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롤로그 (1/66)

농중조

序 

황제의 나라를 찾아온 열여섯 번째 방문객은 ‘물’을 타고 온 자였다. 

먼 곳에서 손님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행차했던 수상(首相) 체제공 서현(曙弦)은 손님을 모신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바닥에 흥건하게 고인 물을 밟고 말았다. 높으신 수상어른의 흑혜(黑鞋)가 더러운 바닷물에 젖은 것을 보고 방 안의 사람들이 죄다 자신이 죄를 지은 듯 어쩔 줄 몰라 하였다. 깨끗한 천을 찾아온다, 차라리 제 옷자락으로 신을 닦는다 부산을 떠는 사람들을 손을 들어 물리친 수상이 바닥에 누운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손님’이다.

‘손님’의 온 몸은 아직도 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바닷물에 젖어 유난히 까맣게 보이는 머리카락이 마치 심해에서 얄랑이는 해초처럼 보인다. 하얗게 질린 안색과 새파랗게 질린 입술 때문에 언뜻 보면 ‘손님’은 이미 숨을 거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의 몸에서 죽어가는 생선에서나 날 법한 불쾌한 비린내가 진동했다. 그러나 수상은 콧잔등조차 찡그리지 않고 그런 남자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꿰뚫어 보기라도 하려는 듯 집요한 눈길이었다.

이윽고 수상이 훽 몸을 돌렸다. 

“어떻습니까?”

가차 없이 돌아서는 수상의 뒤를 따라붙으며 누군가 여쭈었다. 

“물을 타고 온 객이라 하여 애초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소.”

애초부터 기대한 것이 없으니 실망할 것도 없다는 말과는 달리 수상의 목소리는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성큼성큼 힘을 주어 걷는 걸음걸이만 봐도 심기가 몹시 언짢은 듯 했다.

“송구합니다.”

그에 어찌할 줄 모르고 사람들이 허리를 굽실거렸다. 그러나 수상은 앞 다투어 허리를 수그리는 사람들을 본체만체하고 방 안을 휙하니 나가버렸다. 

“그 이를 어찌하오리까?”

그 중에 눈치 빠른 자가 하나 있어 그가 황급히 수상의 뒤를 쫓아 여쭙자, 수상이 겨우 걸음을 멈추고 그 자 쪽을 돌아보았다. 

“다른 객들과 함께 지낼 수 있도록 창혜각으로 모시오리까?”

돌아보기는 했으되 가타부타 말도 없이 애매한 표정만 짓고 있는 수상의 얼굴을 몰래 살피며 누군가 여쭈었다. 

창혜각(蒼惠閣)은 수상 서현이 ‘먼 곳’에서 황제의 나라를 찾아온 손님들을 위해 사비를 들여 만든 누각으로, 지금까지 황제의 나라를 찾은 열다섯 명의 손님들이 기거하고 있는 곳이었다. ‘물’을 타고 와 비록 그 능력이 미미하다고는 하나 열여섯 번째 객도 황제의 나라를 찾아온 손님, 그러므로 이번에도 손님을 모실 곳은 창혜각이 분명하다고 남자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수상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남자가 기대한 것과 달랐다.

“어이하여?”

“예?”

예상 밖의 대꾸에 남자는 넋을 놓고 그렇게 되묻고 말았다. 그 멍청한 대답에 수상의 눈썹이 찌푸려진다. 

“어찌 그래야 하는지 내 물었소.”

“그것이···.”

‘항상 그리하지 않았습니까?’하고 남자는 대답하고 싶었다. 그러나 불쾌해하는 감정이 그대로 드러난 수상의 얼굴을 보자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던 수상이 쯧, 하고 혀를 찼다.

“폐하의 나라를 찾아온 손님이시니 폐하께 보내 드려야 이치에 맞는 것이지요.”

 돌체그 황제의 손님을 지금껏 중간에서 가로챈 수상이 할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방 안의 그 누구도 그 점을 지적하지 못했다. 황제의 나라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이 나라의 실세는 황제가 아닌 저 수상 서현이었다. 또한 눈과 귀가 멀쩡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지고한 황제의 이름이 언제 서현으로 바뀔지 모른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학궁(學宮)의 술사들보다도 강한 힘을 가졌다는 ‘손님’들을 황제에게 보이지도 않고 개인의 휘하에 두고 있는 것만 봐도 수상이 어떤 일을 계획하고 있는지 능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폐하께 고하도록 하시오.”

자리를 떠나는 수상 서현의 뒷모습에 대고 사람들이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아 깊이 고개를 숙였다. 황제를 맞았을 때에나 취하는 예를, 비록 백관의 수장인 수상이라고는 하나 한낱 신하된 자에게 올리는 모습이 몹시 기괴하게 보였다. 

“객의 능력이 어떠하였습니까?”

배례(拜禮)를 올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점처럼 작아졌을 무렵 지금껏 말없이 수상의 뒤를 따르고만 있던 나이 지긋한 사내가 물어왔다. 사내의 물음에 수상이 냉담한 투로 대꾸했다. 

“아해들이 보면 참으로 좋아하겠더이다.”

사내가 머리를 모로 기웃했다.

“송구합니다. 소인이 아둔하여 체제공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광대 같은 ‘힘’을 가졌더라는 말입니다.”

수상이 그렇게 덧붙이고 나서야 비로소 사내는 수상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듯 했다.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사내가 빙긋이 웃는다. 

“어린 황제에게 딱 들어맞는 장난감이로소이다.”

그 사내 또한 관복(官服)을 걸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황제의 관료가 분명할진데, 그는 너무도 쉽게 주인을 입에 담아 그 이름을 조롱하였다. 그리고 수상 또한 그런 사내를 꾸짖지 아니하였다.

**

아직 ‘세계’가 만들어지지 않았던 시절, 마찬가지로 완벽하지 않았던 혼(魂)이 있어 그 혼(魂)이 바라보는 곳에 빛이 생기고 그 혼이 숨쉬는 곳에 공기가 생기고, 마지막으로 그 자가 거니는 곳에 흙이 생겼더라. 

세상에 홀로 존재하던 혼(魂)이 그 때 생긴 흙을 진흙장난으로 소일하는 아이처럼 뭉치고 매만지며 노닐었는데, 그리하여 세계의 모태가 되는 짐승 ‘공혜(供惠)’가 태어났다. 공혜는 혼(魂)만이 존재하던 세상에 처음 생겨난 가장 거대한 짐승으로 긴 꼬리와 긴 수염, 큰 네 앞발과 총명한 눈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온 몸은 부드러운 털로 뒤덮여 있었다. 

공혜(供惠)는 어느 날, 네 갈래로 찢어져 각각 긴 꼬리와 수염을 가진 ‘용(龍)’과 총명한 눈을 가진 ‘기린(麒麟)’과 큰 앞발을 가진 ‘범(虎)’과 온 몸이 깃털로 덮인 ‘새(鳥)’가 되었다. 용과 기린과 범은 각각 그 몸이 하나의 ‘세계’가 되었으니, 흔히 ‘황제의 나라’라고 불리는 이 ‘세계’는 긴 꼬리와 수염을 가진 ‘용’의 세계다. 

