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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한준과 한설, 그리고 한누리 (60/65)

60. 한준과 한설, 그리고 한누리

"반지? 당연히 여기, 헉…!"

누리의 기저귀 찬 엉덩이를 받쳐 안은 내 왼손을 무의식적으로 흘깃 내려다보다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는 그제서야 내 왼손 약지에 자국만 남긴 채로 반지가 사라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직접 매장 쪽에 주고 온 것이었다.

설이를 위한 반지를 주문제작하기 위해서는 그것과 겹쳐질 내 반지가 필요했고, 아마 내 반지는 적어도 이삼 일 정도 디자이너 쪽에 가 있어야 할 것이다. 총지배인이 최대한 빨리 내게 돌려주겠다는 말을 했지만, 보통은 넉넉잡아 일주일 이상 걸리는 일을 부탁해서 겨우 줄인 것이었다.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입을 벌린 채로 붕어처럼 뻐끔거렸다.

팔짱 낀 채 내 앞에 선 설이는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요하고 서늘한 침묵의 분위기 속에서 내 품에 안긴 누리가 우! 하고 신나서 웅얼거렸다. 누리의 목에 스카프처럼 둘러준 거즈 손수건으로 침이 새어 나온 조그마한 입가를 닦아주면서 나는 바짝 마른 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뭐라고 대답하지? 그냥 사실대로 말할까. 하지만 그러면 깜짝 이벤트가 아닌데. 프러포즈 반지를 그렇게 멋없이 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

생각해보면 설이는 늘 내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내게 꽃다발이나 반지 같은 선물을 멋지게 건네서 나를 감동하게 만들었다. 나는 아마 설이처럼 그렇게까지 잘 해내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일단 시도는 해보고 싶었다.

설이가 내 품에서 누리를 데려갔다. 그리고는 아기 바운서에 누리를 눕히고 안전벨트를 채웠다. 위쪽에 고정되어 미세하게 흔들거리는 인형들을 바라보면서 누리가 손을 꼼지락거리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다시 내 앞으로 돌아온 설이가 내 손목을 잡아 바운서 옆의 침실용 소파에 나를 끌어다가 앉혀놓았다. 내 몸 위로 그늘이 졌다.

"형. 반지 어디 갔느냐고 물었잖아. 대답하기 어려운 거야?"

"어… 저기, 그게 아니라, 좀 놀라서……"

내 어깨를 한 손으로 쥔 설이가 나를 코앞에서 내려다보며 내 목덜미를 차가운 손끝으로 느리게 만지작거렸다. 새까만 눈동자가 손에 잡은 사냥감을 보듯 나를 금방이라도 물어 뜯을 것처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거대한 짐승의 발톱 밑에 깔린 것 같은 중압감이 들었다. 나는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저기 그게, 두고 왔어! 치료… 나 치료 받으러 갔었잖아? 거기서 베드에 누울 때 반지를 선반 쪽에다가 놔뒀었나 봐. 아마 선생님께서 잘 보관해 두셨을 거야. 잃어버리지는 않았으니까 걱정 마, 설아. 저기, 내가 다음에 치료 받으러 갈 때…"

"그러니까 형 말은, 물리치료사를 만나는데 반지를 뺐다고."

"…어?"

설이는 내가 한 말을 잘 생각해보라는 듯 눈을 감았다가 뜨며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치료받는 곳은 허리와 다리 부근이었다. 손가락을 다친 것도 아닌데 반지를 뺄 필요가 전혀 없었다. 당연히 여태까지 물리치료를 받으면서 반지를 뺀 적도 없다. 설이는 내가 한 말을 되짚어보듯이 혼잣말처럼 느긋하게 말했다.

"형이 물리치료사를 만나러 가서, 베드에 누울 때 반지를 뺐다는 거지."

"아니, 저기. 잠깐만… 그게 아니다."

마치 내가 불륜 드라마 속 캐릭터라도 된 듯한 정황이었다. 이상한 오해를 불러일으켰다는 생각에 불에 데인 듯 화들짝 놀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설이를 쳐다봤다. 새까맣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어디 더 말해보라는 듯이 가까이 다가왔다.

"설아, 내가 착각했나 봐. 물리치료실에 두고 온 게 아닌 것 같아. 하하……"

"그럼?"

"내가 그 다음에 어디를 갔더라, 아! 마사지!"

설이의 눈썹 끝이 올라갔다.

"……마사지 받을 때 반지를 뺐다고."

"어! 아마 거기 탈의실에 반지 있을 거야. 옷을 다 벗어야 하니까 반지도 뺀 거지!"

당황한 와중에 그래도 나름대로 말을 잘 짜맞췄다는 생각에 뿌듯해졌다. 설이도 납득했을 거란 생각에 눈치를 봤더니, 어쩐지 설이 표정은 굳어져 있었다. 날카로운 시선 끝이 나를 향했다.

