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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은 자신의 말을 들은 서문경이 당장 화를 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아무리 기다려도 일어나지 않았다. 잠시간 청의관 호박방(琥珀房)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두 눈을 홉뜬 채 입을 다문 서문경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화를 낼 기운조차 상실해 버린 것 같았다. 그 아연한 침묵에 조금 머쓱해진 조원이 무심코 엄헌영 쪽을 바라보았다.
엄헌영은 여전히 서문경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굳게 입을 다문 옆모습에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수 없었다. 엄헌영의 옆얼굴에서 시선을 돌리며 조원이 내심 혀를 찼다.
‘저 도령은 당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겐지.’
서문경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으며 우연히 엄헌영과 조우한 것이라 말했었지만 지금 조원의 머릿속에는 엄헌영에 대한 의구심이 똬리를 튼 뱀처럼 묵직하게 들어앉아 있었다.
엄헌영과 청의관에 오던 길에 우연히 조우했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들은 청의관과 창혜각 사이에 있는 승향각(承香刻)에서 마주친 터였다. 엄헌영과 승향각에서 마주친 것이 무슨 문제인가 하면, 문무백관이 황궁에 입궁(入宮)할 때 사용하는 홍휘문(弘暉門)에서 좌우로 빠지지 않고 쭉 걸어 들어오면 나오는 곳이 바로 승향각이기 때문이었다. 상황을 파악해 보면 이야긴즉슨 이렇다. 엄헌영은 홍휘문 좌측에 있는 대전에 들르기 위해서도 아니고, 또 홍휘문 우측에 있는 태황태후의 운현궁에 들르기 위해서도 아닌 오로지 청의관에 들르기 위해 입궁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어제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하고 생각하며 조원은 서문경 쪽을 바라보았다. 재미있게도, 호박방에 들어온 이래 서문경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는 엄헌영과는 달리 서문경은 놀라서 제정신이 아닌 지금조차도 엄헌영을 피하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상반된 모습에 조원이 묘하군, 하고 생각했다가 다음 순간 알겠다는 듯이 턱 끝을 주억거렸다.
서문경과 일부러 눈을 맞추자 서문경의 눈이 반사적으로 찌푸려졌다. 뭐요, 하고 불만스레 묻는 듯한 솔직한 표정에 조원이 웃음을 삼키고 엄헌영을 곁눈질로 가리켰다. 그 단순한 눈짓 하나만으로 조원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챘는지 서문경이 팩 고개를 돌려버렸다. 까만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시뻘겠다.
참으로 닮았지, 하고 생각하면서 조원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효강께서는 야금에게는 무슨 일로?”
시선을 끌기 위해 묻자, 생각대로 엄헌영의 시선이 자신을 향했다. 그 얼굴 위에 황제의 얼굴이 고스란히 겹쳐졌다. 황제의 얼굴이 먹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느낌이라면 엄헌영 쪽은 유채화(油彩畵)로 그린 것 같다는 정도의 차이다. 이 정도로 닮았으니 서문경이 엄헌영과 눈이 마주치는 것을 꺼려할 법도 했다.
“야금?”
그 때, 하고 말한 것은 서문경 쪽이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당신, 왜 나를 그런 이름으로 부르는 겁니까?”
“밤 야(夜)에 날짐승 금(禽)을 쓰지. 내가 만든 호는 아니고, 듣자하니 황궐 내의 사람들이 자네들 이렇게 부르더군.”
왜 어딜 가나 새야 나는, 하고 서문경은 생각하며 고개를 모로 기웃했다.
“밤새면 뭐 부엉이나 올빼미···.”
“그보다는 좀 더 은밀한 의미지.”
서문경이 중얼중얼 제 생각을 늘어놓는 것을 조원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부드럽게 잘랐다. 서문경의 표정이 설핏 굳었다. 조원의 목소리에 희미한 웃음기가 어려 있는 것을 보니 자신이 듣기 좋아할 만한 뜻이 담겨 있는 말은 아닐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밤에 우는 새, 정도의 뜻이려나.”
“황상의 침방에서 말이지.”
조원의 말을 엄헌영이 무뚝뚝한 목소리가 받아 이었다. 서문경의 입이 쩍하고 벌어졌다.
“일각에서는 야금(夜禽)이 아니라 야금(夜衾: 이불)이라고도 하던가.”
“그, 그거.”
다른 것은 몰라도 말 하나만큼은 막히는 경우 없이 야무지던 서문경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그런 말로 절 부르지 마십시오!”
이윽고 서문경이 활화산같이 돌변해, 뒤집어쓰고 있던 핫이불을 바닥에 내팽개치며 고함을 질렀다.
“그딴 소리로 제 속을 뒤집어엎으려고 오신 거라면 나가십시오!”
서문경이 펄펄 뛰며 화를 내자, 조원이 오해하지 말라며 서둘러 두 손을 저었다.
“그게 아닐세.”
“뭐가 아닙니까? 그 말을 전하러 여기까지 오신 것 아닙니까?”
“그것이 아니라니까.”
재차 같은 말을 반복하며 조원이 엄헌영을 눈짓했다.
“효강께서는 무슨 일로 청의관에 들르신 건지 모르겠네만, 나는 아닐세. 자네를 야금이라 부른 것도 그저 참으로 어리로운 호라는 생각이 들어서 한 게야.”
“저를 폐하의 미동 취급하는 말이 무어가 귀엽단 말입니까?”
“밤새라니 자네와 딱 어울리지 않는가.”
“역시 당신 내 속을 뒤집어엎으려고,”
“자네는 역정을 낼 때면 그렇게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상대방을 쏘아보는 버릇이 있거든.”
