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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설이의 깜짝 선물 (55/65)

55. 설이의 깜짝 선물


"준, 누가 왔는지 좀 봐요! 프린스가 당신 친구라고 하던데?"

멀리서 들려오는 로빈의 목소리에 나는 국자를 든 채로 음?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먼 미국 땅에 내 친구가 있을 리가 없는데.

로빈과 한인 마트에서 장을 봐온 것들을 부엌에 정리해두고 알배추로 배춧국을 끓이는 중이었다. 

한인 마트에 있던 된장은, 정가의 3배 정도 값은 되는 것 같아서 눈물 찔끔 흘리면서 사야만 했다. 그래도 끓는 냄비에 한 숟갈 듬뿍 넣자마자 고소한 배춧국 냄새가 흘러나와서 만족스러웠다.

식사 때마다 로빈이 포장해오거나 룸 서비스를 시키거나 설이와 외식하면서 먹는 음식들은 전부 맛있고 새로웠지만, 아무래도 집 밥이 그리웠다. 요리를 시작한 것은 며칠 안 되는데, 여태까지는 부엌이 딸려 있어도 호텔이기 때문에 냄새가 밸 까봐 참았었다.

그러다 한 달 전쯤이었다. 밤중에 갑자기 잠에서 깼는데, 그 순간부터 '내가 직접 끓인 김치찌개가 먹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한식을 파는 식당에도 김치찌개 정도는 있었지만, 그 순간의 나는 내가 직접 끊인 익숙한 맛이 그리웠다. 하지만 여기는 미국이고 한국의 우리 집이 아니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자마자, 거짓말처럼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나 지금 김치찌개 때문에 우는 거야?

스스로가 생각해도 황당했지만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고, 침대 옆자리에서 자고 있는 설이가 깰 까봐 입술을 깨물며 울음을 부들부들 참아야 했다.

“형, 왜 그래. 배 아파?”

그러나 내 노력이 무색하게도, 잠 귀가 밝은 설이가 내 흐느낌을 듣고 금방 깨어났다. 설이는 어둠 속에서 이불을 부여잡고 울고 있는 날 보고 엄청나게 놀랐을 것이다. 뭘 물어봐도 대답도 못할 정도로 서럽게 우는 나를 달래며 설이는 나를 병원으로 급히 데려갈 채비를 했다.

“그게, 흡, 아니, 흐어, 아니라, 흐으읍…,”

아픈 게 아니라고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나는 부끄럽지만 코를 훌쩍이면서 내가 끓인 김치찌개가 먹고 싶어서 울었다는 말을 고백해야만 했다.

"그렇구나."

설이는 눈물과 콧물이 섞인 내 말을 금방 알아들었다. 그리고는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나를 끌어안고 한숨을 내쉬었다.

"……형, 한국 집에 있는 것들이 그립지. 내가 신경 써야 했는데."

내가 김치찌개가 먹고 싶은 게 설이 탓도 아닌데, 또 미안하다는 말을 할 것 같아서 나는 재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도 바쁜 애를 새벽에 자다가 깨게 만들어놓고, 이상한 죄책감까지 주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그냥 잠꼬대 같은 거라며 눈물을 닦아내고 웃는 얼굴을 했지만, 설이는 그냥 넘어가주지 않았다.

호텔 안에서 뭐든 만들어 먹어도 되니까 참지 말라면서,  호텔 지배인의 허락이 담긴 확인증까지 가져다 주며 나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호텔 레스토랑 내에 한식 요리 자격증이 있는 셰프가 있으니, 뭐든 원하는 걸 맘대로 주문해도 된다고 당부했다.

내가 또 밤중에 일어나 울면 이대로 영화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닥터 게일까지 싸 들고 한국으로 돌아갈 기세여서 나는 기운을 내기로 했다.

배춧국 냄새가 고소하게 퍼져서 침이 절로 고였다. 조금만 더 끓이면 딱 좋을 텐데, 손님이 찾아왔다니 일단 중단해야 했다. 그러다 문득, 아침에 호텔방 문 밖을 나서기 전에 설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형이 원하는 건 다 해줄 수 있어, 그러니까 또 울지 마."

