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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반전 외전 : 우리 형은 설 표범 下 (65/65)

연령반전 외전 : 우리 형은 설 표범 下


꽃다발을 파는 사람들이 교문 앞에 바글바글했다. 졸업하는 삼학년 학생들의 가족과 지인이 섞여 운동장 안을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그 사이에는 우정혁의 누나와 부모님처럼 내가 아는 얼굴들도 있어서 졸업장을 든 채로 함께 사진도 찍었다.

들뜬 분위기 속에서 나는 가라앉는 기분을 숨기며 억지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숨을 내쉴 때마다 입김이 하얗게 퍼졌다.

우정혁의 누나가 내 코트 앞섶을 단단히 잠가주면서 물었다.

"준아, 너희 형은? 아직 안 왔어?"

"……네."

내 표정을 빤히 살피던 우정혁의 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창 중에서 제일 잘 나가고 벌써부터 자리 잡은 유일한 사람이니까 바쁠 것이라며 나를 위로해주었다. 

"우리 가족이랑 같이 밥 먹으러 가자. 준이 한우 좋아하니?"

다정하게 말해주는 것이 고마웠지만, 늦더라도 형이 졸업식에 꼭 온다고 했기 때문에 학교 안에서 기다리고 싶었다.

"누나는 얘한테 되게 상냥하더라."

우정혁이 퉁명스럽게 중얼거리자, 누나가 빙긋 웃었다.

"준이는 어떤 동생처럼 능글거리지 않고 귀엽거든."

"아, 하나뿐인 머슴한테 상처 주네."

"준아, 정혁이 이 놈은 도통 무슨 생각 하고 사는지 모르겠어."

"저도 모르겠어요."

우정혁 남매와 잠시 잡담을 나누고 있을 때, 멀리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애들이 소리지르고 속삭이는 소리가 겹쳐 들리며 점점 가까워졌다. 내가 그 소리에 반응해서 뒤돌아보기 전, 따뜻한 손이 내 뒷목을 감싸 쥐었다.

"한준."

차분하게 가라앉은 다정한 목소리와 목덜미에 닿는 익숙한 손가락의 감촉에 나는 어깨를 흠칫 떨었다. 올려다본 형의 얼굴은 그 어느 때처럼 아름다웠다. 눈을 반쯤 감으며 눈웃음을 지은 형이 내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여기 있었네, 늦어서 미안해."

"……괜찮아."

"안녕하세요. 준이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치 내가 유치원생이라도 되는 것처럼 형은 우정혁의 누나에게 인사했다. 물론 형이 나의 보호자인 것은 맞지만, 나는 이제 고등학교도 졸업했고 주민등록증도 있는 성인이었다. 강아지를 습관적으로 쓰다듬듯이 내 뒷머리를 손가락으로 간질이듯 만지며 형은 우정혁의 부모님과도 잠시 인사를 나누었다.

내가 속으로 한숨을 내쉴 때쯤, 형은 내 어깨를 감싸며 나를 데리고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학교 애들은 물론이고, 알지도 못하는 어른들까지 기웃거리며 형의 미모를 구경하는 탓에 한 곳에 서서 오래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었다.

함께 식사하러 가자는 우정혁 가족들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고, 형은 나를 데리고 본관 뒤편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추우니까 일단 타자."

조수석 문을 열어 나를 차 안에 태운 뒤, 형이 운전석 쪽으로 돌아 와서 앉았다. 안전벨트를 얌전히 매고 있으려니 형이 뒷좌석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내 무릎 위에 풍성한 꽃다발이 놓였다. 어쩐지 어디선가 싱그러운 냄새가 난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졸업 축하해, 내 강아지."

"……이런 거 없어도 괜찮은데. 내가 여자애도 아니고."

향긋한 꽃 내음이 마음을 간지럽게 했다. 우유를 탄 것처럼 부드러운 분홍색의 꽃잎이 화사하게 겹겹이 겹쳐져 있어서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커다란 꽃송이가 꽃다발 가득 피어 있었다. 리본에는 ‘리시안셔스’라는 꽃 이름과 함께 ‘변치 않는 사랑.’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나도 모르게 꽃다발에 코를 박고 콧속에 스미는 꽃 향기를 킁킁 맞으며 눈을 감았다. 그 향기 때문인지 마음이 점점 들뜨는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불쑥 미운 마음이 튀어나와서 입술을 비죽거렸다.

"이런 건… 여자한테나 사주지."

나 몰래 전화하는 지영 씨라거나, 형이 좋아하는 그 비밀의 연인에게 사주면 될 것을.

형은 고개를 기울여 내 얼굴을 살피며 자상하게 물었다.

"왜, 꽃이 마음에 안 들어?"

"아냐, 예뻐. ……고마워. 형."

핸들에 팔을 올려 그 위에 비스듬히 이마를 기댄 형이 살포시 웃으며 다행이다, 하고 속삭였다. 이슬을 머금은 꽃송이보다 형이 훨씬 더 예뻤다. 나는 반사적으로 창가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계속 형의 얼굴을 쳐다보다가는 미운 마음이 다 녹아 없어지고 말 것이다.

"후우. 시간이 없어서 꽃을 오래 못 골랐거든."

"형 바쁜데 뭘 이런 것까지 신경 썼어. ……요즘 집에도 잘 못 오면서."

나도 모르게 투정부리는 말투가 나갔다 싶어서 입술을 안으로 꾹 말았다. 형은 그런 내 마음을 눈치 못 챘는지 내 안전벨트를 손끝으로 한 번 더듬어 확인하고는 시동을 걸었다. 형의 손가락이 스쳐 지나간 가슴께가 간질거리는 기분이었다.

미리 예약해두었던 것인지, 우리는 경치가 좋은 조용한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조명이 낮고 테이블마다 무척 멀리 떨어져 있어서 가끔 유리잔이 가볍게 부딪히는 소리만 클래식 음악 사이로 들려올 뿐이었다.

형은 데이트를 나온 매너 있는 남자처럼 내가 앉을 의자를 빼주었고, 스테이크를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내 앞접시에 덜어놔주었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내 취향에 딱 맞는 달콤한 탄산수도 주문해주었다. 사실 그런 것은 평소에도 늘 형이 내게 해주던 일이었지만, 마치 프러포즈라도 할 법한 분위기의 레스토랑에 마주 앉아 있기 때문인지 약간 긴장되었다.

산딸기 맛 탄산수가 들어 있는 내 잔에 형은 무알콜 칵테일이 든 잔을 가볍게 부딪히면서 웃었다.

"교복 입은 너하고 이렇게 마주앉아 있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네."

"아…… 그렇네."

형도 입었던 교복 니트 조끼를 꾹 쥐면서 나는 어색하게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형의 입술에서 나온 '마지막'이라는 말이 가슴 아팠다. 그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된 것을 축하하는 말일지라도 내게는 그게 어쩐지 이별을 뜻하는 것처럼 들렸다. 다정한 그 말투가 내게 ‘이제 독립할 거지?’ 하고 묻는 듯해서 가슴이 죄여 들었다.

물론 스무 살이 되면 홀로서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나였지만, 그래도 내 마음은 구차하게도 한 번쯤은 형이 붙잡아주기를 바랐던 모양이다.

우울한 마음으로 깨작거리고 있자, 형은 식후에 내가 좋아할 법한 티라미수와 아포카토 같은 디저트 류를 잔뜩 주문해주었다. 그리고는 디저트 스푼에 아이스크림을 가득 떠서 내게 손수 내밀었다.

"아, 해야지. 싫어?"

"……좋아."

"그래, 착하지."

이유 모를 원망이 섞인 내 눈빛에도 형은 다정하게 웃었고, 우물거리는 내 뺨이 가득 차도록 계속해서 달콤한 것을 먹였다. 형에게 그 여자에 대해 묻지 못해서 가슴이 답답하고, 그걸로 내가 왜 가슴이 답답해야 하는지도 생각해야 해서 가슴이 두 배로 답답한 와중에도 형이 손수 먹여주는 디저트는 꿈결처럼 달콤해서 자꾸만 삼키게 되었다.

다시 차 안으로 돌아왔을 때, 형은 핸들을 돌리며 오피스텔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바람 좀 쐬고 가자."

내 기분 같아서는 그냥 바로 집으로 가서 방구석에 틀어박혀 이불을 둘러맨 채 웅크리고 싶었지만, 내 졸업식을 위해서 특별히 시간을 내준 형이 고마워서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호에 걸려 차가 멈춰 있을 때 형의 왼손이 창가를 가볍게 두드리는 것이 보였다. 차 안에 흐르는 재즈 음악에 맞춰서 두드리는 것 같았다. 그런 형을 흘깃 보다가 나는 꽃다발을 품 안에 가득 쥐었다.

"……요즘 기분 좋아 보이네, 형."

"으음, 생각보다 일이 잘 되어서 수익이 좋거든."

"…잘 됐다."

"응. 휴학하고 한동안 집에서 일하면서 느긋하게 지낼까 싶어."

집에서 느긋하게 지영 씨랑 단둘이 말이지? 하고 뾰족하고 되묻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보기 드물게 기분이 들떠 있는 것 같은 형을 괴롭히고 싶은 마음까지는 없었다.

야경 사이로 까맣게 강이 흐르는 한강 둔치에 차를 세운 뒤, 형은 먼저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뒷좌석에 나를 위해서 늘 구비해놓는 두툼한 체크무늬 담요를 꺼내서 내 코트 위에 덮어 어깨와 몸을 감싸준 뒤에야 나를 차에서 내리게 했다.

"…나 별로 안 추운데."

다정한 형의 배려가 고마우면서도 울컥 마음이 삐뚤어져서 중얼거리자 형은 내 등을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쓸면서 너 감기 잘 걸려서 안 돼, 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아름다운 야경을 멀리 바라다보며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흰 입김이 곧 사라졌다. 형과 둘뿐인 조용한 밤 풍경 속에 있으려니, 술 취한 사람처럼 나도 모르는 내 진심이 새어나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내 곁에서 형이 앞쪽으로 흐르는 한강에 시선을 둔 채 조용히 말했다.

"내 강아지 언제 크나 했었는데, 결국 이런 날이 오네."

"……뭘, 형이랑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투덜거리는 내 목소리에 형이 조용히 웃었다.

"호적상으로는 그렇지."

"아."

그러고 보니 내 형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종종 잊고 지내는데, 부모님이 산속에서 데려온 신비한 존재이기 때문에 사실 실제로 형은 호적상의 나이가 아닌 것이다. 그보다 몇 살 더 많을 수도, 아니면 나와 전혀 다른 나이 체계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늘 내게 다정하고 나를 잘 돌보며 함께 살아왔기 때문에 형의 특별함을 잊게 되곤 한다.

형이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뭔가 싶어서 흘깃 바라보자 형은 보기 드물게 망설이며 조그마한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바람결에 형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눈가를 덮었다가 흐트러졌다. 은은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내 쪽을 보며 수줍게 웃었다.

"이럴 줄은 몰랐는데… 생각보다 떨리네."

형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서 응? 하고 되묻자, 형은 조약돌처럼 생긴 손바닥만 한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물결에 비치는 도시의 불빛보다 더 반짝이는 것이 들어 있었다. 조그마한 보석이 박힌 반지였다.

"그게 뭐야?"

정말 궁금한 마음에 빤히 내려다보며 물었는데 형이 픽 작게 웃었다. 그리고는 상자 안에서 반지를 꺼냈다. 형의 긴 손가락이 들고 있으니 형이 끼기에는 새끼손가락이 아니고서야 좀 작은 사이즈의 반지라는 게 보였다. 내가 뭔가를 더 묻기 전에 형은, 어깨에 덮은 담요를 쥐고 있는 내 손 중에 왼손을 잡아 부드럽게 끌었다.

