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보름달이 뜬 밤
우정혁네 저택은 3층으로 이루어진 단독주택인데, 현관 쪽에 개인소유 지상주차장이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4층 구조라고 봐야 한다. 그러니까 대문 앞에서 옥상까지는 15m 가까이 되는 높이인 것이다. 당연하게도 바깥에서 저택 옥상으로 올라올 수 있는 계단은 없고, 옆 건물과도 꽤나 떨어져 있는데다가 주변은 모두 우정혁네보다 건물이 낮았다.
그런데 그 높이를 훌쩍 뛰어넘어, 눈 앞에 설이가 서 있다. 꼬리와 함께 짐승의 귀가 튀어나와서 하얗고 검은 털이 달린 귀 끝이 파닥거렸다.
우정혁은 주춤거리며 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발이 땅에 닿고 약간 어지러운 기분이 들었지만, 그제야 설이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설이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내 어깨에 팔을 둘러 나를 지탱하고 있는 우정혁과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설아…? 어…? 어떻게 여기…?"
술기운 때문인지 사고회로가 정지되어서 그저 멍하니 내 앞으로 다가오는 설이의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설이가 걸어오자, 흰 털이 보송보송한 꼬리가 기운 없이 옥상 바닥을 쓸며 끌려왔다.
설이는 촬영장에서 받은 듯한 스포츠 브랜드의 롱 패딩을 입고 있었는데, 머리는 헤어 스프레이로 고정한 듯한 모양새였다. 얼굴에 약간의 화장기도 보였다. 아무리 봐도, 여기 오기 직전까지 드라마 촬영을 했던 모습이었다.
자꾸 풀리려는 눈을 부릅뜨며 똑바로 서 있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여전히 머리가 무거워서 우정혁의 어깨에 자꾸 내 몸이 부딪혔다.
"설아, 너 촬영…! 촬영은 어쩌고…?"
혀가 자꾸 풀려서 '찰영'에 가까운 발음이었지만 설이는 용케도 알아듣고는 눈을 잠시 감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찬 밤바람에 설이의 흰 입김이 흩어졌다.
"잘 끝냈어. 원 테이크로, 열두 시쯤에."
"그렇구나… 역시… 내 동생 천재야……"
흐뭇한 마음에 나는 내 옆에 붙어 서 있는 우정혁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우리 설이가 얼마나 멋진 지 보라는 뜻이었는데, 우정혁은 내 손가락을 아주 정중하게 밀어내며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그러니까 네 동생 놈은, 인간이 아니었던 거네."
우정혁의 시선은 설이의 뾰족이 솟은 짐승의 귀에서 꼬리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술이 확 깨는 걸 느꼈다. 헉, 숨을 들이쉬자 찬 바람이 폐부로 스며들었다. 우정혁의 옆모습은 무척이나 진지해 보였다. 원래 표정이 적은 편이라서 겉으로 보기에는 변화가 거의 없었지만, 친구인 나로서는 현재 우정혁이 적잖이 놀란 상태라는 것을 눈빛으로 알 수 있었다.
"그래. 정말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차라리 그게 더 신빙성 있네. 아무래도 저 놈이… 인간 같은 구석은 없었지."
우정혁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비척거리며 설이의 앞으로 달려가 등 뒤에 설이를 숨긴 채로 두 팔로 막아 섰다. 우정혁은 뭐하냐는 듯 눈가를 찌푸렸다. 물론 나보다 덩치가 훨씬 크고 키도 큰 설이가 내 뒤에 선다고 가려질 리 없었지만, 그래도 술 취한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최선의 조치였다.
"오해야…! 오해야, 우정혁. 우리 설이는… 내 동생은 표범 같은 거 아니야!"
"표범이구나."
"귀, 귀랑 꼬리는… 그, 그냥 너 취해서 헛것 보는 거야. 서, 설이가 막… 완전히 네 발 달린 새하얀 표범으로 변하거나… 그, 그런 건 말도 안 되잖아. 그렇지…?"
"네 발 달린 새하얀 표범으로도 변하는 구나."
우정혁은 심드렁하게 내 말을 따라 하며 중얼거렸다. 나하고 같은 양의 술을 마셨어도 우정혁의 주량이 나와는 다르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우정혁은 별로 취하지 않았다. 소주를 궤짝으로 들이부어야 겨우 나가떨어지는 놈이었다.
