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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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한 번 깜빡할 사이에 봉지(: 바지)가 벗겨졌다. 생선의 배처럼 허옇게 드러낸 제 두 다리를 보고 기겁을 한 서문경이 필사적으로 속적삼을 움켜쥐었다. 검은 양단(洋緞) 장의와 그 안의 회색 적삼, 그리고 흰 주단(紬緞) 봉지를 한꺼번에 벗겨내고 긴 적삼 아래의 속적삼에 막 한 손을 뻗고 있던 황제가, 서문경이 하고 있는 꼴을 보고 눈썹을 꿈틀했다. 백 년 만에 만난 정인(情人)이라도 되는 양 필사적으로 속적삼을 붙잡고 있는 꼴을 보고 황제는 끌끌 혀를 찼다.

“경이 네가 하니 홀딱 벗은 몸에 속적삼과 족건만 두르고 있는 것도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만, 고것과는 별개로 깜둥새 네 취향이 참으로 독특하기도 하구나.”

“무슨 말을!”

황제가 툭 내뱉은 말에 파르르 치를 떤 서문경이 거의 꼬집다시피 붙잡고 있던 속적삼을 놓고 대신 동그마니 몸을 말았다. 그러나 서문경이 제 무릎을 끌어안는 것보다 황제가 뱀처럼 서문경의 다리 사이로 파고드는 것이 더 빨랐다. 윽! 서문경이 불쑥 비집고 들어오는 황제의 몸에 밀려 하릴없이 바닥으로 쓰러지면서 통탄(痛嘆) 어린 비명을 내질렀다.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제 다리 사이를 차지하고 앉은 사내를 원망스런 눈으로 노려보며 서문경이 물었다. 씩씩, 억울한 숨을 몰아쉬는 서문경의 발간 얼굴을 구슬 같은 눈동자로 내려다보던 황제가 툭하고 내뱉었다.

“사내의 마음이 동하는데 또 무슨 이유가 필요 있을꼬.”

“아니, 제가 대체 뭘 어쨌다고 이러십니까!”

이제 와서 웬 앙탈이냐는 듯 황제가 샐쭉한 눈으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못 견디게 억울한 기분이 들어서 서문경이 거의 발악하다시피 외쳤다. 억울함에 온 몸을 파들파들 떠는 서문경을 보고 황제가 쯧쯧, 들으라는 듯 일부러 큰 소리를 내어 혀를 찼다. 그 꼴을 보고 발끈한 서문경이 훽 눈꼬리를 치켜 올렸다가 바락바락 소리만 질러 봐야 나아질 것이 없었다 싶었는지 용케 울분을 수습하고 황제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폐하께서 왜 이러시는 건지 저로서는 도통 까닭을 알 수 없지만, 폐하, 잘 보십시오. 저는 남ㅈ,”

남자란 말입니다!, 하고 말하려던 서문경은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도 잊어버렸다. 뱀처럼 차갑고 매끄러운 것이 불쑥 자신의 다리 사이로 들어왔다. 깜짝 놀란 서문경이 두 다리를 오므리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이런 뻐꾸기 같은 놈을 봤나.”

서문경의 다리 사이로 쑥 손을 밀어 넣은 황제가 남은 손으로 서문경의 어깨를 붙잡아 누르며 타박을 놓았다. 작살에 배가 뚫린 물고기처럼 서문경이 제대로 된 몸부림조차 치지 못하고 굳어 있자 황제의 손이 대담하게 더 깊은 곳으로 파고 들어가 허벅지 안쪽 깊숙이에 있는 서문경의 것을 주물렀다. 방금 전 파정하여 아직 흠뻑 젖은 채인 서문경의 것이 황제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질척질척 젖은 소리를 냈다. 

“힉.”

“천하에 둘도 없을 요희(妖姬)마냥 짐의 음심(淫心)을 돋울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어디 꼬리를 빼느냐.”

“제, 제가 언제, 언제···.”

찰박 찰박.

황제의 손과 자신의 남성 사이에서 나는 적나라한 소리에 새파랗게 질려 있던 서문경이 바들바들 떨리는 눈으로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반쯤은 당혹감에, 반쯤은 공포에 질려 있는 서문경의 눈에는 이제 아롱아롱 희미한 물기까지 비쳤다. 자신의 사고 범위를 훌쩍 벗어나버린 상황에 고함을 지르고 난동을 피울 정신까지 빠져 버린 서문경이 어미 잃은 어린 짐승 같은 눈으로 올려다보자, 황제가 빙긋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그래, 이렇게 말이다.”

응?, 하고 동의를 구하듯 속삭인 황제가 서문경의 음부를 주무르고 있던 손을 떼고 대신 자신의 허리를 밀어붙였다. 힘껏 허리를 밀어붙이자, 풀이 죽어 말랑말랑한 서문경의 것과 마치 잔뜩 독이 오른 뱀처럼 머리를 치켜들고 있는 황제의 것이 맞닿아 힘껏 비벼졌다. 

뜨겁고 딱딱하고 매끄러운 황제의 것이 자신의 남성을 꿰뚫을 듯 밀고 들어오자 순간 기겁한 서문경이 황급히 두 다리를 오므렸다. 그러자 황제의 남성이 기다렸다는 듯 서문경의 남성 아래의 신낭(腎囊) 밑을 파고 들어가 맞물린 다리 사이를 꿰뚫었다. 황제의 것이 콱 다물린 엉덩이 사이를 스치는 것을 느낀 서문경이 소스라치며 파드득 엉덩이를 뒤로 밀었다.

“안 되지, 경아.”

그러자 황제가 발가벗은 서문경의 엉덩이를 한 손으로 움켜쥐고는, 격렬히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퍽, 퍽, 퍽, 퍽! 황제가 허리를 밀어 붙일 때마다 맨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아, 안···!”

두 눈을 홉뜬 서문경이 어쩔 줄 모르고 몸을 뒤틀면서 황제의 손아귀 안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서문경이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서문경의 허리를 끌어안은 황제의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십이월 나뭇가지마냥 마른 황제의 팔이 온 몸으로 매달리다시피 하여 당겨도 미동조차하지 않는 것에 놀란 서문경의 얼굴이 황제의 얼굴을 올려다본 자세 그대로 딱딱하게 굳었다. 쉬-, 그런 서문경의 눈 밑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꾹 짓누른 황제가 잠시 멈췄던 허리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폐하, 안, 안 됩니다!”

“안 되기는 무어가 안 된단 말이냐.”

