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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제(嘉衍帝)는 예조(睿朝)의 15대 황제로서 이름은 강희(康熙), 연호는 가연, 묘호는 혜종(慧宗), 시호는 헌제(憲帝)였다.
가연제는 선황이었던 강윤제(鋼尹帝)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황태자가 병으로 훙서(薨逝)하고 그 뒤를 이어 나머지 형제들이 괴질로 숨을 거둔 후 급서한 강윤제의 뒤를 이어 다음 대 황제로 옹립되었다.
“예조의 황제는 대대로 황룡(黃龍)이며, 하늘을 지키는 천룡(天龍)이었다. 그러나 강윤제 재위 당시의 황태자였던 소현(炤賢)은 청룡(靑龍)이며 수로(水路)를 다스리는 지룡(地龍)이었지. 황룡과는 달리 청룡은 섬약한 존재다. 그러나 차대(次代) 용으로서의 황태자의 교육을 맡은 시강원(侍講院) 관원들은 예조의 다른 황제들과 마찬가지로 황태자가 황룡일 것이라 안이하게 판단했고, 황룡을 훈육하던 그대로 소현태자의 교육을 행했다.”
“그럼 그 때문에?”
“그래, 그것이 소현태자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또한 하늘이 내린 용의 죽음은 하늘의 분노를 불러, 용의 자질을 타고 난 모든 황자들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말하고서 잠시 말을 멈춘 황제가 평소의 그 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태도로 덧붙였다, ‘강윤제의 급서 또한 소현태자의 죽음과 연관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추측이다.’
형제들의 잇따른 죽음으로 가연제가 황제로 등극했을 때의 나이는 불과 11세였다. 황제의 연치가 연소한 탓에, 가연제 즉위 초기에는 선제인 강윤제 때의 공신이며 먼 황친(皇親)이기도 한 서엽(徐燁)과 태후 무아(珷娥)가 각각 섭정승(攝政承)과 수렴청정(垂簾聽政)을 맡아 정권을 담당했다.
“서엽과 황태후는 처음에는 황상의 연치 성숙해지면 스스로 섭정의 자리에서 물러나기로 서로 약조하고 정사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가연제가 관례(冠禮)를 치른 이후로도 용으로서의 자질이 나타나지 않자, 정국은 혼란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예(睿)제국의 직계 황족 중 용의 자질을 타고 나지 않은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가연제에게는 용의 증후(證候)가 나타나지 않았다.”
“용의 증후라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신수(神獸)인 용으로서 거듭날 수 있는 자질. 수직으로 긴 동공(瞳孔), 팔에 돋아나는 양수(陽數)인 81개의 비늘, 목 아래에는 거꾸로 박힌 비늘(逆鱗) 같은 징후가 그것이지. 또한 용으로서의 자질을 가진 황족은 어떤 술사들보다도 강력한 힘을 가지며 자유자재로 비와 구름과 바람을 부린다. 그리고 그들 중 가장 강한 자질을 타고 태어난 자-대부분의 경우에는 황태자-가 용인(龍人)이 아닌 완벽한 용(龍)이 되어 황제로서 즉위하게 된다.”
그리고 태자가 황위에 올라 하늘에게 그것을 고하는 ‘의식’을 치른 직후에는 선황의 소생인 황자, 황녀들에게 나타난 용의 징후는 사라지고 황제(皇弟)들은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온다. 또한 아직 자신이 새 황제임을 하늘에 고하지 못한 황제가 급서하거나, 태자로 책봉된 황자가 훙할 경우에는 살아 있는 황족 중 하나에게 다시 용의 징후가 나타나게 된다.
때문에 조정의 문무백관이며 내명부 어른들과 황친들은 가연제에게서 특별한 용의 자질이 발견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걱정 없이 그를 황제로 옹립했던 것이다.
“이 세계의 신이나 다름이 없는 용님과 같은 형상을 하고 용님과 같은 힘을 가진 황제의 존재 자체가 바로 용님께서 이 세계를 돌보고 계신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가연제는 끝까지 용이 되지 못했다.”
만고(萬古)에 없는 변란(變亂).
“처음에는 모두가 와룡(臥龍)이라고 생각했다. 와룡이란, 용의 자질이 분명히 있으나 아직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황족을 이르는 말이지.”
“와룡이었던 황족이 이전에도 여럿 있었습니까?”
“용으로서의 힘이 다른 황제들보다도 월등할 경우 종종 그랬지. 그래서 가연제에게서 용의 자질이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고 기뻐한 이도 여럿 있었다. 황제의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것은 나라의 홍복(洪福)이 되니 말이다.”
“하지만···.”
서문경의 낯빛이 흐려졌다.
“가연제에게서는 끝까지 용의 자질이 나타나지 않은 모양이군요.”
