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안개 속의 남자
우정혁이 영국으로 떠나는 날이었다. 그리고 내가 병원에 입원하기로 한 날이기도 했다.
아침 일찍 공항으로 우정혁을 배웅 나간 뒤에 근처에서 가볍게 차라도 한 잔 하고, 천천히 돌아와서 입원 절차를 밟아도 여유 있는 일정이었다.
"우정혁 선배하고는 나중에 또 볼 텐데, 형이 공항까지 갈 필요는 없잖아."
"그래도 나 만나겠다고 멀리서 온 친구를 어떻게 그냥 혼자 보내?"
설이는 허리에 손을 올린 채 한숨을 푹 내쉰 뒤 고개를 들었다. 뒷머리는 짧게 치고 앞머리는 눈가를 가릴 만큼 길게 낸 새로운 헤어스타일은 어딘지 모르게 무척이나 섹시한 분위기였다. 긴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미간을 살짝 찌푸린 설이가 차분하게 말했다.
"형은 지금 홑몸도 아니잖아."
"그래서 뭐? 로빈 씨가 차 태워주면 그대로 타고 갔다가, 다시 가만히 타고 오는 게 전부인데 위험할 것도 없지. 내가 지난 반 년 간 그것밖에 더 한 게 있어? 그냥 얌전히 앉아 있고 조금 걷고… 그것도 안 돼?"
몸이 무거워질수록 짜증이 늘었다. 보통 산모들에 비하면 절반 정도의 부피였지만,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이 세상에서 다른 생명을 몸 속에 품고 다닌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욱 힘든 일이었다. 그걸 알기 때문에 주변 모두가 나를 배려해주었고, 특히 설이는 나를 유리 공예품처럼 깨질세라 조심스럽게 대했다.
그렇게 유난스러울 정도로 왕성하던 식욕도, 어느 순간 뚝 끊기듯 없어졌다. 무엇도 먹기 싫어져서 끼니를 때우는 게 어려웠다. 닥터 게일은, 태아가 몸집을 불리기 위해서 위장을 비롯한 다른 장기들을 짓누르고 있어서 기능이 저하되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설이는 내가 미음도 제대로 삼키지 못하거나 생과일 주스를 조금 마시다가 헛구역질을 할 때마다 죄인이라도 된 것마냥 내 곁에 숨소리 하나 안 내고 다가와서 내 어깨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나는 설이의 그런 표정을 보는 게 싫어서 괜찮은 척, 쾌활한 척 해봤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몸이 힘드니까 마음도 지쳐갔다.
설이는 내 목소리에 날이 서자, 또 죄인 같은 표정으로 내 어깨와 목덜미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럼 다녀와. 조심하고, 메시지 자주 남겨줘."
결국 내 쓸데없는 고집에 설이는 그렇게 또 져주고 말았다. 최근 들어 자주 티격태격하기 시작한 우리의 작은 말싸움은 늘 이런 식으로 설이가 지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게 나도 마음 편치 않았다.
사실, 우정혁 놈이야 고등학교 내내 지겹게 봐왔고 정말 설이 말대로 다음에 또 만날 텐데 굳이 무거운 몸으로 내가 공항까지 배웅 갈 필요까지는 없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우정혁도 만삭에 가까워진 내가 공항에 따라가는 것을 부담스러워했고, 만류했다.
하지만 나는 임신으로 인해서 거의 반항기의 청소년 같은 마음상태였기 때문에 남들이 하지 말라는 것은 꼭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게다가 먹는 즐거움도 없어진 채로 몸이 무겁고 속이 울렁거리는 게 어찌나 답답한지,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리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 입원을 하게 되면 수술을 하고 회복될 때까지 한동안 병원에서 옴짝달싹 못할 텐데, 그건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그래서 그 전에 바람 쐬러 외출도 할 겸 공항에 가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설이의 근심 가득한 얼굴을 보니, 고집부린 게 곧바로 후회되었다. 설이는 어릴 때부터 반항기 한 번 없이 나를 잘 따르는 착한 아이였는데, 내가 오히려 설이에게 사춘기 동생처럼 심술을 부리는 격이었다.
"설이 네가 싫으면 안 갈게. …그냥 병원으로 갈게."
