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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그렇게 빨빨거리고 다니누.”
서문경이 급히 청의관으로 돌아오자, 서문경의 거처에서 이미 황제가 둥지를 틀고 있었다. 여기가 청의관이 아니라 천추전이었나? 자신은 있는 줄도 모르는 푸른 비단 금침을 침상 위에 깔고 그 위에 느른하게 누워 있는 황제를 발견한 서문경이 멈칫해서 발걸음을 멈췄다. 막 문지방을 넘으려다 말고 걸음을 멈춘 서문경을 향해 황제가 개라도 부르듯 한 손을 설렁설렁 까닥였다. 찌푸린 눈으로 방 곳곳을 뜯어본 서문경이 한참 후에야 이곳이 자신이 거처하는 방이 맞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어찌 제 방에 계십니까?”
“오늘은 조의(朝議)에 나갔느니.”
“···네?”
“경연(經筵) 또한 열었느니라.”
묻는 말에 대답은 안 하고 상황에 안 맞는 말만 지껄여대는 황제를 의심스런 눈으로 흘겨보던 서문경이 불현듯 깨달았다.
“자,”
비스듬히 침(枕)에 기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황제의 얼굴이 마치 뻐기는 어린아이와도 같았다. ‘후, 훌륭하십니다···.’, 집요하게 자신을 향하는 황제의 시선이 사실은 칭찬을 요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눈치 챈 서문경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리자 용케도 그 중얼거림을 알아들은 황제가 쭉 가슴을 펴고 거드름을 피웠다. 짐처럼 각실(慤實)한 천자가 세상 천지에 어디 또 있을꼬.
“그런데 깜둥새 네 녀석은 깜둥괭이마냥 어디를 발발대고 온 게냐?”
너무 뻔뻔스러워 화를 낼 힘도 나지 않는 황제의 말을 듣고 서문경이 잠시 넋을 놓고 있는데 문득 황제가 물었다. 황제 몰래 조원을 만나고 온 서문경은 얼굴이 난감해하는 표정이 떠오르지 않도록 노력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아니, 뭐···.’
“어디를 가 언 놈을 만났기에 얼굴이 고 모양이야.”
서문경의 말을 들은 채도 하지 않고 황제가 말했다. 의외의 말에 서문경이 어?, 하고 두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제 표정이 뭐가 어떻다는 겁,”
“이리 오너라.”
서문경이 당혹해서 묻는데 황제가 그 말허리를 끊으며 서문경을 닦달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순순히 다가가자 황제가 눈짓으로 자신의 곁에 앉으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주춤거리며 침상 위에 앉기가 무섭게 황제의 앙상한 팔 한 짝이 서문경의 목을 휙 감아쥐었다.
“언 놈을 만나 무슨 말을 들었기에 이리 울상인고.”
응? 황제가 서문경의 입술에 쪼듯이 입을 맞춘 후 물었다.
**
“응?”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서문경이 연신 두 눈을 끔뻑이면서 멍하니 생각했다. 두 눈을 부릅뜨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묻는 듯한 표정으로 황제를 올려다보자 황제의 눈가가 슥 가늘어졌다. 짙은 먹으로 그린 듯한 황제의 우아한 눈매가 가늘어진 것을 본 서문경은 더욱 멍해지고 말았다. 뭐지. 멍청히 황제의 얼굴을 쳐다보던 서문경이 고개를 갸웃했다. 눈매가 가늘어져 더욱더 색이 짙어진 눈동자, 살짝 치켜 올라간 듯 한 긴 눈꼬리.
“아.”
황제는 웃고 있었다.
“지금 뭘 하신 겁니까!”
소스라치게 놀란 서문경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고함을 질렀다. 거의 비명처럼 들리는 서문경의 고함소리를 귓가에서 듣다시피 한 황제가 미간을 찌푸리자, 서문경이 그런 황제를 당혹스런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물었다, ‘뭘 하신 거예요?’
“짐이 무얼 했다고 놀란 토깽이 눈을 뜨고 있누?”
“아니,”
도리어 황제가 의아하다는 얼굴을 하고 되묻자, 서문경은 당황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잘근잘근 애꿎은 입술만 깨물고 있자 황제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달라붙는 듯한 황제의 시선이 언제나처럼 서문경의 눈을 똑바로 향했다가, 오뚝 솟은 콧마루로, 그 아래의 오목한 인중으로, 또 그보다 더 아래로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간다.
입술.
황제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눈치 챈 서문경의 눈길이 저절로 황제의 입술로 향했다. 황제의 입술은 그의 낯빛만큼이나 파리했지만, 그 파리한 입술은 마치 얇은 비단을 꿰어 놓은 듯 미끈하고 또 부드러워 보였다.
“그토록 파르르 떨 필요는 없지 않으냐.”
황제의 입술을 노려보다시피 하고 있던 서문경이 갑자기 던져진 말에 앗, 하고 고개를 들었다. 황제가 눈을 내리깔고 서문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항상 오만한 빛이 넘치던 황제의 눈빛이 지금은 깊은 호수 속처럼 가맣게 가라앉아 있었다. 풀이 죽은 듯 착 가라앉은 황제의 눈빛을 본 서문경이 흠칫했다.
