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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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우십니까.’

오경박사 소천 경모가 서문경의 감은 눈 위에 살그머니 손을 대고 물었다. 턱 끝을 든 채로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던 서문경이 그녀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경모박사가 서문경의 눈을 가린 채로, 서문경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오목한 인중 아래의 입술이 파르라니 질려 있었다. 오뚝한 콧마루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또르르 흘러 입술 사이에 맺혔다가 마른 턱 끝에 가 걸렸다. 턱 끝에 매달려 있던 물방울이 유려한 목선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자, 다시금 위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새로이 턱 끝에 매달렸다. 

냉한(冷汗: 식은땀)인가, 두 명의 박사가 참례(參禮)하는 수객의 발침(拔針)의식을 멀찍이서 구경하던 서생들이 수군거리다가 어느 순간 멈칫 입을 다물었다. 어디에선가 훅 바다 냄새가 풍겨 온 탓이었다.

‘그렇다면, 뜨거우십니까.’

소천 경모가 서문경의 목을 누르며 물었다. 물을 마시는 사람처럼 거칠게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던 서문경의 목젖이 잠잠해졌다. 서문경이 파랗게 질린 입술을 열어 소천 경모의 말에 대꾸했다. 조금. 

‘정확히 몸의 어디가 뜨거우십니까.’

‘머리가, 아니, 목구멍이, 아니, 그것이 아니라···.’

‘이곳이지요.’

혼란스러워하는 서문경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만 있던 소천 경모가 서문경의 말허리를 부드럽게 끊으며 서문경의 가슴팍에 한 손을 짚었다. 서문경이 멍청히 턱 끝을 끄덕였다. 머릿속이 타는 듯 뜨겁고 불덩이를 삼키는 듯 목구멍이 홧홧해서 지금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곧 힘이 가야 할 곳으로 갈 겁니다.’

소천 경모가 말했다. 조금만 참으면 안 아플 게다, 칭얼거리는 어린애를 어르는 듯 부드럽고 달디 단 말투였다. 가진 힘이 미약하니 그리 고통스럽지도 않을 것을. 소천 경모가 서문경을 어르는 것이 못마땅했는지 서문경의 뒤통수를 받치고 힘을 불어 넣고 있던 학승박사가 끌끌 혀를 찼다. 그 말에 무어라 소천 경모가 나무라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러나 정작 서문경은 학승박사가 빈정거리는 소리도, 그것을 나무라는 소천 경모의 목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다. 물속에 잠긴 것처럼 귓전이 먹먹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대의 힘이 어디로 갑니까?’

소천 경모가 조용히 물었다. 서문경의 가슴께를 짚고 있던 그녀의 손이 살그머니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소천 경모에 이어, 자신의 뒤통수에 닿아 있던 학승박사의 체온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서문경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정수리에서 시작되었던 그 뜨거운 기운이 목구멍을 지나 가슴에 잠겼다가, 다시 온 몸을 돌고 있었다. 가슴께에서 일직선으로 내려가 단전(丹田)에 자리를 잡았던 열기가 이윽고 서문경의 다리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리고 그 열기는 서문경의 다리와 발, 마지막으로 발가락 하나하나까지 뜨겁게 데운 다음 다시 위로 솟구쳐 올라왔다. 

‘팔.’

서문경이 중얼거렸다.

‘팔입니까.’

‘아니, 손.’

죽은 것처럼 축 늘어져 있던 서문경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손이.’

그저 손가락 끝을 조금 움직였을 뿐인데, 온 몸이 펄쩍 튀어 오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덕분에 조금 얼떨떨한 심경이 된 서문경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정작 서문경의 입에서 토해진 것은 목 졸린 사람들이나 낼 법한 기묘한 쇳소리였다. 휘파람 소리처럼도 들리는 쇳소리를 몇 번이나 토해낸 다음 서문경은 숨을 몰아쉬었다. 

‘손입니까.’

서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천 경모가 말했다.

‘이제 눈을 뜨셔도 됩니다.’

‘다 끝난 겁니까?’

소천 경모의 말대로 눈을 뜬 서문경이 연신 눈을 껌뻑이며 물었다. 

‘예, 다 끝났습니다. 그런데, 역시 눈이 뻑뻑하신지요?’

뒷걸음질 쳐 서문경에게서 몇 발자국 물러난 오경박사 소천 경모가 손등으로 눈가를 비비고 있는 서문경을 보고 물었다. 예, 아무래도 너무 오래 눈을 감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서문경이 뻑뻑한 눈을 가늘게 뜨며 대답했다. 그 대답에 소천 경모가 불현듯 웃었다.

‘그게 아닙니다.’

‘발밑을 보시게.’

하고 말한 것은 조원이었다. 조원의 목소리를 듣고 그에게로 시선을 돌린 서문경이 자신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자신의 발침 의식을 하는 내내 조원이 먹어치운 것이 분명한 등귤(橙橘) 껍질과 준시(??) 꼭지들이 화류목(樺榴木) 사방탁자 위에 널브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 다 고생하고 있는데 혼자서 뭘 그렇게 드신 겁니까.’

‘다 바닷물이네.’

서문경의 핀잔을 못 들은 척 받아 넘기며 조원이 서문경의 발치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바닷물?, 딴청을 부리는 조원을 몹시 못마땅해 하면서도 서문경이 조원이 가리키는 대로 자신의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이건 웬.’

