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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둘만의 동화 (46/65)

46. 둘만의 동화

촬영이 끝났을 때는 이미 늦은 저녁이었다. 원래라면 훨씬 일찍 끝날 예정이었는데, 갑작스러운 ppl 장면 삽입 요청 때문에 대본이 급하게 수정되었고, 추가 촬영이 이어졌다. 시간 지연이 꽤 되어서 중간에 쉬는 타임도 없었다. 신 매니저님은 내가 푸짐하게 싸다 준 도시락과 간식이 아니었다면 버티기 힘들었을 거라며 한탄하셨다.

설이는 추가 촬영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이미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불만을 표하거나 불성실하게 임하지는 않았지만, 예민한 눈빛과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그 표정으로 기분이 심히 좋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원래라면 일찍 촬영을 끝낸 뒤, 이미 나와 한참 바다를 향해 달려가고 있을 시간이었다.

촬영 중간 메이크업을 고칠 때 곁으로 다가갔더니, 눈을 감은 채로도 내가 다가온 것을 알아채고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설아, 피곤하지? 괜찮아?"

조심스럽게 묻자, 설이는 메이크업 수정이 끝난 후 눈을 뜨며 우울한 눈길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난 상관 없는데, 형 기다리는 거 힘들잖아. ……일부러 일찍 끝나는 날에 맞춰서 데리고 온 건데."

설이가 한숨을 폭 내쉬면서 속상한 듯 속눈썹을 깜빡였다.

나는 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우리 설이가 이렇게 배려심이 넘치고 마음 여리고 천사 같은 아이랍니다.

이 중요한 사실을 주변 사람들도 놓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다들 설이에게 딱 필요한 만큼의 터치를 할 뿐, 말 걸기도 어려워하는 분위기였다.

설이는 대사 실수 한 번 하지 않았고, 상대역 배우도 베테랑답게 갑자기 바뀐 대본에 유연하게 대응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세트장 분위기를 바꾸는 스텝 분들의 몸짓도 엄청나게 빠른 걸 보니, 이런 갑작스러운 촬영이 드물지 않은 모양이었다.

촬영이 끝나자마자, 설이는 신속하게 퇴근 준비를 하고는 신 매니저님과 잠깐 이야기를 나눈 뒤에 나를 데리고 바로 주차장으로 향했다.

"형이 운전할게, 너 피곤하잖아."

앞서 가는 설이에게 차 키를 달라며 손을 뻗었지만, 설이는 대답 없이 조수석 문을 열어서 나를 조수석 시트 위에 앉혔다.

그리고는 허리 숙여 안전벨트를 끌어왔다. 벨트를 내게 매주기 위해서 어깨부터 가슴을 가로질러 내려가며 설이의 손길이 내 몸을 쓸었는데, 그게 어쩐지 부끄러워져서 나는 절로 시선을 피했다.

"내, 내가 매면 되는데. 저기, 그러면, 중간에 휴게소에서 바통 터치하자. 시간 늦어서 빨리 출발해야겠다."

"그 전에."

턱을 가볍게 쥐고 제 쪽으로 돌렸다. 마주보는 순간, 설이가 내 입술에 제 입술을 비스듬하게 맞췄다.

부드럽게 밀고 들어온 혀가 내 입안을 쓸고 지나갔다. 짧은 키스가 내 몸 안에 설탕이라도 사르르 뿌려놓은 기분이었다. 잠시 멍해져 있다가 헛, 하고 정신을 차려 주차장 안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주변은 캄캄했고,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더 해주고 싶은데 시간이 늦었네. 가야겠다."

설이는 차 앞으로 돌아서 운전석에 탑승했다. 나는 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었다가 아직 입 안에 남아있는 부드러운 촉감에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느꼈다.

늦게까지 촬영하고 피곤하지도 않은지, 설이는 빛나는 옆얼굴을 내게 보이며 유유히 핸들을 돌렸다. 늦은 저녁 식사로, 24시간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점에서 드라이브 스루를 했다. 