공혜가 찢어져 만들어진 세 마리 짐승이 죽어 각각 하나의 ‘세계’가 되자, 그들의 전신(前身)인 공혜를 만든 혼(魂) 또한 땅을 받친 ‘물(水)’이 되었는데 그를 가리켜 ‘세계’의 사람들은 ‘신(神)’이라 하고 ‘혼(混)’이라 불렀다. 

거대한 용과 산 같은 범과 영명한 기린이 세 개의 ‘세계’가 되었다면 마지막 남은 광활한 ‘새’는 바로 그 세 개의 세계를 잇는 ‘하늘(天)’이 되었다. 때문에 세 개의 세계는 땅으로서는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하늘과 물로서는 이어져 있는 것이다. 

하늘과 물이 서로 이어져 있는 탓에 용의 땅과 기린의 땅, 범의 땅에 사는 인간과 짐승들이 때때로 다른 짐승의 땅에 떨어지는 일이 있다. 이를 일컬어 낯선 짐승의 백성이 다른 짐승의 땅을 ‘여행’하노라 말한다. 

때문에 다른 세계에 떨어진 자들을 객(客), 혹은 ‘손님’이라 하는데 이 손님들은 위대한 ‘새’의 날개를 타고 왔기 때문인지, 세계를 ‘여행’하는 과정에서 신의 힘이라 일컬어지는 ‘힘’에 머리가 트이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하늘손님’과는 달리 드물게 물을 타고 오는 ‘물손님’이 있다. 그러한 물손님은 만백성의 어머니인 물을 타고 왔으므로 갓 태어난 아기처럼 순결한 상태가 되어 세계를 건너오기 이전의 기억이 매우 희미해질 뿐만 아니라 그 몸 안에 잠든 ‘힘’까지 오히려 씻겨 없어져 버리곤 한다. 

이러한 이유로 ‘하늘손님’은 나타나면 그 땅의 사람들에게 극진한 대우를 받았으나, ‘물손님’은 상대적으로 경시되기 마련이었다. 

서문경(西門慶)은 제안(提岸) 황제가 제위에 오른 후 처음으로 이 세계를 찾은 ‘물손님’이었다. 또한 지금까지 이 세계를 찾은 열여섯 명의 손님 중 처음으로 황제에게 소개된 ‘손님’이기도 했다. 

“괴이한 내가 나는구나.”

서문경은 대뜸 그렇게 말하는 청년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햇볕이 따스한 날인데도 불구하고 눈앞의 청년은 몇 겹이나 표의(表衣)를 걸치고 있었다. 청년의 주위로만 싸늘한 공기가 흐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지금은 서문경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지만 금방이라도 버럭 역정을 낼 듯, 청년의 기다란 눈매가 몹시 차갑다. 

넓은 소매 아래로 슬쩍 드러난 손목이며 길게 뻗은 목 같은 것이 마른 나뭇가지처럼 여위었다. 그러나 마른 몸이 가엾다기보다는 신경질적으로 느껴지게 하는 무언가가 청년에게 있었다. 그것은 길게 찢어진 눈매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유난히 날카롭게 보이는 콧대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자신 이외의 모든 것들을 경멸하는 것처럼 보이는 눈빛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러서가라.”

콜록콜록, 몇 번이나 마른기침을 하면서 청년이 손을 젓는다. 

“물러서.”

서문경이 좀처럼 움직이지 않자 청년이 재차 말한다. 그 목소리에 유리를 긁는 것처럼 섬뜩한 신경질이 섞여 있어 서문경은 자신도 모르게 앉은 자리에서 펄떡 뛰어오르고 말았다. 

“좀 더 뒤로 가거라, 좀 더, 더.”

청년은 몇 번이나 손짓으로 서문경을 뒷걸음질 치게 한 후에야 겨우 만족했다는 듯 짜증을 거두었다. 잔뜩 날이 선 청년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시키는 대로 주춤주춤 물러났던 서문경은 아직도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보고 청년이 팍 이마를 찌푸렸다.

“아둔해 보이는군.”

자신에게 쏟아지는 싸늘한 눈빛에 서문경은 멍청히 두 눈만 끔뻑였다. 대체 이것이 무슨 상황인지, 아니, 꿈인지 현실인지조차 파악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본 청년의 눈빛에 경멸하는 듯한 빛이 어리었다.

“몸에서 비린내가 난다 했더니 눈깔까지도 생선마냥 흐리멍덩하구나.”

휙 고개를 돌린 청년이 ‘효문! 효문!’하고 고함을 질렀다. 고함을 질러대는 청년의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갈라질 듯 위태로웠다. 청년이 고함을 지른 지 수 분이나 지나서야 닫혀있던 문이 열렸다. 푸른 옷을 입고 허리에 느슨한 가죽 띠를 두른 자가 문지방 바깥에 서서 고개를 꾸벅 숙인다.

“찾아 계셨나이까.”

“어찌 이리 행동이 굼뜬가!”

청년에게서 당장 불호령이 떨어지지만, 푸른 옷을 입은 사내는 그다지 놀라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태연한 사내의 얼굴을 본 청년이 한층 더 노하여 ‘고얀 것!’하고 벽력같은 노성을 내질렀다. 그런 청년의 이마에 파르라니 돋은 힘줄이 몹시도 위태로워 보였다. 

“이 자를 물러가게 하라.”

무섭게 사내를 노려보던 청년이 한참 뒤에야 사내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명령했다. 그 말에 서문경이 자신의 앞에 앉은 청년과 자신의 등 뒤에 선 사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나 서문경이 몇 번이나 청년과 사내를 번갈아볼 때까지도 사내는 못 박힌 듯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인기척이 없는 것을 느낀 듯 청년이 눈을 돌렸다가 아직 방을 나가지 않은 서문경과 사내를 발견했다.

“이 자를 당장 물리라는데 무엇을 하고 있는고?”

“송구하오나, 폐하.”

송구하다 말하고 깊숙이 허리를 숙였지만 여전히 사내는 공손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이 자는 다른 세계에서 저희 세계를 찾은 객이옵니다.”

“백치 같은 물손님도 객이라면 객이지.”

청년과 사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파악하지 못해 황망해하는 서문경의 얼굴을 청년이 힐끔 쳐다보고 빈정거렸다.

“다른 세계에서 예조를 방문한 손이니 이 천하의 주인이신 폐하께오서 직접 예와 정을 베풀어 맞아주셔야 마땅하다고 사료되옵니다.”

딱!

사내의 말이 끝나자마자 청년이 던진 사기 재떨이가 사내의 이마에 가 부딪쳤다. 윽, 하고 사내가 신음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무거운 사기 재떨이에 맞은 사내의 이마가 툭 터져 피가 흘러 내렸다.

“지존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 주제에 터진 입이라고 말은 잘 하는구나. 당장 물러가거라!”

귀청을 찢는 듯한 노성이었다. 노여움으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청년이 부르르 몸을 떨고 있었다. ‘손은 이리로 오시게.’, 청년이 그 지경이 되어서야 겨우 사내는 몸을 사리고 물러섰다. 사내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면서 서문경은 무심결에 뒤를 돌아보았다. 스르르 닫히는 문틈에서 청년의 밭은 기침소리가 몇 번이나 들려왔다.

