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눈이 녹으면 꽃이 핀다는 것
식탁 위에 여권이 두 개 놓여 있다.
하나는 데뷔하면서 만들었던 설이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이번에 신청해서 발급된 내 여권이었다.
헐리웃에서 유명한 액션 영화를 시리즈를 성공시켜 한국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영화 감독에게서 러브 콜이 온 것을 설이는 끝까지 관심 없다고 일축했지만, 내가 그런 설이를 설득시켰던 것은 신 매니저님과 이하원 팀장님의 간절한 부탁 때문이었다. 교대로 전화해서 나를 달달 볶으니, 나도 설이에게 한 번 감독을 만나서 얘기라도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부탁했던 것이다.
설이는 내 부탁에도 그다지 내키지 않는 듯 하더니, 별안간 눈을 반짝이며 조건을 내세웠다.
"그럼 형, 여권 만들자."
"어……?"
내게 임신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한 다음부터 설이는 계속 내게 여권을 만들어야 한다며 귀찮게 했었다. 그때마다 나는 오늘 피곤하다, 지금은 바쁘다, 핑계를 대면서 빠져 나왔다. 아무래도 여권까지 만들면, 정말 내가 임신했다고 인정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니, 어차피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설이의 뜻대로 일단 병원에는 가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단 내 여권을 만드는 것으로, 설이를 헐리웃 감독과의 미팅에 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일종의 자포자기였다.
그래, 거기 가서 검사를 받아보면 내가 임신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될 수도 있는 거고.
설이는 로스앤젤레스까지 미팅을 다녀와야 해서 사흘간 내 옆을 비우는 것이 무척이나 못마땅한 듯 했지만, 밤마다 영상통화를 두 시간도 넘게 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겨우 달랬다. 영상통화를 켤 때마다 설이가 화면에서 입술을 비죽 내밀고 토라진 아이 같은 표정을 짓는 게 너무 귀여워서 전부 녹화를 해두었다.
"지금 당장 형한테 키스하고 싶어."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면서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휴대폰에서 흘러나오면, 나는 혼자 있는 집인데도 얼굴을 붉혀야 했다. 호텔방을 배경으로 방금 씻고 나온 설이가 바스가운 앞섶이 벌어져 맨 가슴을 드러낸 상태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크흠, 헛기침을 하면서 내가 "집에 오면 키스해줄게…." 라고 말하자마자 설이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착한 표정으로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였다.
아니나 다를까, 설이는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현관문 앞에서 나를 끌어안고 기대하는 표정으로 코앞에서 쳐다보았다. 생각해보면 내가 먼저 설이에게 진한 스킨십을 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현관문이 열려 있는 상태였지만 어차피 바깥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고, 나는 모든 용기를 끌어 모아서 발 뒤꿈치를 들고 설이의 입술로 돌진했다.
처음 입술이 닿게 한 것은 나였지만, 설이는 바로 내 뒷목을 감싸 잡으면서 놀랍도록 뜨거운 딥 키스를 이어나갔다. 입술이 꼭 맞닿고 혀끝이 농밀하게 내 안을 간질였다. 몇 번이나 해봤지만 매번 숨 쉬는 타이밍을 잊어버려서, 내가 어지러워 몸을 비틀거릴 때에야 설이는 겨우 키스를 멈춰주고 나를 집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무사히 미팅을 마치고 온 설이는 식탁에 놓여 있던 내 여권 위에 자신의 여권을 겹쳐놓고 나서야 흐뭇한 얼굴을 했다.
"설아, 얘기는 잘 했어? 어떻게 됐어?"
그루 엔터테인먼트 해외사업부에는 아는 사람이 전혀 없어서, 설이가 로스앤젤레스에 간 동안의 내용은 보고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신 매니저님도 이번 미팅에는 따라가지 않았고, 내가 모르는 다른 치프 매니저가 함께 갔던 모양이다.
