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왜 거기 있었어?
"혀엉, 나 아파."
창백해진 얼굴의 설이가 아스팔트 바닥에 주저 앉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멈춘 차의 범퍼에 옆구리 쪽을 부딪힌 건지 제 몸을 오른 팔로 감싼 채였는데, 축 늘어뜨린 왼팔 쪽은 옷 밖으로 피가 배어 나온 게 보였다. 충돌의 충격 때문인지 설이의 왼팔이 경련하듯 부들부들 떨렸다.
"서… 설…"
숨이 벅찼다. 주변 사람들이 놀라 수군거리는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귓가에 이명이 들려왔고, 순간 머릿속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를 올려다보는 설이의 눈망울이 상처 입은 아기 사슴처럼 촉촉해져 있었다. 얼른 손을 뻗어 설이의 어깨를 감싸 안으려는데 무릎에 힘이 탁 풀렸다. 무너져 내리듯 설이의 앞에 주저앉았다. 거의 무릎을 꿇은 자세가 되어서야 나는 피가 배어 나오는 설이의 왼 팔뚝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아니,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손이 너무 떨려서 도저히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구급, 구급차를 누가……"
스스로 듣기에도 내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아무도 못 들을 것 같았다. 더 크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피를 흘려 파리해진 설이의 입술을 보면서 나는 덜덜 떨고 있었고 내 생각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제가 불렀습니다. 곧 도착할 테니까, 일단 진정해요."
등 뒤에서 권영도가 저벅저벅 걸어오며 크게 말했다.
"관리 팀과 보험사에도 연락을 했으니 곧…"
내 어깨를 감싸 일으켜주려는 듯 단단하게 쥔 권영도의 손길을, 나도 모르게 쳐냈다.
"놓으세요."
탁!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쳐냈고, 권영도는 그대로 멈춘 채 나를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내 행동이 지나치게 차가웠다고 바로 생각했지만, 지금 그의 기분 따위는 내가 알 바 아니었다. 나는 설이가 다쳤다는 사실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고통으로 눈가를 찌푸린 설이가 몸을 구부린 채 작게 신음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서 설이의 등을 받친 채로 땀에 젖은 이마를 쓸어주었다.
"설아, 많이 아파? 곧 구급차 올 거야. 조금만 참아… 조금만, 응?"
"나 아파……."
끙끙거리며 속삭이는 목소리에 애가 탔다. 눈물로 눈 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괜찮아, 괜찮아, 다독이는 내 목소리가 너무 떨려서 마치 옹알이처럼 느껴졌다. 설이는 느리게 숨을 내쉬어 고통을 참아내면서 제 옆구리 쪽을 감싸고 있던 손을 겨우 움직여 내 손목을 꾹 쥐었다.
뜨겁고 축축한 설이의 손바닥이 마치 족쇄처럼 내 손목을 조였다.
"나 너무 아프니까… 내 곁에만 있어, 형…"
고개를 빠르게 끄덕이자, 뺨으로 내 눈물이 툭 툭 떨어져 내렸다. 설이는 안심한 듯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고통을 이겨내려는 방어기제처럼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그 사이 주변에는 더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소란스러웠고,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다급하게 움직이는 구급대원들이 설이를 간이침대에 실어 구급차에 태울 때에도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아스팔트 바닥 위에 설이의 것이 분명한 핏물이 뚝뚝 떨어져 그 부분만 바닥이 진한 색으로 변해 있었다. 몇 초 간 멍하니 그걸 바라보고 있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꾹 감쌌다.
"정신 차려요."
권영도의 목소리였다. 그가 나를 구급차에 태웠고, 나는 설이와 함께 병원으로 옮겨올 수 있었다.
병원에 도착해서는 이동 침대를 끌고 바삐 오가는 의사와 간호사들을 따라가다가 더 이상 들어올 수 없다고 안내하는 간호사 앞에서 문이 닫혀 대기실 앞에 서 있었다. 망연자실한 표정의 내 곁을 맴돌면서 권영도는 계속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신정아 매니저가 도착했고, 권영도는 자리를 피하며 전화를 이어나갔다. 신 매니저가 내 등을 떠밀면서 내 귀에 빠르게 속삭였다.
