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령반전 외전 : 우리 형은 설 표범 上
“준아, 이리 와.”
다정하게 나를 부르는 형의 목소리에 마음이 편해진다.
형을 향해 달려가자, 나를 한 품에 끌어안고 내 머리카락에 손을 넣어 기분 좋게 쓰다듬었다. 단단한 가슴팍에 이마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다가 실눈을 떠보니 하교하는 학생들이 다들 나와 형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애들은 모두 우리 형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작년에 졸업한 나의 형을 기억하고 있는 애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저 형의 미모에 홀려 있는 것이 분명했다.
대여섯 살 때만 해도, 우리 형이 남달리 특별히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저 내 눈에만 멋지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형처럼 되고 싶다고 늘 생각했기 때문에 내 눈에 동경의 대상인 형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형의 실루엣을 따라 은은하게 반짝이 효과가 따라다니는 것 같은 환상을 보는 것이 나뿐만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때쯤 같은 학년의 여자애들이 내게 인형이며 초콜릿이 든 봉투를 잔뜩 안겨주곤 했는데 당연하게도 내 것은 아니었고, 형에게 전달해달라는 간절한 부탁과 함께 건네준 것들이었다. 중학생이 된 나의 형에게 직접 러브레터를 보낼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조금 안심했던 것 같다.
형을 볼 때 나만 두근거리는 건 아니었어. 다들 그러는 거니까 당연한 거야.
형을 향한 나의 마음이 '이상한 감정'일 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야 형에게 열렬한 고백을 하는 그 수많은 아이들 중에 나 같은 남자애는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래도 크게 고민하지는 않았다.
나는 형에게 단 하나의 동생이니까, 그러니까 난 형을 특별하게 좋아할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런 생각이 나의 위화감에 방패막이 되어주었고, 형은 언제나 나에게 천사 같이 상냥하게 대해 주었다.
"준아, 아직도 너한테 선물 전달해달라고 말 거는 애들 있어?“
형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물었다.
그 당시 나는 드디어 중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에 형처럼 교복을 입게 된 것이 마냥 기뻤다. 그러나 형은, 소매와 옷 길이가 전체적으로 너무 커서 어정쩡한 사이즈의 교복을 입은 어수룩한 내 모습을 보면서 늘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날 보며 너무 위험한데, 하고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곤 했다.
혹시 내가 형과 다르게 너무 평범하고 못나서 창피한 건 아닐까? 초등학교에 이어 중학교도 같은 학교를 다니게 되었으니 우리가 형제임을 교내의 모두가 알 것이다. 나는 불안 섞인 눈빛으로 형을 올려다 보았다.
"아니. 왠지 모르겠는데 여자애들이 이제 나한테 말을 안 걸어."
"그렇구나."
"날 피하는 것 같기도 하고. 왤까, 형?"
"…글쎄."
내가 좋아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형은 내 뒷목을 쓰다듬었다. 형의 손가락이 피부 위를 스칠 때마다 나는 어깨를 움찔거리며 요상한 간지러움을 느꼈다. 그런 내 모습을 관찰하듯 바라보는 형의 눈매에 웃음이 깊어졌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형에 대한 궁금한 점을 내게 찾아와 귀찮게 물어보던 애들이 언젠가부터 나를 두려운 듯 쳐다보며 지나갔다. 오히려 나와 말을 하면 큰일이 나는 것처럼 나를 피하거나 인사도 겨우 하며 지나갔기 때문에 나는 형의 인기에 비해서 편하게 중학교 생활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형을 따라다니던 몇몇 연예 기획사 사람들은, 형이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는 우리 집 초인종까지 누르며 집요하게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꽤나 유명한 곳들도 있었는지 형이 곧 연예계에 데뷔한다는 소문이 떠돌아다녔다. 하지만 동생인 나는 그런 소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혹시나 싶어서 형에게 소문에 대해 물어보면, 냉담한 반응만 돌아왔다.
"그런 쪽에 관심 없어."
딱 잘라 말하니 더 물을 수도 없었다.
형은 나와 부모님이 아닌 타인과는, 두 마디 이상 말하는 법이 없는 조용한 성격이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축제나 파티는 당연히 불참했고, 스스로가 인기가 많은 것에도 늘 눈썹을 올리며 싫은 듯한 기색을 보이곤 했다. 뭐랄까, ‘인간’이라는 종 자체를 싫어하는 느낌이었다.
어느 날인가, 형과 손을 잡고 걸어서 하교하던 날이었다. 집 앞에서 형을 기다리던 여학생이 형을 발견하고 반색하며 다가오자 형은 내 손을 잡고 걷다가 멈춰 서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형을 꽤 오래 따라다녔던 누나여서 나도 그 얼굴이 눈에 익었다.
"…잠깐 여기 있어."
차분하게 속삭인 형이 내 손을 만지작거리며 아쉽다는 듯 느리게 놓곤, 혼자 걸어가 내게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거절의 말을 전했다. 나는 멀뚱히 서서 형이 그 누나를 비롯한 많은 추종자들을 쫓아내는 것을 지켜보며 자랐다. 내게는 그런 게 평범한 일상이었다.
형은 예외 없이 평등하게 거절했다.
하지만 형에게 고백해온 그 많은 사람들 중에 형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을까? 연예인인가 싶을 정도로 예쁜 사람도 있었는데.
"다시는 찾아오지 마세요. 접근금지 신청하기 전에."
싸늘한 형의 눈빛에 상대는 창백해져서 아무 말도 못하고 멈춰 섰고, 형은 내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아무도 근처를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대문과 현관문을 굳건히 잠갔다.
슬픈 일이지만 아주 어렸을 적 우리 아버지께서는 일찍 돌아가셨다. 그리고 형이 중학생이 되었을 때, 어머니께서도 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서로뿐이었다. 아마 그래서 형은 더 나를 과보호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내가 사춘기에 접어들 때에도 형은 나를 마냥 어린애 대하듯 했다.
"집에 갈 때 누가 말 걸면, 절대 대답하지 말고 형한테 전화해."
"어… 그치만 형은 수업 듣는 중이잖아."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 알았지?"
내 어깨를 꾹 쥐며 다정하게 묻는 형에게 나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런 형의 잔소리에 조금이라도 짜증을 내거나 투덜거리면, 형은 나를 안아 등허리와 엉덩이를 쓸어주며 달랬다. 그럴 때면 정말 나는 형 앞에서 꼬마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 봐야 고작 한 살 차이일 뿐인데.
중학생인 나와 고등학생인 형은 하교 시간이 달랐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늘 내가 형보다 두어 시간 먼저 집에 도착했다. 그러다 보니 혼자가 된 순간에 내게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들도 가끔 있었다. 대부분은 연예 기획사 관계자였다.
"저기, 안녕? 네가 정결고 1학년 한설 동생이지?"
"아… 네."
모르는 사람이 말 걸면 대답하지 말라고 했었는데. 나는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헉 숨을 들이켰지만, 자신을 유명 배우 권영도가 있는 소속사 사람이라고 소개하며 친절하게 웃는 그 남자는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그 당시 나도 권영도가 출연한 드라마는 몇 편이나 봤었다.
"그래. 너 참 귀엽게 생겼구나. 네 형하고 분위기는 전혀 다른데, 그래도 마스크가 괜찮네. 저 건너편 중학교 다니지? 한설도 거기 졸업했다던데."
"……네에."
대답하면 안 되는데, 하고 속으로 생각하며 주먹으로 내 머리를 콩 때렸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거의 울상이 된 나에게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명함을 건네며 교복 재킷 주머니에 적힌 내 이름을 흘깃거렸다.
"그래, 너는 준이구나. 한준."
그루 엔터테인먼트 로고가 박힌 고급스러운 재질의 명함에 '기획팀 팀장 이하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형은 보통 이런 식으로 명함을 받으면 웃는 얼굴로 다시 상대방에게 명함을 되돌려주며 필요 없다고 깔끔하게 말하곤 했었는데, 나는 그런 짓을 할 용기가 없어서 그저 명함을 만지작거리고 서 있었다.
"준아. 근처 카페에서 잠깐 얘기할까? 햄버거 가게도 괜찮고. 배 안 고프니?"
"어… 아뇨… 저는 저기… 이따가 형 오면 같이 저녁 먹을 거라서요…."
"형이 곧 오는 구나."
이하원 팀장이라는 사람은 어쩐지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길가를 두리번거리더니 나를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그날 저녁은 내가 형에게 배운 요리 중에 가장 자신 있는 김치찌개를 할 참이었다. 내가 맛있게 해주겠다고 형에게 나만 믿으라며 큰소리를 쳐놓은 상태라서, 가능하면 빨리 집에 들어가서 저녁 지을 준비를 하고 싶었다.
"저… 김치 썰어놓으러 가야 하는데……"
"그렇니? 저기 말이야, 실은 아저씨가 너희 형이랑 얘기하고 싶어서 무척 오랫동안 기다렸어. 작년부터 전화도 하고 그랬는데… 너희 형이 만나주질 않았거든."
속상한 표정으로 안경을 밀어 올리며 이하원 팀장이라는 사람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형이 가끔 타인들에게 쌀쌀맞게 구는 것은 사실이라서 조금 미안한 마음에 나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너희 형이 다른 기획사하고 계약한 적 있니? 구두 계약이라도 말이야."
"…가끔 저랑 외식하거나 영화 보러 갈 때 형이 구두를 신기는 하는데요, 그게 어떤 계약이 된 건지는 저도 잘……"
"아니, 아니, 서류 말고 그냥 대화로 약속한 기획사가 있어?"
"어…… 모르겠어요."
"그렇구나."
이하원 팀장은 실망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하다가 별안간 내 손을 꼭 잡았다. 움찔 놀라서 그에게서 손을 빼내려고 하는데 그가 친절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아저씨는 말이야, 너희 형이 꼭 세계적인 대 스타가 될 거라고 믿는단다. 내가 아이돌 하이레벨 멤버도 직접 하나씩 모은 사람이거든? 여태 정말 많은 애들을 데뷔시켰지만, 한설처럼 신비로운 마스크는 처음 봤어. 남다른 아우라가 느껴진다고!"
"…사실 저희 형이 좀 유난히 멋있기는 해요."
"그렇지? 일반인 중에서 눈에 띄게 잘 생겨서 데뷔한 애들 꽤 있지만, 그래도 촌티 벗으려면 카메라 마사지 한참 받아야 되거든. 그런데 한설은 이미 완성형 미남이야. 게다가 약간 서늘한 그 눈빛이며 발음 명확한 낮은 목소리, 큰 키에 체형 곧은 것도 정말 큰 장점이지."