조원이 서문경의 얼굴을 똑바로 손가락질했다. 막 언성을 높이고 있던 서문경이 자신도 모르게 멈칫했다. 그런 서문경의 얼굴을 보고 조원은 씩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마치 부엉이 같지 않은가.”
“······.”
그 능청스런 태도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온 몸에서 힘이 빠져서, 서문경은 그만 더 이상 화내기를 포기하고 두 어깨를 늘어뜨렸다.
서문경은 약간 허탈해하는 듯한 눈길을 두 사람에게 던지며 물었다.
“그럼 대체 왜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
“나와 자네가 특별한 용건이 있어야만 얼굴을 접할 만한 사이던가?”
“그런 사이죠.”
는질맞게 웃는 조원을 찌릿 노려보며 서문경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건 그렇군.”
능갈을 떤 보람도 없이 단박에 수긍한 조원이 그제야 목적을 밝혔다. 서문경은 푹 한숨을 쉬었다. 이 자만 상대하면 온 몸의 힘이 쭉쭉 쥐어짜는 것처럼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야 자네 거처에 대한 이야기를 하러 왔네만.”
“거처···.”
서문경의 이맛살이 구겨졌다. 방금 전 자신의 거처가 황제의 후궁들이 사는 궁으로 옮겨질 것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가 생각난 탓이었다.
“그게 답니까?”
그럴 리가 없지, 하고 생각하면서 서문경은 한숨을 푹 쉬었다. 숫제 추궁하는 투로 캐어묻자 의외로 조원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당신은 아까 목적을 말했던 겁니까?”
“그렇게 되는군.”
“괜히 힘만 뺐군···.”
서문경이 한숨을 섞어 중얼거리며 털썩 벽에 등을 기댔다. 벽을 등을 기댄 채 주루룩 미끄러져 앉는 서문경에게 엄헌영이 한심하다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그 시선이 그대로 느껴졌지만, 서문경은 고집스레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고만 있었다. 어제까지였다면 몰라도 오늘의 자신에게 황제와 한 판에 찍은 듯한 얼굴을 한 그를 노려볼 담력은 존재치 않았다.
“그런데 효강께서는 무슨 일로?”
그런 엄헌영과 서문경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며 조원이 물었다. 엄헌영이 밀봉(密封)한 것처럼 다물려 있던 입을 열었다.
“받을 것이 있어서.”
“받을 것?”
그 말이 의외였는지, 조원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엄헌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서문경의 앞에 한 손을 내밀었다.
“가마 삯.”
“그.” 제 턱 밑에 내밀어진 남자의 손을 내려다보며 서문경이 입을 열었다. 난감함과 부끄러움이 어지럽게 얽혀 있는 목소리였다. “저, 아직 제가 돈을 벌 방도가 없어서.”
“한량(閑良)이라는 말이군.”
한량이라기보다는 백수랄까. 서문경이 자존심상 차마 입 밖으로는 낼 수 없는 말을 우물거리며 엄헌영의 눈치를 살폈다.
“조금만 변제 기한을 늘려주시면.”
서문경이 그렇게 말하자, 엄헌영의 눈이 슥 방 안에 널려 있는 비단옷과 보석 구슬 등을 돌아보았다. 엄헌영의 시선이 얼마 전 황제가 바둑 비슷한 것을 두자며 들고 온 바둑돌 중 요암(窯巖)산 최고급 대합으로 만들었다는 백석(白石)에 가 멎는 것을 보고 서문경이 서둘러 변명했다.
“제 것이 아닙니다.”
“폐하의 소유지요.”
서문경의 말을 조원이 거들고 나섰다. 뜻밖의 도움에 서문경이 경계의 시선을 던지자, 조원이 보란 듯이 빙긋 웃었다. 서문경의 눈매가 더더욱 가느스름해졌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효강께도 벌써 빚을 졌다니, 빚꾸러기로군, 자네.”
자신을 거의 노려보다시피 하는 서문경에게 조원이 농을 걸었다. 조원 딴에는 농이랍시고 한 말이었지만 서문경의 입장에서는 가볍게 웃어넘길 수 없는 말이었다. 정말로 이 세상에 와서 얻은 것이라곤 여기저기 빚뿐이로군. 서문경이 내심 생각하며 엄헌영에게 부탁했다.
“그, 급하신 것이 아니라면 가마 삯을 갚는 것을 조금 미룰 수 있을까요. 절대로 안 갚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뻔뻔한 말이지만 제가 아직은 돈을 벌 만한 방법이 없어서.”
그 말을 들은 엄헌영의 표정이 묘해졌다.
“기다리면 은자가 나올 만한 길이 생긴다는 말인가?”
그 물음에 서문경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했다.
“일을 할 테니 임료도 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일?”
“폐하께서.”
하는 말에 조원이 설마, 하고 불쑥 끼어들었다.
“설마 자네, 교방대연회에 나가려는 건가?”
조원과 엄헌영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서문경이 당황해서 눈을 끔뻑였다.
“그거야, 내보낼 만한 예인이 없어 난감하다고 하시니까.”
“그런 일을 당했는데도?”
조원이 말하자, 서문경이 팍 이맛살을 구겼다.
“겨우 잊었는데 다시 생각나게 하깁니까?”
“대체 왜? 부담스럽지도 않은가?”
서문경이 짜증을 내는 것에도 개의치 않고 조원이 재차 묻자, 어지간히도 궁금했나 싶었던지 서문경이 잠깐 신경질을 거두고 대답했다.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그런데?”
달려들 듯한 기세인 조원을 피해 벽에 깊숙이 등을 기대며 시선을 내리깐 서문경이 우물거렸다.
“난감해 보이셔서 그냥.”
