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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그게 가능해? (51/65)

51. 그게 가능해?

눈을 떴을 때는 별장 2층 침실이었다. 이불까지 꼭 덮은 채로 잠들어 있었는데, 아마도 나보다 먼저 깬 설이가 나를 침대로 옮겨 놓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정작 설이는 곁에 없었고, 계단 아래쪽에서 누군가가 두런두런 대화하는 말소리가 들렸다. 재빨리 일어나 내려가니, 현관 앞쪽에서 관리인과 대화 중인 설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 오셨어요?”

내 목소리에 뒤돌아보는 설이의 양 손에는 검은 비닐봉투에 담긴 묵직한 식 재료와 생고기가 랩으로 포장된 것이 들려 있었다. 내가 별장을 떠나지 않은 것을 확인한 관리인 분께서 저녁거리를 가져다 주신 모양이었다.

"그쪽은 제 동생이에요. 갑자기 다른 사람 있어서 놀라셨죠?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해요."

"아… 아녜요. 뭘 그런 걸."

왠지 모르게 관리인은 당황한 표정으로 나와 설이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어쩌면 형제가 너무 안 닮았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게 나와 다르게 설이는 미모가 눈부시고 범상치 않은 아우라가 느껴지는 아이니까.

"참, 별장 주인 어르신 전화번호는 이제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감사 인사도 드리고, 돈으로 안 받으신다면 선물이라도 좀 보내드리고 싶은데."

"아……"

관리인 분께서는 내 질문에 엉뚱하게 설이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셨다. 그러자 설이가 내 쪽을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내가 연락처 받았어. 감사 인사하고 사례도 내가 할 테니까, 형은 신경 쓰지 마."

"어, 그럴래?"

설이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관리인 분께서도 편안해진 얼굴로 만족의 미소를 지으셨다. 나는 오늘 저녁 식사 후에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전했고 관리인은 그렇게 알고 있겠다고 말한 뒤에 현관문 밖으로 나갔다.

설이는 손에 든 짐들을 식탁에 올려두고 내 쪽으로 돌아와 나를 꼭 끌어안았다. 어쩐지 설이의 품에 오랜만에 안기는 느낌이 들었다. 속 터놓고 이야기를 하고 난 뒤에 개운하게 낮잠도 좀 잤더니, 몸과 마음이 가벼워져서 그런지 행복이 절로 샘솟았다.

"그러고 보니 설이 너 그 옷은 어디서 났어?"

짧아서 팔목과 발목이 드러난 파자마가 아니라 설이는 집에서 평소에 잘 입는 스타일의 잿빛 트레이닝 복 세트를 입고 있었다. 이제는 불이 다 꺼진 벽난로 옆 흔들의자에 똑같은 색상의 트레이닝 복이 곱게 개어 있었다. 속옷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형 자는 동안 사왔어. 형 것도 있으니까 갈아입어."

"와, 안 그래도 계속 같은 옷이라 찝찝했어."

순순히 설이가 준 옷으로 갈아 입자, 포근하고 산뜻하나 기분이었다. 사이즈도 딱 맞았다. 무엇보다고 설이하고 똑같은 옷이라는 게 어쩐지 커플 옷처럼 보여서 쑥스러웠다. 고등학교 교복과 체육복 이후로 설이와 똑같은 옷을 처음 입는 것 같았다. 이걸 준비한 설이가 귀엽게 느껴졌다.

싱크대 쪽에서 내게 넓은 등을 보인 채 설이는 식 재료를 물로 씻는 중이었다.

"형 배고프지, 소고기 구워서 밥 먹자. 간단하게 된장찌개도 끓일 수 있을 것 같아."

그 얘기를 듣자마자 잊고 있던 허기가 뱃속에서 휘몰아쳤다. 꼬르륵거리는 뱃고동소리가 싱크대 물줄기를 뚫고 들릴 정도로 컸다. 설이는 피식 웃더니 비닐봉투 안에서 사과를 꺼내 과도로 금방 솜씨 좋게 껍질을 벗겨냈다. 마치 이 별장에 와본 것처럼 익숙하게 찬장을 열더니 그릇에 사과를 담아 내게 내주었다.

식탁에 앉아서 사과를 아삭아삭 씹다가 식사 준비에 열중하는 설이에게 넌지시 말했다.

"설아, 이왕이면 최민욱 형님도 불러서 같이 먹자. 주변에 계시는 것 같던데, 알지?"

