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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진실의 문 (47/65)

47. 진실의 문

팔짱을 낀 채로 큰 몸을 구겨 조수석에서 잠든 설이 얼굴이 천사처럼 예뻤다.

워낙 다리가 길어서 어떻게 해도 글러브박스에 무릎과 종아리가 부딪혔다. 넓은 어깨를 구겨 조수석과 차장에 닿도록 비스듬히 왼쪽으로 몸을 돌린 채로 새근새근 잘도 잤다.

서울로 돌아가는 아침 운전은 기필코 내가 하겠다고 차 키를 빼앗아 겨우 쟁취해낸 것이었다. 뒷좌석에서 편히 자라니까 내 옆에 있을 거라며 고집을 부렸다.

잠든 와중에도 내 눈길이 닿을 때마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섬세하게 떨리는 것 같았다. 예쁘게 잠든 얼굴을 가끔 흘깃거리며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조금도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다행히도 오전 중에 여유 있게 집에 도착할 수 있었고, 샤워하고 제대로 된 식사까지 하고 나서도 설이가 몇 시간 더 눈 붙이다가 촬영 갈 만큼 시간이 넉넉했다.

"설아, 등갈비 사논 거 있는데 김치 찜 해먹을까? 너 씻는 동안, 전기 밥솥으로 금방 해놓을게."

"좋아, 고마워. 형."

설이는 내 등뒤에서 나를 끌어안고 내 머리카락 사이로 코를 댄 채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만족한 듯이 침실 쪽 욕실을 향해 걸어 갔다.

부엌에서 팔 걷어붙이고 재료 손질부터 했다. 가능하면 어제 먹이려고 미리 준비해둔 재료들이라 요리하기 수월했다. 김장 김치 위에 등갈비와 양념을 올리고 파를 큼직하게 썰었다. 밥솥을 닫고 40분 코스 예약 버튼을 눌러놓고 나니 끝이었다. 협찬 받은 즉석 현미밥이 집에 잔뜩 있어서 따로 밥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더욱 간편했다.

시간이 남는 김에 바깥 욕실에서 샤워하고 나오니, 설이는 머리를 말리는 중인지 침실 쪽에서 드라이 기기 소리가 났다. 그제야 휴대폰을 방치해둔 게 생각나서 롱 패딩 주머니를 뒤졌더니 이미 배터리가 나가서 전원이 꺼져 있었다. 충전하자마자 바로 화면이 켜졌는데,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누구지?"

모르는 번호로 연속 두 번의 전화였다. 보통 낯선 번호로 온 전화는 수상해서 받지 않는 편이었지만, 어쩐지 대출이나 보험 광고를 위해서 아침 일찍 연속으로 전화를 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부재중 메시지를 남긴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잘못 건 전화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잊어버렸다.

등갈비를 뜯고 있는데, 설이가 내 밥숟갈 위에 살코기와 잘게 찢은 김치찜 한 조각을 올려놓았다. 정신 없이 먹고 있느라 몰랐는데, 이미 설이는 식사를 끝낸 참이었다.

"아… 왜, 설아 너 더 먹지."

"나는 이제 배불러. 형 많이 먹어."

설이가 손을 뻗어서 내 입가를 닦아줄 때에서야 내가 입 주변에 붉은 양념을 묻힌 채로 심취해서 등갈비를 먹고 있던 것을 깨달았다. 얼굴이 확 붉어지는 것을 느꼈지만, 설이는 식탁 맞은편에 앉아 흐뭇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피클이 담긴 그릇을 내 쪽으로 더 가까이 밀어주었다.

"형 원래 한식 먹을 때 피클 같은 거 안 먹었잖아."

조금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설이에게 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안에 가득 담긴 음식물을 씹어 삼키고 물을 마시고 나서 대답했다.

"응, 원래 그랬지. 근데 요즘에 자꾸 피클이 먹고 싶더라. 새콤하고 상큼하잖아."

"흐음."

설이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빤히 바라봤다.

"다른 거 뭐 먹고 싶은 건 없고?"

"음… 많지. 근데 대부분 다 집에 있어. 엄청 사 놨어."

민망해하며 웃자 설이는 일어나더니 내 물 잔을 가득 채워주었다. 피클도 더 담아서 내왔다.

"그래도 또 먹고 싶은 거 생기면 언제든 나한테 말해, 형."

어쩌면 이렇게 착한지, 감동 받은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설이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내 어깨를 쓸었다.