웅얼거리며 내가 대답하자, 설이는 몸을 숙여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입술 끝을 부드럽게 올리며 근사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미안해하는 것이 귀엽다는 듯 뺨을 건드렸다.
"아니야. 형이 가고 싶으면 가야지. 잘 다녀와, 나도 스케줄 마치고 바로 병원으로 갈 테니까 이따가 병원에서 보자. 형."
영화 촬영이 끝나면, 바로 한가해질 줄 알았던 설이의 스케줄은 촬영 분을 모두 마치고도 끝없이 이어졌다. 배우 한설에 대한 해외 팬들의 관심이 예상보다 더 뜨거웠고, 그루 엔터테인먼트에서도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는 생각인지 설이를 홍보할 수 있는 쇼 프로그램이나 관계자들의 파티 방문 일정을 자꾸 만들어냈다.
내가 우정혁과 공항에 갈 때쯤 설이는 병원에서 한 시간 남짓 거리에 있는 티후아나 쪽에서 영화 홍보용 생방송이 있었는데, 아마 예정대로 진행된다면 내가 병원으로 돌아갈 때에 설이도 촬영이 끝날 것이라고 했다.
"오늘도 먹고 싶은 건 없고?"
고개를 끄덕이는 내가 안쓰럽다는 듯 설이는 내 뺨을 손등으로 슬슬 쓸다가 한숨 섞인 미소를 지었다.
"조금이라도 먹고 싶은 게 생기면, 로빈에게 꼭 얘기해. 참지 말고, 응?"
다정한 눈빛으로 이번에는 내 귀를 만지작거리며 설이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출근하는 설이의 가슴팍에 고개를 파묻고 미안해, 하고 속삭였다. 형제로 지내는 그 오랜 시간 동안에는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는데…… 서로에게 그 이상의 존재가 되기로 맹세한 뒤로 자꾸 미안할 일만 늘었다. 설이는 내 사과에 흉통을 울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등을 쓰다듬는 커다란 손바닥에 위로 받으면서 눈을 감고 나는 다짐했다.
아기만 태어나면, 설이한테 진짜 잘 해줄 거야. 물론 아기한테도 잘 할 거고.
***
로빈은 자타 공인의 베스트 드라이버였다. 평소 애용하는 오픈카가 아니라 중형 세단을 타고 나왔고, 우리를 공항까지 안전하게 모셔다 드리겠다며 설이를 안심시켰다. 게다가 우리를 뒤따르는 검은 세단에는 김영진 형님과 내가 모르는 다른 남자들이 타고 있었는데, 결국 로빈을 제외한 경호원이 총 네 명이었다.
조수석에는 최민욱 형님이 탔고, 뒷좌석에 나와 우정혁이 탔다. 우정혁은 부잣집 도련님이면서도 집안에서 거칠게 다뤄온 문제아여서 그런지 상석에 타는 것을 무척이나 어색해했다. 게다가 경호원을 달고 다녀본 적은 없어서 그것도 꽤나 불편해했다.
"내가 진짜 친구 녀석 하나 잘 둬가지고, 별 경험을 다 해본다."
"좋지? 내 덕분에 호강하는 줄 알아라."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우정혁은 차창 밖의 도로를 바라보았다. 다음에는 한국에서 만나게 될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아마 그럴 것이다. 설이의 미국 스케줄이 끝나고 나도 몸이 회복되면 우리는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고, 우정혁도 정기적으로 한국에 들어오니까 그때쯤 다시 만나기가 쉽다.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때는 우리 집에 아기도 있겠지?"
우정혁은 피식 웃다가 심각한 표정을 했다.
"……그러고 보니까 내가 너네 아기 낳으면, 돌잔치에 금반지 들고 가겠다고 했었는데."
그런 말을 했었나. 기억나지 않아서 그래? 하고 되물었다. 우정혁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감탄하듯 말했다.
"하, 장난으로 한 말이었는데 진짜 금반지 사게 생겼네."
허탈한 듯 웃는 우정혁을 보며 나는 금반지를 얻게 되었다는 생각에 뿌듯해졌다.
습관적으로 배를 쓰다듬었다. 이제는 펑퍼짐하고 루즈한 옷으로 가리지 않으면, 배가 불룩한 것이 멀리에서 봐도 테가 날 정도가 되어버렸다. 몸은 여전히 말랐기 때문에 누가 내 알몸을 본다면, 흡사 외계인 같이 보일 것이다.
