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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사랑은 환상 (40/65)

40. 사랑은 환상



내가 네 머슴인 줄 아느냐며 투덜거리기는 해도, 우정혁은 지하주차장까지 나를 데리러 와주었다.

수학여행이나 수련회, MT 같은 것을 가본 적이 없어서 뭘 챙겨야 하나 고민했지만, 사실상 우정혁 집에는 없는 게 없었다. 집 안에 영화 보는 방이 따로 있고 탁구대에 농구대까지 있는 집에 뭔들 없을까. 소소하게 내 칫솔과 파자마나 챙겨가야겠다는 생각에 작은 옆 가방을 챙겼다.

지하주차장 쪽에서 호출이 와서 셔터 열림 버튼을 눌러줬더니 스피커로 "야, 내려와." 하고 무척이나 귀찮아하는 말투로 말하는 우정혁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도 지난번처럼 갑자기 현관문이 안 열린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복도 밖에서 바로 지하로 이어지는 엘리베이터를 탔기 때문에 프런트의 경비원 분들을 만나지 않고 주차장까지 내려갈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하주차장에서 벤이 아닌 차를 타는 건 오랜만이었다. 신 매니저님이 혹시 설이 스케줄 관련으로 이동할 때 이용하라면서 회사 전용 경차를 내 쪽으로 빼줬었는데, 그걸 타본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그 차를 몰고 대형 할인 마트로 가서 장을 봐왔더니, 바로 다음날부터 설이가 식재료 배달 서비스를 신청하는 바람에 그 뒤로 운전할 일이 일체 없었다. 주차장에 차를 그냥 박아만 두는 것이 아까워서 하루는 밤에 혼자 드라이브라도 갈까 싶어 내려갔더니, 어느새 차가 없어져 있었다.

"형 혼자 따로 나갈 일도 없잖아. 정 필요할 때는 사람 부르면 돼."

설이가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다독였다. 하긴, 회사 경비로 나오는 차인데 그렇게 묵혀둘 바에야 회수해서 더 필요한 쪽에 주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지하주차장에 내려올 때에는 어쩌다가 설이와 함께 신 매니저님의 벤을 탈 때뿐이었다. 그것도 설이의 스케줄에 따라갔다가 외식을 하는 정도의 가벼운 외출이었다.

오피스텔에서 내려오는 유리문 바로 앞쪽에 우정혁의 차가 헤드라이트를 켠 채로 서 있었다.

달려가서 조수석 문을 열고 타자마자, 우정혁이 의심의 눈길로 날 쳐다봤다.

"네 동생 놈한테는 외박한다고 말한 거지?"

내가 안전벨트를 매자마자 주차장 밖으로 빠져나가던 우정혁은, "아직 안 했는데?" 라는 내 대답에 급정거를 밟았다. 답지 않게 놀란 얼굴이 되어서 휘둥그래진 눈으로 날 바라봤다. 그리고는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게 누굴 납치범으로 만들려고… 너 내가 네 동생한테 멱살잡이 당하는 꼴을 진정 보고 싶으냐?"

"에이, 우리 설이가 너한테 왜 그러겠어."

"충분히 그럴 거 같은데."

"안 그래. 지금 설이 촬영 중이라서, 쉴 때 전화 오면 그때 말할 거야. 우리 설이 이번에 드라마 한다? 로맨스야. DTS 제작인데, 엄청 멋진 역할로 나올 거야. 당연히 남자 주인공이고!"

"그래, 좋겠네. 네 동생은 멋지고 넌 참 해맑고 걱정 없어서 좋겠다……."

"뭐야, 왜 또 갑자기."

"됐어. 네 동생한테 얻어터지면 합의금이나 높게 불러야겠다. 만약 내가 살아있다면 말이지."

우정혁은 삶을 어느 정도 포기한 것 같은 흐린 눈으로 다시 운전하며 주차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명목상으로는 설이의 사교활동에 본보기가 되어주기 위한 외박이었지만, 사실 개인적으로 꽤 설레는 감이 있었다. 어딘가로 훌쩍 여행을 떠나는 기분도 들었고, 학교 다닐 때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었던 ‘수업 빼먹고 담 타기’ 같은 것을 하는 기분도 들었다.