탐스러운 그 붉은 입술 사이로 한숨이 작게 새어 나왔을 때,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나는 형이 옷을 벗지 않는 지압 마사지를 허락했었는데."

"아?"

"그 마사지사, 서른 살 남자였지. 아마."

새까만 눈동자가 가늘어지며 설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 남자가 형에게 옷을 벗으라고 했어?"

"아니! 그게, 그러니까… 당연히 안 벗었지, 안 벗었는데… 아마 반지가… 없으니까, 내 생각에는 거기에 있지 않을까… 하고… 내가 거기에 두고 온 것 같아서, 나는 그냥 생각에……"

주절거리면서도 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오해를 풀려고 할수록 오히려 더 엉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설이의 시선을 피했다가 마른 입술을 축이며 다급하게 고개를 들었다.

"저기, 설아. 형이 왜 그러냐면… 아얏!"

목덜미 쪽을 깨물렸다. 송곳니로 깨문 자리를 꾹 감싸 쥔 채로 설이가 내 목젖에 코끝을 비볐다. 스스로 진정하려는 듯 뜨거운 숨을 느리게 내뱉으면서 설이는 깨문 잇자국이 남았을 그 자리에 가볍게 입술을 댔다.

나는 겨우 손을 뻗어 설이의 팔뚝을 슬슬 쓸면서 다시 용기 내어 입을 열었다.

"그, 반지 말이야… 으응!"

설이의 손이 미끄러지듯 허리를 내려가더니 별안간 내 엉덩이를 움켜쥐는 바람에 이상한 소리가 샜다. 나는 반사적으로 소파 옆 바운서 쪽을 쳐다봤는데, 누리는 제 부모가 뭘 하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손에 닿을 듯 닿지 않는 자리에 고정된 인형이 흔들리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엉덩이 한 쪽을 제 손 안에서 주무르며 설이가 내 귓바퀴를 살짝 씹듯이 깨물었다. 앓는 소리를 내자, 열 받은 듯 훅- 숨을 내쉬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 마사지사가 형 여기를 이렇게 주물렀어?"

"읏, 응…! 아니,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내게 몸을 바짝 맞붙인 채로 설이는 소파에 거의 나를 눕혔다. 아래를 뭉근하게 내 허벅지 안쪽에 부딪혀오면서 설이가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차분하면서도 어딘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설이는 말을 이었다.

"경호원들은 형이 병원과 마사지 샵 두 곳에만 다녀왔다고 했는데, 형은 여태까지 한 번도 빼지 않던 반지를 어딘가에 두고 왔어. 그렇다면 그 두 곳 중 어딘가에서 반지를 빼야만 할 일이 생겼다는 건데……."

"그냥, 그… 빠진… 것 같아. 내가 살이 좀 빠졌나 봐."

설이는 고개를 기울이며 내 얼굴을 조용히 바라봤다.

어쩐지 내 잘생긴 동생의 입술 끝이 살짝 비틀려 올라간 것 같아 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형의 평소 체중은, 내가 붙여둔 영양사와 배달 식사를 맡은 조리사 쪽에서 관리하는 거니까… 그렇다면 이 책임은 그쪽에 물어야겠네."

망했다. 이 프러포즈 이벤트는 망한 게 틀림 없다.

자칫 평온해 보이지만 실은 엄청나게 열 받았을 때의 은은한 미소를 띄고 있는 설이의 고운 얼굴을 마주보면서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나는 설이를 기쁘게 하고 싶었던 것뿐인데 어째 말하면 말할수록 자꾸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설이는 더 화가 나 보였다.

내 엉덩이를 쥐고 조금 세게 주무르던 손이 허리 쪽으로 올라오더니 바지 안으로 긴 손가락이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맨 살에 닿는 설이의 손가락이 간지러우면서도 야한 느낌이 들어서 나는 생각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하긴, 내가 지금 어차피 열심히 생각한다고 해도, 또 쓸데없이 상황을 꼬아버릴 것 같기는 하다만.

내 뺨을 살짝 깨물면서 설이는 잔뜩 뾰로통한 표정이었다. 마치 '형, 왜 나한테 자꾸 거짓말 해?' 하고 원망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형님들이나 도라 아주머니, 주변에서 일하며 도와주시는 다른 분들이 다 소환되어 질책을 받게 생겼다. 그렇게 민폐를 끼칠 수는 없다. 일단은 어떻게든 먼저 설이를 좀 진정시켜야 한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서… 설아! 나 갑자기 어지러운 거 같아. 아, 왜 이렇게 어지럽지…?"

대사를 읽어도 이것보다는 자연스럽겠다 싶은 말투였다.

