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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CRASH (35/65)

35. CRASH

"…이게 제가 두고 간 건가요?"

황당해하는 내 표정 앞에서도 권영도는 소파 팔걸이에 팔을 기대어 걸친 채로 태연하게 고개 끄덕였다. 과연 권영도 이사가 그루 엔터테인먼트 본사의 이사 사무실에서 얼마나 머물며 업무를 보는지 모르겠지만, 개인 공간이 지나치게 넓어서 회장님께서 계신 대표 사무실보다 더 좋아 보였다. 아방가르드 한 소파 또한 무척이나 크고 비싸 보여서 앉아있기가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권영도 이사는 마주 앉은 내게 따뜻한 카라멜 마끼아또를 가까이 밀어주었다. 어쩌다 카페에 갈 일이 있어도 가장 저렴한 아메리카노를 늘 마시다 보니까 달달한 커피는 익숙치 않아서 입맛에 잘 맞지 않았지만, 그래도 예의상 한 모금 마셨다.

원목 테이블 위에 권영도 이사가 올려놓은 내 물건은, 이 공간에는 초라할 정도로 조그마한 껌 통이었다. 졸음 방지용 자일리톨 껌이었는데, 주변 사람들이 하나씩 꺼내 먹어서 이미 반 이상 비어있는 상태였다. 권영도 이사님은 자일리톨 껌 통을 자랑스럽게 내 앞에 놓아두고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턱짓했다.

"이거, 한준 씨 것 맞잖습니까. 전에 편의점에서 사와서 운전석에 앉는 걸 내가 봤는데."

"뭐…… 제가 산 거긴 하죠."

나는 허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 수긍에 권영도 이사는 그것 보라는 듯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이 껌 통 하나를 되찾기 위해서 내가 본사까지 열심히 달려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아마 권영도는 내가 이 외출을 위해 얼마나 험난한 여정을 해야 했는지 모를 것이다.

집 밖으로 나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피스텔 로비로 내려오기까지, 세 번이 넘게 지문 인식과 비밀번호 해제를 해야 했고, 로비를 가로질러서 빠르게 걸어가는 도중에 왠지 모르겠지만 경비원 분들이 허겁지겁 달려와서 내게 말을 걸었다.

“어, 어디 가십니까.”

무슨 비상사태라도 생겼나 싶은 분위기여서 왜 그러시냐고 물었더니 경비원 분들은 내 외출을 보고 받은 적이 없다면서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며칠 집 비우는 것도 아닌데, 어디 가는지를 말씀 드려야 하나?

"아, 잠깐 볼일이 있어서 나갔다 오려고요. 수고하십시오."

"어디! 어디를… 어디를 가시는지 혹시… 여쭤봐도 될 지……"

로비 정문에서 자주 보는 경비원이 정문까지 따라 나왔다. 다른 경비원은 정장 안쪽의 무전기를 통해서 뭔가 중얼거리며 무전을 주고 받고 있었다. 혹시나 싶어서 조심스레 물었다.

"동네에 무슨 일 생겼나요? 혹시 도둑? 아니면 탈옥범이라도……"

"아닙니다. 아무 일 없습니다."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내며 경비원은 어색하게 웃었다. 우리 설이가 연예인이기도 하고, 어릴 적부터 워낙 인기가 많고 주변에 사람이 들끓어서 일부러 보안이 철저한 곳으로 이사를 온 건데… 혹시라도 무슨 사고가 있는 걸 까봐 의심의 눈초리로 주변을 둘러봤지만, 풍경은 평온했다.

뒤쪽에서 무전을 하던 다른 경호원 분이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오며 내게 말을 걸었다.

"저기 혹시, 휴대폰에 전화가 오는데 안 받으시는 건……"

"네? 휴대폰이요?"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주머니를 뒤져보니 내 폰이 없었다. 신발장 위에 올려둔 채로 운동화 끈을 묶고 일어나며 잊어버린 채 나온 모양이었다.

"아, 집에 있나 봐요. 그럼, 수고하세요."

어차피 금방 돌아올 텐데, 휴대폰 하나 가지러 다시 지문인식에 비밀번호 해제까지 몇 번이나 감행하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 안까지 올라갔다가 되돌아오는 과정은 생각만으로도 귀찮아서 포기했다. 그 사이에 별 일 있을 리도 없고, 급한 일이 생기면 그루 엔터에서 설이에게 전화하면 그만이었다.