우정혁은 기대감에 반짝거리는 나를 옆 눈으로 흘깃거리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야, 우리 집에 뭐 재미있는 거 없어. 왜 그렇게 신이 나있냐."

"그냥 새로워서. 요즘 설이 다치고 신경 쓸 것도 많았는데… 일탈하는 기분이야. 왠지 좋다."

"그래. 좋으면 다행이고."

히히거리고 있는 내 모습에 우정혁은 핸들을 돌리며 느리게 대답했다.

우정혁의 집으로 향하기 전, 마켓에 들러서 먹을 것을 잔뜩 샀다. 원래 부잣집인 그 댁에는 음식을 해주고 청소도 도와주는 아주머니들께서 계시는데, 우정혁의 부모님이 여행을 가시면서 그분들도 휴가 상태인 모양이다. 애초에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우정혁은 그게 더 좋다고 했다. 나도 그 편이 훨씬 나았다.

장을 본 뒤에 집 근처 카페에서 커피도 한 잔 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앞에 두고 앉아서 나는 우정혁에게 설이의 교통사고 경위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했다. 물론 카페 안이 워낙 한가했고, 주변에 듣는 귀가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최대한 우리 설이와 권영도 이름이 대화에 등장하지 않도록 주의했다.

우정혁은 신중한 표정으로 느리게 눈을 끔뻑거리더니 흐음, 하고 뭔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 했다.

"듣다 보니까 이상하네. 네 동생은 왜 갑자기 거기 서 있었는데?"

"어?"

고개를 기울이며 우정혁이 말을 이었다.

"아니, 신기하잖아. 사고 난 곳까지 바로 콜택시 타고 달려온다고 쳐도, 어떻게 너 있는 곳을 바로 알았던 거지? 너한테 뭐 위치추적 장치라도 붙여놓은 거 아닌 이상, 말이 안 되잖냐. 네가 거기서 전화를 해서 위치를 알려준 것도 아닌데, 어떻게 거기까지 바로 갔대?"

"어… 글쎄다…"

설이의 사고에 대해서 우정혁이 꼬집은 의문점은, 권영도의 말과 정확히 일치했다. 사실 나도 그래서 혹시 내 몸에 뭐가 붙어 있나 싶은 의심이 생겼고, 샤워할 때 구석구석 만져본 게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액세서리라고는 설이가 준 반지밖에 안 하고 다니는데, 이 조그마한 반지 어디에 그런 게 들어가겠느냐는 말이다. 애초에 설이가 나한테 그런 걸 달아서 내 위치를 알아낼 이유도 없다.

제 머그 잔을 노려보며 생각에 잠긴 우정혁에게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사실…… 그 사람도 너랑 같은 말을 하더라."

"누구, 사고 차량 운전했다던 그 분?"

고개를 끄덕이자, 우정혁은 "합리적인 의심이지."하고 혼잣말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권영도는 설이가 보통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설이의 존재에 대해서 더 의심하는 바가 많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사실까지 고백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정혁은 아직 설이가 설 표범으로도 변하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우정혁이 테이블 위에 올려둔 제 담배 곽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뭐, 어쨌든 간에 그 녀석은 널 끔찍이 좋아하니까, 네 몸에 해를 끼칠 리는 없고… 네 눈에 안 띄게 경호원이라도 붙여놨을 수는 있겠지."

그 말을 하면서 우정혁은 수상한 사람이 있나 확인해보듯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나도 따라서 훑어보았지만, 카페 안은 한산했고 손님이라고는 우리와 할머니 두 분뿐이었다.

"그나저나 네 동생, 다친 것도 잘 회복됐다니까 다행이네."

"응, 그렇지."

"…설마 네 관심 끌기 위해서 일부러 차에 치였다거나 하진 않겠지."

우정혁의 혼잣말에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안 나왔다.

"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음모론이야. 설, 아니, 내 동생이 바보야?"

"흐음. 나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싶어서 눈가를 찌푸리며 노려보자, 우정혁은 내 표정이 웃긴지 피식 웃으면서 계산표와 담배 곽을 들고 일어섰다.

"사람은 말이야, 뭔가 하나 매달리게 되면 그냥 다 바보가 돼. 그것 하나 밖에 생각 못하는 바보가 되는 거다. 애송이 한준."