이리도 좋기만 한 것을. 황제가 세상에 둘도 없는 우문(愚問)이라도 들은 것처럼 끌끌 혀를 차면서 핀잔을 놓았다. 그리고 파드득 파드득 포기를 모르고 몸부림을 치는 서문경의 몸을 더 깊숙이 모전(毛氈) 위로 내리누르며, 무어라 또 항의를 내뱉으려 하고 있는 서문경의 입에 와락 달려들어 입을 맞추었다. 입 안 깊이 혀를 들이밀어 휘젓고, 손으로는 다리 사이를 거침없이 주무르자 이윽고 완전히 혼이 나간 듯 서문경의 반항이 멎었다. 서문경의 다리 안쪽을 주무르는 황제의 손이 더더욱 대담해졌다.

“앗···.”

황제와 서문경이 몸이 마치 교미하는 뱀처럼 얽혔다. 황제와 서문경의 몸이 부딪칠 때마다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찰박, 찰박, 찰박, 시간이 지날수록 그 소리는 묘한 물기를 머금기 시작했다. 황제의 살갗에서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한 탓이기도 했고 황제의 단단한 배에 부딪친 서문경의 것이 점점 발기하여 조금씩 희뿌연 정액을 토하기 시작한 탓이기도 했다. 뒤로는 자신의 엉덩이를 움켜쥔 황제의 단단한 손에 막히고, 앞으로는 황제의 딱딱한 몸에 막혀 어쩔 줄 모르고 있던 서문경이 온 몸에 바글바글 끓어오르기 시작한 열기에 어쩔 줄을 모르고 있다가 도저히 신음을 견딜 수 없는 지경이 이르자 아랫입술을 깨물고 살그머니 황제의 팔에 손톱을 세웠다.

“옳지.”

용케도 서문경이 자신의 팔에 손톱을 세우는 것을 알아챈 황제가 옆으로 긴 눈을 가늘게 뜨며 살살 눈웃음을 쳤다. 그것을 본 서문경이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 손을 뗐다가, 다시금 황제의 배에 곤두선 성기가 비벼지자 신음을 내뱉으며 황제의 목을 끌어안았다.

“힉!”

황제의 용물이 엉덩이 사이를 비비는 생경한 느낌에 서문경은 진저리를 쳤다. 금방이라도 황제의 것이 자신의 엉덩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좁게 다물린 밀지를 꿰뚫을 것만 같았다. 황제가 더운 숨을 서문경의 귓가에 내뱉으며 허리를 움직였다. 길고 단단한 용물이 서문경의 성기와 그 아래의 주머니, 그리고 오므린 허벅지 안쪽과 엉덩이 사이를 한 번에 뚫고 들어왔다. 오싹 등줄기에 소름이 달렸다. 갑작스런 위기감이 들었다. 서문경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폐하! 폐하! 폐하!”

서문경이 몇 번이나 필사적으로 외치고 나서야 황제는 겨우 시선을 돌려 서문경을 바라보았다. 황제의 이마에서 뚝 더운 땀이 흘러 서문경의 볼을 타고 흘렀다.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그 깊이를 알 수 없이 새카맸다. 그 까만 눈을 보자 다시금 오싹 등골에 오한이 돋았다. 

거짓말, 하고 서문경은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황제의 눈을 보자 이상하게도 확신이 들었다. 황제는 지금 여기서 자신을 여자처럼 안을 셈이었다.

“아, 안,”

안 된다고 말해야 하는데, 그런데 입이 얼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공포로 두 눈을 부릅뜬 채 제대로 된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입술만 오물거리고 있는 서문경을 황제는 찌푸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 안, 안, 안 돼, 폐하. 평소에는 그토록 잘 굴러가던 혀가 마치 얼어붙기라도 한 듯 더듬더듬 서문경이 내뱉는 소리를 듣던 황제가 불현듯 사납게 미간을 구겼다. 그것을 보고 덜컥 겁이 난 듯 서문경이 황급히 황제의 팔을 붙잡고 매달렸다.

“폐하.”

두려움으로 어롱거리는 눈을 한 채 서문경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 돼요.”

싫습니다, 하고 서문경이 겨우 내뱉었다. 그 순간 황제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것을 보자 서문경은 자신의 시야가 아득해지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마치 눈이 멀어가고 있는 듯이, 눈앞에 보이는 황제의 모습이 멀어지고 안개가 끼듯 희미해졌다. 누군가 자신의 귓가에 대고 징을 울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시야도 머릿속도 좀처럼 정신을 차릴 수 없이 멍멍했다.  

“폐하···.”

“천하에 몹쓸 놈 같으니.”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던 황제가 서문경의 눈가에 손바닥을 덮으면서 중얼거렸다.

“울기는 왜 또 우누.”

황제가 혀를 차며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서문경은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어?, 하고 황망한 마음에 중얼거리며 눈을 깜빡이자 또그르르르 뜨거운 물방울이 얼굴을 타고 흘러 귓바퀴를 타고 가 맺혔다. 

“되었다.”

지금까지 집요하게 서문경의 몸을 탐하던 것이 거짓말이었다는 것처럼 선선히 몸을 일으킨 황제가 툴툴거리며 서문경의 적삼을 훌쩍 서문경의 머리에 던져 주었다. 풀썩 자신의 머리 위에 와 덮인 회색 적삼을 반사적으로 끌어내린 서문경이 멍청히 두 눈을 껌뻑거렸다.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며 두 눈만 끔뻑거리는 서문경을 본 황제가 발칵 신경질을 냈다.  

“고 멍청한 얼굴 좀 치우거라.”

곱게 놓아 줬으면 된 거지, 왜 그렇게 내 보따리도 내 놓으라는 표정으로 보고 있누? 황제가 괜한 트집을 잡으며 은분매화장 위에 놓여 있던 미색 곰방대를 입에 물고 부싯돌에 불을 댕겼다. 칙, 소리와 함께 곰방대 끝에 불이 붙더니 곧 곰방대에서 뻐금뻐금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리 오거라.”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빨아대던 황제가 곰방대를 받쳐 들지 않은 손으로 살랑살랑 서문경을 불렀다. 언제는 쳐다보지도 말래더니. 서문경이 기가 막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황제가 짜증 섞인 고함을 버럭 질렀다, ‘이리로 오래두!’

“몹쓸 놈의 깜둥새.”

황제의 짜증을 못 이겨 비척비척 서문경이 다가가자 황제가 휙 서문경의 손목을 당겨 다시 서문경을 제 품 안에 가두었다. 반사적으로 바짝 굳어버린 서문경의 목덜미에 푹 입술을 묻으며 황제가 심술궂게 중얼거렸다, ‘김이 다 빠졌으니 이제 네 놈이 제발 해 봐라 부추겨도 안 한다, 이것아.’

“폐하, 그럼.”

“그 꼴을 해서는 어딜 나가려고.”