‘네가 내게 경호원으로 그 사람을 붙여놓은 걸 알고 있다’는 식으로 조금쯤 놀려줄까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반응을 보니 설이는 조금도 당황한 것 같지 않았다. 프라이팬을 꺼내 인덕션 위에 올리면서 설이가 미소 걸린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마치 귀여운 꼬마를 보는 눈빛이었다.

"그 사람은 이미 돌아갔어. 내가 형 옆에 있을 때는 바로 퇴근하도록 지시했거든."

"와… 설이 너 이제 나한테 숨길 마음도 없구나?"

"이미 들켰는데, 뭘."

식탁 쪽으로 다가와 허리를 굽히며 내 머리꼭지에 쪽, 입을 맞춘 설이는 다시 팔을 걷어붙인 채 프라이팬 앞으로 돌아갔다.

살짝 익히면 되는 질 좋은 고기였기 때문에, 씻은 쌈 채소와 방금 끓은 된장찌개, 고기와 레토르트 쌀밥으로 금새 이른 저녁 상이 차려졌다. 생각해보니 점심을 건너뛰고 낮잠을 잤으니, 이렇게까지 허기가 지는 게 당연한 것이었다.

설이는 거의 먹지도 않고 내게 꾸준히 쌈을 싸서 먹였다. 다 씹어 삼키고 나면, 어느새 다시 입 앞에 동그란 상추깻잎쌈이 대기 중이었기 때문에 몇 인 분을 혼자 다 해치우는지 알 수 없는 정도였다.

"근데 너 왜 경비 일 잘하고 있는 사람을 데려가다 내 경호를 맡긴 거야? 내가 어디 나다니는 사람도 아니고, 어린 애도 아닌데."

"형, 나한테는 스토커나 극성 팬의 위협이 흔한 일이야. 그래서 야외 촬영할 때에는 소속사에서 가드들을 붙여주잖아."

설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내 입에 쌈을 밀어 넣으며 말을 이었다.

"형은 나하고 가장 밀접한 관계인 유일한 사람인데, 그런 위험이 형에게도 미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겠어. 만약의 경우를 늘 대비해야 안전한 거잖아."

"아… 그래서 블랙박스도 실시간으로 전송 확인 하는 건가."

"그렇지."

만족스러운 미소로 대답하며 설이는 내 입에 마지막 쌈을 넣었다.

식사가 끝난 뒤에는 함께 별장 안을 대강 정리하고 청소했다. 설이는 아니나 다를까 내가 손을 뻗는 곳마다 잽싸게 본인이 나서서 이불을 펴고 빨랫감을 담고 바닥을 쓸어서 나를 멀뚱히 앉아 있게 만들었다.

잊고 있었던 신 매니저님의 부탁이 떠올라서 '지금 설이와 함께 있다'고 메시지를 보내자 신 매니저님은 '헐리웃!'이라고 답장을 보내왔다.

***

"……이걸 타고 돌아가겠다고?"

차고 앞에서 설이는 싸늘한 표정으로 권영도의 차를 노려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 키를 흔들었다. 빌려서 타고 온 차니까 다시 타고 돌아가야지.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를 했지만 설이는 내 어깨를 잡아 세웠다.

"내 차 타고 가, 저건 사람 시켜서 내일 가져올게."

생각해보니 설이도 여기까지 차를 타고 왔을 것이다.

"아니면 각자 운전해서…!"

"밤 운전, 쓸쓸해."

설이는 슬프게 웃는 얼굴로 내 몸을 껴안으며 말했고, 나는 단번에 납득했다. 게다가 혼자서 멀리까지 밤 운전 하는 건 위험한 일이다. 설이는 배웅을 위해 찾아와주신 관리인에게 권영도 이사의 차 키를 맡겼다. 그리고 다른 곳에 주차해두었던 제 차를 별장 앞까지 끌고 왔다. 졸지에 귀찮은 부탁까지 관리인 분께 맡기게 된 것 같아서, 설이 차의 조수석에 타서 차창을 열고 인사를 드렸다.

"저, 불청객이었는데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너무 잘 있다가 갑니다. 꼭 사례할게요."

"아니에요. 청년이 여기 묵어준 덕에 이번 달에는 보너스도 많이 받게 됐고, 내가 오히려 감사할 판이죠."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배웅하는 관리인의 얼굴이 전에 없이 밝아 보였다.

***

서울로 돌아가는 차 안에는 설이가 나를 위해서 구비해놓은 각종 과자와 음료 캔이 그득했다. 자연스럽게 감자 칩 봉지를 뜯어 반쯤 먹어갈 때에 우리가 탄 차는 어둑한 도로를 매끄럽게 달리고 있었다. 나는 음료수로 목을 축이면서 운전하는 설이의 팔뚝을 콕 찔렀다.