황제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제국은 혼란에 휩싸였다. 전국 각지에서 홍수며 전염병 등 앙해(殃害: 재해)가 잇따랐고, 민심은 흉흉해졌으며 여기저기에서 난이 일어났다. 용의 자질이 없는 가연제는 정당한 황제가 아니라는 말에 공공연히 떠돌았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조정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그 때 섭정승을 지낸 서엽의 계자(季子)에게서 용의 증후가 나타났다는 말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선제의 직계도 아닌데도 말입니까?”
서문경이 놀라서 묻자 황제의 낯빛이 흐려졌다.
“그래, 그것이 문제였다. 차라리 최말단 후궁 소생의 황자기라도 했다면 가연제가 그에게 황위를 선양하고 상황 자리로 물러나기라도 했을 것을. 서엽은 황가의 혈통이라고는 하나 황족보 말단에도 이름을 올린 이름뿐인 황족에 불과했다. 그러니 서엽의 계자에 대해서는 더 할 말도 없겠지.”
“하지만 폐하, 서엽이란 자는 가연제의 즉위 직후 태후와 함께 섭정을 지냈다고도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그랬지.”
서문경의 지적에 황제가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몇 번 마른기침을 하고 나서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황친이란 이름을 붙이기도 부끄러운 처지였지만, 서엽 그 자는 그런 처지와는 별개로 당대 최고의 권력자였단다. 가연제의 선대인 강윤제 시대에는 강윤제를 도와 나라를 평안하게 했고, 그 공으로 문무백관의 수장인 수상을 지냈으며, 이만 호(戶)의 식읍을 받고 해마다 황족에 준하는 1만석의 봉록을 받는 동시에 강윤제가 가장 귀애하던 손녀인 경혜현주(瓊慧縣主)를 아내로 맞기도 했지.”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위태로운 목소리로 황제가 말을 이었다. 수상이라는 단어에 서문경이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다가 황제의 목소리가 가래라도 낀 듯 깔끄러워진 것을 깨닫고 급히 물주전자를 들었다.
서문경이 따라 준 물로 입술과 목을 적신 황제가 숨을 헐떡였다. 금방이라도 쓰러져 버릴 것처럼 초점이 흐려진 황제의 눈을 보고 걱정이 된 서문경이 ‘힘드시면.’하고 말을 꺼냈지만 황제가 한 손을 들어 그런 서문경의 입을 막았다.
“괜찮다, 경아.”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 낯빛을 한 주제에 당치도 않은 말로 자신을 안심시키려 드는 황제를 서문경이 뾰족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걸 말이라고, 하고 말하는 듯한 서문경의 시선에 황제가 마른기침 섞인 웃음을 터뜨리고는, 침상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있는 서문경의 목에 제 팔을 잡아 아래로 끌었다. 아픈 사람을 밀어낼 수도 없는 일이라 그가 시키는 대로 얌전히 따라오자 이윽고 서문경은 황제의 몸 위에 비스듬히 올라탄 꼴이 되고 말았다.
“폐하.”
“즉 서엽의 계자는.”
항의하려는 서문경의 말을 막으며 황제가 서문경의 목을 한 팔로 감싸고 다른 한 팔을 서문경의 등에 둘렀다. 관자놀이에 닿은 황제의 가슴이 펄떡펄떡 뛰는 것을 듣고 서문경이 짜증이 반, 포기가 반 섞인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러시니까 궐내에 이상한 소문이 도는 겁니까, 하고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얼마나 사람에 굶주렸으면 같은 사내에게도 이렇게 달라붙나 싶어 안쓰럽기도 했다.
“황위를 잇기에는 너무 먼 방계혈족이지만 황제인 가연제가 가지고 있지 못한 용의 자질을 가지고 있고, 또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서엽의 아들. 그러나 미미한 용의 증후가 나타났다는 이유 하나로 황가의 적통인 가연제를 밀어내고 그를 황위에 앉히기에는 또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 가연제가 와룡일 확률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고.”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지. 황제가 나직하게 덧붙였다.
“그래서, 결국 일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황제가 자신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기 시작한 것을 느끼며 서문경이 물었다. 그렇게 묻자, 황제에게서 픽 바람이 새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가연제가 급서했다.”
어떤 결론도 나지 않은 상황에서.
“그럼!”
당황한 서문경이 번쩍 머리를 치켜들었다. 급한 마음에 황제의 머리 옆에 양 손을 짚고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자 그 시선을 눈치 챈 황제가 천천히 한 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럼, 폐하가.”
이 말을 해도 될 것인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서문경이 말을 꺼냈다.
“서엽의 계자란 소년이.”
그러나 그 말에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승하하기 전, 가연제는 후궁인 혜비 엄씨에게서 황자를 하나 보았다.”