서문경은 이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저 문 안의 청년이 누구인지,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어쩌다 이런 상황이 되었더라?

서문경은 황망한 심정이 되어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기억의 처음은 고통 속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였다.

서문경은 눈을 떴다. 

“욱.”

눈을 뜬 서문경이 처음 느낀 것은 역한 비린내였다. 코를 찌르는 비린내를 맡자마자 욱, 하고 구토가 일어났다. 그러나 밭은목에서 올라오는 것은 시큼털털한 신물뿐이었다. 

몇 번이나 헛구역질을 하고서 겨우 정신을 차린 서문경은, 그 역겨운 냄새가 다름 아닌 자신의 몸에서 나는 냄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피부가 따끔따끔 아파왔다. 살펴보자 자신의 온 몸은 흠뻑 물에 젖은 채였다. 

짠물에 젖은 몸과 따끔거리는 피부, 그리고 자신의 몸에서 나는 역한 비린내. 도무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째서?, 하고 이맛살을 찌푸린 서문경은 무심코 주위를 돌아보았다가 그만 멍해져버리고 말았다.

그가 있는 곳은 무척 아름다운 방이었다. 

넓은 방 사면은 색이 고운 호박색 벽지가 발려 안온한 느낌을 주었다. 사방의 벽을 바른 호박색 벽지는 금분이나 혹은 진주 따위를 갈아 넣은 모양인지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은근한 반짝거림이 있었다. 호박색 벽지 가득 그려진 하얀 꽃과 나뭇가지들은 마치 살아서 춤을 추는 것처럼 생생했다. 열려 있는 문 근처에 걸린 커다란 석모란도(石牡丹圖)나, 방 한 구석에 장식처럼 놓인 옻칠한 은분매화장(銀粉梅花欌) 같은 것이 단아하면서도 동시에 화사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너무나 아름다운 방인지라 더욱 더 당혹스러웠다. 서문경의 ‘기억’에 의하면 이런 방은 그가 속한 사회나 문화 속에 흔히 존재하지는 않는 것이었다. 

갑자기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기는?”

어디야, 하고 서문경이 불쑥 중얼거렸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서문경은 아픈 머리를 감싸 쥐고 기억을 더듬었다. 어째서 자신이 정신을 잃고 있었는지, 왜 자신의 몸에서 이토록 지독한 비린내가 나는지, 왜 온 몸이 소금물에 젖어 있는 것인지 생각해내야 한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두통이 강해졌지만 서문경은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기이한 긴박감이 들었다. 쿵, 쿵, 쿵. 귓전에 북소리처럼 울리는 심장소리 때문에 쫓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서문경의 머릿속에 많은 것들이 섬광처럼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수도 없이 많은 단어와 장면들이 스쳐 지나간 후 서문경은 겨우 자신이 정신을 잃기 직전의 기억을 찾아냈다.  

서문경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누군가의 놀란 얼굴이었다. 유난히 바람이 거셌다. 덮치듯 뒤에서부터 훅 밀려드는 바람에 놀라 뒤를 돌아보자 넓게 펼쳐진 바다가 술렁이는 것이 보였다. 사위가 어느덧 어두워져 있었다. 툭, 드러난 팔에 난데없는 물기가 느껴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부슬비였다. 빗방울이 떨어지자 아무래도 거세던 바람이 더욱더 강해지기 시작했다. 귓전에 스치는 바람소리가 따갑게 느껴질 지경이라 서문경은 자신도 모르게 귀를 막고 눈살을 찌푸렸다. 

어둑어둑한 가운데 홀로 하얗게 서 있는 등대 부근에서 누군가 손을 흔들었다. 체구가 젊은이처럼 당당하지만 벌써 머리카락의 반이 희게 샌 나이든 남자였다. ‘경아, 경아!’, 남자가 목을 놓아 연신 서문경의 이름을 불러댔다. 지금 가요, 하고 자신이 그에게 대답했던 것도 같았다. 

남자 쪽으로 가기 위해 서문경이 등대가 있는 방파제 위로 올라가려 할 때였다. 문득 등 뒤에서 차가운 기운이 확 끼치면서 등골을 오싹한 무언가가 타고 올라왔다. 경아!, 남자가 갑자기 달음박질을 쳤다. 놀란 남자의 얼굴이 기이하도록 선명히 기억났다. 당당한 체구가 무색하도록 놀라고, 금방이라도 허물어져 울부짖을 듯이 비통해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갑자기 덮쳐온 너울파도에 휩쓸려 서문경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러니까···.”

아, 하고 신음하며 서문경은 입가를 손바닥으로 뒤덮었다. 눈가가 어쩐지 뜨거워졌다. 서문경은 멍하니 자신이 파도에 휩쓸리기 직전 보았던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의 얼굴생김이 손에 잡힐 것처럼 똑똑히 기억이 나는데도 그 남자가 누구인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남자의 이름도, 그 남자가 자신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도. 

“바다에.”

파도에 휩쓸렸기 때문인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서문경은 입가에 손을 댄 채 중얼거렸다. 떠올리고 싶은 것이 잘 생각나지 않아 답답했지만 서문경은 좋은 쪽으로 애써 생각하려 했다. 일시적인 현상일 것이다, 그 커다란 너울파도에 휩쓸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살아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서문경은 후우, 하고 한숨을 쉬었다. 마음을 가라앉히려 심호흡을 여러 번 하고 났더니 불안감이 조금씩 흐려지는 것 같았다. 약간이나마 냉정을 되찾은 서문경은 자신에게 또 다른 문제는 없는지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려 보았다. 자신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속한 사회의 이름이나 그 사회에서의 일반적인 상식 같은 것들이 무리 없이 떠올랐다. 서문경은 그제야 좀 안심해서 잔뜩 찌푸렸던 얼굴을 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경이라고 했었는데.”

문득 바닷가에서 남자가 자신을 부르던 이름을 떠올리고 서문경은 생각했다, ‘그게 내 이름인가?’

“!”

거기까지 생각한 서문경은 다음 순간 흠칫 어깨를 떨었다. 

“내 이름이.”

입 속으로 중얼거리며 서문경은 다시금 어깨를 떨었다. 아주 무서운 것이라도 본 사람처럼 눈을 홉뜬 서문경의 몸이 저절로 덜덜 떨렸다. 바다에 빠지기 직전에 보았던 그 남자에 대해서만 기억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던 사람이었는지, 자신에게 가족은 있었는지, 심지어는 자신의 이름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한기(寒氣)가 드십니까?”

그 때였다. 

누군가 등 뒤에서 말을 걸어 서문경은 화들짝 놀랐다. 놀란 눈으로 돌아보자 소매와 품이 넓은 흰 옷을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서문경을 향해 여인이 살짝 눈웃음을 친다. 초승달처럼 둥글게 굽어진 눈이 신기한 것을 구경하는 것처럼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서문경은 몹시 불쾌해졌다.

“소녀의 이름은 재하 원혜라 하오이다.” 