그 반짝이는 반지는 내 왼손 약지에 딱 맞게 들어갔다.

"어, 어어… 내 거야?"

놀라서 입을 벌린 채로 형을 올려다보며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자, 조금 긴장한 듯 하던 형의 미소가 환해졌다.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는 형의 붉은 입술이 다정하게 응, 네 거야. 하고 대답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허여멀건 한 손가락에 반짝이는 선이 생긴 것이 무척이나 낯설어서 멍하니 손등을 펴고 내려다보았다. 형은 그런 내 뺨과 귀를 찬 바람으로부터 지켜주듯이 감싸 쥐고 조용히 물었다.

"마음에 들어?"

"어… 엄청 반짝거려. 비쌀 것 같아. 닌텐도보다 비쌀 것 같아. 아니, 형이 지난달에 사준 맥북보다 더 비쌀 것 같아."

손을 움직일 때마다 각도가 바뀌면 빛깔이 조금씩 다르게 느껴지는 반지 안의 조그마한 보석을 빤히 바라보며 감탄하듯 주절거리는 내게 형은 조용히 웃어주었다.

고개를 불쑥 들어 기분 좋아 보이는 형을 올려다보았다.

"근데 형, 갑자기 나한테 왜 반지를 주는 거야?"

"너에게 꼭 주고 싶었거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문득 떠올랐다.

"그건가? 졸업반지? 성인됐다고 축하하는 반지?"

"…그런 의미도 되겠지."

지문이 느껴질 정도로 진득하게 내 귓불을 만지며 형이 대답했다. 간지러우면서도 어쩐지 나른해지는 그 손길에 어깨를 움츠리며 나는 되물었다.

"그러면 다른 의미야? 나 생일 되려면 좀 남았는데… 생일 선물?"

음, 하고 목안을 울려 소리를 낸 형이, 반지를 낀 내 왼손을 들어 부드럽게 쓸면서 잠시 고민하는 듯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나는 얌전히 주인에게 손을 내어준 강아지처럼 그런 형의 얼굴을 끔뻑거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준아, 사람들이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왜 반지를 끼는지 생각해 봐."

열등생에게 찬찬히 문제를 설명해주는 선생님처럼 자상하게 형이 물었고, 나는 골똘히 생각하며 손가락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별안간 기침이 불쑥 튀어나왔다.

에취! 내가 몸을 숙이는 것과 동시에 형이 거의 내 몸을 들듯이 허리를 감싸 안았다.

"일단 차 안으로 들어가자."

담요로 덮은 채 나를 조수석에 앉히고, 적당한 온도로 히터를 올려준 뒤에야 형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풋 웃었다.

"괜히 분위기 잡으려다가 너 감기 걸리게 만들 뻔했네."

"아… 이제 기침 안 나와."

형이 분위기를 잡으려고 했던 거였구나. 근데 왜?

내가 반지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 형은 차를 오피스텔 쪽으로 몰았다.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왜 반지를 끼는지 생각해보라며 형이 숙제를 내준 탓에 차 안에서 생각에 잠겼지만, 배도 부른 데다가 따뜻한 곳에 들어오니 잠이 왔다. 게다가 부드럽게 흔들리는 차 안의 움직임이 기분 좋아서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운전석 쪽에서 형이 작게 웃으면서 아직 아기네, 하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너무 졸려서 반박할 수 없었다.

주차장에서 차 시동이 꺼지자 겨우 눈을 떴고, 형에게 업히다시피 해서 집에 들어왔다.

목욕물을 받아놓고 욕조에 들어가서 가만히 손을 펴보니 욕실의 노란 조명에 비추어서 뿌연 욕실 안의 내 반지가 더 아름다워 보였다.

내가 알기로 네 번째인지 세 번째인지, 아무튼 몇 번 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는 것이 중요하거나 하는 건, 보통 결혼한 사이에 하는 이야기였다. 아니면 적어도 사귀는 사이거나.

"……그거 말고 또 있나?"

가족끼리 반지 선물하는 건 어디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어서, 우정혁한테라도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욕조에서 일어섰다.

젖은 머리를 털고 옷을 갈아입고 나서 책상에 올려둔 휴대폰을 보자 이하원 팀장님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숙소에서 생활하려면 미리 말해둬야 하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일정을 빨리 말해줬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참, 그랬었지."

가라앉은 기분을 고개를 저어서 떨쳐낸 다음, 드라이기로 머리카락을 말리고 거실로 나갔다.

형이 거실 테이블에 자료를 펼쳐두고 읽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형이 말했다.

"머리 말려주려고 했더니, 이제 다 컸네."

"저기, 형."

나는 아직 반지를 낀 것이 낯선 손을 주먹 쥔 채로 거실 소파 쪽을 향해 다가갔다. 내 어두운 표정에 형이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래?"

"이하원 팀장님이 그러시던데… 형이 나 숙소 가는 거 허락했다고."

…진짜야? 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더니 형이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다리를 꼬아 앉았다.

"아, 그거."

마치 잊고 있었다는 듯이 형이 시선을 들었다. 형에게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라서 이제야 생각난 것 같은 목소리였다. 손에 들고 있던 서류 파일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형이 나를 잠시 빤히 바라봤다.

"그랬어. 그쪽에서 연락이 왔었거든."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목소리에 나는 상처를 받은 것처럼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 같아서 감추기 위해 고개를 푹 숙였다.

"준아, 이리와 봐."

거부할 수 없는 형의 목소리에 이끌리듯이 나는 주춤거리며 형의 앞까지 다가가 섰다. 형은 손을 뻗어 내 머리를 가볍게 쓸었다.

"네가 나를 떠나서… 거기 가서 살고 싶다면, 그럴 수 있게 해줘야지."

아쉬움 한 자락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형의 목소리는 망설임 없이 시원스러웠다.

"언제쯤 나가게 될 지만 알려줘. 형이 네 짐 싸는 거 도와줄 테니까."

형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 가슴을 꾹 짓누르는 것처럼 아파왔다. 형이 나를 내쫓는 상황도 아닌데, 궁상 맞게 울먹거리다가 눈물이 떨어질 까봐 숨도 크게 못 쉬겠다.

"형은… 내가 나가도… 아무렇지 않아?"

내 말에 형 쪽에서 푸스스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리가 없잖아. 많이 쓸쓸하겠지."

"………거짓말."

입술을 비틀며 나는 중얼거렸다. 속으로만 말하려던 내 목소리가 밖으로 튀어나와 버린 것이다. 아주 작게 말했는데도 형은 내 말을 들었는지 음? 하고 되물었다. 이제 이판사판이다. 어차피 이렇게 형과 떨어지게 될 바에야, 답답하게 가슴에 쌓아둔 말이라도 해버리고 싶었다.

형의 착한 강아지는 더 안 할 거야.

"…지영 씨랑 살 거잖아."

"뭐?"

형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고, 그래서 형에게 울컥 화가 났다. 고개를 쳐들고 애써 눈을 부릅떴지만 결국 눈물이 주륵 흘렀다. 입술이 부들부들 떨려서 목소리가 이상해졌다.

"형은… 흐으, 내가 나가고 나면, 이 집에서 지영 씨랑 둘이 살 거잖아!"

지영 씨? 형은 이번에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썹을 밀어 올렸다.

형이 몇 번이나 그 여자와 은밀하게 속닥이며 전화하는 걸 엿들었던 내 입장에서는 그런 형의 태연한 표정조차도 너무나 화가 나는 것이었다.반지가 손바닥 살에 자국을 낼 정도로 주먹을 꾹 쥐었다.

"나도 다 알아! 흐으…! 형은 내가 숙소에 가기를 바라고 있었지? 나, 나 바보 아니야! 형한테 연인이 생긴 걸 내가 모를 줄 알았어…?"

화가 화를 불렀다. 서러운 마음이 커질수록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 알 수 없었지만, 이미 터져버린 이상 더 못할 말도 없었다.

"나, 나랑 같이 자던 침대에서… 지영 씨랑 꼭 껴안고 자려고 하는 거잖아!"

"한준."

그만하라는 듯이 형이 나지막하게 나를 불렀다. 그 목소리에 어깨 힘이 쭉 빠졌다. 고개를 떨군 채로 나는 중얼거렸다.

"흐으, 나한테 했던 것처럼, 그 여자한테 자, 자장가도 불러주고… 토닥토닥 재워주고…… 싫어. 그런 거… 정말 싫어……."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뚝뚝 마루 바닥을 수놓고 있었다.

형은 나를 얼마나 이상한 애로 생각할까. 여태까지 동생이라고 열심히 돌봐줬는데 알고 보니 형의 연인이나 질투하는 변태라는 걸 알게 되어서 기분이 나쁠까. 만약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팔로 눈가를 꾹 가려 막은 채로 나는 흐느껴 울었다.

형이 작게 웃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내가 너 아닌 사람하고 단둘이 한 집에서 사는 게 싫어?"

차분하게 묻는 형의 목소리에 나는 서러움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로 어깨를 들썩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하고 형은 잠시 생각하는 듯 했다.

"내가 준이 너 아닌 다른 사람과 한 침대에서 자는 것도?"

"…싫어, 너무 싫어."

마음속에서 한 번 걸러지지도 않고 진심이 불쑥 나왔다. 형은 어쩐지 만족한 듯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상냥하게 말했다.

"싫으면, 집에서 나가지 않으면 되잖아."

"그치만 형은… 형은…!"

북받쳐오는 서러움에 반박하려고 하자, 소파에 앉은 형은 응? 하고 웃으며 내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형은 나보고 집에서 나가란 말도 한 적 없고, 지영 씨하고 사귄다는 말도 직접 한 적 없었다.

급격히 차분해진 마음으로 젖은 속눈썹을 깜빡 거리며 숨을 고르고 있으려니 형이 내 쪽으로 팔을 뻗었다. 이리 와서 안기라는 신호였다.

억측의 서러움과 울분으로 지친 내 몸은, 쉴 곳을 찾듯이 형 쪽으로 자석처럼 이끌려갔다. 형의 단단한 허벅지 위에 앉으며 너른 어깨와 목덜미 사이에 익숙하게 고개를 뉘였다. 내 허리와 등을 끌어안고 쓸어주는 손길에 마음까지 녹아 내렸다.

"준아. 형은 너 밖에 없어. 너 말고 다른 사람들은, 다 쓸데없는 존재야."

다정하면서도 차가운 말을 하는 형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가까이 닿을 듯이 들려왔다. 부드러운 형의 숨결이 느껴지자 나는 형의 목덜미를 껴안으며 잠시 눈을 감았다. 마음에 안정이 느껴졌다.

내 등을 일정하게 토닥거리는 손길은 언제나처럼 기분 좋았다.

"준이 너만 좋다면, 영원히 우리 둘이서만 살자."

"……그래도 돼?"

꿈 같았지만 어쩐지 불안한 기분으로 물었다.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형이 아무리 특별한 존재라지만 어쨌거나 내 형이고, 우리는 단순히 형제일 뿐인데 그렇게 계속 둘이서만 지내도 되는 걸까? 내 어리광이나 다름 없는 독점욕 같은 것을, 형이 무리해서 들어주는 건 아닐까?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형이 귓가에 속삭였다.

"나는 준이 네 거야."

그렇구나, 형은 내 거구나. 마치 정답을 들은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늑한 형의 목소리가 깊은 늪처럼 나를 빠져들게 했고, 나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형이랑… 둘이서만 계속 살래."

"그래."

내 머리를 가만히 쓸어주면서 형은, 기획사 쪽에는 연습생을 그만두겠다는 말을 나 대신 전하겠다는 말을 했다. 이하원 팀장님에게도 더는 나에게 연락하지 말라고 해두겠다는 형의 말도, 마냥 달콤하게만 들렸다.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가 형의 가슴을 밀어냈다.

