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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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을 때 처음 본 것은 잠든 황제의 얼굴이었다.

“······.”

‘오늘 꿈이 좀 험하군.’, 서문경은 이불을 몸에 감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 

“그대는 왜 여기에 있는 건가?”

“!”

그러나 꿈이 아니었다. 

서문경은 지척에서 들리는 황제의 목소리를 듣고 눈을 번쩍 떴다. 바로 눈앞에 황제의 하얀 얼굴이 보였다. 방금 전 보았던 때처럼 눈꺼풀이 고이 닫힌 황제는 여전히 잠든 채였다. 서문경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면서 자신이 들은 것이 환청인가 생각했다. 황제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서문경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몹시 졸렸다.

“고얀 것.”

싸늘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서문경은 이번에도 환청이려니 하고 그 말을 못 들은 척 했다. 그러자 그 다음 순간 딱딱한 뭔가가 서문경의 이마를 때렸다. 

“악!”

누구야!, 하고 고함을 버럭 지르며 서문경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다 서문경은 자신을 향해 모로 누운 채 눈만 반짝 뜬 황제가 혀를 끌끌 차고 있는 것을 보았다. 까만 바둑알 같은 황제의 눈이 서문경을 가만히 올려다보다 확 찡그려진다. 자신의 얼굴을 보고 황제가 눈살을 찌푸리자 서문경도 함께 얼굴을 팍 구겼다.

“그대는 정말 성격이 안 좋군.”

황제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버릇이 안 좋기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그랬던 것인지 황제의 얇은 자리옷이 엉망이었다. 잔뜩 구겨진 황제의 자리옷을 본 서문경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 서문경을 보고 황제가 쯧쯧, 혀를 찼다.

“아직 상황파악이 안 되는 건가?”

“?”

“짐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어 주는 일을 자진할 자는 없단 소릴세.”

“하지만 그런 일을 맡은 사람아 분명···.”

있지 않았나? 있었을 것 같은데. 서문경은 자신의 나라에서는 이미 사라져버린 옛 왕조(王朝)들에 대한 어설픈 지식을 더듬으며 말했다. 그 말에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권식(勸飾)이라면 당연히 있다.’ 학처럼 길고 하얀 목이 당연하다는 듯 끄덕여지는 것을 보자 어쩐지 배알이 뒤틀렸다. 서문경은 아픈 배를 슬슬 문지르며 슬쩍 눈을 옆으로 굴렸다. 황제의 거만한 표정을 계속 보고 있으면 자신이 뭔가 또 사고를 칠 것만 같은 위기감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그 사람은 어디에 있습니까?”

황제의 옷차림을 돌보는 자가 나타나면 자신은 이 방에서 나갈 수 있겠지 싶어 서문경이 묻자 황제가 대꾸 없이 빙긋 웃기만 했다. 

“왜 그렇게 웃으십니까?”

불길하게, 하고 서문경이 입 속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까다로운 성격답지 않게 빙긋빙긋 웃고 있던 황제가 슥하고 서문경의 몸을 훑어보았다. 언제 움츠려들었냐는 듯 단번에 날을 세우는 서문경을 보고 황제가 빈정거렸다. 

“권식(勸飾) 우현(瑀泫)이 들어오면 그대가 당장 경을 칠 터인데 뭐가 그리 좋은가?”

그 지적에 서문경이 할 말이 없는 듯 이마를 찡그리고 눈을 내리 깔았다. 그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던 황제가 툭 던지듯 물었다.

“헌데 그대는, 어찌 지존의 침소에 주인의 허락도 없이 와있는가?”

하고 말하는 황제의 눈이 책하듯 삭 가늘어졌다. 서문경은 자신에게 와 닿는 황제의 눈길이 몹시 따갑다고 생각했다. 화났나. 그렇게 생각하자 문득 억울해졌다. 이 세계의 예법에 대해 무지한 그가 생각해보아도 황제의 침소에 황제의 허락도 없이 들어와 있는 것은 큰 죄였지만 정작 서문경은 그 죄를 저지른 기억이 없었다. 

“못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여기에 들어온 기억이 없습니다.”

서문경이 우물우물 꺼낸 말에 황제가 코웃음을 쳤다. 그것에 울컥한 서문경이 눈을 확 치켜떴다. 황제는 팔짱을 끼고 서서 그런 서문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뭐가요?”

“그대는 당장 목이 잘려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야.”

뎅강. 입으로 말하며 황제가 목을 치는 시늉을 했다. 이를 갈면서도 제대로 된 대꾸 한 마디하지 못하는 서문경에게 황제가 보란 듯 킬킬, 심술궂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러나 황제는 곧 울컥 치솟은 기침 때문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손으로 입가를 틀어막은 황제가 쿨럭쿨럭 밭은기침을 해댔다.

“폐하?” 

처음에는 거 참 고소하다, 하고 생각하던 서문경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황제가 기침을 그치지 않자 깜짝 놀라 외쳤다. 금방이라도 피를 토할 것처럼 격렬한 기침이었다. 기침 중간 중간에 학, 학, 하는 쇳소리가 새어 나온다. 황제는 등을 굽힌 채 계속해서 기침을 했다. 그가 기침을 할 때마다 날개뼈가 솟아나온 마른 등이 부서질 것처럼 들썩였다. 크게 뜨인 눈은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서문경은 황급히 황제에게 다가가 그의 등에 손을 뻗었다. 

“누구···!”

기침이 멎지 않아 이대로 황제가 숨이 막힐까 겁이 난 서문경이 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그 순간 서문경의 손목을 황제가 확 낚아챘다. 서문경이 소스라쳤다. 손목을 틀어쥔 황제의 손가락은 소름끼칠 정도로 거칠고 딱딱했다. 마치 바싹 마른 나뭇가지 같았다. 

“불러봐야, 안 온다.”

겨우 기침이 멎은 듯 숨을 헐떡이며 황제가 말했다. 

“그대도 이제는 알지 않나?”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황제의 눈이 굶주린 짐승처럼 보여서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충혈 되어 있어 그런 것일 거다, 서문경은 놀란 가슴을 타이르며 뒤로 물러섰다. 황제의 등이 가늘게 떨리고 있다. 괴로워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심술궂게 웃고 있는 것일까. 짐작이 가지 않는다.

