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건강하지 못한 관계
"설아? 이사님 오셨잖아. 문 열어야지."
"……"
몇 초간 고집스럽게 입을 꾹 다문 채로 내 손을 붙잡고 있던 설이는 어쩔 수 없이 손가락에 힘을 풀어 나를 놓아주었다.
혹시 사고 이후에 권영도 이사에 대해서 반감이 생긴 것은 아닌가 싶어 걱정이었다. 사고에 고의성이 없는 것을 확인했고, 설이도 말로는 다 괜찮다고 했지만, 만약 이번 일로 타인에 대한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면 그건 억지로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설이의 머리를 가볍게 쓸어준 뒤에 문 쪽으로 다가갔다.
"들어오세요."
권영도는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문을 열자 시선을 들어 내 안색을 살피듯 나와 눈을 맞췄다. 실례합니다, 하고 내게 살짝 목례하는 그를 보고 있으려니 교통사고 당시에 내가 그의 손을 차갑게 쳐냈던 기억이 떠올랐다. 감정적이고 유치한 행동이었다.
"저, 이사님, 그날은 죄송했습니다…"
"한준 씨는 나에게 사과할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면서 권영도는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는 듯 내 어깨를 가볍게 툭 두드렸다. 그가 일부러 설이를 차로 친 게 아니라는 것을 조수석에 앉아 있었던 내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는데, 의연하고 냉정하게 대처하지 못한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그런 나를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배려하는 그의 태도에 존경심마저 들었다. 어딘가 껄렁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은근히 제대로 된 사람이다. 처음에는 언제 봤다고 동성인 내게 첫만남부터 작업을 거나, 양아치 아닌가, 싶은 인상이었는데 보면 볼수록 진국이라서 참 의외였다. 이래서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되는 모양이다.
멍하니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친 순간, 권영도가 다시 입을 열었지만 설이의 목소리가 먼저 우리 둘 사이를 갈랐다.
"계속 서 있지 마시고 이쪽으로 오시죠."
그리고 내 쪽으로 손을 뻗어 손바닥을 내보였다.
"…형, 다시 이리와."
어째서인지 초조한 눈빛이었다.
권영도 이사를 소파 자리로 안내하는 사이, 신 매니저가 권영도에게 인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설이에게 건네주러 온 자료를 모두 테이블에 내려놓았고 서류 가방을 어깨에 걸치며 먼저 자리를 피해주었다.
권영도 이사는 신 매니저가 앉았던 설이의 맞은편 소파에 자리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설이의 옆자리에 앉았다. 냉장고 쪽으로 가서 손님인 이사님에게 뭔가 마실 것을 꺼내드리려고 하는데, 설이가 내 손을 꽉 잡았다.
"자꾸 어딜 가."
설이는 마치 나를 빼앗길 까봐 두렵기라도 한 듯이 경계하는 시선으로 권영도를 쳐다보며 고집스럽게 내 손을 잡고 있었다.
권영도는 유리 테이블 아래로 나와 설이가 잡은 손을 빤히 내려다본 채로 입을 열었다.
"한설 후배님, 제 부주의한 운전으로 상해를 입힌 점에 대해서 사과하고 싶습니다.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보호자인 한준 씨에게도, 심려를 끼쳐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아뇨… 정말 사고였고, 그래도 저는 설이 부상이 이만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 이사님… 고개 드세요."
정중한 태도로 우리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권영도의 모습은, 진실되어 보였다. 병실 안에는 우리를 촬영하고 있는 카메라도 없었고, 이미 변호사를 통해서 깊은 사과의 말을 여러 번이나 전했었다. 그럼에도 직접 만나서 고개 숙여 진심 어린 사과까지 하는 것이다.
물론 설이가 다친 것은 말도 못하게 속상한 일이지만, 잘 회복하고 있는 중이었고 권영도 이사에 대한 악감정은 조금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우릴 향해 숙인 고개를 들지 않고 그대로 묵묵히 기다리는 모습을 보는 것이 마음이 불편했다.
말 없이 권영도의 사과를 듣고만 있던 설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과는 받겠습니다. 선배님."
누그러진 목소리였지만, 여전히 설이는 딱딱한 태도였다. 그러나 내 손을 쥔 손길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손가락 사이로 깍지를 끼면서 엄지로 내 손등 피부를 느리게 쓸었다.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만, 그날처럼 제 형을 갑자기 불러내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일적으로나 사적으로나… 한준은 제 개인 매니저로 계약된 사람이잖습니까."
