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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키스는 형에게만 해 (45/65)

45. 키스는 형에게만 해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가 본 홈쇼핑 채널에서 보쌈 족발 세트를 판매하고 있었는데, 살코기를 큼직하게 썰어내는 장면을 보다가 침을 흘렸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주꾸미 철판 볶음과 소 불고기 패키지도 쇼 호스트가 맛있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이미 전화로 주문 버튼을 눌렀다. 식품 건조기를 파는 방송 화면의 말린 망고나, 요거트 제조기 방송의 요거트와 시리얼까지 전부 이상할 정도로 맛있어 보였다. 그냥 보기만 해도 군침이 흘렀다.

"와… 간장게장 빛깔 미쳤다……."

밥도둑 명성은 괜한 게 아니었다. 흰 쌀밥에 간장게장만 있으면 게임 끝이지.

결국 아직 주문한 다른 상품들 배달이 오기도 전인데, 나는 기어코 간장게장을 열 팩 주문하면 양념 게장을 두 팩 얹어주는 특가 세일 이벤트를 놓치지 않고 바로 주문해버렸다.

따지자면 예전부터 내 주변 사람들보다는 먹는 것을 꽤나 즐기는 편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 주변이라는 게, 식사보다 흡연을 더 좋아하는 우정혁이나 식욕을 포함해서 다른 것에 욕심이 없는 천사 같은 설이를 두고 하는 말이기 때문에 억울한 감이 없지 않다.

내 체격에 비해서는 많은 양을 먹기도 하고 딱히 편식도 안 하지만, 그래도 먹는 것에 집착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보는 것마다 군침이 흐를 정도로 식탐이 많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홈쇼핑 채널을 본 적도 거의 없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일주일 사이에 무려 열 다섯 종류의 음식을 홈쇼핑으로 주문했다. 반찬부터 간식, 하다못해 어린이용 비타민 영양제 젤리까지 맛있어 보여서 구매하고 말았다. 스스로도 미쳤다고 생각하고 반성하면서도, 대체 내가 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갑자기 체질이 바뀌기라도 한 걸까.

"택배 종류가 너무 많고 무거워서, 복도 안쪽까지 들어다 드리겠습니다."

보통 모든 택배는 1층 로비에서 받아서, 각 세대 현관문 앞까지만 전해주는 시스템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너무 방대한 양의 택배를 시킨 탓인지, 현관문 앞에서 경비원 분들이 초인종을 누른 것이다.

지난번 우연히 그루 엔터테인먼트 본사 비상구 계단에서 만났던 바로 그 경비원 분이었고, 뒤쪽에 다른 사람은 바퀴 달린 수레를 끌고 있었다. 수레 안에는 전부 다 내 것으로 추정되는 택배 상자들이 종류 별로 담겨 있었다.

신나게 주문할 때는 생각도 못했는데, 나 때문에 괜히 다른 분들께서 짐 옮기느라 고생을 하셨겠구나 하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아, 저기, 저 때문에 일이 배로 늘어서 힘드시죠. 에고, 죄송합니다… 그냥 거기 두시면 제가 다 집으로 가지고 들어가겠습니다. 분리수거도 제대로 할 테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아닙니다, 이미 허락 받았기 때문에 안쪽 복도까지는 저희가 들어다 드릴 수 있습니다."

"허락이요?"

"네. 그러니까… 동거인분… 6001호 세대주 분께서 안쪽 복도까지는 들어가도 된다고 하셔서, 신속하게 옮겨드리고 나가겠습니다."

경비원 두 분은 정중한 태도로 꾸벅 인사를 하고는, 내가 뭐라고 대답할 새도 없이 무척이나 빠르게 움직였다. 현관으로부터 거실 중문 앞으로 가기 전까지 이어지는 복도에 택배 상자가 차곡차곡 쌓였다. 두 발은 현관문 밖에 머문 채로 최대한 우리 집 복도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려고 허리를 길게 빼고 움직이는 모습이 꽤나 불편해 보였다.

