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아직도 보이지 않았다.
**
흐느끼던 그대로 정신을 잃었던 모양이다.
어둑했던 방 안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환하게 밝아져 있었다. 버려진 인형처럼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서문경은 허리를 당겨 상반신을 일으켰다. 목이며 팔, 다리까지 온 몸이 뻣뻣했다. 씻지 못한 몸에서는 악취까지 났다.
“아.”
자신의 몸에서 나는 악취를 맡고 의아해하던 서문경은 이윽고 지난 일을 떠올렸다. 하나하나 어제의 일을 떠올릴 때마다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후, 하고 서문경은 한숨을 쉬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주위를 둘러봤지만 마땅히 할 만한 일이 없었다. 서문경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방안을 돌아보았다. 꽃들이 만개한 벽지가 발리고 아름다운 가구들이 놓인 이 방이 감옥처럼 느껴졌다. 비단금침이며 장신구들이 놓인 화려한 방과 초라한 자신이 대비되어 조롱당하는 것처럼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서문경은 이 방이 끔찍했지만 그렇다고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이 방 밖에 사람들이 가득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신기한 동물처럼 힐끔거리며 웃던 사람들을 제 발로 찾아갈 생각은 없었다.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서문경은 고개를 저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무기력함이 온 몸을 휘감았다.
어쩔 수 없이 서문경이 다시 자리에 누웠을 때였다.
“기침(起寢)해 계시나이까.”
몸을 모로 뒤척인 순간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서문경은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소청 재하 원혜의 목소리였다. 문을 열어도 좋을지요, 하고 원혜가 물어왔고 서문경이 그 말에 대답하기도 전에 닫혀있던 장지문이 열렸다.
“이러려면 대체 왜 물으신 겁니까?”
서문경이 짜증을 내자 재하 원혜가 두 손을 모으고 공손히 배례를 해 보였다. 그러나 서문경은 그녀의 인사를 받아도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재하 원혜는 공손한 척 인사해 보였지만 실제로 그 인사는 공손하다기보다는 오히려 무례했다. 서문경의 항의를 무시하다는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씻으시는 것이 좋겠군요.”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서문경의 몸을 죽 훑어본 후 소청 재하 원혜가 말했다. 서문경은 대꾸 없이 재하 원혜를 노려보았다. 자신의 몸을 훑어보는 시선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말을 어제 해주셨으면 고마웠을 테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말인가요?”
픽, 웃으며 서문경은 눈을 치켜떴다. 그리고 방금 전 재하 원혜가 했던 것처럼 원혜의 온 몸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어보았다. 그 눈길에 재하 원혜가 몸을 움찔했다.
“모처럼의 손님을 박대하는 것이 일반적인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어마나.”
“댁 같으면 안심하고 고마워하시겠습니까?”
보란 듯 서문경이 씩 웃었다.
“그래서, 어제는 물을 구경해보라는 말도 하지 않으시더니 오늘에 와서 씻으라 선심을 베푸는 저의는 무엇입니까?”
말씀해보세요, 하고 서문경이 빈정거렸다.
재하 원혜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당혹감을 능숙하게 감추고 평소처럼 미소 띤 얼굴로 돌아왔다. 쳇, 하고 서문경이 몰래 혀를 찼다.
“폐하께 문안인사를 드려야지요.”
그 말에 서문경은 와작 얼굴을 구겼다.
“폐하께서 그대의 몸에서 나는 냄새가 몹시 좋지 않다 역정을 내셨지요.”
“그거, 꼭 가봐야 하는 겁니까?”
서문경이 떨떠름하게 묻자 재하 원혜가 조금의 틈도 두지 않고 곧바로 대답했다, ‘당연한 말씀을.’
“대부분의 손님께서는 하늘을 타고 오실 때 각성한 능력으로 이 나라에 보탬이 되십니다만 물을 타고 오신 그대에게는 그런 능력조차 없으니.”
원혜가 서문경에게 노골적인 비웃음을 보냈다.
“무료하신 폐하의 장난감 역할이라도 해주시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
종로에서 뺨을 맞았으니 당연히 화풀이는 한강에서 해야지.
원혜에게 한 방 크게 맞고 대꾸조차 하지 못한 서문경은 그 앙심을 사건의 발단인 황제에게 풀기로 마음을 먹었다. 혼자서는 못 노느냐 빈정거려 주리라 벼르고 황제에게 안내된 서문경은 그러나 실제로 황제를 맞닥뜨리게 되자 입조차 열지 못했다. 황제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위엄에 압도당했다든가하는 매우 극적인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황제가 황제라는 휘황한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몰골이 몹시 엉망이었기 때문이었다.
“······.”
대체 저 꼴이 뭐람. 서문경은 황제의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반쯤 벗겨지다시피 한 겉옷을 보면서 생각했다. 누군가와 격한 드잡이 질이라도 한 것 같은 몰골이었다.