그런 내 모습이 흉측할까 봐 나는 호텔방 안에서도 옷으로 몸을 꼭꼭 숨기고 있었는데, 샌디에고의 기온이 내 생각보다 따뜻한데다가 이제 봄을 지나서 여름으로 다가가는 날씨였기 때문에 옷을 껴입으면 슬슬 땀이 났다. 게다가 눈치 빠른 설이에게서 내 몸을 감추기가 쉽지 않았다.
혼자 목욕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이유로 설이는 굳이 욕실까지 따라 들어와서는, 욕조 안에 함께 들어와서 내 몸을 정성스레 씻겼다. 일부러 몸을 가리기 위해서 거품을 잔뜩 풀어봐도, 내 등뒤에 바짝 붙어 앉아서 여기저기 쓸어 닦아주는 손길에서는 내 몸의 굴곡을 숨길 수가 없었다.
나조차도 배만 불룩한 내 모습을 인정할 수가 없어서 전신 거울을 보기 꺼려지는데, 설이 눈에는 오죽 이상할까. 나는 지레 겁 먹고 설이가 욕조 안에서 나를 닦아주는 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내 머리와 귓가에 입을 맞추며 설이가 내 어깨에 입술을 비볐다.
"그 어떤 때보다 형이 더욱 사랑스러워."
"……거짓말."
울먹이는 내 목소리에 설이가 작게 웃었다.
"나 형한테 거짓말 안 하는 거 알잖아. 응?"
흘깃 고개를 돌려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다정하게 웃는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설이의 몸은 정말로 정직했다. 내 다리 사이로 딱딱한 것이 닿았기 때문에 나는 설이의 말이 거짓이 아니란 것을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욕조 안에서 키스하는 동안, 설이는 손바닥으로 내 배의 볼록한 부분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뱃속에서 아기가 움직이는 것을 선명하게 느꼈다. 설이와 나는 입술을 맞댄 채로 동시에 눈을 떴다. 잠시 놀란 눈빛으로 서로를 쳐다보다가 우리는 푸스스 웃었다. 키스하는 도중에 함께 태동을 느끼다니,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공항에 다다랐을 때, 생각에 빠져 있던 내게 우정혁이 물었다.
"애 이름은 정했냐."
"아직. 설이랑 나랑 각자 더 생각해보고, 오늘 저녁에 둘이 최종적으로 결정하기로 했어."
그러냐, 하고 심드렁하게 말한 우정혁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사실 나는 오늘 아침에 내가 아기 이름 후보로 생각하고 있던 것들 중에서 이미 하나를 확정해서 고른 상태였다. 과연 설이는 내가 고른 이름을 어떻게 생각할지 기대되어서 비실비실 웃고 있던 참이었다.
"왜? 내 얼굴을 왜 그렇게 쳐다봐. 뭐 묻었냐?"
"아니, 뭐랄까… 널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누굴 만나서 가족을 이루고 산다는 게…… 생각보다 꽤 괜찮은 일인 것 같다."
"……뭐야, 너 외롭냐. 누구 소개시켜줘?"
어쩐지 쑥스럽고 민망해져서 팔꿈치로 우정혁을 툭 치자, "그런 건 아니고." 하고 딱 잘라 말했다. 우정혁은 누구 만나서 연애할 생각조차 일절 없다고 말했다. 사실 소개 시켜줄 만한 사람도 없었는데, 다행이다.
공항에는 예상보다 늦게 도착했다. 예정대로라면 우정혁과 조금 더 노닥거리면서 차라도 한 잔 할 생각이었는데, 출국 절차를 밟아야 해서 빨리 보내야만 했다. 공항에는 사람들도 붐볐기 때문에 설이가 챙겨 보낸 마스크를 썼다. 함부로 약을 먹을 수도 없는데 감기라도 옮으면 큰일이었다.
우정혁은 내게 헤이즐넛이 박힌 거대한 초콜릿을 하나 안겨주고 손을 흔들며 떠나갔다.
"한준, 순산해라."