"설아, 너 기쁜 소식 있다고 했던 거, 나 뭔지 알 것 같아."

차 안에 둘 뿐이지만 나는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헐리웃이지? 해외 유명 영화감독한테 제의 온 게 기쁜 소식 맞지?"

설이는 앞쪽을 보며 운전을 하면서 음? 하고 고개를 기울이더니 피식 웃었다.

"아, 그거."

별 거 아니라는 듯 심드렁한 태도였다. 내 생각에 현재 상황에서 이것보다 더 기쁘고 특별한 소식은 없을 것 같은데, 설이는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관심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설이가 말한 기쁜 소식은 이게 아니라는 얘기인데.

설이는 잠시 신호에 걸려 차를 세우고, 생각에 빠진 내 입가의 감자 칩 양념을 손수 털어내 주면서 눈을 접어 웃었다. 무척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음, 내가 말하려고 하는 기쁜 소식은… 전에 말한 또 다른 선물이랑 관련이 있는 거야."

"맞다. 생일 선물이 더 남았다고 했었지?"

설이는 고개를 크게 끄덕인 뒤에 다시 핸들을 쥐고 앞을 주시했다.

재미있는 일이라도 생각났는지, 설이는 운전하다가 조용히 혼자 웃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느냐고 묻자 설이는 수줍은 듯 뺨을 발그레하게 붉히면서 입을 열었다.

"춘글 출판사 대표에게서 아버지 작품들의 판권을 되찾아올 때, 강춘영이 당시 아버지의 담당 편집자도 맡았었기 때문에 동화의 초고와 관련 자료들을 보관하고 있어서 그걸 함께 가져올 수 있었어."

"그랬어?"

"응, 그래서 아버지가 동화를 쓰기 위해 참고했을 설화 내용을 전부 읽어봤거든. 그 안에 신의 아이, 혹은 눈의 정령이라고 말하는 존재가 인간과 짝을 이뤄 자손을 낳는 이야기가 있었어. 아버지의 작품에는 그런 내용이 없었지만 말이야."

"어…… 아버지 동화에는 꼬마가 주인공인데 벌써 짝을 이루거나 그런 내용을 쓰실 수는 없었겠지?"

설이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런데 자료 안에서 눈의 정령과 짝이 된 인간은, 남성이었다는 기록을 확인했어."

"와, 그게 가능해?"

자연스럽게 스틱 과자 봉투를 뜯어 입에 하나 물면서 물었더니, 설이는 눈꼬리를 순하게 내려 웃는 얼굴로 내 쪽을 흘깃 보며 그런가 봐, 하고 대답했다.

집에 거의 다 와가는 길을 확인하니까 긴장이 풀렸는지 몸이 노곤해졌다. 예정에 없던 이 짧은 여행이 아무래도 피곤했던 모양이다. 나는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며 설이 쪽에 물었다.

"그렇구나. 근데 그게 왜? 갑자기 그 얘기는 왜 하는 거야?"

"기뻐서."

응? 하고 설이 쪽을 돌아봤더니 주차장 안으로 진입하면서 들뜬 목소리로 답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한 무리를 이룬다는 건 기쁜 일이잖아."

"어… 뭐, 그렇긴 하지."

그냥 옛날 설화일 뿐인데 평소답지 않게 별 싱거운 얘기를 다 하네, 싶어서 나는 픽 웃었다.

***

오피스텔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우리 집의 냄새가 내 마음을 편하게 했다. 뜨거운 물로 샤워한 뒤에 젖은 머리카락을 말릴 새도 없이 나는 냉장고에서 간장게장 살을 꺼내 뜨거운 흰 쌀밥을 넣고 양푼 가득 비볐다. 각종 밑반찬도 꺼냈다. 설이에게도 먹겠느냐고 물었지만, 부엌으로 다가온 설이는 고개를 저은 뒤 마른 수건으로 내 머리카락을 말려주었다.

"형, 천천히 먹어. 꼭꼭 씹어서 먹고. 응?"

"내가 애야?"

뺨이 볼록해지도록 밥을 밀어 넣은 채 매실 장아찌를 집어 든 내가 올려다보자, 설이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미지근한 물을 유리컵 가득 떠서 내 앞에 놔주고 마주 앉아 나를 감상하듯 바라보는 설이의 눈빛을 마주보며 나는 식사를 이어나갔다.

"근데 설아, 너 신 매니저님한테서 연락 안 왔어? 계속 너 찾으시는 것 같던데."

"괜찮아."

