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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때문이다.”
황제의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린 채 한 동안 말이 없던 서문경이 불쑥 중얼거렸다.
“무어라?”
“아니, 폐하께 하는 말이 아니라 이 세계에 와서 유독 그런 어감의 말을 많이 들은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젠장, 개나 소나 전부 내 탓이래.”
말하다 말고 울컥한 서문경이 음산하게 투덜거린 말을 듣고 황제가 흐음, 의미심장한 신음을 흘리면서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 개나 소란 놈이 짐이냐?”
“안 그래도 심란한데 폐하까지 이러시깁니까.” 무슨 말을 한량없이 꼬아서 들으십니까? 하며 서문경이 짜증을 냈다. “또 그 개나 소란 놈이 누구인지는 제가 아니라 폐하가 더 잘 아실 텐데요.”
그렇게 내뱉고서, 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진주와 옥을 불길이 이는 눈으로 노려보고 있던 서문경이 불현듯 물었다.
“수상입니까, 조원입니까? 그 사람들 외엔 생각할 수가 없는데요.”
“글쎄다.”
일부러 서문경의 애를 태우려는 듯 황제가 느릿하게 대꾸했다.
“부추긴 것은 후자(後者)겠고, 그 부추김에 못 이긴 척 넘어간 놈은 전자겠지.”
“그러니까 그 자들은 저를 뭐라고 생각하고.”
성급하게 입을 열었던 서문경이 문득 밀려들어오는 생각들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알 수 없었는지 갑자기 입을 다물고 눈살을 구겼다.
“뭐겠나. 그대를 짐의 총첩(寵妾)정도로 생각하고 있겠지.”
복잡하게 생각이 엉킨 상태인 서문경을 도와주려는 의도였는지 황제가 드물게 부드러운 투로 말했다. 그러나 황제의 드문 호의에 서문경은 감읍해하는 대신 있는 대로 인상을 구기고는 두 팔로 제 몸을 끌어안고 부르르 떨었다.
“그, 같은 말이라도 그런 표현은 좀.”
“그럼 무어라 해야 하누?”
못 들은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치를 떠는 서문경을 곱지 않은 눈초리로 흘겨보며 황제가 툭 던지듯 물었다. 아, 서문경이 난감한 듯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윽고 답지 않게 열없는 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지나치게 직접적이지 않고 은근한 표현 많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그렇고 그런 사이···.”
하고 말하다가 이건 스스로 생각해도 아니다 싶었는지 서문경이 앓는 신음을 흘리며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러다가 서문경이 본 이야기로 얼른 돌아가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는지 아니면 이 불편한 화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의도에서였는지 갑자기 목을 길게 빼고 빽 고함을 질렀다.
“그런데 그 자들이 범인이라면, 도대체 무슨 생각이랍니까?! 어제 제가 직접 저와 폐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다 해명한 것을 들었을 텐데요!”
“무어.”
황제가 건성으로 대꾸하며 도로 자리에 누워버렸다.
“그대의 말을 믿지 않았다는 소리지.”
서문경이 뒤통수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망연한 표정으로 굳었다.
“제, 제가 그렇게까지 말했었는데도?”
“그대 말이 미덥지 못했던 모양이지.”
황제가 심드렁하게 대답하면서 서문경에게 곱지 않는 눈길을 던졌다.
“아니면 그대 자체가 미덥지 못했거나.”
“제 어디가!”
서문경이 버럭 화를 내다가 문득 자신을 쳐다보는 황제의 눈길에 뾰족뾰족한 가시가 돋아 있는 것을 깨닫고 멈칫했다. 서문경이 슥 실눈을 뜨고 황제의 부루퉁한 표정을 찬찬히 살피다가 물었다.
“뭐가 또 못마땅하십니까.”
“무슨 말이냐.”
짐은 모른다, 하고 황제가 아예 서문경에게서 등을 돌리고 누웠다. 그 등을 서문경이 못마땅한 눈으로 노려보다가 결국 한숨을 쉬며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황제의 마른 등에 두 손을 올렸다.
“왜 그러십니까, 진짜.”
안 그래도 머리 아픈데 폐하까지 이러시깁니까, 서문경이 달래는 것인지 하소연하는 것인지 모를 말을 입 속으로 중얼거리며 황제의 등을 살짝 흔들었다.
“그대는 말이다.”
서문경이 아무리 등을 흔들며 말을 걸어도 대꾸 한 마디 없던 황제가 어느 순간 획 몸을 돌리며 말했다. 황제의 기세에 놀란 서문경이 주춤, 몸을 뒤로 밀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게 짐과 묶이는 것이 못마땅한가?”
“예?”
의외의 말에 서문경의 콧잔등이 왈칵 구겨졌다. 오글오글 주름이 잡힌 서문경의 미간에 황제의 손가락 하나가 툭 내려와 앉았다. 그것에 서문경이 어?, 하고 눈을 휘둥그레 뜨는데, 황제는 그것이 마치 익숙한 일이기라도 한 것처럼 손가락을 문질러 서문경의 미간에 잡힌 주름을 펴면서 말을 이었다.
“짐의 총첩이란 말을 듣는 것이 그리도 싫으냔 말이다.”
잔뜩 심통 난 품새로 말하는 꼴이, 아무래도 조원에게 궐내에 도는 소문을 전해 듣자마자 서문경이 질색을 했던 것이 못내 못마땅했던 모양이었다.
“아니, 전.” 황제의 난데없는 추궁에 당황한 서문경이 어름적거리며 연신 고개를 휘저었다. “아니, 그런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짐과 한데 얽히는 것이 께름칙한 것이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노여워할 이유가 무어 있느냐.”
“그것이 아닙니다. 그저.”
잔뜩 독이 오른 황제를 어떻게 얼러야 할까 고뇌하면서 서문경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그, 수상이 왔을 때도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제가 사는 세계에서는,”
“변명하지 말거라.”
