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 까짓 거, 백년해로 해보자. (54/65)

54. 까짓 거, 백년해로 해보자.



"준, 이 노래 알아요?“

분홍빛 선글라스를 머리 위로 올려 걸치면서 로빈이 내 쪽을 흘깃 쳐다보며 크게 말했다.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그녀는 서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의 여성이었지만, 뭔지 모르게 태양처럼 밝고 활기찬 분위기가 낯선 느낌을 풍겼다. 그게 아마 자라온 곳의 차이인지도 모른다. 자유분방하고 친근감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모르겠는데요. 처음 들어요."

오픈카로 흘러 드는 바람 때문에 내 머리카락이 정신 없이 나부끼고 있었다. 로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래요? 하고 말하며 핸들을 꺾었다.

"호텔 캘리포니아라는 곡이에요. 우리 엄마 나이 대 한국 사람들은 다 좋아하던데, 준은 너무 어려서 모르나 보다."

삼십 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로빈은 싱긋 웃으면서 다시 선글라스를 내려 썼다.

우리가 탄 오픈카는 양 옆으로 엄청나게 길다란 야자수가 심어져 있는 뻥 뚫린 도로를 달리는 중이었다. 날씨가 화창한 데다가 새파란 하늘이 지나칠 정도로 높은 느낌이었다. 약간 우울한 느낌의 올드 팝송이 흐르고 있는 것까지도 내겐 외국적인 느낌이었다.

"오래 비행해서 피곤하죠? 일단 호텔로 빠르게 모실게요."

로빈의 말에 나는 네에, 감사합니다, 하고 대답했지만 사실 아직 피곤조차 느낄 틈이 없었다.

기내 일등석이란 곳은 생각보다 좌석이 넓었고, 방처럼 벽이 따로 있었다. 매끼마다 차려주는 밥을 먹고 누워서 앞쪽 화면으로 영화 보는 것으로 시간이 금방 흘렀다. 마침 우리 설이의 데뷔작을 볼 수 있어서, 설이가 나오는 장면만 몇 번이나 돌려봤는지 모른다. 내가 비행 중 멀미를 할 까봐 걱정된 설이가 몇 번이나 내게 와서 확인했지만, 나는 우리 집 소파에서처럼 편안하게 비행했다. 설이가 기내식에서 내 쪽으로 오는 것에서 어패류를 전부 빼주었기 때문에 식사 중 비린내를 느낄 일도 없었다.

로스앤젤레스 공항에 도착해서부터 설이는 바로 인터뷰와 촬영이 있었다. 배우 한설의 미국 일정을 함께 하는 매니저 팀들과 함께 설이는 바로 스케줄에 맞춰 떠났고, 나는 최민욱 형님과 김영진 형님 사이에 서서 로빈을 기다렸다.

내 미국 생활 내내 나를 도와줄 사람으로 설이가 고용한 일종의 여행 안내원 같은 존재였는데, 로빈은 영어와 한국어에 능통해서 내가 어렵게 헬로우… 하고 인사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한국어 발음도 좋았다.

"준, 옆에 라호야비치 보이죠? 날씨 좋으면 물개도 볼 수 있어요. 조금만 더 달리면 쇼핑할 곳도 있고, 준이 머무는 호텔에서 한 시간 정도 더 가면 한인 마트도 있어요. 김치, 라면 다 있으니까 걱정 말아요, 준!"

듣던 중 가장 반가운 소리였다. 물론 한인마트로 가려면 설이에게 허락도 받고 형님들을 보디가드로 대동한 채로 가야겠지만, 가능하다면 매콤한 맛이 나는 것은 전부 쓸어올 생각이었다. 라면이란 단어만 들어도 국물이 당겼다.

"아마도 Snowflake prince는 준이 식사하고 호텔에서 쉬고 있으면 세네 시간 뒤쯤에는 도착할 거예요. 그렇게 말했죠?"