그때 설이의 휴대폰에 전화가 와서 설이는 거실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 이제 곧 촬영장에 가야 하는 시간이어서 아마 신 매니저님이 스케줄 확인을 위해 전화했을 것이다.

남은 밥을 싹싹 비우고 싱크대에 그릇들을 집어넣고 있는데, 설이는 거실에 선 채로 내게 등을 보이고 계속 전화를 받는 중이었다. 상대방이 신 매니저님이라면 짧게 통화하고 끝났을 텐데, 설이는 계속 듣고만 있었다. 무슨 일이지 싶어서 흘깃 보려니 설이가 한숨을 내쉬며 딱 잘라 대답했다.

"합의 의사는 없다고 전했을 텐데요, 이미 끝난 일입니다."

가까이 다가가자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전에도 들어본 적 있는 변호사님의 목소리였다. 전화를 끊고 나서 돌아보는 설이에게 다가갔더니, 별 일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출판사 사장 말이야, 미지급 인세와 피해금액을 변상해야 하는데, 일부만 지급하는 것으로 합의를 원한다고 해서 거절했어."

"아…"

"퇴근할 때 케이크 사올게, 형 본사 앞에 파는 수제 케이크 좋아하잖아."

고개를 끄덕이자, 설이는 작게 웃으며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설이가 촬영을 간 동안 나는 집안을 청소해두고 아버지의 동화책을 잘 정리해둔 뒤에 낮잠을 잤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같은 번호로 또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지만, 어쩐지 기분이 나빠서 이번에도 무시했다.

설이는 케이크를 사 들고 일찍 퇴근했다.

“내일 저녁에는 바쁘니까, 날짜 바뀌면 바로 축하하고 싶어.”

설이는 체리가 꽂혀 있는 생크림 케이크에 긴 초 두 개와 작은 초 두 개를 꽂았다.

우리는 열두 시가 지나서 내 생일이 되는 순간, 함께 소원을 빌었다. 케이크는 달콤하고 맛있었고, 설이가 내 곁에 있어서 더 없이 포근하고 행복한 저녁이었다.

***

아침 일찍 일어나 설이가 정성스레 끓여준 전복 미역국에 소고기를 구워서 생일상을 받았다. 내 생일이라고 설이가 세수까지 시켜준 덕에 정말로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은 아침이었다. 설이가 설거지하는 동안, 티브이를 보고 있는데 권영도가 나왔다.

"와… 이번에는 우리 설이 상대역이야?"

나는 소파에서 쿠션을 끌어안은 채로 혀를 끌끌 찼다.

설이와 드라마를 찍고 있는 배우 배민아와의 열애설 소식이었다. 두 사람이 밤 중에 거리에서 맞담배를 피우고 있는 파파라치 사진이 떴는데, 양측 소속사에서 발 빠르게 사실무근이라며 입장을 내놓았다. 지인 몇몇이 모인 술자리였다는 증언들도 나왔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 다정해 보여서 의혹은 계속 커지는 모양이었다.

"열애설 제조기셨네. 저것도 정말 능력이다."

이래서 누구에게나 매너 좋고 다정한 남자는 소문이 끊이지 않는 법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채널을 돌렸을 때, 나는 운명의 가게와 조우하고 말았다.

맛 집을 추천해주는 방송이었는데 전설의 명인이 만드는 만두 집이 나왔다. 만두피부터 속까지 특별한 노하우로 제조하고 있었고, 벌써 3대째 이어오는 감칠맛의 비법이 있다고 했다. 큼직한 손만두가 얼마나 맛있어 보이는지 방금 전까지 미역국을 두 그릇 먹은 게 거짓말인 것처럼 군침이 돌았다. 가게는 경기도 쪽에 체인점이 두 곳 있었다. 줄 서서 먹는 맛 집이라서 기본 1시간은 기다려야 하는 모양이었다.

"설아, 설아."

설거지를 끝낸 설이가 손을 닦고 걸어오며 응, 하고 대답했다.

하필 내 생일 저녁에 드라마 <정열의 꽃을 그대에게>의 종방연 파티가 있어서 설이는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는 어차피 설이와 함께하는 요즘 매일이 생일 같다며 입술이 비죽 나온 설이를 한참 달랬지만, 그래도 오늘 하루는 휴가를 내고 나와 하루 종일 데이트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방송이 연장되는 바람에 내 생일과 종방연이 겹치게 되었고, 설이는 종방연 기자회견과 파티에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렇다고 주연 배우가 스케줄 펑크를 낼 수는 없는 법이니까, 내가 밤늦게 침대에서 오붓하게 와인 한 잔 하면서 침대 데이트를 하자는 말로 설이를 어르고 달래고 꼬셔서, 겨우 풀어진 참이었다.

