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 외전 2 : 둘째 계획
"자, 잠깐만…!"
다급하게 외쳤지만 귓바퀴를 깨무는 설이의 그르렁거리는 입김에 허리를 떨며 입술을 짓 깨물었다. 그럼에도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새어나가는 것을 막을 순 없었다. 내가 방심한 틈을 타 등 뒤에서 치고 들어오는 허릿짓에 다시 숨을 헉 들이마셨다.
뭐에 자극을 받았는지 설이는 오래간만에 스케줄이 없어서 늦잠을 자고 일어나자마자 주방으로 따라 들어와서 나를 꽉 껴안았다. 그리고 난데없이 밝은 대낮부터 일이 시작된 것이다.
"으흣, 좀… 천천히…"
일주일 내내 로케이션 촬영으로 집을 비웠던 것을 한 번에 충족하고 싶은 것처럼 설이는 빠듯한 몸 안으로 거침없이 파고 들어왔다. 그게 쑤욱, 반쯤 밀려들어왔을 때 싱크대를 부여잡은 내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삽입으로 자극을 당해 반쯤 선 내 것을 큰 손으로 가볍게 쥐어 슥슥 쓸어 위로하며 조금씩 더 내 몸 안으로 진입해 들어왔다. 등 뒤에 바짝 달라붙은 설이는 내 머리꼭지에 입을 맞추며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형, 후으… 허리에 힘 좀 빼 봐, 응?“
애 태우듯 귓가에 가까이 속삭이는 목소리가 축축하게 가라앉았다.
"읏, 설아, 이것 좀……"
"응?"
내가 뭘 말하는 건지 뻔히 알면서 설이는 부드럽게 되물으며 작게 웃었다. 간질이듯 내 귓가에 짧게 입맞추면서 설이는 느리게 허리를 쳐올렸다. 헉, 숨을 들이마시며 허릿짓을 참아내다가 잠시 멈춘 틈을 타서 싱크대를 쥔 손으로 앞치마 끝자락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등 뒤에서 매듭이 지어진 앞치마가 미약한 내 그 손짓으로 벗겨질 리 없었다.
대체 이 앞치마는 왜 안 벗기는 거야?
하얀 레이스가 잔뜩 달린 웨딩드레스 분위기의 앞치마는 설이가 선물해준 것으로, 주방에서 일할 때는 습관적으로 늘 착용해왔다. 이제 치렁치렁한 느낌에 꽤나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걸 걸치고 요리나 설거지가 아니라 섹스를 하려니까 무척이나 거추장스럽게 느껴진다.
이미 흰 레이스 앞치마만 남기고, 바지와 팬티는 발목까지 내려간 상태였다. 그나마도 오른쪽 다리는 바지 밖으로 빠져 나와서 왼쪽 발목에만 옷들이 걸려 있는 것이다. 게다가 라운드 티셔츠 안으로 들어오는 설이의 은근한 손길에 벌써 윗옷도 슬금슬금 밀려 올라가서 내가 제대로 입고 있는 건 앞치마뿐이었다. 그런데도 설이는 무슨 고집인지 이 거슬리는 앞치마 끈을 절대로 풀어주지 않는 것이다.
식사 초대로 집에 방문했던 우정혁이 내 앞치마를 보더니 네 동생 놈 진짜 악취미라며 인상을 찌푸렸었는데, 내가 보기에 앞치마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걸 맨 상태로 이런 짓을 하는 게 진짜 이상할 뿐이다. 누가 이걸 보기라도 한다면… 그런 생각에 얼굴이 확 붉어졌을 때 설이가 엉덩이를 꾹 잡아 벌렸다.
"형, 지금 나하고 있는데 다른 생각 하는 거야?"
다정한 목소리였지만 심술이 났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변명하기 위해 입을 벌렸지만, 신음을 내지르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설이와 나 단 둘뿐인 집이라지만 집 안에 온통 울릴 정도로 앙앙거리는 내 목소리가 적나라하게 퍼져 나갔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오랜만이기도 한 섹스를 무척이나 반기듯이 내 몸은 설이가 찔러 넣는 곳마다 지나칠 정도로 쾌락을 느꼈다. 앞쪽으로 구겨진 레이스 앞치마를 축축히 적실 정도로 나는 몇 번이고 사정했다. 내 몸을 꽉 붙든 채 설이는 조금 과격하다 싶을 정도로 허릿짓을 이어나갔다. 내가 힘에 부쳐 거의 쓰러질 정도가 되어도 놔주지 않았다.
"흐으, 그마안… 응?…"
내가 울고 있는지도 몰랐는데, 지나친 흥분으로 눈가가 이미 푹 젖었고 애원하는 내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설이는 알았다고 속삭이면서도 조금 더 세게 몸 안으로 저를 밀어 넣어 스퍼트를 올리며 날 괴롭힌 후에야 겨우 파정했다.
파정 후에도 설이는 끈질기게 내 목덜미를 핥고 머리에 입을 맞추며 손 끝으로는 젖은 몸을 훑으며 지분거렸다. 나는 맹수에게 목덜미를 물어뜯긴 사슴처럼 고개를 떨군 채로 축 늘어졌다. 싱크대 앞 바닥에 무릎이 닿았다. 설이는 가볍게 그런 내 허리를 잡아 올리며 만족스러운 듯 느린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이에 가슴팍까지 밀려 올라온 왼손이 유두 끝을 집요하게 짓누르면서 나를 괴롭혔다.
"형은 왜 이렇게 온몸이 달아?"
낮은 목소리가 기쁜 듯이 속삭이며 내 귓불을 쪽 빨았다. 으응, 하고 신음하며 겨우 뒤쪽으로 손을 뻗어 설이의 머리를 만져주었다.
"형이 나를 좋아해서 나에게 달게 느껴지는 걸까?“
응? 하고 되물으며 설이는 내 뒷목에 쪽 쪽 입을 맞췄다. 기진맥진한 와중에 그 귀여운 말에 피식 웃자, 설이도 작게 웃었다. 요즘 부쩍 말이 많아진 누리 때문에 누리와 대화하느라 설이가 스케줄 끝나고 집에 와도 설이와 단둘이 오붓하게 지낼 시간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인지 이렇게 둘뿐이 되면 설이는 응석을 부렸다.
설이는 반대편 손으로 이미 끈적이는 것이 잔뜩 흘러내린 내 허벅지를 더듬었다. 농밀한 후희였다.
서서 하는 게 오랜만이라서 한 번의 교합으로도 내 체력이 딸리는 게 느껴졌다. 미약하게 떨리는 허벅지 근육을 더듬으며 올라온 설이의 긴 손가락이 반쯤 가라앉아 늘어진 내 것을 쥐기 시작했다. 눈이 크게 뜨였다.
"왜, 왜 또…!"
대답 없이 내 허벅지 사이를 무릎으로 밀어 벌리며 설이는 내 뒷목에 제 코끝을 대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 바람에 나는 허리가 저절로 낮아져 싱크대에 가슴이 닿았고, 엉덩이를 뒤로 내민 자세가 되었다. 마치 등 뒤에 서 있는 설이에게 넣어달라고 조르듯이 엉덩이를 들어올린 행색이 된 것이다.
얼굴이 확 붉어지고 파정으로 안정을 되찾았던 내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서, 설아…"
"응."
다정하게 대답하며 설이는 이미 다시 형태를 완벽하게 갖춘 딱딱한 귀두 끝을 그대로 엉덩이 골 사이에 비벼댔다. 내가 대비할 새도 없이 그것은 엉덩이 사이로 꾸욱 밀려들었다. 이미 녹진해진 안쪽 점막을 짓누르며 파고 들어왔다.
"아으응…!"
이번에는 좀 더 매끄럽게 반쯤이 쑥 들어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쉽게 몸 속에 삼킬 수 있는 굵기와 크기는 아니었다. 뜨거운 불기둥은 예민해진 몸 안쪽 부분을 꾹 찌르며 겨우 끝까지 들어왔다. 주저앉으려는 내 허리를 두 손으로 쥐어 지탱하며 설이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형, 힘들어?"
다정하게 물어보는 목소리는 나를 걱정하는 자상한 말투였지만,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희열이 느껴졌다.
