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미지의 세계로!
레스토랑에서 네 사람이 함께하는 식사자리는, 독특한 분위기였다. 권영도 이사의 단골 가게이기 때문에 가게 쪽에서 프라이빗 룸을 마련해줘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 화려한 유명인들의 대화가 기사 거리가 될 뻔했다.
"하, 하, 한설 배우님, 레본 킥 감독님하고 작품 하신다는 얘기 들었어요. 추, 축하드립니다…! 저, 정말 한설 배우님 좋아, 아니 팬입니다……"
제이가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손을 덜덜 떨며 설이 쪽으로 아예 몸을 돌려서 이야기하면, 설이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예, 감사합니다, 정도의 딱딱한 대답을 한 뿐이었다. 심지어 제이 쪽은 쳐다보지도 않는 상태였다. 그리고 나서 설이는 스테이크를 한 입 크기로 썰어서 내 앞에 놓아주며 부드러운 미소로 내 쪽으로 몸을 돌려 앉은 채로 말하는 것이다.
"형, 많이 먹어. 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포장해가면 되니까 천천히 먹고. 응?"
내 입가에 뭐가 묻었는지 모르지만, 설이는 검지를 구부려 내 입술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고 나는 설이가 내 목에 턱받이처럼 둘러준 냅킨을 착용한 채로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준 씨는 어쩐지 요즘 얼굴에 젖 살이 오른 것 같네요. 전보다 더 어려 보여서 귀엽네요."
권영도가 마치 작업을 거는 것처럼 그런 말을 하면, 설이가 어김 없이 삐딱한 시선으로 권영도를 지그시 쳐다봤다. 딱히 권영도에게 반감을 표하지는 않았지만 설이의 그런 조용한 시선 속에는 '어디 계속 해 봐' 하는 분위기가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권영도는 그런 설이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으며 내 앞 접시에 아스파라거스와 한우 채끝 등심을 큼직하게 썰어 덜어주었고, 설이는 그에 질세라 내 반대편 접시 빈자리에 바싹 구운 베이컨과 스테이크 조각을 쌓아 올렸기 때문에 내 앞 접시는 만원 버스처럼 미어 터질 지경이었다. 누가 보면 뷔페에 온 욕심쟁이로 보일 수준의 양이었다.
두 사람이 신경전을 벌이는 동안, 제이는 단답형 로봇처럼 대답하는 설이의 무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기자처럼 질문을 이어갔다.
"저기, 한설 배우님. 어, 어떤 타입을 좋아하시는지… 이상형이나 그런 인터뷰는 잘 안 하시던데… 아무래도 이성만을 사귄다거나 그런 고정관념은 없으실 것 같은데, 그러시죠? 남자도 괜찮으시죠…?"
어떤 간절한 눈빛으로 제이가 물으면, 설이는 제이 쪽을 쳐다보지 않고 짧게 대답했다.
"네."
"역시! 그러실 줄 알았어요! 고정관념 따위에 사로잡히실 분이 아니시죠!"
각자 차를 끌고 왔기 때문에 무 알콜 칵테일을 마시는 중이었지만 제이의 뺨은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제이는 긴장으로 목이 타는지 칵테일을 한 모금 더 마신 뒤에 설이 쪽을 향해 반짝이는 눈빛을 보냈다.
"그, 그러면 한설 배우님, 실례가 안 된다면…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시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내 턱받이에 뭐가 묻었는지 설이는 냅킨을 손끝으로 살살 건드렸고, 그 손길이 내 쇄골 쪽에 닿았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움찔거리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설이는 부드러운 미소로 입 끝을 살짝 올렸다.
"예쁜 사람이 좋습니다, 형처럼."