“고작 입을 맞춘 것 정도,”
“예.”
톡 새가 부리로 쪼는 듯한 입맞춤을 떠올린 서문경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황제의 말을 계속 듣고 있자면 얼굴이 펑 터질 것만 같아서 서문경은 황제의 말허리를 끊으며 두 손을 휘휘 내저었다. 평소 같으면 당장 감히 지존의 말을 끊다니 네 놈이 정녕 경을 치고 싶은 게냐 으르렁댔을 황제가 성노하는 대신 입 끝을 비틀어 올려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서문경의 눈길이 황제의 얼굴에 닿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 버렸다. 아래로 축 처진 황제의 아미(蛾眉)와 눈꼬리, 그리고 시선을 내리깐 황제의 눈 같은 것을 보자 황제가 측은스러워졌는지 완고하던 서문경의 표정이 사르륵 누그러졌다.
“별 것 아니니 그렇게 질색하지 말아라.”
서문경의 기색이 누그러진 것을 귀신처럼 눈치 챈 황제가 서문경의 손목을 끌어다 다시 제 옆에 앉히면서 속살거렸다. 귓가에 더운 숨이 스치는 것에 무심코 어깨를 움츠리면서 서문경이 긴 한숨을 폭 내쉬었다. 예에, 서문경이 마지못해 중얼거리자 서문경의 마음이 풀렸다고 판단했는지 황제가 서문경의 허리에 한 팔을 둘렀다. 그 단단하고 마른 팔이 자신의 몸을 옥죄는 족쇄처럼 느껴져서 서문경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몸을 뒤틀었다. 서문경이 몸부림을 치는 것을 느낀 황제의 눈썹이 못마땅한 듯 당장 휙 치켜 올라갔다. 이건 뭐 애도 아니고. 황제의 표정이 불퉁해지는 것을 본 서문경이 한탄하며 바짝 긴장한 몸에서 일부러 힘을 뺐다.
서문경의 몸에서 힘이 빠지기가 무섭게 병아리를 잡아채는 매처럼 재빨리 서문경의 허리를 자신에게 바싹 끌어당긴 황제가 서문경의 머리통을 다소 거칠게 자신의 목덜미에 묻게 한 다음, 그 위에 자신의 턱을 턱 얹었다.
“탕파(湯婆)를 안고 있는 것보다 경이 너를 안고 있는 것이 더 좋구나.”
서문경의 어깨 위에 턱을 얹은 황제가 나른한 한숨을 쉬는가 싶더니, 그가 이윽고 그렇게 말했다.
“그야, 뜨거운 물하고는 달리 사람 체온은 쉽게 올랐다 내렸다 하는 것이 아니니까···.”
서문경이 퉁명스레 대꾸하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말을 멈췄다.
“그러냐.”
황제가 신기한 것도 다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 어조에 한층 더 의혹이 짙어진 서문경이 어떻게 물어야 황제가 역정을 내지 않을지 신중하게 할 말을 골랐다. 그런 끝에 ‘폐하.’, 조심스레 말을 걸자, 자신의 어깨에 얹힌 황제의 턱이 비스듬히 기우는 것이 느껴진다. 자신의 부름을 듣고서 무슨 일인고, 하고 고개를 갸웃하는 것일 테다.
“여인을, 아니, 다른 이를 품어 보신 적은 없으십니까?”
바싹 말라 뼈가 그대로 드러난 황제의 턱이 살이 적은 어깨에 부딪치는 것이 몹시 아팠지만, 서문경은 제 성질대로 아프니 좀 비키십쇼 짜증을 내는 대신 오히려 목소리를 죽여 물었다. 의외의 질문에 황제가 으응?, 하고 어리둥절한 소리를 냈다가 곧 아아, 알겠다는 듯한 신음을 흘리며 웃는다.
“안심하라.”
“······.”
뜬금없는 대꾸에 서문경이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기웃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이야?
“예?”
“네 놈 이외의 다른 치들을 품은 기억은 없으니.”
“그것이 아닙니다!”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서문경이 발칵 화를 냈다.
“나쁘지 않군.”
서문경이 화를 내는 것을 귓등으로 받아 넘겨 버리고 황제가 나른한 숨을 푹 내쉬었다. 그 숨소리가 하얀 사탕가루가 묻어나올 것처럼 달아서 막 짜증을 내려던 서문경은 멈칫 입술을 멈추었다.
“아니, 생각보다 훨씬 달갑구나.”
서문경의 허리와 어깨에 둘러진 황제의 팔에 힘이 들어간다. 그렇지 않아도 상대의 숨소리가 들릴 만큼 황제에게 바짝 안겨 있던 서문경은 아플 만치 제 몸을 끌어당기는 힘에 무심코 숨을 삼켰다가, 푹 한숨을 쉬었다.
“어린 것이 벌써부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누.”