울었던 것은 정말 그때 딱 한 번뿐이었는데, 그게 설이에게 적잖이 충격이었는지 갑자기 그런 말을 하곤 촬영을 떠났다. 내 이마에 조심스레 입맞추고 떠난 설이를 배웅하면서 나는 그 말을 잊었고, 로빈과 한인 마트에 다녀왔던 것이다.

인덕션을 아예 끈 뒤에 손을 닦고, 로빈이 나를 부르는 현관 쪽으로 걸어나갔다. 그 와중에도 로빈은 계속 준-! 하고 나를 부르고 있었다. 로빈은 장 본 것을 옮겨준 뒤, 다른 곳에 가야 했기 때문에 내가 알았다며 크게 대답하자 바로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문 앞에 익숙한 남자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

"뭐야, 너 왜 여기 있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우정혁의 심드렁한 얼굴을 마주하자, 나는 황당해서 헛웃음이 다 나왔다. 심지어 우정혁은 커다란 짐 가방까지 들고 있었다. 공항에서 바로 이쪽으로 달려온 듯한 차림새와 피곤에 절어 있는 얼굴이었다. 워낙 노안이긴 했지만 삼십 대 초반은 되어 보였다.

너무 의외의 인물을 의외의 장소에서 마주쳐서, 나는 순간 혹시 우정혁이랑 똑같이 생긴 도플갱어가 아닌가 의심했다. 로빈이 미국엔 뭐든 있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캐리어를 내버려둔 채 벨벳 스툴에 털썩 앉은 모습을 관찰해보니, 우정혁이 맞았다.

우정혁은 면세점에서 산 담배 한 보루를 왠 검은 정장 입은 남자에게 압수당했다는 얘기를 했다. 그건 최민욱 형님이었다. 호텔 복도에서 최민욱 형님은 우정혁의 캐리어 안 소지품까지 모조리 다 검사했는데, 담배 냄새가 나에게 해로워서 소지가 불가하다고 했다고 한다. 우정혁이 다시 영국으로 떠날 때 돌려주겠다고 했다며, 무슨 학생 주임인 줄 알았다며 투덜거렸다.

우정혁은 나를 의심스러운 눈길로 올려다보았다.

"야, 나 너 죽을 병 걸린 줄 알았다. 그런 거 아니지?"

"이게 또 오랜만에 만나서 맞을 소리 하네. 죽긴 누가 죽냐."

누가 봐도 건강한 내 모습에 안심했는지 우정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려 호텔방 안을 둘러보며 기지개를 폈다.

"아우우, 아니… 안 그러면 한설 그 놈이 나한테 직접 전화할 리가 없으니까."

"설이가 너한테 전화했어?"

"그래, 일주일 전인가, 대뜸 비행기 표 보낼 테니까 휴가 내고 여기 오라고 하더라."

그제서야 설이가 아침에 말했던 '형이 원하는 건 다 해줄 수 있어' 라는 말의 뜻을 알게 되었다. 설이는 내게 그리워하는 한국의 익숙한 것들을 몽땅 가져오는 대신에 그 모든 것을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우정혁을 데려다 준 것이다. 일종의 살아 있는 추억 상자인 셈이었다.

설이는 미국에서 보내는 하루하루가 무척 바빴다. 바디 트레이닝과 대본 연습 수업을 따로 받았고, 그 외에도 촬영장에 가 있는 시간이 꽤 많았다. 아무래도 이동 거리가 아무리 가까워도 한국과 다르게 기본 두세 시간은 걸리기 때문에 새벽에야 호텔에 도착하곤 했다. 씻고 나면 침대에 누워서 날 몇 번 껴안고 입맞추다가 바로 잠드는 일이 많아졌다.

그래서 설이가 혼자 있을 나를 위해서 특단의 조치를 취한 모양이었다. 그게 우정혁을 미국으로 데려오는 거라니, 어쩐지 그 발상이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사실 설이가 곁에 없을 때의 내 일상은 단조롭기 짝이 없었다. 모처럼의 외국이니 관광을 하려고 해도, 닥터 게일이 내게 오래 걷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조심해야 하는 시기는 지났지만, 그래도 늘 보호자가 있어야 이동이 가능했는데 그래 봐야 로빈이나 형님들과 한인 마트 가는 것이 가장 큰 외출이었다.