서문경이 꼬물꼬물 어깨를 비틀며 장지문 바깥을 애타게 돌아보자, 당장 침방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어 하는 서문경의 속내를 빤히 들여다 본 황제가 흥, 하고 같잖지도 않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거울거리(: 경대)를 끌어다 제 얼굴을 살펴본 서문경이 윽, 하고 입술을 앙다물었다.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문 서문경의 눈가를 황제의 손바닥이 다가와 가리더니, 서문경의 눈가에 손바닥을 댄 채로 황제가 서문경을 억지로 침상 위에 눕혔다.

“아무 짓도 안 할 터이니 눈 좀 붙이거라.”

황제의 손 밑에서 서문경이 불안한 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몇 번이고 몸을 꼬물거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황제가 서문경의 눈가를 덮은 손에 슬쩍 힘을 주자 황제의 손과 서문경의 눈가가 맞닿은 자리에서 희미한 그림자 같은 것이 일렁거렸다. 그 순간 서문경은 잔뜩 힘을 주어 부릅뜨고 있던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천자의 말은 천금(千金)과 같거늘 요 놈은 쓸데없는 의심만 많아서.’, 황제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

“쯧.”

서문경의 잠든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던 제안이 문득 혀를 찼다. 새하얀 나뭇가지 같은 제안의 손가락이 서문경의 눈 밑을 가만히 짚었다. 비단처럼 매끄러운 손가락 끝에 닿은 눈 밑이 오랫동안 흐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거칠고 축축했다. 제안의 손가락이 거친 눈가를 조용히 훑고 지나가 곧 버선코 같은 오뚝한 콧잔등을, 약간 우묵한 인중을 차례로 훑고 지나가 곧 서문경의 입술 위에 가 닿았다.

“입술은 왜 또 툭 내밀고 있누.”

제안이 불쑥 앞으로 나와 있는 서문경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면서 핀잔을 놓았다. 잠결에 그 핀잔을 들은 건지, 아니면 단순히 제안의 손가락이 제 입술을 찔러대는 것이 마뜩찮았는지 서문경이 미간을 찌푸리며 짜증 섞인 신음을 흘렸다. 으으음, 서문경이 얼굴을 모로 기울여 자신의 손가락을 피하자 요것 봐라?, 하고 말하는 듯이 제안이 한 쪽 눈썹을 치올렸다.

“아직 새끼로다.”

서문경의 얼굴에 심술궂은 시선을 던지며, 그 시선에 뒤지지 않을 만치 심술궂은 손가락으로 서문경의 볼을 찔러대고 있던 제안이 어느 순간 그렇게 중얼거리며 한숨을 푹 쉬었다. 제안이 다시 손을 움직여, 다시 서문경의 눈 밑을 더듬으며 천천히 눈살을 찌푸렸다. 어딘가 못 마땅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떤 면으로는 몹시 착잡해 하는 듯도 한 표정이었다.

“무엇 하나 뜻대로 되는 일이 없군.”

제안이 다시금 긴 한숨을 내쉬며 서문경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제안이 손을 움직일 때마다 서문경의 이마를 가리고 있던 머리카락들이 고운 실타래처럼 사르륵 사르륵 옥 같은 이마 위에서 흩어졌다.

“한 동안은 손을 대지 않을 셈이었다만.”

제안이 세운 무릎 위에 턱을 괴고 앉아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덜 자란 새끼새 주제에 누를 자극해대는 건고.”

그러다 한 번 크게 데이지, 제안이 나직한 목소리로 위협하듯 말하며 서문경의 이마를 찰싹 때렸다. 그러자 미간을 더더욱 찌푸리며 서문경이 휘적휘적 손을 저었다. 귓전에서 웽웽대는 각다귀를 쫓는 것 같은 태도에 제안의 표정이 못마땅하게 구겨졌다. 

“짐을 위해서라.”

한참동안 손을 허공에 허우적거리던 서문경이 이제는 착 두 팔을 날개마냥 옆구리에 접고 데구루루 몸을 모로 굴려 누웠다. 그 모양새가 정말 날개를 접고 쉬는 왜가리처럼 보여서 저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제안이 서문경의 머리를 살그머니 들어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딱딱한 뼈가 살에 배겨 아픈 건지 서문경이 중얼중얼 입 속으로 무언가 알아듣기도 힘든 말을 투덜거리기는 했으나, 그러면서도 서문경은 황제의 허벅지 위에서 제 머리를 내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자신의 허벅지를 목침(木枕)으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인 서문경의 얼굴을 제안이 빤히 내려다보았다.

“짐을 위해서 그리하였다, 라.”

다시금 같은 말을 입 속에서 반복하던 제안이 한 순간 픽 소리를 내어 웃었다.

“이 어린 것아.”

네 녀석은 알 턱이 없지, 하고 제안이 탄식하듯 속삭이며 서문경의 코끝을 두 손가락 사이에 꼬집듯 끼우고 가볍게 흔들었다. 차가운 손가락에 색색, 잠든 아기의 숨소리와도 닮은 숨결이 자꾸만 스쳤다.

“그 자애로우시던 선제께서조차 짐에게만큼은 그런 말씀을 해주신 적이 없다.” 

제안은 눈앞에 한 사내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백지장처럼 새하얀 얼굴, 그 얼굴에 늘 우울한 나무그늘처럼 드리워져 있던 것은 불안과 초조감이었다. 그러나 그 하얀 얼굴은 파리한 낯빛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다정하고 상냥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파르스름한 기가 도는 입술은 항상 자애로운 미소를 띠고 있었고, 그의 다갈색 눈동자도 항상 그 눈동자 빛깔만큼이나 다정한 감정들이 어려 있었다. 잔뜩 독이 오른 살모사 같은 그의 모후가 모욕적인 독언을 퍼부을 때조차, 괴던 아들들을 차례로 잃고 거의 미쳐버린 강윤제가 아직 어렸던 그를 향해 용님의 축복을 받은 이들은 모두 죽고 내게 남은 것은 저 병신 하나뿐이라는 폭언을 퍼부었을 때조차. 그리고.

“······.”

황제의 눈에 불현듯 싸늘한 섬광 같은 것이 스쳤다. 쯧, 하고 황제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가느스름하게 뜬 눈매 안에 들어 있는 새카만 눈에 딱히 무엇이다 이름을 붙이기도 복잡한 여러 가지 감정들이 엉망진창으로 엉켜 있었다.

“그러나 그런 선제께서도 짐에게만은 항상 얼음덩어리라도 된 것처럼 구셨지.”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제안의 얼굴에는 슬픔이나 분노 대신 애매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모후께서는 그리 가셨고, 생모 되시는 분의 옥안은 본 기억조차 없다.”