왜 나는 연기를 하려고만 하면 이렇게 말투가 동화책 읽는 아이 같아지는지 모를 일이다. 그래도 나름대로 이마를 짚으면서 성심 성의껏 어지러운 척을 했더니, 내 바지 속으로 들어오던 손가락이 멈칫했다. 그리고는 스르르 빠져나갔다.

한숨을 푹 내쉰 설이가 내 뺨과 이마를 어루만지면서 자상한 목소리를 냈다.

"후… 어디 봐, 괜찮아?"

마치 이렇게 상황을 모면하려고 하는 내 꼼수가 눈에 다 보이지만, 아픈 척까지 하니까 봐주겠다는 듯 너그러운 눈빛과 마주쳤다.

나는 풋, 하고 웃음이 새어버렸다.

우리 설이는 멋지기만 한 게 아니라 이렇게 다정하기까지 하면 대체 어쩌겠다는 거지? 우정혁이 본다면 또 콩깍지가 끼었다며 한심스러운 표정으로 혀를 차겠지만, 내 동생이고 내 반려자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설이는 정말 완벽하다. 물리치료사나 마사지사처럼 나와 아무 연관도 없는 사람들까지 질투하는 것도 내게는 마냥 귀엽게 느껴졌다.

여태까지 내가 전문 마사지사에게 몸을 맡기고 여기저기 관절을 구석구석 치료 받아서 시원했다는 감상을 말할 때마다 설이는 조용히 나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리고는 "잘 됐네." 하고 말했었는데, 그것도 어쩌면 질투하는 것을 참고 숨기는 중이었던 건가 싶다.

"형. 어지럽다는 사람이 왜 그렇게 웃어. 응?"

설이는 픽 웃으며 손가락을 구부려 내 뺨을 툭 쳤다. 어차피 내가 평생을 저밖에 안 봤고, 다른 사람들에게 한눈 팔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화가 조금 누그러진 듯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설이의 손목을 잡아서 내 뺨에 커다란 손바닥을 대고 비볐다.

"글쎄, 설이 네 손이 약손인가 봐. 네가 이렇게 만져주니까 하나도 안 어지럽네?"

"……형, 이런 애교는 어디서 배웠어."

얼굴이 붉어진 설이가 두 손으로 내 뺨을 가두듯 잡고는 별안간 내 얼굴에 키스를 퍼부었다. 입술과 콧잔등, 이마와 뺨에 간지럽게 와 닿는 설이의 부드러운 입술에 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피했다. 그럴 때마다 설이는 내가 고개를 돌리는 걸 따라오며 부드럽게 입 맞추고 내 입술을 장난 치듯이 깨물었다. 자꾸 입술이 부딪히니까 몸에 열기가 좀 오른다 싶었을 때였다.

웃으며 설이의 어깨를 밀어내던 나는, 얼핏 무언가를 보았다.

"……어? 자, 잠깐. 설아."

"응."

"저기 저게 뭐지, 우리 누리 말이야… 어어?"

흔들리는 인형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우리 아기의 바운서 옆으로 비죽 튀어나온 하얀 털 뭉치가 꼬물거리고 있었다. 누리는 아우으, 하고 중얼거리며 인형을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외쳤다.

"꼬리…… 꼬리잖아!"

"음, 그러네."

후다닥 소파에서 내려와 바운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자, 누리는 나를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갑자기 인형 사이로 엄마가 나타나서 기쁜 모양이었다. 그러자 기저귀 밖으로 비집고 나온 하얀 버들 같은 보송보송한 꼬리가 살랑거리며 바운서 아랫부분을 툭 쳤다.

내 손바닥만 한 자그마한 꼬리였지만, 저도 설 표범이라고 과시하는 듯 그 작은 꼬리에도 흰색과 아이보리색, 검은색으로 그라데이션 되어 있는 타원형 무늬가 선명하게 나 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걸 바라보다가 설이의 얼굴을 쳐다봤다.

"우리 누리한테… 꼬리가 있어…!"

"응, 나도 있잖아."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설이는 조금도 놀라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가, 설이가 설 표범이니까 설이하고의 사이에서 내가 낳은 우리 아기도 설 표범의 꼬리가 있는 게 당연한 건가.

누리의 이마를 간질이듯 손끝으로 툭 만지면서 설이가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이 태연하게 말했다.

"이제 가끔 귀도 튀어나오고, 이렇게 꼬리도 나오겠지. 나도 어릴 때는 잘 조절하지 못했었잖아. 형, 기억 안 나?"

"당연히 다 기억하지! 그러면… 누리도 설이 너처럼 완전히 모습이 변한다거나……."

"뭐, 그럴 수도 있겠지."

누리는 제 아빠의 검지를 손 안에 가득 쥐고 아! 하고 즐겁게 옹알이했다.