"너 자꾸 기어오른다?"

"가자, 냉장고에 고기 넣어둬야지."

우정혁의 등 뒤를 따라 나서면서 왜 저 놈이 그런 말을 했나 생각해봤다. 어쩌면 친 누나와 관련된 그 사건에 관련해서 자신이 저질렀던 행동을 비유한 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입을 꾹 다물었다.

우정혁 집에는 예전에 갔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세상을 떠난 친 누나에 대한 물건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당연히 우정혁이 외동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부모님이, 특히 어머니가 누나의 사진과 유품을 보는 걸을 힘들어하셔서 모두 치워버렸다고 우정혁은 흘리듯 말했었다.

"실례합니다."

"아무도 없다니까."

우정혁은 구둣발로 집안에 저벅저벅 걸어 들어갔다. 나는 문 앞에서 자연스럽게 운동화를 벗으려고 허리를 굽혔다가 머쓱해져서 우정혁을 따라 걸어갔다. 그러고 보니 이 집은 미국 드라마처럼 거실에서도 신발을 신고 돌아다녔다. 청소하시는 아주머니 힘드시겠다.

오랜만에 와봐도 여전히 거실이 운동장만 했다. 고등학교 다닐 때보다 우리 집 상황이 월등히 좋아졌고, 지금 설이와 함께 사는 오피스텔도 엄청나게 공간이 넓은 편이지만 그래 봐야 대궐 같은 우정혁 네 본가만은 못했다.

우정혁은 리모컨을 들고 허공에 댄 채 버튼을 꾹 누르면서 집안 전체의 조명을 바꾸고 블라인드 각도를 비스듬하게 조절했다. 온화한 빛에 감싸인 집 안의 모든 가구와 소품들이 눈부셨다. 어머니의 취미이신 듯 아기자기한 도자기 그릇이 유리 진열장 안에 전시되어 있는 것에서 기품이 느껴졌다.

문득 우리 어머니도 아프지 않고 오래 사셨으면, 지금쯤 편하게 취미 생활도 하시고 여행도 다니셨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 가슴 한 편이 쓰려왔다.

고개를 저어 슬픈 생각을 밀어내고, 내가 기억하는 부엌 쪽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마트에서 장 봐온 것들 중에 고기와 채소 류를 냉장고 두 대에 나눠서 집어 넣었다.

"야, 나 씻는다. 너 적당히 쉬어."

"어어."

우정혁이 계단을 올라가는 것을 본 뒤에 널찍한 식탁 위에 과자봉지와 컵라면을 진열했다. 그리고는 듣도보도 못한 향신료가 가득한 찬장을 구경하고 있을 때, 청바지 뒷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진동했다. 설이 전화였다.

"어, 설아! 촬영 잘 하고 있어?"

-……형, 혹시 집 밖이야?

휴대폰 안에 바닷바람이 느껴지는 바람의 소음이 섞여 들었고, 어쩐지 설이의 목소리는 무척 가라앉아 있었다. 새벽부터 이동해서 이어진 촬영이 피곤했던 모양이다.

"아아, 맞다. 설아. 형 지금 우정혁 네 집에 자러 왔다.

-……그 선배네, 자러 갔다고.

어쩐지 기분이 안 좋은 것처럼 느껴지는 목소리여서 선뜻 대답하기가 눈치 보였다. 내가 갑자기 예정에 없이 외출을 해서 놀란 것일지도 모른다. 설이는 워낙 섬세한 아이니까.

"응. 너도 바쁘고 마침 우정혁이 자기네 집에 와있다고 해서. 나도 간만에 여유 있는데 친구네서 외박 좀 해볼까 싶었지. 친구끼리는 가끔 이런 일도 있는 거잖아. 그렇지?"

-……하아.

설이가 짜증스럽게 제 머리카락을 이마 위로 쓸어 올리는 모습이 연상되었다. 무언가가 마음대로 안 될 때의 버릇이었는데, 설이가 언젠가 촬영 중에 그런 행동을 했다가 그게 '다른 남자와 날 사이에 두고 싸우는 남친짤' 같은 것으로 유명해졌다. 그 덕에 설이는 화낼 때 가장 섹시한 스타 top 3에도 올랐다.