“표정이 어찌 그래!”
어이없다는 심경이 표정에 묻어 나왔던 듯, 서문경의 얼굴을 보자마자 황제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서문경은 못된 성질대로 빈정거림으로 응대하는 대신 음, 하고 침중한 신음을 흘렸다. 그것이 의외였던 듯 황제가 소리를 지르려고 벌렸던 입을 슬그머니 다물었다. 황제가 조용해지자 그 동안 서문경과 황제가 하는 꼴을 지켜보고만 있던 승직 효문이 서문경의 등을 툭 쳤다. 사나운 눈으로 돌아보는 서문경에게 그가 나직한 소리로 재촉했다, ‘예를 올리시게.’
“어떻게 말입니까?”
‘가르쳐 주고 하라고 합시다, 좀.’하고 서문경이 대놓고 짜증을 냈다. 효문이 허, 하고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자네의 세계에서는 지존께 드리는 예조차 가르치지 않는가?”
“이 세계에서는 통성명조차 하지 않은 자에게 말을 놓는 예가 있나 보군요.”
서문경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황제가 물건을 던지며 패악을 부려도 미동조차 없던 그의 얼굴근육이 꿈틀 씰룩였다.
“다른 세계에서 온 자에게 자신의 세계가 모욕당하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면 아저···, 아니, 어르신부터 자중하도록 하십시오.”
‘먼저 시작한 건 어르신이십니다.’하고 서문경이 으름장을 놓았다. 서문경이 선수를 쳐서 말하자 승직 효문은 할 말이 없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버릇없는 아이를 보는 듯한 그 태도가 거슬렸지만 서문경은 거기까지만 말하기로 했다. 말이 길어져봐야 손해를 보는 것은 이 세계에 대한 정보가 전무한 자신뿐이라는 것을 서문경은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있던 세계, 아니, 내가 있던 나라에서 지존(至尊),” 아마도 지존이란 황제나 왕 정도로 풀이하면 되겠지, 하고 생각하느라 말이 잠시 끊어졌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뭐라 하셨는가?”
“제가 태어난 나라는 황제도, 왕도 없던 나라였습니다.”
그 말에 승직 효문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눈앞에 난데없이 떨어진 날벼락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었다. 경악하는 승직 효문을 서문경이 가만히 살펴보고 있으려니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효문이 흐트러졌던 표정을 수습했다. 그런 후 효문은 서문경을 찌푸린 눈으로 물끄러미 응시했다. 천하에 둘도 없는 천한 것을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에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쉽사리 읽고 서문경이 툭 내뱉었다.
“이런 근본 없는 것들을 보았나.”
“무슨 말을!”
“라고 말씀하시고 싶은 것 아니었습니까?”
모욕적인 말에 와락 성을 내던 승직 효문은 그 다음에 이어진 서문경의 말을 듣고 말문이 막힌 듯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서문경은 척 팔짱을 끼고 서서 효문의 몸을 아래위로 슥 훑었다.
“기분이 상하십니까?”
“무슨 말씀이신가.”
“금방, 제게 그 말을 하시려던 것 아니었습니까? 그랬으면서 똑같은 말을 어르신 당신께 해 드리니 기분이 상하십니까?”
잠시 동안 말이 없던 효문은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소.’하고 상황을 대충 얼버무리려 했다. 서문경이 확 눈을 치켜떴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죄송합니다.”
서문경이 순순히 사과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시선에서는 경계하는 듯 날카로운 뭔가가 번뜩이고 있었다. 승직 효문의 변명을 믿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그 눈길이 부담스러웠는지 승직 효문이 괜히 헛기침을 했다.
“그럼 폐하와 담소를 나누시게.”
그렇게 말한 승직 효문이 황제에게 배례하고 황급히 물러났다. 황급히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서문경이 혀를 끌끌 찼다.
“응?”
그러다 서문경은 문득 자신의 등에 와 닿는 눈길을 느꼈다. 황제의 존재를 잠시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서문경이 아차했다.
“어.”
분명 화를 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돌아본 황제의 얼굴은 언뜻 보기에 그다지 화가 난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면서 서문경은 황제의 얼굴만 하릴없이 바라보았다.
“······.”
생각해보면 화나지 않은 황제의 얼굴은 본 것은 처음이었다. 찌푸려지지 않은 황제의 얼굴이 너무도 단아해서 서문경은 새삼 놀랐다. 희고 고운 피부와 먹같이 검은 머리카락이 어울려 잘 그린 동양화 속의 인물처럼도 보였다.
서문경과 황제는 서로를 마주본 채 침묵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 먼저 입을 연 것은 황제 쪽이었다.
“무례한 자로고.”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황제는 웃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듯 황제의 눈이 호기심으로 빛나는 것을 보고 서문경은 당황했다.
