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 형하고 나만의 집 (39/65)

39. 형하고 나만의 집


우선 앞치마를 벗어야겠다.

요즘 집안일 할 때 내가 입는 새하얀 앞치마는 이사하면서 설이가 선물해준 것인데, 레이스가 잔뜩 달려서 마치 결혼식 때 신부가 입을 만한 드레스 같은 이미지를 주기 때문에 처음에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런 걸 입고서 당근을 썰거나 조개 해감을 해도 되는 걸까, 아니 애초에 보통 집에서 이런 걸 입나 싶었지만, 선물해준 설이의 성의를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어차피 집에는 늘 설이와 나 둘뿐이었기 때문에 그 복장에 곧 익숙해졌다.

그리고 입을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면, 왠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 치렁치렁한 앞치마를 입고 바삐 움직이는 모습을 설이는 아일랜드 식탁 앞에 느긋하게 앉아서 감상하는 걸 즐겼다. 멸치 같은 사내놈에게 이런 걸 입혀봤자 어울리지도 않고 예쁘지도 않을 게 뻔한데도, 설이는 마치 사랑스럽다는 듯 부드러운 눈길로 나를 오래도록 바라봤다.

어차피 앞치마야 용도가 다 똑같은 거고, 설이가 그렇게 좋아하는데 입으면 되는 거지, 뭐.

다만 설이말고 다른 사람이 이 모습을 본다고 생각하니 민망하기는 했다. 내 취향에 대해서 이상한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싶진 않았다.

황급하게 앞치마를 벗어 식탁 의자에 걸쳤다가, 생각을 바꿨다. 이 앞치마 자체를 아무도 볼 수 없도록 곱게 접어서 싱크대 서랍 아래쪽에 깊숙이 숨겼다.

"맞다, 비밀번호!"

아차 싶어서 바로 제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 그래도 제이도 당황한 상태였는지,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놀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준이 형! 이거 왜 이래요? 엘리베이터 문이 안 열려요!"

"아, 놀랐지. 우리 오피스텔은 엘리베이터 타려면 비밀번호하고 지문 인식이 필요해. 그래서 저기, 바깥으로 나와서 1층 로비 올라가면 경비원분들 계시거든? 방문하는 집이 어딘지 얘기해야 돼."

"대박…! 슈퍼스타 사는 곳은 뭔가 다르네요……."

감탄하는 제이의 목소리 곁에서 진짜? 진짜래? 하고 수런거리는 다른 두 멤버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아무래도 이렇게까지 보안이 철저한 곳은 흔치 않으니까 놀랐을 것이다.

처음에 이사 왔을 때는 나도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게다가 안전을 위해서 설이가 자주 비밀번호를 바꾸는 바람에 문을 못 열어서 외출을 못했던 경우도 있었다. 다행이 설이가 돌아와서 함께 나갈 수 있었지만.

"내가 인터폰으로 프런트 쪽에 미리 전화해놓을게."

"네! 매니저 형이 내려다 주고 가서, 우리 셋만 올라갈 거예요. 근데… 저기, 형! 혹시, 저희가 집에 들어가는 거 좀 그러면 형이 나와도 괜찮아요. 근처에서 밥 먹어요. 저희가 갑자기 스케줄 펑크 난 거라 연락을 못하고 왔어요."

제이는 얼마 전 내가 그루 엔터테인먼트에 오랜만에 방문했을 때 제이와 만나고 싶었다는 말을 권영도 이사에게서 전해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내 생각이 나던 차였는데, 갑작스러운 설이의 사고 때문에 내게 만나자고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설이가 슬슬 방송에서도 얼굴을 비추기 시작했고, 마침 알맞게 짬이 나와서 왔다는 설명이었다.

"올라와, 지금 내 동생 집에 없거든. 외출 중인데, 아마 한 시간은 걸릴 거야."

"오, 그럼 다행이네요. 올라 갈게요!"

설이가 부재중이라는 말에 진심으로 한숨을 내쉬며 목소리가 한결 가벼워지는 걸 보면, 여전히 제이는 설이를 어려워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설이가 낯을 좀 가려서 친해지는 데에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도 설이가 알고 보면 다정하고 귀여운 앤데, 이번 기회에 친해지면 좋겠다.