"이건 단순 사고가 아니에요. 한설 씨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권 이사님 차에 충돌한 것이기 때문에 추측성 기사가 어마어마할 겁니다. 기자들이 한설 씨 형님의 존재를 알게 되면, 인터뷰를 따내려고 안달이 날 거고요. 어떤 기사가 나도 좋을 게 없어요. 남들 눈에 안 띄는 곳에 계셔야 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이가 들어간 수술실 쪽으로 자꾸만 고개가 돌아갔지만, 나는 vip 입원실이 있는 고층으로 가야 했다.
누군가의 집처럼 잘 꾸며진 개인 입원실 안에는, 넓은 응접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었는데,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파악할 수 없었다. 노크 소리와 함께 입원실 안으로 설이를 실은 침대가 들어와서야, 온 몸을 감싼 얼음이 깨진 듯 빠르게 움직였다.
"설아! 괜찮아? 형이야, 응? 우리 설이 괜찮죠?"
뛰어가서 침대 프레임을 짚자, 의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링거 줄을 타고 유리병에 담긴 약물들이 설이의 팔 안으로 뚝뚝 떨어져 들어가는 중이었다. 환자복을 입은 설이는, 얌전히 잠들어 있었다. 환자복이 풀어헤쳐져, 옆구리 쪽으로 무언가 호스 같은 것이 찔러 넣어진 것을 보고 나는 경악했다.
"이건… 이게 대체…"
급하게 숨을 들이마신 나를 잡아 끌며 신 매니저가 놀란 내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내 팔을 몇 번 토닥거렸다. 설이는 안정을 취해야 했기 때문에 조명을 낮춘 침실 쪽에 혼자 둔 채로 우리는 의사와 함께 벽이 나눠진 응접실로 넘어왔다.
"현재 환자분은 흉곽 골절로, 통증 완화제를 투여한 상태입니다. 통증이 심할 것으로 사료되어 하이드로코돈이라는, 일종의 아편성 진통제를 투여했습니다. 지금은 편히 잠든 상태이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 우리 설이 몸에… 호스 같은 것은 뭐죠?"
입술이 떨려서 제대로 말하기가 힘들었다. 의사는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느리게 저으며 위험한 상태는 아닙니다, 하고 미리 한 번 더 말해주었다.
"충돌로 아래쪽 갈비뼈 부근에 골절이 생기면서 뼈가 폐를 건드려서 혈흉이 있었습니다. 다행이 심하지 않아서 쇼크를 일으키지는 않았고요. 흉부에 가슴관을 삽입해서 고인 혈액을 제거하는 시술이 필요했습니다. 상태를 보아, 흉관은 곧 제거할 예정입니다. 자세한 것은, 환자가 깨어나면 엑스레이와 함께 설명 드리겠지만… 지금으로서는 폐경색과 같은 합병증의 위험은 낮을 것으로 보입니다."
의사가 떠나고 난 뒤에, 평온한 얼굴로 잠든 설이의 곁에 내내 앉아 있었다.
몸을 약간 비스듬하게 눕혀놓았는데, 가슴 옆 쪽에 호스가 찔러 넣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게 자꾸 눈에 보여서 자꾸만 목이 매었다. 그러나 설이는 그런 내 속상한 마음은 모른 채, 잠자는 숲 속의 왕자처럼 아름다운 얼굴로 색색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이런 순간에도 어쩌면 설이는 이렇게 아름다울까.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복도 바깥에서 그루 엔터 대표와 전화를 하고 온 신 매니저가 내 옆에 와서 조용히 말했다. 고개 숙인 그 모습을 보면서, 뭐라도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온몸에 기운이 죄다 빠져버려서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대본 리딩이 끝나자마자 한설 씨가 사라졌어요. 주차장에 가 있겠거니 생각했는데, 차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오질 않고… 전화를 해도 받질 않더군요. 권 이사님이 전화 주실 때까지 주차장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될 줄은 전혀 모르고…"
신 매니저가 떠나고 나서야, 따로 의사 소견을 듣고 나서 돌아갔다는 권영도가 떠올랐다.
