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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허술한 프러포즈 대작전 (59/65)

59. 허술한 프러포즈 대작전

반지 선물이란 것이 생각보다 어려운 것이었다. 옷이나 가구처럼 반지도 브랜드라는 것이 있을 텐데, 평생 그런 것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 막상 구입하려니 막막했다. 부모님께서는 평생 패물 같은 걸 소유하고 계시지도 않았다. 아버지께 받았다는 옥 반지를 어머니가 끼고 다니셨지만, 나는 그런 것보다 설이에게 얇고 깔끔하면서도 세련된 것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마치 설이가 내게 준 졸업반지처럼 말이다.

설이도 내게 졸업반지를 선물할 때에는 우리가 이런 관계가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게 분명하다. 그저 형의 졸업을 축하하는 마음으로 반지를 샀을 텐데……. 지금은 그 반지를 낀 채로 설이와 애까지 낳았으니 사람 일은 참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형, 무슨 고민 있어?"

"아니… 아니?"

예민한 설이는 내가 반지에 대해서 잠시 생각만 하려 해도 내 태도가 평소와 다르다고 생각하는 건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그 긴 눈매의 신비롭게 회색 빛 도는 까만 눈동자가 날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내 계획을 이미 전부 들킨 것 같아서 흠칫 놀라게 된다.

설이는 우리 아기의 꼼지락거리는 작은 손에 조랑말 모양의 조그마한 누빔 인형을 쥐어주고서 내 이마에 손등을 가만히 대 보았다.

"……열은 없는 것 같은데. 혹시 몸 안 좋으면 바로 얘기해."

"이제 정말 괜찮아. 배 땅기는 증상도 거의 없어졌어."

근심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내 뺨을 쓰다듬는 손가락이 자상하고 기분 좋아서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설이의 손가락은 내 뺨에서 턱으로 내려와 턱을 슬슬 쓸다가 입술을 엄지로 만지작거렸다.

"그래도 한동안 조심해야지. 형 큰 수술했잖아."

"나야 어차피 집에서 늘 먹고 노는데 뭘."

그런 나와 다르게 설이는 요즘 들어 무척 피곤해 보였다.

한국에 와서는 좀 쉴 수 있으려나 했더니만, 미국에서 찍고 온 영화 때문인지 설이의 스케줄은 한국을 떠나기 전보다 훨씬 더 바빠졌다. 요즘에는 평소에 찍던 시계나 패션 관련 CF뿐만 아니라 유모차를 탑재한 자동차라거나 침구 브랜드처럼 조금 더 가정적이고 부드러운 이미지의 광고들까지 섭렵하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누리와 함께 찍히는 사진들 때문인지, 설이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이나 이미지가 달라져서 예전보다 더 폭 넓은 캐릭터의 작품들까지 제의가 쏟아지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설이가 바빠져서 수면 시간조차 확 줄어든 와중에 누리는 새벽이 되면 자꾸 깼다.

누리가 깨어나서 칭얼거리면 언제나 설이가 나보다 먼저 반응했다. 잠을 얕게 자고 예민한 성정 때문일 것이다.

"형… 누리 내가 볼 테니까, 형은 더 자."

"아냐, 내가… 설아, 음…… 내가…"

졸음에 겨운 눈을 비비면서 겨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해봐도 허사였다.

도라 아주머니께 낮에만 오시는 게 아니라 밤에도 상주해서 누리를 돌봐주시는 것으로 부탁을 드려도 괜찮을 텐데, 설이는 그것까지 참아주지는 못했다. 잘 때는 집에 우리 세 가족이 아닌 타인이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면 집에서 노는 백수이자 엄마인 내가 누리를 돌보면 되는 일인데, 설이는 그것도 허락해주질 않는 것이다. 내가 어물어물 잠에서 깨기도 전에 누리가 아기 침대 안에서 칭얼거리며 울음을 터뜨리려는 조짐을 보이면 설이가 이미 아기 침대 앞으로 가 있는 것을 나는 겨우 실눈 뜨고 발견하는 실정이었다. 그리고는 몇 시간 못 자는 스케줄이어도 철인 같은 체력으로 일어나서 누리의 등을 토닥거려 달래며 거실로 나가 침실 문을 조용히 닫았다.