빤히 설이를 바라보고 있는 우정혁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서 애썼지만, 내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버렸고, 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차라리 우정혁의 뒤통수를 빠르게 한 대 쳐서 기절시키는 것은 어떨까? 우정혁이 나중에 깨어나면 다 잘못 본 거라고, 너 술 먹고 뻗어서 꿈 꾼 거라고 우겨 보는 것이다.
등 뒤에서 설이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흘깃 돌아보자, 설이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가가 붉어진 설이의 얼굴이 그제야 제대로 보였다. 깜짝 놀라서 나는 우정혁은 뒷전이고 얼른 설이의 두 뺨을 쥐었다.
"왜… 왜 그래, 설아… 응…?"
만약 우정혁한테 귀랑 꼬리 들킨 것 때문에 그런 거라면 걱정할 것 없단다. 이 형이 어떻게든 우정혁을 기절 시켜서…
설이가 어깨를 구부리며 내게 안겨왔다. 설이의 커다란 롱 패딩을 입은 덕에 설이에게 안겨있는 기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진짜 이 품에 안기는 것은 이런 기분이었다. 포근하고 기분 좋은 체향이 알코올로 가득했던 내 몸을 정화하듯이 콧속으로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단단하고 의지가 되는 두 팔이 내 등을 담뿍 끌어안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설이의 목덜미에 머리를 끼우듯 기댔다.
설이는 날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참으려고 했는데… 기다리려고 했는데……"
미약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마치 우는 것 같아서 내 속이 다 상했다. 어떻게든 설이의 마음을 달래고 싶어서 나는 겨우 손을 뻗어서 설이의 팔뚝 부근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술에 취해 힘이 빠져버린 탓에 폭신한 패딩 점퍼 위를 두드리는 꼴이었지만 그래도 설이의 목소리가 조금 차분해진 것이 느껴졌다.
"늘 나하고만 있으니까… 집에서 나만 기다리니까, 형 답답한 거 알아. 가끔은 나 아닌 사람들 하고도 교류하고 싶겠지. 형은 사람을 좋아하니까… 그래서 형이 저 선배랑 밤새 놀고 돌아올 때까지, 그냥 두려고 했는데……"
설이는 더 참을 수 없다는 듯 제 입술을 꾹 깨물면서 물기 어린 목소리를 냈다.
"읏, 형이… 다른 사람한테 안겨 있는 거 싫어."
내게서 몸을 떼어내며 여린 눈빛으로 내 얼굴을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미안해, 형."
풀이 죽어서 귀가 아래쪽으로 축 처져 있었다. 보드라운 꼬리는 내 발치를 살짝 건드리며 눈치를 보듯이 내 발목을 가볍게 휘어 감았다.
내가 다른 사람한테 안겨 있다니…?
술에 취한 나를 우정혁이 짐짝처럼 들어 옮기는 것이 설이에게는 다정하게 껴안은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그런 설이의 맹목적인 질투가 귀엽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서 나는 설이의 뺨에 입맞추고 싶은 기분이었다.
설이가 이럴 때면, 신기하게도 묘한 성취감 같은 것이 생겼다. 말도 안 되는 생각과 여기까지 달려온 이 터무니 없는 행동까지 설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걸 은밀한 내 속마음은 무척이나 기뻐하고 있었다. 이 착하고 예쁘고 잘 생긴 아이가 마음속까지 전부 내 것이라는 사실에 마냥 기쁜 것을 보니, 술에 취해서 내 마음 속에 악마가 깨어나기라도 한 모양이다.
설이의 흰 뺨에 내 입술이 닿으려고 할 때였다.
"음, 그래. 거기까지."
박수를 딱! 쳐서 우리의 시선을 끌면서 우정혁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희가 나를 잊은 것쯤은 상관 없는데 말이야, 그런 짓 할 거면 너희들 집으로 가서 해주라. 차 없으면 빌려줄 테니까, 타고 가버려."
우정혁이 다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눈을 감았다. 설이가 나를 끌어안으며 불퉁하게 대답했다.
"제 차 타고 왔습니다."
"아? 설아, 너 차 있어?"
"………응."