꾸벅 인사하고 정류장까지 걸어가는데 뒤쪽에서 저기, 저기… 하고 자꾸 나를 부르려고 망설이는 경비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성격이 좋은 분들이라서 내가 수다 떠는 걸 잘 들어주시기 때문에 시간이 더 있었으면 함께 스몰 토크를 나눴을 테지만, 아무래도 권영도 이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서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렇게 겨우 그루 엔터테인먼트 본사까지 오랜만에 외출을 온 것인데, 내 물건이라는 것이 자일리톨 껌 통이라는 사실이 허무했다. 적어도 점퍼 한 벌이나 카드지갑, 보조가방 같은 것을 두고 온 줄 알았다. 그래도 이사님이 챙겨준 것을 어떻게 할 수는 없으니, 내용물이 반도 남지 않은 껌 통을 손에 쥐었다.

"참… 사려 깊으시네요. 제 잃어버린 껌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권영도 이사는 떨떠름한 내 표정을 보며 이십 대 후반인 주제에 장난꾸러기 소년 같은 표정을 지었다. 큭큭 대고 한참을 웃더니 고개를 들고 씩 웃었다.

"아, 한준 씨 오랜만에 보니까 참 좋네요. 숨통이 트이네."

다정한 눈빛으로 내게 시선을 맞춰오는 권영도를 보자니 아, 역시 배우는 배우구나, 싶은 생각에 속으로 감탄했다. 물론 우리 설이처럼 만화 속 미소년의 섬세한 미모는 아니지만, 부드러운 미소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울렁거리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는 서운하다는 듯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가 내게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요즘 어떻게 지냈어요. 아무리 소속 연예인이 바뀌었다고 해도, 어떻게 이렇게까지 회사에 안 옵니까. 스케줄 없을 때는 계속 본사에 있었는데 한준 씨는 한 번도 안 오더군요. 메시지 답장도 잘 안하고."

"어… 그러게요. 진짜 오랜만이에요."

권영도는 눈썹을 까딱 밀어 올리며 말했다.

"나 한준 씨, 그 집에 감금된 줄 알았어요."

"그게, 굳이 집밖으로 나올 일이 없어서요……."

현관문 앞까지 모든 것이 배달되는 데다가 설이가 나를 스케줄에 데리고 다니지 않으니까, 정말로 나갈 일이 없었다. 살면서 이유도 없이 바깥을 돌아다녀 본 적이 없어서인지 외출을 한다고 해도 사실 딱히 갈 곳도 없었다.

"이러다 얼굴 다 까먹겠네."

권영도 이사가 마치 오래된 애인을 대하듯이 너무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며 내 쪽으로 고개를 숙이는 바람에 나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피해버렸다. 뭔가 또 고백 비스무리한 것을 받는 패턴이 될 것 같은 분위기여서 무척이나 어색해졌다.

"정말, 감금 당하고 있는 건 아니죠?"

진지하게 묻는 말투에 나는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왜요. 제가 어디서 군만두만 먹다 온 것처럼 보이세요? 저 요즘 나름대로 잘 먹고 잘 쉬어서 안색 좋은 편인데…"

부쩍 말랑해진 것 같은 뺨을 주무르고 있자, 권영도 이사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나는 그냥… 한설 후배님이 한준 씨를 너무 꽁꽁 숨겨놓고 혼자만 보는 것 같아서… 약이 좀 올라서요."

권영도 이사가 자리에 일어났다.

"하루쯤은 한설 후배님 혼자 알아서 밥 차려먹으라고 하고, 한준 씨는 나하고 데이트 하지 않을래요? 최근에 알게 된 레스토랑이 있는데 꽤 괜찮더군요. 지난 번에 하이레벨 래디한테 추천 받은 곳인데…"

"엇! 혹시 하이레벨 지금 여기 있나요?"

권영도 이사는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외부 스케줄 있을 겁니다. 아, 그러고 보니 재이는 아까 1층에서 마주쳤었는데, 왜 그럽니까?"

"재이! 오랜만이라 보고 싶어져서요. 재이 만나고 싶네요."

권영도 이사는 기대감에 반짝거리는 내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대화 중간에 하이레벨이 등장하니까 오랜만에 너무 반가워져서 예의 없게 굴었구나, 싶어 미안해졌다.