닥터 게일은, 가능하면 일찍 입원하기를 권고했다.

사오 개월이 지나도록 그렇게 배가 심히 불러오지 않았는데, 뱃속 아이의 크기가 작은 것이 남성 임신의 특징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눈에 띄게 불러올 때는 거의 만삭이라고 봐야 하고, 우리는 그 전에 수술로 아이를 꺼내는 것이 목표라고 설명했다.

언젠가부터 겉옷이나 티셔츠는 내 것보다 거의 두 배 가까이 큰 설이 것을 입게 되긴 했다. 바지도 허리춤이 고무줄로 된 게 아니면 불편해서 입고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우정혁은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흐음, 하고 뭔가 생각하는 듯한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어쨌든 멀리서 손님이 왔으니 대접은 해야겠지.

"야, 배춧국 끓였는데 밥 먹을래?"

"어."

나는 우정혁을 데리고 거실과 이어진 부엌 쪽으로 함께 걸어갔다. 보통 이럴 때는 혼자 식사하곤 했는데, 고소한 냄새가 퍼진 호텔방 안에 우정혁이 함께 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그게 무척 기뻤다. 그냥 기쁜 게 아니라, 감당이 안 될 정도로 기뻐졌다.

이 먼 타국 땅에서 내 동창이자 유일한 친구 놈인 우정혁을 만나다니! 이건 정말 너무 감동적인 일인 것이다. 반가운 마음이 눈물이 되어서 한 바가지 흘러내렸다.

한달 전 즈음부터 계속 이렇게 기분변화가 심했는데,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 롤러코스터 같은 변화였다.

"야, 너 왜 그래?"

우정혁이 부엌에 우뚝 멈춰 선 나를 힐끔거렸다.

내가 울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란 우정혁이 내 앞으로 다가와서 안절부절 못하며 국자를 쥐었다.

"어어, 한준, 야, 너 왜 그래. 내가 국 끓일까? 밥, 밥은 어디 있냐."

우정혁은 부엌 구석에서 자그마한 밥솥을 찾아냈다. 얼마 전까지 레토르트 쌀밥을 데워 먹었는데, 설이가 아예 밥솥을 사다 주었다. 나는 따끈한 밥을 공기에 퍼 담는 우정혁을 보면서 곧 진정했고, 우리는 아일랜드 형식 간이 식탁에 마주 앉아서 배춧국으로 함께 밥을 먹었다.

"무슨 캘리포니아 호텔 방에 시금치 무침도 있냐."

"내가 한인마트에서 사서 무쳤어."

"장조림은?"

"내가 고기 갈라다가 조렸지."

"너 한식에 진심이구나."

우정혁은 내 열정에 감탄하며 밥을 한 공기 비웠다. 내가 식후에 먹을 만한 간식들을 나열하자, 우정혁은 "너 다녀가고 나서 한인마트에 남아 있는 과자가 있긴 하냐" 하며 혀를 내둘렀다.

없을 게 없는 것 같은 우리 호텔방에 맥주가 한 캔도 없다는 것에 의아해하며 우정혁은 내가 주는 타트체리 주스를 받아 들었다.

"음, 그러니까… 우정혁 네 말은, 설이가 아무 설명도 없이 널 오라고 했다는 거지?"

우정혁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여기 늘 혼자 있다고, 별 일 없으면 오라더라."

"그나저나 너 정말 거의 백수 맞구나."

갑자기 불러도 영국에서 휙 날아올 수 있는 우정혁의 한가로움에 감탄하자 우정혁은 "내가 그렇지, 뭐." 하고 솔직히 대답했다.

"아버지께서 잘 하고 계신데, 내가 괜히 끼어들어서 망치기 밖에 더 하겠냐. ……애초에 후계자라면, 그건 누나 자리였어."

우정혁 입에서 누나 얘기가 나오면 나는 할 말이 없어져서 그저 주스만 빨대로 쭉 쭉 빨아 마셨다. 우정혁은 내 배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휙 고개를 돌렸다.