서문경의 발치에 그의 머리통만한 물웅덩이가 생겨 있었다. 얼떨떨해진 서문경이 자신의 얼굴을 훔쳤다. 메마른 손에 물기가 흥건하게 묻어 나왔다. 

‘바닷물?’

‘그래, 그대가 타고 왔던 그 물이네.’

조원이 어깨를 으쓱한 후 다가와서는, 서문경의 어깨에 척하고 제 팔을 걸쳤다.

‘손님들이 제 몸 속에 잠들어 있는 힘을 각성하는 때는, 각 세계를 잇는 통로를 탔을 때 정도지. 나의 경우는 하늘이고, 자네의 경우는 물.’

조원이 말하며 서문경의 발치에 고여 있는 바닷물을 자신의 한 발로 힘껏 밟았다. 찰박, 요란한 소리를 내며 튀어 오른 바닷물이 서문경의 바짓단을 흠뻑 적셨다.

‘힘을 끄집어내는 의식이었으니, 힘의 통로인 물이 나타난 것은 당연한 일이지.’

‘천객들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찌푸린 눈으로 젖은 바짓단을 내려다보고 있던 서문경이 자신의 어깨에 둘러져 있는 조원의 팔을 거칠게 쳐내며 물었다. 

‘글쎄.’

서문경에게 거부당한 조원이 어깨를 한 번 으쓱한 후 팔짱을 꼈다.

‘천객들의 경우에는 자네처럼 간단치가 않지. 돌풍이 일어나거나, 심할 경우 폭풍우가 몰아치기도 하니까.’

‘호오.’

‘객의 몸 안에 숨어 있는 힘의 양에 따라 참례하는 박사의 수도 다르고, 발침 의식 준비에 드는 금액도 달라.’

‘그럼 당신의 경우는 어땠습니까?’

‘오경박사 모두와 이미 은퇴한 술사 몇몇까지 참례했었지.’

그렇게 말하는 조원의 눈이 묘한 장난기로 반짝였다. 서문경의 자존심을 사정없이 깔아뭉개는 자신의 말에 서문경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호오, 그것 참···.’

서문경이 그런 조원을 똑바로 쳐다보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그것 참?’

‘민폐로군요.’

댁 집도 아닌데 작작 좀 하지 그러셨습니까, 서문경이 끌끌 차를 하며 한 말에 순간 정적이 맴돌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문지방 너머에 옹기종기 모여서 수객의 발침 의식을 구경하러 모여 있던 학궁의 술사들이 하나둘씩 서문경의 발언을 질타하는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저 수객이 지금 무어라 했는가. 창혜각에서도 첫 손에 꼽히는 술사이신 조원님께 무례하기 짝이 없도다. 저 수객의 능력은 어떠하기에 저리도 방자하기 짝이 없는가? 등등.

‘허락도 안 받고 훔쳐보는 처지에 뻔뻔도 하십니다.’

서문경이 웅성거리는 서생들에게 짐짓 웃는 척 다가가서는, 그렇게 쏘아붙이며 장지문을 닫아 버렸다. 당황한 서생들의 웅성거림이 더욱더 커졌지만 장지문을 등지고 선 서문경은 그 말들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자네···,’

‘이런 반응을 원하고 제 속을 긁으신 것일 테니 불만은 없으시겠지요.’

무어라 자신에게 꾸중이라도 할 기세인 학승박사를 일별하고 서문경이 조원에게 선수를 쳐 말했다. 학승박사가 기가 막혀 헛웃음을 흘리는 것을 보고 조원은 씩 웃으며 턱 끝을 끄덕였다.

‘과연 천하의 상국께서 그리 표현할 만한 아이로다.’

‘상국? 수상이?’

그가 무슨 말을 한 겁니까, 조원이 흘린 말에 서문경이 정색을 하고 캐어물었다. 표정을 굳힌 서문경의 얼굴을 묘한 빛을 띤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조원이 갑자기 고개를 가로 저었다.

‘특별한 말씀 같은 것은 안 하시었네.’

‘그러니까 그가 저에 대해 뭐라고 했단 말입니까? 별 말 아니라면 말하지 못할 것도 없지,’

‘그만 좀 하시오.’

조원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늘어질 기세인 서문경의 말을 끊은 것은 한참 전부터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던 학승박사였다. 

‘바쁘신 분을 붙잡고 이것이 무슨 실례요.’

학승박사의 그 말에 서문경은 그만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서문경의 눈이 등귤 껍질이 산처럼 쌓인 화류탁자를 슬쩍 곁눈질한 다음, 조원의 몸을 노골적으로 훑었다. 바쁘다니, 이게?, 하고 말하는 듯한 눈길에 학승박사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박사와 염락께서는 어서 창혜각으로 가보시오. 다른 객들께서 기다리고 계실 것이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던지, 돌아가는 상황을 찬찬히 살펴보고만 있던 소천 경모가 나섰다. 막 고함을 지르려다가 경모박사에게 저지당한 학승 박사가 서문경의 얼굴을 죽일 듯 노려보다가 조원의 등살에 못 이겨 방을 나갔다.

‘자, 그럼 조만간 다시 봄세.’

학승 박사의 등을 밀면서 자신도 막 방 밖으로 나가던 조원이 불현듯 뒤를 돌아본다 싶더니 서문경에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서문경의 얼굴이 오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래, 힘을 어떻게 써야 할지는 알겠습니까.’

소천 경모가 서문경의 양 손바닥을 샅샅이 살피며 물었다. 서문경이 아직도 열기로 홧홧한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서문경의 난감해하는 표정을 보고 소천 경모가 빙그레 웃었다.

