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설 시점 외전 : 나의 반려, 한준
나에게는 형이 있다.
"설아."
아주 소중하고 예쁜 것을 부르는 목소리로 형이 나를 불러주면 나는 봄 햇살에 녹는 눈처럼 내 마음이 부드럽게 녹아 내리는 것을 느낀다.
형은 누구에게나 다정하고 말간 얼굴로 웃어준다. 타인을 의심하지 않고, 친근하게 대하기 때문인지 사람들은 내 형을 지나치게 좋아한다. 내가 그들은 가만히 두고 보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의 형이 즐거워 보이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그들은 모두 남일 뿐인데, 가끔 형은 그들에게 과도하게 친절을 베푼다. 그래서 그들은 형의 어깨를 만진다거나 손을 잡고, 포옹을 하면서 주제 넘는 짓을 한다.
"설아, 수영이가 애들이랑 다 같이 학교에서 야영 할 거래. 우리도 같이 할까?"
성인이 된 지금도 내 형은 천진하지만, 어릴 때는 더욱 순했다. 무결한 순백의 소년이었다. 커다란 초식동물 같은 눈을 반짝이며 내게 말을 걸면, 나는 감히 형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형은 순진무구한 눈동자 안에 늘 나를 가득 담았다. 환하게 웃을 때마다 발그레한 뺨이 보드랍게 올라와서 그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나는 욕망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때부터 미소 짓는 형의 얼굴을 홀린 듯 만지작거리곤 했다. 형은 단 한번도 그런 내 손길을 피하거나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내게 형은 유일무이한 존재이며 형에게도 내가 그런 존재임이 틀림없다.
아주 어린 시절, 처음 형을 본 순간부터 나는 느꼈다. 형은 내 것이다.
형도 그 사실을 빨리 깨달아야 할 텐데.
내가 소심하고 자그마한 강아지처럼 형의 옷소매 끝을 붙잡고 기운 없이 흔들면, 형은 늘 내게 귀 기울여주었다.
"혀엉. 그치만, 우리가 밤 늦게까지 돌아가지 않으면, 두 분 다 걱정하실 텐데……."
"아."
상냥하고 마음이 약한 내 형은,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특히 더 약해졌다. 그럴 때, 내가 눈꼬리를 내린 채로 아주 슬픈 목소리를 느리게 내며 쳐다보면 금새 그 맑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혀엉. 그래도 갈 거야…?"
"으음. 아냐, 안 갈게. 설이 네 말이 맞아. 부모님께서 걱정하실 거야, 형이 생각을 못했어."
다정한 나의 형.
형이 내게 약해질수록 나는 알 수 없는 기쁨으로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게 어떤 이름의 감정인지는 더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되었지만, 내겐 이미 어릴 적부터 익숙한 욕심이었다.
이 세상에 가족은 우리 넷뿐이며 형의 두 부모님과, 형의 하나뿐인 동생인 내가 그 구성원의 전부이기 때문에 우리를 제외한 사람들은 다 타인이며 적이다. 타인은 형을 내게서 빼앗아갈지 모르는 잠재적 적군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아주 어릴 적부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마치 내 가족 이외에는 사냥감 혹은 적으로 여기는 유전자가 내 몸 깊숙이 새겨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한준, 같이 아영 가자. 이 형님이 재미있게 놀아줄게. 나 게임기도 있어!"
제 또래보다 한참 마르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새하얀 형의 목덜미에 함부로 팔을 걸치면서 김수영이 그렇게 말하면, 형은 웃으면서 대꾸해주었다. 김수영은 아마 내 기억 속에서 가장 처음으로 거슬렸던 인간이 아닐까 싶다.
그 시절, 강원도 산골에 위치한 초등학교에서는 교내 학생 인원수가 적기 때문에 모든 학년의 아이들이 함께 어우러져 놀았고 모두가 내 형을 좋아했다. 특히 그 중에 김수영은 유독 내 형을 귀찮게 따라다녔다. 착하고 순한 나의 형은, 그런 김수영을 '친구'라는 이름의 쓸데없는 카테고리에 넣었고 내게도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가족도 아닌 그를 적군 이외의 것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마치 제가 내 형에게 뭐라도 되는 듯, 날 경계하는 눈빛을 보내며 형의 팔을 잡아 끌고 형에게 아양을 떠는 그 모습이 나는 어린 나이에도 가소롭게 느껴졌던 것 같다.
