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Sweet Home
파파라치 컷이 처음 공개되었을 때, 설국지색과 Snowflake prince을 비롯한 설이의 팬 사이트들은, ‘과연 한설이 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설전을 벌였다.
검은 세단에서 내린 한설은, 모자를 눌러쓰고 후드까지 겹쳐 쓴 상태였지만 늘씬한 그 체격과 살짝 보이는 얼굴만으로도 그게 배우 한설이라는 것을 누구라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사진 속 설이가 차에서 내린 곳은 샌디에고의 시내 거리였는데, 한 대학병원 근처였다. 그리고 설이는, 품에 누리를 안고 있었다.
나는 손톱을 깨물면서 사진 아래로 스트롤을 내려 댓글들을 살펴봤다.
'야, 한설 왠 테이크아웃 햄버거 같은 거 들고 있음. 미국엔 저런 사이즈 있나 봐.'
'미국에 그런 게 있기는 한데, 저건 버거 아니야. 부리또일 듯.'
'다들 정신 차려. 저건 누가 봐도 아기야. 한설이 아기 안고 있는 거야!'
방향이 다른 곳에서 찍은 사진이 또 올라왔다.
이번에는 설이의 등 뒤쪽에서 찍은 사진이었고, 건물 위에서 찍은 듯 시선이 높았다.
설이가 하얀 속싸개 담요로 번데기처럼 꽁꽁 감싸 놓은 아기를 팔에 안고서 담요 후드를 살짝 들춰 아기의 얼굴을 확인하는 사진이었다. 누리의 방긋 웃는 얼굴 반쪽이 설이의 어깨 너머로 사진에 찍혔다.
그 사진은, 그야말로 핫 이슈였다. 각종 사이트의 첫 화면을 장식했다.
'한설이 미국에서 비밀리에 결혼 후 아이를 낳았다'는 루머는 그렇게 확산되기 시작했다. 나는 그루 엔터테인먼트 쪽에서 내게로 연락을 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설이가 미리 뭐라고 이야기해뒀던 것인지 내게는 이하원 팀장님 쪽에서도 신정아 매니저 쪽에서도 전혀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저 내가 큰 사고를 당했다고 생각하는 권영도 이사님과 우정혁, 제이 쪽에서 보낸 걱정의 메시지들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루 엔터테인먼트는 수많은 의혹들에 전혀 대응하지 않고 묵묵부답 상태였다. 설이는 그런 와중에도 태연해 보였다.
"형, 내가 물어봤는데 반사작용 때문인 것 같아. 누리가 잘 때 스트랩 형식 담요로 팔을 가볍게 감싸주면, 새벽에 자다가 금방 깨는 일이 덜 할 거래."
"어, 그렇구나. 그런데 저기, 설아……"
"비행에 관해서는 문제 없을 거라고 하더라. 누리 여권만 해결되면 바로 한국으로 떠날 수 있도록 다 조치해놨어."
기저귀를 갈아준 뒤에 설이가 누리를 번쩍 들어올렸더니, 누리는 우으 하고 웅얼거리며 환하게 웃었다. 하얗고 조그마한 뺨이 볼록해졌다. 반짝이는 눈동자가 제 아빠를 내려다보며 애교 있게 반쯤 접혔다. 정말 천사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누리에게 빠져있을 때가 아니었다.
"설아, 우리 잠깐 얘기 좀 하자."
"응."
거실에 있는 로빈에게 누리를 잠시 맡겨둔 뒤, 설이는 나를 꼭 끌어안았다.
"소문 때문이라면, 형은 걱정할 것 없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어떻게 그래? 너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봤어?"
"그런 거 상관 없어."
내 걱정 담긴 시선에도 설이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루 엔터테인먼트에서 아직 공식적인 대답을 내놓고 있지 않자, 사람들은 멋대로 떠들어댔다.
‘배우 한설이 미국에서 대기업의 혼외자와 비밀리에 결혼했다’는 기사는 그나마 양반이었다. 한설이 만나던 여자가 아이를 낳은 뒤 잠적했고, 결국 한설은 미혼부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그 여자가 누구인지를 추측하는 것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게 아니라 한설이 대리모 혹은 인공수정으로 2세를 얻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 소문이 인지도를 얻고 있는 것은, 설이와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다는 사람의 증언 때문이었다.
