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행복한 나날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정오가 한참 지난 시간이었다. 간밤에 누구 밑에서 우느라 팅팅 부은 눈을 끔뻑거리며 잠시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눈알이 뻑뻑한 것이 며칠 밤을 샌 느낌이었다. 택배 상하차 아르바이트 후에 몸살 났을 때보다 온 몸이 더 아팠다. 사람 형태만 남았을 뿐이지, 내 몸은 현재 흐물흐물한 종이인형과 다를 바 없는 상태였다.
"아, 크흠. 아…"
목을 가다듬고 목소리를 내봤는데, 무척이나 허스키해서 다른 사람 같았다. 아마도 내가 기절하듯 잠든 이후로도 격렬한 행위는 계속되었고, 나는 내내 신음했던 모양이다. 지난 밤이 선명하게 떠올라서 귓불이 뜨거워졌다. 발끝부터 코밑까지 이불 속에 돌돌 감겨 눈만 내놓은 상태로 격렬했던 순간들을 잠시 떠올렸다.
우리 설이, 생각보다 참 야생적이란 말이야…….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뜨거운 장면들을 억지로 떨쳐냈다.
겨우 용기를 내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데, 온몸의 관절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 앉아, 배쪽을 손바닥으로 슬슬 쓸었다.
배꼽 언저리가 유난히 뻐근하고 뜨끈해서, 몇 번이나 반복해 그 부근을 쓸다가 스탠드 조명 옆 쪽으로 손을 뻗어 버튼을 눌렀다. 커튼 개방 버튼으로 두꺼운 커튼을 쳐내고 블라인드 각도를 맞추자, 오후의 따사로운 햇빛이 넓은 창으로 들어와 침실 안을 비췄다.
"앗……"
지난 밤 나에게 엄청난 수치심과 묘한 기분을 선사했던 침대 옆 거울에 시선이 갔다. 머리카락이 산발이 된 내 얼굴이 어제보다 수척해 보였다. 누군가가 쪽쪽 빨아먹고 간 우유팩처럼 삐쩍 말라 있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설이가 내게 입혀놓고 간 잠옷이 너무 커서, 단추를 다 잠갔어도 쇄골까지 훤히 드러났다. 목덜미와 가슴팍까지 붉은 잇자국과 키스마크가 선명하게 남은 것이 거울을 통해 적나라하게 보였다.
내 파자마도 많은데, 왜 설이는 늘 큰 제 잠옷을 내게 입히는지 모를 일이다. 거울을 보니까 괜히 엄한 기억만 떠올라서 고개를 획 돌렸다.
설이가 준비해두고 갔는지, 침대 머리맡에 생수가 놓여 있었다. 새벽부터 촬영 가느라 바쁜 와중에 나 힘들 까봐 침대 시트와 이불도 새 것으로 갈아두고, 잠든 나를 말끔히 닦여서 제 잠옷까지 입혀 두었다.
아니, 이렇게 배려심이 넘치는 아이인데 어째서 침대에서는 그렇게 난폭한 걸까. 안 된다고 그만하자고 울어도 좀처럼 나를 놔주지 않는다.
생수를 몇 모금 연거푸 마신 뒤에야 휴대폰을 집었다. 자다가 깨면 연락하라던 설이의 말이 생각났다.
"……바쁜 애한테 전화해도 되나."
잠시 고민하다가 설이가 아닌, 신정아 매니저님 휴대폰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무래도 설이는 촬영 중일 확률이 높았다. 몇 번 신호음이 간 끝에 신 매니저님이 전화를 받았다.
- 아, 형님!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움직일 수 있으세요?
밝은 목소리로 내 안부를 묻는 신 매니저의 목소리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지난 밤에 나와 뭔가를 했다고 설이가 광고하지 않고서야, 전화를 받자마자 내 몸이 어떤지 물을 리가 없다. 나는 당황한 채로 입만 뻐끔거리고 있었다.
"아… 어……"
신 매니저는 말을 이었다.
- 한설 씨가 형님 몸이 안 좋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로케 최대한 빨리 끝내고 싶다고요. 어제도 촬영 끝나고 갑자기 혼자 운전해서 서울로 가던데, 어제저녁부터 아프셨나 보네요. 지금은 좀 어떠세요?