아… 하고 당황한 듯 입을 벌린 제이의 시선이 내게로 꽂혔고, 나는 입안에 가득 찬 고기를 꼭 꼭 씹으면서 어색하게 웃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아마도 내 얼굴이 토마토처럼 붉어져 있을 테지만, 민망함에 달아오른 얼굴색을 내가 어떻게 조절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현재 이 4인 테이블에서 유일하게 연예인이 아니며 유일하게 예쁜 외모가 아닌 사람이 있다면 그게 바로 나일 텐데, 설이는 마치 내가 경국지색이라도 되는 듯이 내게 푹 빠진 눈빛으로 아예 테이블에 팔을 궤고 제 얼굴을 비스듬히 올린 채 나를 바라봤다.
"어… 그… 서, 설아, 어서 먹어. 제이 너도, 얘가 장난 좀 친 거 가지고 그렇게 굳어 있으면 어떡하냐, 응? 하하… 하…"
그제야 제이는 설이가 나름대로 위트 있는 대답으로 개인적일 수 있는 질문을 피해간 것이라고 깨달았는지 아! 하고 생기를 되찾았다. 아무래도 제이는 우리 설이를 동경의 대상이며 동시에 연애 대상으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제이가 단순히 한설의 친형으로 알고 있는 내가 그 자리를 꿰찼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큰 실의에 빠지고 말 것이 분명했다. 우리 사이가 전무후무한 스캔들이 되는 것은 일단 나중 일이었다.
"그것 참 우연이네요! 나도 예쁜 사람이 좋은데, 한준 씨처럼."
권영도가 고개를 기울이며 싱긋 웃었다.
……이 양반이 지금 불 난 집에 불 붙이나, 잘 수습해놨더니 끼어들고 앉았다. 아무래도 조속하게 밥을 다 먹고 이 자리를 빨리 파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하하! 물론 준이 형이 무척 귀엽기는 하지만… 오늘 인기폭발이네요."
제이는 내 앞에 있는 칵테일 잔에 제 잔을 살짝 부딪히며 웃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제이야. 네가 생각해도 이 상황이 이상하지.
설이는 그렇다 쳐도, 권영도 이사님은 안과 검진이 시급하다.
“아닌 게 아니라, 한준 씨 얼굴에 광채가 돌고, 전보다 매력적으로 느껴지는데요.”
“제발 이사님, 식사에 집중합시다. 네?”
그래도 나름대로 순탄하던 식사자리에 갑작스러운 일이 벌어진 것은, 샐러드가 추가로 더 나왔을 때였다. 원래 내 앞쪽에는 카프리제 샐러드라는 편 토마토와 치즈가 올라간 샐러드가 놓여 있었는데 이번에는 훈제 연어 샐러드가 놓였다. 워낙 가리는 음식이 없기도 하지만, 연어가 들어간 요리는 평소에도 무척 좋아하던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훈제 연어 샐러드가 가까이에 있는 것만으로도 참지 못할 만큼 강한 연어 비린내가 훅 끼쳐온 것이다. 여태까지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우욱, 하고 입을 막은 채로 속이 뒤틀리는 느낌을 참고 몇 초가 지났을까. 놀란 눈의 세 사람이 내 반응에 식사를 멈추고 주목하는 것이 느껴졌다. 설이는 의자에서 일어나 내 옆 바닥에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내 어깨를 감싸고 괜찮아? 하고 속삭였다.
여태까지 이것저것 잘만 먹고 있었는데, 갑자기 왜 이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연어 비린내에 울렁거리는 느낌이 배 멀미처럼 몰려왔고, 스스로도 내 그런 반응에 당황스러워서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준이 형, 왜 그래요? 체했어요?"
"한준 씨, 뭔가 맛이 이상했습니까? 물 좀 마셔봐요."
나는 대답을 하려고 입을 막은 손을 떼어내고 어색하게 웃었다.
"괜찮… 우웁!"
그러나 다시 두 손으로 코와 입을 막은 채로 몸을 숙여야 했다. 토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설이는 테이블을 흘깃 쳐다보더니 우리 쪽으로 다가온 담당 서빙 직원에게 신속하게 말했다.
"연어 샐러드 좀 치워주시겠습니까."