서문경의 얼굴과 몸 따위를 찬찬히 뜯어보며 여인이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여인의 무례한 눈초리에 불쾌감을 느낀 서문경이 여인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여인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경계심이 잔뜩 서린 서문경의 행동에 여인이 빙긋 웃었다. 깔보는 듯한 웃음이었다.

“하늘이나 때로는 물에서 이 나라를 찾으시는 손님들을 맞이하여 대접하는 소청(所廳) 벼슬을 하고 있나이다.”

여인이 하얀 치마를 펼쳐 작게 절을 한다. 나붓이 펼친 치마에서 붉은 매화 문양이 화사하게 펼쳐졌다.

“물을 타고 오신 손님이시여, 황제의 나라 예조 원경(元景)에 방문하신 것을 온 마음을 다해 반기고 있나이다.”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여인을 서문경이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반기고 있다 말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인의 표정이나 눈에서는 반가운 기색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서문경을 향하는 여인의 눈에서는 여전히 호기심과 희미한 경멸만이 감돌았다. 

그 여인의 눈에 떠도는 감정들을 읽는 순간 서문경은 직감했다. 자신이 환영받지 못하는 손님이란 사실을.

**

서문경의 짐작대로 그는 환영받지 못하는 손님이었다. 여인은 막 정신을 차려 어리벙벙한 상태인 서문경을 조금도 배려해주지 않았다. 서문경에게 자신의 이름과 직책을 밝힌 직후 여인은 웃으며 요구했다.

“일어나십시오.”

“예?”

“황제의 나라에 방문하셨으니 나라의 주인을 뵙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여인이 상냥하게 요구했다. 서문경이 아직도 비린내 나는 바닷물에 흠뻑 젖어 있는 것을 보면서도 여인은 서문경에게 닦을 거리나 갈아입을 옷가지를 주는 대신 그에게 재차 일어나기를 권유했다. 그리고서 그녀는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것이 역력한 서문경의 얼굴을 흘끔 보고 휙 등을 돌렸다. 

“후우.”

서문경은 대체 여기가 어디인지,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 것인지 그녀를 붙잡아 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여인의 웃음에서 벽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따라오셔요.’, 여인이 서문경을 재촉했다. 서문경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한 의문과 빈 기억들에 대한 혼란에 어지럼증을 느끼며 여인의 뒤를 따라 비틀비틀 걸어갔다. 할 수 있는 것이 그것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긴 복도를 걸으면서 서문경은 수많은 사람들과 마주쳤다. 해사한 용모의 소녀 하나가 사뿐사뿐 다가와 여인에게 뭔가를 속삭이자 여인이 서문경을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물을 타고 오신 손님이시랍니다.’ 그 말에 처녀들이 눈을 빛냈다. 구름처럼 고운 비단옷을 입은 여인들이 서문경을 바라보면서 새처럼 웃었다. 산들바람이 잔 나뭇가지를 흔드는 것처럼 속삭이고, 새처럼 낭랑한 웃음소리를 냈다. 고운 옷과 화사한 얼굴이 마치 그림처럼 아름답고, 그들이 내는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악기를 부는 소리만큼이나 가절하였지만 서문경은 그 모든 것이 끔찍했다. 

서문경은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웃음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낯이 뜨거워졌다. 인간으로서 존중받지 못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그는 철창 안의 신기한 구경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여인은 신을 신고 바깥으로 나가 수십 여분을 걸은 뒤에야 나타난 커다란 전각 앞에 멈춰 섰다. 

“수객을 폐하께 배알(拜謁)시켜 드리려 왔소.”

여인이 말하자 전각 입구를 막고 서있던 남자들이 여인에게 길을 터주었다. 여인이 신을 벗고 남자들이 내준 자리로 올라갔다.

물이 찍찍 밟히는 운동화를 신고 있었던 서문경은 전각 앞에 서서 한참을 망설였다. 결국 신을 벗어든 서문경을 보고 전각 입구를 지키고 있던 남자들이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더러운 것을 보는 듯한 남자들의 표정에 울컥한 서문경은 벗으려던 양말을 벗지 않고 쿵쿵 소리를 내며 전각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런 서문경을 남자들은 황당하다는 눈으로 바라보기는 했지만 의외로 그들은 서문경을 저지하지는 않았다.

긴 복도를 걷고 몇 번이나 모퉁이를 돈 후에야 겨우 목적지에 도착한 듯 했다. 여인이 걸음을 멈춘 곳은 어떤 방 앞이었다. 아홉 개의 발톱과 긴 수염을 가진 용이 그려진 장지문이 눈 안에 들어왔다. 금방이라도 그림 밖으로 뛰쳐나올 것 같은 용의 생생한 모습에 순간 숨이 막혔다. 장지문 앞에는 꽃처럼 고운 여인 넷이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녀들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 푸른 옷의 사내에게 재하 원혜라 이름을 밝힌 여인이 다가가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승직(承直)어른, 소청 재하 원혜이옵니다.”

“어서 오게. 체제공께 이미 연통은 받아 보았네.”

사내가 여인의 인사에 고개를 끄덕여 답한 후 서문경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 분이 그 물손님이신가?”

“그러합니다.”

사내가 뾰족한 수염을 기른 턱을 쓰다듬으며 서문경을 살폈다. 

“어서 오시오, 황제의 나라에 온 것을 환영하오.”

환영 인사를 하는 사내를 서문경이 빤히 쳐다보다가 대꾸했다.

“무슨 짓입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눈을 껌뻑이는 남자를 보는 서문경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울컥, 짜증이 솟았다. 일순 분하기까지 했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사람을 낯선 곳에 데려다 놓고 무슨 짓들을 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워하는 모양이 뻔히 보이는 이를 보고 도움을 주기는커녕 일이 이렇다 저렇다 어떤 설명도 없이 끌고 다니기만 하다니. 입으로는 손님이라 하고 환영한다고 하지만 이들이 하는 꼴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사람을 신기한 구경거리 취급을 하고 있는 것은 또 뭔가? 분노와 짜증으로 머리가 어지러워진 서문경은 모든 일이 눈앞의 사내 때문에 일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거칠게 물었다.

“이곳에 저를 데려온 이유가 뭡니까?”

“진정하시오.”

“지금 제가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사람을 무슨 동물원 원숭이처럼!”

분통을 터트리는 서문경을 사내가 손을 들어 막았다. 

“객께서 이 나라에 방문하시게 된 것은 저희의 탓은 아니오이다.”

“그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리고 기억을 잃으신 것 또한.”

항의하려던 서문경은 한순간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 남자나 재하 원혜라는 여인이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왜 기억의 군데군데가 비어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서문경은, 저 남자며 여인이 자신에게 그 이유를 쉽사리 말해주지 않으리라는 것도 깨달았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내가 그렇게 말하자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여인들이 닫혀 있던 문을 열었다. 스르륵, 소리도 없이 문이 열렸다. 사내가 엉거주춤 서 있는 서문경의 등을 밀었다. 넋을 놓고 있던 서문경이 순간적으로 몸을 균형을 잃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악!”

