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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불안하게 해서 미안해 (50/65)

50. 불안하게 해서 미안해

눈꺼풀 사이로 밝은 빛이 새어 들어와서 이미 아침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눈을 뜨면서 기지개를 폈는데, 왠지 개운한 기분이었다. 온 몸을 뜨겁게 달구던 지난 밤의 열이 다 내려갔다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었다.

베개 밑으로 무언가가 툭, 떨어져서 내려다보니 물수건이었다.

"………."

누군가가 간밤에 잠든 내 이마 위에 올려줬던 분명했다. 관리인 아저씨께서 다녀가셨던 걸까.

창 밖으로 테라스 아래를 내려다보니, 온통 새하얀 눈의 정원이 되어 있었다. 소복하게 쌓인 눈을 한참 바라보다가 휴대폰을 찾아 들었다.

설이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

별장 안의 공기는 차갑지 않은 편이었지만 파자마만 입고 있기에는 약간 추운 감이 있었다. 그래서 이곳에 올 때 입고 왔던 청바지와 후드 티셔츠를 다시 찾아 꿰어 입어야 했다.

"일어나셨군요."

"아, 네. 안녕히 주무셨어요."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벌써 훈기가 느껴졌다. 관리인 아저씨께서 언제 오셨는지 벽난로에 불을 지피고 계셨다. 식탁 위에는 식사가 포장되어 있었는데, 가까이 다가가지 않아도 고소한 냄새가 풍겨서 메뉴가 닭 요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적당한 불길을 만들어낸 관리인이 무릎을 짚으며 일어나서 통 유리창을 가리고 있던 이중 커튼의 한 겹을 쳐냈다. 그것만으로도 거실 안으로 은은한 햇살이 비쳐 들어와서 한결 따뜻한 기분이었다. 밖에 쌓인 눈밭에 반사되어서 그런지 햇볕이 더 눈부셨다.

"요즘 비수기라 문 연 가게가 몇 곳 없어요, 닭죽 괜찮으신가요?"

"네,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신경 안 써주셔도 괜찮아요… 너무 죄송해서…."

"나는 돈 받는 만큼 일하는 거니까 그러지 마세요."

관리인은 부드럽게 웃어주며 손사래를 쳤다.

"어제보다는 안색이 좋아 보이네요. 오늘 저녁에는 고기를 좀 가져다 줄까 싶은데."

"아뇨, 정말 괜찮습니다. 어쩌면 저녁에는 다시 돌아갈지도 모르고요. 제가 더 부탁드릴 게 있으면 그때 연락 드리겠습니다."

관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현관문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저기, 그런데요.”

뒤돌아보는 관리인에게 성큼 다가갔다.

“여기 주인 분 연락처는…….”

아아, 관리인은 눈가를 찌푸리며 길게 숨소리를 내더니 얼버무리듯 말했다.

“늙으니까 자꾸 깜빡 깜빡 하네요. 내가 곧 물어보고 연락 드리리다.”

어쩐지 조금 서두르는 모양새로 관리인은 현관 밖으로 떠나갔다.

***

아무래도 지난밤에 유독 식욕이 떨어졌던 것은, 두통과 미열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관리인이 나가고 난 뒤 나는 바로 식탁 앞에 앉았다. 고소한 냄새가 풍겨올 때부터 이미 군침이 돌아서 참기 힘들 정도였다. 비닐봉투 안에는 포장된 닭죽과 함께 일회용 수저와 젓가락, 그리고 작은 통에 담긴 김치와 피클이 있었다.

“……보통 닭죽 파는 가게에서 피클을 밑반찬으로 주던가?”

조금 의아했지만, 어쨌든 최근 새콤한 피클이나 장아찌 류를 즐겨 먹는 나에게는 행운이었다.