-형 지하로 나갔구나. 그 선배가 차로 데리러 왔고.

"어? 어떻게 알았어?"

내 대답에 후우, 하고 설이는 뭔가 조금 당황한 듯한 신음과 함께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휴대폰 너머 저 멀리에서 “한설 배우님!”하고 누군가가 설이를 찾는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분주한 촬영장 풍경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저기, 설아. 나는 우정혁네서 하룻밤 자고, 아침에 집으로 돌아갈 테니까, 너는 내 걱정 말고 촬영 잘 하고 와. 알았지?"

-……응.

"착하네, 우리 설이. 그럼 끊을게!"

전화를 끊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전기 포트에 물을 올리고 있을 때, 우정혁이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벅벅 문지르며 계단에서 내려왔다.

"신났네, 아주. 전화는 했고?"

"했지, 설이 바쁜 것 같더라. 너 우리 설이 싸인 미리 받아놔라. 드라마 아무래도 대박 날 것 같거든. 이 작품 끝나면 아예 해외진출 해서 세계 무대로 가게 될지도 몰라. 할리우드 스타가 머지 않았다."

"됐고, 네 동생 놈이 뭐라고 하냐. 당장 집으로 돌아가서 얌전히 자기 기다리라는 말 안 해?"

물 끓는 전기 포트를 보고 있다가 시선을 우정혁 쪽으로 돌려 물끄러미 바라봤다.

"설이가 그런 말을 왜 해? 무슨 의처증 남편도 아니고."

"아, 말로는 안 하는 구나. 너한테 어지간히 잘 보이고 싶은가 보네."

우정혁은 혼자 피식 웃으면서 컵라면을 두 개 가져와서 포장을 뜯었다. 별 이상한 말을 다 한다 싶었지만, 우정혁은 원래 좀 이상한 놈이다.

우정혁은 컵라면에 자기가 물을 부어놓을 테니까 내게 옷이라도 갈아입으라고 말했다. 계단을 올라가면 또 다른 거실이 나왔는데, 그 거실부터 이어지는 방은 모두 우정혁의 것이었다. 가볍게 세수하고 우정혁의 침실에서 파자마로 갈아 입은 뒤에 다시 내려오자, 컵라면은 알맞게 익어 있었다.

일부러 양이 많은 큰 컵으로 골랐는데 면을 몇 번 크게 건져 먹고 국물을 후룩후룩 마시다 보니 금새 바닥났다. 뜨끈하고 얼큰한 국물이 정말 천상의 맛이었다. 뜨거워서 입김을 불어가며 내가 컵라면 먹는 것에 심취해 있는 동안, 우정혁은 질린다는 얼굴로 나를 구경하고 있었다.

"야… 너네 재정 상태 이제 괜찮지 않냐. 이제 너 알바 하던 곳들 다 네가 임대 줄 수 있을 정도일 텐데, 컵라면을 뭘 그렇게 걸신 들린 듯이 먹어. 네 동생이 너 굶기냐? 한우 채끝살하고 꽃등심 샀는데, 왜 그런 걸로 배를 채워."

"아, 나 이게 너무 먹고 싶었어."

국물 한 모금 안 남은 컵라면 용기 바닥을 젓가락으로 박박 긁어 건더기 스프 한 점까지 남기지 않고 긁어먹었다.

"설이 건강식 해주느라고… 요즘에는 보양식 먹이거든. 평소에는 샐러드랑 담백한 고기 위주로 반찬 해주고 있고. 그래서 이런 불량식품은 아예 집에 사두지를 않아. 설이가 나 먹는 걸 맨날 따라 먹으려고 해서, 나도 설이랑 같이 건강식만 먹거든. 내가 본보기가 되어줘야지."

"열부 났네."

우정혁은 제 몫의 컵라면에 젓가락을 꽂았을 뿐, 아직 한 젓가락도 먹지 않았기 때문에 제 것을 내 앞으로 슥 밀어주었다. 나는 면이 불기 전에 얼른 우정혁 컵라면을 들고 이차전을 시작했다.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로 불을 지피면서 우정혁이 벽면 스위치를 눌러 환기 시스템을 가동했다.

"야, 집에 담배냄새 배면 어머니 싫어하신다며."

