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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문은 들으셨습니까?”
기약 없이 계속되는 침묵이 지겨워진 백추(魄錘) 장경이 대담하게도 수상의 눈을 피해 목민관(牧民官) 이재에게 속삭였다.
“무슨 소문 말입니까?”
그러나 장경의 속삭임에 그렇게 대답한 것은 목민관 이재가 아니라 내내 석상처럼 수상 서현의 옆에 서 있던 천객(天客) 최유였다.
“무슨 재미있는 소문인지 저희에게도 좀 귀띔해 주시지요.”
사람 좋은 웃음을 만면에 떠올린 하늘손님 조원이 최유의 말을 거들었다. 입 가벼운 애기 나인들의 말투를 흉내 낸 조원의 은근한 말투에 장경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시뻘게졌다. 조원을 노려보는 장경의 눈초리가 몹시도 흉흉했다. 그러나 조원은 찌르는 듯 따가운 장경의 눈초리를 보고도 못 본 것처럼 웃으며 태연히 장경을 재촉했다.
“백추 어른, 그 소문이란 것이 대체 뭡니까?”
“염락.”
백추 장경이 수상의 눈치를 살피며 험험, 헛기침만 하고 있자 조원이 재미있는 이야기는 함께 나누자며 장경을 재차 닦달했다. 그런 조원을 보다 못한 천객 최유가 조원을 만류하며 눈짓으로 수상 서현의 얼굴을 가리켰다. 옥을 깎아 만든 것처럼 수려한 서현의 옆얼굴이 금방이라도 노성을 지를 것처럼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이윽고 서현의 입술이 움직였다. 백추 장경이 힉,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신음을 삼키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 소문이란 것이 뭔가.”
그러나 수상 서현의 입에서 나온 것은 몹시 의외의 말이었다.
“예?”
백추 장경이 어깨를 움츠린 채로 반문했다. 활처럼 유려한 서현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그것을 보고 나서야 자신이 어떤 결례를 저질렀는지 깨달은 장경이 허둥거리며 황급히 입을 열었다. ‘체재공?’, 장경과 마찬가지로 아연해 있던 천객 최유가 서현을 제지했지만 서현이 한 손을 들어 그런 최유의 입을 막았다.
“말하라.”
“그, 그것은.” 차가운 바닥에 납작 배를 대고 엎드린 백추 장경이 고했다. “화국에 떠도는 소문을 들었사옵니다.”
“화국이라.”
서현이 손가락 끝으로 날카로운 턱 끝을 살살 쓰다듬으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래, 어제 화국의 화원(畵員) 몇몇이 폐하의 부르심을 받아 천추전에 들었다지.”
“예, 폐하의 부르심을 받고 천추전에 들었던 화원이 제 질녀(姪女)인 백도관(白桃官) 장혜주의 휘하에 있는 화영과 남모라는 자들이온데 그들이 말하기를···.”
장경의 목소리가 은밀한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저절로 낮아졌다.
“폐하의 침전에 그 자가 들어있었다 합니다.”
“그 자?”
“얼마 전에 범님의 세계에서 물을 타고 온 물손님 말이옵니다.”
수상 서현이 잠시 침묵했다. 서현이 침묵하자 넓은 방 안에 덩달아 무거운 침묵이 맴돌았다.
“그 자라면, 얼마 전 체재공께옵서 폐하께 보내드린 바 있네만.”
무거운 침묵을 깨고 신선처럼 길고 하얀 턱수염을 기른 노인이 나섰다. 상서 이부 재상(宰相) 사백령이었다. 문무백관들의 수장이라 하나 그 또한 지존의 앞에서는 한낱 신하에 불과한 수상 서현을 지존인 황제보다 드높이는 사백령의 말에 누구 하나쯤 경악할 만도 한데, 놀랍게도 그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없었다.
“그런 말씀이 아니오라···.”
백추 장경이 난색을 표했다. ‘그것이 아니라?’, 천객 조원이 난감해하는 장경을 재촉하는 것처럼 그의 말을 받았다.
“어제 천추전에 들었던 화원들의 말에 의하면, 폐하께옵서 그 자를.”
“그 자를?”
“애첩이나 되는 것처럼 어여삐 여기더라 하더이다.”
장경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너른 방 안에 모인 사람들이 하나같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자가?, 하고 말하는 듯한 태도였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쯧, 못 들을 말이라도 들었다는 것처럼 수상 서현이 혀를 한 번 차더니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서현의 목소리나 표정이 전에 없이 단호했다. 그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살피던 이들도 역시 그렇지?, 하고 말하는 것처럼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보고 투실투실 살이 찐 몸을 공처럼 웅크리면서도 백추 장경이 반박했다.
“하오나 사실이옵니다. 시경원 소청이 말하기를, 폐하께옵서 그 물손님에게 서괴(西魁)의 진상품인 서래비단으로 만든 옷가지와 벽감(碧鑑)의 최고장인이 흑우(黑牛)의 가죽으로 만든 흑혜와, 또 해국(海國)에서 나는 청옥(靑玉)과 북해(北海)의 흑진주 등을 하사하셨다 하옵니다.”
“시경원 소청이?”
장경의 입에 시경원 소청의 이름이 실리자 방 안의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굳게 입을 다문 사람들이 눈썹을 찌푸리고 백추 장경을 쳐다보았다. 사람들의 눈빛에 의혹이 서리기 시작한 것을 눈치 챈 장경이 말하는데 흥이 오른 듯 상반신을 수상 서현에게로 내밀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어제 천추전에 들었던 화원들이 폐하께 받은 명령이라는 것이 참으로 희한한지라.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검은 새를 그림으로 그리고 조각으로 만들라 하명하셨다 하옵니다.”
수상 서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검은 새?”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니, 대체 어떤 새이기에.”