인터폰으로 프런트에 있는 경비원 분을 호출했다. 곧 친구들이 지하주차장에서 로비로 올라올 테니까, 그 애들이 우리 층으로 오는 엘리베이터를 탑승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아… 동거인 분께서도 허락하신 사항입니까?

"네? 지금 우리 설이한테 허락 받았냐고 물어보시는 건가요?"

-그게, 네… 그 다른 6001호 거주자 분께서 특별히 보안에 신경 써달라고 당부하셨기 때문에 여쭤보는 겁니다. 연예인이신 걸로 알고 있어서…….

"그렇군요, 설이한테는 제가 따로 말할 거라서 괜찮습니다. 모르는 애들도 아니고요. 그럼, 제 친구들 부탁 드릴게요."

경비원은 조금 당황하는 듯 하더니 알겠다고 대답했다. 경비원 분들도 우리 집에 손님이 오는 게 처음이라 놀랐을 것이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분명 지난 번에 그루 엔터테인먼트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그 분이 맞는 것 같은데 갑자기 다시 '거주자님'이라고 딱딱하게 부르는 것이 의아했다. 내 이름을 알고 계신 거라면 그냥 편하게 불러도 상관 없는데. 아무래도 다음에 마주쳤을 때는 좀 편하게 하시라고 해야겠다. 나이대가 비슷하면 말을 놔도 상관 없고.

그나저나 손님 대접할 만한 게 있을지 모르겠다. 선물로 들어온 쿠키 류를 찬장에 넣어두었던 것 같기는 한데.

설이에게도 미리 메시지를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부엌 쪽으로 걸어가며 휴대폰을 만졌다.

'설아, 지금 집에 하이레벨 애들 놀러 왔어. 혹시 너 쉬기 불편하면, 집 구경만 시켜주고 내가 애들이랑 나갔다가 올게.'

메시지를 전송하자마자 답장이 왔다.

'왜?'

"…응? 뭐가 왜냐는 거지?"

설이에게서 온 메시지는 단 한 글자뿐이어서 의중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왜 하이레벨 애들이 갑자기 놀러 왔냐고 묻는 건가? 아니면 왜 집 구경을 시켜주느냐고 묻는 건지, 그도 아니면 왜 내가 애들이랑 나갔다 오냐고? 정확히 뭘 묻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어느 쪽이어도 이상한 물음이었다.

'애들 만나기 부끄러워서 그래? 그러면 금방 나갈 테니까 솔직히 말해도 괜찮아, 설아.'

그러나 설이에게서는 그 뒤로 답장이 없었다.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대답이 없는 걸 보니, 회의 때문에 바쁜 것일지도 모른다. 설이에게서 불편하다고 연락이 오면 애들을 데리고 근처 카페라도 가 봐야겠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60층까지 올라왔는지 현관문 앞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우리 층에는 우리 세대밖에 살지 않아서 헤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바로 인터폰으로 현관문 해제 버튼을 누른 뒤에 다시 부엌으로 달려갔다.

찬장에는 쿠키 종류가 꽤나 많았다. 설이도 군것질을 잘 안 하고, 나도 잘 안 하는 편이어서 선물 받은 것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틴케이스를 뒤집어서 유통기한을 확인하고 있을 때,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쯤이면 애들 셋이 현관 복도를 지나서 거실로 들어와 시끌벅적할 타이밍인데 너무 조용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애들이 집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거실로 다시 나갔을 때, 전자 초인종 소리가 다시 울렸다. 인터폰 화면으로는 여전히 세 명의 애들이 현관문 앞에 옹기종기 모여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스피커 버튼을 눌렀다.

“왜 안 들어와?”

내 물음에 세 명이 동시에 억울하다는 듯 눈썹이 처진 채로 말했다. 

“형, 문 안 열려요!”

"문이 왜? 내가 가서 열어줄게."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 쪽으로 달려갔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지문을 2초간 꾹 눌러 인식을 하자, 띠리릭- 하고 잠긴 문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어?"

그런데도 이상하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문고리를 눌러 아무리 밀어도 전혀 밀리지가 않는 것이다. 비밀번호를 틀린 것도 아니고 지문 인식이 실패한 것도 아닌데, 문은 굳게 닫힌 채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문 밖에 무거운 뭔가가 막고 있는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맞다, 지문이 안 될 경우 홍채 인식도 가능하다고 했었지.