"근데 너 혼자 있는 게 아니네? 여기 왠 미국 누님하고, 보디가드들도 있고. 완전 철통 보완이던데. 누가 보면 그 놈이 아니라 네가 톱스타인 줄 알겠다."

"하하, 설이가 좀 유난이긴 하지."

우정혁은 설이를 '도무지 길들여지지 않는 들개 같은 놈'이라고 말했다. 그런 놈인 설이가 미국에 오래 묵으라며 우정혁에게 우리와 같은 호텔의 아래층에 방도 잡아줬다고 했다.

"그러면서 뭐 그렇게 안 된다는 게 많은지. 너랑 호텔 밖으로 나가려면 하나하나 다 허락 받아야 한다더라. 너 진짜 죽을 병 아니지?"

"아니라니깐, 나 밥 두 공기 먹는 거 못 봤냐."

설이는 아마 내가 우정혁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을 까봐 말하지 않은 모양이다. 사실 우정혁이 아무리 내 친구여도 그건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당분간 임신 사실은 비밀로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

우리는 그러고 며칠 낮에 잠깐 만나서 같이 식사하고 가끔 외식도 했다. 가끔인 이유는 우정혁이 무척 바빴기 때문이다. 우정혁은, 설이가 불러서 온 주제에 혼자 라스베가스 같은 곳까지 관광하러 다녔다. 사실 내게도 같이 가자고 권했지만, 시도 때도 없이 졸려져서 우정혁과 같이 먼 곳까지 외출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우정혁과 내가 자주 가는 곳은 차이나타운이었는데, 내가 갑자기 매운 음식을 먹고 싶을 때 함께 갔다.

로빈이 추천해준 발보아 파크라는 곳에도 볼 게 많았다. 미술관과 박물관을 포함한 거대 관광 명소 같은 공원이었는데, 그 근처에서 우정혁과 타코를 먹고 광장을 거닐면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저 사람들은 늘 따라다니는 거냐."

우정혁이 연못 근처에서 멀거니 선 채 우리를 지켜보는 최민욱 형님과 김영진 형님 쪽을 턱짓했다. 그 앞으로 말을 탄 경찰관이 지나갔고, 말 꼬리가 탁 치며 움직이자 그 주변으로 아이들이 신나서 뛰어다녔다. 평온한 풍경 속에 오도카니 선 두 형님들은 누가 봐도 관광객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응, 그냥 없다고 생각해달래. 그게 더 편하시대."

우정혁은 아이스크림 콘까지 다 먹어 치운 뒤 손을 털었다.

"한준. 내가 진짜 말도 안 되는 가설을 세웠는데 말이다. 너 혹시……"

내 쪽을 보며 눈을 가늘게 뜨는 우정혁과 눈이 마주치자, 비밀을 들킨 것 같아서 뜨끔했다. 그 바람에 아이스크림 덩어리가 목을 급히 넘어가서 켁켁거리자, 우정혁이 내 등을 두드렸다. 위급 상황이 되면 최민욱 형님과 김영진 형님 쪽이 달려오기 때문에 나는 고개를 들고 멀리 보이게 손을 내저었다. 묘하게 치약 맛이 나는 아이스크림이 내 입맛에 안 맞았기 때문에 나는 반쯤 남은 아이스크림을 버렸다.

유모차를 끌고 천천히 거닐고 있는 여자 둘이 우리 앞으로 지나갔다. 나는 무심결에 유모차의 햇빛 가리개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금발 머리에 조그마한 아기가 유모차 안에서 다리를 버둥거리며 웅얼거리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맑은 파란색 눈동자가 접히면서 아기가 방긋 웃었다. 나도 따라 미소 지었다.

"……너 애를 왜 그렇게 유심히 보냐."

“아니, 우정혁아. 너 말이야, 우리 설이 어릴 때 모습 상상해본 적 있냐?”

“있겠냐.”