"아, 저기… 그런데 갑자기 그만 둔다고 하는 건…… 이하원 팀장님이 나 지원해주신 것도 많고, 권영도 배우님도 나 믿어줬는데 미안해서……."

형은 내 이마에 입술을 대었다가 떼며 말했다.

"괜찮아. 아직 정식 계약도 안 했고, 네 레슨비는 전부 내가 지불하고 있었으니까. 애초에 내가 돈을 대는 대신에 원하는 때에 바로 그만 둘 수 있도록 약속해놨었어. 네가 미안할 건 없어."

"아……"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 뺨을 살짝 꼬집으며 형이 피식 웃었다. 찹쌀떡이라도 주무르듯이 내 뺨을 손가락 사이로 만지작거리며 형이 말했다.

"너한테 보여주고 싶은 것도 있고, 할 말도 많았는데."

"뭔데?"

"내일 보여줄게. 내 강아지 너무 울어서 그만 재워야겠다."

형은 허벅지 위에 앉은 나를 가볍게 달랑 안아 들고 일어서서 침실로 걸어갔다. 아기 취급하지 말라며 형의 얼굴을 밀어내자, 형이 내 손바닥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그 간지러운 감촉에 주먹을 쥐자 이번에는 반지를 낀 내 손가락에도 입을 맞췄다. 그 입술이며 숨결이 간지러워서 키득키득 웃어대자 형은 한숨 쉬듯이 말했다.

"아직 아기 맞잖아. 아기처럼 웃으면서."

"안 그랬어. 형 나 이제 스무 살이야, 어른이야!"

"그래, 이제 어른이지."

침대 위에 나를 조심스럽게 내려놓더니 위에서 나를 짓누르듯 묵직하게 끌어안으며 형이 내 위에 함께 누웠다. 나른한 숨이 내 목덜미에 닿자, 왠지 간지러우면서도 찌릿한 느낌이 들었다.

"어서 자, 내일은 멀리 가야 하니까."

나를 꽉 껴안은 품 안에서 나는 내가 울다 지쳐서 금방 잠드는 어린애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어서 눈을 또렷하게 떴지만, 뒷목을 만지작거리는 형의 손길 안에서 그런 내 노력은 허사였다.

속도 시원해진 덕분인지 아주 까무룩, 깊이 잠들었다. 잘자, 내 사랑.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

도심에서 벗어나 형의 차가 달리는 동안, 형은 블루투스 이어폰을 왼쪽에만 낀 채로 몇 번이나 통화했다. 업무에 관련된 것이었는데, 형이 나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대면 회의를 전부 전화 통화로 전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형, 이렇게 바쁜데 그냥 직접 만나서 회의하는 게 낫지 않아?"

"거의 다 끝나가. 이제 곧 메일로만 주고받아도 될 거야."

"으음, 그렇구나."

차에 타기 전에 드라이브 쓰루 카페에서 형이 내게 얌전히 있으라며 주문해준 아이스 초콜릿 음료를 든 채로 빨대를 입에 물었다.

점점 더 녹색 나무들로 가득 물드는 창 밖의 풍경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편해졌다. 어릴 적에는 가족끼리 자주 소풍을 갔었는데, 부모님이 한 분씩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는 학교에서 단체로 가는 소풍이 전부였다.

형도 늘 바빴기 때문에 형과 단둘이 교외로 나오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오랜만에 둘이서 멀리 떠나왔다고 생각하니 마치 학교 수업을 땡땡이라도 친 것 마냥 설레는 기분이었다. 형과의 데이트를 방해하는 전화 통화도 잠잠해지고 나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준아. 여기가 어딘지 기억 나?"

드문드문 길가에 있는 지붕 낮은 주택들을 지나면서 차의 속도가 느려졌고, 왠지 익숙한 것 같은 길목들을 살펴보던 나는 외마디 비명을 냈다.

"아! 우리 어릴 때 살던 곳!"

내가 형의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걷던 시절이라서 기억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부모님과 함께 우리 네 가족이 살던 집이 근처에 있었던 것 같았다. 골목을 끼고 작은 슈퍼마켓이 나오자 기억에 힘이 실렸다.

"형, 나 여기 기억 나!"

기쁜 눈으로 운전석 쪽을 돌아보자 형은 부드럽게 웃으며 나와 살짝 눈을 맞춰 주었다.

"좋아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응, 여기 진짜 오랜만이다! 왠지 고향에 온 것 같이 마음이 포근해져. 아, 진짜 고향 맞나?"

부모님 두 분의 고향은 아니었지만, 동화 작가였던 아버지가 배경 조사를 위해서 부부가 함께 산골로 이사를 온 것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유명하고 잘 나가는 작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동화는 꾸준히 찾아주는 매니아 독자층이 있었다는 것 같다.

"거의 다 왔어."

우리가 함께 살던 동네에서 더 산 쪽을 향해 언덕을 오르며 깊이 들어갔다. 마치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숨어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외진 곳이었기 때문에 차창 밖의 주변은 전부 나무숲이었다. 차의 네비게이션을 통해서 봐도, 주변은 모두 건물 없이 텅텅 빈 녹지였다.

굽이치는 길목을 통해 천천히 진입하는 차 안에서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게 깊이 들어와서 뭐하지? 어차피 산속이라 아무것도 없을 텐데. 캠핑이라도 할 생각이려나.

그런 생각을 했을 때 즈음, 길 끝에 건물이 보였다.

세모꼴의 뾰족한 지붕이 솟은 별장 하나가 난데없이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었다. 담벼락이 가로막은 대문 앞에는 소형 트럭과 승용차가 서 있었다. 형의 세단을 인식하고 있는 것인지 가까이 다가가자 대문이 스르르 열렸다. 별장 앞으로는 아늑하게 차 한 대를 주차할 만한 주차장이 따로 나 있는 마당도 딸려 있었다. 마치 동화 속에 삽화로 그려져 있을 것 같은 풍경이었다.

차가 멈추자마자, 나는 홀린 듯이 안전벨트를 풀었다.

"형, 여기는 뭐야…? 여기 누가 있어?"

"나가서 봐."

달칵, 락킹 해제가 되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바로 조수석 문을 열었다.

찬 공기가 머리카락 속까지 들어와 잔뜩 헤집어놨고, 그 덕분인지 청량한 기분이었다. 차에서 내려 올려다보자 푸른 지붕과 그에 어울리도록 옅은 파스텔 톤으로 색칠된 외벽과 현관문이 아기자기하고 예뻐 보였다. 문 위쪽에 조그마한 새 모양의 종이 달려 있어서 바람결에 흔들리며 찌르르하고 귀여운 소리를 냈다.

그 아기 새 모양의 종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등 뒤로 형이 다가와 내 어깨를 감쌌다.

"앞으로 우리 둘이 살 집이야."

"……어?"

멍한 얼굴로 뒤돌아보자 형이 내 얼굴을 내려다보며 즐거운 듯 눈가를 접어 웃었다. 형이 정말로 기분 좋을 때의 표정이었다.

사르르 녹을 듯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형이 손가락으로 내 뺨을 슬슬 쓸었다.

"너 졸업할 때까지 기다렸어. 멀리서 학교 다니기엔 힘들 것 같았거든."

"아… 여기서 우리 학교까지는 세시간 넘게 걸리겠다."

"그렇지. 그래서 졸업식에 맞춰서 완공할 수 있도록 했어."

너무 예쁜 집이라서 여기서 살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하자 무턱대고 기뻐졌다가, 헤 벌린 입을 다물었다.

"잠깐만, 그러면 우리 지금 살고 있는 오피스텔은? 왜 여기로 이사하는 거야?"

형은 내 뒤통수를 지문으로 문지르듯 만지작거렸다.

"좀 더 안전한 곳으로 오고 싶었어."

"우리 오피스텔도 보안 철저하다고 유명하던데?"

"응, 그래도 여긴 타인이 쉽게 드나들지 못하니까 더 안전하지."

"그런가?"

그래, 하고 형이 대답했기 때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 그렇다면 그럴 것이다. 이사하는 것에 불만도 없고, 어차피 졸업했기 때문에 학교 다닐 일도 없으니 딱히 불편할 것 같지도 않았다. 집밖으로 잘 나다니지 않고 거실에 길게 누워서 영화와 드라마를 보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기 때문에 집 주변에 편의시설이 없어도 크게 신경 쓰이지 않을 것이다.

"아, 근데 여기 서울에서 너무 멀어서 우정혁 놀러 오라고 못하겠다."

"그러게. 아쉽네."

형은 웃으며 내 어깨를 토닥거렸다. 어쩐지 무척 즐거워 보였다.

마당 뒤쪽으로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그 앞에 웅크리고 앉아서 비료 포대를 정리하고 있던 일꾼 아저씨들이 우리 쪽을 돌아보며 꾸벅 인사했다. 마주 인사하고 있을 때, 그 옆으로 불쑥 하이힐을 신은 여자가 나타났다.

"오셨군요. 지금 막 마무리 작업 다 끝났습니다."

"어…? 아…! 안녕하세요……."

긴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밝게 웃는 그 얼굴이 낯익어서 나도 모르게 먼저 인사를 하고 말았다.

형을 오피스텔 앞까지 차로 데려다 주었던 여자였다. 그러고 보니 이 별장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대문 밖에 서 있던 것도 그 때의 그 은색 미니 쿠퍼였다.

분명 이 사람은 지영 씨일 텐데…?

갑작스러운 인사에 의아한 듯한 그 여자가 내 쪽을 쳐다보자, 얼굴이 확 붉어졌다. 자연스럽지 못한 내 태도가 이상하게 느껴졌을 것 같다는 생각에 혼자 부끄러워졌다. 그러나 그녀는 친절하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네, 안녕하세요. 윤슬건설 소장 이지영입니다. 이 저택의 설계도면과 디자인 총책임을 맡았습니다."

"아… 저, 저는 한준이라고 하는데요…. 저는 여기, 한설 형 동생이에요."

나를 뭐라고 설명할 방법이 없어서 형 쪽을 흘깃 바라보며 우물거리며 말하자, 이지영 소장은 싱긋 웃으면서 반갑다고 말했다.

"그 동안 의뢰인인 한설 씨께서 동생분 기쁘게 해드리려고 비밀로 하셨던 것 같은데, 부디 이 곳이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네요."

형이 현관문 패스워드를 설정하도록 돕고 보안 업체의 방문일정에 대해서 말해주는 이지영 소장의 태도는 친절했지만, 누가 봐도 사무적이었다.

형은 무뚝뚝한 얼굴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이지영 소장은 손에 든 패드에 무언가를 꼼꼼히 적어두었다. 아무리 봐도 두 사람이 나를 속이려고 연기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지영 씨'하고 다정하게 부르는 걸 분명 엿들었는데…….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나를 두고 두 사람은 중요한 이야기를 마쳤다.

이지영 소장은 현관문을 열어, 우리 두 사람이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 서 주었다. 형이 내 어깨를 감싸 안고 함께 현관에 들어섰다. 환하게 햇살이 비쳐오는 밝은 거실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우와, 드라마에 나오는 집 같아."

미리 환기를 해둔 듯 기분 나쁜 새집 냄새는 나지 않았고, 은은하게 허브 향이 풍겨왔다. 햇볕이 잘 드는 아이보리 색상의 커튼과 커다란 화분이 중심을 이루는 휴양지 같은 분위기의 거실은 보드라운 분위기로 꾸며져 있었다.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은 티브이 앞의 너른 소파였다. 언젠가 형과 뜬금없이 이름 모를 가구점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영문 모르고 따라 갔다가 체험용으로 디스플레이 되어 있는 소파를 여기저기 앉아보았었다. 그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폭신한 리클라이너 형태의 소파에 오래 앉아 쉬었는데, 그때 그것과 똑같은 모델이 거실에 자리잡고 있었다.