서문경의 한숨 소리를 들은 황제가 타박을 놓았다. 황제의 핀잔을 못 들은 척 흘려버린 서문경이(‘관례도 안 치른 당신이 누구에게 어린 것 운운할 처지는 아닐 텐데.’) 자신의 뒤통수를 살살 쓰다듬기 시작한 손길을 느끼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짐작대로 황제는 부친인 선제 가연제나 생모인 엄 황귀비는 물론, 다른 내외척 어른들이나 또래의 황친들, 심지어는 유모인 봉성부인(奉聖婦人)에게도 이리 친근히 안겨본 일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면 어쩔 수 없나.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서문경은 다시금 폭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의 정에 굶주려 있는 사람이니 이리 다른 사람의 체온을 탐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일 것이다.
반쯤 탈력해서 서문경이 그리 생각하고 있으려니 황제가 서문경의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어 새집을 만들어 놓고, 짧게 친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난 매끈한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슥슥 쓰는 둥 괜한 부산을 떤다. 어린애 손장난 같은 움직임을 서문경이 아무 말 없이 참고 있자, 그것에 자신감을 얻었는지 황제의 손길이 한 층 더 대담해진다.
황제가 콧등으로 어깨를 비비는가 싶더니 이제는 아예 입술을 목과 어깨가 이어지는 오목한 부분에 가져다 댄다. 이윽고 황제의 찬 입술이 쇄골께에 닿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진 서문경이 파르르 몸을 떨면서 황제의 가슴을 밀쳐냈다.
“폐하.”
“그래, 해야 할 말이 남았었지.”
갑자기 밀쳐진 것에 황제가 역정을 내는 대신 서문경의 입술에 촉 다시금 제 입술을 맞추고 말했다. 아무 말도 안 했더니 이제 대놓고 이러냐. 생각지도 못하게 입술을 또다시 빼앗긴 서문경이 기가 막힌 나머지 멍청해져있으려니 황제가 단 꿀이라도 한 숟갈 퍼먹은 것처럼 찹찹 입술을 달싹인다.
“대체 어디를 다녀온 게냐.”
신단(晨旦)에 눈을 떴으면 당장 천추전으로 튀어오지 않고, 결국 지존을 여까지 행보케 하다니 괘씸한 것 같으니. 황제가 서문경의 코끝을 두 손가락 사이에 넣고 비틀며 심술을 부렸다.
“산책을 다녀왔을 뿐입니다.”
“어디로?”
네가 천추전과 청의관 외에 아는 곳이 또 있느냐는 투였다. 그의 말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던 터라, 서문경은 움찔거렸다.
“대밭에···.”
결국 서문경이 거짓을 하지는 않되, 애매하기 짝이 없는 말로 대답을 했다.
“대밭에?”
“예, 대나무 밭에 다녀왔습니다.”
대밭이라. 황제가 의심스레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서문경은 황제의 눈을 피해 눈을 내리깔았다. 분명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황제의 얼굴을 보기가 왜 이렇게 불편한지 모르겠다.
역시 조원에게 황제의 외친들에 대해 들었기 때문인가. 생각 끝에 그렇게 결론을 내린 서문경이 미간을 찌푸리고 몰래 황제의 얼굴을 살폈다. 야위어 날카로운 느낌이 강하기는 하지만 아직 해사한 맵시가 남아 있는 황제의 얼굴을 살펴보고 있자니 뒤늦게 죄책감이 밀려 왔다. 황제가 다른 이들에게 숨기고 싶어 하는 약한 부분을 괜히 캐어 본 것이 아닌가 싶은 반성도 들었다. 차라리 폐하께 직접 여쭈어 볼 것을 그랬나, 살그머니 치켜 뜬 눈으로 황제의 표정을 살피던 서문경이 곧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절레절레 도리질을 쳤다.
“그건 안 되지···.”
부황인 가연제가 용의 증후가 나타나지 않아 당했던 수모와, 그런 그와는 달리 어릴 적부터 용으로서의 증후를 보인 수상 서현에 얽힌 이야기를 주었을 때 지었던 황제의 표정과 목소리를 서문경은 아직 또릿하게 기억했다. 마치 빗소리처럼 무겁게 젖어 울리던 목소리를, 어두운 늪 속에 잠긴 것처럼 어둡던 낯빛과 가장 큰 절망을 맛본 사람처럼 체념 어린 무표정을.
어린 것이 벌써부터 그런 표정을 짓다니. 정말 못 쓰겠다···. 방금 전 황제가 자신을 향해 했던 말을 머릿속으로 그대로 반복하며 서문경이 이마를 구겼다. 힐끔 쳐다보는 눈길을 느꼈는지 대나무 밭이라, 하고 연신 입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던 황제가 눈알만 굴려 서문경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서문경이 움찔했다.
“뭡니까.”
예전에 봤었던 황제의 얼굴과 눈빛을 떠올리며 애틋한 기분을 느끼고 있던 서문경은 정작 황제와 눈이 맞닥뜨리자마자 벌컥 신경질을 냈다. 방금까지 자신의 머릿속에서 우울하게 눈을 내리깔고 있던 사내가 신 포도를 올려다보는 여우처럼 실눈을 뜨고 자신을 흘겨보고 있는 것을 보자 저절로 뱃속에서 불길이 일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하시지요?”