형은 내 거야. 네가 그걸 이해하지 못한다면, 직접 가르쳐 줄게.
교내 소풍으로 계곡에 갔을 때, 나는 김수영과 단 둘이 바위로 올라갔다가 계곡 물 아래로 떨어졌다. 김수영은 내가 물에 빠진 것을 유일하게 목격한 아이였다. 내가 빠지지 않도록 내 손을 잡은 그 아이의 손을 뿌리친 것은 나였지만, 놀란 김수영은 담임 교사를 부르지도 못했고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물 속에 가라앉는 나를 내려다보며 덜덜 떨었다. 물 속에 얼굴이 잠기는 순간까지 나는 그 겁에 질린 눈동자를 또렷이 마주보고 있었다.
구급차가 오고 내가 물 위로 건져졌을 때, 나는 급격히 체온이 내려가서 정신이 흐려졌지만 그래도 내가 원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김수영을 쏘아보는 형의 모습이었다. 형은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는 김수영을 연거푸 주먹으로 때렸다. 주변에서 아이들과 교사가 말릴 때까지 형의 주먹질은 계속되었다.
“혀엉… 나 추워.”
“그래, 설아. 형 여기 있어. 걱정하지 마. 응?”
“응…”
나에게만 유독 다정한 형의 목소리, 내 손을 꼭 쥐는 형의 손길을 느끼면서 나는 비로소 미소 지을 수 있었다.
형은 나를 지키겠다고 굳게 다짐한 듯 나를 부둥켜 안았다. 내가 죽을 뻔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형은 그 후로 가끔 나를 향한 타인의 시선과 나에게 다가오는 인간에 대해 예민하게 굴었지만, 그런 점들이 도리어 사랑스러웠다. 형은 거대한 맹수를 부둥켜 안은 채 싸고 도는 병아리처럼 보였다.
나를 귀신 보듯 하며 피하던 김수영이 어느 날 형이 곁에 없을 때, 내게 불쑥 물었다.
"너 왜 그랬어…?"
두려워하는 눈빛으로 덜덜 떠는 몸을 뒤로 빼면서도 김수영은 불손한 눈빛으로 경계하며 내게 따져 물었다.
"내가 널 물에 빠뜨린 게 아니잖아… 난 널 도우려 했어…! 근데 넌… 넌…… 한준한테 말해. 내가 널 괴롭힌 게 아니잖아. 내 잘못이 아니잖아…!"
김수영은 내가 손이라도 뻗을 까봐 두려워하는 얼굴로, 감히 내 형의 이름을 말했다. 제 딴에는 무척 용기를 낸 모양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어떻게든 내 형과의 오해를 풀고 싶어하는 그 모습에 나는 조금 화가 났던 것 같다.
웃음이 나왔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김수영 등 뒤의 교실문 한가운데가 무언가로 강타당한 것처럼 우그러졌다. 김수영은 흠칫 어깨를 떨며 뒤돌아본 뒤에 다시 경악한 표정을 내게로 돌렸다.
"네 잘못이지. 내 것을 만졌으니까. 한준, 이라고 내 것을 함부로 부르지마. 남의 것을 욕심내지 마. 형이 그런 건… 나쁜 짓이라고 했어."
형과의 오랜 연습 덕분에 학교를 다니면서는 귀나 꼬리가 튀어나오지 않았지만, 가끔 화를 참으면 눈동자에 잿빛이 휘감겼다. 인간과 다른 어떤 짐승의 눈동자였다. 그리고 나를 화나게 한 어리석은 그 아이 앞에서 굳이 그런 것까지 숨길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내가 평범한 모습을 흉내 내는 것은 오로지 형을 안심시키기 위한 것이다. 나는 그 아이가 제 잘못이 무엇이었는지 알기 쉽도록 친절하고 차분하게 설명했다고 생각했지만, 김수영은 뒷걸음질 쳤다.