눈을 깜빡이자, 눈꺼풀 안에 온통 시뻘건 색이 먹물을 쏟은 것처럼 번졌다. 핏빛. 소름끼치도록 새빨갛던 시야가 차차 어둡게 물들었다. 흘린 지 한참이나 시간이 지나 완전히 굳어 버린 핏빛과 닮았다.

“생모라.”

그러다 문득 제안은 웃으며 말을 고쳤다.

“이 말은 어쩌면 어폐가 있을 지도 모르겠군···.”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입술을 닫아 버린 제안이 한 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서문경의 얼굴만 쓰다듬었다. 이마를 쓰다듬던 손이 매끈하게 빠진 얼굴선을 더듬어 내려가 날카로운 턱 끝을 매만지고, 그 아래로 길게 뻗은 목덜미를 죽 훑어 내렸다. 서문경의 어깨가 반사적으로 움찔 떨렸다. 

“이 요망한 것이.”

제안이 갑자기 허탈한 듯 중얼거렸다.

“사람의 넋을 쏙 빼놓는 말을 해 놓고 싫다고 빽빽 울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더냐.”

그러려면 애초에 왜 그런 말을 했누, 황제가 연신 한숨을 내쉬며 서문경의 입술을 툭툭 때렸다. 

“다른 치도 아니고 감히 천자의 가슴에 불을 놓았으면 네 몸이라도 기꺼이 바쳐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것 아니냐? 응?”

에잉. 이맛살을 구긴 제안이 아무리 괴롭혀대도 깰 기미가 보이지 않는 서문경의 얼굴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황제가 새빨간 혀를 내밀어 서문경의 하얀 볼을 길게 핥아 올리다, 서문경의 뺨에 이르러 혀 대신 단단한 이를 세웠다. 날렵한 것을 지나쳐 날카롭게까지 보이는 턱 선이나 냉소적이기 그지없는 눈매와는 어울리지 않는 통통한 뺨을 한 입 크게 베어 물자 갓 만든 찹쌀떡이라도 물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서문경의 뺨은 하얀 찹쌀가루를 듬뿍 묻힌 찹쌀떡마냥 통통하고 탱글탱글한데다 따뜻하고 어딘가 좋은 향까지 풍겼다.

“그냥 한 입에 털어 넣어 버릴 양이었는데.”

‘그런데 이 망할 깜둥새가.’, 서문경의 뺨을 내키는 만큼 깨물고 빨던 황제가 겨우 숙였던 머리를 들고 내뱉었다. 타인의 타액(唾液)이 잔뜩 묻은 뺨이 찜찜한 듯 더더욱 인상을 찌푸린 서문경의 뺨을 황제가 비단수건으로 닦아주자, 그제야 서문경이 보송보송한 뺨을 하고 구겼던 미간을 폈다. 서문경의 볼을 닦아준 비단수건을 대충 아무 곳에나 내팽개쳐 버린 제안이 서문경의 얼굴을 짜증스레 노려보다가 어느 순간 탈력한 듯 긴 숨을 푹 내쉬었다.

“어린 것은 알았다만 이렇게까지 갓난애일 줄은.”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건 좀 아니지 않으냐? 제안이 대답을 해 줄 리가 만무한 서문경의 얼굴을 쳐다보며 재차 물었다.

“무어.”

그러다 제안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한 결 노염과 허탈함이 가신 투로 중얼거렸다.

“범님의 세계서 네게 정인이 없었던 것만은 확실해졌구나.”

그렇게 말해 놓고 황제가 심술궂게 덧붙였다, ‘설사 있었다 하여도 색사(色事)에 서툰 네 놈 몸짓으로 봐서는 그리 깊은 사이는 아니었던 것이 확실하고.’

“수확은 무어···, 그 정도뿐인가.”

제안은 서문경의 뺨을 진짜 찹쌀떡이라도 되는 냥 조물딱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짐은 한참을 굶주려 배가 골아 있는데 네 놈은 아직 이렇게 새끼이니 대체 어찌해야 좋누.”

이것 참, 하고 제안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한심한 일이로다.”

제안의 눈빛이 순간 깊이 가라앉았다.

“짐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거늘.”

서문경의 뺨을 쓰다듬는 황제의 손길이 느려졌다. 황제가 문득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대연회인가.”

하고 내뱉듯 말한 황제가 혼잣말처럼 입 속으로 누군가의 이름을 웅얼거렸다. 해가 진 침방 안이 어둑했던 탓에 황제의 창백한 입술이 중얼거린 이름은 서현, 이었던 것 같았지만 분명치는 않았다. 

그러다 제안이 느릿하게 시선을 돌려 월문 장지 위에 드리워져 있는 사람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긴 머리채를 촘촘히 땋아 머리 양 옆에 말아 올린 머리 모양과 폭포수처럼 넓게 펼쳐진 치맛자락. 아마도 침방 앞을 지키고 앉아 있을 궁인들의 그림자일 것이리라. 그네들이 숨소리를 죽이고 침방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 창호지 위에 비친 그림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전해져 와서 황제는 실소를 흘렸다. 

아마도 늦어도 내일 이른 아침쯤이면 드넓은 황궐 전체에 물손님과 황제가 배를 맞추었다는 풍문이 돌았을 것이 제 눈으로 본 듯 선했다. 지금이라도 저 것들의 주둥아리를 비틀어 소문이 도는 것을 막아 버릴까, 황제가 생각하다가 아직도 자신의 허벅지를 배고 있는 서문경의 얼굴을 힐끔 보고 생각을 바꾸었다. 아니, 차라리 잘 되었다.

“황제는 무치(無恥)라.”

자고로 황제인 무치(無恥)라.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황제와 후비, 혹은 황제와 후궁들이 동침(同寢)을 할 때면 몇몇 내관과 여관들이 침방에 입실하여 황제와 그 처첩들이 색을 쓰는 것을 지켜보아야 한다. 혹여 있을 지도 모를 불의의 사고를 대비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보통의 황제들과는 달리 그림자는커녕 신뢰할 만한 궁인들도 전무한 제안의 경우에는 그러한 일이 없었다. 

“재고(再考)하여 보니 발 없는 말이 있어 오히려 다행인지도 모르겠군.”

다시 생각해 보니 자신과 서문경이 아래가 맞았다는 소문이 퍼져 자신이 손해를 볼 일은 없었다. 제안이 킬킬, 기침 섞인 소리로 웃으며 서문경을 내려다보았다, ‘그렇지 않으냐, 경아.’ 물론 저 까다로운 깜둥새도 그렇게 생각할 리는 만무하지만. 

“황제는 자고로 무치라···.”

제안이 불쑥, 방금 전 자신이 했었던 말을 그대로 반복했다.

“황제는 무치.”

한 번 더 같은 말을 중얼거리자, 제안의 낯빛이 천천히 어두워졌다. 어두워진 낯빛만큼 그의 눈빛 또한 아득해졌다. 그 눈빛이 베일 듯 날카롭고, 찢길 듯 사나웠다. 