겨우 서문경이 변명할 말을 생각하고 입을 열었을 때, 채 본론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황제의 단호한 목소리가 서문경의 말허리를 끊었다.
“어떤 식으로든 짐과 내뺄 수 없는 관계로 못 박히는 것이 싫은 게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네가 짐을 그렇게 몰아가고 있지 않으냐.”
황제의 이유 모를 짜증에 덩달아 화가 난 서문경이 다소 날카로워진 목소리로 말하자, 황제가 그런 서문경을 똑바로 노려보면서 가랬다. 한 치 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온 감에(憾?)에 서문경이 움찔하는데, 그것을 어딘가 마음이 찔리는 구석이 있어 머뭇거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황제의 서슬이 한층 더 시퍼레졌다.
“짐이 부끄러우냐?”
“새삼스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무어라? 새삼스레?”
“아니, 그게 아니라.”
“간솔히 털어 놓거라. 짐이 지겨워진 것이 아니냐!”
“만난 지 얼마 되었다고 벌써 지겨워지긴 뭘 지겨워집니까!”
기가 막혀 서문경이 빽 내지른 소리에 황제가 눈시울을 크게 치떴다. 잡아먹을 듯 매섭게 치켜뜬 황제의 눈에 응시당한 서문경은 순간적으로 움찔해서 뭡니까, 하고 중얼거리며 상반신을 뒤로 밀었다. 슬슬 엉덩이를 뒤로 밀어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서문경의 손목을 매가 먹잇감을 잡아채듯 황제의 손이 낚아챘다.
“경아.”
억지로 끌어 서문경을 자신의 옆자리에 눕힌 황제가 속삭였다.
“하지 마라.”
“폐하?”
“그렇게 짐과 얽히는 것을 질색하지 말거라.”
서문경의 등과 목에 차례로 황제의 팔이 감겼다. 황제가 힘을 주어 자신을 끌어당기는 것을 느낀 서문경이 반사적으로 몸을 바르작거리는데, 그 때 황제가 서문경의 귀에 자신의 입술을 대고 속살거렸다.
“짐의 곁에 있어라.”
그대의 몸에 오색실로 수놓은 능라(綾羅)와 비단(緋緞)을 폭포처럼 둘러 주고 그대의 목에 호박(호박)과 색색가지 옥돌과 진주와 찬석(鑽石: 금강석)을 엮어 만든 수파(首?)를 걸어 주겠다. 호박을 단 각향노리개와 옥돌을 갈아 만든 구슬과 산호 구슬을 물린 연봉잠과 금비녀 은비녀를 커다란 상자 가득 넣고 봉등을 단 방에 주단으로 꾸민 방에 넣어 주겠다, 아니, 금은보패와 주단과 칠보로 장식된 궁을 주겠다. 황제가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로 서문경을 살살 꾀었다.
끝도 없이 늘어지는 온갖 보석들의 이름과 장신구들의 이름을 들으면서 서문경은 대꾸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눈썹만 찌푸렸다. 현재 황제가 궁전이니 뭐니 하는 것을 내릴 힘도 없는 처지인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같은 사내를 무슨 비녀니 노리개니 비단옷이니 하는 것으로 꾀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그 점을 톡 쏘아 붙일 수 없었던 것은, 자신의 목을 끌어안고 속삭이는 황제의 목소리가 왜인지 무척이나 애달프게 느껴진 탓이었다.
“경아 너는, ···다른 치들과는 다르지 않으냐. 그러니 그렇게 뿔내지 말거라.”
“······.”
이거 원, 하고 서문경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제가 질색한 이유는 절대로 폐하가 싫어서가 아닙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서문경이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면서 황제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저 저와 폐하는 같은 남자이고,”
“그 말은 말라고 했느니.”
최대한 조심스럽게 한 말이었는데 오히려 그 말이 황제의 심기를 거슬린 모양이었다. 단박에 황제의 목소리가 싸늘해지자 서문경이 젠장, 하고 이를 악물었다.
“다 변명이다. 다 변명 아니냐.”
“폐하,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른 치들과 똑같이 말하지 말래두!”
“저는···, 아니, 아니, 됐습니다.”
서문경이 탈력하여 더 이상 변명할 기력도 잃어버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 하겠습니다. 이젠 그러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폐하께서도 안심하십시오.”
서문경이 한숨을 섞어 중얼거리자, 황제가 염탐하듯 빠끔 눈만 치뜨고 서문경을 보았다. 그 모습이 또 묘하게 애처로워서 서문경이 황제의 머리 위에서 두 손바닥을 마주 댔다 다시 폈다. 그것을 몇 번 반복하자 노란 빛이 도는 부리를 벌리고 빽빽거리는 검은 병아리들이 황제의 이마와 귀 옆에 가득해졌다. 그림과 조각으로밖에 보지 못한 검은 병아리를 만들어내느라 실수로 여기저기 생긴 까마귀와 까치들이 깍깍, 발톱을 세운 채 우짖고 탐욕스런 까마귀 몇몇이 칠보탁상을 제 부리로 찧고 있는 가운데 그 소란스러움이 의외로 기꺼운 듯 황제가 킬킬 마른기침 소리가 섞인 웃음을 흘렸다.
그러다 문득 황제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열심히 쪼고 있는 까마귀 한 마리를 손등으로 밀면서 서문경의 이름을 불렀다.
“경아.”
“예.”
“어떠냐. ‘힘’은 대충 안정되어 가는 것 같으냐?”
“예? 그렇지요. 제법 익숙해 졌습니다. 아무래도 청의관에서는 할 일이 이것 밖에 없으니까요. 그래도 종종 실수를 하긴 하지만···.”
실수, 하는 부분에서 막 자신을 쪼아대는 까마귀와 까치를 쫓아내면서 서문경이 착실하게 대답했다.
“헌데, 이전에는 발탈이나 가면극 같은 것들을 즐겨 보았더냐?”