“효문이 당해내지 못하는 자는 네가 처음인 것 같구나.”
“···그렇습니까.”
“나는 제안(提岸)이라 한다.”
갑작스러운 상황 전개에 서문경은 어찌해야 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오래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황제는 자신의 이름을 밝혔고, 이 젊은 황제는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에 군림하는 자였다. 이 세계에 떨어진 이상 서문경은 이 황제에게 복종할 필요는 없으되 존중해 주어야 할 필요는 있으리라.
“죄송합니다만.”
그러나 자신의 이름을 말하려고 입을 열었던 서문경은 다음 순간 난감함을 숨기지 못하고 그렇게 말해야만 했다. 서문경의 입에서 나온 말이 의외였던지 황제가 초승달 같은 눈썹을 팍 찌푸렸다. 성질 나쁘기로는 뱃속의 창자가 네댓 바퀴는 꼬여 있는 듯한 그가 오해하기 전에 서문경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저는 제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아아.”
서문경이 머뭇거리며 그렇게 덧붙였을 때에야 겨우 황제는 찌푸렸던 눈썹을 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하고 알겠다는 듯한 신음을 흘리며 황제가 새삼스레 서문경의 온 몸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래, 그대는 물을 타고 왔다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그렇다 해도 대략적으로 기억나는 것 정도는 있지 않나?”
서문경의 목소리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떨떠름함을 눈치 채지 못한 건지, 아니면 서문경이 마뜩찮아 하는 것을 눈치 챘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해줄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건지 황제가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런 황제를 흰 눈으로 노려보다가 서문경이 결국 포기하고 한숨을 푹 쉬었다. 아직 믿기지는 않지만 황제라는데 그런 인간에게 배려를 뭘 바라.
“경(慶).”
“경?”
“성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름에는 경(慶)자가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내뱉어 놓고서 서문경이 기억을 더듬어 경자가 들어가는 그럴듯한 이름들을 여러 개 떠올려 보았다. 경아, 라고 불렀으니 아마도 경자가 앞글자이기보다는 뒷글자일 확률이 크겠지. 그렇다면 혜경이나, 세경, 아니, 이건 여자 이름이고, 남자 이름 중에는 준경이나 의경, 혁경 같은···.
“그렇다면 경아라 부르면 되는가?”
한창 상념에 잠겨 있던 서문경이 갑자기 들려온 황제의 목소리에 휙 고개를 돌렸다. 서문경의 경악한 눈초리를 마주 보고도 황제가 태연히 고개를 기웃기웃하며 ‘경? 아니면 경아? 경이야?’하고 서문경의 이름을 여러 가지로 불러 보았다. 서문경이 팍 얼굴을 찡그리며 팔을 벅벅 긁었다.
“왜 그러나?”
“저, 그렇게 간지러운 이름은.”
갑자기 팔을 긁어대는 서문경을 황제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노려보다가 스슥 앉은 채 뒤로 물러났다. 서문경이 한숨을 쉬며 변명했다, ‘피부병 같은 건 안 걸렸습니다.’ 그렇게 말해 놓고 서문경은 ‘여기와 원래 있던 곳과는 세계 자체가 다르다니 장담할 수는 없지만.’하고 생각했지만 그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경아, 는 남자에게 쓰기에는 너무 간지러운 이름 아닙니까···.”
‘뭡니까, 그 계집애 같은 이름은.’하고 외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서문경이 차분히 황제를 설득했다. 그러자 황제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팔짱을 끼고 고개를 모로 기웃거렸다.
“자네 입으로 경이라면서? 경이를 경이라 부르지 그럼 무어라 부르나.”
그게 싫다면 온전한 이름을 생각해 내던가. 황제가 난감해 하는 서문경을 내리깐 눈으로 쳐다보면서 빈정거렸다. 경아, 경이야, 경아, 어느 쪽이 더 좋을까. 일부러 들으란 듯 큰 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중얼대고 있는 황제를 보고 뿌득 이를 간 서문경이 하릴 없이 내뱉었다.
“경이든, 경아든, 좋을 대로 부르십시오.”
서문경이 씹어 내뱉듯 말하자 황제가 거만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당연한 말을.”
**
그래요, 너 잘나셨습니다. 서문경은 한숨을 폭 쉬고 그것으로 만사를 포기했다. 그 와중에도 황제는 서문경의 이름을 여러 가지로 불러 보며 자신의 마음에 드는 쪽을 고르고 있었다. 이윽고 황제가 제 마음에 드는 이름을 결정했는지 고개를 들고 서문경의 이름을 불렀다.
“그럼, 경아.”
“···예.”
