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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경은 무릎을 꿇은 채 방 제일 구석진 말좌(末座)에 앉아 있었다. 종아리에 닿는 바닥이 아랫목도 아닌 것이 따뜻한 것을 지나쳐 펄펄 가마솥이 끓는 듯하였다. 무릎이 견딜 수 없이 뜨거워져서 자세를 좀 바꿔 볼까 몸을 꼬물거리다가, 이윽고 서문경은 꼬무락거리는 것을 그만 두었다. 자신의 신중치 못한 태도 때문에 황제가 괜한 트집을 잡힐까 걱정이 되기도 했고, 또.
“황상, 이것이 어인 일이오?”
한 동안 말도 없이 황제를 노려보다시피 하고 있던 태황태후가 불현듯 툭 내뱉듯 말했다. 그 조모에 그 손자라고, 태황태후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눈빛을 태황태후에게 던지고 있던 황제가 퉁명스런 투로 대꾸했다.
“소손(小孫)이 할마마마를 찾아 뵌 것이 어인 일이냐는 말씀을 들을 만한 일이옵니까?”
“황상께서 이 할미를 마지막으로 찾으셨던 것이 까마득한 예전 일이니, 늙고 우둔한 가슴에 새삼 낯선 마음이 들어서 이런다오.”
“마마의 옥안(玉顔)을 뵈오니 소손도 그런 마음이 드옵니다. 소손이 와병(臥病) 중이었던 내내 마마를 뵙지 못하였으니, 실로 오랜만이라 할 만 하옵니다.”
직역하자면 ‘평소에는 코빼기도 내밀지 않던 놈이 갑자기 찾아왔으니 내가 네 놈을 박대(薄待)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으냐.’, ‘손자가 몸져누워 있던 내내 문병도 한 번 안 왔던 주제에 무슨 낯짝으로 그런 말을 하냐.’ 정도려니.
서문경은 우아한 말투로 독기 어린 말을 혀에 기름이라도 바른 듯 술술 내뱉고 있는 태황태후와 황제를 질린 표정으로 훔쳐보았다. 아무 것도 모르는 자신이 봐도 서로를 싫어하는 것이 한 눈에 보이는 조손(祖孫)간이었지만,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독언(毒言)을 퍼붓고 있는 모습만큼은 판에 박은 듯 닮아 있었다.
“이렇게 예인을 대동한 것을 보니 황상의 성의(聖意)가 비단 배후(拜候: 문안)에만 닿아 있는 것이 아닌 듯한데, 이 할미의 짐작이 맞소?”
순수한 뜻으로 문후 든 것도 아닌 주제에 작작 좀 하시오, 하는 뜻으로 태황태후가 말하며 방 한 구석에 구겨져 있던 서문경에게 시선을 돌렸다. 최대한 태황태후의 눈에 뜨이지 않도록 거의 방 모서리에 가까운 곳에 기어 들어가 있던 서문경이 그런 보람도 없이 자신에게 쏟아지는 눈초리에 속으로 투덜투덜 욕설을 지껄였다.
아, 따가워. 시선을 받는 것만으로 느껴질 리 없는 따끔함을 온 몸에서 느끼며 서문경이 다른 사람들의 시야에선 보일 리가 없는 발가락을 꼬물거렸다. 호기심 어린 태황태후의 시선이나 다소의 적대감이 느껴지는 중년 남자의 시선은 그러려니 하더라도, 자신이 이 방 안에 들어선 순간부터 아예 눈에서 불꽃을 쏟아내다시피 하는 저 청년의 시선은 도저히 웃어넘길 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때 한 번 절묘하구만.’
서문경은 속으로 한숨을 푹 쉬며, 방 안에 들어선 순간부터 했던 생각을 다시 한 번 반복했다. 창혜각 뒤 대밭에서 헤어질 때 언뜻 저 인간이 태황태후전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을 지나가듯 들은 기억이 있기는 했지만 그 때로부터 지난 시간이 몇 시간인데 아직까지 여기에 눌러 붙어 있을 줄이야.
‘금방이라도 태황태후전을 박차고 나올 것처럼 굴더니, 실제로는 아예 여기에 둥지를 틀다시피 했네.’
아랫목에 눌러 붙은 인절미 같은 놈. 부친인 엄유의 눈총까지 감수하고 수번이나 태황태후전에서의 탈출을 시도했던 엄헌영이 들으면 당장 칼을 뽑아들 생각을 하면서 서문경이 다시금 발가락을 꼬물거렸다. 쏟아지는 사람들의 눈초리를 아무 말도 못하고 받고만 있으려니 며칠째 환기도 안 한 방에 갇혀 있는 것처럼 머리가 답답하고 숨이 막혀왔다.
-그는 태황태후의 애제인 엄유 어르신의 계자일세. 그러니 성은 엄씨이고, 이름은 헌영, 자(字)는 엄화.
눈앞의 사내에 대해 조원이 해주었던 말이 언뜻 머리를 스쳤다. 서문경은 마치 하늘같으신 태황태후의 앞에서 황송하여 어쩔 줄 몰라 하는 서인(庶人)인 것처럼 깊숙이 머리를 조아리고 생각했다, ‘그러면 저 자의 이름은 엄헌영이라는 거군.’
“참으로 고운 청년이로고.”
표정이나 시선으로 봐서는 금방이라도 날 물어뜯을 기세이긴 한데, 설마 황제와 태황태후가 있는 방에서 그러진 않겠지. 서문경이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데 태황태후가 말했다. 거의 이마를 바닥에 대듯 몸을 수그리고 있는 서문경의 자세가 마음에 들었는지 한층 부드러워진 어조였다.
“황상, 저 자가 이번 내춘 대연회 경연에 황상을 대신하여 내보낼 예인이오?”
“그렇사옵니다.”
“그래···.”
태황태후에 생각에 잠긴 것처럼 말끝을 흐렸다. 서문경은 자신의 머리통에 쏟아지는 태황태후의 시선이 한층 집요해진 것을 느끼고 눈살을 구겼다. 별로 눈에 띄고 싶지 않았는데, 왜 또.
“곱다. 사내가 어찌 저리도 고운고.”
거의 핥듯이 서문경의 얼굴을 뜯어보던 태황태후가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한숨을 섞어 말하면서 한 손으로 무릎까지 치는 모습을 보아하니 오목조목 귀티가 서린 서문경의 생김새가 대단히 마음에 흡족한 모양이었다.
“눈매가 새치름하고 입맵시가 야무진 것이 수리를 닮았도다.”
“···감사합니다.”
태황태후 엄씨가 칭찬이랍시고 해 준 말에 서문경의 입매가 절로 삐뚜름해졌다. 다 좋은데 왜 또 새인 거냐. 서문경이 진지하게 ‘진짜 내 얼굴이 새를 닮았나.’하고 고민하기 시작할 무렵, 태황태후가 맏누이가 나 어린 동생을 부르듯 정답고 은근한 목소리로 서문경을 불렀다, ‘자네.’
“한 번 고개를 들어 보게.”
“마마, 천한 예인 따위에게 어찌하여,”
“짐이 언제 그대가 입을 열어도 좋다 윤허하였나.”
태황태후의 말에 화들짝 놀란 엄유가 당혹한 기색으로 제 맏누이를 만류하는데, 황제의 싸늘한 목소리가 엄유의 말허리를 잘랐다.
서릿발이라도 날릴 듯한 황제의 어조에 당장 깨갱한 엄유가 꼬리를 만 개처럼 상반신을 엎드리고 엉덩이를 슬금슬금 뒤로 밀었다. 그 볼품없는 모습에, 저렇게 한심한 자래도 일단은 제 아비인지라 기분이 나빠졌는지 엄헌영의 표정이 노골적으로 험악해졌다. 저런, 하고 태황태후 또한 못마땅한 기색을 그대로 드러내며 혀를 찼다.
“황상, 비록 자당이 황상의 안전에서 무례를 범하기는 했으나 그래도 황상의 외숙조부(外叔祖父)가 아니오.”