비닐 포장을 벗겨내자 닭죽은 푹 끓인 듯 뜨끈하고 빛깔이 좋았다. 나는 앞뒤 잴 것 없이 일단 한 숟가락 듬뿍 떠서 후후 불어 먹었다. 그 뒤로는 닭죽 포장 그릇이 빌 때까지 아무 기억이 없었다. 얼마나 심취해 있었는지, 약 2인분 정도였을 양의 닭죽이 다 비고 난 뒤에야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아… 진짜 맛있다. 우리 설이도 이거 좋아하……."

입을 다문 채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가라앉은 시선을 떨궜다.

어쩌면 설이는 내가 화났을 거라는 생각에 감히 내게 연락할 생각도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지도 모른다.

어찌되었건 설이는 설이니까, 무슨 짓을 했다고 하더라도 내가 옳은 방향을 제시해줘야 한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내가 설이를 책임지고 잘 돌볼 것이라고 마지막까지 믿고 계셨을 것이다.

빈 포장 용기와 비닐을 잘 정리해서 치운 뒤에 휴대폰을 찾아 들자마자, 전화가 왔다. 통화 버튼을 터치하자마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이고, 바로 받으시네요! 다행이다. 지금 댁에 계시죠?

"어… 아뇨. 저 서울에서 멀리 좀 나와 있는데, 무슨 일 있으세요?"

휴대폰 너머의 신정아 매니저는 내 대답이 의외였는지 잠시 뚝 말을 멈췄다. 나의 외출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한 반응이었다. 

하긴, 내가 거의 집에 달라붙어 있기는 했지.

- 아하, 그래서 세대 호출 버튼을 눌러도 계속 반응이 없으셨군요. 낮잠 주무시는 줄 알았는데.

"어? 매니저 님, 저희 집 앞에 계세요?"

신 매니저는 방금 전까지는 우리 오피스텔 지하주차장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곳으로 이동 중이라고 대답했다. 목소리가 초조하게 느껴졌다.

- 저기, 한설 씨가 연락이 안 돼서요.

"네?"

- 오전에 스케줄 하나 있던 걸 미뤄달라고 해서 그렇게 했는데, 그거 말고 중요한 용건이 있거든요… 하아.

계단을 오르는 듯 숨을 한 차례 길게 내신 뒤에 신 매니저는 말을 이었다.

- 헐리웃에서 활동하는 영화 감독 쪽에서 러브 콜이 왔어요. 시리즈 액션물에 한설을 캐스팅할 생각이 있다는 건데, 한 번 LA에 와서 이야기를 나눠보자고 제안 했습니다. 이건 엄청난 기회에요!

헐리웃이라니, 휴대폰을 쥔 손에 식은땀이 나는 것이 느껴졌다. 어버버 입을 벌리고 있다가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 지금 설이가 연락을 안 받는다는 거죠? 설이 아직 그 소식 모르죠?"

이번에는 빠르게 걷고 있는지 숨을 가쁘게 내쉬며 대답했다.

- 아, 아뇨. 그건 아닙니다. 한설 씨하고 아까 통화는 했어요. 이 기쁜 소식은 전했습니다. 그런데 관심 없다고 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더라고요.

답답하다는 듯이 말하는 신 매니저님의 목소리에 나는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아마 우리 설이랑 일하면서 많이 익숙해졌겠지만, 설이가 대화나 사교에 적극적인 타입은 아니었다. 그게 신 매니저님의 복장을 터지게 만든 게 아마 한두 번은 아니었을 것이다.

- 물론 지금 당장 정할 일은 아니기는 합니다. 기본적으로 올해 계획되어 있었던 한설 씨 스케줄도 있고요. 하지만 다른 일들을 다 정리하고서라도 붙잡아야 하는 기회라는 데에는 저도, 이사님들도, 대표님도 같은 의견입니다.

"그렇겠죠. 저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는데……."