설이는 나에게 알리기 싫었던 듯이 입술을 꾹 다물고 대답했다.
난간 쪽으로 흘깃 고개를 돌렸더니, 반대편 길에 은색으로 날렵하게 잘 빠진 람보르기니 차체가 내려다보였다.
저거, 그거잖아. 람보르기니 아벤타도르. 뭐야, 저런 비싼 걸 진짜 타고 다니는 사람이 권영도 말고도 있었구나. 근데, 그게 내 동생이라니. 면허는 대체 언제 딴 거지.
그러고 보니 저 은색의 차체를 우리 오피스텔 주차장에서도 봤었다. 항상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입구 쪽 명당 자리를 지키고 서 있던데.
저런 차는 흔하지도 않고, 차가 워낙 눈에 띄어서 신 매니저님의 벤 기다리는 동안 저 차 앞에서 얼쩡대며 구경하곤 했었다. 혹시 블랙박스에 얼쩡거리는 내 모습이 찍힌 건 아니겠지, 상상하다가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요즘에는 주차된 상태에서도 블랙박스 화면이 실시간으로 휴대폰을 통해 전송이 된다니까, 어쩌면 차 구경하는 내 모습이 찍혔을 수도 있다.
"그래. 어서 가라, 그… 가능하면 꼬리랑 귀 좀 숨기고."
우정혁이 흐린 눈으로 설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맞다, 지금 이게 문제였지. 설이 얼굴에 정신 팔려서 우정혁을 기절 시킬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나는 설이의 품에서 빠져 나와 비틀거리며 우정혁 쪽으로 한 발자국 걸어갔다. 등뒤에서 설이가 내 손목을 붙잡고 있어서 일정 거리 이상 우정혁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나는 망설이자다 겨우 말을 꺼냈다.
"그, 야, 우정혁… 우리 설이에 대해서는 제발…"
주섬주섬 빈 와인 병을 구석에 모아놓으며 우정혁은 흘깃 고개를 들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물었다.
"뭐, 비밀로 해달라고?"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고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정혁이 한숨 섞인 말투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탑 스타가 된 네 동생 놈이 짐승의 귀와 꼬리를 단 모습으로 짠하고 변신해서, 우리 집 옥상으로 훌쩍 뛰어넘어 들어왔다는 걸, 비밀로 해달란 말이지?"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정혁이 픽 웃었다.
"야. 그걸 누가 믿냐? 어디다가 발설해도, 나만 미친놈 될 뿐이야."
……그런가? 그렇구나. 우정혁의 말을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권영도 이사도 일단 우리의 비밀을 지켜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외계인 같은 것을 연구하는 미스터리 단체가 아니고서는, 쉽게 믿을 수 없는 사실이기는 했다. 게다가 연예인 관련 가십거리는 허무맹랑한 것도 많은 편이니까, 누군가가 설이가 사실은 설 표범이라고 말한들 과연 그게 연애설보다 더 주목을 받을지 의문이었다.
적당히 빈 병을 치워주고 손바닥을 터는 우정혁의 모습이 순간 너무 대단해 보여서 나는 눈을 빛내며 감탄했다.
"뭐야, 너 오늘따라 왜 이렇게 똑똑해. 너 우정혁 아니지."
"아니 근데 이 새끼가…"
우정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노려보다가, 귀찮은 파리 쫓아내는 표정으로 손을 휘휘 저었다. 설이가 등뒤에서 나를 끌어안으며 그만 가자, 형, 하고 속삭였다.
내가 겁이 없는 편인데 술에 취하면 고소공포증이 아주 약간 있어서, 혹시나 설이가 나를 데리고 옥상 밑으로 뛰어서 내려가자고 하면 어쩌나 살짝 걱정이 들었다. 다행히도 설이는 나를 부축해서 옥상 계단을 통해 내려갔다. 귀와 꼬리는 어느새 숨겼고, 설이는 내가 갈아입은 옷과 칫솔까지 내 가방에 넣어 챙겨 들었다.
그리고는 내가 입고 있던 패딩 점퍼의 지퍼를 목 끝까지 올려주고 후드를 씌워 나를 거의 포장해서 안아 들었다. 설이는 현관 앞까지 따라온 우정혁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그렇게 불손한 눈빛이어도 인사는 하는 구나."