기회가 나면 늘 이렇게 한계까지 몰아붙이며 정사를 길게 이어가는 설이 때문에 나는 이미 중반쯤부터 얼굴이 죄다 눈물로 젖곤 했다. 괜찮아? 하고 물어보는 목소리에 칭얼거리듯 으응, 하는 대답이 입 사이로 나갔다.
제 고집을 다 받아줘서 고맙다는 듯 설이는 고개를 옆으로 돌린 내 뺨과 질끈 감은 눈꺼풀에 쪽, 쪽 입맞추며 나를 달래듯이 매력적인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렸다.
"예쁘다. 형, 너무 예뻐."
간지러운 목소리로 나를 구슬리며 설이는 천천히 제 것을 조금 빼내더니 바로 강하게 허릿짓을 시작했다. 젖은 몸 안쪽이 마찰될 때마다 질퍽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는 정신 없이 울었다.
스물다섯이 된 설이는, 전과 다를 바 없이 조용하고 순한 성격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능글맞은 구석이 생겼다. 내가 이제 그만 하자고 거절하려고 할 때마다 이런 식으로 내게 예쁘다거나 귀엽다고 칭찬하며 아기 달래는 말투를 쓰는 것이다. 그것도 안 통하면 눈꼬리를 내리며 싫어? 하고 물어왔다. 그건 정말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
나도 이 정도로 설이와 부부로 지내면서 몸을 섞었으면, 이제 설이의 유혹 패턴이나 몸짓에 익숙해질 만도 한데 매번 새로웠다. 늘 내 체력과 정신의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바람에 뭘 더 생각할 사이도 없이 정신 없이 몸이 털렸다.
"으응… 아! 읏, 누, 누리 올 시간… 다 됐어… 아아, 응! 그만……"
허리를 세게 쳐올리고 엉덩이 사이로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설이는 내 목을 까득 깨물었다. 몸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아픈 정도의 세기였다. 목덜미에 잇자국이 남을 것이다.
설이는 피부 위에 입술을 댄 채로 들끓는 목소리를 냈다.
"후으, 조금만 더 해."
그리곤 나를 설득하기 위해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읏, 요즘 친구들하고 노느라 좀 늦는다며."
"흐! 그래도오…"
그래도 여긴 주방이잖아, 설아!
나는 제대로 항변하고 싶었지만, 자칫하면 혀를 깨물 정도로 빠르게 삽입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등 뒤에서 나를 단단히 옭아맨 팔뚝을 쥔 채로 버티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주방은 아일랜드 식탁으로 구분되어 있을 뿐 거실과 바로 이어져 있었다. 현관 안으로 들어와서 계속 거실을 가로질러 걸으면 바로 주방이 시야에 들어오는 구조였다. 혹시라도 일찍 집에 도착한 누리와 누리의 개인 경호원이 된 최민욱 형님이 주방에서 엄청난 행위를 하고 있는 우리를 발견할 수도 있었다.
그런 걱정에 조마조마한 심정인 것은 나뿐인지, 결국 설이는 제가 성이 찰 때까지 격렬하게 밀어붙이다가 파정한 뒤에야 나를 놓아주었다.
"형, 울었어?"
샤워콕 앞에서 내 어깨를 문질러 닦아주며 설이가 떠보듯이 물었다. 대답 없이 밉게 쳐다보는 눈빛에도 씩 웃으며 설이는 내 뺨에 입을 맞췄다. 주방에서 내게 등짝을 찰싹 얻어맞고 나서야 주섬주섬 함께 뒷정리를 한 뒤에 바로 함께 안방 욕실에 들어온 참이었다. 샤워하면서도 설이는 아쉬운 눈길로 내 몸을 내려다보며 이곳 저곳 느리게 문질러 닦아주었다.
"설아. 너 요즘 능글맞아진 거 알아?"
"그런가."
설이는 작게 웃으며 내 몸을 끌어안았다. 나는 다시 야릇한 분위기로 돌변하려는 설이의 가슴팍을 밀어내고 급하게 샤워를 마쳤다.
옷을 새로 꺼내 입고 서로의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아 말린 뒤에야 휴대폰을 확인했는데, 설이의 말처럼 누리가 유치원 친구들과 노느라 귀가가 늦어진다는 최민욱 형님의 보고 문자가 와 있었다.
"아, 다행이다. 시간 좀 있네."
"…형, 그러면 우리 조금만 껴안고 누워 있을까."
나른한 눈길과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를 잡아 끌었다. 무척이나 유혹적인 제안이었지만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누리 간식 준비해야 돼. 설이 너는 쉬어."
"…칫."
모처럼 쉬는 날이니까 쉬라며 뾰로통한 표정을 한 설이를 침대에 눕혀두고 서둘러 주방으로 나왔지만, 설이는 어슬렁거리며 날 따라왔다. 내게 방해가 되지 않겠다는 듯 멀찍이 소파에 앉아 내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자유시간을 줘도 주인만 따라다니는 대형견 같아서 귀여웠지만, 이제 설이를 예뻐해 줄 시간이 없었다.
"아이고… 어디 보자."
누리가 하원 하면 간식으로 먹이려고 수플레 팬케이크를 만들던 중이었다. 머랭을 위한 보울 안에 밀가루가 채에 미처 다 쳐지지 못해 뭉친 상태였다. 보울에 담긴 것을 다 버리고 다시 계란 흰자와 노른자를 구분해 넣기 시작했다.
아이고, 베이킹 하다가 중간에 딴 짓을 했더니 갈 길이 멀다.
얼마 전, 유치원 친구 테디의 집에 놀러 갔던 누리가 수플레 팬케이크를 엄청 맛있게 먹었다는 테디네 어머니의 말을 전해 듣고 나서 오늘 간식으로 수플레 팬케이크를 준비한 것이다. 예전에 설이와 셋이 외식할 때 레스토랑 브런치 메뉴로 수플레 팬케이크가 나왔을 때는 누리가 깨작거리며 먹었는데, 친구 집에 갔더니 맛있었던 모양이다. 테디네 어머니로부터 레시피를 얻어서 심혈 기울여 만들던 도중에 설이가 깨어나는 바람에 주방에서 격렬하게 판을 벌여 버렸다.
하긴, 누리가 없을 때가 아니면 그런 건 못하지. 나도 꽤 욕구불만 상태였고… 너무 좋았으니까.
나는 설이의 갑작스러웠던 유혹에 납득해서 고개를 끄덕이며 머랭과 반죽을 조심스레 섞었다.
네 살이 된 누리는 부쩍 말이 늘더니 영리한 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홈스쿨링으로 가르치기에는 역부족이지 않나 싶었다. 결국 설이와의 회의 끝에 누리를 소규모 원생으로만 운영하는 유치원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사실 나는 되도록이면 누리를 홈스쿨링으로 가르치며 어느 정도 더 클 때까지 집에서 보호하고 싶었는데, 그건 세상 사람들이 누리에게 지나치게 관심이 많은 탓이었다. 하루 자고 나면 쑥쑥 크는 우리 아이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외식 한 번 하려고 해도 주변에서 시선들이 쏟아졌다.
설이를 쏙 빼다 박았기 때문에 제 아빠 설이와 함께 있으면 그때마다 기사거리가 되었다. <한설, 미니어처 같은 조카와 함께 아동복 쇼핑 눈길 끌어…> 라거나 <배우 한설과 꼬마 조카의 화려한 레고 테마파크 나들이> 같은 헤드라인을 볼 때마다 나는 사람들이 애꿎은 누리까지 귀찮게 할 까봐 안절부절 못하게 되었다.
설이가 바빠서 나와 누리만 외출을 하게 될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경호해주는 형님들이 곁에 있었지만 우리 예쁜 아이에게로 꽂히는 사람들의 시선은 도무지 막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와 달리 타인에게 무덤덤한 누리의 성격이었다. 누리는 제 아빠처럼 사람들의 시선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설이의 교육 덕분인지 낯선 사람이 말을 걸어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일절 대답하지 않았다. 누가 아는 척하며 인사를 해도, 제가 확실히 알고 있는 지인이 아니면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로 쳐다보다가 휙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런 누리의 새침한 태도조차도 설이를 닮아서 화제가 되곤 했다.
***
"아빠아-!"