한두 번 내가 깨어나서 거실로 따라나갔더니, 설이는 상처 받은 눈길로 "형, 내가 못 미더워?" 하고 물었다. 나는 설이가 우리 아기의 아빠로 너무 완벽하다며, 누리를 대단히 잘 돌본다는 칭찬을 여러 번 반복하고 결국 침대로 돌아와 누울 수 밖에 없었다. 설이를 피곤하게 할지언정, '형과 아기를 내가 지키고 돌본다'라는 설이의 자부심에 상처를 줄 수는 없는 것이다.

다행히도 누리는 새벽에 자주 깨어나기는 해도, 내내 울고 보채는 아기는 아니었다. 자다가 깼을 때 아무도 자신을 안아주지 않으면 칭얼거리기는 했지만, 막상 안아주면 울지 않고 잘 놀았다. 마치 보초를 서는 야생동물처럼 말똥말똥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면서 안겨 있는 것을 좋아했다.

도라 아주머니는 차라리 울며 보채도 달래면 잘 자는 아기가 더 수월할 수 있다고 했는데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누리는 다른 아기들에 비해 잠을 정말 잘 안 자는 타입이었다. 특히 나와 설이, 도라 아주머니처럼 매일 보고 자주 보는 사람들의 기척에는 둔감했는데 그 외의 사람의 발소리나 목소리가 들리면 흠칫 놀라면서 잘 깼다. 누가 제 아빠 안 닮았다고 할 까봐 그런 예민한 점까지 똑같은지 신기한 일이었다.

설이 스케줄에 따라 매일 다르기는 하지만, 도라 아주머니께서는 보통 이른 아침에 출근하셨다. 그러면 설이는 바통 터치하듯이 도라 아주머니에게 누리를 맡기고 스케줄 갈 준비를 하는 것이다. 나는 보통 병원에 다녀오는 일정이 없으면 늘 집에 있었는데 설이가 사다 준 폼 롤러 위에서 몸을 굴리면서 스트레칭을 하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오늘은 요가 매트를 펴는 대신, 설이를 파자마 차림으로 졸졸 따라갔다. 그리고 전신 거울 앞에서 캡 모자를 푹 눌러쓰는 설이의 팔을 붙잡았다.

"설아, 스케줄을 좀 줄이는 게 어떨까? 너 요즘 누리 보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자서 과로하는 것 같은데……. 괜찮다는 말 하지 말고, 응?"

"으음."

설이는 대답 대신 손을 뻗어 내 뺨을 만지작거렸다. 엄지로 살짝 눌러 내 뺨이 밀가루 반죽처럼 튀어나오게 만들더니 혼자 피식 웃었다. 어쩐지 피부가 푸석해진 것 같은 설이를 측은한 눈길로 올려다보다가 나는 설이의 손에 뺨을 잡힌 채로 말을 이었다.

"며칠 휴가 내고 누리랑 셋이 좀 쉬다 올까? 네가 말하기 힘들면, 내가 신 매니저님하고 전화 통화 한 번 해볼게."

"휴가?"

"응, 어디 좋은 데…… 우리 전에 신세 졌던 강원도 별장 어때? 거기 주인 분께 한 번 연락 드려보자. 괜찮다고 하시면 거기서 며칠 쉬고, 이번에는 주인 분 직접 만나서 감사 인사도 제대로 하고 이것저것 선물도 좀 해드리고 오자!"

설이는 나를 빤히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형, 거기가 마음에 들어?"

고개를 빠르게 끄덕이자, 왠지 모르게 설이는 만족스러운 눈빛이었다. 뿌듯한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그러자. 형이 좋으면 나도 좋아."

설이는 스케줄 조정을 한 뒤에 별장에도 연락을 해보겠다는 말을 하고 출근했다.