그 뒤로 김수영은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고, 얼마 후에는 아예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형은 완전히 내 차지였다. 수업이 끝나도 쓸데없는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았고, 나를 그 사이에 끼워 넣으려는 형의 노력도 덜해졌다. 형은 그저 내 손을 잡고 산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며 온전히 나와의 시간을 보냈다. 형과 함께 걷는 길은 사계절 아름다웠다.
다행히도 내가 이상한 능력을 가졌다는 소문은 나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내 마음 약한 형이 아주 슬퍼했을 것이다. 형은 나를 아끼고 좋아하기 때문에 나에 대한 괴소문을 힘겨워했을 게 뻔했다.
나는 눈 속에 파묻힌 채로 칼날 같은 바람으로부터 내 몸을 보호하기 위해 잔뜩 웅크리고 있던 것이 최초의 기억일 뿐인 짐승이었다. 내 자신에 대해서 아는 바는 극히 적었지만, 커 가면서 알아낸 사실들은 꽤 있었다.
따뜻하게 나를 품어준 가족들 이외에는 나의 존재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 주로 내가 분노와 짜증과 같은 감정을 참아내지 못하면 완전히 설 표범의 모습으로 변모하게 된다는 것, 나에게는 타인과 다르게 생각만으로 무거운 물건을 부수거나 옮기는 일이나 비와 눈이 내리게 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흔히 사춘기라고 부르는 시점을 지나가면서 나는 내가 짝을 원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반려가 될 단 한 사람을 강렬히 원하고 있으며 그게 바로 한준, 나의 형이었다.
***
"설아, 혹시 좋아하는 여자애 생겼어?"
형은 그러나 늘 내가 다른 누군가를 좋아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단 한 번도 형 이외의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는데도, 바보 같은 나의 형은 그걸 몰랐다.
형에게 다가가는 여자들을 몇 번이나 빼앗은 끝에, 형이 본인의 연애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부분에서 형은 놀랄 정도로 둔감했고 귀여울 정도로 순진한 소년이었다.
흔히 데이트하는 연인들의 일반적 연애에 대해서는 나도 아는 바가 적었지만, 형을 독점하고 싶은 마음이라면 가슴속을 뜨겁게 데울 정도였다.
독점욕, 그 정염을 간직하면서 나는 인간의 모습으로 청년이 되었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뒤의 형은, 자주 쓸쓸해했다. 그 공허한 마음을 '동생'인 나를 보살피는 것으로 채우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보호자가 사라진 빈 자리를 스스로가 보호자가 되는 것으로 어떻게든 무마하고 싶어했다. 나는 그런 형이 가여우면서도 귀여웠다.
좋은 분들이 떠나간 것과 형이 많이 울게 된 것은 가슴 아팠지만, 단 둘뿐인 집에서 형과 식탁에 마주앉아 식사하고 거실에서 형의 무릎을 베고 눕거나 장을 봐서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일들이 행복했다.
이렇게 영원히 형과 나, 단 둘뿐이었으면.
"우리 설이, 형한테도 이렇게 잘하는데… 나중에 결혼하면 상대한테 얼마나 잘해줄까?"
형은 예쁘게 웃으면서 나를 화나게 하는 재주가 있었는데, 말도 안 되는 가정을 하면서 보드라운 눈가의 살을 접으며 미소 지었다. 유순한 얼굴로 웃으며 형은, 나와 가상의 여자가 하는 결혼을 상상했다. 그런 있을 수 없는 일을 떠올리는 형이 귀엽기도 했지만, 나를 본인에게서 떼어놓을 생각을 한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괘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아무데도 안 가."
"응?"
"형 두고 어디 가지 않을 거야."
차분히 말하며 내가 손을 잡으면, 그 하얗고 말랑거리는 손바닥을 꾹 쥐면서 눈을 지그시 바라보면, 형은 눈빛으로 동요하며 놀랐다. 그래도 내가 자신의 품 안에 있는 것이 기뻐서 못 견디겠으면서, 잘도 나를 다른 누군가와 결혼시키려고 했다.