그러고 보면 보통 다른 아파트의 경우, 경비원 분들이 입는 제복 같은 경비 복이 따로 있던데 우리 오피스텔은 모두 검은 정장을 입고 계셨다. 가끔 일 층 로비에서 경비 복을 입은 나이 지긋한 경비원 아저씨 분도 한 두 번 마주친 적이 있지만, 내가 자주 보는 분들은 거의 다 검은 정장 차림이었고 젊고 건장했다. 마치 방송국에서 봤던 연예인들의 보디가드들과 흡사한 모습이다.

식은 땀을 흘리면서 상자를 정리하는 얼굴들을 보니 미안해져서 내가 상자에 손을 대자, 두 사람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저희가 들겠습니다!”

"아, 이렇게까지 해주실 필요 없는데… 진짜 감사합니다. 두 분, 시간 괜찮으시면 잠깐 들어오세요. 커피나 음료수라도 한 잔 드시고 가세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두 사람은 택배 상자를 다 옮기고는, 내 말에 극구 사양하며 현관문 밖으로 뒷걸음질 쳤다. 뒤쪽의 경비원 분은 빈 수레 손잡이를 꾹 쥔 채로 눈치를 봤고, 낯익은 경비원 분은 정중한 태도로 안녕히 계시라며 꾸벅 인사했다.

"그러지 마시고…!"

팔을 붙잡았더니, 흠칫 놀라며 물러섰다. 무례했나 싶어서 얼른 놓아드렸다.

"제가 정말 죄송해서 그래요. 그럼, 가지 마시고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부리나케 집 안으로 뛰어들어가 냉장고에서 병에 든 수제 밀크 티 두 병을 꺼냈다. 이건 홈쇼핑이 아니라 내가 직접 가게에 가서 사온 것이었다.

천재적인 신인 배우 한설 주연의 로맨스 드라마 <정열의 꽃을 그대에게> 를 촬영 중인 프랜차이즈 플라워 카페에서 기간 한정으로 주연 배우들의 사진이 붙어 있는 음료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일정 금액 이상의 음료와 디저트를 구매하면 배우의 사인이 담긴 보조배터리를 증정하는 행사도 있었다. 물론 그건 플라워 카페 지점마다 한정 수량이 있어서 일찍 가지 않으면 구매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벤트 당일에 카페 오픈 전에 미리 문 앞에 가있기로 결심했다. 

설이에게 내 계획을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일찍 일어나기 위해서 휴대폰 알람을 맞추다가 그만 들키고 말았다. 내 옆에서 대본을 읽던 설이가 내 휴대폰 화면을 흘깃 보더니 불쑥 물었다.

"형, 아침부터 어디 가려고." 

왠지 모르게 못된 짓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설이는 자초지종을 듣고 나더니, 한숨을 푹 내쉬면서 나를 껴안았다.

"그런 건 내가 얼마든지 구해다 줄 수 있어. 굳이 형이 나갈 필요 없어."

"설아, 이런 건 직접 가서 사야 의미가 있는 거야!"

한 번도 연예인을 좋아해본 적 없는 설이는 내 의견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수고스럽게 형이 갈 필요 없이 협찬 사에서 준 것을 촬영 끝나고 집에 가져오겠다고 했다. 나는 “싫어, 내가 꼭 가야 해. 내 손으로 구해야 의미가 있는 거야.” 하고 아이처럼 떼를 쓴 끝에 결국 혼자 외출할 수 있었다. 

어차피 걸어서 5분 거리의 카페였다.

아침 일찍 서둘러서 나갔지만, 역시나 이미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한정판 인원수 내에 들어서 설이의 사인이 새겨진 보조배터리도 받아냈고, 유리병에 설이의 사진이 붙어 있는 밀크 티도 잔뜩 샀다. 입구에 있는 실물크기 설이의 등신대 판넬 옆에 서서 인증 사진도 찍을 수 있었다.