생각에 잠긴 듯 굳어 있는 서현의 턱과 눈을 살핀 천객 최유가 나직이 물었다. 서현의 표정이 변한 것을 미처 눈치 채지 못한 장경이 신이 나 손짓 발짓을 하며 화국의 백도관이라는 제 질녀에게 들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리고 황명을 받자와 그 새의 조각을 만든 남모란 놈이 말하기를, 폐하께옵서 침전을 찾는 물손님을 주렴 안으로 들이시고 그를 손수 품에 안아 검둥새라 부르며 몹시 귀애하셨다 하옵니다.”
방 안에 순간 침묵이 감돌았다.
“그, 폐하께옵서 물손님을 품에 안으시고.”
당혹해하는 기색이 만면에 역력한 상서 이부 재상 사백령이 그렇게 말하다 말고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천객 조원이 웬만한 일로는 웃음을 지우지 않는 고 빤빤한 얼굴을 들고 상서 이부 재상 사백령의 말을 이었다.
“그 까다로우신 분께서 곱다, 곱다 품에 안아 어르시고, 어전창고의 귀물들을 하사품으로 내리시고, 당과 같은 애칭으로 부르시며 화국의 사람들을 불러다 그를 본 딴 새의 그림과 조각을 만들게 하시다니.”
조원의 시선이 서현을 향했다. 자신을 향한 시선을 눈치 채고 서현이 말없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백추 어른의 표현이 참으로 탁월하지 않습니까.”
조원의 칭찬에 백추 장경이 반색을 하며 무릎을 쳤다, ‘역시 조원님이시오. 참으로 영민하시오.’ 그 한 마디에 졸지에 우둔한 군중이 된 사백령과 이재 등이 장경을 쏘아보았다.
“무엇이 말인가.”
서현의 무뚝뚝한 물음에 조원이 빙긋 웃었다.
“이쯤 되면 정말 애첩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지 않습니까.”
“헛소리.”
그렇게 대답하는 서현의 목소리는 싸늘하다 못해 마치 눈보라가 몰아치는 듯하였다.
“그 아이를 찾아가 보시렵니까.”
수상 서현의 굳어진 표정을 본 천객 최유가 이쯤해서 그만 두어라 조원에게 슬쩍 눈치를 주는데, 그 눈짓을 보지 못한 건지 아니면 보고도 못 본 척 하는 건지 조원이 다시금 서현에게 물었다. 서현이 대꾸 없이 조원을 노려보았다.
“체제공.”
서현의 차가운 눈초리를 웃음기 어린 눈으로 마주보다 불쑥 조원이 말했다.
“천추전에 연통을 넣겠습니다.”
“염락!”
물음이 아니었다, 통보였다. 조원의 방자한 행동에 사백령과 이재 등의 표정이 싸늘해졌고, 눈치 없는 장경조차 허둥거리는 빛을 감추지 못하였다. 깜짝 놀란 최유가 조원을 부르며 조원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뭇 사람들의 흉흉한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조원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여전히 싱글거리는 웃음을 온 얼굴에 띠운 채, 조원은 수상 서현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수분이 흘렀다.
“···그리 하라.”
수상 서현이 피로한 듯,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 올리면서 말했다. 조원의 얼굴에 드리운 웃음이 조금 더 짙어졌다. 조원이 두 손을 마른 배 위에 포개고 서현의 앞에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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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경의 시선이 장지문 앞에 궤례(?禮)하고 있는 나인들을 향했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살펴봐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나인들의 시선은 공손히 아래를 향하고 있을 뿐이었다. 방금 전에 분명히 시선을 느꼈는데 착각이었나? 일순 그렇게 생각했지만 역시 착각일 리가 없다.
“기분 탓인가.”
혼잣말을 가장해 중얼거린 서문경은 일부러 고개를 과장되게 흔들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슥, 하고 피부와 옷감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다시금 자신의 뒤통수에 와 꽂히는 시선을 느낀 서문경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뭘 엿보고 있는 겁니까.”
성큼성큼 장지문 앞까지 걸어간 서문경이 황급히 고개를 숙인 나인들의 하얀 가르마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하지만 그 추궁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한 동안 서문경은 싸늘한 눈초리로 나인들의 머리통을 내려다보다, 제 손으로 문고리를 움켜잡고 힘껏 장지문을 닫았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가로로 넓게 펼쳐진 장지문이 무너지기라도 할 것처럼 우르르 흔들렸다.
“다짜고짜 닫아 버리고 오면 장차 더 곤란해질 터인데.”
관음증이라도 있나, 하고 투덜거리며 걸어오는 서문경을 비스듬히 누운 채 올려다보면서 황제가 말했다. 황제의 의미심장한 말에 서문경이 저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 이맛살을 찌푸렸다가 곧 오리 깃털 누비이불이 황제의 허리께까지 내려와 있는 것을 보고 벌컥 성을 냈다.
“그건 왜 또 내리고 계십니까!”
“무겁다. 귀찮아.”
“깃털 이불인데 무겁기는 뭐가 무겁습니까? 깃털 이불 정도도 감당 못할 정도면 공기는 무거워서 어떻게 사십니까? 변명하지 마시고 잘 덮고 계십시오.”
안 그래도 열이 안 내려서 큰일인데. 서문경이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찬 물에 적신 천을 황제의 이마에 가져다댔다. 그런 서문경의 무릎에 채여,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푸르고 검은 구슬들이 차르르 서로 부딪쳐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오늘 황제가 서문경에게 구슬 놀이나 하자며 선물한 구슬들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덩달아 열이 오를 것 같은 황제의 이마에 닿은 천이 급속도로 미지근해졌다. 서문경은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천으로 꼼꼼히 황제의 얼굴을 닦아 준 후, 항아리에 담겨 있던 물을 은그릇에 쏟아 버리고 여관이 새로 길어다 준 찬물을 다시 항아리에 채웠다. 그리고 그 물에 새 수건을 적신 다음 그것을 그새 다시 발갛게 열이 오른 황제의 이마 위에 얹었다. 기분이 좋아졌는지 황제의 찌푸린 미간이 반듯이 펼쳐지고, 창백한 입술 사이에서는 나른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경아.”