떠나기 전 그는 나에게 급발진이나 브레이크 고장에 관해서는 보험사에서 조사 중에 있으며, 모든 치료비와 그 외의 정신적 보상에 대한 이야기도 나지막한 목소리로 설명했지만, 하나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권영도는 내게 고개 숙이며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되어 죄송합니다. 한준 씨에게는… 지금 내가 곁에 있는 게 더 괴롭겠군요. 정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무거운 얼굴로 사과했던 권영도에 내가 뭐라고 했는지, 뭔가 대답을 하기는 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새벽녘에 박궁선 회장이 다녀갔을 때에도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던 것 같다. 신 매니저는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내게 뭐라도 먹으라며 음료수와 포장된 죽 같은 것을 사다 주었는데, 아무것도 넘어가지 않아서 물도 마실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맑은 햇살이 블라인드 사이로 새어 들어올 때쯤, 침대 옆에 기대어 선 잠을 자고 있던 내 머리카락을 무언가가 간지럽게 건드렸다. 몽롱한 정신에 고개를 들어보니, 설이의 손가락이었다.
"서, 설아…! 정신 들어? 괜찮아? 응? 많이 아파?"
눈을 가늘게 뜬 설이가 아기처럼 배시시 웃으면서 형, 하고 속삭였다. 그게 어찌나 고맙고 미안하고 속상한지 눈물이 터져 나왔다. 설이가 깨면 호출해달라고 했던 간호사의 당부가 떠올라 겨우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침대 위쪽 벽의 스위치를 눌렀다.
"나 괜찮으니까 울지 마, 형."
흉관이 삽입되어 있어서 함부로 설이를 껴안을 수도 없었다.
설이는 다정하게 울지 말라고 속삭이며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어쩐지 만족스러워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내 눈가의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냈다.
의사는 다시 한 번 엑스레이 사진을 찍고 나서, 보호자인 나를 불러 설이의 상태에 대해서 차근히 설명해주었다. 혈흉이라고 폐와 흉벽 사이에 고인 피를 빼내는 흉관삽입술을 했던 것을 이제 제거해도 될 것 같다며 설이의 컨디션 회복이 무척이나 빠르다는 말을 전했다.
"아무리 젊은 청년이어도, 이렇게까지 회복력이 빠른 것은 처음 봅니다."
"그렇습니까?"
"사실 사고 상황 내용을 들어봤을 때에는 늑골까지 골절이 오기 쉬웠을 것 같은데, 그러지도 않았고 골절에 비해서 내장 충격도 무척이나 덜 한 상태입니다. 하늘이 도왔다고 생각해야 할 겁니다."
흉관을 제거한 뒤, 설이는 겨우 침대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일어나 앉을 정도가 되었다. 범퍼와 충돌할 때에 왼팔에도 충격이 가해져서 미세 골절이 있는 것으로 의심되어 왼팔도 깁스를 한 상태였다.
몸통을 감싸고 있는 흉곽 골절의 경우, 움직이지 않고 숨만 쉬어도 고통이 느껴진다고 하는데 설이는 그런 통증을 착하게 잘 참았다. 진통제를 너무 써도 회복에 좋지 않다고 했고, 설이는 일반적인 환자들보다 진통제를 적게 써도 많이 아파하지 않아서 회복을 위해 그대로 유지하는 중이었다.
스케줄에 관련해서는, 오래 쉬어야 하기 때문에 변동 사항이 많아졌다.
신 매니저는 바쁘게 병원을 오가면서 그루 엔터와 드라마 팀 간에 협의된 사항에 대해 틈틈이 브리핑했고, 병원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나를 위해서 식사 류와 갈아입을 옷들을 사다 주기도 했다.
오피스텔에 들어갈 수 있으면 옷 같은 걸 따로 사지 않고 집에서 가져오면 될 텐데, 나와 설이의 지문 혹은 홍채 인식이 되지 않으면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사고 뒤로 내 허락을 받고 오피스텔 경비 쪽에서 마스터 키를 이용해 내 휴대폰을 찾아다 주었지만, 그런 식으로 여러 번 부탁할 수는 없는 일이다.