"한 두 개비 정도는 괜찮아."

"그러지 말고, 우리 옥상으로 가자. 나 다 먹었어."

컵라면은 이미 또 바닥이 났고, 우정혁은 대체 그 멸치 같은 몸뚱이 어디에 음식이 다 들어가냐고 경악을 했다.

음식은 끊기면 안 되기 때문에, 장봐온 것들을 꺼내 싸 들고 부엌 창고를 지나 이 저택의 옥상으로 향하는 옥외 계단을 올랐다. 파마자 위에 내가 가져온 롱 패딩을 입었는데, 입고 보니 설이 것이었다. 품이 한참 커서 마치 설이에게 안겨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 설이, 촬영장이 바다라서 춥지는 않을까. 커뮤니티 사진 보니까, 얇은 셔츠 입혀놓고 촬영하는 것 같던데.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이제 정상 생활을 해도 괜찮고 신기할 정도로 뼈도 빨리 붙는다고 했지만, 그래도 몸도 성치 않은 애가 바닷바람에 감기라도 걸릴 까봐 걱정이었다. 만약 설이가 힘든 촬영으로 열이라도 나면 소송이라도 걸 테다. 그래도 눈치 빠르고 철두철미하신 신 매니저님이 설이 곁에 붙어 있어서 조금 마음이 놓였다.

우정혁네 저택 옥상에는 비닐하우스처럼 찬 바람을 막아주는 곳 안에 화로가 딸린 바비큐 테이블이 구비되어 있어서 바비큐 파티를 하기에 딱 이었다. 아마 우정혁의 친 누나가 살아계셨을 때는 가족끼리 오붓하게 이 옥상에서 파티를 하지 않았을까. 그 사건이 일어난 뒤로는, 아무도 옥상에서 바비큐 파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화로 숯불에 불을 붙이는 우정혁의 뒷모습이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흘깃, 뒤돌아본 우정혁이 목장갑을 탁탁 털며 뭘 봐, 하고 입김을 내뱉었다.

"그냥… 너처럼 외로운 놈한테 나 같은 든든한 친구가 있는 게 참 다행이다 싶어서."

"얼씨구."

불이 붙은 화로에 석쇠에 고기를 집어 올리며 우정혁이 궁시렁거렸다.

"날 머슴으로 쓰는 놈이 말은 잘하네. 와인 따지도 않고 벌써 취했냐."

우정혁이 고기를 굽는 동안, 나는 코르크 마개를 따서 와인을 따랐다. 붉은 와인이 유리 잔 안에서 찰랑거렸다.

공부만 못할 뿐이지 고기는 기가 막히게 잘 굽는 우정혁 덕분에 알맞게 익힌 꽃등심이 입 안에서 살살 녹았다. 쌈을 싸 먹기에도 아까운 맛이었다. 우정혁은 원체 식욕이 없고 내가 뭘 먹는 걸 구경하는 걸 더 좋아해서 고기를 몇 점 먹지 않았기에 나머지는 다 내 차지였다. 상추와 깻잎을 겹쳐 안에 고기를 세 점씩 싸서 먹었다.

맛있는 걸 먹으니 당연하게도 추운 곳에서 고생하는 동생 생각이 났지만, 설이도 본인이 먹는 것보다는 내가 먹는 걸 구경하는 것을 더 즐겼다. 그런 면에서는 설이나 우정혁이나 둘 다 참 신기한 녀석들이다. 고기를 앞에 두고 어떻게 그렇게 차분할 수 있지.

한 손에는 와인 잔을, 다른 한 손에는 연기가 피어 오르는 담배를 걸쳐 쥔 채 우정혁은 비닐 하우스의 열어둔 문 밖을 멀리 쳐다봤다.

새까만 밤하늘은 서울이라 그런지 별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부모님하고 어린 설이하고 함께 살던 강원도 산골에서는 은은하게 빛나는 별들이 참 아름다웠었는데.

툇마루에 앉아서 지는 별똥별을 목격했던 밤, 설이에게 두 손 모아서 소원을 비는 법을 가르쳐 주었던 적도 있었다. 나를 따라서 조그마한 손을 모은 채로 새까맣고 예쁜 눈망울로 날 올려다보던 어린 설이가 내게 물었다.