담백한 인사말이었는데, 어쩐지 그 인사에 내가 정말로 아기를 곧 낳게 된다는 것이 실감 났다. 사실 말하자면, 낳는다기보다는 수술로 꺼내는 것이겠지만, 어쨌든 제왕절개와 비슷하다고 했으니 이것도 출산이었다. 우정혁이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보고 서 있는데 로빈이 내게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준, 뭐 먹고 싶은 거 없어요? 프린스한테 보고 연락 해야 하는데."
설이에게 보내는 휴대폰 메시지 화면을 흔들어 보였다. 로빈은 내게 예시로 메뉴들을 읊어주었지만, 피자나 파스타, 떡볶이와 우동, 그 어떤 것도 내 속을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거의 빈속이었지만 계속 체한 느낌이었다. 그나마도 개운한 페퍼민트 차라거나 오렌지주스, 레몬에이드 같은 것은 조금 넘어가는데, 그걸로는 식사가 되지 않아서 문제였다.
"베이컨 비프 버거는 어떠십니까? 전에 잘 드시던데."
언제부터 등 뒤에 있었는지, 김영진 형님이 내게 물었다. 그 옆에는 최민욱 형님을 비롯해서 내가 모르는 두 명의 경호원들이 옹기종기 모여 서 있었다. 가만 보자, 우리 오피스텔에서 경비원으로 지나가며 봤던 사람들인 것 같은데…… 이 사람들을 여기 다 데려오면 우리 오피스텔은 대체 누가 지키는 거야?
"가벼운 스프 같은 거라도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최민욱 형님마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보탰다. 모두가 나만 쳐다보고 내 식사 메뉴에 대해 회의하고 있었다. 고작 나의 끼니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게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말 식욕이 없었다.
"정 그러면 따뜻한 코코아라도 마시고 병원 쪽으로 이동할래요?"
로빈이 다정하게 물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저었다.
일단 사람들로 바글거리는 시끄러운 공항을 벗어나고 싶었다. 게이트 넘버 안내 방송이 귓가를 윙윙 울렸다. 갑작스럽게 몰려 오는 피로감 때문에 한숨 자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내가 갑자기 지쳐 보였는지 로빈과 형님들은 서둘러서 주차해둔 차를 찾고, 나를 안내하며 일사 분란하게 움직였다.
***
차 안에서 우정혁이 준 초콜릿을 조금 뜯어 먹으면서 차창 밖의 광활한 도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들판 같은 것이라도 구경할 게 좀 있었는데, 지금은 안개에 둘러싸여서 무엇 하나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와, 오늘은 아침부터 밖이 정말 뿌옇네요. 멀리 있는 건 하나도 안 보여요."
로스엔젤레스 국제공항에서 샌디에고 병원 쪽으로 돌아가는 길은, 최민욱 형님이 교대로 운전하고 로빈이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로빈은 따뜻하게 시트를 데운 뒷좌석에 쿠션을 껴안고 앉아 있는 나를 흘깃 돌아봤다.
"요즘엔 늘 이래요. 그래도 아침엔 안개주의보 발령이었는데, 지금은 조금 나아졌네요."
"우정혁 놈 탄 비행기는 괜찮으려나."
"어쩌면 연착으로 몇 시간은 발 묶일 가능성도 있어요."
설이는 생방송 중이었기 때문에 메시지를 보낸다고 해도 답장을 받을 수 없었다. 그래도 지금 병원으로 가는 길이라고 메시지를 보내놓았다.
"…어쩐지 좀 춥네요."
"히터 올리겠습니다."
최민욱 형님이 안정적으로 운전하며 즉각 대답했다.
그 뒤로 몇 분 정도 나는 잠시 졸고 있었던 것 같다.
어? 하고 로빈이 의아해 하는 소리를 낼 때, 나는 로빈과 마찬가지로 정면을 주시했다. 희뿌연 안개가 흩어지는 도로에 우리 앞 쪽으로는 김영진 형님이 운전하는 검은 세단이 먼저 가는 중이었다. 고속도로 포장 상태가 한국과는 다르게 거칠다는 생각은 늘 했지만, 앞차가 주춤하며 살짝 비틀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저 먼 곳에서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쿠궁, 쿵, 무언가가 부딪혀 일어나는 웅장한 소음이 먼저 들려왔다. 그리고 바로 몇 초 후에 대처할 사이도 없이 앞차가 급히 멈춰 섰고, 우리 세 사람이 탄 차는 앞차의 범퍼에 비스듬히 부딪혔다. 그 충격에 몸이 흔들렸다. 나는 벨트를 두 손으로 꾹 쥐었다.