아무래도 권영도 이사가 자꾸 나를 잘 받아주니까 만만해진 모양이었다. 그래도 연상이고 직장 상사인데다가 내게 호감을 표시하는 사람인데, 너무 버릇없이 굴었던 것 같아서 뒷목을 긁적이며 반성했다.

"그… 이사님 말씀 중이셨는데, 죄송합니다. 레스토랑, 재이랑 셋이 같이 가실래요? 제가 쏠게요. 아, 일단 설이한테 연락부터 해야 하는데……"

권영도는 소파에 앉은 내게 다가오더니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창가 쪽 비즈니스 테이블 위에 있던 사내 전화의 스피커폰 버튼을 눌렀다.

"가만히 있어 봐요. 재이가 아직 본사 건물 근처에 있다고 하면, 이쪽으로 부를게요. 한설 후배님에게도 내가 연락하죠."

이러니 저러니 해도 참 자상한 어른이구나, 싶었다.

나도 칠 년 뒤에는 권영도 이사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가 될 수 있을까? 내게 권영도는 동경의 대상에 가깝기 때문에 그가 자꾸 기회를 달라느니 데이트를 하자느니 그런 말을 해도, 단칼에 거절하기가 쉽지 않다. 내게 이런 형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엄청나게 의지가 되었을 텐데.

벌떡 일어나 소파를 벗어나며 문 손잡이를 잡았다. 다른 층 사무실에 전화를 걸던 권영도 이사가 내게 어디가요? 하고 물었다.

"아, 재이 혹시 연습실 쪽에 있으면 전화 못 받을지도 모르거든요! 제가 그쪽으로 내려가 보겠습니다."

몇 달 동안은 건물 내에서 심부름만 했기 때문에 뻔질나게 드나들던 곳이었다. 연습실과 녹음실이 있는 복도는 단숨에 다녀올 수 있었다. 오랜만에 와서 그런지 나들이 온 기분이라 절로 신이 났다.

재이와는 영화촬영장에서 함께 일하면서 더 가까워졌는데, 그 뒤로는 볼 일이 없어서 아쉬웠다. 재이가 우리 오피스텔로 놀러 오고 싶어했었지만, 나 혼자 사는 집도 아닐뿐더러 설이가 워낙 예민하고 섬세하다 보니까 재이를 초대할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만나면 반가워하겠지?

엘리베이터로 가는 것보다는 비상구 계단을 이용하는 게 더 빠를 성 싶어서 비상구 문을 열어젖혔는데, 그 안에서 의외의 인물과 마주쳤다.

"…어? 왜 여기 계세요?"

"아."

나와 비슷한 나이대로 추정되는 우리 오피스텔 경비원으로, 외출할 때 정문 앞에서 내게 어디를 가느냐고 행선지를 계속 묻던 그 경비원이었다. 내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낭패를 본 표정을 지었다. 뭘 하고 있던 건지 모르지만 그는 마네킹처럼 문 옆 벽 쪽에 붙어 서 있었다.

닮은 사람인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헤어스타일과 옷차림까지 똑같은데 도플갱어가 아닌 이상, 분명히 본인이었다.

"여기 관계자 외에는 출입이 불가한데… 그루 엔터에 아는 사람 있으세요? 아니, 근데 근무 중이신 거 아니셨어요? 갑자기 어떻게 여기까지…… 근데 정말 여기서 뭐하세요?"

이런 우연이 있나, 어떻게 여기서 마주치지?

신기하기도 하고 의아해서 이것저것 물어봐도 경비원은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서 있었다. 오피스텔 경비 근무를 설 때는 늘 그랬지만, 아까와 마찬가지로 어두운 색의 수트 차림인 그는 정장 재킷 안 쪽에 손을 쓱 집어넣더니 무전기 버튼을 꾹 눌러 뭔가 급히 작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묘하게 수상해 보이는 몸짓 때문에 가까이 다가가서 더 말을 걸어보려는데, 삐빅거리는 무전기의 소음이 조용한 비상구 계단 안으로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기계음 안에서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거기 있습니까.

그 목소리가 왠지 낯익어서 나는 손가락으로 경비원의 귀에 꽂힌 인이어를 가리켰다.

"그거, 혹시 우리 설이에요?"

"…아닙니다."

"우리 설이 목소리 같았는데."

"아닙니다."

"제 동생이랑 아는 사이신 거 아니에요?"

"모릅니다."

