답이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무르익은 석류처럼 입술을 조금 벌린 채로 황제는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안에는 분명히 알알이 맺힌 석류 알만큼이나 많은 말들이 들어 있을 터인데,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뜻밖의 상황에 서문경은 당황한 시선을 들었다. 그렇다가 그의 얼굴에 당혹스런 기색이 어리었다. 자신을 말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 황제의 얼굴이 당황실색(唐慌失色)하여 창백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폐하?”

“어찌하여서.” 황제가 우물거렸다. 서문경이 눈썹을 구겼다. 한참을 기다려 겨우 말 비슷한 것을 하기는 했으되, 그의 시선이 자신을 빗겨 나가고 있었던 탓이었다. 혼잣말인가? 서문경이 생각하는데, 황제가 말을 이었다. “어찌하여 그런 마음을 품었느냐고?”

황제는 시선을 돌렸다. 황제의 가만 눈이 자신을 향하자 서문경이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다. 황제가 물었다.

“그것이 무어 중요하더냐?”

“예?”

“중요한 것은 짐이 그대를 내 옥비로 맞아 품 안의 황리(:꾀꼬리)마냥 어여삐 여겨 주고 정겹게 끌어안아 입 맞춰 주고 그대의 마음이 흡족하도록 매일 고운 옷 더운 음식과 빛나는 옥구슬을 밤하늘의 경하(傾河)처럼 뿌려 주리라는 것뿐이다. 그대가 고개만 한 번 끄덕여 준다면 짐은 일생을 그대만 품어 총(寵)하며 다른 치는 돌아보지도 않을 것이다. 제국의 천자가 이리 말해 주는데 이 외에 또 무엇이 중요하단 말이냐?”

“폐하···.”

서문경의 얼굴이 흐려졌다. 이리 오너라. 황제가 서문경을 향해 서둘러 두 팔을 뻗었지만, 서문경은 되레 뒤로 물러났다. 황제의 눈이 커졌다. 충격을 받은 것처럼 그의 눈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본 서문경의 얼굴에 의혹이 더 짙어졌다.

서문경이 물었다.

“왜 그러시는 겁니까?”

“짐이 싫으냐?”

“그런 말은 한 적도 없잖습니까, 그저 저는 왜 이렇게 서두르시는지 알 수가 없어서 그럽니다. 솔직히 당혹스럽습니다. 왜 갑자기 저를 비로 맞으시겠다 하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하면 좋겠다는 지려(志慮)가 들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더냐?”

“부족합니다!”

서문경이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몇 번이고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폐하도 저도 남자입니다. 이 나라 사람들에게는 그런 사실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지 몰라도, 저는 아닙니다. 전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유를 들어야겠습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요? 그것만이라면 전 납득할 수 없습니다.”

몰아치듯 말하고서, 서문경은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이미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했으니, 네 놈도 입이 있다면 대답해 보라는 식의 행동이었다. 황제는 매서운 눈으로 그런 서문경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서문경이 피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그 시선을 받아쳤다. 네가 아무리 노려봐도 나는 옳은 말을 했으니 부러질지언정 꺾이지는 않으리라는 표정이었다.

고집을 부리는 서문경을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노려보던 황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는 이미 결론을 내리고 있다.”

황제의 입 안에서 튀어나온 것은 비난이었다. 이번에는 서문경의 눈이 커질 차례였다. 무슨, 서문경이 중얼거리자마자 그 말허리를 황제가 뎅겅 잘랐다.

“이유가 무엇이든 너는 싫다고 할 셈이 아니냐.”

“그건,”

“아니더냐? 그럴 듯한 이유가 있다면 순순히 짐의 비가 되어 줄 테냐? 아니지 않느냐.”

“그러시는 폐하는.” 발끈한 서문경이, 자신이 황제가 불현듯 고집을 부리는 이유를 듣고자 했다는 사실도 잊고 반박했다. “제가 뭐라고 대답하든 뜻을 이루실 셈이 아닙니까?”

“빌어먹을 깜둥새.”

황제가 말하며 서문경의 두 볼을 쭉 잡아 늘렸다. 병든 닭처럼 늘 골골거리는 주제에 어찌나 행동이 빠른지, 이번에는 서문경이 피할 틈도 없었다. 서문경의 코끝을 자신의 코끝으로 찌르며 황제가 목구멍 안으로 아르릉거렸다.

“두고 보거라. 네 녀석 쪽에서 먼저 부리 쫙쫙 벌리고 짐의 품 안에 안겨들게 될 테니까 말이다.”

“제 눈에 흙이 들어가지 않는 이상은 그럴 일 없을 겁니다.”