- 그래서 최대한 가까운 시일 내에 한설 씨를 설득해서 그쪽 감독이랑 이야기라도 나눴으면 하거든요. 이틀 내에는 그쪽에 답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저는 지금 본사 회의 가는 중입니다. 저기, 제가 지금은 그래서 시간이 없는데, 혹시 형님께서 한설 씨랑 연락이 되시거든 설득을 좀 해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부탁 드립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속에서부터 끌어 올라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배우로서 무척이나 좋은 기회가 찾아온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설이는 지금 그런 것에 집중할 마음이 아닐 것이다. 만약 설이가 힘으로 누군가를 해치고, 그게 범죄의 한 종류가 된다면 그건 감싸줄 수 없는 일이다.

"……일단 커피라도 한 잔 해야겠다."

열이 났던 것의 여파인지, 아직 머릿속이 멍해서 제대로 생각이 돌아가지 않은 것 같았다. 관리인 분께서 챙겨주신 간식거리 중에 디카페인 캔 커피가 있었고, 별장 내에 커피포트나 캡슐 에스프레소 머신도 구비되어 있었지만 카페에서 갓 내려주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싶은 기분이었다.

상가 쪽에 문을 연 카페 하나쯤은 있을 것 같아서 관리인이 메시지로 보내준 별장 현관 비밀번호를 확인하고 문 밖으로 나섰다.

"아으, 춥긴 춥구나."

점퍼 같은 거라도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내겐 티셔츠에 겹쳐 입은 기모 후드티가 전부였기 때문에 소매 안으로 손을 집어넣고 덜덜 떨면서 정원을 걸어 나왔다. 쌓인 눈을 밟을 때마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이 기분 좋았다.

별장 담벼락 밖으로 나와서 지난밤 처음으로 주차했던 건너편 상가 쪽으로 한참 걸어갔더니 그 사이에 다행히도 자그마한 프랜차이즈 카페 하나가 문을 열었다.

손님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주문한 아메리카노는 금방 나왔다. 테이크 아웃 컵을 두 손으로 들고 따뜻한 온기에 몸을 녹이면서 한 모금 후르륵 마시고 고개를 들었을 때, 쇼윈도 창 밖으로 익숙한 사람이 급하게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어?"

잘못 봤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아메리카노를 반쯤 비웠을 때, 카페 바 안 쪽에 있던 아르바이트 생이 다가왔다.

"저기, 손님. 근처에 이사 오셨어요?"

"아… 여기 살지는 않고, 잠시 머무르는 중이에요."

유니폼과 동일한 색상의 모자를 매만지며 여학생은 수줍게 웃었다.

"너무 춥게 입고 나오신 것 같아서요. 오늘 눈도 내리고 기온 엄청 낮은데."

"네에, 갑자기 외박할 일이 생겨서 겉옷을 못 챙겼는데, 갑자기 눈이 왔네요."

신경 써주는 게 고마워서 웃으며 대답하자, 여학생이 내게 두툼하고 넓은 담요를 건넸다.

"이거 몸에 감싸고 가세요. 저희 카페 이벤트로 팔던 건데 남아서 저 두 개 갖고 있거든요. 손님 가지세요."

"어… 그러면 제가 구매를 할게요."

여학생은 두 손을 내저었다.

"이제는 판매 안 해서 판매 코드도 없고요, 제가 그냥 드리고 싶어서 드리는 거예요. 혹시… 연예인은 아니시죠?"

내 얼굴을 빤히 뜯어보면서 눈을 동그랗게 뜬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나는 눈길을 피하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당연히 연예인도 아니고 그냥 백수나 다름 없다고 대답하자, 아르바이트 생은 그러냐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내 얼굴을 한참 바라봤다.

그러고 보면 설이는 이런 식으로 수많은 사람이 쳐다보는 건데, 그 중압감을 어떻게 견딜까 싶다. 괜히 연예인해서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지는 않을까, 그래서 다른 사람을 해칠 정도로 힘을 쓰게 된 건 아닐까. 어떻게 해서든 설이를 옹호하는 쪽으로 생각하려고 하는 스스로에서 한숨을 내쉬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침 다른 손님이 카페 안에 들어와서 아르바이트 생은 다시 카페 바 안으로 돌아갔고, 나는 그 여학생에게 다시 한 번 감사 인사를 한 뒤에 그 큰 담요로 몸을 감싼 채로 카페 밖에 나왔다.