"소원, 형아, 누가 들어?"

"음… 아마 신일 걸. 아빠 동화책에서 봤는데, 모든 곳에는 신이 있대."

“신?”

처음 듣는 단어를 발음해보는 설이의 조그마한 입술이 옹알거리는 게 너무 귀여워서, 그때 나는 설이의 보드라운 두 뺨을 꼭 쥐어주었던 것 같다. 설이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내 손길이 닿으면 기분 좋은 듯 배시시 웃었다.

"응. 저 별님도 신이고, 새하얀 눈님도 신이고, 반짝반짝 해님도 신이야."

"형, 내가 형아, 들을래. 형아 소원 설이가, 들어줄 거야.“

아직 인간의 언어를 따라 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말투와 발음은 어눌했지만, 설이는 늘 원하는 바를 제대로 전하는 아이였다. 나는 설이의 그 예쁜 마음이 고마워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내 소원은 뭐였을까? 아마 설이가 우리 가족 곁에서 건강하고 잘 크는 것 아니었을까. 오래오래 설이하고 함께 하고 싶다고, 그렇게 빌었던 것 같다.

약간 취기가 오르는 기분이었다. 생각이 느려지고 몸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절로 웃음이 났다. 

"후후, 우리 설이…… 참 귀여웠지."

"하이고, 너는 술주정도 네 동생 자랑이냐."

피식 웃는 우정혁,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와인 병을 하나 더 땄다. 고기 먹는 김에 물 마시듯이 와인을 마셔서 술술 넘어갔던 덕에 취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행동마저 느려지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후욱 느리게 숨을 내뱉으며 눈을 깜빡여 빈 와인병과 재떨이에 초점을 맞췄다.

“야, 우정혁.”

“왜.”

“…나 사실 요즘 좀 고민이다. 나 때문에…… 설이가 잘못된 길로 가는 건 아닌가, 싶어.”

내가 꿈꿔왔던 설이의 미래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방해물이 바로 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설이는 나를 하나뿐인 가족으로, 형으로, 연인으로 소중하게 대해주지만, 결국 그 모든 역할을 나 혼자 다 가지게 되어버리면 설이의 인생에는 나밖에 남지 않는다. 나는 설이가 외로운 삶을 살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화목하고 유복하고 여유 있는 삶을 가지도록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걸, 내가 망치고 있는 것이다.

우정혁은 내 한탄 같은 혼잣말을 묵묵히 듣고 있다가 재떨이에 담배꽁초를 비벼 껐다.

“한준, 넌 말이다. 네 동생이, 그… 뭐냐. 성자 같은 거라고 생각해?”

응? 하고 취기에 어지러워 눈가를 찌푸리며 되묻자, 우정혁이 제 관자놀이 부근을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네 동생 놈이, 한설이, 꼭 바른 길로 가야 하는 이유가 뭔데.”

무슨 질문인가 싶어서 잠시 멍하니 눈을 감았다 뜨면서 나는 할 말을 골랐다. 술에 취해서 그런지 생각하는 바가 전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건… 그러니까… 설이는 착하고 순하고… 정말 완벽하니까. 내가 여태 아껴왔고… 예뻐하고… 소중하게 키웠고…….”

“너는 대체 걔가 뭐라고 생각하는 건데. 한설이 네 꿈 속의 공주님이라도 되냐?”

왜 또 시비를 거나 싶어서 노려보자, 우정혁이 와인 한 모금을 소주처럼 입 안에 털어 넣고 삼켰다.

“야. 네가 그렇게 환상을 품으면, 그걸 견디는 입장은 또 얼마나 힘들겠냐. 걔가 이제 유치원생도 아니잖아. 자기 길을 알려줘야 하는 건 갈림길 앞에서 갈팡질팡하고 주저하는 어리버리들이지, 한설은 아니야. 나는 네 동생처럼 한 우물만 파는 놈도 못 봤어. 그냥 놔둬. 너는…… 그냥 너나 걱정해, 인마.”