“심술을 부렸다.”

오랜 시간에 걸쳐 숨을 고른 황제가 불쑥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잔뜩 잠겨 있었다.

“내 침소에 그대를 던져 넣은 것은 효문일게다.”

의외의 말에 서문경이 눈을 크게 떴다.

“아니면 그대를 접대하고 있을 청의관 소청일 수도 있고.”

“예?”

“또는 다른 자일 수도 있지.”

결국 모른다는 말이 아닌가 싶어 서문경이 팍 이마를 구기는 순간 그 얼굴을 보고 황제가 킬킬 웃었다. 그러나 그러던 황제가 다음 순간, 어조를 달리하여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그대는 눈치가 퍽 빠른 듯 하더군.” 

웃음기가 싹 사라진 투에 서문경의 표정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작일(昨日)에.’, 황제가 말을 잇자 서문경은 비로소 알아차렸다. 황제는 어제 수상과 맞닥뜨렸을 때의 그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예상대로 황제가 말했다.

“그러니, 짐과 수상과 다른 신자(臣子)들이 한 자리에 있는 것을 보았으니 대충의 짐작은 하고 있겠지.”

황제는 신하(臣下)들이 자신과 수상 중 누구의 신하인지 정확히 말하지 않았다. 때문에 서문경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서문경의 얼굴이 굳었다. 이 황제가 자신에게 어째서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 나라의 모든 신자들은 두 황제를 모신다.”

서문경의 얼굴이 굳어가는 것에 개의치 않고 황제는 말을 이었다.

“진짜 용(龍)이 누구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지.” 하고 말하던 황제가 서문경의 표정을 보고 픽 웃었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이구나.”

끌끌, 하고 혀를 찬 황제는 굳어진 서문경을 뒤로 하고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문경의 머리로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가늘고 길고 검은 그림자. 서문경은 눈을 찡그리고 생각했다, ‘뭐지?’ 뭔가와 닮았다고 생각했지만, 그 ‘뭔가’가 무엇인지 도통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때 황제가 뒤를 돌아보았다.

“골머리 싸안을 필요 없다. 그대가 알아들어야 하는 것은 한 가지 뿐이다. 너는 그 자들에게 가치가 없는 사람이란 사실.”

“······.”

“귀찮은 짐짝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것도.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짐’인 내게 던져진 것을 보면 말이다.”

황제의 까만 눈을 서문경이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그것을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을 한 황제가 마주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마무리를 하자면.”

황제의 눈이 순간 반짝이는 것 같다고 서문경은 생각했다.

“네가 기댈 곳은 나 밖에는 없다는 것이지.”

**

서문경의 얼굴이 와작 구겨졌다. 서문경은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자신도 모르게 황제의 얼굴을 응시하다 픽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팔짱을 끼고 앉은 서문경이 자신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기가 막힌다는 듯 웃자 황제도 빙긋 입술 끝을 끌어올려 웃었다. 

황제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며 웃고 나서야 서문경은 자신이 지금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서문경은 스르륵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 눈을 슥 옆으로 굴려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나 아무 짓도 안 했어. 그런 서문경의 귓전에 킬킬, 하고 기침 섞인 웃음소리가 스쳤다. 

“왜, 마음이 안 좋으냐, 경아?”

경아, 하고 속삭거리는 소리에 서문경이 팍 눈매를 구겼다. 그러나 차마 대놓고 짜증을 낼 수는 없었던 탓에 서문경은 애꿎은 팔만 북북 긁어댔다. ‘그러다 다치지.’, 서문경이 제 팔을 박박 긁어대는 꼴을 보고 황제가 끌끌 혀를 찬다.

“뭐가 그리 불만이냐.”

“뭐, 딱히 불만은···.” 불만이 없다며 거짓부렁을 입에 담던 서문경은 양심이 찔렸는지 아니면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는 회의가 들었는지 결국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이윽고 서문경이 끙, 하고 앓는 신음과 함께 말을 끝맺었다. “없습니다.”

“무어가?”

황제가 의아하다는 듯 묻자 서문경이 짜증을 냈다, ‘불만 말입니다, 불만.’ 그러자 황제가 야윈 턱을 뾰족한 손가락 끝으로 문지르며 대꾸했다, ‘짐의 눈에는 몹시 많아 뵈는데.’ 그러나 그렇게 추궁해도 서문경이 시치미를 뚝 떼고 내게 불만 따위는 없다 주장하자 황제가 만족스럽다는 듯 빙긋 웃었다.

“하기는. 짐에게 기대게 해 주겠다는데 역시 불만 따위가 있을 리가 없지.”

“예···.”

‘아무렴요.’하고 읊조리는 서문경의 얼굴에는 슬쩍 보는 것만으로도 따끔따끔한 가시가 느껴지는 불만과 짜증이 얼룩져 있었다. 황제가 그런 서문경에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뭡니까.”

자신의 턱 밑에 내밀어진 황제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서문경이 퉁명스레 물었다. 그러자 황제가 서문경의 턱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 구부렸다. 그러자 서문경의 턱 바로 밑에 놓여 있던 황제의 손가락이 서문경의 턱 끝에 와 닿았다. 

그 순간,

“?!”

뱀?! 맨살에 닿은 황제의 손가락이 무섭도록 차갑고 매끄러웠다. 예상외의 감촉에 소스라치게 놀란 서문경이 눈을 부릅뜨고 자신도 모르게 확 뒷걸음질을 쳤다. 

“왜 놀라는 게냐?”

갑자기 서문경이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서자 황제도 덩달아 놀란 것 같았다. 그러나 서문경은 황제의 기분을 달래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자신의 놀란 가슴을 다스리는데 바빴다. 서문경의 가슴팍이 식식 거칠게 오르내렸다. 방금 그건 대체 뭐였지? 새카맣게 흐려진 서문경의 눈이 혼란스럽게 일렁였다.

“폐하···.”