확실히 보온성이 조금 올라갔지만 여전히 덜덜 떨릴 정도로 추운 날이었다. 빨리 별장으로 돌아가서 몸을 녹이다가 별장 청소를 좀 해놔야겠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서둘렀다. 밤새 눈이 쌓여 길 위에 언 곳이 있었는지, 신발 밑창이 그 위에서 미끄러졌다.

"조심하십……!"

바로 뒷발로 지탱해서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갑자기 어딘가에서 튀어나온 남자가 내 등을 받치고 있었다. 흘깃 뒤돌아보자 그 남자는 깜짝 놀라며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역시! 내가 아까 본 게 맞았구나, 최민욱 형님 맞으시죠!"

"아…… 이름 기억하시네요."

검은 코트를 입고 깃을 세워 얼굴을 반쯤 숨기고 있던 그는, 난처해하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정체를 들켜서 포기했는지, 어떻게든 고개를 돌려 모르는 사람인 척 하려는 행동을 그만두었다.

지난 번 택배 상자를 집 안 복도까지 옮겨주면서 통성명을 했던 두 명의 젊은 경비원 분 중의 한 명이었던 최민욱 형님이었다. 게다가 그와는 그루 엔터테인먼트 비상구 계단에서도 우연히 만난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반가워서 웃음부터 나왔다.

"와, 아까 카페 안에 있다가 밖에 지나가는 사람을 봤는데 최민욱 형님이랑 너무 비슷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어떻게 여기에서……!"

나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최민욱 형님은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을 만난 것처럼 무척 난처한 듯 입술을 깨물면서 계속 한숨을 작게 내쉬고 있었다.

나는 잠시 그런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깨달은 바가 있었다.

"형님, 오늘 오피스텔 경비는?"

"아…… 쉬는 날입니다."

이 추운 날씨에 그는 식은땀이라도 흘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애써 무표정을 가장하려는 듯한 그를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던 나는, 몸을 감싼 담요를 꾹 쥐며 나 홀로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말하자면, 경호원이신 거죠?"

"아… 아닙니다…"

"저기, 민욱 형님. 쉬는 날에 무전기를 품고 다니는 사람은 없어요."

나를 도와주느라 흐트러진 코트 안쪽에 무전기가 보였다. 그는 급하게 코트를 여몄다.

그러니까 최민욱 형님은, 우리 오피스텔을 지키는 게 아니라 나를 지키는 거였구나.

그게 아니라면 두 번이나 밖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것이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한 번은 관계자 외 출입 금지를 엄격하게 지키는 그루 엔터테인먼트 본사 안에서였고, 또 지금은 뜬금없이 강원도 철원 근처였다. 나를 따라다니는 중이기 때문에 내가 갑자기 넘어질 뻔한 상황에도 바로 다가올 수 있었던 것이다.

내 추리에 할 말을 잃었는지 최민욱 형님은 대답 없이 입을 꾹 다문 채 시선을 피했다.

"설이가 고용한 겁니까? 언제부터요?"

"……제 업무와 클라이언트에 대한 정보는 밝힐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자초지종이야 어찌되었건, 바쁘게 일하는 사람을 괴롭히지는 말자는 생각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추우니까 지금 제가 묵고 있는 별장으로 같이 가세요. 거기 주인 분께서 맘 좋은 분이시라 잠시 묵고 있는데, 같이 가서 몸 좀 녹이세요."

"아, 아뇨. 저는 지내는 곳이 따로 있습니다."

그렇구나, 최민욱 형님도 나를 따라서 이 근처에 아예 하룻밤 보냈던 거구나.

