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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처한 순간에 낯익은 목소리를 듣자 무작정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입술 끝을 약간 비틀고 빙그레 웃는 조원의 얼굴을 보자 그 감정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다소의 불안과 약간의 경계심을 가지고 조심스레 두어 걸음 물러난 서문경이 천천히 조원과 눈을 맞췄다. 서문경과 눈을 마주치자 조원의 눈에 어린 웃음이 조금 더 짙어졌다.
“자네가 여기는 웬 일인가?”
하고 물은 조원이 서문경의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표정을 굳히고 고개를 모로 갸웃했다.
“설마 혼자 온 게야?”
“그렇습니다만.”
얼결에 서문경이 대답하자 못마땅한 듯 조원이 미간을 찌푸리고 혀를 한 번 찼다. 저 치가 어떻다 평할 수 있을 정도로 조원을 많이 만나본 것은 아니었지만, 어떤 상황에 처해도 또 어떤 폭언을 들어도 마냥 싱글싱글 웃고만 있던 그가 갑자기 낯을 구긴 것에 놀란 서문경이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물으려던 때였다.
“저,”
“설마 나를 찾아온 겐가?”
자신이 언제 얼굴을 찌푸렸냐는 듯 평소의 그 은근하게 웃는 얼굴로 돌아온 조원이 서문경의 말을 막았다.
“댁 말고 제가 여기 아는 사람이 또 있습니까.”
조원의 말에 댕강 말허리가 잘린 서문경이 다소 불퉁한 투로 내뱉었다. 그렇지, 조원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염락, 자네가 아는 잔가.”
그 때, 조원과 서문경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던 남자가 끼어들었다. 서문경이 반사적으로 조원을 향해 슬쩍 발걸음을 옮겼다. 서문경 자신조차도 눈치 채지 못한 무의식적인 행동을 용케도 알아챈 조원이 슥 한 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조금.”
황제를 닮은 남자의 눈이 서문경을 빤히 내려다보는 것을 본 조원이 서문경의 손목을 잡아 자신 쪽으로 끌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조원에게로 옮겨갔다.
“조금 아는 잡니다.”
서문경을 제 등 뒤로 숨기는 조원을 보는 남자의 눈이 샐쭉해졌다.
“이제 계집도 모자라 사내에게까지 손을 대나.”
“설마요.”
남자의 이죽거림을 웃으며 받아 넘긴 조원이 남자에게 눈짓을 해 보였다. 그 눈짓이 뜻하는 바를 눈치 채지 못한 남자가 응?, 하고 눈살을 찌푸렸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조원의 몸을 우악스레 옆으로 밀쳤다.
“효강, 어찌 이러십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사내로서 그리 당당한 체구가 아닌 조원은 그러나 제 몸을 무슨 장애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거칠게 밀치는 사내의 손을 물 흐르듯 받아 넘기며 선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버티고 섰다. 그것에 부아가 났는지 남자가 제 손을 받친 조원의 손등을 확 치고 재빨리 손을 뻗어 서문경의 옷자락을 잡아챘다.
“효강! 어찌 이러십니까!”
“분명 이 몸을 보고 황상(皇上)을 입에 담았겠다?”
조원이 날카롭게 외쳤지만, 남자는 그것에 조금도 개의치 않고 서문경의 소맷자락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어어, 하고 남자 쪽으로 까치발을 하고 끌려가던 서문경이 뒤늦게 제정신을 차리고 남자의 무례한 손을 뿌리쳤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서문경이 사내에게 잡혔던 자리를 탈탈 털어내며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얼음장처럼 돌변한 서문경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멍청해져 있던 남자가 곧 정신을 차리고 하,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그 쪽이야말로 이 무슨 무롄가.”
그렇게 내뱉고서 남자가 서문경을 노려보았다. 자신의 눈높이보다 한참 아래에 있는 서문경의 머리를 쏘아보는 검은 눈이 더욱더 짙은 색으로 변해 내리깔려 있다. 그 검은 눈을 빤히 올려다보다가 서문경이 불현듯 눈살을 찌푸렸다.
다시 봐도 놀라울 정도로 황제와 닮은 사내다. 먹이라도 먹인 것처럼 유난히 검은 눈과 머리카락, 가로로 긴 우아한 눈매, 우뚝한 콧대와 잘 생긴 인중 아래의 입술 생김까지. 황제와 다른 구석이라고는 찾아보려고 해도 햇볕에 고루 타 건강해 보이는 안색과 치기 어린 듯 하나 기본적으로 생기로 반짝이는 눈빛, 그리고 생동감 넘치는 표정과 장승처럼 벌어진 몸 정도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십시오.”
서문경이 충동적으로 내뱉었다.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것을 보자 막 가슴 속에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껄끄러움이 더더욱 커졌다.
“이상합니다.”
수묵화 속에서 막 튀어나온 것 같은 우아한 눈이 미간에 주름이 잡힐 만치 찌푸려지지 않은 것도, 또 깔보는 듯 경멸하는 빛을 담고 다른 사람을 내려다보지 않는 것도 모두 이상했다. 황제를 닮은 남자의 눈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서문경은 불현듯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깨닫고 화들짝 놀랐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취향이 나빠졌나.
“자자.”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는 서문경을 보고 남자가 잠시 얼이 빠져 있는 틈을 타 조원이 서문경의 앞을 가리고 나섰다. 그것에 당장 표정이 굳은 남자가 고함을 지르려고 막 입을 벌리는 찰나,
“효강, 태황태후전에서 사람이 나왔습니다.”
조원이 선수를 쳐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남자가 입을 벌린 자세 그대로 쩍 굳었다.
“그래서 제가 방금 전 언질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태황태후전의 부르심을 받고도 한 걸음에 달려가지 않으니 이런 일이 생기지요.’, 천천히 팔짱을 끼고 선 조원이 들으라는 듯 크게 혀를 찼다.
“장군, 마마께옵서 기다리고 계시옵니다.”
자칫하면 치맛자락이 땅에 끌리는 것이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긴 비단 관복을 입은 여관이 소리 없이 다가와 말했다. 태황태후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반사적으로 얼굴을 구긴 남자가 가자미눈을 뜨고 조원을 노려보면서도 낭패라는 듯이 계속 입술을 달싹였다.
“어서 가시지요.”
“여기서!”