"아… 그… 괘, 괜찮습니다."
- 아이고. 목소리가 완전히 갔네요. 한설 씨가 걱정할 만 하네요.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신 매니저의 목소리에 괜히 죄책감이 들어서 뒷목을 긁적였다. 내 예상대로 설이는 지금 한참 촬영 중이라고 했다.
신 매니저님은, 촬영장에 함께 가지 못한 나를 위해서 설이가 얼마나 연기를 잘 하고 있는지 브리핑해주었다.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첫 드라마이지만 떨지도 않고 실수 하나 없이 촬영 현장에 잘 적응하고 있다고 했다. 완벽을 추구하는 작가의 작품이라서 감정선이 복잡한 캐릭터를 연기해야 하는데, 설이가 캐릭터 해석 능력이 탁월하다고 감독으로부터 칭찬이 자자하다고 한다.
대견한 설이 소식을 흐뭇하게 듣고 있는데, 아! 하고 휴대폰 너머에서 신 매니저가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 근데 형님, 한설 씨 어제 형님 뵈러 집으로 갔던 거 맞습니까?
"어… 네, 맞아요. 저랑 같이 있었는데, 왜 그러시죠?"
- 음, 촬영 중에 소매를 걷는 의상이 있는데… 한설 씨 팔에 어제는 없던 흉터가 잔뜩 생겼더라고요.
"흉터요?"
- 예, 날카로운 것에 팔뚝을 여기저기 긁힌 것 같은데, 어쩌다가 이랬냐고 물어도 대답도 없고, 그냥 조용히 웃기만 해서요. 뭐, 기분이 나쁜 것 같지는 않아서 다행이긴 한데. 형님도 아시다시피 한설 씨가, 현장에서 진짜 과묵한 편이거든요. 오죽하면 선배 배우 분들도 한설 씨한테 말 걸기를 어려워하더라고요. 아무튼, 간밤에 어디서 고양이가 할퀴기라도 한 건지… 심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일단 촬영은 메이크업으로 가렸습니다.
"아…… 네에…."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왜 설이 팔에 상처가 생겼을까 골똘히 생각하다가 겨우 지난 밤의 기억을 떠올렸다. 뜨거운 정사의 중간부터는 내가 이성을 잃고 설이의 팔에 손톱을 세웠던 것 같기도 하다. 아니, 분명 그랬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침대에 무릎 꿇은 채 대역죄인처럼 엎드렸다. 목이 아파서 내적으로 포효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감히…! 우리 설이의 몸에, 배우의 몸에 무슨 짓을 한 거야…!
나 따위야, 어차피 집에만 있는 사람이니까 잇자국이나 손자국으로 온몸이 얼룩덜룩해도 아무 상관없지만 우리 설이는 슈퍼스타였다. 천만 명의 관객들 시선이 쫓는 몸인 것이다. 그 백옥 같은 피부 위에, 근육이 잘 발달된 늘씬하고 잘 생긴 팔뚝 위에, 내가 감히 손톱 자국을 냈다니. 침대에 웅크려 부들부들 떨면서 나는 침묵 속 반성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다. 설이의 전화였다.
- 형, 일어났어? 왜 나한테 바로 전화 안 했어. 다른 사람 말고 나한테 하라니까…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귀여워서 비실 웃음이 샜다. 나한테는 이렇게 투정도 부리면서 밖에만 나가면 과묵한 남자로 통한다는 사실이 마냥 귀여웠다. 어쩌면 우리 설이는 그냥 수줍음이 많아서 가만히 있을 뿐인데, 워낙 분위기부터 눈빛까지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있는 미남이라서 사람들이 다가가기 어려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너 바쁠 것 같아서 그랬지. 촬영 중이라더라."
설이는 조그맣게 투정부리듯 대답했다.
"하나도 안 바빠. 형 전화 받는 것보다 바쁜 일 따위 없어."
다정한 목소리로 예쁜 말을 해주는 설이 때문에 나는 휴대폰을 든 채로 입이 귀까지 늘어났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내 몸과 방 안에 가득 남아 있는 설이의 체향 덕분인지 설이가 마치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가까이 느껴졌다.