"맞아요. 형은 몸매도 멋있어서 어릴 때부터 옷 테가 좋았어요. 학교에서 항상 키도 제일 컸거든요. 열일곱 평생동안 안 멋있던 적이 없어요."
"역시 그랬구나! 게다가 너희 형은 누굴 봐도 당당한 자세와 시니컬한 태도를 잃지 않더라. 그런 대담한 성격은 앞으로 세계적인 무대에 서게 될 때도 뛰어난 장점이 될 거다. 그것도 큰 재능이야."
"아, 우리 형은 원래 겁이 없고 용감한 성격이거든요. 그래서 그럴 거예요. 어릴 때부터 검도 했었는데, 작년에 전국시합도 나가고 그랬거든요? 검도 코치 선생님이 지난 번에도 집에 찾아오셔서 계속 검도 하라고 부탁하고 난리였어요."
"그런데도 한설이 안 한다고 했니?"
"네, 방과후 여유시간이 없어지는 게 싫다고 그랬어요. 형이 집에 와서 저 밥도 차려주고, 집안일도 다 하거든요. 그리고 저 과외도 해줘요. 그래서 아마 저 돌보느라 바빠서 그랬던 거 같아요."
"그렇구나. 그런 자상한 면도 있다니, 더욱 매력적이네."
생각해보니 내가 형의 미래에 걸림돌이 되는 것 같다는 생각에 시무룩해졌다. 모처럼 나와 생각이 잘 맞는 사람을 만나 형 자랑을 하는 것은 무척 즐거웠지만, 이야기를 하다 보니 형이 검도를 그만 둔 것도 나 때문이고 어쩌면 연예인을 못하는 것도 내 뒷바라지를 하느라 바빠서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죄여왔다.
"동생이 약점이라는 건가……"
이하원 팀장이라는 아저씨는 뭔가 중얼거리더니 다시 내게 웃는 얼굴을 했다. 내 어깨를 팡팡 두드리며 기운차게 말했다.
"친형이 멋지고 자상해서 참 좋겠다, 준아."
"네. 저희 형은 사실 요리도 잘해요."
아무리 우울해도 형에 대한 자랑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래? 하고 반색하며 흥미를 가지고 안경을 추켜올리는 이하원 팀장에게 나는 그 동안 형이 나에게 해주었던 요리 메뉴들을 읊어주었다.
어머니가 안 계시게 된 후로부터는, 형이 어머니 손맛을 그대로 재현한 된장찌개와 불고기, 제육볶음과 오징어덮밥, 김치찌개 등의 가정 식을 내게 꼬박꼬박 해 먹였다. 그리고 가끔 특식으로 파스타와 외국 식 고기조림 같은 것도 해주었다. 메뉴 이름이 어려워서 기억은 못하지만, 와인을 넣었다고 했는데 술 맛은 하나도 안 났다. 혹시 고기 먹다가 취하는 건 아닌가 걱정했던 게 우스울 정도로 고기가 야들야들 부드러워서 맛있기만 했다.
"와, 한설은 요리에도 재능이 있구나?"
"네. 우리 형은 못하는 게 없어요! 사실 노래도 엄청 잘 하거든요? 그런데 밖에서 노래를 부를 일이 없어서 다른 사람들은 몰라요. 저 잘 때 자장가도 불러주고, 제가 좋아하는 팝송은 기타 연주도 하면서 저한테 불러주고 그래요. 이렇게 말하면 못 믿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우리 형보다 목소리 좋은 가수를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노래를 잘한다니! 악기 연주도 가능하고, 음, 너무 좋은 정보구나.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너희 형은 엄청난 대 스타가 될 거야. 어쩌면 너희 형은 조물주가 신경 써서 만든 특별한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아닌 것 같은, 그런 매력은 흔한 게 아니지."
속사포처럼 내 말을 받아 대답하면서 이하원 팀장은 내 어깨를 쥐었다.
"준아. 한설은 꼭 우리 그루 엔터테인먼트로 와야 해. 너희 형의 매력을 십분 이해하고 충분히 발산할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는 건 우리밖에 없단다. 준이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어… 저는……"
"한설은 내가 캐스팅할 앞으로의 모든 스타들 중에 최고일 거라고 장담해. 그렇게 완벽한 마스크에 재능도 넘치고,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도 출중하지. 어떤 식으로든 변신 가능한 캐릭터야. 어쩌면, 정말 평범한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니까?"
"네에?"
나는 안경 렌즈 너머로 보이는 이하원 팀장의 예리한 눈빛에 어깨를 잔뜩 굳히며 긴장했다. 내 어깨를 꾹 쥔 그가 힘주어 말했다.
"뛰어난 미모를 지녔지만 누구로든 변신할 수 있는 얼굴! 그리고 초능력이라고 가진 것 같은 미스테리한 분위기… 정말 최고야. 정말이지, 비인간적인 매력이야."
침을 꿀꺽 삼킨 나는 덜덜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우, 우리 형은 평범한 인간이에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크게 나갔다. 꿈에 젖은 듯 희망찬 표정을 하고 있던 이하원 팀장이 응? 하고 되물었다.
나는 원래부터 거짓말에 지나칠 정도로 재능이 없었는데, 그런 내 능력에 비해서 숨기고 있는 비밀이 너무 컸다. 방심하고 있던 터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벼, 변신한다거나 그런 거 못해요…! 그냥… 그냥 사람이고… 표범이나 그런 건 절대… 절대 아니에요……"
거의 울먹이는 수준이었다. 나는 눈물이 가득 들어찬 눈망울로 이하원 팀장의 시선을 피하지 못한 채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금방이라도 형의 비밀을 들킬 것 같아서 두려웠다.
사실 내 형에게는 아주 특별한 비밀이 있었다. 우리 가족끼리만 공유하는 은밀한 비밀이었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형과 나만의 비밀이 되었다.
"무슨 얘기를 하는 거니?"
이하원 팀장은 내가 혹시라도 특종을 말할 까봐 기대하는 기자처럼 받아 적을 기세로 내 어깨를 쥐며 더 가까이 다가왔다. 호기심과 어떤 야망을 담아 내 말을 경청하는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긴장이 되어서 해서는 안 되는 어떤 말도 해버릴 것 같았다.
사실은 나의 형 한설이 폭설 내린 강원도의 어느 산 속에서 주워온 아이라거나, 신혼부부였던 부모님이 그 당시 갓난아이였던 형을 데려와 친아들로 키웠다거나, 그저 버려진 아이인 줄 알았던 내 형이 새하얀 설 표범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특별한 존재였다거나, 그런 평범한 인간이 아닌 나의 형을… 내가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뭐든 괜찮아, 준아. 아저씨는 입이 무겁단다. 말해보렴."
이하원 팀장이 내 어깨를 꽉 쥐며 속삭이듯 말했다. 덜덜 떨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있다가 나는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
"우, 우리 형은… 그러니까 저희 형은요…"
"……한준."
익숙하고 낮은 목소리에 내 어깨가 움찔 떨렸다.
내게 집중하고 있던 이하원 팀장은 나보다 더 놀란 것 같았다. 그의 등 뒤에 다가와 서 있던 내 형은, 뒤돌아보는 이하원 팀장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혀, 혀엉!"
괴롭힘을 당하고 있던 것도 아닌데, 위기의 순간에 왕자님처럼 나타난 형의 모습을 보니 기쁘고 가슴이 벅찼다.
"곧바로 집에 가 있으라고 했잖아. 왜 여기에 있어."
"아, 그게… 여기 이 팀장 아저씨께서…"
그때까지 이하원 팀장이라는 아저씨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그를 힐끔 바라보며 말하는데, 형의 시선이 내 어깨에 머물렀다.
내 팔을 잡아 제 품으로 끌어당기는 형의 힘에 이끌려 나는 형의 교복 재킷과 그 안에 입은 형의 스웨터에 코를 박으며 형에게 안겼다. 익숙하고 기분 좋은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내 옷에도 똑같은 섬유유연제를 쓰는데, 어째서 형한테서는 이렇게도 좋은 냄새가 날까. 하루 종일 안겨 있고 싶은 향기였다.
내 머리를 손바닥으로 감싸 안은 형의 목소리가 몸을 타고 울렸다.
"애 데리고 길에서 뭐 하시는 겁니까."
"아니, 한설 군. 잠깐 동생하고 얘기 좀 한 거니까 너무 경계할 거 없어요. 길에서 우연히 만난 건데…"
"우연히? 저희 집 바로 앞에서 기다리다가 만난 거겠죠."
"아, 그게, 한설 군이 도통 만나주질 않으니까 답답해서…"
"또다시 제 동생에게 말 거는 걸 목격했을 때는, 바로 신고 조치하겠습니다. 혹시라도 아동청소년 강제추행으로 조사 받게 된다면 커리어에 문제가 있을 테니, 조심하시는 게 좋겠네요."
"하, 한설 군! 한설 씨!"
당황한 이하원 팀장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형은 내 어깨를 감싸 품에 안은 채로 걸어갔다. 나는 형의 옆에 붙어 서서 열쇠고리처럼 달랑거리며 따라 걸으면서 힐끔거리며 형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언제나 형의 가슴팍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형과 키 차이가 났는데, 그건 다 형이 너무 큰 탓이었다. 밑에서 올려다보아도 숨 막히게 잘 생긴 형은 앞을 보며 냉담한 표정으로 걸었다. 그 표정에 비소로 내가 혼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형의 눈치를 살폈다. 조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혀엉… 저 팀장 아저씨 말이야, 나쁜 분 같지는 않는데……"
집 앞에 도착해 현관문 패스워드를 입력하고 지문 인식을 한 뒤에 형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대답 없이 문을 열고 나부터 집 안으로 들여보냈다.
뒤따라 들어온 형이 현관문을 닫자, 자동 잠금 장치가 몇 겹이나 철컥거리며 단단히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려왔다.
형의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아서, 거실에 우물쭈물 거리며 서 있었더니 형이 나를 빤히 내려다보다가 내 머리에 가볍게 입술을 붙였다가 떼었다.
"배고프지? 씻어, 저녁 차려 놓을 테니까."
"아, 저기, 형! 오늘은 내가 형한테 김치찌개 해주려고…"
"다음에 해줘. 오늘은 내가 할 테니까 어서 씻어."