나는 바운서의 안전벨트를 풀고 누리를 품에 안았다. 순한 아기인 우리 누리는 내 냄새가 나자 기분이 좋은지 눈가를 찌푸리면서 방긋 웃었다. 그리고는 목이 파인 내 라운드 넥 셔츠의 가슴팍 부분을 조그마한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입을 오물거렸다.

임신과 출산에 걸쳐서 지금까지도 조금 부풀어있는 내 유두에서는, 젖이라고 하기 민망한 정도의 뿌연 분비물이 찔끔 나오는 정도였기에 누리에게는 계속 분유를 먹여왔다. 그런데도 본능인 것인지 누리는 내 납작한 가슴을 빠는 걸 좋아했다.

설이는 형 힘들고 피부 쓸려서 아프니까 안 된다면서 누리에게 젖을 물리지 못하게 했는데, 나는 그래도 가끔 누리가 칭얼거리면 내 볼품 없는 빈 젖꼭지를 물려주곤 했다. 셔츠를 쥐어 젖을 달라는 듯 찡얼거리는 누리에게 옷을 내려 가슴이 빠끔히 드러나게 해주자, 누리는 내게 안긴 채로 젖을 빨았다.

"조금만 물려. 형 팔도 아프고 힘들어서 안 돼."

이번에도 불만스러운 듯 조용히 말하는 설이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쭙쭙 열심히 있는 힘을 다해서 빈 젖꼭지를 빠는 누리에게는 여전히 꼬리가 나와 있었다. 하얗고 조그마한 꼬리를 만지작거리자, 젖을 빨던 누리의 머리에 불쑥 하얀 솜 덩어리 같은 귀가 솟았다. 헉, 하고 놀라는 내 목소리에 아기 설 표범의 조그마한 귀 끝이 움찔거렸다.

"어떡해. 누리 귀도 나왔어."

"응."

"아… 너무 귀엽긴 한데…… 으음, 병원 다닐 때 신경 써야겠다."

도라 아주머니께는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걱정했는데, 후에 넌지시 말을 꺼내봤더니 도라 아주머니는 놀란 얼굴로 "어머나, 여태까지 그 깜찍한 꼬리를 한 번도 못 보셨나요?" 하고 내게 되물었다. 마치 아기의 첫 걸음마나 첫 말소리를 내가 놓친 것처럼 첫 꼬리를 나 대신 자신이 본 것에 대해서 미안해하는 얼굴이었다.

놀라지 않으셨냐고 묻자, 오히려 동물의 귀와 꼬리가 튀어나오는 것은 누리의 개성이며 모든 아기는 다 저마다 귀엽고 예쁜 특성이 있는 거라며 나를 안심시키려고 했다. 비밀 엄수에 대해서는 걱정할 것 없다며 도라 아주머니는, "돈으로 안 되는 건 없답니다." 하며 조카 로빈과 같은 말을 했다.

그날 저녁 침대 안에서, 나는 드물게 내게 등을 보이며 돌아 누운 설이를 뒤에서 끌어안고 달래야 했다. 반지 소동에 대해서는 마음이 다 풀린 줄 알았더니 내게 조용히 등을 돌려 누운 걸 보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설아, 내가 병원이나 마사지 샵에 연락해서 반지 금방 찾아올게, 응?"

"………"

"설이 너한테 받은 소중한 반지인데, 빼놓고 다녀서 미안해."

넓은 등에 얼굴을 꾹 붙여 비비면서 설이의 가슴팍과 복근을 손바닥으로 슬슬 쓸자, 설이는 여전히 돌아누운 채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형이 반지를 뺀 것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야."

내 손을 허리에서 풀어내고 내 쪽으로 돌아누운 설이가 울먹이는 표정으로 작게 목소리를 냈다.

"……나한테 숨기는 거 없기로 했잖아."

잔뜩 서운해하는 눈빛이었다. 울상이 된 설이가 너무 귀여워서 나는 웃음이 나올 뻔 했지만, 가까스로 참고 설이의 뺨을 쓰다듬었다. 우리의 옆 아기침대에서 누리가 새근새근 자고 있었기 때문에 목소리를 거의 속삭이는 수준으로 작게 내야 했다.

"형이 잘못했어. 응?"

"……"

"사랑해, 설아."

쪽, 소리가 날 정도로 진하게 입술을 맞부딪히고 뽀뽀해주었더니 설이는 수줍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리고는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면서 "나도 사랑해, 형." 하고 달콤하게 속삭였다.

우리 설이는 어쩌면 이렇게 귀엽고 예쁜 건지, 가능하면 온몸을 쪽 쪽 빨아서 사탕처럼 핥아먹고 싶은 기분이었다. 내 욕망의 소용돌이가 담긴 시선을 마주 보면서 설이는 수줍게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내 손가락을 이불 속에서 끌어와 만지작거렸다. 웃는 얼굴이 갓난아기 누리와 꼭 닮았다.