“대밭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분명 태화궁(太和宮)까지는 가야 있을 터인데, 길도 모르는 경이 네가 어찌 그렇게 멀리까지 나갔누?”
아. 서문경이 난감한 탄성을 흘리며 자신이 했던 말을 바로 후회했다. 괜히 들쑤셨다.
“그건,”
어디 적당한 변명거리가 없을까 고민하던 서문경이 순간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아, 하고 손뼉을 쳤다.
“가마!”
“가마?”
“가마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저 밖에 가마들이 즐비하게!’ 서문경이 제 방 한 구석에 달린 반월창(半月窓)을 손가락질하며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이 깜둥새가 갑자기 왜 이렇게 빽빽대누. 황제가 노골적으로 한심하다는 눈초리를 하고 서문경이 손짓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음, 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폐하, 혹시 교방 대연회라고 아십니까?”
서문경이 황제의 동그란 뒤통수를 노려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아.”
황제가 대답 대신 무슨 뜻인지 모를 신음을 짧게 흘렸다.
“들으니까, 폐하께서는 아직 폐하를 대신해 경연에 내보낼 예인을 정하지 않으셨다고 하던데요?”
“아니, 이미 정했네.”
황제의 단호한 대꾸에 서문경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정하셨다고요?”
“그래, 원래 내춘 대연회는 내명부(內命婦)의 주인인 황후가 주재하나, 현재 곤위(坤位)가 비어 있으니 후를 대신하여 이번 대연회를 주재하시는 태황태후께 경연에 내보낼 예인을 정했다는 말씀을 전하기만 하면 되겠군.”
“그렇군요.”
황제의 말을 듣자 괜한 걱정을 했다 싶어 서문경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렇지, 하고 황제가 그 답지 않게 따사로운 웃음을 마주 흘리며 턱 끝을 끄덕여 보였다. 잠시 황제와 서문경 간에 온화한 공기가 흘렀다.
“함께 가겠느냐?”
“예?”
서문경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게 묻자 황제가 이런 우매한 것을 보았나, 하고 혀를 끌끌 찼다.
“어디기는 어디야. 태황태후전(太皇太后殿)을 이름이지.”
“제가 그 곳에는 왜 갑니까?”
별로 보고 싶은 얼굴도 아니고. 어리둥절함을 감추지 못하는 서문경을 말끄러미 쳐다보던 황제가 어느 순간 빙긋 웃었다. 모란이 만개하는 듯한 화사한 웃음에 황제가 서문경이 자신도 모르게 덩달아 입꼬리를 끌어 올리는데 황제가 말했다.
“누백(累百) 년 만에 제국을 찾은 물손님이기도 하고.”
“아.”
“그리고 감히 천자를 대신하여 경연에 나가니 예인이니 한 번쯤 태황태후전에 눈도장을 찍어 놓아도 좋지 않겠느냐.”
“예?”
서문경의 표정이 싹 굳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얼얼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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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서문경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며 황제의 가슴을 밀어냈다. 미색 의금(衣襟) 사이로 드러난 서문경의 쇄골에 막 입술을 대고 있던 제안은 더 이상 버티지 않고 서문경이 미는 대로 밀려나며 생각했다. 아직은 이 정도까진가.
“그래, 해야 할 말이 남았었지.”
제안은 자신의 입술이 닿았던 쇄골께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바르르 몸을 떨고 있는 서문경을 곁눈질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자 입술로만 뭔가를 계속 투덜거리고 있던 서문경이 아, 하고 고개를 들었다.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이 등골이 간질간질할 만큼 귀염성스러워서 제안은 충동적으로 서문경의 입술에 툭 자신의 입술을 찍었다. 다시금 입맞춤을 당한 서문경이 화를 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멍해져 있다. 유별나게 가만 눈이 멍청해져 있는 것이 참으로 어여뻐서 불쑥 뱃속에 뜨거운 무언가가 치솟았지만 제안은 단 것이라도 먹은 것처럼 입맛을 다시는 것으로 그 충동을 참아냈다.
“대체 어디를 다녀온 게냐.”
한 없이 멍청해져 있는 서문경이 제정신이 들도록 일부러 크게 묻자, 서문경이 파드득 머리를 털었다. 한 동안 변명거리를 찾아 헤매는 듯한 서문경의 표정을 느긋하게 감상하며 황제가 오늘 아침 서문경을 천추전으로 데려오기 위해 청의관으로 보냈던 대령상궁 연재 화연이 홀로 돌아와 자신에게 아뢴 말이 머릿속을 떠돌고 있었다.
‘폐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황제의 시선이 서문경의 찌푸려진 미간 사이에 머물렀다. 망설이던 서문경이 겨우 입술을 열어 이렇게 말했다.
“산책을 다녀왔을 뿐입니다.”