형은 내 가방을 벗겨 바닥에 내려놓고 나를 욕실 쪽으로 밀었다. 어차피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내게도 요리할 기회가 있으니까 내일쯤 다시 시도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는데, 욕실 문 앞에서 형은 내 어깨 부분을 내려다보며 눈가를 찌푸렸다.
"한준. 씻기 전에 교복 벗어서 바구니에 넣어 놔. 바로 세탁해야겠다."
"어어, 그럴게."
이미 깨끗하게 드라이 클리닝 맡겨 논 것을 바로 꺼내 입은 첫날이었는데도, 형은 내 교복에 뭔가 더러운 것이 묻은 것처럼 말했다.
형이 만든 요리로 저녁을 맛있게 먹고, 두둑하게 배가 불러서 소파에 길게 누운 채로 선잠이 들었다.
그런 나를 형은 언제나처럼 안아서 방까지 옮겨 주었다. 물론 내 방이 아니라 형 방의 침대 위였다. 부모님이 떠난 이후로는 특히, 각자 방이 있어도 잘 때는 한 침대에서 둘이 같이 자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게 너무도 당연해서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친구 우정혁에게 그 사실을 어쩌다가 말했더니, 우정혁은 인상을 찌푸리며 걱정스레 물었다.
"그거… 좀 많이 이상한 거 아니냐. 다 큰 형제가 왜 굳이 붙어서 자?"
"이상한 건가……. 다른 집은 안 그래?"
"글쎄. 나는 누나가 있어서 상상도 못하겠지만, 형이어도 토 나올 것 같은데."
진지하게 대답하는 우정혁의 얼굴은 진심으로 일그러져 있었고, 나는 우정혁처럼 자신의 형제와 조금도 붙어 있기 싫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신기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형 품 안에 안겨 있으면 포근하고 마음이 편해져서 잠이 잘 왔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밤에도, 어머니가 뒤이어 세상을 떠나신 날에도, 나는 어김없이 형의 품에 안겨 있었다. 형은 훌쩍이며 우는 내 등을 말없이 토닥거려주고 내 머리를 감싸며 밤새 나를 지켜주곤 했었다.
그날도 선잠에서 깨어나 뒤척이는 나를 단단한 팔이 이불로 덮어 끌어안았다. 형은 낮은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렇게 교육을 해도… 사람 무서운 줄 모르고… 다른 남자한테 어깨도 내어주고 말이야. 이 강아지를 어쩌면 좋지, 응?"
몽롱한 의식 속에서 나는 그게 아니라고, 그 아저씨는 진짜 위험한 사람이 아닌 것을 내가 판단할 수 있어서 대화했던 거라고 말대꾸하고 싶었지만 너무 졸려서 입 밖으로 웅얼거리는 소리밖에 나가지 않았다.
형은 피식 웃은 뒤에 내가 다시 깊이 잠들 수 있도록 내 등을 일정하게 토닥거려주었다. 그리고 잠들기 전, 형이 내 뺨에 입을 맞추는 간지러운 촉감을 느꼈다.
***
그 뒤로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형과 같은 고등학교를 다니게 될 때까지 이하원 팀장은 단 한 번도 우리 집 앞으로 찾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쪽 사람들 사이에 어떤 소문이라도 돌았는지, 연예 기획사와 관련된 모두가 일절 발길을 끊었다. 그 덕분에 학교 정문 앞으로 낯선 사람이 찾아오는 일이 없어져서 편하기는 했다.
어차피 나는 그런 사람들이 형을 빌미로 말 걸지 않으면,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동네 남학생일 뿐이었다. 인기도 없었고, 학교 성적이 특출하게 좋지도 않고, 운동 신경도 그저 그렇고, 친구라고는 음울하고 늘 낮잠만 자는 부잣집 도련님 우정혁 뿐인 학교 생활이었다.
"웃기지 않냐. 너네 형은 나를 마치 도둑놈 보듯 한단 말이지."
우정혁은 우리 형과 교내에서 마주칠 때마다 그런 식으로 내 형을 모함했다. 아무래도 형이 너무 잘나서 시기하는 무리들과 비슷한 마음이 아닐까 싶다.
"무슨 소리야. 형은 가끔 나한테 너 안부도 묻고 그래."
"……방금 진짜 오줌 지릴 뻔했다."
우정혁은 어깨를 바르르 떨면서 겁 먹은 척을 했지만, 나는 그저 우정혁의 과대망상을 흘려 들었다. 우정혁이 형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서 인사할 때마다 형이 친절하게 우정혁을 바라보며 그래, 안녕, 하고 대답해주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았는데도 우정혁은 나의 천사 같은 형을 모함하는 것이다.
물론 지나칠 정도로 우리 형제를 귀찮게 하는 사람들에게는 형이 가끔 차갑게 응대할 때도 있지만, 우리 형은 기본적으로 다정한 사람이었다.
"야, 떡잎부터 다르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지? 꼬마 때부터 형은 항상 나한테 양보했었어. 선물 받은 모자나 샤프 같은 것도 다 나한테 줬다니까? 얼마나 착하고 멋지냐? 너는 이런 형 없지? 부럽지?"
"그래, 그래. 그분께서 너를 엄청 아끼시는 건 알지. 그래서 네가 이렇게 응석받이로 자랐나 보다."
"너는 부잣집 막내도련님인 주제에. 동네 양아치들하고 놀다가 일 년 꿇어서 친구도 없잖아."
"저기요, 그런 저밖에 친구 없는 불쌍한 분이 누구신데, 그런 말씀을…?"
"나, 나는 우리 형 때문에 사람 조심하느라 그런 거야! 나를 통해서 형한테 접근하려는 불순한 애들을 내가 미리 차단하는 거지. 보디가드처럼."
주변을 살피며 예리한 표정을 짓는 나를 보면서 우정혁은 심드렁한 표정을 했다.
"보디가드… 너 별명 흰둥이인 거 알고는 있냐."
"뭐?"
"정확히 말하면, 왕실에 입양된 흰둥이. 그래서 만져보고 싶어도 주인이 국왕이라 차마 못 만져보는 강아지래. 우리 누나가 그러더라."
우정혁의 누나는 우리 형처럼 한 학년 선배이기 때문에 가끔 우정혁을 통해서 형에 대한 소식을 전해주곤 했다. 우리 형이 교실에서 누가 말도 못 붙일 정도로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다고 알려준 것도 우정혁의 누나였다.
"왕실에 입양된 흰둥이… 너무 웃기지 않냐. 똥개 주제에 호강한다."
"이, 입양되기는 누가!"
나는 발작하듯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우정혁은 어? 하고 나를 돌아봤는데, 나는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고 말았다.
"우, 우리 친형제 맞거든? 입양된 거 아니거든?"
내가 생각해도 나는 비밀을 감추는 데에는 영 소질이 없는 것 같다. 우정혁은 누가 뭐랬냐, 하고 심드렁하게 고개를 돌렸지만 나는 내내 심장이 두근두근 뛰어댔다.
아름다운 나의 형이 인간이 아니라 설 표범의 모습을 한 특별한 존재이며 나와는 친 형제가 아닌 것을 내가 알게 된 건, 열 살 무렵이었다.
학교 뒷산으로 소풍을 갔었는데, 발을 헛디뎌 굴러 떨어진 나는 산 속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발목을 접 지른 것 같았고, 일어날 수 없었다. 나는 흙투성이가 되어서 떨어진 자리에서 크게 울지도 못해서 훌쩍이며 몸을 웅크렸다.
선생님과 동급생들이 나를 찾아 돌아다녔지만, 나를 쉽게 찾지 못했다. 그대로 산 속에서 죽게 될 거라는 생각에 겁 먹고 얼마나 울었던가.
그때 산 중턱을 단번에 휙 넘어온 하얗고 커다란 짐승이 내 앞으로 달려왔다. 그대로 산짐승에게 잡아 먹히는 줄 알고 숨을 멈춘 내가 굳은 채 올려다보았을 때, 신비한 회백색의 눈을 지닌 새하얀 표범이 내 앞에 멈춰 서서 거친 숨을 내뱉었다. 긴 발톱이 박혀 있는 두툼한 발이 내 몸 앞으로 다가왔다. 섬세한 표범의 무늬가 새겨진 꼬리가 흙 바닥을 채찍처럼 탁 쳤다. 그게 어쩐지 사람으로 치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느낌이었다. 검은 코를 킁킁거리며 내 몸을 살펴보던 그 커다란 짐승은, 어리고 왜소한 내게는 커 보였지만 다 자라지 못해 어린 테가 났다. 성체가 되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그 상냥하고 신비로운 설 표범은, 내가 눈을 두어 번 깜박거리는 사이에 사라졌다. 그리고 그 짐승이 있던 자리에 내 형 한설이 서 있었다.
"준아. 괜찮아? 무서웠지."
다정하게 나를 살피며 형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뺨을 쓰다듬었고, 안도감에 엉엉 울며 나는 형을 부둥켜 안았다.
그 뒤로 형에게 업혀서 산을 내려올 때까지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중에서야, 내가 소풍 도중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형이 교실을 뛰쳐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 부모님은 나를 앉혀두고 형의 비밀을 말해주었다.
눈 덮인 산에서 주워온 아름답고 신비한 아이, 그게 내 형 한설이었다.
***
"누가 귀찮게 하지는 않았어?"
형은 나를 조수석에 태워 주면서 다정하게 물었다. 내가 고개를 재빨리 끄덕이자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차 문을 닫았다.
형이 차 앞쪽으로 돌아 운전석으로 가는 동안 나는 가슴을 쓸어 내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거짓말은 정말 못할 짓이다. 특히 하나뿐인 내 형에게는.
형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로, 지금처럼 내가 하교할 때마다 나를 데리러 왔다. 정문 앞에서 매일 감격의 포옹을 하는 형제를 이제 모두가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우리 형제의 유별나고 애틋한 애정표현은 안 보면 서운할 일상적 풍경이 된 것이다.
그들에게 늘 봐도 적응이 안 되고 새로운 것은, 나날이 아름다워지는 형의 미모였다. 게다가 스무 살에 중형 세단을 몰고 다니는 형의 재력까지 사람들 시선을 잡아 끌었다.
형이 성인이 되고 더는 외삼촌이 우리의 법적 보호자가 아니게 된 후부터는, 여태까지 살던 집도 팔고 오피스텔로 이사 왔다. 우정혁이 '안전 가옥'이라고 부르는 우리의 오피스텔 건물에는, 한 번도 마주친 적은 없지만 정치계 인사도 살고 있다고 했다.