이유를 모른 채로 직원은 급하게 네, 하고 대답하며 샐러드 그릇을 가지고 돌아갔다. 그런 뒤에 몇 초가 지나자 나를 괴롭히던 연어의 비린내가 코앞에서 사라졌고, 토기가 느껴지던 것도 겨우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게 뭐라고 짧은 시간 내에 내 이마에는 식은땀마저 맺혀 있었다.
설이는 내 이마를 차갑고 시원한 손가락으로 천천히 닦아냈다. 그리고는 신중한 눈빛으로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형. 아무래도 이거 입덧,"
"설아! 우, 우리 이만 가자. 내가 아무래도 너무 많이 먹어서 버거운 것 같은데, 하하, 저기, 이사님하고 제이 너는 더 먹고 천천히 돌아가면 될 것 같은데, 그러니까, 어, 오늘은 너무 반가워서 제가 사겠습니다. 아무튼 반가웠고, 다음에 또 봅시다!"
혹시라도 설이가 쓸데없는 말을 꺼낼 까봐 다급하게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안 그래도 나 혼자 속으로 계속 의심하고 있던 것을 설이는, 차에 타자마자 다시 한 번 입 밖으로 꺼냈다.
"형, 얼굴이 창백해. 역시 입덧인 것 같은데."
내게 안전벨트를 매준 뒤에 설이는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내 뺨을 손등으로 쓸었다.
차창을 살짝 열고 신선한 공기를 맞으면서 드라이브를 하자, 신기하게도 속이 금방 가라앉았다. 체기가 있다거나 과식을 한 느낌도 전혀 없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레몬에이드를 한 잔 만들어 마셨는데 그것만으로도 개운해졌다.
설이는 나를 침대에 눕혀 놓고 급히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설아, 어디에 전화 걸어?"
"닥터 게일. 하…… 저쪽은 새벽이라 그런지 전화를 빨리 안 받네."
초조해하는 표정으로 입술을 매만지는 설이를 멍하니 올려다 보다가 휴대폰을 빼앗았다. 설이는 고작 내가 연어 샐러드 냄새에 속이 울렁거린 것으로 미국의 그 교수에게 전화까지 걸고 있는 것이다.
설이는 무슨 에고인가 하는 그 어디에 있다는 병원 교수와 인연이 있는 의사가 지금 한국에 있으니, 당장이라도 연락해서 대학병원으로 가야 한다는 말을 하며 내 뺨을 만지작거렸다. 마치 금방이라도 내가 입덧으로 쓰러질까 두려워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차가워진 설이의 손을 잡고 작게 웃었다.
"나 진짜 괜찮아. 오히려 지금 병원 가면, 아무 이상 없는데 왜 왔냐고 할 걸?"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나중에 진짜 몸이 이상하다 싶으면, 그때 내가 말할게. 어차피 우리 곧 미국 가잖아. 응?"
"……"
안심을 시켜도 설이는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언제 헛구역질을 했냐는 듯 활기 넘치는 내 얼굴을 보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늦은 저녁에는 다시 식욕이 되살아나서 순살 치킨을 배달시켜 먹었다. 설이는 내 권유로 겨우 한 조각을 먹었고, 나머지는 모두 내 위장 속으로 들어갔다. 양념 치킨으로 시킨 덕에 양념이 충분히 남아 거기에다가 밥까지 비벼 먹었다. 내가 잘 먹는 것을 확인하고 설이는 그제야 조금 안심하는 듯 했다.