나는 전생에 무슨 대단한 업적을 쌓았기에 이렇게 예쁜 설이와 미니어처 같은 누리까지도 세트로 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어머니께서 나를 임신하셨을 때, 눈 속에 파묻힌 탐스러운 황금빛 열매를 두 알이나 발견하는 꿈을 꿔서 쌍둥이인 줄 알았다고 하셨던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눈이 다 녹은 봄에 태어났기 때문에 나와 관련된 꿈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셨었는데, 어쩌면 그건 설이와 누리에 대한 꿈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고 싶다.

"설아, 이제 어서 자. 별장 가기 전까지는 계속 바쁘잖아. 응?"

"응, 형이 재워줘."

큰 덩치를 웅크려 내 품에 파고들면서 설이가 애교를 부렸다.

이 깜찍한 것.

나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헤집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내 커다란 설 표범을 품에 안고 등을 토닥거렸다. 누리에게는 안 된다고 엄격하게 굴었으면서 설이는 내 파자마 상의 단추 사이로 슬쩍 콧날을 비비더니 자극으로 도드라진 내 유두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살짝 혀를 내어 핥기에 어서 자라며 등을 찰싹 때렸다. 아쉬워하며 입술을 몇 번 더 대고 내 가슴에 입을 맞춘 뒤에 설이는 눈을 감았다.

잠들 때까지 설이는 내 왼손에 제 손으로 깍지를 낀 채로 있었다.

***

내 반지는 그로부터 이틀이 더 지난 후에야 내 손가락에 다시 돌아왔다. 설이는 내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흘깃 보고 나서 안심한 듯 나를 살짝 껴안고 속삭였다.

"이제 빼지 마, 형. 또 그러면… 밤새 괴롭혀줄 거야."

어찌나 야한 목소리였는지 귓가가 후끈해졌다. 그 말을 할 때, 멀지 않은 곳에서 도라 아주머니께서 누리에게 젖병을 물리는 중이었는데 혹시나 설이의 속삭임이 들렸을 까봐 가슴이 콩닥 콩닥거렸다.

나는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안도의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별장으로 떠나기 전날까지 나는 총책임자 김우현 씨의 전화를 오매불망 기다렸다. 안 그래도 반지 디자이너와의 상담 전화는, 설이가 없는 틈을 타서 해야 했기 때문에 전화가 올 때마다 내가 받지 못해 부재중으로 넘어가는 일이 잦았다. 그렇게 자꾸 통화를 못하면 반지 세공 작업이 너무 늦어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화장실 안에서 문을 잠근 뒤 속삭이며 전화를 받은 적도 있었다. 거의 첩보 영화 수준이었다.

나름대로 설이의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서 나는 디자이너와 통화를 하고 나면, 짧게라도 꼭 우정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백수일 때와 다름 없이 언제 몇 시에 전화를 해도 업무나 시차에 상관 없이 전화를 받으면서 우정혁은 내게 짜증을 냈다.

- 저기요, 누리 어머니. 애먼 사람 괴롭히지 마시고요. 어차피 너는 네 동생 놈 손 안에 든 쥐니까, 허술한 서프라이즈는 관두는 게 어떠냐.

"초치지 말고, 전화 끊자.”

우정혁은 영상 통화로 누리를 보여줄 때는 얌전했지만, 누리가 없으면 내 전화를 무척이나 귀찮아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옹알이하는 누리의 짧은 영상 몇 개를 빌미로 전화를 걸었고, 그제야 불만이 없어졌다. 우정혁은 “누리 말이야, 네 동생 놈하고 정말 똑같이 생겼는데… 이 녀석은 왜 이렇게 귀엽지?” 하고 늘 심각하게 고민했다. 한국에 왔을 때 우연히 봤는데 우정혁의 휴대폰 배경화면이 잠든 누리의 사진이었다.

결국 누리의 귀여움 덕분에, 나는 완성된 프러포즈 링을 발신인이 우정혁 이름으로 된 퀵서비스 택배를 통해서 받을 수 있었다.

가끔 우정혁이 영국에서 해외 배송으로 누리 옷과 장난감을 보내오거나 어플을 통해서 한국에 있는 가게들에서 누리 선물을 우리 오피스텔로 발송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설이는 우정혁 이름으로 오는 택배 상자에 의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래서 매장 총책임자에게 부탁해서 설이 반지를 우정혁의 누리 선물로 위장시킨 것이다.

“이번에는 상자가 꽤 작네.”