'한설이 고등학교 재학 당시 운동장에서 한 남학생과 키스하는 것을 목격했다'는 그 증언에는 동조하는 사람이 몇몇 등장하면서 한설이 사실 게이였으며, 남성 파트너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갖고 싶어서 미국에서 동양인 대리모를 구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완성되었다.
"미치겠네, 진짜. 그때 얘기가 갑자기 왜 나와……"
당시 졸업식날 운동장에서 한설과 키스했던 장본인인 나는, 그 기억이 뒤늦게 떠올라서 얼굴이 불타올랐다. 내가 계속해서 기사와 댓글들을 찾아보자 설이는 휴대폰 화면을 가리며 내 시선을 빼앗었다.
"한국으로 돌아가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 있다고 직접 발표할 거야."
"뭐?"
"아기는 내 친자라는 말도 할 거고, 이외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기로 했어. 박궁선 회장 쪽에서 제안한 거야."
"……아니, 왜? 회장님이나 그루 엔터는 어떻게 알고 있는데?"
설마 내가 아기를 낳았다는 사실을 설이가 회사 쪽에 말했을 리도 없고, 그걸 믿어줄 리도 없었다. 당황한 내 앞에서 설이는 내 두 손을 꼭 쥔 채로 말을 이었다.
"그쪽도 그렇게 알고 있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가졌다고. 내가 먼저 계약을 해지하고 은퇴하겠다고 했지만, 그루 엔터 쪽에서 내 사생활을 최대한 지켜주는 대신, 활동을 계속하자고 했어. 그리고 그 쪽이 앞으로 형과 누리를 지키기에는 더 나을 것 같다고 판단했고."
"그렇지만…… 설아, 사람들이 그걸 납득할 리가 없어. 너를 두고 말이 많을 거야. 물론 누리에 대해서도 계속 관심을 가질 테고."
"어차피 내가 이번 일로 은퇴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계속 우리를 추적할 거야. 그것보다는 공표 후에 보호를 받으면서 대중의 시선 안에 있는 편이 더 안전할 거야."
"……나는 사람들이 너를 두고, 뒤에서 속닥거리는 거 싫어."
설이는 내 중얼거림이 귀엽다는 듯이 내 손가락에 촉 촉 입을 맞추며 작게 웃었다. 혼란스러운 내 마음 상태와 달리 설이는 너무나도 느긋해 보였고, 정말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형은 나만 믿어."
넓은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로 내 등을 토닥거리는 설이의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았지만, 여전히 내 마음은 편치 않았다.
***
번역기를 돌려야 하는 해외 사이트들은 이용하기 힘들어서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틈이 날 때마다 설국지색 사이트에 들어가서 눈송이 분들의 반응을 살펴봤다.
아직 공식적인 발표가 없기 때문에 한설이 직접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의견이 큰 흐름이었지만, 설이에게 배신감을 느껴 팬을 그만두겠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벌써부터 적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설이가 파파라치 컷에서 안고 있었던 우리 아기 누리는, 누가 봐도 설이를 쏙 빼 닮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설이가 본인과 상관 없는 지인의 아기라고 말하면, 그게 더 이상할 상황이었다.
"형, 김치볶음밥에 베이컨 넣는 게 좋아?"
"어? 어어."
"그럼 많이 넣을게."
"어어…"
상체는 맨 가슴을 드러낸 채 파자마 바지만 입은 설이가 싱크대 쪽에 서서 요리를 하는 중이었고, 침대의 내 옆자리에는 누리가 손가락을 웅크리고서 모처럼 곤히 자고 있었다. 커튼을 전부 쳐놔서 햇볕이 거의 들어오지 않았지만 호텔 방 안은 포근했고, 우리 세 가족의 안락한 요새였다.