미국으로 가는 날이 다가올수록 설이는 한국에서 마무리 짓고 가야 하는 스케줄 때문에 바빠졌다. 그래도 꼬박꼬박 식사 때마다 집으로 돌아와서 내 식사량과 컨디션을 시간대 별로 살펴보고 나서야 다시 나가 새벽까지 일하고 돌아왔다. 나는 그 동안 집에서 하루 다섯 끼를 먹는 생활을 이어나갔는데, 레스토랑에서 연어 샐러드 냄새를 맡고 울렁거렸던 기억 때문인지 생선 종류는 그다지 당기지 않아서 고기와 과일 종류를 주로 먹게 되었다. 생선을 떠올리면 비린내가 나는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출국 전, 이하원 팀장이 오랜만에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며 나를 그루 엔터 본사로 불렀다. 설이는 내가 오피스텔 밖으로 나가면 각종 세균과 미세먼지 때문에 바로 병에 걸리기라도 할 것처럼 나의 외출을 극도로 경계했는데, 설이의 미국 활동에 대해 팀장님이 나에게 당부하고 부탁할 게 있다고 했기 때문에 안 나갈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설이는 두 가지 조건을 내세웠는데, 방송 촬영 중인 자신을 대신해서 경호원 최민욱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본사로 가는 것과 30분 내에 이야기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어차피 내가 됐다고 해도 최민욱 형님은 맡은 업무이기 때문에 대기하고 기다리실 것이고, 이하원 팀장님도 나를 한 시간 넘게 붙잡고 얘기할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설이에게 그러마 대답했다.
차에 타기 전, 최민욱 형님은 나에게 깍듯하게 인사하며 손수 뒷문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내게 무슨 상전도 아니고 혼자 뒷좌석에 타고 가는 건 기분이 이상할 것 같아서 조수석에 타기로 했다.
"저 때문에 고생이 많으시네요."
"아닙니다."
최민욱 형님은 과묵한 성격인지 잡담 없이 묵묵히 운전했고, 나는 창 밖을 보며 떡볶이 생각을 했다.
미국에도 떡볶이가 있을까. 거기에서 즉석 떡볶이 같은 거 먹고 싶으면 어떻게 하지.
"저랑 설이 다음 주에 미국으로 가면 한동안 못 오는데, 민욱 형님 그때 좀 쉬시겠네요."
"아……"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최민욱 형님은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을 얼버무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운전하는 최민욱 형님 쪽을 바라보면서 나는 물었다.
"혹시, 저희랑 미국에 같이 가세요?"
"아…… 네… 그렇습니다."
놀란 얼굴로 쳐다보자, 최민욱 형님은 대답을 후회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내게는 이것도 일종의 비밀이었던 모양이다. 사실 그 먼 곳까지 나 하나 경호하겠다고 사람을 데려간다는 것이 나로서는 황당하게 느껴졌지만, 하루 종일 내 곁을 지키지 못하고 촬영을 위해 미국 다른 주를 옮겨 다니며 자리를 오래 비울지도 모르는 설이 입장으로는 불안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형님, 저랑 설이 묵는 곳에서 같이 지내시면 되겠어요!"
"아닙니다. 저희는 숙소를 따로 잡았습니다."
"……저희?"
"도, 도착했네요. 저는 주차장에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최민욱 형님은 진땀을 흘리며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어줬다. 나는 일단 본사 건물 위로 올라가야 했다.
이하원 팀장님은 오랜만에 보는 나를 위해서 홍차와 함께 과일이 잔뜩 올라간 타르트를 준비해주셨는데, 어쩐지 그것만으로도 그루 엔터테인먼트 내에서 설이의 영향력이 무척 커진 것이 느껴졌다. 나를 반기는 이하원 팀장님의 얼굴에 흐뭇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근데 한준 씨, 살이 조금 오른 것 같네요? 보기 좋습니다."
"아… 그런가요?"
나는 이미 과일 타르트를 포크로 크게 잘라 집어 든 상태로 어색하게 웃었다. 샤인머스캣이 올라간 부분이 특히 맛있었다. 이하원 팀장은 마음껏 드시라며 안경 너머로 부드러운 눈길을 보냈다.
"한준 씨가 한설 씨를 우리 그루 엔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쾌거는 없을 겁니다. 블록버스터 영화 계의 큰손 레본 킥 감독의 러브 콜이라뇨! 어느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레본 킥 감독의 시리즈 작품에 등장하는 아시아계 배우는 우리 한설 씨가 두 번째입니다. 지금 전 세계가 우리 한설 씨를 주목하고 있는 겁니다. 이미 세계적인 시선으로 인정을 받은 거란 말입니다!"
"그럼요, 그럼요."