설이가 없는 이틀 동안 대량 구입해서 다 먹지 못할 것 같은 과일더미로 청을 만들었는데 사과 청, 레몬 청, 귤 청, 모과 청 네 종류나 되었다. 깨끗하게 소독한 유리병에 여러 병 담아서 경비원 분께도 나눠드리려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로비로 내려갔더니, 이미 엘리베이터 CCTV로 내 모습을 확인했는지 열리는 자동문 앞에 최민욱 형님이 마중 나와 있었다. 그래서 로비에 발이 닿기도 전에 유리병들을 전달하고, 나는 바로 다시 엘리베이터를 그대로 탄 채로 우리 집 앞까지 도착했다.
결국 설이가 없는 이틀 동안, 한 발자국도 집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레몬 청에 탄산수를 섞어 에이드로 만들어서 건네자, 설이는 그걸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내 허리를 덥석 끌어안아 제 옆에 앉혔다.
"형, 나 그 감독 영화에 출연하기로 했어."
너무 의외의 대답이라 정말? 하고 놀란 얼굴로 묻자, 설이는 부드러운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관심 없는 것처럼 굴더니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쪽에서 내 편의를 많이 봐주겠다고 했고, 여러모로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어."
"무슨 편의?"
"음, 다음날 말부터 미국으로 가게 될 텐데, 그쪽에서 캘리포니아 쪽에 숙소를 제공해주기로 했고 촬영 내내 그쪽에서 장기투숙하기로 했어. 형을 돌봐줄 의사가 있는 병원하고 무척 가까운 호텔이야."
설이의 입에서 '병원'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나는 다시 얼음 동상이 되었다. 나의 그런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설이는 내 어깨를 보석 다루듯 쓰다듬으면서 기쁘게 이어 말했다.
"어차피 나는 주연도 아니고, 촬영은 길어도 사 개월 이내에 끝날 거라는 약속도 받아냈어. 그 이후로는 형 옆에서 계속 함께 있을 수 있을 거야. 게다가 이번 촬영이 잘 성사되는 게 그루 엔터에도 무척 이익이 되는 일이기 때문에 앞으로 내가 형이랑 아기랑 셋이 살면서 연예 활동을 이어나가거나 혹은 은퇴할 때에도 더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조건을 내세울 수 있게 되었어."
뿌듯한 표정으로 내 옆머리에 쪽, 입을 맞추는 설이의 입에서 '형이랑 아기랑 셋이'라는 말이나 '은퇴'라는 말이 나오자 나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는 느낌이었다. 정말 현실 같지 않은 일 투성이였다.
"형은 걱정할 것 하나도 없어."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멍해진 나를 끌어안고, 설이는 내 머리에 제 뺨을 다정하게 비볐다. 주인에게 꼬리를 세운 채 다가와 뺨을 비비는 고양이 같았다. 곧이어 나 너무 행복해, 하고 설이가 속삭였기 때문에 나는 얼음 동상의 마법에서 풀려났다.
설이의 등을 힘겹게 끌어안아 토닥거리며 나는 눈을 감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내 동생이 행복하다는데, 다른 게 다 무슨 상관이야. 나는 그거면 다 좋아.
***
그 뒤로 설이는 틈만 나면 나를 제 무릎에 앉힌 채로 내 아랫배를 쓰다듬으면서 기대감이 담긴 표정으로 속삭였다.
“형 닮으면 정말 예쁠 텐데, 아무래도 나를 많이 닮겠지?”
“아…… 어… 글쎄. 근데 설아, 객관적으로 생각해봐도, 너를 닮아야 예쁘지 않을까.”
“아니야, 형을 닮아야 예쁘고 귀여워.”
수줍게 말하는 얼굴이 꼭 명화 속 천사 그 자체여서 나는 설이의 머리통을 꼬옥 끌어안을 수 밖에 없었다.
일부러 중요하지 않은 스케줄은 잡지 않아서 전보다 집에서 나와 함께 있는 날이 늘어났는데, 가만히 쉬지 않고 바쁘게 집안일을 하면서 돌아다녔다. 내가 스스로 숟가락을 드는 것도 못마땅해 해서, 결국에는 밥도 설이가 직접 떠먹여주는 수준까지 오게 되었다.
사실 아직 나는 내가 임신을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고 실감도 안 날 뿐더러 배가 눈에 띄게 부푼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설이는 나를 거의 만삭 임산부 대하듯이 조심조심 대했다.