서문경이 홀린 것처럼 황제를 불렀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황제는 서문경을 내려다보았지만 정작 황제를 부른 서문경은 뭔가 생각에 빠져 황제를 돌아볼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뭐였지. 서문경이 설레설레 도리질을 하며 생각했다. 순간 자신의 턱 끝에 스쳤던 그 소름끼치는 감각을 서문경은 망설이며 되뇌었다. 물에 젖은 듯 축축하고, 스르륵 뱀이 기어간 것처럼 소름 끼치도록 매끄럽고, 또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 감각을 되뇌는 순간 등골에 오싹한 기운이 달렸다.

“폐하의 손이 금방.”

“짐의 어수(御手)가 어떠하다는 말인가?”

황제의 손을 뚫어져라 노려보던 서문경이 불쑥 내뱉은 말에 황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 대답에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곤혹스러워진 서문경은 잠자코 얼굴만 구겼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황제가 자신의 두 손을 뒤집었다 펴보았다 하며 살피다 자신의 손을 서문경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서문경은 다시 황제의 손에 닿기를 저어했다. 그것이 답답했는지 황제가 성큼 앞으로 다가와 제 손으로 서문경의 양 볼을 움켜잡았다.

“어.”

반사적으로 굳어버렸던 서문경은 다음 순간 자신의 양 볼에 닿은 황제의 손이 인간이 아닌 것처럼 미끈거리지도, 축축하지도 않다는 것을 깨닫고 눈을 홉떴다. 

“짐의 어수의 어디가 그렇게 기괴하단 말이야?”

바짝 마른 손에서 도드라진 손가락뼈가 볼에 그대로 와 닿아 딱딱했다. 그 손은 다른 사람들의 손보다, 조금 차갑고 조금 더 건조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황제의 손은 서문경이 방금 전 느꼈던 것처럼 섬뜩하리만큼 차지도, 물에 젖은 생선의 몸뚱이처럼 축축하고 미끈거리지도 않았다. 

“어째서?”

서문경이 넋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서문경을, 마찬가지로 황제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황제의 얼굴에서 서문경은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 속에는 분명 여러 가지 감정이 이리저리 얽혀 떠도는데, 서문경은 황제의 눈 안에서 떠도는 감정들에 글로 정의된 어떤 이름도 붙일 수가 없었다. 눈빛으로 생각을 읽을 수 없다면 또 다른 감정의 창인 낯빛이나 표정 등에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유추해 볼 수도 있으련만, 그러나 황제의 안색은 여전히 장지문처럼 희기만 하고 그의 얼굴에서는 도무지 표정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를 한참, 문득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잠이 덜 깨기라도 한게냐, 경아.”

짚더미에서 뒹군 망아지 꼴을 해가지고선, 황제가 서문경의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혀를 끌끌 찼다. 황제의 손이 마구 헤집은 자리를 더듬어보자 머리카락이 잔뜩 헝클어진 것이 느껴졌다. ‘설마.’, 눈가를 슥 좁힌 서문경이, 어느새 뒤돌아 침대에 몸을 누이고 있는 황제를 바라보았다. 등심초 보료 위에 몸을 모로 누인 황제가 왜, 하고 묻는 것처럼 턱을 슬쩍 들어올린다.

“제 머리가 왜 이렇습니까?”

“그것을 왜 짐에게 묻느냐.”

고양이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눈웃음을 치는 황제를 서문경이 말없이 노려보다 곧 휘휘 고개를 저었다. 

“어찌하여 그리 낯빛이 좋지 못한가?”

“갑자기 인생이 덧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범인을 알아도 추궁할 수가 없다니, 하고 서문경이 황제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속으로 덧붙였다. 황제는 서문경이 차마 입 밖으로 내어 하지 못한 말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처럼 서문경을 마주 보라보고 웃는다. 포기하면 편하지, 서문경이 탁탁 손을 털고 물러섰다.

“왜 인생이 덧없다 생각했느냐, 경아?”

그러나 서문경과는 달리 황제는 이 상황을 접고 물러날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네가 기댈 곳이 허약한 짐뿐이라 하니 그런가?”

황제가 집요하게 자신을 물고 늘어지자 난감해진 서문경이 잔뜩 이마를 찌푸렸다. 서문경은 신경질적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방금 전까지는 사람을 가지고 노는데 재미가 들린 것 같더니 이젠 또 왜 갑자기 뾰족해지고 난리란 말인가. 

“언제 제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하고 서문경이 되물으며 황제에게 눈으로 말했다, ‘당신이 그랬지, 당신이.’ 

“허나 분명 실망했을 터인데?”

그러나 서문경의 눈에 떠도는 비난을 못 본 척 하고 황제는 다시 서문경을 비꼬았다. 그러자 서문경이 곧바로 코웃음을 쳤다.

“처음 폐하를 뵈었을 때 제 꼴이 어떠했는가를 잊으셨습니까?”

갑작스레 서문경이 예전의 일을 끌고 나오자 황제가 무슨 말이냐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괴상한 냄새가 난다 저를 구박하셨지요.”

“그래, 그것이 불만이었나?”

황제의 눈에 다시 장난기가 핑그르르 돌기 시작한 것을 눈치 챈 서문경이 딱 잘라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는 이 나라에는 처음부터 제가 의지할 데가 없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겁니다.”

손님을 그 따위로 대접하는 나라라니, 하고 서문경이 서슴없이 나라의 주인인 황제 앞에서 그의 나라를 헐뜯었다. 그러나 정작 황제는 노여워하기는커녕 서문경의 말이 흥미롭다는 듯 비스듬히 누운 몸을 움직여 자세를 바꿀 뿐이었다.

“그러니 새삼 실망하고 말고 할 것도 없지요.”

“그대의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만 말이다.”

황제의 추궁에 서문경이 ‘그건.’하고 대답의 서두를 꺼냈을 때였다. 조용하던 장지문 너머로 불현듯 고개를 뻣뻣이 세운 인영(人影)이 하나 나타나더니, 그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지도 의심스러운 지밀(至密)궁인이 소리를 높여 고했다.

“권식(勸飾) 우현(瑀泫) 들었사옵니다.”

“폐하, 신(臣) 우현이 감히 침소에 들어 성상(聖上)의 마리 아뢰려 하옵나이다.”