“글쎄요.” 이전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일단 기분이 가라앉는 서문경이 미간을 구기면서 중얼거렸다. “기억에 있는 것을 보니, 그리 즐겨 보진 않았던 것 같지만···, 일단 기억은 납니다.”
“그러냐. 그럼 되었다.”
“뭐가 말입니까?”
서문경에게 질문을 던지던 황제가 갑자기 씩 웃으며 말했다. 영문을 알 수 없어 고개만 갸웃거리는 서문경의 뒷머리를 황제가 살살 매만졌다. ‘경아.’, 그러다 황제가 갑자기 서문경의 목을 두 팔로 힘껏 껴안았다. 갑작스런 상황에 서문경의 몸이 돌처럼 굳었다.
“경아, 경아. 우리 깜둥새.”
“폐하?!”
“우리 경이는 그리하면 안 된다. 너는 그리하면 아니 돼.”
힘껏 서문경의 목을 끌어안은 황제가 지척에 있는 서문경의 귀에도 잘 들리지 않는 혼잣말을 입 속에서 중얼거렸다.
“경이 너는 그처럼 그리해선 아니 된다.”
“예? 무슨 말씀을,”
하고 떨떠름하게 대꾸하던 서문경의 머릿속에 휙 조원의 웃는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가슴 속에 다시금 울렁거리는 기묘한 기분에 서문경이 이맛살을 찌푸리고 입술을 꽉 앙다물었다.
“···예.”
괜히 머릿속이 복잡해져 서문경이 그렇게 대답하고 말자, 황제가 그제야 만족해서 빙긋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래, 앞으로는 짐 앞에서 짐과의 관계를 부정치 말거라.”
“···예에.”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서문경은 생각했지만 곧 또 저 고집 센 황제와 대거리를 주고받기가 귀찮아져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황제 앞에서만 어떻게든 입조심하면 되겠지.
“그런데 열은 좀 내리신 모양입니다?”
대충 마음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서문경이 황제의 이마에 손을 짚어 보면서 생각했다. 오늘은 아무래도 그른 것 같으니, 기필코 내일은 은밀히 조원을 찾아가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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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너무 똘똘한 것 보다는 조금 멍청한 쪽이 어리롭다더니.”
한 쪽 다리를 세우고 앉아 말끄러미 서문경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던 제안이 불현듯이 중얼거렸다.
서문경은 정비전 우두머리 상궁이 시간을 맞춰 올린 낮것상(: 점심)을 꼬물꼬물 집어먹고 태감 봉승이 내온 차까지 마신 다음 부른 배를 안고 깜빡 잠이 든 참이었다. 불뚝 부른 뱃속이 부담스러운지 서문경이 으음, 신경질적인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모로 돌렸다. 서문경에게 진귀한 짐승이라도 구경하는 것 같은 눈초리를 던지고 있던 제안이 두연 손을 뻗어 서문경의 미간에 잡혀 있는 주름을 펴 주었다.
“헛똑똑이군, 헛똑똑이야.”
서문경의 미간을 살살 문지르며 제안이 킬킬 탁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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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장상장군 교혁경과 교혁경의 종질녀 교운이 다녀간 후, 그들에 대해 잠시간 담소를 나누고 나니 벌써 낮것(: 점심) 때였다.
-폐하, 수라 진어(進御: 왕이 먹고 입는 일을 높여 이름)하시옵소서.
사내치고 어딘가 간드러진 감이 있는 내관의 목소리에 서문경과 황제 사이의 대화가 잠시 끊겼다. 그 틈을 타 무례하게도 장지문을 활짝 연 여관들이 둘씩 짝을 지어 주칠(朱漆)한 대소원반을 침실 안으로 들이기 시작했다.
-검사는요?
뜨끈하게 데운 온돌방에 부산히 어선(御膳: 왕에게 올리는 음식)을 들여오는 여관들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서문경이 갑자기 여관들 사이에 유일하게 섞여 있는 사내를 똑바로 쏘아보며 물었다. 똑바로 사내를 쳐다보며 묻는 목소리가 방울 굴러가는 소리라도 날 것처럼 또랑또랑했다.
두꺼비를 닮은 투박한 생김새의 사내는 바로 태감(太監: 내시감) 봉승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황제의 침실에 들어 있던 물손님이 난데없이 쏘아붙인 말에 당황한 태감 봉승이 우물거리고 있는 사이, 서문경의 시선이 낮것상(: 점심)을 차리고 있던 여관들에게로 옮겨갔다. 온면과 편육, 전유어와 동치미 등이 올라간 간단한 장국상을 차리고, 그 옆의 소원반에 은제 잎수저 한 벌, 상아 젓가락과 양사시 한 벌 등을 올리고 있던 여관들의 등이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폐하께서는 본디부터 검식(檢食)을 저어하시는 터라···.
-애가 아무리 야채를 싫어해도 몸에 좋은 거면 먹여야지요. 떼쓴다고 그걸 다 받아 주시면 어떻게 합니까?
걔 중 연재 화연이 나서서 변명하자, 서문경이 당장 칼 같은 물음을 황제를 향해 던졌다. 마치 자신에게 하는 물음인 것처럼 가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 물음이 태감과 상궁들을 향한 질타라는 것을 뻔히 아는 황제 제안이 마른기침 섞인 웃음을 보란 듯이 흘렸다.
-손에게도 상을 내어 드리고 물러가라.
-하오나 폐하.
지존과 한 공간에서 어선을 함께 들 수 있는 자는 태후와 황후, 혹은 황친과 일부 외척 등 충분한 지위와 혈통을 갖춘 자에 한한다. 그러한 법규를 떠올린 태감 봉승이 반사적으로 반박하자, 황제가 곧바로 책상반 위에 놓여 있던 비아통(: 뼈그릇)을 태감의 머리에 던졌다. 태감이 비아통에 맞은 자리를 움켜쥐고 비명을 질렀다.
-폐, 폐하!