황제가 잔뜩 잠긴 목소리로 서문경을 불렀다. 그 목소리에 이끌려 서문경이 시선을 내리자, 황제가 입술로만 서문경에게 몇 마디 말을 중얼거리면서 서문경의 손바닥을 자신의 손가락 끝으로 간질이듯이 쓸었다. 황제의 입술을 읽은 서문경의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서문경은 할 수 없다는 듯 푹 한숨을 쉬고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바닥을 마주 댔다. 서문경이 한 번 손바닥을 마주 댔다가 손바닥을 뗄 때마다 나타난 병아리를 닮은 검은 새가 빽빽 새된 소리로 울면서 황제의 머리와 어깨 근처로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이게 정말로 되다니.”
수 십 마리의 새끼새가 황제를 에워싸고 빽빽 울고 있는 것을 복잡한 눈으로 지켜보던 서문경이 불쑥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서문경의 시선이 황제의 침상(寢牀)을 향했다. 침상이라기보다는 침방 안에 들어 있는 또 하나의 방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넓은 침상 옆에는 검은 새가 그려진 족자들이 걸려 있고, 그 족자 아래에 놓인 흑단(黑檀) 탁자에도 검은 새를 조각한 장식품들이 수도 없이 늘어져 있었다. 그것을 본 서문경의 눈이 더욱더 복잡해졌다.
‘설마 까마귀나 까치에게 목숨을 구명 받은 일이라도 있는 건가.’
서문경이 곰곰이 생각하다가 곧 한숨을 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웃기지도 않은 생각을 뭘 이렇게 진지하게 하고 있담. 서문경이 뜨거워진 이마 위에 찬 손을 얹고 한탄했다. 저 황제 옆에 있으려니 자신까지 머리가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경아.”
그 때 황제가 서문경의 이름을 불렀다. 자신을 부르는 황제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어서 서문경은 무심코 어깨를 움찔했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이 막 방으로 들어설 때, 열이 올라 신경이 날카로워진 황제가 늙은 어의(御醫)의 이마에 청자 연적을 집어 던진 것을 보고 놀란 가슴이 채 가라앉지 않은 채였다.
또 무슨 일로 심기가 뒤틀렸나, 싶어 서문경이 긴장한 채 돌아보자 황제가 서문경의 하얀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문득 손짓을 했다. 창백한 황제의 손이 자신에게 손짓하는 모습이이 형체도 없는 유령이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여서 서문경은 왠지 불길해졌다.
“무슨 일이십니까.”
“덥구나.”
서문경이 묻자, 황제가 머루 같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면서 말했다. 서문경이 한숨을 쉬며 젖은 천을 든 손을 들어 올리자 황제가 갑자기 서문경의 손목을 잡았다. 뜬금없이 손목을 붙잡힌 서문경이 말없이 한 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건 뭐 하자는 거지?’
“경이 네 녀석은 체온이 낮구나.”
“그게 아니라 폐하께서 뜨거우신 게지요. 괜한 사람 더듬지 마시고 병아리나 만지십시오.”
힘들게 만들어 놨더니, 하고 서문경이 싸늘하게 투덜거리자 열이 올라 눈앞이 가물가물한 와중에도 황제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대가 옆에 있는데 무엇 때문에.”
그 말에 서문경은 찌푸린 눈으로 황제와, 황제의 머리 옆에서 작디작은 날개를 열심히 퍼덕이고 있는 새끼 새들을 번갈아보았다. 유심히 쳐다보고 있자니 불현듯 새끼 새들의 검은 털빛이 자신의 머리카락 색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섬뜩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 정수리를 관통했다. 설마 요 놈들을 저라고 생각하고 계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서문경은 충동적으로 황제에게 물으려다가 다음 순간 고개를 가로저으며 열었던 입을 다시 다물고 말았다. 어째서인지 황제에게 대답을 들으면 뭔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폐하.”
서문경이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쿨럭쿨럭 마른기침을 하던 황제가 뭔가?, 하고 묻는 것처럼 눈썹을 치켜 올렸다. 서문경이 궤례한 궁인들의 고개가 살포시 장지문을 향해 기울어져 있는 것을 눈짓하며 물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저 치들이 염탐꾼을 자청하는 것이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아니, 그것이 아니라.”
“그럼?”
의아한 듯 그렇게 물은 황제가 갑자기 목 안이 껄끄러워졌는지 기침을 하며 서문경에게 손짓을 했다. 반사적으로 흑단 탁자에 놓인 옥주전자를 들어 올리며 서문경이 오늘 아침의 일을 떠올렸다.
“자꾸 사람들이 저를 훔쳐보고 수군거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물론 예전에도 그랬었지만 오늘은 뭐랄까, 태도가 좀 더···.” 서문경이 주전자를 든 채로 적당한 표현을 찾아 머뭇거렸다. “은밀하달까.”
그러니까 떠돌뱅이와 정분이 난 동네 처녀애에 대해 수군거리는 것처럼, 하고 말했다가 서문경이 당장 윽, 하고 혀를 빼어 물었다. 자신의 표현에 온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낀 탓이었다.
“은밀하다라.”
황제가 마른기침을 쿨룩대며 생각에 잠겼다. 그럴 일이 있었더냐, 하고 이윽고 황제가 묻는 말에 서문경이 도리질을 쳤다.