별장으로 떠나기 위해서 짐을 챙기던 설이가 퀵서비스로 온 상자를 받아서 거실로 들어오는 날 흘깃 보며 말했다. 나는 움찔, 놀랐다가 미소를 지어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으, 으응. 그러네? 우정혁이 뭐, 누리 쪽쪽이를 또 보냈나 봐. 공갈 젖꼭지 많은데… 하하.”

“……한국 오면, 식사 한 번 같이 해.”

“정말? 그러면 우정혁 집에 초대해서 같이 밥 먹을까?”

“……그래.”

엄청난 발전이었다. 그래도 우정혁이 우리 아기를 예뻐하니까 우정혁에 대한 설이 마음이 조금 너그러워진 모양이었다.

나는 드레스 룸 쪽으로 가서 짐을 챙기는 척 하며 문을 살짝 닫고, 택배 상자를 뜯어보았다. 안쪽에는 겹겹이 고급스러운 상자가 들어 있었는데 러시아 인형처럼 까도 까도 계속 나왔다. 결국 마지막 벨벳 상자를 열었더니, 그 안에 반짝이는 링이 있었다.

“……와아.”

설이에게 오해를 받더라도 오래 나가서 반지를 찾아 헤매며 빙빙 돌고, 디자이너와 몰래 전화 상담하면서 수선을 떨었던 보람이 있었다. 분명 내 반지와 다른 모양인데도, 은은하게 반짝이면서도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은 편안한 분위기가 꼭 닮아 있었다. 내 반지를 빼내어 프러포즈 링과 맞대었더니 마치 포옹을 한 우리 두 사람처럼 달라붙어 딱 맞았다. 아주 자그마한 보석이 띠를 이루듯이 사선으로 박혀 있는 모습이 세련되어서 우리 설이의 하얗고 긴 손가락에 섬세하게 어울릴 것 같았다.

“형, 거기 있어?”

문 밖에서 다가오는 설이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나는 일단 크고 작은 상자의 잔해를 벽면 옷장 한 쪽 구석에 몰아넣고 옷장의 슬라이드 문을 닫았다. 그리고 설이의 시계 진열대 아래 서랍을 열어서 커프스 버튼들 사이에 반지를 숨겼다.

설이의 커다란 카디건 하나를 집어 들고 문을 열었더니 의심 없는 표정으로 설이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 옷 가져가려고?”

“어? 어어, 추울 때 입을 거야. 난 네 옷 입으면 포근하고 편하더라.”

“그래, 그럼. 그것도 챙기자. 내가 가방에 넣을게.”

설이는 내가 제 옷을 걸쳐 입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내 말이 기분 좋았는지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나는 겨우 등뒤에서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안도했다. 설이가 누리를 안으러 거실로 나간 틈을 타서 나는 얼른 서랍에서 프러포즈 링을 꺼내 작은 속옷용 파우치에 집어넣었다.

***

오랜만에 와보는 강원도의 별장은, 마치 내 집처럼 편안하게 우리를 반기는 것 같았다. 이제는 부모님과 함께 살던 그 집이 아닌데도 내게는 마치 고향집처럼 느껴졌다. 지난 번에 왔을 때보다 훨씬 익숙한 분위기였다.

게다가 관리인 분께서 우리를 너무도 반갑게 맞이해주셨기 때문에 더욱 기뻤다. 갓난아기는 아주 오랜만에 본다면서 우리 누리를 위해서 준비한 듯한 식탁용 아기 의자와 원목으로 된 쿠션 바운서까지 구비해 놓은 걸 보여주셨다. 감동적이기도 하고 너무 고맙고 죄송해서 나는 일단 준비해 갔던 한우세트와 과일, 다과 보따리를 관리인 분께 전해드렸다.

어째서인지 관리인은 설이를 빤히 보다가 선물을 받으셨다.

“그런데 별장 주인 분과는 오늘도 못 만나는 걸까요? 많이 바쁘신 분인가 보네요.”

“아…… 예, 아직은 그러신 모양입니다. 내가 아직 지시 받은 게 없어서 뭐라고 말을 못하겠네요.”

관리인은 뒷목을 긁적이며 설이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편히 쉬다가 가시라는 말을 끝으로 별장을 나가셨다.

우리는 짐을 푸른 뒤에 일단 누리에게 분유를 타서 먹였다. 구조상 지난 번과 달라진 것은 딱히 없었지만, 여전히 깔끔하게 정리되어 마치 우리 세 가족을 위한 것처럼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아기용 의자며 아기 침대까지 섬세하게 구비되어 있어서 신기했다. 별장 주인은 어쩌면 동화 속에 나오는 키다리 아저씨 같은 분일지도 모른다.

벽난로에 불을 떼야 했던 지난 번과 다르게 이제는 날씨가 좋았다. 정원이 보이는 거실 벽면 유리창으로 기분 좋게 햇살이 가득 새어 들어왔다. 누리의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 하늘거리는 안쪽의 속 커튼을 쳐놓았다.