넌 잘나셨고 전 관대하렵니다, 네. ···사실 그 외엔 별다른 수도 없고. 서문경은 입 속으로 중얼거리며 부글거리는 속을 가라앉혔다. 계속해서 자신을 세뇌시킨 보람이 있는 것인지 서문경은 황제가 ‘경아’하고 간지럽기 짝이 없는 이름으로 자신을 불렀을 때에도 꺼려하는 내색 없이 대답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넌 어떻게 여기에 왔느냐?”
“···폐하께서 부르시지 않았습니까?!”
침착, 침착, 하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다스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낯모르는 여자들에게 끌려가 펄펄 끓는 물속에 던져졌던 굴욕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폐하를 기다리게 만드는 것은 예가 아닙니다!, 혼자 씻겠다고 애원하던 자신의 귓전에 대고 그 성질 급한 여자들이 쩌렁쩌렁 외쳤던 말이 지척에서 들리는 듯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서문경이 으르렁 소리를 지르자 심기가 상했는지 황제가 대뜸 도끼눈을 떴다.
“어느 안전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건가!”
웬 안전?, 하고 같이 눈을 부릅떴던 서문경이 다음 순간 ‘아아, 안전’하고 끓어올랐던 분을 진정시켰다(안전제일, 안전제일). 서문경이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고개를 숙이자, 그것을 자신의 무례한 행동을 반성하고 있는 것이라고 오해한 듯 황제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소리를 지르면 언제나 그랬듯 콜록콜록 밭은기침을 몇 번 내뱉은 후 황제가 턱을 치켜 올렸다.
“허나 지금만은 무례를 용서토록 하겠다.”
고개를 숙였던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알지 못하는 서문경은 그래서 고개를 들자마자 황제가 한 말에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
저건 뭐가 이렇게 변덕스러워? 서문경은 투덜거리며 인상을 구겼다.
“짐(朕)은 몹시 분주하지만.”
서문경이 인상을 구기든 말든 황제는 여전히 자신의 생각 속에 빠진 채였다. 황제는 서문경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가 흠흠 괜히 헛기침을 했다가를 반복한 후 거드름을 피우며 말을 꺼냈다. 서문경은 황제가 분주하기는커녕 자신만큼이나 한가해 보인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그것을 따지고 들지는 않았다. 그 말을 하면 저 까다로운 청년이 어떻게 반응할지 눈에 선해 모든 것이 귀찮아졌기 때문이었다.
뭐, 가끔은 진실을 숨기는 것이 좋을 때도 있는 법이지.
“그러나 승직의 말처럼 짐의 나라를 방문한 객을 짐이 손수 보살펴 주는 것 또한 짐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니.”
보살펴 준다고? 대꾸 없이 황제가 하는 말을 듣고만 있던 서문경이 문득 눈을 가늘게 떴다. 황제의 말에서 뭔가 걸리는 것이 있었던 탓이었다.
“승직이라 하심은 아까의.”
“그래, 그대를 짐에게로 안내했던 효문을 이름이다.”
역시, 하고 서문경은 생각하며 속으로 승직 효문이란 사내에게 욕을 퍼부었다. 소청 재하 원혜가 자신에게 한 말과 저 황제가 알고 있는 것이 어찌 다르다 했더니 결국 이런 것이었나. 서문경은 끌끌 혀를 찼다. 아무래도 이 세계의 사람들은 능력 없는 물손님인 자신이 몹시 귀찮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서문경은 말없이 황제를 응시했다. 그리고 이 세계의 사람들에게 저 황제는 물손님인 자신만큼이나 귀찮은 존재인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떠올려보면, 말로는 폐하니, 지존이니 하지만 저 황제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이 세계의 예법에 대해 잘 모르는 자신이 봐도 한 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무례했었다.
“폐하.”
“불렀느냐.”
서문경이 자신을 부르자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할 말이 있으면 말해보라 승낙의 표시를 했다.
“그 머리나 옷은.”
서문경의 말에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황제의 낯이 확 붉어졌다. 황제가 깃이 어깨 너머로 넘어 가다시피 한 표의(表衣)를 당겨 입으며 뒤늦게 옷매무새를 바로 했다.
“잠자리가 험했을 뿐이다.”
그렇습니까, 서문경이 납득한 듯 말하자 황제의 낯빛이 안도한 듯 천천히 밝아졌다. 그러나 서문경은 황제의 그 태도에서 오히려 확신을 얻었다.
황제나 제후가 없는 나라에서 태어나 자란 서문경이 생각해봐도 황제의 잠자리가 험하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시중을 드는 자가 몇 백, 몇 천이나 될 황제의 옷매무새가 저리 난잡하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자신의 일에 정신이 팔려 무심코 넘어갔던 소청 재하 원혜와 승직 효문의 태도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제 군주의 약점을 한낱 손님에 불과한 자신 앞에서 너무도 쉽게 입에 올리던 소청 재하 원혜의 모습이며, 짠물에 젖어 괴이한 냄새까지 풍기는 자를 태연히 지존의 앞에 데려다 놓던 사람들의 행동이며, 황제가 하는 말을 듣는 둥 마는 둥하던 승직 효문의 태도까지.