먼 친척들은 '큰놈이 죽은 부모 보험금을 펑펑 쓰는 것 아니냐' 의심하며 흉을 봤었는데, 사실 형은 부모님이 남겨준 유산을 모두 내 앞으로 돌려 놓은 상태였다.
"이건 전부 네 거야. 너는 그분들의 소중한 아이잖아."
그렇게 말하며 내 이름으로 된 계좌들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게 전부 합쳐서 얼마였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차피 보호자 허락 없이 내가 쓸 수도 없는데다가 평범한 고등학생인 내게는 새어보기도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형도 엄마 아빠의 소중한 아들이야. 내 형이잖아."
"그래. 그래도 너와는 다르지."
모두가 형을 우리 부모님의 친아들로 알고 있는데, 굳이 형은 그렇게 선을 그었다. 나는 그게 못내 서운했지만, 형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결국 형은 부모님의 돈은 조금도 쓰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미성년자인 동안, 두 분의 보험금은 우리의 학비와 우릴 돌봐주는 외삼촌의 운용비로 쓰였지만 유산은 그대로였다.
우리가 넓고 조용한 집으로 이사를 하거나 차를 몰고 다니며 유복한 생활을 하는 것은, 오로지 형의 능력이었다. 꾸준히 주식도 하고 가상화폐에 투자하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그게 이렇게 큰 돈이 되는 건지는 몰랐다. 교실에서 사다리타기 게임을 해도 늘 꽝이 걸리는 내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세계인 것이다.
대학에 들어간 형은 학업에 열중하면서도 나를 돌보는 데에 시간을 많이 쓰는데, 그 와중에 돈을 벌고 있다는 게 새삼 신기했다. 내게 용돈도 모자라지 않게 주기 때문에 매점에서 간식도 두둑하게 사 먹을 수 있었다. 형은 여러모로 나와는 정말 다른 사람이다.
다르기야 다르겠지. 형은 국왕이고… 나는 흰둥이니까…….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어디 들렀다가 갈까."
핸들을 돌리면서 형이 자상하게 물었다. 나는 안전벨트를 손 안에서 꾹 쥐어 만지작거리면서 흘깃 형 쪽을 올려다보았다.
"딱히 없는데… 형 안 바빠?"
"오늘은 괜찮아."
미켈란젤로의 조각상 같은 미색의 고운 얼굴로 내 쪽을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웃어주는 형을 마주보다가 나는 고개를 어색하게 돌려버렸다. 그 얼굴을 편안히 감상하기에는 내가 형에게 숨기고 있는 비밀이 하나 있어서 양심이 찔리기 때문이었다.
"흐음."
형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본 뒤에 다시 앞을 보며 운전했다. 내 모습이 혹시 수상해 보였나? 긴장해서 마른 입술을 축이며 눈만 깜빡이고 있자, 형이 신호에 맞춰 차를 세웠다.
커다란 손바닥이 내 이마로 다가왔다. 나보다 조금 더 체온이 높은 형의 손이 내 이마를 부드럽게 감싸듯 손을 대어본 뒤에 다시 핸들 쪽으로 돌아갔다.
"너 어제 저녁 밥 남겼던데, 몸이 안 좋은 건 아니지?"
"아… 어어, 그, 양이 너무 많아서… 나 안 아파!"
밝게 대답하려고 했던 것뿐인데 목소리가 너무 커졌다.
이하원 팀장 아저씨가 연락을 해온 것은 얼마 전부터였다. 처음에는 우연히 길에서 마주쳤는데 반가운 마음에 휴대폰 번호를 교환했고, 카페에서 평범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어제는, 교문 앞으로 나를 찾아왔다. 형이 바빠서 나 혼자 집에 돌아갈 때를 딱 맞춰 왔었다.
그 아저씨가 수제 케이크를 잔뜩 사주었기 때문에 그걸 먹어서 저녁 식사는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형에게는 그냥 놀다가 왔다고 했으니 아마 우정혁과 놀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 안 아프다니 다행이네."
"응…."
"그런데,"
"……?"
"내 강아지가 형한테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네."
역시 알았구나.
형은 옛날부터 눈치가 빨랐다. 내가 거짓말에 재능이 없는 것만큼이나 형은 거짓말을 알아채는 것에 천재적 재능이 있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우정혁은 '그냥 한준 네가 바보인 거다.' 라고 했지만, 그게 아니라 우리 형이 천재인 것이다.
차라리 일찍 들켜서 마음이 편했다. 나도 이제 삼 학년이라 진로 문제로 곧 보호자 면담이 정해져 있었고, 형과 함께 교무실에 가야 한다. 그 전에 형에게 미리 내 장래희망에 대해서 말해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오피스텔 주차장 안에 도착했을 때, 시동이 꺼진 차 안에서 나는 용기 내어 눈을 질끈 감고 입을 열었다.
"……나 있잖아 형, 연예인 해보고 싶어!"
바로 안 된다고 잘라 말할 것 같았던 형은 조용했다. 실눈을 뜨고 운전석을 바라보자, 형은 차분한 표정으로 핸들에 팔을 걸친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형의 고운 얼굴은 의중을 파악하기 힘든 무표정이었다.
잠시 길게 숨을 내쉰 뒤, 형이 차분하게 물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어?"
"어… 그게…"
"지난 달까지는 그런 말 없었잖아."
화가 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원래 형은 내가 뭘 잘못해서 혼낼 때에도 늘 차분했기 때문에 어쩌면 내 예상이 틀린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대답은 해야겠기에, 고개를 숙인 채 무릎 위에 올린 내 손을 꼼지락거리며 대답했다.
"응, 여태까지 생각 안 해봤는데… 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고… 의외로 그쪽에 재능이 있을 지도 모르잖아… 어차피 난 성적도 안 좋은데다가 따로 하고 싶은 일도 없으니까……."
사실 그건 부가적인 이유였다. 연예인이 되면, 제대로 내 손으로 돈을 벌어서 형한테 보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첫 번째였다. 그리고 연예인이 되는 걸 도와준다는 사람도 있고.
형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하려는 듯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흐음, 하고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 강아지한테 누가 그런 바람을 불어넣었을까."
중얼거리는 형의 혼잣말은, 내게 들으라고 하는 말인 게 분명했다. 나는 결국 실토했다.
"그… 이하원 팀장님이라고, 그루 엔터테인먼트에 계시는 아저씨인데, 형 혹시 기억나? 예전에 집 앞에서 형도 만난 적 있었는데!"
"……기억하지."
형은 부드럽게 대답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잘못을 고백할 때 너무 눈치를 보면, 형이 괜찮다는 듯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곤 했었다. 계속 말해보라며 형이 턱짓했고 나는 용기를 내어 말을 이었다.
"저기, 형이 모르는 사람하고는 말 섞지 말라고 했었지만… 그 아저씨는 우리가 전에도 알던 사람이잖아? 이번에 학교 앞에서 우연히 봤는데 너무 반갑기도 했고… 그래서 어쩌다가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분이 나한테 연예인 해보자고 했어! 카메라 테스트? 그거 받아보자고 하더라."
"그랬어?"
"응, 안 그래도 내가 형처럼 공부를 잘 하지도 못하고, 앞으로 뭘 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는데… 아저씨 말 들어보니까 연예인 도전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관심이 생기더라구."
막상 이야기를 꺼냈는데 형이 잘 들어주고, 긴장이 풀리니까 조금 신이 났다.
"아, 사실 난 그 아저씨가 또 그때처럼 형 귀찮게 하려고 하는 거면, 말 걸지 마시라고 단호하게 말하려고 했거든? 근데 그게 아니더라고. 이번에는 나를 캐스팅하려고 한 거였대. 저기… 음… 형 앞에서 이런 말하면 부끄럽지만…… 내 얼굴이 꽤 괜찮대."
신이 가장 공들여서 깎은 조각상 같은 형 앞에서 내 외모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우스운 일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래도 연예기획사에서 프로로 일하고 있는 사람의 의견이었기 때문에 내심 기뻤다.
형은 말없이 내가 조잘거리는 수다를 한참 듣다가 입술 끝을 올려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내 뺨을 손가락으로 간질이듯 쓸었다.
"예쁘지, 우리 준이. 많이 예쁘지."
형의 칭찬이 기뻐서 내 얼굴이 빨개지는 것이 느껴졌다. 심장도 지나칠 정도로 두근두근 뛰어댔다.
여태까지 형이 연애하는 모습은 한 번도 못 봤지만, 언젠가 형이 어떤 여자를 만나게 된다면 그 여자는 형의 이런 시선과 스킨십을 늘 받을 텐데 심장이 떨어져나가는 건 아닐까? 사실은 형이 영원히 나에게만 이렇게 다정했으면 좋겠는데, 그건 지나친 욕심일 것이다.
차에서 내려 집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형은 내 말에 대한 어떤 의견도 내놓지 않았다. 연예인 같은 허황된 꿈은 꾸지 말고 공부나 하라거나, 어디 그렇게 하고 싶으면 한 번 해봐라, 어느 쪽도 아니었다.
내가 씻고 옷을 갈아입는 동안 형은 평소처럼 식사를 차려주었고, 식탁 위에는 내가 좋아하는 반찬들이 가득했다. 메인 요리는 돼지고기 두루치기였는데 방금 볶아서 반질반질하게 양념이 배어 매콤한 향이 났다.
"뜨거우니까 조심하고, 천천히 먹어."
"응! 잘 먹겠습니다!"
"샐러드 적게 줬으니까 남기면 혼날 줄 알아."
금새 시무룩해지는 내 표정에 형이 작게 픽 웃음을 흘렸다.
채소를 너무 적게 먹는다며 형이 매끼니 작은 접시에 샐러드를 담아주는데, 그건 꼭 다 먹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게 눈 감추듯이 허겁지겁 고기를 집어먹고 있으니 형이 내 앞으로 물잔을 가까이 밀어주었다. 밥 먹다가 형과 눈이 마주쳐서 나도 모르게 눈웃음을 지었다. 형은 식탁 위로 손을 뻗어 내 입가를 맨손으로 닦아내고는 내가 밥 먹는 모습을 한참 바라봤다.
