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눈 내리는 별장
사람의 목숨에 관한 일이었다. 어리광을 부리거나 토라진다고 해서 얼버무리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만약 설이가 어떤 힘을 지니고 있고, 그걸 이용해서 사람을 해쳤다면 경우에 따라 죄값을 치러야 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할 말을 잃은 내게 설이가 한 걸음 더 다가왔고, 나는 본능적으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마치 설이의 손길을 피하고 싶은 것처럼 내 왼 팔을 오른쪽 손으로 감쌌다.
"형…… 내가 무서워?"
상처 받은 듯 설이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내게 더 다가오지 않고 나의 눈치를 보며 설이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주먹을 꾹 쥐었다.
"괜찮습니까."
내 어깨를 감싼 것은 권영도였다. 그가 나를 지탱해주는 것이 의지가 되었다. 나는 권영도에게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설이는 괴로운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린 채 우리 쪽을 노려 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기운 없는 목소리를 냈다.
"…이쪽으로 와, 집에 가자. 형."
나는 짧게 고개 저었다. 대답을 회피하려는 설이의 태도가 괘씸하게 느껴졌다. 내가 뭘 묻고 있는지 알면서 설이는 시선을 피했다.
"똑바로 대답해, 한설. 사람을 해쳤어?"
"………."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는 설이의 눈빛에는 어쩐지 나를 향한 원망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설이는 대답 없이 내 어깨를 감싼 권영도의 손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주제보다도, 권영도 이사와 나의 스킨십이 훨씬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듯한 태도였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가 다시 설이를 쳐다보았다.
"대답할 마음이 생기면 연락해, 그때까지 좀 떨어져서 지내자."
"형…!"
내게 다가오려는 설이를 나는 싸늘한 눈길로 뒤돌아보았다.
"왜, 힘이라도 써서 강제로 날 데려가려고?"
"……어디에 있을 건지, 그것만 알려줘. 형…."
고개를 푹 숙인 설이가 힘 없이 중얼거리며 물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경보 음을 듣고 달려온 안전 요원들이 하나 둘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일사 분란하게 움직이며 우리에게 다친 곳이 없는지에 대해서 물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그들은 짧은 질문 뒤에 우리가 이 공간을 벗어나도록 유도했다.
주차장 입구에서 빠져나갈 때까지 권영도는 어깨를 감싸 나를 부축해주었는데, 나는 그런 그의 행동을 저지하지 않았다. 아픈 곳은 없었지만 여러 충격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서 어지럽고 이마가 뜨거웠기 때문에 똑바로 걸어갈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
오피스텔 밖으로 나와 길가에서 택시를 잡기 위해 멈춰 섰을 때까지도 뒤쪽에 설이가 멀찍이 서 있음을 알았다.
"따라오지마. 한설."
"……형, 무리하면 안 돼."
안절부절 못하는 목소리로 설이는 짧게 말하고는, 더 다가오지 않고 천천히 물러섰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내 곁에 서 있는 권영도가 "한설 씨는 갔습니다" 하고 말했기 때문에 그제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일단 택시를 타고 그루 엔터테인먼트 본사로 향했다. 권영도 이사는 스케줄이 있었고, 나는 어디든 상관없이 갈 곳이 필요했다. 사무실에서 권영도는 나를 소파에 앉혀놓은 채로 몇 번이나 전화했고, 매니저와도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는 한참 뒤에 내게 다가왔다
"취소할 수 없는 스케줄이 있어서 몇 시간 자리를 비워야 하는데, 잠시 근처 호텔에서 쉬고 있을래요? 아니면 내 집에 가서…"
"아니요, 괜찮습니다. 더 이상 이사님께 폐 끼칠 수는 없어요."
"폐라……."
권영도는 숨을 훅, 내뱉은 뒤에 밝은 목소리로 내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아 나와 눈을 맞췄다.