“이런.”
못된 것들. 서문경은 혀를 찼다.
물끄러미 황제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던 서문경이 푹 한숨을 쉬고 물었다, ‘몸에, 아니, 아, 옥체(玉體)에 감히 손을 대도 괜찮을까요.’ 그 말이 의외였던지 황제가 치켜 올라갔던 눈꼬리를 슬그머니 내리고 잠시 머뭇거렸다. 아무래도 저 손님의 무지한 청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고민하는 듯한 모양이었다.
“그리하라.”
고민하던 황제가 겨우 결론을 내렸는지 턱 끝을 치켜들고 오만하게 대꾸했다. 그 거만한 모습이 어제와는 달리 얄밉다기보다는 괜히 측은해 보여서 서문경은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황제의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듬어주었다.
어리둥절해 하는 황제의 표정을 못 본 척하고 황제의 옷매무새와 머리카락을 다듬어 준 서문경은 뒤로 발을 물려 물러났다.
“혹시 제게 궁금한 것이 있으십니까?”
함께 시간을 보내주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하고 서문경은 생각하며 물었다.
**
한 순간이라도 빈틈을 보이는 것이 아니었는데. 날이 채 저물지도 않아 서문경은 이를 갈며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날이 밝자마자 황제의 침소로 끌려갔던 서문경은 몇 시간이나 쉬지 않고 황제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네가 살던 곳은 어떤 곳이었느냐,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되었느냐, 네 세계를 만드신 범님은 어떤 분이시냐, 등등 황제의 질문이 좀처럼 끊이지 않았던 탓이었다. 긴 말을 하기가 귀찮았던 서문경은 기억이 불안정해서, 어쩌다보니, 모르는 사람, 등의 대답으로 얼버무리려 했지만 황제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성의 없는 대답을 할 때마다 황제는 죽일 듯 서문경을 노려보았고, 서문경은 결국 황제가 바라는 ‘성의 있는’ 대답을 다시 해줘야만 했다. 그러다보니 서문경은 중간부터 ‘두 번 대답을 하느니 차라리 긴대답 하나로 끝내자’라는 생각이 들어 황제가 바라는 대로 묻는 말에 고분고분 대꾸를 해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실수였다. 평소 제 가신들에게 노골적인 무시를 받아 온 황제가 서문경이 자신을 무시하지 않고 꼬박꼬박 대답을 해주자 잔뜩 신이 난 것이었다. 때문에 서문경은 말문이 트인 황제에게 붙잡혀 입 안이 마르도록 말을 하고, 하고, 또 해야 했다.
서문경이 황제의 침소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해가 저물 무렵이었다. 서문경이 원래 자신이 살던 나라의 지도자에 대한 험담을 하고 있을 무렵, 장지문 밖에서 승직 효문이 갑자기 큰 소리로 아뢰었기 때문이었다.
“황상, 수상 체제공 서현(曙弦) 들었사옵니다.”
이야기의 맥을 끊는 그의 목소리에 황제도, 서문경도 입을 닫았다. 장지문에 그려진 구조룡(九爪龍)의 머리에 긴 그림자 하나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입을 다문 채 황제가 그 그림자를 주시하고 있었다.
서문경은 황제처럼 장지문에 어린 그림자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그 그림자보다도 장지문에 그려진 용의 그림이 서문경의 눈길을 끌었다. 하얀 종이가 하늘의 구름처럼도 보이고 짙게 낀 안개처럼도 보였다. 그 구름 같기도 하고 안개 같기도 한 공간 가득 용이 노닐고 있었다. 뱀처럼 긴 몸통과 두 개의 뿔의 돋은 머리, 긴 수염과 꼬리를 가진 용이 구름을 뚫고 솟아오르고 있었다. 흑옥(黑玉)같은 검은 비늘이 반짝이는 것이 숨 막힐 정도로 생생하다. 용은 길게 찢어진 입을 벌리고 있었다. 종유석처럼 날카로운 이빨들이 있는 자리에 그림자가 있었다. 서문경은 용이 그림자를 금방이라도 잡아 삼킬 것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들라하라.”
말없이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던 황제가 수상의 알현을 수락했다. 그 말에 겨우 정신을 차린 서문경이 눈을 크게 뜬 순간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린 순간 나타난 광경에 서문경은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긴 그림자만큼이나 키가 큰 사내였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은 단정했지만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서문경이 느낀 것은 호감이 아니라 불쾌감이었다. 제 군주의 앞에 선 자 답지 않게 사내의 얼굴에서는 공손함도 조심스러움도 찾을 수 없었다. 무엇을 보는 건지 알 수 없는 눈은 황제의 어깨 너머를 향하고 있었고, 그의 입매와 눈매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황제에게 무릎을 꿇지도, 허리를 숙이지도, 하다못해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다.