"바쁘신데 괜히 제 것까지 사다 주시느라, 죄송합니다."
"아뇨. 형님 분께서 한설 씨 옆에 붙어계셔야 저도 안심하고 업무를 보고 올 수 있거든요."
신 매니저는 친절하게도 휴대폰 충전기와 속옷까지 챙겨주었다.
"일단 외부인 출입이 금지되기는 하지만, 혹시 몰라서 사설업체 경호원을 불렀습니다."
"그럴 것 까지는…"
"회장님 지시였거든요. 지금 한설이 중태에 빠졌다는 찌라시도 돌 정도로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상태라서, 조심하는 게 좋겠습니다."
네, 하고 무겁게 대답하며 나는 설이의 입가에 물병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설이가 물을 마시기 쉽게 빨대를 잡아 고정해주었다. 설이는 얌전하게 신 매니저와 나의 대화를 들으며 물을 쪽 빨아 마셨다. 그리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병을 내려놓고 손수건으로 설이의 입가를 조심스레 닦아냈다. 사고 당시의 통증으로 괴로웠는지 아랫입술을 잔뜩 깨물어서 뜯어지고 딱지가 내려앉았다. 속상한 마음에 한숨을 푹 내쉬며 입술에 연고를 살살 바르자 설이가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아팠어?"
걱정되는 마음에 손을 떼고 묻자, 설이는 푸스스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착하고 순한 내 동생, 내가 걱정할 까봐 아픈 티도 내질 않는다.
우리를 빤히 보고 있던 신 매니저가 신기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형님은… 참 능숙하시네요. 뭐랄까, 참 대단하십니다. 보호자의 정석이랄까."
"아주 어릴 때부터 설이를 돌봤으니까요."
미지근한 물수건으로 조심스레 얼굴을 닦아내자 설이는 눈을 감고 얌전히 내게 얼굴을 내어주고 있었다. 설이가 아플 일이 별로 없어서 병간호를 해본 적은 많지 않지만, 그래도 응석 부리는 것을 받아주는 것에는 익숙했다.
깔끔하게 닦아낸 얼굴에 로션을 살살 발라주고 머리도 빗어주었다.
간이 테이블을 펼쳐서 신 매니저가 공수해온 닭죽의 포장을 뜯었다. 아직 따끈따끈해서 김이 올라왔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좋은 닭을 골라다가 삶고 정성스럽게 살코기를 뜯어내서 죽을 끓여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설이 곁에서 떠날 수가 없다. 병실 옆에 부엌이 딸려 있기는 했지만 내가 요리하고 있는 사이에 설이가 아프면 어쩌나 싶어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다.
"매니저님도 이쪽으로 와서 같이 좀 드세요."
"저는 아까 먹었습니다. 형님 것까지 두둑하게 사온 거니까, 두 분 식사 같이 하셔요."
"아, 감사합니다."
닭죽을 한 수저 떠서 후후 불어 뜨겁지 않은 온도로 식힌 뒤에 한 입 넣어주면, 설이는 아- 하고 잘 받아먹었다. 제가 한 입을 먹고 나서는, 내가 똑같이 한 입 먹기 전에는 입을 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설이 한 입, 나 한 입, 차례로 나눠먹는 중이었다.
그런 우리 둘의 모습을 이제는 익숙하게 바라보며 신 매니저는 태블릿 pc 화면을 휙휙 넘겼다.
"일단 감독님과 다시 한 번 얘기를 해봤는데, 그쪽 팀은 의견이 같아요. 한설 씨 말고 다른 사람을 다시 캐스팅하고 싶지는 않다고 합니다."
대본 리딩을 했던 로맨스 드라마 얘기였다.
"물론, 한설 씨가 회복하고 촬영에 들어갈 수 있게 될 때까지 시간이 걸릴 테니까, 그럴 경우 촬영 계획 자체가 전체적으로 두 달 이상 딜레이 될 수 있다는 점은 그쪽도 인지를 하고 있습니다만, 그 감독님 고집이 강한 편이라서요."