"임신 초기가 보통 더 위험하다고 하니까, 형은 얌전히 있어."
설이는 임신과 출산 관련 서적을 엄청나게 사들이기 시작했는데, 가끔 서재에 틀어박혀서 고시 공부하는 모양으로 안경을 쓴 채 심각하게 태교에 관한 책을 읽었다. 그 모습이 꼭 아기 신랑 같이 보여서 웃음이 났다.
그런데 그런 설이의 유난스러움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나도 모르게 TV에서 임신 관련 내용이 나오는 토크쇼 방송이 있으면 채널을 멈추게 되는 것이다. 패널로 나온 여자 연예인들이 각자 자신의 출산 경험을 이야기하며 얼마나 급박하고 위험한 상황이었는지 출산의 고통을 실감나게 표현하는데, 그게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식은땀이 난 손으로 리모컨을 쥔 채로 그런 방송을 보고 있으면, 설이가 다가와서 "형은 자연분만이 아니라 제왕절개와 흡사한 수술법으로 분만하게 될 거야."하고 안심시키듯이 말해주었는데, 그건 또 그거대로 무서웠다. 진짜 임신을 하게 된 건지 확실하지 않은데도 벌써부터 겁이 나서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왔다.
TV에 빠져 있을 때 전화가 왔다. 휴대폰에 뜨는 번호는, 딱히 저장해두지 않았지만 누구인지 기억하고 있었다. 발신자는 강춘영의 부인이었다.
"………"
휴대폰 화면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다가, 결국 전화를 받았다. 그때 마침 설이는 샤워를 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나는 거실에 혼자 있었다.
내가 전화를 받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휴대폰 건너편에서는 말 꺼내기를 망설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대로 몇 초가 흘렀을 즈음, 강춘영의 부인이 주저하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 저… 한준 씨, 다시는 전화할 일 없을 거라고 했었는데, 이렇게 다시 연락을 드리게 되어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자신의 상황을 비참해하는 목소리였다. 나는 딱히 할 말이 없어서 대답하지 않았다. 강춘영의 부인은 길게 한숨을 내쉰 뒤, 결심한 듯이 말을 이었다.
- 결국, 남편이 교도소로 들어갔어요. 사기죄 몇 건이 넘어가서…. 나하고 우리 아들들은 지금, 빚더미에 오르게 생겼습니다. 정말… 앞일이 막막하고, 너무 힘들어서…… 얘기를 들어보니까, 한준 씨가 우리 애들 아빠하고 아주 친했던 친구 분의 아들이라고 하던데… 저기, 도저히 돈을 다 갚아내기가 힘들어요. 지금 소송 남은 것이 한두 곳이 아니지만, 가장 큰 금액을 피해보상금으로 갚아야 하는 것은 한준 씨 동생분 쪽이에요. 부디… 자비를 베풀어서 금액을 좀 줄여서 합의해주면 안될까요? 이런 부탁 정말 죄송하고, 또 죄송합니다……
눈물 섞인 한탄을 듣고 있자니 머리가 아팠지만, 그 목소리에서 어머니를 떠올렸다. 생활고로 힘들어하시던 어머니께서 일찍 세상을 떠나시게 된 것은, 몸 고생과 마음 고생 때문이었을 것이다. 함께 고생하는 자식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그 속에 섞여 있었겠지.
강춘영에게도 아내와 아들들이 있다. 그리고 가족들은 죄가 없다.
"형, 누구야?"
머리를 수건으로 털면서 거실로 걸어 나온 설이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고, 나는 휴대폰에 대고 강춘영 부인 쪽에 대답했다.
"동생이랑 얘기해보고, 강춘영 씨 쪽으로 연락하겠습니다. 저한테… 더 이상 전화하실 일 없게 할게요."
내 말 뜻을 바로 알아들었는지 몇 번이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는 목소리를 듣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짧은 대화만으로 상황을 눈치챈 설이가 엄한 표정으로 내 곁에 앉았지만, 나는 수건을 뺏어 들고 설이의 머리를 말려주며 차근히 이야기했다.
"설아, 나 강춘영 그 사람을 한 번 더 만나서 이야기 해보고 싶어."