"이렇게 합시다. 내가 한준 씨에게 차를 빌려주겠습니다. 여기 지하 2층에 내 전용 주차 구역이 있는 거 알죠? 거기에서 원하는 녀석으로 하나 골라 끌고 가세요. 어딜 가려고 해도 차는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아뇨, 하지만…"
"내가 말한 블랙박스 실시간 영상 전송 기능은, 해제가 가능합니다. 한준 씨 보는 앞에서 해제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권영도가 눈을 찡긋거리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나는 그런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미미하게 따라 웃었다. 지금은 그의 호의에 기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 유일한 친구 놈인 우정혁도 한국에 없고, 그간 설이의 차를 타고 다니거나 설이와 연관된 신 매니저님의 벤을 이용했기 때문에 나 혼자서 어딘가로 이동하려면 계속 버스나 지하철, 택시를 타야 했다. 하지만 목적지도 없는 상황에서 움직이는 차 안에 내내 앉아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다른 사람들이 없는 곳에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루 엔터 지하 주차장에서 내게 차 키를 건네주며 권영도가 내 손을 가볍게 잡았다.
"한준 씨, 난 아무것도 못 듣고 못 본 걸로 하겠습니다."
"…다치실 뻔했던 것 죄송합니다, 이사님. 제 동생 때문에…"
권영도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나 본데, 원래 상대방 때문에 다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그 정도는 굳은살이 배기면 아무것도 아니고요. 오히려 내가 상대방에게 주는 상처가 더 아프죠. 한준 씨도 지금 그래서 도망가는 거 아닙니까?"
"……감사합니다, 차는 꼭 세차해서 돌려드리겠습니다."
권영도는 제가 가장 아끼는 애마를 빌려주려고 했지만, 나는 그가 가진 유일한 국산 중형 SUV를 선택했다. 그가 지방 촬영을 갈 때에 매니저에게 빌려주고 이것저것 짐을 실어오는 심부름을 하는 차량이었다. 권영도와 함께 일하는 스텝들이 가끔 그 안에서 차박을 하는 것도 목격했었고, 그런 식으로 편하게 굴리는 차량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나로서는 그나마 부담이 적은 차를 선택했지만, 그래도 내게는 과분한 차였다. 사이드 미러로 보이는 권영도의 배웅을 받으며 조심스럽게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
아무 생각 없이 달리다 보니 이미 서울을 벗어나 있었다.
추억 속의 부모님 얼굴이 아른아른 거릴 때마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져 눈가를 닦아내며 핸들을 쥐었다.
우리 가족은 분명 가진 것 없이 가난했지만, 그래도 그 좁고 허름한 집 안에서 웃음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산에서 본 풀꽃들을 스케치해서 내게 저녁마다 보여주며 동화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어머니는 몸이 약한 내가 행여나 아버지의 모험담에 끌려 산에 오르겠다고 할까봐 아버지에게 잔소리를 퍼부으며 내게 따뜻한 차를 달게 해서 먹여주셨다.
산골에서 달리 친구가 없는 내가 동생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말하면 부모님께서는 늘 난처해 하셨는데, 어느 날 정말로 내게 거짓말처럼 동생이 생겼다. 하얀 눈 산에서 태어난 천사 같은 아이였다.
"……하아."
결국 어떤 생각을 하더라도 설이에게로 귀결되고 마는 내 머릿속 회로 때문에 생각을 비울 수가 없었다. 등 뒤에서 나를 부르며 가엾은 표정으로 멈춰 서 있던 설이의 모습이 자꾸만 눈 앞에 아른거렸다.
하지만 설이와 떨어져서 시간을 보내면서 내 마음을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어차피 설이가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그 새까만 눈망울을 마주하면, 결국 끌어안아주고 말 것이다. 그런 나라는 사람을 내가 질릴 정도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순간에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바보 같이 설이만 보면 뭐든 다 용서하고 감싸 안아주고 싶은 내 감정과 현실에서의 옳고 그른 판단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만약 설이가 누군가를 헤쳤다면, ……그게 살인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어떤 답도 내리지 못하고 내 머리는 그저 '쉬고 싶다'는 생각으로 도피하려고 할 뿐이었다.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데다가 이미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이 근처가 맞을 텐데."
차 안에서 혼자 조용히 중얼거리던 나는 불 꺼진 어둑한 상가 근처에 차를 세웠다.