누리가 우렁차게 나를 부르며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주방에서부터 쪼르르 달려나가 우리 아기를 맞이했다. 최민욱 형님의 도움을 받아 신발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 신는 누리를 보다가 최민욱 형님에게서 누리 가방을 건네 받았다.
"오늘은 테디하고 루희, 지나, 넷이서 야외 놀이터에서 놀다가 왔습니다. 루희 어머니께서 코코아를 사주셔서 반쯤 마셨고, 그 외에 특이사항은 없습니다."
근엄한 표정으로 누리의 일과를 읊어주는 최민욱 형님의 모습은 언제 보아도 적응이 안되어서 웃음이 났지만, 웃음을 참으며 감사하다고 대답했다.
누리가 태어났을 때부터 봐왔기 때문인지 최민욱 형님은 누리의 담당 경호를 맡게 되면서부터는 예전보다 더 경호에 엄격해졌다. 아무래도 어린 아이를 밖에서 보호하는 일이니까 확실하게 일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설이도 그를 누리 담당으로 변경했을 것이다.
지난 번에는 누리가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다가 앞으로 넘어져 손바닥과 무릎이 까졌다며 내게 급히 연락이 왔다. 최민욱 형님은 그대로 누리를 데리고 대학병원 응급실로 가겠다는 말을 해서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손바닥은 조금 긁혔을 뿐 양호했고, 무릎 한 쪽에는 겨우 피가 조금 비칠 정도로 다쳤는데도 최민욱 형님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심지어 누리는 별 것 아니라는 듯이 그 자리에서 툭툭 털고 일어났다고 했는데도 말이다.
물론 집에 와서 내게 상처 부위를 보여줄 때에는 너무 아팠다며 울먹거렸다. 무릎을 보여주며 호오 해달라고 내게 귀엽게 응석을 부렸었다.
"오늘 유치원에서 재미있게 지냈어?"
"응. 숫자 노래 하고 그네 탔어요. 누리 초록색 주머니 먹었어."
"아이고, 그랬어어?"
똘망똘망한 표정으로 제 일과를 얘기하는 우리 아기가 너무 예뻐서 꽉 껴안아주자 까르르 웃었다.
아마도 누리가 먹었다는 초록색 주머니는 점심 식사로 나왔던 양배추말이찜일 것이다. 유치원에서 매일 보내주는 알림장 메시지로 원생들의 식사 메뉴를 확인했던 것을 떠올리며 누리를 데리고 거실로 들어왔다.
소파에 앉아서 티브이를 보던 설이를 발견하자, 누리는 손을 가볍게 흔들며 지나갔다.
"어? 설이 안녕-"
마치 길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반 친구라도 만난 모양새였다. 설이도 그래, 하고 대답하며 피식 웃었다.
오히려 더 어릴 때에는 설이를 곧잘 아빠라고 불렀었는데, 요즘에는 거의 친구 취급이었다.
유치원을 다니면서 존댓말을 조금씩 익히기 시작했지만, 누리는 아직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서 사용했고 매끄럽게 대화를 하지는 못했다. 유치원 담임 선생님 말로는 몇 달만 지나도 금방 어휘가 늘고 능숙해질 거라고 했다. 누리가 친구들에게 인기는 무척 많은데, 몇몇 조용하고 자신을 귀찮게 하지 않는 아이들 빼고는 대화를 잘 하지 않고 과묵한 편이라고 했다.
하지만 누리는 집에서 꽤나 수다쟁이였기 때문에 유치원에서의 과묵한 모습이 전혀 상상이 안 되는 것이다.
"우와, 딸기네? 누리 딸기 좋아. 그치, 아빠아-"
애교 섞인 말투로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제법 발음도 정확하다. 누리는 내게 말을 걸면서 눈을 치켜 뜨고 식탁에 고개를 기울여 기댔다. 마치 그렇게 하면 자신이 얼마나 귀여운지 알고 있는 것처럼. 실제로 너무 귀여워서 몇 번이나 사진으로 찍어둔 모습이다.
이미 세 살이 되면서부터 꼬리와 귀를 감쪽같이 감추기 시작했던 누리는, 그때부터 영리하고 애교가 많았다. 엄마아, 아빠아, 하고 연습하듯이 종알거릴 때에는 얼마나 깜찍한지 누리를 예뻐하느라 나는 숨 쉬기도 힘들었다. 설이는 내게 애교 부리는 제 아이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중얼거렸다.
"……날 닮아서 표범인 줄 알았더니, 아기 여우가 따로 없네."
누리는 나를 때때로 '엄마'라고 불렀다가 다시 '아빠'라고도 하는데, 요즘에는 밖에서 거의 나를 아빠라고 부르는 편이었다.
유치원 친구들과 비교해 봤을 때 그 애들의 엄마는 전부 여성이고, 아빠가 전부 남성이라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자연스럽게 나를 아빠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을 그대로 놔두었더니 설이를 부르는 호칭이 엉망이 되었다.
폭신하게 구워지고 있는 수플레 팬케이크 냄새를 황홀한 듯이 눈 감고 맡아보던 누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아빠! 누리 손 씻어요. 거품 노래 끝날 때까지 씻을 거야."
"맞아. 간식 먹기 전에 손 씻지?"
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누리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저쪽 가서 설 아빠한테 손 씻는 거 도와달라고 해."
"…아니요, 누리 혼자 해."
소파에 앉아 있는 설이를 빤히 바라보던 누리가 단호하게 대답하더니 거실을 가로질러 종종 걸어갔다.
유치원 선생님 말로는, 누리가 친구와 대화할 때 "나는, 아빠랑 설이랑 살아." 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내가 설이를 설아- 하고 부르니까 누리도 그대로 따라 부르게 되었던 모양이다. 설이가 나를 '형' 하고 불러도 내가 엄마나 아빠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면서 어째서 설이에 대한 호칭은 나를 따라 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결국엔 내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설이를 '누리아빠' 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게 어찌나 민망했는지 모른다. 설이를 불러야만 할 상황에도 그냥 입만 벙긋거리다가 말았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가 지나치게 부끄러워하는 것을 보면서 설이는 꽤 즐거워했는데, 마트에서 함께 장을 보다가 내 귓가에 "누리엄마, 이만 집에 갈까." 하고 속삭여서 나를 기겁하게 만든 적도 있었다.
그런 내 노력에도 누리는 저를 꼭 닮은 아빠를 올려다보며 "설아, 아이스크림 사주세요." 하고 말했다. 나는 반쯤 포기하는 심정으로 누리를 놔두게 되었다. 바깥에서는 설이에게도 가끔 아빠라고 부르는 것으로 봐서, 설이를 친구나 동료처럼 부르는 것은 누리의 장난 혹은 고집인 모양이었다.
게다가 최근에는, 집 밖에서 기자들이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하곤 설이의 손을 잡으며 “삼초온-“ 하고 불렀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네 살배기 누리가 삼촌발언으로 몇 년 째 계속 되어온 '배우 한설 애 아빠 논란'을 잠재워 버린 것이다.
손을 깨끗하게 씻었다고 확인시켜주기 위해서 누리는 내게 조르르 달려와서 뽀얗고 조그마한 손바닥을 내밀었다.
내 새끼는 어쩜 이렇게 영특하고 착하고 예쁜 걸까. 누리를 껴안고 뺨을 쪽쪽거리다가 식탁 앞에 앉혔다.
"설아, 이쪽으로 와서 차 마셔."
"응."
목 관리를 위해서 설이에게는 따뜻한 도라지 모과차를 찻잔에 담아주고, 그 옆자리에는 수플레 팬케이크와 함께 고양이 그림이 그려진 조그마한 컵을 내놓았다. 팬케이크 위에 블루베리를 얹어주자 누리의 눈동자가 초롱초롱해졌다.
오렌지 착즙 주스가 담긴 병을 건넸더니 누리가 두 손으로 병을 꼭 쥐고는 옆자리에 턱을 괘고 있는 설이를 흘깃거렸다. 불신의 눈동자가 설이를 올려다보며 눈꼬리를 매섭게 올렸다.
"…누리가 할 거야."
"그래, 알았어."
설이는 피식 웃으면서 어이가 없다는 듯 찻잔을 들었다.
불과 며칠 전, 누리가 무거운 주스 병을 들고 낑낑거리고 있기에 설이가 그걸 빼앗아서 대신 주스를 컵에 따라준 적이 있었다.