“흙 뿌려 주랴?”

흙은 없으니 급한 대로 재라도. 황제가 불이 꺼진 곰방담뱃대를 슬쩍 들어 올리자 서문경이 기겁을 했다. 광증(狂症)이라도 드셨습니까! 급히 몸을 피하며 서문경이 외치자 황제의 눈꼬리가 싹 치켜 올라갔다. 황제가 팔을 걷으며 나섰다.

“말본새 좀 보게. 오라, 네 놈이 한 번 털이 홀랑 벗겨져 기름에 튀겨져 봐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가, 갈 겁니다!”

자신이 실언을 했다는 생각과 함께, 위기감을 동시에 느낀 서문경이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콧방귀를 한 번 뀐 황제가 푸른 궁초(宮?)침에 등을 기대고 뻐끔뻐끔 담뱃대를 빨았다. 황제가 마치 쥐새끼를 노리는 매처럼 달려들어 자신의 발목을 낚아챌 것이라 경계하고 있던 서문경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황제가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자, 불현듯 불안한 기분이 들었던지 슬그머니 곁눈질을 했다. 그것을 귀신처럼 알아챈 황제가 서문경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불퉁하게 내뱉었다.

“간다면서?”

“갈 겁니다.”

그 대답과는 달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문경이 보료방석을 끌어다 앉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래서 눈만 돌려 쳐다보았더니, 역시나 서문경이 초록 수석(繡席) 위에 오도카니 올라앉아 자신 쪽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뭐냐, 깜둥아. 뻐끔, 담뱃대를 한 번 더 빨면서 황제가 눈짓을 보냈다. 발끈한 서문경이 같은 말을 힘주어 반복한다. 

“갈 겁니다.”

“그래, 가거라.”

“갈 겁니다. ···용건만 끝나면.”

뜻밖의 말에 황제가 콧잔등이를 꿈틀했다.

“용건?”

“저더러 어쩌란 말입니까?”

“으응?” 황제는 입에는 연죽(煙竹)을 문 채로 고개를 모로 한 번 갸웃했다. “얌전히 봉(鳳) 첩지를 받으면···.”

“아니, 아니, 아니, 그것 말고.”

서문경이 팔목이 뚝 부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기세로 두 손을 흔들었다. 

“잊고 계신 것이 있지 않습니까? 얼마 전에, 대연회 때 폐하의 예인으로 나가 달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왜 자세한 말씀이 없으신 겁니까? 대연회가 대충 어떤 식으로 열리는지, 제 차례는 언젠지, 또 제가 그곳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씀을 해주셔야 제가 준비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리 신경 쓸 것 없느니.”

높은 침 위에 턱을 괴고 앉은 황제가 시퉁하게 내뱉었다. 그게 뭐 그리 중요한 연회라고. 시큰둥하기 짝이 없는 그의 태도에 서문경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그, 그런가? 헷갈리고 있는 것이 분명한 서문경의 얼굴을 흘깃 보고 황제가 말했다.

“그것 외엔 용건은 또 없는고?”

“그···, 렇습니다만.”

태황태후가 그리 닦달을 해대고, 권가(權家)의 여인들은 물론이요 심심찮게 여가(閭家)의 아낙들까지 궐 안에 드나들었던 것을 보면 절대 ‘고깟 것’정도로 취급될 연회가 아닌 듯한데 참으로 이상하다. 하지만 황제의 반응이 저리도 시들하니. 

서문경이 자신이 눈으로 보고 들은 사실과 황제의 반응 사이에서 이리 기울었다, 저리 기울었다 하고 있는데 불쑥 황제가 서문경의 볼을 연죽 끝으로 툭 쳤다. 앗, 차거! 따끈하게 달아올라 있던 볼에 찬 옥석이 닿자 뒷덜미가 섬뜩해져서 서문경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앉은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황제로부터 화다닥 물러난 서문경이 찬 기운이 남은 볼을 문지르며 황제를 노려보았다. 황제가 곰방대 물부리를 후후 불고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곰곰이 하누. 신경 쓸 것 없대두.”

앉아서 구경만 할 예정인 넌 그렇겠지. 그렇게 쏘아 붙이고 싶었지만, 서문경은 꾹 참았다. 내춘 대연회가 황제의 말대로 보잘 것 같은 연회든, 아니면 그 이름에 걸맞게 큰 축제든 간에 황제를 대신해서 참가하는 이상 꼼꼼히 준비를 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한창 생각에 잠겨 있던 서문경이 일순 흠칫했다. 황제를 대신해서 참가하는 이상? 아니다, 어차피 참가하기로 한 이상은, 이겠지. 좋아. 아무도 듣지 못하건만 제 마음 속에서 말을 고치고 혼자서 만족한 서문경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갈게냐?”