“또한, 신하되는 처지로 황상의 안전에서 실경(失敬)을 저질렀다고는 하나 천한 예인의 앞에서 두 분 폐하의 외친까지 되시는 권귀(權貴)를 나무랐다는 예는 고금(古今)을 통틀어 들어본 바가 없나이다.”
태황태후를 이어 엄헌영까지 따지고 들자 황제가 엄헌영을 지그시 노려보며 침묵했다. 금방이라도 들고 있는 옥배를 엄헌영의 머리통으로 던질 듯한 짜증 섞인 눈초리를 똑바로 받아내며 엄헌영이 턱 끝을 슬쩍 치켜들었다. 방금 네가 섣불리 저지른 실수를 또 한 번 반복하겠느냐는 도발이었다.
“황상, 아직 엄 장군이 연소한 탓에 종종 얕은 생각을 하고 섣불리 행동하는 경우가 있으니 너그러우신 황상께서 너무 나무라시지 마시고 귀엽게 보아 넘겨주시기를 바라오.”
엄유의 무례함을 꾸짖는 황제를 곧바로 만류하던 태황태후가 이번에는 주제넘게 황제를 도발하는 엄헌영을 감싸고 나섰다. 황실의 큰 어른이 엄헌영을 감싸고돌자, 더더욱 성질대로 난장을 칠 수가 없어진 황제의 표정이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운현궁의 옥벽(玉壁)을 믿고 네가 감히 어깃장을 부리는구나.”
한참 동안 엄헌영을 노려보던 황제가 씹어 내뱉듯 말했다.
‘내전의 옥(玉)’, 태황태후가 강윤제의 정후였던 시절 절세(絶世)의 가인(佳人)이었던 황후를 일컬어 세간에서 하던 말이었다. 그리고 경혜황후(瓊慧皇后)였던 시절 내전의 옥이라 불리던 태황태후는, 태후의 좌에 오른 후 가연제 재위 초기에 수렴청정을 맡으면서 그 완고하면서도 과격한 정치색 때문에 ‘단경궁(端境宮)의 옥벽(玉壁)’이라 불리었다. 가연제가 붕(崩)하고 태후 무아가 태황태후의 거처인 운현궁으로 거처를 옮긴 이후로도 세간의 사람들은 그녀를 암암리에 여전히 황궐의 실세인 옥벽이라 부르고 있었다.
‘태황태후의 치맛자락에 숨어 감히 지존을 능멸하느냐.’는 황제의 말뜻을 단번에 알아차린 엄헌영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그렇지 않아도 태황태후가 자신과 황제 사이에 끼어 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찰나에, 황제의 조롱까지 들으니 머리끝까지 열불이 치솟았다.
“소신을 비롯한 문무백관(文武百官)들이 아직 발톱도 없는 용의 발아래 웅크리고 있는 것은, 폐하의 몸 안에 흐르고 있는 피 때문인 것을 기억하소서.”
엄헌영이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윽박지르는 것 같은 투에 황제의 눈빛이 흉흉해졌다. 눈빛으로 사람을 찢어 죽일 수 있다면, 금방이라도 엄헌영의 몸을 수 백 조각으로 찢어발길 것 같은 눈초리였다.
“효강, 네가 대체 누를 믿고 그리도 오만방자한지 모르겠구나.”
“소신이 믿는 것은 오로지 소신 하나 뿐이옵니다.”
하고 대꾸한 엄헌영이 빈정거리듯이 덧붙였다, ‘뿔도 발톱도 없는 주제에 몸 안에 흐르는 아비와 어미의 피 만으로 연명(延命)하는 누구와는 다르지요.’ 그 말에 황제가 이번에는 서슴없이 들고 있던 옥배를 엄헌영의 이마에 집어던졌다. 사납게 눈을 치뜬 엄헌영이 황제가 던진 옥배가 자신의 이마에 날아오는 것을 보면서도 고집스럽게 머리를 치켜들고 그대로 옥배를 맞았다.
“효강아!”
딱!
엄헌영의 이마에 부딪친 옥배가 바닥으로 떨어져 데구르르 소리를 내면서 몇 바퀴 굴러갔다. 깜짝 놀란 엄유가 무릎걸음으로 엄헌영을 향해 기어갔다. 옥배에 맞은 이마가 가로로 길게 짖어져 새빨간 피가 흐르고 있었다.
“황상! 이 늙은 할미의 앞에서 무슨 짓이요?!”
태황태후 엄씨가 대경(大驚)하여 고함을 질렀다. 엄유가 피가 흐르는 엄헌영의 이마를 소맷자락으로 훔치며 황제에게 원망스런 눈길을 보냈다. 다른 이들의 질책을 한 몸에 받은 황제는 여전히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엄헌영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황제에게 적대적인 방의 분위기 때문인지 그 모습이 묘하게 외로워 보였다.
“······.”
이거 보자보자 하니까. 숨을 죽이고 다른 이들이 하는 짓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서문경이 거칠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감히 나설 자리는 아닌 것을 압니다만.”
서문경의 한숨 섞인 목소리가 방 안에 무겁게 가라앉은 침묵을 깨뜨렸다.
“그래도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말하자, 사람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자신에게 와 꽂히는 것이 느껴졌다. 어쩐지 화살촉들에 겨누어진 과녁받이가 된 기분이라서 머쓱하기도 하고 확 짜증이 치솟기도 했지만 서문경은 지랄 맞은 성질머리를 가까스로 가라앉히고 하다 만 말을 이었다.
그러자, 그렇지 않아도 제 아들이 황제가 던진 잔에 얻어맞아 치솟은 울분을 풀 데가 없어 속만 끓이던 엄유가 벌컥 화를 냈다.
“천한 광대 나부랭이 따위가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말하라.”
엄헌영이 확 눈을 사납게 치켜뜨고 포효하듯 외치는데, 황제의 목소리가 그 말을 막고 나섰다. 이 때다 하고 역정을 냈던 엄유가 곧바로 말허리가 끊기자 당혹한 나머지 어물거렸고, 무어라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던 태황태후 또한 황제에게 선수를 빼앗겨 벌린 입을 채 다물지도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엄유와 태황태후의 표정을 재빨리 살핀 서문경이 내심 한숨을 쉬면서 태황태후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 엄유라는 작자는 몰라도, 아무래도 여기에서 태황태후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은 옳은 선택이 아닌 것 같아서였다.
“그리하게.”
서문경의 시선이 힐끗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알고 태황태후 엄씨가 가까스로 입술에 미소를 띠며 턱 끝을 끄덕였다. 황제가 못마땅한 듯 이맛살을 찌푸리는 것이 보였지만, 서문경은 그것을 못 본 척해 버렸다.
“그럼 말씀 드리겠습니다.”
황제와 태황태후 모두에게 허락을 얻은 서문경이 허리를 당겨 엎드려 있던 몸을 들었다. 태황태후의 관심에서 벗어나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지나치게 납작 엎드려 있던 몸이 어차피 이렇게 될 일, 왜 답지 않은 짓거리를 한 거냐며 우두둑 우두둑 비명을 질러댔다. 지끈지끈 아픈 관절을 주무르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서문경이 눈썹을 찌푸렸다. 이렇게 될 줄 내가 알았냐고.
“말씀을 듣다 보니 이상하다 싶은 것이 있어 감히 어르신들의 담소 중에 끼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냐.”
태황태후가 답하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정중하기는 하나 아주높임은 아닌 투와, 공손하기는 하나 비굴한 기색이 없는 서문경의 얼굴을 보고 어딘가 어색하다 느낀 탓이었다. 태황태후가 의아한 눈길로 자신의 얼굴을 살피는 것을 느끼며 서문경은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찌릿 엄헌영을 노려보았다. 그것을 느낀 엄헌영이 성 난 짐승처럼 두 눈을 마주 부라린다.
“저 분께서 분명 황상께 아무리 큰 실례를 저질렀다 하나 어찌 천한 예인의 앞에서 귀인(貴人)을 나무라느냐 하셨습니다만.”
“그렇네만.”
“그렇게 따지자면, 천한 자의 앞에서 감히 지존의 허물을 들추는 무례함은 어찌 생각해야 합니까?”