포장된 버거 세트를 건네주면서 운전석에 앉은 설이의 얼굴을 확인한 아르바이트생은 충격 받은 표정이었다. 예고에 없던 행운이 찾아오면 사람은 울게 되는 모양이다. 시선은 설이에게 향한 채 오열하는 아르바이트생에게서 포장된 종이 백을 건네 받으면서 설이는 무심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그 작은 행동에 아르바이트생은 아예 주저앉아 우리 시야에서 사라졌다. 동료가 다가와 왜 그러냐고 묻자 한설… 한설…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들려왔다.

암, 그 마음 이해하지.

햄버거를 차 안에서 먹기 시작했을 때 벌써 열두 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우리를 태운 설이의 차는 어두컴컴한 도로 위를 달렸다. 신호에 걸릴 때마다 커피 몇 모금만 마실 뿐인 설이의 입에 나는 갓 튀긴 감자튀김을 쏙 넣어주었다.

"설이, 이따가 갓길에 차 세우자, 내가 운전할게."

핸들을 쥔 설이는 시선이 앞으로 향한 채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른손을 뻗어 조수석으로 넘어오더니 감자튀김을 쥔 내 손을 만지작거렸다. 손등을 엄지로 부드럽게 쓸며 다정하게 말했다.

"내가 운전하고, 형이 나 먹여주는 게 더 좋아."

차가 잠시 멈추자, 내 손등을 끌어가 제 뺨에 비비더니 입을 맞췄다. 설이의 애교에 황홀해져서 멍하니 설이의 옆얼굴만 바라보고 있으니, 설이는 어서 더 먹으라며 나를 부추겼다.

나는 빅맥 세트에 추가로 치즈 버거를 하나 더 먹는 중이었다. 중간 중간 감자튀김도 먹고 있고, 애플파이도 후식으로 사둔 상태였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먹어도 배부른 느낌이 없는지, 신기할 지경이다.

누가 보면 내 뱃속에 애라도 하나 들어 있는 줄 알겠다.

두둑하게 먹고 나서는 당연한 수순으로 까무룩 잠들었다. 밤 운전하는 사람 옆에서는 졸지 않는 게 예의인데, 나는 그런 예의까지 버거랑 같이 삼켜버린 모양이다. 얼핏 잠이 깼을 때에는 내가 앉은 조수석 시트가 잠들기 편하도록 뒤쪽으로 눕혀져 있었고, 내 몸을 따뜻한 담요가 덮고 있었다. 그걸 확인하고도 도무지 잠이 깨지 않아서 나는 다시 기절하듯 잠들어버렸다.

휴게소에 들르면 반드시 내가 운전석에 앉겠다고 다짐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나는 아주 숙면을 했던 모양이었다.

눈을 떴을 때는, 차창 밖으로 새벽이 푸르게 밝아오고 있었다.

"아…"

"일어났어?"

운전석 좌석을 젖혀 내 쪽을 향해 팔을 굽히고 누워 있던 설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어 보였다.

눈가에 나른한 분위기가 담겨 있었다. 아무래도 밤샘 운전이 많이 피곤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설이는 손을 뻗어 내 눈가를 가만히 쓸어주며 형, 피곤하지, 하고 물었다. 눈가에 닿는 손바닥이 따뜻하고 그 손길은 너무 포근해서 절로 눈이 감겼다.

"형, 바다 보러 나갈래?"

"그러자."

바람이 꽤 거칠게 불었는데, 차 안에서 내가 덮고 자던 크고 두꺼운 담요를 가지고 나온 설이가 담요로 내 등부터 감싸 나를 돌돌 포장하듯 감아놨다. 나를 보송보송한 김밥으로 만들어놓고는, 등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담요보다도 등에 닿는 설이의 체온과 나를 꽉 옭아맨 팔뚝의 악력이 나를 추위로부터 더욱 단단하게 보호해주는 느낌이었다.

내 머리 위에 턱을 올린 설이가 형, 추워? 하고 물었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무 난간 아래로 이어지는 풍경은, 추위와 졸음을 전부 이겨낼 만큼 아름다운 것이었다. 방파제가 쌓인 곳으로 파도가 밀려와 하얗게 부서졌다.  탁 트인 시야에 전부 담을 수도 없을 정도로 넓은 바다가 너울치고 있었다.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파도의 물결은 거대한 인어의 비늘처럼 신비롭게 느껴졌다. 나는 그저 입을 벌리고 멍하니 그 바다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벅찼다.