“제가 요즘 한 일이라고는 폐하와,”
대화를 나누고 산책을 갔다가 옷과 신발을 몇 개 선물 받은 정도 밖에, 하고 대답하다가 서문경이 멈칫했다. 서문경의 시선이 방바닥 여기저기를 굴러다니고 있는 구슬들에 가 꽂혔다. 침실 천장에 박혀 있는 야명주(夜明珠)의 빛을 받아 손톱만한 크기의 푸르고 검은 구슬이 밤하늘의 별처럼 빛났다. 서문경의 눈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구슬치기를 하고 놀던 구슬과 자신의 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폐하, 설마.” 서문경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저거, 설마.”
“해국(海國)산 청옥(靑玉)과 북해(北海)의 흑진주다.”
“!”
의외의 대답에 깜짝 놀란 서문경이 황급히 구슬들을 두 손 가득 쓸어 모았다.
서문경이 진주와 청옥을 두 손에 받쳐 든 채 황제를 향해 무어라 말하려는 찰나였다. 구조룡이 그려진 장지문 너머로 비치는 사람의 그림자가 갑자기 늘어난다 싶더니, 단순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나인들이 일제히 넙죽 절을 하며 외쳤다.
“수상 체제공 서현과 상서 이부 장관 사백령 이하 천객들이 들었사옵니다!”
어째서? 서문경과 황제의 표정이 싹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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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상께오서 이토록 옥도미령(玉度靡寧)하오시니 신들의 근심이 참으로 망극합니다.”
사내의 담담한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신들은 다만 주상께오서 강녕해 지시기만을 바라고 또 바랄 뿐이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내의 목소리나 태도는 말의 내용처럼 망극한 슬픔은커녕 오연해 보일 정도로 예사로웠다.
서문경은 저절로 찌푸려지는 눈을 들어 사내의 무표정한 얼굴을 응시했다. 사내의 뒤에 줄줄이 열을 지어 앉아 있던 조복(朝服) 차림의 남자 몇몇이 그 무례한 시선을 눈치 채고 서문경을 향해 눈을 부라린다. 그러나 그 흉흉한 눈초리에 서문경이 겁을 먹어 움츠려드는 대신 보란 듯 코웃음을 쳤다. 서문경이 눈짓으로, 감히 황제의 용안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수상 서현을 가리키는 것을 본 남자들이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험험, 헛기침을 하면서 시선을 돌린다.
“경(卿)들이 침전까지 어인 일인가.”
열이 올라 말랑말랑해진 몸을 억지로 일으켜 다리를 꼬고 있던 황제가 수상 서현을 빤히 쳐다보다가 불쑥 물었다. 그 말에 대답한 것은 서현의 뒤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상서 이부 장관 사백령이었다.
“황상의 성후(聖侯) 쇠약하시다는 비보를 전해 듣고 근심을 참지 못하여 이리 알현을 청했나이다.”
“경들의 충심이 기특하여 내 웃음이 다 나오는군.”
황제가 꼰 다리 위에 턱을 괴며 픽, 웃었다. 그 명백한 비웃음에, 뽐내듯 목을 빼고 말하던 사백령의 주름진 얼굴이 와작 일그러졌다.
“헌데.”
황제가 싸늘한 눈으로 서현 이하 신하들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황제의 시선을 받고 사백령이나 이재나 최유 등이 불편한 듯 시선을 피하는 반면, 구슬주렴 바깥에 자리를 잡고 앉은 이후로 내내 싱글싱글 웃고 있던 조원이 무엄하게도 황제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실눈을 뜨고 씩 눈웃음을 쳤다.
황제의 시선이 잠시 조원의 얼굴에 머물렀다. 서문경은 고개를 돌려 조원의 표정을 살핀 후, 다시 황제의 얼굴로 눈을 돌렸다. 눈을 가늘게 뜨고 웃고 있는 조원의 얼굴이 마치 밀랍 가면을 뒤집어 쓴 것 같다고 생각하며 황제를 바라보자, 황제 또한 가면을 쓴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한 폭의 먹그림 같다고 생각했다. 표정도, 빛도, 색도, 아무 것도 없는, 그저 흑과 백의 세계.
“짐을 배알하였으니 이만 돌아가 보는 것이 어떤가. 태의(太醫) 영윤이 고하기를, 곧 정전(正殿)에 나아갈 수 있을 정도로 기력이 회복될 것이라 하니 경들은 근심 말고 거처로 돌아가 보도록 하라.”
그러나 이윽고 황제가 그렇게 말했을 때, 황제의 표정은 평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언제나처럼 비웃는 듯 비스듬한 입매와 자신 이외의 모든 것들을 가소로이 여기는 듯한 눈빛을 보고 서문경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방금 전의 그 표정은 설마 환각이었나 싶었던 것이다.
“객께서는···.”
서문경이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문득 서현이 말했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서문경은 뒤늦게 수상이 자신을 부른 것을 알고 어안이 벙벙해져서 서현을 돌아보았다.
“객께서는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가.”
“? 폐하 덕분에 부족한 것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 그렇군. 다행이오.”
서현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듯이 말하고서 서문경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흡사 주인의 뒤를 따르는 개처럼 서현의 뒤에 앉아 있던 노인이며 공처럼 뚱뚱한 사내며 다른 이들과는 달리 평복(平服) 차림을 한 석상 같은 남자가 서문경의 몸을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한다.
짧게 자른 머리카락에서부터 하얀 깃과 장식 소매를 댄 검은 단삼, 검은 마노로 장식한 푸른 주단 허리띠, 하얀 봉지와 그 아래의 족건까지 샅샅이 훑는 남자들의 눈길이 점점 더 굳어졌다. 남자들의 무례한 눈길에 덩달아 표정이 굳어진 서문경이 무어라 한 마디 쏘아 붙이려고 입을 열었을 때였다.