하고 말한 서문경은 주위에 믿을 만한 사람이라곤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황제의 신세를 생각해내고 새삼 한숨을 푹 쉬었다.
“도와줄 사람도 저 밖에 없어 보이고.”
서문경이 탄식하듯 늘어놓는 말을 들으며 조원은 엄헌영 쪽을 힐끗 곁눈질했다. 서문경은 시선을 내리깔고 있으니 알 리가 없겠지만, 고개를 들고 있는 조원에게는 서문경의 말이 이어질수록 엄헌영을 감싸고 있는 공기가 점점 험악해지고 있는 것이 빤히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무어가 저리 못마땅한지, 하고 조원이 생각하고 있는데 엄헌영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지 모르겠군.”
한창 말하다가 엄헌영의 말에 말허리가 싹둑 잘린 서문경이 채 다물지 못한 입술을 달싹거리며 엄헌영 쪽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아니면 그저 때가 되었다 싶은 마음에서였는지 엄헌영이 말을 이었다.
“백희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지.”
“···그 이야기는 왜 또 꺼내는 겁니까?”
다 헛소문인 것을, 하고 혼잣말처럼 말한 서문경이 혀를 차며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서문경의 밤톨 같은 뒤통수에 대고 엄헌영이 툭 내뱉었다.
“헛소문이라.”
“그게 헛소문이 아니면 뭡니까?”
비꼬는 듯한 투에 발끈한 서문경이 따지듯 묻자 엄헌영의 한 쪽 입꼬리가 비스듬히 치켜 올라갔다.
“그게 허문(虛聞: 헛소문)일 리가 없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제멋대로 떠들어대는 소리가 헛소문이 아닐 리가 없지 않습니까?”
“황제.”
엄헌영이 뜬금없는 단어를 내뱉었다. 일순 멈칫했던 서문경이 곧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지존께서 말씀하신 바가 어찌 허문일 수 있겠는가?”
그 말에 서문경의 얼굴에서 싹 핏기가 빠져나갔다.
“황상 폐하께옵서 먼저 말씀을 꺼내시었다 하더군. 제국을 찾은 물손님을 언제까지나 청의관에 거처하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만 거처지를 옮기는 것이 어떤가 하고.”
그리고, 엄헌영은 하얗게 굳어 있는 서문경을 쏘아보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마침 백희궁이 비어 있으니 그 곳은 새 거처지로 어떠한가 평신저두(平身低頭) 부복하고 있던 내관과 상궁들에게 하문하셨다 하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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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두두두 말발굽이 땅을 때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막 따뜻한 밀수(蜜水)가 든 물그릇을 들고 있던 황제가 물그릇을 도로 내려놓고 장지문 쪽에 시선을 던졌다. 숨을 내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워하는 궁인의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그 발소리가 점점 커진다 싶더니 이윽고 장지문 밖에서 아옹다옹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어찌 이리 무례하게, 다 필요 없고 폐하께서는 안에 계십니까, 이리 나오시면 폐하께 객이 당도한 사실을 아뢰어 드릴 수 없음입니다, -등등의 말이 점점 언성이 높아지며 오간다 싶더니 키가 훌쩍 크고 호리호리한 그림자가 고만고만한 키의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튀어나왔다. 그 그림자를, 다른 나인들과는 달리 어여머리를 올린 여관이 황급히 가로막고 나섰다.
“제 아무리 이 세계 귀천존비(貴賤尊卑)의 법도에 따르지 않는 범님의 백성이라 하여도 어전(御前)에서 이토록 오만무례(傲慢無禮)할 수는 없습니다!”
사내의 그림자를 가로막은 궁인, 즉 대령상궁 연재 화연이 당혹해하며 외치는 소리에 황제가 끌끌 혀를 찼다. 누가 들으면 더 없이 짐에게 충선(忠善)한 지밀인 줄 오해하겠어.
“당장 어전에 합당한 예를 갖추지 않으시면,”
물손님이 어전에서 예를 갖추지 않았다는 것보다 자신이 무시당한 것에 더 역증을 내고 있을 것이 뻔한 대령상궁의 말을 황제가 썩둑 잘랐다.
“객을 들게 하라.”
그 말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지존의 가장 가까이에서 지존의 수족 노릇을 해야 하는 대령상궁으로서는 낙제점에 가까운 태도였다. 자신이 손수 내린 하명에도 대령상궁이 움직이지 않자, 황제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물그릇을 들어 올렸다.
“드, 드십시오.”
장지문에 비치는 황제의 그림자가 물그릇을 집어 던지려는 모습을 취하자 식겁한 대령상궁이 그제야 물손님을 장지문 바로 앞으로 밀어붙였다. 물손님을 방패막이 삼으려는 태도에 황제의 반듯한 아미가 지렁이처럼 꿈틀했다.
“연재 상궁.”
장지문이 열리자, 벼개에 비스듬히 기댄 황제가 대령상궁을 불렀다. ‘하명하시옵소서.’, 갑작스레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대령상궁이 다소 의아해 하면서도 고개를 숙이고 엎드리며 대답하였다. 그 흰 가리마 위로 툭 던지듯 황제가 말했다.
“참으로 타의 귀감이 될 만한 태도가 아닌가.”
뜬금없는 말에 대령상궁을 비롯한 지밀나인들의 얼굴에도 의아해하는 빛이 떠올랐다. 그 와중에 노골적으로 얼굴을 구기고 있는 물손님, 서문경에게 가까이 와 보라는 뜻으로 손을 까닥이며 황제가 말을 이었다.
“예조를 찾은 객으로 방패질을 하다니, 이 산지옥에서 잘도 연명하는 자 다운 교활함일세.”