그제야 나는 그의 업무가 거의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니는 것이었다는 걸 이해했다. 그게 놀랍다기보다는, 고단하시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만두 하나 먹겠다고 멀리 차 타고 달려가는 나의 한심한 경로를 추적하면서 얼마나 피곤하셨을까 하는 안쓰러운 마음이다. 내가 국가 기밀 정보를 캐고 다닌다거나 위험한 사람들을 은밀하게 만나는 직업도 아닌데, 개인 경호원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이 새삼 민망해졌다.

"저는 그러면 이만 별장으로 들어갈 테니까, 형님도 지내는 곳 들어가셔서 좀 쉬세요."

꾸벅 인사를 하자, 당황한 듯 마주 인사를 하는 그를 내버려둔 채로 나는 다시 걸음을 재촉하며 별장으로 향했다. 궁금증이 해소된 것도 좋고, 가능하면 대화를 더 나누고 싶었지만 너무 추웠고 요즘 따라 체력이 빨리 닳는 느낌이었다.

별장 정원 안으로 들어와 돌길을 걷던 나는, 중간에 멈춰 섰다. 

연락 없이 집에도 없는 설이가 지금 어디에 있을지 알 것 같았다.

"……한설, 너 거기 있지."

내 목소리와 함께 입김이 퍼져 사라졌다.

주변은 고요했다. 눈 쌓인 정원에는 따로 구비된 차고와 그 옆의 작은 창고, 돌길을 따라 세워진 나무 난간과 가든램프, 테라스가 전부였다.

작게 한숨을 내쉰 나는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설픈 콩트를 떠올렸다. 학교 다닐 때에도 축제나 연극제 같은 것에서 배우 역할은커녕 짐꾼으로 무대 설치를 도운 게 전부였었는데, 이렇게 연기할 일이 생길 줄을 꿈에도 몰랐다.

담요를 쥔 손을 이마에 올려 내 이마를 짚으며 혼잣말을 했다.

"아, 왜 이렇게 어지럽지?"

거의 로봇 수준의 발음이었지만, 연기에 재능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눈 쌓인 돌길에 털썩 주저앉듯이 쓰러졌다. 그것도 극적으로 연기해내지 못하고 어색하게 엉덩이부터 앉으며 옆으로 넘어져 눕는 수준이었다.

그때 순식간에 무언가가 차고 문밖 쪽에서 사람 키보다 훨씬 높은 담벼락을 훌쩍 뛰어넘어 정원에 착지했다. 그렇게 높은 점프를 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조용하고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내게 빠르게 달려와서 바닥에 쓰러진 내 어깨와 무릎 뒤를 받치며 나를 안아 들었다.

그러면 그렇지. 이제 설이 너에 대해서는 좀 알 것 같거든.

따뜻한 손길을 느끼며 스르르 눈을 떠서 빤히 바라보자, 나를 안아 들고 얼굴을 살피던 설이가 헉 숨을 들이마시며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쉰 뒤에 설이의 품에서 내려왔다.

"………."

우물쭈물 고개를 숙이며 제 손을 마주 꾹 쥔 채로 설이는 혼날 것을 두려워하는 아이처럼 내 앞에 서 있었다. 어제 파티에서 입었던 슈트 차림 그대로였는데, 재킷을 입지 않아서 위쪽에는 얇은 와이셔츠 차림이었다. 세팅해두었던 머리카락은 눈을 맞아서 젖었는지 잔뜩 흐트러져 있었고, 밖에 얼마나 서 있었는지 얼굴이 흰 눈보다 더 창백했다. 추위로 인해 귓바퀴와 코끝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런 설이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나는 먼저 현관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따라 들어와."

내 말에 큰 덩치로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쫄래쫄래 따라 들어오는 설이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훈훈한 별장 안으로 들어와서 나는 일단 벽난로 안에 땔감을 더 넣었다. 불쏘시개로 안쪽을 휘저어 정리한 뒤에 일어서서 뒤돌아봤다. 설이는 소파 뒤쪽 거실에 어정쩡하게 선 채로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설이 너 일단 욕실로 올라가서 따뜻한 물로 씻어. 거기 안에 포장된 파자마가 몇 벌 있는데, 너한테는 좀 작아도 어쩔 수 없으니까 그거 입고 내려와. 알았어?"