-네 놈이 지금 짐의 말에 토를 다는 게냐.
황제가 싸늘한 눈초리로 봉승을 노려보며 으름장을 놓았다, ‘네 놈이 정녕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무엇하고 있느냐. 짐이 두 번이나 똑같은 말을 해야 할까.
-화, 황명 받들겠나이다.
‘새 상을 내어 오거라, 어서!’, 무쇠 그릇에 맞아 피가 흐르는 머리통을 움켜잡고 태감이 거의 비명처럼 들리는 지시를 여관들에게 내렸다.
-성질 한 번 참.
여관들이 새 상을 내어 방의 서쪽에 차려 놓고 황급히 사라졌다. 태감처럼 머리로 무쇠 그릇을 받아야하는 처지가 될까 기겁한 여관들이 기미상궁도, 황제의 시중을 들 태감도 남겨 두지 않고 우르르 사라지자 서문경이 아연한 얼굴로 그들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문득 혀를 찼다.
-그 말은 짐에게 하는 말이냐?
-그럼 누구에게 하는 말이겠습니까?
-허. 저들도 내심은 기쁠 것인데 무슨 말이더냐. 네 뾰족한 말화살에 화살받이 신세가 되느니 이만 물러가 보는 것이 낫지.
-폐하, 잠시.
황제의 같잖지도 않은 변명을 아예 못 들은 척 하고 서문경이 황제의 상 앞으로 다가갔다.
-뭘 하는 게냐?
-아니,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 말입니다.
서문경이 의심스런 눈으로 대원반 위의 음식들을 둘레둘레 살펴보다 어디선 주워들은 것이라도 있는지 갑자기 음식 하나하나를 은시저로 쿡쿡 찔러보았다. 그 꼴이 마치 어른 흉내를 내는 꼬마둥이처럼 진지한데도 몹시 어설퍼서 황제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심술궂은 웃음을 흘렸다. 그것을 비웃음이라고 생각했는지 바로 이맛살을 찌푸린 서문경이, 더운 국에 퐁당 담갔던 은수저를 획 거두고 자신에게 주어진 상 앞에 털썩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그렇다 쳐도, 기미 드는 상궁은 왜 물리신 겁니까?
한참을 제 분에 못 이겨 씩씩거리던 서문경이 겨우 입을 여는가 싶더니, 그렇게 물었다. 당장 왜 사람을 비웃는 거냐, 따지고 들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던 황제가 으응?, 의아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모로 기웃했다. 그 기색을 눈치 챈 서문경이 부루퉁하게 덧붙였다, ‘그것도 지금 대답을 듣고 나면 빼먹지 않고 따질 겁니다.’
-그대와 오붓이 있고 싶어서 그랬지.
서문경이 잠시 침묵하다 물었다.
-농담이시지요?
‘제발 농담이라고 말해.’, 하고 눈빛으로 호소하고 있는 서문경을 흘낏 보고 황제가 시선을 돌렸다. 그것을 보고 방금 황제가 둘이서 오붓이 운운한 헛소리가 어쩌면 진심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서문경이 두 팔로 제 몸을 끌어안고 파르르 떨었다. 하던 말을 계속해야 할까 아니면 화제를 바꿔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서문경이 결국 말을 돌렸다.
-그런데 이거, 정말 먹어도 괜찮은 겁니까?
바삭하게 구운 전유어가 아예 그물이 되도록 은젓가락으로 쑤셔 놓고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서문경이 뱁새눈을 뜨고 원반 위를 노려보았다.
-죽지는 않겠지.
황제가 불안하기 짝이 없는 말을 툭 내뱉고서 청백자 숟가락을 들었다, ‘짐을 보면 알지 않느냐.’ 황제가 덧붙인 말에 서문경의 표정이 안심하기는커녕 더욱 더 떨떠름해졌다.
-폐하, 잠시만.
무릎걸음으로 슬슬 다가간 서문경이 가져간 잎숟가락으로 유기에 담긴 감주를 한 입 홀짝 마셨다. 의심으로 희번덕한 눈을 해가지고 다가온 주제에 감주를 한 모금 마셔 보더니 의외로 그것이 입에 맞는 듯 단번에 두 눈이 동그래진 서문경을 빤히 쳐다보다 황제가 감주 단지를 서문경에게 내밀었다.
-그대가 들라.
-괜찮으시겠습니까?
이거 정말 맛있는데. 혹여 음식에 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독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린 서문경이 눈을 반짝였다.
-괜찮겠지.
먹을 먹인 듯 유난히 까만 눈으로 서문경을 응시하던 황제가 문득 웃으면서 말했다. 서문경은 황제의 대답이 어딘가 의뭉스러운 느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잠시, 이윽고 그는 그 느낌을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렸다.
-이곳에 온 이후 제가 무척 예민해진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하나같이 입 속에는 꿀을 품고 뱃속에 칼을 감추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일까요. 은근한 단맛이 도는 단술을 게 눈 감추듯 한 단지나 먹어 치워버린 서문경이 폭 한숨을 쉬며 탄식했다. 그 말에 황제가 너그러운 척 웃으며 대꾸했다, ‘그럴 만도 하지.’
감주를 모조리 먹어 치우고 나자 그제야 본격적으로 입맛이 도는지 서문경은 은수저로 여기저기 구멍을 내 놓은 음식들을 한 입 두 입 조심스레 베어 먹어 보더니, 결국 제 상 위에 올라간 음식들을 모조리 먹어 치우고 황제의 음식까지 탐한 뒤에야 부른 배를 두드리며 상 앞에서 물러났다. ‘걸신이라도 들린 게야?’, 마른 몸이 무색하게 음식들을 죄다 제 뱃속으로 쓸어 담아버린 서문경을 조금 질린 눈으로 바라보며 황제가 타박하자 서문경이 흥, 하고 콧방귀를 꼈다.
-다 폐하의 신하들이 엉큼해서 생긴 일 아닙니까?
-무어라?