"나 차 좀 빌려주면 안 돼?"

"……어디 가려고."

설이는 소파에 앉으며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여전히 불퉁한 표정이었다.

"저기, 방송에 나온 맛 집에서 만두 먹고 싶어."

"그런 거라면 내가 사람 시켜서…"

"아냐! 남들 귀찮게 하고 싶지 않기도 하고, 저런 건 직접 가서 찜통에서 나온 걸 바로 간장 찍어서 먹어야 맛있는 거야. 나 이따가 혼자 운전해서 가서 잠깐 먹고 오고 싶어. 김치만두랑 잡채만두 한 판씩만 먹고 올래, 응?"

말하면서 벌써 입가에 침이 고였다.

설이는 '나랑 같이 가' 하고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이미 종방연 스케줄을 위해서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신 매니저님이 벤을 타고 곧 주차장에 도착할 것이다.

"정말 조심조심해서 몰고 다녀올게. 응?"

"……형 혼자 보내기 싫은데."

"왕복 두 시간이면 금방이야! 형 운전 잘하는 거 알잖아. 나 정말 저거 너무 먹고 싶은데… 형 생일인데 부탁 안 들어줄 거야?"

설이는 한참 동안 입을 꾹 다물고 내 허리를 만지작거리고 있다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설이 착하다고, 고맙다고, 볼에 뽀뽀를 여러 번 해주자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머리도 쓰다듬어주고 엉덩이도 두드려주자 설이는 소파에 엎드려 나를 끌어안고는 "내가 같이 가고 싶은데." 하고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형이 출발 할 때, 만두 먹을 때, 다시 올 때, 꼬박꼬박 계속 실시간으로 연락 할게. 걱정 마, 알았지?"

"……응."

착하게 대답한 설이는 모자를 눌러쓰고 지하주차장에 마중 나와있는 벤을 타기 위해서 집을 나섰다.

현관 앞에서 내 손을 잡고는 영영 헤어지는 연인처럼 얼마나 애절한 눈빛을 하고 있는지, 스케줄이 아니라 학교였다면 그냥 결석 시켰을 것이다. '다녀오겠습니다' 키스를 한 뒤, 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문 뒤에야 설이는 현관문 밖으로 떠났다.

나는 만두가게 상호명과 영업시간을 체크하고, 빠르게 나갈 준비를 했다. 가게까지 가는 시간도 있고, 줄 서서 기다릴 것을 생각하면 지금 출발해야만 출출하기 전에 만두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휴대폰에 온 메시지를 보니, 내 생일이라고 외삼촌께서 돈을 보내주셨다. 어차피 설이가 보내드린 용돈이 고스란히 다시 내게 오는 격이었지만 잊지 않고 신경 써주신 것에 감사 메시지를 드렸다. 이제는 외삼촌께서 중요한 일이 있을 때 내가 아니라 설이에게 연락하신다는 것을 알고 나서 무척 뿌듯했다. 예전에 외삼촌은 늘 내가 설이에게 헌신하느라 내 삶을 잃는 것 같다고 걱정하셨는데, 요즘엔 어쩌다가 연락할 때마다 ‘네 동생 건강식 좀 해 먹여라’ 하고 잔소리하시는 것이 나를 기쁘게 만든다.

설이의 커다란 기모 후드 티를 빌려 입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언제 봐도 반짝이는 동생의 고급 차를 내가 혼자 타고 만두 먹으러 마실이나 다녀도 되는 건가, 잠시 고민했지만 식욕이 그런 고민을 간단히 이겼다. 내비게이션에 만두가게 주소를 찍고 출발하기 전, 설이에게 출발한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바로 전화가 와서 블루투스로 연결해서 전화를 받았다.

- 형, 조심해서 다녀오고… 중간 중간 연락 꼭 해줘야 해.

잔뜩 아쉬워하는 설이의 낮은 목소리에 웃음 섞인 대답을 했다.

"알았어, 형이 네 몫까지 사다 놓을게. 웃으면서 방송 잘 해야 돼. 설이 착하지?"

- ……응, 그럴게.