“그것은.”
생각지도 못한 지적을 받고 당혹한 듯 태황태후가 중얼거렸다.
“그 또한 자네가 할 지적은 아닌 듯 하군.”
태황태후와는 달리 조금도 흔들리는 기색하나 없이 엄헌영이 말했다. 그 싸늘한 말에 서문경이 대꾸 없이 엄헌영을 향해 눈을 치켜뜨고, 콧잔등을 찌푸렸다.
“그대들, 안면이 있는 사이였던가.”
서문경과 엄헌영이 한 동안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으려니 황제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물었다. 황제가 툭 던지듯 물은 말에 덜컹 가슴이 내려앉는 듯하여 서문경이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부릅떴다. 조원을 만나기 위해 창혜각에 갔었던 사실을 아직 황제에게 숨기고 있었던 탓이었다.
“그것은,”
“무슨 말씀이십니까.”
엄헌영이 먼저 입을 열자, 자신의 사정을 알 리 없는 엄헌영이 무슨 말을 지껄일지 덜컥 걱정이 된 서문경이 재빨리 엄헌영의 말을 가로챘다. 창혜각 후원에서 기다리고 있으라는 경고를 무시하고 불시에 제 앞에 나타난 천한 예인이 이제는 자신의 말까지 가로막고 나서자 기가 막힌 나머지 엄헌영이 노여워하는 것도 잊고 허, 하며 헛웃음을 흘렸다.
“아니.”
황제가 입 속으로 중얼거리며 슥 눈가를 좁혔다. 가늘어진 눈매 안에 들어 있는 가만 눈이 자신의 속내를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아서 괜히 속이 불편해지는 것을 느낀 서문경이 시선을 내리깔아 황제의 눈을 피했다.
“효강이 경이 네 허락도 없이 네게 말을 놓기에 하는 말이다.”
“무슨 말씀이시오, 황상.”
태황태후가 묻자, 황제가 서문경을 흉내라도 내듯이 두 눈을 내리깐 채 태황태후와 엄헌영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서문경과는 달리 황제가 두 눈을 내리깔고 사람을 쳐다보자 그 눈길은 겸연쩍어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사람을 얕잡아 보는 듯 거만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가 풍겼다.
“어찌하여 예조의 권귀 되는 자가 한낱 예인에게 허락을 구해야 한단 말이시옵니까?”
혹시라도 제 머리 위에 날벼락이 떨어질까 방 한편에 물러서서 황제와 태황태후 엄씨의 눈치만 살피고 있던 엄유가, 또다시 제 아들에게로 화살이 향하자 아무래도 이것은 아니다 싶었던지 나서서 항의했다. 그 말에 황제가 엄유에게 시선을 돌려, 그를 향해 경멸하는 시선을 보냈다.
“존비(尊卑)의 위계질서는 하늘이 열린 이후로 늘 있어 온 법도이네만, 이 세계의 법도로는 이 자의 귀천(貴賤)을 잴 수 없음이라.”
“황상. 그 말은.”
황제의 의미심장한 말에 눈치 빠른 태황태후가 먼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잇따라 황제의 말뜻을 알아챈 엄헌영과 엄유가 새삼스런 눈으로 서문경을 돌아보았다.
그러다 설마···, 하며 엄유가 중얼거렸다.
“설마, 자네가 얼마 전 예에 흘러 왔다는 물손님이신가.”
“그래, 그 쪽이 바로 그.”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태황태후 엄씨가 그리 말하며 휘둥그레 뜬 눈으로 서문경의 온 몸을 훑었다. 물론, 새삼스런 눈으로 서문경을 살피는 것은 비단 그녀 뿐만은 아니었다. 진귀한 구경거리라도 앞둔 듯 두 눈을 가늘게 뜬 엄유가 연신 호, 호오, 하는 소리를 내며 서문경을 뜯어보았고, 엄헌영 또한 부릅뜬 눈으로 뚫어져라 서문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서문경은 가만히 이마를 찌푸렸다. 이 세계에 온 이후 구경가마리 취급을 받는 것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아닌 모양이었다.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의 눈이 순식간에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느끼자, 어쩐지 심장 뛰는 소리가 빨라지고 반대로 뒷머리가 싸늘하게 식었다.
그 때, 누군가가 불쑥 중얼거렸다.
“물손님.”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마치 목구멍 안쪽에서 부글거리는 듯했다. 그 목소리에 이끌려 서문경은 바닥으로 내리깔고 있던 눈을 들었다. 그러나 바글바글 끓는 물에서 나는 것 같은 그 목소리를 낸 사람이 누구인지는 이미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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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손님.’
그르렁거리는 목소리가 아직 엄헌영의 귀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목소리 같지 않은 목소리를 아무 의미도 없이 되새기며 한참 전부터 거의 노려보다시피 하고 있던 얼굴을 다시금 이렇게 살펴보고 있으려니 불쑥 새퉁맞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손님이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얼굴로 태황태후 엄씨와 자신의 아비를 차례로 쳐다보던 물손님의 시선이 이윽고 자신에게로 와서 멎는다.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특별히 눈매를 찌푸리지 않아도 어딘가 샐쭉한 느낌이 드는 물손님의 눈매가 더더욱 가느스름해지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한 동안을 시선을 맞부딪치고 있자니, 불현듯 묘한 기분이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치솟았다. 과연, 하고 엄헌영은 물손님이라는 작자를 응시하며 생각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어딘가 묘한 느낌이 드는 자라고 생각했었다. 대갓집 따님들이나 탈 만한 화사한 승교(乘轎)를 타고 알록달록 곱기도 고운 장의로 얼굴을 가리고 있기에, 처음에는 또 하루가 멀다 하고 이 댁 따님의 눈에서 옥루(玉淚)를 흘리게 만들었네, 저 댁 따님이 정혼(定婚) 파하게 만들었네 하는 소식을 듣게 만드는 염락 조원을 찾아온 처녀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정작 얼굴을 가린 장의를 내리자, 그 안에서 나타난 것은 계집이 아닌 사내의 얼굴이었다.
몇 시간 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자신도 모르게 눈에 힘이 들어갔는지, 자신을 마주 바라보고 있던 물손님도 팍 미간을 찌푸린다. 네가 노려보면 어쩔 거냐, 하고 따지기라도 하는 듯한 눈초리였다.
-폐하?!
태황태후의 표현처럼 쥐새끼를 노리는 수리마냥 뾰족한 눈초리를 보고 있으려니, 자신의 얼굴을 보고 저 자가 당황하여 외치던 말이 다시금 생각났다. 허, 하고 저절로 허탈한 소리가 흘러 나왔다. 자신과 황상 사이의 오랜 반목은 저 태황태후와 황제의 사이가 좋지 못한 것만큼이나 유명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어쩐지 자신의 얼굴을 보자마자 겁도 없이 폐하 소리를 한다 싶었다.
“과연···,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보니, 어딘가 이 세계의 사람들과는 사뭇 생김새 다른 듯도 하구나.”
태황태후가 마치 한숨이 섞인 듯한, 가쁜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마마의 말씀이 옳사옵니다.’, 자신의 아비가 태황태후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소리도 들렸다.
‘그런가.’, 그러나 태황태후의 말에 엄헌영은 의구심을 느꼈다. 엄헌영은 물손님의 생김새를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물손님의 슬쩍 내리깐 눈은 은행껍질처럼 얇은 속 쌍꺼풀이 져 있었고 눈꼬리는 마치 그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 끝이 살짝 치켜 올라가 있었으며,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콧마루는 절묘한 호선을 그리며 자연스레 잘 생긴 인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지금은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어 잘 보이지 않은 검은 눈에는 어떤 일에도 기죽지 않을 고집스런 빛이 엿보였고 그에 걸맞게 물손님의 턱 선은 조금 날카로운 듯도 하였지만, 묘하게도 그의 두 뺨은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어린아이처럼 희고 포동포동했다.