경비원 분들에게 그렇게 내가 쟁취해 온 밀크 티 병을 하나씩 건네자, 어색해하면서 서로 눈짓을 주고 받던 두 분은 결국 병을 받아 들었다.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저도 잘 먹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녜요, 짐도 옮겨주시고 늘 보안에 신경 써주시잖아요. 두 분 시간만 괜찮으시면 식사라도 대접해드리고 싶은데…"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안 된다며 휘둥그래진 눈으로 거절하셔서 아쉬웠다.

바쁘신 분들이니까 어쩔 수 없지.

"참. 그거 밀크 티인데 맛있더라고요, 요 앞에 카페에서 사온 건데… 사실 그 병 겉면에 붙은 사진이 제 동생이랍니다. 하하, 두 분 다 저희 애가 연예인인 건 아시죠? 요즘 드라마 주연이라서 인기 엄청 많거든요. 아주 난리더라고요."

코 끝을 검지로 쓱 밀어 긁으며 설이의 사진이 붙은 음료를 사기 위해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모였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요즘 사람 만날 일이 줄어서 설이 자랑을 할 곳이 딱히 없었기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말이 술술 나왔다.

"사실 극중에서 우리 설이가 꽃집 청년 역할이라, 거기 카페 가면 꽃 들고 있는 설이 모양 등신대가 있거든요. 실물 크기라서 그 옆에 서면 사람들이 다 작아지더라고요. 실물만큼은 아니지만 사진만으로도 골목길을 훤하게 비출 만큼 잘생기긴 했거든요, 우리 설이가. 저희 애가 바빠서 프런트로 전화할 때 목소리만 자주 들으셨겠지만, 아마 가끔 보셨을 거예요. 모자 푹 눌러쓰고 저하고 나오던 훤칠한 애 기억하시죠?"

"예에…"

경비원 두 분이 병을 쥔 채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아 참, 제가 인사도 제대로 안 했네요. 저는 한준이라고 합니다. 우리 설이 형이고요. 이제 곧 스물둘 됩니다. 두 분은 어떻게…"

"아…… 최민욱입니다."

"김영진입니다."

그냥 통성명하고 인사를 하자는 것뿐인데, 구십 도로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는 두 사람 때문에 나도 덩달아 허리 굽혀 인사했다.

원래 경비 일을 하자면 과묵해야만 하는 건지, 두 사람이 이십 대 후반의 나이이며 이 오피스텔에서 일한 것은 일 년도 채 안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많은 질문을 던져야 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이 곳으로 이사올 때쯤부터 둘 다 이 곳에서의 일을 시작하신 모양이었다. 근무 중에 너무 오래 붙잡고 있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아쉽지만 두 분을 보내야만 했다.

"그럼 형님들, 시간 되시면 꼭 놀러 오세요. 식사 대접하겠습니다!"

손을 흔들며 현관문 밖까지 배웅하자, 두 사람 다 쑥스러움이 많은 성격인지 무척이나 당황하며 어서 집안으로 들어가시라고 극존칭으로 대답하더니 쏜살같이 사라졌다.

***

"형, 오늘 뭐했어."

촬영 갔다가 오후 늦게 돌아온 설이는 겉옷을 벗으며 내 쪽으로 고개를 숙여 내 뺨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일종의 '다녀왔습니다' 인사 같은 것이었는데, 아주 가볍게 뽀뽀한 뒤에는 늘 바로 손부터 씻었다. 늘 한결 같은 순서였다.

어째서 그렇게 늘 손부터 씻는지 궁금해서 물었더니, 바깥에서 다른 사람들과 물건들을 만진 손으로 나를 안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내 동생 깔끔한 건 알아줘야 한다.

"낮에 집에 배달 온 게 많아서, 박스 뜯고 정리하느라 바빴어."