황제는, 가연제의 정후인 명의황후가 소생 없이 승하하고, 유일한 후궁인 혜비 엄씨 또한 황자를 낳은 직후 숨을 거두어 가연제의 직계비속은 엄씨 소생의 황자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짤막하게 덧붙였다.
“가연제가 붕(崩)했을 때 황자는 겨우 십 이 세 남짓.”
황실의 적통인 황자를 황제로 옹립할 것인가, 아니면 용의 증후가 나타난 서엽의 계자를 황제로 옹립해야 할 것인가. 다시금 조정에 격론이 일었다.
“격론 끝에, 황실의 큰 어른인 무아태후는, 아니, 태황태후는 황실의 적통인 황자로 하여금 황위를 잇게 하되 관례를 올린 후에도 황자에게서 용의 증후가 나타나지 않거나, 혹은 서엽의 계자가 인피(人皮)를 벗고 완전한 용으로 나게 된다면 서엽의 계자에게 황위를 선양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서문경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황제의 얼굴을 응시했다. ‘설마.’하고 중얼거리는 서문경의 입술을 읽고 황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서엽의 계자가 바로 그대도 몇 번이고 본 적이 있는 수상 서현이고.”
“폐하는···.”
“바로 짐이 가연제의 아들인 제안이다.”
서문경은 황제의 머리 옆을 짚은 자신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느꼈다.
“서현은, 그 자는, 그 자가 가지고 있다는 용의 자질은.”
“아직 완전히 개화(開花)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 내가 아직 용상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깜둥새야, 좀 안아 보자꾸나. 황제가 속삭이며 서문경의 등에 팔을 둘렀다.
“그럼 폐하의 관례는 언제?”
이상할 정도로 얌전히 황제의 품에 안긴 서문경이 물었다.
“올해가 짐이 꼬박 약관(弱冠: 스무 살)이고, 또 짐의 탄일(誕日: 탄생일)이 올해 시월 초이렛날이니···.”
몇 달 남지 않았구나, 황제가 태평하게 중얼거린 말에 서문경이 번쩍 고개를 치켜들며 고함을 질렀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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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태평하게 말씀하실 문제가 아닙니다!”
신경질적으로 외친 서문경이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 바람에 방금 전까지 서문경의 등을 감싸고 있던 팔을 양쪽으로 벌린 채 황제가 눈썹을 찌푸렸다.
“탄일이 시월 초이렛날이라고 하셨지요?”
초조한 듯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주렴 근처를 돌아다니던 서문경이 딱 발걸음을 멈추더니 물었다. 황제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그런데 그런 건 나중에 언소토록 하고 이리로,”
“시월 초이레라면 시월, 칠 일···.”
“헌데 경아, 오늘이 언젠 줄은 아느냐?”
황제의 말은 들은 척 만 척 하고 생각에 잠겨 있던 서문경이, 그 물음에 움찔했다. 서문경이 눈살을 찌푸리고 황제 쪽을 말끄러미 쳐다보다가 불쑥 중얼거렸다.
“그건···.”
“그럴 줄 알았지.”
황제가 픽, 비웃는 소리를 내자 발끈한 서문경의 말이 저절로 빨라졌다.
“뭡니까. 제가 날짜를 모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아닙니까. 달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누구 하나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서문경이 황제에게 들으란 듯 일부러 큰 소리로 투덜거린 다음 아무도 없는 주렴 밖을 찌푸린 눈으로 쳐다보다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아직 날이 쌀쌀하니까.” 서문경의 시선이 흘깃 황제를 향했다. “십이월이나 일 월···, 인가요?”
“아깝군.”
황제가 누워 있던 허리를 당기며 대꾸했다. 서문경이 급히 다가가 황제가 일어나 앉는 것을 도왔다. 서문경이 자신의 허리 뒤에 침을 끼워 주자 거기에 등을 기대고 앉은 황제가 보자, 하고 말을 꺼냈다.
“이월이다. 이월 초열흘날.”
“이월 십 일이라.”
서문경이 엄지를 아랫입술에 대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곳도 한 달에 삼십일이나 삼십일일인가.’
“지금이 이월 십 일이고, 폐하의 탄일이 시월 칠 일이면 여덟 달 정도 시간이 남았군요.”
짧다. 그렇게 말해 놓고 스스로의 말에 절망했는지 서문경의 낯빛이 흐려졌다.
“길구먼.”
그러나 황제는 한 쪽 무릎을 세우고 앉더니 그 위에 제 턱을 괴고 한숨을 푹 쉬었다. 징그럽게 많이도 남았군, 하고 말하는 듯한 황제의 태도에 서문경이 이건 또 무슨 반응인가 하고 미간을 찌푸렸다가 설마, 싶어서 조심스레 물었다.
“폐하.”
“오냐.”
“설마, 싫으신 겁니까.”