"아… 네, 인터뷰 끝나고 감독님하고 식사한 뒤에 온다고 하더라고요."

로빈이 말하는 Snowflake prince는 미국과 유럽인들로 이루어진 설이 팬클럽 이름이라고 했다. 직역하면 '눈꽃 왕자님'이라는 뜻이었는데, 아무래도 우리 설이의 이름 뜻이 ‘눈’이라는 게 외국 팬들에게 무척 낭만적으로 느껴졌던 모양이다.

로빈은 설이에게 고용되기 전까지 샌디에고 근처 병원에서 오래 일했다고 하는데, 어쩌다가 나를 돌보는 일을 맡게 된 건지 모를 일이었다. 내가 묻자 로빈은 별 싱거운 질문을 다한다는 듯 나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준, 한국은 어떤지 모르지만… 미국에서는 돈으로 안 되는 게 없답니다? 돈을 많이 주면 뭐든 다 돼요."

경쾌한 대답이었다. 나는 한국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대답해주었다.

그런데 대체 설이는 얼마나 주고 로빈을 고용하는 걸까. 최민욱 형님에 김영진 형님까지 미국으로 데려오느라 돈을 많이 썼을 텐데.

호텔에 내려 형님들의 도움을 받아 짐을 옮기고, 방 안으로 안내 받은 뒤에 로빈은 내게 룸 서비스 시키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영어 울렁증이 있는 내가 간단하게 주문할 수 있도록 룸 내의 전화기로 메뉴 판에 있는 번호를 말하고 플리즈, 하고 부탁하는 것까지 연습시켜주었다.

"프린스는 준이 되도록 룸 밖으로 나가지 않고, 원하는 걸 다 해줄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했어요. 혹시 나랑 어디 가고 싶으면 프린스한테 미리 허락 받고, 직접 전화하거나 아니면 그 맨인블랙 통해서 연락하면 돼요. 알았죠?"

로빈이 말하는 맨인블랙은 최민욱 형님이었다.

호텔 접객실과 연결된 현관문 밖으로 나가기 전, 로빈이 나를 돌아봤다.

"참, 나 베이비시터 경력도 꽤 되니까 걱정 말아요."

"네?"

로빈이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윙크하고 떠나간 뒤에 나는 멍청한 얼굴로 아, 하고 깨달았다. 아무래도 설이가 로빈을 단지 여행 안내원 격으로만 고용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장기투숙을 예약한 호텔은 꽤나 넓은 편이었고, 침실이 따로 있는데다가 간단한 식사를 차려먹을 수 있을 정도로 부엌 겸 거실도 넓었다. 거실 통 창으로 햇살이 눈부시게 스며들어왔고, 저 멀리에 해변의 물결이 반짝이는 것이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도 끝내줬다.

그래도 설이가 곁에 없으니 이 모든 것이 쓸데 없이 느껴졌다.

혼자 덩그러니 외국에서 밥 먹기 싫어서, 최민욱 형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형님들, 우리 미국 햄버거 먹을래요?'

3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노트 소리가 들렸고, 최민욱 형님은 내게 어떤 종류의 버거가 먹고 싶은지 물었다. 그래 봐야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불고기 버거 세트 같은 것뿐이라서 대답을 못하고 어물거리고 있자, 최민욱 형님은 믿음직스럽게도 일단 유명한 걸로 사오겠다며 빠르게 길을 나섰다.

혼자 먹기 싫다는 내 요청에 따라서 나와 두 형님, 셋이서 우리 호텔방 접객실 테이블 앞에 동그랗게 모여 앉아서 버거를 먹었다.