때는 벌써 사방이 환하게 밝은 이른 아침이었다. ‘참으로 이르군.’, 모로 누운 채 턱을 괴고 있던 황제가 빈정거렸다. ‘폐하.’, 황제의 허락이 들려오지 않자 장지문 밖에 선 자가 무엄하게도 황제를 재촉했다. 황제가 짜증스레 얼굴을 찌푸리는 것을 보면서 서문경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짐의 머리보다 감히 머리를 높이 두다니 이 무슨 무례인가?”

자리에서 일어선 서문경을 황제가 찡그린 눈으로 노려보며 꾸짖었다. 그 추상같은 꾸짖음에 서문경이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지만 그러나 그것은 반사적인 행동이었을 뿐, 서문경의 얼굴은 여전히 놀라거나 두려워하는 기색 하나 없이 심드렁했다.

“그것은 죄송합니다만 폐하의 신하들은 하나같이 불쾌해서 말입니다.”

웬만하면 한 장소에 있고 싶지 않습니다. 한 마디도 지지 않고 서문경이 대꾸한 말에 방금 전까지 노여움을 감추지 않고 있던 황제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늘 그랬듯 터져 나온 웃음 끝을 메마른 기침으로 장식한 황제가 쿨럭쿨럭 기침이 터지는 입을 틀어막고는 킬킬킬 웃었다.

“과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황제가 서문경에서 손을 저어 보였다, ‘물러가보도록 하라.’ 서문경은 의아한 얼굴로 황제의 얼굴을 살피다가 다음 순간 황제의 말대로 뒷걸음질을 쳐 물러났다(‘저 자식의 변덕 따위, 알게 뭐냐.’). 그런 서문경의 뒤에 대고 황제가 심술궂은 말을 덧붙였다.

“힘든 일이 있거나 궁금한 것이 있다면 지체하지 않고 짐에게 의지하도록 하려무나.” 

그렇게 말한 황제가 서문경이 치를 떨며 싫어하는 호칭을 잊지 않고 덧붙였다, ‘경아.’ 

“···그것 참 고마운 말씀이군요.”

벌레를 씹은 것 같은 얼굴을 한 서문경이 몸을 부르르 떤 다음 대답했다. 그것을 보고 황제가 침(枕)에 얼굴을 대고 소리를 죽여 웃었다.

“그러나 물러가기 전에 폐하께서 궁금해 하셨던 점에 대해 말씀 올리자면.” 그러나, 웃느라 바들바들 떨리는 황제의 뒷머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서문경이 걸음을 옮기며 문득 입을 열었다. “제가 폐하의 말씀을 듣고 걱정한 것은.”

다시 한 번 문 밖에서 황제의 대꾸를 재촉하는 말이 들려서 서문경의 말이 잠시 끊겼다. 황제가 귀찮은 듯, ‘들라.’하고 고함을 친 후 서문경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서문경이 말을 이었다.

“무척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무엇이?”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서문경은 장지문 밖에 서 있는 초로의 사내를 힐끗 바라 본 후 침소 밖으로 발을 디뎠다. 

“애를 돌보는 건 아무래도 힘들지 않겠습니까.”

행색도 초라한 애송이가 자신을 일별하고 무심히 고개를 돌린 것에 노한 듯 권식 우현이란 사내가 서문경을 노려보고 있었다. 서문경은 ‘이 나라의 손님 대접은 어떻게 하나같이 이 모양인지 몰라.’하고 사내가 들으란 듯 중얼거린 후 성큼성큼 저 밖으로 걸어가 버렸다.

**

서문경은 짜증스레 뒷머리를 긁으며 자신이 묵고 있는 청의관(淸意館)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서문경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을 때 서문경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안온한 휴식이 아니라 불청객이었다. 

“오셨나이까.”

찬 공기에 얼어 있던 서문경의 뺨에 온기를 품은 차향이 와 스쳤다. 서문경은 그간 이 방에 있는 줄도 몰랐던 물색 양단방석에 옷고름 대신 호박을 단 양단 저고리에 비취빛 치마를 입은 여인 하나가 올라앉아 있다. 수수한 빛깔의 방석 위에 펼쳐진 비취빛 생고사 치맛자락이 새벽하늘처럼 맑았다. 서문경의 눈이 화려한 자개다반과 그 위에 놓인 옥색찻잔과 수가 놓인 비단방석과 여인의 옷자락을 차례로 훑었다. 

이윽고 서문경의 시선이 여인의 얼굴에 가 멎었다. 소청 재하 원혜. 서문경이 대번에 눈살을 팍 찌푸렸다.

“실례십니다.”

소청 재하 원혜가 입가를 소맷자락으로 가리며 서문경을 질책했다. 그러자 서문경이, 넓은 소매에 가린 재하 원혜의 입가를 내려다보고 대꾸했다, ‘웃고 계신 것 다 보입니다.’ 그러자 소청이 방글방글 웃으며 입가를 가린 옷자락을 내렸다. 그런 재하 원혜를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던 서문경이 곧 입을 열어 그녀를 추궁했다.

“당신입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하고 반문하는 소청 재하 원혜를 서문경이 찬찬히 뜯어보다 푹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알면서도 모른 척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확인 차 서문경은 물었다.

“일어나 보니 이불에 말린 채로 폐하의 침소에 던져져 있더군요. 당신이 그런 것 아닙니까?”

“잠시만요.”

당황한 재하 원혜가 손을 들어 일단 서문경의 말을 멈추게 한 다음, 입가를 가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살펴보자, 방금 전과는 달리 비취빛 옷자락 너머로 희미하게 비치는 재하 원혜의 입술에는 웃음기 하나 없었다. 자신을 놀리려던 때와 같은 손짓을 보고 신경을 곤두세웠건만 김빠지게도 그 손짓은 그저 소청 재하 원혜의 버릇인 모양이었다. 서문경이 허탈하게 웃었다. 

“아.”

그러나 그 때 소청이 뭔가 짚이는 것이 있는 듯 아, 하고 신음했다. 서문경의 귀가 번뜩했다.

“짚이는 것이 있습니까?”