누그러진 목소리로 다정하게 대답하는 설이의 목소리만으로도 그 예쁜 표정이 연상되어서 허공에다가 잔뜩 뽀뽀를 날렸다. 설이는 기쁜 듯 작게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시원하게 도로를 달리는데 이번에는 권영도 이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사님! 잘 지내셨는지 모르겠네요."

- 와아… 나를 왜 이렇게 반겨줍니까? 사람 설레게.

장난기 섞인 권영도 이사의 목소리를 꽤 오랜만에 듣는 기분이었다.

"저 지금 맛있는 거 먹으러 가는 중이라 기분이 좋거든요."

- 뭐야, 나한테서 전화 온 게 기쁜 거 아닙니까?

토라진 아이 같은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킥킥 웃음이 났다. 권영도는 내 기분이 좋아 보여서 다행이라면서 본인은 지금 촬영 중이라고 했다. 나는 낮에 본 연애 기사 방송이 생각나서 불쑥 물었다.

"이사님, 배민아 씨랑 정말 사귀세요?"

-아… 아아, 그거요.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는 중입니다.

골치 아프다는 듯 대답하는 목소리에 '근데 그 굴뚝에 연기 너무 나는 거 아니냐'며 약 올리듯 물었더니 권영도가 난처해하며 웃었다. 그래도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어차피 설이에게도 그렇지만 권영도 이사에게 스캔들은 일상이었다.

-한준 씨, 생일 축하해요. 이 말 하고 싶어서 전화했습니다.

"어… 저 생일인 거 어떻게 아셨어요?"

-이력서에 인적 사항 있잖습니까. 예전에 봐뒀죠.

"아… 그렇구나, 감사합니다."

권영도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선물 같은 거 하면, 불편해할 겁니까?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핸들을 돌리면서 나는 네, 하고 미안함을 담아서 작게 대답했다.

"나중에 이사님한테 연인이 생기면, 그분에게 해주세요."

-참… 한결 같네요, 한준 씨도.

권영도는 작게 웃으면서 요즘 하이레벨이 잘 나간다며 말을 돌렸다. 아마도 나를 배려해서 내가 불편하지 않게 화제를 바꿔준 것 같았다. 해외 팬들에게 인기가 많아서 하이레벨이 조만간 해외 투어 콘서트를 하게 될 거라는 소식을 전해왔고, 제이가 고양이를 키우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해주었다. 나중에 제이가 시간이 나면, 셋이서 같이 밥을 먹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만두 가게에 도착까지 10분 정도 남았을 때, 또 전화가 왔다. 블루투스로 연결된 스마트 화면을 봤더니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이제부터는 골목길로 접어들기 때문에 한 눈 팔다가는 길을 잃기 쉬웠다. 일단 차를 대놓고 다시 화면을 보니, 계속 부재중 전화를 남겼던 바로 그 번호였다.

이번에는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못 걸려온 전화도, 스팸 광고도 아닌 게 분명했다.

-저… 한준 씨 휴대폰 번호가 맞을까요?

중년 여성의 목소리였다.

"네, 맞는데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저는 강춘영 씨 아내 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전화 드리는 거 실례라는 건 알지만, 남편이 꼭 전해달라는 말이 있어서요.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지만, 낯선 이름이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강춘영 씨가 누군지 모르겠는데요."

- 제… 남편은… 그러니까, 춘글 출판사 대표입니다…….

"아."

단박에 내 표정이 굳는 게 느껴졌다. 차를 세워두기 잘했다. 자칫 사고를 낼 뻔했다.

아버지의 동창이자, 동화 판권을 전부 가져간 출판사 대표의 이름이 강춘영이었다는 사실이 그제야 떠올랐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한 번 봤을 뿐이지만, 좋지 않은 기억이라 그의 얼굴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내게서 아무 대답이 없자, 그쪽에서 잠시 망설이더니 말을 이었다.

- 남편이 지금 구치소에 있는 건, 한준 씨도 아실 거예요.

"……네."

- 저… 이런 부탁 드리기 참 어렵지만……

우물쭈물하는 목소리를 듣고 있다가, 나는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는 그를 친구라고 믿었을 것이다. 불공정 계약으로 우리 집안 사정이 어려워진 것보다도, 아버지의 신뢰를 져 버렸던 것을 용서하기 힘들었다. 그 남자를 나는 더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잠시만요. 제가 매정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춘글 출판사와 관련된 어떤 연락도 받고 싶지 않습니다. 적어도 아직은… 좀 힘들 것 같아서요. 죄송하지만 끊겠습니다."