“넌 안타깝게도 우리 설이 애기 때 못 봤지? 얼마나 귀여웠는데. 만약 우리 설이를 저렇게 유모차에 태워서 어디 광장 같은 데를 나갔다면, 몇 걸음 걷지도 못했을 거다. 워낙 귀여워야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구경하고 싶어서 멈춰 서서 주변을 서성거릴 텐데, 그러면 곤란하잖아. 우리 설이는 안 그래도 내성적인 성격이라 와앙 울어버렸을지도 몰라. 사실 잘 안 우는 아이이기는 했지만, 또 가끔 떼쓰다가 눈물이 그렁그렁할 때는 깨물어주고 싶게 귀여웠어. 하, 진짜 심장에 안 좋았어.”

"음, 글쎄…… 아기 때는 보통 다 귀엽지."

"보통 귀여운 게 아니었다니까? 위험할 정도의 귀여움이었어."

"뭐, 그 놈이야 워낙 대중들이 좋아하는 외모다만, 난 그 놈 싸가지를 아는데?"

"설이가 너한테 좀 퉁명스럽게 구는 건 있지만, 그것도 다 애교야."

"하! 그래. 그런 걸로 하자."

우정혁은 나와 도저히 말이 안 통한다고 생각할 때는 늘 그렇듯이 대충 대화를 마무리해버렸다.

우리는 볕이 좋아서 공원 근처의 테라스가 있는 카페에 갔다. 우정혁은 담배 대신에 파르페 꽂힌 과자 손가락 사이에 쥐고 후우-… 하고 담배를 피우는 동작을 했다. 손끝을 흔들어 탈탈 재를 떨구는 행동까지 취하는 걸 보면, 이제 중독자가 다 된 것 같다.

식후에는 늘 담배를 피우던 놈인데 그걸 못하게 하는 게 조금 미안하기는 해도, 뱃속의 우리 아기 생각하면 어쩔 수가 없다.

레몬과 라임이 들어간 케이크를 먹으며 가만히 배를 문지르고 있자, 우정혁이 테라스 너머 딴 곳을 바라보면서 평온히 물었다.

"근데 언제 낳는 거냐, 너 뱃속에 그거. 예정일이 있을 거 아니야."

"음, 수술 날짜는 아마 다음 달…… 헉."

포크를 떨어뜨리며 나는 경악의 표정으로 우정혁을 바라보았다. 우정혁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파르페의 긴 과자를 아작아작 씹어먹으면서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스러운 유도심문에 넘어가버렸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우정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날짜를 셌다.

"난 그때까지는 못 있을 것 같은데. 아버지가 자꾸 불러서."

"야. 우정혁, 너, 너 알고 있었어? 어떻게? 아, 아니, 어떻게?"

"모든 정황이 너무나 그렇다, 인마."

피식 웃은 놈이 마치 탐정 같은 눈빛으로 물을 마신 뒤 말을 이었다.

"한설 그 놈은 내가 네 옆에 있는 걸 그렇게도 싫어했으면서 날 갖다가 네 옆에 놓질 않나, 너는 시도 때도 없이 졸고 미친 듯이 먹어대고, 가끔은 미국 누님이랑 같이 병원에 다니잖아. 건강하면서 그렇게 건강검진을 자주 하는 사람은 없어. 게다가 어제는 네가 직접 만든 탕수육이 너무 맛있다고 오열했잖아. 그런 걸로 갑자기 우는 게 말이 되냐. 그리고 너… 이상하게 배쪽에만 살이 찌고 있어. 풍선도 아니고."

"아……"

설이의 옷을 입어서 거의 힙합 소년 같은 스타일의 나를 스스로 내려다보다가 납득했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배가 불러오는 느낌이었다. 최근에는 다리가 저려서 잠들기 전까지 설이가 다리를 주물러주지 않으면 잠들지 못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면서 우정혁의 눈치를 봤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냐, 이상하지."

"뭐. 이상하긴 한데. 어차피 내 인생 아니니까."

우정혁은 무신경하고도 깔끔하게 말했다. 덕분에 마음은 편해졌다.

비록 이렇게 매정한 놈이지만, 그래도 유일한 동창 친구니까 참아주자. 어차피 얘도 나 없으면 진짜 외톨이 신세니까.

우정혁은 아버지가 미국에 여자 숨겨놓은 줄 알고 노발대발 한다는 얘기를 했다. 내 임신 소식은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넘어간 것이다. 나 같으면 신기해서 이것저것 물어볼 것 같은데, 우정혁은 케이크 다 못 먹을 거면 나눠먹자는 말이나 했다.