설이의 품에서 열심히 젖병을 빠는 누리를 한참 바라보는데, 설이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형 먼저 씻을래? 식사는 하고 왔으니까 벌써 배고프진 않을 테고, 올라가서 욕조에 몸 담그고 쉬어.”

“아, 그럴까?”

나는 계단을 빠르게 뛰어 올라갔다.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안 그래도 설이에게 줄 반지가 잘 있는지 살펴보고 싶었다. 나는 설이가 옮겨둔 짐 가방 사이에서 내 작은 파우치를 찾기 위해서 열심히 뒤졌다.

"뭐야, 어디 갔지?"

내 옷들과 내 물품들이 들어 있는 가방 안에는 없었다. 혹시나 싶어서 설이의 짐 가방 안을 뒤졌는데, 워낙 간단하게 가지고 다니는 설이의 가방에는 옷가지와 대본 뿐이었다.

어쩌면 아기용 가방에 들어 있는 건가 싶어서 고개를 벌떡 들었다. 누리의 짐이 들어 있는 가방은 1층 거실에 있었다. 분유 소분통과 젖병 같은 것을 바로 사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내려가서 누리 가방을 뒤지면 이상해 보일 텐데 어쩌지.

초조한 마음으로 가방 앞에 멍하니 앉아 있는데, 계단을 느긋하게 올라오는 설이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2층 침실 쪽으로 누리를 안은 채로 걸어온 설이가 문 안쪽으로 고개를 들이밀면서 불쑥 물었다.

"형, 이거 찾아?"

설이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내 작은 파우치였다.

그 안에는 내가 숨겨둔 프러포즈 링이 들어 있을 것이다.

……혹시 봤나? 못 봤겠지?

나는 삐걱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묻지도 않은 변명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 어어, 어, 그, 그거는, 그러니까 내 건데, 그게 왜, 거기, 그…"

설이는 제 어깨에 기댄 채 웅얼거리는 누리를 어르면서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이거 형 속옷 파우치였던 것 같은데… 맞지? 욕실 문 옆에 둘게."

욕실의 탈의용 바구니 곁 선반에 내 파우치를 올려놓은 설이가 의심 없는 표정으로 다시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나는 발소리가 사라진 뒤에야 파우치를 열어보았다. 겹겹이 접혀 있는 내 드로즈 사이로 반짝이는 링 반지가 얌전히 끼어 있는 걸 확인하고 나는 숨을 깊이 내쉬었다.

이거 원, 간 떨려서 프러포즈 두 번은 못 하겠다.

일단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서 몸을 담그면서 나는 어떻게 설이에게 반지를 전해줘야 하나 고민했다. 반지를 제작하고 그걸 집으로 다시 가져오는 과정에만 신경 쓰느라 정작 건네주는 상황에 대해서는 상상을 해보지 못했다.

내가 봤던 드라마나 영화 같은 데에서 나올 법한 로맨틱하고 클래식한 이벤트는 도무지 쑥스러워서 준비할 수 없었다.

게다가 차를 타고 드라이브 하면서 야경을 본다거나 멋진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면서 반지를 건네려고 해도, 갓난아기가 그 사이에 끼어 있으면 전혀 프러포즈의 분위기가 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아기를 낳기 전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누리가 생기고 나니까 우리의 일상은 전부 누리에게 맞춰져 있었다. 야경을 보려고 해도 차 뒷좌석에서 기저귀를 갈아줘야 할 것이고, 레스토랑에서는 우리 둘 중의 한 명이 누리를 보는 동안 번 갈아가면서 식사를 해야 할 테니까 와인 잔을 부딪힐 정신이 없을 것이다.

"아, 멋있게 주고 싶은데 쉽지 않네."

나는 욕조 안에서 팅팅 불어버린 손가락으로 젖은 머리를 헝클어뜨린 뒤에 목욕을 빨리 끝마쳤다.

***

편한 실내용 트레이닝 복으로 갈아입고 머리카락을 거의 다 말린 뒤에 계단을 내려가니 조용했다. 이제 내가 누리를 볼 테니까 그 동안 씻고 좀 쉬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부엌 쪽에는 없었다. 거실 소파에도, 둘은 없었다.

소파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더니, 넓게 걸려 있는 그림 앞에 설이가 등을 보인 채로 서 있었다.

설이는 제 품에 안은 누리에게 조곤조곤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중이었다. 조용히 다가갔더니 설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지? 두 분 다 좋은 분들이셨어. 이 그림처럼 온화하고 다정하셨지. 누리 너를 만날 수 있었다면, 두 분 모두 무척 기뻐하셨을 거다. 너를 예뻐하고 아껴주셨겠지. ……갑자기 나타난 나에게도 그렇게 해주셨던 분들이니까."