"형, 나 이거 너무 좋아!"

이지영 소장이 옆에 있다는 것도 잊고, 나는 소파로 달려가 냉큼 앉았다. 포근하게 등을 감싸는 소파의 촉감이 역시 최고였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형은 소파에 몸을 기울여 내 이마를 슬슬 쓸다가 고개를 숙여 쪽, 입을 맞춰주었다. 눈이 번뜩 뜨였다.

이지영 소장 쪽을 재빠르게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못 본 것처럼 창가 쪽으로 걸어가서 커튼을 묶고 베란다 문을 밀어젖혔다.

"이쪽 썬룸에도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위쪽 고정 어닝의 중간 부분은 스위치로 해체가 가능해서 바람 좋은 날은 열어 둘 수 있어요."

유리관처럼 생긴 썬룸 안으로 다가가자 이지영 소장은 문틀에 걸린 리모컨을 보여주며 설명을 이었다.

"썬베드의 가림 막도 리모컨으로 조절 가능합니다. 지금 같은 겨울에도 편히 썬베드를 사용하실 수 있도록 온도조절 장치를 설치해놓았습니다."

"와… 형, 여기에 왜 침대가 있어?"

나는 원형의 아늑한 야외 침대에 앉으며 형 쪽을 돌아보았다. 문가에 기대에 팔짱을 끼고 있던 형이 썬룸 안을 둘러보면서 조용히 대답했다.

"응, 정원 보면서 너하고 낮잠 자면 좋을 것 같아서."

"아… 그렇구나……."

나는 어쩐지 수줍어져서 뒷목을 긁적이며 우물거렸다. 하지만 설레는 마음에 자꾸 입술 끝이 올라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형의 품 안에서 노닥거리다가 낮잠을 자는 휴일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꿀맛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이지영 소장이 이상하게 생각할 까봐 그쪽을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이지영 소장은 내가 민망하지 않도록 친절하게 웃으며 말했다.

"반지가 참 예쁘네요."

"아! 이거요, 네, 형이… 저한테…"

사실 잊고 있었던, 끼고 있는 줄도 몰랐던 반지 얘기를 그녀가 꺼냈기 때문에 나는 당황해서 왼손을 주먹 쥐고 손등을 감쌌다.

"제 결혼반지보다 훨씬 예뻐요. 부럽네요, 센스 있는 분하고 사셔서."

한숨을 폭 내쉬며 손을 펴서 흔들어 보이는 이지영 소장의 왼손에는 내 것과 디자인이 전혀 다른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이미 결혼을 하신 분이었구나! 의혹이 말끔히 풀려서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나를 보며 형이 소리 내어 웃었다.

"준아, 그렇게 좋아?"

"응?"

"이 집, 그렇게 마음에 드냐고."

진심을 다해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며 형은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사실 내가 지금 기쁜 것은 이지영 소장과 형이 연인 관계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지만, 천사 같은 나의 형은 그런 내 마음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저, 그러면 저는 이만 가볼게요. 마지막 컨펌 받았을 때와 다른 부분은 동일합니다. 나머지는 두 분이 천천히 둘러보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래요. 감사합니다."

마당에서의 작업이 끝난 일꾼 아저씨들과 함께 이지영 소장이 떠나고 난 뒤에, 형과 단 둘이 본격적으로 집 안을 탐방했다. 꼭대기 쪽부터 구경하며 내려오고 싶다는 내 말에 따라 우리는 계단을 올랐다.

맨 위층에는 지붕 때문에 천장이 낮은 다락이 있었고, 그 아래가 삼층이었다. 삼층 전체는 서재였기 때문에 아직 짐을 옮겨오지 않아 텅텅 빈 책장들이 꼭 맞춘 듯이 벽에 늘어서 있었다. 중앙에는 너른 원목 책상 두 개가 마주보는 형태로 놓여 있었다.

"형, 책상이 왜 두 개나 있어?"

"하나는 네 거야."

"아…"

학교 다니는 내내 집에 와서는 단 한 번도 책을 펴보지 않은 학창시절이었지만, 그래도 내 방에도 책상이 있기는 했다. 어릴 때는 형을 따라 하고 싶은 마음에 형 앞에서 숙제도 하고 동화책 읽는 시늉이라도 하곤 했었는데, 자라면서 점점 공부에 대한 흥미를 잃어간 것이다. 형처럼 진득하게 앉아서 한 가지에 몰두하지 못하고 금방 새로운 것에 흥미를 가지는 내 성격 탓도 있었다.

형은 내 동그란 뒤통수를 익숙하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네가 대학 진학은 원하지 않는 것 같아서 강요하지 않았지만, 혹시라도 공부하고 싶은 게 생길 수도 있잖아. 연예인 쪽은 그만두기로 했고."

"으음… 딱히 공부하고 싶은 거 없는데."

"천천히 생각해도 괜찮아."

금방 초조한 표정을 짓는 내 어깨를 감싸며 형은 웃어주었다.

"어차피 오랫동안 나하고 여기서 살 텐데, 서두를 것 없으니까."

미래에 대한 생각이 너무 없는 스스로가 조금 한심하게 느껴져서 시무룩한 기분이었지만, 형 말대로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 생각하기로 했다. 형이 내 곁에 있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이층으로 내려오자 복도를 끼고 있는 드레스 룸이 두 개, 그리고 넓은 침실이었다. 안쪽에 따로 욕실도 있어서 아파트로 따지자면 안방 같아 보였다. 넓은 침대를 가운데에 둔 채로 양 옆의 서랍장이 비어 있었다.

오피스텔 짐을 이쪽으로 옮겨오면 아마 양쪽 서랍장이 전부 다 내 물건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잡동사니를 만들지 않고 말끔하게 버리며 짐을 정리하는 형과 다르게 나는 늘 물건이 많아서 형의 영역까지 침범하게 되곤 했다. 그래도 형은 화내지 않고 늘 내 것까지 정리해주었다. 생각할수록 우리 형은 천사가 확실하다. 

욕실 문으로 이어지는 코너 쪽에는 침대와 어울리는 어두운 색감의 원목 화장대와 거울이 구비되어 있었다.

넓은 벽 거울에 내 얼굴이 비쳐 보였다. 상기된 내 두 뺨과 반짝이는 눈빛이 정말 우정혁 말대로 헥헥거리며 꼬리 흔드는 흰둥이 같았다. 그런 나를 형이 등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바보 같이 헤 벌리고 있던 입을 다물었다.

"그, 저기, 예전에 엄마아빠 방이 이런 분위기였는데… 꼭 부부 침실 같다, 하하."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보드라운 시트를 손바닥으로 쓸면서 어색하게 웃자, 여전히 화장대 거울 쪽을 향해 서 있던 형과 거울 안에서 눈이 마주쳤다. 내 실없는 소리에 웃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진지한 표정으로 거울 안의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너무 쓸데없는 소리를 했나, 민망해져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크흠, 음… 나중에 형 결혼하게 되면 여기서 나 혼자 살겠지? 그때는 좀 이상하겠다. 둘이 있을 때는 몰라도, 혼자서 이런 방은 좀……."

"그럴 일 없어."

단호하게 잘라 말하는 형의 목소리가 어딘지 조금 화난 것 같았다.

내 쪽을 돌아본 형이 다가와 내 옆에 앉았고, 반동으로 매트리스가 미동했다. 나보다 체온이 높은 형의 손가락이 내 귓바퀴를 지나며 머리카락 사이로 헤집고 들어와 내 머리를 단단히 감쌌다.

가까이 다가온 얼굴이 내 눈을 코앞에서 빤히 마주보았다. 형의 콧날이 내 콧등에 살짝 닿아 간지러워졌기 때문에 속눈썹이 절로 움찔거렸다.

형의 새까만 눈동자는 자세히 바라보면 안쪽에 은은한 흰 빛이 감돌았다. 그래서 빛의 각도에 따라 신비로운 회백색이 되곤 했다. 그럴 때면 어렸을 적에 나를 구하러 왔던 짐승의 모습이 떠올랐다. 동화 속의 왕자님처럼 나를 구하러 왔던 아름다운 설 표범.

"분명하게 말할게, 잘 들어."

형의 목소리가 낮게 우르릉거렸다. 나를 꼼짝 못하게 붙잡아둔 그 눈동자에 내 놀란 얼굴이 비쳐 보였다.

"나는 너를 두고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거나 다른 연인을 만들지 않아."

"……그, 그렇지만. 연인이… 형한테는 연인이……"

내가 우물거리며 변명하듯 말하자, 형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 내게 다른 사람이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울 만큼 싫었던 거잖아." 

귓불이 확 뜨거워졌다. 이지영 소장과의 사이를 의심해서 형한테 울며 떼를 썼던 기억이 떠올라서 시선을 들 수 없었다.

형은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차분히 목소리를 내며 반지 낀 내 손가락을 감싸 쥐었다.

"내가 다른 남자, 혹은 여자와 한 침대에서 껴안고 자는 거 괜찮아? 자장가도 불러주고, 너한테 하듯이."

"그런 건… 싫어."

거짓말로라도 괜찮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건 말하자면 형의 동생인 나만의 특권이니까, 다른 사람에게 양보할 수 없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 것처럼 형은 내가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눈빛으로 내게 쐐기를 박았다.

"내가 '평생 함께 살 연인'은 너야. 난 너 이외의 존재는 곁에 두고 싶지 않아."

"……이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 나는 좋은데, 너무 좋은데…"

"네가 좋으면 되는 거야. 다른 건 생각하지 마."

솔직한 내 대답을 칭찬하듯이 형은 내 어깨를 감싼 손을 위로 옮겨가며 내 목덜미를 쥐었다. 그 손길이 나를 끌어당겼다.

서로의 콧날이 닿자, 형은 눈을 감았다. 곱게 뻗은 속눈썹을 내게 보이며 형은 길게 나른한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내게 콧날을 느리게 비비며 내 뒷목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마치 거대한 야생동물이 인간에게 애정표현을 하는 것 같은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형의 얼굴이 이렇게 가까이 다가와 있다는 것만으로 심장이 폭주기관차처럼 마구 날뛰는 걸 보면, 난 정상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이런 나를 손가락질 할지도 모르지만, 형이 괜찮다고 하면 다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형이 내 것이라면, 나는 형 것이니까. 

형의 윗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

"한준… 넌 내 거야."

거봐. 정답을 맞췄다는 뿌듯함에 내 입술에 미소가 감돌았다.

형은 타버릴 것처럼 뜨거운 입술로 내 숨을 삼켜버렸다. 입술 점막이 닿았다가 살짝 떨어질 때 쪽, 하고 끈적한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신호탄이라도 되는 양, 형은 내 머리를 감싸 쥐고 옆으로 비틀어 입술을 붙이면서 혀끝을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영화와 드라마 속 장면으로 보면서 상상만 해봤던 첫 키스는, 아찔한 맛이었다. 입천장을 쓸며 힘 있게 내 혀를 감아 빠는 그 촉감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다정한 것 같으면서도 거칠게 몰아치는 그 혀끝에 내 온 몸이 녹아 내렸다.

힘이 풀려 침대 시트 위로 쓰러질 것 같은 내 몸을 형은 가볍게 지탱했다. 나는 허리에 감긴 팔에 의지하듯이 몸을 맡겼다.

