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축복과 불행
"준아, 와줬구나."
불쾌하게도 그 남자는 나를 친근하게 불렀다.
유리 벽 너머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그 얼굴은, 세월 때문인지 기억보다 훨씬 말랐고 초췌해져 있었다. 아버지 장례식장에 찾아왔을 때만 해도 번듯한 양복을 차려 입고 있었는데, 이제는 수감자 복장을 입은 초라한 모습이다.
안경을 코 위로 추겨 올리며 남자는 내게 의자에 어서 앉으라며 권했다.
"……짧게 얘기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넌 정말 우영이를 닮았구나. 커갈수록 더 똑같이 생겼어."
그는 내 말 따위는 들리지 않는 것처럼 두꺼운 유리판 너머의 내 얼굴을 빤히 관찰하듯 바라봤다. 날 보면서 혼자 아버지와의 과거를 미화시켜 추억하는 것 같은 그 눈빛이 기분 나빠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면회는 10분 정도 가능하다고 했지만, 나는 1분도 이 남자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설이의 체취가 남아 있는 후드 소매를 꾹 쥔 채 억지로 의자에 앉았다. 강춘영은 그제야 자신도 반대편 의자에 앉았다.
"그래도 우영이가 세상 떠나기 전에 제 아들을 남길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냐. 한우영이 그 놈이 천애고아나 마찬가지로 자라서, 제 가족을 그렇게 끔찍이 아꼈는데 말이야. 그러고 보면, 우영이 놈이…"
"본론만 얘기하시죠."
그는 웃음기를 지우고, 입을 꾹 다문 채로 나를 무표정하게 쳐다보더니 픽 웃었다. 그리고는 한탄하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피차 바쁜데 그렇게 하자.”
“…….”
“그, 너도 알겠지만, 뭐 의도야 어찌되었건 내가 지금 사기죄로 재판을 좀 받는 중인데… 사업자금 문제로 현재 잠깐 경제사정이 좋지 않아서 말이야, 다른 쪽이야 생판 남이라 쳐도 너는 내 친구 놈 자식 아니니? 그… 일부 변상으로 합의 좀 해줘라. 탈세로 오해 받아서 지금 강제징수에 공탁까지 해야 할 지 모르고… 이 아저씨 상황이 좀 그래.”
뻔뻔하게도 나를 친구 아들쯤으로 생각하며 변명을 늘어놓는 그의 모습이 한심하고 기분 나빠서 시선을 피했다.
"그런 문제는 변호사 통해서 제 동생에게 이야기 하세요."
"야, 준아. 그 놈이랑 무슨 얘기가 되겠니? 그 놈은 막말로 우영이 자식도 아니고, ……사람새끼도 아닌데."
강춘영은 내 놀란 얼굴을, 재미있다는 듯이 팔짱을 낀 채 바라보며 히죽히죽 웃었다. 동요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내 시선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내 쪽으로 좀 더 가까이 유리판에 얼굴을 댄 채로 입을 열었다.
"난 말이다, 네 생각보다 우영이랑 친했어. 그래서 한우영 그 바보 같은 놈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안다. 준이 네가 모르는 것도 말이야."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남자는 여유롭게 목을 꺾으며 어깨를 주물렀다. 내게 뭔가 중요한 것을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나를 놀리고 있었다. 잔뜩 욕해주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무릎 위의 주먹을 꾹 쥐었다. 감시 중인 교도관은 없지만 모든 것이 녹음 기록 중이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강춘영이 은밀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마지막 작품을 쓰기 전에, 강원도 그 산골에서 출판사로 찾아온 한우영이 그랬지. 산에 올랐다가 아주 예쁜 꽃을 봤다고 말이야. 새파란 꽃이 눈 덮인 산에 홀로 피어있는 게, 참 신묘해 보였다고."
……꽃? 그게 어쨌다는 거지, 생각하다가 문득 나도 비슷한 꿈을 꿨던 기억을 떠올렸다. 설이와 밤을 보낸 뒤에 꿨던 꿈이었다. 나는 그 꿈속에서 꽃이 너무 예뻐서 설이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멋대로 꽃을 꺾었었다.