여관이 다시금 남자를 재촉하자, 남자가 할 수 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 나서면서도 잊지 않고 서문경을 돌아보았다. 자꾸만 자신의 앞을 가로막으려 드는 조원 때문에 짜증을 내고 있던 서문경이 너, 하는 남자의 말에 조원의 어깨 위로 빼꼼 눈을 들고 남자를 쳐다보았다.
“여기서 기다려.”
어디 가지 말고!, 남자가 으르렁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서문경을 윽박질렀다. 서문경이 허, 하고 코웃음을 쳤다. 내가 왜?
“도망치지 말고!”
염락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도 다 알고 있으니까! 마지막까지 남자가 얼토당토 안 한 말을 지껄이며 사라졌다.
“요즘 황궁에서는 저런 종류의 헛소리를 하는 것이 유행이랍니까?”
여관과, 그보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위무사에게 끌려가다시피 하는 남자를 곱지 않은 눈으로 노려보며 서문경이 말했다. 남자에게서 서문경을 보호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내내 서문경의 앞을 집요하게 막고 있던 조원이 겨우 서문경의 앞에서 물러서 빙글 몸을 돌렸다.
“···뭡니까.”
마주본 조원의 얼굴이 평소와는 달리 난감한 듯, 못마땅한 듯 일그러져 있어서 서문경은 주춤했다.
“하필이면 저 치와 맞닥뜨리나.”
조원이 손등을 이마에 대고 푹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필이면, 이라니요?”
“거기다 또 저 자의 면전에다 대고 폐하를 닮았다고 지껄여대다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팔짱을 끼고 선 조원이 서문경을 추궁했다. 질문을 받은 서문경이 이맛살을 찌푸린 채 침묵했다. 어떻게 된 일이냐니,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태학궁으로 가려다가, 당신이 오늘도 태학궁에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어 좀 더 당신이 있을 확률이 높은 창혜각으로 왔습니다.”
서문경의 말을 듣고 조원이 응?,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전에 창혜각에 와 본 적이 있던가?”
서문경은 고개를 흔들었다.
“처음입니다.”
“그럼 어떻게?”
“이상하게 오늘 청의관 앞에 외부 사람들로 보이는 여자들과 가마꾼들이 득실거리기에.”
거기까지만 들어도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짐작이 가는지 조원이 턱 끝을 주억거렸다, ‘무작정 가마를 탔군?’
“그런데 일단 창혜각에 오기는 했는데, 가마 삯을 낼만한 돈이 없어서 난감해하던 중에 아까 그 남자가 나타나 대신 삯을 치러 주었습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린 서문경이 천천히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생각해보면···.”
생각에 잠겨 조금 더 색이 짙어진 서문경의 눈을 조원이 빤히 쳐다보다가, 서문경이 고개를 들기 직전 언제 그랬냐는 듯 시선을 돌렸다.
“그 사람,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는데요.”
굳이 분류하자면 호인(好人)쪽에 가깝달까.
“호인이라.”
조원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황상과 얽히지 않는다면 그렇겠지.”
“아!”
조원의 말에 서문경이 갑자기 빽 소리를 질렀다.
“그 자는 뭐기에 폐하와 그렇게 닮은 겁니까? 그 자도 황족입니까?”
갑자기 소리를 지른 서문경이 면구하도록 대놓고 귀를 막은 조원이 슬슬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족은 아니야.”
“그런데 어떻게 폐하와 그렇게,”
“폐하와 그 치가 닮은 것은.” 서문경의 말을 썩둑 지르며 조원이 느릿하게 말끝을 끌다가, 불쑥 물었다. “자네, 폐하의 모후(母后)가 뉘신지는 알고 있나?”
조원이 갑자기 말을 돌리자 서문경이 다소 의아해하면서도 일단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히는 아니지만, 대충은 들었습니다.”
“폐하께?”
“예···.”
폐하께?, 하고 물으며 자신을 쳐다보는 조원의 눈초리가 왜인지 예사롭지 않게 느껴져서 서문경은 말끝을 흐렸다. 서문경의 대답을 들은 조원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군, 폐하께서 자네를 꽤 괴시는 듯하네.’ 그 모습이 평소와 다름없이 다소 가볍고 또 여유로워서 서문경은 황망히 두 눈만 끔뻑였다.
“폐하의 모후는, 선제이신 가연제의 단 하나 뿐인 후궁이었던 혜비(慧妃) 엄씨시네. 폐하께서 황위에 오르신 후에는 엄 황귀비(皇貴妃)로 추존(追尊)되셨지. 선제이신 가연제께서는 정후인 명의황후를 몹시 익애하시어 황제로 옹립된 후에도 몇 년 동안이나 후궁을 들이지 아니하셨네.”
“그런데 왜 혜비를?”
“명의황후께서 황자를 생산하시지 못하셨기 때문이지.”
그래서, 하고 조원이 나직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가연제께서 제좌에 오르신 후에도 계속 명의황후가 회임(懷妊)치 못하자, 당시 황태후셨으며 가연제의 모후이기도 한 지금의 태황태후께서 가장 앞장서 자신의 사가 조카인 엄씨를 가연제의 후궁으로 들였지. 그 분께서 바로 지금의 폐하를 생산하신 엄 황귀비시네.”
별 다른 대꾸 없이 조원의 말을 듣고만 있던 서문경이 불쑥 물었다.
“폐하께서는 부황이신 가연제와 모후이신 혜비 엄씨 중 어떤 분을 닮으셨습니까?”
“누구라고 생각하나?”
조원이 되묻자, 서문경이 발칵 신경질을 냈다.
“사람 좀 그만 떠볼 수 없습니까?”
“자네야말로 이미 답을 내 놓고 확인 차 묻는 버릇은 어디서 들였나?”
그 말에 순간 서문경이 말문이 막혀 애꿎은 눈썹만 구기다가, 이윽고 툴툴거리며 말했다.
“모후 쪽을 닮으신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요, 하고 덧붙이면서 서문경은 굵은 뼈대와는 별개로 섬세하기까지 한 황제의 미모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래, 그렇지.”
“그런데 아까 그 자와 폐하는 어째서 닮은 겁니까?”