‘무엇을?’하고 묻는 대신 황제가 한쪽 눈썹을 쓸 치켜 올렸다. 차마 ‘황좌에서 물러나고 싶으신 겁니까.’하고 묻지 못해 우물거리던 서문경이 그 심드렁한 반응에 자극받아 욱하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물러나고 싶으십니까.”
“용상에서?”
그렇게 대꾸하는 황제의 목소리에는 어렴풋한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서문경이 황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하고 대답한 황제가 싹 표정을 바꾸고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우리 깜둥새가 왜 그런 괴이쩍은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짐이 앉아 있는 이 자리가 바로 세상의 모든 이들이 바라고 마지않는 지존의 자리인 것을.”
아무나 앉을 수 있는 자리인 줄 아느냐? 턱 끝을 오만하게 치켜 든 황제가 깔보는 듯한 눈으로 서문경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 거만한 모습을 못마땅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서문경이 곧 짜증을 섞어 대꾸했다, ‘폐하께서 지금 앉아 계신 곳은 병석인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쨌든 제 걱정은 쓸데없는 걱정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황제의 이마에 젖은 천을 가져다대며 서문경이 의심쩍게 물었다.
“그래.”
황제가 나직하게 대답하며 빙그레 웃었다. 자신의 팔 아래로 보이는 황제의 입술이 천천히 호선을 그리는 것을 보고 서문경이 황제의 이마를 짚었던 손을 치웠다.
“모든 이들이 원하는 자리가 아니더냐.”
방금 전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하며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힘도 자격도 갖추지 못한 자, 힘을 가졌으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자, 그리고 자격을 갖추었으나 힘을 가지지 못한 자.”
“······.”
“그 모두가.”
그렇게 말하며 황제의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가슴 속 한 구석이 서늘해졌다. 서문경은 자신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추우냐.”
황제의 말을 듣고 서문경이 얼결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랬다가 서문경은 자신이 오한이라도 느끼는 것처럼 두 팔로 몸을 감싸 안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황했다.
“아니, 아닙니다.”
서문경이 홀린 듯 멍한 투로 중얼거리며 재빨리 황제의 얼굴을 살폈다. 그 시선을 눈치 챈 황제가 서문경과 눈을 맞추며 웃었다. 그 웃음이 평소의 그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어서 서문경은 다시 한 번 당황했다.
방금 느낀 그 선뜩함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런데, 원점으로 돌아와도 또 문제군요.”
여덟 달이라. 서문경이 천정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런데 그 용의 증후라는 것은 때가 되면 저절로 나타나는 겁니까?”
“보통은 그렇지.”
“저, 제 힘을 오경박사라는 사람들이 억지로 끌어내 준 것처럼 용의 자질도 그럴 수는 없는 겁니까?”
얼마 전 태학궁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린 서문경이 혹시나 싶어 물었다. 그러자 황제가 대꾸 없이 물끄러미 서문경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무심코 황제에게 고개를 돌렸던 서문경의 자신을 쳐다보는 황제의 표정을 보고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 한심하게 보십니까.”
“경아, 경아.”
황제가 한숨을 섞어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세운 무릎 위에 턱을 괴고 빙긋 웃었다. 황제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웃자, 수묵화 속의 사람이 갑자기 현실로 튀어 나온 것처럼 느껴져서 서문경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예전부터 생각하던 것이지만, 평소에는 그리도 똘똘하면서 결정적인 곳에서 이리 맹하면 어쩌누.”
“제가 언제,”
“그것이 가능하다면 짐이 이러고 있을 리가 만무하지 않으냐.”
황제의 말에 서문경이 하던 말을 멈추고 멍청한 탄성을 내뱉었다, ‘아.’
“그리고 용의 힘은 오경박사 등 술사들의 힘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단다.”
“하지만 아까는 마치 다른 방법이 있는 것처럼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음, 오경박사들은 불가능하지만 시강원(侍講院) 관원들이라면 미흡하나마 잠들어 있는 용의 자질이 빨리 깨어나도록 유도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용의 증후가 나타난 황태자를 맡아 술사로서의 교육을 시키는 특무기관이니 그곳의 관원들은 확실히 다른 술사들과는 다르지. 황제가 덧붙인 말을 듣고 이제야 시강원이 어떤 기관인지를 떠올린 서문경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시강원이라면 자신들이 받들어야 할 황태자가 천룡인지 지룡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해 결국 태자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갔다는 곳 아닙니까.”
그런 곳에 어떻게 폐하를 맡긴 답니까, 서문경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우리 깜둥새.”
의외의 말을 들었다는 듯 눈을 크게 떴던 황제가 곧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서문경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 오거라.”