귓가에서 비명이 들렸다. 헐떡임이 들렸다. 그 헐떡임 속에 울음소리가 섞여 있었다. 어미를 잃은 어린 짐승이 내지르는 것 같던 비통한 그 흐느낌. 삐걱 삐걱 삐걱. 헐떡이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침상이 흔들리던 소리. 높아지던 여인의 교성(嬌聲). 그것을 뒤따르듯 차차 사내의 거칠어진 숨결. 온 방안에 가득 찬 것 같던 습기. 그 습기가 손에 만져질 듯이 느껴졌었다. 그 끔찍한 습기 속에서 홀로 고고하게 서 있던 사내. 사막의 모래처럼 건조하던 눈빛. 제발. 누군가가 애원했다. 애원한 것은 여인이었던가, 아니면 사내였던가. 아니면 나였던가. 귀를 막았다. 귀를 막은 손이 누군가에 의해 억지로 떼어졌다. 아니다. 그것은 내가 아니라···.

모든 것이 분명치 않고 몽롱했다. 분명한 것은 하나뿐이었다.

“경아.”

제안이 서문경의 귓가에 입술을 붙이고 속삭였다. 언젠가 서문경에게 한 적이 있었던 말이었다.

“경아, 너만은 그리해서는 안 된다.”

몇 대 전의 황제가 그의 황후를 가둬두기 위해 만든 거대한 새장에서 했었던 말끝에 이전에는 한 적이 없었던 말이 나직하게 따라 붙었다.

“그리해야, 네가 산다.”

그렇지 않으면 짐도 네 목이 여기에 붙어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구나.

**

춥다.

독한 술에 취한 듯 잠기운에 흠뻑 젖어 있던 서문경은 문득 한기를 느꼈다. 드러난 팔다리에 싸늘한 공기가 달라붙었다. 마치 물어뜯는 듯한 한기였다. 반사적으로 온기를 찾아 손을 더듬거리던 서문경은 곧 옆에서 굴러다니고 있는 탕파(湯婆) 하나를 찾아냈다. 무작정 탕파를 껴안은 다음에야 그 탕파가 몹시도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 좋을 만치 더운 물을 넣은 그 탕파는 겉에 가죽이라도 씌운 것처럼 매끈매끈하고 말랑말랑했다. 

“?”

말랑말랑?

탕파를 쓰다듬던 서문경의 손이 멈칫했다. 잠깐, 탕파가 말랑말랑할 리가.

“!”

하고 생각하던 서문경이 다음 순간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몽롱하던 머리가 찬물이라도 맞은 듯이 싹 개였다.

“흐익.”

아래를 내려다본 서문경은 신음을 흘렸다. 그의 얼굴에서 싹 핏기가 가셨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인 서문경의 옆에는 그의 마찬가지로 나신(裸身)인 사내가 누워 있었다. 폭포처럼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과 대비되는 새하얀 피부가 마치 아무도 밟지 않은 새벽녘의 눈밭을 바라보는 듯하였다. 홀로 빛을 발하는 듯한 그 아찔한 피부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서문경이 갑자기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치켜 든 서문경의 얼굴이 창백한 것을 지나쳐 거의 사색에 가까웠다.

서문경이 비장하게 중얼거렸다.

“아무 일도 없었어.”

그럼, 하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서문경은 사내의 발치에서 나뒹굴고 있는 포단(蒲團: 이불)을 끌어올려 사내의 몸을 덮었다. 경황 중에 포단을 사내의 머리끝까지 끌어올리던 서문경이 뒤늦게 아차하고 포단을 사내의 어깨까지 내려 준 다음 한숨을 폭 쉬었다.

“도망치자.”

폐하께서 기침(起枕)하시기 전에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잘 도망치면 대충 꿈으로 얼버무릴 수 있어. 그렇게 중얼거린 다음 바닥에 흩어져 있던 제 옷가지를 바람과 같은 속도로 꿰어 입은 서문경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지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서문경이 힐끔 사내의 잠든 얼굴을 돌아보았다. 저절로 꿀꺽 마른침이 메마른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타액에 자극 받은 목구멍이 따끔따끔 아파왔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하는 거야.”

잠들어 있는 사내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말인지 모를 말을 웅얼거린 서문경은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다. 침방 앞을 지키고 있던 나인들이 놀래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서문경은 모른척하고 바람처럼 그들을 지나쳤다. 아무리 자신이 재빨리 천추전을 나간다고 해도 나인들이나 위병 등 보는 눈이 있는 이상 자신이 나간 시간을 아주 속일 수는 없다는 것 정도는 서문경도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일단 이 자리를 뜨고 싶었다.

사내 홀로 남은 와실(臥室) 안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눈을 감은 사내는 정말로 잠이 든 듯, 한참 동안이나 눈을 뜨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렇게 나온단 말이지.”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사내가 중얼거렸다.

“이거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이구먼.”

아니면 너무 창황하여 일단 도거(逃去)하고 보는 겐가. ···하기는. 무슨 이유에서건 저 놈이 헛똑똑이란 결론은 변하지 않는다. 쯧쯧 혀를 차며 말한 사내가 천천히 눈을 뜨고, 허리를 당겨 몸을 일으켰다. 아직 나신인 채로 모로 누워 비스듬히 턱을 괸 사내가 흐음, 하고 나지막한 신음을 흘렸다.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 먹으로 그린 듯한 사내의 눈이 한층 더 짙어졌다.

“그럼 저 맹랑한 것을 어떻게 할까···.”

**

따갑다.

장옷마냥 이불을 뒤집어쓰고 서문경은 생각했다. 정수리부터 이불을 뒤집어썼는데도 사람들의 따가운 눈초리가 그대로 느껴졌다. 정말로 미칠 일이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서문경이 중얼거렸다. 단 하룻밤 사이에 어떻게 이렇게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단 말인가. 서문경이 탄식하다가 곧바로 부득 이를 갈았다. 이게 다,

“그놈의 인간!”

불같은 화를 참지 못한 서문경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얇은 미색 장지문 너머로 어른어른 비치던 그림자가 화들짝 튀어 오르는 것이 보였다. 다들 제 할 일을 하는 척 부산히 서문경의 방 앞을 이리 지나고 저리 지나가더니, 사실은 역시 방 안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저것도 다 그 자에게 내 동태를 일러바치려는 셈에서 나오는 게지, 서문경이 이를 갈며 상각하다가 다음 순간 찬찬히 미간을 구겼다. 아니지.

“이건 그냥.”

이건 그냥 소문이 사실인지 궁금해서이려나.