-식사랍시고 매번 도라지니 연근이니 하는 풀떼기에 생선 좀 푼 물을 던져주는 것이 고작이니 제가 굶주리지 않게 생겼습니까.
암팡지게 대꾸한 서문경이 후우, 부른 배를 문지르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갑자기 불린 배가 서문경 자신도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졸리냐.
황제가 이윽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서문경을 보고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서문경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평소와는 달리 높임말인지 반말인지도 모를 말을 중얼대는 꼴을 보아하니 반쯤은 잠에 취한 것이 확실했다.
-이만 처소로 돌아가 봐야겠습니다.
기분 좋게 따뜻한 바닥에 앉아 자신도 모르게 졸고 있던 서문경이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던지 손을 저으며 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목을 끌어 서문경을 억지로 제 앞에 앉힌 황제가 살살 서문경을 꾀었다.
-잠시 눈 좀 붙이겠느냐.
-하지만···.
-아직 해가 중천이니 짐의 침전에서 오수(: 낮잠)를 즐긴들 무어 어떨까.
그 말에 서문경이 황제를 올려다보며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렸다. 나른하게 잠에 취한 눈동자가 느릿하게 굴러가는 모습을 보아하니 황제의 제안이 퍽 그럴듯하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짐이 깨워 주마.
-······.
-청의관으로 가 봐야 좋은 일도 없지 않느냐. 그래, 청의관 소청이 무슨 일론지 천추전까지 와서 봉승과 수군덕거리다 청의관으로 돌아간 것을 보기는 했었다만.
-···그럼 잠시만 신세지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자신에게 호기심을 넘어 아주 음흉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소청 재하 원혜에 대한 부담감과 몰려오는 졸음을 결국 참지 못한 서문경이 황제의 꾐에 넘어가 그렇게 말했다. ‘잘 생각하였다.’, 그 말에 황제가 사르륵 녹아들 듯한 눈웃음을 치며 자신의 옆자리를 서문경에게 내어 주었다. 그러나 서문경은 아무리 그래도 황제의 옆에서 낮잠을 자는 것은 지나치게 무례하다 싶었는지 쩍 하품을 하면서 한 손을 휘휘 황제에게 저어 보였다.
-잠시만···.
한 시간 뒤에 깨워 주세요, 하는 말만 남기고 해 좋은 날 병아리마냥 꾸벅꾸벅 졸던 서문경이 콜콜 어린애 같은 숨소리를 내며 잠든 것이 불과 십여 분 전의 일이었다.
“헛똑똑이군, 헛똑똑이야.”
곤히 잠든 서문경의 미간을 문지르며 황제가 심술궂게 웃었다.
“그렇게 당하고도 궁인들의 입을 경계하지 않는 게냐. 소청과 청의관 궁인들의 입방정보다 이것을 더 경계 했어야지.”
오뚝 솟아오른 서문경의 콧마루를 살살 잡고 흔들던 황제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말랐지만 훤칠한 몸이 벽에 기댄 채 잠들어 있는 서문경의 몸 얼굴 위에 짙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내일쯤이면 황제와 수객이 초야(初夜)를 치렀다 소문이 날지도 모르겠군.”
입매를 비틀며 그렇게 말한 황제가 한 손으로 서문경의 허리를 감싸고 남은 한 손을 서문경의 무릎 밑에 밀어 넣었다. 십 이 월의 나뭇가지처럼 깡마른 팔에서 나온 것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볍게 서문경을 들어 올린 황제가 서문경의 몸을 자신의 침상 위에 뉘였다. 딱딱한 벽에 기대 있다 푹신한 비단 금침 속에 폭삭 안기니 구름 위를 걷고 있는 기분이라도 들었는지 서문경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사르르 펴졌다.
“이 헛똑똑이야.”
서문경의 옆자리에 모로 누워 서문경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던 황제가 벌써 몇 번이나 중얼거렸던 말을 마치 입버릇처럼 중얼거리다 문득 생각난 것이 있었던지 픽,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곳에 온 이후 유독 예민해진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하나같이 입 속에는 꿀을 품고 뱃속에 칼을 감추고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일까요.’
“입 안에는 꿀을 품고 뱃속에는 칼을 감추고 있다니, 딱 들어맞는 표현이 아니냐.”
‘응?’, 서문경이 잠들기 직전 자신에게 늘어놓았던 한탄을 떠올린 황제가 눈웃음을 치며 손톱 끝으로 서문경의 콧등을 살살 긁었다. 그것을 느꼈는지 있는 대로 얼굴을 찌푸린 서문경이 으음, 짜증 섞인 칭얼거림을 흘렸다. 서문경의 숨결에서 알사탕이라도 삼킨 듯한 아련한 단내가 났다.
“흐음.”
서문경의 콧등을 긁던 황제의 손이 순간 우뚝 멈췄다.
“괜찮을 리가 만무하지.”
서로의 코끝이 닿을 만치 서문경을 향해 고개를 숙인 황제가 속삭였다. 황제의 숨결이 속눈썹을 흔드는 것이 간지러웠는지 서문경이 잠결에 두 손을 휘휘 내저었다.
“경아, 우리 깜둥새.”
서문경의 양 손목을 잡아 그의 양 귀 옆에 찬찬히 내리 누리며 황제가 킬킬거렸다.
“그 감주가 그리 달고 맛나더냐.”
거의 서문경의 몸 위에 올라타다시피 한 황제는 서문경의 귓가에 붙이고 있던 입술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 깜둥새. 영악한 척 해봐야 결국은 헛똑똑이지.”
독이 든 술은 무릇 단 법이란다, 웃음기 섞인 속삭임이 듣는 것만으로도 허리 아래가 찡 울릴 정도로 완염하였다.