두 손으로 들기 버거울 정도로 큰 버거는 안쪽에 치즈가 잔뜩 녹아 들어 있었고 소고기 패티에서 육즙과 기름기가 줄줄 흘러서 깨끗하게 먹기 힘들었다. 하지만 느끼하면서도 짠 맛이 중독성 있어서 그 양이 엄청난데도 다 먹을 수 있었다. 커다란 초콜릿 쉐이크 테이크 아웃 컵을 들고, 무서울 정도로 커다란 감자튀김까지 먹고 있으려니 거인의 나라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근데 정말 잘 드시네요. 그렇게 마르셨는데……"

김영진 형님이 신기하다는 듯 버거를 우물거리며 내게 말하자, 최민욱 형님이 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꾹 찌르면서 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영진 형님이 버거를 내려놓고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었다. 

"죄송합니다. 주의한다고 하는데, 사실 제가 말이 좀 많거든요."

"어어, 저도 수다 떠는 거 좋아해요. 설이가 바빠서 저 혼자일 때가 많을 텐데, 괜찮으시면 저랑 식사도 해주시고 같이 좀 놀아주세요. 저 외국은 처음이라… 맛있는 건 같이 먹으면 더 좋잖아요."

내 말에 김영진 형님이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요! 그렇지 않아도, 후방 쪽 애들은 교대로 식당 가는데 저희는 그럴 수 없으니까…"

"후방 쪽 애들이요?"

김영진 형님은 입을 다물었고, 최민욱 형님은 한숨을 내쉬며 테이블을 정리했다.

"이 녀석이 쓸데없이, 죄송합니다. 바로 쉬실 수 있게 하겠습니다."

전광석화 같은 손놀림으로 접객실 테이블은 말끔히 치워졌고, 두 사람이 호텔을 빠져나가자마자 나는 다시 또 혼자였다.

주름 하나 없는 침대 시트에 풀썩 누워서 빵빵 해진 배를 쓰다듬으며 나는 홀로 중얼거렸다.

"……아닌가, 혼자가 아니라 둘이 있는 건가."

이 뱃속에 정말 어떤 생명체가 들어있다면 나는 호텔 방에 혼자 있는 게 아니라 아기와 함께 있는 게 될 것이었다.

배부른 김에 스르르 눈을 감고 배 위에 손바닥을 올리고 있자, 어떤 심장박동 같은 게 들리는 것 같았다.

“형, 깼어?”

부스럭거리는 소음에 눈을 떴을 때는, 침실 안에 은은한 조명이 켜져 있었다. 불그스름한 빛이 감도는 따뜻한 침실 쪽으로 젖은 머리를 털면서 설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안 그래도 깨워야 했는데. 잘 잤어?"

상쾌하고도 낯선 비누 냄새를 풍기면서 설이는 잠이 덜 깬 내 입술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춘 뒤에 다시 침실과 이어진 드레스 룸으로 걸어갔다. 허리춤에 묶은 큰 타월이 하체를 가리고 있었지만 허리부터 어깨까지 뻗어 올라가는 탄탄한 등 근육은 빛에 비춰서 그 윤곽이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높은 옷걸이에 걸린 옷들을 옆으로 넘기는 설이의 뒷모습에서 팔이 움직일 때마다 날개 뼈가 꿈틀거리는 것에 왠지 모르게 침이 꿀꺽 넘어갔다.

편안한 스웨터에 청바지를 걸쳐 입은 설이는 내게로 다시 다가와서 침대 위로 올라왔다. 여전히 졸린 눈길로 저를 쳐다보고 있는 나를 꼬옥 껴안고는 내 목덜미에 코를 비볐다.

"하아…… 살 것 같아."

외국에 나와서 특별히 더 잘 생겨보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따스한 빛이 담긴 설이의 눈동자는 묘한 색을 냈다.

"형 잠들기 전에 햄버거를 라지 사이즈로 먹었다던데, 아직 배고프지는 않지? 물 가져다 줄까."

나는 졸린 눈을 감고 우으응, 하고 잠투정하듯이 고개를 저으며 설이의 넓은 가슴팍에 뺨을 기댔다. 설이가 작게 웃을 때마다 흉통이 기분 좋게 움직였다. 설이는 내 등을 부드럽게 토닥거리면서 내 귓가에 속삭였다.