그때쯤 나는 차 안에서 형과 대화했던 것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형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가 밥공기의 마지막 한 숟갈을 비워내고 열심히 씹어 넘겼을 때, 형이 식탁에 팔을 올려 턱을 괜 채로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준아. 네가 만약 연예인이 되면… 스케줄이 많아서 무척 바쁘고 힘들 거야."
"어? 괜찮아. 나 생각보다 튼튼해, 형."
팔을 구부려 자신 있게 단단한 이두박근을 내보이며 말하는 내게 형은 작게 웃어주었다. 그리고는 조금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연예인이 되면 바쁘기 때문에 지금처럼 나하고 시간 보내기도 힘들 텐데, 그것도 괜찮아?"
"아……!"
그런 생각은 못 해봤다. 생각해보면 연예인 스케줄이 학교 시간표 같지는 않을 것이다. 출근이나 퇴근 시간이 일정하지 않을 테고, 급식처럼 제때 밥을 주는지도 모르겠다. 티브이에서 보면 새벽에 벤을 타고 이동하기도 하던데, 그러다 보면 집에서 형하고 같이 이야기하거나 식사할 시간이 없을지도 모른다. 형이 아니라 매니저가 되는 사람이랑 하루 종일 같이 지내게 될 것이다.
생각지 못한 문제에 울적해져서 내가 입을 다물고 생각에 빠져 있자, 형은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그것 봐, 준아. 더 천천히 생각 해보고…"
"스, 스케줄 조절해달라고 하면 괜찮을 거야!"
내가 급하게 말을 내뱉자, 형은 나를 바라봤다. 형의 시선에는 질타가 섞여 있지 않았다. 그저 걱정스러운 눈빛이었다.
"나 주제에 톱스타가 될 수는 없을 거고… 처음에는 그렇게 바쁘지 않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조금씩 적응해가면… 물론 나도 형이랑 둘이 있을 때가 제일 즐겁고 행복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렇게 지낼 수는 없잖아."
말하면서 생각해보니 사실이 그랬다. 형은 벌써 대학생이고, 나도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성인이다. 형에게 붙어서 응석만 부리며 살 수는 없는 일이다.
생각을 굳히고 나는 내 말에 스스로 납득하며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그러니까 언제까지 형이랑만 지낼 수는 없어. 나중에는 형도…… 결혼할 거잖아. 그러면 형은 형수님 되는 분이랑 살 테고, 나도 독립해야 하잖아. 그러니까 슬슬 연습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눈치를 보며 고개를 들었을 때, 형은 싸늘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저 내 착각이었는지도 모른다. 형은 고요한 시선을 내게 보내며 생각에 잠겨 있을 뿐, 딱히 기분이 나쁜 건 아닐 것이다. 흰 얼굴에 콧대가 높고 눈매가 길게 빠진 형의 매력적인 외모는 가끔 차가운 인상을 주곤 했다.
잠시 후 부드럽게 표정을 풀면서 형은 흐음… 하고 목을 울렸다.
"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네."
"어… 곧 졸업하면 나도 스무 살이니까, 나도 어린애 아니잖아."
형은 내 말에 잠시 표정이 굳어 있다가 입술 끝을 올렸다.
"그래, 그렇구나. 무슨 말인지 알겠어."
자리에서 가뿐하게 일어난 형은, 식탁 위를 치우고 평소처럼 나를 위해서 디저트를 내어주었다. 냉장고 안에서 차게 식힌 과일 푸딩이었다. 투명하고 탱글탱글한 푸딩 안에 오밀조밀하게 체리와 망고, 키위가 들어가 있는 그 디저트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명동의 유명한 베이커리에서 사 먹었었는데 그 뒤로 내가 푹 빠지자, 형이 레시피를 연구해서 직접 만들어주곤 했다. 신기하게도 가게에서 사는 것보다 형이 만든 것이 훨씬 더 맛있었다. 이미 내 입맛이 형에게 길들여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예쁜 찻잔에 담긴 홍차까지 내어주고 형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 먹어."
그리고는 주방에서 발길을 돌려 식탁에서 멀어졌다.
"전화할 곳이 있어서 서재에 가 있을 테니까, 천천히 먹고 있어."
"응."
나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형이 계단을 올라 서재가 있는 이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형이 사라진 뒤, 디저트 스푼은 쉴 새 없이 내 입 속으로 들어갔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형이 내 의견에 딱히 반대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스푼을 입에 문 채로 파자마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서 우정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야, 나 어쩌면 될지도 몰라!
학원도 안 다니고 같이 노는 친구도 나 밖에 없는 주제에 우정혁은 몇 분 지나서야 뭐가, 하고 짧게 답장을 보내왔다. 아마도 방구석에서 헤드폰 낀 채로 롤이나 하고 있었을 것이다.
- 연예인 하는 거!
이미 이하원 팀장 아저씨를 교문 앞에서 나와 함께 만난 적이 있는 우정혁에게는 따로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우정혁의 답장을 기다리지 않고 연이어서 계속 메시지를 보냈다.
- 나 카메라 테스트 갈 때 같이 갈 거지?
- 옷은 뭐 입지?
- 아, 은근히 떨린다. 형이 반대할 줄 알았는데 반응 괜찮은 것 같아.
내가 보낸 메시지를 한참이나 읽지 않고 쌓아두고 있다가, 단번에 읽은 우정혁은 내가 푸딩을 다 먹고 홍차를 다 마실 때가 되어서야 대답했다.
- 너네 형이 반대를 안 했다고? 의외네. 근데 왜 나는 너 이제 학교도 못 올 거 같냐.
우정혁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돼서 물음표를 하나 보냈다.
- ?
- 너네 형 연예 기획사 사람들 질색하던데, 괜히 그런 말 꺼내서 너 집에 감금되는 거 아니냐.
- 야, 우리 형을 뭐로 보는 거야?
강아지 캐릭터가 아르르, 짖으며 화를 내는 모습의 이모티콘까지 보내고 나자 우정혁은 '아님 말고.' 하고 답장하더니 그 뒤로는 또 내 메시지를 씹었다. 우정혁은 참 이상한 놈이다. 형이 나를 감금할 리가 없는데. 우리 형이 얼마나 자상한 남자인지 모르는 우정혁이 불쌍할 따름이다.
디저트 접시와 포크, 찻잔을 개수대 안에 넣어둔 채로 내 방으로 돌아가려다가 발길을 돌렸다.
"형이랑 좀 더 얘기해봐야지."
형의 서재와 드레스 룸이 있는 이층 계단으로 살금살금 올라갔다.
평소에는 형이 위층에서 혼자 공부를 하거나 주식 관련 일을 하기 때문에 나는 형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계단을 오르는 일이 거의 없었다. 어차피 표지에 영어가 쓰여 있는 두꺼운 책이 잔뜩 꽂혀 있는 형의 서재에는 재미있는 것도 없었다. 노트북도 있긴 하지만, 패스워드가 걸려 있어서 그걸로 게임을 할 수도 없다.
게다가 드레스 룸에 가봐도 형이 가진 옷은 전부 나한테는 터무니 없이 컸다. 형의 신체 사이즈에 맞춘 옷들은 몰래 빌려 입을 수도 없었다. 그러니 내가 이층에 갈 일은 아예 없는 것이다. 형이 딱히 내 출입을 금지한 적은 없었음에도, 내게는 금단의 영역 같은 느낌이 있었다.
형을 귀찮게 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그래도 '연예인을 해도 된다'는 확답을 얻어내고 싶었다. 계단을 올라 복도를 조금 걸어가자 형의 서재 문이 한 뼘 정도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노크를 하려고 손등을 가져다 댔을 때 서재 안에서 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군요, 서둘러 주시면 좋겠습니다."
전화를 하는 것 같았다. 휴대폰 너머 상대방의 얘기를 한참 들으며 형은 음, 하고 낮은 목소리를 낸 뒤에 말을 이었다.
"아뇨. 그 부분은 그대로 놔두는 게 좋겠습니다. 그 애가 마음에 들어 했던 부분은 최대한 보존하고 싶어서요. …네."
그 애가 누구지?
나도 모르게 대화 내용에 솔깃해져서 문가에 더 가까이 다가가며 귀를 가져다 댔다.
내가 서재 앞에 서 있는 것을 모르고, 형은 계속 통화를 이어나갔다.
"그건 일단 보류하죠. 네, 저야 그렇게 하고 싶지만… 평생 함께 살 연인이니까 그 애의 의견이 중요합니다."
문틈으로 보이는 형의 옆얼굴이 부드럽게 미소 짓는 것 같았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분명 형은 '평생 함께 살 연인'이라고 말했다.
……형한테 연인이 있었구나.
가슴 한 부분을 무거운 돌멩이로 꾹 짓누르는 것처럼 답답한 통증이 느껴져서 옷자락을 쥐었다. 왜 형은 연인이 생긴 걸 나한테 말 안 했을까. 그런 중요한 걸 내게 비밀로 하다니, 그게 너무 서운해서 눈가가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네, 그럼 모두 예정대로 진행해주시죠."
내가 잠시 멍해진 사이, 통화는 끊겼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고, 긴 목재 책상 앞에 앉은 채 휴대폰을 내려놓은 형과 문틈 사이로 눈 마주치고 말았다. 나쁜 짓을 한 것처럼 놀라 숨을 헉 들이마셨는데, 형은 다정한 얼굴로 싱긋 웃었다.
이렇게 순하고 착한 형의 통화 내용을 몰래 엿들었으니 나쁜 짓을 한 것은 맞는지도 모른다. 나는 나쁜 동생이다.
"언제 올라왔어? 왜 안 들어오고 거기 서 있어."
"아… 저기…"
"이리 와."
형은 다정한 눈길로 나에게 턱짓했다.
주저하면서 잠시 표정을 정리한 뒤에 나는 천천히 서재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혹시 어릴 때 자주 그랬던 것처럼 형이 무릎 위에 나를 앉게 해주려나 조금 기대했지만, 형은 자신이 앉은 등받이 의자 옆에 있는 쿠션 체어를 손짓했다.
일단 연예인 이야기를 하러 온 거니까… 형의 '연인'에 대한 건 머릿속에서 지워야지.
"왜 머리를 흔들어. 머리 아파?"
다정하게 내 뺨을 손등으로 쓸며 고개를 기울여 물어보는 형에게서는 조금도 화난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우정혁은 형이 나를 감금할지도 모를 만큼 그 일에 반대할 거라고 했었는데.
나는 아니야, 하고 말하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내가 갑자기 연예인 하고 싶다고 해서… 형 화난 거 아닌가 걱정돼서……."