하고 말하며 황제가 물그릇을 입술에 댔다. 서문경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그 물그릇을 향했다가, 이윽고 대령상궁이 제 몸을 가지고 무슨 짓을 하려고 했었는지를 깨닫고 오만상을 찌푸렸다.
“당신.”
“경아.”
화난 늑대마냥 허연 이를 드러낸 서문경이 대령상궁을 향해 으르렁거리는데, 그 뒤통수에 황제의 메마른 목소리가 와 부딪쳤다. 그 목소리를 듣고 퍼뜩 자신의 목적을 기억해 낸 서문경이 번개처럼 황제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틈을 타 대령상궁이 황급히 장지문을 닫으라는 시늉을 했다.
“앗.”
장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서문경이 아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적나라한 표정을 느긋하게 구경하며 황제가 들으란 듯 끌끌끌 혀를 찼다.
“참 재빠르기도 하구나, 우리 깜둥새.”
“지금 놀리시는 겁니까!”
비꼬는 듯한 말에 서문경이 뼛성을 내자 황제가 불쾌한 듯 미간을 구겼다.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목소리를 높이는고?”
“폐하께서 먼저 도발하지 않으셨습니까?”
“도발이라?”
황제는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놀랍게도, 노여워하며 꾸짖는 말투나 서문경을 가소로워하는 태도와는 달리 정작 황제의 표정은 그다지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만시(晩時: 늦은 때)에 짐의 침방에는 웬 일이더냐?”
갑자기 화제를 돌려 황제가 말했다. 황제의 말대로 밖에는 벌써 저녁 어스름이 깔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소문을 들었습니다.”
황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문경이 대답했다. 황제의 머리가 모로 조금 기울었다. 비단처럼 황제의 귀 밑에 드리워져 있던 검은 머리채가 폭포수처럼 마른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 모습에 서문경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다. 수묵화 속의 미인이 갑자기 현실로 튀어나온 것을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소문이라?”
황제가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서문경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붓으로 그린 듯한 미모와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날카롭고도 메마른 목소리에 새삼스럽게 놀란 탓이었다. 서문경이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 더더욱 눈을 매섭게 뜨고 이악스레 따지고 들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무어가 말이야?”
“백희궁!”
서문경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팍을 치며 외쳤다.
“백희궁이라니?”
황제가 이맛살을 구긴 채 물었다. 대체 왜 지금 그 말이 나오느냐는 태도였다.
“폐하께서 말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서문경은 그런 얄팍한 연기에는 속지 않겠다는 듯 오히려 눈을 더 크게 부릅뜨며 말했다. 한층 더 험악해진 서문경의 말투에 황제의 미간에 패인 주름이 더더욱 깊어졌다. 서문경이 씩씩 숨을 몰아쉬며 목소리를 높였다.
“제 거처를 백희궁으로 옮기는 것이 어떠하냐 먼저 말을 꺼내셨다 들었습니다.”
“아아.”
그제야 황제가 알겠다는 시늉을 했다. 황제가 대수롭잖다는 듯 흘린 신음소리를 들은 서문경의 얼굴이 더더욱 오만상이 되고 낯빛이 흙빛마냥 칙칙해졌다. 참혹하다는 말을 붙여도 무방할 듯한 서문경의 표정을 보고 황제가 한 쪽 아미를 슬며시 치켜 올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서문경의 눈과 이마에 ‘당신이 내게 어떻게 이럴 수가.’하는 말이 떡하니 쓰여 있던 탓이었다.
“자네 표정이 어찌 그런고.”
“사실이었던 겁니까?”
서문경이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로 물었다. 황제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짐이 그리 하문한 것이 맞다.”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
서문경이 격분을 참지 못하고 씨근거리자 황제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서문경이 화를 내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라서, 서문경은 머리끝까지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황제가 귀찮다는 듯 고개를 휘휘 젓고, 기수(: 이불)에 몸을 누이며 툭 물음을 던졌다.
“깜둥새야, 백희궁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나 알기나 알면서 팔팔 뛰는 게냐?”
“압니다!”
서문경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기세 좋게 대답했다. 호오, 하고 말하는 듯 황제의 눈이 은근히 거들떠졌다.
“황제의 후궁들이 거처하는 궁궐이라고 들었습니다.”
“웬일로 아는구나.”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더니, 우리 깜둥새가 오늘 아침 일찍 나가 경내를 좀 쏘다니기라도 한 모양이지. 황제가 툭 내뱉은 말에 서문경이 눈살을 찌푸린 채 고개를 갸웃했다. 그 말은 그런 때 쓰는 말이 아닌 것 같은데.
“허나 언제까지 청의관에 있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니냐.”
“하지만 왜 하필 그곳입니까? 다른 곳도 많잖습니까!”
안 그래도 삿된 소문이 퍼져 있는데, 하는 말이 나오려고 하는 것을 애써 목구멍 아래로 꿀꺽 삼켜 버리고 서문경이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서문경이 온 몸으로 불편하다는 시늉을 해 보인 다음에도 황제의 얼굴은 그 전과 마찬가지로 심드렁하기 그지없었다.
“마침 비어 있지 않으냐.”
“아무리 그래도!”
황제가 무신경한 언사에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서문경이 결국 화를 내며 갈퀴눈을 떴다. 하지만 화를 내던 것도 잠시, 황제가 갑자기 기침을 하기 시작해서 서문경은 기껏 열었던 입을 다시 다물어야만 했다. 콜록 콜록 피라도 토할 것처럼 기침을 하는 기세에 놀라서 서문경이 허둥지둥 주전자와 물그릇을 들었다.
“항상 적기(適期)에 기침이 터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만.”