우정혁이 픽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설이에게 안긴 채로 다음에 보자… 하고 손을 흔들었다. 설이가 인사 중인 내 손을 잡아 패딩 주머니에 쏙 넣게 만들더니 현관 밖으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람보르기니의 문이 위로 열리는 것을 보며 오… 하고 감탄하고 있자, 설이가 나를 조수석에 앉히고 안전벨트를 매어주었다.
승차감이 좋아서 조용히 달리는 차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슬슬 잠이 오고 있었는데, 입을 꾹 다물고 운전하고 있던 설이가 조용히 말했다.
"……형은 우정혁 선배를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
"응? 내가? 아닌데."
바로 대답했지만, 설이는 앞을 주시하면서 한층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정혁 선배하고 있을 때에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무척 상기되어 있어. 전화로만 들어도 알 수 있어. 그 선배하고 있으면 즐거운 거잖아. ……나하고 있을 때보다 더."
분하다는 듯한 목소리는 끝으로 갈수록 기운 없이 작아졌다.
나는 설이가 운전 중이라는 사실도 잊고, 설이의 단단한 팔뚝을 톡톡 때리듯이 토닥거렸다.
"그럴 리가! 설아, 형은 너랑 있는 게 제일 즐거워. 진짜야!"
내 진심을 몰라주는 거라면 나도 서운할 만한 타이밍이었다. 나는 술기운이며 졸음도 다 떨쳐내고 얼굴까지 붉어지며 열변을 토했다.
"설아, 내가 널 오죽 좋아하면 너랑 그런… 야한… 일까지 하겠어. 세상에 동생이랑 키스하는… 그래, 그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동생이랑 몸까지 섞는 형이 어디 있겠냐. 그거 쉽지 않은 거다, 설아. 그런데 나는 너랑 뭘 해도 좋고 뭘 해도 즐거워.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응?"
최근 깨달은 것인데, 나는 어느 정도 술 취하면 못하는 소리가 없는 편이다.
"그렇다고 형이… 뭐, 너를 잡아먹은 게 크흠,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내가 설이 너를 얼마나 예뻐하는데, 응? 설국지색 커뮤니티에서 그러더라. 얼음장 같은 한설의 마음을 녹이고 연인이 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엑스칼리버를 뽑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토르의 망치를 들 수 있는 존재인 거라고. 근데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잖아! 그게 얼마나 고맙고 흐뭇하고 감사한데. 나는 네 마음 다 알아, 설아. 응?"
나는 어느새 핸들을 쥔 설이의 팔뚝에 기대듯이 뺨을 대고 비벼대는 중이었다. 술 마셔서 그런지, 우리 설이가 평소보다 더 잘생기고 잘나 보였다. 묵묵히 내 말을 듣고 있는 설이의 옆얼굴에 약간 홍조가 떠올랐다.
오피스텔 지하주차장에 도착해서 차를 세웠고, 엔진이 꺼지자 차 안은 조용해졌다. 설이는 가만히 핸들 위에 손을 올린 채로 잠시 멈춰 있었다.
내가 조수석에서 설이의 깎아지른 절벽같이 아득한 턱 선을 바다보고 있자, 설이가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는 몸을 숙였다. 뜨거운 숨을 훅, 내뱉은 설이의 입술이 내 뺨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형한테 나밖에 없었으면 좋겠어."
나는 손을 뻗어 설이의 뒷목을 손가락 끝으로 간질이며 속삭였다.
"나한테는 설이 너밖에 없어."
설이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무언가가 만족스럽지 않은 모양이었다. 설이는 욕심쟁이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제 뒷목을 간질이던 내 손가락을 끌어와 제 큰 손 안에 가두듯이 꾹 쥐었다.
"형이 완전히 내 것이 되었으면 좋겠어."
나는 작게 피식 웃음이 나와서 고개를 숙였다. 설이에게 내가 이 이상 더 줄 수 있는 게 있다면, 주고 싶었다. 나는 언제나 설이만을 바라보며 살아왔고, 지금도 이렇게 곁에 있는데 뭐가 그렇게 불안한 걸까. 설이는 내가 어디론가 떠나갈 까봐 안달하는 눈빛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갈망에 답을 내리듯이, 보드라운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나는 설이의 두 귀를 꾹 잡으면서 눈을 맞춰 똑똑히 말해주었다.