"화 안 났어."
나지막하게 웃으며 형은 내 머리카락을 가볍게 흐트러뜨렸다. 마치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아예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게 안심이 되면서도 왜 못내 아쉬운 걸까. 형이 내 일에 대해서만 계속 생각하고 고민하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걸까?
형은 대기화면이 띄워져 있던 중앙 모니터 쪽으로 몸을 돌리며 무선 마우스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화면이 켜지고, 수치가 계속 변하는 그래프 같은 것이 가득 보였다. 형은 그 수치들을 확인하듯이 화면에 시선을 둔 채로 내게 말했다.
"그 얘기라면… 함께 기획사를 알아보는 걸로 하자. 엔터테인먼트 쪽도 분야에 따라 여러 곳이 있으니까, 네가 어떤 쪽을 원하는지 생각해본 뒤에 회사들을 비교 해봐야 할 거야. 하지만 일단 네가 이야기했던 곳이 있는 거 같으니 거기부터 가서 상담해봐도 될 테고. 일단 그렇게 정해두자."
"……반대 안 해?"
나도 모르게 불쑥 나온 질문이었다. 마치 형이 반대 해주기를 원하는 것처럼 들렸을 지도 모른다. 형의 관심을 바라고 엇나가는 행동을 하는 반항아처럼 보였을 까봐 귓불이 화끈거렸다.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는 형에게 바로 변명했다.
"아, 아니, 그게 저기… 우정혁 알지? 걔가 형이 반대 안 하냐고 물어봐서, 그냥……"
애꿎은 우정혁을 변명거리로 팔아서 미안하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형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내가 왜 반대하겠어. 준이 네가 하고 싶다고 했잖아."
역시 천사 같은 나의 형. 내가 원하는 건 뭐든지 다 들어준다.
그런데도 왜 나는 자꾸 기분이 이상하게 우울해지는 걸까. 그럴 리가 없는데도 형이 내가 모르는 '연인'에게 정신을 쏟느라 나 같은 것은 어떻게 되든 상관 없어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괜한 망상이고 심술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표정이 굳어졌다.
그런 내 마음을 모르는 형은, 낮게 숨을 내쉬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내 강아지가 어느새 다 커서 내게서 독립할 생각까지 하는데, 도와줘야지."
"……으응."
"너 잘 되면 바빠져서 우리, 금방 따로 살게 될 수도 있겠다. 많이 아쉽네."
형의 목소리가 조금도 아쉽지 않은 것처럼 들리는 건 왜일까. 어쩌면 사실 형은 나 같은 짐 덩어리를 빨리 치워버리고 형의 비밀 연인과 가정을 꾸리고 싶었던 것일 지도 모른다. …아니, 이건 비약이고 그저 내 상상일 뿐이다. 우리 형은 그렇게 매정한 사람이 아니다.
형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고, 나는 마음을 무언가로 콕 콕 찌르듯 따가운 기분을 느끼면서 형을 마주보고 어색하게 웃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
"한준, 너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냐."
"……내가 뭘."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책가방 끈을 꾹 쥐고 걸었다. 안 그래도 기분이 울적한데 곁에 다가와 걸으며 우정혁이 내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부잣집 도련님 주제에 운동장 안까지 비싼 외제차로 등교할 것이지, 꼭 학교 근처 버스정류장까지 버스를 타고 등교했다. 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샀는지 막대사탕을 꼬나 물고 있었다.
"뭐랄까. 음. 산책 나왔다가 주인 잃고 미아 된 흰둥이 표정?"
"그게 뭐야."
우정혁은 불쑥 레몬 맛 막대사탕을 건넸다. 원 플러스 원이었던 모양이다. 지금은 내키지 않지만 점심 먹고 나서 후식으로 먹고 싶을 수도 있으니 사탕을 받아 교복 주머니에 넣었다. 우정혁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고 보니 너네 형 차가 안 보이네. 오늘 너 혼자 왔냐?"
"……어. 형이 요즘 좀 바빠서."
대학교 수업하고 일 병행 때문에 바쁘다고 했지만, 사실은 데이트 때문에 바쁘겠지. 속으로 빈정거리며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흐음, 별일이네. 너네 형은 아무리 바빠도 네 기사 노릇은 꼭 하시던데."
"아, 귀찮아! 말 걸지 마."
"게다가 너는 오늘따라 쓸데없이 예민하고. 흐음."
우정혁은 마치 본인이 탐정이라도 된 것처럼 머리를 굴리는 표정을 지었다.
괜히 짜증나서 성큼성큼 발걸음을 빨리 해서 운동장을 가로질렀더니 우정혁이 두어 걸음 만에 내 옆자리를 따라잡았다.
형과의 지난 밤 대화가 떠올라서 울컥했다. 서재에서 나가기 전 나에게 형은 “당분간 일이 있어서 바쁠 것 같으니까 기획사 방문은 친구하고 다녀와.” 하고 말했다. 나랑 있는 것보다 바쁜 일이라니? 우정혁 말대로 형은 아무리 바빠도 늘 나를 최우선으로 생각했었는데…….
내 미간이 잔뜩 찌푸려지는 게 느껴졌다.
"형이 카메라 테스트하러 같이 못 간대. 할 수 없이 너랑 가야 돼."
우울한 내 중얼거림에 우정혁이 코웃음 쳤다.
"할 수 없이? 내 금 쪽 같은 시간을 친히 내어주는 건데, 어디 감히…!"
"너 어차피 주말에 할 일 없잖아. 요즘 너네 누나 베이킹에 취미 들려서, 집에 있어봤자 설거지 보조나 한다며."
"그건 그렇지."
우정혁은 막대사탕을 쫍 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되는 연예기획사 오디션 날에 그나마 우정혁이라도 있으니 혼자 가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기는 했지만, 형이 함께 가주지 않는 것은 내게 충격이었다. 정말 나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그 전화 통화로 말하던 '연인'에게로 전부 넘어가버린 건 아닐까.
나는 수업을 들을 때에도, 쉬는 시간이나 체육시간에도 내내 그 생각에 우울했다.
나의 카운슬러 우정혁은 점심 시간에 우울한 내게 특별히 핫 초콜릿을 사주었다.
"……형한테 사귀는 여자가 생긴 것 같아."
"그러냐."
일생일대의 대사건인데도 불구하고 우정혁은 인스턴트 핫 초코에 담긴 마쉬멜로를 스푼으로 골라먹으며 심드렁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내가 눈을 부릅뜨며 쳐다보자, 우정혁이 도리어 내게 물었다.
"그게 뭐 그렇게 심각해질 일인가? 너네 형 인기 많은 건 네가 제일 잘 알잖아. 게다가 이제 명문대 학생이겠다, 돈도 많겠다, 그 외모에 애인 없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냐."
"그…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태까지는 사귀는 사람 없었단 말이야! 그래서 나는 너무 놀라서… 기분이 이상하기도 하고… 속이 울렁거리고…"
"울렁거리는 건 네가 급식 많이 먹어서 그런 거고. 여태 네가 몰랐을 뿐 계속 연애하고 있었을 지도 모르지. 너네 형은 고백도 많이 받잖아."
"그랬을 리가 없어! 형이 누구 사귄다는 말 한 적 없단 말이야."
우정혁은 내 말에 픽 웃으면서 되물었다.
"너네 형이 누구 사귀면, 너한테 꼭 얘기해야 돼?"
"……어?"
"그렇잖아. 동생한테 일일이 연애 보고할 이유가 뭐가 있어."
우정혁의 말이 맞다. 꼭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없고, 형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우정혁의 말에 납득해서 입을 다물었지만 삐친 어린 아이처럼 입술이 비죽 튀어나왔다.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따갑지.
형은 내가 평소처럼 급식 반찬 사진을 찍어서 보냈는데도 답장이 없었다. 오늘 준이 좋아하는 반찬이네, 나물 남기지 말고 먹어, 맛있게 먹어, 보통은 그렇게 바로 답장을 꼭 해주는 편인데 메시지를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정말 수업이나 일로 바빠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왠지 얼굴 모르는 어떤 여자와 데이트를 하거나 전화로 애정표현을 하느라 나에게 신경을 못 쓰는 것 같단 확신이 들었다.
도대체 어떤 누나일까.
형은 교내 유명한 미인이 말을 걸어와도 싫어했다. 발레 콩쿠르에 나가고, 티브이 광고에도 나오는 엄청 예쁜 누나가 계속해서 형에게 고백을 해왔는데도 거절했다. 상심한 그 누나가 남들 다 보는 데에서 악담을 퍼부어도 무시했다. 그때 나를 비롯한 많은 애들은 그런 생각을 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여자를 원하기에 저러는 걸까? 누가 한설의 이상형일까?
하지만 결론적으로 형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 누구의 고백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대학에서는 다를지도 모르지.
형은 정말로 바쁜 것인지 내 저녁 밥도 포장해서 냉장고에 넣어둔 채로 저녁 늦게까지 안 돌아오기를 며칠이나 반복했다.
***
나는 결국 우정혁과 둘이서 그루 엔터테인먼트 본사까지 오게 되었다.
"야, 예쁜 사람 진짜 많긴 하다."
우정혁은 쉴 새 없이 속삭이며 깊은 생각에 빠진 내 팔을 툭툭 쳤다. 저 사람도 연습생일까, 저 사람은 모델 같다, 로비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흘깃거리며 우정혁이 자꾸 말을 걸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안 데려오는 건데 싶다가도 우정혁마저 없으면 떨려서 죽을 것 같기는 했다.
"조용히 좀 해, 자꾸 두리번거리지 마, 창피하잖아…!"
"야. 이런 것조차 창피하면서 어떻게 연예인을 하냐."
나는 이미 민망해서 붉어진 얼굴로 우정혁을 열심히 노려봤지만, 우정혁은 그런 나를 신경도 쓰지 않고 여전히 기획사 건물 안을 구경하느라 바빴다. 사실 나도 화려한 미술관처럼 생긴 건물 인테리어와 가끔 지나가는 연예인 같은 사람들이 신기하기는 했지만, 오디션을 앞두고 있으니 긴장되어서 얌전히 무릎을 모으고 앉아 있었다.
"아, 준아! 많이 기다렸지."
이하원 팀장 아저씨가 안쪽 엘리베이터 문에서부터 빠르게 걸어 나왔다. 나와 우정혁이 일어나서 꾸벅 인사를 하자 반가운 표정으로 내 어깨를 토닥거렸다.