따뜻한 꿀물을 따라 황제의 입가에 대주면서도 서문경이 투덜거렸다. 서문경이 불만스레 웅얼거리는 소리를 대충 귓등으로 받아 넘기면서 황제가 제 등을 쓸라는 눈짓을 보냈다. 그 모습이 못 견디게 얄미워서 서문경은 황제의 눈짓을 잘못 알아들은 척 하고 황제의 등을 쓸어주는 대신 그의 등을 탕탕 소리가 나도록 두드렸다.
“무엄한 놈.”
한참 뒤에 제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황제가 서문경 쪽을 쏘아보았다. 황제의 벌어진 입술에서 쉬익하고 숨소리가 빠져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놀고 있는 궁을 이롭게 써보겠다는데 그게 무어 나쁜고?”
꿀물을 한 모금 힘겹게 넘긴 황제가 툭하고 내뱉었다. 꿀물 한 모금도 겨우겨우 넘기는 나약한 황제를 아슬아슬하다는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던 서문경이 그 말을 듣고 눈을 껌뻑거렸다.
“아.”
다음 순간에서야 화제가 황제가 기침을 하기 전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은 서문경은 급히 고개를 주억거리고 대답했다.
“하지만 하필 왜 그 궁이란 말입니까?”
“놀고먹는 것이 사람이면 매우 쳐서라도 버릇을 고치지, 무생(無生)한 것들이면 개선의 여지도 없음이야.”
황제가 더럭 신경질을 냈다. 황제가 말하는 무생한 밥버러지가 사는 사람도 없는 백희궁이라는 사실을 눈치 챈 서문경은 눈을 내리깔고 침묵했다. 매사에 신경질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은 애초부터 하고 있었지만 무생물에게까지 짜증을 낼 줄은.
“그러니 이참에 제 구실이나 해 보라고 그런 명을 한 게지.”
집이면 집답게 사람을 뫼셔야 할 것 아닌가, 하는 황제의 말에 서문경은 잠시 침묵했다. 아무래도 모셔야 할 사람이 틀린 것 같은데 지금 상황에서는 그걸 지적하면 안 되겠지···.
“그래도 그곳은 싫습니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서문경이, 다소 무뚝뚝한 투로 중얼거린 것은 황제가 물그릇을 거의 비웠을 때 즈음이었다.
“싫다?”
“예, 싫습니다.”
“어째서 저어하는 게야?”
“그건.”
서문경이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모로 돌렸다. 차마 자신의 입으로 ‘그곳에 거처지를 정하고 나면 네 애첩이라는 소문이 빼도 박도 못하게 퍼질 것 같아서 그런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아무튼 싫습니다. 싫어요.”
어떻게 설득해야 황제가 납득할지 고민하던 서문경이 한참 뒤에 부루퉁하게 내뱉었다.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마땅히 둘러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무어.” 그런 서문경을 찌푸린 눈으로 말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던 황제가 조금 뒤 입을 열어 그렇게 말했다. 바닥을 내려다보는 척하며 황제의 시선을 피하고 있던 서문경의 귀 끝이 쫑긋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빤히 내려다보던 황제의 한 쪽 입꼬리가 슥 치켜 올라갔다. “그리도 저어하니 강요할 수는 없겠구나.”
서문경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까다로운 황제답지 않은 말이었지만 일단 제 귀에 단 말을 듣고 나서인지 별다른 의심이 들지 않았다.
“정말이십니까?”
“지존된 자가 설마하니 허언을 할까.”
서문경이 반색하며 묻자, 황제가 불쾌한 듯 찌푸린 낯을 하고 쏘아붙였다. 물론이다 밝은 낯을 하고 고개를 주억거려 주는 것보다 그 편이 훨씬 더 신뢰가 가서 서문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입니다.”
진심으로 안심한 듯 가슴께를 쓸어내리는 서문경을 곁눈질로 힐끗 보고 황제가 작게 혀를 찼다. 먹이를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 주는 것이 말이 되느냐며 화내는 어린아이를 그럼 먹이를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 준다며 꼬인 어른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하필이면 왜 ‘그’ 백희궁을 언급한 건지는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백희궁으로 거처를 옮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뻐하는 서문경의 모습은 그 어리석은 아이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 왜 그렇게 쳐다보십니까?”
자신을 응시하는 눈초리를 느꼈는지 서문경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턱을 괸 채로 황제가 중얼거렸다, ‘아니, 아무 것도 아니다.’ 턱을 괴고 있는 탓인지 아니면 괜히 떨떠름한 기분에 입 속으로 중얼거린 탓인지 자신이 들어도 자신의 발음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어줍었다.
황제의 시선이 힐끗 다시 서문경의 얼굴을 쓸었다. 바로 눈앞에 놓인 것 밖에는 보지 못하는 우둔한 모습이 한심하게 여겨질 만도 한데 그런 생각은 들지 않고 오히려 어리로온 생각이 드는 것이 참으로 이상타 싶었다. 황제라고 해서 삐죽빼죽 모가 난 제 성격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던 것이다.
희안타. 어째서일꼬.
“아니다.”
황제가 말했다. 실상은 서문경이 아니라, 제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말이었다. 묘하게 허탈해하는 듯한 투에 서문경이 무심코 황제를 바라보았다가 황제의 먹물 같은 눈과 마주치고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급한 불을 끄고 나자 이제야 왜 자신이 그간 황제를 피하고 있었는지가 생각난 모양이었다. 그 일에 대해서도 마저 따질까? 안 돼. 답을 들으면 돌이킬 수 없어. 그럼 도망칠까? 도망치는 것이 좋겠지? 고 조그만 머리통에서 맹렬하게 굴러가고 있을 생각이 빤히 읽혔다.