"……응."

기운 없이 순하게 대답하며 설이는 계단을 터덜터덜 올라갔다.

위층 욕실 쪽에서 샤워하는 소리가 나는 것을 확인한 뒤에 일 층으로 내려와서 레토르트 죽을 전자레인지에 데웠다. 시간이 있으면 관리인 분께서 사다 주신 닭죽 집이 어디인지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정신까지는 없었다.

잠시 뒤에 나무 계단을 내려오는 설이의 발소리가 들려서 올려다보니, 발목과 팔목이 드러나게 짧아진 남색의 파자마를 입은 설이가 어깨를 늘어뜨린 채 내 앞에 섰다. 머리카락에서 물기가 똑 똑 흘러내리고 있었다.

"……혀엉."

설이는 내 눈치를 살피면서 타월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설이를 끌고 가서 식탁 앞에 앉혔다. 플라스틱 수저를 쥐어주고 뜨끈하게 데워진 죽 그릇을 앞에 놓자 설이는 조심스럽게 그걸 떠 먹었다. 나는 설이의 등 뒤에 서서 마른 타월로 설이의 젖은 머리카락을 털어 말렸다.

어제보다는 내 화가 좀 누그러졌다고 느꼈는지 설이는 좀 더 속도를 내어 죽을 떠 먹었다.

머리카락도 거의 다 마르고 죽 그릇도 바닥을 비웠을 때, 나무 타는 소리가 들려오는 따뜻한 벽난로 앞으로 설이를 데려와 앉혔다. 소파도 있었지만 벽난로와 더 가깝게 앉아서 몸을 녹였으면 하는 마음에 바닥 카펫에 앉혔더니 설이는 나를 마주보는 자세로 앉았다.

부슬부슬 마른 까만 머리카락이 촉촉하게 젖은 눈망울을 살짝 가리고 있었다.

"설이 너 형한테 해야 할 말이 있지 않아?"

"……미안해."

"사과 말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네가 뭘 했는지 설명해야지."

차갑게 대꾸하자 설이는 시선을 내리깔고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벽난로의 불길에 설이의 조각 같은 얼굴 한 쪽이 좀 더 밝은 빛으로 감싸였다. 잠시 입술을 말아 넣었다가 눈을 깜빡 거린 설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형, 나도…… 내가 뭔지 모르겠어."

기운 없지만 차분한 목소리였다.

"나는 눈 속에 있었고, 그게 언제부터였는지 왜 거기에 있었는지, 내가 누구인지 몰라. 아버지가 나를 눈 속에서 꺼내줬고 어머니와 형을 만났어. 거기부터가 내 선명한 기억이야."

"………"

"나는 형이랑 똑같아지고 싶다고 생각했고, 그랬더니 인간의 모습이 되었어. 내가 원하면 가능한 일들이 있었어. 완벽히 자유자재는 아니지만 다시 짐승의 모습이 된다거나… 물건을 생각으로 조금 옮길 수 있는 정도의 힘이야."

설이는 설명으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들어 우리 뒤쪽의 소파를 쳐다보았다. 넓고 묵직한 가죽 소파가 어떤 힘에 이끌리듯이 단숨에 스르르 우리 쪽으로 끌려왔다.

내가 놀란 눈으로 소파와 설이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자, 설이는 내가 혹시 겁을 먹었을 까봐 불안한 듯이 까만 눈동자를 몇 번이나 깜빡이며 착한 어린 아이 같은 표정을 했다.

"이… 이런 것도 늘 되는 건 아니야. 너무 크고 무거운 건 움직일 수 없어. 예를 들면, 산이라거나."