그리고 이내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뒤차가 우리 차를 밀어냈다. 안전벨트를 하고 있었음에도 내 몸은 순간적으로 앞으로 쏟아졌고 조수석 헤드에 이마를 부딪혔다. 내 몸과 조수석 사이에 끼었던 쿠션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 신발 아래 밟힌 초콜릿 판이 바삭, 부서졌다.
잠시 머릿속이 새까맣게 방전된 느낌이었다. 심장이 기분 나쁘게 뛰고 온몸이 덜덜 떨렸다.
내 가슴과 배를 가로질러 나를 단단히 조여 맨 안전벨트가 반작용 때문인지 더 세게 나를 옭아맸다. 최근 배가 불러오면서 안전벨트를 매면 배 부분이 꽉 끼어서 가만히 있어도 답답했는데, 이 순간 누군가가 내 배를 터뜨릴 기세로 압박하는 기분이었다.
우리 아기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하지? 배쪽이 눌려서 아기가 잘못되면 어쩌지?
통증보다도 그런 두려움 때문에 숨이 더욱 막혀왔다. 입을 벌려봐도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헉… 허억… 하……"
"준! 괜찮아요!?"
"한준 씨!"
나는 떨리는 손으로 안전벨트 버클을 잡아 해제하려고 했지만, 도저히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등 뒤쪽에 여전히 차들이 부딪혀올 때마다 그 진동이 우리가 탄 차까지 미세하게 전해져 왔다. 경보 음이 여기저기에서 정신 없이 울려왔다.
로빈이 조수석 문을 급히 열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지만, 제어장치가 모든 문을 동시에 잠근 모양이었다. 최민욱 형님의 도움으로 두 사람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고, 이내 내가 타 있는 뒷좌석 문을 열어젖혔다.
"천천히 숨 쉬어요, 괜찮아요. 준, 아무 일 없어요. 숨 쉬어봐요."
로빈이 크고 차분한 목소리로 나를 달래면서 안전벨트 버클을 풀었다. 그제야 숨이 쉬어졌다.
매캐한 연기가 열린 문 사이로 들어왔다. 로빈이 내 몸을 시트 쪽으로 눌러 세워주었고, 숨 쉬기가 한결 수월했다. 하지만 충격 때문인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배 안쪽에서 찌릿거리는 통증이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일단 차 밖으로 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최민욱 형님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앞차에서 뛰어온 김영진 형님과 다른 남자들이 나를 천천히 차에서 들어서 끌어내렸다.
"추돌 사고입니다. 어림잡아 추돌 차량이 서른 대는 넘는 것 같습니다."
"911에 연락해봤지만 마비 상태에요."
형님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도로 한 켠에 몸을 웅크렸다.
"준, 왜 그래요. 어디 다친 거예요?"
로빈이 내 앞에 바싹 붙어 앉아 말을 걸었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괜찮다고 말하려고 하는데, 입술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사실 조금도 괜찮지가 않았다. 나는 두 팔로 내 배를 감싼 채로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무슨 일이죠? 부상입니까?"
"모르겠어요. 외상은 없는 것 같은데, 준이 움직이질 못해요."
"병원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고, 후방 쪽 경호 차량은 현재 이쪽으로 진입이 불가합니다."
“어쩌면 일종의 산통인지도 몰라요. 어떻게든 병원으로 가야 해요!”
주변에서 다급하게 말하는 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내 의식이 멀어지는 것인지도 몰랐다.
차에서 내린 사람들의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 아이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김영진 형님이 숨을 몰아 쉬며 어느 쪽에선가 달려왔다.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 내쉬며 급하게 쏟아내듯이 말했다.
"화재입니다! 앞쪽 충돌로 쓰러진 탱크로리에 불이 붙었어요. 큰일이에요, 반대쪽 도로도 막혀서, 화재진압 차량들이 진입을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단 A1을 옮겨야 합니다!"