자꾸만 조원이 말을 빙빙 돌리는 것에 짜증이 나기도 하고, 지치기도 한 서문경이 다소 거칠게 캐어물었다. 그 말을 듣고 조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서문경의 입장에서는 그리워야 마땅한 그 현대적인 몸짓이 묘하게 더 얄밉게 느껴져서 서문경은 그만 복잡한 심경이 되고 말았다.
“방금 폐하의 모후인 혜비가 태황태후의 질녀라는 이야기는 했었지.”
“그렇습니다.”
또 그 이야긴가 싶어 서문경의 말투가 절로 무뚝뚝해졌다.
“정확히 말하면 혜비께서는 무아태후의 사가 큰 오라비의 맏딸이셨지.”
서문경의 불퉁한 표정을 보고 조원이 웃음을 흘리며 손을 저었다, ‘딴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니 표정 좀 풀어.’
“그리고 무아태후의 형제자매 중 가장 나이 어린 자가 바로 선제 때 상서 병부 장관을 지낸 엄유. 아까 자네가 본 자는 그 어르신의 계자(季子: 막내아들)지.”
조원이 시선이 제안을 빼닮은 남자가 서 있었던 자리를 슥 곁눈질로 가리켰다.
“그럼.”
서문경이 두 눈을 끔뻑였고, 조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효강은 사사로이는 황상의 외당숙(外堂叔: 어머니의 사촌 오빠나 남동생)되시는 분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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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당숙?”
당혹한 서문경이 불쑥 내뱉었다.
“하지만 폐하와 아까 그 자는 별로 나이 차이가 나 보이지 않았는데요.”
기껏 해봐야 서너 살 정도 차이가 날까. 잠시간 머릿속으로 황제 제안과 효강이라는 사내 간의 촌수를 더듬어보던 서문경이 입 속으로 웅얼거렸다. 효강과 제안 간에 친속(親屬)이건 외친(外親)이건 간에 어떤 식으로든 피가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한 틀에서 찍어낸 듯 닮은 생김새를 보고도 그 둘 간의 혈연을 짐작치 못했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겠지. 하지만 어느 정도 미루어 짐작하고 있던 답을 얻고 나서도 서문경은 과연, 하고 고개를 주억거리기는커녕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말에 조원이 픽 웃으며 대꾸했다.
“효강의 부친이신 엄유 어르신과 엄 수경궁(水鏡宮) 마마의 부친이신 엄충 어르신네 사이의 나이 차가 거의 이십 여 세이니 그럴 만도 하지.”
그렇게 말하고서 조원이 주위를 한 번 휘 둘러보더니 서문경에게 손짓을 했다. 가까이 와 보라는 뜻의 손짓을 보고도 서문경이 좀처럼 선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경계 어린 눈빛만 보내자, 조원이 다가가 서문경의 한 쪽 귀를 휙 잡아당겼다. 방심하고 있다가 갑자기 귀를 잡아당겨진 서문경이 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 하지.”
서문경의 귀에 그렇게 속삭인 조원이 서문경의 귀를 놓아주며 싱긋 웃었다.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일부러 이러고 있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하고 말하는 조원의 눈이 흘끗 서문경이 입고 있는 장의에 가 닿았다. 그 시선을 느낀 서문경이 자신도 모르게 움찔 어깨를 움츠렸다. 괜스레 옷깃을 여미는 척 하며 슬그머니 치켜뜬 눈으로 자신의 표정을 살피는 서문경을 보고 조원이 싱글싱글 얄미운 웃음을 흘렸다.
“보아하니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보고자 일부러 여복(女服)을 입은 모양인데.”
은근히 내리 깐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조원을 서문경이 매섭게 뜬 눈으로 노려보았다. 내가 이 옷을 여자 옷인 줄 모르고 대충 골라 입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비꼬기는.
“일단 다시 얼굴 좀 가리시고, 따라오게.”
그렇게 말한 조원이 손가락을 두어 번 위로 까닥까닥하고는 휙 뒤돌아서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서문경이 그런 그의 뒷모습에 아니꼬운 눈빛을 던지면서도 공단 주의를 장옷 삼아 다시 머리 위에 덮어쓰고 조원의 뒤를 따랐다.
“안으로 들어갈 겁니까?”
“그래야지.”
조원이 길찬 대나무들로 무성한 북문 후원을 돌아 창혜각 입구로 향하자, 갑자기 주춤 걸음을 늦춘 서문경이 물었다.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이 추운 날에 눈 맞으며 밖에서 담소라도 나눌까.’, 조원이 빈정거리는 건지 우스갯소린지 가늠할 수 없는 말을 지껄이며 잰 걸음을 걸었다. 그러나 한 번 발걸음을 늦춘 서문경은 아무래도 더 이상 나아갈 마음이 생기지 않는지 아예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왜 그러나.”
뒤늦게 조원이 서문경이 자신을 따라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뒤를 돌아보았다. 조원과 벌써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있는 서문경은 조금 복잡한 눈으로 창혜각 기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쏴아아, 하고 대나무가 바람에 쓸리는 소리가 났다. 마치 간단없이 밀려오는 파도가 바위에 부딪쳐 부서지는 것 같은 차디찬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갑자기 마음속이 허전해지고 온 몸에 오슬오슬 오한이 밀려왔다. 그 찬 소리 한 가운데 검푸른 기왓장을 비늘을 잇듯 쌓아 올린 전각이 한 채 서 있었다. 높다란 용마루에 선 기와 끝에서 창백한 햇빛이 와 산산이 부서진다. 부서지는 햇빛을 받은 기와 끝이 새파란 물을 들은 듯 푸르렀다.
“무엇을 보나.”
멍하니 용마루를 올려다보고 있는 서문경의 두 눈이 넋이라도 나간 사람처럼 초점이 없어, 어쩐지 조마조마한 심정이 된 조원이 충동적으로 물었다.
“청의관에···.”
자신이 묵고 있는 처소의 이름을 굳은 혀끝에서 간신히 굴리며 서문경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냥, 제가 이곳이 아니라 청의관에 묵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째서?”
여전히 멍하니 창혜각 지붕만 올려다보고 있는 서문경의 주의를 끌기 위해 조원이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일부러 목소리를 높인 보람이 있었는지, 서문경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조원을 쳐다보았다. 답지 않게 멍청한 서문경의 눈을 본 조원이 반사적으로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인형의 눈에 박아 넣은 유리구슬처럼 생기 없는 눈을 보고 있으려니 어쩐지 마음이 좋지 않았다.