***

도라 아주머니께서 누리를 봐주시는 동안, 나는 오피스텔 1층 로비 쪽에 머물고 있을 최민욱 형님을 개인적으로 호출했다.

김장 김치를 옮길 때 빼고는 내가 따로 형님께 메시지를 보내는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내 부름에 신속하게 달려온 최민욱 형님은 조금 긴장한 얼굴이었다. 내가 갑자기 아프거나 위급 상황이 발생한 줄 알고 뛰어온 듯 했다.

"형님, 저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형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현관문 안쪽 복도로 최민욱 형님을 끌고 들어와서 내 계획을 설명했다. 속닥거리는 내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던 형님은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이미 잔뜩 피곤한 얼굴이라서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니까… 거짓말을 해달라, 이 말씀이시죠."

“네!”

난감한 듯 입가를 가린 채로 시선을 내린 최민욱 형님이 미간에 주름이 진 채로 한숨을 한 번 더 푹 내쉬었다.

"도라 아주머니는 벌써 협조해주시기로 했습니다. 사실 이런 걸 두고 하얀 거짓말이라고 하잖아요? 설이를 기쁘게 해주고 싶거든요. 나중에 짠! 하고 설명하면 되니까 큰 문제 없을 겁니다. 절 믿으세요, 형님!"

"……저는 아시다시피 한설 님께 고용된 입장입니다. 클라이언트와의 계약 이행에 있어서 비밀 엄수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신뢰를 주는 보고와 소통입니다. 저는 한준 씨에 대한 일은 무엇이든, 사소한 것 하나까지 클라이언트 쪽에 보고할 의무가 있습니다."

"아, 혹시 제가 집에 있다고 거짓말하기 힘드신 거라면, 물리치료 갔다고 설이한테 말해주세요."

"……그건 거짓말이 아닙니까?"

"좋습니다, 그럼 몰래 외출했다가 집에 오기 전에 물리치료도 받읍시다. 그건 괜찮죠?"

"……하아."

최민욱 형님은 고개를 내저었다.

안되겠다 싶어서 나는 좀 더 생각이 유연한 편인 김영진 형님을 호출했다. 그리고 김영진 형님 쪽에도 나의 계획을 설명했다.

설이에게는 내가 출산으로 안 좋아진 허리와 골반 관절을 위해 잠시 물리치료를 받고 온다고 이야기하고, 사실은 반지를 물색하러 나가는 일정이었다. 원래 내가 외출하게 되면 어디에서 뭘 하는 중인지 실시간으로 설이에게 보고가 들어가기 때문에 몰래 반지를 보러 다니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야 깜짝 선물이 아닌 것이다.

"괜찮네요! 그런 이벤트 드라마에서 많이 하잖습니까?"

역시 김영진 형님은 내 편을 들어주었다. 최민욱 형님이 눈치를 주듯이 째려보았지만 김영진 형님은 신난 듯 말을 이었다.

"어차피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도 않을 거고, 실제로 치료도 받으면 문제 없지 않을까요? 그리고 저희가 늘 같이 다니는데 위험할 것도 없고 말이죠."

"그렇죠? 역시 영진 형님! 어차피 30분도 안 걸릴 겁니다. 금방 돌아오면 돼요!"

결국 최민욱 형님은 우리 두 사람의 의지를 꺾지 못했고, 도라 아주머니까지 합세해서 그런 로맨틱한 일에는 여러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한 거라면서 최민욱 형님을 설득했다. 3대 1이었다.

안 된다며 끝까지 버티던 최민욱 형님은 내가 내미는 마지막 필살기, 누리의 커다란 눈망울과 배시시 웃는 미소에 져 버리고 말았다.

***

"다음은 그러니까…… 다미아니라는 곳이네요."