꼭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내 불안한 시선에도 설이는 말을 이었다.
"그날, 형이 연락도 안 되고 갑자기 없어져서 혹시 납치라도 당했나 하는 생각에 찾아나선 참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입장에서는… 납치나 다름 없었다고 생각하게 되네요."
가련한 표정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며 설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형이 없어져서 얼마나 놀랐는지…….”
나는 깍지 낀 손에 힘을 주며 설이의 팔을 잡았다.
"설아, 그건 내가 휴대폰을 두고 나가서 그래, 내 잘못이야."
공연히 나 때문에 애꿎은 권영도 이사님이 싫은 소리를 듣는다는 생각에 다급하게 말했지만 설이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선배님께서 불러내지 않으셨다면, 형은 집 밖으로 나갈 일도 없었을 거잖아."
부드럽게 눈을 접으면서 말하는 설이의 태도에 말 문이 막혀서 입을 다물었다.
물론 그렇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게 권영도 이사님의 잘못은 아니지 않을까.
생각에 빠진 나를 두고 설이는 다시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려운 부탁은 아니니 들어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선배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설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권영도는 작게 숨을 내쉬면서 테이블을 짚었다.
"후배님, 이번 사고에 대해서는 정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이미 후배님 쪽에서 거절한 일이지만, 치료비 일체와 정신적인 피해보상까지 전부 제가 부담하고 싶은 마음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하지만,"
말을 끊으며 권영도는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후배님에게 개인적인 내 친분과 만남까지 제지 받을 필요가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군요."
말투와 목소리가 부드러웠지만, 서로 부딪히는 눈빛이 어쩐지 차갑게 느껴지는 것은 착각이 아니겠지. 어딘지 신경이 곤두서 있는 태도는 설이와 더불어 권영도 쪽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권영도는 입술을 누그러뜨려 웃었다.
"그래도 후배님께서는 한준 씨의 '친동생'이시니까, 앞으로는 한준 씨를 만날 때 전보다 연락에 신경 쓰도록 하죠."
살짝 고개를 숙여 목례하며 대화에 아예 종지부를 찍은 권영도가 내게 좀 더 온화한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한준 씨, 단둘이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아… 네."
나도 모르게 내 손을 쥔 설이의 눈치를 봤다. 권영도 이사와 잠깐 대화를 나누는 것까지 설이의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었지만, 나는 아직 환자인 우리 설이의 심기가 불편하지 않기를 바랐다. 입원 이후로 설이 곁에서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잠깐 다녀와도 괜찮아? 속삭이듯 묻자 설이는 내 손을 깍지 낀 채로 조몰락거리다가 고개를 느리게 한 번 끄덕였다. 그러나 소파에서 일어나는 내 팔을 제 쪽으로 다시 끌어 나를 도로 소파에 앉히더니 내 이마에 몸을 숙여 입을 맞췄다.
"빨리 돌아와, 형."
"아, 어어, 그래야지."
권영도의 시선을 의식하며 아차, 싶었다. 설이는 이 공간 안에 둘뿐인 것처럼 행동했지만, 사실 우리 앞에는 그루 엔터테인먼트의 이사 한 분이 떡 하니 앉아계신 것이다. 바로 이런 설이의 태도 때문에 우리 관계가 세간이 들키는 건 시간 문제일수도 있는 것이다.
조만간 신 매니저님하고 이 일로 상담을 좀 해야 할 텐데.
"같이 나가죠."
우리의 진한 스킨십을 못 본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권영도는 내게 턱짓하며 먼저 문 쪽으로 걸어갔다.
입원실과 연결된 응접실에서 이야기를 나눠도 됐을 텐데, 권영도 이사는 복도로 나와서 한 층 더 위에 있는 옥상 실외정원으로 나갔다.
난간 앞까지 걸어간 권영도가 나를 등진 채 서서 코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찬 바람이 우리 사이를 가르고 지나갔다. 다행히도 옥상에는 우리 두 사람뿐이었다. 나는 권영도의 등 뒤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무슨… 문제가 생겼습니까? 설이하고 관련된 일인 거죠?"