혼잣말을 하려고 한 것도 아닌데 저절로 탄식이 흘러 나왔다. 그리하라 시킨 적도 없는데 멋대로 지껄여대는 제 주둥아리를 한 대 때려준 다음 서문경은 팔짱을 꼈다. 그러다 문득 은분매화장 위에 놓은 자개 거울거리 안을 들여다보니 그 안에는 거만하게 팔짱을 낀 주제에 오줌이라도 싼 어린애처럼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는 요상한 꼴의 사내애가 비치고 있었다. 푸른 비단을 댄 흰 솜이불 안에 들어있는 얼굴은 껍질을 깐 계란의 속살처럼 희고 반지르르하기는커녕 사흘 밤낮을 샌 폐인마냥 초췌하기 짝이 없었다.

“허.”

그 꼴을 보고 서문경이 자신도 모르게 실소했다.

“시커먼 게 아주 턱 밑까지 내려왔구먼.”

하고 되는대로 지껄이고 나서 서문경이 아으으으, 앓는 소리를 내며 벽에 마구 이마를 비볐다. 결코 옮고 싶지 않았던 황제의 말투가 아주 입에 붙어버린 작금의 현실이 통탄스럽기도 했고, 또 자신의 주둥아리가 조잘거린 황제의 말투에서 저절로 어제의 일을 연상해버린 자신의 머리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 때 문득 문 앞의 나인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말이 소곤거림이지 방 안에 있는 자신의 귀에까지 말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니 일부러 들으라고 하는 말이 분명했다.

“너희 청의관에서 묵고 계신 객께서 폐하의 애···.”

하고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청의관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일하는 궁인인 모양이었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애기나인들이 어마, 어마마 호들갑스러운 소리를 내며 궁인의 입을 막았다.

“애윤이 너는 목소리를 낮추는 것이 좋겠다.” 

“지금 수객께서는 침방 안에서 주무시고 계시다. 혹여 네 호들갑에 객께서 깨시기라도 하면 그 뒤탈을 어찌 수습할 셈이란 말이냐?”

제 동무들이 경고랍시고 재잘거린 소리에 제 흥에 겨워 묻고 있던 궁인이 아차하고 말을 멈췄다. 미색 장지 위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보아하니 깜짝 놀라 소매로 입을 가린 모양이었다. 이윽고, 여전히 입을 가린 여인의 그림자가 슬그머니 모로 향하는가 싶더니 그녀가 속살거렸다.

“그나저나, 너희 청의관 수객께서 어제 천추전에서 황상과 꽃잠을 주무셨다는 것이 사실이더냐?”

“그런 것이야 우리 나인들은 모를 일이지.”

그냥 그렇게만 말해 뒀으면 좋을 것을, 대답한 청의관 나인은 꼭 안 붙여도 좋을 말을 덧붙이고 만다.

“하지만 물손님께서 어젯밤 처소로 돌아오지 않으신 것은 사실일세.”

“나와 한 방을 쓰는 유금이의 내형제(內兄弟)가 천추전 안지밀인데, 그이가 유금이에게 어젯밤 내내 물손님께서 천추전에 머무르셨다 귀띔해주었다 하더라.”

또 다른 청의관 나인이 자신이 제 방 동무에게 들은 정보를 질세라 늘어놓았다.

“어젯밤 내내 두 분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우리네는 모를 일이다만.”

하고 그이가 덧붙였지만, 그 애매한 말끝에 꺄르르르 간드러지게 웃는 꼴이 이미 충분히 어제 ‘그 방’안에서 ‘그 두 분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 보지 않아도 알겠다는 투였다. 그 궁인을 따라 다른 궁인들도 쨋쨋한 웃음을 흘렸다. 

“일이 이리 되었으니, 이전부터 궁내에 공공연하게 돌던 풍문이 사실인가보아.”

한참 동안 웃고 난 후 걔 중 누군가가 목소리를 낮추 속삭였다. 장지문에 비친 다른 이들의 그림자가 그녀를 향해 조금 기울어졌다. 갸우뚱 고개를 기울이는 어린 새 같은 몸짓이었다.

“풍문?”

“그래, 황상께옵서 물손님을 몹시 귀애하시어 애첩으로 삼으실 셈이라는, 그.”

“애윤아.”

쉿, 하고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제 동무가 주의를 주고 나서야 자신의 목소리가 다시금 커졌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궁인이 혹여 방 안에 있는 물손님이 들었을까 싶어 장지문 안을 들여다보고, 또 혹시나 지체 높은 마마님들께서 제 부주의한 언사를 들으셨을까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던 궁인이 다음 순간 갑자기 치맛자락을 외로 여미더니 말했다.

“아직 침방(針房)에 손봐야 할 일거리가 산더미이니 내 이만 가 보마.”

장지문 위에 비치던 나인의 그림자 하나가 재빨리 사라졌다. 콩콩콩 콩을 찧는 듯한 가벼운 발소리가 아득히 멀어지자, 남아 있던 청의관 나인 중 하나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애윤이 조 것도 그리 겁이 나면 입을 가볍게 놀리지나 말 것이지.”

“다들 그리 말하니 궁금해서 몸이 달았었던 게지.”

그렇게 말하던 여인들이 멀리서 자신들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는지 동시에 몸을 모로 돌렸다. 이윽고, 서문경의 방 앞에 서 있던 두 여인의 그림자 또한 흩어지고 사위가 고요해졌다. 

그리고,

“누가 애첩이래, 누가.”

여관들이 떠들어대던 내내 이불 안에서 숨죽이고 있던 서문경이 험악하게 내뱉었다. 평소 같으면 당당히 문이라도 열고 쏘아 붙여줬을 터이지만 사안이 사안인 만큼 앞으로 나서기가 면구했다.

“미쳤나, 누가 이런 걸 애첩으로 삼아.”

서문경이 이불을 질질 끌고 거울거리에 더더욱 제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대며 웅얼거렸다. 분 냄새라도 날 법한 뽀얀 처녀애는커녕 낯빛이 누렇게 뜨고 눈 밑이 시커먼 사내애의 얼굴이 맑은 거울 한 가득 차 있는 꼴을 보자 저절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러다 서문경이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지 한 쪽 눈을 찌푸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말이 이상한데?’

“아, 그렇지, 그게 아니라.”

한참을 고민하던 서문경이 손뼉을 짝 쳤다. 그런 다음 그가 턱을 괴고 유심히 말을 골랐다.

“누가 그딴 거 해주기나 한다던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기세 좋게 내뱉은 서문경은 자신의 말이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좋아, 이거다.’하고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아, 이거지, 이거. 같은 사내놈의 애첩이라니, 누구 혼삿길을 막으려고. 그건 엎드려서 빌어도 안 될 말이지.”

“맹랑하군.”

위 아래로 흐뭇하게 움직이던 서문경의 턱이 딱 멎었다.