"형 지금쯤 일어날 것 같아서, 맞춰서 집에 도착하도록 배달 시켜놨어."
"배달?"
"응, 식사 해야지. 아마 현관문 앞에 있을 거야."
이불 속에서 몸을 일으켜 방 밖으로 나서면서 나는 의아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비나 지하에서 호출 온 적 없었는데?"
"형 자는데 방해될 까봐 다른 사람 시켰어."
"아… 안 그래도 되는데."
현관문 앞에는 정말 보냉백이 놓여 있었다. 꽤 묵직한 것을 들어다가 거실을 가로질러 아일랜드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배달 음식이 잘 도착한 것을 확인하자, 휴대폰 너머에서 설이가 자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따뜻할 때 먹고, 더 자. 목욕은 내가 집에 가서 시켜줄 테니까 꼼짝 말고 침대에서 쉬어."
"아니… 환자도 아닌데, 뭐 그렇게까지……"
"내가 그러고 싶어, 형. 그렇게 해줘. 응?"
어려운 일도 아니고, 내가 호강하는 부탁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러마 하고 대답했다. 표정은 볼 수 없지만 내 순순한 대답에 설이가 조용히 웃는 얼굴이 그려졌다. 촬영이 재개되어 전화를 끊었고, 나는 유명 한정식 집의 이름이 박혀 있는 보냉백을 열어보았다.
보온병에 담긴 배 도라지 차와 함께 보온 도시락 통 속에 죽 세트가 담겨 있었다. 전복죽, 참치죽, 야채죽, 닭죽, 호박죽… 나 혼자 먹는 건데 죽 종류만 다섯 가지였다. 아직 그릇이 전부 따뜻한 것을 보니, 정말로 방금 전에 배달이 온 모양이었다.
식탁 의자에 앉으려다가 다시 방으로 들어가서 푹신한 담요를 꺼내왔다. 그걸 의자 위에 접어서 깔아놓고서 겨우 의자에 올라 앉을 수 있었다. 지난 밤의 여파로 엉덩이 안쪽이 시큰거리는 것도 문제였지만, 계속 마찰된 엉덩이와 허벅지 부분의 피부가 딱딱한 곳에 닿으면 쓸려서 아팠다. 평소 생활할 때에 절대로 아플 수 없는 은밀한 부위에서 찌릿하게 전해져 오는 통증이 야릇하게 느껴져서 혼자 헛기침을 해댔다.
전복죽 통을 열어서 한 수저 뜨다가 휴대폰에 남은 메시지들을 읽어보았다. 가장 최근에 와 있는 것은, 우정혁의 짧은 문자였다.
'살아있냐.'
오늘 아침 일찍 보낸 걸로 봐서, 꽤나 일찍 일어난 모양이다. 아마 우정혁은 숙취 해소를 위해서 아침 식사로 컵라면 같은 걸 먹어야 했을 것이다. 반면에 나는 동생이 바쁜 와중에도 날 위해 배달 시켜준 따뜻한 죽을 먹고 있었다. 이 유난스러운 호강을 자랑하려다가 애인도 없는 우정혁이 불쌍해서 그만뒀다. 그리고 잔뜩 쉬어버린 내 목소리를 들으면 틀림없이 한숨 쉬면서 쯧쯧거릴 것 같아서 그냥 ‘응.’ 하고 답장을 보냈더니, 죽 한 그릇을 다 비울 때쯤 답장이 왔다.
'그래. 난 저녁 비행기로 다시 떠난다.'
아무리 취했어도 설이가 그날 짐승처럼 꼬리와 귀를 단 모습을 했던 것은 분명히 기억할 텐데, 그런 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우정혁이 고마웠다. 꽤나 믿음직스러운 놈이라서, 비밀 엄수에 대해서는 걱정도 안 되었다.
우정혁은 한참 뒤에 '너네집 똥개 무서워서 다시는 네놈이랑 술 안 마신다' 하고 메시지를 보내와서 나를 웃게 만들었다.