아버지께서 그리셨던 그림은 여전히 별장 거실 벽에 걸려 있었고, 그 앞에 선 설이는 누리에게 그림을 보여주는 중이었다. 조용하게 속삭이는 설이의 낮은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두 분처럼 나하고 형도 너에게 좋은 부모가 될게. 나는 최선을 다 할 거야. 그러니까… 누리 너도, 형을 위해서 착한 아이가 되어줘. 형을 기쁘게 해줘."

그럴 거지? 하고 묻는 설이의 목소리에 누리는 어으, 하고 대답하는 것처럼 웅얼거리며 설이의 뺨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눈가가 뜨거워져서 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설이의 등뒤로 가까이 다가가서 단단하고 얄쌍한 허리를 가득 끌어안았다. 그리고 너른 등에 내 젖은 뺨을 기댔다. 설이는 작게 웃으면서 형, 왔어? 하고 말했다. 누리가 나를 발견하고는 아우으! 하고 중얼거렸다.

이렇게 행복한 순간이 내 인생에 또 있을 수 있을까. 나는 지금 천국에 와 있었다.

포근하고 익숙한 설이의 비누 향 섞인 체취를 맡으면서 나는 설이의 등에 이마를 꾹 비볐다. 그리고 설이의 허리를 더욱 꼭 끌어안았다.

"설아, 형이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이 별장 사줄게."

울먹임 때문에 코가 막혀서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주인 분께서 허락해주시면 내가 이 별장 사서, 설이 너한테 줄게."

설이는 작게 웃으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고마워. 형."

"그래. 형만 믿어."

"응."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 모아서 누리 교육비만 따로 놔두고 내 전 재산을 쏟아 부어서라도 이 별장을 사야겠다고 다짐했다. 이 다정하고 안락한 공간을 설이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누리가 크고 난 뒤, 나는 설이와 함께 여기서 내 남은 인생을 보내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다.

어차피 설이가 경제력이 있으니까, 누리에 대한 건 설이에게 맡겨놓고서라도 나는 이 별장을 꼭 사야겠다.

***

설이는 누리를 씻기고 난 뒤에 샤워했다. 그리고 우리 셋은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부드러운 커튼 아래서 카펫에 누워 뒹굴면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오랜만의 휴가였고, 내 부탁으로 업무 전화가 오지 않도록 설이와 내 휴대폰을 아예 꺼둔 상태였다.

우리 세 가족을 방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설이가 누리와 놀아주는 동안, 곧 설이가 촬영을 들어가게 될 영화의 원작 소설을 읽어보는 중이었다.

눈 덮인 겨울 산골에서 우연히 만난 두 어린 아이가 함께 커가면서 나중에는 결국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동화 같은 이야기였다. 나는 동화 작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인지, 이런 이야기들을 좋아하는 것 같다.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사랑에 홀딱 빠지는 이야기.

"설아. 이거 말이야, 꼭 우리 얘기 같지 않아? 주인공 성격도 그렇고…"

천장을 향해 펼치고 있던 소설집을 접어두고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림처럼 잘생긴 동화 속 왕자님 같은 미남이 긴 속눈썹을 내리깐 채로 눈을 감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그 곁에는 그와 꼭 닮은 도자기 인형 같은 아기가 마찬가지로 색색 숨을 고르게 내쉬며 잠들고 있다.

귀여운 내 천사들.

나는 조용히 일어나 앉아서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것을 꺼냈다. 은은하게 반짝이는 투명한 다이아몬드가 만든 반지의 라인이 햇살 속에서 마치 잔물결처럼 빛났다.

잠든 설이의 길고 예쁜 왼손의 약지에 나는 조심스럽게 프러포즈 링을 끼웠다. 하얗고 섬세한 설이의 손가락에 꼭 맞춘 반지가 제 자리를 찾은 것처럼 아름답게 어울렸다.

햇살이 웨딩 베일처럼 씌워진 설이의 고운 얼굴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설이는 보기 드물게 깊이 잠든 와중에도 내 입술이 닿자 미세하게 입술 끝을 올려 미소 지었다. 달콤한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낮잠을 자는 내 갓난아기와 나의 반려 옆에 다시 누운 채로, 나는 눈을 감았다. 부드럽게 숨을 내쉬는 설이의 가슴팍에 손바닥을 가만히 올려 따뜻한 심장소리를 느꼈다.

사랑해, 설아. 흰 눈의 요정이 선물해준 나의 소중한 반려.

잠에서 깨어나면 두 사람에게 입 맞추고, 우리는 함께 저녁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면서 평온한 시간을 보내겠지.

제 손에 끼워진 반지를 발견한 설이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기대하면서 나는 단잠에 빠져들었다.

내가 사랑하는 하나뿐인 내 동생의 부드러운 숨결을 느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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