"형, 잠 깨야지."

"왜……"

"병원 검진 예약되어 있잖아. 검사 받고 나서 뭐 먹고 싶은지 생각해봐. 여기 한식도 있고, 바비큐도 맛있대."

다정한 목소리 사이로 '병원'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절로 잠이 달아났다. 설이는 얼음처럼 붙어버린 내 옆구리에 손을 끼워 넣어 나를 일으켜 세우고 내게 자신의 커다란 후드짚업을 걸쳐 입혔다.

호텔 복도에는 기다렸다는 듯 로빈이 서 있었는데, 내 앞에서는 설이를 눈꽃 왕자님이라고 불렀으면서 설이에게는 정중했다.

"차 대기시켜놨어요. 병원에도 연락 미리 했습니다, Sir."

우리는 로빈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는데, 이번에는 아침에 공항에서부터 타고 온 빨간 오픈카가 아니라 차창이 모두 까맣게 선팅 된 중형 세단이었다. 운전하는 로빈 옆에는 우람한 체격의 처음 보는 미국 남자가 타고 있었는데, 아마도 설이의 개인 경호원인 모양이었다. 뒷좌석에서 설이는 나와 나란히 앉아 내 손을 꼭 잡고, 긴장하지 말라며 나를 다독였다.

***

"음……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새파란 눈동자를 무테 안경 안쪽에서 깜빡이며 닥터 게일이 한 마디를 할 때마다 내 옆에 가까이 붙어 앉은 로빈이 바로 통역하여 알려주었다. 밑이 뚫려 있는 원피스 형태의 환자복 한 장에 의지한 채로 바들바들 떨며 나는 닥터 게일이 그냥 아무 말도 못하도록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피를 뽑고 소변을 받고, 초음파 검사를 비롯해서 거대한 통속에 들어간다거나 다리 사이로 차갑고 길쭉한 쇠 젓가락 같이 생긴 것을 집어넣는 등의 검사들이 지속되는 동안, 내 머릿속은 새하얗게 비어 있었다. 간호사들은 모두 친절했고, 내 곁에는 계속 설이가 함께 있어 주었다. 나를 응원하고 위로하듯 손을 꼭 잡고 따라다니는 설이가 없었더라면, 내 영혼은 이미 가루가 되어 파스스 흩어졌을지도 모른다.

내 어깨를 감싼 설이가 영어로 뭔가 질문하자, 로빈은 내 귓가에 "솔직하게 전부 말씀해주십시오." 하고 설이의 말을 전했다.

닥터 게일은 신중한 표정으로 음, 하고 신음하며 모니터 화면 안의 꿈틀거리는 새까만 영상들을 조금 더 오래 주시했다. 그 뒤로 이어지는 닥터 게일의 말들은 전부 몇 초 느리게 로빈의 입을 통해서 내게 전해졌다.

"처음 미스터 한의 의뢰를 받았을 때는, 환자분의 몸 속에 일종의 종양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예상했었습니다. 그럴 경우에도 종종 임신과 같은 징후들이 나타나고, 남성은 극히 드물지만 대부분의 가임기 여성 환자들은 그래서 임신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미스터 한은, 파트너의 임신이 의심되는 여러 정황을 메일로 보내왔었죠. 실로 흥미로웠습니다."

그래서 지금 내 상태가 어떻다는 거야, 이 양반아.

답답한 마음으로 환자복 옷자락을 식은땀 난 손으로 꾹 쥐면서 로빈의 통역에 귀 기울였다. 닥터 게일은 나와 설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음, 여성구가 없는 몸으로 임신이 가능할 거라는 가정을 하기가 힘들었지만… 실제로 항문에서 직장으로 이어지는 부분에서부터 어떤 날카로운 것에 의해 여러 번 충돌한 듯한 흔적이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여성의 질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길이 만들어진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그 게이트는 꽤나 길들여진 형태였기에 안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붉은 빛이 나는 레이저 포인터로 스크린에 띄운 사진의 어느 부분을 가리키면서 닥터 게일이 안경을 추겨 올렸다.