설이의 설명을 떠올리며 침착하게 다시 비밀번호를 누르고 화면에 맞추어 눈동자를 크게 뜨고 대자, 이번에도 띠리릭-하고 록 해제가 되었다.

그럼에도 문은 조금도 밀리지 않는 것이다.

문 밖에 바짝 붙어선 제이의 목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왔다.

"준이 형, 열어주세요!"

제이에게 전화를 걸어 스피커폰으로 변경해 신발장 위에 올려두었다. 다리에 힘을 주어 지탱하며 두 손으로 문을 있는 힘껏 밀어봐도 실패였다.

"아… 얘들아, 문이 고장 났나 봐."

"네? 갑자기요?"

혹시 걸쇠가 잘못 걸려있나 보았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빗장을 꽂아 넣는 이중 잠금 장치도 설치되어 있었지만, 한 번도 그걸 사용해 이중으로 걸어 잠근 적도 없었다.

이런 경우에는 1층 프런트에 다시 호출해서 경비원 분들을 불러야 하나? 아니면 근처 출장 수리업체를 검색해볼까.

당황해서 고민하는 와중에 현관문 밖에서 부산스러운 소음이 들리더니, 하이레벨 애들이 일제히 인사하는 소리가 복도 가득 크게 울렸다.

"아, 안녕하십니까!"

누가 왔나, 싶었는데 바로 스피커폰으로 설이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만나러 오셨나 봐요."

하이레벨 애들은 설이보다 데뷔도 먼저 했으면서 모두 긴장한 듯 넵, 하고 딱딱하게 대답했다. 셋이서 허둥지둥 설이에게 대답을 와중에, 식재료 배달업자도 도착해버렸다.

평소 쥐 죽은 듯 조용하던 현관 앞 복도가 여러 사람들로 부산스러운 게 느껴졌다.

"아, 바깥양반 계시네. 여기 두고 가겠습니다."

식재료 배달 기사님은 보냉백에 담긴 식재료를 맡기고 떠나갔다.

"설아! 문이 안 열려!"

여전히 통화가 연결되어 있는 제이의 폰으로 내 목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설이는 음, 그래? 하고 의아해했고, 문고리를 만지작거리는 듯 했다. 그러나 여전히 문은 굳건히 닫힌 채였다.

"일단 세 분은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수리 기사님을 불러야 할 것 같아서요."

설이의 차분한 목소리에 세 명은 수긍하는 듯 했다. 제이가 휴대폰에 가까이 목소리를 냈다.

"준이 형, 저희 다음에 만나야 할 것 같아요. 문이 언제 고쳐질지도 모르고…"

"아, 그래. 내가 연락할게. 미안하다, 애들아."

"아녜요, 다음에는 미리 연락하겠습니다!"

전화가 끊어지고 세 명이 복도를 걸어 멀어지는 듯 소음이 작아졌다. 인터폰 쪽으로 달려가 현관문 앞 화면을 비추는 버튼을 누르자, 설이가 혼자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설아, 일단 경비원 분들한테 호출해볼까?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현관문 앞까지 왔다갔다하는 나와 다르게 인터폰 화면 속의 설이는 초인종이 달린 센서 화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쪽에서는 내가 보일 리가 없는데도, 마치 나와 눈이 마주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화질 낮은 화면으로 보이는 설이의 흰 얼굴이 어쩐지 조금 퉁명스러운 표정이었다. 내 물음에 대답도 없이 가만히 서 있던 설이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비밀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설아, 그거 해 봤자 소용없다니까, 내가 몇 번이나 해봤는데 그래도 문이 안…"

띠리릭- 도어 록 해제를 알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리는 것 같았다.

거짓말처럼 현관문은 언제 그렇게 굳건히 잠겨 있었냐는 듯 설이의 손에 너무도 쉽게 열렸다. 설이는 복도를 뚜벅뚜벅 걸어서는 이중 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왔다. 아직도 벙 찐 표정으로 인터폰 앞에 서 있는 내게로 다가와서 팔을 뻗어 나를 한 품에 확 끌어안았다.

"어, 어떻게 문이…"

내 어깨에 콧날을 비비며 설이가 잔뜩 속상해하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형, 왜 자꾸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게 하려는 거야?"

응? 하고 되묻자 설이는 낮게 한숨 섞인 목소리를 냈다.