"그 꽃이 왠지 좋은 영감을 준다면서, 희귀한 풀꽃에 대한 자료를 찾아달라기에 내가 도왔었지. 다음 번에 그 꽃의 사진이라도 찍어두고 싶어서 다시 산에 올랐을 때는, 어딘지 찾을 수 없었다고 했었던가? 아무튼 그 후에도 한우영은 자주 산에 오르면서 그 지역 설화에 대한 자료도 꽤나 심취해서 찾더구나. 여러 지역에 전설로 내려 오는… 왜, 호랑이 전설이나 여우 설화 같은, 뭐 그런 것 말이다."
"…그래서요, 그게 뭐 어쨌다는 겁니까."
"나도 우영이 놈에게 관련 자료 찾아주면서, 신비로운 옛날 이야기 따위에 꽤 빠져 있었단 말이지. 신빙성은 없지만 꽤나 동화 같은 전설들이 많았거든. 한우영이는 그런 참고 자료를 공부하면서 작품을 완성했지. 그 뒤에 얼마 안 있어서, 그 놈이 자신에게 둘째 아들이 태어났다는 말을 했어. 나는 몰랐는데, 재수씨가 한참 전부터 임신 상태였던 모양이지?"
그는 내게 눈을 찡긋거리며 웃었다. 나는 입술을 짓깨물었다.
"나는 비밀을 알아."
표정을 바꾼 강춘영이 유리판을 손바닥으로 짚었다.
"우리가 찾던 자료 중에 그런 게 있었지, 철원 향토 민담과 티베트, 시베리아에 비슷하게 남아 있는 구술 문학 속 내용이었는데, 겨울 산 벼랑 끝에 피는 새파란 꽃에 관련된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였어."
나도 모르게 남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모든 설화는 공통적으로 '신께서 아이를 포태하시면, 눈 속에 푸른 꽃이 핀다', 그렇게 말하고 있었어. 물론 그 존재는 산신령이거나 눈꽃의 정령, 겨울 신으로 각자 모습이 달랐지만, 결국 신의 아이가 태어난다는 뜻은 동일하지."
"……신의 아이."
"그래. 구술로 전해 내려와서 분명하지야 않겠지만, 대부분 신의 아이를 네 발 달린 털 짐승의 모습으로 구사하고 있었지. 물론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된 자료들도 있었어. 어린 소녀나, 아주 훤칠한 청년으로 말이야."
"그게… 뭐… 우리 가족이랑은 상관 없습니다. 어차피… 허구의 이야기잖아요."
강춘영은 내 말에 입 끝을 비틀어 올려 웃었다.
"허구라고? 준아, 주변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던 적은 없니? 갑자기 누가 사고를 당했다거나, 마치 짠 것처럼 외부에서의 알 수 없는 힘으로 무거운 물건이나 차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거나 움직여 사람이 다친다거나 하는… 인간이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 말이야."
"……그런 건 우연이니까."
"우연? 하하! 얘야, 사람의 예감이라는 건 생각보다 무척 정확하단다. 너도 아마 가끔은 이상하다고 느꼈을 거다. 네가 동생이라고 여기는 그 녀석과 있을 때면 남에게는 말할 수 없는, 혹은 남들이 절대 믿을 리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 말이야. 그런 적 있지?"
나는 입을 다문 채 그의 말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속셈대로 따라줄 마음은 없었다.
아마도 강춘영은 설이가 설 표범의 모습으로 변한다거나 귀와 꼬리가 생겨나는 것은 모르는 것 같았다. 그 사실을 알았다면 벌써 그걸 자료와 연관 지으며 지금 내게 협박하고도 남았을 테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에게는 설이의 존재를 증명할 아무런 증거도 없으니까.
나는 시치미를 때며 고개를 쳐들었다.
"그런 적 없습니다. 그리고 자꾸 이상한 상상으로 제 동생을 모함하려고 하시는 것 같은데, 설이는 제 친동생이 맞아요. 어릴 적 강원도에서 태어났고요. 쓸데없는 애기 하실 거면…"
"하하! 준아. 호적상 너희는 연년생인데, 한우영이 '둘째 아들이 태어났다'고 말했을 때는 이미 네가 태어나고도 한참이 지난 뒤였어. 그 부부가 속도위반으로 혼인신고부터 했었다는 건, 친구인 내가 가장 잘 아는 사실이야. 네가 생각해도 이미 모순이 느껴지지 않니? 응?"