"그렇게 기다려주신다면, 하겠습니다."
설이는 내가 입가를 닦아줄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애초에 우리 쪽에서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한 것이니, 계약 파기가 당연한 사항인데도 감독이 설이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한 모양이었다. 예정보다 드라마 오픈이 늦어지면 문제 되는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닐 텐데, 다음 분기로 일정을 넘기는 한이 있더라도 설이를 꼭 주연으로 쓰고 싶다는 감독의 의견이 강했다.
"음… 그래도 두 달 안에는 회복하고 시작해야 할 텐데요."
"네. 형이 마음에 들어 한 시나리오니까, 가능하면 그 작품으로 하고 싶어서요."
설이는 부드럽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설아, 일단 네 건강이 우선이니까 억지로 그 일정에 맞추기 보다는…!"
"괜찮아. 나 금방 나을 수 있어."
깁스하지 않은 오른손으로 내 손을 끌어와 잡으며 제 뺨에 내 손을 문질렀다. 그리고는 내 손가락에 아직 까칠한 입술을 대며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내 손에 입술을 붙인 채, 설이가 조용히 말했다.
"형이 내 곁에 있어줄 테니까 괜찮아."
"아, 응… 그래, 어, 어서 먹자."
아무래도 이런 류의 낯뜨거운 스킨십은 남에게 보이기 민망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보통의 형제들은 이렇게까지 다정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테니까. 기자들이 알게 될 경우, 어쩌면 사고보다 나와의 스킨십이 더 화제가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신 매니저는 헛기침 조금 하더니 브리핑을 이어갔다. 대부분은 차질 없이 스케줄이 변경 가능했지만, 부득이한 경우에는 캔슬되었고 그루 엔터 쪽에서 변상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는 것 같아 보였다. 오히려 평소보다 신 매니저의 일이 더 늘어난 것 같아서 미안할 따름이었다.
"저는 월급 받는 만큼 일하고 있으니, 형님께서 마음 쓸 필요는 없어요."
세세한 것까지 신경 써주면서도 신 매니저는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퇴근하는 신 매니저를 배웅하기 위해서 입원실 밖 복도로 나오자, 경호하고 있던 검은 정장의 남자가 나를 알아보고 살짝 고개 숙여 목례했다. 나도 마주 고개 숙여 인사를 한 뒤, 복도 중간의 vip실 전용 엘리베이터 앞까지 신 매니저를 따라갔다. 설이가 주사를 맞고 링거 액을 갈 시간이기 때문에 잠시 간호사분께 병실을 맡기고 배웅을 나온 참이었다.
"저, 형님, 권영도 이사님이 걱정 많이 하시더라고요."
"아…"
사고 이후로 이하원 팀장을 비롯해서 회사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게 몇몇 병문안을 왔었지만, 권영도 이사는 그 뒤로 볼 수 없었다.
뉴스와 인터넷 기사는, ‘배우 권영도와 한설이 함께 이동 중에 사고가 났다’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사고 당시에는 목격자 증언이 뒤섞여서 두 사람이 싸움을 벌였던 것으로 오보가 났었지만, 회사 측의 조치로 그런 기사들이 금방 내려갔다고 했다. 권영도의 음주운전 의혹도 있었다. 그러나 구급대원들과 함께 도착한 경찰들이 확답해준 덕에 그런 추측성 기사는 전부 내려갔다.
결론적으로는 '단순한 사고'로 마무리 된 것이다.
그러나 다른 문제도 있었다. 권영도 이사가 나와 함께 타고 있었던 그의 차는 컨버터블로 유명한 외제차였고, 그가 오래 광고모델로 활동해온 브랜드의 차였다. 그렇기 때문에 결함으로 인한 사고가 아닌가 조사하는 과정 속에서 브랜드의 주가가 급 하락했고, 그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가장 난처해진 것은 권영도였다. 권영도의 사진과 함께 뜨는 그런 가십성 기사들을 조금 읽다가 마음이 불편해져서 창을 꺼버리곤 했다.