청담동 길바닥을 몇 번이나 빙빙 돌았는지 알 수 없었다. 30분이면 해결하고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이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귀금속을 파는 브랜드가 이렇게 많았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도라 아주머니의 추천을 받아서 까르띠에, 샤넬, 미키모토 등의 브랜드 매장을 돌았지만 저마다 디자인이 다르고 그 중에서 뭘 어떻게 골라야 하는지 도무지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이왕이면, 예쁘고 좋은 것을 설이에게 선물해주고 싶은데 확 느낌이 오는 반지도 없을뿐더러 그 가격이 천차만별이었다.

"으아… 아까부터 계속 반짝거리는 걸 봤더니 눈이 멀어버릴 것 같아요."

김영진 형님이 눈을 거칠게 비비며 중얼거렸고, 사실 내 감상도 비슷했다.

벨벳 장갑을 낀 직원 분들이 유리진열대 안에서 꺼내주는 반지는 하나같이 눈부셨고 아름다웠다. 다이아몬드의 커팅 방식과 링의 디자인과 브랜드의 역사, 디자이너의 이력에 대해서 줄줄 읊어주는 친절한 직원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더 결정하기가 어려워졌다.

"이번에도 영 아닙니까?"

등을 돌린 채로 주변을 경계하고 있던 최민욱 형님이 내 쪽에 대고 속삭였다. 나 때문에 몇 시간이나 밖을 헤매고 있는 두 형님들께 미안해서라도 어서 반지를 구매하고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설이에게 변명으로 내민 물리치료에 추나 요법, 거기다가 마사지까지 하고 왔다고 해도 이제는 다시 오피스텔로 돌아가야 거짓말에 얼추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한숨을 푹 내쉬는 내 앞에서 친절한 미소를 잃지 않으며 직원이 넌지시 물었다.

"프러포즈 링을 찾으시는 거죠?"

"아… 네, 뭐, 그런 셈이죠."

뒷목을 긁적이며 나는 시선을 피해버렸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이 느껴져서 훅 바람을 불어 앞머리를 날리면서 헛기침을 해댔다.

내가 소중하게 아끼던 내 동생 한설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반지를 사러 왔다는 사실이 현실적으로 다가와서 갑작스레 민망해졌다.

"그렇다면, 연인과 아침에 눈을 떠서 손을 잡았을 때를 떠올려 보시면 어떨까요? 그 순간 연인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을 반지를 상상해보시는 거예요."

"어……"

나는 자다가 눈을 떴을 때 다정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설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고 내 뺨을 만지작거리는 설이의 커다란 손, 길쭉한 손가락. 그리고 우리 아기를 팔에 안고 조그마한 등을 토닥거리는 설이의 조심스러운 손길.

나는 상상 끝에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디자인이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이 손가락에 내 것과 똑같은 반지가 끼워져 있다면 어떨까. 우리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는 반지를 하나씩 나눠서 끼고 있으면 좋겠다.

"……저기, 이거랑 똑같은 걸 만들 수 있을까요?"

나는 내 왼 손에서 설이가 선물해준 졸업반지를 빼내 직원에게 건넸다.

직원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반지를 벨벳 천 위에 옮겨 받아서는 응접실 한 켠에 있는 현미경과 빛을 내는 기계 안에 집어 넣고 한참 렌즈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실례한다고 고개를 숙인 뒤, 안쪽의 다른 사무실로 통하는 문으로 사라졌다.

김영진 형님이 뒷짐을 진 채로 내가 앉은 쿠션 소파 쪽으로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도라 씨와 통화했는데, 누리는 잘 자고 있습니다. 그런데 깨어나서 한준 씨가 오래 자리를 비운 걸 깨닫게 되면 울음을 터뜨릴 것 같다고 합니다."

"아, 역시 그렇겠죠?"

내 불안한 질문에 김영진 형님은 고개를 단호하게 끄덕였다.