"……여기는 형하고 나만의 집이잖아. 다른 사람이 침범하는 건 싫어."

어리광이 잔뜩 담긴 목소리였다. 마치 제 영역에 들어오는 적을 경계하는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숨소리가 섞여 있었다. 내 몸을 가득 끌어안는 설이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설이가 이렇게 싫어하는데, 내가 무신경했나 싶어서 설이의 너른 등판을 가볍게 쓸어주었다.

"미안, 그렇지만 설아. 집에 찾아온 손님을 내쫓을 수는 없잖아. 응?"

"왜 그러면 안 되는 건데?"

"……어?"

설이는 내 어깨를 두 손으로 꾹 쥐며 내게서 떨어졌다. 눈썹을 밀어 올린 채 신경질적인 눈빛을 하고 있었다.

"형은 내 하나뿐인 반려잖아. 그리고 여기는 우리 둘만의 보금자리야. 그러니까 형이랑 내가 아닌 사람들은 들어오지 못하는 게 맞아. 그렇잖아, 형. 아니야?"

"어… 물론 우리가 그런, 그런 사이가 되기로 한 건 맞지만,"

얼굴이 붉어져서 일단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된 후에 다시 불만 가득한 설이의 얼굴을 마주봤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집에 다른 사람들이 못 들어오게 해서는 안 돼."

"안 돼?"

정말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되묻는 설이의 가슴팍을 가볍게 도닥였다.

"응, 안 되는 거야. 가끔 친구들도 초대하고, 여러 사람들하고 교류하면서 살아가야지. 원래 가끔 서로 집에도 놀러 가고 그러면서 친해지는 거야. 우리 둘이서만 살아가는 세상 아니잖아. 그렇지? 다가오는 사람들 자꾸 밀어내고 그러면 못 써."

"……."

불복하는 표정이었지만 착한 설이는 말대꾸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머리를 가만히 쓸어주자 눈을 감고 숨을 작게 내쉰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머리카락과 귀를 만져주는 내 손길에 기분이 조금 풀렸는지 다시 눈을 뜬 설이의 눈빛이 온순해져 있다.

"참, 너 회의는 어쩌고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오늘 정할 거 많다고 했잖아."

"……다시 나가봐야 해."

"그러면 일하다가 중간에 집으로 온 거네? 왜?"

"………"

설이는 대답 없이 원망의 눈길로 나를 바라봤다. 마치 내가 하이레벨 애들을 집으로 들이려고 해서 그걸 막기 위해 한걸음에 달려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대로라면 우리 설이가 알고 보니 인간혐오증이 있다고 헛소문이라도 날 판이다.

"설아, 그러면 신 매니저님 집으로 오시라고 해. 집에서 회의하면 되잖아."

"………"

"설아. 그러면 못 쓴다고 했잖아."

엄한 표정을 했더니, 설이가 내 시선을 피했다.

이 고집쟁이를 어쩌면 좋지.

말도 잘 듣고 순한 성격이지만 이렇게 한 번씩 고집을 부리면 맘을 돌리기가 쉽지 않다.

알았으니까 얼른 다녀오라며 설이의 어깨를 현관 쪽으로 밀었더니, 복도를 걸어나가서 식재료가 담긴 보냉백을 들어다가 가져왔다. 아일랜드 식탁에 보냉백을 올려놔 주고는 다시 내 쪽으로 와서 쪽, 소리가 나도록 내 뺨에 입을 맞췄다.

"다시 다녀올게, 얌전히 있어."

싱긋 웃고 떠나는 설이를 현관문까지 배웅하고 나니, 문득 설이 말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내가 사고뭉치 어린애도 아닌데, 설이는 외출할 때마다 내게 얌전히 있으라면서 주의를 준다. 어쩐지 그게 어른 흉내 내는 아이같이 느껴져서 피식 웃으며 부엌으로 향했다.

오리고기를 손질해서 미리 초벌구이를 해놓고, 버섯전골을 바글바글 끓이다 보니 설이가 다시 올 시간이었다. 냄비에 국자를 넣어 휘휘 저어가며 간을 맞추고 있는데, 방금 전에 일어난 일이 참 신기하단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설이가 오자마자 문이 갑자기 열릴 수 있지? 마치 설이말고 다른 사람은 못 들어오게 누가 막은 것처럼. 그렇지만 그런 마법 같은 것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할 리도 없고…….