최민욱 형님의 말에 의하면, 주변을 돌아다니는 기자들이 꽤 목격되었으니 되도록이면 테라스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게 좋겠다고 했다. 설이에 대한 루머가 퍼지면서부터 나는 한국의 실시간 뉴스 챙겨보는 버릇이 생겼는데, 헤드라인으로 지나가는 기사가 내 시선을 잡았다.
- 톱스타 한설에 대한 특종이 있다며 각 매체를 통해 제보했던 출판사 대표 강모 씨가 수감 도중 사망했습니다. 원인은 심장마비로 밝혀졌으며, 강모 씨와 접견했던 한 기자는 그가 한설의 출생에 관한 비밀을 알고 있으며 특종을 단독 제공하는 것을 조건으로 수 억대의 금액 요구를 제시했다고 말했습니다. 한설의 소속사인 그루 엔터테인먼트 쪽에서는 법적 대응을…
강춘영, 잊고 지냈던 그 남자의 비릿한 미소가 떠올라서 소름이 돋았다.
어쩌면 강춘영은 여태까지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설이에 대한 루머가 떠도는 지금이라면, 설이에 대해 무슨 말이든 꺼내도 화제가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만약 그가 죽기 전에 누군가에게 설이의 출생이나 신체적인 특이성 같은 것을 발설했으면 어쩌나 두렵기도 했고, 이미 그가 죽었다고 하니 묘한 기분이었다.
왜 갑자기 사망했을까. 기사에 대해서 더 찾아보니 강춘영이 수감 중인 지역에 때아닌 폭우가 있었는데, 그 폭우가 있던 밤이 지나고 나서 심장마비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고 했다.
"……아니겠지."
설이는 지금 미국에 나와 함께 있고, 내게 더는 사람을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럼에도 나는 부엌 쪽을 멀리 바라보았다. 설이는 탄탄한 가슴팍과 멋지게 갈라진 복근을 드러낸 채로 아일랜드 바 위에 프라이팬을 내려놓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형. 달걀프라이 노른자가 터져버렸어, 미안."
눈가를 찡그리며 귀엽게 웃는 설이 보는 순간 의심한 게 미안해져서 푸스스 웃고 말았다.
아마 설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괜히 안 좋은 기억으로 남은 강춘영의 사망 소식을 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나는 휴대폰 화면을 넘겼다.
***
저녁에는 한국으로 떠나는 우리를 위해서 로빈이 준비한 파티가 있었다. 파티라고 해봐야, 내가 멀리까지 움직일 수 없고 우리 누리도 조심해야 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호텔 라운지를 빌려 우리끼리 조용히 식사하는 자리였다.
최민욱 형님과 김영진 형님을 비롯해서 내가 모르는 다른 경호원 분들도 모두 함께했으면 했지만, 그들은 짧게 식사하고 돌아가며 보초를 서거나 주변을 점검했다.
"준, 내가 우리 천사를 안고 있을 테니 더 식사해요."
"저 많이 먹었어요. 로빈 씨 편하게 드세요."
"에이, 그게 아니라 곧 못 보게 될 우리 베이비를 더 안고 싶어서 그래요."
로빈이 내게서 누리를 데려가서 안고 얼러주며 돌봐주는 덕분에 나는 바비큐를 잔뜩 먹을 수 있었다.
설이는 식사 도중에 몇 번이고 전화가 와서 통화를 하기 위해서 잠시 자리를 비웠는데, 한 두 번은 우리가 곧 돌아갈 오피스텔의 청소와 재정비를 위한 전화인 것 같았지만 나머지는 그루 엔터테인먼트에서 온 연락인 게 분명했다. 설이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파티가 끝난 후 호텔에 돌아와서, 나는 침대에 누리를 눕혀 두고 드레스룸 쪽에 서 있는 설이에게로 다가갔다. 손목시계를 푸르고 있던 설이의 넓은 등을 뒤에서 껴안았다. 단단하고 날렵한 허리가 내 두 팔에 기분 좋게 감겼다.
설이는 피식 웃으면서 내 쪽을 흘깃 돌아봤다.
"형, 안 피곤해?"
"……있잖아, 누리 내 아이인 걸로 발표하자. 사람들한테는, 형의 아기라고 해줘. 응?"