비누 향이 나는 손으로 나를 껴안고 내 뺨을 만지던 설이는 내 이야기를 들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집 안에 쌓여 있는 택배 상자를 봐도 설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뭘 그렇게 많이 사느냐 잔소리를 할 법도 한데, '형이 사고 싶으면 사는 거지' 하고 넘어가는 성격이었다. 오히려 내가 뭘 사거나 욕심 내면 설이는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나도 모아둔 돈이 있는데, 설이는 내게 월급도 따로 주면서 제 명의의 신용카드를 쓰게 했다. 생활비를 따로 지급하지 않는 대신, 제 카드를 사용하라며 신신당부했다.

사실 나는 그게 어떤 기분인지 알 것 같아서 그냥 설이가 하라는 대로 설이 명의의 카드를 썼다. 학생 시절, 내가 아르바이트 하면서 아낀 돈으로 장 봐서 고기 반찬을 했을 때 설이가 잘 먹어주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돈을 번다는 것은 무슨 일을 하든 쉽지 않고, 그래서 동기부여가 필요한 법이다.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 돈을 쓸 때 얼마나 행복한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과소비할 마음은 없었는데, 세상에는 어쩌면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많은지 모르겠다. 여태까지 이렇게 많은 걸 안 먹고 어떻게 살았는지 신기할 지경이다.

설이는 새로 생긴 내 취미를 오히려 적극 장려하는 편이었다. 내가 홈쇼핑으로 주문한 것 중에 뭔가를 잘 먹으면, 같은 메뉴로 맛 집을 찾아서 포장해왔다. 너무 많은 음식을 주문해서 냉동실에 다 안 들어가는 걸 가지고 낑낑거리고 있자, 설이는 아예 베란다 쪽에 둘 대형 냉장고를 한 대 더 구입하기까지 했다.

"집에 맛있는 게 너무 많은데, 너랑 나 둘 뿐이라서 유통기한 내에 다 못 먹을 것 같아."

"괜찮아."

"설아, 그러지 말고 내가 도시락 싸가지고 너 스케줄 따라다니면 어떨까? 설이 네 거랑 신 매니저님 거랑, 새로 오셨다는 로드 매니저님 거랑 다른 스탭 분들 것까지 내가 도시락 다 쌀 수 있어. 간식까지 다 내가 책임질게!"

"……형이 왜 그 사람들 도시락을 싸줘."

"어차피 나 너 없으면 집에서 할 일도 없고, 설이 너도 밖에서 변변찮은 식사 사먹는 것보다 형이 해준 게 더 좋지 않아? 네 것 만드는 김에 다른 사람들 것까지 하는 거 어렵지도 않고… 싫어?"

"……"

평소와 다름 없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그 사슴 같은 새까만 눈망울에 불편한 기색이 담겨 있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내 제안이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

"설아, 형 요즘 집에서 혼자 너무 심심하다. 밥도 매일 혼자 먹으니까 지겹고, 살만 찌는 것 같고… 네가 보기에도 나 아랫배가 좀 나온 것 같지 않아? 그리고 우리 설이 밖에서 멋있게 일하는 것도 좀 구경하고 싶은데, 안될까?"

내가 홈쇼핑과 식탐에 빠지는 것도, 생각해보면 다 할 일이 너무 없어서 그렇다. 정신 없이 바쁘게 살 때에는 홈쇼핑 시간제 세일이나 추첨 찬스 같은 것에는 관심도 없었다. 지금처럼 매끼마다 간식까지 꼬박꼬박 챙겨 먹으면서 하루에 약 다섯 끼 정도를 먹지도 않았었다.

이제는 능력 있는 동생 덕분에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잠을 쪼개서 잘 필요가 없어졌으니 정말 감사할 일이지만, 그래도 사람이 하는 일이 있어야지. 이대로 가다가는 폐인 되기 딱 좋았다.