그는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아. 실은 말이야… 네 형이 전화했었어."
"우, 우리 형이요?"
요즘엔 형이 바빠서 아침에 얼굴도 못 볼 정도인데다가 내가 카메라 테스트 받으러 가는 날이라고 했던 것도 기억 못하는 줄 알고 있었는데.
어쩌면 전에 이하원 팀장 아저씨한테 길에서 화를 냈을 때처럼 이번에도 반대했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올려다보자 아저씨는 웃으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예나 지금이나 한설 군은, 칼 같은 성격이더라. 예의 바르게 말하는데도 왠지 무서워서 자꾸 말이 안 나오는 거 있지. 전화 온 김에 혹시나 싶어서 살짝 다시 데뷔 제의해봤는데… 이번에도 단번에 퇴짜야. 뭐, 그 성격을 몰랐던 건 아니고, 너무 아쉽기는 하지만… 일보 후퇴해야지."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잇던 아저씨가 내 쪽을 보며 밝게 웃었다.
"그나저나 한설 군이 동생 잘 부탁한다고 하더라."
"……어, 정말요?"
"그래. 너 있는 그대로 잘 봐달라고 그러더라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이하원 팀장 아저씨는, 형제나 자매가 둘 다 연예인인 사람들의 예시를 들면서 연예인으로서의 기질은 유전인 경우가 많다는 말을 했다. 그래서 핏줄이 무서운 거라고 말하며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사실 그 말에 뜨끔했다. 우리 형은 정말 재주가 많지만, 나는 형과 친 형제가 아닐뿐더러 형과 달리 평범한 인간이다. 어쩌면 팀장 아저씨가 내게서 형과 비슷한 점을 바라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메라 앞에 경직된 자세로 서 있으니, 팀장 아저씨가 데려온 신인개발팀 매니저라는 여자분이 와서 먼저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적 사항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는데 뭐라고 대답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긴장을 풀기 위해서, 내 가방을 들고 구석에 앉아 있는 우정혁만 계속 쳐다봤던 것 같다.
본격적인 오디션을 하기 앞서, 카메라 뒤쪽으로 신인개발 팀의 팀장이라는 사람도 도착했기 때문에 무척 긴장되었다. 두어 명의 스태프가 문을 열고 인사를 꾸벅 하며 팀장에게 뭔가 소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노, 노래부터 하겠습니다."
준비해온 노래를 몇 소절 부른 뒤에 눈을 떴더니, 팀장 아저씨와 매니저라는 여자분의 표정이 미묘해져 있었다. 신인개발팀 매니저가 휴대폰에 뭔가 메모를 한 뒤에 나와 눈이 마주치자 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한준 군. 잘 들었습니다. 본인 노래 실력은…… 스스로 알기 어려운 법이죠."
예전에 우정혁이 나보고 “너 음치라고 생각해본 적 없냐?” 하고 진지하게 물었을 때에도 나는 별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어릴 때부터 집에서 내가 노래를 흥얼거릴 때마다 형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고, 뺨을 살짝 꼬집으며 노래도 귀엽게 잘한다고 칭찬해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형의 평가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에 내가 평균 이상의 노래 실력은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 그렇지, 참. 대사 준비해온 것도 해볼래?"
이하원 팀장 아저씨는 내 노래를 듣고 난 뒤에 왠지 모르게 넋이 나가있다가 다급하게 말했다. 아저씨가 메일로 드라마 대본에서 발췌한 것 같은 대사 몇 개를 보내줬었다. 대사 옆 괄호 안에 인물의 감정 표현을 설명해주는 글이 적혀 있었다.
밤새 연습해왔기 때문에 나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카메라 앞에서 슬픈 표정을 지으며 외워온 대사를 읊었다.
"제가, 제가 훔친 게 아니에요. 믿어주세요. 저는 그때 잠, 잠들어 있었어요. 다른 사람들이 어… 뭐라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범인이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형사님!"
긴장해서 더듬거린 부분도 있었지만 그래도 대사를 빼먹지 않고 다 말했기 때문에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카메라 테스트 날짜가 정해진 뒤부터 나름대로 연기 수업에 관한 책을 읽으며 연구했던 것이다.
대사가 끝난 뒤, 이하원 팀장 아저씨와 신인 개발팀 매니저를 쳐다봤지만 두 사람 다 아무 말이 없었다.
"저기, 다 했는데요…?"
먼저 말을 꺼내봤지만, 그래도 정적이었다.
그때 카메라 뒤쪽 벽에 서 있던 누군가가 풋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누군가가 나를 비웃는 것 같아서 기분이 상했는데, 밝은 조명이 중앙의 내 쪽을 향해 있어서 웃는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 사람이 천천히 카메라 앞쪽으로 걸어 나오고 나서야,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배우 권영도였다.
드라마 속에서나 보던 사람을 눈 앞에서 만나니 신기한 마음에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나를 비웃어서 화가 났던 마음도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권영도는 팔짱을 낀 채로 빙그레 미소 짓더니, 이하원 팀장 아저씨 쪽을 향해 말했다.
"하원 팀장이 데려왔어요? 이 친구, 여러모로 참 다양하게 재능이 없는 편이네요."
일부러 확인하지 않아도 나에 대한 평가인 것을 알 수 있어서 우울해졌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뜨거워진 눈을 깜빡 거리고 있는데, 권영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런데도… 뭔지 모를 매력이 있네."
그의 목소리에 즐거움이 느껴졌다. 기대에 찬 눈을 들어서 바라보자, 권영도가 다가와서 내게 악수를 청했다. 나는 두 손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흐음, 열아홉 살이라고 했나?"
권영도는 이번에도 이하원 팀장 아저씨 쪽을 향해 말했지만, 내가 바로 대답했다.
"네! 곧 졸업합니다. 몇 달만 지나면 저도 스무 살이에요."
"…그래요? 이쪽 업계는 무엇보다 매력이 있느냐가 가장 중요하니까… 같이 일해보죠."
씩 웃으며 내 머리를 가볍게 두드리는 권영도에게 나는 몇 번이나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감격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정혁에게 돈 가스 정식도 사주었다.
소스를 입가에 묻힌 채로 우정혁은 중얼거렸다.
"노래랑 연기를 그렇게까지 못하면, 그것도 재능이 되는 구나."
"뭐래. 나 아까 합격 받은 거 못 봤냐?"
"그러니까 하는 말이다."
우정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세다, 말세, 하고 중얼거렸다.
***
형에게 이 기쁜 소식을 빨리 전하고 싶어서 어디냐고 메시지를 보내봤더니, 곧 집에 도착한다고 했다. 오피스텔 정문 앞으로 마중 나가겠다고 했더니 형은 추우니까 집에 들어 가 있으라고 답장했다.
"아, 숨어 있다가 깜짝 놀라게 해줘야겠다!"
나는 들뜬 마음으로 오피스텔 정문 뒤쪽 벽에 숨어서 형을 기다렸다.
평소에 형이 타고 다니는 검은 세단을 아무리 기다려도 봐도 오지 않았다. 주차장 쪽으로는 다른 차들만 계속해서 들어갔다. 어디쯤이냐고 다시 물어볼까 싶어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데, 정문 앞에 은색의 낯선 차가 멈춰 섰다. 그리고 그 안에 익숙한 형의 옆 얼굴이 보였다.
"어…?"
운전석에는 여자가 앉아 있었다.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자가 싱긋 웃으며 무언가 말하자 형도 그녀를 마주보며 웃는 것 같았다.
어깨에 힘이 탁 풀렸다.
……형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저렇게 웃어주는 구나.
눈 앞에서 형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어서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다가, 형이 차문을 여는 것을 보고 들킬 것 같아서 벽 뒤로 몸을 반쯤 숨겼다.
형은 차에서 내려 열린 문을 짚은 채로 운전석의 여자에게 인사했다.
"고마워요. 일부러 태워다 줄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귀찮게 해드린 것 같네요."
"아니에요! 한설 씨와 여기까지 오는 내내 너무 즐거웠어요. 오히려 제가 감사하죠."
"하하, 그렇게 말해주신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형의 목소리가 무척 다정하게 들렸다.
"시간이 늦어졌네요. 조심해서 가세요.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네, 전화할게요."
여자는 상냥한 목소리로 대답했고, 그녀가 탄 은색 미니 쿠퍼가 떠나갈 때까지 형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떠나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마치 즐거웠던 데이트가 끝난 것을 아쉬워하는 남자의 모습 같았다.
나는 주먹을 쥔 채로 벽 뒤에 가만히 숨어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바로 튀어나가 형을 놀라게 하고, 가슴 벅차게 기쁜 소식을 전할 타이밍이었는데, 어쩐지 기분이 가라앉아서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뒷모습을 보인 채로 서 있던 형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그대로 말했다.
"언제까지 거기 숨어 있을 거야, 한준."
"……아, 알고 있었어?"
흠칫 놀라서 묻자 형이 뒤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응."
그리고는 내 쪽을 향해서 팔을 벌렸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 품에 뛰어들어 안길 자세를 취했다가 멈췄다. 형에게 애교 부릴 기분이 아니었다.
뛰어가지 않고 천천히 다가가자 형은 눈을 가늘게 뜨며 흐음, 하고 낮은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내 쪽으로 다가와서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아이를 달래듯이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내 등을 토닥거렸다.
"추운데 밖에서 기다리고, 그렇게 형이 보고 싶었어?"
"……응. 그런데 형은 아닌 것 같네."
아주 작게 중얼거렸는데도 내 말을 들었는지 형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리가."
내 뺨을 감싸 가슴팍에 끌어당겨 안고는 내 머리꼭지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귀와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면서 형은 내게 속삭였다.
"내 강아지, 하루 종일 너무 보고 싶었어."
"……거짓말."
왜 자꾸 아이처럼 투정을 부리게 되는 건지 모르겠다.
비죽 나온 입술을 어쩌지 못해서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형은 즐거운 듯 낮게 목을 울려 웃으면서 내 뺨을 만지작거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서 집 안에 들어올 때까지 나는 형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아서 입이 근질거렸다.
그 여자는 누구야? 그 여자랑 어디 갔었어? 하루 종일 같이 있었어? ……애인이야?
마음속에서 질문들이 팝콘처럼 가득 부풀었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형이 먼저 말해주지 않는데 그런 걸 캐묻는 건 잘못된 행동인 것 같았다. 형이 대답하기 싫을 수도 있고.
'너네 형이 누구 사귀면, 너한테 꼭 얘기해야 돼?'