마치 무거운 상자는 들 수 없다는 듯이 태연하게 산을 움직일 수 없다고 말하는 설이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며 나는 계속 말해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을 괴롭히거나 귀찮게 구는 사람들에게 못된 장난을 친 적은 있어. 차 문을 잠근다거나 바퀴를 살짝 비틀리게 해서 놀라게 하거나, 그런 정도의 일이었어. 가끔 지나치게 되어버리긴 했지만… 누군가를 진짜 해친 적은 없어."

설이는 고개를 들어 내 손을 꼭 쥐면서 말을 이었다.

"정말이야, 형. 사람을 죽인 적 없어. ……믿어줘."

간절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날 쳐다보던 설이의 눈빛은 길을 잃고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벽난로 앞에서도 설이의 손이 차가웠다. 나는 설이의 찬 손가락을 꾹 쥔 채로 고개 숙인 설이와 눈을 맞췄다.

"그러면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크게 다치게 한 적은 있다는 얘기야?"

"………."

설이는 대답 없이 내 눈을 바라보면서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형이… 편의점에서 일할 때, 형을 때렸던 남자."

"아."

나는 기억 속에서 그 일을 떠올렸다. 진상 손님이 나와 함께 일하는 수아 누나에게 추근대는 게 눈에 거슬려서 실랑이를 좀 벌였는데, 그때 흥분한 그 남자에게 뺨을 맞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도 맞은 만큼 때려 갚아줬고, 그 남자는 줄행랑을 쳤다.

그 뒤로 한동안 진상 손님이 편의점에 안 온다 싶었더니 교통사고를 당해서 중환자실에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설마…… 놀란 눈으로 설이를 쳐다보자, 설이는 잘게 고개를 저으며 어물어물 대답했다.

"그 남자가 형을 때렸다고 해서… 너무 화가 나서 찾아갔는데, 그 남자가 술을 먹고 운전을 하려는 걸 봤어. 처음이 아닌 것처럼 익숙하게 팩 소주를 마시면서 차에 타더라고. 내가 한 것이라고는… 와이퍼를 조금 움직인 게 전부였어. 그것도 잠시였고… 그 남자가 뭔가 짜증이 났는지 신경질적으로 핸들을 돌린 뒤에 엑셀을 밟은 거야. 술을 마시고 브레이크와 착각했나 보지. 그 순간 내가 한 건, 그 남자의 차가 들이받는 곳에 지나가던 어린 아이를 옆으로 세게 밀쳐서 피하게 만든 것뿐이었어."

"………"

"그거 말고는 정말 없어."

나는 일단 안심의 한숨을 내쉬었다. 설이의 손가락을 쥐고 있는 내 손이 미약하게 떨렸다. 잠시나마 설이가 혹시 살인이라도 했을 까봐 정말 두려웠다.

차 사고 얘기를 하니까 권영도 이사와 내가 함께 탄 차가 멋대로 사고를 낸 기억이 떠올랐지만, 그때 다친 것은 설이 뿐이었다. 솔직하게 고백하는 아이 앞에서 쓸데없는 의심은 접어두자.

나는 아까보다는 조금 편해진 표정으로 설이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너 어제 주차장에서 그거, 권영도 이사님 정말 다칠 뻔 했어.”

“미안해, 형. 잘못했어. 다신 안 그럴게.”

설이는 내 두 손을 모아 잡고 제 보드라운 뺨을 내 손등에 비비면서 반성하는 가여운 목소리로 사과했다.

“다음에 이사님께 제대로 사과 드리고, 다신 그러지 마.”

“응.”

유순하게 대답하며 내 손등에 부드러운 입술을 댄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잡힌 손을 빼내어 설이의 덜 마른 머리카락을 가만 가만 만져주자, 시선을 내린 채로 설이는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나는 어쩌면 괴물일지도 몰라. 강춘영, 그 아저씨가 그러더라.”

멈칫, 손을 댄 설이의 머리가 미미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넓은 어깨도 떨리고 있었다. 고개를 숙여 머리카락에 표정을 숨긴 설이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내가 형한테 나쁜 일만 생기게 하는 괴물이라면 어떡하지?”