서문경이 비명을 질렀다. 딱딱한 바닥에 내동댕이쳐지자 그렇지 않아도 욱신거리던 몸이 부서질 듯 아파왔다. 그런 서문경의 뒤로 사내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고했다.

“폐하, 수객이 들었사옵니다.”

“누가 들여도 좋다고 했는가?!”

사내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방 안에서 쩌렁쩌렁한 고함소리가 들렸다. 별안간 들려온 고함소리에 놀라 서문경이 벌떡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무엄한 것들!”

저벅저벅, 가벼운 소리가 나고 하얀 무명으로 감싼 발이 보였다. 말끝이 이리저리로 갈라지는 메마른 목소리의 청년이 다시 한 번 고함을 내질렀다. 그러나 황제인 듯한 청년이 아무리 역정을 내고 소리를 질러도 문 밖에 서있는 사람들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함을 질러대는 청년을 무시하기라도 하듯 열렸던 문이 다시 닫힌다. 그것에 더욱 노한 듯 청년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당장······!”

그러나 청년은 쿨럭쿨럭 터져 나온 기침소리에 채 말을 잇지 못했다. 피라도 토할 듯한 격렬한 기침소리였다. 서문경은 기침소리에 놀라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청년이 배와 목을 부여잡고 있었다. 

기침소리는 아무리 기다려도 끊이지 않았다. 걱정이 된 서문경은 망설이다가 무릎걸음으로 주춤주춤 청년에게 다가갔다. 몸을 웅크린 청년의 등에 날개 뼈가 크게 도드라져 튀어나온 것이 보였다. 서문경은 자신도 모르게 청년의 마른 등을 향해 손을 뻗었다. 

“치워라.”

청년의 싸늘한 목소리에 서문경은 움직임을 멈췄다. 지친 기색이 완연한 목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묶인 듯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청년이 천천히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먹물 같은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마른 어깨를 넘쳐흘렀다. 품이 넉넉한 옷 안에 감싸여 있어도 한눈에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마른 청년이었다.

그러나 몸을 일으키자 청년의 말랐을지언정 의외로 왜소하지는 않았다. 옷깃과 소매 사이로 보이는 손목이며 목덜미가 의외로 뼈가 굵었다. 때문인지 하얀 피부와 색이 옅은 입술도 병약하기보다는 우아한 멋을 풍겼다. 서문경은 홀린 듯 청년의 길게 뻗은 목을 바라보았다. 조금은 날카로운 듯한 턱과 코를 보았다. 눈꼬리가 길어 단아한 느낌을 주는 눈도 보았다.

그 때, 

“괴이한 내가 나는구나.”

청년은 자신을 멍청한 얼굴로 올려다보는 서문경을 내리깐 눈으로 마주보다 툭하고 던지듯 말했다. 

**

서문경은 멍하니 눈을 끔뻑거렸다. 순식간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서 혼란스러웠다. 

눈을 뜨니 자신은 어디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낯선 곳에 누워 있었다. 그런데다 자신의 기억 구석구석이 백지처럼 지워진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재하 원혜라 이름을 밝힌 여인이 갑자기 나타나 멋대로 자신을 여기까지 데려다 놓았고, 그 여인과 마찬가지로 제 할 말만 하려 드는 사내가 다짜고짜 자신을 황제의 방 안에 밀어 넣었다. 마지막으로 그 방 안에서 마주친 황제란 자는 서문경을 보자마자 연신 짜증을 내다 결국 물건을 사방에 던져대는 둥 패악을 부렸다. 

그것을 견디다 못하고 서문경을 방 안으로 밀어 넣었던 사내가 다시 서문경을 방 밖으로 끌고 나온 것이 방금 전의 일이였다. 그 모든 일들이 불과 몇 십 여 분 만에 일어난 것이었다. 덕분에 서문경은 아직까지도 정신이 멍멍했다.

“섬약하신 분이시지요.”

소청, 재하 원혜는 처음 만났을 때 그랬던 것처럼 소리도 없이 다가와 말했다. 등을 타고 들려온 갑작스런 목소리에 놀라 뒤돌아보자 재하 원혜가 활짝 핀 꽃처럼 웃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맑아질 듯 아름답고 몹시도 고우며, 또 인간미가 없었다. 서문경은 무심결에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재하 원혜는 그것을 보면서 소맷자락을 들어 입을 가렸다. 아래로 늘어져 하늘하늘 흔들리는 넓은 소맷자락 아래 숨겨진 그녀의 입술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지 서문경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폐하께서는 말입니다.”

소청 재하 원혜의 눈이 가늘어져 있었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비웃는 것 같기도 한 애매한 눈빛이 가늘어진 눈매 안에서 떠돌았다. 그것을 보고 서문경은 자신도 모르게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던 모양이다. 소청 재하 원혜가 작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손님께서 금방 뵈었던 분이 이 나라의 황제 폐하십니다.”

그 때, 그렇게 말하는 소청 재하 원혜에게 황제에게 효문이라 불렸던 사내가 손을 저어 보였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승직 효문이 아무렇게나 내린 명령에 소청 재하 원혜는 순종했다. 그녀는 우아하게 고개와 허리를 숙이고, 한 발 물러서 승직 효문에게 절을 올렸다. 아래로 내리깐 그녀의 눈과 온화한 얼굴빛 어디에도 언짢아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 고분고분한 태도에 서문경은 얼이 빠졌다. 고개만 조금 숙이고 눈만 살짝 내리 깔았을 뿐인데 사람 자체가 바뀌는 것처럼 휙휙 잘도 변한다 싶었다. 

“돌아가실까요.”

그러나 역시 그 여자가 맞았다. 승직 효문을 향해 굽힌 허리를 편 순간, 아니, 정확히는 눈을 서문경에게 돌리는 순간 소청 재하 원혜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떠올랐다. 보고 있자면 은근히 마음 한 구석이 불쾌해지는 예의 그 미소였다. 

그렇게 한마디 툭 던진 소청 재하 원혜는 서문경에게 대답조차 듣지 않고 빙글 돌아서 걸어가 버렸다. 덩그러니 남겨진 서문경은 재하 원혜의 뒤통수를 쏘아보다가 그녀의 모습이 작아지자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뒤를 쫓았다. 

재하 원혜의 걸음은 빨랐다. 색 고운 비단신으로 구름을 밟는 것처럼 사뿐사뿐 걷고 있는 재하 원혜를 좀처럼 따라잡을 수 없어 서문경은 꽤나 애를 먹었다. 거의 뛰다시피 해서 따라잡자 숨이 가쁠 정도였다. 

“저런.”

서문경의 가빠진 숨소리를 들은 듯 재하 원혜가 혀를 찼다.

“벌써 숨이 차십니까. 허약하시군요.”

‘저희 폐하처럼 말이지요.’, 하고 재하 원혜가 덧붙였다. 그 말에 서문경이 잔뜩 이마를 찌푸렸다. 

“그 자가?”