"……아름답다, 설아."

설이는 고개를 기울여 나를 내려다보며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게."

내 손을 꼭 쥐어 롱 패딩 주머니에 집어넣으면서 설이는 만족의 한숨을 내쉬었다.

"형이 좋아할 줄 알았어."

속삭이는 목소리가 내 귀 끝에 닿았다. 촉, 소리가 나게 귓바퀴에 입맞추는 설이의 입술이 부드럽고 따뜻해서 등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속초 바닷가는 내게 낯설면서도 익숙한 곳이었다. 강원도에 살면서 가족끼리 바닷가에 놀러 와 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이 바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렀던 의료원이 있었다. 어머니 손을 잡고 셋이서 서울로 올라온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이쪽까지 내려와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바쁘기도 했지만, 잊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것이다. 슬픈 생각은 피하고 싶었다. 허망하게 아버지를 떠나 보내고 어머니까지 여읜 기억들을, 가능하면 오래 덮어두고 앞만 보며 달려가자고 생각했다.

그걸 가능하게 해준 것은 언제나 설이었다. 소금기 담긴 바다내음과 거친 바람이, 가족들과의 추억을 다시 떠올려도 괜찮다고 용기를 주는 것 같았다.

말없이 나를 껴안은 등 뒤의 설이에게 말했다.

"…고마워, 여기 데려와 줘서."

"응."

설이는 부드럽게 대답하며 나를 품 안에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설이가 내 등뒤에 있다는 것이 이렇게 의지가 된 적이 없었다.

입김을 내뿜으며 한참 동안 바다 구경을 하다가, 감기에 걸리겠다며 설이가 나를 이끌고 다시 차 안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둘 다 코끝까지 빨개졌지만, 그래도 웃고 있었다. 함께 있으면 늘 웃을 수 있으니까.

"너무 예쁜 생일 선물이었어, 고마워. 설아."

아직 생일이 되려면 이틀이나 남았는데, 얼굴만큼이나 마음도 예쁜 설이가 집에서 혼자 적적해하는 나를 위해서 바다로 데려와 준 모양이었다. 손등을 쓸어주자, 설이는 수줍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선물 더 남았는데."

"응?"

나를 보며 예쁘게 웃은 설이가 뒷좌석으로 손을 뻗었다. 가죽으로 된 서류 가방을 집어 앞쪽으로 가져온 설이가 가방을 열더니 실크 소재로 곱게 포장된 무언가를 꺼내서 내게 건넸다.

"이게 뭐야?"

"……생일 선물. 형 기뻐하는 모습 보고 싶어서, 준비되자마자 바로 알려주고 싶었어."

납작하고 널찍한 것을 받아 들고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가 나는 일단 고맙다는 말을 먼저 했다. 설이는 어서 선물 포장을 풀어보라는 듯이 기대가 가득한 눈길로 턱짓했다.

설이가 준 것은 생각보다 가볍고 딱딱한 물체였다. 나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포장을 벗겼다. 실크 천이 벗겨지자 드러난 것은 그림책이었다. 그것도 아주 익숙한, 그리운 동화였다.

"어… 이건…"

"내 선물은 마지막 장 쯤에 있어, 펼쳐봐."

설이는 웃으며 나를 부추겼다.

<눈꽃 정령과 꼬마 이야기> 라는 제목의 그림책 겉 표지에는 새하얀 눈밭 위에서 손을 잡은 두 아이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파스텔 톤의 부드러운 색감과 아기자기한 그림체는, 아버지의 손길에서 탄생한 것이었다.

이사올 때에도 소중하게 부모님 유품들과 함께 보관해두었던 아버지 그림책의 초판 본 중의 하나였다. <눈꽃 정령과 꼬마 이야기>는 아버지의 유작이었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했다. 장롱 속에 고이 간직해둔 것을 설이가 어떻게 알고 꺼내왔는지 모르지만, 오랜만에 마주하는 아버지의 동화책을 속초 바닷가에서 펼치자니 눈가가 뜨거워졌다.