우리 가족이 예전에 살던 집은 이미 없어졌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 무너져가는 초라한 집이었고, 아버지께서 생전에 열심히 이곳 저곳 보수하기는 하셨지만 강풍이 불면 어김없이 벽이 흔들려서 밤새 바람 소리에 잠 못 이룰 정도로 허술한 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던 집뿐만 아니라 주변 마을의 풍경이 전부 바뀌어 있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 어머니와 셋이 서울로 떠나올 때부터 이미 주변을 관광 도시로 바꾸는 사업이 추진되고 있었다. 레저 스포츠와 관련된 캠핑장들이 많이 생겨났고 그 덕에 마을이 전부 전에 없이 도시화되었고 꽤나 번화해졌다. 아버지께서 사고를 당하신 설산 주변은 등산 코스로 잘 정비되어 안내판이 군데군데 설치되어 있었다.
어렴풋한 기억에 따라 걷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높다란 돌담 앞에 멈춰 서게 되었다.
예전에 우리가 살던 집이 있을 법한 곳을 걸쳐서 웅장한 규모의 별장이 지어져 있었다. 하지만 별장 안쪽은 불이 전부 꺼진 것인지 캄캄했고, 벽돌로 지어진 담벼락 밖의 거대한 대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으로 와본 곳의 풍경이 완전히 변한 것도 모자라서 집이 있던 부지에 가까이 다가가 볼 수조차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그 근처에 있는 펜션에 들어가 물었더니, 펜션 주인이 고개를 저었다.
"거기는 장사하는 집이 아니야. 개인 소유에요."
아쉬운 표정으로 네,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내게 펜션 주인이 기다려 봐요,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금세 휴대폰을 가지고 나와서 전화번호 목록을 뒤져보며 중얼거렸다.
"가만 있어 보자… 작년에 보수공사 때문에 그쪽에 연락할 일이 있었거든. 거기 관리인 번호를 내가 알아요."
펜션 주인은 별장 관리인의 전화번호를 내게 알려주며, 오늘밤 묵을 곳이 없다면 2인짜리 빈 방을 싸게 해주겠다고 홍보했다. 비수기라서 손님이 빈 방이 꽤 있다는 이야기도 했다. 실제로 나는 오늘 밤에 잘 곳이 없었기 때문에 명함을 받아 들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불 꺼진 별장 앞에 선 채로, 나는 잠시 고민했다. 늦은 밤에 갑자기 찾아와서 별장 내부에 잠깐 들어가볼 수 없겠느냐는 부탁을 할 생각을 하니 민폐인데다가 염치 없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차라리 어딘가에서 하룻밤 지낸 뒤에 아침에 전화를 해볼까 싶었지만, 지금은 몸보다 마음의 위로가 더 필요했다.
통화 연결 음이 짧게 이어진 뒤에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나이 지긋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였다. 그는 본인이 그 별장의 관리인이라고 대답했다.
"갑자기 이런 부탁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만, 제가 어렸을 적에 이 별장이 지어진 곳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았었거든요. 잠깐만 문을 열어주시면 제가 안쪽 저희 집이 있던 곳 부근만 잠시 구경하고 금방 나가겠습니다. 혹시 오늘이 안 된다면, 내일 다시 연락 드릴 테니까…"
- 잠시만, 잠시만요. 그러니까 청년 말은… 지금 전화 건 청년이 부모님과 이곳에서 살았다는 얘기입니까?
"네, 그때는 제가 알기로 여기 주인 없는 빈 집이 있어서, 제 부모님께서 마을 사람들 허락을 받고 들어와서 사셨다고…"
- 청년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한준입니다."
- 음, 그래요. 그렇군요. 내가 잠시 뒤에 다시 전화하겠습니다.
별장 관리인은 조금 당황한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나는 멍하니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흰 입김이 흩어지고 있었다. 눈 앞의 별장은 정말 어마어마하게 컸다. 우정혁 네 본가는 아무래도 서울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층고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없었을 것이다. 높은 담벼락 밖으로도 높이 솟은 건물의 윗부분이 흘깃 보였다.
……부모님께서 살아계셨더라면, 지금쯤 이런 큰 저택을 지어드릴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건 전부 설이의 능력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또 다시 설이 생각이 나자 나는 눈을 감고 고개를 저어서 생각을 떨쳐 버렸다. 설이에게서는 연락이 오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에 정말 별장 관리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 내가 근처에 있는데, 아마 5분 안에 도착할 겁니다.