"……형이 그 남자 만나는 거 싫어."
"그래, 나도 딱히 그 아저씨 만나는 게 달갑지는 않아. 근데 설아,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해본 뒤에 피해보상금을 어느 정도 줄여서 합의해주면 어떨까 싶어."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설이의 눈빛이 매섭게 끝이 올라간 채로 나를 쳐다봤다. 그 자를 절대로 용서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었고, 사실 내 마음도 설이와 같았다. 하지만 때로는 분노보다 더 중요한 것에 져줘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되찾고 싶었던 건 아버지의 작품에 대한 권리일 뿐이잖아. 나는 그거면 괜찮아. 그 사람은 죄인이지만, 나머지 가족들은 앞으로도 살아가야지. 응?"
입술을 꾹 다문 설이의 머리에서 수건을 내려놓고 설이의 하얗고 보드라운 두 뺨을 손으로 감싸서 얼굴을 마주했다.
"착하지, 내 동생?"
"……."
"앞으로 아기 아빠 될 텐데, 마음 너그럽게 가져야지. 응?"
"……대신 내가 면회실 같이 들어갈래."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얼굴이기는 했지만, 나의 '아기' 운운이 효과가 있었는지 표정이 약간 풀어져서는 나를 끌어안고 겨우 허락해주었다. 절대 임신은 아닐 거라고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이럴 때에 아기 이야기를 꺼내는 스스로가 우습게 느껴졌지만, 뭐 어차피 인생이란 거친 파도 위의 돛단배 같은 거 아니겠어?
***
교도소로 옮겨간 강춘영은 그 동안 여러 일이 있었는지 얼굴이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구치소에서와 달리 수감복 색도 바뀌었고, 이제는 정말 이곳에 갇혀 있는 죄인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구치소에서 면회했을 때보다는 기가 많이 죽어 있는 표정이었다. 어쩌면 내 옆에 함께 등장한 설이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준아, 나한테 더 볼 일이 남아있니? '그거'까지 대동하고."
강춘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내 곁의 설이를 흘깃거렸다. 설이는 표정 없이 나를 지키는 기사처럼 내 옆에 우뚝 서 있을 뿐, 그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거라니, 대체 남의 동생을 무슨 취급하는 건지.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쉰 뒤에 눈을 떴다.
"한 가지 확인 할 것이 있습니다. 내 동생한테 직접 괴물이라고 말했습니까?"
"…그랬다면? 그게 중요한 일은 아니잖아."
고작 그런 일로 이 먼 교도소까지 면회를 왔느냐며 강춘영은 조롱하듯이 말했다. 일부러 자신이 여유 있는 상황이라고 허세를 부리기 위한 몸짓으로 보였다.
내가 소중하게 키워온 천사 같은 설이한테 그런 말을 했다는 것에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로 짜증났다. 하지만 내가 목소리를 키우거나 흥분하면 설이가 옆에서 걱정할 것이기에 욕을 꾹 눌러 참았다. 그리고 싸늘한 눈길로 그 남자를 쏘아봤다.
"그거, 내 동생에게 지금 정중하게 사과하세요. 그러면 합의 해줄 테니까."
"……하!"
과장되게 웃으면서 강춘영이 팔짱을 꼈다.
"이건 뭐, 소꿉장난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비싼 변호사 써서 금액 쳐 올려놓고는 이제 와서 사과하면 합의해주겠다고? 내가 그런 걸 믿을 것 같아? 그것도 저런 괴물 같은 놈 대동해서 와서는 고작 한다는 말이…… 뭐, 사과 안 하면 나 죽일 거야? 준이 너 하는 짓거리가 형제가 아니라 딱, 서방 싸고도는 마누라 격이네. 아주 한심해 죽겠구나, 그 놈이 뭐라고, 네 인생도 참……"
"저기요, 강춘영 씨."
나는 주먹을 꾹 쥐어서 뿌득, 뼈 소리가 나는 설이를 팔로 막아 저지하면서 그의 말을 급히 잘랐다. 설이가 듣는 곳에서 나를 욕하는 걸 보니 아직 설이의 성격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을 못한 모양이었다.