자신에게 내밀어진 황제의 손을 이건 또 뭐냐는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서문경을 황제가 재촉했다. 그 재촉을 못 이겨 서문경이 마지못해 한 발 다가가자, 황제가 몸을 일으켜 서문경의 손목을 자신에게 잡아 당겼다.
“착하다. 착하구나.”
균형을 잃고 무너진 서문경의 몸을 두 팔에 가두듯이 안은 황제가 서문경의 뒷머리를 천하에 다시 없는 귀물(貴物)이라도 되는 것처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까만데도, 이렇게 착하구나.”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여대는 황제를 어리둥절한 눈으로 쳐다보던 서문경이 이윽고 푹 한숨을 내쉬며 황제의 등에 팔을 둘렀다. 서문경이 자신의 등을 마주 안는 것을 느낀 건지 서문경의 허리에 감은 황제의 팔에 더욱더 힘이 들어갔다.
“쉬십시오.”
그러고 보니 아직 약관, 그러니까 스물이 채 지나지 않았다고 했었지, 서문경이 열이 잔뜩 오른 황제의 등을 조심스레 토닥이며 생각했다. 그보다는 더 나이가 들었을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직 어린애였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서문경은 픽 코웃음을 쳤다. 어린애라니, 그렇게 말하는 나는 또 얼마나 나이가 들어서.
“어찌 할까요···.”
고작 여덟 달 동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한숨이 나와서 서문경은 설레설레 도리질을 쳤다. 서문경이 기운 없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황제가 서문경의 어깨를 바짝 끌어안고 서문경의 어깨 위에 제 얼굴을 얹었다. 날 위로라도 해주려는 건가. 서문경은 황제의 행동이 커다란 강아지 같다고 생각하면서 기껍게 황제의 행동을 받아들였다.
“···?”
순간 자신의 맨 목덜미에 사람의 입술처럼 부드러운 것이 스친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서문경은 곧 고개를 저어버렸다. 착각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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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이 들렸다.
“체제공?”
좀처럼 귓가에서 떠나지 않는 귀울림에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서현은 최유가 걱정스레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치켜든 얼굴에 떠올라 있는 표정이 평소와 그리 다르지 않은 모양인지 다른 이들이 의아한 얼굴로 최유를 돌아본다. 그러나 우직한 최유는 그런 사람들의 눈초리에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고 서현의 발밑에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차를 올리겠습니다.”
서현의 안색이 평상시보다 창백하다는 사실을 용케도 알아챈 최유가 그렇게 아뢰고는, 장지문 밖에 공수시립(拱手侍立)하고 있던 시녀를 시켜 차와 다식을 가져오게 했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명령을 받은 시녀가 자개다반에 다식과 다기를 받쳐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향긋한 국화 내가 방 안에 가득 떠돌았다. 시녀를 물러가게 한 최유가 손수 달인 차를 찻종에 채워 서현에게 바쳤다.
“천견(天見),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뜨끈하게 달아오른 찻종을 가만히 쥐고만 있던 서현이 불현듯 물었다.
“폐하께서 예전과 많이 달라지신 듯 했습니다.”
“예전이라.”
서현이 픽 웃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하고 끼어든 것은 염락 조원이었다. 서현이 조원에게로 흘깃 시선을 던지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아이 때문이 아닐지요.”
“그 아이?”
서현이 묻자 조원이 대답 없이 조용히 미소만 지었다.
“물손님 말인가.”
최유가 황제의 침실 안에서 봤던 낯선 청년을 생각하고 말했다. 황제와 수상 사이에 쳐진 주렴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직 앳된 티가 채 가시지 않은 어린 청년이었다.
“천견께서는 그 아이를 어찌 보셨습니까.”
조원의 물음에 최유는 구슬주렴 사이에 맹랑하게 대신들을 응시하던 청년의 까만 눈을 뇌리에 떠올렸다.
“당찬 아이더군.”
“사랑받고 자란 것 같지 않았습니까.”
최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 받고 자라 행동하는데 거침이 없고 매사에 당당하며, 또 다른 이의 불행을 제 일처럼 안쓰럽게 여기는 여유까지 있지요.”
부러운 일입니다, 하고 조원이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최유의 낯빛이 흐려졌다.
“비교할 수 없이 바르고 고운 아이가 아닙니까.”
“우리 천객들과는 말인가.”
조원이 일부러 빠뜨린 말을 최유가 덧붙이자, 조원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꼭 그걸 상기시키셔야 하겠습니까.
“그 아이가 껄끄러운가.”
조원과 최유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서현이 찻종을 다반 위에 내려놓고 물었다.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듯 조원이 천천히 눈썹을 치켜들었다가, 이윽고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저희들 입장에서는.”