최근 누리는 뭐든 혼자 스스로 해내는 것을 즐겼고, 자신이 무언가를 성공하는 모습을 내게 보여주는 것에 보람을 느끼는 듯 했다. 혼자서 양말 신은 것을 칭찬해주었더니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졸린 눈으로 양말부터 찾는 아이였다.
그날도 주스 병의 뚜껑을 멋지게 열어서 컵에 따르는 모습을 내게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 공을 설이가 가로채버린 것이다. 제가 활약할 타이밍을 빼앗겼다는 사실이 서러웠는지 누리는 울음을 터뜨려서 우리 두 사람을 당황하게 했다.
그 뒤로 설이는 누리가 뭘 하려고 하면, 가만히 지켜보기로 한 듯 했다. 커피잔을 들고 두 사람의 테이블 맞은 편에 앉자, 설이는 손을 뻗어 내 손등을 덮고서 만지작거렸다. 불과 한 시간 전 싱크대 앞에서의 정사가 떠올라서 얼굴이 훅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한 시간 전에는 알몸으로 부대꼈는데, 지금은 정사를 벌였던 그 같은 공간에 아이와 셋이 앉아 있는 것이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 것처럼 설이는 입술 끝을 올리며 작게 웃었다. 설이의 조용한 시선이 내 얼굴을 훑고 있었다.
그런 우리 둘의 눈맞춤을 눈치채지 못한 채, 누리는 열심히 주스 뚜껑을 열었다.
낑낑대며 밀폐 형식의 뚜껑을 겨우 열어내더니 조심스럽게 병을 기울여서 주스를 컵에 쪼르르 따라냈다. 이번에는 조금도 흘리지 않았다. 누리는 기대에 찬 눈길로 나를 바라봤다. 대견한 우리 아이를 항해 환하게 웃어주며 나는 설이에게 잡힌 손을 슬그머니 빼냈다.
"우와! 누리 엄청 잘하네? 너무너무 멋지다!"
칭찬과 함께 뺨을 만져줬더니 가느다란 속눈썹을 내리깔며 누리가 수줍게 웃었다. 조그맣고 통통한 입술이 비죽거리며 기쁨을 참지 못하는 것이 보였다.
누리는 곧이어 제 옆에 앉은 설이 쪽을 의기양양한 시선으로 올려다봤다. 이것 좀 보라는 듯이 주스를 따른 컵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예쁨을 받고 싶어하는 얼굴이라기보다는 '어때? 나도 이런 것쯤은 해.' 하고 과시하는 분위기에 가까웠다. 설이는 그런 누리의 도발이 귀엽다는 듯 픽 웃었다.
수플레 팬케이크를 포크로 조금 뜯어내 입에 넣고 오물거리던 누리가 우리를 번갈아 올려다보았다.
"있잖아, 누리 내일 유치원 안 가요."
"응? 그러네. 주말이니까 유치원 안 가지?"
누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쁘게 입을 열었다.
"누리는 엄마랑 하루 종일 놀 거야."
누리는 스케줄이 없는 날의 설이가 나와 껴안고 있는 모습을 하원하고 나서 발견하게 되면, 뺨을 부풀리며 분한 표정을 짓곤 했다.
설이가 쉬는 날에는 내 곁에 붙어있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누리는 자신도 쉴 때는 설이처럼 내 곁에 달라붙어 있으려 했다. 그것이 휴일을 맞은 사람의 권리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고양이 모형이 달린 포크를 꾹 쥔 채 누리가 설이 쪽을 올려다 보았다.
"근데 설이는 일 해요. 그치?"
긴 속눈썹을 깜빡이면서 저와 꼭 닮은 얼굴을 올려다보며 누리는 약 올리듯 말했다. 설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면서 제 아이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손으로 쓰다듬어 헝클어뜨렸다. 누리는 경쟁에서 제가 이겼다고 생각했는지 만족스럽게 발을 동동 구르면서 팬케이크를 야금야금 먹기 시작했다.
아기 여우의 치기 어린 도발 따위는 아무 상관 없다는 듯, 설이는 식탁에 팔을 올려 턱을 괜 채로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리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
"여보."
손에 든 커피잔을 떨어뜨릴 뻔한 내가 눈이 휘둥그래져서 쳐다보자, 설이는 비밀스럽게 눈가를 접어 웃었다. 달콤하면서도 야릇한 분위기의 미소였다. 내가 어색하게 어어, 하고 대답하자 설이는 은밀하게 속삭였다.
"저녁에, 괜찮아?"
"아……."
어린아이는 들어도 모르겠지만, 설이가 내게 뭘 묻는 건지 너무 분명하게 알 것 같은 나는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피웠다. 티슈로 누리의 입가를 닦아주고 접시 옆으로 굴러 떨어진 블루베리도 주웠다.
"그, 글쎄. 누리 목욕도 시켜야 하고… 바, 바쁘긴 할 텐데……"
"다 끝나고."
"아, 어, 음…"
"형이 좋다는 것만 할게. 응?"
속삭이는 목소리가 너무 간질거려서 나는 입술을 꾹 다물고 시선을 피한 채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설이는 만족한 듯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차를 마셨다. 여기서 내가 부끄럽답시고 내빼봤자, 집요한 설이가 계속 나를 꼬시기 시작하면 누리가 우리의 대화가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었다. 그러면 무슨 이야기를 하는 중인지 설명하느라 진땀을 빼는 것은 나였다.
눈치 빠르고 예민한 우리 네 살배기 아기는, 나와 설이가 집 안에서 껴안고 있으면 귀신 같이 나타나서 빤히 올려다보곤 했다.
"아빠, 설이랑 뭐해요?"
순진한 목소리로 문고리를 쥔 누리가 물어볼 때, 드레스 룸 구석이나 안방 침대 아래의 은밀한 공간에서 나는 설이와 엉켜 있다가 벌떡 일어나곤 했다. 내 옷 속으로 이미 들어와 있던 설이의 손을 다급히 빼내고, 지퍼가 열린 바지와 가슴이 드러나게 말려 올라간 셔츠도 누리 눈에 띄지 않도록 전광석화와 같은 손길로 옷 매무새를 다듬었다.
"으응, 설 아빠랑 둘이… 그… 간질이기 장난 하는 거야."
그런 어설픈 변명도 한두 번이었다. 왜 아빠 둘이서 자신을 빼놓고 장난 치며 노는 건지, 누리가 점점 불만과 의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꼭두새벽에 일찍 일어난 누리가 안방 침실 문을 불쑥 열고 들어오는 바람에, 이불로 알몸을 겨우 숨기고 아침 인사를 한 적도 있었다. 누리는 잠결에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엄마아, 얼굴 왜 빨개요?"
"어? 어어… 저기… 그러니까아…"
눈을 가늘게 뜨고 어린 짐승처럼 킁킁거리며 방안의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려고 애쓰는 누리 때문에 내가 당황해 있자, 설이는 오붓한 아침 시간을 방해 받은 것이 아쉬운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누리. 이리 와, 너 좋아하는 만화 보여줄게."
제 머리칼을 잔뜩 헝클어뜨린 설이가 태연한 얼굴로 침대에서 일어나 가운을 걸치며 누리를 데리고 거실로 나가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얼굴이 새빨개져 터져버렸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민망한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되도록이면 누리가 집에 있을 때에는 설이와의 스킨십을 자제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하지만 그것도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나도 모르게 자석처럼 자꾸만 설이에게로 시선이 이끌려 가는 것이 문제였다.
그도 그럴 게, 누구 남자인지 모르겠지만 설이가 너무 멋진 탓이었다. 오피스텔 안에서 편안한 라운드 티셔츠에 트레이닝 복 바지를 걸쳐 입은 채로 설이는 그저 걸어 다니고 물을 마시고 소파에 앉아 있을 뿐인데도, 늘 새롭게 설이의 매력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청년과 어른 남자의 경계에 있는 설이는, 배우로서뿐만이 아니라 연인으로서도 이미 분위기가 무르익은 것이다. 게다가 자상한 눈길로 제 아이의 옷 단추를 잠가 주거나 목마 태워주는 모습을 보면, 그게 또 그렇게 섹시할 수가 없었다.