무심결에 불쑥 중얼거리고 나서 서문경은 아차했다. 금방이라도 원혜가 격노하여 고함을 지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서문경의 생각과는 달리 재하 원혜는 조금도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노호성이 떨어지지 않는 것에 안도하기보다는 도리어 의아해져서 서문경이 소청 재하 원혜의 표정을 살폈다. 버선코처럼 콧날이 오뚝하게 솟은 그녀의 옆모습에는 노한 기색이 없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그 방을 빠져 나올 때까지 쉬지도 않고 고함을 질러더군요. 그렇게 신경질적인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제 말을 들어주는 기미가 없자 나중에는 맞으면 필히 큰 상처를 입고 말 물건들을 사람에게 던지기까지 했어요. 그렇다면 약하기는커녕 난폭하기 짝이 없는 자가 아닙니까?”

서문경이 그렇게 말한 것은 황제를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가 보기에 황제의 신하라 자청한 소청 재하 원혜의 반응이 너무나 기이했기 때문이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남의 속을 떠볼 때가 아닌데,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뿐이었다. 쏟아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을지언정 닦아낼 수는 있지만 말은 그렇지 못했다. 이미 입 밖으로 떠나간 말이다. 

그러나 실수했다고 생각하면서도 서문경은 별다른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어느 정도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황제를 먼저 ‘모욕’한 것은 서문경이 아니라 소청 재하 원혜였다. ‘섬약하다’는 표현은 일국의 황제에게 사용하기에는 지나치게 모욕적인 말이었다. 

비록 지존(至尊)이 붕어(崩御)한 후 대쪽 같은 사관(史官)이 군주의 살아생전을 떠올려 그리 기록할 수는 있을지라도, 살아있는 황제에게 감히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군주는 차라리 난폭할지언정 유약해서는 안 되었다. 군주는 지고지상(至高至上)이고, 지고지존(至高至尊)이라. 군주는 세상의 누구보다도 높은 곳에 서서, 그 높은 곳에서 만백성을 아우른다. 이를 위해 필수 필가결한 것이 바로 군주의 강건함이었다. 

간교한 자들의 세 치 혀에 흔들리지 않고, 모든 사안에 고르게 공명정대하며 지존의 숙명인 고독을 견딜 수 있기 위해서는 바위 같은 굳건함이 필요했다. 때문에 지존을 칭할 때는 유(柔)하다, 약(弱)하다, 무르다 등의 말은 물론이요, 섬세하다, 섬려하다, 섬밀하다 등과 같은 긍정적인 뜻을 가진 말들조차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소청 재하 원혜는 낯빛조차 변하지 않고 자신의 군주를 가리켜 ‘섬약하다’고 말하였다. 그것도 자신의 나라를 방문한 이방인을 향해, 몇 번이나. 황제를 향한 그녀의 방자한 언행은 친밀함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황제를 앞두고 재하 원혜가 서문경의 신병을 승직 효문에게 인도했던 사실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재하 원혜의 벼슬은 감히 황제의 용안(龍顔)을 뵙지 못할 정도로 미천하며, 황제와의 개인적인 친분 또한 전무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뿐이다. 

재하 원혜는 그녀의 군주인 황제를 업신여기고 있었다.

“그런 면이 아주 없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요.”

예상대로 재하 원혜는 서문경의 무례를 그저 웃으며 받아 넘겼다. 자신의 짐작이 맞아 들어갔지만 서문경은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황제라던 청년의 행동이 황당하고 불쾌했지만 소청 재하 원혜 또한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말을 했다가는 아무래도 고운 말이 나갈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서문경은 입을 다물기로 했다. 어째서인지 퍽 기분이 좋아진 듯한 소청 재하 원혜가 지금 서문경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그리고 왜 서문경이 이곳에 있는지 가 어디인지 비로소 설명을 해줄 마음이 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세계’를 일러 용계(龍界), 혹은 용체(龍體)라 합니다. 용님께서 그 몸을 내주시어 만드신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서문경은 그가 처음 눈을 떴을 때 있었던 방으로 다시 안내되었다. 짧지 않은 거리를 걸어오면서 만난 사람들의 노골적인 시선과 수군거림에 지친 서문경이 쓰러지다시피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재하 원혜는 방 바깥에 시립하고 있던 어린 소녀 하나를 불러다 다과를 가지고 오라 이른 후 붉은 보료방석을 깔고 앉았다. 오래지 않아 아까의 그 소녀가 차와 곁들여 먹을 과자를 가지고 방 안에 다녀갔다. 

재하 원혜는 맑게 우려낸 차를 자신의 잔 가득 따라냈다. 하얀 김이 피어오르면서 달짝지근한 향기가 방 안에 가득 퍼졌다.

“손님께서는 혼(混)을 알고 계시는지요.”

재하 원혜는 서문경의 앞에 놓아둔 잔에도 차를 채워준 후 물었다. 서문경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재하 원혜가 말했다.

“그렇다면 손님께서는 범(虎)의 세계에서 오신 분이로군요.”

“범(虎)? 호랑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뜬금없는 말에 서문경이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범님께서는 대범하시고도 또 무심한 분이시지요. 범님의 그러한 성정 탓인지 범의 백성들 또한 세계의 시작이나 원리에 대해 아는 바로 전무하더이다.”

“하지만 그건 제 기억이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아니지요.”

서문경의 반박을 소청 재하 원혜는 단박에 부정했다.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 사람을 내려다보는 듯한 우월감 같은 것이 서려 있어 서문경은 속이 불편해졌다. 

“물을 타고 오신 손님들께서는 기억의 일부를 잃으시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손님, 손님께서는 ‘그런’ 지식을 잃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찻잔에서 올라오던 김이 눈에 띌 정도로 줄어 있었다. 무심결에 서문경은 재하 원혜의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하얀 재하 원혜의 손 안에 들어 있는 하얀 찻잔은 찬 공기 때문인지 마치 땅 위에 쌓인 눈처럼 보였다. 그런 하얀 찻잔 안을 파르스름한 찻물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때 재하 원혜가 갑자기 식은 찻잔을 들어 올려 차를 허공에 확 뿌렸다. 깜짝 놀란 서문경이 눈을 휘둥그레 떴지만 진짜 놀랄 일은 그 다음 순간 일어났다.

“!”

찻물이 그대로 허공에 멈춰 있었다. 모든 것을 바닥으로 끌어들이는 법칙을 무시하고서 허공에 멈춰선 찻물은 그 자체로 기적 같았다. 넋을 잃고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보는 서문경의 눈앞에 재하 원혜가 자신의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섬세한 손가락이 옆으로, 앞으로, 뒤로 움직일 때마다 허공에 뜬 찻물이 재하 원혜의 손가락을 따라 움직였다. 눈앞에서 움직이는 하얀 손가락이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이윽고 재하 원혜가 손을 거뒀을 때 허공에는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어 있었다.

“공혜(供惠)입니다.”

기이한 짐승이었다. 온 몸은 부드러운 깃털로 뒤덮여 있고, 개처럼 긴 주둥이에는 긴 수염이 나 있었다. 깃털 끝에 난 꼬리는 수염만큼이나 길었다. 새들의 그것 같은 깃털로 뒤덮인 몸과는 달리 짐승의 꼬리와 커다란 앞발에는 고양이과 동물들처럼 짧은 털이 나 있고 동아줄 같은 검은 무늬가 박혀 있었다. 치켜든 고개에서 총명한 눈이 보석처럼 빛났다.