“여기서는 파도 소리가 들립니다.”
서문경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대나무밭에서 파도 소리가 나서, 기분이.”
기분이 안 좋아요. 가만히 덧붙이는 서문경의 목소리가 조금 헐떡이는 것처럼 들려서 조원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정작 바라본 서문경의 얼굴은 힘든 기색 하나 없이 말갛기만 했다. 기분 탓인가, 하고 서문경의 하얀 얼굴에서 눈을 돌리던 조원이 불현듯 바른편 눈을 찌푸렸다. 아니다.
“너.”
그늘 안에 있어 유독 낯빛이 희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핏기가 가신 것이었다.
서문경이 무심코 중얼거린 파도 소리라는 말을 다시금 떠올린 조원이 설마,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발침 의식 때 바닷물이 나왔었지. 그럼 파도에 쓸려서 이곳에,”
하고 조원이 말하는 그 때, 다시 한 번 찬바람이 불었다. 예의 그 파도 소리를 닮은 소리가 나고, 서문경의 낯빛이 눈에 띄게 해쓱해졌다. 덜덜 떨리는 아랫입술을 단단한 치아로 꾹 짓씹은 서문경이 부러 힘주어 눈을 치켜뜨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조원이 무심결에 서문경의 팔로 한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서문경은 고개를 한 번 젓고는 그냥 조원의 옆을 스쳐 지나가 버렸다.
“괜찮습니다.”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하고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스스로 들어도 위태롭게 들렸다. 하지만 서문경에게 그 이상을 생각할 정신은 지금 없었다.
슬프지 않다.
가슴 속에는 어떤 고통도 없었다.
그래서 서러웠다.
뜨거운 머릿속과 차가운 가슴 속의 괴리에 온 몸에 납덩이가 차 있는 듯 둔중한 기분이 들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비참함과 마땅히 느껴야 할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는 묘한 죄책감이 뒤섞여 눈앞이 아찔아찔했다.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 같은 고독이 엄습해왔다.
그 순간 왜 그 신경질적인 황제의 얼굴이 떠올랐는지는 서문경 자신도 알지 못했다.
허탈한 신음이 다물린 입술 사이를 비집고 새어 나왔다. 서문경은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 내렸다. 대체 어느 순간부터 그 자를 내 편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건지, 정말로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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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또 어느 집 처자(處子)신가?”
“적 차관댁 고명따님은 어쩌고?”
“아니, 사 태보(太保) 댁 사손(獅孫)은 어쩌고 또 적 차관댁 따님이란 말인가?”
창혜각에서 맞닥뜨린 사람들이 하나같이 조원과 조원의 뒤를 조신하게 따르는 장의 차림의 여인을 볼 때마다 한 마디씩 던졌다. 각기 다른 여자의 이름을 말한 사람들이 조원이 모 여인과 산책을 하는 것을 보았느니, 아니, 모모 여인이 은밀히 조원을 찾아 창혜각 죽원(竹園)에 있는 것을 보았느니, 모모모 여인은 사람들 몰래 제 시비(侍婢)를 시켜 연서(戀書)를 보내왔느니 하고 실랑이를 벌이는 것을 뒤로 하며 서문경이 끌끌 혀를 찼다. 효강이란 자도 자신이 조원을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제 정신 좀 차리라며 설교를 늘어놓더니. 서문경이 조원의 뒤통수를 쏘아보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저 인간, 참 어지간히도 바람둥이인 모양이로군.
“저 사람들도 다 하늘손님들입니까?”
조원이 안내한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서문경이 대뜸 물었다.
“대부분은.”
조원이 다른 사람들에게 말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곱접이문을 닫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여기는?”
조원이 사탕가게에 들어온 어린애처럼 둘레둘레 방 안을 돌아보는 서문경의 옆얼굴을 흘깃 보고, 방 한 구석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등자(橙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내가 기거하는 방일세.”
“여기가 말입니까?”
의외라는 듯 서문경의 고개가 모로 기울었다. 조원이 검은 눈썹을 한 번 찡긋하고 물었다.
“무엇이 이상해?”
“아니, 아닙니다.”
서문경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조원은 대답을 듣지 않아도 벌써 서문경의 생각을 알고 있다는 듯 픽 웃었다.
“생각보다 살풍경하다 그건가.”
“그냥···, 조금 의외라서요.”
곧바로 정곡을 찌르는 조원의 말에 서문경이 잠시 어쩔까 싶어 미간을 찌푸렸다가 이윽고 둘러대는 것을 포기하고 사실을 말했다. 그러자 조원이 웃음기 띤 눈으로 제 방을 새삼스레 돌아보았고, 자연스레 서문경이 그 눈길을 좇아 다시금 방 안을 살펴보았다.
다소 경박한 성미나 화미(華美)한 옷차림새 등으로 미루어보면 그가 기거하는 방 또한 화려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조원이 기거하는 방은 화려하다기보다는 오히려 가지런하고, 또 단숙(端肅)하기보다는 스산한 감이 있었다. 무늬 없는 하얀 비단 벽지를 바른 방 안에는 탁상과 등자, 침상 따위의 기본적인 가구만이 놓여 있었고, 그 가구들 또한 특별한 은장식이나 반패부(半貝付) 따위를 넣지 않은 수수한 것들이었다. 별반 눈에 뜨이는 걸그림이나 도자기 같은 장식품들도 전무하다시피 했다.
“여기서···,”
살기는 사는 겁니까. 생활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조원의 방을 보고 무심코 그렇게 물으려던 서문경이 갑자기 하던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조원이 의아한 눈빛을 던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것을 서문경을 모른 척해 버렸다. 어쩐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조원의 속내를 들여다본 것 같아서 껄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차라도 한 잔 들겠나?”
조원이 그렇게 물었지만 서문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여러 가지로 마음이 뒤숭숭해서 어서 용건을 마친 후 이 곳을 떠나고 싶었다. 메마른 겨울나무 같은 느낌을 주는 이 방에 계속 있는 것도 꺼려졌고, 바람이 불 때마다 파스스 대나무들이 쓸리며 나는 소리도 싫었다.
“그래.”
서문경에게 앉을 것을 권한 조원이 어깨까지 올라오는 등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말을 꺼냈다.
“어디까지 이야기했었지?”
“효강이라는 자가 폐하의 외당숙이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그래.”