그렇지 않다면, 설이와 같이 있는 병실에서 보호자인 나를 굳이 따로 불러낼 일도 없었을 것이다. 권영도가 내 쪽으로 돌아섰다. 뭔가를 말하기 망설이는 듯한 그의 태도에 괜히 내가 더 긴장이 되었다.
"경찰이 그 근처 CCTV들을 조사했습니다. 사고 현장 외곽 코너에 계속 주차되어 있던 SUV 블랙박스 영상도 확보했고요."
"…그런데요?"
"사고 정황에 대해서는 문제될 만한 증거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브레이크 고장도 아니었지만, 결함이라기보다 일시적인 증상일수도 있다는 애매한 결과만 남았죠. 물론 피아디 사 측에서는 내 실수이기를 바라는 것 같았지만… 내 차에도 블랙박스는 달려 있었고, 약물 검사까지 모두 통과했으니까요. EDR 판독도 했고, 교통사고 조사계에서도 최종적으로 내 잘못은 없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어, 그러면, 다 해결된 것 아닌가요? 또 뭐가 있습니까?"
권영도가 목소리를 낮췄다.
"……그 영상들 속의 한설 모습이 내가 보기엔 이상하더군요."
"네? 그게 무슨,"
권영도는 입술을 말아 넣었다가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그날 한설이 있던 여의도 방송국에서 한준 씨와 내가 있던 곳까지는 약 13km 정도 거리였습니다. 40분은 걸리는 거리를 어떻게 그렇게 단 시간 내에 올 수 있었을까요, 대본 리딩은 사고 나기 20분 전에 끝났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래요, 차가 막히지 않았다고 칩시다. 하지만 우리가 있는 곳까지 바로 왔다는 것도 의문입니다. 영상 속 한설은 우리 쪽으로 한치 망설임도 없이 다가오더군요. 마치 한준 씨가 어디에 있는지 다 알고 있었던 것처럼. 한준 씨를 찾아 헤맸다는 사람이 말입니다."
권영도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나는 휴대폰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을 뿐더러 설이한테 외출한다고 말한 적도 없었다.
"이건, 한준 씨에게 사람을 붙였거나 위치추적기를 달지 않았다면 납득이 안 되는 부분입니다."
"그건… 그러니까 우연히…"
"네, 물론 모든 게 다 우연일 수 있겠죠."
권영도는 어떻게든 설이를 변호하고 싶은 내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미미하게 웃어주었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생각해보면 설이는, 신기할 정도로 내가 어디에 있는지 잘 아는 편이었다. 오피스텔 밖으로 나올 때면 언제나 바로 설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렇다고 해서 설이가 내 몸에 위치추적기를 달았을 리도 없고, 만약 사람을 붙였다면 날 따라오는 기척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니까 설이는, 그냥 촉이 좋을 뿐이다. 원래 예민하고 섬세한 성격이라서 어릴 적부터 눈치가 빨랐다. 영민하고 똑똑한 아이였다. 그게 설 표범으로도 변할 수 있는 우리 설이의 특별함에서 나오는 또 다른 특징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릴 때부터 설이는 나를 잘 따르고 착하고 영리했다. 그건 늘 내가 자랑스럽게 생각해온 점이었다. 설이를 스토커 같은 존재로 의심할 일이 아닌 것이다.
권영도는 생각에 잠긴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 거, 지치지 않나요?"
"네?"
"그렇게… 한 사람에게만 종속되어 사는 것 말입니다."
권영도가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언제부터 두 사람이 형제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아주 오랜 시간 함께 했겠죠. 저는 그게, 별로 건강한 관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슨…"
"갇힌 세계나 마찬가지잖아요. 마치 우물 안 개구리처럼, 한준 씨는 한설만 알고 살잖아요."
확실히 나는 설이를 바라보며 살아왔고, 설이를 잘 키우는 게 내 인생의 목표였지만 그걸 한 순간이라도 후회하거나 부정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권영도 이사가 설이와 내 관계를 나쁘게 여기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좀 상하는 순간이었다.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아서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지만, 어쨌든 이사님이 설이 욕을 한 건 아니었기 때문에 입을 꾹 다물고 참았다.
권영도는 내게 성큼 한 발 다가왔다. 그리고는 가까이에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코끝이 닿을 것 같았다.
"제대로 연애해 본 적은 있습니까? 내가…"
"으악!"