한숨을 섞어 서문경이 중얼거린 말에 제안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물었다, ‘어디로?’ 그렇게 묻자 또 한참을 망설인 서문경이 겨우 결심을 한 듯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대답했다.
“대밭에···.”
대나무밭에 다녀왔습니다. 서문경이 중얼거린 말에 제안이 자신도 모르게 픽 웃어버렸다.
‘청의관 여관들이 아뢰기를, 물손님은 첫새벽부터 창혜각으로 행차하였다 하옵니다.’
대나무 밭이라. 제안은 입 속으로 중얼거리며 눈썹 끝을 한 번 추여 올렸다. 가연제의 선제인 강윤제(鋼尹帝)가 재위하고 있었을 당시, 현재의 창혜각 후원이 있는 자리에 서현의 부친인 서엽이 직접 조성한 무성한 대나무 밭이 있다는 것은 황궐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군, 하고 생각하면서도 서문경을 쳐다보고 있는 제안의 눈 안쪽에서는 심술궂은 빛이 빛났다.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저렇게 자신에게 사실을 숨기려 필사적으로 둘러대려는 꼴을 보고 있으려니 슬그머니 심술보가 머리를 들기 시작한다.
“뭡니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비 오는 날 하늘처럼 어두운 낯빛을 하고 있던 서문경이 황제의 시선을 느끼고 따갑게 쏘아붙였다. 그 맹랑한 모습을 보면서 황제가 내심 웃으며 서문경의 ‘힘’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부터 내내 하고 있던 생각을 굳혔다. 저 깜찍한 것을 어떻게 좀 놀려줘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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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황태후 엄씨는 올해 약관(弱冠)을 맞은 손자가 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젊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은 열다섯 처녀의 머리카락으로 만들어 올린 가체보다 검었고, 검은 눈동자는 흑 마노로 만든 바둑돌을 박아 놓은 것처럼 또릿하고 가맸다. 우물처럼 움푹 들어간 눈매며 반대로 툭 튀어 나온 콧대, 버선코 같은 콧방울이며 도톰한 입술 등 이목구비는 놀라울 만큼 뚜렷했고, 뺨과 턱의 윤곽이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무너짐도 없이 절묘했다. 또한 그녀의 두 볼에는 나이에 맞지 않게 소녀 같은 홍조가 돌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런 그녀의 목소리는 잘 생기고 어여쁜 생김새와는 어울리지 않게 기름이 튀는 듯 날카롭고, 으르렁거리는 듯 위협적이었다.
“늦었구나, 효강.”
폭포수 같은 비단 치마 아래 한 쪽 무릎을 세우고 앉은 태황태후 엄씨가 각색의 석영(石英)을 엮어 만든 발 너머 희미하게 보이는 사내의 인영을 보고 툭 던지듯 말했다.
“송구하옵나이다.”
젊은 사내보다 한 발자국 앞서 고두(叩頭)하고 있던 중년 남자가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머리를 조아렸다. 식은땀이라도 뚝뚝 흘릴 듯한 패기 없는 모습에 태황태후 엄씨가 한심해하는 기색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고 끌끌 혀를 찼다. 태황태후가 혀를 차자 중년 남자는 더더욱 어쩔 줄 몰라 했고, 그 꼴을 보다 못한 청년이 남자가 신고 있는 겉족건을 슬그머니 뒤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마마 앞에서 이게 무슨 무례냐!’, 남자가 정색을 하고 청년을 꾸짖었다.
“그만.”
어느 안전이라고 언성을 높이는고. 태황태후가 한 손을 들어 올리면서 남자를 타박했다. 청년이 저지른 무례는 어여삐 보아 넘기면서 자신이 범한 사소한 실수에는 냉혹하다 싶을 정도로 따갑게 타박을 놓는 태황태후의 행동에 남자가 기가 죽어 고개를 숙였다.
하얀 머리꼭지까지 보일 정도로 고개를 바닥에 처박은 중년 남자의 머리를 태황태후가 비스듬히 내려다보았다. 그 눈길이 몹시 싸늘했으나, 그 싸늘한 눈동자 가장 안쪽에는 의외로 희미한 온기가 스며 있었다.
“자당(蔗糖), 자네는 언제쯤이나 철이 들꼬.”
“누, 누님, 헌영이 앞이니 제발 그 호(號)만은.”
남자가 펄쩍 뛰어 오를 듯 놀라며 태황태후를 만류했다. 당황해서 제 아들의 표정을 살피는 애제(愛弟) 엄유의 모습을 보고 태황태후가 소리를 내어 웃었다. 커다란 앵무새가 우짖는 듯 매우 높고 호탕한 웃음소리였다.
“그래, 효강. 듣자 하니 자네 이번에 용호군(龍虎軍) 중랑장(中郞將)에서 1령 장군(將軍)에 올랐다던데.”
엄유의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마음껏 웃은 뒤에야 태황태후는 효강에게 시선을 돌렸다. 당혹해서 끙끙 앓는 신음만 흘리고 있는 제 아비를 짜증 반, 탄식 반인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던 청년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리며 태황태후의 말에 대꾸했다.