설이는 내 제안에 대답 없이 조용히 서 있다가 길게 숨을 내쉬더니 등 뒤에 선 내 팔을 잡아 앞으로 끌어왔다. 진지한 눈길로 나를 내려다보는 설이의 눈빛이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형과 나의 아이잖아. 내 친자식 맞잖아."
"그야 그렇지, 설아. 당연히 네가 아기 아빠지. 그렇지만 세상에 누가 그걸 믿어 주겠어. 믿는다고 해도 곱게 볼 리가 없잖아. 어차피 설이 너와 나, 둘 중의 한 명의 아이인 걸로 발표를 해야 한다면, 내 쪽으로 해줘."
"………."
"난 설이 네가 이런저런 소문으로 욕 먹는 거 싫어.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나한테 네가 얼마나 소중한데… 응?"
두 손으로 뺨을 감싸며 눈을 맞추자 설이는 시선을 내리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내게서 감추었다.
설이는 늘 타인 앞에서도 나를 향한 애정표현에 거침이 없고, 나를 자랑스러워하는 만큼 누리에 대해서도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이지만, 세상 사람들의 기본적인 상식과 통념에는 우리가 이상한 존재로 보이기 쉬웠다. 그리고 나는 그런 시선에 맞서면서까지 아까운 내 동생을 방패막이로 쓰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누구 아이로 알고 있든, 그런 건 상관 없잖아. 그렇지?"
나는 내게서 시선을 피한 채로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생각에 잠긴 설이의 긴 속눈썹 위에 발돋움해서 입을 맞췄다. 쪽 쪽 여러 번 반복할수록 설이의 굳어진 입가가 누그러지는 것을 나는 눈치챘다.
"설아, 내 부탁 들어줄 거지?"
"……그렇게 할게."
못내 아쉬워하면서도 설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착하다고 몇 번이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엉덩이를 두드려주자, 설이는 애교를 부리듯이 큰 덩치를 구부려 내 어깨에 제 뺨을 대고 비볐다. 곧 끈적이는 키스로 이어질 분위기였지만, 침대에 뉘여 놓은 우리의 갓난아기가 꼬물거리며 우응하고 소리를 내기 시작해서 우리는 침대 쪽으로 급히 달려가야 했다.
***
어차피 누리는 호적도 내 밑으로 들어와 있었다. 내가 내 몸으로 직접 낳은 아이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만약 배우 한설이 대중을 속이기 위해서 자신의 아이를 친 형의 아이라고 속인다고 누군가 의심해도, 법적으로 내 아이로 되어 있으니 더는 어떻게 비밀을 캐낼 수 없다. 진실을 알고 있는 닥터 게일과 병원은 환자 정보를 절대로 발설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설이와 아기에 대한 루머는 물밑에서 끊임없이 회자되고 의혹으로 넘쳐나겠지만, 어차피 우리 설이가 대기업 자제와 비밀 결혼을 했다는 증거까지 만들어내 들이미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이었다.
그루 엔터테인먼트와 박궁선 회장 쪽에서도, 설이가 어떤 여성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친형인 내 호적에 올린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걸 정정해서 알려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들 앞에서 '제가 낳았어요' 라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한준 씨! 정말 잘 생각하셨습니다. 동생의 앞날을 위해서도, 그리고 아이를 위해서도, 최선의 결정이었습니다. 한준 씨의 결정으로 우리 그루 엔터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일자리가 안정을 되찾았는지 모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박궁선 회장의 비서는 따로 내게 전화를 걸어서 감사 인사와 함께 앞으로 제공할 법적 조치와 비밀 함구를 위한 제도에 대해서 설명했다.
여론은 배우 한설에 대한 허위 취재로 루머를 만들어낸 신문사들을 힐난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설국지색을 비롯한 설이의 팬 사이트들도 안정을 되찾아가는 중이었다. 아무리 더 의심하려고 해도, 설이가 어떤 여자를 만났다는 정황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의혹은 커지지 못했다.