첫 장에 아버지의 자필로 적혀 있는 문구가 있었다.

'소중한 나의 두 아이에게, 세상을 덮은 새하얀 축복과 함께 영원한 사랑을.'

저도 모르게 훌쩍이다가 눈물을 보이기 싫어서 얼른 손등으로 눈가를 훔쳐냈다. 그러자 부드러운 손길이 내 눈가를 감쌌다.

"울지 말고, 응?"

다정한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웃어주었다. 오랜만에 펼쳐보는 아버지의 그림 동화는, 처음 읽어보는 것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눈으로 덮인 겨울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눈꽃의 정령을 만나게 된 한 꼬마의 이야기였다. 정령은 꼬마가 원하는 소원은 모든지 다 들어주었는데, 눈 속에 꽃이 피어나게 해주거나 눈 내리는 하늘을 날아다니게 해주었고 그 덕분에 꼬마는 조금도 외롭지 않고, 춥지 않았다.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 정령은 꼬마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봄이 올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줘.'

꼬마를 껴안으며 정령은 눈물을 흘렸다.

'네가 나를 원하면, 우리는 다시 만날 거야.'

눈이 모두 녹는 따뜻한 봄이 왔고, 꼬마는 파릇파릇한 봄의 산에서 정령을 매일 그리워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꼬마에게 동생이 태어났다.

그림책은 꼬마가 새하얀 얼굴의 갓난아이를 껴안고 행복해하는 그림으로 끝이 난다.

마지막 장을 펼치려고 하자, 페이지 사이에 서류가 끼어 있는 것이 보였다. 펼쳐보자 맨 위쪽에 법원 마크가 찍혀 있었다.

"……판결문? 설아, 이게 뭐야?"

그제야 설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수줍은 얼굴로 대답했다.

"승소했어, 이제 아버지 작품의 판권은 전부 형 거야."

"……뭐?"

얼떨떨한 표정의 내게 설이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형 어렸을 때, 아버지의 작품 판권을 출판사에서 모두 가로채갔던 것 기억하지? 장례식장에 왔던 아버지의 고등학교 동창."

"아, 그 아저씨."

뻔뻔하게도 장례식장에 찾아온 출판사 사장은, 모든 게 다 아버지의 탓이라는 말을 했었다. 나는 서러움에 눈물을 참을 수 없었고, 설이는 그 사장을 노려봤다가 오히려 욕지거리를 들었다. 다행히도 불 같은 성격의 어머니께서 참지 않고 그 사장의 뺨을 때렸지만, 그래도 속이 풀리지는 않았다.

바쁘게 사느라 잊고 지냈다. 언젠가 어머니께서 무료 변호사에게 아버지의 동화 저작권에 대한 일을 상담하셨던 적도 있기는 했다. 어머니는 변호사의 답변에 대해서 자세히는 말해주지 않았지만 "세상 참 무섭구나." 하고 말하셨다. 그 뒤로는 일절 아버지의 동화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셨기 때문에 나도 잊고 살았다.

“아버지가 계약 당시, 저작권을 모두 양도하는 매절 계약을 했고 그 대신에 계약금을 선 지급 받는 방식을 택했던 것은 아마도 가난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어. 그 출판사 사장은… 아버지뿐만 아니라 신인 작가들을 착취하는 형태로 계약해왔고, 현재는 꽤 큰 출판사와 다른 사업도 병행하고 있었어.”

나는 여전히 믿을 수 없어서 판결문과 설이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는 중이었다.

“소송하는 과정에서 계약금 미지급이나 악질적인 계약 행태와 더불어 탈세 혐의도 입증되었고, 그 사람은 현재 도주 우려가 있어서 구치소에 있는 상태야."

설이는 개운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의 작품들에 대한 저작권 반환 청구 소송은, 시간이 꽤 걸렸지만… 결국에는 이겼어. 형이 모두 상속받을 수 있게 되었어."