"설이 목소리 맞는데."

"아닙니다."

내 모든 질문에 빠르고 단호하게 부정했다. 의심의 눈초리로 지그시 노려보자, 경비원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저희 클라이언트 분이십니다. 한준 님과 아무 관련이 없는 분으로… 보안상 더 말씀은 못 드립니다. 그럼, 지시 받은 일이 있어서…… 저는 이만."

내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재빠르게 계단을 뛰어내려가는 모습이 축지법 쓰는 무인 같았다. 저 정도 체력은 되어야 경비 일을 할 수 있구나.

어쩐지 고등학생 때 시급 높은 아르바이트 중에 연예인 콘서트 가드 자리가 있었는데, 면접을 보러 가자마자 나는 바로 탈락했다. 나름대로 맷집도 좋고 몸 쓰는 일에 자신 있었는데, 이제 생각해보니 만약 저런 무공 실력을 원하는 거라면 그때 내가 안 뽑힌 게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경비원이 사라진 계단을 터덜터덜 내려가다가 멈칫했다.

"근데 '한준 님'이라니, 내 이름을 어떻게 아셨지?"

전부터 나를 매번 꼬박 ‘6001호 거주자님’이라고 불러왔는데, 갑자기 자연스럽게 내 이름을 말하는 그의 태도가 굉장히 의아했다. 그런 고급 오피스텔에서 일하려면 그 많은 거주자들의 인적 사항마저 다 외워야 하는 걸까.

그런데 정말 설이 목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

아쉽게도 재이는 이미 다른 스케줄로 이동을 하고 없었다. 다시 터덜터덜 권영도의 이사 사무실로 돌아가자, 권영도 이사는  '얌전히 앉아 있으면 내가 다 알아봐줄 텐데, 종종거리는 하룻강아지도 아니고 그새를 못 참느냐'며 혀를 쯧 찼다.

"이사님, 지난번부터 왜 자꾸 저를 강아지에 비유하세요? 저 그렇게 왜소하지 않은데요."

"거울 좀 보시죠. 한준 씨가 고양이나 여우 쪽은 아니잖습니까. ……표범은 더더욱 아니고."

헉, 숨을 들이마시며 동그래진 눈으로 쳐다보자 권영도 이사는 신경 쓸 것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설이에 대한 비밀을 누설할 생각 없으니 마음 놓으라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권영도 이사는 내 동생이 설 표범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우리 형제와 부모님만 알고 계셨던 비밀을 함께 공유하는 유일한 타인인 것이다.

겉옷을 들고 일어나며 권영도 이사가 차 키를 챙겼다.

"갑시다. 나랑 둘이 밥 먹어요."

"아, 저……"

"알아보니까, 한설 후배님은 대본 리딩 중이더군요. 끝나면 그쪽으로 불러서 같이 먹죠."

스마트 키에 걸린 열쇠고리를 흔들며, 내 고집에 졌다는 듯 말하는 모습에 머쓱해져 뒷목을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권영도 이사에게는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그 레스토랑에 누구랑 가든 상관없이 나는 내 동생도 먹이고 싶다는 생각에 제대로 식사에 집중하지 못할 게 뻔했다. 그런 내 성격을 잘 아는 권영도의 배려가 고맙기만 했다.

"일단 자리 예약부터 하고, 도착하면 내가 한설 후배님에게 연락하겠습니다. 내 차 타고 가요."

"그럼 이사님, 운전은 제가 하겠습니다!"

"됐어요. 괜히 나하고 관련 일 시켰다고 꼬투리 잡힐라. 그랬다가 우리 회사, 한준 씨 동생에게 위약금 물어줘야 해요."

"앗…"

그루 엔터테인먼트와의 전속 계약 조건으로 설이가 내걸었던 조항 중에 가장 우선시 되는 것이 '한준은 한설 이외의 연예인 매니징을 일체 하지 않는다'는 것임을 권영도 이사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 민망해졌다. 이상한 조항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싶었지만, 이미 권영도 이사는 짐승으로 변한 설이에게 덮쳐진 적도 있는데 새삼 더 이상할 게 없을 것이다.

그래도 같이 일했던 추억이 있어서, 권영도 이사가 운전을 하고 내가 조수석에 타 있으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부드럽게 핸들을 돌리는 권영도의 얼굴을 힐금거리고 있자, 그가 앞을 보면서 내게 말했다.