서현이 최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최유가 묵묵히 고개를 조아려 서현의 눈을 피했다. 그것을 보고 서현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조원을 쳐다보았다. 서현이 최유에게로 시선을 돌렸을 때에도 마냥 서현의 옆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던 조원이, 서현과 눈이 마주치자 실눈을 뜨고 웃었다. 서현이 무심코 눈살을 찌푸렸다.
“아, 그렇게 대놓고 차별하시면 상처 받습니다.”
“그대가 고작 이런 일 정도에 상처 받을 위인이었던가.”
“그럼요.”
뻔뻔하게 대꾸하고서 싱글벙글 웃는 조원의 얼굴을 서현이 빤히 바라보다가 불쑥 생각난 것처럼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그대는.”
“체제공이야말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제가 해야 할 말을 공께서 하시는군요, 하고 조원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채 의혹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서현에게서 눈을 돌린 조원이 방 안의 사람들을 빙 돌아보았다.
“무슨 수를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수라니.”
조원의 말에 긴 턱수염을 쓰다듬고 있던 사백령이 정색을 했다.
“관례가 코앞에 다가왔는데도 어떤 증후도 나타나지 않는 황제를 상대로 체제공께서 무슨 수를 써야 한다는 말이오?”
“맞는 말씀입니다.”
천추전에서 물러난 이후로 내내 손가락 사이로 뭔가를 굴리고 있던 장경이 사백령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최유는 그들의 말에 장단을 맞추는 대신 묵묵히 서현의 표정을 살폈다. 최유와 마찬가지로 서현의 표정을 살피던 조원이 불쑥 내뱉었다.
“신경 쓰이시지요.”
“무엇이 말인가.”
“그 아이가.”
아니, 폐하가, 라고 해야 할까요. 조원이 나직하게 덧붙인 말에 서현은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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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교운이라 하옵니다.”
여인은 삼단 같은 검은 머리를 발유를 발라 곱게 틀어 올리고 있었다. 한껏 모양을 내어 꼬아 올린 머리는 옥이며 산호며 호박 등을 단 갖가지 뒤꽂이와 칠보로 장식된 은잠(銀簪), 파르르 날개를 떠는 떨잠 등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화려한 것은 머리 장식뿐만이 아니었다. 두 겹 금박을 두른 남색 숙고사 치마와 깃과 끝동과 곁마기를 자줏빛으로 회장한 삼회장저고리, 고름에 찬 산호 노리개며 은빛 밀회장도 장식 등이 저절로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화사하고 우아했다.
“폐하, 소신의 종질녀이옵니다.”
여인보다 한 발 앞선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중년 남자가 고했다. 시원스러운 이목구비와 걸걸한 목소리가 참으로 기걸스러운 사내였다.
“반주(班主: 근장상장군)의 종질녀라.”
턱을 비스듬히 무릎 위에 괸 채로 황제가 심드렁히 중얼거렸다. 근장상장군 교혁경이 다소곳이 앉아 있는 자신의 종질녀에게 눈짓을 보냈다. 교혁경의 눈짓을 본 여인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조심스레 들었다. 저 기걸스러운 근장상장군과 피가 섞여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피부가 옥같이 희고 오종종한 얼굴생김을 가진 여인이었다.
“곱구나.”
황제가 툭 내뱉자, 근정상장군 교혁경이 반색을 했다.
“저희 집안의 자랑거리이옵나이다.”
교혁경의 말에 여인이 수줍은 듯 두 눈을 내리깔고 뽀얀 두 볼을 도홧빛으로 물들였다. 그 모습이 황제의 말 그대로 아기처럼 순진하고 또 고왔다.
“그래, 보아하니 반주가 어여삐 여길 만 하구나.”
황제가 제 자랑이라도 들은 것처럼 어깨를 쭉 편 근장상장군 교혁경과 얼굴을 붉힌 장군의 종질녀를 차례로 돌아보고 칭찬했다. 그 말에 좀 더 낯빛이 밝아진 교혁경이 감히 허락도 없이 고개를 치켜들고 성급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폐하 제 종질녀를 폐하께,”
“그런데.”
황제가 교혁경의 말허리를 끊었다. 내내 심드렁하던 황제의 말투가 단호하게 돌변하자 움찔한 교혁경이 내밀던 상반신을 성큼 뒤로 물렸다.
“반주의 종질녀가 반주의 자랑대로 재용(才容)이 빼어나다는 것은 충분히 알겠네만, 무슨 이유로 저 규수를 짐에게 보이는고?”
“예? 그, 그것은.”
황제의 비꼬는 투에 교혁경이 당황하여 우물거리고 교혁경의 종질녀는 수치심으로 확 낯빛이 붉혔다. 그것을 심통 섞인 눈초리로 응시하던 황제가 픽 헛웃음을 흘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몇 달 뒤면 여전히 황제일지 아니면 폐서인(廢庶人) 신세일지도 모를 치에게 아까워서 어찌 보배 같은 종질녀를 내어주누?’