그런 사내 뒤로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문을 지키고 있던 여인들이며 서문경을 힐끗거리며 웃어대던 환관들, 그리고 승직 효문까지도 두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대고 있었다. 자신을 바닥까지 끌어내리고 그만큼 상대를 드높이는 극상(極上)의 예. 언뜻 보면 그들의 절은 황제에게 올리는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알 수 있었다. 그들의 머리가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
서문경은 사람들의 머리가 검은 신을 신은 사내의 발을 향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표정을 굳혔다.
“지존을 뵙사옵니다.”
사내의 말이 무겁게 방 안을 울렸다. 배례는커녕 자신의 앞에 고개조차 숙이지 않는 무례한 가신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던 황제가 한쪽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턱을 괴었다.
“용을 뵙는다 말하지는 않는가?”
그 말에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무겁게, 더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다.
서문경은 갑자기 사위가 서늘해진 것을 느끼고 조심스럽게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나 황제의 날카로운 옆얼굴과 표정이 없는 사내의 얼굴에서는 어떤 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여전히 사내의 발치에 고개를 숙인 사람들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서문경은 무심결에 장지문에 그려진 용의 그림을 보았다. 그리고 황제가 불쑥 내뱉은 말을 떠올렸다.
‘용(龍).’
뜬금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서문경이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하는 생각인지도 모른다.
“···저 이가 이번에 물을 타고 오신 손님이십니까.”
무거운 침묵을 떨치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사내, 수상 서현이었다. 그가 꺼낸 말에 서문경은 눈을 홉떴다. 서문경이 황급히 황제를 돌아보자 역시나 그의 얼굴은 무섭도록 굳어 있었다. 사내는 황제가 한 물음에 대한 답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체제가 다른 세계에서 온 서문경조차도 경악을 금치 못할 무례였다.
서문경은 황제가 곧 노성을 터뜨릴 것이라 생각했다.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저 사내의 뺨을 후려갈기고 저 무례한 것을 끌고 나가라, 고함을 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저 문 밖의 사람들도 지존의 명에 따라 사내를 포박해 나갈 것이라고 의심치 않았다. 아무리 힘없는 지존일지도, 그 아무리 충실치 못한 신하들일지라도.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합니다, 저 분께서 이번에 새로 이 나라를 찾은 물손님이십니다.”
승직 효문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황제를 대할 때와는 비할 수 없이 공손한 어조였다. 말끝을 끄는 듯한 어조, 부드러운 것을 지나쳐 비굴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 수상 서현의 비위를 맞추는 말들이 하나둘씩 사람들에게서 터졌다. 그것을 서문경은 그저 황망히 바라보기만 했다.
“뵙게 되어 반갑소, 이 나라의 수상인 서현이라 하오.”
사내가 서문경을 바라보고 그에게 말을 걸었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어조였지만 말의 내용만큼은 상냥했다. 사내의 검은 눈에 자신의 모습이 어려 있는 것을 보고 서문경의 턱이 더 딱딱하게 굳어졌다.
“체제공께 어서 인사 올리시오.”
승직 효문이 서문경을 재촉했다. 못 박힌 듯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서문경을 보는 그의 눈길이 점차 험악해진다.
그러나 서문경은 승직 효문이 부르는 대로 그에게 다가가는 대신 황제를 돌아보았다. 황제의 하얀 얼굴에서는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화를 내고 있는지, 아니면 슬퍼하는지, 그것도 아니면 작금의 상황을 한탄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사기인형처럼 그저 희기만 한 얼굴 아래 숨겨진 감정을 읽어내기라도 하려는 듯 서문경의 눈이 가늘어졌다.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이윽고 서문경이 웃으며 수상 서현의 인사에 응답했다. 그런 서문경에게 승직 효문이 손을 까닥여 보였다. ‘손께서는 어서 이리로 오라.’, 서문경이 승직 효문이 하고자 하는 말을 꿰뚫어보고 생각했다. 서문경이 빙긋 웃었다, ‘어서 이리로 와서 조아려 인사드리라.’
‘그렇지.’
진짜 우리들의 황제에게.
서문경은 웃는 얼굴 그대로 수상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서문경을 바라보는 사내의 얼굴에 의아하다는 기색이 어렸다.
“지존(至尊)의 앞이 아니라면 당연히 높으신 분을 뵈었으니 허리를 숙여 인사드렸을 텐데.”
그 말에 사내를 비롯한 사람들의 얼굴빛이 변했다. 서문경이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더 높으신 분 앞인지라 당신께 어울리는 예를 차리지 못하는 것이 아쉽습니다.”