설이는 미국에서 영화 촬영을 하는 내내 다른 여자 배우들 혹은 여성 스태프들과 개인적인 연락을 취하거나 만남을 가지기는커녕, 연기 수업과 대본 연습, 트레이닝 센터와 병원을 오가는 것이 동선의 전부였다. 설이는 여성이 아니라 남성과도 필요 이상의 대화를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연쇄추돌사고 현장에서 부상을 당했다는 친형이 입원한 병원을 자주 오가는 것과 갓난아이 조카를 아픈 형 대신 병원에 데리고 다니는 것은 오히려 설이의 이미지를 더 좋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 덕분에 한국에 다시 입국했을 때 취재진들은 설이를 집요하게 괴롭히지 않는 분위기였다. 우리는 생각보다 더 수월하게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
"형, 또 옮길 게 있으면 내가 나가기 전에 해둘게."
"아냐. 누리 침대는 거기가 딱 좋을 것 같고… 다 됐어!"
오래 비워둔 오피스텔은 설이가 미리 사람을 시켜서 청소를 해둔 덕분에 바로 어제까지 생활했던 것처럼 깨끗하고 편안했다.
익숙한 우리 집 냄새를 맡으니까 불쑥 눈물이 났는데, 그 동안 정말 한국이 그리웠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그리고 설이와 나의 보금자리에 이제는 새로운 가족 한누리가 함께 있다는 것이 너무 낯설고 신기한 이벤트였다.
"아… 누리 선물을 또 보냈네."
설이는 신 매니저님의 메시지를 받으며 난감한 표정으로 뒷목을 긁적였다.
지난 주에도 이미 신 매니저님의 차로 싣고 온 팬들의 선물이 거실을 가득 채울 정도였다. 자그마한 아기 우주복과 신발부터 흔들면 각가지 소리가 나는 유아 장난감, 보드라운 소재로 만든 모빌, 그 모든 것이 다 누리의 것이었다.
좋은 목재로 만든 아기침대는 한 팬의 목수 아버지께서 직접 제작하셨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돌려보내야 했다. 이미 각 방마다 누리의 침대가 있었고, 오피스텔 안이 아무리 넓다고 해도 필요 이상의 아기 용품이 지나치게 많았다.
팬들은 아기가 한설의 조카라고 알고 있었지만, 타인에게 무심한 성격인 설이가 '조카바보'가 된 것에 열광했다. 누리를 안고 병원으로 외출하는 것이 모두 설이의 몫이었기 때문에 가끔 설이가 아기를 데리고 다니는 사진과 영상이 찍힐 때마다 화제가 되었다. 블랙 수트에 가죽 구두를 신고, 선글라스까지 낀 설이가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다른 손에는 딸랑이를 쥐고 있는 사진은 엄청난 인기였다.
팬들은 이제 설이보다 누리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아기 도련님 식사 시간인데 데려가도 될까요?"
"아, 네. 감사합니다."
설이가 고용한 베이비시터는 다정하고 말 수가 적은 도라라는 아주머니였는데, 놀랄 정도로 로빈과 얼굴이 닮아 있었다. 알고 보니 로빈의 이모였다. 믿음직스러운 사람인데다가 누리가 잘 따라서 그 덕분에 나는 낮 동안 평온하게 지낼 수 있었다.
우리 둘만 사는 집 안으로 사람 들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설이가 나를 위해서 배려해준 것이 기쁘고 고마웠다.
TV로 그동안 미국에서 출산하느라 못 봤던 한국의 드라마들을 보다보니까, 권영도 이사가 주연으로 나오는 불륜 드라마가 있었다. 아내가 친구와 바람을 피운 것을 타인에게서 들은 권영도가 눈을 부릅뜨며 비통한 표정으로 화면 속에서 말했다.
'……저는 안 믿습니다.'
웬만한 모든 상황에서는 늘 방긋거리며 웃는 우리 누리는, 신기하게도 화면에 권영도가 비춰지면 눈가를 찡그리며 싫은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천사 같은 얼굴로 짜증을 부리는 누리가 너무 귀엽기도 하고, 우연인가 싶어서 한두 번 권영도 이사의 드라마를 볼 때마다 옆에 뉘여 놨더니, 누리는 화면을 볼 줄도 모르면서 권영도 이사의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며 반응했다.