어미를 따라 하는 아이처럼 내 혀도 자극을 받아 형이 하듯 쪽 쪽 혀를 빨아보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형은 목 안으로 낮게 웃으며 나를 칭찬하듯이 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헉, 벌어진 입 안으로 재차 들어와 내 혀끝을 빨고 깨무는 그 행위는 점차 농밀해졌다. 더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심장박동이 빨라졌을 때,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가쁜 숨을 내쉬는 나를 내려다보며 형은 키스로 인해 붉어진 입술로 싱긋 웃었다. 

"네 얼굴 산딸기처럼 붉어졌어, 맛있어 보이네."

뺨을 툭툭 치며 놀리듯 말하는 형을 흘겨보면서도 나는 내 뺨에 닿은 손을 쥐었다.

형하고 키스했다, 그 생각에 가슴이 계속해서 뛰어댔다. 입 안에 남은 키스의 맛을 음미하듯 침을 꿀꺽 삼켰다. 이 키스는 그저 그런 불장난이 아니었다. 나는 이제 형을 누군가에게 빼앗길 까봐 노심초사하거나 질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가지런한 손톱과 마디가 길게 뻗은 형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형이랑…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형은 내 곁에 비스듬히 누우며 팔로 머리를 지탱한 채로 멍한 내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눈썹을 밀어 올린 예민한 표정의 형과 눈이 마주쳤다.

"나 말고 이렇게 되고 싶은 남자가 따로 있었어?"

아니 형, 왜 남자라고 단정하는 거야. 나름대로 나 귀엽다고 가끔 말 걸고 머리 쓰다듬는 여자애들도 꽤 있었는데.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래도 늘 눈이 갔던 것은 드라마 속에서도 남자 주인공이었던 것 같다. 게다가 다들 하나같이 어딘가 내 형을 닮은 남자들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럼 난 대체 언제부터 형을 그런 마음으로 좋아한 거지?

"준아."

다정한 목소리가 내 시선을 이끌었다. 내가 쥔 채로 만지작거리고 있던 형의 손이 내게 깍지를 끼어왔다.

"나는 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널 잘 돌보겠다고 결심했었어. 내 모든 걸 바쳐서라도."

"…그건 엄마아빠한테 감사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나를 거둬서 키워주신 분들이니까."

어릴 적의 형은 자주 꼬리가 튀어나왔다. 짐승의 것이 분명한 희고 뾰족한 귀가 머리에 솟아나기도 했는데, 난 그게 이상한 것인 줄도 몰랐다.

형은 차분하고 온화한 성격의 소년이었지만, 가끔은 신경질적으로 돌변하기도 했다. 대부분 나와 관련된 일들 때문이었는데 형은 동네 아이들이 나를 괴롭힌다거나 지나치게 관심을 가지며 데리고 다니는 것을 싫어했다. 심지어는 어른들이 내게 예쁘다며 내 머리를 쓰다듬기만 해도, 형의 눈빛이 회백색으로 돌변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떠밀거나 힘을 행사하며 화를 내는 일은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내게 지나친 호감이나 불만을 가진 사람들은 사고가 나서 몸이 다치거나 병으로 아파져서 결국에는 내 곁에 다가오지 못하게 되곤 했다.

부모님은 형이 정체를 들켜서 괜한 오해를 사게 되거나 사람들의 미움을 받게 될 까봐 걱정하셨다. 그러나 형은 점차 커갈수록 귀나 꼬리를 내보이는 일도 없어졌고, 위험에 빠진 나를 구하러 올 때가 아니면 짐승의 모습으로 변하는 일도 없었다.

다정한 나의 형은, 부모님께 좋은 아들이었고 내게도 더할 나위 없는 좋은 형제이자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분들에게 감사한 마음뿐이라면, 너를 놓아주는 게 맞아. 평범한 어딘가의 여자와… 네가 결혼해서 잘 살기를 빌어줘야만 하겠지. 그게 형으로서의 내 역할일 테니까."

형은 내 턱을 쥐어 자신을 보게 만든 다음, 살짝 부르튼 내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런데 그러고 싶지 않아. 난 너를 내 반려로 점 찍었으니까."

"…어, 언제부터?"

형은 웃음기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내 손을 끌어가 반지를 낀 내 왼손에 입맞췄다.

"갓 태어난 네가 나를 보고 환하게 웃어주었던 순간부터, 운명이라고 생각했어."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반지 가운데의 작은 보석에 멍하니 시선을 둔 채로 나는 어어…? 하고 입을 벌렸다.

나는 이제야 형을 향한 내 마음을 깨달았는데, 그리고 연애 한 번 해본 적 없는 내 스무 살 인생의 첫 키스도 이제야 경험해봤는데, 나를 향한 형의 마음은 이미 엄청나게 커다랗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여태 형으로서 내게 보여준 애정은 빙산의 일각이었던 것이다.

"그, 그럼… 형은 여태까지 나를… 그런 눈으로……"

"적어도 인간 나이로 성인이 될 때까지는 고이 키워야 할 것 같아서 기다려왔어."

"아…!"

"하지만 네 말대로 내 강아지도 이제 어른이니까, 더 참을 필요 없겠지."

그런 말을 하는 형이야말로 큰 강아지가 된 것처럼 꼬리라도 흔들 듯이 기쁜 얼굴로 내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부드러운 입술이 내 목과 어깨 사이의 피부 위로 도장 찍으며 입맞추는 감촉에 간지러워 몸을 웅크렸다. 게다가 기분이 너무 좋아서 주체하지 못한 것인지 어느새 뻗어 나온 형의 길고 보드라운 설 표범의 꼬리가 가볍게 흔들리며 내 뺨을 건드리고 있었다.

"내 마음을 받아줘서 고마워, 앞으로 좋은 형이자 남편이 될게."

목덜미에 코끝을 간지럽게 비비면서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나는 번뜩 눈을 떴다.

그렇구나. 여기는 우리 신혼 집인 것이었다. 형이 내 손에 끼워준 반지는 프러포즈 링이었고.

뒤늦게 내 상황을 인지하고 나서야 우리가 단지 가벼운 연애를 시작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하긴,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형은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함께해온 반쪽이나 다름 없는 존재였다. 만약 그런 내 형과 가볍게 연애를 하다가 헤어진다고 하면, 내가 형 없이 살 수 있을까?

생각에 빠져 있던 내가 절레절레 고개를 젓자, 형은 찌푸린 내 미간을 지문 끝으로 슬슬 쓸었다.

"왜. 내가 남편으로 못미더워서 그래?"

"으으응, 그게 아니고 형은 진짜 똑똑한 사람인 것 같아서."

내 뜬금없는 칭찬에 형은 바람 빠지듯 피식 웃으며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하지만 정말이었다. 어차피 절대로 헤어져서 살 수 없는 우리니까, 마음을 확인한 뒤에는 연애가 아니라 바로 결혼이 더 맞는 수순인 것이다. 역시 앞일을 내다보는 우리 형의 안목을 따라갈 수가 없다. 그래서 형은 주식도 잘 하고, 어린 나이에 사업이나 투자도 잘 하는 모양이었다.

반짝이는 선망의 눈빛으로 형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번에는 눈꺼풀 위에 간지러운 키스를 받았다.

"근데 형, 이층 침실로 올라오기 전에 방이 또 있는 것 같은데, 그건 뭐야?"

"아… 그거."

일층과 이층 사이의 계단이 꺾어지는 반층에 문이 하나 있었다. 침실과 서재, 드레스 룸과 창고까지 전부 봤고 일층에는 거실과 이어지는 게스트 룸까지 있었기 때문에 더는 나올 방이 없을 텐데. 

형은 어쩐지 쑥스러워하는 표정으로 귓불을 만지작거리다가 시선을 들어 나와 마주보았다.

"궁금하면, 가볼까." 

바로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침대에서 일으켜 세워 부스스해진 내 머리를 정리해주었다.

화장대 벽 거울로 비쳐 보이는 내 얼굴이 누가 봐도 엉망으로 키스한 듯 입술이 부르터 있어서 민망해졌다.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내 입가를 닦아준 형이 내 손을 잡고 이층 복도로 걸어 나왔다.  

반층 아래에 있는 문을 열자, 불 꺼진 방 안에 햇볕이 들어와 아늑한 풍경이 비쳐 보였다.

어린 아이의 것으로 보이는 작은 이층 침대와 사용 감이 느껴지는 목마가 눈에 들어왔다. 키 낮은 책상도 누군가가 사용했던 것처럼 세월이 지난 감이 느껴졌지만 아직 튼튼해 보였다. 게다가 그 모든 것이 익숙하고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방문 앞에 선 채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나 왠지, 이런 방에서 살았던 것 같은데……."

"흠, 그래?"

"응. 이런 침대도 썼던 것 같고, 저런 목마도 탔었는데. 왜, 형 기억 안나? 어렸을 적에 아빠가 손수 만드셨는데, 오른쪽 손잡이가 부러져서 새로… 아!"

방 한 가운데의 카펫 위에 놓인 그 목마도 오른쪽 손잡이가 색상이 다른 나무로 다시 붙인 듯 어색해 보였다. 눈이 휘둥그래져서 뒤돌아보는 내 얼굴에 형은 이제 알았냐는 듯이 내 머리를 흐트러뜨리며 작게 웃었다.

이런 침대며 목마를 썼던 것 같은 기분은, 착각이 아니었다. 

서울로 이사오기 전에 산골 속 옛집에서 우리 형제가 썼던 물건들이었다. 한걸음에 다가가 목마 손잡이를 만져보자, 옛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다시 네다섯 살 무렵으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때는 정말 부모님과 형이 내 세상의 전부였다. 지금이라고 다를 것은 없지만, 그래도 그때는 학교도 다니지 않았고 바깥 세상을 전혀 몰랐으니까 정말로 형만 바라보면서 살았던 시절이었다.

"이거 다 버린 거 아니었어?"

"버리긴 왜 버려. 침대하고 책상, 목마까지 전부 아버지께서 만드신 건데."

"맞아… 아빠가 동화 쓰시다가 가끔 머리 비운다고 취미로 목공 하셨지?"

"이사 가면서 어머니께서 물류센터에 맡겨놓으셨던 거야. 아버지 공구들까지 전부 다."

"그랬구나……."

먼저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관련된 가구들을 보면, 어머니 마음이 힘들어서 그러셨을 거라는 생각에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이지영 소장에게 인테리어를 맡겼더니, 거실 티브이 장 옆에 목마만 장식품으로 두자고 하더라."

"아."

"하지만 나는 예전에 살던 집에서처럼 너와 내 물건을 그대로 둔 방을 만들고 싶었어."

나는 형의 서재 문 앞에서 엿들었던 통화 내용을 떠올렸다.

'아뇨. 그 부분은 그대로 놔두는 게 좋겠습니다. 그 애가 마음에 들어 했던 부분은 최대한 보존하고 싶어서요. …네.'

그게 이걸 말하는 거였구나.

내가 마음에 들어 했던 우리 형제의 보금자리가 그대로 재현되어 있는 것을 다시 한 번 훑어보자, 마음속으로 몽글몽글한 구름 같은 것이 일었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성인이었고 작은 침대와 책상, 목마는 더 이상 우리가 쓸 수 없을 만큼 작아져 버렸다. 이지영 소장의 말대로 그냥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목마 정도만 장식했어도 괜찮을 텐데. 

"근데 형, 이렇게 방 하나를 다 쓰는 건 낭비 아니야? 어차피 이제는 우리가 쓸 수도 없는데." 

나를 생각해주는 건 고맙지만, 이 방을 쓸 어린아이는 이제 없었다.

무릎까지 오는 목마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나를 감상하듯 바라보며 형은 음, 하고 목을 울렸다.

"……혹시 쓸 지도 모르니까. 아이가 생기면."

"응?"