내가 설국지색 팬 사이트만큼이나 자주 들어가는 맘 카페의 고민 게시판에 '요즘 들어 그 사람이 너무 섹시해 보입니다. 제가 미친 걸까요?' 하는 글을 올렸더니, 댓글들은 모두 나를 이해하는 분위기였다.
'원래 그때가 피크에요. 나도 오히려 첫 애 낳고 더 불타올랐거든요.'
'저도요. 남편이 애한테 잘하면 그게 또 매력이죠. 즐기세요!'
'맞아. 그리고 눌맘은 남편이 연하 아니었나? 그럼 또 더 예쁘죠. 크크.'
'그래요. 눌맘 이 참에 둘째 만드세요! 나이 터울도 적당할 걸?'
어차피 내 글에 댓글을 달아주는 맘 카페 회원들은, 내가 남자인 것을 모른다. 게다가 내 남편이 배우 한설인 것도 모르며, 설이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도 모를 테니까 이럴 때 '둘째 계획'을 세우라며 자꾸 나를 부추겼다.
하지만 설이와 느긋하게 있을 시간도 없을뿐더러, 기적과도 같았던 누리 때처럼 또 우리에게 아기가 생길 수 있는 지조차 미지수였다. 게다가 설이는 내가 살짝 운을 띄워봐도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이는 누리 하나로 충분하잖아. 나는… 형 힘든 거 싫어."
관계를 가질 때마다 아직도 내 피부에 남은 수술자국을 미안한 듯 조심스럽게 쓸어보는 설이에게는, 아무래도 내 몸의 부담이 가장 걱정인 모양이었다. 물론 나도 그 고생을 또 하라면 달갑지 않지만 '설이랑 닮은 아기 하나 더 있으면, 그것도 무척 좋긴 하겠다.'하고 무심결에 그렇게 생각하는 정도가 전부였다.
***
"누리야, 우리 설 아빠 일 하는 데에 놀러 갈래?"
주말에도 결코 늦잠 자는 법이 없는 우리 바른 생활 어린이는, 거실 카펫 위에서 꼬리와 귀를 내 놓은 채로 레고 장난감을 조립하면서 놀고 있었다. 보송보송한 귀를 움찔거리며 뒤돌아본 누리가 으응? 하고 되물었다.
"누리 설 아빠 일하는 모습 궁금하지 않아? 아빠 일 끝나면 같이 맛있는 것도 먹자. 어때?"
사진 촬영 스케줄만 남아 있다는 것을 신 매니저님께 전해 들었고, 거의 끝나갈 때에 가서 살짝 구경하면 누리도 지루해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누리 첫돌 기념으로 사진을 찍어주셨던 작가 선생님 팀의 촬영이라서 누리도 안면이 있었다. 작가 선생님의 개인 건물 안에서의 촬영이라서 스텝도 적고 붐비지 않을 것이다.
누리에게 제 아빠의 멋진 모습을 보여줘서 좀 더 설이에게도 친근감과 호감을 많이 느끼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누리는 내 제안에 우응, 하고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더니 말을 타고 있는 카우보이 레고를 제 주머니에 집어 넣으면서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리가 꼬리와 귀를 잘 갈무리할 때까지 시간을 좀 주고, 간식을 먹인 뒤에 외출복으로 갈아 입혔다.
내 외출 계획을 알렸더니 누리 전담 경호원인 최민욱 형님은 조금 고민에 빠진 듯 했다. 설이를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어서 설이 몰래 촬영장에 방문하고 싶다고 했기 때문에 미리 설이에게 외출 내용을 보고할 수 없다는 것이 최민욱 형님이 고민하는 이유일 것이다.
"신 매니저님도 괜찮을 것 같다고 하셨거든요. 차에만 있다가 살짝 구경하고 돌아오면 되니까 걱정 없어요. 형님, 네?"
"음…… 알겠습니다."
겨우 최민욱 형님을 설득하는 것에 성공했고, 나는 누리를 데리고 빠르게 주차장까지 이동했다.
누리와 함께 촬영장 나들이를 떠나는 내 마음은 아이보다 더 설렜다. 사실, 어린 아이를 데리고 촬영장을 따라다니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에 설이 스케줄에 동행하는 것은 무척 오랜만이었다.
"건물 지하주차장에 대기하고 있다가, 30분 내로 다시 돌아오는 겁니다."
운전하면서 최민욱 형님은 내가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몇 번이나 반복해서 말했다.
"아이고, 알고 있습니다. 형님 왜 그렇게 걱정하세요? 누리 옆에는 보호자인 제가 있으니까 문제 없어요!"
"……차라리 누리 혼자인 게 더 가드하기 편합니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면서 최민욱 형님은 핸들을 꺾었다. 어쩐지 형님의 목소리에 한숨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마치 나를 사고뭉치라도 되는 듯 취급하는 것에는 조금 발끈할 뻔했지만, 사실 나보다도 누리가 더 의젓한 것은 사실이어서 납득되었다.
특히 밖에 나오면 더 과묵해지는 누리는 차에서 내릴 때부터 내 손을 꼬옥 잡고, 제 쪽이 내 보호자라도 되는 듯이 주차장 안을 날카롭게 두리번거렸다. 수상한 사람이 나타날 까봐 경계하는 모습이 제법 믿음직스러웠다.
"아빠, 이제 가자. 안전해요."
주차장 엘리베이터로 향하면서 누리가 내 손을 잡아 끌었다. 마치 경비견과 함께 산책하는 기분이라서 피식 웃음이 났다. 보드라운 손으로 나를 꼭 잡고 이끄는 누리가 앞에 있고 뒤쪽에는 최민욱 형님이 있으니, 철통보안이 따로 없었다.
3층 건물 전체가 포토그래퍼 선생님 소유였고, 아무나 들어올 수 없으니 건물 내에는 모두 촬영 관련자들뿐이었다. 설이가 2층에서 촬영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에 우리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지하 주차장에 서 있는 우리들 앞에 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키스하는 두 남자의 모습을 목격했다. 나뿐만 아니라 내 옆의 누리, 등 뒤의 최민욱 형님도 함께 보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굽히며 누리의 눈가를 내 손바닥으로 잽싸게 가렸다.
"읏…! 이봐, 너 진짜 이럴 거야?"
엘리베이터 안쪽 벽에 밀쳐진 채로 기습키스를 당하고 있던 듯한 권영도가 상대를 밀쳐내자, 상대 남자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항변했다.
"이렇게 안 하면, 당신 나 안 보잖아…!"
그 상대방은 배우 조안율이었다. 직접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내가 그루 엔터테인먼트에 처음 입사했을 때에 매니저를 맡을 뻔했던 배우였기 때문에 프로필 사진과 자료들을 많이 봐서 알 수 있었다. 비련의 남 주인공 같은 애절한 표정을 한 조안율은 방금 전까지 촬영 중이었는지 메이크업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권영도 이사님 차에 탔을 때 조안율이 전화를 걸어와서 두 사람이 예전에 사귀던 사이였던 것을 내게 들킨 적도 있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이렇게 밀폐된 공간에서 키스하는 모습이라니…….
두 사람은 뒤늦게 엘리베이터의 열린 문 밖에 서 있는 우리 셋을 발견했고,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특히 나를 본 권영도의 표정은 경악에 가까웠다. 놀라움과 숨길 수 없는 반가움으로 점철된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며 내게 시선이 꽂혔다.
"아… 한준 씨."
닫히려는 엘리베이터 문을 내 등 뒤에서 손을 뻗은 최민욱 형님이 버튼을 눌러 멈췄다.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며 권영도 이사를 향해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이사님. 저기… 잘 지내시죠?"
안부를 묻기 참 뭣한 상황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못 본 척할 수도 없었다.
어찌나 격한 키스였는지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권영도가 당황한 듯 얼굴을 조금 붉혔다.
"어떻게 여기서… 아, 한설 후배님도 촬영 있었죠."
권영도는 내 손을 잡고 있는 누리를 흘깃 내려다보더니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미소 지었다.
그가 누리의 존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설이와 꼭 닮은 우리 아기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권영도의 시선이 어쩐지 조금 서글퍼 보였다.
배우 조안율은 낯선 내 얼굴을 빤히 훑어보며 권영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곤 차가운 목소리를 냈다.