“욕이랍시고 마누라 운운하시는데, 저는 당신 아내 부탁이 아니었으면 여기 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당신 구제해보겠다고 아내가 그렇게 빌고 또 비는데도, 고작 당신은 그렇게 건방 떠는 것 밖에 할 생각 없다면…… 합의는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아, 알았어. 알았다고. 내가, 사과하겠네. 그런 말을 한 건… 미안하게 생각해."
그제야 다급하게 유리 벽 가까이 붙으며 강춘영이 설이 쪽을 흘깃거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그의 사과를 듣는다고 해서 상처 받은 설이 마음을 달랠 수는 없겠지만, 별장에서 눈물 섞인 목소리로 괴물이란 말에 슬퍼하던 설이를 떠올리면 내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다. 그런 나를 위해서라도 사과 받고 싶었다.
나는 내 옆에 선 설이의 손을 감싸 잡았다. 주먹을 얼마나 꾹 쥐고 있었는지, 손바닥 안쪽에 손톱 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그 자국을 살살 쓰다듬어서 깍지를 끼어 쥐면서 나는 강춘영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합의는 해줄게요. 죄값 다 치르고, 제대로 사세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우리 부모님께서 일찍 돌아가신 건, 아무 상관 없는 우리 설이 때문이 아니에요. 불의의 사고와 생활고 때문이었습니다. 그 생활고에는 당신의 배신도 일조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에게 사죄하는 마음을 잊지 말고 사세요."
못마땅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던 강춘영이 고개를 옆으로 획 돌렸다.
나는 설이에게 귓속말을 했다.
"형 곧 나갈 테니까, 차 앞 쪽으로 빼서 히터 틀어놔 줘. 나 추워."
"……알았어."
강춘영과의 면회실에 나를 혼자 두고 나간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는지 설이는 내 손을 꽉 쥐고 있다가 겨우 먼저 문 밖으로 나섰다. 둘만 남게 되자, 강춘영은 내게 급하게 말을 걸었다.
"준아, 너 쟤를 믿니? 내가 한우영이 생각해서 말하는 건데, 저거 정말 위험한 놈이다. 아마 살인도 했을 거야. 내가 장담하마!"
"……우리 아버지 이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마시고, 내 동생 모함하는 것도 그만 두세요. 우리 설이는 그런 일 안 합니다. 이미 절대 그런 적 없다고 했었고요."
"그걸 믿어?"
"당연히 믿습니다."
내 단단한 태도에 강춘영은 흥미를 잃은 듯 중얼거렸다.
“……순진하기는.”
마지막까지 비꼬는 태도였다.
“저는 설이가 말하면 뭐든 믿어요. 그게 설령 백 퍼센트 진실이 아니라고 해도, 그래도 괜찮아요.”
나는 쯧쯧 혀를 차는 그를 향해 이어 말했다.
“가족인데, 하나뿐인 동생인데, 착하고 바른 아이라서 사랑하는 건 아니잖아요. 전 그냥 설이가 좋아요.”
애초에 설이의 정체성이니 도덕성이니 그런 것에 대해 철저히 따질 것이었으면, 동생이랑 입을 맞추거나 몸을 섞는 짓도 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설이를 내보내고 나서 강춘영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혹시 석방된 이후에라도, 우리 설이가 인간이 아니라느니 하는 그런 판타지 내용 떠들어 보기만 하세요. 우리 집이 돈을 가로채간 당신 때문에 가난했고, 내가 몸이 약해서 부모님이 경황이 없어 설이 호적을 늦게 올린 걸로 증명되는 게 과연 뭘까요? 아마 허위사실로 명예훼손 혐의가 걸리겠네요. 그때에는 개인 변호사뿐만 아니라 소속사 변호사까지 참여하게 될 테니까요.”
“……준아, 너 지금 나 협박하는 거냐?”
강춘영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내게 물었고,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도 했는데 제가 못할 건 뭔데요. 저희는 이제 금전적 여유도 있고, 원한다면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당신이 다시는 거기서 못 나오게 하는 것도 가능할 거예요. 그리고, 제가 보기에는 당신이 괴물이에요.”
마지막까지 하고 싶었던 말을 하고 나자,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었다.