"이 부분을 보십시오. 일반적인 인터섹슈얼 남성의 경우, 자궁이 존재한다 해도 그 형태가 미숙하기 때문에 임신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합니다. 실제로 임신과 출산 성공 사례도 극히 드물죠. 하지만 환자분의 경우… 여기, 직장과 방광 사이에 이것이 보이십니까? 환자분의 몸 안에는 안정적인 자궁 역할을 하는 새로운 형태의 생식기관이 존재하는 겁니다. 내벽의 두께도 적당한 상태입니다. 이 부분 역시 후천적인 요인으로 발생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 봅니다."

닥터 게일이 이번에는, 레이저 포인터로 거뭇한 추상화 같은 사진 안의 하얀 돌 같은 것을 가리켰다.

"그 안에 무언가가 자라고 있는 것을 확인했으며, 그것은 아직 미숙하나 분명히 인간 아기의 형태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임신이 맞습니다."

"아……"

나는 로빈의 입을 통해서 들은 소식을 믿을 수가 없어서 벙 찐 표정으로 닥터 게일과 로빈, 그리고 설이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내 손은 어느새 아랫배를 감싸고 있었다.

설이는 내 어깨를 꼬옥 감싼 채로, 닥터 게일에게 뭔가 묻고 있었다. 조심해야 할 것이라거나 앞으로의 입원, 수술에 관한 것이었다. 설이는 남성 출산의 성공 경험이 있는 닥터 게일의 이전 수술 팀을 전부 모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물었다.

나는 로빈에게 손을 내저어, 더 이상 통역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표시를 했다.

"준, 밖에서 좀 쉴까요?"

설이는 의사와 더 할 이야기가 남은 것 같았고, 로빈은 설이에게 뭔가 조용히 속삭인 뒤에 설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를 데리고 복도 끝 대기실 같은 곳으로 데려갔다.

푹신한 소파에 앉자, 창 밖으로 노을이 지는 병원의 정원이 내려다보였다. 몇몇 사람들이 유유히 산책하고 있었다. 로빈은 내게 착즙 오렌지 주스가 담긴 플라스틱 컵을 가져다 주었다. 분홍색 빨대도 꽂혀 있었다.

"……로빈 씨가 보기에 저 진짜 이상하죠."

환자복 위에 설이의 후드를 겹쳐 입은 채로 나는 내 아랫배를 흘깃 내려다보았다. 여태까지는 암만 의심이 된다고 해도 그저 간식과 야식으로 인해 볼록해진 뱃살로 보였는데, 전문가의 확언을 듣고 나니 뱃속에 아이가 존재하는 것 같고 정말로 임산부가 된 기분이었다.

로빈은 바로 고개를 저으며 싱긋 웃었다.

"전혀요."

"……저는 남잔데요? 임신했다는 거 다 들으셨잖아요. 그리고, 설이는 제 동생이란 것도 아시잖아요."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냥 동생도 아니고, 설이는 얼굴만 봐도 이제 전세계 어디에서도 이름을 알만한 연예인이었다. 나는 그런 설이의 인생에 종양 같은 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의 미래가 암울하게 그려졌다.

로빈은 생각에 빠져 축 쳐진 내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드렸다.

“준, 세상에는 이해 못할 신기한 일들이 많아요. 그것들은 전부 남을 괴롭히거나 암살하고 실종시키는 일이 대부분이죠. 그런데 준과 프린스의 경우는 어때요? 단순해져요! 둘이 서로 사랑하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아이가 생기는 거예요. 베이비 말이에요! 그보다 더 기쁘고 좋은 일이 어디 있어요?”

“……그렇지만 사람들이.”