으음, 서문경의 입술이 나지막한 신음을 흘리며 달싹이는가 싶더니, 이윽고 서문경의 미간과 이마에 찡그린 주름이 잡히고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던 신음이 앓는 듯한 소리로 변했다. 벌린 입술 틈으로 색색 내뿜기던 달달한 향내 또한 점점 짓뭉개져 단 향기가 사라지는가 싶더니 결국은 쌉쌀한 박하풀 향기로 변질되어 버렸다. 아픈 쥐가 내는 울음소리처럼 가냘픈 허덕임을 내면서 괴로운 듯 도리질을 하는 서문경의 얼굴을 말끄러미 내려다보던 황제가 불현듯이 웃었다.
“괜찮을 게다.”
경아, 하는 말은 다물린 입술 안쪽으로 사라졌다.
서문경의 손에 깍지를 끼고 그것을 머리 옆에 지긋이 짓누르며 황제가 서문경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몇 번이고 입술을 문지르고 아랫입술을 빠는 것을 반복하자, 바싹 말라 있던 서문경의 입술이 타인의 타액으로 촉촉하게 젖었다. 고통으로 벌려진 입술 사이로 뜨거운 혀를 집어 서문경의 입 안을 슥 훑은 황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거 큰일이군.”
황제가 느릿하게 한 손을 들어 올리면서 중얼거렸다. 서문경을 내려다보는 황제의 표정이 평소와는 달리 난감한 듯, 들뜬 듯, 혹은 불안한 듯 무어라고 확실히 이름을 붙이기 힘들 정도로 오묘했다.
“생각보다 훨씬 어여쁜 것이.”
이놈의 깜둥새를 어찌하면 좋을고, 황제가 헛웃음을 섞어 중얼거리는데 그가 서문경을 향해 내민 손에서 후두둑 검푸른 비늘이 돋았다.
“몸을 크게 해칠 정도의 독은 아니다만, 알면서도 굳이 해로운 것을 몸에 돌게 놓아둘 필요는 없겠지.”
납작하게 깎은 흑마노를 깎아 붙인 것 같은 황제의 손은 마른 몸에 어울리지 않도록 몹시 거대했다. 울퉁불퉁한 피혁에 감싸인 팔 끝, 원래 맵시 있게 뻗은 손가락이 달려 있었던 자리에는 다섯 손가락 대신 하나하나가 창을 달아 놓은 듯 날카로운 발톱들이 위협하듯 뻗어 있었다. 그 손톱 중 하나를 슬쩍 움직인 황제가 날카로운 손톱 끝을 서문경의 아랫입술에 댔다. 손톱 끝이 닿기가 무섭게, 손톱이 닿은 자리가 크게 찢어지는가 싶더니, 그 상처에서 시커먼 피가 한 방울 두 방울씩 크게 방울지어 아래로 흘러내렸다.
“경아.”
뚝.
서문경의 입술에서 검은 피가 그치고, 대신 붉은 피가 희미하게 비치더니 그 다음 순간 거짓말처럼 입술에 난 상처가 아물었다. 마지막으로 흘러내린 서문경의 검은 피 한 방울이 황제의 손 위에 떨어졌다. 서문경의 피가 닿는 순간 황제의 손이 다시 하얗고 고운 인간의 손으로 돌아왔다.
“경아.”
서문경을 내려다보는 황제의 눈이 희미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짐이 계속 제좌(帝座)에 앉아 있는 것을 바라느냐.”
어떤 이도 짐에게 그리하라 말해주지 않았거늘 용님의 백성도 아닌 네가 그것을 바라느냐, 하고 중얼거리는 황제의 목소리는 어쩐지 씁쓸했다.
**
“하나같이 묘하게 번쩍거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들고 있던 비단옷을 바닥에 내려놓고 서문경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서문경의 주변에 여기저기 희고 푸르고 검은 비단옷들이 젖은 빨래마냥 널려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황제가 상자채로 내린 하사품들이었다.
이것은 옥소(玉邵)의 청한단(淸翰緞), 요것은 홍경(弘鏡)의 연주(姸珠)비단, 또 이건 오정(梧井)의 채화단(彩花緞), 황제의 하사품을 전할 때마다 두 눈이 왕방울만 해진 소청 원혜가 단 한숨을 섞어 중얼거리던 말이 새삼스레 서문경의 귓전을 맴돌았다. 그 말을 들을 당시에는 옷이 다 똑같은 옷이지, 하는 마음으로 그녀의 말을 귓등으로 넘겨 버렸었는데 아무래도 그러지 말 것을 그랬다. 방금 전 바닥에 내려놓은 검은 비단옷 대신 비구름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회색 주의(周衣)를 집어 들며 서문경이 생각했다.
“그나마 걔 중에서는 이게 제일 수수하려나. 장옷 같은 것을 쓰면 얼굴이 가려져서 더 좋을 텐데.”
그런데 여기에도 그런 것이 있던가. 잠시 생각하던 서문경이 섬세한 나무 격자와 조각이 달린 장식창으로 달려가 창밖을 내다보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몇 분, 뚫어져라 눈앞을 지나가는 여인들의 차림새를 찬찬히 뜯어보던 서문경이 수수한 감청 두루마기 대신 은실로 자수를 놓고 새끼손톱만한 진주알로 장식된 검은 공단 두루마기를 꺼내 머리에 뒤집어썼다.
“오늘 유난히 사람이 적은데···.”
사람이 없는 틈을 타 잰 걸음으로 거처를 빠져나온 서문경은 청의관 안으로 들어간 적이 없는 낯선 차림새의 여인이 갑자기 밖으로 튀어나온 것에 당황하는 위병들을 멀리로 따돌리고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서문경은 주위를 한 번 휘돌아본 후에 아니, 하고 말을 고쳤다.
“오늘 유난히 궁 사람들은 적고 외부 사람들이 많구나.”