“무엇을 그렇게 보나.”
황제의 차가운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폐하.”
선수를 빼앗긴 서문경이 입을 벌린 채 황제를 돌아보자, 황제의 손이 서문경의 손목을 움켜잡고 서문경을 자신의 품으로 휙 잡아당겼다. 반사적으로 황제의 손을 뿌리치려던 서문경이 자신의 손목을 붙잡고 있는 황제의 손이 델 듯이 뜨겁다는 사실을 알고 멈칫했다.
그러는 사이 서문경의 발끝에 채여 흑진주와 청옥 등이 차르르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그 중 몇몇은 황제와 수상 사이에 쳐진 주렴 밖을 빠져나가 문지방 근처에 앉아 있는 조원과 최유 사이까지 굴러가서야 구르는 것을 멈췄다. 바닥을 굴러다니는 구슬들을 무심코 내려다 본 장경이 헉, 하고 숨을 삼켰다.
“이것은 해국 청옥과 북해 흑진주가 아닙니까!”
“백규(百揆)!”
“아니, 이 귀한 것을···.”
어전(御前)에서 감히 목소리를 높인 백추 장경의 무례에, 대경(大驚)한 이재가 장경을 만류했건만 싸구려 유리구슬처럼 바닥을 굴러다니는 흑진주와 청옥을 보고 눈이 돌아간 장경은 이재의 목소리가 귀에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소문이 사실이었던 모양입니다.”
장경이 수선을 피우는 것을 보고 역시 보석이었나, 하고 서문경이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하는데 조원이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소문? 조원이 내뱉은 말에 서문경은 저절로 자신의 귀가 쫑긋거리는 것을 느꼈다.
“소문이라니요?”
“어전에서 어찌 허락도 없이 입을 놀리는가.”
서문경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묻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무섭게 표정을 굳히고 있던 사백령이 서문경을 꾸중했다. 그 말을 듣고 잠시 입을 다문 서문경이, 곧바로 입을 열어 반박했다.
“제가 무엄하게 군 것은 사실이오나, 이 방 안에 있는 사람들 중 제 허물을 들출 이가 있기는 합니까.”
하고 말하는 서문경의 눈이 차례로 방 안의 사람들을 훑었다. 황제의 앞에서 허락도 없이 고개를 치켜들고 있는 최유와 묘한 미소를 흘리고 있는 조원, 그리고 탐욕스러운 손길로 황제의 보석을 더듬고 있는 장경과 짐짓 충성스러운 신하인 척 고두(叩頭)하고 있으나 실상은 그 머리를 황제가 아닌 수상을 향해 수그리고 있는 사백령과 이재를 비웃는 눈길로 바라본 서문경의 눈길이 마지막에는 서현에게 가 멎었다.
서문경의 눈길이 자신에게 향한 것을 눈치 챈 서현이 말없이 서문경을 마주보았다. 한 동안이나 서현의 눈과 마주보던 서문경이 불현듯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 표정 없이 담담하기만 하던 서현의 눈에 문득 이채가 스친 때문이었다.
“당신,”
“무슨 소문인가.”
서문경이 자신도 모르게 서현을 향해 한 손을 뻗는데, 황제가 서문경의 허리를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허리를 끊었다. 그제야 자신이 아직 황제의 팔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서문경이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가 싸하게 굳어 있는 황제의 턱을 보고 흠칫 놀랐다. 언제나 신경질적인 황제였지만 이토록 심기가 뒤틀린 듯한 표정은 또 처음이었다. 물론 신하라는 자들이 저 모양이니 그럴 만도 하지만···.
“짐이 묻지 않나.”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황제가 좀 더 뾰족해진 목소리로 신하들을 재촉했다.
“성노(盛怒)치 마시옵소서.”
다른 이들이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조원이 나서서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서문경은 당장이라도 황제가 조원의 머리에 벼루라도 집어 던져버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
서현의 눈에서 그에게 절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감정을 발견했을 때와 비슷한 의구심이 솟구쳤다. 서문경은 황제를 바라보는 대신 구슬주렴 사이로 보이는 조원의 하얀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상해. 뭔가 껄끄럽고 불쾌한 감정이 머릿속을 갈작갈작 긁는 기분이 들었다.
“황궐 내에···.” 조원이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폐하께옵서 물손님을 총애하신다는 소문이 파다하옵나이다.”
문득 조원의 눈이 서문경을 향한다 싶더니, 조원이 그렇게 말했다. 조원의 말을 들은 순간 서문경은 응?, 하고 한 쪽 눈을 찡그렸다.
“총애?”
순간적으로 조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리던 서문경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그것 참.” 아니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서문경이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어감이 조금 묘하군요.”
총애가 그런 종류의 총애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껄끄러운 기분을 떨쳐 내려 서문경이 애써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딱딱하게 굳은 입매를 억지로 당겨 웃던 것도 잠시, 조원과 눈이 마주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문경의 얼굴이 다시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조원이 의미심장한 미소가 어린 눈으로 서문경의 얼굴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조원의 시선을 따라 함께 눈을 돌리던 서문경이 이윽고 화들짝 놀라 자신의 허리에 감겨 있는 황제의 팔을 쳐내고는, 숫제 으르렁거릴 기세로 조원에게 따졌다.
“두루뭉술하게 말하지 말고, 제대로 말해 보십시오. 제가 뭘 했다고요?”
조원이 서문경의 말을 고쳤다.
“자네가 뭘 했다는 게 아니라 폐하께오서 자네를 귀애하신다는 소문이 궐 안에 돈다는 말이네.”
“그러니까-.”