듣기 좋게 뛰는 형의 심장 박동이 마주 잡은 손의 맥박으로도 느껴졌다. 형은 모르고 있지만, 나를 좋아한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누구보다도 소중해서 나에게서 떨어져 지낼 수 없다. 그걸 형이 하루 빨리 스스로 깨닫기를 나는 바랐다.
그리하여 형의 곁에는 오직 나만이 남을 수 있기를 원했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된 형의 곁에는 우정혁이라는 이름의 아주 거슬리는 존재가 있었다. 내가 그를 학교 뒷산에 처박아버리거나 쓰러지는 나무 기둥에 깔리도록 하지 않은 것은, 끝없는 인내의 결과였다.
아버지가 생전에 나를 형보다 한 살 아래의 동생으로 호적에 넣었기 때문에 교육과정을 거쳐가는 내내 나는 학교 안에서 형과 늘 학년이 달랐다. 같은 교실을 사용할 수도 없을뿐더러 복도와 건물까지 늘 형과 다른 곳에서 지내야 했다.
내게 학교가 얼마나 지루하고 짜증나는 공간인지, 형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흘깃거리는 시선들과 쓸데 없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그 수많은 인간들을 나는 죽여버리지 않는 것이 힘들었다. 어쩌다 창 밖 운동장에 있는 나를 발견하고 기쁨에 찬 초식동물 같은 눈동자를 빛내며 내게 작은 손을 흔드는 형이 나의 유일한 구원자였다. 그 순간만을 위해서 교내에서의 모든 시간을 견뎌내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형은 교내에서 내가 목격할 때마다 그 거슬리는 남자와 함께 있었는데, 우정혁이라는 그 남자는 어릴 적부터 형이 늘 말하던 빌어먹을 '친구'라는 것이었다. 그는 묘한 눈길로 나를 늘 관찰하듯 바라봤고, 내가 타인과 다르다는 것을 어렴풋이 인지하면서도 나를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았다.
우정혁은 근심 가득한 시선으로 무겁게 입을 열었다.
"……한준이 없으니까 하는 말인데. 너 말이다, 조금 더 평범한 척을 하는 게 어떻겠냐."
어떤 헛소리를 할지 들어보자는 생각으로 말없이 응시하자, 우정혁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한준은 너하고 달라서 교내에서 동생과 키스하는 자신을 인정할 수 없을 거다. 그 녀석, 의외로 고지식하고 올바른 성격이니까 말이야."
"…그래서?"
나는 그가 골치 아픈 문젯거리를 보듯 나를 보는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정혁은 마치 조언가처럼 잘도 지껄였다.
"더 천천히 다가가야 할 거다. 네 소중한 형이 상처 받고 깨지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난 형을 깨트리지 않아."
"저기, 난 아무래도 상관 없지만 말이다. 보통 사람들은… 형제간의 지나친 사랑 같은 걸 인정해주지 않거든?"
"상관 없어."
우정혁은 깊은 한숨을 내쉰 뒤, 습관처럼 교복 안 주머니에서 담배를 찾아 더듬거리다가 멀리서 나를 부르는 형의 목소리를 듣자 그만두었다.
"친 누나를, 지나치게 사랑한 입장에서 하는 말이니까 들어둬라. 만약 나에게 기회가 있다면, 난 더 오래 공들여서 고백하고 싶거든. ……뭐, 이제는 영영 기회가 없지만."
쓸쓸한 눈빛이었다. 형이 부모님을 떠올릴 때의 눈빛을 한 우정혁이 나를 지나쳐가며 피식 웃었다.
"참고로 나는 한준한테 연애 감정 같은 거 전혀 안 느끼니까, 그렇게 노려볼 필요 없어."
형은 우정혁과 함께 있으면, 마치 부모님께 의지하는 것처럼 편안해 보였다. 형 곁에는 늘 내가 있는데도, 형은 내 앞에서는 아무런 걱정도 없는 것처럼 푸념하지 않았다. 그건 전부 우정혁의 몫이었다. 형의 유일한 보호자는 바로 나인데도 불구하고.