“그렇사옵니다.”
“장하구나.”
“이 모두가 마마께서 보살펴 주신 덕분이옵니다.”
태황태후의 보살핌에 감읍하기는커녕 귀찮아 죽겠다는 티를 팍팍 내는 표정을 지은 청년이, 표정으로도 모자라 그 말투조차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허, 헌영이 이놈이···!’, 청년의 무성의한 태도에 청년의 부친인 엄유는 안 그래도 작은 간이 오그라드는 듯 가슴께를 움켜쥐었지만, 정작 노여워해야 할 태황태후는 호탕하게 웃으며 청년의 담대함을 칭찬했다. 옳다, 옳다. 사내라면 그 정도 담력은 있어야지.
“그런데 효강아, 언제까지 용호군에 몸담고 있을 셈이냐?”
웃음을 멈춘 태황태후가 화제를 돌렸다.
“응양군(鷹揚軍)이나 금위군(禁衛軍) 쪽으로 옮길 생각은 없는가?”
태황태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엄헌영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응양군이라니, 소신더러 그 곰 같은 작자의 밑에 있으란 말씀이시옵니까?”
그렇게 말하는 엄헌영의 목소리에 그가 품고 있는 혐오감이 그대로 드러났다. 호오, 하고 태황태후가 재미있다는 듯 눈꼬리를 살짝 접으며 눈웃음을 쳤다.
“반주(班主: 응양군 상장군)가 그리도 못 마땅하냐?”
“무위(武威)는 나무랄 데 없으나, 그렇게 미련해서야 어찌 무관(武官)을 대표하는 응양군 상장군이라 하겠나이까.”
응양군 상장군이 어디 칼질만 잘 해서 되는 자리랍니까. 엄헌영의 거침없는 표현에 그의 부친인 엄유가 안절부절 못 하고 있는 반면, 태황태후는 엄현영의 대담함이 제 성미에 맞는 듯 만족스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금위군(禁衛軍: 황제와 궁중을 지키던 친위군)은?”
태황태후가 떠보듯 던진 말에 엄헌영의 표정이 더더욱 험악해졌다.
“지금 소신(小臣)께 황상을 지키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옵니까, 페하?”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이루는데 무인으로서 그보다 빠른 길이 또 있겠느냐?”
“소신에게 금위군 자리를 주니니 차라리 진짜 매(鷹)나 호랑이(虎)에게 호위를 맡기는 것이 나을 것이옵니다.”
엄헌영이 불쾌한 듯 내뱉은 말에 태황태후가 끌끌 혀를 찬다, ‘저런.’
“아직 네 마음속의 응어리가 풀리지 않은 것이냐?”
“그 응어리는 평생이 가도 풀리지 않을 것이옵나이다.”
“이런, 이런. 사내대장부가 그리 옹졸하여 어디다 쓸까.”
그러나 꾸짖는 듯한 투와는 달리 태황태후의 목소리는 흐뭇함에 차 있었고, 그녀의 표정은 눈앞의 청년이 어여뻐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따사롭기 그지없었다.
“그래, 네 생각이 그리 굳건하다면 내 더 이상 말해 무엇 하겠느냐.”
태황태후가 푸른 옥배(玉杯)에 담긴 귤화채(橘花菜)로 한 모금 입술을 축인 다음 엄헌영의 얼굴에 힐끗 시선을 던졌다. 석영발 너머의 엄헌영은 제 아비의 눈총을 못 본 체 하고 반항적인 두 눈을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있었다. 뭔가 생각에 잠긴 듯 굳은 엄헌영의 표정과 눈빛을 찬찬히 살피던 태황태후 엄씨가 옥배를 주칠한 소반 위에 내려놓고 말했다.
“효강.”
“하문 하시옵소서.”
자신의 부름에 엄헌영이 시선을 들자, 태황태후가 은근한 미소를 만면에 뗬다.
“그런데 효강아. 네 어째, 아까부터 내내 정신이 딴 데 팔려 있는 듯 하구나.”
“그것은.”
엄헌영의 얼굴에 낭패라는 기색이 스쳤다. 잘 생긴 얼굴이 와락 일그러지며 상아(象牙) 같은 치아가 질끈 아랫입술을 깨무는 모습을 본 태황태후가 호오, 하고 의미 모를 신음을 흘리며 넓은 소맷자락으로 붉게 칠한 입술을 가렸다.
“네가 이 운현궁(云賢宮)에 늦게 당도한 것이 그 일 때문이냐.”
“그 일은 참으로 송구하오나···.”
태황태후의 추궁에 엄헌영이 말끝을 흐렸다. 이런, 이런. 태황태후가 자애롭게 미소 지으며 탄식 아닌 탄식을 했다.
“내 그 일을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까닭이 궁금한 게야. 그래, 아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입궐(入闕)하던 찰나에 어디 화용월태(花容月態)의 규수라도 만난 것이냐?”