서문경이 머리가 아픈 듯 제 이마를 부여잡고 중얼거렸다. 입에 담는 것만 해도 망측스러운지 그러니까, 하고 말하는 서문경의 입매가 부르르 떨렸다.
“폐하와 제 사이가 그렇고 그렇다는 소문이 돈다 그겁니까?”
“그렇네.”
“어느 미친놈이!”
분통을 참지 못한 서문경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나 버럭 고함을 질렀다.
“어느 미친놈이 그런 개 같은 소리를 지껄인답니까?”
소문을 퍼뜨린 자가 자신의 앞에 있으면 당장 그 놈의 멱살을 휘어잡을 기세로 서문경이 화를 냈다. 겁도 없이 언성을 높이는 서문경의 행동에 식겁한 사람들이 수상과 황제의 안색을 차례로 살폈다. 그러나 그렇게 겁먹은 사람들이 무색해지도록 황제는 비스듬히 침을 베고 기댄 채 서문경을 말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고, 또 수상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그런 황제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헛소문인가?”
빙그레 웃으며, 역정을 내는 서문경을 응시하고 있던 조원이 불쑥 물었다. 있는 대로 얼굴을 찌푸리고는 부득부득 이를 갈고 있던 서문경이 뜻밖의 질문을 받고 당황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서문경의 입에서 허, 하고 헛웃음이 흘러 나왔다.
“어째서?”
설레설레 도리질을 하는 서문경을 조원이 웃음기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 오해를 받을 만한 행동을 한 적도 없고, 무엇보다 폐하와 저 모두 남자가 아닙니까.”
“아, 그건가.”
서문경의 대답을 듣고 조원이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자네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범님의 세계에서 온 자였었지. 그 뜻을 파악하기 힘든 모호한 중얼거림의 서문경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 세계에선 아니라는 겁니까?”
혹시 싶어 서문경이 조심스럽게 묻자, 조원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서문경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진짭니까?”
“뭘 그렇게 놀라나. 범세계에서도 그런 자들이 종종 있지 않았나.”
“그것은, 예, 뭐. 그렇지만.”
서문경이 자신도 모르게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중얼거리고는, 힐끗 눈동자를 굴려 황제를 곁눈질했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폐하께서는?”
“그러니까···, 그, 황제시라 대를 이으셔야 하니까.”
“짐의 후사(後嗣)를 염려해주는 마음이 고맙고 기특하도다.”
서문경이 망설이다 내뱉은 말에 황제가 조용히 대꾸했다. 서문경이 으, 하고 눈을 구겼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방금 자신이 한 말이 황제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눈치 챈 탓이었다.
“저, 마음 상하게 하려는 뜻은 없었습니다.”
“후비나 후정(後庭)이 사내인지 계집인지는 크게 중요치 않네.”
그 때 조원이 다시 끼어들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체제공?, 자신의 말에 어리둥절해하는 서문경을 가늘게 뜬 눈으로 흘깃 보고 조원이 곧바로 생각에 잠겨 있는 수상에게 물었다. 서현은 대꾸하지 않았다.
“지존에게는.” 조원이 수상을 응시한 채로 말을 이었다. “아니, 용께는.”
용! 조원이 실수인 척 말을 고치자, 서문경이 놀라서 두 눈을 부릅떴다. 놀란 서문경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조원이 말을 이었다.
“용은 신수(神獸)이니, 홍진(紅塵)에 사는 사람들과 어찌 같을손가.”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 조원이 태학궁에서 말한, 자신을 범님의 세계에 돌려보내 줄 수 있다는 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한 서문경이 더듬더듬 물었다. 잔뜩 긴장한 서문경의 모습을 보고 조원이 실눈을 뜨고 웃었다. 어린애의 뒤꿈치를 무는 뱀처럼 교활한 듯도 하고, 백 년을 산 현인(賢人)처럼 인자해 보이기도 하는 오묘한 웃음이었다.
“용의 배필은 같은 용(龍)뿐이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하고 조원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자신의 배필을 같은 용으로 만드는 것이지. 어찌 범과 다람쥐가 교합할 수 있을손가. 그러니 결과적으로 용의 배필이 사내인지 계집인지는 크게 중요치 않아.”
그래, 이건 아는가?, 조원이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질문을 던지며 방 안을 빙 둘러 보았다.
“여기서 용이란, 누구를 이름인지.”
“이 세계를 만들었다는···.”
하고 대답하다가 서문경이 도중에 입을 닫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물론 이 세계를 만들고 보살펴 주시는 신수도 용님이시지. 하지만 이 세계에 대대로 군림하는 이 또한 용일세.”
서문경은 방 안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수상의 등에 닿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정작 그 말을 꺼낸 조원의 눈은, 황제와 수상 중 그 누구에게도 닿아 있지 않았다. 서문경은 황제의 안색을 살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시선이 수상을 향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아니다, 다음 순간 서문경은 고쳐 생각했다. 자신의 시선은 수상을 향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등지고 있는 장지문을 향하는 것이었다.
“······.”
서문경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장지문 가득 그려진 구조룡이 수상의 머리에 발톱을 세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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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으십니까.”
서문경이 황제의 이마에 돋아난 식은땀을 닦으며 조용히 물었다. 황제가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나 그런 황제의 얼굴이나 입술이,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해서 서문경은 황제의 대답을 조금도 믿지 않았다.
“해가 졌구나.”
“일어나시면 안 됩니다.”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 황제를 서문경이 다시 눕혔다. 조심스레 힘을 주어 누른 황제의 가슴팍이 힘에 부치는 일을 한 적도 없는데 팔딱팔딱 거칠게도 뛰고 있어서 서문경은 무심결에 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대야말로, 용케도 얌전을 빼고 있더구나.”