그런 건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설이는 내 앞으로 반찬 그릇들을 더 가까이 놓아주었다.

"아니, 너 헐리웃 영화에 나올지도 모른다잖아! 싫어? 너무 부담스러워서 그래?"

"음…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 것 같아서, 그 일에 전념하고 싶어."

"뭔데? 어디 다른 유명한 작품에 또 출연하기로 했어?"

설이는 작게 웃으며 밥 먹어,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식사를 마친 뒤에 빵빵 한 배를 두드리며 소파에 길게 늘어져 있는데 설이가 따뜻한 차를 한 잔 타와서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소화를 돕고 면역 증진에 도움이 되는 허브 차라며 설국지색 눈송이 분들이 선물해준 것들 중의 하나였다.

설이는 소파 아래 바닥에 앉아서 차를 마시는 나를 올려다봤다. 나를 향한 그 눈망울이 꼭 조그마한 강아지 같아서 나도 모르게 찻잔을 내려놓은 뒤에 설이의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쓰다듬어주었다. 설이는 눈을 감고 잠시 내 손길을 즐기다가 내 손목을 낚아채 잡았다.

"형."

그리고는 수줍게 시선을 내렸다가 내게 속삭였다.

"우리 사이에 아기가 생길 것 같아."

"………응?"

지나치게 과식한 게 문제였다. 너무 먹어대서 소화 하느라 계속 졸리고, 몽롱한 기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설이가 하는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아서 이상한 얘기로 착각하고 말았다.

"미안, 잘 못 들었네. 우리 사이에 뭐가 생긴다고?"

"아기."

설이는 입 끝을 올려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더 확실할 수 없을 발음으로 ‘아기’ 라고 대답했다.

멍한 얼굴로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데, 내 아랫배로 설이의 손바닥이 와닿았다. 과식으로 인해 볼록해진 내 배 위를 설이가 조심스럽게 쓸었다.

"지금, 형 몸 안에 우리 아기가 있는 거야."

"……내 몸 안에 아기가."

"응, 형 지금 임신한 거야."

설이는 수줍은 분홍빛으로 물든 뺨으로 예쁘게 웃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무래도 요즘 신조어나 새로운 형태의 농담인 모양인데, 설이는 방송계에 있으니 그런 것을 빨리 접해서 잘 알겠지만 나는 요즘 홈쇼핑을 보는 것이 전부라서 예능 프로그램 같은 데에서 쓰는 말은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이게 재미있는 말인 건지 몰라서 웃지도 못하고 어색한 표정을 짓고 몇 초쯤 지났다.

설이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차분하게 물었다.

"형, 임신 징후 못 느꼈어?"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이유 모를 피로감이라거나 식욕 변화, 컨디션이나 수면 조절이 어려운 것 같은 기분이 들지는 않았어? 요즘 형… 전보다 많은 양을 먹고 있잖아."

"그건! 맛있는 게 많아서! 아니, 아니지. 이런 변명을 할 게 아니라… 설아,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 손을 잡으며 진정하라는 듯 손등을 차분하게 두드리며 설이가 말했다.

"샌디에고 UCLA에 남성 임신을 연구하는 팀이 있어. 출산을 도왔던 경험이 있는 교수도 있고. 몇 년 전에 인터섹슈얼로 밝혀진 한 남자가 불완전한 생식기로 임신하게 된 뉴스가 있었잖아."

"어… 그랬던 것 같기도 한데……."

"그 병원에서 안전하게 출산하도록 도왔고, 현재까지 남성 출산에 대한 연구를 계속 해오는 곳이야. 그쪽 담당 교수와 메일을 주고 받았거든. 내 정체에 대해서 전부 밝힐 수는 없었지만, 형의 임신이 의심되는 점을 꾸준히 설명했고, 그쪽에서도 검진을 진행하는 게 좋겠다고 연락이 왔어. 검사를 받아보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거야."

"자…… 장난이지?"

나는 웃음기를 담은 얼굴로 설이의 눈치를 살폈다.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설이는 내게 다정하게 물었다.

"형, 내가 이런 중요한 일로 장난을 칠 리가 있겠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 설이는 이런 장난을 칠 아이는 아니었다.

내게 생각할 시간을 주려는 듯 설이는 가만히 내 손을 잡은 채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침을 꿀꺽 삼키면서 나는 내 아랫배를 문질렀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내 신체에 특이점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남자가 임신이라니, 누구한테 말해도 웃음거리가 될 것이 뻔하다. 아무도 믿지 못할 것이다.