"아, 설이다."

휴대폰 진동이 울려서 꺼내자, 우정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만 몇 번째냐. 나랑 같이 있으면 그렇게 전화를 해내네."

우정혁의 혀 차는 소리를 뒤로하고, 나는 영상 통화를 켰다.

설이는 본인이 우정혁을 미국으로 초대했고 내가 우정혁과 놀러 나오는 걸 미리 알고 있었으면서도, 휴대폰 화면으로 내 옆에 우정혁이 보이면 '대체 저 사람이 왜 형 옆에 있지' 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불만스러운 눈빛과 비죽 나온 입술이 너무 귀여워서 웃음부터 나왔다.

- 형, 잘 놀고 있어? 피곤하면 바로 들어가.

"어어, 하나도 안 피곤하고 괜찮아."

- 배가 아프지는 않고?

"응. 다 좋아."

내 웃는 얼굴에 설이도 표정이 풀어져 부드러운 얼굴이 되었다.

영화 속에서 설이는 얼굴을 반쯤 가리는 검은 망토를 두르고 등장하는 의문의 검술사 같은 역할이라고 했는데, 까맣고 긴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촬영장에서의 영상 통화는 긴 머리의 설이를 볼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어딘지 청순하면서도 섹시했고, 가련한 아름다움이 느껴져서 황홀했다.

벌써 그런 설이의 모습이 찍힌 짧은 영상이 설국지색 사이트에도 돌아다녔는데, 눈송이 분들은 모두 나와 같은 마음이었다. 긴 머리의 설이가 너무 예뻐서, 사극 같은 것도 무척 어울릴 것 같았다. 긴 생머리가 이렇게 아름답게 어울리는 청년이 이 세상에 또 있을 리 없다. 우리 설이는 독보적인 미인인 것이다.

- 보고 싶어, 형.

달콤한 목소리와 애정을 담은 눈길이 내게 쏟아지자 나는 금새 얼굴이 뜨거워졌다. 카페 테이블에 마주 앉은 우정혁에게 들릴 까봐 "나, 나도…" 속삭이자, 우정혁이 "얼씨구." 하고 빈정거렸다.

- Wow! Is that your friend?

그때 갑자기 설이의 얼굴을 비추는 휴대폰 카메라 앵글에 불쑥 갈색 머리에 초록색 눈동자를 지닌 여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커다란 초록색 눈을 깜빡이면서 그 여자가 높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He's so cute like you! What an adorable boy!

내 옆에 통역해줄 로빈이 없었기 때문에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지만, 그 여자는 손바닥에 키스를 날리며 내게 윙크했다. 그리고 몇 마디를 더 하려는 그 여자에게 설이가 뭔가 짜증 섞인 말을 영어로 했고, 아쉬운 듯 여자는 화면에서 밀려났다.

"형, 미안. 갑자기 시끄러워서 놀랐지."

"아… 아니, 괜찮아. 같이 촬영하는 배우야? 예, 예쁘시다."

"어, 앞으로 세 시간은 더 걸릴 거 같아. 형은 우정혁 선배랑 같이 저녁 먹어. 꼭꼭 씹어서 먹고, 지난 번 검진 때 게일이 말했던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이 들면 잠시 멈췄다가 물 마시고."

설이는 그 뒤로 5분 정도 잔소리를 더 하다가 촬영이 재개되어서 어쩔 수 없이 통화를 끊었다.

"……."

설이는 저렇게 예쁘고 화려한 사람들하고 같이 일하는 거구나.

물론 한국에서도 그랬지만, 외국 연예인들은 어쩐지 정말 다른 세계 종족의 느낌이었다. 아무리 이성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설이라고 해도 저렇게 적극적이고 여신처럼 아름다운 사람들이 계속 옆에 있다 보면 마음이 좀 동할 수도 있지 않을까.

잠시 멍하니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우정혁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한준. 넌 진짜 놀랄 정도로 생각이 들여다보이는 단순한 녀석이다."

"어? 뭐?"