설이는 로케이션 촬영이 끝난 뒤에도, 서울에 돌아와서 새벽까지 촬영하는 날이 꽤 있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집에 일찍 들어오려고 노력했다. 나는 한 번도 설이한테 빨리 퇴근하라고 바가지를 긁은 적이 없었는데, 설이는 촬영 팀 회식 같은 것도 전부 마다하고 무조건 집으로 왔다. 그야말로 칼퇴였다.
심지어 촬영 중간에 시간이 두 시간 이상 빌 때면, 꼭 집으로 돌아와서 나와 잠깐이라도 시간을 보낸 뒤에 다시 촬영장으로 돌아가는 수준이었다.
이로써 배우 한설이 집안에 금 덩어리를 숨겨놨다는 소문은 점점 커져만 갔다.
"설아, 그래도 그런 회식 자리 한 번씩 참석하고 그래야지. 그게 사회생활이야."
"……싫어. 형이랑 있을래."
"가서 사람들이랑 밥만 먹고 와. 한 시간만, 아니 삼십 분만. 응?"
내가 어르고 달래서 겨우 식사 자리에 보내놓으면, 그날은 설국지색 커뮤니티의 자유게시판에 불이 났다. 평소 안 하던 짓을 하는 설이 때문에 팬들이 놀란 것이다. 한 번은, 드라마 팀이 회식하는 식당의 종업원 중에 눈송이가 있었던 모양이다. 설이가 있는 룸에 서빙을 하면서 실시간으로 정보가 올라왔다.
'한설 회 먹음. 광어 회 한 점 집어먹는데도 섹시함.'
'특종, 한설 술 안 마심. 옆에 감독이 권했는데 사이다 마심.'
'한설 진짜 한 마디도 안 하는 듯. 웃지도 않음. 마네킹인가 봄.'
'한설 손목시계만 쳐다봄. 따로 약속 있는 듯.'
'정각 되자마자 한설 인사하고 튀어나감. 뭐지?'
설이가 회식자리에서 떠나면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실시간 글도 끊겼고, 팬들은 대체 설이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궁금해했다.
"형, 나 다녀왔어."
정말로 내 부탁대로 딱 삼십 분만 채워서 회식 자리에 앉아 있다가 돌아온 설이는 꼬리라도 흔들 기세로 내 품에 뛰어들어 뺨을 비벼댔다. 나는 내 말대로 조금씩 사회생활에 적응해주는 설이에게 착하다, 잘 했다, 칭찬을 해줬지만 아무래도 설이가 자발적으로 사람들과 식사 약속이나 술 약속을 잡는 날은 아주 멀게만 느껴졌다.
집에 오면, 그 순간부터 설이는 내게 몸을 붙인 채로 있었다. 예전보다 응석이 더 심해진 느낌이었다.
이제는 내가 집안일 하는 꼴도 봐주질 않았다. 내가 설거지를 하려고 하면 그것도 뺏어서 제가 다 해버리고, 청소기를 좀 돌리려고 했더니 로봇 청소기를 다섯 대나 사서 바닥에 풀어두었다. 나는 무슨 검은 로봇 염소들이 풀 뜯는 목장인 줄 알았다. 건조된 빨래를 개어놓는 일까지 설이가 일사천리로 모두 해치웠다.
아무리 그래도 설이의 생활 매니저로 따로 설이와 계약해서 돈 받고 일하는 건데, 이런 식이면 일종의 직무유기였다.
"참, 설아. 집에 사과 있는데 깎아줄…"
"내가 깎을 거야."
나는 쟁반과 과도, 사과 알마저 빼앗겼다. 설이는 깔끔하게 껍질을 제거한 사과를 내 입에 넣어주고는 흐뭇한 얼굴을 했다.
내가 아무것도 못하도록 소파에 앉혀두고는 내 옆에 꼭 붙어 앉아 내 어깨에 팔을 올리거나 내 허리를 끌어안고 내 무릎에 누웠다. 그러다가 나를 아예 제 무릎 위에 앉혔다. 내 어깨에 턱을 올려 내 허벅지 위로 드라마 대본을 펼쳐놓고 읽었다. 대본을 한 장씩 넘기면서 큰 손으로 내 손을 감싸 쥐고 만지작거렸다. 설이가 조용히 집중하고 있어서 나는 방해하지 않으려고 얌전히 설이 무릎에 앉아 손을 내준 상태였다.