서문경은 사내와 사람들에게 보란 듯 황제를 돌아보고 말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어 말했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그들이 똑바로 알아들을 수 있도록. 가장 ‘객관적인 타인’인 자신의 눈에 ‘누가’ 진짜 황제로 보이는지를 알려주기 위하여.
“더 하실 말씀은?”
자신에게 와 닿는 사람들의 눈초리가 찌르는 듯 따가웠다. 그러나 서문경은 개의치 않고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렇군, 이해하오.”
한동안 말이 없던 사내가 천천히 얼굴에 웃음을 떠올리며 말했다. 관대하게 내뱉는 그 말을 듣자 어쩐지 등골이 오싹해졌다. 사내의 검은 눈이 자신을 응시하는 것을 서문경이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빛 한 점 보이지 않는 사내의 눈이 섬뜩했다.
“시간이 된다면 태학궁(術學宮)에 들러 보도록 하시오. 물을 타고 오느라 대부분이 소실되었겠지만 미력하나마 몸 안에 범님께서 내려주신 능력이 남아 있을 터이니.”
그렇게 일러준 후 사내는 천천히 선 자리에서 물러났다.
“손님인 그대가 이토록 폐하를 잘 따르는 것을 보니 나도 마음이 흡족하오.”
“······.”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지만 서문경은 웃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의 적의(敵意)가 아플 정도로 확실히 느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사내는 황제에게 깊이 허리를 숙여 보인 후 황제의 침전을 나섰다. 사내가 침전을 나가자마자 장지문이 다시 닫혔다.
“후우.”
서문경은 이마에 손을 짚고 눈을 꾹 감았다. 아주 어리석은 짓을 저지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대,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적으로 돌렸군.”
픽, 미처 참지 못하고 새어나오는 웃음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황제가 킬킬킬 웃고 있었다. 황제의 말에 서문경이 이마를 팍 찌푸렸다.
“이 나라에 오자마자 이런 일을 저지르다니.”
서문경은 팔짱을 끼고 서서, 배까지 잡고 웃고 있는 황제를 못마땅하게 내려다보았다, ‘이건 편을 들어줘도.’
“어찌 그랬나.”
무슨 심산으로. 겨우 웃음을 그친 황제가 콜록콜록 마른기침을 하면서 물었다. 그렇게 묻는 황제의 눈이 몹시 날카로워서 서문경은 ‘폐하를 위하여’ 운운하여 이참에 금은보화나 좀 뜯어내볼까 하던 속물적인 계획을 철회했다. 서문경은 쳇, 하고 작게 혀를 차며 투덜거렸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났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빈정 상해서 그랬습니다.” 좀, 하고 서문경이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짜증이 나 있었거든요. 이 나라 사람들에게.”
하지만 앞날을 생각하면 그런 짓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만. 서문경은 폭 한숨을 쉬었다.
“그러냐.”
턱을 괴고 앉아서 그런 서문경의 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황제가 불현듯 말했다. 네, 하고 서문경이 대충 대꾸했다.
그 이후로는 대화가 끊겼다. 침묵, 그러기를 한참,
“그만 돌아가 봐도 좋다.”
불쑥 생각난 것처럼 머리를 든 황제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며 짓는 표정이 ‘무슨 까닭으로 여태 여기 있누.’하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라서 서문경은 신경질이 났다. 그러나 그렇다고 계속 자리보전하고 앉아 있어봐야 자신만 괴로울 따름이다.
“그럼.”
하고, 결론을 내린 서문경은 당장 황제의 침소를 박차고 나왔다. 황제의 침방을 나서자마자 자신을 향하는 사람들의 눈초리가 험악해진 것이 당장에 느껴졌다. 서문경은 난감해졌다. 나, 사실 돌아가는 길을 모르는데···.
하지만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는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볼 엄두도 나지 않아서 서문경은 여기저기를 헤매다 겨우 눈에 익은 전각을 찾아, 자신에게 주어진 방에 틀어박혔다. 그가 길을 헤맨 지 반나절만의 일이었다.
“젠장.”
오늘 있었던 일을 멍하니 되뇌어 본 서문경이 망할 놈의 성격, 하고 다시 한 번 한탄했다. 그러다 서문경은 힘이 없는 황제를 탓하고 자신을 황제에게 데려간 소청 재하 원혜를 탓했다가 괜한 동정심에 황제의 침소에 눌러 붙었던 자신을 탓하는 둥 바닥을 뒹굴며 짜증을 냈다.
몇 번이나 머리를 쥐어뜯은 끝에 마음을 가라앉힌 서문경은 이곳이 어디인지, 이 나라가 어떤 곳인지, 돌아갈 방법은 없는지 등을 내일이 되는 즉시 알아보기로 마음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에도 서문경은 끌려가다시피 해 황제의 침소에 던져졌다.