정말 존재할 리 없을까? 우리 설이는 꼬리랑 귀도 생기는데.

"……아니겠지. 하하, 나도 참."

순간적으로 설이가 일부러 문이 열리지 않게 염력이라도 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터무니 없는 상상이었다. 아무리 우리 설이가 설 표범으로 변신할 수 있는 존재라고 해도, 요술 같은 힘을 부려서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만약 그런 게 가능하다면, 우리 설이는 정말 인간이 아닌 건데? 문도 안 열리게 만들고 자동차도 맘대로 움직이고, 뭐… 비나 눈도 내리게 하고?

내 생각에 스스로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설이는 식사 준비가 마무리되었을 무렵,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오자마자 샤워를 마친 후에 젖은 머리로 식탁 앞에 앉았다. 행복한 표정으로 내가 차린 음식들을 오물오물 먹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아기 강아지가 따로 없었다. 내가 오리 고기를 알맞은 크기로 잘라 밥 수저 위에 올려주면, 한 입에 앙 물고 야무지게 씹어먹었다.

누가 내가 키운 내 동생 아니랄 까봐, 내 음식에 입맛이 길들여져서 그런지 참 맛있게도 먹는다. 이렇게 순진한 얼굴을 한 설이에게 악의적으로도 쓸 수 있는 어떤 대단한 힘이 있을 것처럼 상상했던 스스로를 깊이 반성했다. 설이는 단지 수줍음이 많고 고집 센 아이일 뿐이다.

"참, 설아. 너 내일 아침 일찍 드라마 촬영 간다고?"

"응…. 형한테 아직 말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았어."

"당연히 신 매니저님께서 따로 메시지 보내주셨지. 너 식사 일정 때문에 나한테 대략적으로 스케줄 알려주시거든."

"…그렇구나."

설이는 마치 내가 신 매니저님하고 따로 연락하는 게 마음에 안 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건 내 착각일 것이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로 물을 한 모금 마신 설이가 물 잔을 내려놓고 나를 바라봤다.

"로케이션 촬영이라서 통영까지 가야 하니까, 새벽에 집에 오게 될 것 같아. 아니면… 다음날 아침일지도 모르고."

"아, 그 시나리오에서 바다 가는 장면 있었지? 그게 처음 부분이 아니었는데, 맨 처음부터 찍는 게 아니구나."

이제 설이가 정말 드라마를 찍는다는 게 신기해서 호들갑을 떠는 나와 다르게 설이는 로케이션 촬영이 벌써부터 피곤하게 느껴지는지 조금 가라앉은 표정이었다.

잘 다녀오라며 다가가서 어깨를 주물러주자, 설이는 누그러진 눈빛으로 내 허리를 담뿍 껴안으며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어차피 우리는 하나의 세제와 섬유유연제를 같이 써서 옷을 세탁하기 때문에 설이와 내 옷에서는 같은 향기가 날 게 뻔한데, 그럼에도 설이는 내 몸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은 것을 즐겼다. 마치 신경 안정을 위한 허브 향이라도 맡은 듯, 평온하게 풀어진 표정이 되었다. 

"내일 피곤할 테니까 일찍 자는 게 좋겠다."

"응. 형 샤워 끝나고 침대로 오면, 그때 같이 잘게."

아직 환자주제에 제가 설거지를 하겠다는 설이의 엉덩이를 찰싹 때려서 침실로 먼저 보낸 뒤, 빠르게 뒷정리를 했다.

설이의 수면 시간을 늘려주겠다는 일념 하에 거의 물만 묻히는 수준으로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말린 뒤에 침실에 들어가자, 설이는 내 자리를 남겨둔 채로 침대 한 편에 얌전히 누워 나를 기다렸다.

우리는 잠들 때 가끔 체크무늬로 된 커플 잠옷을 입었는데, 설국지색 눈송이분들이 설이에게 보낸 선물 중 하나였다. 색깔 별로 된 브랜드 잠옷이라서 애초부터 커플 잠옷인 것은 아닌데, 설이는 본인이 그 잠옷을 입을 때마다 내게 꼭 다른 색상의 똑같은 잠옷을 입혔다. 나한테는 품이 커서 목덜미가 쇄골까지 다 드러나고 바지가 질질 끌렸지만, 설이가 나와 똑같은 잠옷을 입는 걸 너무 즐거워해서 같이 입기 시작했다.