심장이 기분 나쁘게 뛰었다.

어차피 저작권 소송에서는 승소했고, 그와 관련된 일은 설이가 제대로 정리를 했을 것으로 믿기 때문에 더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찾아와서 우리 가족을 멸시의 눈으로 바라보며 악담을 해댔던 그 남자에 대한 미움이 도저히 가시지 않았다.

"아, 그만 생각 하고… 만두. 만두."

고개를 휘휘 저어서 기분 나쁜 우울감을 떨쳐내고 다시 맛 집을 찾아 나섰다.

***

"……혼자 오신 거 맞죠?"

수첩에 주문 메뉴를 적던 아주머니가 의문의 눈길로 내 주변을 둘러봤다. 안 그래도 좁은 가게에 모르는 사람들과 가까이 붙어 앉아 있었는데 나만 일행이 없어서 조금 민망한 상태였다.

식사 시간대가 아님에도 가게 밖에 줄 서서 30분을 기다렸다. 그나마 혼자 온 사람이라서 빈자리 차지하는 것에 유리했다. 한 자리가 났을 때, 남들보다 일찍 가게에 들어올 수 있었다. 모두 가족이나 연인끼리 온 단체 손님이었지만, 나는 그 사이에 껴 있어도 전혀 외롭지 않았다. 단지 혼자서만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는 사실이 설이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네, 저 혼자 맞습니다."

뒷목을 긁적이며 어색하게 대답했다. 아주머니는 주문서를 한 번 더 내려다보았다. 그래 봐야 김치만두 한 판, 잡채만두 한 판, 한정판 갈비만두 한 판, 메밀국수 한 그릇을 시켰을 뿐이었다. 어렵게 왔는데 일단 먹을 수 있는 건 다 먹어봐야지.

아주머니는 손뼉을 치며 밝은 얼굴로 소리쳤다.

"아아, 학생 그거구나! 방송 하는 사람이죠? 연예인처럼 예쁘장한 거 보니까 맞네."

"네?"

"그 무슨… 먹방인가 뭔가 하는 사람인 거잖아요?"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아주머니께서는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면서 내게 흰 종이를 한 장 주시며 사인을 해달라고 부탁하셨다. 극구 부인했지만 만두와 메밀국수가 나올 때에 또 부탁을 하셔서, 빨리 먹고 싶은 마음에 어쩔 수 없이 흰 종이에 크게 '한준'이라고 내 이름을 적어드렸더니, 무척 만족하셨다.

갓 쪄낸 만두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을 보여주려고 휴대폰을 꺼내자마자, 타이밍 좋게 설이에게서 영상통화가 왔다. 벽 쪽 자리에 앉게 되어서 등뒤에 사람이 없는 게 다행이었다. 얼른 통화 버튼을 누르자, 벤 안에 앉아 있는 설이의 하얗고 예쁜 얼굴이 화면에 떴다.

"와, 안 그래도 만두 보여주려고 했었는데!"

기자회견을 끝내고 파티 장소로 이동 중이던 설이는 내 들뜬 목소리에 피식 웃더니 만두를 보여달라고 했다. 그러나 어차피 설이는 식탐이 없어서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반투명한 만두피와 그 속에 꽉 찬 만두 속을 봐도 그냥 맛있느냐고 물을 뿐이었다.

손만두 맛은 환상이었지만, 나는 시무룩한 얼굴로 오물거리며 화면을 바라봤다.

"설아… 여기 포장은 안 된대, 너도 먹여주고 싶었는데……."

설이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 괜찮아, 형이 내 몫까지 많이 먹으면 되잖아. 다음에 같이 가자.

"응. 너 파티 어디서 한다고 했지?"

- 여의도. 한 시간 정도 머물다가 집으로 갈 생각이야. 형도 어서 집으로 돌아가.

메밀국수를 후루룩 삼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설이도 바빴지만, 나도 빨리 먹고 나서 자리를 비워줘야 했기 때문에 영상 통화를 금방 끊었다.

내 옆에 앉은 커플은, 만두 한 접시와 메밀국수 한 그릇을 두 사람이 나눠 먹는 중이었다. 만두와 왕만두 수준으로 컸기 때문에 아마 그 정도로도 충분히 두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양이 될 것이다. 그 커플은 이따금 힐금거리면서 김치를 리필해서 먹는 나를 구경했다. 주문할 때는 ‘양이 너무 많으면 아깝지만 남겨야지’ 하고 생각했지만, 나는 모든 그릇을 마법처럼 싹 다 비웠다.