그때, 소낙비 미친 듯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일기예보에 없던 비였기 때문에 당황스러웠다. 벤치가 있는 쪽에는 지붕이 있어서 권영도 이사와 나는 일단 그쪽으로 동시에 뛰어갔다. 하지만 지붕 아래로 피신한다고 해도, 사선으로 들이치는 적군의 화살 같은 빗줄기를 피할 길이 없었다.
너희가 신속히 대화를 끝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몽땅 다 젖게 만들겠다는 의지가 담긴 듯 거센 비였다. 인조잔디가 깔린 옥상 바닥에 뿌옇게 물보라가 일었다. 그 엄청난 빗줄기에 놀라 잠시 멍해져 있었다.
"아… 이만 들어가는 게 좋겠군요."
"네에. 바로 그칠 것 같지도 않고."
흠뻑 젖은 코트와 머리를 입원실 안에서 좀 말리고 가라고 권했지만, 권영도는 젖은 머리를 툭툭 털어내고는 고개를 저었다. 지하주차장으로 연결되는 엘리베이터에 오른 권영도가 내게 말했다.
"조심해요."
"네?"
"언제나 그 남자를 택하는 한준 씨가, 마음에 안 놓여서 말입니다."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권영도는 쓴웃음을 지었고, 나는 고개를 꾸벅 숙여서 인사했다. '그 남자' 라니, 가만 보면 권영도 이사는 단어 선택이 좀 특이한 편이었다. 물론 설이는 어엿한 어른 남자가 되었고, 그건 내가 이미 뜨겁게 확인한 사실이지만… 별안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설이와 내 사이가 '건강한 관계'가 아니라는 권영도 이사의 말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이사님은 내가 설이에게 목을 매고 종속되어 산다고 걱정하듯 말했지만, 그 말은 곧 바꿔 말하면 설이도 내게 종속되어 있다는 의미가 된다.
나는 내 동생을 속박하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설이가 더 자유롭게 여러 사람을 만나보고, 연애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멍한 표정으로 병실 문을 열자마자 보송보송한 수건이 나를 덮쳤다.
"다 젖었네."
커다란 수건으로 나를 옭아매듯이 감싼 채로 내 앞에 선 설이가 나를 누르듯 꽉 껴안았다. 이러다가 골절된 곳이 덧나면 어쩌려고 이러나 싶었지만 수건에 얼굴까지 덮여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설이는 나를 겨우 품에서 놓아주고, 수건 사이로 내 얼굴이 나올 수 있게 해주었다. 장난기 섞인 눈을 빛내는 예쁜 얼굴이 나를 내려다보고 웃었다.
"그러게, 왜 날 두고 밖에 나갔어."
혼내는 듯하면서도 원망과 어리광이 섞인 다정한 말투였다.
비록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건 오른손뿐이지만 설이는 수건으로 내 머리카락을 조물조물 주물러 말려주었다. 자상한 손길로 내 귀 끝까지 조심스레 닦아주는 설이가 너무 좋아서 나는 얌전히 눈을 감았다. 이 손길도, 숨결도, 웃음도, 다정한 관심과 장난도, 그냥 다 내 거 하면 안 되는 걸까. 역시 지나친 욕심일까.
***
퇴원 후 한동안 나는 정성스럽게 곰탕을 끓였다. 한우 꼬리와 우족, 사골을 사다가 대형 냄비에 넣고 오래도록 진국으로 끓여냈다. 예로부터 조상님들은 뼈가 다쳤을 때는 뼈를 고아 먹어야 한다고 했다. 설이는 내가 주는 거라면 늘 착하게 잘 먹었기 때문에 매 끼마다 곰탕을 다른 반찬들과 함께 내놨다.
곰탕을 끓이려면 새벽에도 불을 줄여 가며 냄비를 잘 살펴야 하는데, 내가 부엌에서 떠나질 않으니까 밤에도 잠에서 덜 깬 설이가 거실 소파에서 꾸벅꾸벅 졸면서 나를 지켜봤다.
"설아, 그렇게 졸지 말고 들어가서 먼저 자, 응? 형도 금방 들어갈게."
"으음… 싫어…. 형 없으면 불안해서 못 자……."