저런 헛똑똑이. 그런 서문경의 옆모습에서 시선을 돌리면서 황제는 마른 나뭇가지 같은 제 팔에서 푹신한 벼개 위로 머리를 옮겼다. 어찌된 노릇이건 뾰족한 혀에 비해 답지 않게 암된 구석이 있는 물고기가 자신이 뿌린 밑밥을 물고 어망 안에 들어왔으니 된 일이었다.
“폐하, 그, 그럼 저는 이만.”
“곤권하구나.”
겨우 결론을 내린 서문경이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는데, 황제의 중얼거림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서문경이 주춤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제안은 개의치 않고 눈을 감았다.
“폐하?”
피곤하십니까? 조금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곧 서문경이 묻는 소리가 들렸다. 황제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도, 고개를 가로젓지도 않았다. 눈을 감자 순간적으로 까맣게 의식이 가라앉는 기분이 든 탓이었다. 마치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듯한 감각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과는 별개로 잠은 오지 않았다.
그렇게 한 동안 눈을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으려니 옆에서 바스락 바스락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서문경이 있는 자리였다. 슬쩍 실눈을 뜨고 바라보자 서문경은 엉덩이가 배겼는지 어디에선가 방석을 끌어다 앉은 후에 황제가 남긴 꿀물까지 제 앞에 슬그머니 부어놓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황제가 어젯밤 이야기를 꺼낼 것 같아 무서운데, 자신이 아픈 티를 내며 눈을 감아버리니 걱정이 되어 자리를 떠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눈은 감은 채로 황제가 찬웃음을 지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애를 태워 볼까. 이대로 모르는 척 가장하고, 조바심을 내던 이가 겨우 안도하여 치켜 올렸던 어깨를 살그머니 내리면 다시 이리로 훽 휘두르고, 놀란 새가 혼비백산하여 얼어붙어 있으면 그 때 다시···. 그리하면 저 야윈 몸이 송두리째 자신의 손아귀에 떨어지는 것도 멀지 않았다. 냉정이나 계략 따위와는 거리가 먼 아이이니, 이리로 저리로 마음에 차는 대로 휘두르는 것은 일도 아니다.
정신이 까무룩 멀어진다. 찬 살가죽 위에 떠돌던 현생의 촉감이, 소리까지도 서서히 멀어졌다. 점점,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눈을 감고 있으면 늘 이런 식이었다. 사는지 죽는지조차 모를, 까마득한 나락으로 서서히 잠기는 기분. 어쩌면 더운 물에서 서서히 익어 죽어가는 중인지도 모르지.
어쩌면, 이대로 다시는 눈을 뜰 수 없을지도 모르지···.
그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무십니까.”
하고 조심스레 묻는 소리가, 머얼리서 들려오는 휘파람 소리처럼 들렸다.
그 가느다란 소리가 나락으로 꺼지던 정신을 끄집어 올렸다. 폐하, 하고 다시 소리가 이어졌다. 정말 주무십니까. 혹시라도 잠든 이를 깨울까 거의 중얼거리듯 하는 목소리가 보드랍고도 애틋하다. 그 목소리가 쓸쓸히 놓인 머리 위를 살그머니 쓰다듬는 듯 했다. 무엇이 저리 안쓰러울까. 짐의 무엇을 믿고 어찌 그리 쉽게 정을 주는가, 그대는.
참으로 어리석다. 참으로 미련해. 그 미련함이, 그 냉정치 못한 성정이 그대의 발목을 늪 기슭으로 끌어당기고 있는 것을 모르고.
허나, 냉소 짓는 입술과 머리와는 별개로 뱃속에서는 바글바글 뜨거운 기운이 솟아오른다. 서문경이 안쓰러운 시선을 자신에게 던지는 것이나, 안절부절 못하며 자신의 곁을 맴도는 것이 느껴질 때마다 그 기운도 강해졌다. 그 기운이 마치 찬 곳에서 팔팔 끓는 물을 안고 있는 듯하였다. 톡, 톡, 톡, 끓어 오른 기포가 톡 하나 터질 때마다 그 자리가 녹는 듯 따끈해졌다. 차게 얼어 죽어가던 살이 그 부분만 살아나는 듯했다. 그 더운 기운이 뱃속을 스쳐 가슴팍에까지 다다랐다. 차게 얼어 있던 가슴에, 일순 충동이 일었다.
그래서-.
“경아.”
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에야, 황제는 겨우 자신이 서문경의 손목을 움켜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참으로 새치름한 아이지요.”
청의관을 나와 수강천으로 향하는 숲길을 걷고 있던 조원이 불현듯 말을 꺼냈다. 염락보다 한 발 앞서 걷고 있던 엄헌영이 대답 없이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만 벌써 십 수 번은 본 듯한 그 모습을 보고 조원이 실없는 농지거리를 던졌다, ‘효강의 미간에 패인 주름이 참으로 깊고도 구불구불하니 능히 저 수강천 굽이치는 물살의 따귀를 후려갈기고도 남겠습니다, 그려.’
“그런데 정말 웬일로 이곳까지 행차하신 겝니까?”
엄헌영이 자신이 던진 농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을 보고 덩달아 진중해진 조원이 물었다. 늘 행동거지가 경박한 조원답지 않은 나지막한 투에 엄헌영이 비로소 조원에게 눈길을 돌렸다. 엄헌영과 눈이 마주치자, 조원이 관찰하는 듯한 예리한 눈빛을 재빨리 숨기고 싱긋 사람 좋은 웃음을 흘렸다.
“집요하군.”