누리는 내가 평소에 한두 시간 정도 병원이나 치료 때문에 집을 비우고 제 곁을 떠나있는 것은 용서했지만, 고 작은 몸 안에 체내시계라도 있는 것인지 내가 이상하게 늦는다는 생각이 들면 30분만 지체되어도 울음을 터뜨리고 달래도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병원에 갔다가 평소와 달리 도로가 막혀서 늦기라도 하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복도를 냅다 뛰어야만 했다. 내 얼굴이 보이기 전까지는 아무리 달래도 통곡을 하며 울어대는 통에 우리 아기가 실신이라도 할 까봐 겁이 났다.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을 때, 응접실 안으로 나이 지긋한 다른 직원이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내 반지가 담긴 벨벳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정중하게 인사한 그가 내 앞에 섰다.

"실례했습니다, 고객님. 의뢰하신 다이아몬드 링에 관련하여 안내 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이 매장 총책임자 김우현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그런데 다이아몬드라뇨?"

"고객님께서 건네신 이 다이아몬드 링 말씀이지요."

친절한 말투로 미소 지으며 내 쪽에 내려놓은 바구니를 빤히 내려다보다가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얼빠진 얼굴로 물었다.

"이게…… 진짜 다이아몬드라는 말씀이세요? 진짜 다이아몬드요?"

네, 하고 깔끔하게 대답하는 직원 분의 얼굴을 보며 나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대체 우리 설이는 어떻게 이 비싼 반지를 그 당시 나에게 선물해준 걸까. 나는 이게 비싼 건 줄도 모르고, 설거지 할 때도 끼고 목욕할 때도 끼고 심지어 욕실 청소할 때도 끼고 있었다. 가끔 물 티슈로 슥슥 닦아내는 것이 내 최대의 대우였다. 

사무실 안쪽에서 직원이 반지를 세척해준 것인지, 반지의 안에 박힌 조그맣고 투명한 보석이 내가 평소에 끼고 다닐 때보다 더 반짝거리며 광이 났다. 나는 덜덜 떨리는 내 손을 반대편 손으로 꾹 쥐었다.

"감정서가 없기에 정확히 말씀 드리기는 어렵지만, 감별만으로도 고객님의 링 다이아몬드는 퀄리티가 상당히 높습니다. 하지만 사이즈가 작기 때문에 다이아몬드 자체로 의미가 크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이 링의 경우,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오히려 디자인과 세공 방식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확실히… 시나브론의 마스터 디자인입니다."

"어, 그러면 시나브론? 거기 매장 가면 똑같은 걸 살 수 있나요?"

내 질문이 마치 유치원생 같았던지 직원은 호탕하게 웃고 나서는 안경을 밀어 올렸다. 그리고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시나브론은 국내에 매장이 없습니다. 그쪽의 디자이너는 무척이나 고집스러운 외골수라서 특별한 스토리가 없는 고객의 의뢰는 받지 않습니다. 브랜드 인지도에 비해서 꽤나 배타적인 방식으로 예약을 받는데다가 그 의뢰 금액 또한 상상을 초월하죠."

"아… 어… 그러면… 어떻게… 그, 연락할 방법이……"

"디자이너 시나브론 그론테는 올해 초 사망했습니다. 그러니 무척 귀중한 반지를 가지고 계시는 겁니다."

"……예?"

멍한 표정으로 몇 초간 입을 벌리고 있자, 내 머릿속 생각이 정리되기를 기다려주는 것처럼 직원은 테이블 앞에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앉아서 나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잠시 뒤에 내게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시나브론의 브랜드가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마스터 디자인은 더 이상 가공하지 않는다는 방침입니다."

"저는, 그 애한테 이거랑 똑같은 반지를 선물해주고 싶었는데… 그건 그러면 불가능한 걸까요?"

"음. 고객님, 이런 방법이 있습니다."

총책임자는 내게 다른 반지들을 가져와 보여주었다. 각기 디자인이 다르게 생겼는데 하나로 겹쳐져 포개지는 형식의 디자인 반지 한 쌍이었다.

"프러포즈 링과 웨딩 링을 서로 교환하고 끼워주는 의식에는 '두 사람이 하나가 된다'는 언약의 의미가 가장 중요합니다. 똑같은 사람이 아니라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하나가 되는 것을 축복하는 의미죠. 고객님의 링과 똑같은 것을 만들어낼 수는 없지만… 그것과 하나처럼 어우러지는 나머지 반쪽을 형상화할 수는 있습니다. 두 분의 운명과 같은 만남을 의미하게 되는 겁니다."