드라마 촬영은 중반부를 향해 가고 있었고, 방송이 된 것은 2화 정도였다.
설이는 남자 주인공으로, 아이가 하나 있는 미혼모를 짝사랑하는 옆집 청년 역할이었는데, 그게 일반적이지 않은 캐릭터이기 때문인지 첫 방송 때부터 폭발적인 시청자들의 반응이 쏟아졌다. 그 덕분에 설이의 팬들 연령대가 다양해졌다.
영화 데뷔작에서는 고등학생 역할이었고, 지금도 아직 어린 청년인데도 불구하고 달콤한 연애를 하는 왕자님 같은 역할이 아니라 연상의 미혼모를 사랑하는 비련의 남자 역할을 선택했다는 사실이 화제가 된 모양이었다.
시나리오를 봤을 때부터 너무 재미있었고, 설이가 맡을 역할이 정말 멋지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서 내가 추천했던 작품인데, 좋은 반응을 얻어낼 수 있어서 나도 덩달아 뿌듯해졌다. 물론 이 모든 인기는 설이의 멋진 연기 덕분이지만 그것 또한 너무나도 자랑스러운 바였다.
신중하게 대본의 지문을 검지로 그어가며 읽던 설이가 흐음, 하고 목 안으로 고민하는 듯 앓는 소리를 내었다. 나도 설이를 따라 대본을 읽는 중이었는데 페이지를 넘기지 않고 물끄러미 계속 한 장면을 보는 설이의 행동이 의아해서 흘깃 등 뒤를 돌아보았다. 얼굴이 너무 가까워서 내 뺨에 설이의 콧날이 닿았다.
"왜, 대사가 잘 안 외워져?"
"…음, 그게 아니라 인물의 행동이 별로 이해가 안 돼서 그래."
설이는 대본을 소파 위로 내팽개치고 두 손으로 내 허리를 꼬옥 끌어안았다.
극 중에서 옆집의 여자를 짝사랑하는 청년은 꽃집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마음을 전하지 못해서 주저하고 있었다. 꽃 한 송이를 들고 집 앞에서 그녀를 매일 기다렸다. 그 여자가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거나 시장을 보며 지나갈 때마다 벽 뒤로 숨어버렸다. 여자의 전 남자가 나타나서 그녀를 껴안으며 다시 잘 해보자고 애원하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그대로 달아나버린다. 설이는 짝사랑의 괴로움으로 만취해서 혼자 괴로워하는 청년을 연기해야 했다.
"어디가 이해가 안 되는데?"
설이는 내 손가락을 쥐고 꼼지락거리다가 내 눈치를 흘깃 보더니 대답했다.
"그냥, 없애버리면 되지 않나 싶어서."
"응? 뭐를?"
"저 남자."
설이는 당연한 것을 왜 묻냐는 듯 눈을 예쁘게 깜빡 거리며 천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말문이 막혀서 응? 하고 되물을 뿐이었다. 내 손가락에 쪽 입맞춘 설이는 수줍게 고개를 떨구면서 말했다.
"유지는 저 남자가 제 아이의 친부이기 때문에 저 남자와의 관계를 다시 이어가야 하나 고민하는 거잖아. 저 남자만 없으면, 유지는 무혁의 마음을 받아주겠지. 무혁은 유지를 사랑하고, 아이한테도 잘 할 테니까… 좋은 남자가 되어줄 거야."
"어… 그렇다고… 해서… 살인을 할 수는 없잖아?"
나는 당연한 말을 했지만, 설이는 피식 웃었다.
"뭐. 방법이야 많으니까. 미필적 고의는 증명이 어렵고."
"어… 음… 그래……."
뭐, 작품 속 캐릭터에 대한 해석이야 다양할 수 있는 거지, 나는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설이는 나를 껴안고 내 뺨에 진하게 입을 맞추면서 귓가에 속삭였다. 목소리가 끈적이고 은밀해졌다.
"나는, 형에게 좋은 반려가 되어줄 거야."