태황태후의 표현 그대로 먹이를 노리는 수리처럼 예리한 눈매를 한 주제에, 동시에 아무에게나 삐약삐약 부리를 벌려대는 새끼 새 같은 볼을 같은 사내였다.
아.
참으로 묘한 느낌이 드는 생김새긴 하다만 그다지 이 세계의 사람들과 생긴 것이 다른 것 같지는 않은데, 하고 생각하다가 엄헌영은 순간 깨달았다. 정확히는 생김새가 아니라 저 작은 머리통 안에 든 생각이 달랐다. 표정과 눈빛이 달랐다.
엄헌영은 허공에서 마주친 서문경의 눈을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못마땅하여 연신 씰룩거리고 있는 입가를 보았다. 그래, 맞다. 확실히 저 자의 낯빛과 눈빛은 이 세계의 사람들과는 달랐다. 그에게는 신분이 낮은 자가 흔히 보여주곤 하는 비굴한 태도나 시기 어린 눈빛도 없었고, 신분 높은 자의 표정에 늘 어려 있는 으스대는 듯한 오만함과 타인을 깔보는 거만한 표정도 없었다.
“어느 분의 세계서 오셨는가?”
물손님에 대한 호기심에 황제에 대한 언짢음을 잠시 접어 둔 태황태후 엄씨가 물었다. 소녀처럼 눈을 빛내는 태황태후 엄씨를 보고 순간 물손님이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분명 쓴웃음이었다.
감히 변덕스럽기가 장마기 날씨보다도 더 한 태황태후의 앞에서 고소(苦笑: 쓴 웃음)를 짓다니. 대단한 담력이로다, 혀를 차다가 엄헌영은 불쑥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모로 저었다. 아니다, 저 치는 담대한 것도 무모한 것도 아니라 그저 솔직한 것뿐이었다.
-물손님과 하늘손님이 어떻게 다르냐 물으셨습니까.
물손님이 예로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지나가는 말로 묻자, 염락 조원이 웃으며 해주었던 대답이 문득 엄헌영의 머릿속을 스쳤다.
-장군께서도 아시겠지만, 하늘손님과는 달리 물손님은 물을 타고 옵니다. 그 물은 작은 내일 때도 있고 강일 때도 있으며 호수일 때도 있고 때때로 바다일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기억을 잃고, 힘을 잃지요.
-그래서야 단순한 기억을 상실한 병자가 아닌가.
자신이 그렇게 말했을 때, 조원이 무어라 대답했더라.
-그렇지요.
그렇게 대답하는 조원은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딱딱하기가 목석보다도 더 하다는 금오위(金吾衛) 유일의 여낭장(女郎將)까지 녹인 달콤한 미소가 어딘가 우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런데 효강, 장군께서는 어째서 물손님이 기억을 잃는지 아십니까.
그 묘한 웃음을 아무런 말도 없이 입술에 걸고 있던 조원이 침묵을 깨고 불쑥 물었다.
-물(水)을 타고 왔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합니다. 세계와 세계를 잇는 모든 물들은 혼(混)께서 변하여 이루신 것이고, 혼께서는 세상 만물의 어머니시지요. 어머니의 양수(羊水) 안에서 잠자던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듯, 혼을 타고 다른 세계로 흘러온다는 것은 반쯤은 새로 태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모든 물손님들은 기억을 잃지요.
혼의 은혜로 세상에 난 자라면 다섯 살 먹은 어린아이도 알 법한 이야기를 무슨 큰 비밀이라도 폭로하는 것처럼 말하는 조원을 엄헌영은 다소 의아한 눈으로 쳐다봤던 모양이었다. 갑자기 조원이 멋쩍은 듯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중얼거렸다, ‘다 아시는 이야기인데, 그만 할까요.’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를 하려고 말을 꺼낸 것은 아닐 텐데.
-뭐, 그렇지요.
조원이 건성으로 대꾸하며 반쯤 열린 월창(月窓) 너머로 힐끗 눈길을 던졌다, ‘그런데 밖이 소란스러운 것을 보니 체재공께서 오신 모양입니다.’ 서현이 왔다는 말을 듣고 당분간 창혜각도 떠들썩하겠다 생각하면서 엄헌영이 앉은 자리에서 일어서자 조원이 씩 실눈을 뜨고 웃었다. 가실 겁니까.
-그러나 비단 물손님들이 그런 이유로만 기억을 잃는 것은 아닐 겁니다.
체재공의 추종자들과 맞닥뜨려 괜히 정신 사나워지기 전에 가야지, 하고 대충 대꾸하고는 방을 나가자 그 뒤통수에 대고 조원이 말했다. 뜬금없는 말에 의아해하며 시선을 돌렸다가, 조원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그 묘한 웃음을 다시 보고 깨달았다. 방금 전까지 나누던 대화의 연장선상에 있는 대답이었다.
-그럼 그 이유란 건 뭔가.
-단순히 제 추측에 불과한 말입니다만, 그들이 가진 성품 때문이겠지요.
-성품?
하고 물었지만, 그러나 그 이후로 조원은 어떤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범님의 세계에서 왔습니다.”
물손님의 나직한 목소리가 계속되던 상념을 잘랐다. 공손하지만 비굴하게 태황태후의 비위를 맞추려는 기색은 전혀 없는 담백한 투였다. 성품이라. 목소리와 마찬가지로 구용(苟容)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해사한 얼굴을 보고 엄헌영을 새삼 조원이 했었던 말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태황태후가 손뼉까지 치며 아는 척을 했다.
“오오, 범님의 세계에서 오셨다 했는가. 범님의 세계라. 오, 그래, 그럼 그 술사, 창혜각에 머물고 있는 그 바람쟁이와 같은 세계에서 오셨군.”
“조원 그 작자 말씀이십니까.”
마땅찮은 기분을 조금도 숨기려고 하지 않는 물손님의 반응에 태황태후 엄씨가 소맷자락으로 입가를 가리고 낭랑한 목소리로 웃었다. 자신 앞에서도 움츠려드는 기색 하나 없이 당당한 서문경의 태도에 잠시 당혹한 듯하더니, 또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웃는 모습을 보니 자신이 느낀 위화감이 그저 착각이라 생각하고 넘어간 모양이었다.
“염락과는 그다지 감정이 좋지 못한 모양이구려.”
“감정이 좋고 나쁘고를 논할 정도로 안면이 있는 사이도 아닙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저는 다른 손님들과는 사는 곳도 다르니까요.’하고 물손님이 설명을 덧붙이자 태황태후가 옳다, 하고 무릎을 탁탁 쳤다. 물손님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겨우 물손님이 하늘손님들과는 달리 창혜각이 아닌 청의관에서 묵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표정이었다.
“그래, 그대를 그럼 무어라 부르면 될꼬?”
태황태후가 물었다.
“내 듣기로는 하늘손님들과는 달리 물손님들은 물을 타고 오면서 예전 세계에 대한 기억을 대부분 잊는다 하던데, 그대의 이름이나 호는 기억하고 있는가?”
물손님이 무어라 대답하기 전에 태황태후가 재차 물음을 던졌다. 태황태후 엄씨의 질문에 물손님이 멈칫하는가 싶더니, 금세 낯빛이 어두워졌다. 태황태후의 말마따나 이전 세계에서의 기억을 대부분 잃었을 터이니 원래의 세계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이나 애절한 슬픔 따위는 없을 테지만, 기억이 없다 해도 듣기에 퍽 편한 말은 아닐 것이 뻔했다.
그러나 나기를 명문대가(名門大家)의 고명따님으로 나 철도 들지 않은 나이에 국모(國母)의 자리에 오른 후 짧지 않은 생애 내내 황실의 큰 어른으로 살아 온 태황태후 엄씨는 타인의 감정을 배려해주기 위해 자신의 호기심을 희생한다는 생각이 뇌중(腦中)에 존재할 리가 만무한 여자였다.
“부모가 뉘인지는 기억하는가? 부모 되는 자들의 생김새며, 모친이나 부친의 함자는 또 기억하는고? 친동기(親同氣)는 또 몇이었누? 또, 범님의 세계에서 자네가 무엇을 하는 자였는지는 기억하는가?”