서문경의 말대로 지금 청의관 부근에는 평소와는 달리 두 부류의 여인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서문경이 흉내 낸 차림 그대로 화려한 장식이 들어간 겉옷을 머리에 덮어 쓴 여인들과 머리에 산양털이나 솜을 덧댄 검은 아얌을 쓴 여인들이 그들이었다. 장옷을 쓴 여인들이 청의관 주변을 거닐며 마치 신기한 구경거리라도 되는 듯이 청의관을 흘끔대고 있는 반면, 검은 아얌을 쓴 궁인 차림의 여인들은 긴 치맛자락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여기저기를 다니며 가마꾼들을 불러 세우는데 분주했다.
웬일로 가마가 여기까지 들어와 있나 싶어서 서문경이 가마를 빤히 쳐다보고 있으려니, 그 시선을 눈치 챈 가마꾼 하나가 서문경의 앞으로 냉큼 달려왔다.
“어디로 뫼실까요?”
재빨리 다가와 말간 안색으로 묻는 꼴을 보아하니, 서문경이 아무렇게나 뒤집어 쓴 화려한 비단 두루마기를 보고 어느 대갓집 부인이라도 되겠거니 생각했던 모양이다. 어떻게 할까 서문경이 고민하다가 결국 가마로 올랐다.
“태학궁, 아니, 창혜각으로 가주십시오.”
무심코 태학궁을 입에 담은 서문경이 뒤늦게 조원이 늘 태학궁에 있을 리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 행선지를 고쳤다. 고관의 아녀자들이나 혹은 대상(大商)의 고명딸쯤은 되어야 겨우 걸칠 법한 최고급 연주 비단에 천백(千百) 은실로 구름과 모란을 수놓고, 호리(湖里)의 진주까지 꿰어 만든 화려한 장옷을 걸친 부인의 입에서 사내처럼 나직한 목소리가 튀어 나온 것에 가마꾼은 순간 흠칫한 눈치였지만, 곧 그는 당황한 기색을 능숙하게 숨기고 예에, 하고 쾌활한 목소리로 답했다.
“창혜각으로 말이지요. 소인이 천리마처럼 재빨리 모시겠나이다.”
그 말이 떨어지지가 무섭게 가마가 앞으로 뒤로 잠시 덜컹거린다 싶더니, 가마꾼 두 명이 가마 앞뒤를 받치고 다각다각 진짜 말발굽 소리 같은 발소리를 내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놀랍도록 흔들림이 적은 가마 안에 앉은 서문경이 이상하네, 하고 고개를 연신 모로 갸웃거렸다.
“분명히 저번에는 하마비가 있는 곳까지 갔어야 했는데.”
나도 그 때는 조금 의심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재하 원혜가 자기 몸이 불편한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나를 괴롭히는데 열심인 위인은 아닌데. 서문경이 고개를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며 생각하다가 불현듯 주춤했다. 그러고 보면 오늘 이상한 점이 비단 그것 뿐만은 아니었다.
“이상하게 청의관에 궁인들이 적었고.”
늘 자신의 거처방 앞을 지키고 있던 나 어린 궁인들이 보이지 않던 것은 물론이고, 오늘 청의관 안을 오가는 궁인들의 수가 두 손에 꼽을 정도로 적기도 했다. 꼭두새벽부터 황제의 침전인 천추전에 던져지는 날을 제외하면 하루에 한 번은 꼭 청의관에 들르던 소청 원혜 또한 오늘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한 서문경이 입을 꾹 다물고 눈만 슬쩍 치켜떴다.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꼴처럼 화려한 장의를 머리 위에 쓰고 있는 여인들이 보였다. 소매 끝에 색색깔 꽃수를 놓은 주의를 겹쳐 입고 머리에는 야암드림을 없앤 공단 액엄(額掩: 아얌)을 쓴 궁인들과는 한 눈에 구분되는 옷차림을 한 것뿐만이 아니라, 호기심으로 둘레둘레 청의관 주변을 살펴보는 모습이나 종종걸음으로 후원 주변을 맴도는 모습이 황궐 안에 머무는 궁인이 아니라 여염집 부녀자들이 분명했다.
웬일로 궁 밖 여인들이 궁 안에 들어와 있는 거지?
“북문으로 내려 드릴깝쇼?”
여기에서는 설마 여가의 사람들이 자유롭게 황궁 안을 드나들 수 있는 건가. 또 황궐에 멋대로 가마꾼들이 오고갈 수도 있는 건가. 서문경이 고민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 가마꾼들의 발걸음이 서서히 느려진다 싶더니 앞에서 가마를 끌고 있던 가마꾼이 그렇게 물어왔다.
“아.”
북문이 대체 어디야. 갑작스러운 물음에 서문경이 당황하며 반사적으로 내뱉은 신음을 긍정으로 받아 들였는지 가마꾼들이 왼편으로 가마를 틀었다. 지금이라도 가마를 멈춰야 하나? 이러다가 영 딴 데로 가는 거 아냐? 아무 곳에서나 내려주고 여기가 창혜각입니다, 해도 나는 모를 텐데. 이걸 어쩌나, 움직이는 가마 안에 하릴없이 들어 앉아 끙끙대고 있던 서문경이 곧 에라, 될 대로 되라, 하고 주저앉아 고개를 뒤로 젖혔다 말았다를 반복했다.
그러고 있으려니 곧 가마가 멈췄다.
“도착했습니다요, 아씨.”
가마가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스레 가마를 바닥에 내려놓은 가마꾼이 기운 찬 목소리로 외쳤다. 서문경이 격자 장식을 달고 나무 격자 뒤에 창호지를 바른 문을 밀고 나가다가 가마 삯을 치를 돈이 없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움직임을 멈췄다. 아, 하고 짜증 섞인 신음이 저절로 흘러 나왔다. 가마 삯은커녕 이 세계에 통용되는 돈이 어떻게 생긴 건지 구경한 적도 없으면서 무슨 배짱으로 대뜸 가마를 탔단 말인가.
“아씨? 아니, 마님?”