멍하니 그의 이야기를 듣던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그, 혹시, 분할 결제로 할부 가능할까요?"

그는 내게 반지를 선물 받을 상대의 이미지에 대해서 물어봤고, 나는 성심 성의껏 대답했다.

어차피 어휘력이 바닥을 치는 내가 말할 수 있는 거라고는 우리 설이가 엄청 착하고, 엄청 순하고, 엄청 속이 깊고, 엄청 예쁘고, 엄청 귀엽고, 엄청 멋있으며 가끔 엄청 깜찍하고 엄청 섹시할 때도 있다는 단순한 자랑의 연속이었지만 그는 내 말을 녹음까지 하고 신중하게 메모하며 들었다.

"참! 반지 손가락 사이즈는, 이걸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나는 주머니에 넣어온 것을 테이블에 꺼내 올려놓았다. 총책임자는 안경을 콧잔등 뒤로 밀어 올리며 시선을 집중하느라 미간을 찌푸렸다. 어느새 그의 등 뒤에 다가와 있던 다른 직원도 테이블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내 옆에 서 있던 김영진 형님과 멀찍이 서서 경호 중이던 최민욱 형님의 이목도 집중되었다.

"이건…… 딸랑이입니까?"

누리가 잘 가지고 노는 회전식 딸랑이 장난감이었다. 나비모양을 하고 있는데, 벽에 붙여놓으면 휙휙 돌아가서 누리의 시선을 빼앗는 우리 집 인기 스타였다. 날개 양쪽에 각각 소리 나는 큰 구슬이 박혀 있는데 얼마 전에 바닥에 떨어져 크게 부딪히면서 구슬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 그래서 똑같은 나비 모양으로 새로운 것을 구입했는데, 누리는 새것보다 이 구슬 떨어진 나비 딸랑이를 더 좋아해서 버릴 수 없었다.

"여기에 우리 설… 아니, 반지 낄 그 사람의 왼손 약지가 꼭 맞거든요?"

구슬이 떨어진 자리에 큰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혹시라도 누리가 딸랑이를 쥐었다가 다칠만한 부분인가 싶어서 내가 시험 삼아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봤다. 내 검지가 꼭 들어맞아서 신기했던 김에 내 옆에서 대본을 읽고 있던 설이의 손을 끌어와서 끼워봤더니 약지 부분에 꼭 들어맞았다.

"이 구멍 부분 사이즈로 반지를 제작해주실 수 있을까요?"

"하하… 처음 있는 의뢰이기는 하지만, 가능할 것 같습니다. 애써보겠습니다."

총책임자는 내게 한두 번 더 방문해서 디자인 상담이 가능한지 물었고, 나는 한 번 정도는 더 가능하지만 그 뒤로는 가능하면 전화로 이야기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무리 설이가 요즘 스케줄로 바쁘다고 해도, 워낙 예민하고 섬세한 아이라서 설이의 눈을 피하기가 여간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형님들과 나는 개운한 마음으로 서둘러 차를 타고 우리 오피스텔로 향했다.

"어째 누리가 조용한가 봐요? 도라 아주머니께 따로 연락 안 왔죠?"

"예, 그렇습니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 주시기로 했는데 조용합니다."

"벌써 세 시간 가까이 지났는데… 신기하네요."

어쩌면 우리 누리도 제 아빠를 위한 깜짝 선물 이벤트에 가담해주려는 모양이라고, 마음 편히 생각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오랜만의 외출이라서 대형마트 장을 좀 보고 싶었는데, 생각 외로 반지 쇼핑이 너무 길어져서 눈속임용 물리치료도 못 받고 바로 달려갈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설이한테 들키지 않고, 설이 스케줄보다 빠르게 끝나서 다행이었다. 차창 밖을 쳐다보며 돌아가는 길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

"늦었네? 형."