태황태후가 소녀처럼 두 눈을 빛내며 질문을 퍼부었다. 조금의 악의도 없이 영롱하게 빛나는 그녀의 눈을 보고 물손님이 무어라 몇 마디 말을 입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주춤 몸을 뒤로 미는 것이 보였다.
“저는.” 물손님이 질끈 아랫입술을 깨무는가 싶더니, 이윽고 그가 고개를 모로 저으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아무 것도 기억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
물손님의 대답에 태황태후가 노골적으로 실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피시식, 단숨에 심지도 남지 않을 만큼 타버린 초 같은 표정이 된 태황태후가 그래도 아주 미련을 버리지는 못하겠는지 다시금 물음을 던졌다.
“그래, 그럼 기억이 없다는 기분은 어떤 것이냐.”
“그건.”
태황태후가 세운 무릎 위에 팔꿈치를 짚고 그 위에 비스듬히 턱을 기대며 반쯤 내리깐 눈으로 물손님을 내려다보았다, ‘슬프냐?’
“슬프고 그리우냐? 가슴이 아릿하더냐? 어떤 기분이더냐? 침자(針子: 바늘)로 쿡쿡 찌르는 것 같은 기분에 가까우냐, 아니면 무거운 것으로 머리를 맞는 기분에 가까우냐? 간절하고, 초조하고, 그렇더냐?”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네 부모나 친동기간에 대한 것 외에는 기억하고 있느냐? 대체 범님의 세계란 어떤 곳인고?”
태황태후의 거듭된 물음에 물손님의 얼굴이 점차 파리해졌다. 진짜 익사체(溺死體)라도 된 듯이 얼굴이 새파래졌던 물손님이 발끈한 듯 눈을 매섭게 치떴다가 힐끔 눈동자를 굴려 황제의 모습을 훔쳐보고 꾹 입술을 깨물고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또 다시 얼굴을 하얗게 물들였다 파랗게 물들였다 하는 것이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사고 과정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행동에 엄헌영이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기백 년 만에 대예에 나타났다는 물손님이 황제와 배가 맞았다는 소문의 진위(眞僞)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물손님이 황제와 죽이 맞아 지낸다는 소문은 어느 정도는 사실인 모양이었다.
“어서 말해 보거라. 궁금하구나.”
태황태후가 시퍼레져 있는 물손님의 낯빛이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물손님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황제를 감싸는 물손님의 태도가 마땅찮아 팔짱만 끼고 앉아 있던 엄헌영이 순간 미간을 팍 찌푸렸다. 저 물손님에 대한 감정과는 별개로, 태황태후가 너무 이기적으로 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마마.”
“나이가 드시더니 정말 망령이라도 드셨나이까.”
계속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 싶어 엄헌영이 태황태후를 만류하려 나서는데, 그 때 황제의 싸늘한 일성이 서릿발처럼 떨어졌다. 엄헌영이 태황태후에게로 머리를 돌린 자세 그대로 멈칫했다.
“무, 무어라 하셨소?”
황제의 무엄하다 못해 패륜적이기까지 한 언행에 잠시간 멍청해져 있던 태황태후가 이윽고 제정신을 수습하고 따져 물었다. 그러자 황제가 엉큼스럽게도,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 한 쪽 눈썹을 슥 치켜 올리더니 반문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이옵니까.’
“지금 망령이라도 든 거냐 따져 묻지 않았소!”
“소손이 아무리 간덩이가 부었다 한들 어찌 할마마마께 그런 망발을 할 수 있겠사옵니까?”
그러니까 당신이 잘못 들은 거야. 황제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거짓부렁을 지껄여댔다. 황제가 시치미를 떼고 슬슬 고개를 젓자 기가 막혔는지 태황태후가 허, 허, 하고 연신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면서 엄유와 엄헌영을 돌아보았다.
“소신은 아무 것도 들은 바가 없사옵니다.”
태황태후와 시선이 부딪친 엄헌영이 반사적으로 말했다.
“무어라?”
믿었던 질자에게까지 배신당한 태황태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뜬 눈을 몇 번이나 껌뻑거렸다. 그러나 정작 엄헌영은 자신이 내뱉은 말을 뒤늦게 인지하고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나 의아해하느라 태황태후의 경악한 얼굴에는 눈 한 번 돌리지 않고 있었다.
“소, 소제는 똑바로 들었나이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엄유가 겨우 용기를 내어 외쳤다가, 황제의 표독스러운 시선을 받고 그대로 겁에 질려 굳어버렸다.
“아무래도 마마께서 기체(氣體) 미령하신 모양이오니 소손은 이만 물러가 보도록 하겠나이다.”
눈빛으로 엄유를 바짝 얼려버린 황제가 태황태후로부터 그리해 보라는 허(許)도 듣지 않고 벌떡 앉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더니, 바닥에 앉아 말끄러미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물손님의 손목을 콱 움켜잡고 물손님을 자리에서 일으켰다.
“저, 저, 저!”
“그리 좋아하시는 문안도 드리었고, 하루가 멀다 하고 닦달하시던 예인도 보여 드렸사오니 내춘대연회 날에나 마마의 경해에 접하겠나이다.”
대노(大怒)하여 삿대질을 해대는 태황태후를 싸늘히 내리깐 눈으로 쳐다보며 황제가 내뱉었다.
“마마의 환대 덕분에 소손은 오늘부터 고뿔에 걸릴 예정이오니, 할마마마는 물론이옵고 운현궁의 궁인들까지 모두 부디 천추전에 걸음을 금해 주소서.”
그리고서 황제가 억지로 일으킨 물손님의 허리를 제 쪽으로 바싹 끌어 끌어안듯이 하며 덧붙였다, ‘그리고 이 수객 또한 소손과 같은 병환을 앓을 예정이오니 청의관에 또한 행보를 금하시옵소서.’
“경애(敬愛)하는 할마마마께서 감환(感患)을 앓지 않으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올리는 말씀이오니, 할마마마께서는 부디 소손의 뜻을 존중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
운현궁에 문안을 드리러 갔던 황제가 잔뜩 뿔이 나 침전으로 돌아오자, 천추전 안은 온통 무거운 불안감에 휩싸였다.
내시감 된 도리로 황제에게 다가가 태황태후를 뵙고 오셨느냐는 의례적인 인사를 올리던 봉승이 성난 황제의 발에 치여 바닥을 나뒹군 이후, 천추전을 감싸고 있던 침묵은 더더욱 무거워졌다. 천추전 궁인들은 하나같이 숨을 죽이고, 혹여 황제의 눈에 뜨일까 조마조마하며 필사적으로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성큼성큼 세찬 걸음걸이로 걷는 황제의 널따란 옷자락이 펄럭거릴 때마다 지존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있던 나인들의 몸이 천장까지 튀어 오르기라도 할 것처럼 흠칫흠칫 떨렸다.
태황태후전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기에 폐하께서 저리 역정이 나셨나, 호기심이 간질간질 가슴께를 간질이고 제 동무와 수다스레 입방정을 떨고 싶은 마음에 툭 튀어 나온 입술 끝이 근질근질했지만 동무들과 수다를 떠는 것도 몸이 성한 다음에야 가능한 일 아닌가. 모두가 그 한 생각인지 천추전의 궁아(宮娥)들이며 내관(內冠)들 모두 가리지 않고 머리를 수그린 채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폐하!”
다다닥 다다닥 아까부터 황제의 뒤로 발굽 달린 작은 짐승이 끌려오는 소리 비슷한 것이 난다 싶더니, 누군가가 빽 소리를 질렀다. 언짢거나 노여워 그랬다기보다는 무척 당혹하여 외친 소리인 듯하였다.