“아니옵니다.”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는 태황태후의 표정을 보고 미간을 구긴 엄헌영이 딱 잘라 대꾸했다. 저런. 피시식, 끈 떨어진 연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처럼 태황태후의 표정이 급변했다. 노골적으로 실망했다는 기색을 드러내는 그녀를 본 엄헌영이 제 아비인 엄유에게 보이지 않는 각도로 얼굴을 돌리고 짜증스레 얼굴을 찌푸렸다. 정작 친손자인 황제에게는 정후는커녕 후궁 하나 짝 지워 주려 하지 않는 주제에 왜 애꿎은 자신의 혼사에는 저렇게 관심을 보이는지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어디에 있다 그리 걸음이 늦었던 게야.”
“잠시 창혜각에 있었습니다.”
“창혜각? 아, 천객들이 머무는 전각 말인가.” 엄헌영의 대답에 태황태후 엄씨가 아는 척을 하며 물었다. “그래, 체제공을 만나러 들렀던 겐가.”
“그리할 작정으로 들렀으나, 체제공은 미처 뵙지 못하였나이다.”
“그래···.”
무슨 생각을 하는지 태황태후의 눈빛이 조금 깊어졌다.
“창혜각하니 두연(斗然: 문득) 생각났네만, 나인 아이들이 말하기를 물손님 하나가 모처럼 이 예를 찾았다 하더구나.”
“물손님?”
태황태후의 말에 엄헌영이 잠시 생각해 본 다음 아아, 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소신도 풍문으로나마 들어본 바 있나이다.”
“그 물손님은 그래, 이번에는 창혜각이 아니라 황상께 보내졌다 하더구나.”
황상, 하는 단어에 엄헌영이 와자작 소리라도 날듯이 이맛살을 구겼지만 생각에 잠긴 태황태후는 그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 한 모양이었다.
“황상께서 그 자와 뜻밖에 손발이 맞아 지내신다는 풍설(風說)이 궐 안에 돌던데, 참으로 묘한 일이지.”
“그 황상께서 말입니까?”
엄헌영이 구겨진 미간을 펴지도 않은 채 물었다. 자신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성급히 물어오는 엄헌영의 얼굴에 슥 책망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던 태황태후가, 엄헌영이 짓고 있는 표정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엄헌영이 노골적으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던 탓이었다.
“할미 된 입장에서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풍설이다만, 그렇다고들 하더구나.”
“또 입 가벼운 나인 나부랭이들이 되지도 않는 소설을 쓴 게지요.”
“글쎄다.” 태황태후가 빙긋이 웃으며 덧붙였다. “그러나 그 풍설이 참이건 거짓이건 간에, 그 물손님이란 작자의 얼굴이 궁금한 것은 사실이구나.”
엄헌영은 태황태후의 웃는 얼굴을 슬쩍 보고 내심 혀를 찼다. 천 년 묵은 너구리처럼 은근히 웃는 꼴을 보아하니 무슨 수를 써서건 그 물손님의 얼굴을 볼 속셈을 품고 있는 모양이었다.
“소신이 달려가 당장 그 자를 이 운현궁에 대령하겠나이다.”
제 맏누이의 말이라면 노루를 두고 범이라고 해도 믿을 엄유가 호기롭게 가슴을 치며 나섰다. 그러나 태황태후는 그 말에 싹 안색을 바꾸며 손을 휘휘 저었다, ‘아서라.’
“그런데, 이런 말씀을 드리기가 송구하기 그지없사옵니다만 소신을 어인 연유로 태황태후전까지 부르신 것이옵니까.”
엄헌영이 당혹해하는 제 아비를 곁눈질로 보고 태황태후에게 대담하게 물었다. 아. 엄유를 딱하다는 시선으로 흘겨보고 있던 태황태후 엄씨가 입가를 가리고 있던 소맷자락을 내리면서 엄헌영에게 눈을 돌렸다. 태황태후의 널따란 양단(洋緞) 소매에 수놓인 금사나비가 나푼나푼 진짜 나비처럼 춤을 추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런, 이 늙은이가 피가 끓는 젊은이를 불러 놓고 괜한 수다를 떨었나 보구먼.”
태황태후가 주름 하나 보이지 않도록 꼼꼼히 백분(白粉)을 바른 얼굴로 뻔뻔하게 탄식했다. 그 뻔히 보이는 거짓말에 꼴딱 속아 넘어간 엄유가 바로 정색을 하고 엄헌영을 꾸짖었다, ‘헌영이, 네 이놈, 마마께 그 무슨 말버릇이란 말이냐!’ 아버지의 꾸중을 대충 귓전으로 흘려들으며 엄헌영은 생각했다. 이 흐름도 이제 짜증나다 못해 지겹기까지 하구나.
“그래, 그런데 너희 용호군에서는 이번 내춘 대연회 경연에 어떤 예인을 대표로 내보내기로 했느냐?”
엄헌영의 부친인 엄유를 부추겨 내키는 만큼 엄헌영을 괴롭히고 나서야 태황태후는 엄헌영을 태황태후전으로 부른 진짜 이유를 꺼냈다. 그 이유가 의외였던지 엄헌영이 눈살을 찌푸리고 ‘내춘 대연회?’하고 중얼거렸다가, 어리둥절한 기색을 다 지우지도 않고 일단 태황태후의 물음에 대꾸했다.