‘그대의 힘은 그대의 생각을 눈에 보이는 환상(幻想)을 만드는 것입니다.’

소천 경모가 서문경의 손목을 붙잡고, 양 손바닥을 맞대게 했다. 손바닥을 맞대자 손바닥이 맞닿은 자리가 간지러워져서 서문경은 무심코 눈살을 찌푸렸다. 수천 마리의 개미떼가 지나가는 것 같은 끔찍한 기분이었다.

‘그래, 혹시 모란을 본 적이 있습니까.’

서문경의 손을 감싼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소천 경모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물었다. 서문경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형상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리 자세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래요,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차분히, 예, 좋습니다. 소천 경모가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서문경을 격려했다.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귓전으로 흘려들으며 서문경은 모란의 대략적인 형상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사내의 주먹만 한 커다란 꽃송이, 우단처럼 두껍고 보드라운 붉은 꽃잎, 겨우내 얼어있던 햇빛이 다시 따사로워지기 시작하면 늘 이웃집의 정원에 피던···.

‘되었습니다.’

소천 경모가 서문경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거두며 말했다. 서문경은 맞잡고 있던 손을 천천히 떼어냈다. 그 손 사이에 그가 방금 상상했던 그대로의 모란꽃이 함초롬히 피어 있었다. 

‘원래는 생각을 실체(實體)로 구현(具現)할 수 있는 힘이었을 겝니다.’

서문경의 손바닥 사이에서 피어난 모란을 손가락 끝으로 매만지며 소천 경모가 말했다.

‘그런 것이 물에 실려 이 세계로 오면서 흔적만 남은 겁니다.’

소천 경모가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안타깝소. 참으로 아까운 힘이오. 그대가 물이 아니라 하늘에 실려 왔었더라면 이 나라에 큰 힘이 되었을 것을.’

그 말을 들은 서문경의 표정이 묘해졌다. 

‘객들의 힘까지 빌려야 할 정도의 큰 일이 이 나라에 있습니까.’

서문경이 넌지시 던진 물음에 소천 경모의 표정이 설핏 굳었다. 평생 공부만 하던 사람이라 그런가 어찌 이리 쉽게 속내를 내어 보이나, 낭패라는 빛이 역력한 소천 경모의 얼굴에서 서문경이 못 본 척 슬쩍 시선을 돌리면서 생각했다. 

서문경이 짐짓 관심 없는 척 시선을 돌리자 소천 경모가 반 노골적으로 안도하는 표정이 되어 이것저것 두서없는 말을 늘어놓다 시간이 늦었다며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시간이 나는 대로 다시 찾아뵙겠소이다.’

근처를 지나는 서생을 하나 불러 객을 청의관에 잘 모셔다 드리라 단단히 당부한 소천 경모가 자신도 총총히 서문경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얌을 쓰고 장의를 걸친 그녀의 뒷모습이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후, 서문경은 서생을 마련해 준 초헌을 타고 청의관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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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고 말을 끝맺은 서문경이 무심코 황제 쪽을 돌아보았다가 왈칵 성을 내고 말았다. “지금 제 말을 듣고 계시는 겁니까, 폐하?”

서문경이 추궁하자 서문경의 손바닥을 꼬물꼬물 간질이고 있던 황제가 깜짝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가, 자신이 물 맞은 강아지 같은 얼굴을 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는지 화난 척 목소리를 높였다.

“듣고 있느니.”

“그럼 소천 경모란 자가 했던 말도 들으셨습니까.”

“그 말이 무어?”

“그 박사가 무심코 흘렸던 말이 어딘가···.”

수상하지 않습니까, 하고 말을 이으려다 말고 서문경이 멈칫 입을 다물었다. 내전에서 다시 천추전으로 돌아오자마자 자신의 옆을 꿰어 앉은 황제가 다시 자신의 손바닥을 조몰락거리기 시작한 탓이었다. 

“이상타. 어찌 이리 고운고.”

“제 손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서문경이 야멸치게 제 손을 빼내면서 대꾸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손을 빼내기가 무섭게 황제가 잽싸게 다시 자신의 손을 낚아채자 서문경은 한숨을 쉬며 잠시간 제 손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기로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황제가 제 말을 듣기는커녕 돌이킬 수도 없이 토라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수상이 천객들에게 창혜각을 내어 주신 것은 알고 계십니까?”

“태부(太傅) 제하 이첨이 고하기를, 창혜각이 천객들이 지내기에 좋은 환경이라고 하더군.”

황제가 서문경의 손바닥에 난 손금을 제 손가락으로 덧그리면서 무심히 대꾸했다. 관심 없다는 듯 퉁명스럽기 짝이 없는 황제의 대꾸에 서문경이 가슴을 치고 싶은 것을(정확히는 황제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싶은 것을) 꾹 참고 다시금 물었다.

“제가 아는 것이 없어 여쭙는 것입니다만 손님들에 대한 대접은 시경원에서 담당하고 또 객들에 대한 교육은 태학궁에서 담당하며, 또 객들은 특별한 거처를 마련하기 이전까지는 저처럼 청의관에 묵는 것이 원칙이 아닙니까?”

“황제의 나라를 찾은 객들은 모두 짐의 손님이니 그러는 것이 옳지.”

“그런데 어째서 하늘손님들만,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서문경이 말을 하다 말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황제가 서문경의 한 쪽 볼을 쭉 당기며 서문경이 하다 만 말을 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대 혼자만.’