먼 곳에서 탄 냄새가 진하게 흘러왔다. 뿌연 안개 사이로 건조한 바람이 불었다. 그게 나를 더 숨막히게 했다. 그리고 심장박동이 빨라지면서 온몸의 힘이 쭉 빠져버렸다. 내 힘으로 일어날 수도 없을뿐더러 최민욱 형님과 로빈이 나를 지탱해주지 않았더라면 도로 위에 그대로 쓰러질 판이었다.
따끔거리는 통증이 배 안쪽 어딘가를 꽉 쥐어짜듯 조이기 시작했다. 생 눈물이 눈가로 쏟아져 나왔다.
“제가 업겠습니다.”
"잠깐만요, 준을 그렇게 들면 안 돼요. 배가 눌리면 안 된다고요!"
로빈이 차분하지만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고, 내 옆구리에 손을 집어넣은 최민욱 형님과 허리에 팔을 두른 김영진 형님이 행동을 멈췄다. 마치 공처럼 몸을 웅크린 채로 나는 눈물 젖은 눈을 질끈 감았다. 거대한 무언가가 내 배쪽을 꽉 눌렀다가, 살짝 눌렀다가, 강약을 조절하면서 나를 고문하는 느낌이었다.
멀리서 누군가가 소리쳤고, 사이렌 소리가 길게 울려왔다.
설아…… 한설. 설아, 나 아파. 설아.
여기에 없는 사람인데, 나는 마음속으로 계속 한 사람만을 불렀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고통 속에서 신에게 기도를 하는 것처럼 그저 설이를 떠올리는 일뿐이라는 듯이 나는 입술을 타고 흐르는 짠 눈물을 삼키면서 몸을 점점 더 웅크렸다.
그대로 속절없이 시간은 흘렀다. 그건 5분, 아니면 30분이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상황은 더 나아지지 않았다. 도로 위는 아비규환이었다. 뱃속의 무언가가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통증이 곧 끊어질 것 같았다.
똑, 차가운 물방울 하나가 내 목덜미에 닿았다.
그리고 탄내 섞인 바람이 묘하게 습하게 변하고 있었다.
"My god! How can you be here?!"
나는 놀란 듯 소리치는 것이 로빈의 목소리인 줄은 알았지만, 그녀가 내 앞에서는 거의 쓰는 일 없는 영어로 빠르게 외쳤기 때문에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게다가 나는 정신이 거의 혼미해져 가는 상태였다.
그 안개 속에서 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던 것은, 순전히 내 바람 때문이었다. 나를 구원해줄 단 한 사람이 나를 향해서 달려오길 바라는 내 순진하지만 간절한 소망 때문이었다.
그리고, 안개 속을 헤치면서 멀리서 한 남자가 내게로 달려왔다. 그 남자의 모습이 내 시선에 흐릿하게 들어올 때 즈음, 그는 벌써 두어 걸음 앞까지 성큼 다가와 있었다. 마치 순간이동을 하는 것처럼 빠른 몸놀림이었다.
내가 다시 한 번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그는 내 코앞에 있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서 가쁘게 숨을 내쉬면서 내 뒷목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두 뺨을 감싸 내 얼굴을 살폈다. 부드럽고 익숙한 촉감의 손가락이 나를 어루만지고, 내가 그토록 바랐던 설이의 익숙한 체취와 숨결이 느껴졌다.
"형, 괜찮아. 내가 왔잖아."
나는 그때까지 고집스럽게 내 배를 감싸고 있던 손을 뻗어서 땀으로 흥건한 설이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단단한 어깨와 가슴팍에 내 이마가 닿자, 나는 비로소 숨을 길게 내쉬며 눈을 감을 수 있었다. 내 무릎과 등을 가볍게 들어올려 안정적으로 안은 설이가 내게 속삭였다.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다 꿈 같을 거야. 날 믿어, 형."
나는 설이를 믿었다. 외로움과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은, 언제나 한설이었으니까.
온 힘을 다해서 설이의 어깨를 끌어안아 설이의 셔츠자락을 손 안에 쥐고 있었지만, 곧 내 팔에서 힘이 스르르 풀리는 걸 느꼈다. 더는 어쩌지 못할 정도로 뱃속이 쿵쿵 울리면서 통증이 내 몸을 잠식해갔고, 그 고통에서 도망치려는 듯이 나는 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