"어… 어어…… 어, 설아. 왜 이렇게 일찍 왔어? 너 저기, 촬영은?"

거실에서 나를 맞이하는 것은 도라 아주머니가 아니라 누리를 안고 있는 설이었다.

내가 집을 오래 비웠어도 우리 아기가 울지 않았던 것은 제 아빠가 돌아와 안아주기 때문이었다. 누리는 조그마한 입술을 뻐끔거리면서 우, 우우, 하고 내게 아는 체를 하며 방긋 웃었다. 설이는 누리를 제 어깨에 기대게 해서 안은 채로 거실을 유유히 가로질러 내 앞까지 걸어왔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로 나를 빤히 내려보는 시선이 차분했다.

"촬영 하나 캔슬 됐거든. 베이비시터는 내가 돌려보냈어."

"어, 그랬구나… 언제… 언제 왔어?"

"30분 전쯤."

나는 목 뒤로 침을 꿀꺽 삼킨 뒤에 설이에게서 시선을 피했다. 자연스럽게 카디건을 벗으면서 침실로 향하는데, 내 걸음이 로봇처럼 삐걱거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설이에게 내가 뭔가 잘못한 것은 없지만, 깜짝 이벤트를 빌미로 거짓말을 하는 중인 것은 맞기 때문에 긴장되었다. 나는 설이를 속이는 것에는 재주가 없는 편이었다.

"치료 받고 오는 길이라던데, 시간이 꽤 걸렸네."

"어… 응, 오늘은 좀 그랬어. 하하."

나는 안방 침실로 들어와서 안쪽 욕실에서 손을 씻고 찬 물로 세수했다.

욕실 밖에서 설이가 누리를 안은 채로 나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심장이 쿵덕쿵덕 뛰었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나가자 설이는 아기의 엉덩이를 받쳐 안고 있던 왼팔을 추켜올리며 오른 손을 뻗어 내 젖은 이마 곁 머리카락을 만졌다.

"듣기로는, 치료하고 마사지하고 오는 길이라던데…… 그게 전부야?"

"그… 그럼."

"그렇구나."

설이는 나를 향해 싱긋 웃었지만, 이내 그 고운 석고상 같은 얼굴은 차분한 무표정에 가까워졌다. 나른하게 숨을 내쉬는 설이 앞에서 나는 잘못을 숨기는 어린아이처럼 내 손가락을 쥐고 꼼지락거렸다. 어떻게든 분위기를 전환 시키고 화제를 돌리기 위해서 나는 일부러 목소리를 밝게 냈다.

"저기, 그, 저녁은? 아직이지? 우리 뭐 먹을까?"

"……형. 나한테 숨기는 거 없어?"

나는 거의 딸꾹질을 할 지경이었다.

천진난만한 누리가 부우, 하고 소리를 내며 설이의 니트를 작은 손으로 쥘 듯이 만지작거렸다. 나는 일부러 설이에게서 시선을 피해서 누리 쪽을 바라봤다. 누리의 까맣고 커다란, 제 아빠를 닮아서 빠져들 것만 같은 매력적인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얼른 손을 뻗었다.

"누리 내가 안을게!"

"………"

설이는 내게 누리를 건네주었고, 나는 거의 세 시간 만에 안아보는 내 아기를 품에 안고 얼렀다. 그 사이에 꽤나 묵직해진 것 같아서 그 무게감 마저 사랑스러웠다. 누리는 내게 안기자, 눈가를 접으면서 뺨이 볼록해지게 방긋 웃었다. 나는 그런 누리를 따라서 절로 표정이 풀어지고 헤에, 하고 웃음이 샜다.

설이가 팔짱을 낀 채로 한숨을 길게 내쉰 뒤에 형, 하고 그런 나를 불렀다.

응? 하고 고개를 들자, 눈을 가늘게 뜬 설이의 시선과 마주쳤다.

"형, 반지 어디 갔어."

설이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마치 그르륵 울리는 짐승의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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