“이상합니다.” 황제의 직설적인 말에 괜히 불퉁해진 서문경이 툭 내뱉듯이 말했다. “하늘손님들을 거느리고 수상 그 자가 무슨 일을 꾸미는지,”

서문경이 하던 말을 멈춘 것은 갑자기 자신의 입술에 황제가 그의 손가락을 하나 얹었기 때문이었다. 막 말을 이으려고 입술을 벌렸던 서문경은 예민한 입술에 닿은 섬뜩한 체온에 멈칫하고 말았다. 입술에 닿은 황제의 손가락은 무서울 정도로 말랐고, 묘하게 무거웠으며 또 단단하고 차가웠다. 

그 묘한 감각에 서문경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있으려니 황제가 서문경의 입술에 세웠던 손가락을 거두고 그 손가락으로 장지문 너머를 가리켰다. 아홉 발톱을 세운 검은 용 너머로 사람들의 그림자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경아, 아느냐.”

황제가 서문경의 귓가에 속삭였다. 귓불에 닿을 듯이 붙여진 황제의 입술이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서문경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거렸다. 갓 만든 당과처럼 단 냄새가 나고 살랑살랑 찬 입김이 불어와서 귓가에서 나비가 날아다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저것이 경이 너도 몇 번이나 본 적이 있는 승직 효문, 그리고 그 옆에 있는 것이 내시감 봉승에,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있는 그림자가 내 지밀상궁인 연재 화연이다.”

보이느냐? 황제가 가래가 끓는 듯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서문경은 그 말에 대꾸하는 대신 장지문에 비치는 그림자들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장지문 가득 그려진 검은 용의 머리와 수염에, 아홉 개의 발톱을 세운 발에, 구름 같은 지느러미가 달린 단단한 꼬리에 사람들의 그림자가 더러운 얼룩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엿듣고 있는 겁니까.”

“그래, 명색은 짐을 가까이에서 보필하는 대령상궁에 내시감에 승직이라 하나, 실은 서현의 말이라면 노루도 범이라 할 그런 자들이지. 그러니까 그런 말은 그만두고 재미있는 것이나 더 만들어 보거라.”

응? 황제가 은근히 속삭이는 말에 서문경은 한숨을 폭 쉬었다. 정말 엿듣는 귀 때문에 더 말을 못 하겠다는 걸까, 아니면 병아리를 보고 싶어서 핑계를 대는 걸까. 서문경은 생각하면서 힐끗 눈동자를 굴려 황제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그러자 황제가 기대로 반짝거리는 눈으로 서문경의 손바닥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폐하.”

그런데 역시 검은 병아리는 본 적이 없어서 못 만들 것 같은데, 실수로라도 만드는데 성공하면 등골이 빠지도록 부려 먹힐 것 같기도 하고. 서문경이 골똘히 고민하다가 문득 생각나 말을 꺼냈다.

“응?”

“혹시 조원이라는 자를 아십니까.”

용에 대해 몹시 잘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던 조원이 떠올라 그렇게 묻자, 순간 황제의 낯빛이 변했다. 

“그 치와 만났나.”

“예, 제가 그와 같은 범세계 사람이라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듯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 치와는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다.”

황제가 단호함을 지나쳐 차갑게까지 느껴지는 어투로 서문경의 말허리를 잘랐다.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황제의 차가운 태도에 당황한 서문경이 잠시 침묵하다가 조원을 만난 적이 있느냐고 물으려는 순간, 황제가 쇄골 근처에 손을 받치고 마른기침을 터뜨렸다. 그 때문에 조원에 대해 물을 적기를 놓친 서문경이 한 쪽 눈을 찌푸리고 황제의 마른 등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미심쩍은 기분이 머릿속에서 도통 가시지를 않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병아리는.”

“검은 병아리는 못 만듭니다. 본 적이 없어서.”

콜록콜록 잔기침을 하면서 황제가 한 말에 서문경이 내심 한숨을 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말에 황제가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못 만들어?’

“어찌 그러하더냐.”

“제가 본 적이 없으니까요.”

하고 말하면서 서문경은 어쩐지 자신의 말이 조금 변명처럼 들린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러면 되겠군.”

서문경의 말을 듣고 고민에 빠졌던 황제가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제 무릎을 탁 쳤다. 저 웬수가 또 무슨 생각을 했기에, 적당히 둘러댄 변명으로 겨우 위기를 모면했던 서문경이 황제의 밝아진 얼굴을 보고 펄떡펄떡 놀란 가슴을 짓누르며 생각했다. 

“내시감 있는가?”

“내시감 봉승 들어 있나이다. 하문하소서.”

“화국에 기별을 넣으라.”

“천추전으로 화원을 보내라 하리까.”

“화원과 함께 솜씨 좋은 도공도 하나 보내라 이르라.”

“그리 하겠나이다.”

황제와 서문경의 대화를 엿들으려 장지문에 바싹 붙어 있던 내시감 봉승이 긴 표의를 끌고 사라지자, 황제가 서문경을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붓으로 그린 것 같은 황제의 단아한 얼굴이 싱긋 청년다운 웃음을 짓자 순간 머리가 아찔할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그것을 보고 서문경은 감탄하는 대신 탄식했다. 

“화원을 불러 그림을 그리도록 하고, 그 그림을 보고 도공에게 조각을 만들도록 하겠다. 그러면 되겠는가?”

“될···, 지 안 될지 확신이 안 섭니다만.”