"권 이사님 측에서 뭐든 다 보상하겠다고 했지만, 한설 씨가 이미 변호사를 통해서 모두 다 괜찮다고 마다한 상태니까요… 생각보다 상태가 빨리 호전되었다는 소식도 권 이사님 쪽에 전해드리긴 했는데요. 영 마음이 불편하신 모양입니다."
"네……."
"특히 형님께서 어떤지를 저한테 계속 물어보셔요."
"저요?"
"예, 혹시 과로하진 않는지, 기분은 어떤 것 같은지… 안절부절 못하시더라고요. 아무래도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보호자 쪽에 무척 미안하시겠죠."
그 이후로 권영도 이사에게서는 전화 한 번 오지 않았는데, 신 매니저의 말을 듣고 보니 아무래도 내 눈치를 살피는 모양이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문이 닫히기 전에 버튼을 누른 채로 신 매니저에게 말했다.
"저기, 권 이사님 시간 나실 때 한 번 병문안 와달라고 전해주세요. 그리고 저는 괜찮다고, 정말 괜찮다고 말 좀 전해주세요."
내 대답을 들은 신 매니저는 훨씬 편안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권영도 이사가 일부러 사고를 낸 것은 아니었다. 내가 바로 옆에 앉아 있었으니 그에게 충돌 의도가 없었음은 분명히 알 수 있다. 게다가 후진하는 차 뒤에 갑자기 설이가 서 있다는 것을, 우리 두 사람 다 뒤늦게야 깨달았다. 갑작스러운 그 등장에 당황해서 권영도 이사의 행동이 조금 늦어질 수는 있겠지만, 일단 바로 브레이크를 밟았고 나도 그런 그의 모습을 목격했다. 그렇지만 브레이크가 듣지 않았다.
"참… 이상한 일이지."
복도를 걸어 다시 입원실 안으로 들어갔을 때, 설이는 흉관을 삽입했던 부근을 소독하는 중이었다.
아픈 와중에도 문 안으로 들어서는 나를 발견하고 설이는 누운 채로 싱긋 웃어 보였다. 나만 보면 얼굴이 환해지는 게 귀여우면서도 처치 받는 설이의 모습이 안쓰러워서 나는 쓰게 웃었다.
치료가 끝날 때까지 방해되지 않기 위해서 침대에서 조금 떨어진 소파에 앉았다. 그 동안 정신이 없어서 휴대폰은 거의 방치해둔 상태였다. 오랜만에 쌓인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부재중 통화는 여기저기서 수도 없이 많았지만, 지금은 누구와도 함부로 연락할 수 없었다.
'괜찮냐.'
무뚝뚝할 정도로 짧은 세 글자는, 우정혁이 보낸 것이었다. 아마도 뉴스를 본 뒤에 내게 연락한 모양인데, 단 한 번의 그 메시지가 전부였다. 때가 되면 사태가 수습된 뒤에 내 쪽에서 어련히 답장을 하겠거니 싶어 묵묵히 기다리는 그 모습이 떠올라서 피식 웃음이 샜다.
'그래, 나중에 전화하마.'
답장을 하고 나서 곧 이응 두 개의 답장이 왔다. 그걸로 어쩐지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서 오랜만에 용기 내어 설국지색 커뮤니티에도 들어가볼 마음이 생겼다. 안 그래도 지하철 역 사건에서 나와 메신저 아이디를 교환했던 설이의 팬 두 명에게서도 연락이 와 있었다. 설이에 관련된 속보가 뜰 때마다 눈물을 표현하는 이모티콘이 거의 홍수 수준으로 쏟아졌지만, 내가 답장하지 않는 그 사이에 두 사람은 나와의 단체 메시지 방에 오백 개가 넘는 메시지를 남겨 놓은 채였다.
아니나 다를까 커뮤니티 안은 난리였다.
당연하겠지만 설이의 상태에 관한 소식을 기사로 밖에 알 수 없으니 팬들의 불안이 커져가는 와중에 게시판 내에서 팬들끼리 싸움이 붙거나 기사 내용이 와전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그 와중에 팬들은 그루 엔터로부터 설이의 컨디션이 회복 중이라는 공지를 받아낸 후로 단합하여 커뮤니티 안을 잘 정리하는 중이었고, 설이의 사고에 대한 오보와 악플들을 모아서 신고하는 등의 활동도 이어지고 있었다. 굳세고 강한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사고 당시부터 어버버거리고만 있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형, 뭘 그렇게 봐?"