저 목소리는 아마. 귀에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어린 궁아 하나가 반사적으로 빠끔 위를 올려다보았다가 황제의 싸늘한 눈과 마주치고 기겁해서 당장 이마를 바닥에 처박았다. 놀란 가슴이 쿵덕쿵덕 요란한 북소리를 내며 뛰었다. 머리끝까지 피가 차오르고 눈앞이 핑글핑글 돌아서 금방이라도 정신을 놓아 버릴 것만 같았다. 방금 마주친 황제의 눈에 박힌 듯 눈꺼풀 안쪽에 붙어 떨어지지를 않았다. 가만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던 황제의 눈은 인간의 것이 아닌 것처럼 차갑고, 마치 얇은 피막(皮膜)이라도 한 겹 입힌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그야말로 잘 벼려진 칼날을 목덜미에 대고 있는 것 같은 섬뜩함이었다.
“폐하.”
나 어린 나인이 눈도 제대로 못 들고 몸만 발발발 떨고 있던 것이 안쓰러웠는지 아까 빽 고함을 질렀던 목소리가 나직하게 황제를 얼렀다.
잠시 후, 멈췄던 황제의 걸음이 다시 침방(寢房)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쾅쾅쾅 하는 황제의 성난 걸음 뒤로 또 질질질 무언가를 끌고 가는 소리가 이어졌다. 포기할 줄 모르고 달그닥 달그닥 발굽 찧는 소리를 내며 반항하던 이전 전과는 달리 어느 정도 풀이 죽어 얌전히 끌려가는 듯한 소리였다.
“방금 그거···.”
쾅!
침방 사분합문(四分閤門)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나인들이 하나 둘씩 눈만 치켜뜨고 주위를 살피다가, 황제의 침방 문이 완전히 닫혀 있는 것을 확인하고 두더지처럼 머리를 슬그머니 치올렸다. 미윤(美贇)아, 하고 내시감 근처에서 엎드려 있던 나인이 발작적으로 내뱉더니 무릎걸음으로 살살살 기어 조금 전 황제와 눈이 마주쳤었던 어린 나인의 곁으로 다가왔다.
“황상께오서 침방으로 대동하신 이가 그 물손님이 맞으셨지?”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랬다.”
미윤이라 불린 어린 나인의 옆에 납죽 업더눕고 있던 여우상의 나인이 팔꿈치로 콕콕 미윤의 옆구리를 찌르며 묻자, 미윤의 동무 나인이 새치름히 웃으며 타박을 놓았다.
“고 정도면 아주 내끌고 가신 게지.”
“옳다. 은초(銀草), 네 말이 옳다. 헌데 무슨 일로 저리 성노하시어 수객을 내끌고 가시는고.”
“글쎄다. 성노하시어서 저러시는지 아니면 다른 급한 일이 있으시어 저러셨는지는 언뜻 보아서는 모를 일이지. 침방에서 대체 두 분께서 무엇을 하실꼬.”
황제에게 걷어차인 옆구리를 부여잡고 끙끙대는 있는 내시감에게 들리지 않도록 세 나인들이 서로서로의 귀에 대고 키드득거렸다. 귓속말로 자꾸만 웃음 섞인 소리를 속살거리는 나인들이 제 험언(險言)을 한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자신은 등골이 쑤셔 죽을 지경인데 신이 나서 까르륵거리는 나인들이 얄미웠던 건지 내시감이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인들에게 괜한 일갈(一喝)을 해댔다.
“무엇이 달가워 그리 경망스레 웃어대고 있는고? 썩 물러가 제 할 일들이나 하거라!”
내시감 봉승이 휘휘 손을 저으며 타박하자, 제 동무들과 귀엣말로 속닥거리고 있던 나인들이 불에라도 덴 듯 후다닥 일어나 천추전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왜 괜한 아이들에게 역정을 내십니까?”
그 꼴을 한심스레 지켜보고 있던 대령상궁 연재 화연이 다가와 핀잔을 놓자, 내시감이 발칵 화를 냈다, ‘내 그러지 않게 생겼소?’
“대체 태황태후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대령상궁이 굳게 닫혀 있는 장지문 위를 걱정스레 쳐다보다 무거운 한숨을 폭 쉬었다.
처음에는 황제의 침방을 쳐다보고 있는 대령상궁을 뱁새눈을 뜨고 노려보던 내시감의 눈도, 시간이 지날수록 대령상궁의 얼굴에서 점점 장지문 위로 옮겨갔다. 벌써 침방 깊숙이까지 들어갔는지 미색(微色) 창호지 위에는 황제의 그림자도, 황제의 손에 억지로 끌려 간 물손님의 그림자도 비치지 않고 있었다.
“성심이 몹시 상하신 듯합니다.”
“당분간은 몸은 사려야겠소.”
“저 물손님도 참으로 고생이십니다.”
물손님이 화제에 오르자, 황제의 침방을 바라보며 주거니 받거니 담소를 나누던 대령상궁과 내시감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한 순간 입술을 다물었다.
“저는 이만 운현궁에나 들러 봐야겠습니다.”
한 동안 말이 없던 대령상궁이 마치 지금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황상과 운현궁 마마 사이에 어떤 말씀이 오갔는지를 애략만이라도 알아야 어떤 말을 삼가고 어떻게 몸을 사릴지 알 것 아닙니까.’하고 대령상궁이 변명처럼 덧붙이자, 내시감 봉승도 옳소, 옳소, 입 속으로 웅얼웅얼 동의를 표하면서 대령상궁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
“이 헛똑똑이야.”
침방 안에 들어가자마자 푹신한 모전(毛氈) 위로 서문경을 떠밀다시피 하며 황제가 툭 내뱉었다. 운현궁에서부터 천추전까지 내내 손목을 잡혀 끌려 온 서문경이 황제에가 잡혔던 손목을 주무르며 부루퉁한 얼굴로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렇게 심술이 나신 겁니까?”
‘제가 뭘 어쨌다고요.’, 한참 황제를 꼬나보던 서문경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찌푸린 눈으로 서문경을 쏘아보고 있던 황제가 그 말을 듣고 기가 막힌다는 듯 허,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화를 내시려면 제가 아니라 그 화장 한 번 기막히게 하신 할머니나, 혀에 참기름칠 하신 영감님께 내셔야지요.”
혹여 엄헌영과 이전에 만난 일이 있느냐 추궁당할까 두려워 엄헌영의 이름은 쏙 빼고 서문경이 항의하자, 그 얕은 속셈을 바로 간파하기라도 한 것처럼 황제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그 예리한 눈빛이 자신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느껴져서 괜히 머쓱해진 서문경은 슬그머니 눈동자를 굴려 황제의 시선을 피했다.
“고렇게 혓바닥 잘 굴리는 놈이 어찌 태황태후전 앞에서는 그리도 꿀 먹은 벙어리처럼 굴었는고?”
그렇게 눈을 내리깔고 황제의 시선을 피하고 있으려니 황제가 툭 던지듯 물어왔다. 엄헌영 그 자에 대해서는 별다른 의혹을 품지 않고 넘어가시려는 건가, 하고 안심하던 것도 잠시, 서문경은 황제가 던진 물음을 다시금 머릿속에 곱씹어 보고는 발끈 화가 나 외쳤다.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내가 너 편들어 줬잖아! 금붕어도 아니고 돌아서자마자 잊어버렸냐! 태황태후의 눈에 뜨이는 것도 감수하고 황제의 역성을 들었던 일을 까맣게 잊은 듯한 황제의 발언에 서문경이 억울함을 감추지 못하고 빽빽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황제가 콧등이 시어서 더 이상 못 듣겠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다가와 손가락으로 서문경의 입술을 콱 움켜잡았다. 입술이 잡히고도 서문경이 욱욱욱, 포기하지 않고 무슨 말인지도 알아들을 수 없는 항의를 내질렀다.
“그 이기적인 노인네가 눈치도 없이 네 속을 후벼대는데 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게냐?”
황제가 묻자 욱욱 소리가 뚝 멎었다.
“아무리 그래도 친할머니인데 노인네가 뭡니까.”
황제가 입술을 놓아주니 서문경이 진짜 부리처럼 부루퉁하게 나온 입으로 지껄이는 말이라는 것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쓰으, 황제가 짜증 섞인 위협을 흘리며 서문경의 입술을 찰싹 때렸다. 제 입을 왜 이렇게 못살게 구십니까! 서문경이 엄살 섞인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손바닥으로 제 입가를 가렸다.