그리고 권영도 이사는 내게 전화를 해와서는, 드라마 속에서와 똑같은 말을 했다.
- 한준 씨, 나는 안 믿습니다.
"네? 뭘요?"
- 한준 씨가 연인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가졌다는 그 이야기 말입니다. 회장님께서는 사실이라고 하셨지만, 나는 분명 한준 씨가 내게 뭔가를 속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죠?
권영도 이사는 한국에 돌아온 내가 사고에서 완전히 회복했는지 직접 만나서 확인하지 못해서 안달했다. 게다가 내가 대뜸 아기 아빠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내게 몇 번이나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마치 드라마 속의 불륜을 저지르던 사람처럼 괜히 설이 신경에 거슬릴 까봐 권영도 이사의 전화를 계속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낮 시간대에 설이가 스케줄 때문에 집을 비운 타이밍이 되어서야 전화를 받은 참이었다.
권영도 이사는 한숨을 깊이 내쉬며 진지하게 물었다.
- 한설의 아이가 맞죠? 한준 씨는… 여자를 만날 리가 없어요. 그렇잖습니까. 여태까지 동생만 그렇게 바라봐놓고는.
"이사님,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이사님께서 말씀하시는 아기는 내 아기라는 거예요. 만약 그 이상 우리 설이에 대해서 허위사실 유포하시면 저 가만 안 있습니다?
- 하아아…… 정말 끝까지 잔인하네요.
"좋은 사람 만나세요, 이사님."
나는 웃으면서 권영도 이사를 다독였고 전화를 끊을 때까지도 권영도는 내가 아기의 친 아빠라는 것이 말도 안 된다며 중얼거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친 아빠는 아닐 것이다. 아빠보다는 아기 엄마 격이랄까.
***
"누리야, 저기 아빠 나온다. 누리야. 아아- 빠."
우 우으, 침을 흘리면서 조그마한 입으로 옹알거리며 누리가 눈을 빛냈다. 누리는 티브이 화면보다는 인터뷰하며 들려오는 티브이 속의 설이 목소리에 더 집중했다. 아직 옹알이조차 제대로 못하면서 아, 우우, 하고 조그마한 입술로 뭔가 소리를 내는 것이 꼭 설이가 제 아빠인 것을 안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대견스럽고 감격스러웠다.
어쩌면 우리 누리는 명석한 설이를 닮아서 천재인지도 모른다. 적금을 차곡차곡 모으고, 설이한테 방법을 물어봐서 주식도 좀 해봐서 나중에 우리 누리에게 쓸 교육비를 벌어놔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이렇게 똘똘해서는 어디 유명한 학교로 유학을 보내는 일까지 생길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그마한 녀석을 언젠가 떼어놔야 한다는 걸 깨닫고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개봉을 앞두고 있는 레본 킥 감독의 영화에 대한 홍보 메시지와 함께 지난 시즌 촬영했던 작품의 해외 발매에 대한 소식을 전하는 설이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듣기 좋았다.
“누리 아빠 멋있다, 그렇지?”
대답하는 것처럼 누리는 우, 하고 입술을 모아서 소리를 냈다. 보드라운 햇살 냄새가 나는 누리의 머리에 코를 댄 채로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설이도 누리를 제 아이라고 자랑하고 싶을 텐데, 다른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거 생각하느라 설이 기분을 생각 못해준 것 같네.
인터뷰할 때마다 가끔 ‘조카’에 대해서 묻는 취재진들에게 설이는 화면에서는 보기 드물게 미미한 미소를 입 끝에 올리면서 잘 크고 있으며, 무척 예쁘다는 말을 하곤 했는데 그게 나는 어쩐지 안쓰러웠다.
내 자식이다, 내 새끼다, 자랑하고 싶을 것이다.
“…흐음, 설이를 기쁘게 하고 싶은데, 뭔가 방법이……”
동그랗고 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우, 으우, 하고 제 의견을 말하는 누리를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안아 어르다가, 나는 문득 내 왼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에 시선이 갔다. 설이가 내게 졸업선물로 준 것이었는데, 반지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그래서 나는 바로, 내 계획에 착수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