형이 무슨 말을 했는지 잘 듣지 못해서 고개를 들며 되묻자, 형은 묘한 미소를 흘리며 눈을 접어 웃었다.

"아니야. 아직은 몰라도 돼."

내 머리를 쓸어주며 형이 나를 데리고 거실을 향해 내려갔다. 왜 어릴 때 그대로의 '아이 방'이 굳이 필요한 건지는 아직 이해하지 못했지만, 형이 일부러 만들어둔 거라면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보다는 형이 새집 구경을 기념해서 근처 한식당을 예약해뒀다는 말에 정신이 팔려서 그날은 그대로 콧노래를 부르며 형을 따라 졸래졸래 차를 타고 별장을 떠나왔다.

***

갑자기 연습생 생활을 그만두게 되어서 죄송하다고 그루 엔터테인먼트의 이하원 팀장님에게 따로 연락을 드렸지만,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 팀장님은 괜찮다고 말했다. 오히려 팀장님의 목소리가 후련하게 들렸다. 생각해보면 연기 수업을 배운 것도 두세 달 정도 밖에 되지 않았고, 나 말고도 연습생은 많았으니 내가 아니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어쩌면 연기 선생님을 근심 어린 표정으로 한숨 짓게 하지 않아서 더 다행인지도 모른다.

- 한준, 너 진짜 이사 갔냐.

"응. 그렇다니까. 너 한국 돌아와도 이 형님 보러 못 올걸? 서울에서 되게 멀어."

어학연수로 영국에 간 우정혁은 기특하게도 내 생일에 맞춰서 축하 전화를 해왔다. 스무 살 생일에는 함께 고깃집에 가서 소주를 마셔보기로 했었는데, 우정혁은 영국에 있고 나는 강원도 산골에 있어서 그 약속은 지키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아니, 뜬금없이 왜 그렇게 시골로 이사를 갔대. 연예인 못해서 칩거 생활 하는 거냐."

"그게 아니라 형이 이사하자고 해서 왔어. 시내에서도 엄청 굽이굽이 산중턱까지 들어와야 한다? 주변에 전부 산밖에 없어. 진짜 이 산속에 딱 형이랑 나만 살아. 신기하지?"  

거의 동화 속 요정의 집 같은 별장과 주변 분위기를 자랑하듯이 말한 것뿐인데, 휴대폰 건너편의 우정혁은 으음,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그건 이사가 아니라… 고립된 거 같은데. 누구 만나러 나가기도 힘들잖아, 불편하지 않아?"

"전혀!"

형이 투자해서 새로 시작한 사업이 알고 보니 생필품과 식 재료를 집집마다 배달하는 신생 심부름 업체 사업이었는데, 집 앞에 우체통처럼 생긴 아이스박스 락커가 있어서 소비자가 원하는 시간대에 그 안에 넣어주고 떠난다. 그 덕분에 배달업자와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되고, 누가 내 물건을 훔쳐갈 위험도 없었다.

산골 깊은 곳에 있는 우리 집 같은 경우에는, 드론으로 배달해서 현관 앞에 상자를 놓아준다. 그래서 따로 마트에 가지 않아도 집에 필요한 물건이나 음식은 충분했다. 갑자기 치킨이 먹고 싶어져도 같은 방법으로 심부름을 신청하면 배달이 가능했다. 치킨과 짬뽕을 각각 다른 가게에서 한 번에 픽업한 드론이 멀리서 날아오는 것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였다.

게다가 형이 휴학한 뒤로 집에서 일하며 늘 내 곁에 있기 때문에 내가 원하면 어디든 차를 태워 데려다 주니 이동에 불편함도 없었다. 요즘에는 만약을 위해 형과 함께 가끔 운전 연습도 하며 면허 딸 준비도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형이 이번에 에스프레소 머신을 사서 커피도 직접 내려주는데, 웬만한 카페보다 맛있어! 썬룸에서 바깥 구경하면서 아이스 라떼 마시면 그게 카페지, 뭐."

"음… 그래. 네가 안 불편하면 된 거겠지. 나 같으면 숨 막혀서 못 살 텐데."

"왜? 형이랑 둘이 살면 얼마나 즐거운데!"

"너나 그렇겠지. 넌 형 집착남이니까. 난 너네 형이랑 그런 데에 있으면, 맨발로라도 어떻게든 탈출했을 거다." 

본인은 누나가 부탁하면 한밤에도 아이스크림 사러 편의점 갔다 오는 친누나 집착남인 주제에. 

나는 입술을 비죽 내밀고 우정혁 들으라는 듯이 욕지거리를 내뱉다가, 반색하며 말을 이었다.

"야, 나 그리고 요즘에 목공 배워!"

"목공? 갑자기 왜?"

"예전에 아빠가 쓰시던 공구들이 있어서 관심이 생겼거든. 이번 주에 연필꽂이도 만들었다?"

유튜브 영상을 통해서 목재 다루는 법을 배우고, 형이 사다 준 교재들로도 공부하는 중이었다. 한 달에 한 번씩 형이 동네의 유명한 목수 할아버지를 모시고 와서 수업도 받기 시작했다.

아직은 취미로 시작한 수준이지만, 형이 썬룸 옆으로 공방도 만들어주었기 때문에 더 열심히 해볼 생각이었다. 더 공부해보다가 토목이나 건축 쪽으로 대학 진학할 마음이 생기면 형이 대학도 보내주겠다고 했지만, 그렇게까지 좋아하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서툰 솜씨로 내가 만든 첫 작품인 연필꽂이는, 형의 서재 책상에 놓였다. 고급 만년필이 꽂혀 있기에는 너무 보잘것없는 수준이었지만 형은 내가 만든 연필꽂이를 보물처럼 다뤘다.

한참 자랑하다 보니 우정혁이 있는 영국은 점심 때라서 식사 시간이었다. 나도 막 샤워를 마치고 머리카락을 말린 참이었기 때문에 아쉽지만 전화를 끊어야 했다. 전화를 끊기 전에 우정혁이 그래도 한국에 돌아오면 놀러 갈 테니 이사한 집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지만, 내가 집 주소를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화 다 했어?"

"아… 어어, 우정혁한테서 전화 왔었어. 아직 영국이래."

언제부터 서있었는지 모르게 형은 인기척도 없이 방문 틀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있었다.

저녁 식사를 한 뒤부터 서재에 틀어박혀 일하던 중이었던 형은 안경을 끼고 있었다. 두꺼운 뿔 테 안경이 고운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안타까운 기분이 든 것도 잠시였다. 형이 안경을 벗고 머리카락을 이마 위로 넘기며 내가 앉은 화장대 앞으로 다가왔다. 긴 눈매의 새까만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보며 반쯤 덜 마른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오랜만에 친구랑 전화해서 좋았겠네."

피곤한 듯 가라앉은 목소리가 섹시하게 느껴졌다. 나는 목 뒤로 표나게 침을 꿀꺽 삼켰다.

사실 나는 아직 형에 대한 마음을 정의하지 못한 상태였다. 형이 준 반지를 끼고 있고, 둘뿐인 새 집에서 신혼생활을 하듯이 살고 있었지만, 평생 형으로 생각해온 사람을 내 반려이자 남편으로 그렇게 갑자기 바꿔서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그런 내 마음과 다르게 몸은 적응이 빠른 것인지, 아니면 이미 오래 전부터 내가 깨닫지 못할 뿐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 형에 대한 욕정을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 그냥 그렇지, 뭐. 걔랑은 학교 같이 다녔으니까 지겨워."

흐음, 하고 내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뜬 형의 얼굴에서는 색기마저 느껴졌다. 밤이 되니까 별장 주변이 어두워져 더욱 둘만 있는 기분이 들었다. 긴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장난치듯 꾹 눌러보더니 형이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친구 보러 가고 싶지는 않고? 나하고 늘 둘이서만 있으니까… 지겨울 텐데."

"전혀! 나는 형하고 있는 게 제일 재밌어! 아, 맞다. 형, 우정혁이 나중에 한국 돌아오면 놀러 오고 싶다고 했는데, 내가 여기 집 주소를 몰라서…"

"키스하고 싶네."

음험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말에 응? 하고 멍하니 되묻자 형이 내 입술을 손끝으로 톡톡 건드렸다. 

"종알종알거리는 게 귀여워서…… 먹어버릴까."

"무, 무슨…"

"식후 디저트를 못 먹었거든."

저녁 식사 후 먹었던 생크림 케이크는 정말 달고 맛있었다. 형이 만든 수제 생일 케이크였는데, 성인이 된 내 생일을 기념해서 올해에는 정말 크게 만들어줬다. 식용 색소가 들어 있어서 예쁜 분홍색을 띄는 케이크를 두 조각이나 잘라서 내 그릇에 옮겨주고, 형은 내가 먹는 모습을 구경만 했다.

"이 젤리, 내가 먹어도 되지."

젤리? 되물을 새도 없이 형은 눈만 동그라니 뜬 내게 고개를 숙였다. 순식간에 입술이 깨물려 아얏, 하고 소리 내어 입을 벌리자 형의 혀끝이 입술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탱글거리는 젤리 같은 건 오히려 형의 촉촉한 혀였다.

이따금 눈이 마주치면 형이 조용히 나를 안으며 입을 맞춰오기 때문에 키스에는 제법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혀를 얽고 입술을 빨고 핥을 때마다 새롭게 몸이 녹아 내리는 기분이었다. 매번 처음 같았다.

게다가 최근에는 형이 샤워를 한 뒤에 맨 가슴을 드러내고 침대 앞을 지나가기만 해도 아래가 바짝 서서 큰일이었다. 여태까지는 그저 형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줄 때 그 품에 안겨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는데, 키스라는 선을 넘고 난 뒤에는 형을 자꾸만 의식하게 되었다.

자라나면서 형은 단 한 번도 내게 야한 농담을 한 적도 없었다. 중학생 시절, 내가 밤늦게 화장실에서 몰래 팬티를 빨고 있어도 형은 모르는 척 넘어가 주었다. 그랬던 나의 점잖고 자상한 형이 미처 가리지 못한 내 비죽 솟은 잠옷 바지를 보면서 다정하게 물었다.

"힘들지, 내가 빼줄까." 

"뭐… 뭐를…?"

"나 때문에 그렇게 된 거잖아. 도와줄게."

물론 형의 젖은 맨 가슴이나 탄탄한 복근, 그 아래로 이어지는 근육의 곡선에 시선이 가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몸이 반응해버린 것은 맞지만 그래도 나는 예전처럼 형이 모른 척 해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서로 마음을 확인했고, 나는 스무 살이 되었으니 형은 더 이상 거칠 것 없다는 듯 다가왔다.

"으응, 잠시만…!"

츄웁, 소리를 내며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형의 어깨를 밀어냈다. 

자기 전에 가볍게 페팅해주는 것이 습관이 된 것은 사실이고, 이렇게 키스하다 보면 어느새 머리끝까지 뜨거워져서 결국 또 형의 손을 빌리고 마는 수순이었지만 그래도 부끄럽지 않을 수 없었다.

조도 낮은 스탠드조명이 켜져 있는 침대 쪽으로 나를 들어 옮기면서 형은 내 귓바퀴를 살짝 깨물었다.

"아얏!"

"왜 오늘은 앙탈이야? 생일이라고 더 귀여워진 건가."

형은 피식 웃으면서 이번에는 내 뺨을 살짝 깨물었다. 

잠옷바지와 함께 팬티가 단번에 무릎까지 쑥 끌어내려졌다. 허벅지를 오므리려고 해봐도 이미 그 사이로 뜨거운 형의 손이 들어와 허벅지 안쪽을 쓸고 있다.

"또 벌써 젖었네."