자신의 실수를 눈치 챈 소청 원혜가 재빨리 표정을 굳혔지만 서문경은 이미 그녀의 동요를 눈치 챈 뒤였다. 서문경이 재하 원혜의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학처럼 단정히 앉아 있던 재하 원혜가 그 기세에 밀려 몸을 뒤로 물렸다. 휘청하는 몸을 지탱하려 황급히 두 손을 바닥에 짚은 재하 원혜가 황망히 서문경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서문경의 눈이 몹시 깊고 싸늘했다. 

“누굽니까.”

“손님, 그것은.”

“무슨 이유에섭니까?”

나를 황제의 침소로 던져 놓은 놈이 대체 누구냐 캐어물어도 원혜가 대답하지 않자 서문경은 질문을 바꾸었다. 그 질문에 소청 원혜가 서문경을 올려다보며 빙긋 웃었다, ‘소녀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녀의 대꾸에 서문경이 들으란 듯 지척에서 코웃음을 쳤다.

“누가 한 일인지는 모르실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어째서 그런 일이 생겼는지는 아시는 것 같은 눈치입니다만.”

재하 원혜가 시치미를 떼든 말든 제 할 말을 다 한 서문경이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은 후 재하 원혜에게 손을 내밀었다. 재하 원혜가 눈을 둥그렇게 뜨자 서문경이 짜증을 냈다, ‘뭡니까, 손님을 놔두고 자기 혼자서만 방석을 깔고 앉다니.’ 서문경의 신경질에 소청은 얼떨결에 제가 깔고 앉았던 방석을 빼어 그에게 내주었다. 그러자 서문경이 냉큼 그것을 받아다 그 위에 앉았다. 

“아무튼 이 나라의 손님대접이란.”

“후우.”

“제가 아무리 불청객이라 해도 너무하시지 않습니까.” 한 번 말꼬가 터지자 서문경이 주절주절 예전부터 품고 있었던 불만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바닷물에 젖어 있는 손님을 씻을 수 있게 해주기를 했나, 그렇다고 갈아입을 옷을 주기를 했나, 또 면전에다 대고 무시를 하지 않나, 오늘은 자는 사람을 들어다 다른 방에다 던져놓아 무안을 주질 않나, 거기다 손님은 찬 바닥에 앉아 있는데 혼자 방석을 깔고 앉는데다, 빈속인 손을 앞에 두고 홀로 다과에···.” 

서문경이 다다다다 쏘아 붙이는 말에 소청 재하 원혜는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딱히 반박할 말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참고 서문경의 불만을 들어주려고 해도 그의 불만은 도무지 끊길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자 겨우 서문경의 불평이 멎었다. 서문경이 품고 있던 불만을 모두 토해냈기 때문은 아니었다. 서문경이 원혜의 앞에서 다반을 낚아채며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식사는 없습니까?”

“밖에 누구 없느냐!”

‘주인이고 신하들이고 간에 도통 기본이,’, 서문경의 투덜거림이 다시 시작하려는 것을 깨달은 소청 원혜가 황급히 문 밖의 여인들에게 식사를 가져 올 것을 외쳐 청했다. 그런 그녀의 뒤통수에 대고 서문경이 주문을 덧붙였다.

“원기회복을 해야 하니까 고기로.”

원혜가 막 복도를 지다가던 궁인을 불러 식사를 내어 올 것을 청한 후 한 동안 서문경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달디 단 당과를 베어 먹는 것에 질린 서문경이 다시 잔소리를 할 기미가 보이자 소청 재하 원혜는 ‘조반이 멀었느냐.’하고 궁인을 닦달하는 척 하며 서문경의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

잰걸음을 쳐 달아나는 소청 원혜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서문경은 원혜가 보이지 않게 되자 천천히 벽에 등을 기댔다. 서문경의 손가락이 바닥에 깔린 화문석(花紋席) 위를 몇 번이나 두드렸다. 메마른 손가락 끝에 까슬까슬한 감촉이 스쳤다 사라지기를 수 번,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문득 서문경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자인가.”

서문경이 한숨을 섞어 중얼거렸다. 수상 서현. 어제 황제의 침소에서 봤던 키 큰 사내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황제를 업신여기던 자들이 그 사내 앞에서 돌변해 하나같이 엎드려 복종을 바치던 모습도 뒤를 이었다. 

소청 재하 원혜는 서문경 자신을 황제의 침소 안에 던져놓은 자가 누구인지 모른다 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녀는 무언가를 납득한 눈치였다. 동시에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을 적으로 돌렸다던 황제의 말도 기억이 났다. 보자, 하고 서문경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그 작자가 무슨 말을 했기에.”

졸지에 황제와 묶여 분리수거 당한 서문경이 거칠게 목덜미를 긁었다. 그러다 괜히 자신의 몸에다 짜증을 풀 필요는 없겠다 싶어진 서문경은 고운 화문석을 쥐어뜯다시피 하는 것으로 화풀이를 했다. 소반(小盤)을 받쳐 들고 막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던 궁인 하나가 그 모습을 하고 기겁해 서문경을 말렸다. 그러나 귀한 화문석을 구하느라 소반을 집어 던져버린 궁인은 서문경의 사과 대신 따가운 눈총을 돌려받아야만 했다. 

궁인이 울상을 짓고 돌아간 후 손수 소청 재하 원혜가 식사를 가지고 서문경을 찾아왔다. 저 무례한 자는 무어냐, 나는 저 자의 시중을 들고 싶지 않다, 애원하는 어린 궁인들에게 등이 떠밀려 온 듯 원혜의 얼굴표정이 몹시 떨떠름했다. 

하지만 무엇이라도 꼬투리를 잡아 신경질을 내리라는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서문경은 담담히 그녀에게서 상을 받아 들어 조용히 식사를 마쳤다. 하얀 쌀밥과 맑은 생선국과 갓 무친 나물 두 가지로 조촐한 식사를 끝낸 서문경은 미지근한 국화차로 입 안을 씻어낸 후 재하 원혜에게도 차를 권했다. 

재하 원혜가 찻잔을 받아들자 서문경이 그녀의 찻잔을 채워주며 물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그러자 재하 원혜가 살포시 눈꼬리를 접어 웃으며 대꾸했다, ‘무엇이 궁금하신지요.’ 그런 재하 원혜를 서문경이 힐끔 눈만 치켜 올려 바라보고 시선을 돌렸다.