"그건……."
당황한 내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강춘영이 악마처럼 눈을 번뜩였다.
"……준아, 네 부모가 왜 단명했다고 생각하니."
남자는 자상한 목소리를 꾸며냈다.
"어른으로서, 그리고 연구자로서 충고하자면, 자연에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된단다. 모든 것은 신의 소유니까 말이야. 물론 신의 것은 아름답고 탐나겠지만, 큰 축복에는 더 큰 불행이 그림자처럼 뒤따른다는 것을 알아야지."
"무슨……"
"한우영은… 네 아버지는, 꺾어서는 안 될 꽃을 꺾은 거야. 산신의 아기를 훔쳐왔으니 당연히 온 산의 분노를 사는 게 아니겠니? 신의 가호를 받는 그 겨울 산에서 갑작스러운 실족사라니… 뒤따라서 건강하던 재수씨도 일찍이 떠나게 되어버리고… 그게 다 그 괴물 때문인 거다. 인간들 사이에 있으면 안 되는 게 끼어들어서 사니까 불행이 닥치는 거란다. 그 괴물이 갑자기 내 잘되던 사업도 파헤쳐서 엉망이 됐어! 도망가던 차가 갑자기 벽을 치받고 문이 잠겼다. 한설, 전부 그 괴물 놈이 한 짓이야! 난 알아!"
"………하."
황당해서 웃음이 다 났다. 얼마나 어이가 없는지, 웃음과 함께 눈물도 쏟아졌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떨리는 주먹을 꾹 쥐었다. 의자가 뒤쪽으로 쓰러지며 굉음을 냈다. 유리 벽을 깨고 넘어가 그를 마구잡이로 때리고 패고 싶은 충동을 참아내기 힘들었다.
"괴물…? 당신 눈에는 내 동생이 괴물로 보여?"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고 이가 갈려서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폭설이 쏟아지던 그날, 아버지가 산에서 데려온 조그마한 털 동물은 추위에 옹송그린 채 떨고 있었다. 귀도 꼬리도 모두 조그마하고 연약했다. 사랑스럽게 웃는 눈동자와 순한 웃음소리, 나를 따르는 조그마한 아이. 내 손을 잡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가락, 형아 하고 부르는 그 목소리. 그 모든 것이 기적 같은 일이었다.
"나에게는 천사야."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뺨을 적셨다.
“불행을 몰고 온다고? ……웃기지 마, 그 아이는 내 전부야."
그러나 강춘영은 내 눈물을 비웃었다.
"준아, 잘 생각해봐라. 오래 이어져 온 전설에는 저주와 같은 힘이 있어, 내가 그 이야기의 판권을 가져오지 않았더라면, 너도 죽었을지 모른다. 그 애가 괴물이 아닌 건 맞을까? 어쩌면 부모님과 평생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수도 있었을 텐데, 너희 가족에게 불쑥 그게 끼어들어서 네 인생을 불행으로 몰아간 게 아닐까? 그 괴물 새끼가 사실은 네 전부를 빼앗지는 않았는지 판단해봐. 진실이라는 건 원래 아픈 법이란다. 준아, 널 고아로 만든 게 과연 누굴까?"
"닥쳐요… 닥쳐! 닥치라고요, 제발…! 그만……, 다시는… 당신하고 만날 일 없을 겁니다."
“쯧! 바보 같이, 인간도 아닌 걸 그렇게 감싸봤자 뭐 득 볼 게 있다고. 아비나 자식이나.”
“…….”
노려보는 시선에 남자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인상을 찌푸리다가 먼저 뒤돌아 서서 안쪽 문을 열고 떠나버렸다.
접견실을 빠져나올 때는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있었다. 얼마나 울었던지 목 안쪽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이마에서 미열도 느껴졌다. 교도관 한 명이 내게 다가오더니, 바깥 대기실에 잠깐 앉아서 쉬었다가 가라고 했지만 나는 기운 없이 고개를 저었다.