“물러가라.”
혼잣말인 척 가장한 자신의 투덜거림을 듣고 사색이 된 교혁경에게 황제가 귀찮다는 듯 한 손을 저었다.
“그대의 종질녀를 관리로 천거하고 싶으면 과시(科詩: 과거)를 기다리거나, 아니면 짐의 관례 이후에 다시 찾아오도록 하고, 또 그 규수를 후정으로 들이고 싶다면 그것도 관례 후에 있을 간택령(揀擇令) 이후로 미루도록 하거라.”
말을 마친 황제가 금침을 두르고 아예 침상 위에 누워버렸다. 그 노골적인 축객령에 교혁경과 교혁경의 종질녀 교운이 서로 당혹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침실 앞에 부복(俯伏)하고 있던 지밀나인이 서문경의 도착을 아뢴 것은 그 때였다.
“폐하, 청의관 수객 들었나이다.”
그 말에 교혁경과 교운의 표정이 싹 굳었다.
“어서 들라 하라.”
금침을 두르고 누워 뒤척거리던 황제가 벌떡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탐탁찮아하는 기색이 거짓말처럼 가신 황제의 얼굴을 본 교운이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어졌는지 작은 엉덩이를 연신 들썩거렸다.
“괜찮아졌다 싶었더니 왜 또 열이···.”
혀를 끌끌 차며 침전으로 들어오던 서문경이 낯선 얼굴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경아, 이리로 오너라.”
황제가 멈칫 자리에 멈춰 선 서문경에게 이리로 오라며 주렴 밖으로 한 손을 내밀어 손짓해 보였다. 자신을 천하에 둘도 없는 여우를 보는 것 같은 눈으로 꼬나보는 교혁경의 눈초리에 서문경이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가 황제와 교혁경 사이에 쳐진 주렴을 걷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찾으셨습니까.”
“늦었구나.”
좀 더 가까이 와라 눈짓을 하며 황제가 말했다.
“태학궁에 가보려던 참이었습니다.”
‘폐하의 지밀상궁이 폐하께서 온 몸에 열이 난다며 저를 찾지만 않았더라도 그랬을 겁니다.’, 서문경이 황제의 눈짓을 못 본 척 하고 대답했다. 서문경의 말을 듣고 황제가 살풋 이맛살을 찌푸렸다.
“태학궁에는 어찌하여?”
“폐하.”
서문경이 설레설레 도리질을 하며 곁눈질로 주렴 밖을 가리켰다.
“선객이 계시지 않습니까?”
“저 이들은 그렇지 않아도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황제가 뻔뻔한 낯빛을 도도하게도 치켜들고 교혁경에게 눈총을 주었다. ‘짐의 말이 틀린가?’, 황제가 협박을 섞어 넌지시 던진 말에 교혁경이 차마 고개를 저을 수 없어 떨떠름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물론입니다, 폐하.
“그런데, 저 아가씨도 여관입니까?”
교혁경과 교운이 침실 밖으로 물러나고, 장지문이 닫히는 것까지 확인한 서문경이 털썩 황제의 옆에 주저앉으면서 물었다.
“궁인이 아니라 여염집 규수다. 그 규수와 함께 있던 사내를 보았지?”
서문경이 자신을 마뜩찮은 눈으로 노려보던 덩치 큰 중년 사내를 떠올리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곰 같은 치가 근장상장군 교혁경이다. 그리고 네가 말한 그 규수는 교혁경의 종질녀로, 상서 이부 차관 교해근의 딸이지.”
“상서 이부라면, 어제 본 그 영감님의?”
“그래, 사백령이 바로 상서 이부 장관이지.”
우리 경이는 기억력도 좋구나, 황제가 흐뭇한 듯 웃으며 서문경을 칭찬했다. 그러나 서문경은 칭찬을 듣고도 조금도 기쁘지 않은지 오히려 낯을 찌푸리고는(‘내가 금붕어도 아니고 어제 들은 것을 벌써 잊어버릴 리가.’) 불퉁하게 웅얼거렸다.
“그 영감님의 부하라니. 뭔가 꿍꿍이속이 있는 듯한데요.”
그래, 무슨 일로 폐하를 알현했답니까? 혼자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서문경이 훽 황제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 규수를 내 후정으로 들이고 싶은 모양이더구나.”
그 말에 서문경이 고개를 갸웃했다.
“후정?”
그게 뭐였더라? 황제에게 묻는 건지, 혼잣말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던 서문경이 순간 생각난 것이 있는지 두 눈을 부릅떴다.
“후궁?”
“같은 말이지.”
황제가 태연하게 대꾸하며 서문경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부릅뜬 눈을 깜빡거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황제를 응시하고 있던 서문경이 황제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갑자기 웬···.”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깐 서문경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입을 다물고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뒷머리를 긁적이는 손길이 어째서인지 몹시 신경질적이었다.