“어제 폐하의 처소에서 이 나라의 수상이시라는 분을 뵈었습니다.”

‘들었습니다.’, 하고 재하 원혜가 말했다. 여전히 미소 띤 얼굴이었지만 그 낯빛이 어딘가 맑지 못하고 둔탁해졌다는 것을 서문경은 눈치 빠르게 읽어냈다. 그녀의 눈동자가 경계하는 빛을 띠고 자신을 살펴보는 것도 느꼈다. 소청 재하 원혜는 자신이 수상과 대면했다는 사실 외에도, 자신이 그를 어떻게 대했는지까지 모두 전해들은 모양이었다. 서문경이 문득 빙긋 웃었다. 이렇게 쉽게 불편한 속내를 드러내 주니 이쪽에서는 오히려 상대하기가 편하다.

“그 분께서 학궁(學宮)으로 가보라 말씀해 주시더군요.”

서문경이 꺼낸 말이 자신이 예상했던 것과 다른지 재하 원혜가 대답 없이 눈만 두어 번 껌뻑였다. 

“그 곳에 안내해 주시지요.”

제대로 된 대답도 안 해줄 사람은 이쪽에서도 분리수거를 해야지. 서문경이 선하게 웃으면서 생각했다. 

**

흔히 학궁(學宮)이라 불리는 태학궁(太學宮)은 경학 및 문학 등을 교육하는 소학궁(小學宮), 율학 및 산학 등의 기술을 교육하는 술학궁(術學宮)과 더불어 제국의 대표적인 교육기관이었다. 소학궁이 학문의 기초를 이루는 기초학문을, 술학궁이 응용학문을 가르치는 곳이라면 태학궁은 위대한 정신 혼(混)이 내려주신 힘인 법술(法術)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곳이었다. 

다른 교육기관과 마찬가지로 황궐의 정문인 경원문 왼편에 터를 잡고 있는 태학궁은 때문에 황궁 동쪽 외곽에 자리한 청의관과는 꽤 거리가 있는 편이었다. 

소청 재하 원혜는 유난히 말이 없었다. 서문경의 눈빛이나 표정 따위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눈치 챈 탓에, 연신 그를 훔쳐보며 잘 보이지 않는 속내를 추측하기에 바쁜 것이었다. 조용한 것은 서문경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이유는 소청과는 사뭇 달랐다. 

‘대체 언제까지 걸어야 하는 거야···.’

서문경이 속으로 신경질을 냈다. 청의관을 나온 지 벌써 반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도 목적지가 나오지 않으니, 신경질이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때로부터 또 반시간 남짓을 더 걷고 나서여 겨우 거대한 문이 나왔다. 경원문, 그리고 그 곳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져있었다. 그것을 본 재하 원혜가 근처를 지나던 가마꾼을 불러 세웠다.

그렇게 서문경과 궁인은 그 작은 승교(乘轎)를 타고 태학궁에 도착했다. 몇 시간 만에 겨우 태학궁에 도착한 서문경이 태학궁문에 걸린 현판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다 왔구나. 그러나 서문경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안이했던 것인지 깨달아야만 했다.

“이런 빌어먹을.”

서문경이 입 속으로 욕설을 지껄였다. 대체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걸까. 벌써 세 개의 문을 지나 거울 같은 호수를 두 개나 지나고 몇 개나 전각을 지나쳐온 참이었다. 

앞서 걸으며 서문경을 안내하고 있던 재하 원혜의 발걸음이 멈춘 것은, 몹시 지친 서문경이 ‘저 여자가 누군가에게 날 괴롭히라는 밀명을 받은 것이 아닐까’하고 의심하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태원전(太園殿)입니다.”

걸음을 멈춘 소청이 서문경에게로 몸을 돌리고 말했다.

서문경은 잠시 주위를 살펴보았다. 팔각지붕을 얹은 수려한 전각 세 채가 보인다. 화려하기보다는 오히려 단정한 모로단청이 품위 있는 빛을 발하고, 지붕 위에는 잡상(雜像)들이 그 아래를 지나는 사람들을 내려다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줄줄이 늘어서 있다. 지붕이 내린 그림자 아래로 검은 현판 하나가 걸려 있는데, 그 현판에는 서문경이 읽을 수 없는 글씨가 흰 빛깔로 아로새겨져 있었다. 길게 누운 전각의 그림자가 부스스 부서지는 바람 소리와 함께 서문경의 발치에서 흔들렸다. 세 채의 건물 중 어느 쪽으로 들어가야 하는 건가 서문경이 생각하고 있는데 재하 원혜가 말했다.

“들어가시지요.”

서문경은 재하 원혜를 따라 세 채의 전각 중 왼쪽에 자리한 전각으로 들어갔다. 너른 전각 안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두루마리들을 가득 안고 여기저기를 바삐 오가고 있었다. 제 할 일이 바빠 주위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들 중 하나를 가까스로 붙잡아 재하 원혜가 말을 붙였다. 재하 원혜가 그의 귀에 몇 마디 말을 속삭이자 그녀에게 불려 세워진 서생이 어, 하며 서문경 쪽을 휙 돌아보았다. 

“이런. 학승 박사(博士)께서는 지금 창혜각에 가실 채비를 하고 계시온데···.”

서생이 혀를 차며 말끝을 흐렸다. 그의 말에 뭔가 일이 잘못되어가는 건가 싶어 신경이 날카로워진 서문경이 미간을 찌푸리고 눈을 치켜떴다. 

“학승 선생께서 창혜각에 행차하신다 하면 다른 박사 분들께서는?”

“학승 박사뿐만이 아니라 모든 박사 분들께서 오늘은 창혜각으로 부름을 받았다 하셨소이다.”

먼 길을 온 고생이 물거품이 되는 것이 아쉬웠던지 재하 원혜가 재차 다른 방도가 없나 캐어물었지만 서생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서생의 대답을 들은 원혜가 더 이상 어쩔 수 없다 싶었던지 한숨을 쉬며 서문경을 힐끗 곁눈질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이만 돌아가 봐야 할 것 같다는 눈짓이었다. 