조원이 턱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효강(曉康)이란 호(號)일세. 새벽 효(曉)에 편안할 강(康)자를 쓰지. 이미 말했다시피 그는 태황태후의 애제(愛弟)인 엄유 어르신의 계자네. 그러니 성(姓)은 엄씨이고, 이름은 헌영(軒英), 자(字)는 언화(彦和).”
하고 말하다가 무심코 서문경의 얼굴에 시선을 던진 조원이 실소했다.
“그 따위 놈에게는 관심 없다는 얼굴이군.”
솔직하다 못해 노골적인 표정이로군. 웃으며 그렇게 말하던 조원의 눈이 문득 무슨 생각을 했는지 둥글게 호선을 그리며 굽어졌다.
“그렇게 노골적이니 안 그래도 성미가 불같은 효강이 그런 반응을 보이지.”
“놀라서 그랬습니다.”
생각도 못한 곳에서 폐하와 똑 닮은 얼굴을 보니 제가 놀라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불퉁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서문경이 생각했다. 분명 맞는 말을 하는데 왜 이렇게 변명처럼 들리는 걸까.
“그래서 그랬나? 효강의 얼굴을 보고 폐하, 하고.”
“옆에서 보기라도 하셨습니까?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던 사람이 어찌 그렇게 잘 아신답니까.”
“자네 반응이야 뻔하지. 효강의 반응도 뻔할 뻔자고.”
서문경의 눈초리가 절로 샐쭉해졌다. 나를 언제부터 봤다고 저렇게 잘 아는 척 말을 하나.
“그래, 그 작자는 왜 그렇게 정색을 했답니까?”
닮은 건 사실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새삼 당시의 당혹스런 심경이 생각이 났는지 서문경이 투덜거렸다. ‘그건 그렇지.’하고 웬일로 조원이 서문경의 말을 거들었다. 낯살을 찌푸리고 있던 서문경이 입술을 몇 번 쫑긋거리다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폐하와 그 자, 혹여 사이가···.”
“안 좋지.”
서문경이 어렵게 꺼낸 말을 조원이 낚아챘다.
“아니, 안 좋다기보다는 효강 쪽에서 일방적으로 황상을 원증(怨憎)코 있지.”
“일방적으로?”
서문경의 말 앞에 생략된 말을 용케도 알아채고 조원이 대꾸했다.
“글쎄, 폐하께서는 효강을 신경이나 쓰시려나.”
음, 하고 서문경은 신음을 흘렸다. 자신 이외의 모든 것을 하찮게 여기는데 익숙한 황제와 성질이 불같은 효강이라는 자를 동시에 떠올리자, 노염으로 얼굴이 시뻘게진 효강이 뼈다귀를 빼앗긴 개처럼 왈왈대고 비단 금침 위에 느른하게 누운 황제가 그런 효강을 경멸로 내리깐 눈으로 쳐다보는 그림이 저절로 그려졌다.
“그래서 사이가 안 좋은 겁니까?”
“뭐, 그런 탓도 있고.”
“있고?”
서문경이 대답을 닦달하자, 조원이 답지 않게 곧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망설였다. 양미간을 구긴 채 음, 하고 신음을 흘리는 조원을 서문경이 재촉하듯 바라보았다.
“일단 엄씨 일가 자체가 황상께 사사건건 역심을 품고 있는지라.”
“···폐하의 어디가 그리 마음에 안 찬답니까?”
무릇 황제의 뒤를 받쳐 주어야 할 외친(外親)이 오히려 황제를 적대시한다고 하자 기가 막힌 서문경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다 서문경이 불현듯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 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왜 그러나?”
“그런데 효강이 아니라 엄씨 일가가 폐하께 악심(惡心)을 품고 있다는 말은.” 제 말이 씨가 될까 두려워하기라도 한 것처럼 한 동안 망설이던 서문경이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설마 태황태후도?”
그 말에 조원이 빙긋 웃었다. 긍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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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육이.”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막 잠에서 깨기라도 한 것처럼 쉬어 있었다. 그런 자신의 목소리에 멈칫한 서문경이 몇 번이나 목을 가다듬은 다음 잠시 멈췄던 말을 이었다. “혈육이 아닙니까.”
분명히 태황태후는 우리 폐하의 할머님이시자, 또 외가(外家)쪽으로도 피가 이어져 있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서문경은 성이 난 한편, 또 다른 일편으로는 자신의 상식과 완전히 어긋나 있는 상황에 당혹스러워 하는 것 같아 보였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하는 말이 노골적으로 쓰여 있는 서문경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조원이 순간 빙긋 웃었다.
그러나 동시에 조원의 눈에 싸늘한 불쾌감이 번뜩이듯 스쳤다.
“글쎄, 혈육이라고 무조건 서로 위하고 사랑해야한다는 법이 어디 있던가.”
그렇게 말하는 투가 묘하게 따갑게 느껴져서 서문경은 무심코 조원을 돌아보았다. 서문경과 눈이 마주친 조원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입술 양 끝을 위로 말아 올리며 어여쁜 호선을 그리는 입술, 그러나 마찬가지로 호선을 그리고 있는 눈매 안에 담긴 눈은 묘하게 차가웠다.
조원의 눈과 입술은 빈틈없이 웃는 모양을 하고 있는데도 서문경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조원의 싸늘한 눈빛이었다. 타오르는 불꽃 속에 박혀 있는 얼음을 보는 듯 기묘한 기분이었다.
“사랑받고 자랐으니 그럴 테지.”
자네 같은 수객들은 당연히 친인(親姻)에게 사랑받았고, 또 수많은 친우들에게도 사랑 받았었겠지. 언뜻 들으면 부러워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그 말에도 역시 빈정거림이 가득했다.
조원의 태도가 돌변한 것에 잠시 당황하던 서문경이 곧 입술을 꾹 닫고 두 눈을 매섭게 치떴다.
“왜 그렇게 삐딱하게 나오시는 겁니까.”
서문경의 뾰족한 항의에 막 조원이 열었던 입을 다시 다물었다가, 곧 변명조로 대답했다.
“혈육지친(血肉之親) 간에도 혈육애가 존재치 않는 경우가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걸세.”