"아… 어… 그러니까……"

갑작스러운 상황을 머리가 따라가지 못했다.

"형에게 가장 소중한 게 뭔지, 형이 가장 원하는 게 뭔지 생각했어. 그래서 형에게… 가족으로서의 권리를 되찾아주고 싶었어."

눈물이 아른거려서 설이의 웃는 얼굴이 뿌옇게 흐려졌다. 내 두 뺨을 쥔 채로 설이는 엄지로 쓸어 내 눈물을 닦아냈다. 그러나 눈물은 구슬처럼 흘러내린 뒤에는 또 맺혔다. 설이는 그렇게 울면 눈가가 쓰라리게 된다고 잔소리를 하면서 부드러운 입술을 내 눈꺼풀에 가져다 댔다.

커다란 짐승이 위로하는 것처럼, 내 눈가의 눈물을 뜨거운 혀끝으로 핥아낸 설이가 속삭였다.

"사랑해, 형. 그리고 생일 축하해."

"흐으…"

"하나뿐인 내 반려."

사랑스러워서 못 견디겠다는 듯 속삭이는 설이의 목소리에 나는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설이는 품에 뛰어드는 나를 끌어안으며 운전석 등받이에 몸을 가볍게 부딪혔다. 아버지의 그림책이 무릎 아래로 떨어졌다. 저돌적인 내 포옹에 설이는 살포시 미소 지으면서 내 등을 어르듯이 다독였다.

코앞에서 눈이 마주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키스하기 시작했다. 입술이 세게 부딪히고 혀가 얽히는 사이로 쪽, 쪽, 마찰음이 흘러나왔다. 목 안쪽으로 으음 하고 신음이 절로 샜다. 설이는 내 뒷목을 단단히 붙잡고 고개를 기울여 깊숙이 혀를 집어넣었다. 온몸이 혀로 먹히는 기분이 드는 키스였다. 나는 지지 않고 설이의 혀를 깨물고 눈을 감았다.

비록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한 차 안이고, 두터운 점퍼까지 입은 채였지만, 서로의 손가락이 허리춤으로 비집고 들어가 몸을 더듬었다. 손가락보다 몸이 더 뜨겁게 느껴졌다.

입술이 떨어지고, 나는 헐떡이면서 시선을 떨어뜨리고 작게 물었다.

“저기, 내일도 촬영이지? 무리하면… 안 되겠지?”

이런 말을 꺼낸다는 것이 죽을 만큼 민망해서 땅으로 꺼지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설이의 바지 지퍼를 쥔 내 손은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버거나 감자튀김, 혹은 콜라에 알코올이 섞여 있었던 건 아닐까. 자꾸 설이를 원하게 되었다.

내 부끄럽고 민망한 유혹에 설이는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뭔가를 참듯이 미간을 굳혔다. 대답 없이 손을 뻗어 옷자락 속으로 기어들어온 설이의 손이 내 배를 감싸고 그대로 잠시 가만히 멈췄다. 마치 뭔가를 감지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얘가 뭘 하나 싶어서 올려다 보자, 설이는 제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음…… 안 될 것 같은데.”

나보다 훨씬 더 아쉬운 표정이었지만, 고민 끝에 설이는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보면 밤샘 촬영과 운전으로 지쳤을 설이를 지금은 좀 쉬게 해줘야 하는 게 맞았다. 나는 그냥 손만 잡고 있어도, 뺨에 뽀뽀만 해도 행복하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설이는 제가 거절했으면서 내 배와 허리의 피부를 아쉬운 듯 계속 만지작거렸다.

“사실, 형에게 선물이 하나 더 있어.”

응? 하고 쳐다보자 설이는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아직, 확실하지 않아서.”

나를 꼬옥 껴안고는 속삭였다.

“나중에, 아직은 비밀이야.”

새침한 말투가 너무 귀여워서 나는 잠시 멍해졌다.

설이는 모르겠지만, 내 인생에 가장 큰 선물은 바로 한설이었다.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을 거야, 설아.

파도 소리가 들리는 차 안에서 설이를 담뿍 껴안은 채로 나는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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