***
건물 밖으로 나와서 길에 대 놓은 차를 향해 걷다가 무릎에 힘이 빠졌다. 휘청거리면서 넘어질 뻔 했을 때, 누군가가 나를 부축해주었다. 멍한 상태로 뒤늦게야 고개를 들었다. 햇살을 등진 채 나를 일으켜 세우는 남자의 얼굴이 희뿌옇게 번져 보였다.
"괜찮습니까?"
익숙한 얼굴을 보자, 몸에 힘이 탁 풀려버렸다. 그대로 내가 바닥에 주저앉자, 권영도는 놀란 얼굴로 내 팔을 잡으며 아스팔트 바닥에 몸을 숙여 앉았다. 시선의 높이를 맞춰서 내 얼굴을 잡아 제 쪽으로 돌렸다. 초점이 맞지 않는 시선에 그의 얼굴이 들어왔다. 권영도가 놀란 눈빛으로 내 얼굴을 살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어디 아픈 거예요?"
"왜… 여기에……"
"촬영 중이라고 했잖습니까. 이 주변 연구소에서… 그보다 대체 뭡니까, 왜 혼자 여기에 있는 거예요?"
내가 지나왔던 횡단보도 건너편의 구치소 건물을 흘깃 올려다본 권영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를 더 물어보려다가 고민하는 듯 했다. 대답할 힘을 잃은 채 황망한 마음으로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일어납시다. 다리에 힘을 줘봐요.”
권영도는 나를 일으켜 세워 몇 걸음 걷게 했다. 내가 차를 주차해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권영도의 벤이 서 있었다.
그는 나를 벤으로 데려갔다. 운전석에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던 로드 매니저 김형은 나를 돌아보며 반색했다.
"어? 진짜 맞았네. 달리는 차 안에서 바로 알아보다니, 영도 형님 시력 좋으시네요. 준군, 여기 웬일이에요?"
내 표정이 안 되어 보였는지 반갑게 말을 걸었던 김형이 조용해졌다. 권영도는 나를 좌석에 앉히고는 뒤쪽에서 생수를 꺼내 건넸다.
"한준 씨. 얼굴에 핏기가 없어요, 어디 아픈 것 같은데 병원으로 갈래요?"
생수를 손에 그냥 쥔 채로 나는 권영도를 향해 미미하게 웃어 보였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보다… 촬영 중이신데 그만 가보셔야죠."
"연구원 역할 때문에 자문 얻으러 온 건데,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권영도는 내가 들고만 있던 생수 병을 빼앗아 뚜껑을 열어 다시 내게 건넸다. 입술에 대고 조금 마시려는데 손이 부들 부들 떨려서 턱으로 물이 흘렀다. 김형이 건넨 티슈 곽에서 티슈를 잔뜩 뽑은 권영도가 내 목과 턱으로 흐른 물기를 닦아주었다.
"밥은 너 혼자 먹어야겠다. 내가 이따가 시간 맞춰서 본사로 갈 테니까, 너 먼저 가 있어."
권영도는 나를 데리고 벤에서 내리면서 김형에게 그렇게 일렀다. 상황이 안 좋다고 생각했는지 김형은 질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 키 줘요. 집까지 데려다 줄 테니까."
벤이 떠나간 뒤, 길가에 세워진 설이의 람보르기니를 알아본 권영도가 내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가만히 그의 손바닥을 쳐다보고만 있다가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어 건넸다. 아무래도 지금 내 상태로 운전했다가는 사고를 낼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조수석에 앉아서 안전벨트를 두 손으로 쥔 채로 멍하니 내 무릎만 내려다보았다. 권영도는 말 없이 운전만 했다.
톨게이트를 지나 서울로 빠져 나왔을 때쯤 권영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한설 씨 일이죠, 동생 때문이 아니라면 이런 얼굴 할 리가 없으니까."
"……."
"뭔데 그래요."
주머니에서 꺼낸 휴대폰을 의미 없이 만지작거리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아직 휴대폰 전원을 켜지 않은 상태였다. 설이에게서 분명 연락이 여러 차례 와 있을 테지만, 그걸 확인하고 설이와 이야기를 나눌 준비는 안 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사님."
"네."
"그런 생각해본 적 있으세요? 자신이… 소름 끼칠 만큼 이기적인 것 같다는 생각."