자리에서 일어선 서문경을 힐끔 보고 황제가 물었다.

“갈 거라고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입만 그렇게 놀리고 도통 엉덩이를 뗄 생각을 하지 않기에 여기 아랫목에 떡처럼 눌러 붙을 심산인 줄 알았지.”

“갈 겁니다!”

으르릉 화를 내며 소리친 서문경이 씩씩거리며 뒤돌아섰다. 그러다가 불현듯, 그가 뭔가가 생각난 것처럼 뒤를 돌아보더니 화를 내듯이 쏘아붙였다.

“방금은, 실언이었습니다.”

“? 무어가? 안 가려고?”

“그게 아니라.” 팍 눈썹을 찌푸린 서문경이 입 속으로 우물거렸다. “광증이 있으니 어쩌니 한 게···, 아무래도.”

거기까지 말한 서문경이 콱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런 서문경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황제가 픽 바람소리를 내며 웃자, 그것이 비웃음이라고 생각했는지 서문경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서문경이 외쳤다.

“실언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비웃으실 건 없잖습니까!”

그렇게 살지 마십시오! 사과와 비난이라는 모순된 말을 한꺼번에 내뱉은 서문경이, 혹시나 황제가 무어라 반박을 할까 두려웠는지 서둘러 침방을 나가버렸다. 

쿵쿵거리는 발소리에 놀라 황급히 장지문을 연 나인들이 감히 황제의 안전에서 발소리를 내는 서문경의 포만무례(暴慢無禮)함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은 진노한 황제가 당장 재떨이며 침이며 물그릇이며 온갖 물건을 손에 잡히는 대로 던지며 포악을 떨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황제의 침방 안은 마치 든 사람이 없는 것처럼 고요했다.

그 때 침방 안에서 황제의 밭은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극침(棘針: 살이 에이는 듯 찬바람)이 든다.’, 그 소리가 대령상궁 연재 화연이 나인 아이들을 꾸짖으며 장지문을 닫았다. 이미 서문경은 침전을 뛰쳐나가버린 뒤였다. 

황제는 닫히는 장지문 사이로 나인들의 시선이 서문경의 뒷모습을 좇는 것을 보았다. 저런 꼴로 뛰쳐나갔으니 아마 늦어도 내일 아침쯤이면 물손님이 황제의 총애를 믿고 방자하게 날뛴다는 소문이 돌지 싶었다. 황제는 끌끌 혀를 차면서 담뱃대 끝을 옥돌 재떨이에 한 번 털었다. 그러자 부싯돌도 당기지 않았는데, 담뱃대 끝에 후룩 붉은 불이 들어왔다. 솔솔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를 뻐끔거리면서 황제가 중얼거렸다.

“누가 깜둥새 아니랄까봐.”

머리까지 새대가리면 어쩌누. 자신이 자극하기는 했지만, 저렇게까지 알아서 척척 늪으로 걸어 들어가 주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그러다 문득, 황제가 웃었다. 침방을 나가기 직전 서문경이 했었던 말이 기억난 탓이다. 죄송하다, 실언이었다라. 홧김에 삿된 말을 해 놓고 그것이 그리 가슴에 사무쳤던 모양이었다. 정작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서문경이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 자체도 잊고 있었는데. 황제는 침방 입구에 쳐진 구슬주렴을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자르르르 윤기가 흐르는 색색의 비단실에 푸르고 희고 붉고 노란 보석 구슬들이 꿰어져 있는 것이 참으로 어여뻤다.

“곱다.”

황제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렇게 중얼거리는 황제의 가만 눈은 구슬주렴을 향하고 있지 않았다. 황제의 시선이 화려한 구슬주렴을 지나 금분(金粉)을 먹인 나비모란장을 지나 사람이 앉아 있지 않은 녹색 보료방석에 이르렀다. 금실로 수놓은 제병 안에 잎이 돋은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는 황금새 한 마리가 들어 있었다. 어딘가를 까만 눈으로 응시하고 있는 금의공자(金衣公子: 꾀꼬리)를 황제가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툭 내뱉었다.

“참으로 고와.”

그래서, 무작정 품 안에 품고 싶어졌다. 

-이유는?

또랑또랑하게 묻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듯 했다. 하지만 황제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못했다. 이유를 자신조차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아니지···.”

황제가 불현듯 시선을 내리깔고, 생각을 고쳤다. 알 수 없다고. 아니다.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이유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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