“?!”

바라지도 않았는데 불쑥 들려온 대답에, 서문경의 눈이 저절로 부릅떠지고, 그의 입이 쩍 벌어졌다.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서문경이 대답이 들려온 곳으로 몸을 돌리며 소리쳤다.

“당신!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자신을 가리키는 서문경의 무례한 손가락을 한참 찌푸린 눈으로 바라보던 남자가 이윽고 손을 들어 서문경의 손가락을 옆으로 치워버렸다. 귀찮은 각다귀를 쫓아 버리는 것 같은 손짓에 발끈한 서문경이 무어라 항의하려는데 남자 옆에 서 있던 또 다른 사내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잘 있었나, 야금(夜禽).”

그 목소리에 서문경의 눈이 더더욱 표독스러워졌다.

“당신은 또 언제 들어온 겁니까?”

사내가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했다.

“분명히 말했네, 지금 들어간다고 말이야.”

“지금 들어간다, 가 아니라 지금 들어가도 되느냐, 고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서문경이 사납게 쏘아붙이자 사내가 웃으며 대꾸했다, ‘혹자는 그렇게 하기도 한다더군.’ 그 빤빤한 대꾸에 서문경의 눈초리가 더더욱 사나워졌다.

“어쨌든. 무슨 일로 여기 온 겁니까.”

“내가 못 올 곳을 왔나?”

“웬일로 왔느냐고 묻는 겁니다, 그것도!” 서문경이 번쩍 손을 들어 남자 쪽을 가리켰다. “하필 저 자를 데리고.”

뭐라? 저 자, 하는 서문경의 표현에 남자의 눈썹이 확 치켜 올라갔다. 그러나 이번에도 남자가 무어라 노성을 터뜨리는 것보다 사내가 말하는 것이 빨랐다.

“그건 나도 모르지. 나도 청의관으로 향하던 중에 조우한 터라.”

그렇게 말하고서 남자가 덧붙였다, ‘물론 내 입장에서 그랬다는 거지, 효강께서도 그러셨는지는 모를 일이지.’ 그 의미심장한 말에 서문경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문가에 삐딱하게 서 있던 남자, 효강(曉康) 엄헌영이 팍 이맛살을 구겼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효강의 얼굴을 본 서문경이 못 볼 것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으로 팩 다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것에 발끈한 효강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어찌 태도가 그리 불손한가!”

“그러고 보니 자네.”

사내, 염락 조원이 갑자기 손을 뻗어 서문경의 턱을 쥐었다. 그 갑작스런 행동에 서문경이 놀라서 일순 굳었다가, 곧 제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털어 조원을 손을 떼어냈다. 그것에 조금쯤 기분이 상할 만도 한데 조원은 조금도 마음 상한 기색 없이 서문경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더니 곧 이렇게 물었다.

“잠을 못 잤나?”

안색이 몹시 안 좋군. 조원이 혀를 찼다. 그 말에 서문경이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턱을 쓸었다. 그 정도로 초췌한가?

“그건 아닙니다만.”

서문경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오히려 너무 잘 자서 문제지.

“그래?”

서문경의 대답에 조원이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그와 한 발자국 정도의 거리에 말없이 서 있던 효강 엄헌영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럴 리가, 하고 말하는 듯한 두 사람의 표정에 절로 의구심이 든 서문경이 무심코 조원을 올려다보며 두 눈을 끔뻑거렸다. 조원이 쓴웃음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애매한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의외로군.”

“? 뭐가 말입니까.”

“내가 듣기로는, 하룻밤 내내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렸다고 하던데.”

“?”

조원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영문을 알 수 없어 서문경은 눈을 크게 뜬 채로 천천히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어리둥절해하는 서문경을 본 조원이 눈가를 가느스름하게 좁히며 설명을 덧붙였다.

“천추전에서.”

“!”

“자네, 어젯밤 내내 폐하의 처소에 있었다지?”

화들짝 놀라서 굳어버린 서문경의 표현을 뱀 같은 집요한 시선으로 살피며 조원이 서문경을 떠보았다. 그 은근한 투에 기가 막힌 서문경이 한참 동안 입술만 우물거리다가, 불현듯 엄헌영에게로 팍 고개를 돌리며 고함을 질렀다.

“헛소문입니다!”

“헛소문이라?”

“헛소문입니다! 누가 하룻밤 내내 흐느껴 울었다는 말입니까?! 전 어젯밤 내내 잠만 잤단 말입니다! 단 한 번도 안 깨고 푹!”

“천추전에서?”

“그래요, 천추전에서!”

홧김에 고함을 질러 놓고 서문경이 아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눈을 실처럼 가느스름하게 뜬 조원이 흐음, 하고 오묘한 신음을 흘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조원의 눈이 짓궂게 반짝이는 것을 본 서문경은 서둘러 항변했다.

“아닙니다!”

“뭐가?”

조원이 고개를 갸웃하며 은근한 투로 물었다. 그 심통스런 대꾸에 서문경이 흠칫했다.

“무어가 아니란 말이야?”

“아니, 그게.”

차마 자신의 입으로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나는 황제와 어젯밤 이렇고 저렇고 그런 관계를 맺은 것이 아니다.’고 말할 수가 없어서 서문경은 뻘뻘 식은땀만 흘렸다. 

“폐하와 배를 맞춘 것이 아니란 말이겠지.”

그 때 엄헌영이 툭 내뱉었다. 그의 노골적인 표현에 서문경의 얼굴에서 단번에 핏기가 빠져 나갔다. 

“배, 배를 맞추다니 그건.”

“그런데 정말인가?”

조원과 서문경이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엄헌영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아무 일도 없었나?”

“지금 무슨 말을,”

예의라고는 조금도 차리지 않는 직접적인 물음에 화가 난 서문경이 엄헌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성난 얼굴로 그를 돌아본 것도 잠시, 그 동안 똑바로 쳐다보기를 피하던 엄헌영의 얼굴을 무심코 똑바로 쳐다봐버린 서문경의 얼굴이 무서운 속도로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보고 엄헌영은 눈살을 찌푸렸고, 조원은 오묘한 미소를 입가에 건 채 서문경을 응시했다. 

“소문이 사실이었나?”

“아닙, 아닙니다.”

“이런.”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은 한 주제에 서문경이 끝까지 고집스럽게 부정하자, 조원이 느릿하게 혀를 찼다.

“끝까지는 안 갔단 말이지, 그건?”

단번에 자신이 피하려고 하던 사실을 간파한 조원을 서문경이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뭔가 있기는 했나 보구먼.”

“그게 중요합니까?”