과일 타르트보다 이하원 팀장의 설이 자랑이 더 달게 느껴졌다. 역시 설이 이야기에 대해서는 이하원 팀장만큼 잘 맞는 사람이 없다. 우정혁은 늘 내가 설이 자랑을 하면 심드렁한 표정으로 듣기만 했는데, 이하원 팀장은 나보다 더 많은 수식어로 설이를 칭솔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 그렇기 때문에 제가 요즘 걱정이 참 많습니다. 이제 미국 활동의 카운트다운이 코앞인데,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잡음이 들리면 사기가 떨어지는 법 아니겠습니까?"
"왜요? 우리 설이에 대해서 누가 뭐라고 합니까?"
당장이라도 날카로운 디저트 포크 끝으로 찔러줄 작정으로 포크를 쥔 채 묻자, 이하원 팀장은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두 손을 펴 보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댔다.
"유능하고 매력적인 청년 배우한테 스캔들은 치명적이죠. 그리고 그걸 악용하려는 사람들은 넘쳐나고요. 어디서 그렇게들 말을 지어내는지, 배우 한설이 미국 어느 병원의 산부인과 의사와 꾸준히 접촉 중이며 산부인과 VIP 병실을 예약하는 것 같다는 기사를 냈지 뭡니까."
"……예?"
손에 힘이 빠져 포크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놀라셨죠. 이렇게 사람들이 무섭습니다."
이하원 팀장은 내가 떨어뜨린 포크를 치워주고, 다시 포장된 포크를 내 앞에 내밀면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배우 한설이 활동을 위해 미국으로 떠나는데, 숨겨놓은 여자와 함께 가는 것이고 그 여자가 한설의 아이를 임신 중이라는 소문입니다. 물론, 반박 기사도 냈고 그런 소문의 진원지가 어디인가도 파악했습니다. 예전 신 엔터테인먼트 쪽 기자라고 하더군요."
이하원 팀장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이를 갈았다.
"그 기자, 한설이 신 엔터에 있을 때도 그랬습니다. 우리 쪽 배우 조안율을 김조한 감독 작품 역할에서 밀어내려고 마약 혐의 기사를 가장 먼저 터뜨린 것도 알고 보니 그 기자였죠. 그땐 신 엔터의 신인이었던 한설 씨를 그 역할에 꽂아 넣을 속셈으로 그랬던 것 같은데… 뭐, 이번에는 워낙 황당한 소문을 냈기 때문에 씨알도 안 먹힐 겁니다."
여전히 그 기자와 신 엔터테인먼트를 괘씸해하는 얼굴로 욕을 삼킨 이하원 팀장이 고개를 들었다.
"친형인 한준 씨가 옆에 늘 계시니까 아시겠지만, 우리 한설 배우가 어디 누구를 갑자기 임신시켜서 출산 때문에 미국까지 데려갈 그런 인물입니까?"
"아…… 아니죠. 그럴, 그럴 리가 없죠. 그럼요, 하하……."
속여서 죄송합니다, 이 팀장님. 사실 우리 설이는 어느 정도 그런 면이 있는 인물이 맞는 것 같아요.
차마 할 수 없는 말을 어색한 미소로 대신하며 나는 홍차로 목을 축였다.
"그래서… 미국 활동 기간 동안, 형님인 한준 씨께서 우리 한설 씨를 잘 돌봐주셨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저희 쪽에서 트레이너와 현지 매니저, 로드 매니저, 통역가, 개인 보디가드까지 신경 써서 준비 중이기는 합니다만… 아무래도 사생활에 대해서는 한준 씨께서 가장 잘 파악하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그렇…죠."
"혹시나 한설 씨 주변에 쓸데없이 스캔들을 일으킬 것 같은 여자 연예인 혹은 일반인 여성분들이 있다면, 부디 일찌감치 접근을 차단하거나 방해해주십사 해서 이렇게 부탁을 드립니다. 이게 다 한설 씨 앞일을 위한 겁니다.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연애설은 물론이고, 허무맹랑한 결혼설이나 출산설이 들려와서야 되겠습니까?"