내 말에 권영도는 운전을 이어나가면서 시선이 앞을 향한 채로 작게 웃었다. 그리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달래듯 대답했다.
"한준 씨, 사람은 원래 이기적인 겁니다. 그건 때에 따라서 당연한 거고, 본능 같은 거잖습니까."
나는 길게 숨을 내쉬면서 눈을 감았다.
가슴 속 한 구석이 뻥 뚫린 것 같은 상실감이 느껴졌다. 내게 충격을 주고 어떻게든 내 마음을 흔들어서 제 이익을 챙기려고 하는 그 남자의 악질적인 행동 때문이 아니라,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오늘은 어머니께서 절 낳느라 고생하셨던 날이거든요."
"그렇죠, 한준 씨 생일이잖아요."
권영도는 차가 멈출 때마다 흘깃거리며 내 안색을 살폈다. 나는 딱딱한 휴대폰 모서리를 손가락 지문으로 꾹꾹 누르면서 애써 마음을 추스르려고 노력했지만, 목소리는 자꾸만 흔들려서 나왔다.
"어머니께 죄송한 마음이 들어요."
고맙게도 권영도는 더 묻지 않았다.
강춘영은 내 부모님이 설이의 존재 때문에 죽게 된 거라는 말을 했다. 저주였고 악담이었다. 그건 내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괴롭히는 말이었다. 악질적인 모함을 믿을 마음은 추호도 없었지만,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나는 도저히 설이를 괴물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신의 아이인 설이를 신에게서 훔쳐온 이유로 아버지가 벌을 받아 생명을 잃었고, 설이를 가족으로 여겨 데리고 산 죄로 어머니마저 신에게 생명을 빼앗겨야 했다고 하더라도, 나는 설이를 미워할 수 없다. 결국 내 목숨까지 내놓아야만 하는 운명이라면, 그게 설이를 아끼고 사랑하는 대가라면, 스스로를 버려야 한다고 해도 설이를 놓을 수는 없었다.
한설은 내 동생이고, 내 연인이고, 내 것이다.
이 단단하고 확고한 마음이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보다도 훨씬 우위에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설이를 향한 내 마음이 이렇게도 이기적인 것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힘들어서 혼란스러웠다.
***
나와 설이가 함께 사는 오피스텔 주차장으로 진입할 때쯤에야, 나는 휴대폰 전원을 켰다.
설이에게서는 단 한 통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그 외는 메시지도 전혀 남기지 않았다. 몇 시간 동안 휴대폰을 꺼 놨었는데도 설이에게서 이렇게 연락이 없다는 것이 의아했다.
권영도는 내 쪽을 흘깃 보더니 말했다.
"한준 씨 동생은 아마 지금 우리가 여기 도착했다는 것을 알 겁니다."
"네? …어떻게요?"
권영도는 빈 자리에 주차를 한 뒤에 시동을 껐다. 그리고는 위쪽을 향해 턱짓했다.
"블랙박스 말입니다. 아까부터 구석 부분의 파란 불빛이 깜빡 거리고 있잖아요. 이건 실시간으로 위치와 화면이 전송 가능한 모델입니다. 내 개인 차량도 비슷한 걸 달아뒀거든요. 아마 이 모델은 차 안쪽 녹음까지 실시간 전송 가능할 겁니다."
"아……"
"괜히 나 때문에 두 사람 싸우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한준 씨 짝사랑하는 게 심히 마음에 안 드는 것 같던데."
권영도는 그의 ‘짝사랑’이라는 단어 선택에 난처해하는 나를 보더니 어서 내리자고 웃으며 내 안전 벨트를 풀어주었다. 내가 오피스텔로 올라가는 것을 확인한 뒤에 택시를 타고 돌아가겠다는 권영도에게 미안한 마음이 커졌다. 권영도는 유쾌하게 말했다.
"대리운전해준 게 내가 한준 씨에게 주는 생일선물입니다. 그러면 미안해할 것도 없는 거죠?"
"아뇨, 그래도 미안하고 감사합니다."
"괜찮습니다. 이런 때면 내가 좋은 남자인 걸 확인할 수 있어서 기분이 꽤 괜찮거든요."