서문경이 떨떠름한 기색을 채 숨기지도 못하고 대꾸했다. 그러자 황제가 자아, 하고 서문경의 등을 밀었다. 그 기세에 이기지 못해 자리에서 일어선 서문경이 비단침에 등을 기대고 앉은 황제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폐하······?”

“내 조각이 완성되면 경이 너를 다시 부르겠노라. 그 때는 봉지와 한삼(汗衫: 적삼), 족건(足件: 버선)과 대자(帶子: 허리띠)에 새 운혜(蕓鞋: 신발)까지 지어 네 처소로 보낼 것이니 그것으로 갈아입고 천추전에 들도록 하라.”

“폐하, 그러니까 검은 병아리는.”

“자, 그럼 우리 깜둥새는 처소로 돌아가 보거라.”

깜둥새?! 그건 또 뭔데? 

서문경이 놀래 입만 쩍 벌리고 있는 사이 황제가 손을 젓자, 장지문이 스르르 열렸다. 잠시 정신을 놓고 있었던 사이에 장지문 밖으로 끌려 나온 서문경이 벽에 쿵 이마를 박으며 좌절했다. 검은 병아리에 대한 황제의 기이한 야망을 저지하는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한층 더 이상한 별명만 얻어 나오게 된 이 현실이 참으로 원망스러웠다.

**

이상한데.

서문경은 아침 식사에 곁들임으로 나온 연근튀각을 우물거리면서 생각했다. 서문경이 정작 아침 식사로 나온 삼색 은행 튀김과 연근죽, 홍살구이와 연잎차는 모른 척 하고 우적우적 튀각만 씹고 있자 서문경의 방 앞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여관들의 낯빛이 점차 어두워졌다. 저 까다로운 손께서 또 무슨 트집을 잡으시려 저러시누.

“객께서는 조반은 다 드시었는가?”

소청 재하 원혜가 나타나 그렇게 물은 것은 서문경이 연근튀각을 모두 해치우고 김 튀각에 손을 댔을 즈음이었다.

푹신한 산양털을 안에 덧댄 원혜의 푸른 족건이 사뿐사뿐 마룻바닥을 밟고 나타나자, 서문경의 방 앞에 대기하고 있던 여관들이 반색을 하고 원혜를 반겼다. 추운 날씨 때문에 진주와 붉은 술로 장식한 검은 아얌을 쓰고, 소색 명주 치마저고리 위에 은실로 수를 놓은 검은 우단(羽緞) 표의를 입은 소청 원혜는 두 팔 가득 검푸른 우단을 입힌 상자 두 개를 들고 있었다.

“자네들은 제 자리로 돌아가게.”

자신을 보고 반색하는 여관들을 제 자리로 돌려보낸 후 소청 원혜는 장지문이 완전히 열어젖혀져 있는 서문경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서 오독오독 튀각을 씹는 소리가 들려, 조반을 다 들었겠거니 하고 생각하며 서문경의 방으로 들어온 소청 원혜는 그러나 수저를 움직인 흔적조차 없는 소반 위를 보고 한 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객의 건강을 생각하여 짠 식단인데, 마음에 안 차십니까?”

“생각할 것이 있어 그렇습니다.”

서문경이 손에 들고 있던 김 튀각을 입 안에 훌쩍 던져 넣으며 대꾸했다. 생각할 것이라니요?, 그 말을 듣고 잠시 고개를 갸웃했던 소청 원혜가 곧 짐작 가는 구석이 있던지 은근한 미소를 눈에 띠고 슬그머니 위로 올라가는 입술을 소맷자락으로 가렸다.

소청 원혜가 방 한 구석에 처박혀 있던 호박색 방석을 깔고 서문경의 맞은편에 앉으며 넌지시 물었다.

“태학궁에서 일하는 이들에게 들었습니다. 힘을 찾으셨다고요.”

“예.”

“듣자하니 학승박사와 경모박사께서 참례하셨다지요. 그래서 그 힘이란 것이···.”

“모르는 척 빼시면 재미있으십니까.”

“설마요. 제가 들은 것이 혹여 틀린 것인가 싶어 말을 아끼고 있었답니다.”

“뭐라고 들으셨습니까.”

“환상을 만드는 힘이라고 들었나이다.”

그 말끝에 픽, 하고 희미하게 바람 새는 소리가 들린 것은 서문경의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예, 폐하께옵서 대단히 마음에 들어 하시더군요.”

‘이것도 만들어 보고 저것도 만들어 봐라, 어찌나 성화시던지.’, 쾌감을 닮은 악의로 들떠 있는 재하 원혜의 말에 서문경이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어머나, 그런 서문경의 반응에 김이 빠졌는지 소청 원혜가 의미 없는 탄성을 중얼거렸다. 

“웬일로 하사품을 내리셨나 했더니.”

소청 원혜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서문경은 그녀의 옆자리를 곁눈질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가 옆구리에 끼고 들어왔던 상자와 두루마리가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서문경의 눈길을 눈치 챈 소청 원혜가 지금 막 생각난 것처럼 소반을 치우고 자신의 곁에 두었던 상자와 두루마리를 서문경의 앞에 내려놓았다. 

“뭡니까.”

“폐하께옵서 내리신 하사품입니다.”