서문경이 가마에서 내리지 않고 있자 변덕스런 대갓집 마나님이 또 무슨 바람이 들어서 저러나 조바심이 났는지 가마꾼들이 애끓는 소리로 서문경을 재차 불렀다. 벗어두었던 공단 장의를 잽싸게 머리에 뒤집어쓴 서문경도 길다린 장옷 아래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이를 어쩌면 좋을까.
“뉘신가?”
그 때, 가마 밖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뉘를 찾아오신고?”
그 낯선 남자와 가마꾼들이 무어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가 싶더니, 무슨 말을 해도 모르겠다며 고개를 젓는 가마꾼들과는 더 이상 대화를 해봐야 별 수가 없겠다 싶었던지 남자가 가마를 향해 다가왔다.
“어느 댁 따님이시오?”
똑똑, 문 언저리를 가볍게 두드린 사내가 서문경에게 말을 걸어왔다. 남자가 갑자기 문을 열어젖히지 않은 것에 다소 안도하며 자신의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장의를 코 위에까지 끌어 올리고 있던 서문경이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에 손을 멈췄다.
“혹여, 염락을 찾아오신 게요?”
방금 남자의 행동이 지나치게 현대적이지 않은가 서문경이 생각하고 있는데 남자가 그렇게 물었다.
“!”
“역시 염락을 찾아오신 게로군.”
깜짝 놀란 서문경이 반사적으로 문을 열어젖히자 가마보다 훨씬 높다란 곳에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는 남자가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이거 또 무슨 사달이 나려나.”
동전 몇 푼을 쥐어주고 가마꾼들을 돌려보낸 남자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남자에게서 삯을 받고 총총히 사라져가는 가마꾼들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서문경이 그 말에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파드득 고개를 털고 남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부인인지 소저인지 모르겠소만, 어찌되었건 소저. 소저도 겪어 봤으니 알겠지만 염락 그 인간은,”
“돈!”
뒷머리를 긁적이며 불퉁한 목소리로 주절대고 있던 남자가 서문경이 난데없이 내지른 고함소리에 움찔해서 하던 말을 멈췄다.
“돈은 나중에 꼭 돌려 드리겠습니다.”
“아니, 그건 아무래도 괜찮지만.”
“아니요, 꼭 돌려 드리겠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성함을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덥석 남자의 옷자락을 붙들고 본의 아니게 폐를 끼치게 되어 부끄럽다, 하지만 난감한 상황에서 도와주셔서 참으로 고맙다, 등등의 말을 거의 일방적으로 하고 있던 서문경이 어느 순간 머리에 덮어쓰고 있던 장의가 머리 대신 자신의 어깨에 걸려 있는 것을 눈치 채고 흠칫했다. 서문경이 조용해진 틈을 타 남자가 말했다.
“남자잖아?”
서문경이 찌푸린 눈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킨 남자의 무례한 손가락을 노려보았다.
“초면에 웬 삿대질입니까.”
“아니, 버젓한 사내가 왜 여인 옷을 뒤집어쓰고 있나?!”
적잖게 놀란 듯 남자가 손가락을 내리기는커녕 마구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서문경이 잠시 고민하다 대꾸했다.
“여자 옷이 아니라, 그러니까. 그냥 좀 비싼 옷일 뿐입니다.”
“어디를 보아도 여인의 장옷이건만.”
남자가 단호하게 말하자, 이 세계의 복식에 대해 알 턱이 없는 서문경은 순간 우물거렸지만(‘진짜 여자 옷인가? 아니, 그럼 이놈의 황제는 나한테 왜 여자 옷을 섞어 보낸 거야?) 곧 표정을 굳히고 다시 우겼다.
“정말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요. 괜찮으시다면 성함을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대신 내주신 가마 삯을 갚아 드려야 할 테니까요.’, 서문경이 단호하게 남자의 말을 막았다. 서문경이 갑자기 자신의 말허리를 끊어먹은 것이 의외였는지 남자가 눈을 크게 떴다.
한편, 말은 그럴 리가 없다 잡아뗐지만 자신이 걸치고 있는 장의가 여성용이라는 말에 괜히 머쓱해진 서문경은 어깨에 걸려 있던 장옷을 슬며시 잡아당겨 한 팔에 걸었다. 어쩐지 대충 다른 여인네들을 흉내 내어 주의를 뒤집어 쓴 내 몰골을 보고도 의심스러워하는 사람 하나 없더라니 이게 여자 옷이라서 그랬던 건가.
그러나 그것도 잠시, 서문경은 다음 순간 휭하니 불어온 칼바람에 부르르 몸을 떨고 다시 장의를 들어 잽싸게 두 팔에 꿰어 입었다. 여자 옷이건 남자 옷이건 일단 지금은 추우니 입어야겠다, 생각하며 무심코 고개를 들던 서문경은 그제야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는 남자의 시선을 눈치 채고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어.”
남자의 얼굴을 본 서문경이 얼빠진 소리를 내뱉었다.
“음?”
서문경을 눈이 구슬처럼 동그래지자 남자가 덩달아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폐하?”
서문경이 불쑥 내뱉었다가 다음 순간 아니, 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폐하···, 는 확실히 아닌데.”
닮았어, 남자의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보며 서문경이 중얼거렸다.
“황상을 뵌 적이 있나?”
서문경의 말을 들은 순간 남자의 표정이 싹 굳었다. 황제와 닮은 남자의 길고 우아한 눈매가 당장 싸늘해져 자신을 노려보는 것을 본 서문경은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분명한 적의(敵意)-.
“아니, 아닙니다.”
자리를 뜨는 것이 좋겠다, 하고 결론을 내린 서문경이 남자를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한 발, 뒷걸음질 쳤을 때였다.
“효강(曉康), 태황태후전(太皇太后殿)에서 부르심이 있었던 것이 벌써 한 식경 전인데 여기서 대체 무엇을 하시는 겝니까?”
귀에 익은 목소리에 서문경이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리자,
“아, 자넨가.”
염락 조원이 서문경을 발견하고 싱긋 눈을 접으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