"와, 나 진짜 먹방 전문 방송 같은 거 해야 하나."

어쩌면 내가 먹는 것에 재능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가게 주인 아주머니께서 사인으로 모자라서 나와 사진을 같이 찍고 싶어하셨기 때문에 계산 후에 거의 도망치듯 나와야 했다.

근처 편의점에서 짜먹는 아이스크림을 초코 맛으로 사서 멍하니 먹고 나서야, 나는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집으로 가는 중이라고 설이에게 메시지를 보낸 다음, 시동을 걸었다. 아마 왔던 경로대로 돌아가면 40분 내에는 집에 도착할 수 있을 거라는 상세한 설명도 덧붙였다. 이미 파티장에 도착한 설이는 '알았어, 조심해서 운전해.' 하고 답장한 뒤로 바쁜 것 같았다.

한 번 먹어보니까 맛 집의 비법을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집에 가는 길에 장을 봐서 내가 직접 설이에게 만두를 빚어줄까 생각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끈질기네."

춘글 출판사 대표의 아내였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벨 소리를 무시한 채로 운전을 이어가다가, 결국 너무 신경이 쓰여서 차를 세웠다.

낮에 설이가 변호사와 통화했던 것도 들었기 때문에 그 남자의 아내가 내게 전화한 이유는 충분히 추측할 수 있었다. 아마도 우리 쪽에 배상해줘야 하는 피해보상금이나 여태껏 미지급했던 인세 같은 것은, 이미 엄청난 액수일 것이다. 여러 사람을 속이고 이용했다고 했으니, 아마 전부를 갚기에는 역부족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적당한 금액을 합의하고 싶을 것이다. 그런 마음이 괘씸해서 전화를 받기가 더 싫었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 신경 쓰게 되는 것도 피곤한 일이니까, 차라리 전화를 받고 확실하게 못을 박아 거절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한준입니다."

- 네, 자꾸 귀찮게 해드려서 미안하지만… 저도 구치소에 있는 남편 부탁을 들어줄 수 밖에 없어서 말이에요. 정말 미안합니다.

눈가를 꾹꾹 누르며 스트레스로 지끈거리는 두통을 참아냈다.

"저에게 원하시는 게 뭡니까."

- 아, 제 남편은 한준 씨가 구치소로 면회를 와주시기를 바라더군요. 직접 만나서 꼭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다고…….

"제가 왜 그래야 하죠?"

중년 여성은 내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가, 지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한준 씨, 전 그저… 전하라는 말만 전할게요. 사실 저도 피해자 입장이라, 남에게 싫은 소리 듣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남편은 '한우영의 하나뿐인 친자식 한준에게 꼭 할 말이 있으니 면회를 오라고 전해라' 라는 말을 했어요. 제가 말씀드릴 것은 이게 전부이고… 이제 전화 안 드리겠습니다.

"………어딥니까."

나는 떨리는 손으로 핸들을 꾹 쥐었다. 목소리가 갈라지는 것 같았다.

"제가, 강춘영 씨가 있는 곳으로 가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고, 메시지로 보내온 구치소의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찍어 넣었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울렁거리는 기분이었다. 경기도 의왕에 있는 구치소는 만두가게에서 20분 거리였다.

내게 말을 전한 그 남자의 아내는 뜻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지만, '한우영의 하나뿐인 친자식'이라는 말은 일종의 협박이었다. 그는 설이가 아버지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우리 가족은 내 동생을 입양했다는 말을 누구에게도 한 적이 없었다. 설이의 목숨이 달린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설이에 관련된 것은 전부 꼭꼭 숨겨왔다. 호적에도 설이가 올라와 있고, 먼 친척들까지도 모두 설이가 내 친동생이라고 알고 있었다. 우리는 산골에서 가족끼리 살았고, 함부로 비밀을 누설하지 않았다.

하지만 강춘영은 우리 설이의 비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다.

“대체…… 뭘 알고 있는 거지.”

잠시 망설였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핸들을 꺾었다.

구치소에 거의 다 와갈 때쯤, 공교롭게도 설에게서 전화가 왔고 나는 휴대폰 전원을 꺼 버렸다. 아직은 설이가 모르게 하고 싶었다.

내가 먼저 그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고 나서, 그런 다음에 설이에게 연락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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