관리인은 운전을 하는 중인지 휴대폰 너머에서 내비게이션 안내 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나는 기다리겠다고 대답했다.
- 날이 추우니까 차 안에 계시라고… 아니, 차 안에 계세요.
"괜찮습니다."
낮에 차를 몰고 가서 만두만 먹고 집으로 돌아올 생각이었기 때문에 설이의 두터운 후드를 흰 면 티 위에 껴 입은 것이 전부였지만, 그래도 바람이 거세게 불지 않아서 견딜 만 했다. 찬 밤 기온에 귀와 코가 빨갛게 마비되는 것이 느껴졌고, 그게 오히려 정신을 맑게 도와주는 것 같았다.
곧 어두운 별장 앞 길로 헤드라이트를 비추며 누군가의 차량이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키 작은 중년 남성이었고, 아마도 나와 통화를 했던 관리인인 것 같았다. 어둠 속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자 그는 다가와서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마치 윗사람을 대하는 것 같은 그 태도에 놀라 나도 얼른 급하게 마주 고개 숙였다.
관리인은 대문 바깥 쪽의 경비 시스템을 해제하며 내 쪽에 설명했다.
"타고 오신 차량은 안에 세워두시면 됩니다. 지금 어디에 있죠?"
"아, 저 건너편 상가건물 앞에 주차했어요."
"그럼 제게 차 키를 주시면 이따가 안쪽에 주차시켜 놓겠습니다."
"아니, 저 잠시만 있다가…"
"들어오시죠."
관리인이 터치 화면을 조정하자, 거대한 대문이 느리게 끼익 소리를 내며 옆으로 접혀 열렸다. 안쪽의 넓은 정원에 하나 둘 스탠드 형 가든램프가 켜지기 시작했다. 은은하게 빛을 내는 램프들 덕분에 별장 입구로 향하는 정원의 돌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숲 속 요정의 집으로 향하는 것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였다.
관리인은 앞서 걸으면서 나를 향해 말했다.
"이틀에 한 번씩 별장 내부를 청소하고 있고, 주인 분께서 언제 오시더라도 불편 없이 이용하실 수 있게끔 관리하는 게 바로 제 일입니다."
"네에…"
“일 층 입구에 전체 보일러 전원 시스템이 있는데, 지금 바로 켜두면 30분 내에는 훈훈해질 겁니다. 벽난로도 있으니까, 바로 불을 피워 드리죠.”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센서 등이 켜져서 컴컴한 현관 내부를 비춰주었다. 관리인이 벽면의 스위치를 눌러서 거실 불을 켰고, 단번에 주변이 환해졌다. 중앙에 위치한 넓은 소파부터 커튼, 벽난로 옆의 흔들의자까지 모두 포근한 파스텔 톤으로 꾸며져 있었다. 아직 보일러가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분위기의 별장이었다.
관리인은 바로 벽난로 앞에 다가가 옆에 쌓여 있던 땔감을 넣으며 익숙하게 불을 지폈다. 인테리어용으로 구비되어 있는 전기벽난로가 아니라 정말 나무로 불을 때는 벽난로였다. 예전 우리집도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방식이었던 것이 떠올라 작게 미소 지었다.
“그 집이 있던 곳은, 여기 벽난로 앞 거실부터 계단 앞쪽까지 정도일 겁니다.”
“아……”
“처음 건물 설계 당시에 내가 여기서 공사 일을 했기 때문에 잘 압니다.”
관리인은 벽난로에 불을 지핀 뒤에 무릎을 짚고 일어나서 손을 탈탈 털었다.
이미 변해버린 낯선 곳이지만, 지난 날의 그리움을 느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깨끗하게 잘 지어진 별장 내부를 돌아보다가, 소파 뒤편 벽면에 크게 걸려 있는 액자로 시선이 향했다.
“작년까지는 여기 펜션이 있었는데, 지금 주인이 땅을 사서 별장을 지었어요.”
“이 그림은……”
“그거요, 무슨 애들 읽은 책 그리는 작가 그림입니다. 여기 주인 분이 좋아하시죠.”