"난 네 거야."
설이는 진지한 눈길로, 그런 말을 하는 내 얼굴을 빤히 뜯어보더니 마치 제 자신에게 다짐하듯, 혹은 무언가를 결심하듯이 조용히 읊조렸다.
"……응, 형은 내 거야."
내 손목을 휘어잡는 설이의 몸이 술 취한 나보다 뜨겁게 느껴졌다.
오피스텔 안으로 돌아오자마자, 집안은 어두컴컴했다. 벽면 스위치를 눌러 불을 켜려고 하는 나를 설이가 막아 섰다. 왜 그러냐는 듯 올려다보자 어둠 속에서 그늘 진 설이의 얼굴이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암막 커튼에 달빛이 가려져 실루엣마저도 흐릿했지만, 날 보는 설이의 눈빛이 너무 선명해서 그게 무척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우정혁과 옥상에서 보았던 밤하늘에 보름달이 떠 있었는데, 설이의 눈동자 속 동공을 감싼 홍채가 그 달처럼 둥글게 빛나 보였다. 착각이 아니었다. 블랙홀 같은 눈동자에 흰 빛이 마치 은하수처럼 맴돌고 있었다.
"설아, 너 눈이…"
내 손목을 꽉 쥔 설이의 악력이 너무 세서,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며 그 손 안에서 빠져 나오려고 팔을 비틀었는데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설이는 내 손목을 제 쪽으로 끌어 나를 코앞에 놓고 나서 말했다.
"아기가 생긴다면, 형도 좋겠지?"
낮게 갈라진 목소리는 마치 바람결에 흔들리는 커튼처럼 부드러워서, 나는 설이가 말하는 바를 제대로 깨닫지 못해 응? 하고 되물었다. 내 손목을 쥔 채로 나를 바짝 끌어안으며 설이가 내 귓가에 입술을 댄 채로 속삭였다.
"형하고 나 사이에서 아기가 태어나면… 형은 내내 집에서 아기를 돌봐주고 예뻐해줄 거잖아. 그렇지?"
설이가 하는 말이 머릿속에서 술 기운과 함께 빙빙 돌아서 어지러웠지만, 곧 정신을 차렸다.
말도 안 되는 가설을 진지한 얼굴로 물어보는 설이가 귀여울 따름이었다.
뭐… 생물학적으로 우리는 둘 다 남자니까 그럴 수야 없겠지만, 어쨌든 갓난아기가 어디선가 뚝 떨어진다면 당연히 돌보고 예뻐하게 되겠지. 어차피 실현될 리 없는 일이고, 나는 설이를 달래주고 어서 침대에 뛰어들어 곯아떨어지고 싶은 마음뿐이라서 가벼운 마음으로 대답했다.
"으음… 그렇겠지?"
내 대답에 설이는 뭔가 어려운 부탁에 대한 허락을 받은 것처럼, 표정이 한결 가벼워졌다. 기쁜 듯한 얼굴로 나를 번쩍 안아 들고 거실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침실은 입구에서부터 센서로 작용하는 조명등이 있어서, 아무도 없는 방에 들어가면 은은하게 조도 낮은 조명이 켜졌다.
그 덕분에 나를 안고 있는 설이의 얼굴이 보였다. 입 꼬리가 반원을 그리며 부드럽게 올라가 있었다. 조심스럽게 나를 침대에 내려놓고는, 친절하게 롱 패딩 점퍼를 벗겨주며 설이는 기대감에 젖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신비한 색으로 변한 설이의 눈동자에 홀려 멍하니 설이가 하는 대로 점퍼를 벗었고, 나는 파자마 차림이 되었다.
설이는 제 패딩도 벗어 침대 아래 바닥에 떨어뜨리고는 제 셔츠 단추를 느리게 하나씩 풀러 내려갔다. 침대에 무릎을 올리며 가까이 다가오는 설이를 보는데 왜 침이 꿀꺽 넘어가는지 모를 일이다
그래, 그럼 그러자. 형, 우리… 아기 갖자.
그렇게 속삭이는 설이의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은데, 내 입술을 집어삼키는 뜨거운 설이의 혀에 정신이 아득해졌기 때문에 확실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