그게 나를 괴롭게 했지만, 형에게는 나와 달리 친구라는 존재가 하나쯤은 필요하다는 사실을 나는 이해해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형에게 천천히 다가가라는 우정혁의 말은 전부 쓸데없는 소리였다. 형은 그럴수록 내게서 더 멀어지는 선택을 거듭했다.
많은 인간들이 그러하듯 형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두고, 돈에 대한 걱정 없도록 해주어도 형은 어떻게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내게 어떤 상의도 없이 직장을 구했다. 그것도 내가 아주 경멸하는 부류들로 가득한 곳에 뛰어들었다. 연예 기획사, 기자, 캐스팅 매니저…… 삶의 모든 순간에 끼어들어 형과 나의 시간을 방해하고 내게 말을 걸고 사진을 찍어대는 귀찮고 지겨운 존재들과 형은 함께 일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나는 형의 곁을 잠시 떠나야만 했다. 우리 관계를 정비하지 않으면, 형은 영영 나를 기댈 수 없는 어린 동생으로만 볼 것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형은 잠시만 눈을 떼도 누군가와 싸움이 붙어 얼굴에 상처가 나거나 촬영장의 촬영 기구에 깔릴 뻔하는 위태로운 존재여서 형에게서 떠나있는 동안에도 그 곁을 맴돌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저기…! 설아."
오랜만에 촬영장에서 나를 만난 형은, 얼마나 애타는 얼굴을 하고 있었던가.
그리움에 목마른 눈빛으로 계속해서 나를 따라오는 형의 시선이 내 몸에 닿는 것을 느낄 때마다 타는 것처럼 온몸이 뜨거워졌다. 형이 나를 동생이 아닌 남자로 봐줄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형의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는 거지? 거기 지낼 만 해? 집에는, 안 와……?"
가여운 나의 형. 내게 손을 뻗는 형의 손길을 피하는 내 작은 동작에도 형의 눈동자는 흔들렸다.
"반지가 잘 어울리네요, 한준 씨."
"……어?"
가녀린 형의 손가락 사이에 내 손을 끼워 넣어 보드라운 형의 손을 만지자, 형은 나를 한참이나 바라봤다.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형의 심장 박동이 맞닿은 손으로 전해져 왔다.
권영도의 집에서 자지 말라는 내 경고의 말을 들으며 그 커다랗고 유순한 눈동자를 깜빡이던 형은, 그날 밤 내 말대로 권영도의 오피스텔에서 홀로 걸어 나왔다. 나는 그런 형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몰래 지켜보았다. 바로 다가가서 껴안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형을 온전히 다 갖기 위해서는 인내해야만 하는 것이다.
깊은 생각에 빠진 형은 뾰족한 입술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뭘 전부 가진다는 거지? ……내가 줄 수 있는 거라면 좋겠는데."
나는 미소 지었다. 형은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설이 보고 싶다."
나도 형이 보고 싶어. 눈 앞에 있어도, 품 안에 가두고 싶어서 늘 안달이 나.
***
권영도는 우정혁과 다른 부류였으며 명확히 ‘적’이었다. 형에 대한 흑심을 숨기지 않았고, 나의 형에게 끝없이 구애했다. 오만하게도 본인이 연상의 남자이기 때문에 나보다 훨씬 더 유리한 위치에 있기라도 한 듯 여겼다.
죽여도 되지 않을까.
형은 우정혁의 말처럼 이 작은 사회를 이루는 법과 규칙, 도덕이라는 것을 지키고 싶어했고 그걸 당연한 듯 여겼다. 나는 그런 삶의 방식을 존중하고 형을 놀라게 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고 싶었다. 그래서 몇 번이나 주먹을 꽉 쥐어 참아냈다. 내가 아닌 다른 남자가 감히 형의 곁에 서서 빛과 같은 형의 따스한 눈길을 받고 싶어한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
형을 둘만의 가옥에 가두고, 다른 누구도 함부로 우리만의 공간에 들어올 수 없도록 수 겹의 보안 망을 쳐놓고 나서야 들끓는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형을 지켜보도록 내가 고용한 자들이 형에게 누군가가 다가오면 바로 내게 알릴 것이다.