차에서 내려서 내게 차 키를 다시 건네주면서 권영도가 씨익 웃었다. 그가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고 일부러 더 장난스럽게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에게 마주 웃어 보인 뒤에 우리는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가 있는 입구 쪽을 향해 걸어갔다.
권영도 이사가 나보다 두어 발자국 앞쪽에서 걸었고, 나는 그를 따라서 느리게 걸어가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권영도에게 차를 빌려주고 다음에 돌려받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니저 김형과 이야기할 때 본사로 돌아간다고 했던 것을 보면 다음 스케줄이 남은 것 같았고, 번거롭게 길에서 택시를 잡아타게 만들 걸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했다.
비록 내 것이 아니라 설이의 차이지만, 그래도 설에게도 사정을 설명하면 될 것이었다. 권영도 이사에게 차 키를 건네주기 위해서 그를 불렀을 때였다.
"저기! 이사님."
내 부름에 뒤돌아보며 자리에 멈춘 권영도의 앞으로 단번에 콰광! 하는 굉음과 함께 지하주차장 천장 덕트에 매달려 있던 와이어웨이 조명이 떨어졌다. 기다린 조명 한 줄이 단 번에 떨어지자 천장재와 함께 먼지가 무릎까지 뿌옇게 흐트러졌다가 가라앉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돌처럼 굳는 나와 권영도는, 천천히 천장과 바닥을 바라보며 숨을 골랐다. 만약 내가 바로 직전에 권영도를 불러서 그가 멈춰 서지 않았더라면, 정확히 권영도의 머리 위로 조명 구조물이 떨어질 뻔 했다.
만약 지진이나 건물 내의 공사 문제였더라면 어떤 진동도 없이 딱 그 한 줄의 조명만 떨어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안정성 검사를 철저하게 하고 있는 곳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경보 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괘, 괜찮으세요?"
"아…… 네. 다친 곳은 없습니다. 놀라기는 했지만."
가슴을 쓸어 내리는 순간,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엘리베이터 출입구 쪽에 선 채 나를 바라보고 있던 설이와 눈이 마주쳤다.
설이가 우리 쪽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종방연 파티에서 있었던 모습 그대로인 것 같은 검은 수트에 마찬가지로 검은 로퍼를 신은 설이는 싸늘한 표정이었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얼굴에 날 선 눈빛이 나를 지나서 권영도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붉은 입술이 꾹 다물려 있었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얼굴과 온통 검은 옷차림이 마치 저승사자 같은 인상을 주었다.
'주변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던 적은 없니? 갑자기 누가 사고를 당했다거나, 마치 짠 것처럼 외부에서의 알 수 없는 힘으로 무거운 물건이나 차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거나 움직여 사람이 다친다거나 하는… 인간이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 말이야. ……사람의 예감이라는 건 생각보다 무척 정확하단다.'
왜 갑자기 그자의 악의 섞인 목소리가 떠오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설이는 마치 바닥에 떨어진 조명의 깨진 잔재들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것들을 밟으며 가까이 걸어왔다. 방금 전에 일어난 사고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태연한 발걸음이었다.
형, 하고 부르면서 내게로 손을 뻗는 설이에게 팔이 닿을 거리에서 나는,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설이의 손이 닿지 않는 거리에 멈춰 섰다.
"설아… 네가 그랬어?"
내게 손을 뻗은 채로 설이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새까만 눈동자는 그저 대답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요한 눈빛이 내 표정을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내가 이렇게 차가운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너, 이거 말고도 이런 적 있어?"
설이는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무거운 공기가 흐르는 지하주차장에 다른 조명들이 점멸하고 있었다. 이미 떨어져 부서진 거대한 한 줄의 조명 때문에 주변이 어두워져 우리 세 사람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설이는 내게 더 다가오지도 않고, 대답하지도 않았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킨 뒤에 설이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한설. 사람을 해친 적이 있느냐고 묻잖아. 너 그랬어?"
탁해진 시선으로 내 얼굴을 주시하던 설이가 내게로 다시 한 발자국 성큼 다가왔다. 눈썹 끝을 아래로 내려 애처로운 표정을 한 채로 설이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하면, 형은 나를 미워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