하고 말한 소청 원혜가 다분히 의례적인 태도로 두루마리를 펴고, 천자가 황제의 나라를 찾은 객을 어여뻐하여 아래를 하사품을 내리니 그 성은이 가히 하늘을 찌르고 운운하는 말을 읊기 시작했다. 그것을 귓전으로 들으며 서문경은 잠시 고민했다. 이거 영화에서 본 것처럼 절이라도 하고 들어야하나. 아니, 그건 후궁 첩지를 받을 때나 하던, 아니, 아니던가. 어쩌지. 

“열어보십시오.”

서문경이 절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두루마리에 쓰인 글을 모조리 읽어버린 소청 재하 원혜가 서문경에게 상자를 슥 내밀었다. ‘뭐, 성은에 감읍하옵나이다, 라든가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이런 건 안 해도 되는 겁니까?’, 어색하게 두 손을 들어 올린 채 서문경이 묻자 소청 원혜가 별다른 대꾸 없이 배시시 웃었다. 그 열없는 웃음을 보고 서문경은 혀를 찼다. 원래는 해야 하는 건가 보군.

“어마나.”

서문경이 상자를 열자, 흥미로운 눈으로 그 안을 들여다 본 소청 재하 원혜가 탄성을 터뜨렸다.

검푸른 우단을 입힌 상자 뚜껑을 열자, 그 안에는 달처럼 뽀얀 능라(綾羅) 주단(綢緞)이 깔려 있고 그 위에는 질 좋은 검은 가죽으로 만든 마른신이 한 켤레 놓여있었다. 흑혜가 든 상자보다 조금 더 큰 흑단(黑檀) 상자 안에는 서문경의 예상대로 얇은 단의(單衣)에서부터 흰 바지와 속적삼, 검은 숙고사 적삼과 긴 적삼에 두를 푸른 수를 놓은 대자(帶子)에 산양털을 넣은 족건(: 버선)까지 입을 것들이 꼼꼼히 들어 있었다.

“세상에, 이것이 다 뭐랍니까.”

상자 안을 가득가득 채운 비단들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 소청 원혜가 두 손을 맞잡고 달콤한 한숨을 내쉬었다. 원혜의 검은 눈이 탐욕과 감탄으로 반짝반짝 빛나며 상자 안에서 좀처럼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서문경은 기쁘다기보다는 조금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이거, 하고 서문경이 상자 안의 옷과 신발을 손가락질했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고 말을 고쳤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답니까?”

서문경의 뜬금없는 질문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된 소청 원혜가 산호와 비취로 장식한 머리를 모로 기웃하며 대꾸했다. 

“글쎄요, 지금 폐하께오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는 소녀는 알 방도가 없지요. 다만 화국의 사람들이 분주하게 천추전을 들락거렸다 합니다.”

서문경의 얼굴이 와작 구겨졌다.

“천추전 침방 나인 아이들의 말로는, 폐하께옵서 지난 밤 상서로운 꿈이라도 꾸신 것인지 화방의 솜씨 좋은 화공과 도공들을 불러 그림을 그리게 하고 그 그림을 보고 조각을 만들라 명령하셨답니다.”

“대, 대체 어떤?”

“이 세계에는 없는 새인데, 손께서는 범님의 세계에서 오신 분이니 혹시 아시는지요? 전체적으로는 마치 병아리처럼 생겼는데 병아리와는 달리 털이 검고, 새끼지만 벌써 날렵한 태가 나고 까치처럼 꼬리가 살짝 긴 새랍니다.”

“······.”

서문경이 이마에 손을 짚고 한탄했다. 이 망할 인간이 정말로 했구나. 

“소청.”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서문경을 원혜가 의아한 눈으로 훔쳐보고 있는데, 누군가 서문경의 방에 고개를 내밀고 소청을 닦달했다. ‘대령상궁께서 와 계시지 않나.’, 원혜처럼 허리에 구름이 수놓아져 있는 검은 띠를 두른 여관이 말하자 소청이 지금 생각났다는 듯 아, 하고 신음을 흘렸다.

“이런, 얼른 갈아입고 가셔야겠습니다.”

‘어디를?’, 하는 뜻으로 서문경이 미간을 찌푸리자, 소청 원혜가 빙그레 웃으며 서문경에게 내려진 옷가지와 신발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객을 천추전으로 모시려 대령상궁 마마님께옵서 친히 오셨답니다.”

꼭 물손님을 천추전으로 데려오라 폐하께옵서 신신당부를 하셨다 합니다. 소청 원혜가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인 말에 서문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도망칠 생각도 하지 말라 이거냐, 이 인간아.

**

누구에게든 조원이란 자가 말했던 용에 대해 물어봐야 할 텐데. 황제의 침전 앞에 멈춰 선 채 서문경은 고민했다. 하지만 그것을 대체 누구에게 물어야 할 것인가, 커다랗게 입을 벌린 용의 머리가 조각되어 있는 지붕마루를 올려다보며 서문경은 이마를 찌푸렸다. 어제부터 지금까지 내내, 조원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네.

-이 세계에 진짜 용(龍)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나.

-아직 진짜 용이 누구인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참말인지 거짓말인지조차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현재로서는 매달릴 수 있는 동아줄이 그 말 외에는 없었다. 

그러나.

서문경은 다시 한 번 고뇌에 사로잡혔다. 조원이 말한 용이란 과연 무엇일까. 진짜 용(龍)을 이르는 말일까, 아니면 어떤 사람을 용에 비유한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 세계를 만들었다는 용의 흔적이 남은 어떤 물건이나 유적을 이름일까. 서문경은 무심결에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나를 제대로 상대해주는 사람조차 없는 이런 곳에서 내가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틈을 보이기만을 호시탐탐 노리는 소청 원혜? 나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승직 효문이나 오경박사 학승? 아니면 성실한 사람인 것이 분명하지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없는 오경박사 경모? 그것도 아니면 황제? 