내가 팔에 매달리며 간절한 눈길로 올려다보자, 설이는 입술을 꾹 다문 채로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서 고민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언제부터인가 가벼운 외출조차도 설이의 눈치를 보며 허락을 맡게 되었는데, 생각해보면 설이가 내 월급 주는 사람이니까 내게는 갑이었다.

제 팔뚝을 감싼 내 손가락을 떼어다가 만지작거리면서 설이는 신중한 표정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촬영장은 너무 위험해."

마치 병아리 한 마리를 길 한복판에 풀어놓는 일인 것처럼 걱정하고 있었다.

"설아, 이 형은 하이레벨이랑 권영도 이사님 매니저도 했던 몸이야!"

비록 새끼 매니저 급이라서 업무라고는 심부름과 운전뿐이었지만, 어쨌든 내 경력이 맞기는 했다.

'권영도'라는 이름이 내 입에서 나오자마자 왼쪽 눈썹을 비틀어 올리면서 살짝 인상을 찌푸렸던 설이는, 몇 초간 침묵하더니 겨우 입술을 열었다. 

"……매일은 안 되고, 촬영 일찍 끝나는 날만."

"정말? 정말이지, 설아?"

"그리고 도시락은 굳이 만들 필요 없어."

"에이, 매일도 아닌데, 몇 십 개도 만들 수 있어! 걱정 마, 설아. 형이 우리 동생 잘 봐달라고 진짜 맛있게 만들어줄게. 너 내가 잠깐 급식소에서 일했던 거 알지? 형만 믿어."

설이는 내게 뭔가를 말하려고 하다가, 기대감에 차서 태블릿 피시에 다운로드 해뒀던 요리책을 펼치는 나를 보더니 그저 입을 다물었다. 내 어깨를 만지작거리고 지분거리면서 뒷머리에 입을 맞춰줄 뿐이었다.   

***

드라마 <정열의 꽃을 그대에게>는 촬영 후반부를 향해 가는 중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이주 안에는 촬영이 모두 끝날 예정이었는데, 시청률과 화제성이 높아져서 연장방송이 확정되었고 결국 이번 달 말까지 촬영이 이어지게 되었다고 신매니저님께 전해 들었다.

세트장 방문도 처음인데다가 설이의 드라마 촬영 팀을 직접 만나는 것도 처음이어서, 무척 떨렸다. 밤늦게까지 밤과 호두를 꿀에 조려서 간식을 만들어서 인원수에 맞게 소포장을 했는데, 거대한 박스를 가득 채울 정도의 양이었다. 그 정도면 졸릴 만도 했는데 긴장해서 그런지 눈이 반짝반짝 했다.

"아니, 그냥 오셔도 되는데 이런 건 언제 다 준비하셨어요?"

오랜만에 만난 신정아 매니저는, 바쁜 와중에도 내게 아는 척을 해주며 몇 번이고 감사의 말을 전했다. 새로 왔다는 막내 로드매니저와 소개시켜주고, 감독님께 내가 설이의 형이라며 인사도 시켜주었다.

별 것 아닌 간식을 다들 좋아해줘서 다행이었다. 설이의 팬들이 보낸 커피 트럭에서 스텝들이 모두 커피를 가져와 마시면서 내가 만든 간식을 먹는 모습을 보니 뿌듯했다.

"도시락은, 매니저님들하고 우리 설이 것만 준비했어요. 아무래도 다른 분들 것까지 만들기는 시간도 부족했어서… 입맛에 맞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유, 진짜 이러실 필요 없는데. 한설 씨 형님덕분에 저희만 호강하게 생겼네요."

신 매니저는 도시락 통을 받아 들고 미안해하는 기색이었지만, 휴식할 짬이 나자 로드 매니저와 함께 재빠르게 도시락을 든 채 사라졌다.