“준, 다른 건 생각하지 말아요. 어차피 생각 없는 수다쟁이들은, 준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 않아요.”

로빈의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 마음에 깊이 스며들었다.

"……고맙습니다."

"별 말씀을."

로빈은 장난스럽게 고개 숙이며 내게 인사했다. 웃으면 눈가에 깊이 주름이 지는 로빈의 얼굴을 마주보고 있으려니 나도 표정이 풀어졌다.

***

호텔로 돌아가기 전, 엄청 고급스러워 보이는 한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철판 불고기가 활활 타오르는 불이 붙은 채로 서빙 되었고, 배추김치와 밑반찬은 조그마한 종지에 꽃처럼 담겨 있어서 먹기 아까울 정도였다. 게다가 김치를 다 먹고 나면 한 번 리필할 때마다 가격이 붙는 것 같았다. 미국은 혹독한 곳이었다.

이런 비싼 식당도 그렇고, 병원에서 진찰 받는 비용까지 우리 돈으로 전부 다 감당할 수 있는 걸까. 병원에서 따라다니던 건장한 미국 남자는 아마도 소속사 측에서 보낸 보디가드겠지만, 그 외의 인원들은 다 설이의 개인 고용이었다. 나중에 입원하게 되면 또 하루에 얼마나 나갈까.

"저기… 설아, 우리 호텔 숙박 비용은 회사에서 대는 거지?"

"응."

"다행이다. 그거라도 돈이 안 나가서……"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설이는 바 형태의 테이블에 기대어 내 얼굴을 찬찬히 살피더니 긴 손가락으로 내 뒷목을 가만히 주물렀다.

"형, 돈 걱정은 하지 마. 그런 거 말고, 몸 건강에 신경 써줘. 그리고…… 형은 나랑 아기 생각만 하면 돼."

고개를 기울이며 애교 있게 웃는 설이의 얼굴이 너무 황홀해서 나는 물잔을 꾹 쥔 채로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그래, 어차피 아기는 이미 생긴 거니까, 다른 것보다 이제 설이랑 아기만 신경 쓰자. 지금은 설이한테 의지하고, 애 낳고 나서 육아 비용은 그때 가서 또 벌면 되는 거니까. 모아둔 돈도 있고, 앞으로 어떻게든 되겠지.

설이는 내게 계속 이것저것 손수 먹여주고 내 입가를 닦아주면서 나를 살뜰히 살폈고, 이따금 내 머리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프라이빗한 레스토랑이었지만 우리 앞에서 바로 고기와 채소를 구워주는 셰프와 서빙 직원은 그런 우리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설이가 잠시 전화를 받기 위해서 자리를 비우고, 내게 약과가 박혀 있는 아이스크림을 디저트로 가져다주던 직원이 내게 빠르게 속삭이듯 말했다.

"Your husband is so HOT…!"

굳이 누군가가 번역을 해주지 않아도 대충 느낌으로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서 내 얼굴이 빨개졌다.

“브, 브라더… 마이 브라더……”

나는 어물어물 단어로 대답했지만, 부끄러움과 당황스러움 때문에 바닥으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직원에게 들린 것 같지는 않았다. 곧 이어서 설이가 내 옆자리로 돌아왔고, 그 직원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무뚝뚝한 얼굴로 서빙을 마친 뒤 급히 사라졌다.

분명 허즈밴드라면 남편이라는 뜻일 텐데, 저 직원의 눈에는 설이가 내 남편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하긴, 아무리 개방적인 문화권의 미국이라고 해도 형제끼리 식사 중에 머리에 뽀뽀를 하거나 손을 만지지는 않겠지.

설이는 내 뺨에 손등을 대며 "왜 이렇게 얼굴이 빨개, 더워?" 하고 다정하게 물었지만 나는 대답 대신 셰프와 안쪽 직원을 힐끔 바라봤다. 철판 위를 정리하는 셰프와 달리 우리를 쳐다보고 있던 그 직원은 시선을 피하며 은밀한 미소를 보냈다.