일단 누구보다도 이 사실을 가장 믿을 수 없는 것은 바로 나였다. 어느새 소파에 앉아 내 옆에서 허벅지를 쓸어주는 설이를 올려다 보았다.

“그… 확실한 건 아니지? 임신 아닐 수도 있잖아, 그렇지?”

“아니었으면 좋겠어?”

서운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설이는 “형도 아기 좋다고 했으면서.” 하고 투정 부르듯 중얼거렸다. 물론 그런 설이의 애교 섞인 말투나 처진 눈꼬리 같은 것이 무척이나 귀엽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지금은 설이의 매력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내가 기뻐하지 않는 것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설이의 앞에서 나는 잠시 얼음 동상이 되어 앉아 있었다.

아니, 설아. 형은 너랑 동성 연애를 하는 것도, 동생인 너랑 연애 하는 것도 큰 용기가 필요했는데, 느닷없이 남자인 내가 임신이라니. 물론 세상에 설 표범으로 모습이 변하는 우리 설이 같은 존재도 있으니, 그 이상 불가능한 건 더 없을 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도 내가 임신이라니?

“하하…! 하하하… 하아…….”

혼자 실없이 웃다가 나는 웃음을 뚝 그쳤다. 꿈도 망상도 아니고, 일단 가능성 있는 현실이었다.

멍하니 설이를 쳐다보자 내 손을 꽉 잡아주며 설이는 믿음직스러운 표정으로 내 어깨를 쓰다듬었다.

“형은 하나도 걱정할 것 없어. 출산할 때까지 내가 완벽하게 준비할 테니까.”

언제부터 생각했던 건지 설이는 내게 브리핑하듯 막힘 없이 이야기했다.

“아마 검사 후, 예정대로 된다면 아기를 낳는 것까지 그쪽 병원에 입원해서 하게 될 거야. 출국 날짜는 내 스케줄을 좀 봐야 해. 아직 조정이 잘 안 되었고, 형도 알다시피 갑자기 예정에 없이 미국 감독이 제의를 해와서 말이야. 그래도 다음 달에는 출국할 수 있도록 할게. 면세점에서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미리 알아봐둬, 형. 몸에 해로운 것 빼고는 다 사줄게.”

마치 어디 해외여행으로 놀러 가는 것처럼 쾌활하게 말하는 설이의 얼굴을 쳐다보면서도, 머릿속으로 전혀 이해가 안 돼서 나는 로봇처럼 삐그덕대며 고개를 움직여 반응했다.

그때 설이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는데, 신 매니저님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해외 병원 쪽이었던 모양이다. 설이는 반색하며 소파에서 일어나 “Hello,” 하고 전화를 받으면서 거실 반대편 쪽으로 걸어나갔다.

영어로 대화했기 때문에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었지만, 감으로 충분히 그게 내 건강 상태에 대한 보고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 내 아랫배를 두 팔로 감쌌다.

……이 안에 아기가 들어 있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동화나 판타지 소설 같은 이야기였다. 내가 소설 속 주인공도 아닌데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내가 외국 병원에서 출산까지 한다고?

아니, 잠깐. 외국 병원에 입원해야 한다면 보험 적용도 못하잖아. 그 금액 폭탄을 어쩌려고 그러지, 뉴스에서 보니까 미국 같은 곳은 치과 치료도 너무 비싸서 개인이 혼자서 이도 뽑고 그런다던데. 장기간 입원에 어쩌면 수술도 있을 텐데, 우리 집안 뿌리 뽑히는 건 아닐까.

이런 상황에서도 돈 걱정부터 하고 있는 내가 스스로도 참 답답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수가 없어서 자꾸만 생각이 다른 곳으로 샜다. 일종의 현실도피인 모양이었다.

아냐, 아닐 수도 있어. 그래, 아닐 확률이 훨씬 높지.

“…….”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빤히 내 아랫배를 내려다봤다. 내가 보기엔 과식과 과도한 당 섭취로 간식 살이 찐 것 같은데, 설이와의 민망할 정도로 뜨거웠던 밤들을 떠올리면 그게 마냥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설이는 전화를 끊고 혼란에 빠져 있는 나를 데려다가 양치를 시키고, 침대 이불 안에 넣어 토닥토닥 자장가를 불러 주었다. 남들 앞에서는 말수도 적을뿐더러 절대 노래하지 않는 설이는, 사실 엄청나게 듣기 좋은 음색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나는 특급 비상 상황이나 다름 없는 임신 의혹에도 불구하고, 밤새 고민할 수도 없이 스르르 잠들고 말았다.

잠드는 순간까지도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닐 거야, 설마. 내가 어떻게 아기를 가졌겠어.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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