"미안한데, 네비게이션 화면에서 최근 목적지 좀 찾아줄래요? 길이 헷갈리네."

"아, 그럴게요."

화면을 터치해서 주소 목록을 내려보는데, 블루투스로 연결된 권영도의 휴대폰에 전화가 왔다. 목적지를 누르는 순간이었기 때문에 잘못해서 통화 연결 버튼을 눌러버렸고, 차 안으로 스피커에 연결된 통화 상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아, 진짜! 왜 이렇게 전화를 안받아요! 당신, 정말 이럴 거야?

"하아……"

권영도는 골치 아프게 되었다는 듯, 횡단보도 앞에서 차를 세우자마자 눈을 질끈 감았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통화 연결이 되어버렸는데 내 마음대로 전화를 끊어버릴 수도 없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 권영도 씨, 듣고 있어요? 듣고 있냐고요.

짜증 섞인 남자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기 때문에 나는 죄송하단 말도 못하고 조수석에서 안전벨트만 쥔 채로 권영도의 눈치를 봐야 했다. 권영도는 신호가 바뀌자 바로 차를 출발시키더니, 주변의 골목길로 빠졌다. 그리고는 적당한 곳에 차를 세웠다.

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조안율’이었다. 그루 엔터 소속 배우로, 원래 내가 로드 매니저로 들어갈 예정이었던 배우였기 때문에 프로필과 필모그래피는 다 외우고 있지만 실제로 만나본 적은 없었다. 설이가 데뷔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조안율이 마약 혐의로 활동을 중단해야 했기 때문에 본사에서 마주칠 일도 없어서 인사조차 해보질 못했다.

'천사 같은 얼굴로 악역에 어울리는 배우'라는 타이틀이 붙어 유명했었는데, 각종 스캔들 때문에 지금은 인기가 꽤 떨어진 상태였다. 그래도 최근에는 증거불충분으로 혐의 없음이 인정되어서 다시 드라마에 복귀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 권영도 씨. 자꾸 나 무시하는데, 계속 이렇게 전화 안 받고 답장 안 하면, 나 직접 찾아가요? 그래도 돼?

"네가 스토커냐. 그리고 지금 전화 받았잖아."

아무래도 내가 실수로 통화 버튼을 누르지 않았으면 전화를 안 받고 바로 통화 거절했을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골목길에 차를 세운 권영도는 내 쪽을 힐끔 보면서 스피커 음량을 꾹꾹 눌러 줄였다. 그리고는 빠르게 말했다.

"용건 없으면 끊고, 나 지금 바빠. ……혼자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권영도 이사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기 위해서, 아무것도 안 들리는 것처럼 문 쪽에 몸을 붙이고 물건처럼 숨죽이고 있었다. 몰랐는데 조안율과 꽤나 친한 모양이었다.

- 혼자 아니면 누구랑 있는데요. 촬영도 없는 날에 뭐 하느라 바쁘신데?

"용건이나 말해."

- 당신, 요즘 강애리 만난다는 거 진짜에요? 안 그래도 나랑 영화 할 때 당신에 대해서 자꾸 묻더니만. 아주 상 여우던데. 진짜 걔 만나요?

"…너 기자야? 그건 왜 궁금한데."

자꾸 나를 흘깃거리는 권영도의 얼굴이 창문에 비쳐서 나는 아예 시선을 내려 내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이럴 때 휴대폰이 있어야 뭐라도 하는 척 하기 좋은데, 왜 나는 휴대폰을 두고 나와가지고.

- 내가 당신 전 애인인데 그런 거 궁금할 수도 있지. 왜 이렇게 차갑게 굴어요? 지금 누구랑 있는데, 어차피 매니저 아니야?

하아아, 한숨을 길게 내쉰 권영도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멋지게 세팅해두었던 제 머리카락을 대충 손끝으로 헝클어뜨렸다.

……이사님, 배우 조안율하고 사귀었구나.

별로 놀랍지는 않았다. 오십 대의 부모뻘 배우들과도 스캔들이 나는 남자였다. 권영도가 우리 설이와 사귄다고 기사가 나지 않는 한, 내가 놀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디서 소문으로 들어본 적도 없는 진실을 알아버려서, 의외라는 생각은 들었다. 별 시시콜콜한 의문으로 기사 거리가 많이 쓰여지던데, 정작 진짜로 사귀는 사이는 기자들이 알아내지 못할 때도 있는 모양이다. 아니면 소속사에서 돈을 써서 막았을 수도 있겠다. 아무래도 동성끼리의 스캔들은 연예인에게 있어서 최악의 허물이 될 테니까.