어느새 튀어나온 건지, 설이의 보송보송한 꼬리가 내 허벅지를 감싸듯이 쓸었다. 설이는 손을 넓게 펼쳐 내 아랫배에 손바닥을 밀착하고는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기분이 무척 좋은 모양이었다. 설이는 작게 웃음을 흘리면서 내 귓바퀴에 제 콧날을 비비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 뒷목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는 듯이 킁킁거렸다. 간지러워서 하지 말라고 했더니, 아예 목덜미를 깨물었다.
"아얏…! 깨물면 아프다니까…"
"형은 내 거야."
샤워할 때마다 거울에 비치는 내 몸에 설이의 잇자국이 늘 새롭게 남아 있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손목이나 발목에는 꽉 옭아맸던 설이의 손자국이 아직도 벌겋게 남아 있었다. 힘 조절을 하려고 해도, 막상 관계가 시작되면 설이는 제 힘을 제어하기 힘들어했다.
하긴, 설이 팔뚝에 손톱 자국을 낸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다행히도 설이의 몸은 회복 능력이 좋아서, 설이의 팔에 남은 손톱 자국은 하루 만에 사라졌다. 설이는 어쩐지 그걸 무척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잠들기 전에 침대에서 내게 달라붙어 치근거리다가, 난데없이 제 손가락을 깨물어 달라며 검지를 내 입술에 앞에 내밀기도 했다. 피가 날 정도로 깨물어서 상처를 내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하는 얼굴이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고 말았지만, 설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자신이 내 어깨에 잇자국을 잔뜩 새기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새벽에 문득, 배가 아팠다.
어떻게 아픈지 설명하기는 어려운데, 아랫배 쪽이 무언가로 누르듯이 뻐근하게 아파서 잠이 깨어버렸다. 배탈이 나거나 속이 안 좋은 것은 아니었다.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통증이었다. 그렇다고 병원에 가거나 진통제를 먹을 만큼 아픈 것은 아니었고, 가볍게 신경이 쓰일 정도였다.
"으음… 뭐지."
중얼거리며 뒤척이자, 등 뒤에서 나를 껴안은 채로 잠들어 있던 설이가 나른한 숨소리를 내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내 몸을 제 쪽으로 끌어당겨 품에 가득 안으면서 설이가 잠에서 덜 깬 낮은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형, 왜 그래. 왜 깼어…?"
열이 많은 설이는 상체를 벗은 채였는데, 내 등뒤에 닿는 설이의 가슴에서 느껴지는 체온이 너무 따뜻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작게 저었더니 설이가 나를 다시 재우려는 듯이 내 가슴팍 위를 손바닥으로 토닥거렸다.
그러나 한 번 깼더니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다. 낮에 하는 일이 없어서 자주 졸았더니 그걸로 잠이 충족된 모양이었다. 설이가 일찍 퇴근해서 집안일을 대신 해주기 때문에 나는 지나칠 정도로 한가해졌다. 웬만한 백수도 이 정도로 하루 종일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루 엔터 본사에 나가서 일이나 신 매니저님 일이나 도울까 했더니, 설이가 매서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어디서 이천 피스 짜리 직소퍼즐을 몇 개나 사와서는, 그걸 다 끼워 맞춰서 완성하고 나면 본사에 나가서 일해도 된다고 했다. 아주 신데렐라가 따로 없었다.
"…잠이 안 와?"
예민한 설이가 내 숨소리만으로 내가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는 나지막이 물어왔다. 어차피 숨길 수도 없어서 응, 하고 대답했더니 설이가 주저 없이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 벽에 붙은 전자 시계를 보니 새벽 세 시였다.
"코코아 타줄게, 마시고 자자.”
곤히 잘 자는 애를 깨워서 코코아 타라고 시키는 게 어쩐지 너무 미안해서 싫다고 했더니, 설이는 조용히 웃었다.
“어차피 오후 촬영이라서 괜찮아. 나 별로 잠 없는 거 알잖아.”
착한 설이는 내 허벅지를 토닥거리며 그렇게 나를 안심시키고는 거실로 나갔다.
잠시 뒤에 마시멜로우가 들어간 코코아 두 잔을 침대로 가져왔다. 따뜻하고 달콤한 코코아를 둘이서 호로록 마시고 있는데, 자다가 일어나서 머리카락이 뻗친 설이의 동그란 뒤통수가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설이는 멍한 표정으로 머그잔을 쥐고 있다가 내가 웃자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뭔가를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왜 그래? 무슨 생각해?”