“누가 혈육 간이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싸 안고 이해해 줘야 한다고 했습니까? 저도 세상이 넓은 만큼 별별 일들이 다 벌어진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서문경이 팔짱을 낀 채 냉소적으로 내뱉었다. “하루에도 십 수 건이나 패륜적인 소식이 쏟아졌지요. 자식을 등쳐먹는 부모,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 딸을 겁탈하는 아비, 딸을 팔아넘기는 어미, 돈 때문에 서로를 죽이는 부모자식 간.”
하지만, 서문경의 단호한 목소리가 곧바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건 다른 이야기 아닙니까? 폐하의 일은 폐하의 일일 뿐, 당신께서 겪고 아는 이들의 이야기에 겹쳐 보지 마십시오. 그건 당신에게도 폐하에게도 못할 짓입니다.”
마지막 말을 들은 조원이 눈을 크게 떴다. 서문경은 매섭게 뜬 눈을 조원의 얼굴로 옮겼다가, 표정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조원의 얼굴이 화가 났다기보다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듣고 놀란 것처럼 보였던 탓이었다.
“아이는 사랑해 주어야 하는 법입니다.”
잠시 그가 생각할 시간을 준 뒤에, 서문경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조원이 숙이고 있던 머리를 들었다.
“묻힌 자리에서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한 포기 풀도, 말 못 하는 짐승도 사랑을 주어 키우면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제 주인에게 애정을 돌려주는 법입니다. 하물며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에게도 이유는 있었네.”
“압니다.”
서문경이 선뜻 수긍했다. 서문경의 대답이 너무도 선선했던 탓에 조원이 눈을 가늘게 뜨고 서문경의 얼굴을 응시했다. 노골적으로 의심을 드러내는 눈빛에 서문경은 마찬가지로 곱지 않은 눈빛을 되쏘아 주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이유란 게 제가 수긍할만한 것이라는 확신은 들지 않습니다.” 아닙니까? 하고 서문경이 당돌하게 물었다. “듣자하니 엄씨 일가고 태황태후고 간에 폐하께서 조막만한 어린애였던 시절부터 폐하를 배척했던 듯한데, 애를 상대로 이유는 무슨.”
있어봐야 제 권력보전에 관한 이유였겠지요, 서문경이 이기죽대는 말에 조원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드물게도 말문이 막힌 조원을 노려보며 서문경이 쏘듯이 말을 이었다.
“말 못하는 풀도 물을 주면 꽃을 피우고 한낱 개 한 마리도 먹이를 주면 꼬리를 흔든다고, 제가 이 세계에 와서 비웃음과 적대감을 제한 무언가를 주었던 사람은 폐하 한 사람뿐이니 저는 폐하 편을 들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까.’하고 낮아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서문경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조원의 시선이 자신을 집요하게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을 모른 척 할까 하다가 서문경이 곧 생각을 고쳐 조원을 마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조원이 버릇처럼 싱긋 웃었다. 그러나 서문경은 그를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달리 더 이상 그 웃는 얼굴에 속지 않았다.
“말씀하십시오.”
하고 서문경이 말하자 조원의 한 쪽 눈썹이 찡긋 추켜 올라갔다.
“제게 할 말이 있으신 것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니 조원이 기가 막힌다는 듯 하,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자네지. 나를 찾아온 것도 자네 아닌가?”
“그렇지요.”
“그러고 보니.”
조원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불쑥 말했다. 서문경이 들어줄 테니 말해 보라는 듯 턱 끝을 가볍게 끄덕였다. 조원이 말을 이었다.
“자네는 당최 무슨 생각으로 나를 찾아온 겐가?”
“여쭐 말이 있어서 찾아왔다고, 이미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또 이 세계에 제가 아는 사람이 몇 없다는 것도, 그 중에서 제가 제대로 말을 섞을 수 있을 만한 이가 당신 밖에 없다는 것도 잘 알고 계실 텐데요.”
“아니, 그 말이 아니라.” 조원이 휘휘 한 손을 저었다. “자네가 무엇을 묻건 그건 자네의 자유네만, 제대로 된 대답을 해줄지 말지는 내 자율세.”
그 말에 서문경은 한 동안 아무 말도 없이 빤히 조원의 얼굴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전부는 무리겠지만.” 그러다 문득 서문경이 입을 열었다. “어느 정도는 진실을 말해 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째서?”
그 물음에 서문경은 잠시 침묵하며 적당한 표현을 골랐다. 이윽고 서문경이 입을 열었다.
“당신을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래, 처음 봤을 때부터. “당신이 뭔가 제게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요.”
“내가 자네에게?”
우습다는 듯 조원의 말끝에 픽 웃는 소리가 섞였다. 그러나 서문경은 그것에 발칵 화를 내는 대신 눈을 살짝 내리깔고, 제멋대로 자란 손톱 끝으로 날렵한 턱 끝을 살살 긁적였다. 사실 서문경은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이나 감정 따위에 민감한 편이었다. 악의(惡意)에도 물론 그렇지만 그가 악의보다 더 민감하게 느끼는 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제가 어떤 특정한 행동을 하길 바라는 듯한데···.”
아냐. 이게 아니라 좀 더···. 서문경은 자신이 표현을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난감해했지만 그 잘못된 표현이 조원에게는 뜻밖에 가 닿았던 모양이었다.
“특정한 행동이라.”
‘어떤?’, 팔짱을 끼고 등을 등받이에 기댄, 다소 방만한 자세로 앉은 조원이 고개를 까닥이며 물었다.
“그것까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적기를 놓치고 표현을 고치는 것을 포기한 서문경이 조원의 말에 솔직하게 대답하자 조원이 하하, 하고 소리를 내어 웃었다. 뜻밖의 상황에 유쾌해하는 듯도 하고, 어떻게 들으면 조금 어이없어 하는 것처럼도 들리는 묘한 웃음소리였다.
“그런데, 그것을 알면서도 나를 찾아왔다?”
“몇 번이나 말해야 합니까?” 서문경이 뾰족하게 되물었다. “저는 이 나라에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궁금한 점을 물을 만한 사람은 더더욱 없지요.”
“하지만 나는 무슨 꿍꿍이속을 가지고 있는 지도 모를 인간이 아닌가? 찜찜하지도 않은가?”
“방법이 없으니 그 정도 불안은 감안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원하는 바가 있는 상황인 만큼, 어둠 속에서 뒤를 캐면서 조종할 생각 말고 이왕이면 햇빛 아래서 적극적으로 일해보자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제게도 콩고물을. 하며 서문경이 손을 벌리는 시늉을 해보였다.