불쑥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황제가 웅얼웅얼 대꾸했다. 잘 들리지 않는 말을 듣느라 한 쪽 눈을 찡그리고 있던 서문경이 황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머지 눈을 마저 찌푸렸다.
“이렇게 심술 맞으신 것을 보니 역시 폐하가 맞으시군요.”
너무 얌전하셔서 순간적으로 우리 폐하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서문경이 날벼락이 떨어질 각오를 하고 빈정거렸다. 그러나 서문경의 말을 들은 황제는 화를 내기는커녕 칭찬이라도 들은 것 마냥 빙그레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우리 경아가 웬일로 그리 기특한 말을 하누?”
“···기특한 말이라니.”
제가 언제요. 서문경이 진심으로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런 서문경의 머리라도 쓰다듬으려는 심산인지 황제가 한 손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자신의 머리까지 채 올라오지도 못하고 헤매는 모양새가 안쓰러워 서문경이 한숨을 푹 쉬고는 황제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기 쉽도록 고개를 숙여 주었다.
“우리 폐하라니, 하는 말이 제법 귀엽지 않으냐.”
“아.”
황제가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자신이 방금 전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해 낸 서문경이 낭패라는 듯 미간을 구겼다. 말투라는 게 생각보다 잘 옮는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서문경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폐하.”
“음?”
“저기, 그런 말씀은···, 자제하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무슨 말?”
“그러니까, 우리라거나.”
또 깜둥새라든가, 서문경이 미간을 찌푸린 채로 중얼거렸다.
“흐응.”
자신이 어째서 그래야 하냐고 비웃는 것처럼 황제가 곧바로 코웃음을 쳤다.
“폐하께서는 그런 소문이 불쾌하지 않으십니까?”
의외의 반응에 서문경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고개를 기울이느라 원래의 자리로 올라가려고 하는 서문경의 머리를 자신 쪽으로 잡아 눌러 쓰다듬으며 황제가 츠츠츠, 혀를 찼다.
“그깟 소문 하나에 일희일노하는 것은 사내장부가 할 만한 일이 아니지.”
그렇게 말하는 황제의 말투가 너무 단호해서 서문경은 할 말을 잃었다. 자신과 입을 모아 불만을 토할 황제가 저렇게 태평하게 나오니 더 이상 할 말이 없기도 하고, 또 생각보다 호탕한 황제의 대처가 조금 놀랍기도 해서 서문경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있으려니 서문경의 머리를 쓰다듬는 황제의 손길이 조금 거칠어졌다.
“싫으냐.”
그러다가 불현듯 던져진 질문에 서문경이 멈칫했다.
“예?”
“싫으냔 말이다.”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황제의 손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머리 위에 얹혀 있던 무게감이 사라지자, 무심코 머리를 든 서문경이 당황한 얼굴로 황제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진하게 간 먹물을 찍어 놓은 것처럼 새카만 황제의 눈이 서문경의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과 마주치자 순간 서문경은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저는···.”
“너도 싫으냐.”
서문경이 겨우 무거운 입을 여는데, 황제가 다시금 물었다.
“너도···, 라니요?” 황제의 말에서 걸리는 구석을 발견한 서문경이 망설이다 반문했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서문경이 재차 캐묻자 황제가 못 이긴 척 떨떠름한 투로 대꾸했다. 하, 하고 서문경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누굽니까.”
하고 묻고 나서야 서문경은 자신에게 그것을 물을 자격도 이유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미 말은 입 밖으로 튀어나간 뒤였다. 내가 왜 그랬지, 서문경은 뒤늦게 한탄하면서 입과 눈을 동시에 일그러뜨렸다.
“궁금하냐.”
황제가 서문경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물었다.
“그렇다기보다는···, 그냥, 그 치가 괘씸해서 그렇습니다.”
“왜?”
“그냥.”
하고 말을 얼버무리면서 서문경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지금 오지랖 넓게 행동하고 있다는 건 알지만, 사람 마음이 무 자르듯 뚝 자를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스스로에게 변명하듯이 중얼거리고 나서, 서문경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혹시 그 자입니까?”
“그 자?”
“조원, 말입니다.”
“그 자 뿐만은 아니지.”
서문경은 자신의 질문에 대한 황제의 대답이 일부러 핵심을 비켜 나가려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말하는 황제의 목소리가 유난히 우울하게 들려서 뭐라고 빈정거리려던 것을 그만두었다.
“그래, 그 자 뿐만이 아니라···.”
황제가 방금 전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하며 서문경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껄끄러운 소문이 돈다니 어쩌면 그대도 곧 그럴 테지.”
서문경을 향해 내밀었던 손이 서문경의 곁을 비켜나 그의 발치에서 뒹굴고 있던 검은 새 조각을 집어 들었다. 서문경의 시선이 새 조각을 쥐고 있는 황제의 손을 향했다.
가엾도록 말랐지만 뼈마디 하나하나가 사내답게 굵은 손이 검은 병아리의 머리를 쓰다듬고 작은 부리 끝을 튕기듯 스치고 손을 대면 보송보송한 털이 만져질 것 같은 둥근 등을 슥 훑었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황제의 손이 새 조각이 아니라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고 입술을 훔치고 제 등을 훑는 것처럼 느껴져서 서문경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목에 가시가 걸린 듯 껄끄러운 감정이 반, 살아 있지도 않은 새 조각을 저리도 애틋하게 매만지는 황제가 안쓰러운 마음이 반이었다.
“그래, 내일부터는 천추전에 문안 드는 것은 그만둘 텐가.”
황제가 새 조각을 향한 시선을 들지 않은 채 물었다.
“그만두고 싶다 하면 그렇게 해주실 겁니까.”
서문경이 한 손에 들고 있던 수건을 탁자 위에 놓고,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앉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럴 리가.”