-용을 뵙는다 말하지는 않는가?

불현듯, 수상 서현과 맞닥뜨렸을 때 황제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때렸다. 용을 뵙는다, 서문경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것과 조원이 말한 용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서문경은 생각했다. 황제를 만나면 넌지시 떠보기라도 할까. 그렇게 고민하던 서문경이 고개를 저었다. 어쩌서인지 그 말 만큼은 황제에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막연한 예감이 들었다.

마땅한 해결책을 찾지 못한 탓에, 용마루를 올려다보는 서문경의 눈이 저절로 험악해졌다.  

한 편, 새 것이 분명한 비단옷을 입고 사뿐사뿐 걸어온 낯선 귀공자가 갑자기 황제의 침전 앞에 멈춰 서서 표정을 굳히고 있자 침전을 지키고 있던 위병(衛兵)들의 얼굴도 덩달아 굳어지기 시작했다. 금빛 단청을 노려보는 귀공자의 눈초리가 기와 밑을 지키고 선 자신들을 노려보는 것처럼 느껴져서 위병들의 어깨가 저절로 움츠려 들었다. 저 공자는 뉘신고, 대령상궁 마마께옵서 몸소 모셔 온 것을 보니 귀한 댁 자제신가 본데 어찌 여기서 저러고 계시는고. 

위병들이 그렇게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그간 손님의 뒤를 지키고만 있던 황제의 대령상궁이 귀공자에게 말을 걸었다.

“폐하께옵서 기다리고 계시나이다. 더 이상 성심에 풍파를 일으키지 마소서.”

대령상궁이 재촉하자 흑의를 두른 귀공자가 단청에서 눈을 떼고 찌푸린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더운 물에 씻어 유난히 새뽀얀 얼굴에서 유일하게 까만 눈이 자신을 쏘아보자 황제의 대령상궁인 연재 화연은 반사적으로 움츠려드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대령상궁 연재 화연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청년의 옥 같은 얼굴과 매끈한 몸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폭 달콤한 한숨을 내쉬었다. 옷이 날개라더니, 역시 옛말이 틀린 것 하나 없구나. 

“안으로 드소서.”

대령상궁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천추전 입구를 지키고 있던 위병들이 서문경을 향해 일사불란하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지체 높은 관원(官員)이나 위세 당당한 대부(大富)를 맞는 것처럼 정중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아무래도 저 치들도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귀공자가 그 물손님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눈치였다. 

하지만 그럴 만도 하지, 대령상궁이 한 손을 볼에다 대고 다시 한 번 한숨을 쉬었다. 위병들이 내어준 길로 미적거리며 걸어가는 서문경의 뒷모습이 보였다. 만사가 귀찮은 듯 구부정한 어깨에 질질 발을 끌다시피 한 걸음걸이임에도 불구하고 물손님의 뒤태는 옥을 갈아 놓은 듯 곱고 늘씬하기만 할 뿐이었다. 더운 물에 씻기고 비단 옷을 입혀 놓았더니 까마귀가 백로가 다 되었구나.

“폐하, 수객 들었사옵니다.”

멀리서 서문경을 보고 저건 누군가 싶어 눈을 홉떴던 내시감 봉승이 여전히 배고픈 까마귀처럼 불손한 서문경의 눈초리를 보고 나서야 황급히 황제에게 고했다. 이윽고 안에서 ‘들라.’하는 소리가 들렸다.

“경이 왔느냐.”

황제의 방으로 들어가자, 언제나처럼 고즈넉한 방 깊은 곳에 느른하게 누워 있던 황제가 서문경을 맞이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하고 서문경이 황제에게 따지다 말고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장지문 안으로 들어가기가 무섭게 문지방 근처에 낯선 사내 둘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것을 본 탓이었다. 그 광경에 멈칫해서 방 안을 살펴보자, 황제의 앞에는 평소와는 달리 푸른 구슬을 꿰어 만든 주렴이 쳐져 있었다.

“이리로 오라.”

그것을 보고 서문경이 자신은 어째야 하나 싶어 머뭇거리고 있는데 주렴을 치고 앉은 황제가 서문경에게 손짓을 했다. 괜찮을까, 서문경이 고민하다가 황제가 손짓하는 대로 주렴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주렴 바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문지방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낯선 사내들이 신경이 쓰인 탓이었다.  

“이리로 오라니까.”

서문경이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자 부아가 났는지 황제가 신경질을 내며 서문경의 손목을 확 잡아당겼다. 막 바닥에 무릎을 대고 있던 서문경이 갑자기 손목을 잡아당기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바닥을 보고 서문경이 반사적으로 눈을 꾹 감는데, 갑자기 무릎이 바닥에 죽 끌리는 느낌이 들더니 곧 얼굴에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 대신 매끄럽고 폭신한 것이 닿았다.

“?”

생각지도 못한 감각에 서문경이 감았던 눈을 슬그머니 떴다가, 지척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황제를 보고 놀라서 입을 쩍 벌렸다.  

“폐하!”

황제의 품에 푹 얼굴을 박은 서문경이 소스라치게 놀라 머리를 치켜들며 외쳤다. 그러자 황제가 바닥에 볼품없이 쓰러진 서문경의 몸을 추슬러 안으면서 투덜거렸다. ‘짐의 말을 듣지 않고 딴청을 부리니 이런 꼴을 당하지.’ 황제가 자신을 놓아주기는커녕 자신의 두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끼우려 들자 서문경이 발버둥을 쳤다.