그러나 그 때, 지금까지는 한 발 물러서서 소청과 서생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서문경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혹시 박사라는 분들이 다른 세계에서 온 손님들을 맞이해야 할 의무를 지신 분들입니까?”

“예에. 손님들의 ‘힘’이 어떠한 것인지를 파악하고, 그 ‘힘’을 능란하게 다룰 수 있도록 도움을 드리는 것도 박사직의 의무 중 하나이지요.”

서생의 대답에 서문경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청(所廳)이 객들이 이 세계에 적응할 수 있도록 생활 전반을 도와준다면, 박사(博士)는 객들의 능력을 파악하고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말이군요.”

‘맞습니다.’하고 서생이 선선히 맞장구를 쳤다. 그렇군요, 하고 서문경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서문경이 하는 꼴을 보고 있던 재하 원혜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저 까다로운 손님이 또 무슨 트집을 잡을 것인지 걱정이 되었던 탓이다. 그러나 청의관 내에서는 이미 유명해진 새 손님의 성격을 알 리 만무한 태학궁의 서생은 서문경이 묻는 대로 순진한 대답을 꼬박꼬박 돌려주고 있었다.  

“그럼, 창혜각은 황궐에 있는 건물입니까?”

여러 가지 잡다한 질문을 던져 대답을 듣기를 수 번, 서문경이 이번에는 박사들이 모임을 가진다는 창혜각에 대해 물었다. 그렇게 묻는 투가 지금까지 그랬듯 사심 없는 것을 지나쳐 심드렁하기까지 했던 터라 서생은 이번 또한 별다른 경계 없이 대답해 주었다.

“아닙니다. 상국(相國)께서 다른 세계에서 이 세계를 찾은 객들을 위해 친히 마련해주신 곳이오이다.”

“상국이라면?”

“수상이신 체제공 어르신 말입니다.”

별 희한한 것도 다 묻는다는 듯 서생이 웃으며 대답하자, 서문경이 ‘그렇습니까.’하고 겨우 납득했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자, 잠시 멈추십시오.’, 서문경의 웃는 모습을 보고 위기감을 느낀 재하 원혜가 황급히 서생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그녀의 제지 때문에 채 말을 끝맺지 못한 서생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궁인을 돌아보았다. 그런 그에게 잔뜩 이마를 찌푸린 재하 원혜가 무어라 꾸짖는 말을 하려는 찰나, 서생의 뒤로 누군가가 다가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학유(學諭)가 어찌 여기 있는가?”

그것은 키가 작고 마른 몸에 하얗게 샌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었다.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서생이 기겁을 하여 허리를 숙였다. 소청 재하 원혜 또한 태도가 돌변하여 ‘학승박사를 뵙습니다.’하고 인사를 해보였다. 

“이 청년은?”

서생과 소청의 인사를 목례로 화답한 노인이 허리 숙인 사람들 뒤에서 멀뚱히 눈을 끔뻑이며 서 있는 서문경에게 눈길을 돌렸다. 노인이 자신에게 눈길을 주자 서문경이 어른에 대한 예의로 일단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해 보인 후에 물었다.

“어르신께서 태학궁의 박사십니까?”

“그렇소만 그대는?”

“범님의 세계에서 물을 타고 이 세계로 온 손님입니다.”

‘그래서 아직 제 이름도 알지 못하는 처지입니다.’하고 서문경이 놀라는 박사에게 자신의 처지에 대해 넌지시 밝혔다. 박사가 얼떨떨한 얼굴로 서문경의 온 몸을 훑어 본 후 중얼거렸다, ‘그래, 자네가.’ 그 중얼거림을 용케 알아들은 서문경이 웃으며 대꾸했다.

“말씀을 들으니 이미 저를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한데 어찌 지금까지 저를 찾아오시지도, 부르시지도 않았는지요.”

그 맹랑한 말에 노인을 비롯한 모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서생이 안절부절 못하며 노인의 표정을 살피고, 소청 재하 원혜는 서문경을 흘겨보고 그를 책했다. 그러나 서문경은 그런 그들에게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노인을 지긋이 응시하고만 있을 뿐이었다. 회반죽을 바른 것처럼 굳어있던 노인의 얼굴에서 돌출된 회색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무성한 눈썹 아래로 삼백안인 노인의 눈이 서문경을 노려보듯이 천천히 살펴본다. 이윽고 그가 대답했다.

“그렇군. 그것은 내 불찰이오.”

“그러하시면.”

“그럼 조만간 그대를 내 찾아가도록 하지.”

노인의 말에 서문경은 잠시 고민했다. 여기서 더 파고들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이 정도에서 일을 끝맺고 처소로 돌아가야 할 것인가. 자신의 세계로 돌아갈 길은 없는 것인지, 기억을 다시 찾을 방도는 없는지, 자신은 이제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 건지 궁금한 것이 너무나 많았지만 머리 한구석에 자리 잡은 서늘한 이성이 노인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지고 싶은 충동을 가로막았다. 

창혜각은 어제 보았던 그 수상이 만든 것이라 했다. 그리고 태학궁의 모든 박사들이 지금 그 창혜각으로 가고 있다고 했다. 서생의 말에 따르면, 박사란 다른 세계에서 온 손님들의 힘을 파악하고 그것을 능히 다스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의무를 가진 자들이라 하였다. 그런 박사들이 ‘손님’인 서문경을 제쳐 두고 수상이 만든 창혜각으로 모인다면···.

“······.”

어떻게 할까. 창혜각은 수상이 손님들을 위해 지은 곳이라 하였으니 서문경이 자신도 가보겠다 우긴다면 박사와 동행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이미 수상과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미운 털이 박힌 상태였다. 거기까지 생각한 서문경은 한숨을 쉬며 물러섰다. 여기서 접고 돌아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서문경이 노인에게 인사를 하고 물러나려던 때였다. 

“굳이 두 번이나 고생을 해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

서문경은 갑자기 노인의 뒤에 나타난 낯선 사내를 올려다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아이를 어르듯 노인에게 말한 사내가 그런 서문경을 보고 싱긋 눈웃음을 쳤다. 깎아 만든 것처럼 딱딱한 얼굴이 눈웃음을 치자 사르르 풀어지며 생기가 돌았다. 