더 이상 빨개질 수도 없을 정도로 얼굴이 벌게진 서문경이 무뚝뚝하게 물었다. 쿡 찌르면 벌건 물이 나올 것 같은 서문경의 볼을 조원이 충동에 따라 한 번 찔러본 다음, 무슨 짓이냐는 눈초리로 자신을 쏘아보는 서문경에게 말했다.

“그렇진 않지.”

“그걸 물어보려고 온 겁니까?”

“그것도 아니라네.”

자네와 폐하에 얽힌 풍문이야 그저 오다가다 들은 것일 뿐이라네, 하고 말한 조원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덧붙였다.

“침소에서 나오자마자 여기저기서 떠들어대더군. 종묘사직(宗廟社稷)을 보위하실 폐하께옵서 혹여 엄인(?人: 고자)은 아니신가 경경불매(耿耿不寐)하고 있던 이들이 참으로 많았던 모양이야. 정후나 후궁은커녕 나인아이 하나 취하신 적 없다 보니 은근히 그런 걱정을 할 법도 하지. 만방에 승은(承恩)을 바라는 꽃들이 이리도 가득한데 정작 나비는 어느 꽃에도 앉을 생각이 없으니.”

하고 말한 조원이 서문경을 힐긋 곁눈질했다.

“스, 승은.”

서문경이 충격을 받은 듯 웅얼거렸다. 그렇게 중얼거리는 그의 입술이 몹시 창백했다. 역사극에서만 들었던 승은이니 임금의 총애니 봉작(封爵)이니 하는 단어들이 메아리처럼 서문경의 머릿속을 떠돌았다. 그런 건가. 정작 일이 진행되던 당시나 오늘 새벽에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미처 깨닫지 못했었는데 어제의 그건 설마 그 말로만 듣던 그······.

“그러니 온 궁내가 시끌벅적해질 만도 하지 않은가. 어떤 꽃 같은 여인들과 어떤 옥 같은 미동들을 보아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셨던 폐하께옵서 승은을 내려 주신 이가 있다는데.”

자, 장희빈? 충격을 받은 나머지 장희빈과 숙빈 최씨 같은 조원과 엄헌영으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던 서문경이 파르르 떨면서 조원의 말을 끊었다.

“분명히 말해 두지만 그건 오햅니다! 그런 짓 한 적 없습니다!”

“그건 중요하지 않네.”

하지만 서문경의 시퍼런 서슬에도 조원이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그의 말에 서문경이 멈칫했다. 

“중요하지 않다고요?”

“그래, 개인적으로는 대단히 궁금하지만.”

“왜 사실 여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까?”

그 물음에 조원이 대답해 주는 대신 애매한 미소만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안달이 난 서문경이 확 조원의 옷자락을 잡아채려고 손을 뻗는데 그 때 엄헌영이 툭 말을 뱉었다.

“이미 엎질러진 타락(駝酪: 우유)자기니.”

“아, 아무 일도 없었다고 제가 분명히!”

엄밀히 말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하는 말은 꿀꺽 넘겨 버리고 서문경이 항의했다. 

“있었네.”

그러나 조원의 웃음기 어린 말이 서문경의 말을 막았다. 서문경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보자 조원이 보란 듯이 빙긋 웃어보였다. 그 웃음을 보자 어쩐지 불길함에 가슴이 떨려 와서 서문경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오물거렸다.

“자네와 폐하를 제외한 궁내의 사람들에게는 모두 있었던 일이네.”

“뭐.”

“그러니 자네가 실은 어땠다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 항변해도 소용없는 일이야.”

그렇게 말하는 조원의 목소리는 조금 들뜬 것처럼 들렸다.

“자네 얼굴만 보면 어둡던 용안(龍顔)에 꽃이 피고, 심통 사납던 폐하께옵서 자네만큼은 곱다 참으로 곱다 단 말 고운 말 연발하여 괴시며, 또 온갖 보배들을 안은 천추전 나인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청의관을 드나드는데 어찌 그런 소문이 돌지 않고 배기겠는가?”

조원의 설명에 서문경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대체 언제 그런 일이?, 하고 황망히 생각하다가 혹시나 싶어 황제와 보낸 시간을 애써 되뇌어 봐도 나오는 것은 자신에게 신경질을 부리던 황제의 모습, 별 것 아닌 일로도 대단한 일을 해낸 양 거드름을 피우던 황제의 모습, 그리고 때때로 일이 제 마음대로 풀리지 않으면 있는 대로 소리를 지르며 생떼를 부리던 황제의 모습 등등뿐이었다.

“옷과 신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혼란에 휩싸인 서문경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분명 네가 그 딴 몰골로 내 침전에 드나드는 꼴은 도저히 못 봐 주겠다며 던져준 것이었는데? 

“그런데다 황제의 침전에서 하룻밤을 꼬박 지냈으니.”

엄헌영이 툭 내뱉었다. 뭔가 몹시 탐탁지 않다는 투였지만 서문경은 엄헌영의 속내 따위에 신경쓸만한 여력이 없는 상태였다. 

“타고 있는 장작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됐지.”

엄헌영의 말을 조원이 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두 팔로 머리를 감싸 안은 서문경이 매달리는 것 같은 시선으로 조원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평소보다 조금 더 상냥한 웃음을 입가에 매단 조원이 서문경과 눈을 맞추며 위로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기정사실화라고 할까.”

“뭐가요!”

서문경이 대뜸 소리를 질렀다. 그의 목소리에서 쇠를 긁는 듯한 소리가 함께 튀어나왔다. 

“뭐겠나.”

조원이 능청스레 대답하며 엄헌영에게 슬쩍 시선을 돌렸다.

“효강께서는 어떤 풍문을 들으셨습니까?”

엄헌영이 대답 대신 미간을 팍 찌푸렸다. 그것을 못 본 척 하고 조원이 여전히 쾌활한 투로 말했다.

“저는 곧 청의관 물손님의 거처가 백희궁(百熙宮)으로 옮겨질 거라는 말을 들었습니다만.”

“백희궁?”

자신이 모르는 곳의 이름이 나오자 서문경이 의아하게 중얼거렸다. 음, 하고 조원이 턱을 끄덕이며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혹자들은 백희궁(百戱宮)이라고도 하지.”

“그러니까 거기가 대체 어떤 곳이기에,”

“이런, 무산지몽(巫山之夢)만치 사내의 마음을 끄는 것이 어디 있을꼬.”

조원의 말에 서문경의 눈이 찡그려졌다. 조원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그것을 눈치 빠르게 알아챈 조원이 조금 목소리를 낮추어 답을 속삭여 주었다.

“황상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궁일세.”

즉, 하고 조원이 말했다.

“황상의 후궁들이 있는 곳이지.”

지금은 비어 있으니 자네가 첫 손님이 되겠군, 조원이 부드러운 투로 사족(蛇足)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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