설이가 옷을 추스르며 물었다. 치료를 끝낸 간호사 두 명이 이동식 카트를 끌고 나가려고 하는 중이었다. 문을 열어주고 설이의 침대에 가까이 다가갔다.
괜찮아? 하고 이마를 쓸어주자 설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상처도 잘 아물고 있고, 회복이 빠른 편이래."
자랑하는 듯 말하는 것이 귀여웠다. 다행이다, 칭찬하며 설이의 보드라운 뺨을 만지작거리자,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뜨며 수줍게 웃었다. 혈색이 돌아와서 흰 뺨이 여린 분홍빛을 띄었다. 그런 설이의 예쁜 눈빛을 받고 있다가,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설아."
응? 하고 묻는 새까만 눈동자가 날 담은 채 부드럽게 깜빡였다.
"너… 어쩌다가 그 길에 서 있었던 거야? 대본 리딩 했던 방송국은 꽤 멀었잖아. 왜 갑자기 거기에 있었어? 어떻게 이사님 차 뒤에 나타난 거야?"
"……"
설이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나를 빤히 바라봤다.
누운 채로 나를 그렇게 몇 초간 말 없이 지켜보던 설이가 깁스하지 않은 오른 손을 내게 뻗었다.
"형, 나 일으켜줘."
"어어."
큰 이상은 없을 테지만, 아직은 숨 쉴 때 평소와 다르게 조금 버겁거나 숨을 내뱉기 벅차다는 느낌이 있을 수도 있다는 의사 소견이 있었다. 그럴 때에는 폐 쪽에 무리가 가지 않게 자세를 조금 옮겨가면서 눕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
나는 급히 침대 옆 리모컨을 눌러 천천히 침대 위쪽이 45도 정도 올라오도록 설정했다. 경사진 침대에서 설이가 누운 채로 몸을 조금 일으켰다. 나는 설이의 손을 잡아 내 어깨를 감싸게 한 뒤에 베개를 설이의 어깨쯤에 닿도록 조정해주었다.
그 사이에 설이가 내 어깨를 스르륵 감싸며 내게 상체를 기대어 안겨왔다.
흉곽 골절 때문에 몸이 세게 닿으면 아플 것이다. 나는 내 어깨에 기대는 설이의 머리를 조심스레 감싸 안았다. 잠결에 응석을 부리는 어린 아이처럼 설이는 내 목덜미에 이마를 비비며 웅얼거렸다.
"형, 나… 잘 기억이 안 나. 그날 너무 무서워서……."
"그렇구나. 그렇겠지."
사고 이후에 경찰도 다녀갔었다. 사고 당시 상황에 대해 이런저런 것을 물었지만, 설이는 피곤해서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나에게도 질문이 쏟아졌지만, 내가 기억하는 것도 설이의 대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사고였고, 나는 설이가 뒤 범퍼에 충돌했다는 사실을 인지한 뒤로는 거의 머릿속이 하얗게 빈 상태였다.
아마 권영도 쪽에도 경찰이 찾아갔을 것이다. 일부러 사고를 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금방 밝혀졌지만, 그 후로도 경찰은 전화를 해서 자세한 정황을 물으며 설이의 휴식을 방해하곤 했었다. 분명 필요한 절차였지만, 설이는 그 과정을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우리 설이 아픈데… 형이 괜한 걸 물었네, 미안해."
설이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환자복을 입어서 어쩐지 더 여윈 것처럼 느껴지는 설이의 등줄기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넓은 등짝을 토닥토닥 두드리자 설이는 내 어깨에 뺨을 내고는 만족스러운 숨을 깊이 내쉬며 나른하게 속삭였다.
"아냐, 나는 형이 곁에 있으면 괜찮아. ……다 괜찮아."
마치 암시라도 거는 것 같은 그 나지막한 목소리에 나도 마음이 평온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