나는 더 이상 형의 착한 아이로 남고 싶지 않았다. 형을 안을 수 있는 유일한 남자가 나라는 것을, 형이 알기를 원했다.
“나 이제 성인이야, 형.”
혼란스러워하는 형의 손을 잡았다.
“나를 위해서…… 어디까지 내어줄 수 있어?”
마음이 순진하고 늦된 나의 형은, 금새 얼굴이 붉어지고 눈빛에 동요가 보였다.
"설아, 나는… 형은…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다 내어줄 수 있지만…… 이런 건 안 돼."
형이 머리로 인지하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아. 몸에 새겨주면 되니까.
"더 어쩌지 못할 만큼… 사랑해. 형."
내 마음과 영혼은, 우리가 처음 만난 때부터 전부 형의 것이야.
탈 것처럼 뜨거운 밤이었다. 형은 그 연약하고 부드러운 팔로 나를 끌어안고 몇 번이나 내 이름을 부르며 울었다. 젖은 목소리로 교성하며 내게만 집중한 형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고 예쁘고 귀했기 때문에 나는 처음 맛보는 형의 살결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드디어 형의 안에 깊숙이 들어갈 수 있게 되었고, 내 마음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뿌듯하고 기쁜 마음으로 가득 찼다.
형은 부끄러워하면서도 다정하게 속삭였다.
"사랑해, 한설. 예쁜 내 설아."
수줍게 물든 뺨과 다정한 눈빛, 달콤한 입술과 내 뺨을 쓰다듬는 솜털 같이 부드러운 손가락, 그 모든 것이 내 것이다. 내 사랑스러운 사람.
나는 내 반려와 내 사이에 끼어드는 누군가를 물어뜯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섬세하고 착한 나의 형은, 내가 누군가를 헤치는 것을 두려워했고 그것이 형의 마음에 상처가 될지도 모르기에 나는 늘 신중해야 했다. 그래서 반대로 타인이 나를 죽일지도 모르는 상황을, 어릴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한 번 만들어내야 했던 것이다.
형을 조수석에 태운 빌어먹을 권영도의 오픈카를 움직여 내 몸에 부딪히게 만들었다. 나는 그 충돌로 차라리 내 팔 한 쪽이라도 뜯겨나가기를 바랐다. 절대로 지워질 수 없는 상처가 내 몸에 남길 바랐다. 그 상처로 하여금 형이 나를 볼 때마다 기억을 떠올리며 경각심을 가지게 된다면, 내가 불쌍해서라도 형은 내 곁에만 있을 텐데.
"혀엉, 나 아파."
어릴 적부터 형은 나의 어리광에 약했다. 게다가 아픈 내 말은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나 너무 아프니까… 내 곁에만 있어, 형…"
고개를 끄덕이는 형의 얼굴이 눈물로 온통 젖어 있었다. 순도 높은 다이아몬드 원석 같은 투명한 눈물 방울이 형의 눈동자에 고여 흘러내렸다. 몸통이 부서지는 통증 속에서도 나는 온 몸에 퍼지는 희열을 느꼈다. 형의 그 맑게 젖은 순수한 눈동자가 오직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이대로 죽는다고 하더라도, 형은 영원히 나만을 사랑할 것이다.
권영도는 그 사고 이후로 나를 극도로 경계했다.
형이 없는 틈을 타서 입원한 나를 찾아온 권영도는, 고요한 병실 안에서 내게 경고했다.
"그만 두시죠, 후배님. 그런 방식으로는 한준 씨를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무슨 말씀이시죠."
권영도는 비난조의 말투와 차가운 미소를 내게 보였다.
"나는 후배님이… 인간이 아닌 그 어떤 불명의 존재라도 상관 없고, 관심 없습니다. 물론 한준 씨를 슬프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당신의 정체에 대해서 발설할 마음도 없고 말이죠."