그렇게 생각했을 때, 만약 내가 설이와 이런저런 것을 하는 사이라는 것이 세간에 들통난다면 우리 설이는 사회에서 매장될 지도 모른다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쳐서 등골이 싸했다. 왜 여태 그 생각을 못했을까.

권영도는 내 쪽을 보면서 계속 뭔가 종알거리는 조안율에게 말했다.

"나 지금, 좋아하는 사람하고 같이 있어. 그러니까 끊는다."

통화 종료 버튼을 꾹, 누르고 나니 차 안이 고요해졌다.

권영도 이사는 헛기침을 하더니 머쓱한 표정으로 핸들을 응시한 채 내게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조안율하고는 재작년까지… 만났었는데… 뭐 지금은… 아무 사이 아니고요… 물론 한준 씨는 궁금하지 않겠지만, 내가 오해 받기 싫어서 말하는 겁니다. 나 그렇게… 여기저기 걸쳐서 만나는 쓰레기는 아니거든요. 일단 좋아하는 사람… 있을 때는 한눈 팔지 않고요."

"네에……."

진심을 말하는 것 같은 권영도의 얼굴이 조금 붉어져 보였다.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지금 내 안에서 깨달은 문제 때문에 심각해진 상태였다. 혹시라도 설이가 '제 연인은 제 친형입니다.’ 하고 공식석상에서 직접 말하는 일이 생길 까봐 두려워졌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설이가 자신에게 불리한 것을 일부러 고백할 바보는 절대 아니지만, 그런 것보다 일단 설이는 타인에게 잘 보이고 싶어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숨기고 감추는 게 좋을 일들을 구분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혹시 모르니까, 만약을 위해서 설이와 나 사이의 일들을 일단 신정아 매니저님에게 미리 말해두고 설이를 조심시키는 게 좋지 않을까. 신 매니저 님은 믿을만한 사람이니까…  아니, 그렇다고 해도 어디까지 이해해줄 지는 모르는 것이다. 게다가 어디까지 얘기해도 괜찮은 거지?

창백해진 얼굴로 고민하는 내 손을 권영도가 살짝 잡았다. 고개를 들었더니 걱정하는 눈길로 내 얼굴을 살폈다.

"괜찮아요? 안색이 안 좋은데… 밥은 다음에 먹고, 집으로 데려다 줄게요." 

"아니… 저 혼자 갈 수 있습니다. 죄송해요. 다음에 뵐게요."

"그럴 필요 뭐 있어요. 내가 집 앞까지 데려다 주겠습니다. 주소 불러요."

권영도 이사는 내 손을 놓아주고, 차를 잠시 세워뒀던 골목에서 빼기 위해서 후진을 하며 사이드 미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집에 도착하면 일단 신 매니저님한테 둘이 좀 만나자고 연락해야겠다고 다짐하며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어?”

후방 카메라에 비치는 룸미러 모니터 화면으로 설이가 보였다. 착각이 아니었다. 권영도와 내가 타고 있는 차 뒤쪽에 설이가 우뚝 서 있었다. 짧은 찰나, 차 뒤쪽에서 설이가 우리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시선과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후방 장애물 감지 센서 시스템이 삐익, 경보 음을 울렸다. 나보다 먼저 설이를 발견했을 권영도가 반사적으로 브레이크를 밟는 것을 보았다. 

"어어? 이거 왜 이래."

권영도 이사의 당황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차는 멈추지 않았고, 얼마 안 있어서 무언가가 차 뒤 범퍼에 쿵 부딪히는 소음이 들렸다. 그 충격으로 덜컥, 차 안에 앉은 내게도 진동이 느껴졌다. 그제서야, 브레이크가 걸려 차가 멈췄다. 헉, 숨을 들이마시며 사이드 미러 쪽을 보자, 뒤쪽에 서 있던 설이 모습이 사라져 있었다.

"서…… 설아!"

새하얗게 빈 머릿속에 설마, 하는 의문이 들자마자 떨리는 손으로 급하게 안전벨트를 풀었다. 권영도 대신 운전석 락 해제 버튼을 누르고, 조수석 문 레버를 누르며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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