“하.”
서문경의 뻔뻔한 요구에 기가 막힌 듯 조원이 낸 헛바람 소리가 얼마 지나지 않아 호탕한 웃음소리로 변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정신이 나가기라도 했나. 서문경이 배를 잡고 웃는 조원의 머리꼭지를 못마땅한 눈으로 흘겨보며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겨우 웃음을 멈추고 허리를 펴던 조원이 철없는 요즘 젊은이들을 한심해하는 노인네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서문경을 보고 다시 한 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좋네.”
저걸 패서라도 웃음을 그치게 해야 할까. 서문경이 곰곰이 고민하기 시작할 무렵 겨우 웃음을 그친 조원이 눈꼬리에 배어나온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치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묻고 싶은 말이 있다면 마음껏 묻도록 하게나.”
“···무슨 바람이 불어 갑자기 태도가 변하셨습니까?”
“이런, 대답해 준다고 해도 불만인가, 자네는?”
“불만이 아니라.”
“어차피 내가 대답하고자 하는 것만 답하고, 숨기고 싶은 것은 숨길 터이니 부담 가지지 말게나.”
아, 하고 얼굴을 구긴 서문경이 탄성인지 이기죽거리는 것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빈정거리는 건가, 아니면 감탄하는 건가?’, 서문경이 느끼고 있는 감정이 어느 쪽인지 조원 또한 애매하다 싶었는지, 조원이 장난기로 눈을 반짝이며 넌지시 물었다. 그 물음에 서문경이 한 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당연히 빈정거리는 겁니다.
“하지만 다행이군요. 안심이 됩니다.”
“안심이 된다? 어째서?”
“당신이 갑자기 제게 조건 없는 호의를 가지게 되어 그런 말을 한 거라면 그건 또 나름대로 무서우니까요.”
당신은 적당히 교활하고, 적당히 의뭉스럽게 행동해 주시면 됩니다. 서문경이 일부러 심술궂게 내뱉은 말에 조원이 언짢아하기는커녕 대단히 달가워하며 서문경의 말을 받았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그래, 일단. 태황태후와 엄씨 일가가 폐하를 마뜩찮아 하는 이유는 뭐랍니까?”
“태황태후가 폐하를 마뜩찮아 하는 이유는 뻔하지 않은가.”
“용의 증후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서문경이 두 번 생각해 보지도 않고 대답하자 조원이 휙, 휘파람을 한 번 불었다. 그 경박한 행동에 서문경이 이맛살을 구기고 있으려니, 조원이 빙그레 웃으며 들으란 듯이 중얼거렸다. 폐하께 들었나 보지?
“정확히 말하면 용의 증후가 나타나지 않은 황자시기 때문이지.”
무슨 말인가 싶어 서문경이 입을 다물고 있으려니 모르겠나?, 하고 조원이 능글맞은 투로 서문경의 속을 들쑤셨다. 그렇지 않아도 잔뜩 신경질이 나 있던 서문경이 아, 적당히 좀 하십쇼, 하고 짜증을 내다가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에 멈칫했다.
“혹시···.”
서문경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조원이 격려하듯 턱 끝을 끄덕였지만 해서는 안 되는 말을 억지로 하고 있는 것처럼 입술이 굳어서 잘 움직이지 않았다.
“용의 증후도 나타나지 않은 황족인 주제에, 정통한 황제의 피를 이은 황자이기 때문입니까.”
“맞네.”
“황제의 아드님이 아니셨으면, 용의 증후가 나타난 자로 하여금 황통을 잇게 할 수 있었을 것을, 능력도 없이 자격만을 갖추고 태어나···.”
차마 더 말을 이을 생각이 들지 않는지 서문경이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러자 조원이 나서 서문경에 차마 하지 못한 말을 마무리 지었다.
“일을 번거롭게 만들었기 때문에.”
“하.”
짜증이 머리 꼭대기까지 솟구쳐 오르니 고함을 지르기보다는 도리어 웃음이 나왔다. 하, 하하, 눈도 입술도 전혀 미소 짓지 않은 채 입으로만 바람 새는 듯한 웃음소리를 내고 있던 서문경이 다음 순간 돌변해서 북 이를 갈아 붙였다.
“미쳤군.”
다른 이가 들으면 앉은 자리에서 목이 베여도 할 말이 없을 만한 말을 지껄이는 서문경을 향해 조원이 웃으며, 제 입술 위에 한 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쉬, 하고 어르는 듯한 바람 소리를 들은 서문경이 눈썹을 찌푸렸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또 무슨 같잖은 이유랍니까?”
서문경이 아예 경멸하는 기색을 숨기지도 않고 빈정거리는 투로 물었다. 혹시 하는 마음에 충고를 해 주어도 성난 기색을 숨기지 않는 서문경을 보고 어깨를 한 번 으쓱한 조원이 서문경의 물음에 대답해 주었다.
“효강의 부친이자 엄 수경궁 마마의 숙부 되시는 태본 엄유 어르신께서 황제를 저어하시는 것은, 그 어르신의 경박부허(輕薄浮虛)한 성미답게 자신의 귀하신 누님과 존경하는 형님께서 황상을 꺼리기 때문이지.”
“또?”
“또 수경궁 마마의 부친 되시는 엄충 어르신이 폐하를 못마땅해 하시는 이유는 바로 폐하께서 그 가연황제의 핏줄이기 때문이고.”
제안의 부친이자 선제인 가연제의 이름을 들은 서문경이 가장 먼저 고개를 까닥이며 ‘그 작자는 또 무엇을 했기에.’하고 생각한 다음, 다시 반대편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저 말은 폐하의 외조부도 살아 있다는 말이군.
그러나 이윽고 또 ‘하지만 살아 있어봐야 도움도 안 되니 없느니만 못하군.’하고 다소 난폭한 말을 중얼거린 서문경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고 조원을 향해 두 눈을 가늘게 떠 보였다. 조원이 물었다.
“왜 그러나.”
“엄충이 가연 황제를 왜 시퉁하게 여기는지 물으면, 알려주실 겁니까?”
“아니.”
조원이 딱 잘라 거절하자, 서문경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을 본 조원이 오해하지 말라며 고개를 휘휘 젓는다.