이상한데.
입술을 꾹 앙다문 서문경은 제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슬슬 문지르며 생각했다. 어째서인지 싫은 사람이 횡재를 했다는 소식이라도 들은 것처럼 가슴 속 한편이 불편했다.
“음.”
갑자기 왜 언짢은 기분이 든 것인지 골똘히 생각하던 서문경이 황제의 얼굴을 힐끗 곁눈질한 후 결론을 지었다. 나는 만난 지도 얼마 안 된 네 녀석의 미래를 걱정하느라 어젯밤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너는 아까 그 어여쁜 아가씨와 화촉을 밝히시겠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황제를 흘겨보는 서문경의 눈초리가 저절로 뾰족해졌다.
서문경은 황제에게 자신의 불편한 감정이 들키지 않도록 마음을 가다듬으며 다시금 물었다.
“그래서, 어쩌기로 하셨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물은 직후, 자신의 목소리가 화가 나기라도 한 것처럼 몹시 날카롭게 들려서 서문경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음?”
“그러니까 그 아가씨를 후궁으로···.” 서문경이 의식적으로 목소리를 억누르며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후궁으로 받아들이기로 약속하셨습니까?”
말을 끝맺고 나니 어쩐지 추궁하는 투라서 서문경은 아차했다. 황제 또한 그것을 느꼈는지 서문경의 질문을 듣고도 꽤 오랫동안 대답이 없었다.
“폐하.”
불편한 침묵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을 참지 못한 서문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폐하, 제 말 뜻은, 트집 잡는 게 아니라, ···어?”
저절로 꼬물거리는 자신의 발가락을 내려다보며 말하던 서문경은 자신의 턱에 황제의 손이 턱 와 닿은 것을 깨닫고 얼빠진 소리를 냈다. 서문경의 턱을 받치듯 하고 있던 황제의 손이 힘을 주어 서문경을 고개를 자신을 향해 들어 올렸다.
“거절했다.”
황제가 툭 내뱉은 말에 서문경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경이 네 말대로 속셈이 빤히 들여다보이는데 더 생각하고 말고 할 것이 무어있누. 짐은 꼬리 아홉 달린 여우를 내 궁에 풀어 키우는 취미는 없느니.”
“여우라니.”
서문경이 고개를 갸웃했다.
“여우는커녕 토끼처럼 순진해 보이는 아가씨던데요.”
서문경의 평가를 들은 황제가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고 코웃음을 쳤다.
“너구리의 딸이 토끼일 리가 만무하지 않으냐.”
“예?”
“그 규수의 아버지인 교해근은 상서 이부 장관인 사백령의 측근이다. 사람 좋아 보이는 겉모양과는 달리 그 속내는 너구리마냥 능글맞고 간교해서 그 치에게 밉보여 누명을 쓰고 궁부를 떠난 자도 하나 둘이 아니지.”
그리고 그대가 아까 본 그 규수는, 하고 황제가 덧붙였다.
“그 교해근이 가장 귀애하는 딸이다. 외모는 판이하게 다르지만 백 년 묵은 구렁이가 열댓은 들어 있는 것 같은 속내는 제 아비와 판에 찍은 듯 하다더구나. 그런 치가 아무런 꿍꿍이도 없이 허수아비 황제의 후궁이 되겠다 했을 리가 만무하지 않으냐.”
뭐, 교혁경 그 곰 같은 놈이야 제 사촌형이 명령하니 과연 내 종질녀의 재용이 황상의 후비가 될 만치 빼어나구나 하고 실실대며 짐을 찾아왔겠지만. 황제가 이죽거리며 상장군을 비꼬았다. 황제의 말을 듣고 세상 물정 모르는 소녀처럼 새뽀얗고 마냥 순진해 보이던 교운의 얼굴을 새삼 떠올린 서문경이 내심 혀를 내둘렀다. 사람은 겉만 보고는 모르는 법이라더니.
“그런데 교해근이란 자는 어제 그 영감님의 측근이라면서 왜 갑자기 딸을 폐하의 후궁으로 들이려고 한 겁니까?”
황제의 설명과 자신이 방금 보았던 현실 사이에 묘한 괴리감이 있다고 느낀 서문경이 눈을 껌벅거리다가 물었다. 그 질문에 황제가 한 쪽 입술 끝을 슥 끌어 올려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글쎄, 역시 작일 있었던 일 때문이겠지.”
“?”
연거푸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긴 서문경을 황제가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 따가운 시선을 눈치 챈 서문경은 황제와 시선을 맞추며 의아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 때 마치 때를 맞춘 것처럼 황제가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정확히는?”
황제가 서문경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우리 깜둥새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