언짢아하는 기색을 숨기지도 않고 엄헌영이 내뱉었다.
“소인이 그리하였습니까?”
노골적인 박대에도 웃는 표정 하나 흩뜨리지 않고 조원이 대꾸했다.
“승향각에서 맞닥친 이후로 내내 같은 물음만 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습니까? 하며 자신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모로 갸웃한 후 조원이 너스레를 떨었다, ‘소인이 효강께서 청의관까지 납시신 이유가 몹시 궁금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자네는 그 자와는 무슨 관계지?”
조원이 엄헌영에게 그가 서문경을 찾아간 진짜 이유에 대해 다시 물으려는 순간, 엄헌영이 선수를 쳐 물었다. 정말로 조원과 서문경의 관계에 대해 궁금해서 한 질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조원의 입을 막기 위함인지 모를 말에 조원이 잠시 난감해 하는 듯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가 이윽고 언제 그랬냐는 듯 산뜻하기 그지없는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일면지분(一面之分: 한 번 만나 본 정도의 친분)이지요.”
엄헌영이 이맛살을 구겼다. 조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허설이 아닙니다.”
“자네를 찾아 창혜각까지 찾아갔던 자 아닌가.”
엄헌영과 서문경이 처음 얼굴을 맞닥뜨렸던 때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가 나오면 또 변명할 말이 없지. 방금 전에 딱히 자신이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닌데도, 추궁하는 듯한 엄헌영의 시선에 왠지 모를 거북스러움을 느끼면서 조원은 가느다란 한숨을 쉬었다.
“그랬었지요.”
“그와 특별한 친분이라도 있는 겐가.”
하는 수 없이 그렇게 대답하자 엄헌영이 곧바로 물었다. 누가 용호군 소속 아니랄까봐 문초라도 하는 듯한 투에 조원이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허언을 한 것이 아니라, 진실로 저와 물손님 사이에는 딱히 친분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다만 물손님과 저는 동향(同鄕) 사람이니 때때로 담소를 나누고 싶을 때가 있지요.”
“자네와 동향이라. 그 자도 그럼 범님의 땅에서 온 자였단 말이군.” 조원의 대답에 겨우 납득한 듯한 표정을 지은 엄헌영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렇게 말했다. “과연, 그래서 그리 간덩이가 부었었던 거로군.”
“범님을 모욕하시면 천벌을 받으십니다.”
엄헌영의 거침없는 말에 조원이 쓴웃음을 지으며 충고했다. 그러나 그 충고를 귓등으로 받아 넘기고 엄헌영은 코웃음을 쳤다.
“천벌?”
엄헌영은 조원을 똑바로 바라보고 물었다.
“너는 범님을 네 눈으로 본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대답한 조원은, 그러나 곧바로 이렇게 반박했다. “하지만 용님께서 계시지 않습니까. 용님께서 존재하신다면 범님께서도 계신 거겠지요.”
“그대는 마치 용님을 눈으로 본 것처럼 이야기하는군.”
하지만 그 말을 듣고도 엄헌영의 태도는 여전히 냉소적이었다.
“용님은 계십니다.”
조원이 말했다. 제 부모의 흠을 잡으려 드는 무뢰배를 꾸짖는 것처럼 엄준하기 짝이 없는 투였다.
“그래서 묻지 않는가, 그대가 그대의 눈으로 직접 범님이나 용님을 뵌 적이 있는가 하고.”
평소의 조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엄준한 투에 조금쯤은 놀랄 만도 한데, 엄헌영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재차 그렇게 캐물어왔다. 완고하기 짝이 없는 그의 태도에 조원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조원은 발걸음을 멈추고 엄헌영 쪽을 돌아보았다. 엄헌영이 어느 틈엔가 걸음을 멈춘 탓이었다. 어느새 그들은 수강천으로 통하는 산책로 중간까지 다라라 있었다. 산책로 양옆에 키 큰 회화나무들이 들어서 두 사람의 머리 위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다보록이 돋아난 잎들이 쏴아아 하는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그 소리 때문인지, 사위(四圍)에 병아리 털 마냥 노오란 햇빛이 가득 차 있고 드러난 피부에 닿는 공기가 참으로 따스한데도 이상하게 온 몸에 오한이 들었다.
엄헌영은 쏟아지는 햇빛을 등지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엄헌영의 얼굴에는 짙은 그림자가 어리어 있었다. 금물결로 찰랑이는 세상에서 홀로 검은 그림자에 잠겨 있는 엄헌영의 모습은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이 이질적이었다. 그러나 그 기묘한 분위기는 비단 그가 빛을 등지고 있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엄헌영은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얼굴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꼈는지 조원의 한 쪽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잠시 후 조원이 조하던 목소리를 조금 누그러뜨리고 엄헌영을 떠보았다.
“하지만 용님께서 존재하신다는 증거가 이 땅에는 존재하지 않습니까.”
“증거.” 증거라. 엄헌영이 툭하고 내뱉었다. 그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비웃음이 어렸다. “있었지.”
“있었다?”
엄헌영이 선뜻 대답하자 일순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던 조원이, 다음 순간 엄헌영이 한 대답의 어감이 어딘가 묘하다는 것을 깨닫고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있었네.”
조원은 찬웃음을 흘리는 엄헌영을 바라보았다.
“혹, 효강께서는 이제 용님의 증거가 이 땅에서 사라졌다고 여기시는 겁니까.”
조원의 직접적인 물음에 엄헌영 또한 조원 쪽을 돌아보았다. 마주친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역시 그대도 범님의 백성이었군.”
그러다 불현듯, 엄헌영의 한 쪽 입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필요 이상으로 담대해.”
“어째서 그런 의려를 하게 되신 겁니까?”