“얌전히 좀 있거라, 얌전히.”

자꾸만 자신의 품에서 빠져 나가려고 하는 서문경이 얄미웠는지 황제가 서문경의 뒤통수를 찰싹 때렸다. 갑자기 뒤통수를 얻어맞아 서문경이 잠시 멍해져 있는데, 그것을 얌전해진 것으로 오해했는지 황제가 씩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서문경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꼬까옷을 입었더니 아주 곱구나. 진짜 깜둥새 같아.”

“아니······.”

멍청하게 중얼거린 서문경이 다음 순간 번쩍 정신을 차리고 빽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제게 검은 옷을 입힌 겁니까?’ 그 소리를 듣고 황제가 눈을 흘기며 반박했다. 그게 아니면 왜 짐이 하사품을 내렸겠누.

“게 있는가.”

이 인간 진짜 안 되겠네, 황제의 천연덕스러운 대꾸를 듣고 서문경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황제가 말했다. 그 말을 듣고 혹시 나를 부르는 건가 싶어 서문경이 불편한 고개를 틀자, 장지문 근처에 내내 무릎을 꿇고 있던 사내들이 이마를 바닥에 댄 채로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명하시옵소서.”

“그것을 두고 물러가거라.”

“황명 받들겠나이다.”

사내 중 하나가 무릎걸음으로 걸어와 구슬주렴 앞에 커다란 상자를 바치고 다시 무릎걸음으로 물러났다. 그 사내들이 뒷걸음질 쳐 장지문 밖으로 나가자마자, 방 안에서 마치 은밀한 일이라도 치러지고 있는 것처럼 지밀 궁인들이 재빨리 장지문을 닫았다. 평소보다 유난히 재빠른 지밀 궁인들의 행동에 서문경이 알 수 없는 불쾌감을 느끼면서 황제의 품 안에서 빠져 나왔다.

“왜 그러누?”

“저 사람들 행동이 좀.”

하고 말하다가 서문경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방금 전 지밀 궁인들의 행동이 묘하게 불쾌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어째서 불쾌함을 느꼈는지 묻는다면 정확히 설명하기가 어려웠던 탓이었다. 

“그런데 그 상자는 뭡니까?”

별 것 아니겠지, 하고 서문경은 애써 생각하며 구슬주렴 바깥에 놓인 상자에 주의를 돌렸다. 서문경이 그렇게 묻자 황제가 턱 끝을 들어 상자를 가리켰다. 그 턱짓이 상자를 이 안으로 들고 오라는 명령이라는 것을 눈치 빠르게 깨닫고 서문경이 투덜거리며 상자를 주렴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이건.”

“잘 만들지 않았느냐.”

황제가 시키는 대로 상자 뚜껑을 연 서문경이 확 눈살을 찌푸렸다. 커다란 상자 가득 검은 새 그림이 그려진 족자와 검은 새 조각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살아서 날개를 퍼덕일 것 같은 검은 새 조각을 찡그린 눈으로 쳐다보던 서문경이 황제에게 휙 고개를 돌렸다. ‘이 망할 인간아!’라는 뜻으로 번뜩이는 서문경의 눈빛을 무엇으로 오해했는지 황제가 마른 가슴을 쭉 펴고 거만스레 어깨를 으쓱거렸다.

“경이, 너와 똑 닮았다.”

“아, 대체 어디가 말입니까!” 분을 참지 못하고 서문경이 버럭 고함을 질러버렸다. “제가 새대가립니까? 제가 부리가 달렸습니까? 제가 왜요! 제가 왜 샙니까!”

“어느 안전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느냐?!”

황제 또한 지지 않고 노성을 질렀다. 황제가 목소리를 높이자, 지존의 앞에서 감히 목소리를 높인 죄로 호되게 경을 칠까봐, 가 아니라 황제가 기침을 시작할까봐 겁이 난 서문경이 목구멍 밖까지 튀어나온 욕을 가까스로 삼키고(젠장, 나도 우리 집에서는 귀한 아들이었을 텐데.) 억눌린 목소리로 황제를 달랬다. 그게 아니라, 하고 서문경이 억지로 끌어올린 입술 끝을 부들부들 떨며 말을 건네자 황제가 무슨 변명을 할지 두고 보겠다는 듯 매서운 눈으로 말없이 서문경을 노려보았다.

“···잘 만든 것 같기도 하군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서문경이 입 속으로 중얼거리듯 말한 후 재빨리 덧붙였다, 저와는 안 닮았지만.

“그래. 그렇게 입혀 놓으니 진짜 깜둥새 같구나.”

서문경이 덧붙인 말을 못 들은 척 하고 흐뭇하게 대꾸한 황제가 새 조각을 하나 제 손바닥 위에 얹어 서문경의 얼굴 옆에 바싹 가져다댔다. 바로 옆에서 비교해보니 더욱 더 흡족했는지 황제가 씩 기분 좋게 웃었다. 그 흐뭇해하는 얼굴을 후려갈겨 버리고 싶은 것을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내며 서문경이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 세계엔 안경도 없는 건가?’ 그러자 황제가 찌푸린 표정을 채 수습하지 못한 서문경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뚱한 표정이 정말 닮았군.”

“······.”

시비냐.

그러나 서문경이 정말 미칠 만한 일은 그 다음 날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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