"무슨 생각인지 뻔히 알겠는데, 내가 보기에는… 애초에 표범으로도 변하는 희한한 놈인데다가, 제 형을 미친 듯이 따라다니더니 결국엔 형을 임신까지 시켜놓은 이 말도 안 되는 미친놈은, 어차피 너밖에 눈에 안 보일 거다. 바람 같은 거 안 피울걸."

"무… 무슨 소리야,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됐고, 그만 호텔로 돌아가자. 너네 방에서 룸 서비스 시켜야지."

우리는 그 길로 돌아갔다. 우정혁은 호텔 셰프가 자랑하는 스테이크를 먹었고, 나는 오므라이스에 카레가 뿌려진 것을 먹었다.

***

설이는 약속한 시간에 퇴근해서 돌아왔는데, 호텔에 오자마자 나와 우정혁이 함께 소파에 늘어져서 한국 자막이 있는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리고는 몇 초 간 빤히 우정혁의 얼굴을 바라봤다.

“…….”

무언의 메시지라도 보내는 듯한 눈빛이었다.

"너네 서방 왔으니까 난 그만 갈란다."

우정혁이 잽싸게 달아난 자리를 소독하듯이 청소한 뒤에야 설이는 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제 냄새를 내게 묻히듯이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으며 뺨을 비벼댔다. 이미 촬영장에서 분장을 지우고 샤워까지 마친 설이에게서는 향긋한 냄새가 풍겼다.

침대에서 설이는 조금 분한 듯이 내 쇄골에 오래 입을 맞추다가, 별안간 내 어깨를 송곳니로 깨물었다.

"아얏!"

"……형, 우정혁 선배랑 매일 놀아서 좋아?"

대답을 하려고 입을 열면, 설이가 급하게 입을 맞춰왔다. 뜨겁게 섞이는 혀가 입천장을 훑고 내 혀를 꾹 짓눌렀다가 쪽 빨았다. 침대에 나는 파묻듯이 눕혀놓고, 내 위에서 한참 키스를 이어나가던 설이가 뜨거운 숨을 내뱉으면서 입술을 떼고 속삭였다.

"나도 촬영 그만두고, 형이랑 있을래."

우정혁에 대한 질투심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너무 귀여워서, 나는 손을 뻗어 목덜미를 감싸고 설이의 눈꺼풀에 입을 맞췄다.

"이제 곧 촬영 다 끝나가잖아. 너 쉬게 되면, 계속 둘이 있자."

"응."

"그리고 설이 너는, 이제 아기 아빠잖아. 더 의젓해야지."

"……응."

설이는 어리광 부리듯 내 뺨에 코를 비비면서 눈을 감았다. 어느새 튀어나온 설 표범의 보드랍고 뾰족한 귀 끝이 내 눈가에 닿아서 간지러웠다. 평소에도 예민하지만, 귀와 꼬리가 튀어나온 설이는 감각이 더 뛰어나졌다. 그래서 그대로 내 배 위에 손바닥을 올리면, 나도 잘 느끼지 못하는 태동을 느꼈다.

"우리 아기 잘 움직이고 있네. 며칠 전보다 박동도 더 세졌어."

"그래? 나는 잘 못 느끼겠던데."

설이가 미소를 지으며 미지근한 손바닥을 내 옷으로 집어넣었다. 볼록한 배위를 쓰다듬으며 올라온 손이 내 가슴팍을 주물렀다.

"앗, 야아… 하지마, 설아…"

"형, 아기 이름은 더 생각해봤어?"

"으음. 아직 못 정했어. 어려워."

내 가슴 위를 간질이듯 애무하는 설이의 손길을 느끼면서 나는 다가오는 설이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 잘 뻗은 콧날에도, 흰 뺨에도, 뜨거운 입술에도, 쪽 쪽 진하게 닿았다. 설이는 몸을 숙여서 내 옷자락을 걷어 올리고 배 볼록한 배 위에도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음, 그럼… 내가 생각해볼게.”

설이는 내 배 위에 귀를 가져다 댄 채 눈을 감고 미소 지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내 동생이자, 내 연인이자, 곧 우리 아이의 아빠가 된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을 정도로 행복했다. 설이와 나는 아이 이름을 지어보면서 꼭 껴안은 채로 새벽까지 속삭이며 키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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