울컥 뜨거운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 말도 안 되는 악담에 설이가 상처받았을 걸 생각하니 욕지거리가 나올 것 같았다.

고개 숙인 설이의 양쪽 어깨를 꾹 밀어 쥔 채로 “나 봐봐.” 하고 설이를 타일렀다. 천천히 고개를 든 설이의 눈가가 붉게 젖어 있었다. 눈을 깜빡이면 눈물이 금방이라도 흐를 것처럼 그렁그렁 맺혔다.

나는 또박또박 정확하게 말했다.

“넌 내 동생이야, 한설.”

내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난 네가 그 무엇이어도 상관 없어. 나는 설이 네가 네 행동으로 너 스스로를 위험하게 만들까 두려웠을 뿐이야. 떨어져 있는 동안 너 혼자 쓸쓸하게 해서…… 불안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두 팔로 꼭 껴안아주자 내 목덜미로 후드득 눈물이 떨어졌다. 내 어깨에 젖은 얼굴을 숨기며 설이는 한참이나 내게 안겨 있었다. 몸만 커졌을 뿐, 설이의 마음은 처음 만났을 때의 조그마한 털 짐승 그대로인 것 같이 느껴졌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넓은 등을 조심스럽게 쓸어주자 설이는 웅얼거리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음, 형에게 해줄 얘기가 더 있는데, 밤을 샜더니 피곤해…….”

“해줄 얘기? 뭐 잘못한 거야?”

설이는 눈을 반쯤 감은 채 피식 웃었다.

“아니야, 기쁜 소식인데…… 형이 날 용서해준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졸려.”

잠투정을 하듯 몸을 웅크려 내 무릎 위에 머리를 대고 눕더니, 설이는 금새 숨을 고르게 내쉬며 잠들었다. 고운 얼굴로 새근새근 잠든 설이의 얼굴을 내려다보자니 가슴 한 구석이 뭉클해졌다. 나에게 이렇게 진심으로 매달리는 설이의 마음이 고맙고 한편으로는 짠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가 곁에 없으면 혼자가 되는 것은, 설이도 마찬가지였다.

“절대 널 혼자 두지 않을게, 미안해. 내 동생.”

그렇게 한참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나도 앉은 채로 깜빡 졸았는지, 보드랍고 폭신한 느낌에 눈을 떴다.

숨을 헉 들이마시며, 벽난로 앞 불빛을 쬐며 잠든 거대한 짐승을 바라보았다. 사람 머리만 한 앞발을 내 무릎 위에 올린 채로 거대한 몸을 둥글게 말아 누운 자세였다. 고르게 숨을 내쉴 때마다 거대한 흉곽이 들썩였다. 그렇게 몸이 숨결 따라 움직이면 흰 털에 섬세한 검은 고리 무늬가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소파까지 뒤쪽으로 밀어버린 몸체는 넓은 거실을 반 이상 채웠다.

“……하하. 어지간히 마음이 놓였나 보네.”

예고 없이 눈 앞에서 보는 거대한 설 표범의 모습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지만, 그게 우리 설이라는 걸 인식하고 나서는 긴장감이 없어졌다. 까맣고 촉촉한 코 끝이며 긴 수염 끝까지 모두 사랑스러웠다. 잠든 와중에도 내가 조심스럽게 손 끝으로 털을 쓰다듬자 귀 끝이 파르르 떨렸다.

아주 어릴 때는 자주 제 긴 꼬리를 입에 문 채로 나를 쳐다보곤 했었는데, 이제 아기 설 표범 모습은 못 보겠지. 어쩐지 조금 아쉽기도 했다.

“잘 자, 내 귀여운 동생.”

폭신폭신한 설 표범의 몸체 위로 몸을 숙여 기댄 채 나도 눈을 감았다.

벽면에 걸린 아버지의 그림처럼, 나는 행복한 표정으로 설이와 낮잠에 빠져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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