황제가 딱 잘라 대꾸하며 새 조각을 침 옆에 내려놓았다. 그 대답을 듣고 서문경이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확실히 그런 소문은 찜찜하지만.”
서문경은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며 황제의 침상 아래로 내려왔다. 황제가 ‘가는 건가?’하는 눈으로 그런 서문경을 쳐다보았다. 자신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눈으로 좇는 황제를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마음이 짠해져서 서문경이 다시 침상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그러자 황제가 다시 안심한 듯 굳었던 표정을 풀고 스르륵 눈을 감았다.
“그런 소문은 찜찜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 치들이 바라는 대로 해줄 마음은 없습니다. 보아하니 폐하의 병문안은커녕 그 소문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찾아온 것이 눈에 뻔히 보이던데요.”
서문경은 소문이 거짓이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툭 자리를 털고 일어서던 수상과 조원 등을 생각하고 이를 갈았다.
“뭐, 헛소문을 퍼뜨린 것들이야 잡아다 경을 치면 되는 것이고, 그 소문이 사실이 될 것도 아니고.”
서문경이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다가 갑자기 입을 딱 다물고 눈을 감은 채 침상 위에 누워 있는 황제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파리하게 시든 황제의 얼굴이 오늘따라 유난히 불안하고 우울하게 보였다. 그 창백한 낯빛과, 그림자가 진 것 같은 표정을 보고 있으려니 안쓰러운 마음에 저절로 입술을 깨물게 된다.
서문경은 다시금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며 작게 도리질을 쳤다. 황제를 코앞에 두고도 빳빳이 고개를 쳐들고 있던 수상 서현의 모습이나 그런 수상에게 거리낌 없이 무릎을 꿇고 절을 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어지럽게 맴돌았다. 또 열이 올라 숨을 헐떡이고 있는 황제를 보고도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는 대령상궁이나 내시감, 태의들을 생각하자 불쑥 치솟아 오르는 짜증으로 머리가 아팠다.
그런데 내가 왜.
서문경이 이를 갈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못마땅하게 치켜 올라갔던 서문경의 눈꼬리가 스르륵 아래로 내려왔다. 마른 입술 사이로 색색 더운 숨을 내쉬고 있는 황제의 모습을 보자 순간 솟구쳤던 짜증도, 독기도 풍선에 바람 빠지듯 빠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후우.”
서문경이 길게 숨을 내쉬며 황제의 이마에 젖은 천을 올렸다. 얇은 천 한 장을 사이에 두고 느껴지는 피부에 어느새 또 열이 올라있어서 저절로 혀를 차게 된다. 분명히 짜증도 나고 궐내에 파다하다는 그 괴이한 소문이 신경 쓰이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서문경이 한숨을 섞어 중얼거렸다. 찬물을 적신 천을 든 서문경의 손가락이 황제의 얼굴을 정성스레 닦아주었다. 얇은 피부 아래 둥그런 뼈가 그대로 만져지는 마른 이마, 움푹 들어간 눈과 딱딱한 광대뼈, 단단한 턱.
‘너도 싫으냐.’
황제가 우울하게 중얼거리던 목소리가 불현듯 귓전에 울려서 서문경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째서인지 이 깡마른 사내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이 사내의 신세가 딱하고, 이 자를 업신여기는 사람들이 언짢고, 그래서 이 치를 그대로 놓아둘 수가 없어졌다.
어쩔 수 없구나. 서문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경아.”
그 때 문득 눈을 감고 있던 황제가 서문경의 이름을 불렀다.
“많이 말씀하시면 몸에 안 좋습니다.”
그렇게 대꾸하는 서문경의 목소리는 앵돌아진 것처럼 무뚝뚝했지만, 그 불퉁한 투와는 달리 말의 내용은 상냥했다.
“경아.”
“폐하, 이렇게 계속 말씀하시면,”
“용이란 건 말이다.”
“!”
생각지도 못한 말에 서문경이 눈을 부릅뜬 채 굳었다. 감았던 눈을 뜬 황제가 서문경의 표정을 보고 픽 웃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것을 서문경이 만류했지만 황제는 되었다며 손을 내저어 보였다. 좀처럼 뜻을 굽히지 않는 황제에게 밀려 서문경이 황제의 등 뒤에 침을 받쳐 주자, 황제가 푹신한 비단 침에 등을 기대고 나른한 한숨을 내쉬었다.
“조원, 그 치가 용에 대해 앞뒤 설명 없이 지껄여대고 내뺐으니 그대는 무슨 말을 하나 어리둥절했었겠지.”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서문경이 얼떨떨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매사에 또릿하고 때로는 또릿한 것을 지나쳐 모난 구석까지 있는 서문경이 어리벙벙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귀여웠던지 황제가 두 팔을 뻗어 서문경의 몸을 제 품 안에 가두었다. 황제의 갑작스런 행동에 서문경이 흠칫하는데, 서문경이 제정신을 차리고 제 몸을 밀어내기 전에 황제가 먼저 움직여 서문경의 어깨 위에 탁 제 턱을 올렸다. 빗장뼈에 황제의 턱이 부딪쳐 서문경이 아야, 하고 신음을 흘렸다.
“이 세계에서 용은, 이 세계를 이루는 용님을 말하기도 하지만 황제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서문경이 고개를 갸웃하며 대꾸했다, ‘그건 저희 세계에서도 그렇습니다만. 물론 옛날 일이지만.’
“비유 따위가 아니다.”
서문경의 말을 듣고 황제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용의 세계에서의 황제는, 진짜 용(龍)이어야만 한단다.”
황제가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서문경의 목덜미에 콧등을 묻었다.
“인간이 아니라 신수(神獸).”
즉, 하고 황제가 속삭였다.
“사람의 외피(外皮)를 뒤집어 쓴 짐승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