그렇게 묻는 조원은 어딘가 불안정해 보였다. 부릅뜬 눈과 꾹 다물린 입매, 부르르 잔 경련을 일으키는 입꼬리에서 숨길 수 없는 초조감이 맴돌았다. 그것을 보고 엄헌영은 눈을 찡그렸다. 대체 체제공 그 자의 무엇이 이토록 하늘 손님들의 마음을 끄는 것인가?
엄헌영이 반문했다.
“그대는, 용님의 은혜가 이 땅에 존재한다는 증거가 사라진 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아는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조원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단호함을 넘어 완고하게까지 느껴지는 어투와 목소리였다.
“체제공께서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가 있었지, 서현.”
하지만, 하고 곧바로 엄헌영이 내뱉었다. 조원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헌의공께서 자신의 계자에게서 용의 증후를 보았다 주장하며 그를 운현궁 마마(: 태황태후)의 앞에 선보인 이후로 십 년도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아직도 그는 완벽한 용으로 거듭나지 못했지 않은가. 완벽한 용으로 거듭나지 못하는 한 증후는 어디까지나 증후일 뿐, 용님이 계시다는 증거는 될 수 없다.”
“섣부른 판단이십니다, 효강.”
엄헌영의 단정적인 말을 조원의 말이 가로막았다. 엄헌영의 말허리를 자르는 조원의 목소리는 매우 부드러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몹시 과급(過急)했다. 섣부른 판단이라, 엄헌영이 조원이 했었던 말을 그대로 반복하며 조소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체제공에게 나타난 용의 증후는 그저 불똥에 불과할 뿐이다. 이제 이 땅에 용은 없어.”
“그렇지 않습니다.”
괜한 고집을 부리는군, 엄헌영이 조원에게서 시선을 돌리면서 말했다. 그런 그의 뒷머리에 대고 조원이 조금 억눌린 듯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효강께서야말로 괜한 걱정을 하시는 것이 아닌지.”
“그렇다면 나도 기쁘겠군.”
엄헌영이 멈춰 있던 발걸음을 옮기며 대충 중얼거렸다. 조원의 말 따위는 심중에 담을 생각조차 없다는 듯 무심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지만 조원은 의견을 굽힐 마음이 조금도 없는 듯했다.
“물손님이 증거가 아닙니까.”
조원이 내뱉은 말에 엄헌영의 걸음이 우뚝 멎었다. 조원이 계속해서 말했다.
“저희 천객들과는 달리 청의관에 묵고 있는 수객은, 얼마 전 혼의 은혜를 받은 몸입니다. 그는 그 무서운 너울파도에 휘말리고도 상처 하나 없이 살아남았습니다. 이 세계에 무사히 뿌리를 내리고 살라는 배려로 혼께서 친히 그의 기억조차 지워 주셨습니다. 그런 그를 효강께서도 보시지 않았습니까. 범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용님의 은혜가 사라졌다면 그가 그럴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쏘아 붙이는 듯한 투로 그렇게 말한 조원은, 그리고 엄헌영이 무어라 반박을 하기 전에 서둘러 화제를 돌려버렸다. 용의 유무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조차, 아니, 용의 존재에 대해 의심하는 것 자체를 몹시 꺼려하는 듯한 태도였다.
“그런데 정말로 수객은 왜 찾으신 겁니까?”
가마 삯 정도야 효강께는 당과 값도 되지 못하는 돈 아닙니까? 조원이 그렇게 묻자 엄헌영이 노골적으로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조원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 자가 마음에 드셨습니까?”
“당치도 않은 말을.” 조원이 재차 묻는 내내 꾹 입을 닫고 있던 엄헌영이 벌컥 성을 냈다. “그 탁목조(啄木鳥: 딱따구리) 같은 것을 누가?”
“그럼 어찌하여 그러셨습니까?”
“의심쩍었기 때문이다.”
엄헌영이 딱 잘라 말했다.
“물손님이 말입니까?”
조원이 묻자, 엄헌영이 가소롭다는 듯이 콧방귀까지 뀌었다.
“마냥 듣그럽기만 하지 꿍꿍이속이라고는 약에 쓸래도 없어 뵈는 것을 내가 어찌 경계해야 한단 말인가.”
“그럼?”
미간까지 구기고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조원이 어느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가 있었던지 입을 열었다.
“황상 폐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엄헌영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침묵하던 엄헌영이 다시 입을 연 것은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가 아무런 계산도 없이 누군가에게 호의를 품을 리가 없다.”
엄헌영은 단정적으로 말하고 고개를 저었다. 어느 누구의 반박도 허용치 않겠다는 단호한 태도에 조원은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효강, 당신께서는 대체.”
조원이 겨우 말문을 열었을 때, 불현듯 바람 부는 소리가 들렸다. 회화나무 잎이 다시금 흔들리며 다시금 쏴아아아, 파도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들은 조원은 자신도 모르게 동편(東便)을 돌아보았다. 황제의 침전인 천추전이 있는 자리. 또한, 지금쯤 서문경이 있을 곳이기도 했다.
그 때 엄헌영이 다시금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 들려왔다.
“그 치가 아무런 계산도 없이 누군가에게 호의를 품었을 리가 없어.” 그러니. “···제 몸 하나 간수하기 힘든 처지하면 차라리 피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조원은 몰래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이제는 누구의 이야기인지조차 알 수 없는 중얼거림. 허나 깊이 고려해 볼 가치도, 마음에 깊이 둘 필요 없는 말이었다. 그와 자신은 생각도 목적도 다를 터이니.
···허나, 조금 마음이 쓰였다. 이상한 일이지만, 천추전이 있는 곳에서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