"……"
"다만 나는 한준 씨가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니까… 한준 씨를 놓아주세요. 어차피 그쪽은 형제잖아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짐승의 모습으로 변해 내 발톱 아래 권영도의 목 줄기를 움켜줄 수 없음이 안타까웠다. 그 언젠가 집 앞 놀이터에서 이 자가 형에게 입맞추려고 했던 때, 나는 그때 이 남자를 죽였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형이 가녀린 팔로 짐승이 된 나의 몸을 끌어안고 덜덜 떨지 않았더라면 권영도는 그 순간 이미 죽었을 운명이었다.
깊은 숨을 삼키며 가까스로 화를 참아내고 나는 미소 지었다.
"내가 처음 형을 만난 순간부터 형은 내 것입니다. 이루어진다는 개념은 없어요. 형은 내 연인이고 반려이며 내 소유입니다."
"무슨…"
권영도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눈가를 찌푸렸다.
그럴 것이다. 그는 타인이며, 우리 두 사람 밖의 세계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의 운명을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내가 누군가를 헤칠 까봐, 그로 인해서 내가 위험에 처할 까봐 늘 두려워하는 형의 어린 사슴 같은 눈망울을 떠올리며 꾹 쥔 주먹 안의 힘을 뺐다.
"그러니까 권영도, 내 것에 접근하지 마. 그쪽은 내가 아니니까 형과는 이루어질 수 없어."
"하지만…!"
"그쪽은 어차피 형에게 그저 지인일 뿐인데, 형에게 누가 더 소중할지 가늠이 안 됩니까? 다음 번에 또 당신이 나를 차로 치기라도 한다면…… 과연 그때도 내 형이 그쪽에게 웃어줄까?"
내 질문에 권영도는 굳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작게 하, 하고 숨을 내쉬듯이 웃었다.
그가 돌아가고 난 뒤, 자리를 비웠던 형은 돌아와서 내 얼굴을 따뜻한 물수건으로 닦아주었다.
"우리 설이 어쩜 이렇게 잘생겼지, 응?"
대체 어떻게 하면 형을 내게만 묶어둘 수 있을까.
나는 내 팔에 머리를 기대고 잠든 형을 새벽까지 지켜보면서 긴 고민에 빠졌다. 새근새근 잠든 형은 여전히 아이 같았다. 형에게는 빈틈이 많아서, 권영도 같은 남자가 언제든 또 끼어들 여지가 있었다.
형은 우리만의 요새에도 타인을 거리낌 없이 들이려고 했다. 이전에 잠시 함께 일했던 아이돌 가수 같은 것들에게도 관대했다. 형의 곁에는 날파리처럼 인간들이 자꾸 꼬였고, 그게 나를 몹시 화나게 만들었다.
위험할 수도 있는 모든 타인에서 친근하게 다가가는 것은, 형의 습성이다. 어릴 적부터 형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것 또한 내 천진한 반려의 귀여운 부분이기에 나는 형을 탓하지 않는다. 형에게 다가오는 그 무리들의 잘못이다.
형을 완전히 갖는 것, 우리가 서로의 반려로서 하나의 가족을 이루는 것, 그건 단 하나의 결론으로 도출되었다.
"아기가 생긴다면, 형도 좋겠지?"
형은 어린 토끼 같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형하고 나 사이에서 아기가 태어나면… 형은 내내 집에서 아기를 돌봐주고 예뻐해 줄 거잖아. 그렇지?"
조금 고민하는 것 같았지만, 사려 깊고 사랑스러운 나의 형은 내게 오래 대답을 기다리는 형벌을 주지 않았다. 곧 입가에 미미하게 미소를 띠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으음… 그렇겠지?"
형을 껴안고 그 부드럽고 내게 꼭 맞는 몸 속 안에 나를 깊숙이 퍼뜨린다면, 형은 내 아이를 잉태할 것이다. 그건 믿음을 넘어선 확신이었다. 나의 짝을 만나, 그 짝에게서 아이를 만드는 어떤 본능 같은 것이 내 몸에 새겨져 있었다. 내가 그걸 원한다면,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형은 내 아래서 예쁘게 흐트러졌다. 달콤한 체온을 전하며 한껏 뜨거워졌다. 나를 받아들이고 내 아이를 받아들일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었다.
형은 나의 아이를 품어주었다. 비로소 우리는 한 가족이 되었다.