“아직 삼계(三界)가 형성되지 않았던 때에 혼(混)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혼(混)’이나 ‘지고한 정신’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만, 먼 옛날에는 지고한 정신조차도 완벽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때의 혼(混)을 일러 혼(魂)이라 하였습니다.”

물로써 만들어진 짐승은 파르스름한 빛을 뿜었다. 그 기이한 모습이 너무나 신비로워서 서문경은 짐승에게서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던 우주(宇宙)를 혼(魂)이 바라보면 그곳에 빛이 생기고, 혼(魂)이 숨 쉬는 곳에 공기의 흐름이 생기고, 혼(魂)이 거니는 곳에 흙이 생겼다 합니다. 지고한 정신께서는 그 흙을 벗하여 그것을 매만지며 소일하였는데 그리하여 생겨난 것이 삼계의 어버이이신 공혜(供惠)입니다.”

재하 원혜가 짐승의 총명한 눈을 가리켰다. 그러자 짐승의 눈이 검게 물들었다.

“공혜께서는 곧 네 마리의 짐승으로 나뉘어졌습니다. 공혜의 총명한 눈을 이어받은 것이 기린(麒麟)입니다. 기린께서는 곧 수컷인 기(麒)와 암컷인 린(麟)으로 분하여 이 세상 여자와 남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재하 원혜의 손이 짐승의 커다란 앞발과 긴 꼬리를 짚었다. 짐승의 앞발과 꼬리가 맑은 호박색으로 변했다.

“범(虎)께서는 공혜의 강한 앞발과 탐스러운 꼬리를 이어받은 분이십니다. 다른 누구보다도 강인하신 분이시지요. 또한 범께서는 그대와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선조기도 하십니다.”

재하 원혜의 손이 이번에는 짐승의 긴 수염에 가 닿았다. 재하 원혜는 턱을 들고 웃었다. 그녀의 얼굴에 강한 자부심이 서렸다.

“공혜처럼 긴 수염을 가지신 분이 바로 지금 이 세계의 어버이이신 용(龍)이십니다. 용님께서는 세계를 만든 후 은거하여 세계의 백성들에게 제 모습을 내보이지 않고 계시는 범님이나 기린님과는 달리 아직도 자신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고 계십니다.”

‘이 나라가 용님의 은혜가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증거입니다.’하고 재하 원혜가 덧붙였다. 서문경은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기린과 범과 용께서는 그 몸을 바쳐 삼계의 땅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공혜의 마지막 조각이신 새(鳥)께서는 그 땅 위의 하늘이 되셨고, 공혜를 만드신 혼(魂)께서는 비로소 형성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정신인 혼(混)으로서 다시 태어나 땅 아래의 물이 되셨습니다. 그러한 탓에 기린의 세계와 범의 세계와 용의 세계는 위로는 하늘로, 아래로는 물로 이어져 있습니다. 때문에 드물지만 삼계에서는 서로의 백성이 하늘과 물을 통해 다른 시조의 세계로 방문하는 일이 있게 됩니다.”

“그럼···.”

서문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쩐지 불안해졌다.

“새의 날개를 타고 오신 손님들을 일러 하늘손님이라 하고, 물을 타고 오신 손님들을 물손님이라 합니다. 그리고 손님께서는 그 중 물손님이십니다.”

불안해하는 서문경을 보면서 재하 원혜가 말했다.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아 서문경은 공혜라는 짐승을 바라보았다. 파르스름하게 빛나던 몸은 하늘같은 쪽빛으로 변하고, 눈은 검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긴 수염도 구름 같은 회색으로 어두워졌다. 서문경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호박색으로 빛나는, 짐승의 앞발과 꼬리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손가락 끝이 찻물로 흠뻑 젖었다.

“물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가장 위대한 정신도 물이며, 가장 위대한 어머니도 제 자식을 물속에 품고 있지요. 때문에 물을 타고 오는 손님들은 물 안에서 태어나기 이전의 상태로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서문경은 젖은 손가락으로 가만히 자신의 볼을 쓰다듬었다. 차가웠다.

“그래서 물손님들은 물을 타고 다른 세계로 오시면서 몇 개의 기억을 잊게 됩니다.”

재하 원혜가 계속해서 말했다.

“원래 자신이 있었던 나라에서, 자신을 이루던 근원적인 기억을 잊게 됩니다.”

그 목소리가 야속했다.

“그대를 보물처럼 아끼셨을 모친과, 그대를 가장 기껍게 여기셨을 부친, 그대를 가장 가깝게 여겼을 친동기들이며, 그대를 가장 친근히 생각했을 소중한 벗이며, 그들이 불렀던 당신의 이름까지도.”

재하 원혜가 빈 자신의 찻잔에 다시 차를 따랐다. 또르륵, 맑은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귓전에 크게 울렸다.

“어서 오세요, 범의 땅에서 용의 땅으로 오신 손님이시여.”

재하 원혜는 다시 한 번 말했다, ‘저희들은 당신을 환영합니다.’

그러나 서문경이 원하는 것은 용(龍)의 백성이 주는 환영이 아니었다. 그는 원혜가 말한 자신의 땅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범(虎)의 땅에서 자신을 사랑해주던 사람들을 원했다, 지워진 기억을 되찾기를 원했다. 그러나 잊혀진 기억 때문에 그 바람 또한 간절할 만큼 뜨겁지 않아서 공허했다. 그 공허함이 참을 수 없이 괴로웠다.

**

“범이라.”

서문경이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가 오늘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바싹 말라붙은 목이 아팠다.

“호랑이.”

호랑이는, 하고 중얼거리며 서문경은 기억을 더듬었다. 가로로 길고 바위처럼 커다란 몸집,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꿈틀거리던 유연한 근육. 그 몸을 뒤덮은 노란 털과 온 몸을 휘감은 듯한 검은 무늬. 발톱을 숨긴 커다란 앞발과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호박색 눈동자. 몇 번이나 실제로 본 적이 있는 동물이지만 그 동물은 사람에 의해 사육된 것일 뿐 진짜 야생의 생물은 아니었다. 항상 나른한 듯 배를 깔고 누워 있었던 모습이 기억났다. 길고 두꺼운 꼬리가 탁탁, 자신을 귀찮게 하는 날벌레들을 쫓으려 움직이던 모습도 떠올랐다.

“범의 세계라고?”

그 호랑이? 서문경은 무심결에 하, 하고 비웃음을 흘렸다. 

제가 하고자 하는 바를 다 하고 나서야 원혜는 겨우 선심을 쓰듯 서문경에게 지금의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서문경이 살던 세계를 원래는 어떻게 부르는지, 이 세계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리고 서문경이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는 기이한 생물, 그 생물이 찢어져 생겨났다는 거대한 짐승들. 그 짐승 중 셋은 땅이 되어 세 개의 세계가 되고 나머지 하나는 세계들 위를 나르는 하늘이 되었다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만든 위대한 무언가는 세계를 받치는 물이 되었다한다. 