눈을 질끈 감으며 창피함을 견뎌냈다. …그래서 잠깐만 기다리라고 한 건데.

키스만으로도 기대감에 젖어버린 팬티를 형이 볼 수 없도록 미리 내가 벗어서 침대 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었던 건데, 형이 그럴 기회를 주지 않는다. 이미 축축해진 팬티와 함께 잠옷바지가 형의 손길에 의해 내 발목에서 빼내져 완전히 벗겨졌다.

오금을 간질이며 다시 허벅지 안쪽까지 쓸고 올라온 형의 손길이 쿠퍼액으로 끈적하게 젖은 내 고환 아래쪽을 부드럽게 누르듯 만졌다. 그리고 긴 손가락이 우연인 듯 고간을 지나 움찔거리는 뒤쪽 구멍까지 닿아 있었다. 나는 그 감질 나는 촉감에 고개를 뒤로 뻗으며 입술 사이로 침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뻐끔거렸다.

"흐아아…"

"준아."

"으응!"

짧은 손톱 끝부분이 축축한 엉덩이 사이로 들어와 구멍 안쪽에 살짝 파고들어왔다가 내가 소리를 높이자 스르르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바로 빳빳하게 서기 시작한 내 기둥을 그러쥐고 기분 좋은 압박감을 주며 쓸어주었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허리를 비틀어 사정 감을 참아보려고 해도 형의 손길은 절묘할 정도로 기분 좋았다.

그래도 자존심이 있지, 1분이라도 넘겨보자는 마음에 형의 어깨에 손톱을 꾹 눌러 넣어 힘을 주며 달아오르는 몸을 참아냈다.

"나 너한테, 받고 싶은 게 있는데."

"아으응!"

요도구 끝을 진하게 문지르며 귓가에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에 나는 결국 몸을 바르르 떨며 사정해버렸다.

멍한 눈길은 초점이 맞지 않고, 형의 손을 적시면서 정액을 찔끔거리며 쏟아냈다. 그 순간의 황홀경을 알면서도 형은 짓궂게 손끝으로 살짝 요도 구멍을 막았다가 열어주며 내 몸이 안달하게 만들었다. 내가 짜증을 부리듯 단단한 어깨에 이마를 비벼대며 숨을 내쉬자 그제야 내 것을 장난스레 만지던 것을 그만두고 내 엉덩이를 가볍게 안아 두드렸다.

"나한테… 으응, 받고 싶은 거…?"

"응. 줄 수 있어?"

나른해진 내 귓가에 입술을 비비며 형이 나지막이 물었다.

형은 아침 일찍 나가더니, 스무 살이 된 내게 생일 선물이라면서 파스텔 톤의 미니 쿠퍼를 몰고 왔다. 아직 나 혼자 운전하지는 못하게 하지만, 그래도 너무 큰 선물이라서 입이 안 다물어졌다. 그 뿐만이 아니라 스테이크도 맛있게 구워 주고, 수제 케이크까지 만들어서 내게 선물했다.

그런 형에게 내가 줄 수 있는 게 있고, 형도 받고 싶은 게 있다면 나는 오히려 기쁠 지경이었다.

"응… 뭐든지 줄게, 형……."

따뜻한 가슴팍에 뺨을 비비며 내가 웅얼거리자 형은 만족한 듯 내 등허리를 쓸며 그래, 하고 대답했다.

기분 좋은 사정 감으로 빠르게 잠이 왔고, 늘 그랬듯이 형이 물수건으로 내 아래를 닦아주는 걸 느끼며 잠들었다. 

***

햇살 좋은 한낮의 산속은, 작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오고 이따금 바람결에 나뭇가지들이 흔들려서 한 폭의 수채화처럼 기분 좋은 풍경을 보여주었다. 겨울의 찬 기운이 물러나고 봄이 오는 것이 그 신선한 공기에서도 느껴졌다. 게다가 마당에는 연못이 있어서 햇빛이 부서져 반짝이는 물결이 참 예뻤다.

그 모든 것이 한 눈에 보이는 썬룸은 그야말로 낙원이었다.

어차피 우리 둘 뿐인 공간이었고, 전면 유리창 밖으로 비쳐지는 풍경은 평온하고 아름다웠다.

"으응, 다… 다리 벌리지 마. 부끄러워, 형…"

유리천장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볕에 솜털까지 세세히 다 보일 정도로 밝은 공간에서 알몸으로 누워 있으니 민망해서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나마 자바라 형식의 썬베드 지붕이 반쯤 쳐진 상태여서 베개에 누인 내 얼굴과 목덜미까지는 그늘이 졌지만, 내 허벅지 사이에 몸을 끼워 넣고 서 있는 형에게는 내 모든 속살이 적나라하게 비쳐 보일 것이었다.

"괜찮아, 아무도 안 봐."

발목을 쥐어 올리며 내 발바닥에 쪽 입을 맞춘 뒤, 형은 다정하게 속삭였다.

형이 보잖아, 형이 지금 내 몸을 보고 있잖아…!  

속으로 외쳐봐도 소용 없는 일이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옷가지를 바닥에 내팽개친 형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였는데 어째서인지 부끄러워서 얼굴을 가리는 것은 나뿐이었다. 손가락 사이로 흘깃 보이는 형의 몸이 햇살을 등지고 있어서 내겐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잔뜩 성난 형의 그것이 엄청나게 흥분해있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밤이 되면 침실에서 이따금 형이 내 것을 등 뒤에서 만져주며 허벅지 사이로 형의 것을 밀어 넣어 문지르곤 했기 때문에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정면에서 형의 발기한 그것을 보는 건 아직 민망한 일이었다.

우리는 섬에 떨어진 연인처럼 푸르른 풍경이 둘러싼 곳에서 알몸으로 뒤엉키는 중이었다. 왜 우리의 새 집에 썬룸이 있고, 바깥 풍경을 구경하는 이 공간에 굳이 침대까지 구비되어 있는지를 이제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내 강아지, 벌써 이렇게 됐네. 귀엽게."

형은 마치 내 것이 길가에 핀 강아지풀이라도 되는 양 귀여워하며 허리춤으로 슬쩍 밀고 들어와서 내 가랑이 사이로 형의 것을 맞대고 뭉근하게 비벼댔다. 지나치게 자극적인 광경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터질 것 같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린 채로 벌벌 떠는 게 전부였다. 나는 이제 고작 스물이고, 매일매일 형을 상대로 야한 경험을 갱신해가는 중이다.

"읏, 그야… 형이 자꾸, 보니까…"

"내가 보면 흥분되는 구나." 

능글맞은 눈웃음으로 싱긋 웃으며 형은 몸을 굽혀 내 오금을 접어 올렸다. 꼭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마치 내가 변태라도 된 것 같은 기분에 나는 반박은 못한 채로 고개를 잘잘 저었다. 그러나 형은 이미 내 허리를 반으로 접어 올린 채 벌어진 허벅지 사이로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헉, 숨을 멈추며 눈을 크게 떠보았지만 형의 부드럽고 촉촉한 혓바닥이 내 엉덩이 사이를 간질이듯 핥고 있는 감촉을 피할 수 없었다. 움찔거리는 구멍 안으로 살짝 혀끝을 집어넣었다가 쪽, 하고 빨아올리는 그 자극에 울컥 눈가가 뜨거워졌다.

"흣, 혀, 혀엉… 이런 건… 나 못해……"

왜 형이 내 엉덩이를 벌려 그 사이를 핥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이미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에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인지부조화를 겪고 있는 내 상황은 아랑곳하지 않고 형은 몇 번이나 더 사탕을 핥듯이 쪽 쪽 소리를 내어 내 민감한 곳을 빨아댔다. 고간을 긁듯이 혀를 세워 핥는 그 자극에는 결국 눈물이 터져 나왔다.

"흐… 하지 마, 이상해. 혀엉……"

"알았어. 쉬이, 울지 마."

형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마지막까지 내 아랫배에 쪽, 입을 맞추며 올라왔다.

나른하고 기분 좋은 아침이었고, 나는 썬룸에 서서 밖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고 있던 형에게 다가갔을 뿐이었다. 그리고 지난 밤에 형이 나한테 받고 싶다고 한 게 뭐였냐고 물었을 뿐인데, 왜 이렇게 된 걸까.

형은 거실에서 썬룸으로 넘어오는 문가의 탁자에 커피잔을 내려놓고 나를 들어다가 썬베드에 앉혔다. 그리고 갑자기 퍼부어진 키스와 함께 정신 없이 형을 따라서 끙끙거리며 입을 맞추는 사이에 옷이 벗겨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햇살 속에 완전히 알몸이 되어 있었다.

형은 내가 누워 색색 숨을 고르는 동안, 베개 아래로 깊숙이 손을 집어넣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후우, 준아. 네가 끼워줄래?"

형은 약간 땀이 났는지 이마를 쓸어 올린 뒤,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나는 썬베드 위에 거의 대자로 뻗어 숨만 내쉬고 있다가 손에 쥐어진 납작한 비닐을 얼굴 위로 들어보았다.

"아, 이거…!"

콘돔이었다.

이런 게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직접 본 것은 처음이라서 잠시 멍해졌다. 눈도 깜박거리지 않고 그걸 쥔 채 보고만 있자, 형은 내 가슴 위로 손을 뻗어 손바닥으로 가볍게 눌러 쓸면서 나를 재촉했다. 뾰족하게 솟은 좁쌀만 한 내 젖꼭지를 형이 손톱으로 살짝 긁어서 몸이 가볍게 튀었다.

"읏…! 그, 근데 형. 나 이거… 처음 만져보는데."

자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비닐 포장을 조심스레 뜯어내자, 내가 예상하지 못한 끈적한 재질의 무언가에 축축하게 젖은 고무줄 같은 것이 뭉쳐 나왔다. 그걸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슬라임이라도 되는 듯 손가락으로 쥐고 주물거리고 있자, 형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너를 너무 온실 속에서 키웠나 보다."

형은 붉어진 내 뺨에 입을 맞추곤 내 손에서 끈적이는 고무덩이를 가져갔다. 그리곤 능숙하게 허리를 세워 형의 빳빳한 성기에 그걸 밀어 씌웠다. 그 모습이 너무 어른스럽게 느껴져서 나는 선망의 눈길로 형을 바라봤다. 끝부분이 뭉툭하게 부풀어오른 형의 것은 핏줄이 툭 툭 튀어나와 무섭게 생겼지만, 얇은 고무 막을 금방이라도 뚫어버릴 것처럼 성이 나 있어서 멋져 보였다. 발끝이 자꾸만 오므라들었다.

"형, 그거… 나한테 넣을 거야?"

분위기를 봐서는 너무 분명한 수순이었지만, 저렇게 무섭게 생긴 흉물이 내 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걸 믿을 수 없어서 물어봐야만 했다. 형은 입술 끝을 유려하게 올려 웃으면서 응, 하고 낮게 대답했다.

이미 꺼덕거리는 그 끝을 내 허벅지 안쪽 살에 밀어붙이면서 내 몸을 움찔거리게 위협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형의 목소리는 달콤했다.

"준아. 우리, 평생 함께 할 연인이 되기로 했잖아."

"응… 그, 그랬어."

"그건 곧 부부가 되는 거니까, 첫날밤을 치러야지."

하지만 형, 지금은 너무 밝은 아침인데.

만약 우리가 지금 배달 음식을 시키기라도 했다면, 날아오던 드론이 유리천장 밖에서 우리 두 사람의 야릇한 장면을 목격했을 수도 있었다. 그게 아니라도 저 멀리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새들은 이미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 눈치챘을 수도 있었다. 내 무릎을 접어 올리며 바짝 허리를 붙여오는 형의 땀에 젖은 복근이 전부 선명하게 보이는 한낮의 정사였다.