그러나 그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과 마주친 서문경은 웃기는커녕 도리어 눈을 팍 찌푸렸다. 이 세계에 와서 싱글싱글 잘 웃는 사람 치고 제대로 된 사람을 보지 못했던 탓이다(하지만 그 다음 순간 서문경은 생각을 고쳤다, ‘잘 웃건 못 웃건 간에 성격은 다 나빴지.’).

“태학궁에 계시었습니까.”

사내를 보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그것을 본 서문경의 얼굴이 더더욱 험상궂어졌다. 이 세계에 와서 지위가 높았던 사람치고 제대로 된 사람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그러고서 서문경은 또다시 생각을 정정했다, ‘생각해보면 지위가 높건 낮건 간에 다 엉망이긴 했어.’).

“그래, 그대가 이번에 범님의 세계에서 왔다는 자인가.”

그 인사에 웃음으로 답한 낯선 사내가 서문경의 앞까지 걸어와 상반신을 조금 숙이고 서문경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부담스럽군, 하고 서문경이 사내의 어깨를 슥 밀었다. 그러자 구부렸던 상반신을 펴고 사내가 불쾌해하는 기색도 없이 씩 웃었다.

“듣던 그대롤세.”

“?”

누구한테 무슨 말을 들은 거냐, 서문경이 눈으로 묻자 사내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후 사내는 불퉁해져 있는 서문경의 왼손을 낚아채 억지로 악수를 나누었다.

“나는 염락 조원이라 하네. 호와 이름 중 아무 것으로나 불러도 좋아.”

“···아까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아직 제 이름도 알지 못하는 처지입니다.”

이 인간은 또 왜 초면에 반말이지, 금방이라도 튀어나오려는 짜증을 꾹꾹 목구멍 아래로 밟아 넣은 서문경이 감정을 숨기느라 무뚝뚝해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래, 하고 사내가 다시 한 번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리고 자네처럼 범님의 세계에서 온 하늘손님이라네.”

서문경의 눈이 커다래졌다.

**

“범의 세계에서 왔다고?”

그 자리에 장승처럼 굳어 선 채 서문경이 속삭였다.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서문경의 눈을 웃음기 섞인 눈으로 마주보며 조원이 천천히 턱 끝을 끄덕였다.

“나와, 같은 곳에서?”

“아마도.”

그대와 같은 곳에서. 조원이 반복해서 말하며 보란 듯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것을 본 서문경의 한 손이 조원을 향해 불쑥 내밀어졌다. 그러다가 서문경의 손이 조원의 멱살을 잡는 대신 허공에서 우뚝 멈췄다. 허공에서 멈춘 하얀 손가락이 건반을 두드리는 것처럼 움찔움찔 떨렸다. 그것을 재미있다는 듯한 눈으로 관찰하며 조원이 씩 웃었다. 실눈을 뜨고 웃는 얼굴이 신 포도를 앞둔 여우처럼 교활하고 얄미워 보였다.

“생김새를 보니 그대, 나와 같은 나라에서 온 모양이로군.”

하고 말하며 조원이 입술로만 속삭였다. 그 입술을 읽은 서문경의 눈에서 순간 불꽃이 튀었다.

“조원님!”

“이게 무슨 짓인가!”

서문경이 갑자기 달려들어 조원의 멱살을 틀어잡자 놀란 소청이 비명을 지르고 학승박사가 대경하여 추상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멍청히 그 꼴을 보고만 있던 서생이 박사의 눈총을 받고 뒤늦게 서문경을 조원에게서 떼어냈다. 

“악력이 참으로 좋으시군.”

멱살을 잡혔던 사람답지 않게 조원이 넉살 좋은 웃음을 흘리며 흐드러진 앞섶을 가다듬었다. 

“실례···, 했습니다.”

조원에게서 억지로 떼어 내지고 나서야 겨우 자신이 저지른 짓을 자각한 서문경이 억눌린 목소리로 사과했다. ‘귀한 하늘손님께 감히 무슨 짓을···!’, 잔뜩 노하여 낯빛이 시뻘게진 학승박사가 버럭 고함을 지르려는 것을 조원이 한 손을 들어 막은 후 서문경을 향해 빙긋 웃었다. 

“많이 놀랐던 모양이로군.”

아무래도 그대와 동향(同鄕)인 것 같다는 내 짐작이 맞았나보이. 조원이 너스레를 떨었다. 너그러운 척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이 몹시 신경에 거슬렸지만 이미 저지른 일이 있는 서문경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화를 참았다. 

“내게 묻고 싶은 것이 많으시겠지.” 조원이 부추기는 듯 은근한 투로 말했다. “그대의 ‘힘’에 관해서는 일단 급한 불을 끈 다음에 논해 보도록 하지.”

그렇게 말한 조원은 아직도 파르르 분에 떨고 있는 학승박사를 힐끗 곁눈질했다. 분을 가라앉히려 뾰족한 턱수염을 쓰다듬고 있던 학승박사가 그 눈길을 눈치 채고 처마처럼 돌출된 눈썹을 팍 치켜 올렸다. 

“창혜각에는 그 후에 가셔도 괜찮으시겠지요, 박사.”

“허나 이미 상국께서,”

“오늘 안에만 가면 될 것 아닙니까. 언제까지 가야 한다 정확한 시간을 정해 주신 것도 아닌데요.”

조원이 박사의 말허리를 끊으며 한 쪽 눈을 찡긋했다. 그 경박한 행동에 서문경이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는데, 정작 그 모습을 정면에서 본 학승박사나 서생 등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만 휘둥그레 뜰 뿐이었다. 아무래도 방금 조원이 한 행동이 무슨 뜻으로 한 것인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들어가세.”

조원이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 모를 말을 툭 던지고 휙 뒤돌아 어딘가로 걸어가 버렸다. 그 뒷모습을 노려보던 서문경이 자신의 눈치만 살피고 있는 소청 원혜에게 먼저 청의관으로 돌아가라 이르고는 조원을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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