설이는 메이크업을 받거나 대본을 받아 들고 의자에 앉아 헤어 드라이를 받는 와중에도 내가 누군가와 대화하면 거울을 통해서 빤히 바라봤다. 감독님께 불려갔다가도 바람처럼 달려와서 내 곁에 서 있었다.

평소에는 촬영장에서 물만 조금 마실 뿐,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는다는 신 매니저님의 말과 다르게 설이는 내가 입에 넣어주는 것을 곧잘 먹었다. 호두 정과와 밤 절임은 물론이고, 따로 설이만 먹이려고 챙겨간 인삼 꿀 절임도 잘만 받아 먹었다.

내가 따라온 촬영은 두 씬만 찍으면 되기 때문에 비교적 일찍 끝나겠지만, 평소에는 밤을 새서 촬영 작업하는 날도 잦아서 체력을 잘 보존하는 게 중요했다. 목 건강을 위해 보온병에 담아온 레몬차도 착하게 잘 받아 마셨다.

"설아, 오늘 끝나고 매니저님들 같이 저녁 식사 하시자고 말했더니 신 매니저님이 너 저녁 약속 있다고 하더라? 누구 만나기로 했어?"

드라마 역할에 맞춰서 수수한 청년의 모습을 한 설이가 앞머리를 내린 채로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린넨 앞치마를 맨 채로 청바지에 난방셔츠를 입은 꽃집 청년의 모습인데, 왜 이렇게 섹시해 보이는지 모를 일이다.

"형이랑 갈 데 있어."

"나랑?"

고개를 끄덕이는 흰 얼굴에 수줍은 미소가 떠 있다.

"형이랑 단둘이 밤바다 보러 가려고."

나야 설이와 어딜 가도 기쁜데다가 오랜만에 바다에 간다는 생각에 설레기도 했지만, 설이가 피곤하지는 않을지 걱정이었다. 설이에게 도시락을 한 숟갈씩 떠 먹여주면서 "너 쉬는 날 가면 안 돼?" 하고 넌지시 물었지만 설이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 가고 싶어."

제법 단호한 표정으로 떼쓰듯이 말하는 표정이 귀여워서 그러자고 대답했다.

설이는 뭐가 그렇게 기분 좋은지 이따금 이유 없이 배시시 웃으며 나를 끌어안았다.

촬영장은 그 덕분에 수런거렸다. 신 매니저님 말에 의하면, 평소 설이는 늘 무표정인데다가 특히 여배우와의 애정 씬이 있는 날에는 분위기가 더욱 무거워진다고 했다. 

설이의 상대역인 여자 주인공 역할의 배우 배민아는, 삼십 대 초반으로 설이보다 훨씬 나이가 많지만 여전히 젊고 아름다운 배우였다. 매번 작품마다 흥행에 성공하며 인지도도 높은데다가 많은 연예인들이 이상형으로 꼽는 배우라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설이는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배민아와 딱 인사만 나눌 뿐, 사담을 전혀 나누지 않는 것 같았다. 대기실에서 내 무릎에 눕거나 날 껴안고 등 뒤에서 내게 몸을 밀착한 채로 강아지처럼 응석 부리던 설이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화난 것으로 착각할 것 같은 표정으로 스탠바이하고 있었다. 그런 설이의 태도가 익숙한 듯 배민아도 메이크업 수정을 받으며 설이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그러다가 촬영이 시작되자, 두 사람의 표정이 생동감 넘치는 얼굴로 바뀌었다. 둘 사이에 애절한 연인의 분위기가 절로 생겨났다.

"와… 역시 배우는 다르구나."

혀를 내두를 연기였다. 내 눈앞에 찬바람 쌩쌩 불던 두 사람이 어느새 서로 죽고 못 사는 드라마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아마도 평소 친화력이 부족하더라도 이렇게 일에는 전혀 지장을 주지 않기 때문에 설이에 대한 감독님의 평가가 높은 모양이었다.