작은 꽃들이 잔뜩 피어있는 둔덕 위에 두 아이가 누워서 눈을 감고 있는 그림이었다. 해맑은 두 아이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 담겨 있어서 좋은 꿈을 꾸는 것처럼 보였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이 그림은 분명, 아버지의 작품이었다.
“별장 주인 분은 지금 이쪽에 살지 않고, 어차피 비어 있는 곳이니까 청년 내키는 대로 여기 묵으라고 하더군요.”
“네? 어떻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기, 저는 다 둘러봤으니까……”
그 말에 놀라 관리인 쪽을 돌아보며 나는 허둥지둥 다시 나갈 채비를 했지만, 관리인은 보안 시스템을 눌러 확인하면서 말을 이었다.
“지하로 내려가면 와인 저장고가 있고 통조림 류도 꽤 있어서 마음대로 드셔도 됩니다만, 식사 거리는 없을 겁니다.”
내게로 다가온 관리인은 잠시 쉬고 계세요, 하고 말하며 내가 손에 쥐고 있던 차 키를 자연스럽게 가져갔다. 내 의사와 상관 없이 나를 이 별장 주인의 손님으로 대하는 태도였다.
나 혼자 남은 별장 소파 위에 덩그러니 앉아서, 오늘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가만히 떠올려보고 있으려니 두통이 느껴졌다. 약간 허기가 진 것도 같았지만, 뭔가를 먹을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을 때에 현관문이 열리면서 비닐봉투를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가 잔뜩 든 비닐봉투를 건네면서 관리인은 가져갔던 차 키도 다시 돌려주었다.
“타고 오신 차는 안쪽에 주차시켜 놨습니다. 대문 옆으로 자동 차고 문이 있는데, 나갈 때는 바로 시스템이 감지되어 문이 열릴 겁니다.”
“아, 감사합니다.”
“귀한 손님으로 모시라는 주인 분 부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편히 계시고, 모르는 건 아까 그 번호로 저한테 편하게 물으시면 됩니다. 밤 늦게까지 하는 가게들은 꽤 거리가 있어서…… 더 필요한 게 있으면 나가지 마시고 연락주세요. 몸이 안 좋아 보이네요. 그 안에… 약도 드리라고 해서.”
그럼, 하고 꾸벅 인사를 하며 나가려는 관리인을 붙잡았다.
“여기 주인 분께 제가 따로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 전화번호라도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관리인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더니, 고개를 들었다.
“번호를 알려드려도 되는지 여쭤보고, 내일 말씀드릴 테니까 오늘은 쉬세요. 벌써 자정이 넘었습니다.”
“아… 네, 그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관리인이 떠나고 난 뒤에 또 다시 혼자 남아 소파에 털썩 앉았다가, 건네 받은 비닐봉투를 열어보았다.
바로 먹을 수 있도록 포장된 따끈한 국밥과 레토르트 죽, 라면 등 먹을 것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약 상자가 함께 들어 있었는데, 무심코 꺼내보니 ‘임산부에게도 안전한 해열진통제’라고 적혀 있었다.
그제야 이마를 짚어보았다. 구치소에 갔을 때부터의 미열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춥지 않고 오히려 약간 더운 듯 하면서도 몸이 으슬으슬 떨린다고 생각했더니 약간 감기 몸살 기운이 들었던 모양이다.
관리인의 말처럼 보일러가 들어오고 벽난로에 불이 지펴지자, 금새 공기가 훈훈해졌다.
“……뭐라도 좀 먹을까.”
그다지 내키지 않았지만, 일부러 나를 위해 사다 주신 건데 식으면 아깝다는 생각에 국밥 포장을 뜯었다.
부엌의 식탁이 익숙했다. 나와 설이가 함께 살고 있는 오피스텔과 같은 모델에 같은 색상이었기 때문에 혼자 식탁 앞에 앉자, 설이 생각이 났다. 혼자서 밥은 챙겨 먹었을지, 지금쯤 뭘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지만, 마음 약해져서 연락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휴대폰 화면을 뒤집어 식탁에 올려두었다.
몇 숟가락 뜨지 못하고 국밥을 거의 남겼다. 생수를 뜯어서 진통제를 한 알 겨우 넘기고 나서 식사는 끝마쳤다. 그렇게 왕성했던 식욕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계단을 오르자 2층에도 거실이 있었고, 침실 두 곳과 욕실이 구비되어 있었다. 3층에는 빈 방과 함께 서재 같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침실 침대는 깨끗하고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관리인의 말처럼 언제라도 주인이 와서 쉴 수 있게 마련되어 있었다.