마치 주인만 졸졸 따라다니는 아기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는 기분이었다. 물론 대형견보다 훨씬 크지만, 어깨도 널찍하니 덩치도 큰 설이가 자그마한 쿠션을 껴안은 채로 부엌에서 내가 왔다 갔다 움직일 때마다 졸음을 참고 시선으로 따라오는 게 퍽 귀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가스레인지 불을 끄고 설이와 함께 침대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평온한 일상이었다.
방송에서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가능한 정도가 되자, 설이는 벌써 스케줄을 소화하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설이와 권영도 이사가 미모의 여인을 사이에 둔 라이벌 관계이며, 권영도가 설이를 없애버리기 위해서 차로 친 것이라는 괴소문이 음지에서 퍼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상상력도 참 풍부하다. 어째서 설이가 권영도 이사와 미모의 여인을 사이에 두고 싸울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설이 본인보다 아름다운 미모의 여인이 존재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말이다.
“설아, 또 나가서 만나는 거야?”
“응. 금방 돌아올 테니까 집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설이는 흰 캡 모자를 푹 눌러쓰고 후드짚업을 걸쳐 입은 채로 내 어깨를 끌어당겨 머리꼭지에 입술을 꾹 눌러 뽀뽀했다.
왼팔의 깁스도 풀었고 흉곽 보호대도 착용하지 않지만, 그래도 웬만하면 움직이지 않아야 회복이 빠를 텐데. 신정아 매니저와 둘이 회의를 할 때에는 고집스럽게 설이가 집 밖으로 꼭 나가서 신 매니저를 만났다. 애초에 오피스텔로 이사올 당시 이하원 팀장님은, 업무 때문에 스텝들이 들를 일이 많을 테니까 일부러 넓은 집을 구한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이사 온 이래로 이 넓은 이층 짜리 오피스텔에는 언제나 설이와 나 단 둘뿐이었다.
설이는 운동화를 신은 뒤에 현관까지 따라온 내게 다시 뒤돌아서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코 끝과 입술이었다. 아쉬운 듯 내 뺨을 큰 손으로 만지작거리던 설이는 금방 올게, 하고 말한 뒤에 현관문 도어 록을 해제하고 밖으로 나갔다.
아무래도 너무 곰탕만 먹으면 질릴 테니까. 보양식을 좀 먹여야겠단 생각에 오리구이와 버섯 전골을 만들 재료들을 배달 주문해둔 상태였다. 일단 배달이 올 동안 양파와 파를 다듬는 중이었다. 배달이 빨리 와서 식사 준비가 일찍 끝나면 설이가 올 때까지 우정혁에게 전화나 해볼까 생각하던 차였다.
삐- 삐-
지하주차장 입구에서 세대호출이 왔다. 신 매니저의 벤과 자차는 모두 차량등록이 된 상태이기 때문에 주차장에 들어오기 위해서 세대호출을 할 필요가 없었다. 식 재료 배달 차의 경우에도 주기적으로 배달을 오기 때문에 차량등록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세대호출 벨 소리가 집 안에 울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워낙 손님이 없는 집이라, 어쩌나 벨 소리가 들려도 잘못 누른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래서인지 설이는 누가 호출을 누르더라도, 그냥 무시하라며 내게 당부했다. 집요한 팬들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말에 그러마하고 대답했었다. 인터넷 신문기사를 보면, 택배기사님인 척 유니폼을 차려 입고 변장한 채로 집까지 찾아오는 악질적인 스토커 팬들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평소에는 세대호출에 반응하지 않는 편이지만, 지금은 배달을 시켜놨으니 신경이 쓰였다.
어쩌면 새로운 배달업자라서 차량등록이 안 됐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싱크대에서 빠르게 손을 씻고 거실을 가로 질러 뛰어갔다. 그리고 버튼을 눌러 인터폰 화면을 보았는데, 너무 의외의 얼굴들이 화면에 등장해서 깜짝 놀랐다.
“너희… 여길 어떻게…?”
인터폰 화면으로 보이는 차 안에는 네 명이 타고 있었는데, 운전석에 핸들을 쥔 낯선 로드 매니저를 제외하고는 모두 익숙한 얼굴이었다. 조수석에 앉은 것은 하이레벨의 리드보컬 래디였고, 시트 뒤쪽으로 빠끔히 고개를 내밀어 손을 흔드는 것은 제이, 그 옆은 니키였다.
갑작스러운 방문객의 등장에 놀라기는 했지만, 그래도 일단 반가운 마음에 열림 버튼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