“심술부리는 것이 아니라, 그 이유까지는 나도 모르네.”
나 또한 황궐에서는 한낱 객에 불과한 것을. 조원이 덧붙인 말에 서문경이 채 의심스러워하는 기색을 지우지 못하면서도 결국 납득한 척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그 남자, 효강, 아니, 엄헌영이라는 자와는 어느 정도 친분이 있으셨으니 왜 그 치가 폐하를 못 마땅해 하는지는 아시겠지요?”
“친분?”
서문경의 말에 조원이 크게 웃었다.
“그 치가 하는 꼴을 보고도 나와 그 자가 친분이 있다 여길 수 있다니, 자네, 생각보다 화통한 사람이었군. 허나 기대를 배반하여 미안하네만 그 이와 그렇다 할 친분은 없네. 그저 그 분이 창혜각에 자주 드나드시니 말문만 트고 지내는 것이지.”
그 말에 서문경은 효강 엄헌영이 조원에 대해 지껄여대던 험담을 새삼스레 떠올렸지만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달랐습니다. 그 사람 말입니다. 당신에 대해서 말할 때와, 폐하께 적의를 드러낼 때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서문경의 목소리는 조금 우울했다.
“당신을 헐뜯을 때와, 폐하를 입에 담았을 때는 태도도, 어조와 목소리도 확연히 달랐습니다. 당신 때와는 달리, 폐하를 입에 담았을 때의 그 작자는 마치 성난 호랑이와 같았지요.”
하고 말한 서문경은 금방 자신이 한 비유 때문에 범님이 만난 세계라는 자신의 본 세계가 생각나 더욱 더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덮친 그 너울파도 소리를 닮은 바람소리부터 시작해서, 여러 모로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이었다, 이 창혜각은.
“그 자가 폐하를 증오하는 이유도 제 아비와 같습니까.”
더 이상 본래의 세계에 대한 생각을 해 봐야 우울해지기만 할 뿐이라, 서문경이 서둘러 물었다. 때 맞춰 불어온 바람 소리를 들으며 조원이 대꾸했다.
“그건, 지금은 비밀로 해 두지.”
그 말에 서문경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다른 것을 묻지요.”
“그러시게.”
선뜻 고개를 끄덕이는 조원을 서문경이 뚫어질 듯 응시했다.
“폐하와는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십니까?”
그 말에 조원이 씩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리며 서문경의 이마를 살짝 밀었다.
“그것도 아직은 비밀로 해 두지.”
서문경이 입을 다물고 물끄러미 조원을 응시했다. ‘왜 그러나?’, 조원이 묻자 서문경이 진지하게 대꾸했다. 여기 온 이후로 자주 사람을 때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어이쿠. 때리시려고.”
“아니요. 때리고 싶은 사람은 폐하고 당신은 목을 한 번 졸라보면 마음이 편해질 것 같네요.
“······.”
“그럼, 폐하께 그 곰 같은 장군의 종질녀를 보낸 것도 당신입니까?”
“곰 같은?”
서문경의 두서없는 설명에 조원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곧 누군지 알겠다며 빙그레 웃었다. 근장상장군 교혁경 말이로군.
“반주의 종질녀를 내가 무슨 수로 움직이나? 힘을 쓰신 것은 수상 어르신이지.”
“그를 부추긴 것은 당신 아닙니까?”
서문경의 날카로운 추궁에 이번에 조원은 반박하지 않았다.
“용케 알았군.”
“누구를 바보로 압니까.”
서문경이 쏘아 붙이듯 말하고, 말투만큼 뾰족한 눈초리로 조원을 노려보았다.
“폐하께서는 그것이 저 때문이라 하시던데, 사실입니까.”
“흐음.”
실눈을 뜬 조원이 의뭉스레 눈웃음을 쳤다. 그 능구렁이 같은 얼굴을 보고 서문경이 다시금 저 놈의 목을 붙잡고 짤짤 흔들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리는데, 조원이 히죽 이번에는 장난기 많은 사내애처럼 웃어보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지.”
그 애매하기 짝이 없는 대꾸에 서문경이 발칵 역정을 내려다, 곧 자신이 화를 내봐야 조원이 제대로 된 답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대신 긴 한숨을 쉬었다.
“그런 짓을 부추기는 당신이나 또 당신이 들쑤신다고 대뜸 그런 짓거리를 하는 수상이나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요.”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이로 치자면 자네 곁에 계시는 그 분만한 이가 또 있겠나?”
조원이 지나가듯 흘린 말에 서문경이 예?, 하고 반문할 찰나였다.
“그나저나 곧 교방(敎坊) 대연회(大宴會)가 열리겠군.”
자리에서 일어선 조원이 격자 장식을 붙인 창가로 다가갔다. 갑자기 화제를 돌린 것에 의구심을 느낀 서문경이 방금 전 한 말이 무슨 말이냐 캐물으려다가 대신 교방 대연회가 무엇이냐 물었다. 어쩐지 물어봐야 대답해 주지 않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조원이 설명했다.
“다른 말로 내춘(來春) 대연회라고도 하지. 혹독한 겨울이 가고 봄이 오기를 바라며 궁중에서 여는 내연(內宴)인데 높게는 황상과 태황태후 폐하에서부터 낮게는 3성 12부 관부(官府)에 이르기까지 황궁의 어른들과 각부를 대표하는 재주꾼들을 연회에 내보내 서로 재주를 겨루는 연횔세.”
하고 말하며 조원이 창밖으로 자유롭게 오가는 색색깔의 승교(乘轎: 가마)들을 눈짓했다.
“황궐 내에 감히 어염집 사람들과 가마가 오가는 것도 그 때문이지.”
“···그런데 그게 지금 상황과 무슨 상관입니까.”
왜인지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져 서문경이 묻자 조원이 대답을 해주기는커녕 도리어 반문했다.
“황상께서 따로 말씀이 없으셨나?”
“무엇을요.”
“황상께서는 아직 어떤 이를 경연(慶宴)에 내보내실지 성의(聖意)를 밝히지 않으셨네.”
그렇게 말하는 조원의 눈이 말끄러미 서문경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자신을 볼 때마다 힘은 좀 안정이 되었냐느니, 뭐 새로이 익힌 재주는 없냐느니 물어대던 황제가 불현듯 생각나 서문경이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