서양인들 사이에 섞여 있어도 설이는 훌쩍 키가 크고 어깨가 넓어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게 바로 연예인 아우라인 모양이다. 설이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어도, 사람들은 누구나 돌아보며 흘깃거렸다.

나는 그런 설이가 자랑스러우면서도, 그 곁에 보잘것없는 내가 있어서 괜히 누군가의 시선에 꼬투리 잡힐까 걱정되었다. 자격지심인지 모르지만 그래서 나는 의식적으로 설이에게서 반 걸음쯤 떨어져서 걸었다. 설이는 그럴 때마다 내 어깨를 제 쪽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형 자꾸 나한테서 떨어지면 여기서 키스할 거야. 혀 넣어서, 진하게.”

귓가에 속삭이는 설이의 목소리에 나는 얌전히 설이의 품에 안겨서 걸었다. 설이는 한다면 하는 애니까.

***

우리는 호텔로 돌아가기 전, 근처 해변을 잠시 거닐었다. 레스토랑이 있던 번화가와 달리 인적이 드물어서 손을 잡고 걸어도 마음이 편했다. 큰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젊은 여자와 손을 잡은 연인이 지나갔다. 그 누구도 우리를 신경 쓰지 않았다.

"형, 추워?"

"아니. 설이 너야말로 겉옷도 없이. 이거 줄까?"

내가 걸쳐 입은 설이의 후드짚업을 가리키며 묻자, 설이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미소 지었다.

수평선과 이어지는 하늘은 넓은 캔버스에 누군가가 그려놓은 예술 작품 같이 아름다웠다. 푸른 색과 붉은 노을 색 유화물감을 섞어서 발라놓은 것처럼 부드러운 빛깔로 예쁘게 물들어 있어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물결 마저 잔잔하게 흔들리며 음악을 만들어냈다.

경치 좋은 곳에 멈춰 서서 잠시 해변의 밤 풍경을 바라볼 때였다. 등 뒤에서 나를 따뜻하게 껴안은 커다란 짐승 같은 설이가 내 귓가에 뜨거운 입술을 댄 채로 달콤하게 속삭였다.

"고마워, 형."

내 몸을 감싼 설이의 손등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곱지만, 이제 나보다 훨씬 커진 손이 여전히 예뻤다.

"나를 가족으로 받아주고 사랑해줘서, 너무 고맙고…… 미안해. 형."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망설여졌다.

설이는 내 배가 눌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가슴팍과 어깨를 끌어안으면서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형, 앞으로 내가 잘 할게. 정말, 좋은 반려가 될게."

설이의 가슴 벅찬 목소리에는 물기가 서려 있었다.

임신을 한다는 것은, 남자의 몸으로 내가 평생 감히 예상도 못해본 사건이었다. 그렇지만 이건 내가 아니라도, 누구에게나 중대사일 것이다. 그리고 너무나 소중한 일이다.

설이가 내게 미안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나는 고개 숙인 설이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려고 너를 사랑한 게 아니야.

“설아, 나 봐봐.”

나는 뒤돌아서 설이의 두 뺨을 쥐었다. 오직 나만을 바라보는 순종의 눈동자가 사랑스러워서 웃음이 절로 났다.

아무 말 없이, 발끝을 올려 고개를 들고 설이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말로는 다 할 수 없이 뜨거운 마음이었기에 키스로 전했다.

설아. 우리 까짓 거, 아기 낳고 백년해로 한 번 해보자.

뜨거운 혀끝을 얽으면서 나는 내 마음이 설이에게 전해졌다는 것을 알았다. 눈을 감은 채로 파르르 떨리는 설이의 속눈썹을 감상하다가 나도 눈을 감았다.

해변의 부드럽고 축축한 바람이, 하나가 된 우리를 감쌌다가 물결 위로 유유히 흘러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