"누군데? 아이돌? 얘는 언제 사귀던 앤데요?"
"그렇게 연락해도 안 받더니… 그 동안 아이 돌보느라 바빴나 봅니다."
조안율의 질문을 들은 채도 안 하며 권영도는 내게 말을 건넸다. 전에 없이 기운 없는 목소리였는데 왠지 그게 마음 불편해서 나는 아, 뭐… 그렇죠… 죄송합니다… 하고 얼버무리듯 대답했다. 조안율의 의심처럼 마치 전에 사귀었던 애인을 대하듯 슬픔이 담긴 은근한 시선으로 날 바라보는 권영도의 눈빛을 나도 모르게 피해버렸다.
"아빠아-, 빨리 가자. 설이 만나러 가요. 응?"
남이 내게 말 거는 것을 싫어하는 누리는 내 손을 잡아 당기며 칭얼거렸다. 권영도를 올려다보는 누리의 눈꼬리가 제법 매섭게 올라가 있었다.
경계하는 표정의 누리를 내려다보며 권영도는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닮았네요. 무서울 정도로."
중얼거리는 권영도 옆에서 조안율은, 주인의 관심을 빼앗겨서 잔뜩 성이 난 강아지처럼 권영도의 팔을 잡아 끌며 안달했다.
"누군데요, 뭐야. 대체 무슨 사이야, 영도 씨. 응?"
마치 불륜 드라마 속 한 장면 같은 이상한 이 분위기를 정리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최민욱 형님이었다. 타인의 사사로운 인간관계 따위는 경호 업무와 무관하여 관심 없다는 듯 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두 분, 내릴 거면 빨리 내리시죠. 저희는 올라가야 해서 말입니다."
"아…… 네. 죄송했습니다."
권영도가 내리자 조안율이 조르르 따라 내렸다.
"저, 그러면 안녕히…"
엘리베이터에 타서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하자, 닫히는 자동문 사이로 권영도는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미소 띤 얼굴로 작게 끄덕였다. 어쩐지 그의 마지막 표정에 나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런데 전 애인이라더니, 조안율에게 권영도는 지나간 사랑이 아닌 모양이다. 제 이미지를 챙기거나 몸을 사리지도 않고 자신에게 매달리는 사람이 있으니 권영도 이사님도 다행이 외롭지는 않으시겠다.
"하아… 제가 이래서 한준 씨 가드가 어렵다고 하는 겁니다."
최민욱 형님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중얼거렸다.
"지금 일은 따로 보고 드리지 않겠습니다만, 또 다른 '아는 남자'와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겠습니다."
"아하핫… 민욱 형님,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제가 꼭 무슨 희대의 바람둥이 같잖아요.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네."
진땀 빼는 내 옆에서 누리는 내 손을 잡고 흔들면서 동요를 흥얼거렸다. 누리는 그저 방해꾼이 사라진 것이 기쁜 모양이었다.
공간 전체가 촬영장인 2층에 도착하자, 피사체에게 조명을 집중하느라 다른 부분은 어둑하게 조도를 낮춘 상태였다. 그 덕분에 스텝 분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들어올 수 있었다. 찰칵거리는 카메라 셔터 음과 사람들의 작은 수선거림, 그리고 팝송이 흘러나오는 배경 사이에서 오롯이 빛의 집중을 받고 있는 배우 한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간이의자 위에 긴 다리를 접어 걸터앉은 설이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조금씩 포즈를 바꿔가면서 촬영에 임하고 있었다.
부스스하게 흐트러뜨린 머리카락과 창백한 피부, 붉은 입술이 도화지 같은 배경 안에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몸에 달라붙는 얇고 검은 목 폴라 티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은 뼈대 곧은 몸이 아름다웠다. 자연스럽게 어깨를 구부리고 앉아 있었는데, 그 자체로도 분위기 있는 작품이었다. 나른한 표정의 설이는 눈을 감으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깎아 내지른 절벽 같은 날카로운 턱 선과 입술, 콧대의 곡선이 완만한 이마로 올라가며 아름다운 굴곡을 만들어냈다. 눈 감은 설이의 섬세한 얼굴 옆에서는 공중에 떠다니는 먼지 한 톨도 흰 눈 결정처럼 예쁘게만 보였다.
"우아… 찰칵 찰칵해…."
내 손을 잡아 끌며 속삭이는 누리의 목소리에 나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꼴사납게 입을 벌린 채로 멍청한 표정이 되어 설이를 감상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응, 그러네. 찰칵하고 사진 찍고 있지?"
누리는 아무래도 촬영하며 배우로 일하고 있는 제 아빠의 멋진 모습보다도, 빛이 반짝이며 셔터 음 소리를 내는 카메라에 정신이 쏠린 모양이었다. 어쨌든 눈을 빛내며 즐거워 보이는 얼굴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품에 안에 올리자, 누리는 내 목덜미를 껴안은 채로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미어캣처럼 촬영장을 열심히 구경했다.
우리를 먼저 발견한 신 매니저님이 내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형님하고 조카님 오셨네. 촬영 거의 다 끝나가요."
누리는 얼굴을 익혀 알고 있는 신 매니저님을 보자 예의 바르게 고개를 꾸벅 숙여서 인사했다. 흐뭇한 얼굴로 누리의 손을 잡고 흔드는 신매니저님과 몇 마디 주고 받고 있을 때, 촬영이 끝났다.
공간 전체의 조명을 밝혀 주변이 밝아지고, 누리를 발견한 스텝들이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태어날 때부터 주목 받아온 누리에게는 이미 일상이었기 때문에 누리는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내게 내려달라며 바둥거렸다.
스타일리스트 팀에게 둘러싸여 있던 설이가 내 쪽을 보며 싱긋 웃었다.
"아……."
마치 짝사랑 상대가 제게 아는 척을 해주어서 놀란 소년처럼 내 가슴이 뛰었다.
이제 와서 정말 주책이다 싶었지만, 수많은 촬영장 사람들 사이에서 나를 금세 발견하고 다정한 눈빛을 멀리서 보내오는 설이의 모습은 가슴 설레게 하면서도 마음을 찡하게 하는 감동이 있었다.
"설아아-"
누리는 망설임 없이 도도도 뛰어가며 손을 뻗어 제 아빠에게 안겼다. 배우 한설은 조카라고 알려진 제 판박이 꼬마를 안아 올리며 다정하게 아이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밖에서 만나니까 특별히 반가웠는지 누리는 제 아빠를 꼭 끌어안으며 목덜미에 고개를 폭 기대어 안겼다. 그 모습에 가까이 있던 스타일리스트 보조 스텝들이 아아, 하고 감탄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미남과 아이의 조합을 흐뭇하게 감상하는 그들 쪽으로 다가가자, 나를 아는 몇몇이 인사를 해왔다. 마주 고개를 숙이며 설이의 곁에 섰다.
"형, 왜 말도 없이 왔어. 애 데리고 오는 거 힘들었을 텐데."
예상하지 못한 만남이 무척 반가운 듯 설이는 눈동자 가득 나를 담으며 부드럽게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촬영 중에는 볼 수 없는 자연스럽고 달콤한 표정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계속 설이와 우리 쪽을 주목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 설이 너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그랬지. 누리한테 너 일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싶었거든."
촬영을 위해서 스프레이를 뿌려 고정한 설이의 머리카락이 신기한지 누리는 설이 품에 안겨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근데… 오랜만에 촬영하는 거 보니까…… 엄청 멋있다, 설아."
칭찬의 말을 하는 게 왠지 쑥스러워서 입가를 긁적이며 헤 웃자 설이가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리고는 내 쪽으로 몸을 숙이며 내 귓가에 입술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속삭였다.
"지금 형한테 키스하고 싶은데, 안 되겠지."
"어어? 어……"
눈에 띄게 당황하는 내 얼굴에 설이는 만족한 듯이 피식 웃었다. 나를 놀리려는 수작이었던 것 같은데, 나는 매번 이렇게 또 당하고 만다.
얼굴이 붉어진 내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우리 대화를 엿듣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설이의 등짝을 밉지 않게 살짝 때렸다.
"너 정말 혼나, 한설."
"응. 집에 가서 형한테 혼날게."