**
염락 조원(調元)은 먼 곳에서 수상 서현을 발견하고 빙그레 웃었다. 얼굴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먼 거리였지만 조원이 서현을 알아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조원이 특별히 눈이 좋다거나, 혹은 머나먼 거리를 쉽사리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그에게 애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여전히 추종자들에 둘러싸여 계시는군요.”
수상 서현은 항상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언제나 그의 지척에는 그의 추종자들이 가득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염락(炎樂).”
수상 서현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고 슬쩍 고개만 끄덕여 목례를 했다. 서현의 눈길을 받은 조원이 그때서야 비로소 깊숙이 허리를 숙이고 절을 했다. 경박한 소리에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던 사람들도 조원의 얼굴을 확인하고 구겼던 얼굴을 폈다.
“염락께서 예까진 어인 일이신지요?”
“내 궁금해 도무지 참을 수가 있어야지요.”
누군가 던진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 조원이 냉큼 대꾸했다. 그리고 조원이 싱글벙글 웃는 얼굴 그대로 서현을 응시했다. 그 웃는 얼굴 뒤에 대답을 강요하는 뭔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챈 서현이 이마를 찌푸렸다.
“무어가 그리 궁금한가?”
“나와 같은 세계의 사람이 왔다지 않습니까?”
조원의 웃음이 미묘하게 변했다. 잘 생긴 눈매가 슥 가늘어지더니 둥글게 굽어진다. 둥글게 굽어진 눈매 안에 담긴 눈이 짓궂은 호기심으로 빛나고 있는 것을 보고 서현은 무심결에 한숨을 쉬어버렸다. ‘어디 편찮으십니까?’, 한숨을 쉬는 자신을 보고 걱정하는 척 하는 꼴이 몹시 얄미웠다.
“같은 범님의 세계에서 왔다 한들 하늘을 타고 온 그대와는 격이 다른 자다.”
‘압니다.’하고 선뜻 조원이 대답했다.
“그러니 상국(相國)께서 거두시지 않은 것이겠지요.”
“······.”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궁금한 마음이 드는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의외의 순순한 반응에 의심스런 표정을 지었던 수상 서현은 곧바로 이어진 조원의 말을 듣고 쯧, 혀를 찼다, ‘그러면 그렇지.’
손을 휘휘 저으며 걸음을 옮기는 서현을 뒤로 조원이 따라붙으며 계속해서 물었다. 그 새로운 손님은 젊습니까, 아닙니까? 여자아이인가요, 아니면 사내아이인가요? 성격은 어떻습니까? 앞으로 그 아이를 어찌하실 생각이신지요? 조원이 입을 열 때마다 서현의 얼굴이 구겨졌다. 서현은 이마에 손을 짚고 고개를 슬슬 저었다. 시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맹랑한 아이더군.”
“어떤 아이기에 체제공께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서현이 입을 꾹 다물었다. 아픈 이마를 누르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말하는 것을 듣고 있자면 당장 그 입을 때려주고 싶은데.”
“?”
“반박할 구석이 없어 그렇게 할 수도 없더군.”
‘당하셨군요?’하고 조원이 킬킬킬, 배를 잡고 웃음을 터뜨리는 가운데 서현은 조원을 지나쳐 천추전(千秋殿) 건너편으로 걸어가 버렸다. 서늘하게 굳어진 서현을 옆얼굴을 슬쩍 훔쳐본 사람들이 하나둘씩 숨을 죽였다. 서현의 얼굴을 힐끔힐끔 훔쳐보기만 하던 사람들 중 그나마 용기 있는 자가 있어 겨우 여쭈었다.
“그 수객(水客)은 어찌하실 셈이십니까?”
그 물음에 서현이 ‘무얼.’하고 귀찮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물을 타고 온 손이니 내게는 필요치 않소.”
사람들이 힐끗 고개만 돌려 뒤에 남겨진 조원을 보았다. 조원은 아직까지 웃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질 정도로 경박한 모습이었지만 하늘을 타고 온 범의 백성인 그는 학궁의 어떤 술사보다도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범님의 백성이라 하나 새로이 이 나라를 찾아온 손님은 그렇지 못했다. 힘이 있는 손님과 힘이 없는 손님, 조원과 같은 전자(前者)는 그들의 진정한 황제인 서현에게 필요한 자들로서 모든 사람이 기꺼이 환영하고 받들어 모셨지만 후자(後者)는 아니었다. 서현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는 새 손님은 그들에게도 귀찮은 짐일 뿐이었다.
“그 심통 맞은 성격을 보아하니 폐하와는 잘 어울릴 것 같더군.”
서현이 무심하게 던진 말에 사람들이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이렇게 서문경은 수상이 생각 없이 던진 한 마디 때문에 황제의 놀이상대로 굳어져버렸다.
그래서 다음 날 아침, 서문경은 이불과 함께 황제의 침소로 던져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