설이는 꽃다발을 만들고 있다가 여배우가 가게 안으로 들어오자, 고개를 푹 숙이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 때에는 슬픔을 숨기듯 짐짓 웃는 얼굴을 만들어냈다.

"……오셨어요. 유지 씨. 다시는 제 얼굴, 보기 싫으신 거 아니었나요."

"그때는 미안했어요."

여 주인공이 주저하며 다가오자, 설이가 한 걸음 물러섰다. 등 뒤의 테이블에 허리가 닿았다. 우수에 찬 눈동자가 바닥을 내려다보며 기운 없이 미소 지었다. 나지막한 한숨을 내뱉었다.

"괜찮습니다. 미소가 친 아빠를 만나니까 행복해 보이던데요. 유지 씨도…… 그렇고요.”

“그건, 오해예요!”

여 주인공은 성큼 다가와서 설이의 손을 잡았다.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늘 내가 조물거리고 내 몸을 쓰다듬던 설이의 하얗고 큰 손을 다른 누가 잡고 있는 모습은 언제 봐도 적응이 안 되고 낯설었다. 아마도 설이가 워낙 타인과 닿는 것을 싫어해서 더 그런 것 같았다.

연기를 위해서인지 설이는, 여 주인공의 손이 닿자 당황하는 기색이지만 기분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그 말은, 제가 유지 씨에게 다시 고백해도 된다는 뜻입니까?”

“아…”

“확실하게 대답해주세요, 제가 당신에게 목말라 있다는 거 아시잖아요.”

설이는 짝사랑에 불타는 연하 남의 모습으로 상대의 두 손을 잡으며 무릎을 꿇었다.

아래서 올려다보는 설이의 애처로운 눈길이 얼마나 예쁜지, 이제 내가 아니라 저 배우도 알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왠지 좀 기운이 빠졌다. 짜증이 나는 건가, 아무튼 좋지 않은 기분이었다. 어차피 이 모든 게 연기일 뿐이라는 건 알지만 설이에게 러브라인이 있는 작품은 처음이라서 마음이 이상했다. 화면으로 보는 것보다 실제로 두 사람의 스킨십을 목도하는 것은 더 큰 파급력이 있었다.

“제가 착각하는 거라면 말해줘요, 지금 당신에게… 키스하기 전에.”

일어서서 상대 역 배우의 작은 어깨를 감싸 쥔 설이가 금방이라도 키스할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나른하게 뜬 눈으로 상대의 눈을 마주 내려다보면서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침이 꿀꺽 넘어갔다. 숨 쉬는 것도 잊을 정도로 집중하며 관람하는 중이었다.

키스 씬이 있다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진짜로 입술이 닿는 건가. 혹시 아예 혀를 섞으면서까지 키스하는 건 아니겠지? 이 드라마 시청 가능 연령이 어느 정도였더라.

머릿속에 불이 날 정도로 혼돈 속에서 생각하는 사이, 감독이 컷! 하고 외쳤다.

정말로 입술이 닿을 듯한 순간, 설이가 이쪽을 흘깃 보며 눈으로 웃는 것 같았는데 착각일까.

내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동생의 연기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너그러운 형의 얼굴은 아니었을 것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빛나는 두 사람의 스킨십을 꼴사납게 질투하는 마른 멸치 같은 남자의 초라한 모습이었겠지.

결국 키스는 하지 않았다. 시나리오에 있던 것을 설이가 반대했던 모양이다. 화면에는 키스를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연기는 두 사람의 포옹으로 이어졌고 스킨십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도 모르게 안심해서 길게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촬영을 끝낸 설이가 다가와서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귓가에 속삭였다.

“뭘 그렇게 놀라, 나 형에게만 키스하는 거 알잖아.”

기쁜 듯 속삭이는 목소리에 얼빠진 표정을 하고 있자, 설이가 은근하게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이따가 차에서 실컷 해줄 테니까, 표정 풀어. 형.”

아… 앙큼한 내 동생, 귀여워서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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