교도소를 빠져 나와서 설이가 온열 시트까지 따뜻하게 데워놓은 조수석에 앉아, 오랜만에 드라이브를 했다. 꽃샘추위가 시작되었지만 그래도 겨울과 다르게 바깥 풍경이 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눈이 녹으면 꽃이 핀다는 것이 새삼 실감되어서, 차창 밖을 바라보는데 배시시 웃음이 났다.
설이는 핸들을 잡지 않은 오른손으로 내 손을 꼭 쥐었다.
“형, 고마워.”
설이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나는 뭐가? 하고 물으면서 설이 쪽을 쳐다봤다. 운전을 하면서 옆모습으로 설이는 작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전부 다, 그냥 모든 게 고마워. 형.”
평온한 미소를 짓는 설이가 보기 좋았기 때문에 나도 그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설이가 미리 알아둔 수제 레몬타르트 가게에 들러서 타르트를 두 판이나 포장했다. 신맛에 대한 나의 집착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어서 몰래 인터넷에 검색해봤더니, 보통 임신 초기 입맛 변화는 사람마다 가지각색인데, 나처럼 신맛 나는 것을 먹으면 속이 개운했다는 사람이 몇몇 있었다. 아예 뭘 먹어도 메스꺼워서 식사를 제대로 못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었다. 임신 초기 사연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왠지 모르게 빠져들어서, 결국 나는 초보 맘 카페에 가입하고 말았다.
“맞다! 설이 너, 권 이사님께 사과 드려야지. 너 때문에 다칠 뻔 하셨었잖아.”
“……응.”
정말 내키지 않는 듯한 눈빛이었지만, 설이는 착하게 대답해주었다.
그 덕분에 나는 오랜만에 그루 엔터테인먼트 본사로 나들이를 가게 되었는데, 내가 없는 동안 인테리어 공사를 여러 부분에 걸쳐 했는지 본사 건물이 전보다 훨씬 더 멋있어진 것 같았다. 아마 이 공사 비용에 우리 설이가 벌어들인 돈이 꽤나 들어갔겠지, 싶은 마음으로 뿌듯해하며 복도를 걸었다.
우리가 강원도 별장에서 서울로 올라온 그 다음날, 설이는 정말로 누군가에게 부탁해서 권영도 이사님의 차를 그루 엔터 본사로 가져다 놓았다. 차 키까지 이미 권영도 매니저 쪽으로 반납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정작 차를 빌렸던 내가 인사를 하지 않으면 예의가 아닌 것 같았고, 주차장에서 일어난 사고에 대해서 제대로 사과도 해야 했다.
권영도 이사는 나를 보자 반가워하는 얼굴이었는데, 내 옆의 설이를 쳐다보면서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선배님, 그때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 다시는 그런 일 없게 하겠습니다. 진심으로 사과 드립니다.”
“……그래요, 후배님. 진심이 담긴 표정을 더 연기하는 편이 좋겠지만, 어쨌든 사과 받겠습니다.”
다시 반색하며 권영도는 부드러운 미소로 내게 말했다.
“한준 씨, 타이밍 참 잘 맞춰서 왔습니다. 방금 나도 스케줄이 다 끝났고, 제이도 하이레벨 공연 준비 끝나고 근처에 있다고 하더군요. 지난번에 셋이 함께 밥 먹기로 했던 거 오늘이 좋겠습니다. 어때요?”
“와! 제이 보고 싶었는데 잘 됐네요!”
권영도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 꼬리를 올린 채 설이 쪽을 쳐다보았다.
“한설 후배님, 괜찮죠? 후배님도 같이 넷이서 식사합시다.”
“그러자, 설아. 응?”
“……….”
거의 표정 변화가 없던 설이는 요즘 들어서 눈가를 살짝 찌푸려서 싫은 티를 내는 일이 늘었는데, 지금이 딱 악몽을 꾸는 표정이었다. 사실 요즘 집밖에서 외식을 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과 왁자지껄하게 먹어본 적이 없어서, 그런 북적거리는 분위기가 그리웠던 참이었다. 오랜만에 즐거운 회식이 될 것 같아 눈을 반짝이는 나를 바라보면서, 설이가 아주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