설이는 눈을 깜빡 거리며 내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꿈. 아까 꿈 꿨거든.”
“꿈? 무슨 꿈인데? 설이 너, 꿈 잘 안 꾸잖아.”
내 말에 설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왼쪽 눈썹을 밀어 올려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꿈 속에서 형이 뭔가를 안고 있더라고. 솜 뭉치 같은 건 줄 알고 내가 뭐냐고 물어봤더니 형이 그냥 웃었어. 그리고는 품에 있는 걸 나한테 보여줬는데, 무슨… 하얗고 작은 동물이었어. 꼬리가 달려 있었거든. 귀가 뾰족하고…… 고양이였으려나.”
“음, 고양이?”
“아마 그렇겠지. 되게 작았어. 형이…… 그걸 너무 예뻐하는 것 같아서,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어.”
설이는 머그잔을 침대 옆 선반에 올려두고는 내 허리를 껴안으며 허벅지 위에 머리를 기대고 드러누웠다. 꿈 속에서 봤던 작은 동물을 떠올리며 질투하는 표정이 아이 같았다. 내가 웃으면서 이마와 귀를 만져주고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자, 설이는 그제야 속이 좀 풀린 것 같았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고양이나 강아지를 한 마리 키워도 좋을 것 같다. 여태까지는 바빠서 반려동물 키울 생각을 한 번도 못해봤지만, 나는 동물들을 꽤나 좋아하는 편이었다. 게다가 요즘에는 집에서 혼자 할 일도 없으니 동물을 데려와서 돌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나는 반색하며 설이의 뺨을 잡아 내 쪽으로 돌렸다.
“설아, 우리 고양이 한 마리 키울까?”
내 말에 고양이보다 더 날카롭게 빠진 눈꼬리가 예민하게 치켜 올라갔다. 눈을 가늘게 뜨면서 설이는 입을 꾹 다물었다. 금방이라도 꼬리가 튀어나와서 기분이 언짢은 것을 표하며 침대를 탁 탁 쳐댈 것 같았다. 콧숨을 느리게 내쉰 설이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형이 나 말고 고양이를 안고 있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싫으니까… 그런 생각은 그만둬.”
나는 알았다고 대답하며 허리를 굽혀 설이의 입술에 쪽 쪽 입을 맞췄다. 누구에게서랄 것 없이 서로의 입술에서 달짝지근한 코코아 맛이 났다. 그렇게 몇 번이고 뽀뽀를 장난처럼 이어가다가 설이는 휴대폰으로 메일을 확인했다. 요즘에는 신 매니저님 이외의 사람과도 자주 메일을 주고 받고, 전화통화도 했다.
메일이나 전화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언젠가 통화 도중에 ‘변호사 님’ 이라고 지칭하는 것을 들었다. 아무래도 뭔가 법적으로 문제가 생긴 것 같아서 걱정이 되었지만, 설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섣불리 묻지도 못하고 있었다.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아서 휴대폰으로 메일을 심각하게 읽는 설이의 옆에서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뭐… 요즘 일하는 데에 무슨 문제 생겼어? 변호사랑 연락하는 것 같던데…….”
“아.”
설이는 휴대폰을 던져놓고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스탠드 조명을 끈 채로 나를 껴안고는 이불을 단단히 덮어주었다. 무슨 일 때문인지 설이한테서 제대로 대답을 듣지 못해서 궁금증으로 두 눈은 더 말똥말똥해져 버렸다. 설이는 어둠 속에서 그런 내 기척을 느꼈는지, 피식 웃으면서 내 가슴 위를 토닥거렸다.
“곧 형 생일이 다가오잖아.”
“응? 그렇지. 그런데 그게 왜?”
“그래서 형 생일선물 준비하느라 그런 거야.”
뭐? 내 생일선물을 왜 변호사랑 준비하는 거지.
더욱 더 의문만 커져가는 나를 꼭 껴안은 채로 설이는 작게 속삭였다.
“…… 선물 기대해,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