“폐하의 할머니라지 않습니까.”
황제의 눈총을 받고 서문경이 시무룩하게 이유를 털어 놓자, 황제가 의아하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운현궁 마마에 대해서는 짐이 아무 언질도 주지 않았더냐.”
“저도 귀가 있습니다.”
‘굳이 폐하께서 언질을 주시지 않아도 그 정도는 대충이나마 주위에서 주워듣습니다.’, 서문경이 조원에게 황제의 외친인 엄씨 일가에 대해 들은 사실을 숨기고 대충 에둘러쳤다. 의구심이 든 듯 황제가 한 쪽 눈썹을 치켜 올리기는 했으나 그것도 잠시, 서문경의 변명이 그럴듯하다 싶었던지 다시 눈썹을 제 자리로 내린 황제가 다음 말을 재촉하듯 턱 끝을 끄덕였다.
“그럼 어찌하여 그랬는고. 네가 삽시간에 낯모르는 그 어른에 대한 공경심이 생긴 것도 아닐 터이고.”
“그건 그렇지만.”
“다른 치들에게는 가시랭이 돋친 말 하나도 송곳니로 갈아서 되돌려 주었던 주제에, 그 노인네의 생떼는 왜 가타부타 말도 않고 들어주고 있었느냔 말이다.”
“······.”
“듣고 있어 봐야 네 놈 속만-,”
“그럼 폐하는 왜 그러셨습니까.”
묵묵무언으로 황제가 하는 말만 듣고 있던 서문경이 어느 순간 욱해서 황제에게 되레 따져 물었다. 말허리를 댕강 잘린 황제가 어이가 없어 눈만 부릅뜨고 있다가 서문경의 분해 하는 표정을 보고 헛웃음 소리를 흘렸다.
“짐이 무어?”
“그런 폐하는 왜 그 할머니가 하는 말을 듣고만 계셨던 겁니까? 얌전히 듣고 있어 봐야 폐하의 속만 문드러질 텐데요. 원래 그렇게 효손이셨던 겁니까? 듣자 듣자하니까 별 가당치도 않은 말로 폐하를 모욕하는 놈이 있는가 하면, 태황태후는 그런 조카 놈의 무례함을 앞장서서 혼내지는 못할망정 폐하 앞에서 그 놈만 감싸 돌고···!”
듣는 제 속이 다 터집디다! 서문경이 가슴을 치며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평소에는 그렇게 화를 잘 내시는 분이 거기서는 왜 참고 계셨습니까?”
“짐이 먼저 묻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제 말은!”
화를 바락 내던 서문경은 황제가 콜록콜록 발작적인 강기침을 터뜨리며 가슴을 쓸어안는 것을 보고 흠칫해서 하던 말을 멈췄다. 콜록콜록콜록콜록, 듣는 사람이 다 숨이 막힐 정도로 끝도 없이 이어지는 강기침에 서문경이 불뚝성을 가라앉히려 일부러 한숨을 쉬며 무릎걸음으로 황제의 앞에 다가 앉았다.
“···태황태후라서 그랬습니다.”
무릎을 꿇은 채 황제의 얼굴을 말끄러미 올려다보고 있던 서문경이 불현듯 중얼거렸다.
허리까지 접고 건기침을 하고 있던 황제가 물기 어린 한 쪽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서문경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이 무슨 말인고. 아무리 눈짓으로 대답을 재촉해 봐도 더 이상 말이 없는 서문경의 앞에 황제가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황제의 머루 같은 눈이 같은 눈높이에서 자신을 응시하자 괜히 머쓱해진 서문경이 슬쩍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황제가 말로 캐물었다.
“방금 무어라 했느냐.”
“상대가 태황태후인지라 참았다고 했습니다.”
“경이 네가 그런 인내심이 있는 줄은 몰랐다만.”
아래로는 청의관의 말단 관리인 소청 재하 원혜에서부터 위로는 그 권세가 땅을 뒤흔들고 하늘을 찌른다는 수상 서현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곧바로 가시 돋친 말을 내쏘아대던 서문경의 얼굴을 말끄러미 쳐다보며 황제가 말하자, 그 시선의 뜻을 단박에 알아챈 서문경이 곧바로 아르릉 짖었다.
“그 때와는 경우가 다르지 않습니까?”
“경우가 다르다?”
“폐하께서 말씀하신 그 때야, 제가 아무리 독한 말을 퍼부어도 그 여파가 기껏 해봐야 저에게 미치고 말 뿐이었지만 가까 그 때는 아니었지 않습니까. 폐하 말마따나 제가 그리 착한 성격이 아닌 건 맞지만, 제 말 때문에 다른 사람까지 낭패를 당할 수 있는 상황에서까지 함부로 입을 놀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경우가 다르지요, 하고 서문경이 설득하듯 덧붙이는 말을 듣고 황제가 고개를 모로 까닥했다.
“다른 이에게까지 폐를 끼칠 수 있는 상황이라.”
“그렇습니다.”
“그 말은.”
황제가 가늘게 뜨고 있던 눈을 천천히 치뜨면서 서문경을 바라보았다.
“짐에게 불똥이 튈까 두려워 태황태후의 독변(毒辯)을 참고 있었다는 말이렷다.”
황제의 직접적인 표현에 서문경이 눈을 부릅떴다가 이윽고 두 눈을 바닥으로 내리깔면서 우물거렸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시면 제가 또 민망···, 악!”
이유 없이 귓가가 홧홧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어서 입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던 서문경이 갑자기 빽 고함을 질렀다. 어깨가 확 떠밀리는 기분이 들면서 시야가 핑글 반전되었던 탓이었다.
“놀랐잖습니까!”
모전 위에 완전히 드러누운 꼴이 된 서문경이 자신의 배 위에 올라타 있는 황제를 보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황제가 대답 대신 ‘흐음.’ 무슨 뜻인지도 모를 신음을 흘리며 턱 끝을 쓰다듬더니, 내리깐 눈으로 서문경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황제의 내리깐 눈이 진짜 검은 유리구슬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끝을 알 수 없이 깊고 가매서 무심코 황제를 올려다 본 서문경은 순간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가만히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서문경을, 마찬가지로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던 황제가 어느 순간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폐,”
하, 하는 말에 맞닿는 입술 사이로 묻혔다. 갑자기 입을 맞춰져 눈을 부릅뜨고 굳어져 있으려니 축축하고 뜨거운 것이 입술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이를 콱 다물다가,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손이 옷깃을 확 벌리는 것을 느끼고 놀라서 입을 벌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황제의 혀가 서문경의 입 안으로 들어와 입 안 깊숙한 곳에 굳어서 웅크리고 있던 서문경의 혀를 잡아채, 거칠게 휘어 감았다.
“읏···.”
바싹 마른 것처럼 보이던 황제의 입술은 뜻밖에도 비단처럼 차갑고 매끄러웠다. 그리고 입 안을 사납게 쓸고 서문경의 혀를 뱀처럼 옭아 맨 황제의 혀는 델 듯이 뜨거웠다. 그 비단처럼 차가운 것 안에 심장처럼 뜨거운 것이 들어 있는 괴리에 순간 멍해져 있으려니, 황제의 혀가 서문경의 입 안을 마음껏 휘젓기 시작했다.
살아 있는 뱀처럼 황제의 혀가 서문경의 혀를 휘감고, 힘을 주어 그 혀를 빨았다. 그것은 마치 몰아치는 폭풍우와 같았다. 서문경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거칠고 잔혹하게 서문경의 입 안을 희롱하던 황제의 혀가 갑자기 유순해진 것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는지도 가늠할 수 없는 어느 순간이었다.
그러나 느릿하게 혀를 빨고 입 안과 치열을 더듬는 황제의 혀는 느릿해진 만큼 더더욱 집요해져서 서문경은 여전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입술 사이로 저절로 앓는 듯한 신음이 흘러 나왔다. 머릿속이 완전히 녹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멍해진 귓가에 문득 질척질척, 마치 빗소리와도 닮은 젖은 소리가 났다.