***
"설아, 새벽에 누리 돌보느라 피곤하지. 응?"
다정한 나의 반려는 소파에 앉아 대본을 읽는 내 뒤로 다가와 나를 끌어안고 부드러운 손길로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나는 형이 나를 어릴 때처럼 대하는 것이 기분 좋다. 나를 달래고 어루만지고 귀여워해주는 형의 표현들이 전부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을 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만이 형에게 연인이며 반려이며 동생인 것이다. 누구도 감히 이 안락한 관계를 빼앗을 수 없다.
"도라 아주머니께서 낮에도 우리 아기 잘 논다는데, 왜 이렇게 밤에 깨는지 모르겠어. 누리가 야행성인가?"
소파 뒤에 서서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형의 손목을 끌어왔다.
내 무릎 위에 앉히자, 형은 금새 소년처럼 뺨이 붉어진다. 그리고 베이비시터가 아기를 봐주는 방 쪽을 흘깃거리며 내 가슴을 여리게 밀어냈다.
"야아… 네 무릎에 앉는 건 좀… 그래…."
몸을 섞고 아이까지 낳았건만, 형은 스킨십을 할 때마다 여전히 수줍고 소심한 초식동물처럼 어깨를 움츠린다. 베이비시터나 경호원 앞에서 가볍게 입맞춤을 하면 보드라운 뺨이 터질 것처럼 붉어지고 작은 입술을 뻐끔거렸다. 당황으로 빛나는 동그란 눈동자는 너무 귀여워서 늘 내게서 웃음을 자아낸다.
내 반려는 어쩌면 이렇게 사랑스러울까.
"설아… 집에 도라 아주머니 계신데, 이러고 있으면… 들킬 수도 있고……."
내 무릎에서 내려오려고 하는 형의 허리를 단단히 손으로 감싸 쥐었다. 뱃속에서 아이를 꺼내느라 칼로 짼 상처가 생긴 형의 부드러운 피부는 모두 아물었지만 여전히 그 흔적이 남았다. 나는 옷 겉으로 형의 허리와 배를 천천히 쓸었다. 가벼운 스킨십일 뿐인데, 형은 벌써부터 그 작은 심장을 콩닥거리면서 내 손가락을 잡아 밀어낸다.
그러다가 멈칫, 내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발견하고는 만지작거렸다. 흐뭇해하는 형의 미소가 보기 좋다.
형이 내게 선물한 반지의 의미를 안다. 우리는 세상에서 말하는 연인이자, 부부인 것이다. 오직 둘뿐인 영원한 약속.
"괜찮아, 형. 지금은 아무도 안 보잖아."
"그래도… 아주머니 나오시면……"
"우리가 이런 사이인 걸 알 테니까 괜찮아."
"으으응…"
뾰족하게 도드라진 유두를 옷 겉에서 손가락 끝으로 문지르자, 형은 금새 달콤한 소리를 냈다. 나를 위해서 준비된 아름다운 음악처럼 형의 입술 사이로 예쁜 소리가 흘러나왔다.
살짝 벌어진 그 작은 입술을 혀로 가르고 들어갔다. 뒤로 조금 물러나려는 형의 허리를 끌어 잡아 입석을 깊이 헤집었다. 형은 가슴팍을 어루만지는 나의 손길과 끈질기게 제 작은 혀를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내 장난스러운 키스에 숨이 차서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형의 짧고 여린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한참 바라보며 등줄기를 쓸었다.
농밀한 키스가 길게 이어질수록 형의 몸에서 긴장의 힘이 풀렸다. 이제는 누가 보더라도 상관 없다는 듯 형은 수줍은 두 손을 올려 내 뺨을 감싸 쥐었다. 나는 혀끝으로 형의 입천장을 간질이며 작게 웃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사랑스러운 나의 반려, 소중한 나의 형.
이대로 영영 그대와 입을 맞춘 채로 있을 수 있다면…….
"아기 도련님이 계속 울어요! 이쪽으로 좀 와주세요!"
우리의 작은 아기 울음소리로 곧 깨어진 짧은 키스였지만, 그래도 상관 없다. 나는 형과 이렇게 평생을 함께 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