그리하여 별개로 존재하는 것 같이 보이는 세 개의 세계는 땅 아래로는 물로, 땅 위로는 하늘로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그녀는 하늘과 물이 서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하늘과 물을 통해 종종 낯선 세계로 ‘여행’을 하게 되는 자들도 있다고 했다. 그 중 서문경은 물을 통해 이 세계를 찾은 ‘물손님’이라고도.

“······.”

말도 안돼, 하고 서문경은 비웃었지만 그 웃음은 곧 스러지고 말았다. 

‘기억을 잃었다고요?’

재하 원혜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살금살금 서문경의 얼굴을 훔쳐보는 눈길이 느껴졌다.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눈이 쌓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들릴 듯 들리지 않는 듯, 들릴 리 없는 소리가. 사락, 사락, 사락. 살금살금 훔쳐보는 눈초리가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재하 원혜는 서문경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살펴보고 그것을 즐기고 있었다. 

‘그럴 리가요.’

재하 원혜는 서문경의 표정을 살피고,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넓은 옷자락으로 가렸다. 서문경은 그녀가 웃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서문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 이름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내 부모가 누구였는지, 형제는 있었는지, 가장 친했던 친구는 누구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울컥 터져 나오려는 화를 억누르고 애써 차분하게 한 말에 재하 원혜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몇 개의 기억을 잃게 되었다고.’

‘그렇지요.’

그렇게 대꾸하면서 재하 원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갯짓이 너무나 가볍고 경쾌해서 더 화가 났다.

‘하지만.’

재하 원혜가 고개를 들어 서문경과 눈을 맞추면서 입술을 움직였다. 붉은 칠을 한 원혜의 입술이 빙긋, 고운 호선을 그렸다. 

‘기억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 않나요?’

‘무엇을!’

결국 서문경이 목소리를 높였다. 갑작스레 터져 나온 고성(高聲)에 놀랄 법도 한데 재하 원혜는 놀란 기색 하나 없이 차분히 손을 저어 서문경을 막았다.

‘금방 손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이름이란 무엇입니까?’

그 조용한 물음이 우문(愚問)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눈을 찌푸리고 가감 없이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재하 원혜와 눈이 마주친 순간 서문경은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깨닫고 눈을 홉떴다. 

‘이름이란 무엇인가요?’

재하 원혜가 재차 물어왔다. 서문경은 대답 없이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꾹, 단단한 치아가 아랫입술을 깨물고 짓눌렀다. 순식간에 온 몸이 차가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름이 무엇인지, 무엇을 말하는 건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그리고 또 아시지요.’

그녀는 더 이상 서문경에게 묻고 있지 않았다.

‘부모란 당신에게 어떤 사람인지, 형제란 뭔지, 친구가 어떤 관계를 말하는 것인지 다 알고 계시지요.’

달그락, 찻잔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돌아보자 재하 원혜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녀는 허리를 구부려 비어버린 다기를 다반에 받쳐 들었다. 달그락, 달그락, 무거운 다기가 나무와 부딪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다기를 챙겨 들고 긴 옷자락을 추슬러 갈 채비를 마친 재하 원혜가 힐끗 서문경에게 시선을 돌렸다.

‘귀애받고 자라셨군요.’

재하 원혜는 자신의 말에 경계어린 눈초리를 하는 서문경을 한동안 말없이 응시했다. 

‘물을 타고 온 손님들은 아주 근원적인 것을 잊는답니다.’

이미 말씀드렸었지만, 하고 재하 원혜가 덧붙였다. 그 말에 뾰족하던 서문경의 눈초리가 미세하게 풀어진다. 그 모습이 예민한 짐승 같았다, 낯선 곳에 떨어져 불안해하면서도 겉으로는 강한 척 한껏 털을 곤두세우는.

‘여기서 근원(根源)이란, 그런 겁니다.’

‘뿌리’하고 재하 원혜가 속삭였다.

‘근원이라는 말 그대로, 사람이 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는 뿌리.’

‘뿌리.’

‘당신이 가장 사랑하던 것들, 당신을 가장 사랑하던 것들.’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서문경의 눈동자가 스르륵 흐려졌다. 

‘당신은 당신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무방비하게 떨리는 서문경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재하 원혜가 말했다. 아니, ‘선고’했다. 서문경의 눈이 크게 뜨였다. 크게 벌어진 서문경의 눈 속에서 떠도는 감정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보였다. 경악, 그 뒤를 이은 희미한 희망, 그 희망을 끊어버리는 절망, 그리고 모든 것을 집어삼켜버리는 공포.

‘저 세계에서의 가장 근원적인 기억을 잃어버린 것은 그대를 위한 혼의 배려이며.’

끊임없이 움직이는 입술이 잔인하다.

‘그대가 그 이외의 것을 기억하는 것 또한 새 세계에 뿌리내릴 그대를 위한 혼의 배려입니다.’

그렇게 말한 후 재하 원혜는 구름 같은 옷자락을 끌고 방을 나가버렸다.

“범이라.”

범이라, 서문경이 소청 재하 원혜의 말투를 흉내 내어 말했다. 그리고 호랑이, 하고 그가 아는 대로 풀어 다시 말했다. 그가 알고 있는 호랑이의 모습 그대로가 선명하게 머리에 떠오른다. 

“아버지.”

아버지, 하고 말해보았다. 그리고 어머니, 하고 속삭여보았다. 그 말의 뜻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그러나 자신이 그렇게 불렀을 사람들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는다.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던 천장이 크게 부풀어 오른다. 아, 하고 서문경은 신음을 흘렸다. 농익은 열매가 터지듯 뭔가가 툭 터지는 기분이 들더니 눈에서 뜨거운 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눈물, 하고 반사적으로 서문경이 중얼거렸다. 슬픈가? 서문경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뜨거웠던 눈물이 어느새 미지근하게 식어갔다. 귓바퀴를 타고 귀 안에 맺힌 눈물은 차가웠다. 

“나는.”

하고픈 말도 없으면서 뭔가 말해야 할 것 같은 막연한 기분에 무작정 중얼거려보지만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막막하다.

그 뿐이었다. 슬픈 것이 아니었다.

허무했다.

그러나 무엇을 잃었는지 ‘느낄 수가’ 없었다.

허전하다.

울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뿐이었다. 무엇을 위해 울어야하는가.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 나를 사랑했을 사람들. 그들을 잃었기 때문에 울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어떤 기억도 없어, 그래서 감정도 우러나지 않는다. 눈은 울되 심장이 울지 않았다. 슬픔조차 의무처럼 느껴졌다. 

“······.”

이윽고 서러움이 북받쳐 흐느낌이 입 속에서 터져 나왔지만 그래도 그것은 슬픔이 아니었다. 길을 잃은 아이나 느낄 법한 막막함이 그를 흐느끼게 만들었다. 무엇을 잃은 것인지 알 수 없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홀로 남겨진 것 같은 불안감과, 불안에 떨면서 그리워할 뭔가가 없다는 상실감이 심장을 뒤흔들었다. 

재하 원혜의 말을 부정하고, 그녀를 비웃는 척했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며, ···이제 자신은 모든 것을 잃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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