마지막에는 내 욕을 좀 한 것 같은데, 그래도 전체적으로 들어보면 설이 칭찬인 것 같아서 봐줬다.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와인을 네 병 비웠다. 시간은 벌써 새벽 네 시를 넘어가는 중이었다. 나한테 좀처럼 제 얘기를 안 하는 우정혁도, 꽤 취했는지 떠돌이 유학 생활이 고달프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마음에도 없는 경영 공부를 하려니 성향에 안 맞아서 죽겠는 모양이다.

혼자 골방에 틀어박혀서 기타 연주하고 담배 피우면서 가만히 있는 거나 좋아하는 놈이 고생이 많았다. 비록 공부 머리는 없어도 이해심 많고 성격 좋은 놈인데, 부모님이 허락을 안 하시니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다른 일자리도 못 찾고 답답할 것이다. 부모님도 답답하시겠지. 친구로는 참 좋은 놈인데.

“……우리 설이도 너 같은 친구 있으면 좋을 텐데.”

“뭐. 칭찬이냐.”

“너 우리 설이랑 친구 할래?”

“욕이었구나.”

설이한테도 마음을 터놓을 친구가 있으면 참 좋을 텐데. 나에게만 매달리는 게 안쓰럽다. 귀와 꼬리 없는 평범한 인간들과 어울려서 잘 지낼 수 있도록, 부모님 대신에 내가 설이를 잘 이끌어줬어야 하는데…….

“야, 너 진짜 취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순간적으로 잠이 와서 앞으로 고꾸라지는 나를 부축하며 우정혁이 나를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거의 생물 오징어 수준으로 흐느적거리기 시작한 나를 우정혁이 거의 껴안듯이 하며 한 발자국씩 나를 이끌었다.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하고 한탄하는 우정혁의 중얼거림이 들려와서 나는 눈을 감은 채로 피식 웃어버렸다.

“근데 아까부터 우리 집 앞 센서 등이 왜 자꾸 켜져 있지.”

우정혁이 나를 짐짝처럼 옆구리에 낀 채로 난간 쪽으로 한 발 다가가며 혼잣말을 했다.

“흠, 이 시간에 누구 올 사람도 없고… 초인종 고장 나서 눌러도 어차피 알 수가 없는데.”

우정혁은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내저으며 내 겨드랑에서 손을 집어넣어서 나를 어깨에 거의 들쳐 맸다. 내가 아무리 말라비틀어진 멸치라지만, 지금 뱃속에 들어 있는 한우만 한 근이 넘는데 이렇게 쉽게 우정혁이 들쳐 맬 수 있다는 것에 살짝 자존심이 상했다. 힘 없는 팔로 우정혁의 등짝을 때렸다.

“야… 내가 걸어갈게. 내려줘……”

“그러다 계단에서 넘어져서 네 얼굴 갈리면, 네 동생이 내 얼굴도 갈아버릴 텐데?”

진지하게 말하는 우정혁에게 나는 그럴 리 없다고 항의하려고 했지만 너무 졸려서 말하기가 귀찮았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아까부터 어디선가 설이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새벽의 찬 바람결에 시원한 설이의 체향이 섞여 왔다. 내가 좋아하는 비누 향과 함께 설이의 목덜미에 코를 박으면 느낄 수 있는 체온의 냄새였다. 그렇게까지 생각하다가 나는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후후, 나도 참…… 내가 동물도 아닌데… 어떻게 설이 냄새가…”

그때 눈 앞으로 무언가가 풀썩 튀어올라 착지하는 그림자 같은 것을 보았다. 물론 나는 우정혁의 어깨에 몸이 걸쳐진 상태라서 옥상 바닥에 시선이 박혀 있었는데, 그림자 같은 것과 함께 설이의 컨버스 화가 보였다. 흰 컨버스 화를 신은 다리가 내 쪽으로 걸어오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여기 옥상에, 우정혁네 옥상에 설이가 와 있는 것이다. 나 결국 취해서 잠들었나, 꿈을 꾸네.

“나 꿈… 꾸나 봐…….”

우정혁은 우뚝 멈춰선 채로 대답했다.

"한준, 나도 취했나 보다. 헛것이 보이네."

그러나 식식거리며 옥상 바닥을 툭 치는 꼬리는, 헛것이 아니었다. 복슬복슬한 흰 털을 수놓은 검은 고리 무늬는 분명 새하얀 표범의 꼬리였고 우리 설이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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