“폐, 폐하.”
“경아.”
겨우 황제의 입술이 떨어지자, 서문경이 몽롱해진 눈으로 황제를 올려다보며 끊어질 듯 희미한 목소리로 황제를 불렀다. 그러자 서문경을 내려다보는 황제의 검은 눈이 더욱 더 검어졌다. 마치 흑마노를 그대로 박아 놓은 듯 빛이 보이지 않는 새카만 눈.
“경아.”
그렇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작은 헐떡임조차 없어서 더욱더 현실감이 없었다.
황제의 입술이 서문경의 턱 끝에 닿았다. 그 입술이 서문경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속삭이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날카로운 턱 끝에서, 어린아이의 뺨처럼 부드러운 뺨을 지나 희미한 온기를 머금은 귀 뒤로, 그리고 열이 올라 말랑말랑해진 귓불로.
“읏.”
황제의 이빨이 귓불 끝을 깨물자 서문경이 흠칫해서 어깨를 움츠렸다. 몸을 움츠리는 서문경의 옷깃을 황제의 손이 능숙하게 벌렸다. 옷깃이 넓게 벌어져 어깨에 걸려 있는 것을 눈치 채고 서문경이 화들짝 놀라 제 옷차림을 내려다보자, 벌써 대자(帶子: 허리띠)가 풀려 옷차림이 한껏 흐트러져 있었다.
“폐하!”
서문경이 당황하여 황제의 가슴을 밀어냈다. 그러나 말랐지만 의외로 단단한 황제의 가슴은 서문경의 몸에 거의 맞닿다시피 한 채, 더 이상 밀려나지 앉았다. 눈으로 빚어 그 위에 얼음조각으로 손톱을 만들어 올린 듯한 황제의 손이 서문경의 반쯤 벗겨지다시피 한 적삼 안으로 들어가 그 안의 속적삼 안으로 파고들었다. 맨 가슴에 황제의 차가운 손이 닿자 서문경의 허리가 펄쩍 위로 튀어 올랐다. 맨살에 닿은 황제의 손이 소스라질 만치 차가웠던 탓이었다.
“폐하, 이게 무슨,”
“경아.”
황제의 두 팔 안에 갇힌 서문경이 몸부림을 치는데 황제가 서문경의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그 속삭임이 너무도 애달팠던 탓에 서문경의 몸부림이 순간적으로 멎었다.
“경아, 경아, 경아.”
황제가 계속해서 서문경의 귓가에 속삭였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희미한 속삭임에 서문경은 가슴 속이 저릿저릿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내 깜둥새.’, 황제가 자신의 입술을 서문경의 이마에 문지르면서 속살거렸다.
“폐하···.”
“경이 너 뿐이다.”
나직한 목소리로 황제를 부르던 서문경이 황제의 말에 멈칫했다. 황제가 서문경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목과 어깨가 이어지는 깊은 곳에 입술을 맞추는 것이 느껴졌지만 서문경은 황제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짐에게 그런 말을 해준 이는 너 뿐이구나.’,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황제가 쓸쓸하게 중얼거린 말을 들은 탓이었다.
“경아.”
황제가 다시금 서문경의 이름을 부르면서 가슴을 쓰다듬던 손을 뒤로 밀어 움푹 들어간 서문경의 등줄기를 훑었다. 반사적으로 서문경이 허리를 튕기자, 솟아오른 가슴을 황제가 입술로 더듬었다. 뜨겁고 부드러운 입술이 맨 가슴을 더듬고, 축축한 혀가 맨 피부를 부드럽게 핥아 올렸다. 경아, 경아, 경아. 황제가 계속해서 속삭이는 제 이름을 들으며 서문경은 생각했다. 뜨거운 물속에 잠겨 있는 듯한 묘한 부유감이 들었다.
이윽고 다리 사이에 무언가 딱딱하고 뜨거운 것이 닿았다. 의식이 몽롱하여 서문경이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데, 황제의 뜨거운 숨이 그의 귓가에 퍼부어졌다. 그리고 조금 뒤, 슥, 슥, 슥, 얇은 옷 한 겹을 사이에 두고 자신의 것이 완전히 발기한 황제의 양물과 비벼지는 소리가 들렸다.
“폐, 폐하!”
물속에 잠긴 듯 농몽해져 있던 시야가 확 깨어나며, 찬물을 뒤집어 쓴 것 같은 위기감이 들이닥쳤다. 서문경이 벌떡 몸을 일으키려 하자, 황제가 우악스런 손길로 서문경을 다시 눕히며 허리를 서문경에게 더욱더 바싹 가져다대고, 서문경의 것에 자신의 양물을 비볐다. ‘폐, 폐하! 폐하!’, 사내의 딱딱한 양물이 자신의 것에 비벼지는 생경한 감각에 소스라치던 서문경이 자극을 받아 자신의 것 또한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한 것을 느끼고 기함했다.
“그래, 착하지, 경아···.”
‘얌전히, 그래, 얌전히 있거라.’, 황제가 당황해 어쩔 줄을 모르는 서문경을 다정한 목소리로 달랬다. 쉬이, 하고 황제가 나직이 내뱉는 소리에 등골이 오싹해져서 서문경은 자신도 모르게 두 팔을 황제의 등에 두르고 그에게 매달렸다. 서문경이 자신의 등에 매달리는 것을 느낀 황제가 순간 짧은 웃음소리를 흘린 것도 같았다.
다시금 입이 맞춰졌다. 밀려들어오는 혀를 맞으면서 가느스름하게 눈을 뜨자 황제와 눈이 마주쳤다. 까만, 정말로 새까만 눈동자였다. 너무 까매서 살아 있는 사람의 눈동자처럼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황제의 섬세한 손가락이 자신의 목 뒤를, 등을, 허리를 쓰다듬는 것이 느껴졌다. 그 손길이 저 섬세한 예술품 같은 손가락이 행하는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치 탐욕스러웠다.
밀물처럼 밀려드는 애처로움과 달고 뜨거운 물에 잠긴 듯한 몽롱함과 그 사이에 섞인 충동과 쾌락에 완전히 함몰되어 서문경은 황제의 등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황제의 것이 자신의 다리 사이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비비고, 꿰뚫었다. 마치 정말로 맨 몸으로 얽혀 황제의 것을 받아들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서문경은 어쩔 줄 모르고 황제의 등에 손톱을 세웠다. 짧은 손톱이 자꾸만 황제의 등에서 흘러 내려서 어쩐지 안타까운 기분이 들었다.
“읏, 흐읏···, 읏, 아···.”
“경아, 경아···.”
“폐, 하, ···앗!”
황제를 부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파정(破精)한 서문경이 눈앞이 새하얘지는 것을 느끼고 두 눈을 부릅떴다.
“아.”
다시 원래의 색으로 돌아온 시야에서 말끄러미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황제의 하얀 얼굴을 보고 서문경이 멍하니 두 눈을 끔뻑였다.
“아.”
그리고 천천히, 서문경의 온 몸이 달아올랐다. 귓불이, 목덜미가, 얼굴 전체가 터질 듯 새빨개졌다. 황제가 달게 웃으며 한 손으로 서문경의 뺨을 쓰다듬었다. 황제의 손이 서문경의 뺨을 쓰다듬는 순간, 황제가 아직 발기해 있는 양물로 서문경의 다리 사이를 찔러 올렸다. 서문경이 펄쩍 누운 자리에서 뛰어 올랐다.
“깜둥새인 줄 알았는데 실은 토깽이더냐.”
“뭐, 뭐···!”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하는 것보다도 사내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발언에 역정을 내는 것이 먼저였다. 시뻘게진 얼굴로 발칵 화를 내는 서문경의 오른뺨을 황제가 살살 눈웃음을 치면서 깨물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그렇지만 혼자서만 즐기면 짐이 곤란하지 않으냐.”
그 말에 서문경이 반사적으로 황제의 다리 사이로 시선을 내렸다. 그 시선을 느끼고 황제가 빙긋 웃었다. 서문경의 낯빛이 사색(死色)이 된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