‘준아, 네 부모가 왜 단명했다고 생각하니.’
강춘영의 목소리가 악마처럼 낄낄거리는 소리로 변해서 내 귓가에 이명처럼 울렸다. 눈을 질끈 감으며 이마를 감쌌는데, 뜨끈한 미열이 아직도 느껴졌다.
“술이라도 한잔 할까.”
관리인 말로는 지하로 내려가면 와인 저장고가 있다고 했다. 지하 창고의 통조림 류도 마음대로 먹어도 된다고 했으니, 와인 한 병 정도는 마셔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 한 발 내디뎠을 때, 뱃속이 따끔거렸다.
그렇게 과식을 해도 소화가 잘만 됐었는데, 갑자기 술을 마시려는 생각을 하자마자 따끔거리는 것이 의아했다.
“……신경성 위염인가.”
아랫배를 손바닥으로 감싸자, 그 통증은 금세 멎었다. 하지만 이미 술을 마실 생각은 사라져 있었다.
몸도 나른했고, 씻고 일찍 자자는 생각에 욕실로 들어갔다. 외박할 예정이 없었기 때문에 따로 챙겨온 옷이 없어서 씻고 나면 이대로 원래 입었던 옷을 다시 입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욕실에는 바스 가운과 함께 비닐 포장된 파자마가 놓여 있었다.
뜨거운 물로 씻고 나서 다시 냄새 나는 옷을 입고 싶지 않은 마음에, 파자마를 뜯어서 입었는데 신기할 정도로 내게 딱 맞은 사이즈였다. 아마도 이 별장의 주인은 나와 덩치가 비슷한 모양이었다. 하물며 우리 집에도 가지고 있는 브랜드의 파자마여서 마치 내 것을 입은 것 같은 편안함을 주었다.
2층 테라스로 나가서 찬 바람을 맞았다.
어둠이 깔린 밤하늘에는 희미하게 별이 보였지만, 예전처럼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
휴대폰을 내려다보니, 설이에게서는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권영도 이사에게서 안부를 묻는 메시지가 와 있었는데, 걱정할 것 같아서 가까운 시일 내에 차를 돌려드리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침실의 낮은 조명만 켜둔 채로 건물 안의 모든 조명을 끄고 벽난로의 불도 꺼버리자, 이 넓은 별장 안에 나 혼자라는 것이 어쩐지 쓸쓸하게 느껴졌다. 염치 없지만, 관리인 분이라도 같이 있어달라고 부탁하는 게 나을 뻔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예전 이 집에서는 가족과 늘 함께 잠들었고, 지금도 내 곁에는 늘 설이가 있었다. 이제 설이가 없으면, 나는 이 세상에 이렇게 혼자가 되는 것이라는 사실이 더욱 뼈저리게 느껴졌다.
“……잘 자, 설아.”
눈을 감고 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잠든 새벽 사이에 열이 많이 올라서 몸이 오들오들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이불 안에 폭 싸여 몸을 옹송그린 채로 나는 이를 악물고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헤매고 있었다. 몸이 아파서 마음이 약해졌는지, 아니면 마음이 약해져서 몸이 아파진 건지 모르겠지만 갑작스레 어머니 생각이 났고, 꿈결 속에서 나는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현실에서도 눈물이 뜨겁게 눈가를 적셨고, 누군가의 차가운 손가락이 내 눈가를 닦아냈다.
쉬이, 괜찮아. 울지마.
나를 달래는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았는데 어쩌면 그것마저 꿈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이마에 찬 물수건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미지근한 물수건으로 내 목덜미와 몸을 닦아내는 조심스러운 손길도 느껴졌다.
그러나 희미하게 눈을 떴을 때, 내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새벽 내내 폭설이 내려 커튼이 반쯤 쳐진 창문 밖으로 소복소복 눈이 쌓이는 것이 달빛에 희미하게 비쳐 보였다. 그리고 밖을 맴도는 짐승의 발소리 같은 것을 들으면서 나는 스르르 잠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