“대연회를 주재하시는 마마께옵서 그것을 어찌 소신께 하문하시는 것이옵니까?”
“너희 용호군에서는 아직 명단을 경연 공최부(供催部)에 제출치 아니하였더구나. 덕분에 예정이 늦어지니, 대체 용호군 내부에서 일이 어찌 되어가는가 싶어 효강 네 얼굴도 한 번 볼 겸하여 자네를 불러 보았네.”
“···대장군께 한 번 언질을 넣어 보겠나이다.”
“그래. 그래 주었으면 좋겠구나.”
엄헌영의 말에 상냥하게 답한 태황태후가 마치 생각하던 것을 실수로 흘린 것처럼 나직이 덧붙였다.
“그런데, 황상께서도 늦으시는구나.”
“!”
태황태후가 일부러 흘린 말에 엄헌영이 당장 도깨비상이 되어 두 눈을 홉떴다. 그것을 살포시 내리깐 눈으로 흘기면서 태황태후가 실수했다는 듯 가식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황상께서도 아직 소식이 없으십니까?”
태황태후가 드리운 떡밥을 냉큼 문 엄유가 물었다. 짐짓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태황태후가 탄식했다.
“자당아, 황상께서 워낙 옥도미령(玉度靡寧: 임금의 건강이 좋지 못함)하시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느냐, 언뜻 들으면 손자의 허물을 감싸줄 줄 아는 자애로운 할머니 같은 태황태후의 말에 엄유는 분개하고 엄헌영은 혀를 찼다. 그렇다 하여도 어찌 황궐의 큰 어른 되시는 마마를 이토록 기다리게 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태황태후의 간사한 말에 꼴딱 속아 넘어가 분탄하는 엄유를 보며 엄헌영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역시 물러간다고 말하는 것이 좋을까.
“마마,”
“곧 천추전에서 기별이 있겠지.”
엄헌영이 생각 끝에 결정을 내리고 태황태후를 부르는데, 그 소리를 못 들은 척 하고 태황태후가 말했다. 일부러 무시하는 기색이 역력한 태도에 역시 안 된다는 건가, 하고 엄헌영이 표정을 굳히는데, 태황태후가 그제야 인자하게 미소 지으며 엄헌영을 돌아보았다, ‘할 말이라도 있는 게냐, 효강아?’
“마마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이만 소신은 물러가 볼까 하옵,”
제 아비에게서 불호령을 들을 각오를 굳히고 엄헌영이 꿋꿋하게 말을 꺼내는데, 그 때 살문 앞을 지키고 있던 나인이 나부죽이 절을 하며 태황태후에게 아뢰었다.
“마마, 황상께옵서 문후 드셨나이다.”
나인이 아뢴 말 한 마디에 방 안의 공기가 싸늘하게 굳었다. 위로는 태황태후부터, 아래로는 엄헌영의 눈이 반사적으로 살문을 향했다.
나인들의 그림자가 어른어른 비치는 구화장지문으로 지금껏 보이지 않던 사내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겨울철 나뭇가지마냥 말랐으나 키가 육 척(尺)을 훌쩍 넘기고 그 뼈대 또한 호골(虎骨)마냥 굵은 사내가 하나, 키가 선 자리에서 앞서 있는 사내에는 미치지 못하나 그 또한 후리후리 키 큰 사내가 또 하나였다.
“마마, 황상께오서 예인 대동하시고 마마께 문안 드셨나이다.”
태황태후에게서 답이 없자, 자신이 아뢴 말을 태황태후가 듣지 못했다 여겼는지 나인이 아까보다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설핏 표정을 굳히고, 장지문에 비친 그림자를 노려보듯이 하고 있던 태황태후가 싸늘한 투로 대꾸했다.
“안으로 모시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살문이 열리고, 황제와 그가 대동하고 온 예인이라는 청년의 모습이 태황태후를 비롯한 방 안의 사람들 앞에 드러났다.
‘어서 안으로 드시오.’, 입으로는 따사로운 말을 지껄이면서 눈으로는 못마땅한 시선을 황제에게 보내던 태황태후의 시선이 당연하다는 듯 황제를 지나 황제의 뒤에 서 있는 청년의 얼굴을 스쳤다.
그를 따르기라도 하듯이 엄유와 엄헌영의 눈이 청년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
“!”
미끄러지듯 눈으로 청년의 전신을 슥 훑고 다시 고개를 돌린 엄유와는 달리, 엄헌영의 시선은 청년의 얼굴에 붙어 떨어지지를 않았다. 집요하게 쳐다보는 시선을 느낀 것인지, 청년이 슬그머니 눈을 들었다가 엄헌영과 눈이 마주쳤다.
“윽.”
엄헌영과 눈이 마주친 청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청년이 고개를 들자 겨우 그의 생김새를 자세히 볼 수 있게 된 엄헌영이 ‘오라, 너.’하고 입술로만 속삭이며 이를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