그렇게 말하는 우정혁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 녀석이 가끔 짜증나기는 해도 맞는 말은 잘 하는 놈이었다. 나는 결국 형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기로 다짐했다.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형이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는 내 쪽으로 다가왔다.
"핫 초콜릿 마실까. 너 좋아하잖아."
형은 단 것을 즐기지 않으면서 내가 좋아하는 건 꼭 같이 먹어주었다. 나는 그런 형의 다정한 태도가 나만을 위한 것이라고 자만하고 있었다. 울 것 같은 표정을 숨기며 고개를 끄덕이자, 형은 바로 부엌 쪽으로 가로질러 걸어갔다.
따뜻한 머그잔을 내 손에 쥐어주며 형이 이마 위로 흘러내린 내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쓸어 넘겨 주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
"……아닌데."
형은 퉁명스러운 내 대답에 작게 웃었다.
"기획사 오디션 보러 갔던 건 어떻게 됐어?"
차 안에서 형과 대화하던 아름다운 긴 머리의 여자에 대해서 내내 생각하고 있던 나는, 형의 물음에 그제서야 그루 엔터테인먼트에서 권영도를 만난 일이 떠올랐다. 단번에 기분이 들떠서 머그잔을 내려놓고 형의 팔을 잡았다.
"맞다, 형! 나 있잖아, 오디션 보러 갔었는데, 거기서 누구 만났는지 알아? 권영도 만났어!"
"권영도?"
"지난 번에 내가 정주행했던 드라마 주인공 있잖아, 피부 까맣고 잘 생기고!"
내가 한참 그의 외형을 설명해도 기억이 안 나는지 미간을 찌푸린 채로 있던 형은, 드라마를 보던 와중에 내가 진짜 잘 생겼다고 감탄했던 일을 말하자 바로 알아챘다.
"아, 그 남자."
"응! 그 권영도가 나 오디션 볼 때 뒤에서 다 보고 있었나 봐. 처음에는 조금 재수없는 사람인 줄 알았더니, 나보고 글쎄, 매력 있다고 했어! 매력 있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나하고 같이 일해보자고 했다? 나 권영도랑 악수도 했어! 이제 나 거기 연습생 될 것 같아!"
한참 낮에 있었던 놀라운 사건에 대해서 조잘조잘 이야기하자 어쩐 일인지 형은 불쾌한 듯 음, 하고 눈을 가늘게 뜨며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팔짱을 긴 채로 비스듬히 어깨를 기울여 잠시 생각에 잠긴 눈빛을 했다.
바로 축하해줄 거라고 생각했던 형이 예상외로 잠잠해서 나는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형… 축하 안 해줘? 안 기뻐?"
"으음, 신뢰할 수 있는 곳인가 의심이 되어서. 그 기획사나… 그 남자나."
혀를 쯧 차며 잠시 한숨을 길게 내쉰 형은, 눈치를 보고 있던 나를 끌어안았다. 형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댄 내 귓가에 형이 속삭였다.
"축하해. 내 강아지가 너무 귀엽고 예뻐서… 다들 눈독 들일까 봐 걱정되네."
"아이, 참. 형도. 내가 그 정도는 아니지."
쑥스러운 마음에 중얼거리자, 형은 내 뒷머리를 간질이듯 천천히 쓰다듬었다.
"정말이야. 네가 너무 예뻐서…… 형은 걱정이 많아."
나를 향한 형의 애정이 예전 그대로인 것 같다는 안정감에 나는 눈을 감고 형의 품에 안겨 마음껏 기쁨에 취해 있었다. 그렇지만 그 행복은 짧았다. 우리를 방해하며 형의 휴대폰에서 벨 소리가 울린 것이다. 주머니에서 꺼낸 휴대폰 화면을 흘깃 봤는데, '지영 씨'라고 적혀 있었다.
"서재에 가서 전화 받고 올게."
품에 안았던 나를 미련 없이 놓아준 뒤, 형은 소파에서 일어났다.
"통화가 길어질 것 같으니까, 먼저 자."
"아… 알았어."
계단을 오르며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대는 형을 모습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서재 쪽으로 멀어지면서 형의 목소리가 점점 흐릿해져 갔지만, 무척 듣기 좋은 저음으로 자상하게 말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분명 기쁜 날인데, 왜 이렇게 기분이 가라앉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침대에 누워 뒤척이던 내가 새벽녘이 되어서야 잠들 때까지도 형은 내 옆으로 돌아와 눕지 않았다.
***
졸업식이 다가오자 학교 안은 전보다 더 어수선해졌다. 거의 자유시간이나 다름 없는 수업마저도 일찍 끝나니까 꽤나 한가해졌다. 우정혁은 졸업하자마자 대학생인 누나와 함께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갈 예정이어서 학교에서는 내내 책상에 엎어져 잠만 잤다.
"우정혁, 야, 나 심심해."
"나 런던 가면… 누나 따라서 새벽에 일어나야 할 거다. 우리 누나 성격 알지?"
"알지."
"한준, 너도 미리 자둬. 또 연기 수업 들으러 갈 거잖아."
나는 수업 끝나면, 그루 엔터테인먼트에 가서 일주일에 두 번 연기 레슨을 받았다. 배우 권영도와 친분이 있는 연기 선생님은, 엄청 유명한 분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연습생으로 있는 세 명의 애들과 함께 그룹 수업을 받았는데 나만 레벨이 떨어져서 일대일 수업으로 바뀌었다.
연기 선생님은, 나를 가르치는 일이 에베레스트 등산에 도전하는 일 같다고 했다. 나와의 수업이 끝날 때마다 연기 선생님이 이하원 팀장님 쪽에 상담을 요청했다.
"그래도 준아, 노래보다는 연기 쪽으로… 그나마 가망이 있어 보이는 쪽으로 밀어보자."
이하원 팀장님이 한숨을 푹 내쉬면서 말하셨는데 왠지 미안했다.
일대일 연기 레슨을 몇 번 진행하면서 내 연기 실력이 도저히 늘지 않는다는 것을 나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연기한 장면을 영상 녹화해서 확인했는데, 내 얼굴과 똑같은 로봇인 줄 알았다. 아니, 로봇도 이렇게 부자연스럽게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도 배우 권영도가 회사 안에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인 것 같은데, 그런 권영도가 나를 마음에 들어해 준 덕분에 그나마 이하원 팀장님도 나를 포기하지 않고 있는 느낌이었다.
"역시 특훈을 해보는 건 어떨까? 준아, 너 졸업하고 나면 대학 진학 예정도 없다고 했으니까… 우리 쪽에서 숙소를 지원해줄 테니까 옮겨올래?"
그래도 나를 어떻게든 도와주려는 이하원 팀장님이 고마웠지만 나는 주저했다.
"아, 형이 아마 허락 안 해 줄 거라서요, 숙소 생활은 아직 좀……."
"한설 군은 괜찮다고 하던데? 미리 연락해봤거든."
"네?"
"본인 동생이 그러길 원하면, 괜찮다더라. 너도 이제 곧 성인이니까 말이야. 네 결정에 하나하나 간섭하지 않을 테니까 안심하라고 했어."
내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니, 형이 그런 말을 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철렁했다. 그런 내 마음을 모르는 이하원 팀장님은 예전에 아이돌그룹 하이레벨이 처음으로 썼던 숙소에 자리가 남아 있다면서 친절하게 설명해주셨지만, 나는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아 저는…… 조, 조금 더 생각해보고 말씀 드릴게요."
왠지 모르게 당황한 나는 도망치듯이 그루 엔터테인먼트 본사 건물에서 빠져 나왔다.
집으로 가는 길에 형에게 전화를 걸어봤지만, 부재중 통화로 넘어갔다. 요즘에는 자주 그랬다. 예전에는 연결 음이 두 번 지나기도 전에 내 전화라면 언제나 받았었는데.
요즘 형은 외박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귀가 시간이 점점 늦어진다 싶더니 아예 밤새 집을 비웠다가 아침에서야 조용히 들어오는 날도 생겼다.
"아, 너 학교 갈 시간이구나."
가방을 맨 나를 현관 앞에서 마주한 형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눈가에 피곤함이 서려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형이 학업과 일로 바빴을 것을 생각하며 안쓰러웠겠지만, 미운 마음에 표정이 굳어졌다. 그 여자랑 있었을 게 뻔하니까.
"새로 시작한 일 때문에… 정신이 없네."
눈가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피곤한 듯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더니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고 스쳐 지나갔다. 거실 탁자 위에 서류 가방을 올려 둔 뒤에 코트를 입은 채로 소파에 털썩 몸을 뉘이듯 앉았다.
얼핏 들은 이야기로는, 형이 새로운 유통 사업에 투자하고 있었던 것이 이제 수익을 보고 있는 중이라서 바쁘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건 잘 모르겠고 형이 하는 모든 말들이 변명처럼 느껴져서 마음이 괴로웠다.
어쩌면 그 여자도 사업상 만나는 업무 관련 지인일지도 모르는데, 자꾸 형을 의심하는 내 스스로가 밉다.
"준아, 요즘 너한테 신경을 못 써주는 것 같아서 미안하다."
"……아니야."
가방 끈을 꾹 쥔 채로 신발에 발을 우겨 넣으며 작게 대답했다.
"어느 정도 일 마무리되면, 둘이 놀러 가자. 좋지?"
"…응, 좋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숙소 생활을 하게 될 거고, 형은 내가 아니라 여자친구와 함께 놀러 다니게 되겠지. 우리는 그렇게 점점 멀어질 것이다.
나는 학교 늦겠다며 형의 시선을 피해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 거실 쪽의 형이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렸다.
"네, 지영 씨."
부드러운 목소리. 나는 현관 앞에 그대로 우뚝 멈춰 섰다. 형의 전화를 몰래 듣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아서 형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아… 맞습니다. 단둘이 있는 시간을 방해 받기 싫으니까요, 네… 그렇죠.“
달콤한 밀애를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역시 잘 아시는군요. 그래요, ……아직은 우리 둘만의 비밀입니다.“
더는 듣고 있을 자신이 없어서 나는 눈을 질끈 감고 현관문 밖으로 나섰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어댔다.
둘만의 비밀이라니, 나 같은 건 모르는 형과 그 여자만의 비밀이 생기다니.
나는 울먹이는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학교 쪽으로 빠르게 걸었다. 나야말로 형에게 비밀인 마음이 자라났다는 것을 모른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