날 내려다보며 능글맞게 대답하는 설이를 당해낼 재간이 없다. 누리도 이제 촬영장이 지겨워졌는지, 집에 가자며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설이가 메이크업을 지우고 돌아갈 준비를 하는 동안, 누리는 스텝 누나들에게 예쁨을 받았다. 사진이나 동영상 촬영은 철저히 금지했지만, 신원이 분명하고 위험하지 않은 지인들과 이야기하는 정도의 교류는 괜찮았다. 연예인과 다를 바 없는 누리의 상황 특성상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럴 때 조금이라도 사교성을 길러주고 싶었다.
"어머… 너는 어쩌면 네 삼촌이랑 이렇게 꼭 닮았니? 천사가 따로 없다, 얘."
"속눈썹 긴 것 좀 봐. 앙증맞은 입술도 미치겠어."
촬영 감독님이 주신 캐러멜과 사탕을 손에 쥔 채로 누리는 저와 시선을 맞춰 웅크려 앉은 누나들을 빤히 바라봤다. 그저 숨 쉬며 그렇게 바라봐주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팬 서비스였다. 누나들은 누리의 귀여움에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누가 이렇게 머리를 멋지게 빗어 넘겨 줬어요, 응? 예쁜 리본 타이는 누가 해줬어요?"
"……엄마."
누리는 짧게 대답하며 내 옷자락을 잡아 끌었다. 그들의 시선이 내게로 꽂혔다.
평소에는 그렇게 아빠라고 잘 부르더니 이런 순간에 왜 갑자기 또 호칭이 엄마로 바뀌는지 모를 일이었다.
내가 어색하게 웃자, 메이크업 팀 스텝이 불쑥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애 어머니께서도 엄청 미인이신가 봐요. 그러니까 아기천사가 태어났겠죠?"
"그러게, 공개되지 않은 일반인이라는 건 아는데… 보통 한쪽 유전자만으로 이렇게까지 예쁘기 힘들거든요! 아내 분께서 참 예쁘시겠어요."
"맞아요. 선남선녀이시겠네요!"
"아… 음, 감사합니다."
딱히 대답할 말이 없어서 그저 웃고 말았는데, 누나들에 내게 말을 거는 것이 기분 나빴는지 누리가 내게 매달렸다.
"엄마, 내 거야. 누리 거에요!"
내 다리를 와락 끌어안으며 주변 누나들을 매섭게 노려보는 누리의 태도에 모두가 당황했다. 누가 봐도 내 쪽이 '엄마'인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제 누리가 엄마와 아빠 정도는 충분히 구별해서 말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인지, 모두들 물음표 가득한 시선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때 구세주처럼 설이가 등장했다. 메이크업을 말끔하게 다 지우고, 잘생긴 맨 얼굴을 모자를 눌러 써서 반쯤 가린 장신의 미남이 몸을 숙여 내 다리에 매달린 누리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형, 이제 그만 가자."
"삼초온……."
누리가 설이의 팔뚝에 매달리며 삼촌이라고 웅얼거려준 덕분에 주변의 의심은 다시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들의 관심사는 나와 가공의 아내에서 눈 앞의 천사들에게로 홀랑 넘어갔다. 설이와 누리 조합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온통 시선과 마음이 쏠리게 만들었다. 둘이 함께 있는 걸 보면 쓸데없는 잡생각을 머릿속에서 사라지게 하는 마법 같은 게 있는 듯 했다.
"혹시 나중에 애기 동생 생기면, 그때도 촬영장에 데리고 놀러 와주세요!"
"어머, 그래요! 둘째도 너무 예쁘겠다."
설레발 치는 그들의 환호 속에서 나는 귀 끝을 붉히면서 겨우 빠져 나왔다. 내게 있지도 않은 아내라는 인물에 대해서 소문만 무성한 상태였기 때문에 아무래도 그들은 내가 미혼부라는 쪽 소문보다, 내가 어떤 여인과 오붓한 결혼 생활을 하는 중이라는 쪽을 믿는 모양이었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누리가 안전벨트를 만지작거리다가 물었다.
"있잖아, 누리, 동생 생겨요?"
운전 중인 최민욱 형님은 아무것도 못 들은 척 묵묵히 핸들을 돌렸고, 조수석에 앉아 있던 설이가 뒷좌석의 누리와 내 쪽을 돌아보았다.
나는 마치 변명하듯 설이를 바라보며 아, 아니…! 그게…! 하고 말을 더듬었다. 누가 보면 둘째를 갖고 싶어서 내가 아이에게 물어보도록 부추긴 것처럼 보일 분위기였다.
설이는 내 표정을 가만히 살펴보다가 누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누리. 동생 갖고 싶어?"
누리는 그 질문에 눈을 깜빡이며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휙휙 저었다.
"아니야. 누리는 아빠만 있으면 돼."
내 쪽으로 고개를 폭 기대면서 누리가 대답했다.
설이는 흐음, 하고 내 쪽으로 다시 시선을 한참 두더니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려 카 시트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최민욱 형님이 운전석에서 이런 대화를 다 듣고 있다고 생각하니 민망해서 가슴이 콩닥거렸지만, 그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누리는 내게 기댄 채로 새근새근 잠이 들었고, 설이는 차에서 내릴 때까지 말이 없었다.
***
"형이 원하면, 노팅해줄 수 있어."
귓불을 씹듯이 빨면서 설이가 뜨겁게 속삭였다. 귓가에 스미는 낮은 그 목소리만으로도 몸이 움찔거릴 정도의 자극이었다.
"아니, 읏… 으응… 나는, 그게 아니라……"
상황상 내가 둘째 아이를 갖고 싶어하는 것처럼 되어버렸는데, 사실과는 조금 달랐다.
그러나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샤워를 한 뒤에 침실에 들어올 때까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있던 설이가 느닷없이 침대 안에서 내 등을 끌어안으며 내게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던 것이다.
설이는 망설임 없이 파자마 잠옷을 끌어올리며 내 등줄기를 따라 입을 맞추고 바짝 선 유두를 잡아 꼬집듯이 세게 주물렀다.
갑작스러운 애무에 내 아래도 반응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나는 몸을 웅크린 채로 등 뒤에서 나를 만지는 설이의 손길과 입술을 그저 받는 것만도 벅찼다.
맨 허리를 어루만지던 손길이 내 골반을 잡아 저를 마주보도록 내 몸을 돌렸다. 나는 가빠지기 시작한 숨을 겨우 내쉬며 설이의 맨 가슴팍을 밀어냈다. 설이에게서는 방금 씻어 향긋한 비누냄새가 났다. 그 사이에 섞여있는 설이의 체향이 콧속으로 스며들자 내 몸이 금세 녹아 내렸다.
어두운 방 안에서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깝게 껴안은 채 설이는 내 눈을 마주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형, 내 아이가 또 갖고 싶어?"
얇은 파자마 바지 밖으로 설이의 큰 손이 내 엉덩이를 주물렀다. 중지가 엉덩이 골 사이 근처를 노골적으로 어루만지고 있었다. 나는 가쁜 숨 사이로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대답이 애매하다고 생각했는지 설이는 내 코끝에 살짝 입을 맞추며 눈썹을 끌어올렸다.
"……흐음. 나 노팅은 너무 오랜만이라, 자제하기 힘들 것 같은데."
나를 침대 시트 위에 파묻듯이 누르며 설이가 내 몸 위로 타고 올라왔다. 설이는 샤워 후 아래쪽만 파자마를 입은 상태였기 때문에 맨 가슴이 스탠드 조명 불빛에 굴곡을 드러냈다. 단단히 조인 복근이 느릿하게 숨 쉴 때마다 움직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침을 삼켰다.
오른손으로는 내 윗옷을 밀어 올리며 가슴 위를 부드럽게 어루만졌고, 왼손은 내 속옷 안으로 들어와 움찔거리는 엉덩이 사이를 손톱으로 살짝 긁어 자극하며 주물렀다. 내 허벅지 사이에 힘이 절로 빠졌다.
내가 다른 생각을 못하도록 키스하며 입술 사이를 부드럽게 헤집던 혀가 빠져나갔다. 설이가 내 턱을 핥았다.