내 몸 위로 상체를 굽힌 형은 내 턱에 입술을 붙였다가 떼며 맹세하듯 속삭였다.

"기분 좋게 해줄게, 준아."

"아읏!"

눈 앞이 팽팽 돌만큼 충격적인 고통이었다. 내 엉덩이 사이를 찢을 것처럼 굵은 성기 끝이 몸 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그 순간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생 눈물이 쏙 나오는데 형이 혀를 내어 내 눈물을 핥아버렸다.

입술을 벌린 채 벌벌 떨고 있으니 내가 가여웠는지 형은 내 이마와 콧잔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연신 내게 내 강아지 착하다, 예쁘다, 자상하게 말해주었지만 그런 부드러운 위로는 말뿐이었다.

내가 허벅지를 오므리려고 할 때마다 무릎을 잡아 활짝 벌리며 허릿짓을 이어나갔다. 꾸욱 꾹 밀고 들어오는 것이 얼마나 큰지, 삽입의 순간이 꼭 영원 같았다.

형은 여태 내게 거짓말을 하는 법이 없었는데, 아무리 참아봐도 ‘기분 좋게’ 될 것 같은 일이 아니었다. 이미 뺨을 축축하게 적실 정도로 내가 울고 있었는지 형은 반쯤 밀어 넣던 것을 멈추며 내 머리 옆으로 팔을 짚어 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아…… 미치겠다."

형의 혼잣말이 어떤 의미로 미치겠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프고 놀라서 거의 반쯤 정신이 나가는 중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엉덩이에 힘이 들어갈 때마다 뻑뻑하게 끼워진 그 크고 굵은 흉기에 의해 찌르는 통증이 느껴졌고, 동시에 형도 자극을 받아서 단단해진 아랫배로 숨을 참으며 몸을 지탱했다.

형이 내 젖은 눈가에 입술을 비비며 속삭였다.

"후, 거의 다 들어갔어. 힘 빼도 돼."

"으읏…, 거어짓말."

흘겨보며 형의 눈치를 살피자, 형은 젖은 내 속눈썹을 엄지로 닦아내며 씩 웃었다. 너무 청량한 미소라서 내가 방심했던 모양이다. 형은 웃음기 끝에 중얼거렸다.

"많이 컸네, 한준."

그리고는 바로 쾅! 허리를 쳐올렸다. 나는 내뱉으려던 숨을 삼키며 내 혀를 깨물 위기였는데, 그럴 것을 이미 예상했던 것처럼 형의 왼쪽 엄지가 내 입 안에 들어와 혀를 부드럽게 누르고 있어서 신음만 새어 나왔다.

흐으…… 끊어질 듯 가느다란 신음을 내뱉으며 정신을 차리느라 눈을 깜빡이고 있으려니 평소보다 붉게 달아오른 형의 얼굴이 눈 앞에 들어왔다. 긴 속눈썹을 움찔거리며 후우, 숨을 내뱉는 형의 표정이 잔뜩 상기되어서 어쩐지 낯설어 보였다.

처음 느껴보는 희열에 어쩔 줄 모르는 소년의 얼굴이었다.

"하아, 꿈만 같아."

몸이 이어진 채로 속삭이는 형의 목소리에 나는 여태까지 아프다며 낑낑거리던 것도 잊고 손을 뻗어 형의 목을 끌어안으며 입술을 부딪혔다. 몸 안으로 쿵쿵 울리는 소리가 내 것인지 아니면 형의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기뻐서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이내 형이 내 혀를 감아 키스하며 허리를 천천히 뒤로 뺐다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부터는 다시 앙앙 울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형의 목을 감싼 팔을 푸르지는 않았다.

따사로운 햇살이 땀방울 하나까지 보석처럼 아름답게 비춰주는 썬룸 안에서 우리는 부끄러움을 잊을 만큼 오래 몸을 섞었다. 이미 나는 몇 번이나 절정에 다다라서 몸을 겹친 아랫배는 물론이고 가슴까지 튀어 오른 정액과 땀으로 온몸이 젖어 있었다. 힘 빠진 다리가 너덜너덜해져서 형이 위치를 바꿀 때마다 발목이 덜렁거리며 흔들렸다.

내가 그렇게 몇 번이고 내보낼 동안 형은 한 번도 사정하지 않았는데, 나와 다르게 조금도 지쳐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붉어진 입술로 내 손가락을 깨물고 귀와 어깨를 핥으면서 오랫동안 아주 느릿하게 몸을 쳐올려 내 뱃속을 쾅 쾅 찧어댔다.

"으응, 형… 그만……."

대답처럼 내 가슴팍 사이에 입을 맞추면서 형이 내 위로 깊이 무게를 주며 허리를 끼워 맞춰 왔다.

흐읍, 숨을 참으며 눈을 동그랗게 뜨자 형이 녹듯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아직 더 들어올 것이 있었다니, 경이로울 수준이었다. 뱃속 깊은 어딘가를 꾹 찔러오는 단단한 그 끝이 어디에 있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안쪽 점막을 찢는 것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그대로 멈춰 있기를 잠시, 갑자기 투둑- 하고 무언가가 뜯어지는 소리가 났다. 내 뱃속의 내장이 끊어지는 소리는 아닐까. 온몸을 취하게 했던 은은한 쾌락 사이로 선명하게 고통이 느껴졌다. 왈칵 눈물이 쏟아지자, 형은 얼른 몸을 숙여 내 눈가에 쪽 쪽 입을 맞췄다.

"이런, 자제하려고 했는데. 읏, 잘 안 되네."

난감하다는 듯이 살포시 웃는 형의 얼굴이 눈물로 뿌얘졌다. 대체 이게 뭐냐고 묻지도 못하고 입술만 뻐끔거리고 있는 내 젖은 머리카락을 이마 뒤로 넘겨주며 형이 내 허리를 감싸 안고 다독였다.

"괜찮아. 고양이과 짐승들은 이렇게 커진 상태로 오래 사정하거든. 예전에 같이 책에서 봤지?"

"흣, 그런 거… 몰라아… 흐아아…"

결국 뱃속이 뜨겁다 못해서 타는 것 같은 느낌에 겁을 먹은 내가 울기 시작하자, 형이 눈에 띄게 당황하며 쉬이- 하고 속삭이면서 나를 달랬다. 구멍 사이로 들어와서 계속 움직이며 쾌락 점을 누르던 형의 성기가 이상할 정도로 커져서 뱃속이 빠듯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게 마냥 아프기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고통 속에 낯선 쾌락이 섞여 있는 게 더 무서웠다.

이내 뱃속으로 울컥 울컥 무언가가 퍼져 나가는 것이 느껴져서 형의 목덜미를 꼭 껴안은 채 눈을 감았다. 접합부 사이로 끈적이며 무언가가 새어 나왔고, 형은 "아, 결국 찢어졌네." 하고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품에 안겨 바들바들 떠는 내 머리를 감싼 채로 형이 다정하게 말했다.

"그래도 이번엔 임신하지 않도록 노력했으니까, 걱정할 것 없어."

응…? 멍하니 눈을 떠서 어깨를 밀어내며 얼굴을 마주보자, 형은 긴 사정으로 눈가를 찌푸리며 뜨거운 숨을 내뱉고 있었다. 그런 형의 얼굴이 무척이나 섹시해서 고통이 조금 참을 만 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형과 내가 어릴 적에 봤다는 동물 도감 책에 그런 동물의 생식기와 관련된 내용이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형의 말에 의하면 이대로 한참은 더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느릿하게 숨을 내쉬며 참아냈더니 조금씩 고통과 이물 감에 익숙해졌다.

천천히 형이 내 엉덩이를 받혀서 몸을 움직였고, 내가 형의 위에 엎어진 채로 누울 수 있도록 자세를 바꿨다. 형의 몸에 짓눌러서 내가 힘들어지지 않도록 배려한 것 같았다.

형은 여전히 눈물에 젖은 내 퉁퉁 부운 눈가를 가만히 감싸주며 기분 좋은 듯이 웃었다. 내 몸은 여전히 형의 것이 꿰 뚫린 상태였지만 그래도 눈가가 붉어진 채로 나를 바라보는 형과 눈이 마주치니 기분이 좋아져서 배시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형이 나한테 받고 싶은 게, 으응… 이거였구나."

우리 형은 설 표범이지만, 남자는 다 늑대라던 옛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에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아, 하고 이제서야 뭔가 생각난 듯한 표정을 짓더니 손을 뻗어서 침대에 걸쳐진 형의 청바지 뒷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걸 네가 나한테 끼워줬으면 해서."

콘돔이라면 이제 못 해, 하고 질색한 표정으로 형의 손을 바라보니 빛나는 반지였다.

"아… 이거… 내 거?"

익숙한 그 디자인에 습관적으로 형의 가슴팍에 올려진 내 왼손을 내려다보니 내 반지는 그대로 내 손가락에 여전히 끼워진 상태였다. 나는 그제서야 형이 내 졸업식에 나에게 선물했던 반지가 세트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것보다 조금 큰 반지를 건네 받아 만지작거리며 관찰하고 있을 때 형이 조곤조곤 말했다.

"…우리가 처음으로 하나가 되는 날에 같이 끼고 싶었거든."

내 엉덩이를 벌려 핥을 때에는 야릇한 표정을 짓던 형이 반지를 나눠 끼자는 말을 하면서는 부끄러운 기색을 보였다. 그게 왜 귀엽게 느껴지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형의 뺨에 겨우 고개를 들어 뽀뽀한 뒤에 형의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고마워."

형은 진심으로 감동한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의 손가락을 한참 말없이 바라봤다.

나도 형과 똑같은 반지를 나눠 끼게 되어서 감회가 새롭긴 하지만… 모두 형이 준비한 것이니까 '형이 나한테 받는 것'은 아니었다. 형은 내게 뭐든 해주는데, 나는 아무것도 해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형이고 형이 내 동생이었다면, 나도 멋지게 형을 챙겨줄 수 있었을 텐데. 연인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늘 형에게 받기만 하는 애물단지 동생이었다. 

"…나도 형한테 반지 같은 거 해주고 싶은데."

중얼거리는 내 말에 형이 작게 웃었다.

"네가 끼워줬으니까, 네가 준 거야."

"그런 거 말고…… 나만 해줄 수 있는, 그런 거."

뾰로통해진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형이 반지를 낀 왼손으로 내 뺨을 밉지 않게 꼬집었다. 찹쌀떡처럼 늘어나는 내 볼 살을 기분 좋다는 듯 만지작거리던 형이 두 손으로 내 뺨을 비벼 흔들며 피식 웃었다.

"그럼, 나중에…… 나중에 받을게."

형의 말은 꼭 나만이 형에게 해줄 수 있는 그런 특별한 게 있기는 하다는 말로 들려서 솔깃했다. 내가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자 형은 콧날을 내 코끝에 다정하게 비비며 두 손으로 내 엉덩이를 벌려 쥐었다. 그 손길에 안쪽 깊이 박힌 형의 것이 꺼덕이며 몸 속을 휘젓는 느낌이 들어서 허리가 바르르 떨렸다.

"아으응…!"

"나중에 네가… 아이라도 낳아주고 싶어지면, 나중에 그걸로 받을게."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형이 다시 몸을 뒤집었기 때문에 나는 형의 몸 아래에 다시 깔렸다.

내가 뭔가를 더 묻기 전에 형의 입술이 와 닿았다. 부드러운 키스가 이어졌고, 눈을 감은 형의 등 뒤로 여전히 햇살은 눈부셨다.

신비로운 설 표범인 형과 그의 반려인 내가 산 속 깊이 숨어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고, 일기장에라도 몰래 적어 놓고 싶은 날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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