이하원 팀장은 내 손을 꼭 잡으면서 고개 숙여 정중히 부탁했다.
"저는 한준 씨만 믿습니다."
시들시들한 잡초 같은 몰골로 본사 건물 지하주차장으로 돌아가자, 최민욱 형님은 내 안색이 좋지 않다면서 바로 설이에게 보고하려고 했다. 나는 그런 그를 만류하며 차에 올랐다.
어차피 이하원 팀장의 우려처럼 설이가 미국에서 여러 여성들과 만남을 가진다거나 스캔들이 있을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애초에 설이에게는 몰래 숨겨둔 임신한 여자친구 같은 것은 없는 데다가 스케줄이 없으면 내 옆에서 하루 24시간 떨어지지 않으니, 어떤 여자와도 접촉할 일이 없었다.
단지 문제는, 설이의 형인 내가 아무래도 임신을 한 것 같고 출산도 해야 할 것 같다는 것뿐이었다.
***
"형, 긴장 돼?"
선글라스를 쓴 설이는 공항으로 가는 벤 안에서 내 손을 꼭 잡으면서 다정하게 물었다. 나는 삐걱거리는 고개를 움직여 가로저었지만, 아무래도 미지의 세계 앞에 서 있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난생처음 우리나라를 벗어나서 외국으로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데다가, 뱃속에 아기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이 적응 안 되는 사실도 곧 확인 받게 될 것이었다.
공항에는 이미 취재진들이 설이가 벤에서 내리는 것을 포착하기 위해서 하이에나들처럼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설이가 문을 열고 내리는 순간부터 눈부실 정도로 플래시가 여기저기에서 정신 없이 쏟아졌다. 설이는 내 손을 놓고 뒤차에서 따라온 보디가드들과 함께 공항 안으로 진입했고, 나는 설이가 떠난 지 5분 정도 흐른 뒤에 어수선한 자리를 최민욱 형님과 또 다른 오피스텔 경비원이었던 김영진 형님의 호위를 받으면서 이동했다.
유명 외국 감독의 작품에 출연하게 된 설이에 대한 사람들의 열렬한 기대가 몸소 느껴졌다. 앞서 걸어가는 설이는 주변에 밀물처럼 밀려오는 기자들과 팬으로 추정되는 여러 사람들의 무리가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것처럼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제 쪽으로 바짝 붙으십시오."
최민욱 형님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걸었다. 이미 대스타 한설이 지나간 후였지만, 아직 사람들로 붐벼서 자칫 누군가와 부딪힐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두 사람의 철통 같은 호위로 안전하게 라운지라는 곳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던 설이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밝은 얼굴로 내 손을 잡았다.
"형. 탑승까지 아직 시간이 좀 남았는데, 배고프지는 않아? 과일 같은 걸로 가져다 줄까."
이미 돼지고기를 큼직하게 썰어 넣은 김치찌개로 집에서 배부르게 식사를 한 뒤였기 때문에 식욕은 그다지 없었지만, 내게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들뜬 설이의 눈빛을 마주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설이는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서 아까 전에 왔던 우정혁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야, 네 동생 진짜 잘 나가더라. 할리우드 진출이네.'
어디서 기사라도 봤나 보다. 연예계 소식을 빠르게 접하는 것을 보니까, 우정혁은 영국에서 후계자 수업은커녕 한국에서처럼 탱자탱자 놀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답장을 보냈다.
'우정혁아. 나 미국 가.'
영국 백수는 빠르게 내게 답을 보냈다.
'나도 알아, 인마. 네 동생 놈 따라서 가는 거겠지. 유명한 감독인가 보던데, 작품 하나 탄생하겠네.'
과일과 요거트 같은 것이 담긴 유리그릇을 들고 내게로 다가오는 설이를 올려다보면서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이제는 습관적으로 늘 그러듯 내 아랫배를 동그랗게 쓰다듬었다.
……아냐, 우정혁아. 아무래도 작품이 아니라 다른 것이 탄생할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