"만약 내가 자제하지 못해서… 커다란 짐승으로 변하면, '여기'도 달라지기 때문에 위험할 거야."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집중하던 나는, 설이가 말하는 도중에 허리를 꾹 밀어붙였기 때문에 ‘어디’가 달라진다는 것인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평소에도 어떻게 수납하는지 신기할 정도의 크기였는데 설이의 것은 단단하게 서기 시작하면 더욱 엄청났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얼굴과 달리 그 모양이 무척이나 흉측했다. 만약 설 표범의 모습이 되면, 그것도 모습을 달리할 것이다.
어느새 허벅지까지 내려간 나의 파자마 바지를 밑으로 더 끌어내리며 설이가 내 맨 허벅지에 제 아래를 꾹 밀어붙였다. 이미 옷 안에서 완벽하게 발기하여 모양을 갖춘 설이의 남근이 여린 피부 위를 짓누르는 감촉이 야릇했다. 움찔, 어깨를 떨자 설이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 상태로 노팅하면 형 여기, 찢어질 거야."
그래도 괜찮으면… 노팅해줄까.
설이가 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때 반쯤 선 내 것이 팬티 안에서 울컥 선액을 터뜨리듯 내보냈다. 설이의 겁 주는 목소리에 내가 이렇게나 흥분해버렸다는 것에 나는 당황해서 시선을 피했다. 얼굴이 뜨거워졌다.
내게 긴 속눈썹을 내보이며 시선을 내려 이미 젖은 내 팬티 쪽을 내려다보는 설이의 시선에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단단한 어깨를 쥐었다.
"저기, 그게 아니라… 설아, 내가 또 임신하고 싶다는 게 아니야……"
다시 눈을 떠서 설이를 바라보는 내 눈가에 창피함 때문인지 아니면 당황했기 때문인지 물기가 어렸다. 나는 빤히 바라보는 설이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되는대로 지껄였다.
"그, 거기가… 찢… 찢어지는 건… 너무 무섭… 무섭고… 아니, 물론 지금 반응을 해서 밑에가 젖기는, 했는데… 그건 내가 노팅해달라는… 그런 게 아니고, 조건반사라서… 설이 너랑 하는 건… 좋은데… 어…"
열심히 말하면서 내 시선이 천장을 이리저리 헤매고 있는 동안, 설이가 내 어깨와 목덜미 사이로 고개를 기대더니 곧이어 큭큭대고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너 나 놀리는 거지."
머리를 든 설이가 여전히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리고는 내 뺨에 제 콧날을 대고 부드럽게 비볐다. 그리고는 마치 귀엽다는 듯 내 뺨을 살짝 깨물었다.
내가 임신을 원한 건 아니었다는 걸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설이가 내 옆에 누우며 내 허리를 단단히 껴안았다. 머리꼭지에 꾹 입을 맞추며 그 자세 그대로 내게 말했다.
"형. 둘째는 나중에, 더 신중하게 생각해보자. 우리가 원한다면 임신은 가능하겠지만…… 형 몸이 괜찮을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해."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설이가 내 등을 쓸었다.
"그때까지는, 그냥 사랑하자."
어깨에 입술을 대며 말하는 설이의 목소리가 농밀해졌다.
"노팅은 안 할 거지만…… 잔뜩 찢어져도 모르고 기뻐서 울 만큼 예뻐해 줄게, 형."
아니, 그러니까 설아. 형은 그렇게 격렬한 걸 원하는 것도 아니야.
내가 변명을 하기도 전에 설이는 윗옷을 내 턱까지 밀어 올리며 허리를 더 깊이 껴안더니 바짝 선 내 젖꼭지를 입 안에 가두고 쪽 빨았다.
"아으응…!"
갑작스러운 자극에 교성이 높아졌다. 아직 옆 방의 누리가 잠들지 않았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입을 꾹 다물었지만 온몸이 바르르 떨릴 정도로 설이는 내 가슴팍을 세게 빨고 핥았다.
그때였다. 굳게 잠겨있던 우리 침실의 문이 쾅! 소리를 내며 강한 힘으로 열렸다.
"뭐, 뭐야?"
나는 화들짝 놀라서 설이의 팔뚝을 잡았고, 설이는 고개를 들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문 앞에는 어쩐지 엄청나게 화난 얼굴의 누리가 식식거리며 화를 삭이듯이 어깨를 들썩이며 서 있었다.
"아… 저기… 누리야…?"
하얀 고양이 그림이 잔뜩 그려져 있는 잠옷 파자마를 입은 누리는, 꼬리와 귀가 튀어나온 상태였다. 보송보송하게 흰 털이 제법 자랐고 표범 특유의 문양마저 선명해진 누리의 꼬리가 문지방을 탁 쳤다.
"다 봤어! 누리 다 알아!"
눈썹이 올라가 제법 날카로운 표정이 된 누리는 침대에 엉켜 있는 우리 두 사람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설이는 이불을 끌어올려 내 벗은 몸을 감추듯 덮었다. 그런 설이를 울먹이는 눈길로 노려보던 누리가 서러운 듯 입술을 떨며 말했다.
"누리도… 누리도 아빠 찌찌 먹을래!"
나름 으르릉 소리까지 낸 누리가 침대 위로 점프하며 뛰어 올라왔다. 그리고는 이불로 덮인 나와 설이의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내 목을 꼬옥 끌어안았다. 잠시 놀라 멍해져 있던 나는 풉, 웃음을 터뜨렸다.
최근 방에서 설이와 내가 단둘이 자는 것까지 질투하기 시작했던 누리는, 문 잠그고 우리가 몰래 뭐하고 노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불시에 문을 열었는데 설이가 내 가슴을 애무하는 모습이 젖 먹는 것으로 보여서 화가 났던 것이다.
누리가 아기일 때 남자인 내 몸으로는 모유가 나오지 않아서 분유를 먹였었지만, 가끔은 젖 먹이듯 누리를 안고 가슴을 내어줬었다. 그게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지 누리가 내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며 갓난아기처럼 어물어물 젖을 찾았다.
"안 돼, 너 이미 그거 졸업했잖아."
설이가 누리를 내게서 떼어놓으며 단호하게 말하자, 누리가 뺨을 잔뜩 부풀리며 제 아빠를 솜방망이 같은 주먹으로 툭툭 때렸다. 쓰읍- 하고 혼내는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그만두었지만, 분이 풀리지 않는지 화난 얼굴은 그대로여서 설이도 피식 웃고 말았다.
나는 이불 속에서 내려간 바지를 올려 입고 윗옷도 바르게 내린 뒤에 다시 누리를 품에 껴안았다.
"그런데 누리 너, 문 어떻게 열었어? 분명히 잠갔었는데?"
내 물음에 크고 맑은 눈을 예쁘게 깜빡이며 누리가 착하게 대답했다.
"으응, 누리 눈 꼭 감고 '열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열었어."
"아하……."
아기 설 표범의 뾰족한 귀 끝을 파닥이며 말하는 누리를 내려다보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꼬리가 가볍게 살랑거렸다.
하긴, 설이는 화가 나면 천장 조명을 떨어뜨리고 차 한 대 정도는 맘대로 움직였다. 그런 설이를 꼭 닮은 내 신비로운 아기가 잠긴 문 여는 것 정도는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누리 오늘 여기서 잘 거예요."
단호하게 발언한 누리가 내 어깨에 말랑거리는 제 뺨을 꾹 누르며 나를 껴안았다.
설이는 뒷목을 주무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래도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래, 우리 귀염둥이. 아빠들이랑 같이 자자."
물론 설이와 내가 교대로 욕실에 다녀오며 잔뜩 흥분한 상태였던 각자의 몸을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하기는 했다. 그래도 결국에는 한 침대에 셋이 누워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누리는 나와 설이 사이에서 작은 몸을 웅크리고 너무 행복한 얼굴로 새근새근 잠들었다.
아이를 사이에 둔 채 설이는 내게 팔베개를 해준 상태로 눈을 감고 있었다. 고운 옆얼굴을 흘깃거리자, 설이는 눈을 감고 조용히 말했다.
"……형. 그렇게 쳐다보면 나 못 자. 둘째 만들기 전에 어서 눈 감아."
나는 픽 웃으며 눈을 감았다. 언젠가는 정말로 다시 임신 계획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직은 이대로, 우리 셋이서 행복하자. 귀여운 나의 설 표범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