"…팬들이 이 사실을 알면 욕하지나 않을까 모르겠다. 너 입으라고 보낸 건데."

"가까이 와, 형,"

나를 제 품에 꼭 맞도록 껴안고서야 설이는 느긋한 숨을 내쉬면서 눈을 감았다.

***

설이는 정확히 아침 여섯 시에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다녀올게." 하고 작게 속삭였다. 나는 잠결이라서 그게 꿈인가 싶은 정도로 몽롱한 상태로 그저 "으응, 그래." 하고 대답했던 게 전부였다.

세 시간이 더 지난 아홉시쯤에야 잠에서 깨어나서, 동생은 그렇게 일찍부터 일하러 나가는데 나는 이게 뭔 늦잠인가 싶어서 반성했다.

설국지색 커뮤니티에 들어가보니, 벌써 설이의 드라마 촬영에 대한 게시물이 가득했다. 촬영장 근처에 사는 팬들이 있는지 촬영 모습을 찍은 사진도 올라왔다. 설이가 상대 여배우와 함께 대본을 보며 대화하고 있는 모습이 스텝들 사이로 흐릿하게 찍혀 있었다. 비록 화질이 너무 낮은 데다가 제대로 초점이 맞지 않는 휴대폰 사진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이의 미모와 아우라만은 선명했다.

'배민아 드라마 찍을 때마다 남자 주인공이랑 사귀던데, 설 오빠랑도 그러면 어쩌지?'

'절대 그럴 일 없음. 한설은 필요한 말 이외에는 안 한다고 함. 헤어 샵 스텝으로 있던 내 친구가 말해줌.'

'아 근데 진짜 우리 눈꽃오빠 과묵하긴 한듯. 따로 친한 배우 없더라.'

'조심하는 거지. 신인이니까.'

'조심이라기보다 그냥 다른 연예인들한테 관심이 없어 보여. 회식에서도 혼자 빠져나가는 거 봄.'

확실히 우리 설이가 다른 연예인들과 친분이 있지는 않은데, 그게 팬들 눈에도 조금 이상하게 보이는 모양이다.

첫 영화 때 친구 역할로 나왔던 하이레벨 제이가 성격도 좋고 착한데다가 나이대도 비슷해서 친구로 지내면 딱 좋을 것 같았는데, 집으로 오는 것도 그렇게 싫다고 하니까 더 밀어붙일 방법이 없었다.

"……일하면서 사교성도 좀 생기면 좋으련만."

아쉽지만 어쩔 수가 없다. 친구가 억지로 생기는 것도 아니니까.

그러고 보니, 우정혁에게 연락을 한다고 해놓고 잊고 있었다. 설이가 다쳤을 때부터 묵묵하게 내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통화 연결음이 길게 이어져서 그냥 끊을까 하던 찰나에 전화를 받았다.

늘 그렇듯이 심드렁한 목소리였다.

-어, 한준. 이제 여유가 좀 생겼나 보다.

"그렇지, 뭐. 설이 이제 정말 괜찮거든. 혹시 후유증 있을까 걱정했는데, 검진해봐도 그런 건 없을 것 같다고 하더라. 그래도 더 지켜보긴 해야지."

-그래. 나 아직 한국이야.

"또 호텔에서 지내냐, 도련님?"

-아냐. 집이야. 너 옛날에 놀러 왔었잖아, 우리 본가.

"부모님 닦달 때문에 집에 안 간다더니?"

-어어, 두 분이 제주도 가셨어. 그래서 나 집에 며칠 내내 혼자야.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이에게 인간 관계를 더 넓게 가져야 한다고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본보기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조차도 친구 만나는 일이 없고, 인간 관계가 이렇게 좁을 수가 없는데 설이에게 잔소리해봤자 효력 없는 단순한 설교가 될 뿐이다.

"야! 잘 됐다."

-어? 뭐가.

"우정혁, 나 너네 집에서 하루만 신세지자."

어차피 설이도 멀리 촬영 가서 새벽에 오거나 하루 집을 비우게 되었으니, 지금이 친구 집에서 자고 오기 딱 좋은 시기인 것이다.

설아, 형이 친구 사귀는 본보기를 보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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